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98차 전교 주일 담화(요약)
‘가서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여라’(마태 22,9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가 올해 전교 주일을 위하여 선택한 주제는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1-14 참조)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인 임금은 자신의 초대를 손님들이 거절하자 종들에게 이렇게 이릅니다.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우리는 이 핵심 구절을 성찰하면서 복음화의 여러 중요한 측면들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1. ‘가서 초대하여라!’ 주님의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러 끈기 있게 나아가는 선교 사명
임금이 종들에게 내린 명령에서, 우리는 선교 사명의 핵심을 표현하는 두 단어를 발견합니다. 바로, ‘가다’ 그리고 ‘초대하다’입니다. 이를 통하여 선교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과 만나고 하느님과 친교를 시작할 수 있게 초대하려고 그들에게 끈기 있게 나아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상황에서 복음에 대한 증언을 통하여 이러한 보편적 선교 사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교회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분과 함께 오늘날 이 세상의 ‘교차로’로 계속해서 떠날 수 있도록 합시다.
임금은 종들에게 ‘가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대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종들이 임금의 초대를 시급하게 그러나 또한 깊은 존중과 큰 친절을 담아 전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반드시, 선포되시는 그분의 ‘방식’을 그대로 본받아야만 합니다. 압박이나 강요나 개종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친밀감과 연민과 온유로 그리고 이로써 하느님의 고유한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을 반영하면서 해야 합니다.
2. ‘혼인 잔치에’ -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명이 지니는 종말론적 차원과 성찬의 차원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한다는 소식을 전하라고 종들에게 일렀습니다. 이 잔치는 종말론적 잔치를 반영합니다. 종말론적 잔치로의 초대는, 주님께서 당신 말씀과 성체 성혈을 양식으로 주시어 우리를 살찌우시는 성찬 식탁으로의 초대와 본질적으로 연결됩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 모두는 성찬례를 모든 차원에서, 특히 종말론적이고 선교적인 차원에서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는 하느님 마음 그 자체에서 시작되어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사랑의 성사', 84항).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위하여 마련하신 그 혼인 잔치를 향하여 걸어가는 희망의 순례자이자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을’ - 시노드 정신을 온전히 살아가며 선교하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닌 보편 사명
세 번째 성찰은 임금의 초대를 받는 이들, 곧 ‘모든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 이것이 선교의 핵심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모든 선교 사명은 모든 이를 당신께 이끄시려는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교황청 전교기구 총회에서 한 연설, 2023.6.3.). 그러니 우리는 선교 활동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맙시다.
모든 이를 위한 선교 사명은 모든 이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복음에 봉사하는 가운데 시노드 정신을 온전히 살아가며 선교하는 교회를 향한 여정을 계속 걸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보편 교회에도 개별 교회에도 모두 긴밀한 선교 협력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필요합니다. 시노달리타스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며, 그 반대로 선교 또한 언제나 시노드적입니다. 우리가 시노드 정신을 더욱 깊이 살아가는 더욱 선교적인 교회가 되도록 주님의 이끄심과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다 함께 바칩시다(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1회기 폐막 미사 강론, 2023.10.29. 참조).
끝으로, 눈을 들어 성모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 제자들의 복음화 사명을 위하여 성모 마리아께 어머니의 전구를 청합시다. 그리고 가서 전합시다. 우리 어머니의 기쁨과 애정 어린 염려로 그리고 온유와 사랑에서 비롯된 힘으로('복음의 기쁨', 288항 참조) 모든 이에게 가서 우리 구세주 임금님의 초대를 전합시다. 복음화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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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교황 담화 요약
타오르는 마음, 움직이는 두 발(루카 24,13-35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전교 주일을 위하여 저는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이야기(루카 24,13-35 참조)에서 영감을 받아 ‘타오르는 마음, 움직이는 두 발’을 주제로 선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시는 것을 들었을 때에 속에서 마음이 타올랐고, 그분을 알아보았을 때에 눈이 열렸으며, 마침내 두 발을 떼어 길을 떠났습니다.
1.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올랐습니다. 선교 활동에서 하느님 말씀은 마음을 밝혀 주고 변화시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선교하는 제자들 가까이에 머무르시고 그들 곁에서 걸으십니다. 그들을 에워싸고 압도하려 하는 무법의 신비에 그들이 길을 잃고 낙담하며 두려워할 때 특히 그렇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나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루카 24,27). 제자들이 나중에 서로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도록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밝혀 주시고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성경의 의미를 풀이해 주시며 우리와 동행하시려는 부활하신 주님께 언제나 기꺼이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2. 빵을 떼실 때에 우리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렸고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빵을 떼시는 예수님을 그들이 알아보았을 때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 24,31). 제자들을 더욱더 타오르게 하시고자 이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마음에 들어가셨기에 그분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자신들의 고유한 체험을 모든 이와 나누고자 곧바로 길을 떠나도록 제자들을 재촉합니다. 이는 선교하는 모든 제자가,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분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빵을 떼고 세상을 위하여 떼어진 빵이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로 거행하는 사랑은 우리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본성상 모든 이와 나누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찬례는 교회 생활뿐 아니라 교회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사랑의 성사」, 84항).
3.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기쁨으로 우리는 두 발을 떼어 길을 떠납니다. 언제나 밖으로 나가는 교회의 영원한 젊음
눈이 열려 ‘빵을 떼시는’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 제자들은 ‘지체 없이 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루카 24,33 참조). 모든 이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타올라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되게 만날 수 없습니다.
‘길을 떠나는 두 발’이라는 표상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모든 사람과 민족에게 심지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교회에 맡기신 사명, ‘만민 선교’(missio ad gentes)의 영원한 유효함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사로잡고 다그칩니다(2코린 5,14 참조). 이 사랑은 곧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영감을 주며 자극합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새롭게 길을 떠나는 가운데 영원히 젊게 해 주는 사랑입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맡겨집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선교 운동에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 활동의 시급성은 자연스럽게 모든 교회 구성원과 모든 차원에서의 더욱 친밀한 선교 협력을 요청합니다. 이는 교회가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핵심 단어에 따라 수행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 여정의 근본적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의 마음이 하느님 말씀으로 타오르게 하고 다른 이들의 눈이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열리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의 길을 모든 이가 함께 걷도록 초대하기 위하여 길을 떠납시다.
길이신 우리의 모후, 그리스도의 선교하는 제자들의 어머니, 선교의 모후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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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루카 18,1)해 주십니다. 제가 어릴 때, ‘파티마의 푸른 군대’라는 단체에서 성모님의 요청이시라고 하면서, 소련 소비에트 공화국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기도는 시작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과연 정말 소비에트 공화국이 회개하여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자유 민주주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2절)
소련의 붕괴가 시작되기 전, 1989년 3월 13일 동독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300명의 신도가 여행자유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00만명이 모이는 대형 집회로 확산되었습니다. 동독 정부는 이미 장벽을 지켜낼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합니다(출처: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3절)
그러다가 결국 1989년 11월 9일 밤, 동 베를린의 정부 기자 회견 시 대변인으로 임명된 샤보브스키가 여행법 관련 답변을 하다가, 실수로 “지금 당장, 여행자유화조치를 시행한다.”라고 선언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시민들은 동서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으로 달려가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동서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4-5절)
비슷한 상황이 소련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991년 8월부터 12월 사이에는 러시아를 포함한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거나 소련 수립 조약에서 탈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6-7절)
그러다가 이들도 결국,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평의회의 142-H 선언으로 소련연방이 해체되었습니다(출처: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소련의 붕괴]). 처음 그 소식을 들을 때, 저 뉴스가 사실인가 싶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경제, 사회적으로 많은 변수가 있었지만, 여러 사람이 마음을 모아 꾸준하고도 간절히 기도하면,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상황도 기적처럼 변화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그때만 해도 ‘아, 이제 우리나라의 통일이 얼마 안 남았구나!’하는 희망에 한층 더 부풀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우리도 잘 알다시피, 아~직입니다. 그러나 동서독과 소련의 경우를 되새기며, 그 긴장과 갈등의 상황 속에서는 어찌보면 전혀 예기치도 못했던,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 일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기도합니다. 물론 민족의 화해를 통한 국토통일이 여러 변수의 종합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지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고 굳게 믿으면서 꾸준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 민족의 재일치가 언젠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방법대로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습니다. 본의 아니게 정치적인 예를 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갑자기 떠오른 사건과 상황의 재해석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예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어느 본당에서 예비신자 환영식을 하고, 첫수업을 하면서, 예비신자분들이 어떻게 성당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성 예비신자 분이 자신이 성당에 오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제가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울고 계셨습니다. 그때 자기들은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 사는 집주인이 망해서 전셋돈을 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는 그것에 대해 잘 몰랐는데, 그저 자기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그때까지만 해도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느님, 우리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세요!’ 그때 하느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런지, 우여곡절 속에 다행스럽게 전셋돈을 다시 받을 수 있었고,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실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생각까지는 못하고, 그냥 그렇게 어머니의 눈물이 멈춰진 것에만 안도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입시를 보게 되었는데,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재수를 하면서, 예전 자기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느님이 생각나서,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제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몇 달을 기도하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 거야? 하느님이 내가 달라면 주고, 내가 해달라고 하는 대로 해주시는 분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전설동화에 나오는 도깨비나 귀신아냐! 내가 지금 하느님을 도깨비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진정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알기 위해서, 재수 중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믿고 싶어서 성당에 왔다.”라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성당에 오게 되셨습니까?
주 하느님과 주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시렵니까?
지금까지 성당을 찾은 분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또는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워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새로 이사 와서 친구도 사귀고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장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성당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이유로 성당에 오시게 되었든지 간에, 여러분은 이제 예비신자 교리반에 들어가서 하느님에 대해 배우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우리를 세상에 만들어 내어주신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에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지만, 죄를 지어 행복이 아니라 고통과 번뇌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우리의 죗값으로 대신 바쳐 우리를 구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시고 돌아가셨지만, 죄없이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에게 다시 생명을 내어주셔서 부활시켜 주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시고, 그 길을 걸어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배우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지?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고 평안한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어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등등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시고 싶어서 성당에 오시게 되셨지만, 여러분이 성당에 오실 수 있도록 성당을 여러분 눈에 띄게 하시고, 여러분이 성당에 오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마침내 오늘 여러분이 성당에 오게 되기까지 여러분과 함께하시면서 여러분을 움직이셨던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몸소 나타나시어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온전히 뵈옵고 알고 깨달아 믿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비록 머리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아도, 비록 우리의 오관으로는 쉽게 느껴지지 않아도, 엄연히 살아계시고, 우리를 구원의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내어 마침내 구원해 내고 마시는 주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아낌없이 사랑해주셔서, 여러분이 주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저와 우리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공동체 교우 모두가 여러분을 위해 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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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
언젠가 한 번 어느 본당에서 어떤 분이 돈은 벌어야 하는데 정작 몸을 많이 상하셔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시고는, 주임신부님께서 그분을 본당 관리인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때는 각 본당에서 야간 방호 관리인 제도가 있어서, 방에 출근하여 성당 문을 닫고 잠을 자고는 아침에 성당 문을 열고 새벽미사를 준비한 다음 사무실에서 출근하면 퇴근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성당에서 야간 방호 관리 일을 하는데, 자꾸 집안의 중학생 딸이 자주 가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속을 썩다가 그분은 결국 자식을 위해 사회의 어려운 막일을 선택하여 직업을 옮기고는 몸은 힘들지만, 저녁에 집으로 퇴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집으로 퇴근하여 돌아와서 그런지, 그렇게 집을 나가서 속을 썩이던 딸 아이가 안정을 찾고, 그때부터는 더 이상 가출해서 이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례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우리는 나름 각자의 소임이 있고 역할이 있습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성당에서 신자들을 위해 수고하듯이, 평신도들은 가정을 꾸미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가정을 성화시켜야 할 소명과 책무가 있습니다. 가정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갑니다.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가정 구성원 서로는 서로를 알게 모르게 존재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미움이 북받쳐 오르기도 할 지 모르지만, 자신이 인지적으로 느끼고 판단하고 있는 관계와는 다르게,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에 내재된 존재적이고 감성적인 무의식 속의 또 다른 관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함께 같은 공간과 같은 순간을 공유하지 못하면 그 공허함이 허전함과 불안, 조바심과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존재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떨어져 있을 때 더 보고 싶고 서로를 더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존재적으로 절감하는 이치입니다. 평신도 신자분들은 가정을 꾸리고 이루어야 합니다.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되어 가고, 가족이 모여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살면서 한 가정을 이루며, 더 나아가 신자 가정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이루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제가 부임하여 얼마 안 되었지만, 우리 본당 신자들이 얼마나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 등촌3동 103위 한국순교성인 성당 공동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당 공동체를 유지하고 성숙시키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계신지 피부 깊숙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노고로 이 성당 공동체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있고 풍요로워졌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여러분께 찬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한 성당 공동체가 유지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성직자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신자들의 노고가 마치 비료처럼 쌓이고 녹아내려야 합니다. 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 한 대를 드리기 위해서도 제단을 꾸미는 분들, 제대를 차리는 분들, 방송장치를 준비하는 이들, 해설하는 분들, 독서하는 분들,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와 함께 미사에 참례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신자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와 희생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평신도 신자 여러분이 채워주시고 있는 몫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분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희생하고 계심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비단 미사 전례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건설과 유지, 선교와 교육에 이어 이웃 사랑에도 헌신하셔야 합니다.
