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가해) 마태 5,38-48; 17/02/19

본당 부임 축하미사 강론

이승준 프란치스코 신부

안녕하십니까?

풍납동 성당에서 수색 예수성심 성당으로 부임한 이승준 프란치스코 신부입니다. 제가 수색 예수성심 성당에 부임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이어서 그러는지 어색하고, 설레이며, 떨림이 교차합니다. 교우 여러분의 많은 사랑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부임한 첫 주일이 연중 제7주일입니다. 연중시기의 시작은 주님 세례축일입니다.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보내면서, 주님의 세례 받으심을 묵상하고,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례성사의 축복을 다시금 상기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창조 질서의 가장 완전하고, 순결한 주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주님에게 선택된 자녀임을 확고히 하며, 연중시기의 신앙 여정의 초반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중 제1주간부터 연중 제6주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을 성찰하며, 세상의 어두움으로 물들고, 세속에 얼룩진 것들을 비워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중 여섯 주간동안 주님이 허락하신 신앙 여정을 통하여 주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혼돈의 세상을 당신이 보시기 참 좋게 창조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참 좋은 세상, 사랑과 평화가 깃들인 세상, 주님은 이러한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선사하신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이러한 세상을 파괴하고, 오직 안락함과 편안함, 그리고 즐거움만으로 세상을 채워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창조의 역사를 깨닫고, 주님의 지혜로 채워 나아가야합니다. 이 세상은 주님의 지혜를 통하여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분명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거처인 성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거처로 선택하신 우리의 마음에는 오직 당신의 메아리가 울려 퍼져야 하며, 당신의 은총과 평화, 그리고 생명의 샘물이 넘쳐 흘러야합니다.

우리는 연중시기 여섯 주간동안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아벨의 거룩한 제물로 우리는 주님께 봉헌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거처하시는 하나의 성전이며, 주님과 하나된 주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혜를 깨달아 나아가며, 우리가 주님의 창조 역사에 우리의 역사를 함께 하고 있기에,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거룩한 나무 십자가를 새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고, 죄인들만을 못 박았던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그 나무 십자가를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거룩한 구원의 십자가로 변화시켜 받아드립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변모를 통하여 우리도 함께 변화된 삶으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겼기에, 주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이 이끌어 주심에 따라, 우리의 이웃에게 다가갑니다. 세상의 어두움에서 구원의 손길과 구원의 빛을 희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가갑니다. 그리고 사랑의 향기를 전달합니다. 그 향기는 주님의 향기로, 널리 널리 전파되어 나아갑니다. 우리는 주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한 사랑의 힘을 깨달아갑니다. 죽음도 막지 못했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에, 사랑의 참된 의미를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버림받아야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으며,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을 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모습을 닮았고, 주님 사랑의 손길과 주님의 영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에게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향기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지혜를 깨달아 실천하는 주님의 참된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창조역사 안에서 함께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여정을 통하여 세상의 지혜 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주님의 지혜를 통하여 세상에 참된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한 주간 한 주간의 신앙 여정 속에서 남기는 우리의 발자국은 세상의 발자국이 아니라, 주님 사랑의 발자국이 되어야함을 항상 상기해야겠습니다.

연중 제7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수색 예수성심 성당에 계시는 모든 교우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항상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주님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저희 작은 마음으로 느껴봅니다.

보시기에 좋으셨던 세상에 당신의 향기를 맡습니다.

세상의 어두움이 깃들여지지 않았던 세상,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깃들여진 세상,

주님! 그 세상에서 저희의 삶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작은 저희 마음, 당신의 지혜를 깨닫기에 많이 미흡하지만,

저희는 당신이 허락하신 시간들에서 조금씩이나마 당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님! 당신이 지상에서 허락하신 생명의 시간은 진정 당신 지혜의 깨달음 여정임을 느낍니다.

주님! 저희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도구이며, 당신의 지체입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시어, 당신이 가시자는 곳에 저희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당신의 역사에 저희 역사가 함께 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 메아리가 저희 마음에서 울려 퍼지며, 사랑의 샘이 넘쳐 나게 하소서!

