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제51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문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3,5)


우리 시대에 희망과 믿음을 전하기

(가해) 마태 28,16-20; 17/05/28

기술의 진보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접근하여 소식을 신속히 공유하고 널리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 소식은 기쁜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고,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마음을 끊임없이 작동하는 맷돌에 비유하였습니다. 알곡을 갈아 낼지 쓸모없는 쭉정이를 갈아 낼지는 맷돌장이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갈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어떤 양식을 줄 것인가는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 담화를 직장이나 개인적 관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이들에게 풍성한 양식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맷돌처럼 날마다 정보를 갈아 내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모든 이가 건설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만남의 문화를 증진하며 확신을 지니고 현실을 바라보도록 도와줍니다.

전쟁, 테러리즘, 추문, 온갖 인간적 실패와 같은 나쁜 소식에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어 비롯된 걱정의 악순환을 끊고 두려움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을 막아 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인간 고통의 비극을 무시하는 오보를 퍼뜨리는 것도 아니고, 사악한 추문에 눈감아 버리는 순진한 낙관주의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우리가 모두 커져가는 불만족과 체념의 감정을 극복하려고 애쓸 것을 제안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때때로 무관심이나 두려움, 또는 악은 무한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기쁜 소식은 팔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인간 고통의 비극과 악행을 쉽게 오락거리로 변화시키는 커뮤니케이션 산업에는 늘 우리의 양심을 무뎌지게 하거나 비관주의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유혹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개방적이고 창의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찾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결코 악에 현혹되지 않고 그 대신 수용자의 편에서 문제 해결에 집중하며 긍정적이고 책임감 있는 접근법을 촉진하고자 애씁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기쁜 소식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를 제공해 줄 것을 모든 이에게 요청합니다.

기쁜 소식

인간의 삶은 단지 사건들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니라, 가장 연관성 있는 자료들을 선정하고 모을 수 있는 해석의 렌즈를 선택하여 전해지기를 기다리는 역사이고 이야기입니다. 현실은 그 자체로 명확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들을 바라보는 데 사용하는 렌즈에 달려 있습니다. 렌즈를 바꾼다면 현실 자체가 다르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올바른 렌즈를 통하여 현실을 읽기 시작할 수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탁월한 기쁜 소식, 곧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으로 시작하는 기쁜 소식만이 올바른 렌즈가 될 수 있습니다. 마르코 성인은 이처럼 예수님에 관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바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그 복음을 시작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르코 복음의 각 장들을 읽으면서 각 제목들이 내용과 부합하고, 무엇보다 그 내용이 바로 예수님 자체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 자체, 곧 이 기쁜 소식은 고통을 없애 주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이 좀 더 큰 그림의 일부, 하느님 아버지와 온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체험되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간의 상황에 연대하여 주시며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당신 자녀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3,5). 이 말씀은 당신 백성의 역사에 깊이 참여하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해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나약함을 감싸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심지어 어둠과 죽음도 빛과 생명을 만나는 지점이 됩니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희망은 삶이 실패의 쓰라림을 마주하는 바로 그 교차로에서 탄생합니다. 이러한 희망은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고(로마 5,5 참조), 그 사랑은 땅에 뿌려진 씨앗에서 새싹이 솟아나듯이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빛에 비추어 보면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새로운 비극도 기쁜 소식을 위한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며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새롭게 일어서려는 결의 찬 얼굴과 손길에 힘을 북돋울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앗에 대한 확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복음적 사고방식을 전하시고, 죽고서야 부활하는 사랑의 법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올바른 렌즈를 주시고자 비유를 이용하십니다. 그분께서는 흔히 하느님 나라를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그 능력을 드러내는 씨앗에 비유하십니다(마르 4,1-34 참조). 하느님 나라의 조용한 권능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이러한 이미지와 은유는 그 권능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청중이 그 권능을 자유롭고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는 자비로운 방법입니다. 또한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역설적 아름다움을 전하는 파스카 신비의 무한한 존엄을 관념이 아닌 이미지로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그 생명 안에서 고난과 십자가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나약함은 다른 어떤 인간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실패는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전주곡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자라나고 깊어집니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마르 4,26-27)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쉽게 보아 넘겨버리지만 조용히 뿌리내리는 한 알의 씨앗처럼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합니다. 성령께서 예리한 시각을 부여하신 사람들은 그 씨앗이 꽃을 피우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도처에 자라나는 잡초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성령의 지평

예수님 자체인 기쁜 소식에 기초한 우리의 희망은 주님 승천의 전례 거행 때에 우리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주님께서 지금은 더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희망의 지평은 오히려 더욱더 넓어집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을 하늘로 들어 올리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이제 자유롭게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히브 10,19-20 참조). 우리는 “성령의 힘을 받아” “땅끝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구원된 인류의 “증인”이자 전달자가 될 수 있습니다(사도 1,7-8).

또한,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부활의 신비에 대한 확신으로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형성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모든 이야기와 각 개인의 얼굴 안에 담겨 있는 기쁜 소식을 알아보고 밝게 비출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날 이루어지는 각양각색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우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신앙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우리 삶과 역사의 매 순간마다 어떻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며, 인내로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희망은 이 거룩한 역사를 엮어내는 실이며, 바느질을 하시는 분은 바로 위로자이신 성령이십니다. 희망은 덕목들 가운데 가장 겸손한 덕입니다. 희망은 삶의 굽이굽이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모든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인 성인들의 생애 안에 수없이 많은 형태로 다시 쓰여진 복음을 새롭게 읽음으로써 희망을 키웁니다. 우리 시대의 극적인 사건들 가운데서도 기쁜 소식에 감도되어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횃불처럼 빛나고 나아갈 길을 밝히며 확신과 희망의 새로운 길을 여는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오늘날에도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를 향한 갈망의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주님 승천 대축일

