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일)
우리는 이 11월 위령 성월에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 인생에 기여해주셨던 은인들과 선인들을 기억합니다. 동시에 우리 민족과 사회 그리고 인류사회를 위해 희생하셨던 열사들과 의사들을 비롯하여, 우리의 지상 생애와 신앙 생활을 위해 순교, 순국, 순직하신 모든 분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영혼들과 불쌍하고 억울하며 비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도 함께 기억합니다.
예전에 한번 교구 신부님들과 독일 수도원 체험 피정 때, 나치 치하의 첫 번째 포로수용소였던 ‘다하우 포로 수용소’(Dachau Concentration Camp)를 방문하고, 수용소 한 귀퉁이에서 수용소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일생 기도하며 희생을 바치고 있는 깔멜 수녀원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한때 슈테펜 자이베르트 독일 총리가 방문하여 세상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켰던 다하우 수용소는 1933년 어린 시절, 성당에서 복사를 서던 아돌프 히틀러가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우리의 마지막 희망 히틀러!”라는 구호를 내걸고 권력을 잡은 직후 만든 정치범 수용소로 유대인과 동성애자, 집시, 전쟁포로, 장애인 등 20만 명이 수용된 곳입니다.
뮌헨에서 약 1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 수용소 정문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는 성경구절을 개절하여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문구를 통해 강제 노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미군이 1945년 4월 29일 이 수용소를 장악하기 전까지, 군수품 공장 등지에서 강제 노동으로 닭장 같은 수용소에서 하루 한 끼를 먹으며, 기아나 질병으로 숨지거나 살해된 이는 천주교 신부 2,579명을 비롯하여 41,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중 사제 38분과 수사 3분, 평신도 3분 총 44분이 지난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이 있기에 살려달라고 하는 사형자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으신 막시 밀리언 콜베 신부님은 1982년 시성되셨습니다.
미군이 공격했을 당시 수용소에는 약 3만 명이 있었는데, 수용소 열차에서 2,000여구 이상의 처리하지 못한 시신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이에 분노한 미군들이 항복한 독일 경비병들을 사살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하우 소용소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해 적지만, 독일 강제 수용소의 모델이 되는 최초의 수용소였고, 또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입니다. 저체온에 대한 생존력 테스트를 위해 사람을 얼음물에 담궈 놓고 죽을 때까지 매시간 피를 뽑거나, 나체로 영하의 날씨에 서 있도록 하면서 신체반응을 테스트 했고, 항생제의 효력을 시험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사람들을 박테리아에 감염시켜, 가스괴저를 일으키거나 파상풍에 걸리게 했으며, 압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사람을 방에 넣고 진공상태를 만들어 실험했다고 합니다.
다하우 수용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가 순교 성인들뿐만 아니라, 12월 28일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처럼, 인간의 구원을 부르짖으며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던 인간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도 제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과 과학 기술을 주장하며 인간의 진보를 기치로 내걸었던 근대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뜻에 동참하거나 따르지 않았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결국 그들이 외치던 인간 발전은 인간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겨 놓고, 허망한 꿈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교회는 가진 자들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교의를 전파하는 단체에 불과하고, 현세에서는 힘이 들어도 마지막 날에 죽어서 행복하게 될 것이라며, 가난한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외치며, 종교와 도덕과 예술을 한낮 신념으로 강등시키고, 이성과 과학 기술을 근거로 한 경제와 정치 발전을 도모하던 근대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 전쟁과 전쟁 중에 저지른 인간들의 무참한 폭력으로 인하여,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말을 남기게 했고, 인류의 진보를 외치던 근대화의 기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ㅍ더 나은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다른 한쪽의 인간과 자연을 희생시키는 어리석음을 통해, 우리는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료 발전을 생체 실험, 이념과 종교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한 전쟁과 인종 핍박, 고문, 납치, 인신 매매, 학살,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재해, 온난화 영향으로 빈번하고 거대해진 자연재해, 생각하기조차 싫은 상황들이 오늘 우리가 사는 곳곳에서 벌어지며, 거꾸로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사람들에 의해 사건 사고가 생겨나는 데도, 자신들을 되돌아볼 줄 모르고 그 대신 그 책임을 하느님께 묻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느님께서는 뭘 하시는가?”
“왜 선하신 하느님께서 이런 악을 용인하시는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런 인간의 잔악한 행위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사랑 때문에 아파하시고, 오히려 인간의 잔악한 행위로 피해를 당한 다른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시며 죽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그런 물음을 던지며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단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다.”
라는 말 외에는 정작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주님 앞에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겸허히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죽은 모든 이들을 기념하는 11월 위령 성월에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죽음을 연상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 지상 생애를 살다가, 언젠가는 우리의 외적인 육을 떠나 영으로 새 세상으로 건너갑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지상 생애를 마치고 새 세상으로 가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는 남겨진 가족과 인류 사회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하며, 새 세상으로 떠나시렵니까?
내 유언장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쓰셨습니까?
육적인 것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어간다면......, 어디서 어떻게 헤매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도 없이 가버린다면, 너무나도 아쉽고 억울하고 어쩔 줄 모르는 채 생을 마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지상 생애를 마칠 시간과 장소를 우리 스스로 정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고, 언제일지 모르게 다가올 새 세상 행을 위해 미리 준비하기로 합시다. 내일 부활의 영광을 위해 오늘 우리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따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그 길이 바로 내 구원의 길임을 명심하기로 합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는 오늘 우리 삶 속에 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꿈과 희망 그리고 우리 삶의 목표와 가치를 주님과 주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에 둡시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헌신하며, 우리의 마지막 생애를 불태우며, 육의 마침과 영의 시작을 준비합시다.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생애로 넘어가는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기로 합시다. 물질을 넘어 영으로, 한계를 넘어 영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생애를 미리 준비하기로 합시다. 육의 제한 속에 갇히지 않는 우리의 꿈과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펼쳐나갈 수 있도록, 오늘 여기서 새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기로 합시다.
영원을 향한 우리의 꿈을 미리 앞당겨 살도록 하는 우리의 신앙을 통해, 시들지 않고, 꺽이지 않는 영원을 향한 우리의 꿈을 준비합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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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꽃꽂이
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어떤 때는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어떤 때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려고, 나름 기도도 하고 말씀도 청하는데, 왜 예수님께서 응답해 주지 않으시는가?’
주 하느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주님의 사명을 실현해야만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어느 한 사람을 선발하여 특별히 부르시고, 그에게 그 소명을 실현할 능력을 주십니다. 한 집안의 가장인 아브람을 온 인류의 가장이요 신앙의 모범으로 삼기 위하여 아브라함으로 부르신다거나,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 아기를 낳기 위하여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신다거나, 이 땅에서 주님의 소명을 계속 이어서 실현할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지키기 위해 시몬을 베드로로 부르신다거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 성 바오로 등을 부르시고, 예수님의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심어주십니다.
이렇게 주 하느님께서는 인류와 자연계의 위급한 상황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 세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시어 누군가를 강제적으로 취하시고, 주 하느님의 소명을 실현하도록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인간 각자의 자유의지를 강제로 거스르시거나 개입하시려고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주님께서 성경의 말씀과 예언자들과 교부들을 통해 일러 주신 가르침을 익히고 실현하도록 안내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주 하느님을 선택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그와 함께하시면서 주님을 따르는 길을 비춰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셔서 주님을 따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도,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까지에는 물리적인 시간만으로도 20여 년이 걸립니다. 육체적으로 태어나서 엎어지고 제대로 서서 걷고 달리는 과정까지만도 오래 걸리고, 또 신체가 삶의 능력을 발휘할 때까지는 상당 기간이 걸립니다. 정신적인 과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미운 일곱 살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춘기와 자기 인식과 너와 나의 관계 및 사회의 구성과 제도와 문화를 습득하고 자기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진입하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비춰본다면, 우리의 영적인 성숙 과정도 그 정도 길이와 내용의 영신 수련을 갈고 닦아야, 수덕 신비 생활에 대한 감을 어렴풋이나마 잡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를 거룩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한다고 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거룩한 생활을 주님이나 누군가가 대신 이루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힘입어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과정입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불만과 불평을 쏟아붓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힘겹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체험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주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도 없고, 내가 스스로 복음의 길을 걸으며 겪게 되는 어려움과 난관을 헤쳐 나갈 때 비로소,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고 계시는구나!’하고 느끼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 나는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는 복음의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며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일러주신 하느님 나라를 향한 복음의 길은, 마치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쇼핑몰에서 온라인 쇼핑을 하듯이 버튼을 누르거나 원하는 물건을 클릭하고 결제했을 때, 누군가가 이미 애써서 만들어 주는 완성된 물건을 내가 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두 번 기도했다고 해서, 어느 한순간 주님께 대한 강렬한 열정으로 말씀을 청한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지 않듯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준하고 진실하게 주님을 모시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품고, 주님께 청하고 스스로 자기 몸으로 말씀을 이루고자 하는 절제와 인내를 통한 수덕의 삶을 살아 내야 합니다.