주님! 저희는 당신 사랑의 향기를 전하러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언제나 저희를 지켜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당신 자녀 되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7주일

(나해) 마르코 2,1-12; 12/02/19

지난 주일 우리는 정들었던 김 에프렘 수녀님과 윤 오딜로 수녀님을 섭섭한 가운데 떠나 보냈고, 오늘 김 도나타 수녀님과 최 님미아 수녀님을 맞이했습니다. 두 분 수녀님, 환영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하시겠지만, 저희 삼성동 성가정 성당 신자들을 사랑해 주시고 복음삼덕의 빛을 밝혀 주시기를 청합니다. 여기 사시는 동안 건강하시고 주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대합니다. 우리 신자들도 수녀님께 기쁜 마음으로 협조해 주시고 배려해 드릴 것입니다. 저도 할 만큼 하겠지만, 제가 성심껏 한다고 하는 일이 수녀님들의 마음에 다 들지 않더라도 너그러운 아량으로 받아주시고 사랑으로 저의 부족함을 채워, 신자들과 함께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를 얻도록 노력합니다. 우리 수녀님들께 환영의 박수를 쳐 드립시다.

다음 주에는 여러분이 꿈에도 그리던 박진수 요엘 신부님께서 우리 본당에 부임하시게 됩니다. 2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사이동을 하시는 성직자 수도자분들이 언제 어디서나 주님 사랑의 영 안에서 행복하시고 복음의 빛을 받아 살아나가실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인 예비신자 여러분, 우리 천주교 서울대교구 삼성동 성가정 성당을 찾아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분들에게도 환영의 힘찬 박수를 쳐주십시오.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아내와 자녀의 성화에 못 이겨서 나오신 분들도 있으실 것이고, 또 어떤 분은 부모님의 간곡한 권유에 마지못해 나오신 분들도 있으실 것이고, 결혼하기 위해서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진리와 평화를 갈구하며 인간의 길을 찾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천주교회를 찾아오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계기로 성당을 찾아 오셨지만, 그 어떤 경우가 되었다 하더라도 여러분을 이 성당 이 자리로 부르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이 기회에 주님을 알아 뵈옵고, 주님 안에서 평화와 새 희망의 길을 모색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지금 세례를 받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도 성당에 나오게 된 동기나 계기 중에는 예비신자들의 경우와 유사한 분들도 있습니다.

