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1년 전교 주일 담화 요약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나해) 마태 28,16-20; ’21/10/2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힘을 체험하고, 우리 개인의 삶과 공동체 삶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을 깨달으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선포하고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그리고 세상 구원의 필요성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그 누구도 배척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이 자비로운 사랑에서 소외되거나 배척된다고 느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의 체험

복음화의 역사는, 주님께서 모든 이를 불러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자 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으로 시작되었습니다(요한 15,12-17 참조).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전한 사람들은 사도들입니다. 주님과 나누는 우정 안에서 사도들은, 주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고,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시며, 더러운 이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며, 참행복을 알려 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권위 있게 가르쳐 주시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이는 그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기며 경이로움과 커다란 기쁨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9 참조)는 사실을 감사한 마음으로 떠올릴 때마다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각별한 사랑에 우리는 경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탄은 본디 우리가 소유하거나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이러한 방식으로만 무상성의 기적, 보답을 바라지 않고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기적이 꽃필 수 있습니다. 선교 열정도 이성적 추론이나 이해타산의 결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습니다. ‘선교에 몸담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의 반영입니다”(교황청 전교기구에 보내는 메시지, 2020.5.2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와 고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이나 난관은 그들을 한 걸음 물러서게 하거나 자신 안에 갇히게 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와 갈등과 어려움을 선교를 위한 기회로 삼도록 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이미 많은 이들이 체험한 고통, 고독, 가난, 불의를 부각시키고 증폭시켰습니다. 보건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명목으로 무관심과 냉담을 포장하고 정당화하려는 유혹이 생길 때, 필수적인 거리 두기 조치를 만남과 돌봄과 증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자비의 사명이 긴급히 요청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사도 4,20), 곧 우리가 체험한 자비는 이렇게 판단의 기준이자 신뢰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시간과 노력과 재화를 쏟아야 할 소속감과 연대의 공동체”('모든 형제들', 36항)를 세우고자 하는 공동의 열정을 회복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기를, 형제애를 지니기를,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소중히 여기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저마다 받은 초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는 올해 전교 주일의 주제는 우리 마음에 지닌 것을 우리가 저마다 ‘책임’지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하는 요청입니다. 이 사명은 언제나 교회의 특징이며,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교황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4항)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거행하는 전교 주일에, 우리는 너그럽고 기쁨 넘치는 복음의 사도가 되겠다는 세례 때의 약속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며 도와주는 모든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자신의 집과 가족들을 떠나 구원의 메시지에 목말랐던 지역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결연히 나서는 모든 이를 기억합시다.

우리는 선교의 소명이 과거의 일이거나 이전 시대의 낭만적인 흔적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시대에 우리 삶의 반경을 넓히고, 우리의 “관심권”('모든 형제들', 97항)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는 다른 이들이 비록 우리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날마다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명에 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우리도 기꺼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곧 주님과 함께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도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기꺼이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우리가 모두 참된 선교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선교하는 제자이신 성모님께서 세례 받은 모든 이 안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열망을 키워 주시기를 청합니다(마태 5,13-14 참조).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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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전교주일 꽃꽂이




연중 제30주일



(가해) 마태 28,16-20; ’20/10/18

어떤 교우분이 “코로나19 전염병이 우리에게 닥친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시는 것인가요?”라고 여쭈셨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감염상황의 발발은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벌을 주신다기보다는, 우리 인간이 자연의 질서 체계를 교란시키는 바람에 생겨난 재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우리 인간들에게 잘 관리하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 동안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존재 이유와 목적에 따라 잘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훼손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 창조시에 만들어 주신 자연의 질서 체계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 손상된 자연의 질서 체계가 다시 회복될 때까지는 우리가 코로나19 감염과 확산에 따르는 어려움을 겪어야 할 만큼 다 겪고 난 다음에야 이런 상황이 진정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에서 주 하느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야말로 주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마지막 상황이 닥쳐, 이를 해결하기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있을 때에만 인간 세계에 개입하십니다.

그렇다고 주 하느님께서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코로나에 안 걸리게 해주신다든지, 걸려도 금방 낮게 해주시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자연의 훼손에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작년 대림 시기를 상기해 볼 때, 대림 제4주일 미사 복음인 마태오 복음 서두인 1장 18절부터 24절을 보면, 주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자신과 결혼할 여인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마태 1,19)합니다. 그런데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0-21절) 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바로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23절) 라는 해석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한다고 코로나19를 비롯하여 인류를 위협하는 자연 재해를 하루 아침에 없애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시고,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신자들은 병이 안 걸리게 해주시겠다든지 걸려도 빨리 낳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우리와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병에 걸려 죽을 것만 같은 아픔을 겪고 발버둥을 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우리 손을 잡아 주기만 해도 그 아픔이 반감하는 기분을 느낍니다. 누가 우리 손을 잡아준다고 외적이고 육체적인 병이 낳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잡아준 손을 꽉 잡고 매달리면서 아픔을 견디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러면 어딘지 모르게 아픔이 줄어드는 기분이 들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면서 우리 병이 나을 것만 같은 기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심정과도 같은가 봅니다. 어떤 때는 마취제를 농도를 높여가면서 그렇게 여러 번 맞아도 통증이 가시지 않다가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을 때 통증이 약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누군가가 나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함께해준다는 사실에 심리적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고 고통을 이겨내게 해줍니다. 아플 때 사람이 옆에만 있어주어도 그렇게 위안이 되는데,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해주신다면야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 죗값으로 대신 주님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에게 주님 생명을 나눠주고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다시 함께하시다가 승천하실 때, 또 같은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안겨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 맨 마지막 장면에서 주님께서는 하늘에 오르시면서 제자들에게 온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고, 약속해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우리 몸이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병을 없애 주시고, 병에 걸린 우리를 금방 낳게 해주시지는 않지만, 우리와 함께 아파해주시고, 우리 손을 맞잡고 우리의 병고를 나눠 짊어져 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어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면서 우리가 처한 병고와 어려움에서 우리가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설사 병이 완쾌되어 낳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주님의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 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어쩌면 우리는 미사참례하고 기도할 때야 비로소 그분과 함께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곁에서 늘 함께하시는 주 하느님을 깊이 느끼며,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라는 질문을 통해 율법교사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7-38절) 라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39-4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맨 처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자연을 훼손하여 세상을 어지럽힌 우리의 부주의와 이기적인 타성에 대해 주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회개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훼손하고 손상시킨 주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직접 손을 뻗쳐 자연계를 훼손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훼손 행위를 통해 생겨난 환경을 개발과 문명이라고 여기면서 간접적인 이득을 취하고 누려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무의식 중에 우리에게 주어지고 선택한 물건을 사용하고 쓰레기를 버리면서 환경을 파괴해 왔고 주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찬미하여라’라는 회칙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하신 말처럼 우리는 대자연 피조물계의 훼손과 파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회심해야 합니다. 주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보존하며 유지하는 노력은 정부당국이나 환경운동가만이 할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자각을 통해 지금까지의 편의와 한계이익만 쫓던 생활 습관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피조물계의 훼손은 단순히 자연환경의 파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이 우리 인류를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이번 코로나19의 감염상황에서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성경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22,39)는 주 하느님의 두 번째 계명에 마주서서, 자연을 더 이상 우리의 발전과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만 여기지 않고, 공존하며 함께 살아나가야 하는 이웃으로 여기도록 발상의 전환을 합시다.