복음의 거룩한 길을 걷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꾸준하고 진실하게 구체적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노력이 곁들여져야 합니다. 우리가 피아노 치는 법을 안다고 해서 곧바로 피아노를 잘 치게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기가 알고 들은 것을 자기화하기까지에는 매일 몇 시간씩 정기적으로 피아노 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처럼,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기도하는 수덕 신비 생활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삼사십 분씩 주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바쁜 세상에서 어떻게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는데 내 생애를 배분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한 시간을 주님께 바치면, 우리에게 두 시간을 되돌려주시는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시간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만큼, 우리가 주님을 우리 생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우리가 주님께 다다르려고 갈망하고 기도하는 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며, 그만큼 주님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주님을 찾고, 주님을 향한 복음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고 해서, 한순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주님께 우리가 청하는 것 역시 한순간에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청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지도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며, 설사 우리의 청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주님의 뜻에 합치되기까지의 정화기간과 우리 자신과 우리와 함께하는 관계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의 동의와 인정 및 수용이라는 과정을 은연중에 거쳐서, 우리 삶에 녹아내기까지의 상당한 기간을 무르익혀야만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오랜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겸손과 절제, 심지어는 박해마저도 겪게 되겠지만, 주님께 다다르고 복음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갈증과 꺼지지 않는 열망으로 다가선다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며 내려주시는 축복과 은총으로 잔잔한 평화 속에서 이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겪고 그 과정을 한 계단 한 계단 넘어서게 됩니다.
순수하고 단순하게 열정적으로 주님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끔 짓는 죄와 세상의 죄가 나를 주님을 향한 길에서 가로막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향한 거룩한 삶의 길을 낙담하고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3.20.) 성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함과 부족함을 처절하게 느끼면서도, 주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마치 한탄하듯이 하소연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24절) 인간적인 약점과 실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주님께 의지하며 희망을 겁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18.24-25)
사도 성 바오로는 우리 인간의 인격적인 한계와 육체적인 어려운 문제에 자주 걸려 넘어지는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리라고 일러 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26절)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하느님께 구원을 받으리라고 역설합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27절)
이러한 성령의 간구에 힘입어, 주님께서는 마침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28-30절)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과 간절한 희망’과
‘주님을 향한 순수하고 단순한 열정과 갈망’,
그리고 ‘주님과 복음의 길을 따른 하느님 나라 건설을 향한 중단없는 부단한 노력’
을 기울인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 문을 기꺼이 열어 주시며, 주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생활을 기쁘게 허락하시며, 성령의 섭리와 안배하심으로 우리를 주님과 함께하는 잔잔한 기쁨과 평화 속에 머무르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 모두, 우리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새 생명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시고 이끄시는 주님께, 맞갖은 삶으로 다다르며 축복과 은총 안에 살아갑시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ㄷ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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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꽃꽂이
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언젠가 어느 본당에서 미사 시간에 신자들을 앞자리에 나오라고 부르고 뒷자리에 불을 끄곤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앞 자리를 텅 비워 놓고 뒷자리를 고집하며 불필요한 전기 낭비를 방지하고자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만, 내적으로는 ‘내가 여기 있으니 주님께서 오셔서 빛을 비춰주십시오.’ 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우리 삶의 빛이신 그리스도 주님께로 나아가자는 취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 제가 하는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주님, 제가 하는 일을 축복해주시고, 열매 맺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면, 자기가 주님께 매달렸던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다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되었다는 생각은 잠깐이고, 곧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경우에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거나, 그 보답으로 형제자매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반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주님께서는 날 도와주지 않으시냐?’라고 원망합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 청하고, 내가 건강하고 몸 성히 지내기를 바라며, 내가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이 무조건 주님이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의 결실을 자신의 것만으로 여기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온 세상을 우리에게 맡겨 잘 관리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라고 하신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면 내 주님이고,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주님이 아니다.’라는 식의 기도는 미신이지 그리스도교 주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주님으로 믿으며 따르는 신자들은 자신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에서,
“주님께서는 왜 이 일을 겪도록 하시는지?”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지?”
“주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를 찾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서 찾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을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그러시고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려는 율법 교사에게, 강도 만난 유다인을 치료해주고 보호해 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시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친구로 삼아주시고, 친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3-15절) 그리고 주님의 명령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인 제자들과 우리 인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상에서 목숨을 내놓으십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 뜻과 의미를 미리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16,26-28) 그리고 그 일을 우리에게 계속하라고 명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주님의 명에 따라 사랑하다가 지치고 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1-23)
아울러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에게 주님을 보다 더 잘 알게 해주시고, 주님께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19-20.26)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요한 16,15.23)
사도 성 바오로는 성령께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는데 힘을 보태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에페 3,16-17)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죄악과 어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구원해주시는지와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성경에 기록한 복음사가는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라고 밝힙니다.
아울러 오늘 성서주간을 시작하며 성경 안에서 우리 삶의 빛과 인생의 길을 발견하고, 주님을 따라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그 길을 걸어나가, 마침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우리 인류 모두가 구원되는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다같이 노력합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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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꽃꽂이
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제38회 성서 주간 담화 및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요약
제38회 성서 주간 담화(요약)
“새벽부터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시편 119[118],147)
코로나19 감염증의 확산으로 우리 신앙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몰아닥쳤습니다. 미사 참례도 온라인 미사를 대송으로 바치게 되었고, 비대면 면담으로 각종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을 통한 신앙생활과 그에 따른 실천은 분명히 그 한계가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와 성사, 그리고 공동체 생활은 그 첫 자리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인격적 만남이 있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현장에서 믿는 이들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과 소통을 통한 친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고, 그 일치로 구원에 이르며, 그 구원을 이웃과 친교하면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은 주님과 맺는 인격적 만남입니다. 성경은 말씀의 집인 교회의 전례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선포되고, 소통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친교의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하며, 특히 성서 사도직 현장에서 행동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말씀께서 교회 활동 전체를 이끄시고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도록 ('주님의 말씀', 73항 참조), 비록 아직 어둡지만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어둡고 힘든 세상에 말씀이 희망의 선물로 주어졌으며 이 말씀 안에 우리의 구원이 빛나고 있습니다. 말씀에는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래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깨닫고 체험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2022년 11월 20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신 호 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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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7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요약
‘마리아는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루카 1,39 참조)
성모님이 주 하느님의 천사에게서 예수 아기의 잉태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응답하신 것과,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실 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라고 하신 말씀, 그리고 주님께서 사도 성 바오로를 부르실 때, ‘일어나라. 내가 너를 네가 본 것의 증인으로 선택한다.’(사도 26,16 참조)라고 하신 말씀의 공통점은 ‘일어나다’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은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라고, 우리 주변의 모든 삶을 의식하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일어났다
마리아는 주님 탄생 예고를 듣고 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위해 일어나 길을 떠납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자기 삶을 위한 최고의 계획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순례하는 교회, 봉사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는 교회,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교회의 표상이 됩니다! 성모님과 함께, 우리 삶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 곧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가장 큰 영적 기쁨, 모든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빛의 폭발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빛을 맛본,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8)고 합니다. 부활 이야기에서 우리는 종종 ‘깨우다’와 ‘일어나다’라는 두 단어를 봅니다. 주님께서는 이 단어들로, 빛을 향하여 밖으로 나가라고 그리고 우리의 닫힌 모든 문의 문지방을 넘어서도록 당신의 이끄심에 내맡기라고 우리를 다그치십니다
…… 서둘러 길을 떠났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성인은 루카 복음 주해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산악 지방을 향하여 떠났는데, “그 약속에 크게 기뻐하여 자신의 기쁨이 가져다준 열정으로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저마다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보이는 어려움에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이유들을 나는 곧바로 떠올리는가? 아니면 관심과 기꺼이 도우려는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가?” 당연히 여러분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 가야 한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전쟁, 강제 이주, 빈곤, 폭력, 기후 재난 상황의 여파로 많은 이들은 이렇게 자문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것인가? 왜 나여야만 하는가? 왜 지금인가? 그러나 오히려 삶에서 진정으로 해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86항 참조) 나자렛의 젊은 여인의 서두름은 주님께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아 그것을 반드시 나누어야 한다고, 다시 말해 자신들이 체험한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다른 이들이 흘러넘치게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이들의 서두름입니다. 자신의 어려움보다는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우선할 수 있는 이들의 서두름입니다. 마리아께서는 모든 ‘관계 맺음’에서 가장 참된 것, 바로 만남, 나눔, 사랑, 봉사에서 비롯되는 것을 찾아 떠나십니다. 얼마나 많은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이시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다’고 우리에게 증언하는지 모릅니다!
