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일

(가해) 마태 6,24-34; 17/02/26

주일 미사를 마친 다음 성당 마당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하려고 서 있으면, 매주 “저는 어느 성당에서 신부님 강론이 좋다고 해서 들으러 왔습니다.”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혹시 우리 신자들 중에 점집이나 다른 곳에 좋은 말씀 들으러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고, 다른 이들은 쫓아와서 듣는데, 우리 본당 신자들도 이렇게 감격해 할까 싶기도 합니다. 예전에 어떤 선배 신부님이, “본당 신부 강론 열심히 준비해도 본당 신자들이 감탄하지 않고, 그저 본당 살림 빵꾸나 내지 않으면 돼!” 라고 하시던 우스개 소리가 생각납니다.

지난 12월과 1월, 교구장님께 두 번 편지를 올렸습니다. 그 두 번째 편지 서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난 대림성탄 시기에는 우리 수색 예수성심 성당 신자들이,

1. 대림성탄 판공성사 1,105여명

2. 대림성탄 판공찰고지 368여명

3, 대림특강 참생명학교 475여명 수강

4. 대림성탄 14개 구역, 단체별 불우이웃돕기 사랑나눔

5. 성탄대축일(12/25) 예비신자 봉헌식 109여명

6. 주님공현대축일(1/8) 예비신자 환영식 33여명

등을 무리라고 생각하여 불평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주임사제가 요청하는 대로 기꺼이 다 수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심 깊고 충실한 신자들이 사는 본당에 저를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는 소리를 했습니다.

지난 주 새로 부임하신 이승준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사정을 보아도, 교구장님께서 큰 본당에서 은퇴하시는 신부님을 뒷바라지 하느라 3년이나 고생하신 분을 우리 수색 예수성심 성당으로 보내주신 것으로 보아, 교구장님께서는 우리 수색 예수성심 성당 신자들이 얼마나 사제를 사랑하고 사제단과 일치하여 충실하게 신앙을 살고 있는지 잘 알고 맡기신 듯합니다.

교구장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썼습니다.

“여러 본당과 각 사목지를 다 돌보시느라 신경을 많이 쓰셔야 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하해와 같은 은총으로 저희 수색 예수성심 성당의 처지를 헤아려주심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로 부임한 이승준 프란치스코 신부와 신자들 모두가 힘을 합쳐 교구장님의 올 사목지침을 충실히 이행하여 사목적인 결실을 맺어 교구장님의 배려에 보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는 교구장님의 사목교서를 본당에서 실현하기 위해, 신자들이 뉴타운 개발로 이전하여 줄어드는 상황에서 ‘미사 전례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독려하고 있으며, 매일 오전 10시 미사 전(9시 45분)에 성전에서 ‘성무일도 낮기도’를, 매일 저녁 21시에 가정의 화목과 단란, 본당의 친교와 일치,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통한 국토통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만과’를 바치며(기도 후 본당사제단이 강복합니다), 매주 각 단체가 가해 미사 전례에서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을 53주로 나누어 읽고 그에 따른 훈화를 들으며, 매주 화요일에는 20시부터 21시까지 ‘공동 성체조배’를 하고, 매월 첫 목요일 19시 미사와 ‘성시간’을 지내고, 매월 둘째 주 수요일 미사 후 11시부터 본당에서 돌아가신 교우들을 위한 ‘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저희의 미력한 노력을 어여삐 보아주시어 축복해주시고 사목적인 결실을 맺어주시길 간구합니다.”

여러분 제가 잘못 쓴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우리 본당은 1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역대 주임사제분들과 수녀님들, 평신도 지도자들, 그리고 신자 전체의 헌신적인 희생봉사로 빚어져 왔음을 성당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당의 건물과 부대시설, 신앙과 신심 프로그램, 구역반과 단체들의 조직과 신앙 전통을 살펴보면, 우리 성당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결코 모자라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해와 올 해 교구장님께 보고 드렸던 우리 성당의 외적 표지와 숫자들 그리고 항목들이 얼마나 크고 깊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직접 그 사목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대면하고 깊은 체험을 통해, 주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 안에서 힘을 얻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겠지요.