(가해) 마태 28,16-20; 14/06/01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루카 5,5)한 베드로와 첫 번째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라고 하시면서 실제로 제자들이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루카 5,7)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라고 하셨고,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경에 다른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일일이 명확히 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제자들은 나름대로 ‘아, 저분을 따라가면 장차관은 아니더라도 무엇인가는 한 자리 하겠구나!’ 내지는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베푸시는 등의 기적을 보면서 ‘아 저분을 따라가면 뭔가 고생하며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는 등의 기대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의 뭔가를 주셨을 것이고, 그러기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던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에게 ‘그래 너는 이 다음에 내무부 장관, 너는 법무장관 자리를 배정해 주겠다’는 등의 기대와 희망을 보장해주기는커녕, 거꾸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라고 하시고는, 마치 그들의 염원과 기대를 모르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술 더 떠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라고까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라고 하시면서, 먼저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재촉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바라는 것과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서 주실 것이라고 확언하십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2-3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마태 6,25.32)

제자들은 이후에도 예수님께서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증거로 기적을 베풀어주셔도, 기적의 효과를 누리기만을 바라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따르기를 주저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어린아이 하나 제대로 고쳐주지 못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마태 17,17) 라고 한탄하셨습니다.

빵의 기적을 맛보고 따라온 제자들에게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라고 물리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기는커녕, 단지 더 이상 기적을 베풀어 주시 않으시자,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이렇다 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하고 물으십니다. 물론 개중에는 시몬 베드로처럼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제자도 있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그러나 제자들은 마지막까지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권력과 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중 유다는 그런 현세적인 기대와 탐욕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유다교 지도자들에게 맞서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헛된 기대로 싸움을 붙입니다.

그러나 현세적인 권력과 통치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칼로 치는 베드로를 말리십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야말로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버리십니다.

유다는 자살하고(마태 27,5) 제자들은 유다인들의 체포와 사형이 두려워, 엠마오나 인근의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거나, 무서워 떨며 다락방에 숨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시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그러자 실의에 빠져 있던 제자들이 ‘아, 이제야 말로 한 자리 하겠구나!’ 싶어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실제로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와서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면서도,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17) 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다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내려주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승천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 1,8)

오늘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생을 바쳐 알려주시고자 하셨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억합니다. 우리를 지어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보답하는 의미로, 형제들을 사랑함이 우리의 삶이요, 사명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삶이라는 사실을 되새깁니다.

마침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며, 완성되고, 구원되는 길이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희망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새생명의 길을 살아가도록,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청하며 기다립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다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주고 그를 보살펴 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의사소통이 고통을 달래주는 향유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맛좋은 포도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은 속임수나 특수 효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고 길가에 버려진 이들에게 사랑과 애정으로 이웃이 되는 우리의 힘에서 나와야 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홍보주일 담화문에서



주님 승천 대축일

(다해) 루카 24,46ㄴ-53; 13/05/12

지난 5월 2일 임산부 축복미사에 참여하러 오는 임산부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저 배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

과학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 성적으로 결합하여, 남성의 생식세포와 여성의 생식세포가 여성의 몸속에 수정되어, 새로운 세포가 생성하고 발육하는 과정의 태아와 그 영양 체계가 들어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초음파 사진을 찍어보면, 그 아이의 생태적 육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히 눈으로 드러난 조그만 생명체의 모습을 과학적 기자재를 통해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습니다.

저는 아기를 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가 하느님 사랑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열 달 동안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다가 세상에 내주시는 것이 아기의 탄생으로 보입니다. 어머니는 열 달 동안 자기 뱃속에서 아기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사랑으로 감싸 안고 키우다가 세상에 하느님 사랑을 내놓는 것입니다. 비단 새로운 인간 세포의 출현만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새로운 현존이 세상에 드러나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보입니다. 그 아이를 통해 하느님의 새로운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는 기적 같은 순간입니다.

아마 이런 영적인 접근이 아기를 인격체로 바라보게 하고, 단순한 아기의 출생이 아닌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 선인들도 태교에 대해 그렇게 중시 여겼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 선인들은 그냥 서양처럼 조건 맞아 임신하고, 때 돼서 낳고, 그냥 그렇게 자라나는 외형적인 임신과 발육 및 출산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배고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기의 인격적인 미래를 생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토록 중시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울러 아기를 낳은 부모에게는 열 달 동안 사랑과 자신의 에너지와 온 인격을 다 쏟아 부은 내 아기 내 분신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사진에서 보듯이 귀엽고 사랑스런 아기의 모습과는 또 다른, 뭔가 더 깊고 애절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이어 부모의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 부모의 인격적인 사랑을 합치고 협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기를 낳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겨봅니다.

‘내 마음 속엔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는지?’

‘내 마음 속엔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

오늘 부활하시어 제자들과 함께하시다가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되돌아봅니다.

‘그 동안 어떤 힘이 내 신앙을 유지하고 계발하고 있는지?’

‘주님께서는 내게 현실 세계 안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를 이겨내도록 힘을 주시고 계신지?’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말씀을 이루기까지,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밝혀주시며,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물이 솟아나는 샘으로 적셔주고 계신지?’

‘아니면, 탐욕스런 내 희망과 포부를 보조하고 지원할 힘으로 여기고 기도하고 있는지?’

어머니가 십여 달 동안 아기를 마음속에 담고 있듯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늘 하느님 사랑을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메마르고 목마른 세상에 드러낼 준비를 하면서 주님 사랑을 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승천 축일인 오늘 우리 마음 속에 주님 사랑을 굳건히 간직합시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 은총이 우리 일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합시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에페 1,17-20)

우리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주님 사랑을 고이 간직하고 다듬어, 세상에 내 놓아 주님 나라를 이루어 나갑시다.

