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해외원조주일 담화문


우리 공동의 집과 한 가족인 인류를 보호합시다

(가해)마태 5,1-12; 17/01/2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스물다섯 번째 맞는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1993년부터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전 세계의 가난한 이웃의 삶을 이해하고 나눔 의식을 고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제정하여, 모든 신자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도록 촉구해 왔습니다.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산업화되고 고도로 과학화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일상에서 윤택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립니다. 늘어난 수명을 구가하면서 이전 시대에서는 시공의 한계 때문에 가지 못한 장소를 여행합니다.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 손쉽게 소통을 하고,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지식과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먹거리와 입을거리는 언제나 시장에 넘치도록 풍부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불평등과 모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발달한 과학 기술과 사회 제도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 때문에 공동선을 왜곡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그로 말미암아 지구 공동체는 양극화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70억 인류 가운데 10억이 넘는 이웃이 여전히 1달러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사는 절대적 빈곤에 허덕입니다. 이 불평등한 상황 자체가 우리 삶 전체를 압박하면서 깊은 성찰을 하게 하는 가운데 공정과 정의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요구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사이의 갈등을 상시적으로 노출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안락과 평화를 부끄럽게 합니다.

자연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시간 인류가 견지해 온 인간 중심의 가부장적 생활 태도는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보시니 좋으셨다는(창세 1장 참조) 피조물계를 인간의 편익을 위해서는 착취해도 되는 자원으로만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유일한 거처, 곧 하느님의 선물인 공동의 집(‘찬미받으소서’, 1항) 지구는 파괴되어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로마 8,22)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세상에 현존하는 불평등과 갈등은 오랜 시간의 축적과 함께 지구에 살았던 개개인 모두의 생활 태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삶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가 전면적으로 직면해 있는 현실의 모든 문제에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성찰해야 하고, 변화 또한 전면적이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카 10,29-37 참조)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우연히 내 앞에 놓여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가던 길을 멈추고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결연히 실행하는 착한 이웃이 됩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마르 3,35)라고 하신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생태주의자들의 수호자이신 프란치스코 성인에게서 영감을 받아 쓰신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찬미받으소서’, 49항)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는, 현대에 우리가 직면해 있는 위기는 인류적이고 지구적 차원의 것이면서 이에 대한 해결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책임과 파괴된 지구에 대한 성찰로 접근해야만 가능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비 생활은 결코 이웃의 삶과 생태계, 곧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내 이웃의 생활 태도는 나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권리나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제한하고 수탈함으로써 내게 온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환경으로부터 오는 혜택을 누리는 동안 우리의 후손들도 정당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돌아봅시다. 자연을 단지 자원으로써만 인식하는 태도 때문에 어머니인 땅(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 곧 공동의 집인 지구가 수탈당하고 하느님의 선물인 자연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 깨닫도록 합시다.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권리와 재화들은 사실 애초부터 나만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할 선물이었던 것임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한 형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나눔과 헌신은 결국 내게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해외 원조 주일에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를 더욱 깊이 깨달아, 예수님의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은 자녀답게 나눔과 가난을 실천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결심합시다.

2017년 1월 29일 해외 원조 주일에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이사장 김 운 회 주교



연중 제4주일 설미사

06/01/29

언젠가 인터넷에 이런 글이 떴습니다. 아마도 글의 내용은 여성이 쓴 것 같았는데 그 제목은 ‘이제 당신의 아내를 한번 안아주세요!’라는 글입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TV를 켜면, 거리에 나가면 놀라운 몸매의 미인들 넘쳐 나지만 당신의 아내의 넉넉한 뱃살은 헬스클럽에 등록하느니 남편 보약 한 첩, 애들 먹거리 하나 더 사들이는 아내의 넉넉한 마음입니다.

직장에도, 대학에도, 국회에도 똑똑하고 지적인 여인들의 목소리 넘쳐 나지만 당신 아내의 넘치는 잔소리는 깨끗한 집, 반듯한 아이들 건강한 당신을 위한 아내의 사랑의 외침입니다.

