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 어린이 강론

(가해) 마태 4,12-23; 17/01/2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 어린이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어요?

† 오늘은 예수님께서 집을 떠나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날이에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회개’가 무엇입니까?

◎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도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 하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 여러분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세요?

◎ 예, 하늘 나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님을 만나서 더 큰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 그러면, 이제 신부님을 따라 함께 기도합시다.

◎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저희가 예수님의 사랑을 잘 깨닫고/ 감사드리게 해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모든 신자들과/ 한 식구가 되어/ 하늘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 아멘.



연중 제3주일

(가해) 마태 4,12-23; 17/01/22

- 서울대교구 성서사목부 성서못자리 박기석 요한 신부

⑴ 인디언들이 원숭이를 사냥하는 방법 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나무에 파고 설탕 덩어리를 넣습니다. 일단 원숭이가 손을 넣고 덩어리를 움켜쥐면 사냥은 끝입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손에 쥔 설탕을 놓지 않아 결국 잡혀 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 작은 집착과 그 거대한 비극이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된다는 것, 그래서 인지 쩔쩔매는 원숭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때때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모습으로 비춰지게 됩니다.

⑵ 이제껏 짧은 생을 살아왔고 착각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이 보다 더 긴 시간을 살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미련과 후회가 더 많았던 시간을 살아온 어르신네들의 지혜는 거듭 말합니다. “놓아야 할 땐 놓고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한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하느님이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말씀이 “떠나라.” 였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1).

고향과 친척과 부모를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한 곳에 정착해서 땅도 마련하고 집도 지어 안정된 문명사회의 달콤함을 맛보며 살던 유목민이 다시 거칠고 위험한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나이는 이미 칠십 오 세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늙은 나이에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정말 큰 모험이지요.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확고한 신뢰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즉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친근한 것을 떠나서 미지의 것으로 향하는 데 따르는 두려움과 염려를 접어 두고 하느님만을 믿고 길을 떠납니다.

⑶ 예수님도 당신 제자들에게 갖고 있는 것은 물론 부모와 가족들조차도 버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연중 제3주일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눔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 중략 …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도앵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다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배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그렇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제일 먼저 보여준 모습은 ‘버리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던 삶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챗바퀴 돌 듯 지루한 일상의 삶을 탈출하기 위해서 어부였던 그들이 자신의 생존수단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편안하고 성공이 보장된 미래지향적인 설득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아주 간단하게, 세례자 요한이 잡히자 예수께서 “회개와 하늘 나라의 가까이 왔음”을 외치며 전도를 시작하셨다는 것만을 밝힐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게 했겠습니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 입니다. ‘회개’란 정신계계의 변화, 즉 모든 실재와 상황에 대한 가치 평가 기준의 180도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늘 나라는 이 전환된 가치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⑷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신앙인이 되려면 아브라함처럼,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처럼 가족과 친지와 고향을 버리고 삶의 생존수단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떠나야한다는 그분의 명령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버리고 떠나라”는 말씀은 공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친근한 것에만 붙어 있지 말고 미지의 것으로 향해라’,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라’, ‘편견을 버려라’, ‘아집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의 편견과 아집에 사로 잡혀서 헤매는지 모릅니다. 누군가와의, 아니 늘 가까이 있는 이와의 해묵은 감정이 삶의 오장육부를 파고들어 서서히 부패시키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은 흐르면서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는 이상(李箱)의 수필 ‘권태’의 한 구절은 떠나지 못하는 자가 빚을 수밖에 없는 내면의 풍경을 스케치 하는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제한된 소견,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과 인간을 보게 되어서 마음에 안 들고 미운 것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과감히 눈을 돌려보려는 시도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 준다는 것입니다. 비록 낯익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에서 벗어나는 일이 어려운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⑸ 삶의 질이 소유에 의해서 결정되고 얼마나 소비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등급이 판가름 나는 것이 요즘 세상입니다. <소유와 소비>가 예수님의 넉넉한 사랑을 대신할 만큼 오만한 세상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 “그물과 배”를 버리고 “회개”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회개는 끊임없이 자신의 편견과 아집에서, 자신과 친근한 것에서 벗어나고 떠나는 것입니다. 고정된 시각을 바꾸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은 바로 “놓아야 할 땐 놓고 떠나야 할 땐 떠나야 한다.”는 바로 그 말일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못 낚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운명을 넘볼 수 있겠습니까 ?

⑹ 성서못자리-간단하게 설명 후 강론 마무리 !