아울러 자연의 훼손으로 인한 허물어진 방역체계로 말미암아 수난당하고 있는 환우들을 마치 죄인처럼 낙인 찍고, 지속적인 질병 보균자와 전염병자로 여겨 멀리하고 마음과 몸으로 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진정 나 자신처럼 여겨서 감싸 안고 돌봐 주어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공동체에 복귀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축복하고 기도해주면서 애정을 가지고 함께하여 위로하고 배려하는 주님의 사랑을 실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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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꽃꽂이




연중 제30주일


베네딕토 15세 교황 성하께서 세상에서 선교사들이 수행하는 활동에 관하여


가톨릭 세계의 총대주교와 수석 주교, 대주교와 주교에게 보내는


교황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 부분 요약



(다해) 루카 18,9-14; ’19/10/27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올 10월을 특별 전교의 달로 선포하셨습니다. 그 선포는 베네딕토 15세의 교황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 1919.11.30.) 반포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교서 중에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부분을 요약하여 전해드리겠습니다.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임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께로 되돌아가실 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하고 말씀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이 임무는 분명 사도들의 죽음과 더불어 끝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임무는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세상 끝날까지, 다시 말해 진리의 가르침으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실 그날 이후 “그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고”(마르 16,20),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게”(시편 19[18],5)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이 거룩한 명령을 기억하며, 세기의 흐름 속에서, 세상 모든 곳에, 하느님 말씀의 전파자들과 봉사자들을 파견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가져다주신 영원한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초기 300년 동안, 연이은 박해의 광풍이 지옥에서 풀려나와 갓 태어난 교회가 온통 그리스도인들의 피로 넘쳐흐를 때에도, 복음의 소리는 널리 전파되어 로마 제국의 극변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공적으로 교회에 평화와 자유가 주어졌을 때, 복음 전파는 특별히 열정과 성덕에 뛰어난 이들의 노력 속에서 사도직 활동에 힘입어 전 세계적으로 매우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들 중에 조명자 그레고리오는 아르메니아를, 빅토리노는 오스트리아 동남부 스티리아를, 프루멘시오는 에티오피아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인들을 그리스도 안에 태어나게 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노는 잉글랜드인들을, 골룸바노와 팔라디오는 스코틀랜드인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또한 위트레흐트의 첫 번째 주교인 클레멘스 빌리브로르도가 네덜란드를 복음화하였고, 보니파시오와 안스가리오가 게르만 민족에게,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슬라브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기욤 드 뤼브룩은 복음의 빛으로 몽골인들 속으로 들어갔으며,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파견하였고, 얼마 뒤 프란치스코회 회원들이 그곳에 성대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설립하였으나 박해의 폭풍우가 몰아쳐 무너져 버렸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후, 도미니코회의 자랑이요 빛인 바르톨로메오 라스 까사스라는 탁월한 인물로 대변되는 일군의 사도들은 사람들의 파렴치한 횡포에 맞서 그곳에 있는 가난한 원주민들을 보호하고 악마의 혹독한 종살이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헌신하였습니다.

한편 마땅히 사도들에 비견될 수 있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동인도와 일본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많은 땀을 흘린 후, 중국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중국을 눈앞에 두고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사실상 자신의 죽음으로 중국이라는 광활한 지역의 새로운 복음화에 길을 열었고, 수많은 수도회와 선교회의 열심한 회원들이, 온갖 변화 속에서, 진리의 사도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마지막으로 발견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아프리카 내륙과 마찬가지로, 대담함과 항구함 속에서 탐험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령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광대한 태평양에는 우리 선교사들의 활발한 열정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먼 섬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형제들의 구원을 열망하며, 사도들의 모범에 따라, 자신을 성화하는 데 이르렀고, 적지 않은 이들이 피로써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며 자신의 사도직을 순교로 장식하였습니다.

신앙을 전파하는 데 있어 우리가 겪은 많은 역경과 수많은 빛나는 사업들 그리고 모범이 되는 불굴의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죽음의 어두움과 그늘 아래 머물고 있는 이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에 심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토록 현저하게 많은 수를 차지하는 영혼들의 불행을 애처로이 여기고, 거룩한 사도적 의무를 통해, 이 영혼들을 구원에 참여하도록 이끌기를 갈망하고 기도를 청합니다.

신자 여러분,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교회가 여러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바로 여러분들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책무는 전적으로 거룩한 것이며 따라서 소소한 인간적 이해를 넘어서 있는 것임을 생각하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이들에게 빛을 가져다 주고 영원한 파멸을 향해 달리고 있는 이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젖히는 이들입니다. 따라서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안을 잊어버려라.??(시편 45[44],11)는 성서 말씀을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하신 말씀으로 여기며, 다음의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곧 여러분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해야 하고 지상의 조국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시민들을 늘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이미 참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고 또 무한한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는 모든 신자를 향하여 기쁜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신자들은 비신자들을 돕는 것이 자신들과 직결된 의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기”(집회 17,14) 때문입니다. 사실 이웃이 긴급한 상태에 있으면 있을수록, 이 의무는 그만큼 더 막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불행 속에 머물며, 눈멀고 고삐 풀린 욕망으로 악마에 굴복하여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비신자들보다 더 우리의 형제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자신의 능력껏 그들에게 빛을 비추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모든 이는, 특히 선교사들의 사업을 도움으로써, 막중한 자기 의무를 완수하고, 비신자들에게 신앙의 선물을 베풀어 주신 데에 대하여 하느님께 그분께서 기꺼이 받으시는 방식으로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를 위해 주님께서 선교하는 모든 이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해 주시고,너 나 할 것 없이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께 의지하여 기꺼이 선교에 나서주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사도들의 모후께서 많은 이들의 간청에 호의를 베푸시고, 복음의 선포자들에게 성령이 넘쳐흐르게 하시기를 바라며, 본인은 그분의 보호를 청하고 또한 아버지다운 사랑의 표지로, 존경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과 여러분의 성직자 그리고 여러분의 백성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1919년 11월 30일