이제 우리 스스로,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되새기며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성전에서 전례를 봉헌하고 기도하면서 주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지?

주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내 삶이 기쁘고 행복한지?

성경을 자주 읽고, 읽은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주님의 뜻을 일상에 적용하며 살고 있는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으로 남겨주신 하느님 나라를 동료 신자들과 함께 어떻게 건설하고 있는지?

구원의 사순시기를 맞이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도록 합시다.

우리가 애써 지은 이 성전에서 봉헌하는 전례를 통해, 우리 삶의 기쁨과 희망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가 애써 가꾸는 이 성전에서 기도하며 주 예수님을 만나 뵈오면서, 평화와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가 소공동체 구역반과 소공동체 단체원들과 함께 복음을 읽고 묵상하여, 주님의 감추어진 신비를 깨닫게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깨달은 주님의 말씀과 사랑의 신비를 형제자매들과 함께 활동하며 하나씩 이룸으로써, 신앙의 체험과 그에 따른 희열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어려운 이들을 돌보고 나눔으로써, 우리 스스로도 정화되고 보람될 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신앙생활의 이러한 기쁨과 희망이 우리가 성당에 나오면서 얻고 싶고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당에서 비단 신자들과 함께 만나고 활동하며 좋아서 좋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영적 체험 때문에 황홀하여, 그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뿌듯한 기쁨으로 행복합시다.

또 다시 시작하는 신앙 회개와 보속의 계절에 우리의 신앙을 정화하는 활동들이 다소 번거롭고 불편하게 될지 모릅니다. 이 재계의 사순절에, 우리가 전통적으로 행해오던 신앙과 신심 프로그램들을 통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생명을 바쳐 희생제사를 봉헌하신 주님의 수고수난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이 정화의 순간들을 하나씩 충실히 밟고 다 채움으로써,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주님과의 진실한 만남을 가지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따뜻한 위로를 받기로 합시다. 그리고 그런 깊은 신앙 체험을 통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남들은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 우리 현세 생활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나가기로 합시다. 우리의 정화는 나 한 개인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연중 제8주일

(가해) 마태 6,24-34; 14/03/02

이번 수요일 3월 5일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다음 주 사순 제1주일에 ‘참생명학교’ 개막강의를 하게 되기 때문에,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시기 담화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달 3월 소공동체 모임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게 됩니다. 저는 ‘실천약속을 위한 안내’에서 코린토 후서 8장 9절의 “그분께서는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를 예수님의 가냘프고 약한 탄생의 주제어로 삼아 제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황님께서도 올 사순시기 담화의 주제를 이 성경구절로 삼으셨습니다.

교황님은 사도 바오로가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을 위한 모금을 독려하기 위해 이 말을 했다는 것을 전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바오로 성인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가난해지라는 초대, 곧 복음적으로 가난하게 살라는 이 초대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의 은총

그리스도는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우리와 똑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히브 4,15 참조).” 심지어는 당시 막장 노동자로 여긴 목동들보다 더 가련하게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인”(루카 2,12) 채로 태어나심으로써 목동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은총이고 너그러움이며 가까이 하려는 열망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와 나눕니다. 사랑은 서로 닮게 하고 평등을 낳으며 장벽을 허물고 간격을 없앱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논리, 곧 사랑의 논리, 강생과 십자가의 논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하는 마음에서 풍족한 가운데 자선을 베푸는 사람처럼 우리에게 구원을 하늘에서 그냥 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가 필요한 이들과 죄를 지은 이들 가운데 계시고자, 그리고 우리의 죄를 몸소 짊어지시고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며 비참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자 가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가난의 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5 이하 참조)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시는 방식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부유한 분께서 모든 것을 버리시고, 우리와 같이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가난한 인간 조건을 선택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느끼며 부모를 사랑하고, 그 사랑과 보살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는 아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십니다. 예수님의 부요는 그분이 아드님이시라는 데에 있으며, 아버지와 맺으신 유일한 관계가 이 가난한 메시아의 최고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편안한 멍에”를 지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은, 그분의 “부유한 가난”과 그 “가난한 부요”로 우리가 부유하게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드님이시며 형제이신 그분의 영을 나누라고, 아드님 안에서 자녀가 되고 형제들 가운데 맏이이신 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로마 8,29 참조).