연중 제3주일

(다해) 루카 1,1-4; 4,14-21; 16/01/24

인디언 추장 시애틀은 언젠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를 도와주러 오는 것이 여러분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면 우리와 함께하지만,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면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가끔 어려운 이들을 도와줄 기회가 생기지만, 사실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도움을 주면서 우리 마음 속엔 뿌듯함과 기쁨과 보람이 샘솟습니다. 거기다 상대가 감사해 준다면 하나 더 얻는 것이겠지요. 어떤 때는 마치 내 죄 하나를 상쇄 받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 도움을 받을 경우엔 마음이 아주 부담스럽긴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어 다행스럽고, 도움을 받음으로써 형제를 얻을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 도움은 주고 받는 것이기도 하며, 그러기에 나누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계가 형성되며, 신의를 갖게 됩니다. 업무관계가 아닌 인간 서로간에 신뢰가 형성되면 그 안에 사랑이 근거하고 그렇게 발생한 사랑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스위스 출신의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이를 가리켜 ‘인간관계 안에 발생하는 하느님’이라는 명제를 내세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통해 드러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유다인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를 펼치시어, 61장 1-2절에 쓰여진 예언을 주님의 소명 삼아 선언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지난 금요일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과 미사를 드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레지오 활동 잘 하고 계신지요? 어떤 때는 가끔 활동 나가는 단원들끼리 마음이 모아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단장과 뜻을 같이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 활동 말고 저 활동을 하면 어떨까? 이 사람 말고 저 사람하고 활동 나가면 어떨까? 마음속에서 이기적인 유혹거리가 스멀스멀 샘솟기 시작할 때 인가 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식이 잘 생겨서, 일등이라 예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식이기 때문에 예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는 레지오를 그리고 내 마음에 드는 쁘레시디움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의 성향과 우리의 지향을 펼치도록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그저 ‘레지오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단원들과 단장이 어쩌면 우리가 갈아치워야 할 훼방꾼이나 방해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잘 적절하고 맞는 사람으로 선발하여 우리에게 보내주신 선물로 여기고 받아들여 함께함이 우리의 숙제이고 우리에게 내려주신 주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교황님은 ‘단점 없는 사람이 없고, 죄 없는 성인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은 상업활동이 아니기에 업적이나 실적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표면상으로는 예비신자 관면과 환자방문이나 봉사활동이라는 활동내역이 있지만, 그것은 매개일 뿐 우리의 활동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활동을 나가면서 단장이나 같이 활동하러 나가는 동료 단원들과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부서진 사랑은 우리 대상자들에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활동은 실패가 됩니다. 사랑 없이 맺어진 활동의 결과는 결과적으로 좋은 열매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형제들과 하나되어 사랑을 나누는 좋은 결실을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나 이 부류만 없으면, 저 사람이나 저 부류만 없으면 이룰 수 있는 것 같고, ‘일이 되게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일은 되도록 해야 할 거 아니냐?’ 라고 볼멘 목소리로 외치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의 일은 대상으로서의 그 어느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일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것을 해 나가는 과정에 발생하는 사랑의 관계형성과 그 관계형성 안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고 체험하는 것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라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서로 서로가 사랑하여, 주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고, 주님 사랑 안에서 우리 사랑의 결실을 이룹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연중 제3주일 제23회 해외 원조 주일 담화


지구촌 모든 이에게 한 줄기 빛을!

(나해) 마르 1,14-20; 15/01/2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국 천주교회는 지구촌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따스한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해외원조 사업을 시행한 지 23년을 맞이합니다.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리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주고 가셨습니다. 교황께서는 방한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열린 기내 기자회견에서 “인간의 고통을 마주하게 되면 언제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인간의 고통에 관해서는 중립적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라는 명령을 이행할 수 있습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93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마태 5,7). 이와 같은 전망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국제 구호 기구인 국제 카리타스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협하는 지구촌 기아 퇴치를 위해서 온 힘을 모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지금 이 세상에도 극심한 빈곤과 기아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굶주리고 있으며, 극심한 빈곤과 기아의 구조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기아란 충분한 식량을 얻지 못해 건강하고 활동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성적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는 8억 4,200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8명 중 1명은 건강을 지키기 위한 충분한 식량 섭취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전체 기아 인구의 98%가 개발 도상국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은 12억 명에 달하며, 이들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유엔 새천년개발목표 보고서 2014~2015」참조).

또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에서 발행하는 ‘기아 지도’를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영양실조 인구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며 눈여겨보아야 할 곳이 바로 중동 지역입니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시리아 분쟁으로 인한 식량 불안정성이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기아 인구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분쟁으로 인해 전 세계의 난민, 난민지위신청자 그리고 실향민 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5천만 명을 넘었습니다. 이런 절대 빈곤층의 대부분이 어린이와 여성이며, 분쟁 지역과 농촌 지역 공동체가 기아의 최전방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첫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와 다름이 없다.”고 하시며 돈에 대한 우상 숭배를 강도 높게 비판하셨습니다. 전 세계에는 모든 인구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세계 곳곳이 식량 위기를 겪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식량을 공정하게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식량 위기는 분배의 문제, 곧 정의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 카리타스는 기아를 없애려고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선,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와 재난 상황에서 식량 구호를 실시합니다. 그리고 구조적인 빈곤을 퇴치하려고 중장기적인 식량 안정화 사업과 농업 개발 사업을 수행합니다. 또한 전 세계 20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는 164개 카리타스 회원 기구들과 연대하여 기아를 극복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한국의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과 만나신 자리에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간 증진이라는 분야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시도록 격려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인류 가족으로서 공동선을 위한 연대와 인간의 존엄성이 환히 빛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신 사랑과 나눔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이가 결핍과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드립니다.

2015년 1월 25일 해외 원조 주일에

한국 카리타스 인터내셔널

이사장 김 운 회 주교



연중 제3주일

(가해) 마태 4,12-23; 14/01/26

안녕하십니까? 지난 12월 31일 송년미사를 드리고 새해를 맞이한 지 벌써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송년미사 때 혹시 주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새해에는 혹시 어려운 이들에게 희사하거나 봉사활동이라도 하겠다는 다짐을 봉헌하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제22회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인류는 한 가족, 모든 이에게 양식을’이라는 주제로 국제 카리타스의 지구촌 기아 퇴치 캠페인의 개막을 선포하셨습니다. 교황님은 “164개 회원 기구의 연합회인 국제 카리타스가 전 세계 200여 개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국제 카리타스의 활동은 교회 사명의 본질을 이룬다.” 라고 하셨습니다. “국제 카리타스는 예수님께서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기아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를 향한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라고 강조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오늘날에도 10억 명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라고 오늘의 상황을 지적하시며, “이러한 부끄러운 현실을 모르는 척하거나 기아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 듯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라고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교황님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빵과 물고기의 기적(마태 14,14-2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설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군중이 굶주리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고 하셨고, 제자들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고 나서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것을 모두 모았습니다.”

교황님은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식량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우리에게 명확히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곧, 뜻이 있다면 우리가 가진 것은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충분히 가지고 있고 이를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라고 강조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충분한 식량을 가질 권리를 주셨다는 이 긴급한 요청에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주십시오. 우리는 기본적인 욕구와 필요를 해결하는 데도 수많은 장벽을 넘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나누기로 합시다. 동시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활동의 열매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존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협력합시다.

저는 한 인류 가족으로서,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이들의 침묵의 목소리를 대신함으로써, 이 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식량과 자원을 낭비하거나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더 신중해집시다. 이 캠페인을 통해 우리의 모든 행동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저는 여러분들께 ‘한 인류 가족’으로서 ‘모든 이와 양식을’ 나누기 위한 카리타스의 캠페인에 동참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청합니다.

