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가해) ; 마태 5,17-37; 17/02/12

너희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수색 예수성심 성당

김원철 레오 신부 고별강론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입춘이 지났음에도 한기가 가득한 날씨와 관계없이 우리의 믿음은 따뜻한 봄과 같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푸른 싹을 틔울 준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무수한 규칙과 법, 그리고 규정과 의무들이 우리들의 삶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무를 조금 더 구체적이고 공공으로 지키고자 서로가 약속한 것이 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법을 악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법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서,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처음 세 개의 계명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위해서, 나머지 일곱 개의 계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그토록 강조하는 율법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10개의 계명만으로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구체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될 수 있는 613개의 세칙서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점차로 율법의 근원이 되는 정신 보다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보다는, 단지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 라고만 이야기 합니다. 때문에 사람이 아파서 신음하고 있는데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일해서는 안 된다.”고 만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점차로 잊어가는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마는, 나는 인간을 말로 괴롭히는 것까지도 금한다. 율법이 간음하지 말라고 강조하나, 나는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금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기억할 계명의 정신 두 가지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러분은 하루를 생활하시면서 얼마나 10계명을 지키고 계십니까?

아니,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심하라고 말씀하신 사랑의 정신을 얼마나 실천하고 계십니까?

법이란 딱딱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하지만 다리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 없다면 다리는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사랑이란 율법의 정신이 사라진다면, 율법은 오히려 타인과 나를 분리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저울이 될 것입니다.

제 1 독서에 나와 있듯이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나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 잠시 우리들이 처한 상황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이유와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강조하십니다. “너희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한 주간을 생활하시면서, 그 동안 나는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핑계거리를 만들고 살고 있었는지 바라보시며,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고 실천 하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연중 제6주일

(나해) 마르 1,40-45; 15/02/15

용인에 가면 인보성체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중증 지체 장애아 요양원인 '요한의 집'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겨울에 피정 삼아 잠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아이들이 대부모 집이나 자매결연을 맺은 가정으로 놀러 가고 남은 아이들만 한 방에 모여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 방에 들어갔습니다. 광호와 준식이라는 아이와 놀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저를 향해 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두 아이들과 계속 놀고 있는데 갑자기 울음 소리가 났습니다. 저를 향해 오던 아이가 제가 다른 아이와 놀고 있으니까, 오다 말고 선생님께로 향했나 봅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 아이는 사면초가였습니다. 그 아이는 그 순간 자기 한 몸 둘 데가 없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사이를 그야말로 맴돌다가 갈 곳이 없으니까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정말 몸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점점 이상해지고, 또 이상해지니까 더욱 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아서 맴도는 사람들. 감싸주고 안아주지 않아 방황하는 수 많은 영혼들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많은 아이들이 다 저만 쳐다보고 있었나 봅니다. 혹시 자기에게 오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그 중엔 침대에 눕혀져 주사바늘로 위에 직접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만 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큰 짐을 진 아이들입니다. 애처롭다는 감상적인 표현보다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는, 표정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서글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주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으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그러자 그는 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됩니다.

저도 한 동안 매일 같은 지향의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주님의 거룩한 사도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날 저는 요한의 집 아이들을 보면서 그 기도는 제가 주님께 청할 기도일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이 주님께 그리고 그 집을 찾는 이들에게 하는 청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제 손길이 자기에게 스쳐가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적극적으로 요구할 기력조차 없고, 저항하고 극복할 아무런 희망조차 간직하지 못한 아이들. 그저 남이 자기에게 다가와 먹여 주고 안아 주기만을, 그야말로 처분만 바라는 아이들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나병환자는 유다 사회에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동네 밖에서 기거하도록 했습니다. 또 나병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천형을 받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러한 상황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이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다시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 1,44) 라고 엄하게 이르십니다.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떠올려봅니다. 제 처분만 바라는 이들은 요한의 집에서뿐 아니라 본당 교우들. 본당 관할구역 내에서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렵고 힘겹게 인생을 살며, 외롭고 허전하다고 느끼며, 위로 받고 싶고, 힘을 받기를 청하는 소외된 이들의 가슴 속에 익명으로 남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당을 향해 거는 지역사회의 기대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선행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사랑과 은총과 위로와 평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그려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하는 사도 바오로 말을 되새깁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0,31.33; 11,1)