예비신자 여러분은 오늘부터 예비 신자 교육과정을 밟게 됩니다. 예비 신자 교육과정을 통해 여러분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삶에 대한 안내를 받게 됩니다. 예비 신자 교육과정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뉘어 집니다. 첫단계는 세례성사를 위한 6개월 간의 예비신자 교리 기간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첫고해성사를 위한 약 2개월간의 신비교육기간입니다. 세번째와 네번째 단계는 구약과 신약 성경공부기간이며, 신약성경공부를 마치면 견진성사를 받게 됩니다. 반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올 8월 15일 세례를 받을 여러분은 구약을 먼저 공부하고, 내년 7월에 신약을 시작하여 견진성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6개월간의 예비신자 교리 과정을 밟게 됩니다. 2개월간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고 성령에 대한 기초 교리를 배운 후 4월 중순에 ‘예비신자 받아들이는 예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7월초에 성지순례를 하며, 삶 속에서 신앙을 실천했던 선조들의 신앙에 대해 알게 됩니다. 이어서 일곱 가지 성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습득한 후에 여러분이 세례성사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면, 7월말에 ‘예비신자 선발예식’을 합니다. 그리고 8월에 ‘세례 전 피정’을 통해 세례성사를 받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고, 마음에서부터 주님을 믿고 선택하여 교회 안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신자들과 한 식구가 되기를 청하시면, 올 해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에 세례성사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성사를 받아 새신자가 된 후 2개월간의 세례 후 교육으로 10월경에 첫고해성사를 받고, 이어 성경모임을 통해 구약성경부터 성경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년 7월경에 신약공부를 한 후에 여러분은 2013년 11월에 견진성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성사를 받고 난 후 약 한 달 후 세례자들이 첫고해성사를 볼 때 이미 세례자의 50%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례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는 교리도 더 이상 안 받고, 너 나 할 것 없이 평등한 신자인 것은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예비신자들은 어서 빨리 교리를 끝내고 세례 받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세례자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 특별히 구역 반모임 소공동체 모임에 들어가 복음을 듣고 나누며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는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또는 그나마 단체에라도 가입하여 활동을 하면서 선배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을 통해 신앙을 전수받지 않는다면, 새세례자들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홀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이 세례자는 매년 100~150여 명씩 늘어나도, 미사 참례자수는 몇 년째 제자리 수인 기현상의 한 원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새신자들이 겪게 되는 이러한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내용적인 냉담율을 떨어뜨리고 풍요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년여 기간의 4단계 신앙교육 기초과정을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예비신자 교육과정이라는 신앙교육이 12개조로 이루어진 사도신경에서 확대된 100여가지 교리문답에 나오는 교리를 설명하고, 예비신자들은 그 교리항목들과 12기도문을 외우는데 치중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때는 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인 신학교리를 전달하는 데 치중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이라고 하면, 뭔가 모르는 것을 새로 배우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도 지식과의 연관 하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교육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주님에 대한 교리지식을 전달하고 습득하느냐에 있기 보다는, 얼마나 깊이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이해하고, 얼마나 많이 주님을 사랑하여, 얼마나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변화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 교육과정의 변화는 교리 지식의 전달과 수용이라는 지적인 습득에 그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이고 이성적인 깨달음과 주님 사랑의 마음에 대한 감성적인 느낌으로 이어져, 우리 실생활에 적용하게 합니다. 자신의 일상에 주님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바로 그 교리 지식을 추출해 낸, 교리의 원천인 성경을 통해서 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제자 공동체가 처한 특정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쉽게 이해하고 그 의미와 내용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나, 바로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너의 악행들을 씻어 주는 이,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 43,19.25)

여기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왔던 사고방식과 처세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오면서 얼마나 주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았는지. 내가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그 지난 세월이 사실은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돌봐주시고 이끌어주신 은총의 세월이었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실존에 대해 새롭게 눈 뜨게 됩니다. 우리 삶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면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게 되고 주님께 감사 드리게 됩니다. 주님 사랑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면서 우리는 우리 과거의 가치관과 생활습관을 버리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신 그 생명의 나라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1-22)

성경을 읽고 나누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익히고 자신의 일상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맺어주시는 열매를 바라보며,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몸소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와 깨달음 그리고 그에 따른 믿음은 우리가 주 예수님을 우리 생의 주인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해주며 우리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 현실에서 적용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좋은 의도가 의심을 받을 때도 있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좋은 행동이 결과적으로 다른 이들과 비교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오해를 받으시면서 사셨습니다. 세상 사회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얻어서 조금이라도 더 잘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면서, 나누는 것이 더 풍요해지고 행복해지는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서로 남을 짓밟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신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희생하는 것이 사는 길이요 이기는 길이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죽는 것이 지는 것이요 실패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부활이라는 새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요 승리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리 대조적으로 사셨고 또 우리를 그 대조사회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신앙교육은 주님께서 최고로 삼으셨던 것, 즉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고 현실에 적용하여 스스로 변화하고 또 주변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과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이 사건과 상황을 통해 주님께서는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오늘 이 사건과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누구와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 매 순간과 매 사건과 상황이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을 주님과의 연관 안에서 주님 사랑과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찾고 또 실천하며 주님을 만나 뵈옵고 주님 사랑 안에서 살아나가기로 합시다.

예비신자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교육 과정을 통해 주님을 뵈옵고 주님을 깊이 체험하는 좋은 순간들이 점점 많아져서, 여러분이 주님 안에 사는 것이 여러분 삶의 참 자유요 기쁨의 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새로 태어나는 기쁨이 여러분을 신앙으로 초대하고 우리 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모험과 전적인 의탁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1,8. 10)

그리고 신자 여러분, 오늘 예비신자 환영식을 맞아 여러분을 교회와 신앙으로 이끌어준 부모와 대부모를 비롯한 선배 신앙인들과 성직자 수도자들의 노고를 되새기며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 아멘.