건강한 서두름은 언제나 우리가 위를 향하고 다른 이들을 향하게 합니다
엘리사벳은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하신 하느님의 기적과 같은 개입을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인사를 듣자마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한 경탄과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참된 환대를 보일 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중심에 둘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누구에게서도 결코 받아보지 못한 친밀함과 존중의 느낌, 편견과 반감 없음, 사랑의 눈길을 처음으로 받는 뜻밖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멀리서 바라보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체험의 기쁨은, 우리가 예수님을 환대하고 그분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느끼며 그분을 더 잘 알고자 서두르게 하였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3-14)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인류가 마주하는 도전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여러분을 위한 저의 메시지이자 교회에 맡겨진 위대한 메시지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저마다를 위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당신 구원과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에 계신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엄청난 선물을 우리 삶으로 기꺼이 맞아들이고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어 그리스도와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과 자애로운 봉사를 깊이 상처 입은 인류에게 전하는 방법을 보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성령께서 시노달리타스 방식으로 여러분 마음에, 모든 거짓된 경계를 버리고 ‘일어나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하는 여정의 기쁨을 불붙여 주시기를 빕니다. 지금이 일어날 때입니다! 서둘러 일어납시다! 모든 이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마리아께서 그러셨듯이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품고 갑시다! 여러분 삶의 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앞을 향하여 나아가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이루실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미루어 두지 마십시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의 꿈을 그리고 여러분이 내딛는 걸음걸음을 강복합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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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꽃꽂이
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6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요약
‘일어나라. 내가 너를 네가 본 것의 증인으로 선택한다’(사도 26,16 참조)
세계 각지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고통과 사회적 고립을 겪었습니다. 보건 위기는 특히, 여러분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마주해 본 적 없는 어려운 상황들에 놓였습니다. 이번 체험은 우리의 약함을 증명하였지만, 우리가 연대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우리의 미덕들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세상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 구조에 도움을 주고 희망의 씨앗을 심으며 자유와 정의를 지키고 평화의 일꾼이자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젊은이가 넘어질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 인류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젊은이가 일어나면 이는 마치 온 세상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오로가 임금 앞에서 한 증언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던 어느 날, 곧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와 그 일행 둘레를 비추기 전까지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고 말합니다(사도 26,13 참조). 그런데 바오로는 홀로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로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소리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주님께서는 사울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당신께서 사울을 인격적으로 알고 계셨음을 사울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만나는 것만이 삶을 변화시킵니다. 비록 사울은 박해자이지만, 비록 사울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그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 자비를 보여 주고자 하십니다. 과분하고 조건 없는 사랑인 이 은총은 사울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빛이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26,15)
다른 이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스스로 예수님께 말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혼란스럽고 생각이 의심으로 가득하거나 심지어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길지라도, 예수님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이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마침내 주님께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26,15)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악에는 선으로, 증오에는 사랑으로 답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불의와 폭력과 조롱과 박해를 견디는지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누구도 교회를 모르고서는, 또 자기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와 동떨어진 채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교회적 차원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온전히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뾰족한 막대기를 차면 너만 아프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 등을 돌리는 모든 젊은이에게 이와 동일한 따뜻한 ‘훈계’를 하십니다. “너는 언제까지 나에게서 도망 다니려느냐? 너는 왜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느냐? 나는 네가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가끔 ‘더 이상 그분을 기억하지 않으리라.’(예레 20,9 참조) 하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의 마음에는 불이 타오릅니다. 아무리 그 불을 끄려고 애써도, 그 불을 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불이 우리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완전히 적대적이며 당신을 박해하던 이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가닿지 않는 젊은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눈멀었음을 깨닫기
우리는 그리스도와 만나기 전의 사울이 어느 정도 ‘자만이 넘치는’ 사람으로, 자신의 도덕적 온전성과 열정, 출신과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겼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는 옳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자 사울은 ‘땅에 엎어졌고’ 눈이 멉니다. 한순간에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앞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확신이 흔들립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던 격정적인 열망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깨달음이 그의 마음 안에 생깁니다. 그의 확신과 자만이 사라지면서 그는 한순간에 길을 잃고 나약해진 ‘작은’ 이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겸손, 곧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다른 이들이나 심지어 종교적 진리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멀어야만 비로소 보기 시작합니다!
관점 바꾸기
바오로의 회심은 되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에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 22,10 참조). 회심은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 하던 대로 해나가겠지만, 이제는 우리의 마음과 원동력이 바뀌었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다마스쿠스로 가던 그의 여정의 목표와 목적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이때부터 바오로는 새로운 눈으로, 실재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젊음의 힘과 열정을 헛되이 쓰지 않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오로의 태도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념에 고취되어, 어쩌면 부추겨져서 다른 많은 이의 삶에 폭력과 파괴를 행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이들은 디지털 세상 안에서 쉽게 떠돌며 악의를 퍼뜨리고 반대자를 몰살시키고자 가짜 뉴스라는 무기를 악랄하게 이용하여 가상 현실과 사회 연결망을 새로운 전쟁터로 사용합니다.
이방인들의 사도
이후로 바오로는 ‘이방인들의 사도’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역설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박해하던 바로 그 사람을 신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방식은 최악의 박해자를 위대한 증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일어나 증언하라!”
우리가 세례로 얻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때 주님께서는 중요하고 삶을 바꾸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너는 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일어나라! 기죽어 있거나 너 자신 안에 갇혀있지 마라. 사명이 너를 기다린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 일어나십시오! 여러분 또한 눈이 멀었었고, 빛을 만났음을 증언하십시오.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여러분 안에서, 다른 이들 안에서, 교회가 이루는 친교 안에서 여러분도 보았습니다. 그 안에서 모든 고독이 극복됩니다.
- 일어나십시오! 인간관계 안에, 우리 가정의 삶 안에, 부모와 자녀의 대화 안에, 젊은이와 노인의 대화 안에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랑과 존중을 증언하십시오.
- 일어나십시오! 사회 정의, 진리와 공정, 인권을 지키십시오. 박해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 이주민들을 보호하십시오.
- 일어나십시오! 실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증언하십시오. 이 방식으로 여러분은 경이로움이 가득한 눈으로 피조물들을 바라보게 되고 지구를 우리 공동의 집으로 여기게 되며 통합적 생태론을 증진하고자 용기를 낼 수 있게 됩니다.