연중 제6주일

(나해) 마르 1,40-45; 12/02/12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창립시기에 독특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후기 조선의 소외된 지식인들이 새로운 사회 탐구의 한 방안으로 성리학을 모색하던 중에 생겨났습니다. 서쪽에서 온 학문이라는 뜻의 서학이라는 천주교의 교리와 사상을 연구하던 중 서학이 단순히 학문이 아닌 종교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새시대의 정치사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선교를 통해 생긴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들이 자체적으로 찾아 얻은 교회이며, 그 교리를 현실화 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승훈이 중국에 가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과 동료 선비들을 세례시키고 중인과 상인계급까지 아우르는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유교 사회 속에서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루려고 하자 당시 사회의 커다란 반발과 저항을 받아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첫째, 신앙공동체가 자생적으로 발생했고, 둘째, 세례자가 생겼으며, 셋째, 교회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넷째, 순교자가 생겼다는 4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초기교회가 사회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자 지도층이었던 지식인인 양반들의 많은 수는 교회를 떠났고, 중인과 상인들이 교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떠난 양반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신분적이고 사회적인 위치와 권리를 박탈당하기 보다는 배교를 선택했고, 중인과 상인들은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주고 자신들의 존재를 존중해주는 새로운 사회인 교회를 선택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박해가 시작되던 1791년부터 한불 수호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1886년까지 선교를 활발히 할 수 없었습니다. 선교는 커녕 숨어서 살아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와 70년 군부독재시대에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가톨릭 학생회, 가톨릭 청년회, 가톨릭 노동 청년회 등과 모든 본당과 신자들은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신자들은 드러내 놓고 신자라고 밝히기를 꺼려했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교를 하기에는 사회에서 받을 불이익 때문에 개인적이고 신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우리 천주교회를 선교 없는 교회처럼 만들어 놓다시피 했습니다.

또 우리 사회는 무엇인가 드러내 놓고 말을 하면, ‘왜 설쳐 대느냐?’ ‘왜 겸손하게 자기를 감추고 조용히 살면 되지, 뭐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으면서 나서느냐?’는 문화적인 분위기가 우리를 움츠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 신자들도 앞서서 사람들에게 신앙을 선포하고 권유하기 보다는 남 모르게 기도하면서 묵묵히 선행을 실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지금은 천주교인이라고 해서 드러내놓고 박해를 받는 시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가 성화되어 성인군자처럼 되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모범을 보고 따라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을 살다 보면 우리 한 몸 살기조차 힘듭니다. 무한 경쟁세계에서 주위에 신앙의 모범을 보이면서 내가 양보하고 희생하다 보면 사회에서 뒤처지고 밑지고 손해 볼까 두려워 우리도 악착같이 그 경쟁체제 안으로 들어가 남들처럼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나 살아남고자 합니다. 또 그렇게 경쟁체제 안에서 아귀다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처럼 살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는 한참을 더 노력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자평합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해 봅니다.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신앙을 처음 시작할 때보다 더 성화되었다고 자부할 수도 없고, 이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격적이고 생활 면에서 훌륭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또는 언제쯤 그렇게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성화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남에게 드러내놓고 자신할 만한 신앙의 모범을 보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좋은 길을 권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좋은 길을 선택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어떤 때는 강요를 해서라도 좋은 길로 가도록 하고, 어떻게든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대신해 주면서까지 그 길로 인도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가 신앙의 모범을 잘 보인다고 해도, 사람들이 우리를 따를지는 미지수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동을 받는 것에 끌리기는 해도, 이해관계를 따라 더 잘 움직이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평화를 누리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평화를 주는 길보다 평화를 얻기 어려운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마르 13,11) 사도 바오로는 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라고 선교에 대해 말합니다. 베드로 역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라고 말합니다.

우리 강남 11지구 복음화율을 보면, D본당 30.8%와 D1동본당 25.7%, A본당 24.3%, 및 또 다른 D본당 23.2%, A1동본당 19.7%, Ch본당 19.0%에 이어 14%로 16개 본당 중 9번째에 속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순수 삼성동 지역의 복음화율은 11.41%로 삼성동 성당 설립 당시의 12.80%에 비해 1.39%가 감소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성동 지역 인구증가율 29.65%에 비하자면 신자 증가율은 15.60%로 지역 인구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고 거꾸로 신자증가율이 인구증가율보다 14.05%가 떨어졌습니다.