베네딕토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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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꽃꽂이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16년 전교 주일 담화


선교하는 교회, 자비의 증언



(다해) 마태 28,16-20; '16/10/2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가 지내고 있는 자비의 특별 희년은 2016년 전교 주일에도 특별한 빛을 비추어 줍니다. 자비의 희년은 우리에게 만민 선교를 영적 육체적으로 위대하고 엄청난 자비의 활동으로 여기도록 초대합니다. 전교 주일에 우리 모두는 선교하는 제자로 밖으로 나아가 저마다 자신의 능력, 창의력, 지혜, 경험을 기꺼이 나누어 온 인류에게 하느님의 온유함과 연민을 전하여 주도록 권유받습니다. 교회는 선교 사명의 정신으로 복음을 모르는 이들을 돌봅니다. 교회는 모든 이가 구원받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복음의 뛰는 심장인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야”(칙서, 「자비의 얼굴」, 12항) 하고, 또한 세계 방방곡곡에 자비를 선포하여 남녀노소 모두에게 다가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만나시면 자비가 하느님 마음 속 깊이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처음부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가장 취약한 이들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위대함과 권능은 젊은이들과 소외된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실 수 있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신명 4,31; 시편 86[85],15; 103[102],8; 111[110],4 참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친절하시고 [우리를] 보살펴 주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가까이 하시어 모든 이와, 특히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가정의] 부모가 자녀의 삶을 위하여 하는 것과 똑같이 인간의 현실에 온유함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예레 31,20 참조). 성경에서 자비를 언급하며 사용하는 표현은 어머니의 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상황에서 그리고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언제나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는 어머니 태에서 나온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본질적 측면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은 특히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시어 키워주시고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의 나약함과 불성실함에 직면하시어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연민으로 북받쳐 오르십니다(호세 11,8 참조).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자비로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고,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십니다(시편 145[144],8-9 참조).

자비는 강생하신 말씀 안에서 가장 고귀하고 완전하게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 넘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와 비교로 자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설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몸소 자비를 인간이 되게 하시고 인격화하셨습니다”(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2항). 우리가 복음과 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따르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 삶을 하느님의 선하심의 표징인 거저 받은 선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자비의 얼굴」, 3항 참조). 교회는 무엇보다도 인류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눈길을 깨닫고 그분께서 자비로운 사랑으로 교회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러한 사랑을 통하여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모든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며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이 사랑을 모든 민족들이 알도록 합니다.

초기 교회처럼, 연령과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이가 이러한 자비로운 사랑을 증언합니다. 선교 분야에서 남성들과 함께 활동하는 여성의 존재감이 상당히 증대된 것은 하느님 모성애의 중요한 표징이 됩니다. 여성 평신도나 수도자들, 심지어 오늘날 많은 가정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서부터 봉사 활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양한 형태로 자신들의 선교 소명을 수행합니다. 선교사들의 복음화 활동과 성사적 활동과 더불어, 여성들과 가정들은 종종 사람들의 문제를 더 적절하게 이해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바람직하고 때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을 돌보면서 조직보다는 인간을 더 중시하며, 인적 영적 자원을 분배하여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삶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 조화, 평화, 연대, 대화, 협력, 형제애를 구축해 나가며, 특히 가난한 이들을 돌봅니다.

많은 곳에서 복음화가 교육으로 시작되어 선교 활동을 하는 이들은 교육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마치 복음에 나오는 자비로운 포도 재배인처럼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교육을 실천한 이후에야 얻게 되는 열매를 인내롭게 기다립니다(루카 13,7-9; 요한 15,1 참조). 이러한 방식으로 복음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이 배출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복음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이들 또한 교회를 어머니로 여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주님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분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비의 모성적 봉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끊임없이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지 개종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신앙과 사랑으로 커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한한 사랑, 곧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품고 세계 곳곳의 거리를 누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선물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과 사랑입니다.

모든 민족들과 문화는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불의, 전쟁, 인도적 위기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할 때 더욱더 필요한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경험으로부터 용서와 자비의 복음이 기쁨과 화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복음의 사명은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는 현재 상황에서 모든 도전에 맞서 새로운 선교 여정에 나서라는 부르심에 귀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관하여 저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주님께서 가리켜 주시는 그 길을 잘 식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안위를 떠나 용기를 갖고 복음의 빛이 필요한 모든 ‘변방’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따르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입니다”(20항).

이 희년에 우리는 제90차 전교 주일을 맞이합니다. 전교 주일은 1926년에 비오 11세 교황께서 처음 승인하시고 교황청 전교회가 주관하였습니다. 이에, 저의 선임 교황들의 현명한 지침들을 상기해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분들께서는, 전 세계 모든 교구, 본당, 수도회, 협회, 교회 운동에서 헌금을 모아 교황청 전교회로 보내어, 어려운 그리스도 공동체를 돌보고 심지어 땅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그 헌금이 사용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러한 선교하는 교회 공동체의 행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사에만 집착하지 말고, 온 인류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도록 합시다.

구원받은 인류의 숭고한 표상이자 교회 선교사들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님께서 모든 이와 가정이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있는 신비로운 현존을 어디에서든 알리고 지켜나가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인간관계와 문화와 민족들을 새롭게 하시며 모든 이를 기쁨이 넘치는 자비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바티칸에서

2016년 5월 15일

성령 강림 대축일

프란치스코


(원문: Pope Francis, Message for the World Mission Day 2016, 2016.5.15., 독일어, 이탈리아어 판도 참조)

영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missions/documents/papa-francesco_20160515_giornata-missionaria2016.html

독일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de/messages/missions/documents/papa-francesco_20160515_giornata-missionaria2016.html

이탈리아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missions/documents/papa-francesco_20160515_giornata-missionaria2016.html




연중 제30주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89차 전교주일 담화(요약)


