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89차 전교주일 담화(요약)


선교,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나해) 마르 10,46ㄴ-52; 15/10/2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15년 전교 주일은 봉헌 생활의 해에 거행되어 기도와 묵상에 힘을 더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세례 받은 이는 은사로 받은 신앙을 선포하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따르기는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며,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그분의 헌신, 그리고 봉사와 사랑의 행동을 본받아 목숨을 바쳐 새 생명을 찾으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삶 전체가 선교적인 것이었기에 그분을 좀 더 가까이 따르는 이들은 이러한 특성을 온전히 지녀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선교적 차원은 또한 모든 봉헌 생활에 내재된 것이기도 합니다. 선교는 개종이나 단순한 전략이 아닙니다. 선교는 신앙의 원리에 속하는 것으로 “오라.” 그리고 “나아가라.” 하고 속삭이시는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선교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사는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시며 이야기하시고 숨 쉬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선교 활동 한가운데에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66항).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이며 또한 그분 백성을 향한 열정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서 기도하며 우리를 존엄하게 하시고 지탱하시는 그분의 깊은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꿰뚫린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하느님 백성과 온 인류에게 퍼져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과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복음의 기쁨’, 268항 참조).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는 언제나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계획과 새로운 도전들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저마다의 삶의 증언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특히 봉헌된 이들은 복음이 아직 선포되지 않은 민족들을 향하여 선교의 넓은 변방으로 나아가라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의 반포 5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모두 이 문서를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성찰하도록 초대됩니다. 이 교령은 봉헌 생활회의 강력한 선교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느님 은총으로 선교 사명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사명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세계의 여러 변방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되고, 많은 노고와 고난에 대한 보답이 됩니다. 이러한 소명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태도는, 비록 많은 사목적, 교회적, 인도적 필요에 관련된 고귀한 이유가 있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복음에 봉사하라는 부르심에 어긋납니다. 저는 여전히 용감하게 증언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때로는 시류를 거스를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참된 선교 이상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온전히 내어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는 자신의 뿌리를 되찾고 개별 문화의 가치를 보전하려는 모든 민족들의 요구를 존중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다른 전통과 철학 체계를 알고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신비를 이해하고, 모든 문화의 빛이며 변화시키는 힘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모든 민족들과 문화가 자기의 고유한 전통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역학 관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합니다. “누가 복음 선포의 우선적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그 답은 명료하며 복음 자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가난한 이들, 작은 이들, 병든 이들, 무시당하거나 잊힌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루카 14,13-14 참조). 이들을 우선적 대상으로 삼는 복음화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시는 나라의 표징입니다.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결코 가난한 이들을 저버리지 맙시다”(‘복음의 기쁨’, 48항 참조).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는 이들은 일상적인 불확실성 안에서 가난한 이들처럼 살며 모든 힘의 행사를 포기하고 가장 작은 이들의 형제자매가 되어 그들에게 복음의 기쁨과 하느님 사랑의 표징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선교사의 열정은 복음입니다. 바오로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복음은 모든 인간의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원천입니다. 교회는 이 선물을 인식하고 있기에 지치지 않고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1요한 1,1)을 모든 이에게 끊임없이 선포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종들, 곧 주교, 신부, 수도자, 평신도들의 사명은 모든 이가 빠짐없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 선교 활동의 광대한 지역에서 모든 세례 받은 이는 저마다의 개인적 상황에 따라 세례 서약을 온전히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저는 다른 나라든 자기 나라든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에 협력하는 모든 이를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선교의 모범이신 마리아께 맡겨드리며 모든 이에게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 10, 46-52; 2003/10/26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의 폭우로 시애틀과 서부워싱턴 일대가 물에 잠겼다고 하던데 여러분 댁은 별고 없으신가요?

오늘 복음을 보면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보는 거지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47)하고 소리친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는 막무가네다. 그만큼 간절하리라.

보다못해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묻는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51) 그러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51)라고 청한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2)하시며 그를 고쳐주신다.

앞 못보는 거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시리라는 그의 믿음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앞 못보는 거지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본다. 바르티매오는 수많은 장님 중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다가가서 선택을 받았다.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바람 그리고 예수님의 선택이 기적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간절하게 청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선택을 받는 것이냐?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히브 5, 1-6)라고 말한다. 전승에 따르면, 그 앞 못보는 거지 바르티매오는 훗날 12사도의 한 사람이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결국 주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업을 하게 된다. 스스로 보게 된 사실로 말미암아 스스로 은총을 입은 사실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은총을 내려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도 주님께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도 바르티매오처럼 사람들이 말려도 창피를 무릅쓰고서라도 주님께 받고 싶은 은총이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누구를 위한 은총이며, 그 은총이 이루어지면 누구에게 도움이 되며 여러분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오늘 바르티매오가 주님께 간절히 말씀드린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이렇게 들린다. '주님, 저를 고쳐주시고, 또 그렇게 고쳐서 주님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염원을 주님께 청하십시오. 여러분의 염원을 주님께서 꼭 들어주시리라고 믿으면서 꾸준히 그리고 간절하게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총을 입으시면 형제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 은총으로 입은 결과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연중 제30주일

(가해) 마태 22 34-40; 2002/10/27

한 집안에 형제들이 부모와 관계가 좋으면 형제들 서로간에 우애도 돈독하다. 그러나 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형제들끼리도 서로 헐뜯고 분란이 끊이지 않는 것을 종종 본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37-40절)라고 하신다.

