연중 제29주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화위원장 2016년 전교 주일 담화


복음의 기쁨을 온 세상에!



루카 18,1-8; 16/10/16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항).

1. 이 사실을 온 몸으로 증언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서 인물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요한복음 4장,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만납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인간의 처지를 표상하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가까이 살펴봅시다.

먼저, 이 여인이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 처음에는 ‘유다인’이었다가, ‘선생님’, ‘예언자’를 거쳐서, 마침내 ‘메시아’로 바뀌어 가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점점 깊이 만나 상대방의 정체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주님의 이 말씀대로, 이 여인은 지금 그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대화는 예수님 쪽에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주시오” 하고 청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교도들과 다름없이 천대하고, 그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는 일조차 꺼렸습니다. 또 어떤 유다인들은 밖에서 다른 여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 순간부터 눈을 감았기 때문에, 담벼락이나 건물 등에 부딪쳐 얼굴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상대가 사마리아 여인인데다가 겉 차림새만 보아도 삶이 완전히 헝클어지고 망가진 사람이라면, 가까이 하는 것만도 유다인에게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이 그 만남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 자신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유다인(남자)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의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우물물로 시작된 대화는 계속 진행되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마음에 두셨던 물’,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자 한 바로 그 물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물을 청하는 쪽이 바뀌어, 그 여인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이 장면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장벽을 뚫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경계를 넘어, 길 잃은 양과 같은 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모습입니다. 먼 여행과 한낮의 땡볕에 지친 몸을 이끌고 그분은 먼저 우물가에 와서 기다리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먼저 움직이시는 쪽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물은 이사악, 야곱, 모세 등 이스라엘 역사에서 많은 이들에게 결혼을 위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여기서도 우물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익숙한 여러 명칭을 쓰십니다. 목자, 아버지, 남편은 가장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남편 혹은 부부관계는 인간의 경험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가장 깊고 강력한 갈증을 채워주고, 사람의 본 모습을 실현시켜주는 제일 보편적인 관계를 표상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서에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란 ‘부부’를 가리킵니다(창세 1,26-27). 모든 인간관계, 특히 그 대표적 표현인 부부관계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상을 실현하는 제일 가깝고도 일반적인 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야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남성은 여성을 만나야 남자로 깨어납니다. 여성도 남성을 만나야 여자로 깨어납니다. 남녀가 몸, 정신, 영혼을 다해 만나면 자기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납니다. 몸만 만나면 몸만 깨어납니다. 부부는 서로 상대방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깨워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하고 우주 천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모습으로 각 사람 안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 사람의 유일성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면 그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만들어 거기에 잠재워두신 아름다운 사람이 깨어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수많은 남성을 만났지만, 그 누구와도 몸을 스치는 정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깨워주실 때까지 그 여인은 계속 상대방을 바꿔가며 몸을 스쳤지만 내면의 갈증은 더해갈 뿐이었습니다.

2. 많은 예언자들이, 충실한 남편인 하느님과 불충한 아내라는 표상을 빌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가 돌아오는 체험을 통해서, 불충한 백성이 결국 돌아오기까지 참아내시는 하느님의 충실하고 인내롭고 더할 수 없이 강력한 자비와 사랑의 힘이 결국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2,2.20;31,3), 에제키엘(16,1-43), 이사야(40-5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자기 남편인 야훼와의 계약을 깨뜨리지만, 남편인 주님께서는 상대방이 “처녀였을 때 약혼했던 것을 생각하고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계약을 맺으리라”고 예고합니다(에제 16,59-63; 이사 61,10; 62,4-5 참조).