결혼 전에는 새 모이만큼 먹더니 요즘은 머슴밥 같이 먹어대는 아내 당신의 아내가 아이들이 남긴 밥 접시 귀퉁이의 반찬까지 먹어치우는 것은 당신의 늦은 귀가로 밀려 돌아가는 식은 밥 남은 반찬의 음식쓰레기 처리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에 세련된 화장 멋진 옷차림을 바랐지만 당신의 아내가 편한 고무줄 바지에 헐렁한 티셔츠에 굽 낮은 구두를 신고 나서는 것은 사랑스런 당신의 아이들을 더 잘 돌보려는 엄마의 소중한 마음입니다.

밖의 밥이 지겨운 당신 김이 모라 모락나는 갓 지은 밥을 먹고 싶은 당신에게 아이들 앞세워 외식 타령하는 당신 아내의 외식타령은 365일 밥짓고 치우는 그녀가 반찬 걱정, 치울 걱정 없이 잠깐의 여유라도 찾고 싶은 소박한 소망입니다.

일주일 내내 일에 지친 당신 주말엔 그저 잠만 쏟아지는데 나가고 싶어 안달하며 볶아대는 당신의 아내! 그것은 당신에게 휴식을 주는 편안한 집이 당신의 아내에겐 출퇴근도 없이 쏟아지는 일거리를 처리해야 하는 당신 아내의 일터이기 때문입니다.

꿈 많고, 아름답고, 날씬하고 건강했던 당신의 그녀가 아무런 꿈도 없이 생각도 없이 하루 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보통 아줌마가 되어버린 것은 당신에게 그녀의 일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꿈이 바로 당신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가씨 때의 당당함은 어디로 갔는지 '자기, 날 사랑해, 사랑하긴 하냐구' 귀찮도록 따라 다니며 물어대는 당신의 아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런 느낌없이 아내이기 때문에 던져지는 키스와 포옹이 아니라 가슴 가득 안은 사랑을 사무치도록 전하는 그런 포옹입니다.

이제 당신의 아내를 안아 주세요.

당신의 사랑이 전해질 때까지 꼭~~ 아주 꼭~~ 말입니다.

귀에 대고 속삭이세요.

'당신 정말 사랑해' 라고...”

저에겐 읽기조차 부담스러운 글이지만, 여러분에겐 괜찮을 것 같아 읽어드렸습니다.

성당에서 신자 부부들을 볼 때마다, 겉으로 보기엔 모두 선남 선녀요, 모두 멋진 남편, 아름다운 아내인지라 실제로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리고 남이 볼 땐 훌륭하고 좋지만, 실제로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로 보입니다. 밖에서 아무리 잘 해도 집에서는 빵점인게 한국 남자요, 남자는 집안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늘 부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왔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남이 실제로 좋아보인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남입니다.

남의 장점과 내 배우자의 단점을 비교하면 내 배우자만 못나 보이고, 그런 못난이와 사는 나만 답답하고 슬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버지, 내 자식이 내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내 가족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었으면 좋겠건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지나친 요망사항에 불과한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현실은 내 기대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저 행복하려면 먼저 남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내 욕심을 버리고, 내 가족의 현실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하면서 제켜놓고 비난하고 원망하기 보다는,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지나친 기내나 요구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길이 내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는 지름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도록,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주셨다고 여기고, 그것을 마치 내 일생의 사명처럼 실행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배우자를 바라기보다, 내 배우자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내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물론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면 더 좋겠죠.

올 한 해 여러분이 노력하고 노력해서 여러분의 가정을 성가정으로 꾸미시고, 그렇게 여러분의 가정이 성가정이 됨으로써 우리 교회도 더욱 더 거룩하게 되기를 수녀님들과 함께 1년 내내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오늘 설날을 맞아 다함께 주보를 보면서 올 한 해를 설계해 봅시다.

첫째, 올 2006년에,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꼭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가지만 정하고 1년 동안 꾸준히 기도하며 청합시다.

둘째, 올 2006년에는, 내가 우리 가족에게 그 동안 살면서 꼭 해야만 했는데도 못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올 해는 이 일 하나만큼은 꼭 하겠다고 다짐할 것은 무엇입니까?