박해시나 외부의 뚜렷한 외압이 없는데도 신자 수가 제자리 걸음이거나 감소했다면, 공동체의 내부 상황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숫자는 외부로 드러나는 수치일 뿐이지만 숫자가 공동체의 현황을 드러내는 여러가지 표지 중의 하나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성이라는 질적인 향상이 깊어지면, 숫자는 줄어듭니까, 늘어납니까, 그대로 입니가? 아니면 양적인 성장은 질적인 성숙과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신자 5천여명의 본당에서 예비신자 환영식에 예비신자 스스로 찾아온 신자들 십여명이 대부분이고 본당 신자들의 선교로 오는 예비신자가 한자리 숫자라면... 우리 모두가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해 한 번 짚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그는 예수님께서 ‘하고자만 하시면’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주님께 청합니다. 그런 그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깨끗이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너희가 하고자만 하면 나를 전할 수 있다. 너희가 전하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나에게 오게 하겠다.’

여러분, 선교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선교는 많이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예비자 환영식을 앞두고 하는 행사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으면서 모두 선교사명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예언직, 왕직, 사제직을 우리의 삶 한 가운데서 실현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매일 매일 살면서 자기가 머물고 있는 가정과 직장,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동시에 선교는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살아나가는 신앙생활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단지 복음을 전할 뿐이고,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 아니십니까? 우리는 교회 신자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오는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누기 위해 교회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2년 교회의 교부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면서 사회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신앙을 쇄신하고자 했습니다. 올 2012년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 삼성동 본당이 지역사회에 문을 열고 신앙을 전하며 우리 본당 스스로 복음화하여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기로 합시다.

‘구체적으로 그 어느 누구에게 신앙생활에서 오는 나의 이 기쁨과 행복을 전할 것인지?’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어떤 은총을 선물로 받았는지?’ ‘어떻게 신앙 생활의 기쁨과 희망을 전할 것인지?’ 등을 실현 가능하게 계획을 짜고 실천하여 교회의 선교 사명을 이루기로 합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1코린 10,31)



연중 제6주일

(나해) 마르코 1,40-45; 06/02/12

지난 주간에 최재봉 안나 할머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비록 누워는 계셨어도 따님들의 병구완으로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가버리시니까 너무나 섭섭하고 인간 생명이 이렇게 끝나는 구나하고 생각하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장례미사를 드릴 때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처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참으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되새깁니다.

장례 미사의 기도문은 하나 같이 주님께 우리 죄와 허물을 못 본체 해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보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해 주시기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고별식 기도문’에서,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 이 교우를 맡기오니 나약한 인간으로서 저지른 죄를 주님의 자비로 용서하시고 하느님 나라에서 성인들과 함께 끝없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리고 묘지를 축성하고 ‘하관 기도문’에서,

“주님 비오니, 죽은 우리 형제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부족한 행실에 벌을 내리지 마소서. 이 형제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사오니, 지상에서 참된 신앙으로 신도들 무리에 들었듯이 천상에서는 주님의 자비로 천사들 반열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매일 미사 중에 평화를 구하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 생애가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게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못 본체 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야만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밤마다 끝기도를 바치면서 양심 성찰을 해보면, 그저 내 생애가 부끄럽고 죄스럽기 그지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 뜨고 날만 새면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이리 왈 저리 왈 하고 떠들어 댑니다.

그리고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래서 문제고,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 된다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고 이렇게 또 저렇게 해야만 한다고 자기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 앞에, 아니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도 죽음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되새길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마태 6,27) 하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그 질문에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감히 대답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명을 한 순간이라도 늘릴 수 없습니다.

아니 늘리기는커녕, 언제 죽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꽥하고 죽는 순간에도, 지금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항변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니, ‘꽥!’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주님께서 주신 생명, 주님께서 도로 데려가시니 그러시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처지입니다.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요구를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주시는 대로 받고, 그저 주시기에 황송해하고 감읍하며 살아갈 수밖에!

그럼 우리 인간의 처지가 그렇게 비참해 보일정도로 미소하고,

우리 인간의 생명이 그저 우리가 오늘 누리고 있을 뿐이지,

주님께서 부르시기만 하면 언제 어떻게든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미약하기만 한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아쉽고 씁쓸하지만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 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 다른 무엇이 더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처지가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고,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셨으니 언제든지 다시 부르시면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제 데려 가실지는 모르지만 오늘 이렇게 살아있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요구할 수도 청할 수도 없는 생명 자체를 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명을 온전히 보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죄악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도록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죄를 대신 씻어주시고 살 수 있도록 구원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말씀과 성체성사를 남겨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셨고, 성체를 모시고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리고 그 길을 우리가 깨우치고 발견하고 걸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애초에 우리를 다시 데려가시기 위해 우리 인간을 지어내신 것도 아니요, 언제든지 우리 생명을 회수하시기 위해 주님 생명을 나눠주신 것도 아니요, 우리를 어떻게든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주님 은총의 뜻이요 결실이 우리의 생애다.