우리의 증언

이 가난의 “길”이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길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에서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통하여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부요는 우리의 부요가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에 힘입어 실천하는 우리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가난을 통해서만 전해집니다.

빈곤은 가난과 다릅니다. 빈곤은 믿음과 연대와 희망이 없는 가난입니다.

물질적 빈곤은 보통 가난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간 존엄을 거스르는 상황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곧 식량, 물, 위생, 일자리, 개인적으로 발전하고 문화적으로 성장할 기회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와 필요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 교회는 도움을 주면서, 곧 봉사(diakonia)를 하면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인류의 모습을 훼손시키는 그 상처들을 감싸주고자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봅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도우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도덕적 빈곤은 사람들을 악과 죄의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알코올, 약물, 도박, 음란물에 중독된 일부 가족, 특히 자녀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없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또한 불의한 사회 상황,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의 존엄을 빼앗아가는 실업, 공평한 교육과 의료 혜택의 부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도덕적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도덕적 빈곤은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빈곤은 경제적 붕괴도 일으키며,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 사랑을 거부할 때 빠지게 되는 영적 빈곤으로 반드시 이어집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 낼 수 있다고,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복음은 영적 빈곤의 참된 해결책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이 해방의 소식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식,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애주는 위대하신 분으로 늘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신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우리가 친교와 영원한 생명을 받고 태어났다는 소식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자비와 희망의 메시지를 기쁘게 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사순 시기에 교회 전체가 물질적, 도덕적, 영적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메시지를 증언할 준비를 하기 바랍니다. 이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감싸 안을 준비가 되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순은 금욕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우리의 가난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부유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 물어보도록 합시다. 진정한 가난은 아프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러한 차원의 참회 없이는 그 어떤 금욕도 참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런 희생도 따르지 않고 아픔이 없는 자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 참조).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의 결심을 굳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인간의 빈곤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키우도록 도와주시어, 우리가 자비로워지고 또 자비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13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에

프란치스코


연중 제8주일

(나해) 마르코 2,18-22; 06/02/26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는 지난 2006년 2월 22일 서울대교구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인 정진석 대주교님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인 이날 일반 알현 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오는 3월 24일 추기경회의에서 서임될 추기경 15명의 명단을 발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에 즉위한 다음 처음 열리는 3월 24일 추기경회의 이후 추기경은 193명이 될 예정이며, 그 가운데 교황 선거권을 가지는 80세 이하 추기경은 120명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새 추기경 명단을 발표하면서, 이날 축일이 추기경회의를 발표하기에 “매우 적절한 날”이라고 강조하셨다. 추기경들은 “베드로의 후계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도직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교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돕고 뒷받침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또한, “추기경들은 교황을 중심으로 일종의 원로원을 구성하며, 교황은 추기경들에 의존하여 신앙의 일치와 친교의 영구하고 가시적인 원천이며 토대인 교황직과 관련된 임무들을 수행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또한 새 추기경 임명으로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정하신 대로 교황 선거권을 가지는 추기경 수를 120명으로 맞추고자” 하였음을 밝히셨습니다.

이번에 새로 서임되는 추기경님들 중에 교황 선거권을 가지는 분들은 12분입니다.