셋째, 올 2006년 한 해 동안, 내가 우리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열심히 하겠다’, ‘잘 하겠다’고 막연히 정하지 말고, 구체적이고도 내가 실현가능한 것을 하나씩 정해 노력하기로 합시다.



연중 제4주일

(가해)마태 5, 1-12; 01/30/05

근 현대시기에 한국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청업자에게 납품을 받아놓고 줄 것도 안 주고, 그나마 자기가 줄 것을 담보삼아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아 챙기고 나서 고의부도를 내고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성장가도를 달려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서 그야말로 당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보고 집안에서 부인들은 자기 남편이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왜 남들은 다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 왜 우리 남편은 하는 일마다 안 되는가하면서 말이다.

과연 고의부도를 내고 자기만 살찌우는 사람들이 잘 한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 당하는 사람이 잘못한 것인가. 아니면 똘똘하지 못해서 자기 몫을 미리 챙기지 못하고 자기가 받아낼 것을 악착같이 쫓아가서 얻어내지 못해서 그냥 손해보고 마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

오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서 돈 벌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꿀꺽 꿀꺽 먹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자기 것을 찾아내고 기어이 받아내고야 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은 손해를 보지만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이익을 기대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는 것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똘똘이들에게 당하고,

냉정히 잘라 말하지 못하고,

악착같이 받아내지 못해서 손해보고 결국 슬퍼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식을 보자니 남편이 걸리고. 남편을 생각하자니 자식이 걸리고,

시댁을 생각하자니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고, 친정을 생각하자니 남편의 얼굴이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선한 마음에 죄책감과 부담감만 가득 안고 그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슬퍼하는 사람들.

부모와 자식의 죽음을 잊지 못해 한 없이 아파하는 사람들,

이별한 배우자와 친지들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아 그리워하며, 아직도 자기 삶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들

심지어는 이웃의 불행과 아픔 앞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아파해주고, 이웃의 불행과 아픔을 적절히 도와주지 못해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 꿇어 자신의 부족함과 이기적인 모습을 뉘우치며 아파하는 사람들,

세상의 행복과 구원을 막고 지연시키는 불의와 사리사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슬퍼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기는커녕 그 사람들에게 아픔을 선사하고 상대의 아픔을 전제로 자신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지 못하고 오로지 사리사욕에 빠져 자기만 챙기는 사람들은 어떤가?

현세에서 재물을 모으기는 하지만, 그 재물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하며 불안 속에 살아가며,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현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누구보다도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주님의 위로는커녕 이웃의 손가락질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반면에 자기의 것을 빼앗기고 자기 것을 받아내지 못해서 억울해 하다가 결국 분노와 미움에 갇혀버린 사람은 참으로 안쓰럽다. 차라리 잊어버리고 포기해버린 사람은 편안하기라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비록 안 주기 때문에 못 받고, 빼앗아 가기 때문에 빼앗겼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괴롭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오히려 염려해주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다.

비단 세상 안에서만이 아니라, 술 먹고 괴롭히는 남편이나 바람난 아내, 부모의 속을 갈가리 찢어 놓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그 괴로움을 호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끌어안은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대신 아버지께 간구해주신 것같이,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성화시키는 사람은 주님의 진정한 위로와 구원을 얻을 것이다.

현세에서는 주님께서 나의 결백함과 나의 용서를 알고 계시니 위로를 받을 것이고,

나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께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구하시는 주님의 남은 고통을 덜해주고 있으니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마침내는 자기가 위로하고 용서해 준 사람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여서 죽었지만 죽지 않고 부활하신 것처럼,

비록 현세에서 당하면서도 용서하고,

자신의 마음을 복수하라고 충동하는 악에게 빼앗기지 않고

끝까지 선하게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한 없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그의 죄를 묻지 않고 부활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아멘.