신자분들이 이 모든 일들을 주 대전에 봉헌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정이 화목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성당에 와서 봉사할 때 자신의 가정을 지켜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희생합니다. 그런데 만일,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정의 평화와 안녕을 기도하며 봉헌하면서도 그 부작용으로 가정이 거꾸로 불안해진다면, 만일 내 가정의 구성원들이 내가 집을 잠시 떠나 성당에 나와서 일함으로써 불안해하고 불편해하며, 나의 부재로 인해 그 부재의 아쉬움과 존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며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성당에서의 봉사를 통하여 성가정이 자동적으로 이루어기기를 바리기보다, 가정에서 머물며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42-45절) 라고 이르십니다.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이 세상살이에서 겪는 어려움과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 안고 치유해주는 가정교회라고 합니다. 세상살이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상처를 안고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 구성원들이 그를 반기고 감싸 안아주며 위로해주면서 치유해 줍니다. 그래서 다시 회복하여 그 다음날 건강하게 험난한 세상에 나가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만일 세상살이에서 지쳐서 집에 돌아왔을 때, 가정에서 자신을 품어 안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만일 세상에서 상처입은 가슴을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각자 자기를 사랑해주기만 바라고, 다른 가족 구성원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한다면?
있어야 할 순간에 없고, 채워주어야 할 아쉬움과 공허함을 사랑으로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허전해지고, 불안해지고, 문제의 가정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 매일 성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여러분, 누가 가정에서 이 몫을 담당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지만, 그 구원의 희생제사를 바라본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다시 생명을 주셔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나,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스러운 제자요 사도인 내가 그 몫을 담당해야 합니다.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희생하면서 그러한 숭고한 봉사와 희생 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손상된다면 아전인수격이 되고 맙니다. 성당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자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자 모두 주님의 뜻대로 말씀을 실현하여 사랑함으로써 성가정이 되어 화목하고 평안하게 살도록 성당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름답고 활발하며 제 몫을 다하는 성당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다른 한 쪽으로 생각해 보면, 성당이 꼭 활발하지 않아도, 성당에 와서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가 이루어져서 신자들이 평안하고 행복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상처 난 가정은 결과적으로 성당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만일 우리가 ‘성당 봉사는 무슨, 자기 집안 꼴은 돼지 우리로 만들어 놓고 다니는데?!’ 또는 ‘성당 봉사는 무슨, 자기 집안은 매일 싸우고 긴장과 갈등 속에서 소리를 높여서 이웃의 악표양이 되고 있는데?!’ 라는 손찌검을 받는다면, 우리가 선교할 때 누가 우리를 따라 성당에 오겠습니까?
이러한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우리 서로 서로의 가정을 아끼고 돌봐 주는 마음으로 성당에서 봉사하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가정으로 돌려 성가정을 이루도록 합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거룩하고 화목한 사람이 되어서 성당에 가는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성당에 모이게 합시다. 어느 성당에서 무엇을 하고, 어느 신부님, 수녀님이 어떤 강의화 행사를 하는가 보다, 당분간은 ‘성당 신자들이 각자 자기 가정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 사랑 안에서 화목하고 평화로워져서 성당이 얼마나 거룩해지는지’를 바라봅시다.
지금 혹시 가정에서 내가 성당에서 봉사하는 문제로 긴장과 갈등관계가 형성되고 있거나, 자녀의 중독이나 가출 등의 일탈과 이상증세가 생성되고 있다면, 이 미사를 마치는 동시에 성당에서 하는 모든 봉사를 중단하고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정교회에 봉사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 라고 하시며, 특별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고 명하셨습니다. 지금 가정에서 가장 작은 이가 누구인지, 가장 작은 사람의 처지에 놓여있는 이가 누구인지 되새겨 보고 그 가장 작은 이가 스스로 모자람이 없다고 느낄 때까지 희생봉사 하십시오.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하신 것처럼 섬기고 봉사하여 가정교회를 이루십시오.
어떤 신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성당에서 일하는 정도의 반만이라도 집에서 그렇게 일한다면, 아마도 우리 집안에서 나를 떠받들고 살거야!” 네, 그렇게 헌신적으로 사랑하여, 가정이 화목하게 되고 가족들에게서 떠받쳐질 정도로 행복한 가정교회를 이루십시오.
아울러 지금부터 육 개월 안에, ‘한 사람, 한가지 활동하기’를 권고합니다. 개인적으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또는 신심단체에 속해서 기도하면서, 활동으로는 성당 내부에서, 또는 선교의 일선에서, 또는 이웃 사랑 부문에서 한 가지 활동만을 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가정에서 주님 사랑의 뜻대로 주님 사랑의 말씀을 실현하기를 본당 주임사제의 사목지침으로 명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 하나 귀하게 만드셨고, 각기 다른 은총을 선물로 주셨음을 우리 모두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회장감이 어디 있고, 단장감이 따로 어디 있겠습니까? ‘맡을 사람이 없어요,’ ‘할 사림이 없어요.’ 하지 말고 주 하느님의 창조의지를 믿고 역할을 나누기로 합시다. 그래도 모자라면 선교하세요.
어떤 분들은 “아무나 맡길 수는 없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한 때는 ‘아무나’였습니다. 우리는 단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쓰시겠다고 부르시는 초대에 응답을 했을 뿐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만큼의 은총을 주셔서 그 직무를 무난히 수행해 왔고, 그 은총을 통해 성숙되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믿고 응답하여, 성령의 이끄심에 맡기면서 우리 소명을 다 하기로 합시다.
모든 단체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하고, 큰 대과가 없어서 2년을 더할 수는 있어도, 그 2년이 지나면 그 짐을 과감히 나누기로 합시다.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로 인하여 성당에서 어디선가 삐끗하고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 저는 감수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당장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숫자가 줄어들 수도 있고, 성당이 조금 덜 활발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나와서 봉사를 하면 할수록 더욱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다가서고 싶기보다, 거꾸로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고 떠나고 싶고, 지치고 부담스럽게 된다면, 그것이 어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 사랑의 뜻대로 성가정이 되어 화목하고 평안하다면, 저는 그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도 아름답고 활발한 성당보다 주님 말씀과 사랑을 실천하는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의 신자들의 기도를 즐겨 받으실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당 공동체의 외적 영광보다 주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정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교우 성가정들로 빛나는 사랑의 본당 공동체’를 만들어 나갑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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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전교주일 담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온 교회가 마음을 모아 2019년 10월 특별 전교의 달을 지낼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난 특별 전교의 달을 계기로, “세례 받고 파견된 이들: 세상 안에서 선교하는 그리스도 교회”라는 그 주제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수많은 공동체들이 선교적 회심을 북돋을 수 있었음을 확신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초래한 고통과 도전이 올 한 해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에서,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한 그 말씀의 빛이 온 교회의 선교 여정을 비추어 줍니다. 이는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이사 6,8) 하고 질문하신 데에 대한 늘 새로운 응답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의 마음으로 건네시는 이 초대는 지금 전 세계적 위기 상황에 빠진 교회와 인류에게 도전 과제가 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기치 못한 거센 돌풍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며, 모두 연약하고 길 잃은 사람들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시급하고도 중요한 이때에 우리는 모두 함께 배를 저어 나가도록 부름받았으며 서로 위로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배에 …… 우리 모두가 타고 있습니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르 4,38) 하고 겁에 질려 한목소리로 외친 바로 그 제자들처럼, 우리도 각자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함께할 때라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겁먹고 길 잃었으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은 인간의 나약함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삶을 그리고 악에서의 해방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로의 부르심, 곧 자신을 벗어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라는 초대는 그 자체로 나눔, 봉사, 전구 기도를 위한 기회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맡겨 주시는 사명은 두려워하며 갇혀 있는 나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면서 재발견되고 쇄신된 나로 옮겨 가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을 온전히 성취하신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요한 19,28-30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위한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요한 19,26-27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각자 기꺼이 파견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선교 활동에 나서는 사랑, 생명을 주고자 언제나 밖으로 나가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요한 3,16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선교사이십니다. 그분의 위격과 활동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요한 4,34; 6,38; 8,12-30; 히브 10,5-10 참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사랑의 사명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의 영과 함께 우리를 제자로 삼으시어 전 세계 민족들에게 선교하도록 보내십니다.
“선교, 곧 ‘밖으로 나가는 교회’는 그저 하나의 계획도, 의지로 노력해서 실현해야 할 지향도 아닙니다. 교회를 자기 밖으로 나가게 해 주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 안에서 여러분은 성령께서 밀어주시고 끌어 주시기에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를 먼저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고 부르십니다. 우리 각자의 소명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사랑 안에 한 가족이며 형제자매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모든 이가 지닌 인간 존엄은, 세례성사와 신앙의 자유를 통하여 당신 자녀가 되어 영원히 당신 마음에 드는 이들이 되라는 하느님 초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받은 선물인 생명 자체에는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 주라는 초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씨앗은 세례 받은 이들 안에서 혼인이나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의 응답으로 꽃을 피울 것입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탄생하고 사랑으로 자라나고 사랑을 추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로마 8,31-39 참조). 하느님께서는 악과 심지어 죄의 도전에도 더욱 큰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마태 5,38-48; 루카 22,33-34 참조). 파스카 신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상처받은 우리 인간을 치유하고 온 우주에 흘러넘칩니다. 세상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보편 성사인 교회는 역사 안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으며 우리를 모든 곳으로 파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증언과 복음 선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당신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며 이러한 방식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나 마음과 생각과 육신과 사회와 문화를 어루만져 변모시켜 주십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유롭고 의식적인 응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을 때만, 이러한 부르심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자문해 봅시다. 우리 삶에 성령의 현존을 기쁘게 맞아들이고, 선교 부르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혼인한 부부나 축성된 사람들이나 성품 직무에 부름받은 사람으로서 각자의 생활 안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의 모든 사건 안에서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기꺼이 언제나 어느 곳으로 파견되어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건설함으로써 성령의 거룩한 생명을 나누고자 합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루카 1,38 참조)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참조)라고 하느님께 응답하려면, 이처럼 열린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은 관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역사의 삶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전 세계 감염증 확산의 시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교회 사명의 도전 과제입니다. 질병, 고통, 두려움, 고립은 우리의 도전 과제입니다. 홀로 임종을 맞이하는 가난한 이들, 버려진 이들, 일자리와 수입을 잃어버린 이들, 노숙자와 식량이 부족한 이들은 우리의 도전 과제입니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집에 머물러야만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맺는 공동체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도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불신과 무관심을 증폭시키는 대신, 우리가 다른 이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 안에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움직여 주십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더욱더 깨닫게 되고, 존엄과 자유를 필요로 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더욱더 활짝 열려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 성찬 전례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주일 미사를 드릴 수 없는 많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또다시 하느님께서 하셨던 질문을 받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느님의 이 질문은 너그럽고 확신에 찬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민족들에게 파견하실 수 있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악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마태 9,35-38; 루카 10,1-12 참조).
또한 전교 주일 거행은, 기도, 묵상, 여러분의 물질적 봉헌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사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풍요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 사랑은 10월 셋째 주일 전례 거행에서 이루어지는 헌금으로 표현되며, 교황청 전교기구가 교황 명의로 수행하는 선교 활동을 지원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전 세계 민족들과 교회들의 영적 물질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게 됩니다.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복음화의 별이시고 근심하는 이의 위안이시며, 당신 아들 예수님의 선교 제자이시니, 언제나 저희를 위하여 전구해 주시고 저희를 도와주소서.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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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제93차 전교주일 교황 담화 요약
세례 받고 파견된 이들: 세상 안에서 선교하는 그리스도 교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베네딕토 15세의 교황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 1919.11.30.)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저는 온 교회가 2019년 10월 한 달을 선교 정신으로 살아가는 특별한 때로 지낼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번 전교 주일 담화의 제목은 10월 특별 전교의 달 주제와 동일하게, “세례 받고 파견된 이들: 세상 안에서 선교하는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이 특별 전교의 달 거행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지니는 선교 차원을 재발견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세례를 통하여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교회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맺는 친교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생명은 팔려고 내놓은 상품이 아니라 -우리는 개종 권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어 주고 전달하며 선포할 보화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이 선물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았고 조건 없이 나누고 있습니다(마태 10,8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달으며 구원의 보편 성사인 교회를 통하여 당신 자비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선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물의 올바른 차원을 알게 해 줍니다. 희망은 우리가 동참하는 하느님 생명의 영원한 지평을 향하여 우리 마음을 열게 해 줍니다. 성사들과 형제애를 통하여 미리 맛보는 그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여 땅끝까지 나아가게 합니다(미카 5,3; 마태 28,19; 사도 1,8; 로마 10,18 참조). 누리 끝에 이르기까지 밖으로 나가는 교회는 지속적이고 항구한 선교적 회심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한없이 열린 마음과 자비로운 나아감이 참으로 실현가능하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성인들과 신자들이 증언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사랑의 다그침입니다(2코린 5,14-21 참조). 내어 주고 희생하며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 사랑의 본질적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선포하는 이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 명령은 우리에게 직접 와 닿습니다. 저는 언제나 선교사이고, 여러분도 언제나 선교사입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선교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멈추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매료되며 또 다른 이들을 매료시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 주어 생명을 낳는 관계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 어떤 이도 쓸모없고 무의미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열매이기에 모두 세상의 선교사입니다. 부모와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선물을 다시 거두어 가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가 당신의 거룩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영원으로부터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생명은, 죄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은총을 선사하는 세례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다시 태어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는 구원을 위하여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있고 성체성사로 완성되는 그 성사적 실재는 회개와 구원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의 소명이고 숙명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느님의 부성과 교회의 모성 안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선교 명령은 세례성사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너희는 성령을 가득히 받아, 세상의 화해를 위하여 일하여라’(요한 20,19-23; 마태 28,16-20 참조). 이 사명은 우리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자신의 존엄을 인식하며, 임신[受精]에서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생명의 고유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따라, 베네딕토 15세께서는 모든 형태의 국수주의와 민족중심주의를 척결하고, 식민지 열강의 경제적 군사적 잇속을 위하여 복음 선포를 이용하는 온갖 행태를 종식시킬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교회에 언제나 필요한 만민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속적인 회개 여정에 근본적으로 이바지합니다. 예수님의 파스카에 대한 믿음, 세례성사로 받은 교회적 사명, 자기 자신과 자기 고향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거리를 두는 초연함, 죄에서 속량되고 개인적 사회적 악에서 해방될 필요성, 이 모든 것이 땅끝까지 다다르는 선교를 요구합니다.