주님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 새로나, 용서와 평화를 나누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일상에서 이루어 나가기로 합시다.

늘 마음 속에서만 간직하고 결심과 각오만 하면서 실제로는 실천하지 못했던 우리의 좋은 꿈과 희망을 주님 은총의 힘으로 이루어 내기로 합시다.

주님의 뜻을 따른 우리의 이상과 꿈을 현실로 드러내기에는 아픔과 장애를 겪겠지만, 주님께 의지하여, 주님 은총의 힘으로 이겨내어, 주님 영광을 드러내기로 합시다.

5월 성모 성월에 성모님의 전구에 힘입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힘있게 이루기로 합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6-47)



주님 승천 대축일

(나해) 마르 16,15-20; 12/05/20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산에 묻고 오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부모를 향한 자식의 사랑보다 우위에 있다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별다른 가족이 없는 저에게는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 뵈옵고 인사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늘 건강히 잘 계시는지 궁금했고, 혹시 집에서 전화라도 오면 연로하신 부모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걱정과 죄스런 마음으로 살았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엔 제가 기도할 때마다, 기억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그분들을 뵈올 수 있으므로 어떤 면에서는 송구스러움이 줄어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십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버려두고 죽으실 때도 황당하고 자신들의 모든 꿈과 희망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아 무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이제는 살았구나 싶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서 평소에 말씀하시던 그 나라를 세울 것이고, 자신들은 그 나라에서 한 자리 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가신다니 정말 야속하기도 하고 예수님 없이 자신들끼리만 살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힘겨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선교활동을 위해 사방 팔방으로 퍼져나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 동시현존을 하셔야 하는데 시공 안에 존재해야 하는 육을 택하신 상황에서는 어려운 일이고, 오히려 승천하셔서 영으로 존재하실 때에는 언제 어디서나 제자들이 원할 때마다 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시고 싶으실 때와 장소마다 함께하실 수 있으시기에 승천하시는 것이 더 좋다고 이야기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언제나 제자들을 어린 아이 키우듯이 대신 다 해주실 수도 없고, 제자들 스스로 자신들이 맡은 사도직을 자신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비켜주시는 것도 필요하기에 승천하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실제로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여,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때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해주셨던 표징은 무엇이었는가? 그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9)하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실제로 사도 베드로는 병자들을 고쳐주고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주었고(사도 5,12-16), 필리포스(8,4-8)에게서도 그리고 바오로도 키프로스 지방의 선교활동 중에 그리스 마술사 엘리마스를 악마의 자식으로 여겨 물리쳤으며(13,4-12),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기 시작했으며(2,1-12), 사도 바오로가 죄수로 이송 중에 풍랑으로 몰타 섬에서 지낼 때 뱀에게 물렸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기에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었으며(28,1-10), 많은 병자들을 고쳐줍니다(4,3; 8,7; 9,32; 19,12; 28,9).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자리에서 주 예수님을 믿어 선교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주님께서는 어떠한 표징을 보여주실 것인가?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에페 1,17-19)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표징은 첫째, 주님을 알고 주님에 대해 명확히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에페 1,17 참조). 오늘 성당을 찾아오시고 예비신자로 등록하신 여러분에게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몸소 드러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둘째, 그분은 여러분의 눈을 밝혀 주시어 우리 삶의 희망을 보여주실 것입니다(18절 참조). 여러분이 주님과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길에 대해 알고 싶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귀를 열어주셔서 주님 말씀을 들려주실 것이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해주셔서 그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셋째, 그분께서 이 땅에서 펼치시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우리의 희망으로 삼게 된다면,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아버지 오른 편에서 누리고 계신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19절 참조).

넷째,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의 힘을 느끼게 해주실 것입니다(20절 참조). 여러분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에게 희망을 두게 되면서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분은 강한 힘으로 여러분이 그 말씀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오늘 승천대축일을 맞이하여, 제1독서에서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며, 하늘에서 감이라도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서 펼쳐주시고 우리의 희망으로 삼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하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과 뜻을 선교하고 실천하여 그 영광이 우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오늘 우리 삼성동 성가정 성당을 찾아오시고 예비신자가 되신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여러분이 주님을 잘 알게 되고, 주님께 여러분 인생의 희망을 두고 나아감으로써, 여러분이 세례성사를 받아 우리 가족이 되고,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45차 홍보주일 담화문 요약

“디지털 시대의 진리, 선포, 참된 삶”

(가해) 마태 28,16-20; 11/06/0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45차 홍보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인 인터넷의 등장이라는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산업 혁명이 생산 과정과 노동자의 삶에 불러일으킨 혁신을 통하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듯이,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일고 있는 깊은 변화가 문화적 사회적 대변혁의 흐름을 주도한다는 견해가 더욱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정보 전달은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 정보를 공개하며, 데이터 교환만이 아니라 오히려 공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대화, 교류, 연대, 긍정적 관계의 창출로 보입니다. 반면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소통의 일방성, 자기 내면세계의 일부만을 전달하려는 경향, 자칫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는 자기 허상을 만들어낼 위험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하나의 평행 세계로 도피하거나 가상 세계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위험들만 조심한다면, 오히려 이 가상공간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진정으로 추구한다는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적인 ‘개인 신상’을 조작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기술은 공간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고, 우정을 쌓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 신세계에서 누가 우리 ‘이웃’입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홀해질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가상 세계의 만남이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직접적인 만남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여서도 안 됩니다. 모든 이는 진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이미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희망과 이상을 함께 나눕니다. 디지털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다운 존재 방식은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책임감 있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가집니다.

