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제24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마리아처럼 의지하기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다해)루카 5,1-11; 16/02/07

요즘 우리 곁엔 유난히 환우들이 많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오는 2월 11일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이래 저래 아프고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기억하여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환우들과 가족들, 의료인들 한 분, 한 분을 떠올리며, 교황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말씀이 당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시며 나자렛에서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질병, 특히 중병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위기에 빠뜨리고, 심오한 질문들을 이끌어냅니다. 우리의 첫 반응은 때로 반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는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잃었고 그 어느 것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시험에 들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모든 긍정적 잠재력이 드러납니다. 신앙이 질병이나 고통, 또는 그에 따른 의문들을 없애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의 가장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열쇠를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열쇠는 어떻게 질병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 곁에서 함께 걸어가시는 예수님께 매우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길을 잘 알고 계시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이 열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께서는 방금 혼인한 부부에게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다가가 문제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지적하시자(요한 2,4 참조), 마리아께서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많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는 교회의 한 모습입니다. 그 중심에는 표징을 행하시는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새로운 공동체의 첫 결실인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곁에는 신중하시고 기도하시는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계십니다. 마리아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에 함께 하시며 그 기쁨이 커지도록 도와주십니다. 마리아께서는 방금 혼인한 부부와 잔치에 초대 받은 모든 손님을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께 전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당신 아드님처럼 우리를 지켜보시는 좋은 어머니께서 계십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 아드님처럼 자애와 자비가 가득한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져 주시어 그들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과도 같은 도움의 손길을 어머니께서 지니고 계십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확신에 넘쳐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에 우리의 마음을 열게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는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2코린 1,3-5). 마리아께서는 위로받으신 어머니로 당신 자녀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카나에서 예수님과 당신 사명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움과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자 오신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구원 사업으로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을 고쳐주시고,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시며,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을 수 있게 해 주시고, 나병 환자들이 건강과 존엄을 되찾도록 해 주시며, 죽은 이들을 되살리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게 됩니다(루카 7,21-22 참조). 성령께서 마리아의 어머니다운 마음에 불러일으키신 요청을 통하여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뿐만 아니라 자비도 드러났습니다.

마리아의 배려에는 하느님의 온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온유는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요구, 심지어 가장 눈치채기 힘든 요구까지도 알아보는 많은 이들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은 아픈 사람들을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픈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나이든 부모를 돌보는 자녀, 조부모를 돌보는 손자들이 얼마나 자주 자신들의 기도를 성모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우리는 제일 먼저 그들의 건강을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4-5). 그런데 신앙에서 힘을 얻은 사랑으로 우리는 그들이 육체적 건강 이상의 것을 얻게 되기를 간청합니다. 우리는 평화,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선물인 평안한 삶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진심으로 간청하는 이들에게 결코 거절하신 적이 없습니다.

카나의 장면에서 예수님과 당신 어머니 곁에는 마리아께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신 일꾼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기적은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기적을 행하실 때 인간의 도움을 활용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우라고 부탁하십니다. 다른 이의 종이 되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 일이지요! 그 무엇보다도 이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마르 10,45)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닮도록 해줍니다. 그들은 물독에 물을 가득 붓습니다(요한 2,7 참조). 그들은 성모님을 신뢰하여 불평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부탁 받은 것을 곧바로 훌륭하게 실행합니다.

이 세계 병자의 날에, 우리 모두가 곤경에 처한 이들, 구체적으로 우리의 병약한 형제자매를 위하여 봉사할 준비가 되도록 예수님과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간청합시다. 때로 이러한 봉사가 힘들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인간적 노력을 어떤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께서 흔히 숨겨진 기적을 행하시는 데에 도움을 드리는 손과 팔과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는 모든 이가 자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정신에서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머니께서 다정한 모습으로 이 성년에 우리와 함께하시어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온유함이 주는 기쁨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자비의 얼굴」, 24항). 그리고 그 기쁨이 우리의 마음 안에 머물고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쁨과 위로와 함께 고난과 시련을 동정 마리아의 전구에 맡겨드립시다.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특히 고통의 때에 자비롭게 바라보시며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자비로운 얼굴을 이제와 영원히 바라볼 만한 이들로 만들어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며 저의 교황 강복을 보내드립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연중 제5주일 제23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


마음의 지혜(Sapientia cordis)


“나는 눈먼 이에게 눈이 되고 다리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어 주었지”(욥 29,15)

(나해) 마르 1,29-39; 12/02/05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와 예수님을 찾아오는 많은 환우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복음과 전후하여, 교회는 1922년부터 매년 2월 11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병자의 날’로 정하고, 병자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을 다짐하고 기도합니다. 오늘은 제23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담화를 듣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 제정하신 제23차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질병의 짐을 짊어지고, 고통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여러모로 하나가 되신 모든 병자 여러분, 그리고 의료계 종사자와 자원봉사자들께 인사드립니다.

올해 세계 병자의 날 주제로 저는 “나는 눈먼 이에게 눈이 되고 다리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어주었지.”(욥 29,15) 라는 욥기의 구절을 묵상하며, 이를 마음의 지혜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지혜는 이론적 추상적인 인식, 추론의 산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고보 성인이 서한에서 설명하신 대로, 이 지혜는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야고 3,17) 이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의 고통에 열려 있고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시는 생각과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시편의 기도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읍시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89],12) 세계 병자의 날의 의의는 하느님의 선물인 이 마음의 지혜로 요약됩니다.

2.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를 섬기는 것입니다. “나는 눈먼 이에게 눈이 되고 다리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어주었지.” 라는 욥의 말에서, 고을의 원로들 가운데 어느 정도 권위가 있고 높은 자리에 있던 이 의로운 사람이 곤경에 처한 이들을 어떻게 섬겼는지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그의 높은 도덕적 경지는 하소연하는 가련한 이와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욥 29,12-13 참조).