새로운 성령 강림은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어, 어떠한 문화도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어떠한 민족도 고립되지 않으며 신앙의 보편적 일치에 열려 있게 해 줍니다. 어느 누구도 자아도취에, 자기 민족과 종교의 아집에 갇혀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파스카는 세상과 종교와 문화가 편협함을 깨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존중하도록 요청합니다. 또한 모든 이에게 참생명을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진리를 향해 더욱더 온전히 돌아서도록 요청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맡겨드립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강생의 순간부터 당신 아드님과 이루는 일치 안에서 나아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사명에 온전히 동참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께 주어진 이 사명은, 성령과 믿음으로 새로운 하느님 자녀들로 태어나는 데에 교회의 어머니로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가장 위대한 임무’에서 이미 선교의 도구로 제시된 교황청 전교기구에 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황청 전교기구는, 선교의 핵심인 기도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후원으로 교황의 선교 임무를 돕는 전 세계적 네트워크로서, 교회의 보편성을 위하여 봉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후원에 힘입어, 교황은 개별 교회들과 함께 복음화 노력을 기울이고(교황청 전교회), 지역 성직자를 양성하며(교황청 베드로 사도회), 어린이들의 선교 의식을 키우고(교황청 어린이전교회), 그리스도 신앙의 선교 차원을 증진합니다(교황청 전교연맹). 교황청 전교기구에 대한 저의 지지를 거듭 약속드리며, 2019년 10월 특별 전교의 달이 저의 직무를 도와주는 그들의 선교 봉사를 쇄신하는 데에도 이바지하리라 믿습니다.
남녀 선교사 여러분에게 그리고 세례의 은총으로 교회의 사명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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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일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전교주일 담화 요약
젊은이들과 함께,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삶은 하나의 사명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이끌리는 것과 파견되는 것은 우리가, 특히 젊은 시절에, 사랑의 내적인 힘으로 여기는 두 가지 움직임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 미래를 약속하고 우리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불현듯 들이닥쳐 우리를 이끌어 가는 삶의 힘을 젊은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느낍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책무를 기쁘게 실천하는 일은 크나큰 과제입니다. 저는 젊음의 빛과 그림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과 가족을 돌이켜 볼 때 저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열렬한 희망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의 선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고 우리를 존재하게 만든 계획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성찰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여기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복음의 기쁨’, 273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교회는 거저 받은 것을 선포하면서(마태 10,8; 사도 3,6 참조), 이 땅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이끄는 바로 그 길과 진리를 젊은이 여러분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유를 일깨우시어 이러한 참되고 완전한 삶의 의미를 찾고 발견하고 선포하도록 북돋워 주십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삶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는 보화가 그 안에 있습니다. 이는 저의 체험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 덕분에 저는 제 꿈의 확실한 토대를 발견했고 그것을 실현할 힘을 찾았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가난이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악은 언제나 더 많이 사랑하도록 이끄는 도화선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젊은이들이 때로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사랑하고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너그럽게 자신을 희생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논리를 배웁니다(1코린 1,17-25 참조). 이것이 바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복음 선포입니다(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을 놓는다는 것은, 그 불로 타오르는 사람을 완성시켜 주고 서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빛을 밝혀 주며 온기를 전하는 것입니다(2코린 5,14 참조). 우리에게 하느님의 드넓은 지평을 열어 주는 성인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이렇게 끊임없이 자문해 볼 것을 여러분에게 권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의 내 상황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땅끝까지 신앙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세례성사로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한창 때에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성사들을 통하여 받은 신앙의 은총 안에서 성장하여 세세대대에 이어지는 증인들의 위대한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연장자의 지혜와 경험은 앞날이 창창한 이들에게 증언과 격려가 됩니다. 자신이 걸어 온 여정의 막바지에 다다른 이들에게 젊은이들의 생기와 열정은 지지와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이렇게 삶의 다양한 단계의 공존 안에서, 교회의 사명은 세대를 이어 주는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깊은 일치의 원천입니다.
교회 사명의 핵심인 신앙 전수는 사랑의 전파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기쁨과 열정은 삶의 새로운 의미와 충만함을 표현합니다. ‘이끌림’으로 신앙이 전파되려면 사랑으로 너그러워진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기에(아가 8,6 참조), 사랑에 한계를 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너그러움은 만남과 증언과 선포를 낳습니다. 너그러움은 신앙에서 멀어진 모든 이, 신앙에 무관심하고 어쩌면 심지어 신앙에 적대적이고 반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과 사랑의 나눔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교회의 성사적 현존과는 여전히 이질적인 인간 문화 종교 상황들이 가장 변방인 “땅끝”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선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때부터, 주님께서 그들과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파견되었습니다(마태 28,20; 사도 1,8 참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만민 선교(missio ad gentes)입니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가장 황폐한 변방은, 신앙에 무관심한 곳 또는 하느님 안에서 사는 충만한 삶을 증오하는 곳입니다. 모든 물질적 영적 궁핍, 곧 우리 형제자매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은 언제나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거부한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땅끝은 매우 상대적이며 언제든 쉽게 ‘항해 가능’합니다. 디지털 세상, 곧 너무나 만연하고 언제든 이용 가능한 소셜 네트워크는 경계를 허물고 거리감을 없애며 차이를 줄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가깝고 바로 손닿는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교류가 잘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참으로 우리 삶을 내어 주지 않는다면 결코 삶의 참된 친교는 나눌 수 없을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는 선교에 동참하려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께서 주신 그 소명에 헌신하여야 합니다(루카 9,23-25 참조). 저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은 자신의 소명을 찾고 발견하고 끝까지 지키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사랑을 증언하십시오
여러분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그분 교회 안에서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모든 교회 단체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에는 본당, 연합회, 운동, 수도 공동체, 다양한 선교 봉사 활동 등이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형제자매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마태 25,40 참조)에게 봉사하는 길을 선교 자원봉사 활동 안에서 발견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인간 존엄을 증진하고 사랑의 기쁨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쁨을 증언합니다. 이러한 교회 경험을 통해, 젊은이들 각자가 받는 교육은 직업적 성공을 위한 준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해 더 잘 봉사하도록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을 개발하고 키우는 기회가 됩니다. 이 칭찬할 만한 선교 봉사의 기회는 보람찬 시작이 되고, 성소 식별을 통해 여러분이 선교사로서 자신을 온전히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한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칠레 젊은이들에게 했던 격려의 말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줄 게 없다거나, 아무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필요로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각자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새기십시오. ‘많은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젊은이들과의 만남, 칠레 마이푸 성모 성지, 2018.1.17.).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이번 10월 전교의 달에 젊은이를 주제로 열립니다. 이번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우리가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그분의 사명을 위해 언제나 더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선교 제자들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 파올로 만나 복자, 저희 모두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또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소서.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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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17년 전교 주일 담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선교 사명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다시 한번, 우리는 전교 주일에 “최초의 가장 위대한 복음 선포자”이신 예수님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파견하십니다. 이번 전교 주일에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선교 사명’에 관하여 새롭게 성찰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없으며, 다만 자신의 목적대로 활동하다가 없어져 버리고 마는 다른 수많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 선교 사명의 ‘토대’이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선교 사명의 ‘핵심’이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선교 사명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본질적 접근 방법’이겠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과 선교 사명
교회의 선교 사명은 선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복음은 파급력 있는 기쁨으로 가득한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새 생명, 곧 생명을 주시는 당신의 영을 선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고 있고 또 전달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실존적 변화, 곧 성자 예수님을 본받아 성부께 영광을 드리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삶을 통하여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로 드러나는 변화(요한 4,23-24 참조)를 바라십니다.
선교 사명과 그리스도의 ‘때’
그런데 교회의 선교 사명은 종교 이념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며, 고결한 윤리적 가르침을 제시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교회의 선교는 은혜로운 구원의 ‘때’를 역사 안에 현존하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로 우리와 동시대 사람이 되시어, 그분을 믿음과 사랑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죽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또다시 곳곳에 부활의 싹이 돋아납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복음이란, 계속해서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한 사람, 겸손하고 경건한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생명을 나누도록 초대하시는 한 사람입니다. ‘세례성사’로, 복음은 새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죄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며, 성령으로 깨우쳐 주고 변모시켜 줍니다. ‘견진성사’로, 복음은 강건하게 하는 도유(塗油)가 되어, 동일한 성령으로 증언과 동반을 위한 새로운 방도와 전략을 가르쳐 줍니다. ‘성체성사’로, 복음은 새 생명을 위한 양식 곧 “불사 약”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인간들을 돌보아 주시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고 구불구불한 길에서 목표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시는 ‘착한 목자’로서 당신의 사명을 계속하십니다. 하느님 덕분에, 수많은 의미 있는 경험들에서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을 계속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수인 누에르족 학생이 살해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에 죽음을 무릅쓰고 그를 보호한 딩카족 학생의 행동이 생각납니다. 반군이 저지른 잔인한 대학살 뒤에 한 선교사가 우간다 북부 키트굼에서 거행한 성찬례가 생각납니다. 그 선교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형제자매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의 표현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저희 하느님, 저희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성찬례는 무한한 위로와 용기의 원천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편협함, 갈등, 인종주의, 부족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복음이 어떠한 도움을 주는지, 그리고 모든 곳에서, 무엇보다도 화해, 형제애 그리고 나눔을 증진하는 데에 복음이 어떠한 도움을 주는지 확인시켜 주는 무수히 많은 증언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계속적인 탈출, 순례 그리고 유배의 영성을 고취시키는 선교 사명
교회의 선교 사명은, ‘계속적인 탈출’의 영성으로 활력을 얻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위를 떠나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따르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은, 우리에게 삶의 다양한 사막들을 지나고 진리와 정의를 향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여러모로 경험함으로써 ‘계속적인 순례’를 하도록 재촉합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은, 우리가 영원한 것들을 갈망하며 하느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서 궁극의 본향을 향한 여정에 있는 유배자임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계속적인 유배’의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교회는 선교 사명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보잘것없는 도구이며 매개체임을 상기합니다.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는 교회, 세속적 성공에 만족하는 교회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이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우리가 더 좋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교의 희망인 젊은이
젊은이는 선교의 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은 끊임없이 많은 젊은이를 끌어당깁니다. 그들은 용기와 열정으로 인간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세계의 문제들에 맞서서 공동 노력을 기울이며 다양한 활동과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 모든 거리, 모든 광장, 세상의 모든 곳에서 예수님을 기쁘게 전하는 ‘신앙의 길잡이’로 나서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선교 사명을 수행하기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우리 시대에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긴박한 일인지 깨닫고, 우리가 “예” 하고 말할 수 있도록 동정 성모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줄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새로운 열정이 일어나게 성모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길들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거룩한 담대함을 우리가 얻을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전구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연중 제29주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화위원장 2016년 전교 주일 담화
복음의 기쁨을 온 세상에!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1항).
1. 이 사실을 온 몸으로 증언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서 인물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요한복음 4장,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만납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인간의 처지를 표상하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가까이 살펴봅시다.