뉴 미디어를 통한 복음 선포는, 종교 콘텐츠를 도입하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에 부합되는 선택과 선호와 판단을 일관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려는 진리의 가치는 그 ‘인기’나 관심도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왜곡하거나 희석시키지 말고 온전하게 알려야 합니다. 진리는 덧없는 매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여 마음을 일깨우고 양심에 호소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는 관계와 친교와 의미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참된 응답입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확신을 증언함으로써, 웹이 사람들을 비인간화하거나, 감정적으로 조작하려 하거나, 힘 있는 자들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독점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오히려 신자들은 인간에 대한 영원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모든 이를 격려합니다. 그 물음은 초월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참으로 살 가치가 있는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증언합니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정신적 열망이 있기에 우리는 진리와 친교를 갈구하고 온전하고 성실한 소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과 젊은이들에게 힘을 주시어 이 디지털 분야에서 언제나 양심적으로 전문가다운 의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이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전구를 통하여 기도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11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



주님 승천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45차 홍보주일 담화문(전문)

"디지털 시대의 진리, 선포, 참된 삶”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45차 홍보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인 인터넷의 등장이라는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산업 혁명이 생산 과정과 노동자의 삶에 불러일으킨 혁신을 통하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듯이,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일고 있는 깊은 변화가 문화적 사회적 대변혁의 흐름을 주도한다는 견해가 더욱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은 커뮤니케이션 방식만이 아니라 막대한 문화변동기를 겪고 있다고 할 정도로 커뮤니케이션 자체이기도 합니다. 정보나 지식을 전하는 이러한 수단들이 배우고 생각하는 새로운 길을 열면서, 관계를 맺고 친교를 쌓는 데에도 새로운 기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매체들이 제공하는 가능성에 대한 경탄을 자아내는 동시에, 디지털 시대에 커뮤니케이션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성찰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인터넷의 뛰어난 잠재력과 그 폭넓은 활용을 접할 때 특히 분명해집니다. 인간 창의력의 다른 모든 산물처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개인과 인류 전체의 온전한 선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를 현명하게 사용하면,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으로 남아 있는, 의미와 진리와 일치에 대한 바람을 충족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정보 전달은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 정보를 공개한다는 의미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지식은 개인적인 교환 형태로 공유됩니다.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상대적이며, 커뮤니케이션은 데이터 교환만이 아니라 오히려 공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역동성으로 인해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새롭게 인식되어 왔고,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대화, 교류, 연대, 긍정적 관계의 창출로 보입니다. 반면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몇 가지 전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소통의 일방성, 자기 내면세계의 일부만을 전달하려는 경향, 자칫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는 자기 허상을 만들어낼 위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젊은이들이, 열정과 호기심으로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려는 이들 특유의 온갖 고뇌와 도전과 창조력을 지니고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에서 생겨난 디지털 광장에 젊은이들이 더욱 많이 참여하여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를 맺고 자기 인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처신뿐 아니라 진정한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평행 세계로 도피하거나 가상 세계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위험들만 조심한다면, 오히려 이 가상공간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진정으로 추구한다는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가상공간 안에서 나눔, ‘우정’을 추구한다면 진실하고 충실해야 하지만, 공적인 ‘개인 신상’을 조작하려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은 공간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고, 그렇게 하여 우정을 쌓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기회이기도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위험들을 깨닫고 더욱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 신세계에서 누가 우리 ‘이웃’입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홀해질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 몰두하여 우리 관심이 흩어지고 현실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으로 깊고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키워 나갈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는 가상 세계의 만남이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직접적인 만남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모든 이는 진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더욱이, 소셜 네트워크가 지닌 역동성은 한 개인이 소통하는 내용 안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이미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희망과 이상을 함께 나눕니다. 따라서 디지털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다운 존재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책임감 있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가집니다. 뉴 미디어를 통한 복음 선포는 여러 미디어 제품에 종교 콘텐츠를 도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는 또한 자신의 디지털 신상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명확히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온전히 복음에 부합되는 선택과 선호와 판단을 일관되게 증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선포자의 일관된 증언 없이 복음 메시지가 선포될 수 없다는 것은 디지털 세계에서도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새로운 상황 안에서 새로운 표현 형태를 통하여, 자기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하도록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1베드 3,15 참조).

디지털 시대에 복음을 증언하는 활동은 복음 메시지가 웹의 전형적인 어떤 논리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이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전하려는 진리의 가치는 그 ‘인기’나 관심도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왜곡하거나 희석시키지 말고 온전하게 알려야 합니다. 진리는 덧없는 매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소비하거나 피상적으로 이용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 진리는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는 선물입니다. 진리는 웹의 가상공간에서 선포된다고 하여도 언제나 현실 세계 안에서 그 모습을 갖추어야 하고 우리가 날마다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의 실제 모습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인간관계는 언제나 신앙 전수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확신을 가지고 충분한 지식과 책임감을 지닌 창조력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능하게 해 준 관계망에 동참하기를 권유합니다. 이는 단순히 참여 욕구를 충족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이 관계망이 인간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웹은 새롭고도 한층 더 복합적인 지성적 정신적 지평, 곧 새로운 형태의 공동 의식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고 인류와 역사의 구원자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는(에페 1,10 참조) 우리의 신앙을 선포하도록 요청받습니다. 복음 선포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여 마음을 일깨우고 양심에 호소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을 때 보여 주신 방식을 연상시킵니다(루카 24,1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대화를 나누시고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것을 드러내게 하시어 그들이 차츰 신비를 이해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는 관계와 친교와 의미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참된 응답입니다. 이 열망은 소셜 네트워크의 엄청난 인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확신을 증언함으로써, 웹이 사람들을 비인간화하거나, 감정적으로 조작하려 하거나, 힘 있는 자들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독점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오히려 신자들은 인간에 대한 영원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모든 이를 격려합니다. 그 물음은 초월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참으로 살 가치가 있는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증언합니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정신적 열망이 있기에 우리는 진리와 친교를 갈구하고 온전하고 성실한 소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디지털 분야에서 젊은이 여러분들이 활약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기술들 덕분에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 마드리드 세계 청년 대회에서 만날 것을 젊은이 여러분에게 거듭 약속드립니다. 또한 저는 하느님께서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그들이 언제나 양심적으로 전문가다운 의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이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전구를 통하여 기도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11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