연중 제7주일

(나해) 마르코 2,1-12; 06/02/19

지난 주간에 동부에서 신부님들 두 분이 스키를 타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아침밥을 드시고 스노우 퀄미 스키장으로 가신지 2시간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혹시나 하고 불안해서 전화를 받아보니, 신부님들 중 한 분이 오른 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지셨다는 것입니다. 부랴부랴 병원을 알아보고, 하루 종일 병원에 함께 다녔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손이 부러진 신부님께서 저보고 말씀하셨습니다. “형, 우리가 형 나두고 우리끼리만 스키 타러 가니까, 일부러 우리 일찍 오라고 기도한 거 아냐?” 그래서 제가 답했습니다. “난 그런 기도 안 해. 우리 성당을 져도 비오지 말라고 기도 안 해. 그냥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도하지.”

그 신부님께서는 하루 종일 자기 때문에 저와 함께 가신 신부님께서 병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미안해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는, 손이 부러져 스키를 못타고 도중하차 하셨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소중했고 기뻤습니다. 그 신부님이 다치지 않으셨다면, 저는 성당 짓는 일로 그냥 제 일만 하면서 지냈을 것이고, 그 신부님들은 노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저와는 상관없이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신부님이 다치심으로써 우리는 셋이서 함께 지내는 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이야 어찌 되었던 사제들과 함께 지내는 순간들이 그렇게도 좋았습니다. 마치 제가 대신 휴가라도 가진 것처럼 행복한 순간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 근처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은 정작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 데려가서,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 뵈옵기만 하면 고쳐질 것이라고 믿었던 네 사람은 결국 예수님께서 앉아계신 방의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그를 내려 보냅니다.

갑자기 지붕이 뚫리고 내려오는 환자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는 놀라기도 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5)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어서 병이 걸린다고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병 걸린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써 그 병을 몰아내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있던 몇 사람이 의아해 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7) 그들은 죄는 하느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믿을 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마음을 알아채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 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8-9)

그러시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10)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11) 예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면 낳게 되리라고 믿고 기대하며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이 이루어졌음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보란 듯이 그 병자가 일어나 걸어 나갑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인간의 아픔과 한계를 아시고 고쳐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우리를 지켜주고 계시다는 사실이 기쁘고 뿌듯하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께 의지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셔서, 인간을 죄와 악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우리의 병으로 표현되는 아픔과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시고,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의 커다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도 중풍병자처럼 육으로나 심적으로나, 우리 스스로 자기 몸 하나 해결하기는커녕 주체하기도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때, 내와 내 인생이 영육적으로 벅차고 힘들어할 때,

내가 쓰러지면, 누가 나를 건사해줄까?

그리고 또 나는 누구를 건사해 줄 것인가?

오늘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려온 네 사람이 병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명확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중풍병자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삼아 그 병자를 위해 헌신한 네 명이 부럽기만 합니다.

비록 중풍이라는 병에 걸려 고생은 하지만, 네 명에게 자신의 생명을 믿고 맡기고 청할 수 있었던 중풍병자가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동시에 그 중풍병자와 함께함으로써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고 보람있게 살아가는 그 중풍병자의 동반자들도 역시 행복해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아픔과 한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주님.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바라보고 계시기에 우리는 늘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우리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여겨 함께하는 사람들의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고쳐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살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위해 헌신해주는 형제들에게도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형제들에게 함께하는 동반자로 기꺼이 나섭시다.