누구도 기아로 죽어가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우리 주님께 은총을 청하며, 여러분에게 강복합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호소에 동참하여,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김운회 주교님은 “한국 카리타스는 지난 20년간의 해외원조 활동에 이어, 2014년 해외 원조 주일을 기점으로 향후 10년간 더 이상 기아로 죽어가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힘쓰자.” 고 권유하십니다.

‘기아’란 비단 충분한 식량을 얻지 못하는 상태뿐만 아니라,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영양소의 부족도 기아라고 강조합니다. 필수 영양소가 부족하면 면역력이 저하되어 전염병에 걸리기 쉽고, 신체적, 정신적 발전을 저해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지금 현재 전세계에서는 8억 4200만 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이는 곧, 8명중 1명이 굶주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중 98%가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고, 3/4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농촌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전체 인구의 15%가 심각한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고,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어린이 3명중 1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으며, 6명중 1명이 저체중이며, 4명중 1명이 발육부진 상태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어린이 3명 중 1명이 적절한 주거지가 없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기아 현상이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전세계의 식량 생산량은 지난 4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하여, 전세계 인구가 충분히 먹고도 남습니다. 300원이면 1명의 어린이에게 하루치 식량을 제공할 수 있다고들 하는데도, 굶주리는 이들이 생기는 이유는 식량을 공정하게 나누지 못하는 이른바 분배의 문제 곧 정의의 문제입니다.

한국 카리타스는 교황님의 지구촌 기아 퇴치 캠페인 “인류는 한 가족, 모든 이에게 양식을!”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첫째, 식량을 아끼고 낭비하지 맙시다.

매년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1/3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매주 식단표를 작성하고, 정기적으로 저장해 놓은 음식물을 확인하고,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저장된 음식을 섭취하며, 장을 볼 때 항상 미리 작성한 목록을 가지고 갑시다.

둘째, 일주일에 하루는 금육을 합시다.

소고기 1Kg을 만드는데 평균 15,000리터의 물이 들어갑니다. 고기를 덜 먹으면, 에너지도 절약되므로, 매주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말고, 기우변화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셋째, 공정무역 제품을 사용합시다.

공정무역은 개발도상국의 소외된 생산자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생산지의 생태계를 보호하며, 생산 노동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넷째, 종이 낭비를 줄입시다.

종이 낭비를 줄이면 나무를 심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숲을 보호하고,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습니다. 휴지 대신에 손수건을 사용하고, 인쇄하기 전에 꼭 필요한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이면지를 사용합시다. 종이 우편물을 이메일로 변경하고, 종이컵을 사용하지 맙시다.

다섯째, 변화를 위해 참여합시다.

이 세상의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기부해 주십시오.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봉사활동에 참여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나눠주는 시간이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이들과 양식을 나누기 위한 카리타스 기아 퇴치 캠페인에 함께해 주십시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연중 제3주일

(다해) 루카 1,1-4; 4,14-21: 2013/01/27

우리 상섬동 성가정 성당에 신학생이 생겼습니다. 지난 17일 서울대신학교 신입생 발표에 우리 본당 류호영 안토니오 예비 신학생이 합격하여 서울대교구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귀한 아들을 봉헌해 주신 부모님과 받아주신 교구장님과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류호영 안토니오 신학생과 본당의 모든 예비 신학생 및 성소자들을 위해 특별히 더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21일 월요일 쉬는 날을 틈타 새 신학생과 함께 배론 성지에 누워계신 최양업 신부님 묘소에 가서 문안을 드렸습니다. 배론 입구에서 식사를 하면서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땅에 떨어지는 눈 중에 맨 흙에 떨어지는 눈은 쌓이고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땅에 떨어지는 눈은 쌓이지 못하고 녹아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눈은 대지에 포근히 안기고,

어느 눈은 시멘트 바닥에서 녹아나는구나!

맨 흙은 어머니와 같은 푸근함으로 우리를 감싸고,

시멘트는 엄격한 잣대로 우리를 재는구나!

나는 받아들여지는가?

나는 누구에게 받아들여지는가?

나는 왜 받아들여지는가?

그러는 나는 또 받아들이는가?

나는 누구를 받아들이는가?

나는 무엇을 받아들이는가?

나는 왜 받아들이는가?

지금까지 저를 받아주셨던 주님과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받아주시고 살게 해주신 주님과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받아주시고 살게 해주시고 활동하게 해주셨던 주님과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받아주시고 살게 해주시고 활동하게 해주시고 함께해주셨던 주님과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제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쳤던 모든 분들께 용서를 청합니다.

주님, 제 죄를 사해주시고, 제가 내쳤던 모든 분들을 몸소 어루만져 주소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겨 대속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목숨을 내주셨듯이, 사제가 예수님의 뒤를 이어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미사 성제를 봉헌하고, 고해성사에서 죄를 들으며, 사제가 신자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주는 대속자의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그래서 사제를 연상할 때 주님의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모습과 고해소에서 신자들의 죄를 듣고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초췌한 모습으로 고백소를 나오는 모습이 대표적인 사제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5)처럼!

그런데 오늘날 교회, 특별히 평신도들은 사제에게서 대속자와 희생제사를 봉헌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모습보다는, 사제를 친교의 촉진자 모습으로 바라보고 기대합니다. 희생제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의 죄를 사해주는 모습보다는 사회도 잘 보고, 신자들을 즐겁고 편하고 재미있게 해주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강론을 해도 복음을 에누리 없이 해설하며 청취자들이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복음에 맞춰 삶을 재설계하도록 하기 보다는 웃기고 재미있게 해주기를, 강의를 해도 슬프거나 어렵거나 부담스러운 이야기보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단체지도도 어떻게 하면 주님을 따르는 것인가를 목표로 하여 인도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신자들이 성당에 재미있고, 즐거우며, 기쁘게 나올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더 신경을 기울여주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이 한 쪽은 맞고 다른 쪽을 틀린 것이라던가, 사제직이나 신자생활에 대한 왜곡이나 곡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점차 사제직과 교회 생활에 대한 강조점이 그리스도의 삼중 사제직인 성화 사제직과 복음선포 예언직에서 사도생활 왕직 수행으로 변화되고 있는 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사제나 신자 할 것 없이 우리 교회가 지금 십자가 없는 영광을, 고통 없는 영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고 의문을 자아내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유다 회당에 들어가셔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준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부터 호감을 사고 있는지 자문하게 해줍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는 주님과 주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마음으로부터 실제 삶의 전반에 걸쳐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어느 한 쪽이 아닌 가난한 이들이 영으로 풍요로워짐으로써 물질적으로 가난하면서도 주님과 형제들과의 사랑으로 행복할 수 있고, 부요한 이들이 영으로 풍요로워짐으로써 자신이 가진 물질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해방되고 형제들과 나누고 공유함으로써 자유로워지도록 하며,