- 윌리엄 조셉 레바다(William Joseph Levada) 대주교, 69세,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미국)

- 프란츠 로데(Franc Rode C.M.) 대주교, 71세, 교황청 수도회성 장관, (슬로베니아)

- 아고스티노 발리니(Agostino Vallini) 대주교, 65세, 사도좌 대심원장 (이탈리아)

- 호르헤 리베라토 우로사 사비노(Jorge Liberato Urosa Savino) 대주교, 63세,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대교구장

- 가우덴시오 로살레스(Gaudencio B. Rosales) 대주교, 73세, 필리핀 마닐라 대교구장

- 장 피에르 리카르(Jean-Pierre Ricard) 대주교, 61세, 프랑스 보르도 대교구장

- 안토니오 카니사레스 요베라(Antonio Canizares Llovera) 대주교, 60세, 에스파냐 톨레도 대교구장

-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 74세, 서울 대교구장

- 숀 패트릭 오말리(Sean Patrick O'Malley, O.F.M. Cap.) 대주교, 61세, 미국 보스턴 대교구장

- 스타니스와프 지비시(Stanislaw Dziwisz) 대주교, 66세,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장

- 카를로 카파라(Carlo Caffarra) 대주교, 67세, 이탈리아 볼로냐 대교구장

- 젠 제키운(陳日君, S.D.B.) 요셉 주교, 74세, 홍콩 교구장

이어서 교황님께서는 “그동안 충실한 모범과 존경할 만한 헌신으로 교회에 공헌한 바를 고려하여, 80세가 넘은 고위 성직자 세 명”도 추기경으로 승격시킨다고 발표하셨습니다. 그 세 분은

- 안드레아 코르데로 란자 디 몬테제몰로(Andrea Cordero Lanza di Montezemolo) 대주교, 80세, 로마 외곽 성 바오로 대성전 대사제, (이탈리아)

- 피터 포레쿠 데리(Peter Proeku Dery) 대주교, 87세, 타말레 명의 대주교, (가나)

- 알베르 반오이(Albert Vanhoye, S.J.) 신부, 82세, 교황청 성서대학 전 학장 겸 교황청 성서위원회 전 총무, (프랑스)

입니다. 이 세분은 교황 선거권이 없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새 추기경들이 “교회의 보편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며, “실제로, 새로 임명된 추기경들은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임무를 통해 하느님 백성에 봉사하고 있는 분들이다. 신자들은 주님께서 이들이 헌신적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은총을 주시도록 특별히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교황 성하께서는 추기경회의에서 정진석 추기경님을 비롯한 15분의 새로 임명되신 추기경님들을 서임하실 것이며, 다음 날인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새 추기경들과 함께 축하 미사를 공동집전할 뜻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추기경회의 하루 전인 “3월 23일에는 전체 추기경단을 초대하여 묵상과 기도 모임을 갖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추기경’(樞機卿, 라틴어 Sacrae Romanae Ecclesiae Cardinalis : 영어 The cardinal of the Holy Roman Church)이란 말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초세기 교회에서는 모든 성직자가 주교이거나 사제이거나 부제이거나 어느 한 교회에 종신하도록 소속되어 봉직하는 직책을 위하여 서품되었는데, 그 성직자는 “직위를 받았다.”라고 하고, ‘직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성직자가 평생 봉직하도록 서품되었던 직위를 바꾸게 되면 그때부터는 새 직위로 “입적되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마디는 돌쩌귀라는 라틴어 cardo(hinge)에서 유래된 것이다. 문짝을 문설주에 달고 여닫으려면 돌쩌귀가 중요한데, 교회에 중요한 인물이라는 의미로 직위가 바뀐 이러한 성직자를 ‘직위자’라고 부르지 않고 ‘입적된 중추자’(中樞者, cardinalis)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주교좌가 모든 교회들의 중심, 곧 중추(cardo)로 인정되었기에 중추자라는 칭호는 로마 교구 소속 성직자들에게만 한정되었다가, 점차 서방 교회의 여러 교구에서도 주교좌 성당이 교구의 중추이므로 주교좌 성당에 속한 성직자들을 입적된 중추자라고 불렀습니다.

