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다해) 루카 20, 27-38; 16/11/06


지금도 잊지 못하는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날엔 우리나라에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지만 한 20여 년 전만 해도 장마철에 비가 오면 하수시설이 제대로 안 된 곳에서는 빗물이 역류해서 집안으로 물이 들어 닥치는 곳이 많았습니다.

어느 가난한 동네에서 보좌신부로 재직 중이었는데, 집주인과 세입자가 모두 신자인 집이 있었습니다. 세입자인 처녀의 이름은 카타리나라고 아주 신실한 신자였고, 매주 빈첸시오 활동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비가 많이 오기 시작했답니다. 그 집은 셋방 높이가 주인집 마루보다 낮았답니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혹시 카타리나가 일 나간 사이에 비가 와서 물이 넘쳐 카타리나의 방에 물이 들어가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카타리나에게 “귀중품은 우리 집 마루에다 옮겨 놓고 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답니다.

여러분은 그럴 경우에 무엇을 들고 나오겠습니까?

여러분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것을 대비하기 위하여 어떤 행동을 취하겠습니까?

정작 그 카타리나가 귀중품이라고 들고 나온 것은 성서와 십자가와 성모상이었답니다. 그 주인 아주머니는 텔레비젼이나 냉장고라도 가지고 나올 줄 알았는데, 카타리나가 성서와 십자가와 성모상을 들고 나오길래, 하도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도 신자지만,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정작 예상대로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답니다. 그 때 카타리나는 일 나가고 없고, 어느새 물이 카타리나의 셋방으로 넘쳐 들어가려고 출렁거리고 있었답니다. 그 순간 그 주인집 신자는 하도 마음이 급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답니다. “오, 카타리나의 하느님, 우리 착한 카타리나의 하느님, 카타리나가 없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합니까? 제발 멈추게 해주십시오. 카타리나의 방에 물이 넘칩니다.” 그랬더니 우연인지 하느님께서 주인집 아주머니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비가 그치고 물이 그냥 빠졌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본당 구역 모임에서 그 주인집 신자가 오늘 이 복음 말씀을 읽고 자기의 실생활의 체험을 나누어주었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카타리나는 그나마 자기가 살던 집 전세금을 빼 빈첸시오회에 기부하고 떠나,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루카 20,37) 라고 예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의 주인을 초대하는 것이요, 현존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를 인격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현존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부르면서, 아브라함이 살아 생전에 아브라함과 함께해 주시면서 아브라함을 지켜주고 살려주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 오늘 다시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부르는 그 후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그대로 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하느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유다인들에게, 선조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께서 빌었던 조상들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38절) 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죽은 후의 부활만이 아닌 지금 여기서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위령의 달 첫 주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부모님들과 일가친척들과 우리가 기억하는 영혼들이 주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아껴주시고 돌보아 주셨던 은인들과 후원자분들에게도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공과 덕을 갚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선생님과 동네 어르신 분들과 이웃사촌들, 특별한 인척관계에 놓여있지 않았으면서도 같은 동네와 같은 사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편들어 주고 감싸주셨던 형, 누나, 친구, 동생들, 말없이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셨던 분들, 은인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보다 나은 환경과 조건을 이루기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 이제는 우리가 갚을래야 갚을 수도 없게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그분들을 주님께서 그 공로를 인정해주시고 그 아픔들을 몸소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고 생전의 희생들을 다 채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나눠줄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받은 만큼 나누어 준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주님의 은혜와 동 시대를 살면서 받아왔던 그 많은 혜택과 대우들을 하나씩 되새기면서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우리만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의 벗이 되어줍시다. 주님께서 직간접적으로 여러 익명의 수호천사들을 통해 내게 베풀어주신 은총이 무엇이었는지 되새기며 그 은총을 되갚으면서 살아갑시다.

그래서 주님 앞에 살아있습시다.