이민족과 다른 이의 힘으로 타의에 의해 또 물질과 권력과 명예 때문에 자의로 사로잡힌 이들을 주님의 힘으로 해방시키고, 이들을 사로잡은 이들이 자신의 힘이 하늘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협조자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자신의 힘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며,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하는 이는 더 가지려고 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또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가졌다고 보이는 이를 비난하고 미워하면서도 자기도 어떻게든 가져야겠다는 소유와 지배라는 탐욕과 이해관계에 눈이 멀어 인간이 걸어갈 길과 거룩하게 되는 길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진리와 선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주님 안에서 찾아 이루도록 하고,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과 처지를 개혁하고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현 사회에서 인간에게 불합리하고 부정한 체계들을 나약하고 부족한 한 인간 개인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악의 억압 상황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하도록 하기 위해

사목하면서, 주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루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고 있는가 자문하고 되새기게 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12.27) 우리는 사제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너 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교회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 거룩한 신자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이룹니다. 주님과의 친교와 아울러 형제들과의 친교도 이룹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와서 잘 알고 있다시피 형제들과의 친교는 자신의 형편이 좋을 때 좋은 사람들끼리만 친교를 누리고, 자신보다 많이 가지고 있고, 자신보다 위에 있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하고만 친교를 누리고자 한다면 그곳엔 우정보다 굴종과 아부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좋을 때 축하하는 것보다 어려울 때 함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친구가 됩시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1코린 12,24-25)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께 더 많은 것을 자신에게 내려주시기를 청하기 보다는 가지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위해 청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눕시다.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자신의 축복을 나눕시다. 주님의 은총으로 해방되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도 잡혀있는 이들과 억압당하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함께합시다.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친교는 유지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우리 교회는 내적으로 분열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몸)은 또 다시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할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26) 우리 서로가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아픔과 고통을 나누며 함께할 때 대속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악에서 해방되었고, 자유스러워졌으며 구원되었다고 믿는 신자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과 함께하며 그분들의 해방과 자유와 구원을 위해, 오늘 미사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은 대로 다시 이루며 우리와 우리가 머무는 가정과 동네와 일터에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9)합시다.



(루카 12,35-40); 12/01/23

새해 첫 날 잘 맞으셨습니까? 예전에는 그뭄 밤에 처녀가 부엌에서 부엌신을 불러 새해에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 보고 거리고 나섰다는데 여러분 어제 희망의 내일을 건설하셨습니까? 또 어떤 민속 풍습에서는 그뭄 밤에 잠자면 눈썹이 휘게 된다고 해서, 잠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목탁 소리가 울린 다음에서야 잠에 들었다고도 하는데, 여러분 중에 눈썹 희게 변하신 분은 없으신가요? 한 해를 보내기가 그렇게도 못내 아쉬워 잠을 미뤄가며 하루를 연장하고자 했던 선인들과 새해를 시작하며 새로운 길을 갈구했던 선인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어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자칫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우리의 이중적인 신앙행태에 대해 성찰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민속명절인 새해를 맞아 언제 어떤 처지에 처하더라도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꾸준하고 굳건히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새롭게 변화될 모습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세상 일에만 빠져 있더라도, ‘하늘에 계신’을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세상 일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은총으로.

나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더라도, ‘우리’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은총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 딸로서 살지 않을지라도, ‘아버지’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아버지의 아들 딸로 살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은총으로.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 힘을 쓴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름도 거룩히 빛나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더라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물질만능주의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내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한다손 치더라도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누군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더라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누군가에 품은 앙심이 용서와 사랑으로 서서히 변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죄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더라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죄지을 기회를 서서히 피하게 될 것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을지라도, ‘악에서 구하소서’를 계속 기도하다 보면, 악을 물리치고 선을 행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서서히 듣게 될 것입니다. 양심을 통해 소리치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을지라도, ‘아멘’을 계속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주님의 기도가 진정 나의 기도가 되어갈 것입니다. "아멘"을 통해 새롭게 하시는 아버지의 은총으로.”

어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기도를 바치는 우리 자신보다는 자신의 뜻을 후원해 주시고 채워 주시기만을 바라며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 자신에 대해 다소 우울한 성찰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비록 우리가 이기적이고 물질적이라고 하더라도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변화된다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올 한 해 진정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복 많이 만들어 형제들과 나누면서, 주님께서 원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주님의 나라 건설을 소명으로 삼아 굳건히 노력합시다.



연중 제3주일

(나해) 마르 1,14-20; 12/01/22

오늘은 내일 명절과 연결하여 주님의 기도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을 그리고 내일 명절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새로워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한 때 인터넷에서 신앙인의 2중적인 태도에 대해 뜨겁게 달구었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태도와 자세에 대해 자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뒤를 따라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

오늘 우리가 살펴본 ‘주님의 기도’의 성찰은 우리가 주님의 사도가 되어 우리가 머물고 활동하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실천하면서 사는지, 아니면, 우리가 하고 싶고 얻고 싶고 차지하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기도하면서 사는지, 또는 아예 기도는 하지도 않으면서 주님께서 자기 이상과 이득만 채우도록 후원해 주시기를 청하며 사는지 자문하게 해 줍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연중 제3주일

(나해) 마르 1,14-20; 06/01/22

요즘 한국 신부님들은 아이들에게 세뱃돈으로 도토리를 나눠 준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도토리로 묵을 쑬 것도 아니어서 웬 도토리냐고 하겠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이 도토리는 인기랍니다. 도토리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꾸밀 수 있는 e-money 즉 가상 화폐 같은 것인데, 아이들은 그것으로 홈페이지를 꾸미기도 하고 노래도 듣고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 청소년들은 그냥 먹으면 사라져버리는 과자보다 자신들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도토리를 더 받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요즘 아이들은 “가는 말이 거칠어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한답니다. 게다가 “고생 끝에 골병든다.” “아는 길도 물어 가면 시간 낭비다.” 라는 말을 쉽게 한답니다.