주님 승천 대축일

(나해) 마르 16,15-20; 06/05/28

제 작년 9월 처음 새 성전의 견적을 받았을 때 그 높은 금액에 놀라서 우리가 정녕 이 외국 땅에서 성당을 제대로 잘 지을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고 망설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꼭 있어야 하지만, 커다란 빚을 지고 성당을 지으면 신자들에게 경제적인 부담도 부담이겠거니와 성당을 지어 성당 건축비의 빚의 상환과 운영비에만 총력을 기울이면 과연 교회의 선교 사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고민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당을 지은 이유는 우리끼리 모여서 기도하고 지금 이 성당에 나오는 우리만 잘 살자고 성당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오늘 이렇게 이 땅에서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또 우리가 오늘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청하면서 주님께서 머무실 집, 주님께 기도하는 집을 성당으로 짓습니다.

지금 공사가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우리는 우리 성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전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모든 은혜와 내 일생 순간순간에 펼쳐주신 주님의 업적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이 땅 곳곳의 신비롭고 은혜로운 대자연과 모든 배려하심과 보호하심에 진정 찬미를 드리고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천주교회에게 친히 명령하신 교회의 선교사명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는 신자를 많이 늘려서 성당 경제가 풍요롭게 되고 성전 빚을 하루 빨리 다 갚기 위해서 선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많이 늘어서 우리가 세력을 확장하고 우리의 위치와 사회적 물질적 삶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탄할만하고 감사할만한 것인지를 이웃에게 알리고 함께 주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에페 1,17-19)

선교에는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가 있습니다.

직접 선교라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주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널리 전하는 일입니다. 간접 선교란 말로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에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것을 이웃에게 나누고 가난한 이를 돌보며 이른 바 자기 삶으로 자기가 믿는 신앙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선교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교리 지식을 정확히 알아서 전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선교하는 이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해주시고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를 경험적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셨는지를 명확히 깨닫고 주님께서 나에게 언제 어떻게 해 주셨는지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진정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셨고, 내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업적을 깨달았을 때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스스로 자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것을 알고 감사만 드릴 뿐이지 그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그것은 진정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은혜를 받은 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호박꽃이나 할미꽃도 생생하고 싱싱한 꽃이 되고, 사랑받은 만큼 아니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상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들까지도 그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정도로 사랑이 그야말로 불꽃을 피우게 됩니다. 불꽃까지는 아닐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 마음 씀씀이가 지켜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합니다.

그런데 선교에 있어서 우리 사랑의 대상은 비단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면서 싸우게도 되고 섭섭해 하기도 하고 헤어지게도 되고 심지어는 원수가 되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변하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습니다. 혹시 우리가 변해서 떠나버린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비단 당사자뿐만 아니라 부모나 자식 또는 같이 사는 사람들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고 퍼져나간다는 것이 그 사랑의 본성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랑 안에서 직접 선교와 간접 선교가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자기가 받은 사랑을 전하게 되고 자기가 사랑을 받았기에 새로워진 모습이 겉으로, 삶으로,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7-18) 우리의 지금 우리의 세상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쫓아내고 있는 마귀는 무엇이고, 뱀은 무엇이며, 독은 무엇인지도 숙고해 보아야겠지만,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는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언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되새겨보면서 스스로의 믿음을 더하고 이웃에게 감히 그리고 명확히 고백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희가 스스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이웃에게 전하여 그 사람도 자기 인생 속에서 남들과 똑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그에게도 주님께서 어떤 은총을 언제 어떻게 베풀어주셨는지를 깨달아 주님을 믿고 사랑하게 되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이 그야말로 강물처럼 흘러 온 세상이 주님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며 그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본질이기도 한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5-16)



주님 승천 대축일

(가해) 마태 28, 16-20; 05/05/08

얼마 전에 어떤 자매님이 일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답니다. 쓰러지고 정신이 없어지면서 그 자매님은, ‘아 이러다가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이렇게 죽는 거라면, 죽는 것도 별거 아니구나!’라고 느꼈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식 생각이 나더랍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은 누가 돌보나!’ 그런 생각에 어떻게든 살아서 자식을 돌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를 쓰고 일어나려고 애썼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게 된다면 여러분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죽게 된다면, 여러분이 이곳을 홀로 떠나 다른 먼 곳으로 가야 한다면 무엇이 걸립니까?

아니면 정 반대로 지금 여기에 여러분이 떨어져 와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모나 자식 아니면 연인, 강아지, 사업체, 누가,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에 걸립니까?

아예 고아가 아닌 다음에야 가족과 또 여러 사람과 함께 사는 사람은 여러 가지로 여러 명이 마음에 걸릴지 모릅니다.