먼저, 이 여인이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 처음에는 ‘유다인’이었다가, ‘선생님’, ‘예언자’를 거쳐서, 마침내 ‘메시아’로 바뀌어 가는 것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점점 깊이 만나 상대방의 정체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주님의 이 말씀대로, 이 여인은 지금 그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대화는 예수님 쪽에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주시오” 하고 청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교도들과 다름없이 천대하고, 그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는 일조차 꺼렸습니다. 또 어떤 유다인들은 밖에서 다른 여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 순간부터 눈을 감았기 때문에, 담벼락이나 건물 등에 부딪쳐 얼굴에서 피가 나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상대가 사마리아 여인인데다가 겉 차림새만 보아도 삶이 완전히 헝클어지고 망가진 사람이라면, 가까이 하는 것만도 유다인에게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이 그 만남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여인 자신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유다인(남자)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의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점점 더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 우물물로 시작된 대화는 계속 진행되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마음에 두셨던 물’, 모든 사람에게 주시고자 한 바로 그 물 이야기로 건너갑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물을 청하는 쪽이 바뀌어, 그 여인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이 장면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장벽을 뚫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경계를 넘어, 길 잃은 양과 같은 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모습입니다. 먼 여행과 한낮의 땡볕에 지친 몸을 이끌고 그분은 먼저 우물가에 와서 기다리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먼저 움직이시는 쪽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물은 이사악, 야곱, 모세 등 이스라엘 역사에서 많은 이들에게 결혼을 위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여기서도 우물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익숙한 여러 명칭을 쓰십니다. 목자, 아버지, 남편은 가장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남편 혹은 부부관계는 인간의 경험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가장 깊고 강력한 갈증을 채워주고, 사람의 본 모습을 실현시켜주는 제일 보편적인 관계를 표상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서에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란 ‘부부’를 가리킵니다(창세 1,26-27). 모든 인간관계, 특히 그 대표적 표현인 부부관계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상을 실현하는 제일 가깝고도 일반적인 길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야 인간으로 깨어납니다. 남성은 여성을 만나야 남자로 깨어납니다. 여성도 남성을 만나야 여자로 깨어납니다. 남녀가 몸, 정신, 영혼을 다해 만나면 자기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 깨어납니다. 몸만 만나면 몸만 깨어납니다. 부부는 서로 상대방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깨워주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각자의 얼굴이 다른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하고 우주 천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모습으로 각 사람 안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 사람의 유일성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그 이름을 불러주면 그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만들어 거기에 잠재워두신 아름다운 사람이 깨어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수많은 남성을 만났지만, 그 누구와도 몸을 스치는 정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깨워주실 때까지 그 여인은 계속 상대방을 바꿔가며 몸을 스쳤지만 내면의 갈증은 더해갈 뿐이었습니다.
2. 많은 예언자들이, 충실한 남편인 하느님과 불충한 아내라는 표상을 빌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외간 남자와 놀아났다가 돌아오는 체험을 통해서, 불충한 백성이 결국 돌아오기까지 참아내시는 하느님의 충실하고 인내롭고 더할 수 없이 강력한 자비와 사랑의 힘이 결국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2,2.20;31,3), 에제키엘(16,1-43), 이사야(40-5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자기 남편인 야훼와의 계약을 깨뜨리지만, 남편인 주님께서는 상대방이 “처녀였을 때 약혼했던 것을 생각하고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계약을 맺으리라”고 예고합니다(에제 16,59-63; 이사 61,10; 62,4-5 참조).
바로 그 예언이 드디어 지금 현실로 나타나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참된 의미의 남편이 없이, 어둠과 절망 속에서 삶을 소진하고 있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온갖 장벽을 다 허물고 우물가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물에서 시작된 대화는 더욱 깊어지면서 마침내 그 여인이 지닌 갈증의 깊은 뿌리로 향합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남편 - 소갈병의 뿌리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물물에 대한 갈증은 그 증상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메시아의 도움으로 그 뿌리를 정확히 알아내고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깊은 속에 감추어두었다고 생각했던 비밀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잠들어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아내는 눈길을 받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겉모양만을 보던 사람들과는 달리 속마음을 보시는 하느님’(1사무 16,7 참조)을 만나자 너무나 부끄러워 깊이 숨겨두었던 그 비밀을 자기 입으로 털어놓을 만큼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로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택된 분의 본래 이름을 대며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눈길을 보내주신 죄인입니다.” 하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눈길을 받고, 그 여인은 이제 그 죄의 질긴 사슬에서 풀려나서 말한 것입니다. “남편이 없습니다.” 지금 함께 사는 남자가 있지만, 그가 남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한 것입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8).
이제 그 여인의 고백과 그것을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문제의 뿌리가 드러났습니다. 상대방을 바꾸어가며 수많은 남자를 만났지만, 그것은 단지 피부를 스치는 것이었을 뿐, 영혼 속 깊이에까지 가 닿지는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막’이나 ‘황무지’ 혹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은 그런 그 여인의 내면을 잘 그려줍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 참된 행복을 찾아가는 그 여인의 여정은 세상의 남편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짐 산이라고 하고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니, 도대체 어느 쪽이 옳은지에 관한 문제가 나오자 그 여인이 말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저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겠지요.” 바로 그 때, 예수께서는 복음서 전체에서 처음으로 당신 스스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3. 이렇게 해서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으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가는 그 여인의 여정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9)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여인의 내면 깊은 곳에 켜켜이 자리잡고 있던 갈증이 한꺼번에 해소되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6)던 예언은 이제 현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이렇게 해서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의 구름처럼 아련한 꿈으로만 있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그림자에 불과한 우물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 내버려진 물동이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이제 그 여인은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새 인간”(골로 3,1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를 비롯해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그 여인도 곧바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끄럽던 과거까지 사람들에게 그분을 증언하는 수단으로 동원됩니다.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가서 봅시다.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요한 4,29). 이렇게 해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여기서도 증명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구원의 역사가 완성점에 이르면, “어린양의 아내인 그 신부”(묵시 21,9)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랑인 어린양이 “신부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목마름을 결정적으로 풀어주실 것입니다”(묵시 22,17 참조). 바로 이것이 우리 희망의 근거입니다.
4. 이제 이런 그림을 배경으로 우리 주변과 세상을 바라봅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다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부요한 나라에 속하게 된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니 이 땅에서 물질, 권력, 명예, 쾌락을 좇는 흐름이 넘실거립니다.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크게 벌어져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많은 사람들 뿐 아니라, 겉, 물질, 보이는 환경으로 보자면,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이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속, 마음은 빠른 속도로 사막화하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며,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 이 가운데에서도 외로움은 현대인이 가장 넓고 깊이 빠져든 시대적 질병입니다.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혼자”라는 느낌, 인간의 이 외로움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제일 심각한 사태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창조주께서 세상 만물을 하나하나 만드신 다음, “좋다, 참 좋다!”고 말씀하시다가, 단 한 번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이 바로 사람이 혼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 이렇게 세 위격으로 이루어진 가족-공동체인 하느님께서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인간은 공동체일 때에만 자신의 원형을 닮고 자기를 실현하며 행복과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복음선포에 관한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 쇄신”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바꿀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본당 사목구를 “공동체들의 공동체”(28항)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초공동체, 소공동체 등으로 불리는 지역별 모임에서 하느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그렇게 해서 주님을 만나 기쁨과 힘을 얻은 신앙인들이, 동네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5. 순교자 황일광(1757-1802)은 당시 사회에서 천민으로 멸시를 받는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당시의 관행에 따라, 마을 공동체 안에 살지 못하고 그 경계 밖에서 지내야 했고, 일반인들의 집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나니 교회 공동체는 그를 형제로 받아주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귀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새로 태어난 기쁨을 맛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둘 있다. 하나는 하늘에 가서 들어가는 천국이고, 또 하나는 여기 세상에서 들어가는 교회다.”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포졸들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그는 여유 있게 말재주를 부리며 말했습니다. “포졸들이 나를 남원에서 옥천으로 데려왔네!” 나무(남원)하러 나갔더니 포졸들이 나를 옥천(옥이라는 천국)으로 데려왔다는 뜻이었습니다. 복음을 통해 주님을 만난 그에게는 감옥도 이미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복음을 들여온 이들은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었습니다. 그것도 평신도들이었으며,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신 103위 순교자들, 2014년에 복자로 선포되신 124위 순교자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평신도들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이런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의 정신은 지금도 계속 살아서 한국 교회 특유의 활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교회 구성원 모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제, 예언자, 왕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한다면,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대로 소공동체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스도 신앙이 무엇인지, 참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삶의 우선순위 맨 앞에 두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놀라운 기쁨을 맛 본 사람들입니다. 일흔 두 제자도 복음선포 활동을 마치고 “기쁨에 넘쳐” 돌아왔고(루가 10,17), 그들의 기쁨을 확인하신 예수님께서도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루가 10,21) 외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
6. 결혼은 한 사람에게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한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남녀의 만남과 거기서 출생할 자녀가 함께 이룰 가정은 사회의 기본 세포로서 나라와 세상의 건강과 명운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내면 가장 깊숙한 데서 만난 우리는 이제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이 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시편 85,10)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한 몫을 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종교가 사적인 영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오로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준비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복음의 기쁨,182).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만 몰두하여 이웃과 사회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유형입니다”(2015.5.28일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주님의 마지막 당부를 실천하는 사도가 됩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2016년 10월 전교의 달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전교주일 담화(요약)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우리는 신앙의 해를 마무리하는 가운데 전교 주일을 지냅니다. 신앙의 해는 우리가 주님과 맺은 친교를 강화하고, 용기 있게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로서 우리의 여정을 굳게 다지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저는 몇 가지 성찰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신앙은 그분의 한없는 자비에 감사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갈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신앙은 나누어야 하는 선물입니다.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 제자의 본분 가운데 하나이고 교회의 삶 전체에 활력을 주는 지속적인 투신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며 그분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걸어가도록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세상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활동으로 활력을 얻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놀라운 만남을 체험하였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깊은 기쁨의 경험,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의 메시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길에서 교회를 이끄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되라고 격려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처지에 따라 성령께 기꺼이 응답하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아낌없이 주님을 도와드리십시오. 교황청 전교기구는 하느님 백성 전체에 대한 한층 깊은 선교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기여하도록 독려합니다.
이 신앙의 해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우리가 맺은 관계가 더욱 굳건해지기를 바랍니다. 이는 올해 전교주일에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선교사들, 그리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의 이 근본 사명에 함께하고 도움을 주는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봉사자이며 선교사로서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현대의 복음 선교?, 80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13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전교주일 담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우리는 신앙의 해를 마무리하는 가운데 전교 주일을 지냅니다. 신앙의 해는 우리가 주님과 맺은 친교를 강화하고, 용기 있게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로서 우리의 여정을 굳게 다지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저는 몇 가지 성찰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친교를 맺으시어 우리가 당신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한층 의미 있고 더 좋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신앙은 받아들임,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용기, 그분의 한없는 자비에 감사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살아갈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신앙은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아낌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사랑받는 기쁨, 구원의 기쁨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신앙은 혼자만 간직할 수 없고 나누어야 하는 선물입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간직하려고 하면, 우리는 고립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든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 제자의 본분 가운데 하나이고 교회의 삶 전체에 활력을 주는 지속적인 투신입니다. “선교사 파견은 하나의 교회 공동체가 성숙했다는 분명한 표지입니다”(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95항). ‘성숙한’ 공동체는 신앙을 고백하고, 이를 전례 안에서 기쁘게 거행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또한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외딴 곳”에, 특히 아직 그리스도를 알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합니다. 개인과 공동체 차원에서 우리 신앙의 힘은, 그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고 널리 퍼뜨리며 사랑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역량, 또 우리가 만나는 이들과 우리와 삶의 여정을 함께 하는 이들에게 신앙을 증언할 수 있는 역량으로 가늠될 수 있습니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의 해는, 온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민족들과 나라들 사이에서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선교 정신은 지리적 영토의 문제만이 아니라, 민족과 문화, 개인들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신앙의 “경계”는 장소와 인간 전통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도 가로지르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교 임무, 곧 신앙의 경계를 넓히는 임무가 어떻게 세례 받은 모든 이들과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임무가 되는지를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공동체들, 특히 교구와 본당 사목구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며 거기에서 어느 모로든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나므로, 모든 민족 앞에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 또한 그 공동체의 의무이다”(선교 교령 37항). 따라서 모든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증인”(사도 1,8)이 되라는 명령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으라는 도전과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부차적인 측면이 아니라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며 그분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걸어가도록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저는 주교와 신부, 사제 평의회, 사목 평의회, 그리고 교회 내에서 책임을 맡은 모든 사람과 단체들이 그들의 사목 계획과 양성 계획 안에서 선교 차원을 중요하게 여기기를 바랍니다. “모든 민족 앞에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그들의 사도적 헌신은 불완전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선교 전망은 단순히 그리스도인 생활의 프로그램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측면과 관련된 패러다임 차원이기도합니다.
3. 복음화 활동은 흔히 교회 공동체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장애에 부딪치게 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모든 이에게 선포하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도록 돕는 데에 열정, 기쁨, 용기, 희망이 부족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여전히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자유의 침해로 여깁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이에 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의 양심에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 잘못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에 복음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매우 분명하게 …… 진리가 나타내는 자유로운 선택을 철저히 존중하며 제시하는 것은 …… 그 자유를 온전히 존중하는 것”(?현대의 복음 선교?, 80항)입니다. 우리는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제안하고 복음의 선포자가 되는 용기와 기쁨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를 세상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너무 흔히 폭력, 거짓, 오류를 강조하고 내세운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 시대에, 그것도 교회 안에서, 복음을 따르는 선한 삶을 선포와 증언으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교회 없이는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없다는 근본 원칙을 모든 복음 일꾼이 결코 잊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복음화는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단독 활동이 아니라 언제나 교회적인 활동입니다. 바오로 6세는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홀로 복음을 전하고 작은 공동체를 모으고 성사를 집전하는 이름 없는 설교자나 교리교사나 목자도 교회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떠맡은 사명 때문이나 개인의 원의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과 일치하여, 또 교회의 이름으로”(?현대의 복음 선교?, 60항) 행동합니다. 그리고 이는 선교에 힘을 보태고 모든 선교사와 복음화 일꾼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활력을 불어 넣어 주시는 단 한 몸의 일부라고 느끼게 해 줍니다.