요즘 아이들이 우리보다 사회를 정확히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 느끼고 경험한 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무튼 나와 내 식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죽어라 일해왔습니다. 아무도 이렇다하게 도와주지 않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부지런히 그리고 악착같이 일해왔습니다.

일하면서 어떤 때는 그야말로 줄 것도 제대로 안주면서, 가진 것마저 빼앗으려는 사람들도 만났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일하면 칭찬해 주고 월급을 올려주고 고마워하기는커녕, 나를 더 가멸차게 부려먹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나의 인격과 내 삶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만 알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버림도 받았으며,

필요할 땐 찾다가 필요 없을 땐 차버리는 야비한 세상사를 겪었고,

겸손하고 인간적으로 대하면, 깔보고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 틈새에서 복수하고 싶은 악한 마음마저 들었으며,

상대를 배려해주고 인정해주면, 내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서 져주는 줄로만 알고 자기 권리와 자기주장만 내세우면서 속 썩이는 사람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자니 남과 악착같이 싸워서 이기거나 남을 밟고 올라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과도 같은 세상에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또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고 또 남에게 밟히지 않으려고 갖은 수를 다 썼으며 때로는 나 자신도 남을 밟기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사고나 일들이 생기거나, 우리가 하는 일이 원하는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주님마저도 원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5)

그나마 죄인인 우리에게 회개라도 하면 살려주시겠다니 회개는 하겠는데, 회개하고 나서 새로 살 일이 캄캄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회개하고 나면 세상에서 내가 밥이 될텐데 하는 근심이 나의 현실을 떠나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

복음서에는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배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8)고 쓰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나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리고 내가 세상을 살기위해서는 얼마나 비굴하고 야비해지거나 최소한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 매일 긴장과 경계와 의심 속에서 살아오고 있는데, 나를 당신의 제자로 쓰시겠다니 사람을 잘못 골라도 유분수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르신다면 통사정이라도 하겠는데, 나를 태어날 때부터 샅샅이 다 아시면서도 나를 당신의 제자로 쓰시겠다니...! 간다고 할 수도 없고 안 간다고 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정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복음서를 봅시다.

예수님도 기적을 베풀어 빵을 배불리 먹이고, 병자들을 고쳐줄 때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건 손자건 관계하지 않고

그저 빵만 얻어먹으면 된다는 심산으로 여기저기서 마구 몰려들더니,

더 이상 기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이지도 않고,

병을 고쳐주지도 않으면서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니 내 말을 들으라고 했더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리는 인간들의 심사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애초에 인간들의 속성을 다 아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워낙 지엄하고 명확해서 순명하시느라고 그런 것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용서해주시며 오히려 당신 생명마저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시기에 부활하셨고, 마침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부활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사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믿고 회개하여 새로 나야만 한다고

그리고 나서 주님을 따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함께 일하자고 하십니다.

죽인다고 죽어주고

죽여도 사해주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신 그 분께서

오늘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니

우리가 거절할 수는 없어도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 자신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지라

기쁘게 흔쾌히 응답하지 못함은 당연할 정도입니다.

주님께서도 아마 이런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지라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언제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키우고 만들겠다고 했지, 지금 당장 사람들을 낚아오라고 했니?’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청합니다.

“주님, 저희 죄를 씻어주시고, 저희를 이끄시고 도우시어 당신의 도구로 만들어주소서!

저희는 부족한 인간이오나, 주님께서 저희를 구하시고 변화시켜 쓰시겠다니 그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뿐이옵니다.”



연중 제3주일

(가해)마태 4, 12-23 (17); 01/23/05

어떤 사람들은 성서를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서는 2,000년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실에 잘 맞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성서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 말씀을 감상만 할 뿐이지 실생활에 적용하기에게는 맞지 않고, 하느님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데 필요할 뿐이고, 우리는 단지 감탄만 할 뿐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 나가는데 하나의 기준을 마련해 준다고 한다. 성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착하게 살라고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 좋은 책이라고도 한다. 그러기에 성서는 윤리책이거나 교훈집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성서는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함께하신 하느님의 말씀과 움직이심을 적은 책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해 오셨는가를 쓴 책이다. 그래서 성서를 이스라엘의 역사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성서는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아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면서 그리고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거나 전쟁에 져서 귀양을 갔다거나 등의 민족적인 큰 문제가 생겼을 때마다, 자신들이 현재 처한 상황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되돌아본 ‘반성의 역사’다. 그러니까 성서는 비단 몇 년 몇 월 며칠 어느 왕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그 때 그 일이 왜 일어났으며, 그 일이 일어났을 때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고 이스라엘을 구하셨는지를 기록한 책이다.

그리고 서기 2005년, 그러니까 예수 탄생 2005년이 되는 오늘에서 계산해 보면, 성서는 신약성서만 해도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활동 상황은 지금부터 2000여 년 전의 일이 맞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오늘 2000여 년 전의 이야기를 읽는가? 그것은 성서가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전해주는 위인전이나 윤리적 가르침을 전해 주는 교훈집이 아니라, 사람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2000년 전의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셨고 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려줌으로써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를 읽은 이들이 성서의 말씀을 비단 옛날이야기나 앞으로 역사의 종말에 무엇이 어떻게 발생하겠는가를 알리기 위해서라든가 또는 성서는 이렇게 말하는 데 왜 당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가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근거로 사용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성서는 오늘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이 읽는 성서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지금 자신의 삶 안에서 다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그 성서의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그 말씀을 되새기며,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성서의 말씀이 뜻하고 가리키는 바를 실현하고자 할 때 그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진다.