동북 아시아의 중국, 일본, 조선에서는 황제의 최고 자문 기관을 중추원(中樞院)이라고 불렀는데, 16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중국과 일본 등에서 교회 용어를 번역할 때 그 당시의 국가 사회 용어를 채용하였고, 그리하여 교황의 최고 자문 기관인 “로마 교회의 중추자”들을 “추기경”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추기경(Cardinalis)이라는 용어는 그레고리오 대교황(590-604년) 때에 교회법 용어로 채택되었고, 이 용어가 11세기부터는 세계 교회의 으뜸인 교황의 최고 측근자들이며 자문단으로, 후임 교황의 선출권을 독점하여, 실제로 후임 교황이 그들 중에서 선출되는 최고위 성직자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추기경이 되는가?

추기경에 승격되는 이들은 적어도 사제품을 받았고, 학식과 품행과 신심과 현명한 업무 처리 역량이 특출한 남자 가운데에서 교황이 자유로이 선발하며, 아직 주교가 아닌 이들은 추기경으로 서임되면 주교 서품을 받아야 합니다.

추기경 어떻게 서임되는가?

추기경은 교황이 자유롭게 임명합니다. 추기경의 서임은 교황의 명시적 의사 표시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으며, 미리 다른 추기경들의 자문이나 동의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교황은 전세계 도처에서 적격자들을 뽑아 추기경으로 임명합니다(사제급 추기경들은 각국의 대표급 교구장들 가운데에서 선발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과거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의 국왕이 교황에게 추기경 후보들을 추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세속 국가의 추천권이 없습니다.

새 추기경은 교황이 추기경회의에서 직접 서임합니다. 이러한 관습은 추기경단이 교황 궁정으로 기능하였을 때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교황이 추기경 후보자를 거명하면서 추기경단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하고 물었고, 추기경들이 토론하고 동의하는 절차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형식적인 절차로만 존속하고 있습니다. 새 추기경은 서임되는 즉시 추기경단 특별법에 따라 교황 선거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가집니다.

그리고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동시에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지며, 교황과 마찬가지로 세계어디서나 교구장 주교의 허락 없이 고해성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됩니다.

새 추기경들이 서임 예식 때 신앙고백과 교회에 대한 충성 서약과 순명 선서를 한 후에 받게 되는 ‘붉은 모자’(biretum rubrum)는 추기경의 고귀한 품위를 표상하며, 신앙의 현양을 위하여 또 신자들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그리고 거룩한 로마 교회와 교황을 위하여 죽기까지 피를 흘려야 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축하미사에서 ‘작은 붉은모자’(galerum rubrum)와 ‘추기경 반지’를 수여받습니다.

교황은 백색의 수단을 입으며, 주교는 자주색이고, 사제는 흑색인데 반해, 추기경은 홍색 수단을 입습니다. 그래서 추기경을 ‘홍의(紅衣) 주교’라고도 불렀습니다.

추기경은 교황을 선거하는 소임이 있는 특수한 단체, 곧 추기경단의 구성원으로 임명된 주교이며, 중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함께 소집되는 때에는 합의체적으로 행동하여 교황을 보필하거나, 또는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여러 가지 직무로 교황을 도와드림으로써 교황을 보필한다. 교황과 추기경단의 관계는 교구장 주교와 교구 참사회의 관계 또는 국가 통치자와 국가 최고 회의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교황에게 성실히 협조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갑니다.

본당 주임 사제나 지역 교회의 교구장 주교나 교황청과 바티칸 시국의 부서들이나 기타 상설 기관장의 정년이 75세 인데 반해, 추기경은 80세까지 직책을 수행하고 은퇴하지만, 신분상의 지위는 사제나 주교처럼 종신직입니다.