4. 우리 시대에, 새로운 매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폭넓은 유동성과 편리함 덕분에 사람들, 지식들, 경험들이 뒤섞이고 있습니다. 일 때문에 온 가족이 한 대륙에서 또 다른 대륙으로 이주합니다. 직업적 문화적 교류, 관광, 이와 유사한 현상들도 사람들의 방대한 이동을 촉진합니다. 이로써 본당 공동체조차도 그 지역에 누가 계속 사는 사람이고 누가 잠시 머무르는 사람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닌 지역들 가운데 많은 곳에서, 신앙을 잘 알지 못하거나 종교적 차원에 무관심하거나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의 수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이들 가운데에도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일이 드물지 않아 그들에게도 ‘새로운 복음화’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인류의 상당수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삶의 다양한 영역, 곧 경제, 금융, 식량 안보, 환경만이 아니라 삶의 더 깊은 의미와 삶에 활력을 주는 근본 가치들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인류 공존 역시 긴장과 갈등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는 견실한 평화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을 찾는 데에 불안과 어려움을 야기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지평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이 복잡한 상황에서, 용기 있게 바로 그 현실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 곧 희망과 화해와 친교의 메시지를 선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의 자비와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사랑의 힘은 악의 어둠을 물리치고 우리를 선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길을 환히 비추는 안전한 빛이 필요합니다. 이 빛은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만남만이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증언을 통하여, 사랑과 더불어, 신앙이 주는 희망을 이 세상에 전합시다! 교회의 선교 정신은 개종 권유가 아니라 선의 길을 밝혀 주는 삶의 증언에 있습니다. 이는 희망과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구호 단체나 기업이나 비정부 기구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으로 활력을 얻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놀라운 만남을 체험하였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깊은 기쁨의 경험,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원의 메시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길에서 교회를 이끄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5. 저는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되라고 격려하고자 합니다. 특별히 선교사들, 교구 소속 선교 사제들, 수도자들, 그리고 많은 평신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와 문화들 속에서 복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한 젊은 교회들이 이제는 오히려 어려움에 놓인 교회들에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데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 중에는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닌 교회들도 드물지 않습니다. 젊은 교회들이 그 교회들에 새로움과 열정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 새로움과 열정으로, 삶을 쇄신하고 희망을 주는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보편적 차원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개별 교회, 모든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 파견은 결코 손실이 아니라 이득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처지에 따라 성령께 기꺼이 응답하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아낌없이 주님을 도와드리십시오. 마찬가지로 저는 주교들과 수도 단체들, 공동체들과 모든 그리스도교 단체들이 통찰력과 세심한 식별을 가지고 만민(ad gentes) 선교 성소를 지원하고, 사제, 수도자, 평신도를 필요로 하는 교회들을 도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강화시켜 나가기를 당부합니다. 또한 같은 주교회의나 같은 지역에 속한 교회들이 이러한 관심을 공유하여야 합니다. 성소가 풍요로운 교회들이 성소가 부족한 교회들을 아낌없이 돕는 일이 중요합니다.
또한 저는 선교사들, 특히 교구 소속 선교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파견된 지역의 교회에서 그들의 소중한 봉사를 기쁘게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들의 원래 소속 교회에는 그들의 기쁨과 경험을 가져다줄 것을 촉구합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들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사도 14,27)한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오래된 교회에 젊은 교회의 새로움을 가져다주어 일종의 신앙의 “회복”을 위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전통의 교회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여정에서 서로를 풍요롭게 해 주는 교류를 통하여 신앙을 나누는 열정과 기쁨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주교가 형제 주교들과 함께 모든 교회에 대해 지니는 관심은 교황청 전교 기구의 활동에서 중요한 표지를 발견합니다. 교황청 전교 기구는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공동체의 선교 의식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교황청 전교 기구는 하느님 백성 전체에 대한 한층 깊은 선교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기여하도록 독려합니다.
끝으로 저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그 신앙을 실천할 법적 권리를 누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의 형제자매인 그들은 용감한 증인들입니다. 심지어 초세기 순교자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불굴의 사도 정신으로 현대의 온갖 박해를 견디어 내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실히 따르려고 생명의 위협도 감수하고 있습니다. 저는 폭력과 불용을 겪는 개인, 가정, 공동체와 기도 안에서 함께하고 있음을 거듭 강조하며,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위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이러한 희망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빠르게 퍼져나가 찬양을 받고’(2테살 3,1 참조), 이 신앙의 해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우리가 맺은 관계가 더욱 굳건해지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 그리스도 안에서만 미래에 대한 확신과 참되고 영원한 사랑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믿음의 문?, 15항). 이는 올해 전교 주일에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선교사들, 그리고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의 이 근본 사명에 함께하고 도움을 주는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봉사자이며 선교사로서 “즐거움과 위안을 주는 복음화의 기쁨”(?현대의 복음 선교?, 80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티칸에서
2013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전교주일 담화(요약)
-“진리의 말씀을 널리 퍼뜨리십시오”(자의 교서 '믿음의 문', 6항)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전교 주일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신앙의 해가 시작되고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가 열립니다. 이는 더 큰 용기와 열정으로 만민 선교에 투신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다지는 좋은 기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교회론의 중심으로 삼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신앙의 해를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길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복음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보내십니다.”(「믿음의 문」, 7항)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지녔던 사도적 열정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힘없는 작은 공동체였지만 선포와 증언을 통하여 당시에 그들이 알던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셨고, 하느님 백성 전체가 투신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선교 사명은 개별 교회의 존재와 활동 전체를 포함하여야 합니다. 특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시대에, 교회의 생활 방식과 사목 계획, 교구 조직도 선교에 맞추어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복음화를 위한 열정적인 투신을 가로막는 것은 대부분의 인류가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인류를, 생명수로 초대하고 인도하여야 합니다. 마음의 갈증을 풀어 주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러한 현존의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그분을 알려 모든 이가 이 기쁨을 체험하게 하려는 열망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화에 대한 관심이 그리스도인의 교회 활동과 개인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곧 그들은 자신이 복음화의 대상이고 동시에 복음 선교사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선포의 핵심은 언제나, 세상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포(케리그마)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이며, 이 선물은 우리만 간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 각지의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심지어 온 가족이 고국을 떠나 다른 교회로 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 교회의 보편 선교에 협력하는 교황청전교기구들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들의 활동으로, 복음 선포는 이웃을 돕는 발언이 되고,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가 됩니다. 또한 오지에 교육 기회를 주고, 벽지에 의료 지원을 하며,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이며, 민족들의 발전을 지원하고, 인종 갈등을 극복하며, 모든 단계의 인간 생명을 존중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특히 선교 일꾼들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시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교가 세계의 역사 속에서 확고한 진전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복음화의 별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모든 복음 선교사들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전교주일 담화(전문)
-“진리의 말씀을 널리 퍼뜨리십시오”(자의 교서 '믿음의 문', 6항)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거행하는 전교주일은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신앙의 해가 시작되고 새로운 복음화를 주제로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더 큰 용기와 열정으로 만민 선교에 투신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다지는 좋은 기회입니다.
세계 모든 곳의 가톨릭 주교들이 참석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보편성의 참으로 빛나는 표징이었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에서 그토록 많은 공의회 교부들이 참석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공동체의 목자들, 곧 선교사 주교들과 본토인 주교들은 모든 대륙에 존재하는 교회의 모습을 공의회에 전하며, 이른바 ‘제3세계’의 복잡한 현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려는 열정을 지닌 신생 교회와 젊은 교회의 목자들로서 겪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민 복음화의 긴급한 필요성을 강조하여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교회론의 중심으로 삼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선교 교회론
이러한 교회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미 신학적이고 사목적으로 풍요로운 성찰을 거친 이 교회관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많기에 다시금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복자는 교회의 불변하는 선교 사명에 관한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사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86항). 저 또한 신앙의 해를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길들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복음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보내십니다”(?믿음의 문?, 7항). 하느님의 종 바오로 6세가 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말씀하셨듯이, 복음 선포는 “교회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명령으로 모든 이가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교회에 맡겨진 의무입니다. 이 메시지는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며 대체될 수 없는 것입니다”(5항). 따라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지녔던 사도적 열정을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힘없는 작은 공동체였지만 선포와 증언을 통하여 당시에 그들이 알던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뒤를 이은 교도권이 특별히 선교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선교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셨고, 주교, 사제, 부제, 수도자와 평신도, 곧 하느님 백성 전체가 투신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임무는 그 누구보다 먼저 주교에게 있습니다. 주교단의 일원이며 개별 교회의 목자인 주교는 세계 복음화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사실 주교는 “한 교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축성되었고”(?교회의 선교 사명?, 63항), “새로운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신앙의 선포자”(선교 교령 20항)이며, “하느님 백성의 선교 정신과 열성을 마치 눈으로 볼 수 있듯이 드러내어, 온 교구가 선교하게 하여야 합니다”(선교 교령 38항).
최우선 과제인 복음화
따라서 복음 선포의 사명은 주교가 자신의 사목적 배려에 맡겨진 하느님 백성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교구 소속 선교 사제나 평신도들을 파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교 사명은 개별 교회의 모든 활동과 분야, 다시 말해서 개별 교회의 존재와 활동 전체를 포함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분명히 밝혔고 그 이후의 교도권도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시대에, 교회의 생활 방식과 사목 계획, 교구 조직도 교회 존재의 이 근본 차원인 선교에 맞추어 끊임없이 쇄신되어야 합니다. 봉헌 생활회와 사도 생활단이나 교회 단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강력한 호소를 받아들여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우리 사목자들과 수도자들과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이민족을 위하여 수인이 된”(에페 3,1)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고통 받고 싸웠으며(콜로 1,24-29 참조),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알리는 데에 온갖 방법과 모든 시간을 아끼지 않고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만민 선교는 모든 교회 활동의 일관된 전망과 전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믿음에 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을 증언하고 세상에 선포하는 사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멀리 있는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 보지 못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선교 협력에는” 복음화를 위한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직접적 참여와 같은 새로운 형태들이 포함된다.”(?교회의 선교 사명?, 82항)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해를 거행하고 새로운 복음화에 관한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특히 복음화에 직접 참여하는 선교 협력을 새롭게 시작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신앙과 선포
그리스도를 선포하려는 열정은 또한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여 인류의 문제와 열망과 희망을 깨닫도록 촉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인류를 치유하시고 정화하시고 당신의 현존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언제나 시의적절하고 역사의 중심에 들어가 모든 인간 존재의 가장 심오한 의문에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교회 사명의 광활한 지평과 오늘날의 복잡한 상황은 하느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요청”(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97항)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이 커다란 변화의 시기에”(?믿음의 문?, 8항) 개인과 공동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충실히 믿고 따르도록 요청합니다.
사실, 복음화를 위한 열정적인 투신을 가로막는 것은 서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류가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갈망하는 인류를,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다가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처럼,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로 초대하고 인도하여야 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한 대로 이 여인의 이야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요한 4,1-30 참조).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고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새로운 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그 여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차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서서히 신앙의 여정으로 이끄시어 주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인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고을로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설교집?, 15,30).
마음의 갈증을 풀어 주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러한 현존의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그분을 알려 모든 이가 이 기쁨을 체험하게 하려는 열망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녔지만 하느님을 잊어 가는 공동체와 국가들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촉진하도록 신앙을 전하는 열정을 되살려, 그들이 신앙의 기쁨을 되찾게 하여야 합니다. 복음화에 대한 관심이 그리스도인의 교회 활동과 개인 생활의 뒷전으로 밀려 나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활동과 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곧 그들은 자신이 복음화의 대상이고 동시에 복음 선교사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선포의 핵심은 언제나 같습니다. 세상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포(케리그마)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의 선포입니다. 그 사랑은 당신의 영원하신 외아들 주 예수님을 보내 주신 사건에서 정점을 이룹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우리 인간 본성을 기꺼이 짊어지시고 사랑하시어 십자가 봉헌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 사랑의 계획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마음과 삶에 받아들여야 하는 선물이며 신비입니다. 이에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신앙은 나누라고 받은 선물입니다. 신앙은 열매를 맺도록 받은 탈렌트입니다. 신앙은 감추어질 수 없는 빛입니다. 그 빛이 온 집안을 비추어야 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이며, 이 선물은 우리만 간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포는 사랑이 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오늘날 온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힘차게 울리고 있습니다. 선교지 교회들은 대부분 최근에 생겨난 젊은 교회로서 여전히 선교사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에게도 선교 의식은 공통된 본질이 되어 왔습니다. 세계 각지의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심지어 온 가족이 고국과 지역 공동체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서,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 교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친교와 나눔과 사랑의 표현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의 복음을 듣고 또 들어 참 생명의 원천인 성사들을 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랑으로 변화된 이 탁월한 믿음의 표징을 보며, 저는 세계 교회의 보편 선교에 협력하는 교황청 전교 기구들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들의 활동으로, 복음 선포는 이웃을 돕는 발언이 되고,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가 됩니다. 또한 오지에 교육 기회를 주고, 벽지에 의료 지원을 하며,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이며, 민족들의 발전을 지원하고, 인종 갈등을 극복하며, 모든 단계의 인간 생명을 존중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만민을 향한 복음화 사명에, 특히 선교 일꾼들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시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교가 세계의 역사 속에서 확고한 진전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존 헨리 뉴먼 복자와 함께 다음과 같이 기도드립니다. “주님,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하시어 그들의 입에 올바른 말씀을 담아 주시고 그들의 노고가 열매를 거두게 해 주소서.”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복음화의 별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모든 복음 선교사들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12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
연중 제29주일
피정 중에 신부님들과 측백나무 숲을 거닐었습니다.