성서를 읽으면서 자기가 읽는 성서의 말씀이 과거 2000여 년 전의 주인공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께서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여기고 받아들일 때 성서의 말씀은 그 말씀을 읽고 믿는 이의 마음속에서 살아난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살아 있고 힘이 있기”(히브 4,12)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주님께서 성서를 읽으시고 나서 그들에게 “오늘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성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힘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틀림이 없다. 내 말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만다.”(이사 45,23)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이사 55,11)

오늘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17)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23)

그러므로 주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주님의 말씀은 진정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가 그 말씀의 의미와 내용을 통해 오늘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지를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이 살아 숨쉬며, 마침내는 우리가 그 말씀을 적용하며 살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가 그 말씀을 실현하게 하심으로써, 주님 몸소 주님 말씀을 이루실 것이다.

진정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고, 우리가 복음에서 제시해 주는 그 길을 걸어 나갈 때 우리는 그 말씀에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우리가 씹고 또 씹고 되씹어서, 우리 삶의 맛있고 영양가 있는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힘으로 살아나갈 때, 우리는 우리가 처해있는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불신과 갈등, 불확실성과 불안 속에서 벗어나고 치유되어 진리의 하늘 나라를 찾아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여러분 안에 살아 있기를 빕니다.”(골로 3,16)



연중 제3주일

(다해) 루가 1, 1-4; 4, 14-21; 2004/01/25

예수님께서는 오늘 유다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을 주님의 사명 삼아 선포해주셨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의 성령은 왜 예수님을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셨을까? 부자들에게 보내서 부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면 부자들이 많은 돈을 내 놓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할 수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기회를 제공하거나 특혜를 베풀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가시지 않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신다.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고 소박해 보인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저 오늘 하루 먹고살고 자기 가족이 별일 없이 단란하게 하루를 마치기를 바란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어서 빨리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지 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정직하게 열심히 일할 뿐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이나 일하기 싫어하고 꾀를 부리는 사람들만이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가기 위해 꾀를 부리고 범죄를 저지른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저 그날 하루를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더 주님을 기다린다. 주님께서 자기를 건강하게 해 주셔야만 자기가 일하면서 살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생각해주지 않고 돌봐주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주님만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부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인다. 자기 재산을 유지하고 증식하기 위해 많은 신경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자기 돈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돈 때문에 다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 말고도 자신들을 기쁘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얼핏 보면, 예수님 보다 자기 재산과 그 재산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헛것과 허상의 것들에게서 위안을 느끼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더 외롭고 깊은 공허감 속에서 방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된 것인양 기뻐하고 감사드리지만,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이 불안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돈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데 혹시나 주님께서 자기의 것을 내놓으라고 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듯하다. 어떤 사람은 가난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성서 자체가 읽기 부담스러워 하는 것도 본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비참한 사람이다. 현세에서 자기가 의지하고 믿는 것이 결국은 다 없어지고 사라져 버리게 되거나 아니면, 자기가 먼저 그것들을 다 두고 외롭고 쓸쓸하게 죽음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고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서 도우실 수밖에 없는 것이고, 주님에게서만 희망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가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우리가 재산을 가졌다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눈다. 그리고 재산을 많이 가지지 못했다면 우리의 삶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어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전하고 주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사도들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자면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는"(골로 1, 24) 주님의 제자들이 걷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도 예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이웃과 함께 우리를 나누는 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시고 나누어 주셨기에 우리가 구원되었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나누는 것의 몇 십 배 몇 백 배로 주님께로부터 되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또 바라기에 주저없이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알기에 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증거해야만 우리가 함께 다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예수님의 오른팔로서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가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의 구조와 굴레 속에 갇히고 묶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사랑의 포로가 되어 세상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의 이득에 눈멀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눈 뜬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회의 자리와 권력과 재물에 눌려 지치고 힘들게 하루 하루를 마치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꺼이 일하며 살아가는 자유인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채움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서 이루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까?

주님 은총의 해가 올 한 해 여러분의 삶을 뒤덮길 바랍니다. 아멘.



연중 제3주일-주교회의 사회복지주일 담화문-사랑의 세계화를 만들어 갑시다

2003/01/26

1. 금년은 한국 천주교회가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해외원조를 하여온 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주교회의 1992년 추계 정기총회는 오랫동안 외국 교회의 원조를 받아온 한국 교회가 '원조하는 교회'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매년 1월 마지막 주일인 사회복지주일의 전국 헌금으로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공식적인 해외원조 업무와 활동을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동안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사회복지주일 전국 헌금과 세계 기아민 돕기를 위한 개인 및 단체들의 자발적 헌금으로 전세계 70여 개 나라의 330개 긴급구호 및 개발 사업에 약 100억 원을 지원하였습니다.

2.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끊임없는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수십억의 인구가 굶주리거나 만성적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세계화는 경쟁력이 없거나 뒤떨어지는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을 더욱 더 빈곤의 삶으로 몰아넣고 잇습니다. 이와 같은 빈곤의 세계화는 새 천년기를 시작한 온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물질문명의 극을 달리고 있는 뒷그늘에 수십억의 인구가 기아와 영양 결핍으로 아까운 생명을 접을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골고루 나누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충분한 자원과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기심과 독점욕으로 이 자원과 능력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고 있기에 이와 같은 죄스러운 현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기심과 독점욕은 불의한 죄의 구조로서 가난한 이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분명 하늘을 향해 울부짖을 만큼 정의를 벗어났으며('민족들의 발전', 30항), 이미 굶주림에 짓눌린 사람들은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사목 헌장, 9항).

3. 세상 만민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와 같은 마음으로 대하기를 원하십니다(사목 헌장, 24항). 가족 중 누가 굶주리고 있다면 이를 외면할 이가 어디 있을 것이며, 자기 몫을 나누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두가 한 형제 자매이며, 구세주의 거룩한 피로 구원된 고귀한 존재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이 한 형제로 서로 사랑하며, 어렵고 고통 받는 형제 모두를 함께 도와야 한다는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국적과 인종, 피부색과 성별,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4. 교회는 그 받은바 소명으로 말미암아, 가깝든 멀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덜어 주어야 하며, 단순히 교회의 '남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요긴한' 것을 가지고서도 나누어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과 오래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사회적 관심', 31항 참조). 오늘날 고통 받는 사람은 '무수하게 많은 굶주리는 사람들, 곤궁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거지 라자로가 자기 집 문간에 누워 있음을 모르는 체 하는 부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사회적 관심', 42항 참조). 이제 한국은 국내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한국 교회 역시 그러합니다.