선교,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나해) 마르 10,46ㄴ-52; '15/10/2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15년 전교 주일은 봉헌 생활의 해에 거행되어 기도와 묵상에 힘을 더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세례 받은 이는 은사로 받은 신앙을 선포하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따르기는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며,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그분의 헌신, 그리고 봉사와 사랑의 행동을 본받아 목숨을 바쳐 새 생명을 찾으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 삶 전체가 선교적인 것이었기에 그분을 좀 더 가까이 따르는 이들은 이러한 특성을 온전히 지녀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선교적 차원은 또한 모든 봉헌 생활에 내재된 것이기도 합니다. 선교는 개종이나 단순한 전략이 아닙니다. 선교는 신앙의 원리에 속하는 것으로 “오라.” 그리고 “나아가라.” 하고 속삭이시는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선교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사는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시며 이야기하시고 숨 쉬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선교 활동 한가운데에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66항).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이며 또한 그분 백성을 향한 열정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서 기도하며 우리를 존엄하게 하시고 지탱하시는 그분의 깊은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의 꿰뚫린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하느님 백성과 온 인류에게 퍼져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과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복음의 기쁨’, 268항 참조).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는 언제나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계획과 새로운 도전들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저마다의 삶의 증언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특히 봉헌된 이들은 복음이 아직 선포되지 않은 민족들을 향하여 선교의 넓은 변방으로 나아가라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의 반포 5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모두 이 문서를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성찰하도록 초대됩니다. 이 교령은 봉헌 생활회의 강력한 선교 열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느님 은총으로 선교 사명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사명을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세계의 여러 변방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되고, 많은 노고와 고난에 대한 보답이 됩니다. 이러한 소명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태도는, 비록 많은 사목적, 교회적, 인도적 필요에 관련된 고귀한 이유가 있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복음에 봉사하라는 부르심에 어긋납니다. 저는 여전히 용감하게 증언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때로는 시류를 거스를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참된 선교 이상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온전히 내어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는 자신의 뿌리를 되찾고 개별 문화의 가치를 보전하려는 모든 민족들의 요구를 존중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다른 전통과 철학 체계를 알고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 신비를 이해하고, 모든 문화의 빛이며 변화시키는 힘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모든 민족들과 문화가 자기의 고유한 전통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복잡한 역학 관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합니다. “누가 복음 선포의 우선적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그 답은 명료하며 복음 자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가난한 이들, 작은 이들, 병든 이들, 무시당하거나 잊힌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루카 14,13-14 참조). 이들을 우선적 대상으로 삼는 복음화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시는 나라의 표징입니다.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습니다. 결코 가난한 이들을 저버리지 맙시다”(‘복음의 기쁨’, 48항 참조).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는 이들은 일상적인 불확실성 안에서 가난한 이들처럼 살며 모든 힘의 행사를 포기하고 가장 작은 이들의 형제자매가 되어 그들에게 복음의 기쁨과 하느님 사랑의 표징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선교사의 열정은 복음입니다. 바오로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복음은 모든 인간의 기쁨과 해방과 구원의 원천입니다. 교회는 이 선물을 인식하고 있기에 지치지 않고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1요한 1,1)을 모든 이에게 끊임없이 선포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종들, 곧 주교, 신부, 수도자, 평신도들의 사명은 모든 이가 빠짐없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 선교 활동의 광대한 지역에서 모든 세례 받은 이는 저마다의 개인적 상황에 따라 세례 서약을 온전히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저는 다른 나라든 자기 나라든 저마다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에 협력하는 모든 이를 교회의 어머니이시고 선교의 모범이신 마리아께 맡겨드리며 모든 이에게 저의 진심 어린 교황 강복을 보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전교주일 담화문


-선교,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나누어진 빵



'05/10/2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성체성사에 바쳐진 올해의 전교주일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상에 내어주셨던 수난 전날 밤의 다락방의 분위기를 재현하면서 우리 삶의 ‘감사’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23-24).

저는 최근 발표한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Mane nobiscum Domine)에서, 인류 전체를 위하여 ‘빵을 나누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도록 여러분에게 권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형제자매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주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성체성사는 ‘보편성의 표지’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성을 나누어받은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새로 태어나 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게”(선교 교령, 7항) 될 그 때를 성사를 통하여 예표합니다. 이렇게 성체성사는 선교의 의미를 더욱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우면서, 모든 개별 신자, 특히 선교사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나누어진 빵’이 되게 합니다.

‘나누어진 빵’인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인류

2. 오늘날 인간 사회는 비극적인 사건들에 휘청거리고 자연 재해의 참사에 산산조각이 나면서 어두운 그림자에 뒤덮여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잡히시던 날 밤”(1고린 11,23)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성찬례에서 “빵을 나누시고”(마태 26,26 참조) 모든 인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성사적 표징 아래서 당신을 내어 주십니다. 따라서 저는 “성체성사는 교회 생활에서 친교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연대의 계획”('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27항)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성체성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요한 6,33 참조)이며, 인간의 마음을 활짝 열어 커다란 희망을 품게 합니다.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마태 9,36) 가난한 군중을 보시고 연민에 사로잡히셨던 바로 그 구세주께서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류에게 수세기 동안 끊임없는 연민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사목 종사자들과 선교사들은 구원의 ‘빵’을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미지의 길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중심(에페 1,10; 골로 1,15-20 참조)”('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6항)인 그리스도와 일치될 때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만 사랑에 굶주리고 정의에 목말라하는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만 모든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나누어진 빵’이 되는 교회

3. 특히 주님의 날인 주일에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교회 공동체는 신앙의빛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며, 성찬의 희생 제사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마태 26,28) 바쳐진 것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피를 자양분으로 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선물’을 우리만을 위하여 간직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선포하도록 하고, 그러한 선포는 순교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의 최상의 봉헌이 됩니다. 성체성사로 우리는 더욱 정의롭고 형제애가 충만한 세상을 건설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투신하는 헌신적인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성체성사의 해를 계기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형태의 가난 가운데 하나라도 형제적 관심을 가지고”('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28항) 대응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기”(요한 13,35; 마태 25,31-46 참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찬례 거행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28항).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나누어진 빵’인 선교사들

4.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하고 촉구하십니다. 전 세계의 선교사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합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신 구세주의 말씀이 다시 한 번 울려 퍼집니다. 선교사들도, 때로는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면서, 그들 형제들을 위하여 ‘나누어진 빵’이 됩니다.