연중 제4주일-주님 봉헌 축일

(다해) 루가 4, 21-30; 2004/02/01

지난 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을 주님의 사명 삼아 선포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 21)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모두 놀라며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주 무시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하면서 수군거렸다. 그들의 말은 결국, '이루어졌다니, 뭐가 이루어져? 지가 하느님인가?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져?' '아니, 목수의 아들이 뭘 안다고 저래?' '겨우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뭘 안다고 저렇게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23)

그리고는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 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21-27)고 말씀하신다.

성서기자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썼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28-29)고 썼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기에 유다인들이 그렇게까지 나왔는가? 오늘 우리는 루가 복음을 읽었지만, 마태오 복음 13장 53절에서 58절 나오는 같은 기사를 보면, 마태오는 57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58절에서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 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고 썼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6장 1절에서 6절까지의 기사에서 마르코는 3절 말미에서 그들이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쓰고는 아예 5절에서는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고 까지 썼으며, 6절에서는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고 썼다.

결국 예수님의 고향 어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겨우 목수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왜 설치느냐?'는 비난과 단죄를 받았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자란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은 것에 대해 한 말씀하신 것이고 그에 대한 분노를 오늘 루가 복음은 우리에게 전한다.

다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까지는 보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믿었고 예수님께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청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에서 그렇게 믿고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랐고 지금도 예수님의 부모와 친척이 살고 있는 나자렛에서는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의 청년이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지방의 사람들은 예수님이란 한 인간의 모습에서 하느님성을, 신성을 발견했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인간 그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제까지 우리 동네의 어린아이였던 아이가 UW대학이라도 갔다고 해서 우리 눈에 그 아이가 다른 아이로 비치겠는가? 그저 그 아이는 아이일 뿐이지. 그것도 혹시 자기 자식이라면 또 몰라도, 옆집의 아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 옆집이 여러분과 아주 앙숙과도 같은 관계를 가진 상황이라면 믿기는커녕 그야말로 오늘 성서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죽이려고 덤빌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보면서도 남들과는 달리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것을 발견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도 가져야 하겠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시고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도 한다.

그럼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언급했던 두 가지 비유, 즉 사렙다 마을의 과부와 시리아 장군 나아만 이야기.

열왕기 상권 17장에 나오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아스도랏이라는 여신을 섬기는 시돈 지방의 이방인이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려 두고 시돈의 사람들을 살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나라가 둘로 갈라졌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 숭배에 빠졌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언자를 멀리하고 예언자의 말을 통해 들려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경멸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예언을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말로 듣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비를 내리지 않아 삼 년이나 가뭄이 든 상황에서, 이스라엘 전역의 사람들은 돌보지 않으시고 예언자 엘리야를 시돈 지방의 한 과부에게 보내 먹을 것을 마련해주신 것이다.

열왕기 하권 5장에 나오는 나아만은 시리아의 군사령관이었고 문둥병자였다. 나아만은 자기가 잡아온 노예가 이스라엘의 예언자라면 장군을 고쳐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왕에게 이스라엘 왕에게 자기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예언자에게 안내해 달라고 문서를 써달라고 해서 이스라엘을 찾았다. 나아만은 자기가 낳을 셈으로 어린 소녀의 말을 믿고 이스라엘을 찾아왔지만, 정작 이스라엘의 왕은 예언자를 믿기는커녕 '어떻게 우리가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를 치기 위한 계략과 생트집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며 옷을 찢었다. 우리가 들을 때는 왕의 말이 상식적이고도 합당한 말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과 예언자에게는 지혜도 믿음도 없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우여곡절 속에서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를 찾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아만 장군에게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예언자 엘리사는 시리아에서 이스라엘까지 문둥병을 고치러 먼길을 온 나아만 장군에게 말한다. "요르단강에 가서 그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나아만은 드디어 화를 낸다. '아니 이게 무슨 장난이냐 뭐냐? 시리아에 요르단강 만한 강이 없어서 여기 와서 씻으란 말이냐?' 그러자 그 부하들이 말린다. 만일 이 예언자가 장군에게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장군은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몸이나 씻으라고 하는데, 깨끗하게 된다는데 그 정도쯤 못할 게 뭐냐?' 그래서 나아만은 요르단 강물에 몸을 씻고, 문둥병은 낳았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둥병 환자가 없었는가? 아니다. 다른 문둥병 환자는 요르단강에 안 들어갔는가? 아니다.