오늘 우리 눈과 귀를 통해 도와달라고 청하는 이들의 호소를 모른 체 함으로써, 주님과 형제들 사이에서 마치 없는 사람들처럼, 죽은 이들처럼 외면하지 말고, 고통의 순간에 기꺼이 응답하여 사랑을 나누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주님 사랑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됩시다.

유다인들은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조상들의 하느님 이름을 부른다고 하는데, 우리는 기도할 때 누구의 하느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아울러 누가 내 이름의 하느님을 부르며 주님께 간구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비록 우리가 세상풍파를 헤쳐 나가느라고 바쁘고 힘겹지만 그러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잘 새기고 형제자매들과 증거하고 나누며 살아감으로써, 먼 훗 날 주님 대전에 섰을 때 오늘 우리가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우리의 변호자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찬미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연중 제32주일

(나해) 마르 12,41-44; 15/11/08


지난 달에 ‘오펀 블랙’(Orphan Black)이라는 미국 드라마 1부를 보았습니다. 고아인 줄 알았던 한 여인이 자신과 똑 같은 여인 8명이 있는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1부 마지막 편에서 자신들이 지적재산권으로 상표등록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하느님 나라의 명부에는 내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 명부에 나를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적어 놓으셨을까? 아니면, ‘기특한 놈’이라고 적어 놓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사랑을 베풀어주셨는데, 나는 지금 주어진 은총에 감사드리며 그 사랑과 은총을 되갚아 드리기 위해 교회와 가난한 이웃들에게 헌신하고 있는지? 아니면, 탐욕과 투정 속에서 스스로를 닦달하며 불평과 불만 속에서 하루 하루를 불행하게 살고 있지 않은지 위령성월을 맞아 새삼 되돌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현실에서 육체적인 소멸로서의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없다.”(시편 39,14; 욥 7,8.21; 7,10) “이제 그만이다.” 라는 말 속에 표현되듯이 지상 생애의 끝입니다. 죽음은 인류의 공통된 숙명이며,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1열왕 2,2; 2사무 14,14; 집회 8,7 참조) 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죽음 앞에서 인생은 한갓 그림자요, 하나의 숨결, 허무일 따름이라고 한탄합니다(시편 39,5-7; 89,48-49; 욥 14,1-12; 지혜 2,2-3). 인생은 헛되다! 모든 인간, 심지어 왕에게까지도(집회 10,10) 마지막 운명은 다 같다고 봅니다(전도 3; 지혜 49,8 이하).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

그렇다면, 삶이, 죽음에 대항하는 고뇌에 찬 투쟁에 불과한 것인가?

성경은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기에(지혜 1,13) 인간을 불사불멸의 존재로 만드셨지만, 악마의 시기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봅니다(지혜 2,23-24). 악마의 유혹에 빠져 짓게 되는 죄는 우리의 본성과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악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우리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음의 독침은 죄”(1코린 15,56; 호세 13,14) 라고 합니다. 죽음은 죄의 열매이고, 결과입니다(로마 6,16.21.23). 죄의 공범자는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탐욕이며(로마 7,7), 그 탐욕은 죄를 낳고 죄는 자라서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로마 7,5; 8,6).

그런데, 죽음이 죄의 결과라면, 현세에서 죄 없는 의인의 죽음은 무엇인가?

구약은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이사 52,13-53,12)에서 의인의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고(요한 12,27; 13,21; 마르 14,33; 마태 26,37) 죽음을 피하고 싶어하셨지만(히브 5,7; 루카 22,42; 요한 12,27),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마르 14,36; 마태 26,39; 루카 22,42)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립 2,8)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마르 10,38; 14,30; 마태 20,22; 26,34; 루카 22,34; 요한 18,38).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갈라 3,13 참조) 인류의 죄가 받아야 할 벌을 그리스도께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로마 6,10)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 던져버린 대사제 카야파의 말처럼 “백성을”(요한 11,50-52; 18,14) 위하여, 즉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2코린 5,14)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죄인이었는데도(로마 5,6-8)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1테살 5,10)