우리 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를 하였습니까! 그들을 본보기 삼아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영웅적인 충성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빕니다. 교회는 복음의 대의에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전교주일은 우리에게 지역 공동체와 여러 교회 기구들, 특히 교황청 전교기구와 선교회들이 수행하는 복음화 사명에 동참할 시급한 필요성을 일깨우는 좋은 계기입니다. 이러한 선교는 기도와 희생뿐 아니라 구체적인 물질적 봉헌으로도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 기회에 교황청 전교기구의 소중한 봉사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여러분께서도 정신적 물질적 협력으로 이들의 활동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가 다락방의 체험을 되살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참된 ‘가톨릭’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참된 가톨릭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이루는 긴밀한 일치”인 “선교 영성”('교회의 선교 사명', 88항)이 “성체성사의 여인”('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53항)이신 성모님을 본보기로 삼는 “성체성사의 영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공동체이며, 성령의 소리와 인류의 요구에 언제나 깨어 있는 공동체이고, 신자들, 특히 선교사들이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나누어진 빵”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모든 분께 사도로서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05년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 28, 16-20; 2004/10/24

지난 주간에 사제 피정을 하면서 묵주기도의 신비를 묵상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묵상을 하였다. 특별히 환희의 신비 4단과 5단이 새롭게 다가왔다. 예전까지는 그냥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는 성모님과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찾으신 것을 묵상했지만, 이번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4단에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아버지께 바치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살아가는데 우리가 주님께 살면서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는 기꺼이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신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바치는 것이 보잘것없어도 아주 작은 것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시고 흐뭇해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5단에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봉헌을 받아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충만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께서는 작은 우리의 봉헌을 보시고는 커다란 은총으로 사람들 앞에 주님과 주님 복음의 증거자로 세워주신다는 것을 보았다.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주님의 사제요 주님을 증거하는 신자들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되로 받으시고 말로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랄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주시고 우리의 아주 작은 봉헌에 비해 주님께서는 전적으로 모두를 베풀어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배, 동료, 후배 신부님들과 피정을 함께하고 모임을 하면서 신자들과 함께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오랜만에 주님과 형제들 안에서 행복하고 편안했다. 그러면서도 좋은 소식을 들을 때는 좋았지만,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때는 마음이 무거워져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숙제를 주시고 풀어나가도록 요청하신다는 것을 느꼈다.

산소에도 갔었는데, 일년만에 할아버지 산소 오른쪽이 떼가 떨어져나가고 흙이 패인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일년만에 이러니 내가 없으면 이 산소가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에 우울하기도 했다.

마지막날 막내 동생이, "오빠, 뭐 필요한 것 없어?"하고 물을 때, 내가 "빨리 집에 가서 쉬고만 싶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동생이 으아해 하면서 "어디가 집이야?"하고 묻길래, 내가 "내가 일하는 곳이 내 집이지"하고 대답하자. 동생들이 서운해 하는 것 같았다. 일년 동안 해외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서는 집에 간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도 나갈 때는 내가 미국에 파견 근무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기분으로 한국에 들어갔는데, 정작 내 몸과 마음은 내가 한국에 여행갔다가 돌아오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19-20)고 하셨다.

우리는 살면서 오래 전에 우리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에서 떠나 왔고, 또 앞으로도 떠나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늘나라로 떠날 것이다.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는 각자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잘 따라야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정기간 동안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그 곳에 함께 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함께 실천해 나가면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해야겠다.

늘 우리와 함께해 주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의 믿음과 봉헌을 받아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시며 축복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하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하자.




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 10, 46-52; 2003/10/26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의 폭우로 시애틀과 서부워싱턴 일대가 물에 잠겼다고 하던데 여러분 댁은 별고 없으신가요?

오늘 복음을 보면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보는 거지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47)하고 소리친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는 막무가네다. 그만큼 간절하리라.

보다못해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묻는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51) 그러자 그는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51)라고 청한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2)하시며 그를 고쳐주신다.

앞 못보는 거지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시리라는 그의 믿음이 결실을 이룬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앞 못보는 거지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주님을 바라본다. 바르티매오는 수많은 장님 중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다가가서 선택을 받았다.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바람 그리고 예수님의 선택이 기적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간절하게 청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선택을 받는 것이냐?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 제2독서를 보면 "이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히브 5, 1-6)라고 말한다. 전승에 따르면, 그 앞 못보는 거지 바르티매오는 훗날 12사도의 한 사람이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결국 주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업을 하게 된다. 스스로 보게 된 사실로 말미암아 스스로 은총을 입은 사실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은총을 내려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도 주님께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도 바르티매오처럼 사람들이 말려도 창피를 무릅쓰고서라도 주님께 받고 싶은 은총이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누구를 위한 은총이며, 그 은총이 이루어지면 누구에게 도움이 되며 여러분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오늘 바르티매오가 주님께 간절히 말씀드린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이렇게 들린다. '주님, 저를 고쳐주시고, 또 그렇게 고쳐서 주님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염원을 주님께 청하십시오. 여러분의 염원을 주님께서 꼭 들어주시리라고 믿으면서 꾸준히 그리고 간절하게 청하십시오. 그리고 그 은총을 입으시면 형제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 은총으로 입은 결과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연중 제30주일



(가해) 마태 22 34-40; 2002/10/27

한 집안에 형제들이 부모와 관계가 좋으면 형제들 서로간에 우애도 돈독하다. 그러나 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형제들끼리도 서로 헐뜯고 분란이 끊이지 않는 것을 종종 본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37-40절)라고 하신다.

요한 사도는 이웃 사랑의 근거를 하느님의 사랑과 관련하여 말한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 10-11)

그리고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 4, 19-21)

혹시 무슨 일이나 상황을 이유로 남을 판단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 45) 단지 선한 사람은 자신에게 내린 하느님의 사랑에 기뻐하며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반해 악한 사람은 자신에게 내린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며 늘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 스스로 행복하고, 선한 행위를 통해 세상에 기쁨을 선사하며 하느님 나라를 넓힌다. 악한 사람은 악에게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스스로 불행하고, 악한 행위를 통해 세상 사람들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며 하느님 나라를 좀먹게 된다.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살아가자.




연중 제30주일



(다해) 루가 18, 9-14; 2001/10/28

어떤 사람은 큰 죄를 지어서 평생 고개도 못 들고 다니는가하면, 누구는 작은 죄를 여러 번 지었어도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산다고 한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도 그런 축에 끼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마태 23, 23)라고 나무라신 적이 있다.