우리는 언제 지상 생애를 마치게 될 줄도 모르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우리를 소환하실 수 있다. 그야말로 처지로 말하면 정말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생으로 따지자면 아무 권리도 없고 연장할 수도 없는 우리를 오늘 이렇게 살려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주님 앞에서 오히려 우리는 감사할 뿐만 아니라 기쁘기까지 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가 늘 눈만 뜨고 입만 열면 내뱉는 불만족과 불평과 요구가 아니라, 인정과 감사와 순종이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져야할 자세라는 것을 너무나도 자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나병 환자의 기도를 우리 자신의 기도로 바칩시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0)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1)

그리고 우리의 고쳐지지 않는 교만과 탐욕을 주님의 은총으로 깨끗이 씻고,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갚기 위해 형제들에게 증거하고 나누고 널리 전하며 기쁘게 살아가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일이 잘 풀리고,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언제 깨지고 어느 누구에게 빼앗길 줄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지탱되는 기쁨이지만, 주님과 형제들에게 바치고 봉사하고 나서 생겨나는 뿌듯한 기쁨은 참 기쁨이신 주님과 연결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마칩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그리고 혹시 시간이 나시고 기회가 되시면, 오늘 사제 수품 18주년을 맞이하는 저의 사제직을 위해 주님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연중 제6주일

(나해) 마르 1, 40-45; 2003/02/16

지난 월요일 1988년 서울 관구 신학교 사제 수품자 전국 동창모임이 있었다. 1년 임기의 동창회장의 1년 임기가 만료되어 신나는 마음으로 갔다. 저녁을 먹고 동창들의 근황을 들으면서 참석하지 못한 동창들의 근황을 발표한 후 새 회장을 선출하려는데 난데없이 1년 더 하라는 것이었다. 사양에 사양을 거듭했건만 막무가네로 떠미는 바람에 연임됐다. 2년 전에 서울동창을 임기 끝났다고 그만두었더니 후임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아직까지 동창회를 못하게 되어 그냥 수락하고 말았다. 다녀와서 동창들에게 혹 띠러 갔다가 혹 붙이고 왔다고 불평을 했더니, 한 동창이 혹 띠러 갔다가 붙이고 온 혹이 우정이라며, 여태껏 동창회장을 2년 연임한 친구도 없었고, 3번씩이나 전체박수를 받으며 회장에 선출된 이도 없다면서 부담스럽지만 나누어서 일하자며 회신을 보냈다.

그런데 동창들의 재임 요구를 들으면서 문득 본당 생각을 했다. 본당의 신자들에게 일을 맡기기 위해 얼마나 요구를 했던가? 대과가 없으면 연임이요, 할 수만 있으면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라고 요구했고, 평신도 지도자 뽑기가 하도 어려워서 아예 대상 신자를 불러놓고 따라해 보세요 하면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반복하도록 하고 자리를 수락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던가?

돈도 되지 않고 생색도 나지 않는 자리와 역할들. 요즘은 다 위 자리나 책임지는 자리에 앉기를 싫어한다. 아주 잘하지 않으면 그저 욕먹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구하기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주님께서 주신 시간과 몸과 재능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의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고 보호해 주기까지 하시니 간신히 간신히 그 길을 걸어갈 뿐이다. 이렇게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 덕에 우리도 하고자만 하면 주님을 따라 하늘 나라를 위해 헌실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 31) 대가 없는 선물이 오히려 가치 있듯이, 우리의 희생 봉사는 형제들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니 오롯이 도로 바쳐 드리오리다. 아멘.



연중 제6주일

(다해) 루가 6, 17. 20-26; 01/02/11

요즘 어떤 재벌그룹의 전 총수가 공개적으로 수배되고 국제적으로 도피하는 생활이 보도되고 있다. 오늘 내가 부러워하는 자리와 갖고 싶어하는 것이 내일 내 수치와 죄악이 되지 않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20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하고, 그 처지를 불행으로 여긴다. 그래서 모두 벗어나려고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셨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처지로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셨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과 능력과 가진 것이 모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선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고 또 나누면 하느님께서 더 채워주시니 이들은 행복하다. 이들은 주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다 내줌으로써 물질적으로는 가난해졌지만 하느님과 형제들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21절) 남에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어서 자기가 대신 당하거나, 이웃의 불행 때문에 함께 우는 이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아 웃게 될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모여와' 이웃을 도와주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세상의 행복과 구원을 막고 지연시키는 불의와 사리사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슬퍼하는 이들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위로해 주신다.