오늘날에도 말이 아니라 참된 신앙에 뿌리를 둔 삶으로 “눈먼 이에게 눈”이 되고 “다리 저는 이에게 다리”가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곧 몸을 씻고 옷을 입고 식사를 하는 데에 도움이 필요한 병자들 곁에 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봉사는 특히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치고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을 며칠 돌보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환자가 더 이상 감사 표현을 할 수 없게 될 경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성화의 길입니까! 그렇게 어려운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심을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교회 사명의 버팀목이 됩니다.

3.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픈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입니다. 이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러 오신 아드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드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입니다(마태 20,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아픈 형제자매와 묵묵히 함께하는 동행의 가치를 깨닫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살아있는 신앙으로 성령께 청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곁에 머물면서 우리의 사랑을 전할 때 아픈 형제자매는 사랑과 위로를 더욱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에, ‘삶의 질’을 들먹이면서 중병에 시달리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믿게 만드는 말들 뒤에는 얼마나 큰 거짓이 감춰져 있습니까!

4. 마음의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픈 이들의 곁에서 보내는 시간의 특별한 가치를 잊고 삽니다. 우리는 언제나 바쁘고, 정신없이 일하고 활동하느라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고 다른 이들을 돌보며 책임지는 것의 가치를 잊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 뒤에는 종종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믿음, 곧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형제자매를 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는 모든 도덕 규범의 바탕이 되는 두 가지 으뜸 계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께서 완전히 거저 주시는 은총에 응답하며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을 식별하는 가장 분명한 표지입니다.” 교회가 지닌 선교적 본성에서 “이웃을 향한 실질적인 사랑, 이해하고 돕고 격려하는 공감이 솟아납니다.”

5. 마음의 지혜는 형제자매를 심판하지 않고 그들과 연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픈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찾아가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곁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욥 2,13)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내심 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불행을 그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사랑은 심판하지 않는 나눔, 다른 이들의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나눔입니다. 짐짓 남이 칭찬해 주기를 바라고 좋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그러한 거짓 겸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참사랑입니다.

욥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해답을 찾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온전히 무상으로 지극한 자비에서 우리와 맺으시는 연대라는 지고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참담한 고통, 특히 무고한 고통에 대한 이 사랑의 응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상처는 신앙의 걸림돌이면서 신앙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질병과 외로움과 무능력으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기가 힘들 때에도, 고통의 경험은 은총을 전하는 탁월한 자리이며 마음의 지혜를 얻고 키우기 위한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욥이 모든 일을 겪고 난 뒤 하느님께 드린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고통과 아픔의 신비에 잠긴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이를 받아들일 때 신앙의 산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머리로 고통의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6. 사람이 되신 지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낳으신 어머니 마리아의 보호에 이번 세계 병자의 날을 맡겨드립니다.

“오! 상지의 옥좌이신 마리아님, 우리 어머니로서 모든 병자와 그들을 보살피는 이들을 위하여 전구해 주소서. 저희가 고통 받는 이웃을 섬기고, 고통의 경험을 통하여 마음의 참된 지혜를 받아들이고 키워나갈 수 있게 하소서.”

저는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이 기도를 바치며 교황 강복을 보내드립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연중 제5주일

(가해) 마태 5,13-16; 14/02/09

언젠가 쉬는 교우분이 말했습니다. “신부님, 처음엔 몰랐는데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참 부담스러워요. 영세 받을 땐 나도 신자가 되었구나 싶어서 기쁘고, 여기 저기서 칭찬해 주고 축하해 주니까 좋기만 했는데, 점점 현실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부담스럽기 시작해졌어요…… 교회에서 배운 대로 잘 하면 좋을 텐데 잘 못하니까, 창피하기도 하고, 점점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슬슬 부담스러워 성당에까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성당에 나와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신부님!”

어쩌면 열심과 냉담의 차이는, 우리 안에 주님께서 생생히 살아계시는 것과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의 차이는 ‘부담스러워 용서를 청하고 매달리며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과 ‘부담스러워 피하고 포기하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천주교 신자로서 사회에서 모범을 보이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더 착하고 더 많이 양보하고 남 모르게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까지 하기는커녕, 오늘 나의 현실은 그야말로 내 코가 석자요, 내 가정, 나 한 몸 추스르기조차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마태 5,13-15)

그러기에 가끔은 마음 속으로 ‘적당히 살자!’ ‘남하고 비슷해야지, 나만 그렇게 튀면 안 된다.’ 등등 자신의 부족을 합리화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적당히 넘기고 피해가고 싶습니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우리가 몇 %, 어느 정도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지, 실제로 전혀 안 지키고 안 따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지금 당장 못 지킨다고 하더라도, ‘왜 자신이 못 지켰는지?’,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 지’ 잘 고민하고 되새기고 있다가, 다음에 또 기회가 왔을 때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더 부담스러운 것은 그렇게 부족하고 부당한 나를 주님께서는 주님 복음 선포 사업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내가 겪게 되는 사건과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인지 제 때에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고, 어렴풋이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넘어간 다음, 한 참 후에 되새길 때가 돼서야 제대로 알아 듣고 후회하는 어리석고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부르시니 오히려 이는 부담이 아니라 선택이자 축복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지금 현재 거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지금 당장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지 못하여 거룩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담, 그러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서 사그라들지 않고 피어 오르는 거룩함에 대한 열정 등은 결코 우리의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초대요 축복이자 선택된 이들만이 걸을 수 있는 ‘영광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6-18)

그런 면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오는 부담은 오히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는데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진솔하고 겸허한 고백으로 보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사도 바오로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3-5)

우리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지혜와 힘으로는 이룰 수 없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 소명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6.28)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내게 생기는 모든 일에 성령께서 함께하시면서 이끌어 주시고 힘이 되어주셔서 내가 기꺼이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게”(마태 5,16) 되기를 간구합니다.