결국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기적같이 그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음도 기적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 21장 22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지만, 실상 믿지 않는 자는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난 수요일 미사 복음, 마르코 복음 4장 11절에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게 해주시는 주님께 청해야겠다.

주님! 이 변천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불안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믿어 우리의 미래를 보고 거침없이 나아가게 해 주소서. 저희에게 강한 믿음을 심어주시어, 주님께서 저희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이루고 마침내 하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연중 제4주일-주님 봉헌 축일

(나해) 루가 2, 22-40; 2003/02/02

지난달에 우리 본당에 새 사제가 탄생했다. 참으로 기쁘고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새 사제가 파푸아 뉴기니아라는 오지로 선교를 간다하니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주님께 영광을 드릴 일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부족한 점과 결점도 많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다니 개인적으로는 송구스러울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주님의 교회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찔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는 단점은 우리 눈에 크게 띄지만, 그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아있게 해 주는 장점이 얼마나 많고 또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채워주셨는지 감탄하게 된다. 아울러 나 하나 개인으로는 부족하기에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주듯이 이렇게 많은 형제 자매들을 협조자로 붙여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사업을 하기에 앞서 오히려 내가 가진 인간 본성을 제어하고 인격을 성숙시켜야 하는 과제마저 하나 더 짊어지고 있다.

그 누구든지 잠시라도 멈춰 서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이끌어 주셨는지를 깨닫게 되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야 말리라는 믿음과 희망으로 감히 주님의 사랑을 되새기고 기억하여 내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이것이 봉헌의 삶이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설교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남을 도와주는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힘을 받은 사람답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무슨 일에든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영광과 권세를 누리실 분이십니다. 아멘."(1베드 4, 8. 10-11)

그래서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연약하고 모자란 나를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미래를 무조건 장담할 수도 없고, 조심하고 노력한다고 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저 저의 모든 행동이 주님께 영광이 되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 저를 저버리지 마시고 저를 이끄시어 주님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아멘."



연중 제4주일

(가해) 마태 5, 1-12ㄱ; 02/02/03

어떤 분이 "성당에 가면 가난하게 살라고 하기 때문에 가기 싫다."고 했다. 그분은 "어릴 때 가난해서 힘들었는데, 왜 돈 많이 벌어서 잘 살라고 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라고 하는지 그게 싫다."는 것이다.

성당에서는 가난을 말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먹을 것이 없이 궁핍하거나 굶주리며 살라는 것이 아니다. 하기 쉽게 말한다면, 검소하게 살라는 것이다. 자기의 수입이나 재산을 다 써버리지 말고, 조금만 쓰고 나머지는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다. 그래서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없이, 다같이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가진 사람은 주어서 기쁘고, 없는 사람은 받아서 기쁘다. 재물을 주는 이는 줌으로써 스스로 뿌듯한 긍지를 느끼고, 내가 받아들여져서 기쁘고, 형제의 감사를 받아 마음이 흐뭇해진다. 재물을 받는 사람은 형제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이 넓어지고, 필요한 것이 생겨서 기쁘고, 나를 기억해줘서 기쁘다. 사랑으로 재물을 나누고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함께 사는 평화와 공존의 하늘 나라를 얻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겸손하고 검소하며 자기를 나눔으로써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슬퍼하고, 남에게 악착같이 뺏어오지 못하고 포기하고 용서함으로써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친절로 봉사함으로써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나쁜 일 해서 걸릴까봐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자기 이익을 위해 요리 조리 꾀부리지 않고 속시원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삭히고 아끼고 덮어줌으로써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삶의 방법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이다. 예수님께서 몸소 예수님의 생을 예수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형제들을 위해 삶으로써, 심지어는 형제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심으로써, 부활하신 후엔 세상 모든 형제 자매들의 주님이 되셨고 우리 모두는 주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11-12절)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고 죽어가는 초처럼, 지금 하나라도 더 가져 편안하게 살려다가 외톨이가 되지 말고, 하나라도 더 나누어서 형제를 얻고 행복을 찾기로 하자.