초대교회는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사도 2,31-32) 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생존의 말씀처럼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4-5)

세례로 죽고 주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무능력하게 받아들여만 하는 불가피한 숙명이나 자신의 죄로 인한 단죄만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로마 14,7-8; 필립 1,20 참조)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우리의 희생은 그 가치를 지니고(필립 2,17; 2티모 4,6),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요한 21,19), 생명의 화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묵시 2,10; 12,11).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묵시 14,13) 그들은 고난이나 파멸이 아니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지혜 3,2.3)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라고 확신에 가득 차서 전한 말처럼,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4)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3.26) 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저지르는 모든 악행에서 벗어나, 주 예수님께서 내어주신 새 생명으로 다시 시작하여,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처럼,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성령께 의지하여 현실사회에서 주님의 계명인 ‘사랑의 복음’을 이루어나가는 일이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신앙’을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로마 6,11-13)




연중 제32주일

(나해) 마르 12,38-44: 2012/11/11

예전에 어떤 할머님이 제가 신부인 줄 모르고 제 옆에 앉아서 이말 저말 하시더니, 갑자기 “천주교에 다니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그 할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돈이 제일 적게 든답니다.” 였습니다. 종교와 돈을 연관시켜 ‘좋다.’ 또는 ‘나쁘다.’ 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냐의 여부는 둘째로 치더라도, 언제부터인가 “돈 없으면 성당에도 못 간다.” 는 말이 새삼 부담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헌금한 과부를 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액수보다도 그 헌금이 자기 수입에서 차지하는 정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봉헌금을 십일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내가 진정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는 과부와 같다면,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사렙타 마을의 과부처럼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 과부는 나그네인 예언자 엘리야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흉년에도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1열왕 17,12-16).

신자 개개인의 헌금뿐만 아니라, 교회의 이웃돕기 항목인 찬조비도 봅시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면, 한불 수호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 본당을 설립할 때 '고아원'과 '양로원' 그리고 '시약소'(지금의 보건소)를 함께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재정 형편이 나은 곳에서는 학교와 병원을 설립해 운영했습니다. 이는 그 시대의 사회가 교회에게 그러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였고, 교회는 그러한 사회인들의 생활형편을 접하며 시대의 징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는 구한말이나 일제시대 그리고 6.25전쟁 전·후 때보다 재정적으로 더 풍요롭습니다. 과거 본당마다 운영하던 사회복지시설은 지금 교구 사회복지회나 수도회 또는 뜻있는 평신도가 맡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 각 본당 재정에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지출했던 액수가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만일 그 자리를 교회의 유지와 운영 그리고 행사비와 단체보조비가 대신 차지하고, 예산의 10%만을 이웃돕기 명목으로 책정한 것에 자위하고 있다면, 아니 그것도 본당 재정으로 다 쓰고 모자라서 이웃돕기에 쓰지 못한다면, 교회가 사명은 실천하지 않고 신자들끼리 나눠먹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성하게 해줍니다.

사회의 필요와 아픔에 응답하지 않는 교회와 신앙과 영성은 위선과 허위가 될 위험에 처해집니다. 한국 교회 각 본당이 자기 동네의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환자를 비롯한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거나 사회문제에 응답하기 위한 사회복지시설을 직접 운영하거나 전적으로 후원하면서 사명을 실현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교회의 표징을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면 좋겠습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연중 제32주일

(가해) 마태 25,1-13; 11/11/06

지난 주일 국수 맛있게 드셨습니까? 그렇게 맛있는 국수를 먹어보긴 참 오래간만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에게 맛있는 국수를 제공해주심은 물론 그 동안 본당을 위해 수고하고 계신 사목협의회원들과 직원들 그리고 구역반장님들을 비롯한 봉사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본당을 위해 알게 모르게 뒤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고 계신 봉사자분들을 위해 박수로 감사의 인사를 보냅시다. <*^__^* 박수, 박수 *^__^*>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난 11월 2일 위령의 날 셋째 미사를 드리기 위해 용인 성직자 묘지를 찾았습니다. 누워 계신 신부님들 중에 이젠 아시는 분들이 부쩍 많이 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함께 지구 사제 모임에서, 사제들의 각종 모임에서 뵙고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땅 속에 누워계신 것을 바라보면서, ‘아, 이렇게 가는 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제는 너, 오늘은 나”라고 하시던 선배 신부님들의 말씀이 머리 속을 맴돌았습니다.