매일 저녁 그날 하루를 주님 안에서 되새기면서 기도합니다. 오늘 내가 마주친 사람과 상황 중에 다 하지 못하고, 미처 다 채우지 못했던 모든 사람과 상황을 주님께서 몸소 채워주시기를, 그래서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추게”(15절) 되기를 간구합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시작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거름을 치는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죄를 사해주시고, 주님의 영을 보내시어 저희를 주님 구원사업의 도구로 써주소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연중 제5주일 설미사

13/02/03

지난 주일 손님이 많아서 식사는 하고 가셨습니까? 많은 손님들이 여러분이 저를 아주 많이 사랑해주고 계시다는 정을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은경축을 준비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진정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서 여러분의 온정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여러분은 설 하면 어떤 것이 생각납니까?

저는 떡국이 생각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떡국! 제가 떡국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대학 다닐 때 오퍼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때 점심은 늘 회사 옆 건물의 분식집에서 떡국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인 아주머니가 '청년이 왜 그렇게 떡국을 질리지도 않고 잘 먹느냐?'고 하시면서, 매일 점심 때 저를 위해 떡국을 특별히 끓여 준비해 주셨을 정도였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지 20여년이 넘어 그 때 끓여주신 그 떡국의 맛이 지금 먹는 떡국의 맛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떡국을 먹으면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떡국을 끓이며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이루셨던 부모님의 사랑과 은덕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은 이 설 명절에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여러분이 그리는 설의 꿈과 추억과 기억이 오늘 여러분에게 가정의 화목과 평화를 인도합니까? 잠시 과거의 추억을 되살려 보면서 부모님과 은인과 후원자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우리가 있도록 피를 흘린 순국자들이 베풀어준 온정이 오늘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어떤 영향을 주고 새롭게 승화시켜 주고 있는지 되새겨 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연중 제5주일

(나해) 마르 1,29-39; 12/02/05

지난 2월 1일자 MBC뉴스에서 불교미래사회연구소의 2044년 한국 불교의 자화상 보고서를 기사화 했습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앞으로 30년 후인 2044년에는 국내 최대 종교가 천주교가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불교미래사회연구소 소장인 퇴휴 스님은 천주교 신자가 2044년에 2천5백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이는 2044년 한국의 예상 인구 4,450만명 가운데 56%에 달하는 수치이며, 종교를 가진 국민의 82%가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 퇴휴 스님은 “우리 나라의 총인구수가 2018년에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하게 됨을 감안하면 천주교 신자가 꾸준히 늘어나기만 한다는 예측 자체는 비현실적일 수 있다” 면서도 “하지만 2044년경 한국 최대 종교가 되리라는 정도는 충분히 추론해낼 수 있다” 고 설명합니다. 그는 통계청 인구총조사를 보면, 천주교 신자수가 1985년 186만명, 1995년 295만명, 2005년에는 514만명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가 10년 단위로 두 배씩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좋은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신자증가율이 그렇게 넘치게 되리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 10년간 우리 본당의 통계를 보면, 2000년 9월 7일 설립당시에는 삼성2동 지역 인구가 26,400명이었고 그 중에 신자수는 3,378명으로 지역 인구수 대비 신자 비율은 12.80%였습니다. 그런데 2011년 11월 30일 현재의 통계를 보면 인구수 34,228명이고 신자수는 4,792명으로 지역 인구대비 신자 비율은 14%입니다만, 실제로 삼성2동 지역에 거주하는 신자수는 3,905명으로 인구대비 신자 비율은 11.41%로 오히려 설립 당시보다 1.39%가 감소하였고, 인구증가율 29.65%에 비하자면 신자 증가율은 15.60%로 지역 인구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고 거꾸로 인구증가율보다 14.05%가 떨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국 천주교의 전체적인 통계는 10년 간격으로 두 배씩 늘어났다고 했지만, 우리 본당의 경우에는 10년 만에 지역 인구는 7,828명이 늘어난 데 비해 신자는 2배인 6,756명이 아니라 527명이 늘어난 3,905명일 뿐입니다. 구역외 신자까지 다 합친다고 해도 1,414명이 는 4,792명입니다. 여러분은 이 통계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통계가 완전한 것도 아니고 이 통계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라면 통계를 뭐라고 탓하기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잘 했다’고! 옛날에 신자들이 서로 끈끈한 정을 맺고 좋은 일을 많이 이루면서 그 동안 좋은 신앙의 전통과 추억들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활동하다 보니까 이사를 가도 계속 이 본당에 나오고 자기가 활동하던 그 단체에 전처럼 변함없이 충실했습니다. 좋은 전통이고 아름다운 신자 공동체의 단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던 우리들이 한가지 놓친 점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들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에, 예비신자 선교와 우리와 함께 활동하다가 떨어져 나간 신자들 그리고 우리 본당에 전입한 새 신자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본당에서 열심히 일하는 단체들 중에는 과거부터 열심히 활동하던 신자들로 가득 차고 새로운 신자들이 유입되지 않다 보니까, 고령화되고 겟토화 되고 소수화되고 있습니다. 과거 함께하던 신자들이 멀리 떠나거나 돌아가시거나, 미사와 공동체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자기가 잘 알고 같이 활동하던 이들과만 함께하다 보니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현주소가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면 결국 쇠퇴하는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성장 없는 유지는 결국 쇠퇴하지 않습니까? 우리 신학교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무도 사제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 학교에 후배가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후배가 나를 알던 모르던 후배가 없다면, 나는 마치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 같고 왠지 모르게 맥이 빠지고 허전해 집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제성소가 줄어들면 교회도 함께 휘청거리지 않겠습니까? 새로 흘러 들어오는 물 없이 고여있는 물이 썩어버리고 언젠가는 말라버려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성당은 무슨 클럽이 아닙니다. 일정한 자격을 가진 또래의 그룹이 모여 회원들끼리만 관계를 맺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새로온 낯선 사람은 꺼리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우리 마음에 들고 우리와 비슷한 사람만 선발하여 우리의 이해관계와 친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기뻐하고 행복하자고 초대해야 합니다. 클럽은 회비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인적자산과 소셜로 유지되지만 성당은 신앙과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행복은 우리의 것도 아니요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요 우리가 얻은 것도 아니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에게 그런 기쁨과 행복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서 힘겹고 고통스럽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게 그 기쁨과 행복을 나눠주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려주신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내려주신 커다란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 선물은 형제들과 나눌 때 진정한 행복이 되는 미완성의 행복이자 우리 형제들에게 돌아가야 할 빚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교는 우리 본당의 미래를 위한 생존의 과제입니다. 동시에 선교는 공동체 활성화의 계기이자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내리신 명령입니다. 한 가정과 마을에 어린 아기가 태어나면 모두 기뻐하고 행복해 하지 않습니까? 그 아기를 키우려면 기존 세대의 힘겨운 희생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새로 태어나는 아기로 말미암아 공동체는 활력을 갖게 되고 기뻐하면서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 삼성동 성가정 성당 공동체의 성장과 활성화를 위해 선교와 냉담자 회두라는 산고를 겪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의 하느님께서 서로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고 배려하면서 사랑하심으로써 하나가 됩니다. 삼위의 상호 친교를 통해 하나로 일치시키는 하느님의 본성은 바로 사랑입니다. 삼위의 하느님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사랑이 넘쳐 흘러 오늘의 우리가 창조되었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살아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좋은 마음들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좋은 마음과 신앙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교의 실제에 있어서는 말처럼 그렇게 쉽고 자연스럽지 않겠지만, 꾸준하고 진실하게 우리의 신앙을 살아간다면 언젠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때에 주님께서 우리 이웃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 신자들이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라고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깊어져 신자 서로간의 사랑과 친교의 일치로 그친다면 우리는 고령화되고 겟토화되고 축소되겠지만,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깊어져 이웃과 세상을 품어 안으려고 하고 우리 공동체로 초대한다면 우리는 선교의 역군이 될 것입니다.