2001년 사회복지주일 담화문

세계 기아민들에게 사랑과 희망을 줍시다

(01/01/28)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새 천년기, 첫 번째 맞이하는 사회복지주일에 우리 모두는 세계 기아민들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세기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새 세기가 시작된 오늘의 세계에는 아직도 인류의 10억 인구가 굶주리고 있으며, 20억의 인구가 최저 빈곤선 아래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먼저 발전을 이룩한 부강한 국가들과 아직 개발이 덜 된 국가들 사이의 빈부 격차는 날로 커져가고 있고, 부유한 나라들에 대한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적 의존도는 계속 높아가고만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기아에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부유한 이들을 향하여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사목헌장, 9항 참조). 이러한 굶주린 사람들, 곤궁한 사람들, 집 없는 사람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자기 집 문간에 누워 있는 라자로를 모르는 체하는 부자의 모습과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루가 16,19-31 참조) 실로 수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빈곤의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현실, 이 완전 결핍과 빈곤의 비극 앞에서 우리에게 의문을 제시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사회적 관심, 13항 참조).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셨지만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고(2고린 8,9 참조),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25,40 참조). 이 모범에 따라 성 야고보 사도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자들의 의무를 엄중하게 깨우쳐 주었습니다(야고 5,1-4 참조). 성 요한 사도도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의 궁핍에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은 그 형제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1요한 3,17 참조). 형제애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성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와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에서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원조를 호소하였습니다(1고린 16,1-4, 로마 15,25 참조).

3. 교회는 형제애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왔을 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 공동체 때부터 지금까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형제애를 끊임없이 실천하여 왔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역대 교황님들의 사회적 가르침을 통하여 형제애 실천을 세계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하여 왔습니다. 즉, 교회는 인종과 국경, 피부색과 성별, 이념과 종교를 넘어서서 가난하고,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나눔과 도움을 촉구하고 있으며, 각 선진국 교회는 저개발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해외원조를 지속적으로 실행해 왔습니다.

4.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외국 교회의 원조를 받아왔습니다. 특히 한국 전쟁 후에는 미국 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나라 교회의 원조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복지사업과 개발사업에 재정지원을 받아 가난한 이들을 계속하여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 주교회의는 한국 교회가 해외원조를 공식적으로 시작한다는 뜻깊은 결정을 하였고, 매년 1월 마지막 주일 2차 헌금을 이를 위하여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원조받는 교회'에서 '원조하는 교회'로 변화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5. 오늘날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와 동구의 지역 교회는 한국 교회의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 북녘의 우리 형제 자매들도 우리의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빈곤과 결핍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함께 계시며 형제적인 사랑과 나눔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고통받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임을 잊지 맙시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실천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이러한 정신으로 실시하는 세계 기아민 돕기 헌금에 적극적인 동참을 바라며,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2001년 1월 28일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장 봉 훈 주교



연중4주일-사회복지주일

(나해) 마르 1, 21-28: 2000/01/30

우리 나라는 70년대 이후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가속화되면서, 경제적인 안정과 자녀 교육비를 벌기 위해서 부부가 함께 직업전선에 나서는 맞벌이 가정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더 잘살면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부부가 돈을 벌러 나간 사이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오히려 불행한 가정이 생겨났습니다. 인간 존재와 인격에 대한 철학 교육이 없어져, '어떻게 사느냐?' 보다 '무엇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시되고, 윤리 기준은 사라진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을 축적하려는 경제제일주의 인간상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청소년들에게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요즘 십대 매춘의 근본적인 문제는 십대 여성들이 고생도 않고 즐기면서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돈맛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준 삶의 방식입니다. '가지고 즐기는 것이 행복이며', 즐기기 위해서는 돈을 가져야 하고, 돈을 갖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돈만 가지게 되면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젊은이들의 행동을 결정짓는 가치기준은 인륜이나 신앙이 아니라 돈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파괴하는 경제제일주의, 배금주의라는 악마, 맘몬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고치기 위해서는 '돈'보다도 '사람'이 우선한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고 '인간 자존'을 증거해야 합니다. 돈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돈이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도, 심지어는 가진 돈을 남에게 주는 것이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을 선포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인간 삶의 윤리적 가치'를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돈에 앞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길과 목표와 원동력은 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본당에 그리스도교 어린이집을 지어야하는 우선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사회에 대한 악의 지배에 대항하여 무엇이 옳고 참된 '진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정의'를 세우고, 인간 구원과 사회의 유지를 위해 희생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살도록 제시해야 하겠습니다.