'바리사이'란 단어는 구분된다는 뜻이다. 결국 바리사이파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과는 구분이 될 정도로 율법을 그 조문대로 다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에 비하면 매일 미사 드리고, 아침 저녁 기도, 묵주기도, 삼종기도까지 다 드리고, 교무금, 헌금, 미사예물, 각종 후원금 등도 빠지지 않고 다 바치고, 성서 공부도 하며 구역반모임 열심히 하고 단체 활동에 혹시라도 뒤처질까 뛰는 이른바 소문날 정도로 열심한 신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세리는 누구 하나 좋아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유다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야하는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세금을 다 낼 돈이 없으니까, 세리가 먼저 자기 돈으로 내주고 그 돈을 고리대금으로 쳐서 받아가니까 사람들의 원성을 많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율법상 이자를 붙여먹을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는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악역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세리는 죄인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세리를 더 어여삐 보신다. 그 이유는 바리사이는 기도한답시고 여러 사람 앞에서 보라는 듯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로운 사람으로 치켜세우고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단죄한데 반해, 세리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 13)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은총을 받아 사는 처지에 자신을 내세울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열심도 해야 하겠지만 사회적으로도 지탄받지 말아야겠고, 스스로 부족한 점을 깨닫고 채우기 위해 겸손되이 노력해야 하겠다.




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 10, 46-52: 2000/10/29

지난 본당에서 술을 끊은 적이 있습니다. 술을 끊으니까 많은 남자 신자들이 섭섭해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의 신자들은 담배마저 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끊어야 될 것이라면 언젠가는 끊어지겠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던 중 평화방송 라디오에 출연해서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녹화 1주일 전에 담배가 손에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바랄 때 그것이 진정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가 예수님께 소리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47절) 그는 여러 사람이 말렸지만 더 큰 소리로 소리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2절)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의 믿음은 무엇인가? 소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구세주라는 것을 믿었고', 또 '예수님께 애원하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바르티매오를 바르톨로메오 또는 나타나엘이라는 12제자중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결국 소경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눈을 고쳐달라고 청한 것이 된다(52절).

우리가 진정 주님 앞에서 정당하고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기도 중의 하나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휘감아 달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웃에게 봉사하는데 필요한 재능을 달라'는 기도겠다. 사도 바오로는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 13, 8)라고 말한다.

우리 성당의 주보이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님은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저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교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 28,16-20; '99/10/24

지난 예비자 환영식 때 우리 본당에 새로 찾아온 예비자들이 30명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관찰해 볼 수 있지만,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결국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 공동체가 비신자를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이 30명밖에 안 된다는 결론이 납니다. 주셔도 우리가 받지 않아서 적은 것인지, 안 주셔서 적은 것인지. 다소 충격적인 숫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28, 19-20) 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전교하도록 명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 14) 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왜 전교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모범적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어야 합니다."라는 말로써 복음선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선교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교회 신자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에 함께 나가기 위해서 전교합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사는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진리와 이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세워 마련해 주신 천주교회가 필요하다는 진리를 확신해야 합니다"(교회의 선교사명 9항).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에 합체된 사람은 누구나 형제들에게 대한 봉사와 하느님께 대한 보답으로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증거할 특전과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11항)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령께서는 우리를 선교할 사람들에게 인도하셔서 우리에게 선교대상자를 눈에 띄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며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안내해주는 사람을 거부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기꺼이 응답하여 주님처럼 겸손하게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 선교대상자를 사랑하여 함께 교회를 이루고 성모님의 중재 아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합시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전교 주일 담화



'99/10/24



1. 해마다 돌아오는 전교 주일은 교회에 그 선교적 본성에 대하여 성찰해 볼 좋은 기회를 줍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 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교회는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선포하도록 부름받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흩어져 있는 당신 자녀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데 모으시기를 원하십니다(요한 11,52 참조).

금세기의 마지막인 올해에,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성자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하느님의 모습 그대로"([가톨릭 교회 교리서], 2779항)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아버지께 들어 높여야만 합니다. 하느님이신 스승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이러한 견지에서 해석할 때, 교회의 사도직 활동의 원천을 이해하고 교회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 근본 이유들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2. 교회가 선교하는 목적은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끊임없이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개인과 모든 민족은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신비에 싸인 하느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하느님과 똑같으신(요한 1,18 참조) 하느님의 외아들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1디모 2,4).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아버지의 자녀들임을 알고 놀라며,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할 책임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많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신자들의 잘못으로 냉담자나 무신론자가 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또 어떤 막연한 종교심을 키워서 자신의 모습을 닮은 신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을 전혀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분"(1디모 6,16)이시지만,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가까이 다가오시어 사람들이 "당신께 응답하고 당신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게"([가톨릭 교회 교리서], 52항) 하셨습니다. 이를 선포하고 증언하는 것이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3. 하느님과 만남으로 인간의 존엄이 증진되고 고양된다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기도 드립니다. 이는 곧 "저희가 아버지를 알 수 있는 빛을 받아, 아버지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엄청난 약속, 아버지의 숭고한 주권과 심오한 지혜를 깨닫게 하소서."(성 프란치스코, Fonti Francescane, 268항) 하고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통하여, 또 아직 당신의 계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거룩히 찬양을 받으시도록 기도 드리며, 하느님께서 바로 성화를 통하여 모든 창조물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모든 나라에서 거룩히 빛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는 인류와 창조물을 창조주의 계획에 참여시키고자 노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도록 하셨습니다(에페 1,9.4).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4. 신자들은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바람이 이 세상에서 그들이 맡은 일상의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 더욱 투신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주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자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첫 열매로 보내셨나이다. 성령께서는 성자의 구원 사업을 세상에서 이루시며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나이다"(로마 미사 전례서, 감사기도 제4양식).