예비신자를 성당에 데려오고, 세례 받도록 교육하고, 세례를 받아 새신자로 태어나게 한다면 마치 내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자라나는 모습을 흐믓이 바라보듯이 커다란 기쁨을 안겨줄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역사 속에는 몇 명의 아이를 낳고 기르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 대전에 신앙의 자녀를 낳아 바치시기 바랍니다. 육의 자녀들을 고이 고이 키워 나라와 세상에 봉사하며 살도록 내 놓듯이, 신앙의 자녀들도 고이 키워 주님 대전과 교회와 세상에 희생 봉사하도록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 1,38) 아멘.



연중 제5주일 주님 봉헌 축일

(나해) 루가 2,22-40; 06/02/05

오늘 오후 3시 30분부터 우리가 고대하던 시학(SEAHAWK)의 슈퍼볼(Superbowl) 결승전이 디트로이트에서 열립니다. 30년 만에 처음 결승전에 오른다는 우리 시애틀의 시학 풋볼팀이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또한 텔레비전 광고비가 초당 8천만원이나 한다는 풋볼이 요즘 우리 미국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다려지지요? 오늘 시학이 이길 것 같습니까?

그런데 상대 팀인 스틸러스에 한인계 스타가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하인스 워드’라는 선수인데 그 선수의 가족력이 많은 한인혼혈아들과 여러모로 흡사하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어머니 김영희씨는 서울에서 주한미군을 만나 결혼해 워드를 낳았고 그가 한 살 때 미국으로 건너와 애틀란타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곧 이혼했고 법원은 어머니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생활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아들 워드의 양육권을 주었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서 남편과 헤어지고 아들마저 빼앗겼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들을 되찾기 위해 무진장 열심히 노력했답니다. 접시 닦기부터 시작해서 한꺼번에 세 잡을 뛰면서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돈을 모았고, 결국 아들이 8살이 되던 해에 되찾아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키우기 위해 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접시 닦기와 호텔방 청소, 편의점 캐시어 등 안 해본 일이 없이 쉬지 않으면서 일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키 작은 동양인 엄마가 부끄러워 반항도 많이 했지만, 자기를 위한 어머니의 끝없는 희생과 사랑을 깨닫고 지금은 스틸러스팀 역사상 가장 많은 볼을 받은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 선수는 지금의 자기를 만든 것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신 어머니였다고 말합니다. 이 번 경기가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라도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답니다.

예전에는 자식을 많이 낳으려고 했습니다. 자식이 보배기 때문입니다. 농사일을 하려면 일손도 많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비록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을 키워놓으면 기쁘고 자랑스럽기도 할 뿐만 아니라, 노년에 공경과 효도도 받게 되기 때문에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자식을 많이 안 낳으려고 한답니다. 그것이 한 동안 한국정부에서 실시한 산아제한 프로그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식을 키우는데 너무 힘들고, 자식을 키우는 비용, 특별히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한 쪽으로는 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자기 시간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식을 키우느라 자기 개발과 자기 능력을 상실하고 그저 자식 키우는데 자기 시간과 노력이 다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거와 달리 자식을 키워 놓아 보았자, 나이가 차면 그냥 떠나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부모를 모시겠다고 나서는 자식도 적지만, 자식에게 신세를 지겠다는 부모들도 줄어들어 간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을 많이 안 낳으려고 하고, 심지어는 자기 몸매, 자기 능력, 자기 시간, 자기 소질을 살리다 보니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런 생각의 배경에는 부모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무슨 고생을 해서라도 이루려고 하지만, 자기에게 방해가 되거나 손해라도 되면 꺼리고 즉시 차버리는 이해타산적인 이기주의가 숨어있습니다.