- 일어나십시오! 실패한 삶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십시오. 영적으로 죽은 이들도 새롭게 살아날 수 있고 속박된 이들도 다시 한번 해방될 수 있으며 슬픔에 잠긴 마음도 희망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십시오.
- 일어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을 기쁘게 증언하십시오! 여러분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에, 학교와 대학교에, 일터에, 디지털 세상에, 모든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십시오.
주님과 교회와 교황이 여러분을 믿고, 여러분이 오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날 다른 모든 젊은이 앞에서 증인이 되도록 임명합니다. 결코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20항).
일어나십시오! 개별 교회 안에서 세계 젊은이의 날을 기념하십시오!
저는 우리가 모두 진정한 순례자로서 이 모든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저 ‘종교 관광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길을 밝히고자 하시기에, 저는 우리가 하느님의 놀라우심에 점점 더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우리의 형제자매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도록 더욱더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함께 일어나도록 서로 돕게 될 것이고, 인류 역사의 시련을 마주한 이때에 새롭고 희망찬 미래의 예언자가 될 것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전구해 주시기를 빕니다.
로마 라테라노 성 요한 대성전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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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꽃꽂이
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으며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표현은 무엇을 뜻할까?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인데 왜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주 하느님이 주인이라고 말할까?
또 우리가 세상에 나서 살아가는 것은 나인데 왜 내가 내 맘대로 신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말할까? 그 말이 내 가족과 생업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일까?
만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마음 속에,
“내가 지금 간절히 이러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오니,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소서!”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시간은 이것이니, 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좋은 일을 하는데, 왜 이의를 제기하고 장애가 이리 많은가?”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하는 일이니,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또 하느님이시라면 당연히 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런 일을 이만큼 했으니, 나에게 이 정도는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는 등등의 생각들이 마음 한 구석에 담겨 있다면, 그것은 내가 왕이고 예수님께서 나를 섬기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나는 ‘주 하느님과 주고받는 계약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는 늘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면, 주께서 원하시는 때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처리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자만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3-15)
또 어떤 때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내가 실수했거나 잘못한 적이 없는 데 부당한 일을 당하는 것에 대해, 주 하느님과 사회에 그 책임을 돌리고 원망하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성인으로 알고 있는 욥 성인도 이렇게 울부짖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죄가 없는데 하느님께서 내 권리를 박탈하셨네. 올바른데도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잘못이 없는데도 화살 맞은 내 상처는 아물지 않네.”(욥 34,5-6)
이렇게 울부짖으며 주 하느님을 원망하는 욥에게 주 하느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지각없는 말로 내 뜻을 어둡게 하는 이자는 누구냐?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38,2; 40,8)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잘못된 일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 하느님께서 잘못 심판하셨거나 주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그런 잘못된 것에 대한 책임을 주 하느님께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벌이신 일이거나 이르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일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보다,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고 알려주시는 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선택한 것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옳고 좋은 일을 하러 오셨는데, 사람들이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죽이려고 할 때, 몸소 고통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3,42) 예수님께서는 단지 아버지께 대한 효심이 남달리 깊어서 아버지의 듯을 따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이나 다른 이들이 일반적으로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여러 방법들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하시는 방법이 더 옳고 효과적이라고 믿었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인간을 죄악의 굴레에서 구하시기 위해, 인간 죄의 속죄 대가로 아들 예수를 희생 제물로 삼으시는 방법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동의하고 수긍하며 따랐기 때문에 십자가 상에 못박혀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힘으로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유혹 같은 권능을 포기하시고 아버지께 순명하셨음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 마음 속에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몸소 희생하신 주 예수님께 대한 단순한 보답이 아니라, 주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뜻이 우리 구원의 길이라는 수긍과 인정 및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체험에 의하면, 성당에서 예수님이 말하는 길보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맞고 또 그렇게 살아야만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가는 길이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주 예수님이 일러주시고 비춰 주시는 복음의 길이 우리 삶의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임을 깨닫고 걸어 나갈 때 주 예수님께서 진정 내 삶의 왕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주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내가 만일 이 사회에서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외톨이이며 소외된 양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면,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에제 34,16) 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만일 그렇게 남의 관심과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처지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과 사랑이 나 말고 더 어려운 형제자매들에게 돌아갈 몫을 내가 대신 받고 있는 것이라고 여길 뿐만 아니라, 그래서 내게는 분에 넘치는 것임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 교우들의 가슴 속에 그리스도 왕 되기 말씀으로 최후의 만찬 기사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님이 나를 맨 처음 찾아 주시고, 나 만을 사랑해주시고, 나 만을 도와 주시며, 나 만을 지켜 주시기를 바라며 사는 ‘나 왕 되기’ 삶에서 ‘그리스도 왕 되기’ 삶으로의 전환은 바로 이웃형제들 특히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임을 밝힙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36.40)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에서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이 바로 주님 자신이며 형제라고 일러주시며, 우리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린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슴 속에 주 예수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감사를 되새기며, 내 안에서부터 ‘그리스도 왕 되기’를 실현하며 나아갑시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1코린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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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4주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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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영성 17 파견
그냥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하나 먹고 사는, 거기에 내 일생의 기쁨과 희망과 의미를 두려고, 아니 달리 말한다면 좀 더 나은 현세적인 삶을 위해 신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나를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참여하라고 부르신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미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나를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따로 부르셔서 무슨 일을 맡기셨습니까? 그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을 받은 후 대담하고 열정적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은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로 하느님 오른 쪽에 앉아 계시며, 마지막 날 우리를 구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라고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복음을 믿고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 교회를 이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체제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기존 종교와 사상에서 정치적인 권위와 권력에 절대권을 부여하여 사회를 통치하고 질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체제유지를 위한 종교적 처신을 배척함으로써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사랑의 희생봉사를 함으로써,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와 시기를 사서 박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박해를 받아들여 순교하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교우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교하면 주님처럼 하늘나라에 올라 영생을 누리는 것이요, 부활하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꺼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을 붉은 순교자라고도 합니다. 한편 순교는 못했더라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관용령으로 종교 자유를 얻기까지 로마의 지하 무덤(카타꼼)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생애를 마친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푸른 순교자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주님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박해시기가 끝나자 순교에 이르는 박해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젠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개 처형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전보다 더 활발히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진지하고 철두철미하게 살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은 수도생활이라는 형태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수도자들을 흰 순교자라고도 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인류를 구원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교회에 순명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을 포기하시고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오신 주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또한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나라만을 순수히 택하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신 주님처럼 온전히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교회만을 택함으로써 정결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기보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사람들이 서로를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적대시하게 되어 결국은 전쟁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참으로 신자들을 세상에서 끌어내 교회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보다는, 사회자체를 복음의 하느님 나라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곧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이루며 사는 데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생활을 양심의 순교자, 말씀의 증거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이렇게 복음을 사는 양심의 순교자들이 마지막날 붉은 순교자도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103위 순교성인들과 124위 순교복자들의 후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 왔습니다. 그러한 피의 밭 위에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자라났고, 오늘 우리 사회 안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교회를 물려 줄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순교신앙을 오늘 우리의 삶 속으로 되살려 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는 바와 어긋나고 반대되는 관습과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변화시키면서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심고 가꾸어 나가야겠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복음화를 현대 세계에 맞추어 재확인하는 ‘현대의 복음선교’ 17항에서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성사와 다른 성사들을 베푸는 것’을 복음화라고 규정하려 하였을 수 있습니다.”라고 밝히며, 이것이 복음화의 의미를 빈약하게 하고 나아가 왜곡할 위험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8항에서 복음화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화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내적 변화이며, 한마디로 표현하여, 교회가 복음화한다는 말은, 교회가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거룩한 힘을 통하여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의 활동, 그들의 삶과 구체적인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복음화를 설명하는 가장 알맞은 표현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사전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것이요, 주님을 통해 생명을 얻고자 함이요.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복음을 우리가 머물러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선포하고 이루고자 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미사는 바로 이 파견을 위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시키도록 파견하기 위해! 그리고 그 파견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만들어 주신 그 행복과 구원의 모습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에 성체로 봉헌합니다.