최근에 죽음과 연관하여, 제주도에서 구역반장님들과 올레길을 따라 언덕을 넘고 넘어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중에 피정지도 신부님께서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겨우 열 명이 타면 꽉 차는 연안 낛시배 정도의 크기의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부제품을 받고 육로로 귀국하기 위해 한 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다가 정신을 잃고 환시처럼 나타난 어느 여인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 그나마 출발점인 중국으로 간신히 돌아갈 수 있었고, 또 라파엘호라고 하는 앞의 그 조그만 배를 타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주교님을 모시고 귀국의 길을 밟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면서도 새삼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강론 말씀을 들으면서 ‘전 세계에 사제생활 할 곳이 그렇게 많은데, 당시 선진국이라고 하는 프랑스 신부님들에게 배웠으니 프랑스로 가서 사제생활을 해도 좋았을 텐데, 고국이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좁아 더 크고 잘 사는 나라에 가서 사제생활을 하면 더 좋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죽을 줄 뻔히 알면서 그야말로 잡히면 죽게 될 고국을 죽음의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까지 오고 싶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조선에 들어오면 박해를 받아 죽을 것이 뻔한데, 왜 굳이 죽을 고생을 하면서까지 죽으러 왔는가? 도대체 무엇이 김대건 신부님과 순교자들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주님과 복음과 교회에 헌신하도록 했는가?’

하루 종일 김대건 신부님과 정난주 마리아 성녀의 묘소를 순례하며, ‘과연 내 인생을 통해 나는 무엇을 위해 생명을 바치고 있는가? 내가 생명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내 생명을 죽을 때까지 바치겠는가? 그리고 죽기까지 무엇을 위해 내 삶을 불태우며 헌신하겠는가?’하는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를, 무엇을 위해 불태우고 계십니까?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다 바쳐가면서 우리가 현실에서 헌신하고 있는 것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정녕 우리를 영생에로 이끌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진정 주님 안에서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지금 헌신하고 있는 것이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혹여 부질없는 일이거나 후회할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에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밤늦게 오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다섯 처녀는 어리석어 기름을 조금밖에 준비하지 못해 신랑이 막상 왔을 때 기름을 사러 가는 바람에 신랑을 직접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신 처음부터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만 신랑과 함께 문을 닫고 혼인잔치에 들어갔다고 하십니다. 얼핏 생각하면 야박하다고 느낄 법합니다.

그런데 만일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밝히며 준비해야 하는 기름이 정작 우리가 남에게 나눠줄 수도 나눠 받을 수도 없는 인격이나 공덕이라면, 그리고 혼인잔치의 문이 닫히고 열리는 것이 그 누구의 선택으로 결정되지 않는 우리 죽음의 때라면, 우리는 시간과 주님을 탓하기 보다는 우리 생의 결과임을 자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마지막 날 우리 스스로 대면해야만 하는 우리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자비를 입어 우리가 두려워하는 극형을 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상황을 면하거나 지울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주님이 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1테살 4,14).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죽음으로 대표되는 현실과 물질이라는 한계에 굴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죽음을 넘어 갑시다.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연중 제32주일

(다해) 루가 20, 27-38(27. 34-38); 2004/11/07

오늘은 옛날 이야기를 한 마디 하고 싶다. 지금은 한국에도 그런 일이 없지만 한 10여 년 전만 해도 장마철에 비가 오면 하수시설이 제대로 안 된 곳에서는 빗물이 역류해서 집안으로 물이 들어 닥치는 곳이 많았다.