과거에는 ‘현모양처’가 여성이 추구하던 가치였다면, 요즘은 사회활동을 하며 자기를 계발하고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캐리어 우먼’이 새로운 이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남성도 성공과 사장이나 지도자 또는 건실한 가정의 가장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열정을 발산하고 자기 취미를 개발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주력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리고 또 인생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해지면서 점차 힘들고 어려우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에는 소극적이며 편안하고 빠르고 쉬운 길을 찾음으로써 과거에 우리가 중시하고 추구해오던 많은 가치관들과 이상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변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은 아니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반기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차버리는 현상이 인간관계 속에서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남편이건 부인이건 간에 자기 발전과 행복에 도움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두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연장선 안에서 자식도 외에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직업이나 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자기를 계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자기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 개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김으로써, 언제든지 자기가 살고 여유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직업도 가능하고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인간 사회가 바뀜에 따라 인간의 가치관도 변해가기 마련입니다.

그 반대도 맞겠죠. 인간의 가치관이 변해감으로써 인간 사회도 바뀌고 있겠죠.

하느님과의 관계도 변해가는가 봅니다.

과거에는 자기 남편과 자식이 잘되기만을 마치 정한수 떠 놓고 기도하듯 정성을 드렸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많이 매달려 과거에 비해 자식을 생각할 겨를이 많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회보장제도로 다 해결하면 되는데 뭐하러 하느님께 기도하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를 특히 자기의 필요를 청구하는 도구로 여겨왔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우리 생애를 즐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계발하고 투신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자기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청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데는 아주 인색해 보입니다. 우리가 청원기도보다 감사기도를 훨씬 더 적게 바치는 것도 여기서 기인합니다.

아니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을, 왜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하는 가에 대해 의아해하는 분위기마저 느낍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것이요, 때가 차고 나이들면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그 은총을 통해 우리가 좋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면 그만이지 그것을 왜 다시 되돌려드려야 하는가하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럼으로써 오늘 우리의 사회는 배우자와 자식에 대한 불충실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활동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교회는 인간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께 보답하는 방법 중의 아주 중요한 방법을 형제들에게 대한 봉사로, 그것도 가난하고 어려운 형제들에게 대한 봉사로 여겨왔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마리아와 요셉은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합니다.

이른바 이스라엘의 남자아기가 할례예식을 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고생할 때,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풀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에집트인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오시기 위해 에집트인들의 맏아들과 맏배를 치시고 자신들을 구해주신 주 하느님께 보답하는 의미로 자신들의 첫 아들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의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자녀를 사제와 수도자로 만드는 것도 봉헌에 들어가지만,

다른 쪽에서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것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또 동시에 늘어가는 생활비에 내 한 가족 살기 바쁜 경제구조에 빠져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형이 벌어서 전 가족을 먹여 살리던 가족의 의미와 정신을 되살려, 내가 벌어 내 가족과 친지뿐만 아니라 가난한 형제 자매를 함께 돌보도록 하는 것도 이 시대의 봉헌정신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사회에 바친다는 것도 됩니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자식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세상사와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자식으로 키우는 것도 이 시대의 봉헌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더욱 더 가득하고

주님께서 주신 그 축복을 여러분의 땀과 정성을 쏟아 부어 풍성하게 열매를 맺으시고

그 열매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연중 제5주일

(가해) 마태 5, 13-16; 02/06/05

설날은 한 해의 첫날. 1월 1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원단(元旦)·원일(元日)·정초라고도 한다.

설의 의미와 기원을 살펴보면, 설은 묵은 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 해의 첫머리이다. 따라서 설이라는 말은 ‘설다’, ‘낯설다’ 등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설은 묵은 해에서 분리되어 새해로 통합되어가는 전이과정으로서, 새해에 통합되기에는 익숙하지 못한 단계이다. 설이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된 것도 새해라는 시간질서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조심하고 삼가야 된다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며, 이외에 세수(歲首)·세초(歲初)·연두(年頭)·연시(年始)라는 말에서도 나타난다. ‘설’이라는 말은 신라 때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고 본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원일(元日) 아침에 서로 하례하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되어 있다. 설은 고려시대에는 9대속절(九大俗節)의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4대명절의 하나로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양력설을 쇠다가, 광복후에는 양력설인 신정에 비해 음력 1월 1일을 구정이라고도 했다가, 1985년부터 ‘민속의 날’로 바뀌고, 1989년부터는 3일 동안 쉬면서 ‘설날’이라는 공식 명절이 되었다.

설의 민속은 한민족의 오래된 민속과 중국에서 전래된 민속이 동화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설날이 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분없이 일손을 놓고 객지에 살던 일가친척들이 고향으로 모여들어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미리 마련해 놓은 새 옷을 입는데, 이 새 옷을 ‘설빔’이라고 한다.

설날의 제사는 차례(茶禮)와 성묘로 대별된다. 설날 아침 일찍 세찬(歲饌)과 세주(歲酒), 떡국을 마련하여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지내는 것을 차례라고 한다. 자손들이 모두 장손집에 모여 함께 차례를 지내고, 어른에게 새해 첫인사를 드리는 세배를 한 후에 성묘를 한다. 성묘는 조상묘를 찾아가 간단한 세찬과 세주를 차려놓고 절을 한다. 요즘에는 주로 한식과 추석에 성묘를 하지만,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로서 조상에게 세배를 올린다.