현대 문화에는 평화, 행복, 연대, 인권 존중, 보편적 사랑의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성령의 빛을 받아 교회는 복음에 이미 선포되어 있는 정의, 평화, 사랑의 나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비롭게 실현되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참 행복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개인, 가정, 공동체들의 덕택입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현세 사회는 더 큰 정의와 연대의 지평을 향하여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교회는 또한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는 것을 선포하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에 응답합니다. "이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을 요약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밝혀 줍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822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시며,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가르쳐 주십니다(마태 7,21 참조).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5.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얻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온 인류를 결합시키는 연대와 공평의 요구도 더욱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인간의 품위와는 거리가 먼 조건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몇몇 대륙에 존재하는 빈곤과 문맹, 주택과 보건 시설과 일자리의 부족, 정치적 억압,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 사람들을 짓밟고 있는 전쟁 등을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살아 계신 참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인류를 괴롭히는 문제의 해결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제가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말씀 드린 대로 "한 민족의 발전은 돈이나 물질적 원조나 기술적 방법에서 우선적으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양심과 정신과 행동 방식의 성숙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기술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발전의 주역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찾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하느님을 백성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또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고 사랑받는 인간의 위대함과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인간의 양심을 형성합니다"(58항). 교회는 인류가 같은 아버지의 자녀이며 따라서 모두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진정한 형제애가 넘치는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이바지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인간 진보를 위한 활동을 통하여, 또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 기관을 통하여, 그리고 온갖 형태의 억압과 불의에 대한 끊임없는 고발을 통하여 발전과 평화에 협력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구체적인 기여는 복음을 선포하고, 개인과 가정, 공동체에 그리스도교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을 깨우쳐서 '더 많이 가지기'보다는 '더욱 인간답게 되는'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본연의 사명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참된 발전은 더 깊은 복음화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같은 곳).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6. 교회는 선교 활동에서 말로써만이 아니라 특히 선교사들과 하느님 백성의 성덕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실제로 확인시켜 주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만인 선교의 새로운 자극은 거룩한 선교사를 요구합니다. 사목 방법을 쇄신하거나, 교회의 역량을 조정하거나 신앙의 성서적 신학적 기초를 더욱 깊이 파고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선교사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 성덕에 대한 '새로운 열성'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90항).

신자들은 갖가지 끔찍한 죄의 결과에 맞서 용서와 사랑의 징표를 제시할 의무가 있습니다.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신자들만이 너그럽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는 하느님 사랑의 최고 형태 가운데 하나이며, 끈기 있게 청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7.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죄가 존재해 왔습니다. 죄는 피조물과 하느님의 원초적 유대를 끊어 버리고, 죄를 지은 개인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에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수많은 형태의 죄와 악이 흔히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회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이 "정보와 교육의 주요 도구가 되었고, 개인과 가정과 사회의 행동 규범과 발상의 주요 도구"([교회의 선교 사명], 37항, 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 활동은 개인과 모든 민족에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며 그의 죄를 잊으시고 평온과 평화를 되찾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참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선으로 이길 힘을 주시고, 당신 사랑에 응답하는 이들에게 세상 구원에 참여할 능력을 주십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8. '주님의 기도' 마지막 청원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죄의 길에 들어서지 않게 해 주시고,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악은 흔히 하느님의 계획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구원을 방해하는 인격적 존재인 사탄이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악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에 구원의 소식을 전하도록 부름받았음을 알기에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 세상의 권력자(요한 14,30 참조)를 이기신 것처럼 자신도 일상사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권력과 폭력의 논리에 지배되는 사회 상황에서, 교회는 증오와 복수, 이기주의와 무관심을 녹여 버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의 힘을 증언할 사명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몸값을 치른 그리스도인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 작은 양떼가 전세계에 파견되어, 비록 인간적인 수단은 빈약하지만 어떠한 힘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인류의 누룩이 될 것입니다.

맺는말

9.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전교 주일은 우리 각자에게 공동의 선교 사명을 더욱 강조할 기회를 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공동의 선교 사명을 통하여 화해와 평화를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됩니다. 구원의 사명은 보편적입니다. 곧 개개인과 모든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 전체와 모든 신자에게 해당되는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에 대한 열정을 지녀야 합니다. 곧 세상을 구원하려는 열정을 지니고 아버지 나라가 오게 하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 주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여야 하며, 구세주의 고통과 하나 되어 자신의 고통을 바쳐야 합니다. 또한 선교 협력 기구를 지원하기 위한 개인적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저는 교황청 전교 기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이 기구에서 하는 일은 선교를 위한 기도를 권장하고, 선교 활동을 장려하며, 복음화 활동을 위한 기금을 모으는 것입니다. 교황청 전교 기구는 인류복음화성과 긴밀히 협력하여 일합니다. 인류복음화성은 개별 교회, 그리고 교회 공동체 전체의 다양한 선교 단체와 뜻을 모아 선교 노력을 조정합니다.

우리는 오는 10월 24일에 한 천년기의 마지막 전교 주일을 거행합니다. 지난 천년기 동안 교회의 복음화 활동은 참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미래로 눈을 돌려 가슴을 열고 새 날의 새벽을 기다리며 선교사들이 이룬 엄청난 업적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 드립시다.

교회의 전초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도성의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파수꾼아, 얼마나 있으면 밤이 새겠느냐?"(이사 21,11)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들어라, 저 소리, 보초의 외치는 소리.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하느님과 눈이 마주쳐 모두 함께 환성을 올리는구나"(이사 52,8) 하고 대답합니다. 지구 곳곳에서 그들의 무수한 증언이 울려 퍼집니다. "인류 구원의 제삼천년기가 임박한 이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봄을 준비하시고 우리는 이미 그 새벽을 보고 있습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86항).

샛별이신 성모 마리아님, 우리가 언제나 새로운 열정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예" 하고 따르도록 도와 주시어, 온갖 말을 쓰는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소서(이사 66,18 참조).

이러한 바람으로 저는 선교사들과 선교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이에게 기꺼이 사도좌에서 특별한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1999년 5월 23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9년 전교의 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선교위원장 담화문