5. 세계화되고 있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실천으로 다른 세계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오늘날의 세계화가 가난한 이들에게는 어둠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세계화는 이 어둠을 거슬러 가난한 이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는 세계화입니다. 이 빛과 희망의 세계화는 거창한 구호나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사업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생활 실천으로 시작됩니다. 이기심과 독점욕에서 해방되어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함으로써 복음이 제시하는 청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많이 소유하기보다는 소유한 것을 내 놓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몰아가고 있는 죄스럽고 불의한 모든 제도와 구조에 동조하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시작하고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동안 세계의 기아민을 위하여 가진 것을 사랑으로 나누어 오신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3년 1월 26일, 사회복지주일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봉훈 주교



연중 제3주일(사회복지주일)

02/01/27

오늘날 지구상에는 전 세계 60억 인구 중 40억 명이 극도의 빈곤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 중 10억 이상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12억의 사람들이 하루에 미화 1달러, 우리나라 돈 1,300원 한 달 39,000원 정도의 돈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다른 28억의 사람들은 하루 생활비가 2달러, 2600원이 채 안 된다. 그래서 매일 4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죽어간다. 지난 5년 간 굶주림으로 사망한 사람이 150년 간 전쟁이나 혁명으로 죽은 사람보다 많다.

왜 이렇게 가난한가? 상위 20%의 잘사는 나라가 전 세계 재화의 86%를 소비하는 반면 하위 20%의 가난한 나라는 단지 1.3%만을 소비하고 있다. 세계 최고 부자 3인의 재산 합계가 가장 가난한 나라 48개국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보다 많다. 세계 식량 생산량은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입니다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의 40%는 잘사는 나라에서 가축사료로 사용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마더 데레사 수녀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것은 우리가 가진 바를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못 나누느냐구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마태오 복음 25장 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69항에서는 "'기아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그대가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라고 하신 교부들의 말씀을 기억하여 각자의 능력대로 자신의 재화를 나누어주고 특히 개인이나 국가가 받은 원조를 자조자립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또 88항에서는 "전세계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힘이 닿는 대로 덜어 주는 일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의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쓰고 남는 것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에 따라 자기에게 필요한 몫에서 나누어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정한 사회복지주일이다. 우리 본당에서는 프란치스코 어린이집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지만, 더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나눌 수 있도록 해야겠다. 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더 어려운 나라의 더 어려운 이들에게도 우리 사랑을 나누도록 합시다.



연중 제3주일 사회복지주일

아프간 난민과 세계의 굶주린 이들에게 사랑을 전합시다

02/01/27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1월의 마지막 주일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제정한 사회복지주일입니다. 이 날은 세계 도처에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며 가진 것을 사랑으로 나누는 주일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10억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쟁과 내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 속에 죽어 가고 있습니다. 1979년부터 10년 간 지속된 소련과의 전쟁과 소련군이 철수한 후 계속된 종족 간의 내전으로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최근 3년 간 계속된 극심한 가뭄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의 극빈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미국의 테러응징의 표적이 되어 주민 800만 명이 난민이 되어버린 긴급한 상황이며, 그 중 200만 명이 파키스탄 국경 난민수용소에서 추위와 기아 속에 처절하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2.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함께 골고루 사용하도록 넉넉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며 인간은 단지 세상에 사는 동안 관리자일 뿐입니다. 주인이 아닌 관리자가 자신의 이익과 편안함을 위하여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소유하여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가게 내버려 둔다면 이는 하느님의 뜻과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특히 굶어 죽어 가는 가난한 형제들에게 대한 외면과 무관심은 커다란 죄악입니다. 인간에게 맡겨진 재화는 사랑을 동반한 정의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그리고 풍부히 나누어져야 합니다.

3.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기아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그대가 그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하신 교부들의 말씀을 상기하여 각자의 능력대로 자기 재화를 나누어주고 특히 개인이나 국가가 받은 바 원조로써 자조자립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 주기를 바란다”(사목헌장 69항)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지난 11월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순례자들에게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와 단식을 당부하면서 단식으로 모은 성금을 가난한 이들 특히 테러와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돕도록 요청하셨습니다. 또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도 국제사회와 우리 정부에 아프간 사태로 피난길에 오른 무수한 난민들에게 적극적인 관심과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신자들에게도 난민들과 고통을 나누도록 당부하였습니다.

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요한 13, 34)는 새 계명은 오늘날에 와서는 전세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적용되어야 할 계명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같은 자녀로서 한 형제자매가 된 우리는 비록 나라가 다르고 인종과 피부색,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 할지라도 다른 형제의 궁핍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굶주림의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에게 타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실은 바로 이러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제는 도움을 받아 넉넉하게 된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나라의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바를 나누어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5. 나눔은 사랑의 실천이며 정의실현의 첫걸음입니다. 모든 이가 가진 바를 내어놓고 나눔으로써 모두가 풍요롭게 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오늘날 이 세계 곳곳에서 구현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이런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서 헌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재물의 우상화에서 벗어나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려야하고, 하느님께 속한 재물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가난한 라자로가 우리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참다운 예배를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장봉훈 주교



연중 제3주일

(다해) 루가 1, 1-4; 4, 14-21; 01/01/21

신자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 같은 편이니까 잘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고 힘들 때 보호해주시리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죄 안 짓고 착하게 사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선심공덕을 쌓는 일 즉, 좋은 마음을 가지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공을 쌓으면 구원된다는 것이다. 틀린 대답들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쉽다. 그 이유는 그 대답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이해관계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19)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과 같다. 실제로 예수님의 생애는 가난하고 결핍과 한계를 겪는 이들을 '현실에서 해방시키심으로써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 급기야는 당신 생명을 십자가에서 바치시기까지 하심으로써 이 사명을 완수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는 말씀을 이루시고야 말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 판정과도 같은 말씀의 상황을 이루도록 초대하신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구해주셨으니, 그 보답으로 형제들을 위해 우리도 주님처럼 희생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나만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문제만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명을 따라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나를 나누는 사랑을 실현할 때 주님께서는 나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나를 내가 함께한 형제들과 함께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 33)



연중 제3주일

(나해) 마르 1, 14-20 : 2000/01/23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다되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1, 15)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일생 동안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을 두 번씩 경험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다시 온다 해도 그 때가 되면 우리가 우리의 몸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마치 아주 어렸을 때 희년을 맞이해서 그 의미를 충실히 지키실 수 없으셨던 분처럼.