요한 사도는 이웃 사랑의 근거를 하느님의 사랑과 관련하여 말한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 10-11)

그리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 4, 19-21)

혹시 무슨 일이나 상황을 이유로 남을 판단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 45) 단지 선한 사람은 자신에게 내린 하느님의 사랑에 기뻐하며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반해 악한 사람은 자신에게 내린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며 늘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 스스로 행복하고, 선한 행위를 통해 세상에 기쁨을 선사하며 하느님 나라를 넓힌다. 악한 사람은 악에게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스스로 불행하고, 악한 행위를 통해 세상 사람들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며 하느님 나라를 좀먹게 된다.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살아가자.



연중 제30주일

(다해) 루가 18, 9-14; 01/10/28

어떤 사람은 큰 죄를 지어서 평생 고개도 못 들고 다니는가하면, 누구는 작은 죄를 여러 번 지었어도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산다고 한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도 그런 축에 끼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마태 23, 23)라고 나무라신 적이 있다.

'바리사이'란 단어는 구분된다는 뜻이다. 결국 바리사이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과는 구분이 될 정도로 율법을 그 조문대로 다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에 비하면 매일 미사 드리고, 아침 저녁 기도, 묵주기도, 삼종기도까지 다 드리고, 교무금, 헌금, 미사예물, 각종 후원금 등도 빠지지 않고 다 바치고, 성서 공부도 하며 구역반모임 열심히 하고 단체 활동에 혹시라도 뒤처질까 뛰는 이른바 소문날 정도로 열심한 신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세리는 누구 하나 좋아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유다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야하는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세금을 다 낼 돈이 없으니까, 세리가 먼저 자기 돈으로 내주고 그 돈을 고리대금으로 쳐서 받아가니까 사람들의 원성을 많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율법상 이자를 붙여먹을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는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악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세리는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세리를 더 어여삐 보신다. 그 이유는 바리사이는 기도한답시고 여러 사람 앞에서 보라는 듯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로운 사람으로 치켜세우고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단죄한데 반해, 세리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 13)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은총을 받아 사는 처지에 자신을 내세울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열심도 해야 하겠지만 사회적으로도 지탄받지 말아야겠고, 스스로 부족한 점을 깨닫고 채우기 위해 겸손되이 노력해야 하겠다.



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 10, 46-52: 2000/10/29

지난 본당에서 술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술을 끊으니까 많은 남자 신자들이 섭섭해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의 신자들은 담배마저 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끊어야 될 것이라면 언젠가는 끊어지겠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던 중 평화방송 라디오에 출연해서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녹화 1주일 전에 담배가 손에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바랄 때 그것이 진정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가 예수님께 소리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47절) 그는 여러 사람이 말렸지만 더 큰 소리로 소리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2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의 믿음은 무엇인가? 소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구세주라는 것을 믿었고', 또 '예수님께 애원하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바르티매오를 바르톨로메오 또는 나타나엘이라는 12제자중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결국 소경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눈을 고쳐달라고 청한 것이 된다(52절).

우리가 진정 주님 앞에서 정당하고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기도 중의 하나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휘감아 달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웃에게 봉사하는데 필요한 재능을 달라'는 기도겠다. 사도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 13, 8)라고 말한다.

우리 성당의 주보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저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30주일

(다해)루가 18,9-14 : 98/10/25

사도 바오로는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정의의 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디모 4,7-8)라고 말합니다. 얼른 듣기에는 조금 교만스럽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이렇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이유를 주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히 선포할 수 있었고 그 말씀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2디모 4,17) 이러한 바오로의 확신에 찬 믿음은 또한 바오로의 희망입니다.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어 구원하셔서 당신의 하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2디모 4,18)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족과 나약함이 드러나면 자신이 초라해지고 버림받을 것 같아서,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거나 허풍을 떨어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저것을 소유하거나 이런 저런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부족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채워진 것같이 느끼지만, 자신의 공허함과 내면의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근원적인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약성서의 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그의 간청은 하늘에 다다를 것이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집회 31,20-21) 끊임없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과 애정으로 살아나가십시오. 내 집이나 내가 사는 곳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거나 내 노력으로 복음이 조금 이루어졌다고 만족하지 말고, 과감히 사회와 민족의 복음화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주님, 저를 사랑해주시고, 저에게 오셔서 저를 다스리소서. 제 마음과 생각, 제 의지와 행동을 주님의 사랑으로 정화시켜 주시고, 저에게 주님의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저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시고, 저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셔서 저희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의로운 사람의 무고함을 판단하시어 그를 돌보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 주님께서 지체 없이 오실 것이다."(집회 31,21-22)



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 10,46-52 : 97/10/26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우리 세대에 희망이 있는가?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4-25)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로마 8,23)까지이다. 희망은 영혼의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은 갈증에서 온다. 그리고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피어난다. 그리고 그 희망은 그 갈증을 풀어주실 분께로 향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경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줄 이가 예수님이라고 믿어 주님께 청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르 46,47) 앞 못보는 삶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48절) 그는 너무나 애절하여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48절)

사람들의 멸시와 제재에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과 또 이번 기회에 나를 고쳐 주실 수 있는 이분에게 청해서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확신과 굳은 의지가 마치 사생결단 하듯 달려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소경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는 그를 고쳐주시며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2절?) 주님은 소경이 낳게 된 것을 그의 믿음 탓으로 돌리신 것이다.

나와 우리 가족이, 우리 구역·반이, 우리 사회가 이것만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애타게 기다리는 염원이 있는가? 그리고 그런 우리의 염원이 주님께서 들어주시면 현실에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염원이 주님께 사생결단을 하듯 달려들게 할 만한 간절한 희망으로까지 승화되어 있는가? 그러면 우리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자! 매일 미사를 통해서, 묵주의 9일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과의 채널을 다 맞추어서 기도하자. 우리의 염원과 이 시대의 아픔을 겪는 이들과 북녘의 굶주리는 형제들과 우리의 이기주의와 욕심에서 해방되어 전쟁과 굶주림 없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49절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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