연중 제7주일

(다해) 루가 6, 27-38; 2004/02/22

언젠가 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한 사람이 자기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하기 때문에 먼저 가겠다고 선생님께 말하길래, 내가 곁에서 도와준답시고, "이 사람의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영어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는 제게 오히려 그 말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처음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선생님 말이 임신은 개인적인 것이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She is expecting."(아내가 기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임신은 나쁜 일이 아닌데도 personal하고(개인적이고) private한(사적인) 것이라 밝히지 않는 것이 좋다는 제안을 듣고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미국인들이 한 개인의 인격을 지극히 존중하고 있다는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가끔 나쁜 일만 아니라면 여러 사람 앞에서 본인이 원하던 안 원하던 관계없이 그리고 중이 제 머리 못 깍듯이 본인이 밝히지 못하니까 대신 밝혀서라도 축하해주고 자기 일처럼 여겨 기뻐하는 우리의 문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 남이 달랠 때는 줄 것도 안주고 뭉기작 거리고 질질 끌면서 모른 체하고, 남의 것을 가져올 때는 자기 것도 아닌데도 주기도 전에 먼저 빼앗듯이 가져와 버리는 우리 각자나 강대국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27-3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 세속의 문화와 하느님 나라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31)고 하심으로써 하늘나라의 우위성을 제시해주실 뿐만 아니라, 재물이 아니라 인간을 얻으시려는 주님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손실을 제공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이득 즉 인간의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사랑의 처세술도 보인다.

주님의 말씀은 이어진다.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32) 결국 인간 본성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치 죄인과도 같은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35)고 하신다. 좋은 것은 누가 모르는가. 그런데도 그렇게 할 수 없음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35)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고 하신다.

또 살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자신의 벗과 수호천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비교하고 경쟁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37) 인간 사회에서 우리가 해 준 대로 다 받지 못하기도 하는 아쉬움 속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덤을 주듯이 말씀하신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38) 비록 인간의 세상에서 얻거나 되받을 수 없더라도 주님께서 보고 갚아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성서 상의 인물 다윗에게서 실제로 드러난다. 사울은 다윗이 자기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다. 그에 반하여, 숨어 다니던 다윗은 자기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는다. 이유는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사무 26, 9)는 다윗이 가진 믿음의 행동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에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참되게 살기만 하면 그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부치셨지만 저는 손을 댈 마음이 없었습니다. 임금님은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 아니십니까?"(23)

바오로 사도는 첫째 인간 아담과 둘째 인간 그리스도 예수를 비교하여 말한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47) 결국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현하여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받을 상, 바로 주님과 하나되리라는 것이다.

알렐루야를 통해 교회는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는 주님의 사랑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랑만이 아니라, 좋아하지 않고 눈에 거슬릴 뿐만 아니라 나를 괴롭히기까지 하는 원수 같은 사람에게 희생해주고 배려해주어, 그가 악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남아있게 하려는 사랑이다.

오늘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듯한 주님의 거룩한 계명을 들으면서, 우리 안에 주님의 자비와 보상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고 우리가 계명을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이끌어주시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아멘.



연중 제7주일

(나해) 마르 2, 1-12; 2003/02/23

옛날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와 연관시켰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병이 생기고 일찍 죽는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죄와 고통이 그렇게 말처럼 쉽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전생에 지은 죄와 업보를 내세우면서 인간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을 그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를 많이 지어 십자가의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희생하셨다고 믿는다. 몇 일 전에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다. 사고가 난 전동차에 못 탄 사람도 있고, 탔다가 사고가 나기 바로 직전에 전동차에서 내린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사고를 당한 사람은 죄인이고, 면한 사람은 선인인가? 부상자 중에는 스님도 있고, 수녀님도 두 분이나 계셨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죄를 짊어지시고 희생당하셨지만, 참사를 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주의나 죄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의 결과로 희생된 것이다. 혼자 죽기 싫어서 전동차에 불을 지른 사람과 전동차 내부를 불연재로 해야 하는데 불에 잘 붙고 유독가스를 내뿜는 플라스틱 제품으로 만든 사람들의 탓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것이다. 비단 이번 대구 참사뿐 아니라,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내몰린 도시 빈민, 장애자, 외국인 노동자 등은 자신의 죗값보다는 사회의 희생자들이다. 그러기에 오늘 여기서 우리가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은 아니지만, 원인과 결과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의 구조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면에서 우리 모두는 가해자인 셈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할 규정과 의무를 소홀히 함으로써 우리의 몫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채우도록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악 또는 구조악이라고 하는 이 사회병리현상을 신학적으로는 세상의 죄 또는 원죄 교리에 포함시켜 설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한 이들이나 희생자들을 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고통에 참여한다고 보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5절)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를 죄악의 구조와 병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자유인으로 활동하도록 사회로 돌려보내심으로써 구원하신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께 우리를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구해주시길 청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받아주시도록 기도하자.