특별히 5월 8일 ‘어머니 날’을 맞이하는 오늘, 어머님 생각이 절로 나는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을 떠나셨다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함께하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요한 16, 7)

어떻게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오히려 더 섭섭하고 아쉬움만을 안겨주시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 28,19-20)고 하시면서, 왜 제자들과 생전과 같이 함께 일하시지 않으시고 떠나실까? 제자들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면, 제자들이 나가있는 여러 곳에 손오공처럼 동시 현존하시기가 힘들어서 그러신가? 힘들어서 그러시지는 않으실 텐데 왜 일까? 왜 제자들이 그냥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닐 때보다 복음을 선포하러 다닐 때 더 예수님이 필요할 텐데 왜 예수님께서 그냥 제자들만 보내시고 떠나실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파견 나갈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20)고 하셨는데, 과연 어떻게 함께하실 것인가? 그분은 생전에 여러 번 제자들에게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시면, 예수님 대신 제자들에게 내려오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요한 14, 16-17)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요한 14, 26) 그리고 또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요한 15,26) 그렇게 성령께서는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할 때는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기적을 그저 받아먹기나 하는 것처럼 나약하고 보잘 것 없던 제자들이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시고 또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나서 변화된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는데 열성이지도 못하고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떤 때는 우리의 매일에 기쁨이 넘쳐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심히 교리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서도, 아니 오랫동안 신자로서 성당에 꾸준히 나오고 활동도 열심히 한 신자 가운데서도 주님을 생동감 있게 느끼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의구심마저 가진 사람들이 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 모습을 봅니다.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6-17) 제자들 가운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의구심이 일 때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오히려 더욱 더 깊이 그리고 온전히 알고 싶은 우리의 갈망, 우리 눈으로 직접 예수님의 모습을 뵙고 싶고, 우리 귀로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우리 손으로 예수님을 만져보고 싶고 그 안에 안기고 싶은 우리의 갈망은 오히려 예수님께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의구심이 생길 때마다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말고 오히려 끝까지 파고들고 추구하며 의구심을 풀어주시도록 주님께 요청함으로써 우리의 존재 근거이신 주님을 느끼고 그 안에서 평화를 느끼길 바랍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끝까지 의심할 때 우리는 왜 우리가 예수님께 연결되어 있는지 더 명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하면 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우리 마음을 둘 데가 없고 우리 영혼이 머물 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며 방황 속에서 스스로가 파괴되어 나가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께로 떠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제자들의 마음도 같은 혼돈과 상실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굳세어 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기쁘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면 가능하다. 그런데 그 느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우리에게 그러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제자들이 기쁨과 사명감에 넘쳐 세상 안으로 뛰어들도록 변화시켜 주신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오시도록 청합니다.

우리가 무미건조한 듯 하고, 다소 의무적이며, 형식적인 것만 같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주님과의 끈이 튼튼해지고 그 사랑의 결속이 더욱 견고해지기를 바라면서 성령강림대축일을 기다리며 청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 승천 대축일

(다해) 루가 24, 46-53; 2004/05/23

3년전 오늘 제가 이 본당에 손님으로 동창신부를 찾아왔다.

그 때 그날이 사회적으로는 어머니날이었고, 교회력으로는 승천 대축일이었다.

그 때 저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가끔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그러나 저는 신부 돼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동생이 모시게 되어 늘 가슴속에 부담이 되었는데 정작 돌아가시고 나니까, 이제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내가 생각할 때마다 기억할 때마다 기억할 수 있으니, 가슴에 묻는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이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승천 축일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 머물러 계시면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그곳에 함께하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뵈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본래의 모습대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우리가 청할 때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승천하시면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 7)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나마 '이젠 살았구나.' '이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겠구나.'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또 다시 가신다고 하시니 그리고 이젠 영영 다시 안 돌아오실 것처럼 이야기하시니 정말 슬프고 전보다 절망스럽다. 한 번 가셨으면 아예 돌아오시지 말지 살짝 오셔서는 이제 완전히 가버리신다니 너무나 허망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요한 14, 18)하시며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요한 14, 16-17) 그리고 우리가 성령께서 오시면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 17) 왜냐하면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께서 보여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에게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 2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언제나 주님께 충실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약하고 부족하기까지 한 우리에게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 8, 26-27)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런 희망을 안겨준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가 8, 28)

그리고 또 오늘 에페소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셔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페 1, 22-23)라고 말씀하신다.

승천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보이지 않고 쉽게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의 신비들을 다가오시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도록 청하며,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것'(사도 1, 11)이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산 증인'(루가 24, 18)으로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을 따라 세상에 주님에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하겠다.



주님 승천 대축일

제36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 - 「지상의 평화」에 비추어 본 진정한 평화에 이바지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

2003/06/01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냉전의 암흑기에, 교황 요한 23세 복자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는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횃불로 떠올랐습니다. 교황께서는 진정한 평화에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하는 것"(「지상의 평화」, 1항)이라고 선언하시면서, 진리, 정의, 사랑, 자유를 평화로운 사회의 네 기둥으로 꼽으셨습니다(「지상의 평화」, 37항 참조).

현대 사회의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의 등장은 회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 과학 기술이 이룩한 "국가 간의 상호 이해 증진과 보급의 수단들"을 "공평하고 공명 정대하게" 사용할 것을 촉구하셨을 때 특히 염두에 두신 것은 매체였습니다. 교황께서는 "진리와 정의의 원칙을 무시하고 다른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정보의 유포"(「지상의 평화」, 90항)를 비난하셨습니다.

2. 「지상의 평화」4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사람들을 적대 진영으로 갈라놓았던 분열은 대부분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고, 세계 여러 곳에서는 아직도 정의와 평화, 사회 안정을 필요로 합니다. 중동과 다른 여러 지역의 테러, 분쟁, 협박과 대응 협박, 불의, 착취, 출생 전후의 인간 생명의 존엄과 신성함에 대한 공격 등은 우리 시대를 당혹케 하는 현실입니다.