'99/10/24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강생 2000주년을 눈앞에 두고서 이번 10월을 기하여 금세기 마지막 전교의 달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1922년에 교황 비오 11세께서 처음으로 전교의 달을 선포하신 이후 성교회는 지금까지 해마다 전교의 달을 지내면서 복음 선교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실천해 왔습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도 1970년부터 해마다 10월 전교의 달을 맞이하여 교회의 복음 선교에 대하여 새롭게 묵상하고 그 중요성을 깊이 있게 인식하여 민족과 사회의 복음화 활동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특별히 1970-80년대에는 한국 사회가 요청하는 시대의 징표(마태 16,3)를 받아들여, 한국 사회 안에서 빛과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고 물질적 풍요로움이 도래하자,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열기가 식어 가고 이와 맞물려 있는 복음 선교에 대한 관심이 약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복음 선교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복음 선교를 해야 함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교회는 태어날 때부터 복음 선교를 위하여 태어났고, 선교 행위는 교회의 주변적 외곽 요건이 아니고, 교회의 본성(선교 교령, 2항 참조)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이러한 복음화를 그 어느 때보다도 갈망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 시대를 가치관이 전도되고 도덕과 윤리가 부도 당한 시대라고 일컫습니다. 이것은 가치의 기준이 그 자리를 잃고 도덕과 윤리의 제반 가치가 명목상으로는 인정되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선조들로부터 이어오던 미풍양속과 가치들이 위협 당하고 도외시 당하면서, 많은 사람이 전통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현시적인 결과에만 연연하고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배금주의에서 비롯된 황금 만능주의와 물질주의는 하느님 모습으로서의 인간 품위와 존엄성마저 적지 않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족 구성원간에 또한 이웃간에 물질과 재화에 대한 욕심이 개입되면서 가정이 무너지고 어린이들이 버려지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 아픈 상처를 남긴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주 그리스도의 말씀이 땅위의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고 실제 생활에 영향을 미쳐 삶 전체가 복음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03위 성인을 포함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대단히 어렵고 열악한 교회 상황과 가혹한 박해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 말씀을 실천하며 전파하였습니다. 그분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우리가 오늘날 복음 선교를 위하여 또는 신앙 생활을 위하여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그렇게 큰 어려움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다른 나라와 달리 선조들이 스스로 신앙을 찾아서 후손들에게 물려 줌으로써 좋은 신앙의 토양을 갖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노력한 만큼 분명한 결실이 나타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같은 현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민족 복음화에 매진할 수 있도록 특별한 기회를 허락하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이승훈(베드로) 선조께서 처음으로 북경에서 세례 받은 이후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선교하기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이러한 복음화의 호기를 소극적으로 응답하여 허송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일찍이 성 바오로 사도께서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1고린 9,2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도 그대로 실천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근 국내 교회 안에서 들불처럼 번져 가는 예비신자를 위한 "새로운 가족 찾기 운동"과 냉담자를 위한 "우리 가족 찾기 운동" 등은 우리 교회 복음화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펼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같은 선교 활동은 체험 부족으로 쉽게 신앙을 잃어버리는 교우들에게 신앙 체험을 얻는 소중한 기회가 되고 있어 신심 운동으로 정착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전국 교구와 본당 신자들과 각 단체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러한 선교 열의와 선교 활동이 항구하게 계속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애써 뿌리는 신앙의 씨앗만큼, 내일의 우리 후손들이 신앙의 유산을 꽃피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누리는 신앙 생활의 자유와 선교 활동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 보편교회의 지향대로 하나의 인류 가족인 세계 만민을 위해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노력합시다. 지금까지 받기만 하던 우리 교회도 이제는 명실공히 세계 교회와 함께 나누는 교회로 성숙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대단히 어려웠던 시절 외국의 다른 교회로부터 많은 물질적, 영신적 도움을 받았듯이, 우리도 이제는 보은의 정신으로 여전히 어렵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곤란한 처지에 있는 다른 나라 교회를 도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사제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 비하여, 짧은 시기 안에 신학교 수가 7개로 증가하는 등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에 베풀어 주시는 이러한 은총들이 오직 우리 한국 교회만을 위해서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루가 21,2 참조)처럼 없는 가운데서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울러 정성어린 기도와 아낌없는 희생으로써 오지에서 선교 활동에 여념이 없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영적, 물적으로 지원하는 데 동참하도록 합시다. 이러한 노력이 우리 신앙 선조들이 목숨 바쳐 귀하게 물려준 신앙 유산을 세계 만방에 꽃피우는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격려하시오"(2디모 4,2).

1999년 10월 1일

포교 사업의 수호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선교위원회 위원장 최 덕 기 주교




연중 제30주일



(다해)루가 18,9-14: '98/10/25



사도 바오로는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정의의 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디모 4,7-8)라고 말합니다. 얼른 듣기에는 조금 교만스럽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이렇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이유를 주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히 선포할 수 있었고 그 말씀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2디모 4,17) 이러한 바오로의 확신에 찬 믿음은 또한 바오로의 희망입니다.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어 구원하셔서 당신의 하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2디모 4,18)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족과 나약함이 드러나면 자신이 초라해지고 버림받을 것 같아서,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화를 내거나 허풍을 떨어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저것을 소유하거나 이런 저런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부족분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채워진 것같이 느끼지만, 자신의 공허함과 내면의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근원적인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약성서의 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그의 간청은 하늘에 다다를 것이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소리는 구름을 꿰뚫는다. 또한 그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다."(집회 31,20-21) 끊임없이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과 애정으로 살아나가십시오. 내 집이나 내가 사는 곳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거나 내 노력으로 복음이 조금 이루어졌다고 만족하지 말고, 과감히 사회와 민족의 복음화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주님, 저를 사랑해주시고, 저에게 오셔서 저를 다스리소서. 제 마음과 생각, 제 의지와 행동을 주님의 사랑으로 정화시켜 주시고, 저에게 주님의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 저를 주님의 도구로 써 주시고, 저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셔서 저희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의로운 사람의 무고함을 판단하시어 그를 돌보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 주님께서 지체 없이 오실 것이다."(집회 31,21-22)




연중 제30주일



(나해) 마르 10,46-52: '97/10/26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우리 세대에 희망이 있는가?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4-25)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로마 8,23)까지이다. 희망은 영혼의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은 갈증에서 온다. 그리고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피어난다. 그리고 그 희망은 그 갈증을 풀어주실 분께로 향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경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줄 이가 예수님이라고 믿어 주님께 청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르 46,47) 앞 못보는 삶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48절) 그는 너무나 애절하여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48절)

사람들의 멸시와 제재에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보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과 또 이번 기회에 나를 고쳐 주실 수 있는 이분에게 청해서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확신과 굳은 의지가 마치 사생결단 하듯 달려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소경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는 그를 고쳐주시며 말씀하신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2절?) 주님은 소경이 낳게 된 것을 그의 믿음 탓으로 돌리신 것이다.

나와 우리 가족이, 우리 구역·반이, 우리 사회가 이것만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애타게 기다리는 염원이 있는가? 그리고 그런 우리의 염원이 주님께서 들어주시면 현실에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염원이 주님께 사생결단을 하듯 달려들게 할 만한 간절한 희망으로까지 승화되어 있는가? 그러면 우리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자! 매일 미사를 통해서, 묵주의 9일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주님과의 채널을 다 맞추어서 기도하자. 우리의 염원과 이 시대의 아픔을 겪는 이들과 북녘의 굶주리는 형제들과 우리의 이기주의와 욕심에서 해방되어 전쟁과 굶주림 없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그분이 너를 부르신다."(49절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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