미사의 각 부분을 성경에서 찾아 그 의미와 영성을 찾아본 이 강론을 마치며,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기리고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숨쉬실 수 있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드러나실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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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주간
지난 10월 말에 인목회 사제모임이 제주에서 있었습니다. 둘째날 한라산 어승생악이라는 곳에 올라갔습니다. 제가 다른 신부님들보다 약해서 그런지 아주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끝까지 올라가긴 했는데, 미리 내려가신 다른 신부님들이 너무 기다리는 것 같아서 빨리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빨리 내려오려고 하다가 그만 나무 계단에서 넘어졌고 두 세 바퀴를 구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계단에서 구르면 다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던데, 그날 저는 다행히 얼굴이나 몸에 아무런 상처 없이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무사히 내려와서 신부님들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신부님들이 “왜 하나도 다치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들을 해주었습니다. 아마도 그 날 저녁에 모임을 주최하는 본당에서 미사를 주례해야 해서 그랬는지, 아직도 제가 교회 내에서 쓸모가 있어서 그랬는지, 어쨌든 어디 한 곳 부러지거나 찢어진 곳 없이, 그야말로 은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간 팔이 아파서 거의 활동도 줄이고, 글도 제대로 못쓰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사건사고마저 생기니 난감하기도 하고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저와 함께하시면서 저를 구해주신 주 하느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올려 드립니다.
오늘은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 기억해왔던 ‘성 원귀임 마리아 탄신 200주년 기념의 해 폐막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173항은 “교회가 전례주년 안에서 순교자들과 다른 성인들을 기념할 때,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받고 함께 영광을 받은 성인들 안에서 파스카 신비를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는 그들의 모범을 신자들에게 보여 주고, 그들의 공로로 하느님의 은혜를 간청하여 받는다.’” 라고 말하며, 2006항에서는 “아버지께서는 성인들 가운데서 찬미를 받으시며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을 빛내시나이다.”라는 로마 미사 전례서 성인 감사송1의 문장을 인용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신심차원에서 미사 때 성 원귀임 마리아 탄신 200주년 기념 기도문과 기념곡을 부르며 묵주기도를 바쳤고, 성체조배를 하면서 순교하신 성녀를 기렸습니다. 아울러 성녀께서 순교하신 7월 20일을 전후하여 한 해 동안 서소문 성지순례를 통해 성녀의 순교 행적을 찾아 보고, 그 정신을 따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더운 7월에는 그 유래 없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가두선교에 나가 주님을 전했습니다.
‘성모의 밤’과 ‘순교자의 밤’ 신심행사 때는 구역반과 단체별로 꽃을 봉헌하고, 예식이 끝난 후 환우, 예비신자, 냉담자, 어려운 이웃들과 꽃을 나누며, 성모님의 손길을 통한 주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의 사랑 나눔으로 증산 수색 지역에 영적 꽃동산을 이루는 것을 하늘에서 성녀께서 주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우리 수색 예수성심 성당 신자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셨으리라고 여깁니다.
내적 운동으로는 가정과 일터와 지역사회에서 복음 실천 운동을 실현하면서 하느님 나라 건설 진행온도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영성 교육으로는 ‘본당 공동체의 친교를 향하여’ 라는 책으로 교회론을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는 책으로 가톨릭 교회 교리를 연구해왔습니다.
이웃사랑이라는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기 차원에서는 성녀가 행했던 대로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돌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난 대림절과 이번 사순시기에 구역반과 단체가 함께 이웃사랑활동에 전신자들도 참여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매 주일 작은 바자를 열어 판매와 모금과 정성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찾아 사랑을 나눴습니다. 올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는 신자들끼리 냉커피를 나누면서 천주의 성요한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자들을 위한 늘 푸른 나무 복지관과 사랑나눔을 했고, 관내 노인정 서른 여섯 곳에 수박 한 통씩을 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눠주신 사랑을 지역사회 어르신들과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지난 한 해 우리의 이러한 활동들은 또한 성당 주변의 신자들이 하나 둘 이사하기 시작하여 성당 곳곳에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보며 허전해할 때, 그나마 성녀를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여 더욱 좋았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으며, 주 친히 우리에게 명하신 ‘복음 선포’와 ‘공동체 양성’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미세하나마 우리 교회가 점차로 이 땅의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구역반과 단체모임에서 형제자매들과 복음을 읽고 나누며 주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미사 성제를 통해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깨우친 주님의 뜻을 이룰 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얻은 주님의 뜻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의 일상에서 실현함으로써 주님과 하나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을 주 예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어여삐 보아주셔서 우리 공동체에 알찬 신앙의 열매를 맺어주시기를 더욱 간구합니다.
올 해 성 원귀임 마리아 탄신 200주년을 보내며, 곧 이어 내년 2019년 본당 설립 11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영을 다하여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며 우리 증산, 수색지역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헌신하기로 합시다. 신자수가 줄어들면서 다소 허약해지기 쉬운 공동체의 기운을 신앙의 힘으로 더욱 더 활발하고 굳세게 다져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성령께 의탁하며 꺼지지 않는 성령의 불길로 우리를 휘감아 우리가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 더욱 더 깊이 다가설 수 있도록 청하고 따르기로 합시다. 아울러 주 하느님을 믿는 그 만큼 우리 형제자매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함으로써, 서로 아끼고 덮어주며 배려해주고 채워주면서 주 하느님과 주님을 믿는 우리 수색 예수성심 공동체가 하나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눈에 드러나는 이웃의 결점과 부족함을 발견하고 지적하기는 쉽지만, 진정 내 피붙이 가족처럼 여기고 감싸 안아주며 사랑으로 채워주며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공동체의 사랑을 무르익게 합시다. 그런 결과로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주님 사랑의 공동체로 비춰짐으로써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와 함께 주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하고 매진합시다.
아울러 오늘은 연중 제34주일로서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시자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이 한 주간 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주님의 거룩한 말씀을 되새기고 따르고자 다짐하면서 올 해 서른 네 번째로 성서주간을 보냅니다. 올 성서주간의 주제는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네”라는 시편 19편 8절의 구절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와 같으신 말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우리 마음과 영에 힘을 주십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 늘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삽시다. 교부들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우리를 읽는다.’고 가르칩니다. 말씀을 즐겨 대하면,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새 생명의 은총을 모든 신자들이 체험하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과 영혼에 이러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라고 하시며 성서주간을 시작하십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며 건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생명의 나침반이요 이정표로 삼고 신앙의 길을 굳건히 걸어나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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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주간
얼마 전에 본당 교우 한 분이 사무실을 통해, 제가 인터넷 사이트와 카톡을 통해 매일 강론을 보내드리는 데, 자신도 카톡을 통해 받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한 쪽으로는 참 기뻤습니다. 복음을 목말라 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주님께서 참으로 흐믓해하시며 반기실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론을 쓰는 것이 제 사목사업의 일차적이고 최고 중심 내용이어서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면서도, 감히 하느님의 말씀을 제 세치 혀로 훼손시키지 않는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또 혹시 복음을 해설한답시고 주님과 교회에 누를 기치지는 않는가 하는 두려움으로 늘 조심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도, 이런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쁩니다.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 2,13)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느낀 점에 대해 제게 들려주거나, 구역반 모임이나 단체에서 복음 나누기를 하고 또 그 내용을 나눠줄 때면,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구역장 모임에서 구역장님들과 복음을 나누다 보면, 신자들의 현실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 어려운 현실에서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서 적용하려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제가 구역장님들과 함께 정말 하느님 나라에 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미소하게나마 들어 평안합니다.
복음 나눔을 하며, 구역장님들의 삶 속에 함께하시며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조금씩 성화시켜 주시며 몸소 활동하시는 주님을 발견할 때면, 마음 속 깊이 주님의 위로를 얻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이 생각납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 공동번역)
우리는 주 예수님과 주 예수님의 아버지 주 하느님을 어디서 어떻게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집성해 놓은 성경과 성전을 통해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기적을 일으키셨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달을 때 우리 신앙생활의 환희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위로를 받으며, 그 말씀에 희망을 걸고 나아갑니다.