연중 제7주일

(다해) 루가 6, 27-38; 01/02/18

오늘 다윗은 자신의 정적 사울과 전쟁을 하다가 밤에 기습을 한다. 사울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다윗의 부하 아비새는 하느님께서 넘겨주신 기회라며 죽이자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거절한다. 아비새는 남의 약점을 우리의 기회로 삼는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을 믿는 인간의 도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를 죽이려는 정적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사람이기에 내가 손댈 수 없다는 입장이다. 비록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할 상황이지만, 하느님을 믿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저 내가 할 바를 다 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자는 것이다.

이 말을 사도 바오로의 말과 견주어 보자. 곧 육적인 인간,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지만 영적인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다. 육적인 인간은 서로 죽고 죽이면서 살아가지만, 영적인 인간은 생명을 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용서와 자비라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루가 6, 31) 그리고 "너희는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32절)고 반문하신다. 그리고 또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5-36절) 그리고 또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들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38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종합해보면, 내 것을 내 마음에 들고 또 내가 나누어주고 싶은 이웃과 나누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심지어는 원수와도 나누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최소한 우리가 나누는 만큼에서부터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이웃과 관계를 맺는 육적인 인간인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영적인 인간인지를 되돌아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사명을 실현해야겠다.



연중 제7주일

(나해) 마르 2, 1-12: 2000/02/20

예수님께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에 구멍을 뚫어 중풍병자를 요에 달아 내려보내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으로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만일 내가 쓰러지면 누가 나를 데려다 줄까? 그것도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코앞에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극성스럽게 일해줄 사람이 있을까? 우선 가족이 그렇게 해주겠고, 그 다음엔 누가 해줄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많으신가요? 기대감만 크고 정작 확신할만한 사람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데려다 줄까를 찾기보다, 내가 이 사람은 꼭 예수님께 데려가서 고쳐 주어야겠다고 다짐하고 그 누구를 찾아야 복음이 정말 기쁜소식이 되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고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하느님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절) 하며 중얼거립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이유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 나병환자 등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은 단지 병을 낫게 한다는 말에 그치지 않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가족과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해 주신다는 말까지 포함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받아 다시 집으로 가게 되었으니 "요를 걷어가지고 집으로 가거라"(11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났고 비로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10절)을 보게 되어 "하느님을 찬양"(12절)합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 과거에 우리와 함께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그 누구를 용서하고 찾아가 그를 다시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라면,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가서 주님께 청합시다. '주님, 저를 용서해주시고 살려주시는 주님! 오늘 제가 이 친구를 주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이 친구를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셔서 다시 주님의 사랑과 축복 속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아멘.'



연중 제7주일

(다해) 루가 6,27-38 : 98/02/22

가끔 우리는 '누구를, 어디까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질 때가 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원수들,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뺨을 치면 다른 뺨을 대고, 달라는 대로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고, 한 걸 음 더 나아가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루가 6,31)고 하신다. 우리의 욕심 이 얼마나 큰데. 주저하지 말고 한없이 해주라신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며 되 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여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고 하신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상대가 회개도 하지 않고 참회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주면, 그가 자기 죄를 모르고 심지어는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더욱 더 심해진다고 주장하며 용서를 주저하거나 혼란스러워 한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주셨나? 주님은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세상에 내시고,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가 회개하며 용서해 달 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께 우리 죄를 용서해주실 제물로 당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바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시면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건만, 오늘도 죄 를 짓는 사람은 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회개하고 참회하여 주님 의 은총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그대로 죄를 짓고 죄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처럼 자비롭게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믿고 회 개하는 사람은 죄없는 사람으로 용서를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죄에 계속 갇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책잡힐 일을 하지 말고 할 바를 다하고 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자비를 베푼 만큼 우리가 되받을 것이라고 희망과 용기의 약속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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