보좌신부 때였는데, 한 번은 집주인과 세입자가 모두 신자인 집이 있었다. 그런데 세입자인 처녀는 가타리나라고 아주 열심한 신자였고 매주 빈첸시오 활동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하루는 비가 많이 오자 집주인 아주머니가 혹시 일 나간 사이에 비가 와서 물이 들이쳐 방에 물이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귀중품은 자기 집 마루에다 옮겨 놓고 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단다. 그 집은 셋방이 주인집 마루보다 낮았단다. 여러분은 그럴 경우에 무엇을 들고 나오겠는가? 이 위령성월에 여러분이 정작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랬더니 정작 그 가타리나라는 신자가 귀중품이라고 가지고 나오는 것이 성서와 십자가와 성모상이었단다. 그 주인 아주머니는 텔레비젼이나 냉장고라도 가지고 나올 줄 알았는데 가타리나가 성서와 십자가와 성모상을 들고 나오길래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했단다. 자기도 신자지만 그럴 줄은 몰랐단다.

그런데 하루는 정작 예상대로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단다. 그 때 가타리나는 일 나가고 없고, 어느새 물이 가타리나의 셋방으로 넘치려고 출렁거리고 있었단다. 그순간 그 주인집 신자는 하도 마음이 급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외치게 되었단다. "오, 가타리나의 하느님, 우리 착한 가타리나의 하느님, 가타리나가 없는데 비가 오면 어떻게 합니까? 제발 멈추게 해주십시오. 가타리나의 방에 물이 넘칩니다." 그랬더니 우연인지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비가 그치고 물이 그냥 빠졌단다.

그 때 그 본당 구역 모임에서 그 주인집 신자가 오늘 이 복음 말씀을 읽고 자기의 실생활의 체험을 나누어주었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37)고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의 주인을 초대하는 것이요, 현존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를 인격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현존케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부르면서, 아브라함이 살아 생전에 아브라함과 함께해 주시면서 아브라함을 지켜주고 살려주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 오늘 다시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부르는 그 후손들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그대로 나타나셔서 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도 유다인들에게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께서 빌었던 조상들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38)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죽은 후의 부활만이 아닌 지금 여기서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라고 가르치신다.

오늘 위령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부모님들과 우리가 기억하는 영혼들이 주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청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비록 우리가 세상풍파를 헤쳐 나가느라고 바쁘고 힘겹지만 그러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잘 새기고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주님 앞에 살아 있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연중 제32주일

(가해) 마태 25 1-13; 2002/11/10

SBS TV의 드라마 스페셜-장영철, 정경순 극본, 정세호 연출의 '정'이라는 수목 드라마가 있다. 지난 수요일까지 방영된 3회분을 보면, 보통이 되자고 외치면서도 보통이상을 바라는 홀아비 시아버지와 혼자인 시이모 그리고 가족의 인정을 받기 위해 대박을 꿈꾸는 둘째 아들과 동거녀, 배우로서의 입신양명만을 위해 가족과 관계를 맺는 셋째 딸과 애인, 형제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나는 어린 막내 아들 그리고 주인공 부부가 있다. 드라마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가족을 두고 좋지 않게 떠나버린 시어머니도 있다.

제작진이 설정한 주인공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조씨 집안에 시집 온 부인이자 새 며늘아기며 형수다. 그녀는 암에 걸려 고생하면서도 가족에게 자기 병을 숨긴 채, 인간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이유에서든지 언젠가는 떠나기 마련이니까, 떠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하자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최선은 사랑인데, 서로 자기의 편익을 위해 가족에게 요구하지 말고, 가족 구성원 하나 하나의 됨됨이와 그의 삶을 인정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잘 될 수 있도록 배려해주자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이별의 상황을 앞두고 가족 하나 하나를 보듬으려는 며늘아기를 중심으로 현대 사회 안에서 가족의 관계와 의미를 어떻게 설정하고 또 풀어나가려고 하는지 제작진의 메시지가 궁금하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떠난 후에 우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리고 떠난 다음에 어떻게 변화될까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과거가 될 오늘과 오늘이 미래가 되 버린 과거와의 연관성 안에서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 다시 살피게 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처녀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로 떠나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말씀하신다. 어느 날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닥쳐온 마지막 순간에 다른 누구와 나눠 줄 수도 나눠 받을 수도 없는 자기만의 인생이 어떤 모습일까? 우리 인생의 궤적들이 함량미달과 부정품이어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라고 간청해야만 하는 미련한 처지일까 아니면 기꺼이 주님의 품안에 안기게 될 슬기로운 처지일까?