우리는 가정과 일터와 사회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과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 때 당황하고 힘겨워합니다. 그 사건과 상황을 어서 빨리 잘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이리 저리 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건과 상황을 해결하며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려고 할 때 우리 안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하면, 혹시 나만 손해보지 않을까? 내가 혹시 밀려나지 않을까? 내가 혹시 다른 이들에게서 소외되고 뒤처지지는 않을까?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주님의 말씀을 실제로 적용할 때,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과 평화를 선물로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말씀대로 한 것이 결국은 다른 방법을 따 온 것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결과를 얻고, ‘그 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잘 했구나!’ 하는 확신을 얻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땅의 모든 민족들 위에 너희를 높이 세우실 것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신명 28,1-2) 그리고 주 하느님의 말씀이 사명을 이루지 않고서는 그냥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주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토비트는 자신의 생애를 마치며 이러한 사실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그대로 실행되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는 알고 또 믿는다. 그 말씀들은 하나도 어김이 없다.”(토빗 14,4) 잠언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잠언 30,5)
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라고 참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와 함께해주시리라는 언약을 내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요한 14,23-24)
교회는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도록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사도 4,19) 아울러 주 하느님의 말씀이 단지 세계 각 곳에서 들려오는 속담이나 명언처럼 그냥 그렇게 좋은 글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주춧돌임을 밝힙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요한 사도는 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말씀 실천을 통해 주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1요한 2,5 공동번역)
오늘 제33회 성서주간을 맞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이신 손삼석 주교님은 “성경은 복음화의 원천입니다. ‘모든 복음화는 그 말씀에 기초하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거행하고 증언합니다.’('복음의 기쁨', 174항) 교회가 계속해서 복음화되지 않는다면 세상을 복음화하지 못합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공동체 생활과 다른 이들에 대한 헌신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 인간의 몸을 취하셨음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마음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하며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을 고귀하게 드높이는 무한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강생이 형제자매들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응답이며 말씀의 증거입니다.
성경 묵상과 실천으로 체험하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이웃을 향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 이해하고 돕고 격려하는 공감, 인간의 모든 차원에 대한 관심과 선교열정이 솟아납니다. 참다운 신앙은 결코 개인의 안락과 안전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세상을 향해 열린 대화로 복음의 가치를 전달하며 이 세상을 이전보다 나은 곳으로 가꾸려 노력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신 곳이고 당신 생명을 바쳐 구원하신 거룩한 땅이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복음의 기쁨'. 176-183항 참조)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가 비록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더라도, 하나의 신앙으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면 함께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걸으시고 말씀하시며 선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모든 일을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성경 묵상과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기쁨의 샘이 되어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안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라고 담화문을 발표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알게 된 주 하느님의 말씀과 그 뜻을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며, 주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얻으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갑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일)
언젠가 예비신자 면담을 하면서 ‘어떻게 성당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이런 답변을 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서울에 사는 집주인이 부도가 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넘어가게 되었단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전세금마저 못 받게 되었단다.’ 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 세상살이는 잘 몰랐지만 어머니가 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서, 그 때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 우리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십시오.’ 그런데 우연인지 내가 기도한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는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집주인은 그나마 전세 값을 돌려줬고, 어머니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작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떨어졌습니다. 재수를 하려고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꼭 붙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등학교 때 자기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 생각이 나서 올 3월부터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번에는 서울대학교에 꼭 합격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한 세 달 정도 기도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것 달라고 하면 이것 주고, 저렇게 해 달라면 저렇게 해 준다면 그게 무슨 하느님인가? 내가 지금 무당처럼 미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느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아서 믿고 싶어서 성당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예비신자분들 중에는 성당에 오기 전에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나오게 되었다는 분이 몇 분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실 때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 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2) 라고 말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이유가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45절) 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믿게 하시려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매 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 하느님은 우리 각 개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남자만 오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도록 빵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배불리 먹고 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매몰차게 몰아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그러시고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7.29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율법 교사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강도 만난 유다인을 보고 정작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다 그냥 모른 채 지나쳐가 버렸지만, 평소에 원수같이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가엾이 여겨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봐주고 뒤처리까지 해주었다고. 그렇게 대답해주신 다음,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러면 그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고.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자 하시고,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려고 하십니다. 언제 어떻게 채워주시는지는 주님께서 나의 처지와 주위의 상황을 고려하여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어린아이처럼 부모님께 땡 깡을 부리듯 계속 청하기만을 바라시지는 않으실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고 채워주시면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며 드리는 흠숭과 찬미를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채워주신 것을 바탕으로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총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길 바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제34주일을 맞아 생각해 봅니다. 올 한 해의 내 삶이 누구의 덕분일까? 주님께서는 올 한 해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그런 의미를 되새겨보면, 왜 교회가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7-20)
우리 삶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제단 위에 저렇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형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형제자매들을 바라봅니다.
세례 때에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간절한 염원을 주님께 청합니다.
여러분의 청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청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울러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며 또 세례성사를 받아 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그 때 했던 결심을 되새깁시다.
앞으로 세례를 받고서 내가 어떻게 살기로 했는지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흡하여 주님께 찬미를 부르며 그에 대한 보은으로 주님의 사명을 함께 이루는 협조자와 사도가 됩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최근 경제가 어려워 제2의 IMF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전망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외적인 요인보다 우리를 압박하는 더 큰 고통은 가정과 사회의 내적인 응집력이 무너져서 받는 고통이라고들 합니다. 실제로 지난 IMF 때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는 내적인 결속력이 무너져버려, 가정이 파괴되고 친지와 형제들을 잃어버린 일이 허다한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간디도 "우리 인도인이 영국인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우리 인도인끼리의 차별과 지배를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립은 자립에서 오는 것이며, 안정은 난세를 극복하려는 내적인 힘과 응집력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서기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고 로마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던 유다인들의 반란은 마사다에서 그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이를 예견하고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예루살렘을 보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1) 하고 한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라고 하십니다. 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그리고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과 무관하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이라고 하는 우리 사회와 저 세상이라는 하느님 나라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오늘 구조조정을 전제로 하는 신경제원리는 우리에게 사람보다 물질을 선택하라고 옭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눔보다 경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미노 현상'이라는 경제원리도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에 물건을 팔던 나라도 더 이상 물건을 팔지 못해서 같이 망한다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돈과 물질을 선택하라 하고, 하느님 나라는 인간과 생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우리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투자하고 미래를 위해 비축해야 살아남는다고 요청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어려울수록 이웃과 나누어야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친지와 형제들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요한 6,27 참조), 예수님, 바로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이끄심에 힘입어 그분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실현하며, 그분께서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기로 합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제27회 성서주간 담화문: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1. 머리말
현대 사회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불과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성과를 이루어 냄으로써 오늘의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으며,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득세로 하느님을 닮은 인간성이 창조 질서 안에서 오히려 열등하게 비치기까지 합니다. 또한 정보화의 지나친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인류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해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일들을 실제로 경험하였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는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자연재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자연 이변들은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행하는 지나친 환경 파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난 3월 일본 동북부 지역에 있었던 지진과 쓰나미에 이어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장담하던 인간은 가능성이 몇 백분의 일도 안 되는 극히 적은 예외적인 사고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 놓고 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오랫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또 세계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라고 하는 미국 뉴욕 월가와, 세계 경제 대국의 한가운데에서 연일 일어나고 있는 시위는 오늘의 경제 형태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왜곡되어 있는지를 강변합니다. 상위 1%의 부자들이 전체 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상당수의 하류층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한 나라에서 일어난 경제적 난국이 이웃나라로, 전 세계로 번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이어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일반서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세계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지만, 첨예한 이해관계를 따지느라 해결책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새롭고 확고한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하며, 절대적 판단의 기준이 새로이 요청됩니다.