경사가 심한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강아지가 대열의 맨 앞으로 뛰어 갔다가 맨 뒤까지 다시 뛰어 내려왔다가를 반복했습니다.
정작 주인은 언덕을 올라가느라 힘이 들어 지쳤는데도 그 강아지는 주인과 선두 사이를 쉴 세 없이 왕복하면서 주인에게 달려왔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주인에게서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마다, 또 주인이 안 보일 때마다 그 강아지는 맨 뒤에 있는 주인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길이 언덕이든 평지든 관계없이 그저 주인에게 달려왔습니다.
그 강아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저 강아지의 반만이라도 주님께 잦아든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리고 또 여행 중에 사고가 나는 것을 접하면서, ‘매일 매일의 삶이 참으로 은총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인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번 주간 목요일 평일미사의 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 28) 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고, 얼마나 잘 사는가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살려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고 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현실을 주도하고 지배하는 힘과 제도, 사회, 문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의 사회 제도 너머에 살아계시는 하느님, 현실 사회의 제도가 있어도 그 제도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고 지켜주시는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이끄셔서 우리를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며, 주님께 더욱 더 자주 그리고 깊이 잦아들기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시고, 더욱 더 사랑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3년 전교주일 담화-"선교는 용서의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저는 교황직을 시작할 때부터, 저의 교황직을 성모님의 특별한 가호에 맡기고자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제자들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던”(사도 1,14) 다락방의 경험을 상기하도록 온 신자 공동체에 자주 요청해 왔습니다. 저의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에서 이미 저는 열렬한 기도의 분위기에서만 우리는 “우리 위에 내려 오시는 성령을 받게 되고, 오순절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을 뛰어나온 그들처럼 ‘땅 끝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22항)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성모님께서 어머니이시듯 자신도 ‘어머니’임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발표한 칙서 '강생의 신비'(Incarnationis mysterium)에서 지적하였듯이, 교회는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모든 민족의 흠숭과 묵상의 대상이 되게 하신 요람”(11항)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의 별이시며 찬란한 새벽이시고 우리 발걸음의 확실한 안내자이신('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58항 참조)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함께 이 영적 사명의 길을 계속 갈 생각입니다.
성모님과 묵주기도의 해의 교회의 사명
2. 지난 10월 저는 교황 재위 제25주년을 맞아, 대희년 영성의 지속으로서, 그리스도교 전통에 너무도 친숙한 묵주기도를 재발견하도록 하기 위한 특별한 해를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따라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고 특히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당신께 의지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천상에서 잊지 않고 보호해 주시는 성모님께서 지켜 보시는 가운데 한 해를 보내게 됩니다.
저는 묵주기도의 해가 모든 대륙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의미를 심화시키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복되신 동정 성모님을 배우고 그분의 모범을 따른다면 모든 공동체는 자신의 ‘관상적’이고 ‘선교적’인 활동을 더 잘 부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특별한 성모님의 해가 끝나는 바로 그 시점에 거행되는 전교주일을 잘 준비한다면, 전교주일은 이러한 교회 공동체의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할 것입니다. 성모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날마다 묵주기도를 바치며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묵상할 때 우리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보다도 기도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길러지는 ‘경청’의 태도는 신자들을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셨던”(루가 2,19) 성모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묵상할 때 우리는 “이를테면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예수님과 생생하게 결합되어”('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2항)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더욱 열심히 바라보는 교회
3. Cum Marie contemplemur Christi vultum!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자는 이 말씀을 저는 자주 떠올립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한한 영광이 빛나는(요한 1,14 참조) 성부의 외아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납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21항).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내적으로 그분의 신비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고(요한 14,9) 말씀하십니다.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과 일치하여, 성모님의 학교에서”('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항) 이 신비의 여정을 계속합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스승이시며 안내자이십니다. 성령의 활동에 힘입어,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신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체험과 우리에게 동기를 주는 희망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는('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sio), 24항 참조) ‘차분한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비할 데 없는 모범이신 성모님을 언제나 바라봅시다. 모든 복음 말씀은 성모님을 통하여 놀라운 반향을 얻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 사회에 더욱 깊은 영향을 미치고자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깊이 일치되기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관상하는 ‘기억’이십니다. 심각한 문제들, 무고하게 고통받는 사람들, 무례함과 오만함으로 저질러지는 불의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순종을 본받을 때 신자들은 외견상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조용히 울려 퍼지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닮아가고 사랑하는 더욱 거룩한 교회
4. 세례를 통하여 모든 신자는 성덕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에서, 성덕에 대한 보편적 소명은 모든 사람을 사랑의 완덕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성덕과 선교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의 불가분의 소명입니다. 더욱 거룩해지려는 노력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려는 노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저는 “모든 신자는 성덕과 선교로 부르심을 받았다.”(90항)고 상기시킨 바 있습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삶에 동참함으로써 바오로 성인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갈라 2,20)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묵주기도의 모든 신비가 성덕과 복음화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학교라면, 빛의 신비는 우리 복음의 ‘골자’인 특별한 장면들을 부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세례 받은 모든 신자가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에페 1,5; 사목 헌장, 22항 참조) 선택받았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님께서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고(요한 2,5) 이르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를 권유하셨던 것은 성덕의 길을 추구하라는 명백한 명령입니다. 세례 받은 신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묵상하며 그분을 기쁘게 기다립니다. 또한 성체성사의 제정을 묵상하면서 신자들은 거룩하신 스승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선물을 남기신 다락방을 자주 떠올리게 됩니다. 그 선물이란 바로 제대의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 가나에서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빛의 신비 전체가 펼쳐지는 마리아 배경이 됩니다. 사실상,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촉구, 다볼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성체성사의 제정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특별한 반향을 얻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키시고 그분의 모든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시며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법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선포하는 더욱 선교적인 교회
5.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로 교회가 예수님을 선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더욱 빛나는 성덕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비추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든 노력에서, 교회는 성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성모님에게서 교회는 배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하는 ‘동정녀’가 되고 많은 자녀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가 되는 법을 ‘배웁니다.’
어머니의 주의 깊은 눈길 아래, 교회 공동체는 성령을 가득 받아 다시 태어난 가정처럼 번성하고, 새로운 복음화의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형제 자매들, 특히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과 신앙과 복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바라봅니다. 특히 교회는 그리스도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심을 용감하게 소리 높여 세상에 외칩니다. 교회는 “사람이 되신 말씀이시며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가르침이 바로 기쁜 소식의 핵심”('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 20항)임을 담대하게 즐거이 선포합니다.
유능하고 거룩한 복음 선포자들을 양성하여야 합니다. 특히 만민 선교에 대한 사도들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묵주기도는, 온전히 재발견되고 평가받는다면, 방대한 사도직 활동 분야에서 일할 하느님 백성을 양성시켜 줄 일상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교육적 영성적 도구가 됩니다.
분명한 명령
6. 선교 활성화의 임무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와 모든 교회 공동체의 진지하고 일관된 의무가 되어야 합니다. 교황청 전교 기구는 분명 구체적이고 특별한 역할이 있으며, 저는 헌신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교황청 전교 기구에 감사 드립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교회와 인류가 특별히 필요로 하는 은총을 주님께 얻을 수 있도록 개인으로나 공동으로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이는 어린이, 어른, 젊은이, 노인, 가정, 본당, 수도 공동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드리는 권유입니다.
여러 가지 지향 가운데서도 저는 평화에 대한 지향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전쟁과 불의의 근원은 ‘갈라진’ 마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평화의 비결을 알게 되고 이를 자기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이는 또한 묵주기도의 목표이기도 합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40항). 묵주기도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 안에, 그리고 민족들간에 평화를 건설하는 특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우리는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에게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땅 끝까지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주저 없이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모두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전교주일 담화-"선교는 용서의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의 자비 안에 모든 사람이 일치되기를 바라시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용서하기를 바라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성인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2고린 5,19)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화해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고 하셨던 그리스도의 저 마지막 진솔한 외침을 되풀이하여 상기시켜 줍니다.
종합적으로, 우리가 올해 10월 20일에 "선교는 용서의 선포입니다."라는 고무적인 주제로 거행하게 될 전교 주일의 근본적인 내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전교 주일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그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은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응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
2.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는 지금, 선교의 의무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제가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모르고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공의회 폐막 이후 거의 두 배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당신 아들을 파견하신 인류의 거대한 부분을 보면 교회의 선교가 긴급함을 알 수 있습니다."(3항)
위대한 사도이며 복음 선포자인 바오로 성인의 말씀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 주신 것입니다"(1고린 9,16-17). 인종과 민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분열의 상처와 이념적 갈등, 경제적 불균형, 아직도 인류를 짓누르고 있는 폭력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난 세기를 피로 물들였던 끔직한 전쟁과 혁명들,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직도 거의 고질적으로 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분쟁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비참한 정신적 물질적 가난 중에도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의 자비를 애타게 목말라 하는 사람들의 염원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뿐 아니라 어쩌면 훨씬 더 절실합니다.
3. 저는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에서 고통과 영광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핵심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마지막 시간에 십자가 위에 드러난 그분 신비의 가장 역설적인 측면과 마주치게 됩니다"(25항). 하느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와는 다른 ……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심오한 지혜"(1고린 2,6.7)에 자유로이 다가서게 해 주는 열쇠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얼굴이 이미 비치고 있는 십자가는 우리를 충만한 신앙 생활과 완전한 사랑으로 이끕니다. 십자가는 당신의 생명 자체와 당신의 사랑, 당신의 거룩함을 인간과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바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신비에 비추어 볼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충만한 신앙 생활, 곧 완전한 사랑과 성덕에 이르지 못하면 교회의 사명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겸손과 용서를 실천하며 평화와 친교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은 바오로 성인이 경험하였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주셨으니 그 불러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에페 4,1-3). 바오로 성인은 골로사이인들에게 이렇게 덧붙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그러니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것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골로 3,12-15).
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외침은 절망에 빠진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성부께 당신 생명을 바치신 성자의 기도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의 조건들을 보여 주십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박해자들의 증오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한 기도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실 뿐 아니라 변함 없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유익을 바라시며 그들을 위하여 중개하십니다. 그분의 죽음은 완전한 사랑의 실현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위대한 신비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 주시고자 인간의 얼굴을 받아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얼굴'을 덮어쓰셔야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 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무죄 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2고린 5,21)"([새 천년기], 25항). 그리스도의 완전한 용서는, 그분을 박해한 사람들에게도, 모든 이를 위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정의의 시작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구세주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주님의 계명에 충실한 교회는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선포하고 전파합니다. 신자들은 복음화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이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이며 지상의 순례자로서 걷는 길은 서로 다르더라도 모두 같은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돕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실한 대화는 선교의 주요 방법입니다(선교 교령, 7항; 비그리스도교 선언, 2항 참조). "대화는 교활한 계략이나 이기적 관심에서 나올 수 없으며"([교회의 선교 사명], 56항),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 대신, 대화는 우리가 믿는 원칙들을 설명하고 기쁨과 희망과 삶의 의미라는 신앙의 가장 심오한 진리들을 사랑으로 선포하며,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면서 말을 건넵니다. 사실 대화는 "내적 정화와 회심으로 이끄는" 영적 자극의 실현으로서, "성령께 대한 순종으로 이런 것을 추구하면 영적으로 유익할 것입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56항). 진지하고 정중한 대화를 위한 노력은 하느님의 구원의 사랑을 참되게 증언하는 데에 결코 없어서는 아니 될 조건입니다.
대화는 기꺼이 용서하는 마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남들과 조화를 이루어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용서의 행위는 마음을 두드려 열어 주며, 죄와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참된 친교를 이루어 주기 때문입니다.
6. 전교 주일의 거행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요구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음을 요구하며,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신뢰를 두도록 촉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6).