한편,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좋게든 나쁘게든 정치와 사회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매체의 힘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따라서 이번 제37차 홍보주일 주제로 정해진 '「지상의 평화」에 비추어 본, 진정한 평화에 이바지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시기 적절한 것입니다. 세계와 매체는 교황 요한 23세 복자의 메시지에서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3. 매체와 진리.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적인 도덕적 요구는 진리를 존중하고 진리에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추구하고 말할 자유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는 사실과 정보에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특히 인간의 본성과 존엄, 사회와 공동선,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와 관련해서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중 매체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습니다. 대중 매체는 생각을 나누고 사람들이 상호 이해와 연대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현대의 광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윤리 질서와 공동선의 공통된 인식에 따라 사상을 표현하고 전파하는 진리 탐구의 자유"(「지상의 평화」, 12항)에 대한 권리를 사회 평화의 필수 조건으로 옹호하셨습니다.

사실, 매체는 흔히 진리에 용기 있게 봉사하지만, 때로는 사사로운 이해 관계, 국가적·민족적·인종적·종교적 편견, 물욕과 여러 잘못된 사상들을 퍼뜨리는 선전과 정보 왜곡의 앞잡이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누구보다도 매체 종사자들 스스로, 또 교회와 다른 관련 단체들도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도록 매체에 가하는 압력에 저항하여야 합니다.

4. 매체와 정의. 교황 요한 23세 복자께서 「지상의 평화」에서 보편적인 인간 선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말씀하셨듯이, 모든 개인과 민족은 "보편적 공동선, 곧 전 인류의 공동선"(132항)에 참여할 권리가 있습니다.

매체의 세계적 영향력은 이 점에서 특별한 책임이 있습니다. 공공이든 민간이든 매체가 흔히 특정 이익 집단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체가 삶에 미치는 영향의 본질 자체가 요구하는 것은, 예를 들면 계층 갈등, 지나친 민족주의, 인종 우월주의, 인종 청소 등의 이름으로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반대하는 데에 매체가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반대하는 것은 진리와 정의를 거스르는 중대한 잘못이며, 종교적 신념에 대한 차별입니다. 종교적 신념은 인간 존엄과 자유의 가장 깊은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체는 사건을 정확하게 보도하고, 쟁점을 올바로 설명하며, 다양한 관점들을 공정하게 제시함으로써, 사회 모든 차원의 인간 관계에서 정의와 연대를 증진할 엄중한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불평과 분열을 그럴듯한 말로 덮어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원인을 밝혀내어 이해시키고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5. 매체와 자유. 자유는 참된 평화의 전제 조건이며, 평화의 가장 귀중한 열매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매체는 진리에 이바지함으로써 자유에 이바지합니다. 매체가 거짓을 유포하거나 사건들에 대하여 불건전한 정서적 반응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진실에서 벗어날 때에 그것은 자유에 장애가 됩니다. 사람들이 진실하고 충분한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을 때에만 공동선을 추구하고 책임 있는 공적 권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매체가 자유에 이바지하려면 매체 스스로 자유로워야 하며, 그러한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매체는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만큼, 순전히 상업적인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사회의 참된 요구와 이익에 봉사하여야 합니다. 공동선을 위한 매체 관련 공공 법규가 많이 있지만 정부의 규제는 충분치 못합니다. 특히 취재 기자와 해설자들은 자신의 도덕적 양심의 요구를 따르고, 부유층과 정치 권력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진실을 '날조'하라는 압력에 저항할 중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사회의 약자들에게 개인적 사회적 발전에 필요한 정보 이용의 길을 열어주고 매체의 내용을 결정하고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와 정책을 세우는 데에 그들이 실질적이고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6. 매체와 사랑.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야고 1,20). 냉전이 한창일 때에, 교황 요한 23세 복자께서는 평화의 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단순하지만 심오한 생각을 밝히셨습니다. "전쟁 무기의 균형으로 평화가 이룩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신뢰에 의해서 참된 평화가 확립된다는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지상의 평화」, 113항).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현대 세계의 핵심 주역이며, 신뢰를 쌓는 데에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매체는 어떤 사건에 대하여 단 며칠만에 자기 목적에 맞게 긍정적 또는 부정적 여론을 조성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엄청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진리와 선에 대한 드높은 투신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체 종사자들은 불신의 벽을 허물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고려할 줄 알며, 민족과 국가들을 상호 이해와 존중, 또 이를 넘어 화해와 자비로 불러모으고자 끊임없이 노력함으로써 세계 모든 곳에서 평화에 이바지할 특별한 의무가 있습니다.

"증오와 복수심이 만연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고통받고 죽어 가는 곳에서,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크라코프-라기에브니키의 하느님의 자비 성당에서 한 강론, 2002.8.17., 5항).

이 모든 것은 힘든 과제이지만, 매체 종사자들에게 결코 지나친 요구는 아닙니다. 그들은 사명감과 직업 의식을 통하여 진리와 정의, 자유와 사랑의 주역이 되고, 자신들이 하는 중요한 일을 통하여 "자유를 갈망하고 사랑으로 활성화되고 완성되며 정의의 길을 가면서 진리 위에 기초한"(「지상의 평화」, 167항) 사회 질서에 이바지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번 홍보주일에 매체 종사자들이 그들의 소명인 보편적 공동선에 이바지할 과제에 전적으로 부응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 드립니다. 그들의 개인적 성취만이 아니라 세계 평화와 행복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강복하시고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환경 보존은 지구 평화를 위한 초석