설날에는 농한기인 정초에 한 해 동안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민속놀이들이 행해졌다. 대표적인 놀이로는 윷놀이,·널뛰기,·연날리기,·돈치기,·승경도(陞卿圖)놀이 등이 있다. 설에 가장 널리 성행하는 윷놀이는 정초뿐 아니라 가을걷이가 끝나고 타작을 마치면 시작된다. 연에는 액(厄)자 한 자를 쓰거나 송액(送厄)또는 송액영복(迭厄迎福) 등의 글자를 쓰는데, 이것은 그 해의 재앙이나 못된 액을 연에 실어 날려보낸다는 의미를 지닌 풍속이다.

설의 절식으로 일반적인 것은 떡국이다. 떡국은 쇠고기 또는 닭고기 국물을 넣어서 끓이지만 원래는 꿩고기국에 끓였다. 정초에 서로 만나면 “떡국 먹었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설 쇠었느냐” 또는 “몇 살 먹었느냐”는 물음으로서, 이때 떡국 먹는 것을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한국 북부지방에서는 만두국을 많이 먹는다. 한국의 세주로는 약주·청주 또는 탁주가 쓰이고, 혹은 소주에 약미(藥味)를 가미한 것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였고, 중국에서 온 초백주, 도소주 등이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하시면서,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15)라고 말씀하신다.

미국에 사는 어느 민족은 자신들의 고유 명절에 명절을 세기 위해 학교를 안 가도 학교에서 결석으로 처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미국 사회에 그 민족의 힘이 인정받고 있다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민족의 모습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명절에 가족끼리 모여 함께 가족의 일치와 화목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고, 고국에 있는 부모 친지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어른들에게 소식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또 홀로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나 가족 없이 명절을 지내야 하는 한인 또는 유학생들을 초대하거나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고유의 민속명절을 맞아 이웃에 사는 다른 민족들에게 우리 음식을 나누고 우리의 명절을 소개하는 것도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과 함께 적극적으로 우리 민족을 알리고 우리 한국인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이번 설날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겹쳐 있다.

우리가 재의 수요일을 맞아 마땅히 이마에 재를 바르고, 금육과 금식을 하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여야 하겠지만, 우리의 민속명절과 겹치기 때문에 흥겹고 즐겁게 지내는 대신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초대하고 방문하여 우리 금육과 금식의 몫을 기쁘게 나눔으로써 마음과 내용적으로 금육과 금식을 실현하면 좋겠다. 아무도 초대할 이가 없고 방문할 이가 없어, 양노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어려운 이들을 방문한다면 더욱 더 빛나는 일이겠다.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좋은 생각과 계획들을 이번 기회에 마음속에다만 담아두지 말고 빛을 밝히듯 동족과 이웃 민족들에게 펼쳐 보임으로써 설날을 기쁘게 보내고, 우리 한민족의 빛을 드러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연중 제5주일

(다해) 루가 5, 1-11; 2004/02/08

신자들이 가끔 말한다. "신부님,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저희가 다 따릅니다." 사제들에겐 참으로 부담스러운 말이다. 방향과 지침을 내리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져야하겠기 때문이다. 오히려 순명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앞에서 사제가 정말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는 순명하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이익과 상반되는 결정이 내려지면 비아냥거림과 항변들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분들이 "신부님, 말씀만 하세요. 저희가 다 따르겠습니다."하는 말을 하면, 사제들은 이렇게 알아듣게 된다. 괄호 열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방향대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또는 내가 손해를 보지 않는 한 따르겠습니다. 또는 내 영향력이나 권한이 침해받지 않는 한 따르겠습니다. 또는 나를 귀찮게 하거나 나한테 부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만 따르겠습니다.) 괄호 닫고.

첫 본당에 부임했을 때 신자가 633명이었다. 그래도 본당이라 있을 것은 다 있어야 하니까, 구역, 반장과 주일학교 교사에서부터 자모회, 성가대, 제대회 등등.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이것저것을 다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씩만 하세요." 그랬더니 "신부님이 여기 실정을 몰라서 그렇지 사람이 없는 데서는 한 사람이 이것저것 다 해야 해요."라고 했다.

두 번째 본당은 신자가 9,200명이었다. 그렇게 신자가 많았는데도 거기도 한 사람이 이것저것 다 맡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도 "한 사람이 하나씩만 하세요."했다. 그랬더니 그 신자들이 "신부님이 여기 실정을 잘 몰라서 그렇지, 사람은 많아도 일할 사람은 얼마 없어요. 다 바쁘고 자기 사는 일이 힘들어서요, 성당 일 할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럼 부자 동네는 안 그런가? 다 똑같다.

신자가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니다. 신자들이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 문제다. "그 일은 나 밖에 할 수 없다." 또는 "그 일은 저 사람이 적격이다."는 인간의 판단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성당 일을 할 때에 뽑히는 사람은, 아니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은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이 아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자신을 또 얼마나 내 놓아야 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빠져버린다. 다시 말해서 적격인 사람은 빠지고 그 다음 사람 즉 마음이 약해서 거절하지 못하거나 자기 체면이나 돈벌이를 조금 제쳐놓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몇 개 씩 짊어지게 마련이다. 그러자니 살기도 바쁜 사람들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그저 현상 유지도 점점 힘든 지경이다. 냉담자는 늘어가고, 일할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각자를 다르게 만드셨지만 각자에게 각기 다른 재능을 주셔서 모두 다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보완하면서 살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나만 할 수 있다거나, 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믿는 것이다. 누가 세상에 나면서 이마에 난 구역장이요, 어느 어느 단체의 단체장이란 것을 처음부터 써놓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믿는다면, 우리 각자의 능력과 소질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들여 공동체에 봉사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어, 공동체에서 우리에게 책임자로서 장자리를 맡도록 요구하면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응답하는 이에게는 세상 끝날 까지 함께해주시겠다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직책에 따르는 은총을 주셔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는 우리 주위에 기본적인 조건을 채우는 사람이 있어도 내 편견과 어리석음으로 그 안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그는 할 수 없고 저 사람이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는 가운데 서로를 존중하며 맡겨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도 걱정이 된다면 맡기고 그에게 주님께서 함께해주시도록 청하고 자신의 몸으로 그가 부족하다는 부분을 채우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일 잘 하고 능력있는 누구 한 사람의 지도력보다, 다 함께 노력하는 공동체의 열정에 더욱 큰 열매를 맺어주시지 않겠는가? 되돌아보면, 나 잘난 맛에 고집부리다가 망쳐버린 적이 더 많지 않는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형제들을 믿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리 공동체를 맡기고, 기도하는 가운데 서로 짐을 나누면서 조화를 이루어 열심히 일한다면, 주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열매를 맺어 주시지 않겠는가?