해마다 거행되는 전교 주일에 우리는 선교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그리스도왕 대축일 감사송)인 하느님 나라를 온 세상에 세우기 위하여 일하는 교회의 활동에 모든 방법으로 협력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온전히 따르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증언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며, 신앙을 숨기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욱 널리 구원을 선포하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실제로 언제나 당신 제자들 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교 주일은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소명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 주며, 세상 모든 곳의 선교사들을 통하여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마태 25,40 참조)에게 다가가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 이것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도 말씀의 빵을 나누어주고 구세주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사랑의 선물을 전달해 줄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면서 언제나 교회의 선교를 위하여 일해 온 교황청 전교회의 임무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러한 복음 선포 노력과 교회의 모든 복음화 활동을 선교의 모후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맡겨 드립시다. 인류를 용서하시고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선포하고 증언하는 우리의 여정에 성모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마음을 안고 저는 온 세상의 모든 선교사들에게, 또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형제로서 도와 주는 사람들에게, 오랜 전통의 교회와 새로 세워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사도로서 축복을 보내 드리며, 주님의 무한한 보호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바티칸에서, 2002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002년 주교회의 복음화위원장 담화문 -'우리는 선교사'
친애하는 420만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소임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전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하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주적 통치권을 가지시고 온 누리에 선교함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리신 선교 사명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란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세상으로 만들라는 사명을 떠맡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전세계의 구원에 대하여도 책임과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신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또한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사인 것입니다.
선교 공동체인 교회는 우리가 실현해야 할 선교 사명을 위해 교형자매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유합니다.
첫째, 교회 활력의 표지인 선교에 열정을 가지도록 합시다. 교회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열성과 자극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교입니다. 신자 수가 줄고 열성이 식고 냉담자가 늘며 갈등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선교 열정의 감퇴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난 6월에 개최되었던 월드컵 축구대회를 되새겨 보십시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며 온 나라 전체를 신명나고 뜨거운 감동의 소용돌이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잠재된 열정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기적이고 신화였던 것입니다.
둘째, 선교에 있어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는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연대 의식과 친화력은 훨씬 많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교사가 찾아오기 전에 이미 평신도의 자발적인 선교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평신도 여러분들께서도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꾸준히 선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본당의 사제, 수도자와 함께 21세기의 새로운 한국 교회를 위하여 보다 열성적이며 적극적으로 선교에 헌신하도록 합시다.
셋째, 사제·수도자·평신도가 하나가 되어 적극적으로 이웃을 찾아 가도록 합시다. 선교, 이제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선교는 직접 복음을 전달하는 활동이며, 초자연적 신앙의 은혜를 주는 사도직의 수행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함께 하신 활동입니다. 오순절 날 사도들을 파견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 밖으로 파견하시기에,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찾아가 교회 안내용 홍보물을 나누어 주거나 호소력 있는 대화와 만남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립시다. 그리하여 누구나 갖고 있는 종교심을 일깨워 주도록 합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말씀으로 설명되지 않고서는 참된 복음 선교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있는 우리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대담하게 나아갑시다.
넷째, 새로운 의사 소통의 기술인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들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합시다. 지금은 인터넷의 시대입니다. 인터넷은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입니다. 우리 한국의 정보 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좋은 기술을 가진 우리 교형자매님들께서는 이 시대 "하느님의 선물이며, 현대의 첫째가는 아레오파고인 인터넷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도록 합시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홍보주일 담화).
다섯째, 해외 선교사들에게 영적, 물적으로 격려와 후원을 보내도록 합시다. 역동적인 한국 교회는 아시아 교회의 희망이며 미래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아시아 선교를 한국 교회에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사제와 수도자를 파견할 수 있는 '만민 선교'의 교회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좀 도와주십시오."(사도 16,18) 라고 간청하는 민족들을 찾아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열렬히 선교하는 우리의 장한 선교사들에게 영적·물적으로 격려와 후원을 보내도록 합시다.
420만 형제 자매 선교사 여러분!
교회의 핵심적인 소명은 선교입니다. 선교사인 우리 모두는 주님의 얼굴입니다. 힘찬 선교 열정으로 새롭게 깨어납시다.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고 하시는 주님의 이 호소에 응답합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입니다.
2002년 전교의 달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경갑룡 주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전교주일 담화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9[88], 2).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온 교회에 은총의 시간이었던 구원의 대희년을 우리는 충심으로 기뻐하며 경축하였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경험하였듯이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깊은 데로 가도록" 재촉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히브 13,8)이심을 확신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열정적으로 현재를 살며, 신뢰의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봅니다(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1항 참조).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자세는 새 천년기에 모든 교회 활동의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는 희망으로 빛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10월 21일에 거행될 전교주일을 맞아 제가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2. 이제는 정말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미래를 바라볼 때입니다(히브 12,2 참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을 우리 앞에 펼쳐진 미래로 향하게 하고"([새 천년기], 3항)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선포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감사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라.'(시편 89,2)고 촉구하십니다"([새 천년기], 2항). 지난 해 전교주일에 저는 선교에 대한 투신은 예수님을 열렬히 관상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일깨워 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해 온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분의 광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고([축성 생활][Vita consecrata], 14항 참조)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는 일에 투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제자들은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주시하게 됩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없는 사람"(마태 25,40.45 참조)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최초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파자'([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7항)이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도 복음 전파자로 변화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바람을 깨닫게 됩니다(요한 17,2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1 디모 2,4)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신에 대한 아버지의 뜻임을 아시고,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가 4,43)고 말씀하십니다.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없는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비한 방식으로 찾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인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 '그리스인들'은 미래 세대를 대신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님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2,21).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 빛이십니다(요한 1,9 참조). 인류는 자신들도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내적인 힘에 이끌려 하느님을 '더듬어'(사도 17,25) 찾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끌어당기는 그 힘은 보편적 구원에 대한 열망이 고동치는 그곳 하느님의 심장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 힘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증인이자 전달자로 만드십니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성령 강림에서처럼 성령의 불과 당신 사랑, 그리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셨듯이 당신의 현존으로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3. 대희년의 또 다른 성과는 주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태도, 곧 믿음과 바람으로 앞을 내다보는 태도입니다. 명예롭게도 주님께서는 자비를 보여 주시며 우리 안에 당신께 대한 신뢰를 심어 주시고 각자의 직분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1디모 1,12.13 참조). 이러한 부르심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활 신분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러한 열정은 교회 안에 새로운 선교 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선교는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에게 선교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진정한 만남을 가진 사람들은 그분을 자기 안에만 가두어 둘 수 없으며, 그분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새로운 사도적 활동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단체가 기울이는 매일의 노력으로 실천될 것입니다. …… 확신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른과 가족들, 젊은이와 어린이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때 그것의 근본적인 요구들을 감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1고린 9,22) 하고 말한 바오로의 모범을 따라, 각 사람의 요구와 그들의 감수성, 언어 등을 고려하여야 합니다(40항).
선교에 대한 부르심은 특히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특별한 절박성을 띠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만민(ad gentes) 선교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타당성을 지닙니다. 저는 순례 여행 동안 지켜 볼 수 있었던 인류의 모습을 제 마음 깊이 새겨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에 반영된 그리스도의 얼굴이며, '목자 없는 양'(마르 6,34)처럼 사는 사람들 속에 비친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모든 사람은 '여러 가지'(마르 6,34)를 배울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명백한 연약성과 불완전성에 직면하여 사도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인간적 유혹은 사람들을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 각자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신(마태 14,16; 마르 6,37 참조)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주님의 은총을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깊이 새겨진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깨닫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과 또 당신 은총으로 우리에게 해 주실 모든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4. 이러한 상황에서, 만민(ad gentes) 선교와 평생(ad vitam) 선교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아 온 모든 선교사,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어찌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삶 자체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영원토록'(시편 88) 선포합니다. 이 '영원토록'은 흔히 피를 흘릴 지경에까지 이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난 세기에 얼마나 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있었습니까! 하늘 나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들의 아낌없는 자기 봉헌 덕분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들을 기억하며 감사 드립니다. 그들의 모범은 모든 신자에게 자극과 힘이 되어, 자신들이 '수많은 증인들에게 구름처럼 둘러싸여'(히브 12,1)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게 합니다. 그 증인들은 말과 행동으로 모든 대륙에 복음이 울려 퍼지게 하였고 계속해서 울려 퍼지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사도 4,20 참조). 우리는 성령의 활동과 하느님의 은총이 나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2고린 12; 1고린 1 참조).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믿음을 얻고, 대신에 신비의 선포자이자 증인이 되도록 촉구받고 있습니다.
5. 선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선물, 그리고 각 사람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며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는 선물' 곧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요한 3,16)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의 계시의 선물에 대한 기쁜 선포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만민에 대한 선교 활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은 만민 선교의 일차적 임무입니다?([새천년기], 56항). 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초대이며, 즉각적이고 아낌없는 대답을 요구하는 절박한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출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천사가 알려준 첫 소식에 이끌린 목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본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지체없이 출발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우리는 세상의 길을 걸으며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여야 합니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다락방에서 당신을 만나도록 요청하십니다. "안식일 다음날"(요한 20,19) 저녁 그리스도께서는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을 "불어넣어 주시고" 복음을 선포하는 위대한 모험에 나서게 하셨습니다([새천년기], 58항).
6.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선교는 기도와 구체적인 투신을 요구합니다. 구석 구석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올해는 교황 비오 11세께서 전교 주일을 제정하신 지 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황 비오 11세께서는 교황청 전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하루를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로 정하고 모든 교구와 본당, 가톨릭 기관에서 같은 날에 이를 거행하고 …… 선교 헌금을 권장하도록 하였습니다"(예부성성: 전교 주일 제정, 1926년 4월 14일. 사도좌 관보[AAS] 19(1927), 23항 이하). 그 때부터 전교 주일은 모든 하느님 백성이 선교 명령의 영구한 효력을 기억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선교 활동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며 모든 교구와 본당과 교회 기관과 단체의 일"(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2항)이기 때문입니다. 전교 주일은 또한 "선교가 헌금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덕 활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며, 생명과 재물뿐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81항)는 것을 재확인하는 적절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날은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날입니다. "주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성찬 거행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선교를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과 같은 날입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81항). 75주년을 맞는 이번 전교 주일이 선교 정신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더 많은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성찰하고, 선교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기 위한 적절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7. 2001년 1월 6일에 있었던 대희년 폐막 강론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 강림의 열의와 새로운 열정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덕에 대한 매일의 노력과 기도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태도로 그분에게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분에게서 출발하여야 합니다"(8항).
그러므로,
자비를 얻은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용서하고 용서받은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아픔과 고통을 겪은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열의가 식어가려는 여러분,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은총의 해는 끝이 없습니다.
새 천년기의 교회여,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출발하십시오.
노래하며 나아가십시오!(2001년 주님의 공현 대축일 폐막 미사 참조).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복음화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성령 강림일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뢰로써 성모님께 의지합니다. 또한 그분의 전구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교회 공동체의 사명인 선교 의무를 끈기 있게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축복을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6월 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001년 전교의 달 담화-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 분은 모든 사람이 복음의 말씀으로 참된 삶을 살아가고 마침내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복음적 부르심에 응답하여 우리 신앙 선조들도 가혹한 박해 가운데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말씀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입교를 열심히 권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예전과 같은 종교적 박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는 많은 냉담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하고 있어 교회 내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복음화'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는 급속한 경제성장과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전통적 가치관과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존중하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기보다는 이웃을 경쟁상대로 보며, 이기적인 욕심으로 물질과 재화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점차적으로 만연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간에도 재화에 대한 욕심이 개입되면서 가정이 무너지고 어린이들이 버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같은 시대상황은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이 신자들의 삶 속에 더 깊이 스며들고 또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더욱 널리 선포되어 일상 생활 전체가 복음화될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복음의 빛을 우리 사회에 보다 적극적으로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에 이르는 은총이 세례 받은 신자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웃 형제들에게도 전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적 기쁨을 함께 나누고, 주님의 거룩한 잔치에 다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께서는 자신의 서간문에서 복음 전파의 강한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1디모 2,4),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 하는 것입니다"(1고린 9, 23).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은 신앙의 선물을 받은 모든 사람의 숭고한 의무"(「아시아 교회」제10항) 라고 권고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신자 개인에게는 자신의 신앙 생활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며, 신앙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또한 우리 사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총으로 축복받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고 실천하여 우리의 이웃들을 복음의 길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동포들 더 나아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과거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는 외국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물질적, 정신적으로 커다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보다 훨씬 더 곤란한 처지에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정성어린 기도와 아낌없는 희생으로써 열악한 상황에서 선교활동에 여념이 없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을 드리도록 노력합시다.
이러한 선교열의와 선교활동이 전국 교구와 모든 신자들과 각 단체에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꾸준히 계속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의 씨앗을 심기 위해 애쓰는 만큼, 내일의 우리 후손들이 더욱 풍성한 신앙의 결실을 유산으로 꽃피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우리 신앙 선조들이 우리에게 목숨 바쳐 귀하게 물려준 신앙유산을 열매맺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끝으로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어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2001년 전교의 달에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장 경 갑 룡 주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이번에 제2차 AsIPA(Asian Integral Pastoral Approach-아시아의 통합적인 사목정책) 총회가 있었다. 총회기간 중에 갑자기 아파서 병원신세를 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저렇게 애써 보았지만 몸이 아플 땐 정말 누워 있는 것 밖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고 자고 깨어나 보니 오히려 다른 나라 신부들이 한국 소식을 들려주었다. 아픈 저를 위해 기도해주면서 서로 자기 나라에 오라고 인사하는 신부들을 보면서 문득 우리 집에 오면 무엇을 보여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집에 자기가 살기 편하고 행복하다면 놀러오라고 말할 때 적극적이고 자신만만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냥 인사치레로만 건넬 뿐이다. 아마 우리 신자들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은 이웃에게 성당에 나오라고 하면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성당에 가면 어떤 면에서 좋다고 말하겠는가? 우리 성당이 편하고 행복하다면 우리는 적극적이고 기쁘게 형제 자매들에게 함께 가자고 초대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잘 초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이웃들이 정말 우리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의 생활을 보고서 정말 오고 싶을 정도로, 우리 본당을 소개할 수 있을까? 또 실제로 그런가? 우리의 장점은 무엇인가? 천주교 중에서도 우리 본당만이 지니고 있는 장점은 또 무엇인가?