연중 제4주일

(가해) 마태 5,1-12 : 99/01/31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1)고 하셨습니다. 모두 다 가난은 피하고 싶고 어서 빨리 떨쳐버려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까? 마구간 말구유 위에 태어나 가난을 모르실 지도 않으실 것이고, 가진 사람을 증오하면서 가진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가 대신 취득하려는 탐욕 가득한 이를 말하는 것도 아니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첫째, 비록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적지만 물질적인 것 외에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우정과 나눔, 덕과 인격 등. 오히려 없을 땐 없어서 문제가 없었는데, 돈이 생기니까 문제도 생겼다는 것처럼 재물의 굴레 속에 갇혀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나눠줘서 가난해진 사람들 곧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남에게 각박하게 자기 받을 것 챙길 것 다 챙기지 못하고 당함으로써 '슬퍼하는 사람'(마태 5,4), 법 없이 사는 정도가 아니라 간도 쓸개도 다 내어줄 만큼 이웃에게 '온유한 사람'(5,5), 참으로 옳고 좋은 일에 몸사리지 않고 말로뿐 아니라 스스로를 내 던져 투신하는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5,6), 되받을 생각 않고 꾸어주고 심지어는 엄청난 액수의 보증을 마음속으로는 꺼리면서도 스스로 사랑을 단절 할 수 없어 서주고 나서 자기 재산을 대신 차압당하면서도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못한 채 용서하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5,7), 세상의 죄와 악의 유혹 속에서도 못내 양심을 더럽히지 못하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5,8), 분열과 단절의 아픔을 모른 체 않고 해소하고 다시 일치시켜 화목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5,9),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5,10)은 행복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과 같거나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5,11)고 하셨다. 아니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고 하셨다. "너희가 받을 큰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5,12)



연중 제4주일

(다해) 루가 4,21-30 : 98/02/01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구세주에 관한 이사야 예언서의 기사를 읽으시고 나서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고 말씀하셨다. 회당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저런 건방진…' 내지는 '저런 사기꾼…' 하고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를 들어 그들의 마음을 지적하셨다. 열왕기 상권 17장에 나오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 마을 과부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준 엘리야 이야기와 열왕기 하권 5장에 나오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을 나병으로부터 고쳐주신 이야기다. 예언자들에게 혜택을 받은 이들은 둘 다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불림을 받았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불렸다는 면에서 볼 때, 이 두 사람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이 무엇인가?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먹을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밖에 없는 상태에서 예언자가 먹을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대로 가진 것을 다 내어놓았고, 나아만 장군은 예언자가 7번 씻으라고 제시한 요르단 강보다 자기 나라 시리아에는 더 좋은 강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했다. 이 둘의 예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은 불림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했다.'는 점이다.

요즘 IMF의 자금지원 시대를 맞이하여 어렵다고들 한다. 우리말에 "잘 살 때는 어려울 때를 기억하고 대비하여 검소하고 절약하며 살고, 어려울 때는 잘 살 때를 기억하고 준비하여 낙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격언이 있다. 지금 어려울 때 앞으로 좋아질 때를 대비하여 열심히 일하고 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조건과 상황이 마련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자기를 준비시키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 한편 우리는 좀 더 신앙인의 눈으로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우리의 목표와 희망을 두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물질의 소유 여부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보람이 좌우되는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않을 그리고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생명의 양식인 말씀과 하느님 나라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과정들을 우리 인생의 중간 목표와 수단으로 삼아야겠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 앞에서도 꿋꿋이 살아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루가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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