바로 그 예언이 드디어 지금 현실로 나타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참된 의미의 남편이 없이, 어둠과 절망 속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온갖 장벽을 다 허물고 우물가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물에서 시작된 대화는 더욱 깊어지면서 마침내 그 여인이 지닌 갈증의 깊은 뿌리로 향합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남편 - 소갈병의 뿌리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물물에 대한 갈증은 그 증상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메시아의 도움으로 그 뿌리를 정확히 알아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깊은 속에 감추어두었다고 생각했던 비밀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아내는 눈길을 받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겉모양만을 보던 사람들과는 달리 속마음을 보시는 하느님’(1사무 16,7 참조)을 만나자 너무나 부끄러워 깊이 숨겨두었던 그 비밀을 자기 입으로 털어놓을 만큼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로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택된 분의 본래 이름을 대며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눈길을 보내주신 죄인입니다.” 하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눈길을 받고, 그 여인은 이제 그 죄의 질긴 사슬에서 풀려나서 말한 것입니다. “남편이 없습니다.” 지금 함께 사는 남자가 있지만, 그가 남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한 것입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8).

이제 그 여인의 고백과 그것을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문제의 뿌리가 드러났습니다. 상대방을 바꾸어가며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그것은 단지 피부를 스치는 것이었을 뿐, 영혼 속 깊이에까지 가 닿지는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이나 ‘황무지’ 혹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은 그런 그 여인의 내면을 잘 그려줍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 참된 행복을 찾아가는 그 여인의 여정은 세상의 남편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짐 산이라고 하고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쪽이 옳은지에 관한 문제가 나오자 그 여인이 말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복음서 전체에서 처음으로 당신 스스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3. 이렇게 해서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으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가는 그 여인의 여정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9)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여인의 내면 깊은 곳에 켜켜이 자리잡고 있던 갈증이 한꺼번에 해소되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6)던 예언은 이제 현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이렇게 해서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의 구름처럼 아련한 꿈으로만 있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그림자에 불과한 우물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 내버려진 물동이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이제 그 여인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새 인간”(골로 3,1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를 비롯해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 여인도 곧바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럽던 과거까지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언하는 수단으로 동원됩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한 4,29). 이렇게 해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여기서도 증명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구원의 역사가 완성점에 이르면, “어린양의 아내인 그 신부”(묵시 21,9)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랑인 어린양이 “신부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마름을 결정적으로 풀어주실 것입니다”(묵시 22,17 참조). 바로 이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4. 이제 이런 그림을 배경으로 우리 주변과 세상을 바라봅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다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부요한 나라에 속하게 된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니 이 땅에서 물질, 권력, 명예, 쾌락을 좇는 흐름이 넘실거립니다.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크게 벌어져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많은 사람들 뿐 아니라, 겉, 물질, 보이는 환경으로 보자면,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이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속, 마음은 빠른 속도로 사막화하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며,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 이 가운데에서도 외로움은 현대인이 가장 넓고 깊이 빠져든 시대적 질병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혼자”라는 느낌, 인간의 이 외로움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제일 심각한 사태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창조주께서 세상 만물을 하나하나 만드신 다음, “좋다, 참 좋다!”고 말씀하시다가, 단 한 번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이 바로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 이렇게 세 위격으로 이루어진 가족-공동체인 하느님께서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인간은 공동체일 때에만 자신의 원형을 닮고 자기를 실현하며 행복과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선포에 관한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바꿀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본당 사목구를 “공동체들의 공동체”(28항)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초공동체, 소공동체 등으로 불리는 지역별 모임에서 하느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그렇게 해서 주님을 만나 기쁨과 힘을 얻은 신앙인들이, 동네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5. 순교자 황일광(1757-1802)은 당시 사회에서 천민으로 멸시를 받는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마을 공동체 안에 살지 못하고 그 경계 밖에서 지내야 했고, 일반인들의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니 교회 공동체는 그를 형제로 받아주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귀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새로 태어난 기쁨을 맛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둘 있다. 하나는 하늘에 가서 들어가는 천국이고, 또 하나는 여기 세상에서 들어가는 교회다.”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포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그는 여유 있게 말재주를 부리며 말했습니다. “포졸들이 나를 남원에서 옥천으로 데려왔네!” 나무(남원)하러 나갔더니 포졸들이 나를 옥천(옥이라는 천국)으로 데려왔다는 뜻이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주님을 만난 그에게는 감옥도 이미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복음을 들여온 이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었습니다. 그것도 평신도들이었으며,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신 103위 순교자들, 2014년에 복자로 선포되신 124위 순교자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평신도들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이런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의 정신은 지금도 계속 살아서 한국 교회 특유의 활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교회 구성원 모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제, 예언자, 왕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한다면,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대로 소공동체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 참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삶의 우선순위 맨 앞에 두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놀라운 기쁨을 맛 본 사람들입니다. 일흔 두 제자도 복음선포 활동을 마치고 “기쁨에 넘쳐” 돌아왔고(루가 10,17), 그들의 기쁨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루가 10,21) 외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