희년엔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새 희망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지난 과거를 다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까지 미루고 완성하지 못했던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내가 결혼만 안 했더라면, 내가 다시 살수만 있다면 하고 포기하고 이루지 못했던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고귀한 이상과 가치들을 새로운 자세로 맞이하고 다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과오를 다 잊고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무엇을 하시면서 사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다는 당신 사명을 알리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 19. 21)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믿고 실현함으로써 주님 은총의 해인 희년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편 "때가 다되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의 때도 바로 이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힘으로 변화되는 바로 그 때! 그 때가 되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고 하십니다.

회개하면 복음을 믿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믿을 때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결심보다도 주님의 사랑이 먼저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를 결심하게 하고 변화될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 17)

2000년 대희년을 시작하면서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실현함으로써 내 삶 안에서 나를 통해 이 희년이 실제로 시작되도록 합시다.



연중 제3주일

(가해) 마태 4,12-23(17) : 99/01/24

예수님께서는 오늘 갈릴래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실 첫 장소를 갈릴래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첫 선포지로 삼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갈릴래아가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해 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요르단 강 안쪽을 벗어난 곳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구원에서 제외되리라고 하던 외국인들의 도시, 가난한 이들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신 것에 대해 이사야 8장 23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태 4,15-16)

이러한 예수님의 선택은 제자들을 뽑는 과정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당시에 백성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고 내노라하는 사람들을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던지고 있는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마태 4,18)를 첫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늘나라를 만드는 일에 전력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마태 4,23)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하시며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적으로 가난하고 어렵고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한편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의 선교 노력에 대해 주의를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 우리 주변에 나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안내하고 돌보기로 합시다.



연중 제3주일

(다해) 루가 1,1-4; 4,14-21 : 98/01/25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면서 가르치셨다. 그리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그리스도' 라는 것을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신의 사명을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설명하셨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과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님을 구세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구세주로 오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가난한 이들이 가지지 못해 서럽고 억울하게 살게 되는 물질이 지배하고 물질로 인해서 좌우되는 세상에서 물질로부터 해방되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70인 역 신명기 8,3 재인용)고 일러주셨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주님. 그야말로 물질의 소유여하로 구분되고 평가되는 세상에서의 기쁜 소식이리라.

배우지 못하고 미처 깨닫지 못하여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못해 인간 사회의 법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을 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풀어주시는 주님. 그리고 돈과 탐욕에 묶여 있고 눈먼 이들에게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마음으로 하느님을 기다리며 가난한 사람이 더 행복하다(루가 6,20 참조)는 사실을 선언하시고 보여주신다.

그리고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에로 이르는 길이 바로 당신이라고 보여주신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짓누르는 위협과 제한 앞에서 주님은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렇게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그 "말씀을 이루심"(루가 4,21)으로써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루가 4,19)신 아버지의 명을 완성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시켜 구원하여 주신다.



연중 제3주일

(가해) 마태 4,12-23 : 96/01/21 서울 주보

†. 찬미예수님. 안녕하십니까?

언젠가 한 번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한 친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안 다른 친구가 축하도 할 겸해서 만나서, "세례 받았다며, 축하한다!" 했더니, 그 친구가 "응, 고마워!" 하고 인사했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친구가 "참 너 주의 기도 외울 줄 아니?" "아니, 못해! 너무 길어서…." "뭐?! 그럼 성모송은?" "그것도 혼자서는 못해…." "영광송은?" "……." "그럼, 너 어떻게 세례를 받았니?" "음… 난 주의 기도도 잘 못 외우지만 변한 게 있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세례 받기 전에는 매일 술 먹고 12시를 넘겨야 집에 들어오고, 빚도 많았고, 싸움도 많이 해서 편할 날이 없었지만, 세례 받은 후엔 술 먹어도 잠깐이고, 빚도 다 갚았고, 진짜 사랑은 깊이 못해도 뭐 그리 싸울 일도 없고… 이렇게 말하면 쑥스럽지만, 나 새사람 됐어!"

"새사람 됐어!" 란 이 표현은 우리 모두, 아니 우리 보다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 간절히 바라는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우리를 신앙으로 불러주신 주님께서 더욱 더 바라시고 계시겠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 하고 말씀하신 후,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하시자 그(제자)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마태 4,19-20) 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물을 버렸다' 와 '예수를 따라갔다.' 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자신의 생업을 포기했다는 것과 주님의 모범을 따랐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이미 세례 때 내린 성령의 이끄심으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십니다.(마태 4,13) 즉, 주님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고 또 한편 자신이 꾸려왔고, 이루어 놓은 자기 기반인 나자렛 성가정과 자기 영역·자기 세계를 떠나, 갈릴래아 가파르나움의 이방인들에게 가셨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삶은 단지 자신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국한되거나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에게 자신을 바치는 새로운 변화입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이웃의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내 삶의 나눔과 봉헌이라는 보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겐 복음(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범과 제자들의 변화 안에서 우리는 회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주님의 영인 성령의 부르심과 이끄심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성령의 움직임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게 된다.

이렇게 주님의 변화된 삶이 갈릴래아의 사람들에게 빛이 된 것처럼, 우리의 회개 역시 이 시대의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ㄷ) 하신 사도 바울로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정신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우리가 찾은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사도적인 삶이 진정한 만족과 보람된 삶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구원운동이라는 것을 자신의 이익과 더 나은 육체적 현세적 안락을 추구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증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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