죽으면 끝이 아니라 하늘 나라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영으로 살게될 우리들의 운명 앞에 오늘이 우리에게 하늘 나라를 향한 기회인지 또는 우리 파멸의 장애일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 13)



연중 제32주일

(다해) 창문을 여세요-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시노드; 01/11/11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즉위하시자 마자 "바티칸의 창문을 여세요"라고 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세상 속에서 교회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뜻이었고, 이로써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공의회는 주교님들의 모임이다. 교회 역사상 주교님들은 공의회를 통해 신앙과 윤리와 규범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면서 전 세계 가톨릭 교회가 나아갈 방향과 전망을 잡아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은 신앙의 원천인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인 성전을 새롭게 깨닫고, 이것을 변화된 현대 세계 안에서 다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본연의 임무인 기쁜 소식을 전하며, 세상에서 인류 구원의 사명을 지속해 나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와 교회, 계시 및 사목에 대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을 문헌으로 남겼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고 한국교회는 제대와 신자석을 가로막던 난간을 제거하고, 라틴어로 드리던 미사를 모국어인 우리 한글로 바치게 되었고,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복음화에 기여하고, 타종교와 대화하기 시작했으며 개신교와 함께 성서를 함께 번역하여 지금 우리가 쓰는 '공동번역 성서'를 출간했다.

우리는 지금 시노드를 통해, 226개 본당에 신자 134만 명과 사제 886명, 수도자 2,382명의 우리 서울교구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공의회의 정신에 비추어 지역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실천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복음서의 '하느님 백성' 과 바오로 사도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제시한다. 몸의 지체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한 것처럼, 하느님 백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자기 성소에 확신을 가져야 하겠고, 평신도들은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각자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 성직자, 수도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한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수행한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세고, 사제직은 하느님께 스스로를 봉헌하는 것이며, 예언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우리가 교회라는 의식을 가지고 시노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시노드를 통한 우리 서울교구의 쇄신 작업을 성령께서 잘 이끌어 주시도록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연중 제32주일

(나해) 마르 12, 38-44: 2000/11/12

예수님께서는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과부를 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는 어느 누구보다고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43-44절)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액수보다도 그 헌금이 자기 수입에서 차지하는 정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리는 봉헌금을 십일조에 비유하기도 한다. 내가 진정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는 과부와 같다면,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나오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 과부는 나그네인 예언자 엘리야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흉년에도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우리가 신자 개개인의 헌금에 대해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십일조도 보자.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보면, 한불 수호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은 후에, 한국교회는 본당을 설립하면서 동시에 '고아원'과 '양노원' 그리고 '시약소'(지금의 보건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재정 형편이 나은 곳에서는 학교와 병원을 설립해 운영하였다. 이는 그 시대의 사회가 교회에게 그러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였고, 교회는 그러한 사회인들의 생활형편을 접하며 시대의 징표를 본 것이다.