오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4)라고 말하자 대답한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5)

베드로의 이 대답은 이렇게 들린다. '여기 실정을 몰라서 그러지. 내가 어부인데, 그리고 내가 여기서 계속 고기를 잡아왔고, 여기 살고,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인데, 내가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더 잘 알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니?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보면 우리가 쉽게 말하고 또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내가 더 잘 알고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우리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다. 아니, 할 말이 아주 많다.

그런데 시몬에게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오늘은 지금까지 해 왔던 방법대로 그렇게 했는데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만 있다면 잡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빈털터리로 돌아와야 했던 시몬은 오늘 주님과 마주칠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편 시몬은 모르지만, 시몬에게 명령하는 이는 우리와 우주 만물을 지어내신 분이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찌 자기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따를 수밖에…. 어쩌면 주님 앞에선 우리 모두의 모습이리라. "싫어요." "못해요." "안돼요, 자신없어요." 하면서 뒤로 빠지고…. 또 한편 성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리라 생각하여 감히 엄두도 못내는 우리.

그러나 그에 반하여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면,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신부님, 수녀님)이시니 믿고 따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라시니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겠지요." 주님의 일을 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는 이 보다, 명령을 듣고 그 명령을 통해 주님께서 임하시는 것을 느끼고 따르는 이의 믿음이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5) 이렇게 베드로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쳤더니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서 베드로가 응답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8) 주님 앞에 섰을 때 인간 모두가 느끼는 이 감정. 그러나 그 감정은 표현 그대로의 거부와 결별의 감정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표현은 오히려 청원에 가깝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시몬을 제자로 임명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10)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너는 내가 믿어 사랑하는 내 사람이다. 어서 가서 아버지의 나라를 세워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다. 될 것 같지 않은 상황이 이루어질 때,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일을 해 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해주시어 몸소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아니 믿는 마음으로 투신할 때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결실을 이룰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며,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껴온 믿음이다. 이 교회의 믿음과 지금 내 믿음이 다르다면, 또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과 우리가 활동하는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믿음이 다르다면, 일은 우리의 의지대로 그냥 진행되겠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 우리가 믿어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그 신앙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을 살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이사 6, 8)

"이사야 예언자가 대답한 그 옛날의 응답을 오늘 우리의 말로 갱신하고 채우자."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이사 6, 8)



연중 제5주일

(나해) 마르 1, 29-39; 2003/02/09

요즘 전국적으로 로또 복권이 한창 유행이다. 어떤 이들은 복권천국이라고 비꼬기도 하지만, 로또 복권을 사지 않으면 왕따를 당한다는 이야기마저 돈다. 그 중에는 복권을 사면서 대박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정작 복권이 당첨되면 어떻게 될까? 아주 신나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복권을 샀던 사람들 중에 당첨된 한 사람은 지금 정신적인 불안정과 살해의 위협에 떨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이것 저것을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정작 자기가 계획한 것 이상의 돈이 생기면 오히려 불안해한다. 자신의 계획을 넘어서는 현실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단 넘쳐서 감당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평소에 자기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황하고 방황하는 것과도 같다.

혹시 나는 내가 상상치도 못한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간직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삶의 목적과 목표를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복과 세상에 구원을 앞당겨 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이기적인 안녕과 영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 돈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이웃과 더 단절되고 불안만 가중될 것이다. 땀흘리지 않고 들어온 돈이 그에게 가치마저 선사해 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도 탐욕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시몬의 장모가 아프다고 알린다. 그들이 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병이 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병이 나아서 무엇을 한 단 말인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그 분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절)고 한다. 어떻게 보면 부인이 시중들기 위해서 낫기를 청했기에 나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래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생의 목적이요, 우리가 사는 이유가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38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응하기를 거절하신다.

요즘 내가 주님께 청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를 위해 그것을 청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이 나와 세상에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가져다 주는가?

우리도 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 '세상의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을 살기로 하자.



연중 제5주일

(가해) 마태 5, 13-16; 02/02/10

저희 본당의 신자 수는 공항동, 방화1동, 방화2동에 사는 77,122명 인구 중 약 5.8%인 4,516명입니다. 이 비율은 서울 평균 10.7% 물론이고, 전국 평균 8.83%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가 초기에는 조선 왕조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공산 정권과 군사 정권 하에서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만으로도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마저 숨기거나 드러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신앙을 마음 속 깊이 감추고 사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이고 겸손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또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남이 내 삶을 보고 감동해서 성당에 자진해서 따라 오도록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겠거니 해서 나만 묵묵히 복음을 실현할 뿐 옆사람에게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성당에 오십니다. 또 주님께 좋은 것을 얻고 더 좋게 되기 위해 그리고 성당이 좋아서 성당에 오십니다. 여러분이 바라고 느끼는 그 좋은 것을 여러분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적극적으로 권하시기 바랍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는 사람은 없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5ㄱ. 16절)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이 좋은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좋은 것을 주님께 받고 또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삶이 사람들 앞에 환히 빛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빛으로 환히 빛나는 여러분을 따라 성당에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모범을 보이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은 우리가 마지막날 주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구원될 때까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 안에서도 나를 주님의 도구로 쓰시겠다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는 안되지만 주님의 힘을 얻어 할 수 있겠다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단지 주님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할 것이고 그 복음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지고 싹이 트고 열매를 맺어 그가 신앙을 갖기까지는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므로 꾸준히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몸소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복음 선포의 앞장에 서야하겠습니다.