물론 사람 사는 곳이라 단점들도 많겠다. 그것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 공동체에 있어서, 단점이랄 수 있는 아픔을 얼마나 서로 껴안고 함께 아파하면서 부둥켜주느냐가 사실 장점일 수 있다. 서로 자신의 아픔을 터놓고 이야기해도 뒷소리 듣지 않고, 서로를 아끼고 도와주면서, 실수를 하면 벌보다 용서를 받고, 잘하면 시샘보다는 칭찬을 받으며 또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가 반드시 자신의 아픔에 동참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경험적으로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19-20절)고 하십니다. 내가 언제라도 찾고 싶고, 또 이웃 중 누구를 데려와 함께하고 싶고 오기만 하면 정말 편안하고 행복해서 집에 가기 싫을 정도로 좋은 본당을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가리키며 남의 탓만하고 요구하지만 말고, 우리 각자가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모습을 스스로 희생하면서 만들어 나가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전교 주일 담화
2000/10/22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올 10월 22일에 거행될 연례 전교 주일은 교회의 선교 차원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만민' 선교 활동의 절박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만민'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이며, 모든 교구와 본당, 모든 교회 기관과 단체의 일"(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2항)입니다.
올해의 전교 주일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사랑으로 모든 인류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을 경축하는 은총의 해인 대희년의 빛 안에서 더욱 풍부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탄생 2000년을 되새기는 것은 선교의 기원을 경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최초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강생과 함께 시작된 선교 활동은 교회의 선포와 증언을 통하여 시간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희년은 교회 전체가 성령께 힘입어 새로운 선교 열정으로 일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세례를 받은 모든 분에게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 동시대인들의 요구에 응답하여 겸허한 용기로 복음 선포자가 되어 주시기를 특별히 또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저는 여러 주교님, 신부님, 수도자, 평신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커다란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며 '만민' 선교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교리 교사들과 여러 사목 활동가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시편 126, 6 참조) 모든 사람들의 헌신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고통이 헛되지 않을 것이며, 참으로 다른 사도들의 가슴에 복음의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투신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누룩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대신하여 저는 그분들께 감사 드리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고결한 인내에 대하여 풍성히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말로 격려를 드립니다.
2. 저는 또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을 시작하거나 더욱 확대하였던 다른 많은 분들을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해 나가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자격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 12) 하고 말씀하셨듯이, 파견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그분과 똑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특별한 생활 여건에 따라 협력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은총과 자비의 시간인 이 때에, 저는 특히 온 교회의 힘이 새로운 복음화와 '만민' 선교로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신자도, 어떠한 교회 기관도 만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이 숭고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3항 참조). 그 누구도 자신이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협력할 의무에서 면제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마태 20, 7)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의 적절한 것입니다.
3. 우리는 여기서 특별히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바쳐 피로써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 그 많은 선교사들을 깊은 감동과 애정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교회가 되었던"([제삼천년기], 37항) 20세기에도 이러한 순교자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 끊임없이 현존합니다. 제가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말하였듯이,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순교자들 곧 증인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이는 복음 선포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45항). 바오로가 필립비인들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 29). 바오로는 또한 그의 제자인 디모테오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복음 전파를 위하여 자신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라고(2디모 1, 8 참조) 권합니다. 교회의 모든 사명, 특히 '만민' 선교는 자신이 받은 사명에 충실하여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 곧 "가난과 순명과 봉사의 길,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자기 희생의 길"(선교 교령, 5항)을 인내하며 끝까지 따라가고자 하는 제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기념하는 신앙의 증인들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모범과 격려가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의무로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4. 이 일에서 그리스도인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실 인간의 능력과 선교 활동의 성과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선교 활동을 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아주 흔히 있는 솔직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은 우리를 "새 계약의 일꾼"(2고린 3, 5-6 참조)으로 만드신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신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18-20) 하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교회 안에, 특히 말씀과 성사 속에 영원히 현존하심은 선교의 유효성을 보장해 줍니다. 오늘날 이러한 선교는 자신의 연약함과 나약함 속에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충만한 생명으로 부름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구원의 경험을 자기 형제 자매들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5.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현재 우리가 경축하고 있는 대희년은 앞으로 '만민' 선교에 더욱더 투신하도록 요구합니다. 선교가 시작된 지 2000년이 되었지만,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이 아직 미치지 않은 지역이 지금도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서 오는 부르심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세계에서 들려 오는 복음에 대한 소리 없는 요청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오로가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받은 요청이기도 합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사도 16, 9). 복음화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도움'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초자연적 생명만이 인간 마음 속의 가장 깊은 열망들을 이루어 줄 수 있습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나자렛 예수님을 선포하는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을 닮는 길' 곧 '더욱 인간답게 되는 길'을 열어 줍니다. 이는 고귀한 부르심을 깨닫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 안에서 그 소명을 온전히 이루도록 인류를 이끌어 주는 길입니다"(칙서 [강생의 신비], 2항).
우리는 또한 복음화가 인류에 대한 가치 있는 봉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화는, 모든 인간을 당신께 결합시키시어 불의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연대감으로 충만한 형제 자매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하도록, 인류를 준비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6. 이제 저는 특별히 '만민' 선교를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주교님들과 그들의 협력자인 성직자들, 동시에 남녀 선교 단체들의 활동을 떠올립니다. 선교 지역에서 활동하는 교리 교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교리 교사'라는 단어는 누구보다도 선교지의 교리 교사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 그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날로 번창하고 있는 저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지 못했을 것입니다"(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 교육], 6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교 교령은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민 선교 활동에 크게 공헌한 저 수많은 교리 교사들, 곧 사도 정신에 충만하여 커다란 노고로써 신앙과 교회의 확장을 위하여 독특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도움을 준 남녀 교리 교사들은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선교 교령, 17항). 커다란 노고와 선교 열정으로 일하는 교리 교사들은 여러 가지 임무를 맡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확실히 매우 실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성직자의 부족으로 교리 교사들이 넒은 지역을 책임지면서 소공동체들을 이끌어 가고, 기도와 말씀의 전례를 주관하며, 교리를 설명하고 자선 활동을 계획하는 일이 많습니다.
교리 교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교리 교사 양성, 곧 "더욱 철저한 교리 교육과 교육학 훈련, 지속적인 영성 쇄신과 사도적 쇄신"(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73항)은 더욱더 필요합니다. 그들의 일은 언제나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온 교회가 교리 교사 양성 임무에 더욱 투신하기를 바랍니다. 교리 교사 양성은, 모든 선교 인력의 양성과 마찬가지로, 사목의 우선 과제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력 투자"인 셈입니다. 자신의 일을 위해 잘 준비된 복음선교자와 교사들만이 교회를 건설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밭은 넓고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사실 아무 것도 줄 게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전례에서나 혼자 방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 또 우리의 고통을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봉헌함으로써 선교 활동에 동참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종류의 협력입니다. 수많은 개별 교회에 절대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전교 주일 헌금은 모두 교황청 전교기구의 책임 아래 전세계의 선교 원조에 쓰입니다. 이 기회에 저는 74년 동안 해마다 전교 주일을 준비하고 하느님의 모든 백성에게 선교 의식을 불어넣으며, 어린이에서 어른, 주교에서 신부, 수도자에서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지역 공동체에서 선교사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워 주고 동시에 보편 교회의 요구에도 마음을 열도록 해 준 이 훌륭한 교회 기관에 대하여 깊이 감사 드리고 싶습니다. 교황청 전교기구가 촉진하는 선교 의식 고취와 협력은 하느님 백성에게 선교 활동을 하나의 선물로 제시합니다. 곧, 선교는 자신을 선물로 내어놓는 것이며, 온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영적 물적 재화를 선물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81항 참조).
더욱이 올해의 전교 주일은 세계 선교 대회 거행과 함께 로마에서 특별히 장엄하게 지내게 될 것입니다. 이 대회에는 예수님의 구원 메시지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모든 대륙의 지역 교회들을 대표하여 세계 곳곳에서 교황청 전교기구 회원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아마도 제가 이 중요한 행사를 주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8.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드린 말씀들이 선교 활동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2000년 희년을 경축하면서 "전체 교회는 새로운 선교 상황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빛과 신앙의 즐거움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사도적 열성을 배가하고,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이 높은 이상으로 교육하여야 하겠습니다"(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 86항).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의 힘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도록"(루가 4, 18) 파견되신 예수님의 사명 안에서 그 능력을 드러내시는 성령께서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시어(로마 5, 5 참조) 우리가 주님의 일을 증언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신자들의 어머니이시고 성령께 온전히 순종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예" 하고 대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위대한 '만민' 선교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는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 공동체에 기꺼이 사도좌에서 특별한 축복을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연중 제29주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2,21)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종교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세상에서는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벌면서도 성당에 와서는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현실과 신앙은 별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함정이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우상숭배자로 몰아붙일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백성을 선동하여 사회를 혼란시키려는 파괴분자라고 몰아 붙일 것이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비록 로마와의 전쟁에 져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유다교는 독특하고 단호해서 유다인들은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로마 병정으로 전쟁에 차출되지도 않았고 로마의 신들을 공경하지도 않아도 되는 특별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 대신 로마를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될 뿐 아니라 매국노가 되고,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은 로마의 반동분자요 현실 파괴분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을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18-19)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3가지 종류의 화폐가 있었는데,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사고 파는 데 쓰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에 바치는 돈이고 세 번째 돈이 바로 로마에 세금을 바칠 때 쓰는 로마 돈 데나리온이다. 로마 돈에는 카이사르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 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에 비춰서 쉽게 말한다면, 미국이 우리 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돈을 벌어간 상황에 우리가 미국에서 꾼 돈을 갚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하는 문제고 여기에 갚으라면 매국노고 갚지 말라면 인기는 얻겠지만 사회의 불평불만자, 파괴분자로 몰리게 되는 함정인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달러는 미국으로 보내라고 말씀하신 격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말을 잃고 멍해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정교분리를 말하자는 것도 아니오, 현실을 도피하라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 대한 신앙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실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문제에 지나치게 얽매여 이해관계 속에서 현세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주님께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자.
전교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이미 서울대교구에서 구역 반모임 공동체를 실시한지 2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2000년대 복음화를 향한 소공동체 운동을 시작한지 10년이 가까워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서로 나누어주고 한 마음으로 성찬례를 지내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4-47)고 쓰여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13.14.17)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 어떻게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구역 반모임에서 형제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삶과 지역사회의 현실을 나누지 않고 어떻게 주님의 일을 하고 형제들을 위한 교회의 봉사직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경애하올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를 세상에 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외아들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죗값으로 받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또 그분의 뜻에 따라 인간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우리에게 전해주신 그 말씀대로 당신이 직접 사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그리고 또 계속 우리에게 주님을 알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깨우치게 해주시고 그 말씀을 실현하며 살 힘마저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기로 합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또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구원된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형제 자매들과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께 응답하기로 합시다. 여러분 모두가 2000년대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구역 반모임 소공동체 운동에 교구장님의 뜻에 일치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심으로써 이 민족과 나라의 복음화를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교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오고 또 믿는다고 고백해 온 신앙은 우리에게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보시고 '하느님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진리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경험해 온 세상은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뒤돌아보면 우리에겐 기쁨도 많았지만 슬픔과 괴로움도 많았다. 오늘도 그렇다. 한없이 일해서 돈을 벌고 성공하고 싶지만, 우리의 육체는 쉬어야 한다고 경고 한다. 그리고 술이나 과로로 인해 불성실하게도 된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낭패를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도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우리에게 부정과 부조리를 요구하고 그리고 폭력과 경쟁이 판치는 세상. 이것이 우리가 살아온 세상의 경험이다. 주님의 승천을 보면서도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7)는 것처럼.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진리'와 '경험의 진리'가 충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적대적으로 상반되는 상황에 처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가톨릭 노동 청년회 창설자 조셉 까르덴 추기경님은 "우리는 우리가 사는 어지러운 세상을 주님이 만들어 주신 세상으로 다시 좋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실천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19-20?)
그래서 우리는 먼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만드신 분이 주님이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세상을 주시고자 하셨다는 것과, 주님이 주신 좋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가 전하고 믿는 그 말씀을 실제로 실천하여 이 세상을 복음화 하여야겠다. 주님은 우리의 고민과 꾸준한 노력 속에 함께 하셔서 당신 나라를 만드시고야 말 것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0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