6. 결혼은 한 사람에게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한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남녀의 만남과 거기서 출생할 자녀가 함께 이룰 가정은 사회의 기본 세포로서 나라와 세상의 건강과 명운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내면 가장 깊숙한 데서 만난 우리는 이제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시편 85,10)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한 몫을 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182).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이웃과 사회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유형입니다”(2015.5.28일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주님의 마지막 당부를 실천하는 사도가 됩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2016년 10월 전교의 달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연중 제29주일

(가해) 마태 22,15-21; 05/10/16

피정 중에 신부님들과 측백나무 숲을 거닐었습니다.

경사가 심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강아지가 대열의 맨 앞으로 뛰어 갔다가 맨 뒤까지 다시 뛰어 내려왔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정작 주인은 언덕을 올라가느라 힘이 들어 지쳤는데도 그 강아지는 주인과 선두 사이를 쉴 세 없이 왕복하면서 주인에게 달려왔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주인에게서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마다, 또 주인이 안 보일 때마다 그 강아지는 맨 뒤에 있는 주인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길이 언덕이든 평지든 관계없이 그저 주인에게 달려왔습니다.

그 강아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저 강아지의 반만이라도 주님께 잦아든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리고 또 여행 중에 사고가 나는 것을 접하면서, ‘매일 매일의 삶이 참으로 은총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인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번 주간 목요일 평일미사의 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 28) 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고, 얼마나 잘 사는가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살려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고 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현실을 주도하고 지배하는 힘과 제도, 사회, 문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의 사회 제도 너머에 살아계시는 하느님, 현실 사회의 제도가 있어도 그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고 지켜주시는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이끄셔서 우리를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며, 주님께 더욱 더 자주 그리고 깊이 잦아들기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시고, 더욱 더 사랑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연중 제29주일

(가해) 마태 22,15-21; 99/10/17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2,21)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종교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세상에서는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벌면서도 성당에 와서는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현실과 신앙은 별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함정이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우상숭배자로 몰아붙일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백성을 선동하여 사회를 혼란시키려는 파괴분자라고 몰아 붙일 것이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비록 로마와의 전쟁에 져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유다교는 독특하고 단호해서 유다인들은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로마 병정으로 전쟁에 차출되지도 않았고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지도 않아도 되는 특별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 대신 로마를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될 뿐 아니라 매국노가 되고,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은 로마의 반동분자요 현실 파괴분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을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18-19)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3가지 종류의 화폐가 있었는데,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사고 파는 데 쓰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 바치는 돈이고 세 번째 돈이 바로 로마에 세금을 바칠 때 쓰는 로마 돈 데나리온이다. 로마 돈에는 카이사르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 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에 비춰서 쉽게 말한다면, 미국이 우리 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돈을 벌어간 상황에 우리가 미국에서 꾼 돈을 갚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하는 문제고 여기에 갚으라면 매국노고 갚지 말라면 인기는 얻겠지만 사회의 불평불만자, 파괴분자로 몰리게 되는 함정인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달러는 미국으로 보내라고 말씀하신 격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말을 잃고 멍해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정교분리를 말하자는 것도 아니오, 현실을 도피하라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 대한 신앙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실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여 이해관계 속에서 현세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주님께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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