2. 새로운 복음화의 필요성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을 때, 많은 군중이 와서 끼니를 잊을 정도로 귀한 말씀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특히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억압받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더 많이 와서 경청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희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고 선포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삶의 변화와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성체성사의 신비를 계시하셨을 때, 군중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고 비난하며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이 복음은 내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복된 말씀을 듣던 한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성모 마리아에게만 유보된 특권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이 선언은 우리에게 새로운 각오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라고 기도하고, 이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곧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생활할 때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성스럽게 듣고 실천하도록 노력할 때 비뚤어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복음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묻혀 있는 보화와 같습니다. 성경 말씀을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귀 기울여 듣고 그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 공부, 성경 필사, 성경 외우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친숙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잘 만들어진 신·구약 성경과 주석 성경이 있으며, 성경에 관련된 여러 가지 입문서와 참고서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고귀함을 깨닫고 그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라면,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읽도록 권장해야 합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할 때 더욱 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선 본당 단위로 청년, 어르신, 초·중·고등부를 포함한 모든 신자가 모임을 만들어 추진해 볼 것을 권장합니다. 또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들도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사회와 본당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동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맺는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현세의 야심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파스카로부터 나오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히 봉헌하는 것입니다.
2011년 성서 주간을 맞으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와 공동체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희망하며, 여러분의 참 행복을 주님 안에서 기원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7 참조).
2011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이형우 아빠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I-5 고속도로의 출구 114로 나가면 니스콸미 생태 환경 보호 공원이 있습니다.
니스콸미를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
그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말합니다. “키가 작다.”고. 키가 작으면 옷감이나 물자를 조금 쓰죠. 거꾸로 보면, 보통으로 만들어 놓은 물자를 나에게 맞추느라고 후질러 놓았다고도 할 수 있죠.
친구들이 말합니다. “착하다.”고. 착하다는 말은 거꾸로 보면, 바보라는 소리도 맞습니다.
그럼 남과 다르게 나에게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은 무엇인가?
신부들은 아니 신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다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또 따지고 보면 제가 남보다 강론을 잘 하거나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누구나 기도하고, 누구나 묵상하지만, 전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느낌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인양 소중히 여기고 그걸 형제들과 나누려고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제 달란트요 제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저는 위대한 명상가도 아니고, 훌륭한 영성가도 아닙니다.
그리고 제 책이 베스트 셀러도 아닙니다.
그러나 단지 제가 기도하면서 얻은 것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게 알려주신 것이라고 여겨, 묵상이 끝나자마자 글로 적어서, 형제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제 달란트고 그것을 키우고 성장시켜 지금까지 25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제가 주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학교에 가서 학자들이나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지만
다른 한쪽으로 내게만 있는 장점을 발견하고 성숙시키는 것도 커다란 성장입니다. 물론 남에게 배우고 난 다음에 잘 깨달아서 내 장점을 식별하고 성숙시킬 수도 있겠죠.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 선물을 주셨다는데 나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인지 깨닫고
그 달란트를 소중히 키우고 가꾸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합시다.
그래서 형제들이 내 달란트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잘 가꾸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어떤 부분을 키우고 있습니까?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먹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면서 살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간절히 바라고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0)
우리는 돈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누는 것이 주님께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가져갈 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입니다.
그리고 내 것이라고 하는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형제들과 나누라고 나에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선물을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드러내도록 바라시는지?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선물을 어떻게 형제들과 나누기를 바라시는지?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선물을 누구와 어떻게 나누기를 바라시는지?
하느님께서 우리 공동체 식구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겨 우리가 나누길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실행하면서
나와 우리의 삶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합시다.
아멘.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얼마전 동아일보에 이런 글이 실렸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한 번쯤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기사였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비롯한 우리의 인격과 일상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실제로 위의 지적처럼 기도할 때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하면서도 살 때는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보다 나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주님은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게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25. 32-33)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과 기적으로 몸소 보여주셨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유다인들이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35)하는 조롱과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37)라는 빈정거림이다. 그리고 결국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38)이라는 죄목으로 묶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다.
그런데 이일이 비단 유다인들의 일로서 그치고 만 사건인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렇다고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가? 불행하고 수치스럽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세를 살면서도 주님 앞에 고개를 들고 살기 어려운 처지를 알고나 계신 듯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강도의 모습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여지를 남겨 주신다. 우리에겐 다행인지 아니면 주님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주님을 따르기는커녕 배반하고 거꾸로 주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당시 해골산에는 예수님 외에 두 명의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한 죄수가 예수님께 말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39) 그런데 또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40-41)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42)하고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죄수를 향해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43)
한 명의 죄수는 자기의 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조롱하였고, 다른 죄수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면서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그 죄수의 고백과 청원이 우리를 대변하는 듯 하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초대를 들으며 우리의 삶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기로 하자.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성서주간 담화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 6)
- 다원주의 안에서 복음의 위상-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느덧 무르익어 가는 결실의 계절 가을의 길목에서 성서주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금년 성서주간의 표어를 주님의 위대하신 선포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 6)로 정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21세기 다원주의의 흐름 속에서 성서사도직 봉사자가 구심점으로 삼고 갖추어야 할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비전과 신적 힘의 원천이시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로 다시금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년 레바논에서 열린 가톨릭성서연합 제6차 총회 결의문에서는 향후 6년 동안 여러 차원에서 성서사도직이 수행해야 할 우선적 과제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차대한 과제는 문화·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계에 직면해서 성서사도직의 과제와 역할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연구하는 일이라고 천명되었습니다. 새롭고도 불확실한 다원주의의 흐름 속에서 첨예화되고 있는 상대주의와 가치관의 혼란은 새 천년기의 말씀 봉사자들이 혼신을 다해 극복해야 할 위협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복음화 활동에서 '말씀의 봉사자'가 되고자 우리 자신을 풍부한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야말로 새 천년기의 여명을 맞는 교회가 무엇보다 우선하여야 할 일"('새천년기' 40항)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당면한 이러한 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다음 세 가지 현상에서 관측해 보고 21세기를 사는 말씀의 봉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자연종교의 확산입니다. 지금까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의 훼손이 가져다 준 생태 위기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정복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풍조가 주변에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신성시하는 세계관의 영향은 계시종교를 배제하고 자연종교와 유사한 성향의 종교를 더 선호하게 합니다. 동양종교와 같은 자연종교가 강세를 보이고 계시종교인 그리스도교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둘째, 신영성 운동의 범람입니다. 뉴에이지와 같은 신영성 운동의 이름으로 반그리스도교적인 종교 현상과 운동들이 가톨릭 교회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신영성 운동은 개인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이나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동원될 수 있다는 새로운 종교 운동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종교 선택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물든 신자들은 초월명상, 선, 기공, 요가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인 종교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부정하는 감각적이고 열광적인 신비 체험에만 몰입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인격적인 하느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말씀을 통해 인간과 대화하시는 하느님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이러한 거짓 영성 운동을 경계한 적이 있습니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디모 4, 1).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입니다. 인간의 자기 본능과 감각과 느낌을 충족시키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권위를 흔들고 있습니다. 