연중5주(주님봉헌축일)

루가 2, 22-40; 01/02/04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풀어줄 때까지 10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10번째 재앙은 이집트 사람들의 맏배와 맏아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의 맏배와 맏아들을 죽일 때 이스라엘은 살려주었다. 이스라엘은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 하느님 백성임을 드러냈고 죽음의 천사는 그 표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출애 12장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모태를 열고 나온 맏아들은 모두 나에게 바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출애 13, 2)고 하셨다. 하느님께서 살려주신 맏아들을 다시 하느님께 바치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택과도 연결된다.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 19, 6) 하느님께 바쳐진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곧 이웃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곧 자신의 아들을 사제로 바친다는 것은 그 아들을 자기 집안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민족과 세상을 위해 바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기사(창세 22장)에서도 발견한다. 이사악이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지고 산에 오르던 모습은 세상의 죄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가신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양을 잡았던 것처럼 세상을 살리기 위해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파스카 양처럼 세상을 위해 바쳐진 주님의 사제 백성이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예수님도 성전에 바쳐졌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제 백성이었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제백성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사제직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이루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봉헌하며 초를 축성한다. 초는 자기 자신을 태우며 세상을 밝힌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며 나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 봉헌되시고 십자가상에서 스스로를 바치셨으며 오늘 우리를 봉헌하도록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자신을 봉헌하자. 그래서 시므온의 찬양을 이루어야겠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루가 2, 30-31)



연중 제5주일

(나해) 마르 1, 29-39: 2000/02/06

예수님께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아파서 누워있다고 아뢰자, 예수님께서는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1절). 그리고 날이 저물자 온 동네 사람들이 병자와 마귀들린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으며,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며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34절) 왜냐하면 "마귀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34절).

오늘 예수님께서는 치유자로 나타나십니다. 낮에는 남에게 드러나기가 두려워 나타나지 못하고 마치 죄인처럼 숨어지내던 병자들과 마귀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셔서 그들에게 참 기쁨을 안겨주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이 내리자마자 사람들에게 시중을 들 정도로 완전히 낫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은 봉사자가 됩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35절).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36절) 하고 말씀드렸는데도 주님께서는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시고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 내셨다"(39절).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머물러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다 고쳐주시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시지 않으시고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겠지만(마태 28, 19 참조), 한편으로는 시몬의 장모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의 치유를 받은 우리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돕도록 맡기시기 위해서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 16)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 자유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 일을 내 직무로 맡겨 주신 것입니다"(17절)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19절)라고 말합니다. 내 가족 뿐만아니라 많은 이를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맞아들이기 위해 복음을 선포합시다.



연중 제5주일

(가해) 마태 5,13-16 : 99/02/07

세례를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환하게 빛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세례전 찰고를 할 때 예비신자들은 "저는 잘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 한편 전부 다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인간이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고 싶고, 하느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또 그런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어주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또 소금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부족한 우리에게 교회를 통해 세례성사를 베풀어주실 때 "우리가 비록 잘 모르지만, 그러나 이제부터 더 배워서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거울이 되어 예수님께서 비춰주시는 빛을 받아서, 예수님의 빛을 가족과 이웃들에게 반사하게 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세례성사를 통해 자기가 지금보다 더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나의 가정에 은총과 축복을 내려주셔서 잘 살게 되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따르겠다고 다짐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계십니다. 우리가 바래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프란치스코 성인님의 '평화의 기도'를 여러분과 함께 바치며 우리의 신앙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저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연중 제5주일

(다해) 루가 5,1-11 : 98/02/08

시몬은 어부였다. 매일 배를 몰고 호수로 나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살던 어부였다. 그날도 시몬은 배를 몰고 나갔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그의 배에 올라 군중을 가르치시고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 하셨다. 그러자 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루가 5,5ㄱ) 우리도 가끔 시몬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분의 말씀대로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하지 않고 우리 고집대로 한다. '세상을 살려면…, 인간이니까….' 등등의 핑계를 대면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피해간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 5,5ㄴ) 하고 "그대로 하였더니"(루가 5,6ㄱ)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의 배를 불러서 그물을 끌어올려야 할만큼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었다. 그러자 시몬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믿음이 생겼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가 5,8)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 제가 주님의 말씀을 안 듣고 불평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은 낚을 것이다."(루가 5,10)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다.

주님은 어부 시몬에게 필요한 고기를 잡아 주셨다. 그리고 이 고기잡이 기적을 통해 시몬의 현실적인 욕구를 채워주시고, 시몬에게 믿음을 주셔서 베드로로 만들고 사람들을 낚으라고 부르셨다. 그러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시는 주님을 보고, 베드로는 기꺼이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게 된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언제든지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과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필요한 이 모든 것은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베드로를 부르신 주님은 오늘 "이제 네 잇속만 차리지 말고, 형제들을 구하러 나가라." 하시며 우리를 부르신다. 주님께 믿음을 가지고 청하자. '주님, 베드로에게 해주신 것처럼 저희에게도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시오. 그래서 저희가 걱정 없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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