지금 교회는 구한말이나 일제시대 그리고 6.25전쟁 전·후 때보다 재정적으로 더 풍요롭다. 과거 본당마다 운영하던 사회복지시설은 지금 교구 사회복지회나 수도회 또는 뜻있는 평신도가 맡고 있다. 그러면 과거 각 본당 재정에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기 위해 지출했던 액수가 지금은 어디 있는가? 만일 그 자리에 교회의 유지와 운영 그리고 행사비와 단체보조비가 대신 차지하고, 예산의 10%만을 이웃돕기 명목으로 책정한 것에 자위하고 있다면, 아니 그것도 본당 재정으로 다 쓰고 모자라서 이웃돕기에 쓰지 못한다면, 교회가 사명은 실천하지 않고 신자들끼리 나눠먹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회의 필요와 아픔에 응답하지 않는 교회와 신앙은, 영성은 위선과 허위가 될 위험에 처해있다. 한국 교회 각 본당이 자기 동네의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환자를 비롯한 어려운 이들이나 사회문제에 응답하기 위한 사회복지시설을 직접 운영하거나 전적으로 후원하면서 사명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연중 제32주일

(가해) 마태 25, 1-13; 99/11/07

요즈음 심심찮게 신문 방송에서는 Y2K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Y2K 문제는 컴퓨터의 2000년 표기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현대 세계 생활 심지어는 물, 전기, 연료 등의 필수품마저 컴퓨터로 제어되고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컴퓨터가 21세기에 작동하지 못하게 되면 인간에겐 재앙이 닥친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1999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1월 4일까지 5일간의 비상식량, 비상식수, 비상에너지 등을 준비해야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우리가 마치 죽음을 앞둔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위령 성월인 지금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교황님께서는 10월 26일자 세계 노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엄숙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울러 이 세상에 두고 가는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에게 주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어디 누구 하나 의지할 데 없어 황량한 벌판 같은 곳에 서 있는 느낌이 우리를 전율케 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연상케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두려움과 막막함. 불안과 초조 그러다간 모두 정신병에 시달리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1데살 4, 13-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희망이시기에 오늘도 무난히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깨어 준비"(마태 24, 44. 42)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준비는 등잔을 밝힐 기름처럼 우리의 주님 사랑을 밝히 드러내줄 이웃 사랑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 우리를 사랑에로 초대하듯이 2000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선택한 준비는 2000년대를 향한 복음화 운동입니다. 구역반모임을 통한 복음나누기와 실현 그리고 그 실현방법으로서의 예비자 선교와 이웃돕기입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불안과 불신을 극복하고 복음화를 이룹시다.



연중 제32주일

(다해) 루가 20,27-38(27.34-38) : 98/11/08

하루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어느 신자 자매님의 집에 물이 들어왔답니다. 세든 집 방에 물이 넘쳐들을 것 같아서, 그 자매를 불렀답니다. "카타리나, 물이 넘쳐 들어올지 모르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 마루에라도 옮겨 놓지!" 그런데 정작 그 자매가 들고 나온 것은 텔레비젼같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성서였답니다. 며칠 후 비가 또 쏟아졌는데 그때 그 자매가 집에 없었답니다. 물이 그 자매의 문지방에 찰랑 찰랑 넘치려고 할 때 소리쳤답니다. "카타리나의 하느님, 카타리나의 하느님, 우리 착한 카타리나의 하느님, 카타리나가 집에 없어요. 물이 그만 들어오게 해 주세요!"

저는 이 자매의 말을 들으면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루가 20,37)이란 말이 어떻게 나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착한 카타리나가 믿는 하느님 그리고 착한 카타리나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셨던 하느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착한 카타리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착한 카타리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오늘의 이 어두운 세상에서도 주님의 자녀로서 살도록 해 주시는 하느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하는 외침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20,37ㄴ-38) 우리는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하느님,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마저 우리 죄의 대가로 받아주신 하느님, 그리고 죄없이 죽으신 예수님을 그냥 죽은 채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정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당신 오른편에 두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 성령을 보내주신 하느님. 우리는 그 하느님을 믿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부를 때마다, 예수님께서 믿고 의지하고 순명하셨던 아버지 하느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부를 때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일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도록 주님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주님 안에 살아서 이 세상을 이기십시오. 주님을 모셔서 돈과 세상의 위협을 이기고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면 주님의 사도가 되어 죽음의 어둠 속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 구해주십시오. 그래서 하느님 앞에 살아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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