감성에 충실한 것은 모두 선하다는 상대주의적 가치 기준에 기초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적인 절대적 가치 기준이 무너지고 상대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현상이 혼합되어 효력을 발휘하면서 신자들의 신앙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융합과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뒤섞인 이러한 혼합주의의 영향은 결국 경계와 영역과 정체성을 파괴하여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경계선까지 허물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에 입각한 이러한 움직임들은 신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켜 신앙인들에게조차 교회는 재미없고(교회전례), 고리타분하고(교리교육), 부담스러운(교회윤리)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러한 다원주의의 사조와 풍조에 직면해서 말씀의 봉사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우리의 삶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완전한 중개자로서 우리의 길이시며, 계시자로서 우리의 진리이시며, 구세주로서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 삶의 최고 가치인 길, 진리, 생명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전한다면 그만큼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히브 4, 12)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자연 영성, 평화, 자기 계발 등도 이 말씀 속에 이미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봉사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먼저 다원주의의 긍정적인 고유한 가치들은 올바로 수용하면서도 말씀이 정화되어 뿌리내리는 길을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항상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2003년 11월 23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권혁주 주교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성서주간 담화문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셨나이다"(사도 2, 28; 시편 16(15), 11)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성서주간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기를 빌며 인사드립니다(골로 3,16 참조). 금년 성서주간의 표어인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셨나이다”라는 말씀은 사도 베드로께서 오순절 설교 때에 인용하신 시편 말씀입니다(사도 2,28; 시편 16[15],11). 이 말씀은 우리 신자들 모두가 ‘생명의 길’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계시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서 말씀을 더욱 열심히 경청하고 묵상하고 전하자는 취지에서 선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생명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신약성서에 의하면 ‘생명에 이르는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한 마디로 ‘사랑으로 섬기는 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남기신 핵심 가르침도 바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한 13,1-17; 마르 10,42-45 참조). 예수님은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시면서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제물로 만들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무서운 사자처럼 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린양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는 삶을 사셨습니다(이사 53,10; 요한 1,29.35 “하느님의 어린양”; 마르 10,45 참조).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부터 먼저 불신과 폭력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빛’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죄에 뒤엉켜 ‘불신과 폭력의 악순환’ 속에 빠져 있는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2002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가을의 그윽한 정취를 채 느껴 보기도 전에, 때 이른 겨울 날씨가 찾아왔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이제 곧 새 해가 시작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얼마만큼 주님께서 알려주신 ‘생명의 길’을 걸어왔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욕심에 현혹되어 주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들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합과 평화로 ‘생명’을 살리는 길은 가지 않고,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생명’을 억압하거나 없애는 길을 걷지는 않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반성과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성서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느끼게 해주고 그분과 대화하도록 초대합니다. 성서를 자주 읽고 묵상하며 성서와 함께 기도를 하면, 성서는 우리의 삶 안에 서서히 영향을 주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히브 4,12) 때문입니다. 새 싹이 어둠 속에만 머물러 있으면 죽게 되고 햇볕을 받아야 자라나듯이, 우리의 생명도 하느님의 빛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성서가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의 빛을 받으며 자라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으신 ‘생명의 싹’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정성을 들입시다. 개인으로뿐 아니라, 공동체로도(가족, 소공동체, 또는 본당 단위로)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서 말씀을 더욱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노력합시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생명의 싹’을 키우는 가장 좋은 길 중의 하나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2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권혁주 주교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성서주간-“주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시편 118[119],105)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어느덧 2001년 한 해도 곡식과 과일이 고맙게 무르익은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빈 들녘과 잎을 여읜 숲은 희망의 새 생명을 배태하려는 침묵에 잠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올해는, 화평과 일치의 새 천년기를 열자던 해였음에도, 지난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경악할 대참사와 그에 이은 무력보복의 악몽을 벗지 못한 채, 마치 온 세상이 상호 배척과 증오, 원한과 복수, 끝이 안 보이는 공포와 불안의 시대로 빠져들고 있는 형세입니다. 나라 안에서도 경제 난국에 더하여 정치와 사회의 혼란, 가치관과 가정의 와해 앞에서, 아니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을 쓰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함께 모색해야 할 때를 맞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말없는 대다수 개개인과 가족들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한결같은 성실과 인내로 희망을 지니고 서로 아끼고 도우며 어질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선의의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더러는 사회의 품에서 소외되어, 방황과 허탈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우리의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산다는 우리마저도 하릴없이 세파에 밀려 갈피를 못 잡고 있지나 않습니까.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흔들림 없이 바라보아야 할 별빛, 우리가 꿋꿋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등불은 오직 참 생명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간인 이번 성서주간의 표어를 우리 모두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시편 118[119],105).
“주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열고 주님 자비의 품안으로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더는 세속의‘힘’과 잘난‘지혜’로만 헛되이 살려고 하지 말고, 참 믿음으로 성서말씀을 잣대 삼아 살아갈 때 올바른 방향도 찾고 역경을 헤쳐나갈 힘도 얻을 것입니다. 생명의 샘인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미움과 분열이 아니라 관용과 사랑으로, 일치와 평화로 이끌어 주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나 하루 세끼 밥을 먹어 육신의 목숨을 기르듯이, 우리 모두 먹고 살라고 내어주시는 성서말씀을 날마다 정성된 마음으로 읽고 묵상하면서 삽시다.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금 굳게 고백합시다(요한 6,68).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
주님, 저희가 날마다 성서를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기도하며 살고 선포하게 하시어 성령 안에서 평화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001년 11월 25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장익 주교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2000년 대 희년을 맞이하기 위해 용서 못한 사람 다 풀어 주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어려운 한 분에게 베풀어야겠구나.'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면서 동시에 교회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인 연중 34주일입니다. 이번 주간이 지나면 우리는 1999년을 마치고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게 됩니다. 희년은 구약성서 레위기 25장에서 유래합니다.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에 오는 해를 희년으로 삼고,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죄를 벗고 다른 사람을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모두 다 용서해 주고, 풀어줘서 다 없던 것으로 합니다. 안식년처럼 아무런 생업도 하지 않고 자기와 자기에게 딸린 가족들과 일꾼들 땅, 동물 등 모든 생물이 쉬게 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희년에는 저마다 자기 소유지를 다시 찾아 돌아가도록 풀어줍니다. 그 동안 살기가 어려워서 땅을 팔아 남의 땅에서 살았다면 제 땅을 다시 사고, 남의 종살이를 했다면 다시 자유인이 되어 자기 가족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예외 규정은 있지만 모든 매매가 무효가 되고 인간을 억누르고 제한하던 모든 제약이 풀리는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들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발전해 신명기 15장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규정'에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시는 땅 어느 성에서 너의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의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그가 너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에게 죄가 될 것이다. 너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땅에 있는 궁핍하고 가난한 동족에게 너의 손을 활짝 펴 주라고 너에게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15,7-8.9ㄷ.10ㄴ) 라고 까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1장 44절에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고 그가 무덤에서 나오는데 온 몸이 붕대에 싸여 있는 것을 보시고는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희년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죽음을 이기는 희망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 서로를 풀어주고 베풉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어린이 여러분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요? 예수님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더욱 더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어제 세례성사를 받은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또 부모님을 버리고 하느님께 가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면서 부모님의 자녀가 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반모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 말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견진성사를 받으면 더욱 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할 수 있게까지 되겠지요.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를 이룹니다. 여러분이 말한 것 같이 성체를 모시는 영성체도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해 쪼개 나누어진 빵'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몸을 빵으로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징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성체성사를 이루고, 성체를 모십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되새기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나도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를 바쳐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첫영성체를 하는 우리 친구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좋은 생각을 버리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꼭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성체성사로 힘을 얻어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우리는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 꿈이 이루어지신 분이 있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의 꿈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되새기고 있습니다. 아니 잊혀져 버린 꿈도 있겠지요. 다행스럽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분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길을 계속 걷고 계신 분은 꿈을 이루는 길이 너무나 멀어서 다소 지치거나 조바심은 나실 줄 모르지만 희망이 있어 보람은 있으실 것입니다. 또 꿈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분들은 인생의 신비로움을 느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의 꿈이 판사나 의사나 사장처럼 눈에 보이는 자리거나 위치이고 현실세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면 나의 노력 정도에 따라 그리고 사회가 나의 꿈을 받아들일 시기와 조건이 충족되면 언젠가는 나나 또는 나의 자녀가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 꿈이 우리의 내면에서 근원적으로 샘솟는 것이라면 현실세계에서 완전히 이루기도 또 이루어짐으로써 우리가 기대하던 것을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 특별히 영원과 항구적인 평화, 구원에 대한 갈증 등이 그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는 오늘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 18,36)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사랑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는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버지의 때가 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가 없거나 사라졌다고 생각하여 무시하거나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가 사는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진리에 대한 희망을 간절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 진리는 더욱더 우리에게 가까이 와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시기라도 하듯이 주님은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요한 18,37遁) 하늘나라의 구원과 오심을 선포하시는 기쁜 소식이신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우리와 우리 삶의 주인이요 왕으로 임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