새로 서임되시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과 14분의 추기경님들이 항상 성령으로 충만 되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착하고 복된 목자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추기경님들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진리에 충실하고 모든 이들이 화해하고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이끌어 나가실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기도와 희생을 바쳐드리기로 합시다.


연중 제8주일 교황님 사순절 담화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20, 35)

2003/03/02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사순 시기는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시기입니다. 사순 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일상 여정에 빛을 비춰 주는 하느님의 말씀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면서 부활을 준비합니다.

올해 저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 35)는 사도행전의 한 구절을 사순 시기의 성찰 주제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어떠한 도덕적 권유나 외부의 명령이 아닙니다. 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를 주고받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 줌으로써 만족을 얻습니다.

2.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는 인간 마음 안에 늘 도사리고 있는 이기심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 사회나 매체는 일시적이고 쾌락적인 것들을 공공연히 찬양하는 메시지들을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자연 재해나 전쟁, 그 밖의 비상 사태 때에는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이 분명히 드러나지만, 일반적으로는 연대의 문화를 구축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심 없이 자신을 내어 주고자 하는 우리의 내적 성향은 세속적인 정신에 오염되어 우리 자신의 특정한 이익만을 채우려 들며,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려는 욕구를 부채질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수고로써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은 물론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지나친 소유욕은 인간을 자신의 창조주와 형제 자매들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디모테오에게 한 말씀은 어느 시대에나 들어맞는 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1디모 6, 10)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착취, 형제 자매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기본적인 도덕률의 침해는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서 빚어지는 결과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비극적이고 지속적인 빈곤 상황 앞에서, 우리는 맹목적인 이익 추구와 공동선에 대한 실질적이고 책임 있는 관심의 부족으로 막대한 자원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집중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가난과 무관심으로 고통받는 현상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면서, 저는 자명하지만 흔히 무시되고 있는 한 가지 원칙을 재확인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소수의 특권층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우리는 모든 사람의 희망인 진정한 정의와 연대의 세계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신자들이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자 하는 내적 충동에 따를 때, 그들은 깊은 내적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정의를 증진하고자 노력하고, 약자들을 옹호하는 일에 투신하며,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인도주의 활동을 하고, 모든 응급 상황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드린 완전한 선물인 유일하고 무한한 사랑의 보화에서 힘을 얻습니다. 신자들은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어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필립 2, 6 이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완전한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겸손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해골산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사람들에게 복되신 삼위일체의 사랑의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최고의 선이신 하느님께서만 이 세상의 온갖 빈곤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과 활발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는 열매여야 하며, 하느님을 변함 없는 준거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을 때 우리는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신국론' 'De Civitate Dei', Ⅹ, 6;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 전집' 'Corpus Christinanorum Series Latina' 39: 1351 이하 참조).

4.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아무 것도 바라시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 "죄 많은 사람들"(로마 5, 6)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순 시기를 이타심과 관대함을 바탕으로 용기 있는 결정을 하는 은총의 기회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순 시기는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물리치는 수단으로서 단식과 자선이라는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무기를 제공해 줍니다. 풍족함 가운데서 떼어 주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더 많은 것을 희생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꼭 필요한 자제심이 길러집니다. 끊임없는 기도로 힘을 얻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하느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하는 일에 영감과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도 형제 자매들의 참된 선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사회 생활이나 정치 생활의 중요한 측면들을 향상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러한 변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성인이 가르치듯이,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 13)

5. 흔히 피상적이고 덧없는 삶에 불안스러워하며 참된 행복과 사랑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범을 보여 주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라고 호소하십니다. 이러한 희생은,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생명을 걸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전세계 곳곳의 남녀 선교사들의 감동적인 모범에서 볼 수 있듯이, 자아를 성취하고 기쁨을 얻는 원천입니다. 또한 신앙의 재촉을 받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이바지하고자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 성소를 받아들인 젊은이들의 대답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들, 병자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는 일에 기꺼이 헌신하는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에게서도 이를 경험합니다.