반면에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사리 사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하고 불안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22-23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다가 오해를 받거나 미움을 사고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고 또 그렇게 해야 되는 줄도 알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면 행복할지 못 미더워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시해주는 행복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이며,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다. 이 희망을 이루어나가자.



연중 제6주일

(나해) 마르 1, 40-45: 2000/02/13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41절) 하시자 그의 병세가 곧 나았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통과의례를 명하십니다. 고쳐주신 것은 예수님이시지만 그가 유배지와도 같은 격리지에서 다시 가족과 이웃이 있는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부정을 씻고 정상인이 되었다는 판정을 사제로부터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44절)고 이르십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44절)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45절). 사람들을 피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더 많이 고쳐주시면 좋았을 텐데! 5000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피해가셨습니다. 그 뒤 예수님을 찾아 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 26-27). 그러시면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 29)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간절한 바램을 얻으면 곧 싫증나고 결국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에 두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영원히 변치 않고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얻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해서 사회와 동떨어지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 따로 사회생활 따로가 아니라 신자로서 복음을 전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매 순간 매 기회에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선택하면서 세상의 부정을 씻고 주님께서 깨끗하게 변화시켜 주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 31) 그래서 세상을 구하는 주님의 사도가 됩시다.



연중 제6주일

(가해) 마태 5,17-37 : 99/02/14

살다보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 '본의 아니게'란 말과 함께! 우리가 좋은 일을 했을 때는 누군가가 '내가 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반면에 내가 좋지 못한 일을 했거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을 때는 '내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몰라주기를 바란다. 아니면 적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도 하고 거짓말도 한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예수님은 지난 주 수요일 평일 미사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1-23) 그러시면서 오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17.20)라고 하시면서 떳떳이 살도록 명하신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남의 죄를 짊어지고, 또 자기가 대신 그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변호해 주고 역성해 주며 아예 자기가 했다고 대답하는 것은 참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또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님은 '영신수련'이라는 책 165-167항에서 "첫째 범하면 대죄가 되는 하느님의 계명이나 사람의 계명 하나라도 일부러 거스르지 않아야 하고, 둘째 고의로 소죄 하나라도 범할 생각이 없어야 하고, 셋째 우리 주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기 위해서 부귀보다도 가난한 그리스도와 같이 가난함을 원하고 선택하며, 명예보다도 극도로 업신여김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업신여김을 원하며 또 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현명한 이로 보이기보다는 앞장서서 천대를 가득히 받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차라리 무식하고 미련한 사람같이 취급되기를 원하고 또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겸손의 세 단계'라 한다. 진정 우리가 겸손해지면 '예' 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리라.



연중 제6주일

(다해) 루가 6,17.20-26 : 98/02/15

지난 월요일 저녁 9시 한국방송공사 뉴스에서는, 결혼을 한 후 10년 동안 매일 남편의 술주정 때문에 폭력으로 고생하던 부인이 엉겁결에 흉기로 남편을 살해한 사건을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풀어 달라고 탄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집안에는 우리 천주교의 십가고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단칸방에서 아버지의 불성실한 생활과 술주정 때문에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치지 못한 청소년이 도둑질을 하다가 경찰에 잡혀갔습니다. 남편을 살해한 그 부인이나 그 청소년이 저지른 죄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거나 무죄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2중의 피해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인은 자기의 남편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남편 죽인 여자로 살아야 하고, 그 청소년은 가족과 단란하게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년원을 전전하며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아, 너희가 배부르고 웃게 될 것이다."(루가 6,20-21) 아무도 채워주고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들의 아픔과 한을 주님께서 채워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해 질 것입니다. 지금의 아픔을 주님께서 꼭 갚아주시고 채워주시리라는 희망이 이들에게 행복이 될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주변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멀리하고 단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마음 아파하면서 함께 슬퍼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이들이 깨우치고 그 사랑으로 힘을 얻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다 만족하고 다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가정과 물질을 통해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ㄴ)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9) 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인인 우리는 물질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더 나은 물질적인 욕구와 풍요를 기대하기 보다, 오늘 날 우리 주변에 손상되고 파산된 가정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위로해 줍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해 주는 이가 되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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