최근, 우리는 유럽의 홍수, 라틴 아메리카와 이탈리아의 지진, 아프리카의 전염병, 필리핀의 화산폭발 등으로 생긴 희생자들과, 증오와 폭력, 전쟁으로 일그러진 세계 다른 여러 지역들을 위한 장한 연대의 발로를 목격해 왔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발생할 때,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우리가 재해와 재난의 희생자들과 일체감을 가지고 그들에게 신속히 도움을 주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흔히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계명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도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일게 하는 본연의 자비심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 주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은총을 얻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9, 36 이하 참조).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는 고결한 마음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사도 10, 2-31 참조).

저는 신자들이 이번 사순 시기를 곳곳에 사랑의 복음을 증언할 좋은 기회로 삼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랑의 소명은 모든 참된 복음화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저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간청하며, 성모님께서 우리의 사순 시기 여정에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저의 사랑을 담아 사도로서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1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연중 제8주일

(다해) 루가 6, 39-45; 01/02/25

어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 싸움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아서 그렇지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진실하고 꾸준히 추구하면서 펼치는 것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서로가 지금 당장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서로의 합일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 해도 다양한 의견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의 현상에 하나의 조건과 환경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들 그리고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시각과 입장들이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를 다양화된 사회라 하고 복잡하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파우스트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 자신의 업적을 이룰 때까지 죽음을 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느님과는 타협할 수 없다. 하느님은 우리 이익을 보증해주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조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 조정된다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인간들이 하느님마저 지배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더 우리는 주님을 찾는다.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이렇게 복잡하고 상대화된 세상 속에서 절대적인 가르침을 찾기 위해서이다. 시대와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는다. 혼란과 불확실한 세상에서 확실함을 구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자연과 신비의 영역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구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또 인간 세상에서 우리를 부당하게 압박하는 사람들에게서 구해달라고 청한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서로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지 않아도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께서 만들어주시는 좋은 세상에서 가치있고 의미있는 좋은 역할을 하게 해 달라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45절)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 13)라고 했다. 우리말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다. 우리 마음속에 좋은 것을 심어주시는 하느님을 잘 모셔서 주님 사랑을 실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주님의 생각, 주님의 말씀, 주님의 사랑을 담은 사람이 되어 이 사회를 우리 모두가 그리는 하느님 나라로 만들기로 하자.


연중 제8주일

(나해) 마르 2, 18-22: 2000/02/27

예수님께 사람들이 와서 묻는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18절)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늘 서로의 행동을 시빗거리로 만들기 일쑤입니다. 단식이 중요한가? 아니면 사랑이 중요한가? 예수님께서는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마르 3, 20; 6, 31)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어쩌면 단식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굶는 것이거나 자신을 욕구를 죽이고 자기를 극기하는 차원에서의 단식이 아니라 진정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뛰느라고 먹을 시간조차 없어 굶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자기는 먹을 것이 없어 굶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신심행위는 아주 중요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그 종교행위가 활동을 축소시키거나 아예 멈추도록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활동이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기도해야한다고 그 환자를 떠나는 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의 기도는 오늘 죽어 가는 사람을 제때에 그리고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보호하고 수발하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답하십니다.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19절) 예수님께서 부지런히 아니 많은 병자들에게 시달릴 정도의 호소와 요청을 받을 때에는 활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도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활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죽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20절).

예수님께서는 관습과 전통에 얽매여 현실의 호소와 필요에 눈감아버리는 형식적인 신앙, 갇혀버린 사랑을 다시 현실로 그리고 현장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머리속의 계획에서 현실의 실천으로, 마음속의 동정에서 현실의 봉사활동으로 나서도록 촉구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현장으로 일어서서 나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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