- 2003년 환경의 날 메시지-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연이 주는 혜택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산에서 내뿜는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 온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는 태양, 인간이 배출하는 모든 오염 물질을 받아들이는 풍요로운 바다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참으로 아름답던 하느님의 창조 세계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처참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이를 걱정하는 지구촌 인류의 목소리가 세계 전역으로 울려 퍼졌고, 그런 연유로 1972년 6월 5일 UN 차원에서 처음으로 수십 개 나라의 정상들이 스웨덴 스톡홀름에 모여서 “UN 인간 환경회의”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 국제환경회의에 특사를 보내시어 “인간이 자연의 생명력과 재생 능력을 조절하는 자연의 법칙을 존중해 나가야 참되고 지속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국제 사회의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노력이 미흡하다고 여기시고, 다시 1977년 6월 5일 환경의 날을 맞아 “인류의 안녕을 위하여”란 담화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환경 과제에 응답하려면 단순히 좀더 노력하는 정도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일은 의식의 전환이, 실천에 있어서 내적 외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소명은 우리들이 생활양식을 좀더 단순하고 검소하게 바꾸어 나가고, 우리 사회의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자원을 소중히 보존하는 사회로 만들어 나가도록 합니다. 이것은 또한 마침내 우리 모두가 전세계적인 연대의식을 가지고 모든 사람과 모든 나라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받아들여 오늘날 현존하는 세대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세대들도 생태적으로 건전한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나갈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이 메시지의 뜻을 제대로 받들고 있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이제 환경의 문제는 교회 밖의 문제가 아닌 교회 안의 문제임을 자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 환경 문제 해결에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는 내분비계 교란 물질(환경 호르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환경 호르몬으로 알려진 내분비계 장애 물질을 마구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것이 지속되면 인간의 생물학적 생식 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려서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미래 세대 인류의 출현을 우리 스스로 막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비닐류와 플라스틱 같은 화학 제품을 절대로 불에 태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온 소각은 환경 호르몬의 핵심 물질이자 발암 성분을 지닌 다이옥신을 다량으로 방출하게 되기 때문에 절대로 금해야 할 사안입니다.

둘째로는 에너지 절약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심히 우려하신 대로 석유 주도권 확보를 위한 이라크 전쟁 같은 행태는 지구촌 평화를 깨뜨리는 일일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 지구촌 평화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재생 가능한 에너지 사용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 에너지, 풍력 에너지, 조력 에너지가 그것입니다.

셋째로는 물을 소중히 여기자는 것입니다.

올해는 UN이 정한 ‘물의 해’입니다. 과거 한반도는 삼천리 금수강산 어디에서나 옥수(玉水)가 흘렀고 그 양도 풍부했습니다. 산유국(産油國)은 아니더라도 산수국(産水國)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물 부족 국가에다가 마실 물의 가격은 석유 값보다 비싸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우선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가정의 차원에서는 음식물 남기지 않기, 세제 줄이기, 샴푸 덜 쓰기, 저공해 세재 사용하기를 시행하고 그리고 자칫 환경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대형 댐 건설에 앞서서 물을 다량으로 저장하는 녹색 댐 역할을 하는 나무 심기에도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 31)는 말씀이 오늘에도 계속되고, 또한 하느님께서 주신 자연의 혜택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물론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지도록 새로운 사명 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구촌의 모든 생명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연 환경을 보전하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또 하나의 복음화 사업입니다.

2003년 6월 5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최 영 수 주교



주님 승천 대축일

제36차 홍보 주일 교황 담화 - 인터넷, 복음 선포의 새로운 장

2001/05/12

형제 자매 여러분,

1. 교회는 오순절에 사도들이 성령에 힘입어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 가지 언어로 선포하면서(사도 2,5-11 참조) 시작된 활동을 어느 시대에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화 사명은 그 후 수세기에 걸쳐 지구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으며, 그리스도교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언제나 충실하여(마태 28,19-20 참조) 여러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세계의 다양한 언어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화 역사는 단순히 지리적 확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교회는 수많은 문화적 문턱을 넘어야 했으며, 그 때마다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새로운 활력과 창의력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위대한 발견의 시대, 르네상스, 인쇄술의 발명, 산업 혁명, 현대 세계의 태동 …… 이러한 것들 역시 새로운 형태의 복음화를 요구한 시발점들이었습니다. 정보 통신 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지금, 교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또 한 번 결정적인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2002년 홍보 주일에 '인터넷, 복음 선포의 새로운 장'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2. 인터넷은 분명히 새로운 '장'(forum)입니다. 고대 로마의 '포룸'은 정치와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종교적 의례가 수행되며, 대부분의 사회 생활이 이루어지고, 인간 본성의 가장 아름답고 추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광장이었습니다. 이곳은 복잡하고 분주한 도시 공간이었으며, 주변 문화를 반영하는 한편 자기 나름의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이버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이버 공간은 말하자면 이 새 천년기의 여명에 새롭게 열린 영역입니다. 다른 시대의 새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사이버 공간 역시 위험과 가능성이 교차하며, 다른 커다란 변화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모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로운 세계는 교회에게 인터넷의 잠재력을 복음 메시지 선포에 이용하는 커다란 모험에 나서도록 권유합니다. 이러한 도전은 새 천년기를 시작하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Duc in altum!)"(루가 5,4 참조) 하신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3. 교회는 이 새 매체에 현실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다른 커뮤니케이션 매체들과 마찬가지로 인터넷도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인터넷의 장단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면, 인터넷은 복음화를 위하여 훌륭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터넷은 정보를 제공하고 관심을 유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처음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줍니다.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 것처럼 사이버 공간의 세계에 점점 더 의존하는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인터넷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사이버 공간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실제 세계로 옮겨올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매우 실질적인 방법들을 구상하여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 인터넷은 또한 복음화에 필요한 후속 방안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생활을 지원해 줄 수 없는 문화에서는 계속적인 교육과 교리교육이 필요한데, 이 분야에서 인터넷은 탁월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인터넷 상에는 이미 교회와 교회의 역사, 전통, 교리, 세계 모든 곳의 모든 분야의 교회 활동에 관한 무수한 정보와 문서, 교육 자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살아 있는 전례 생활과 성사 생활만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심오한 하느님 체험을 인터넷이 대신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도록 준비시켜 주고 이제 막 신앙 여정을 시작한 새 신자들을 돕는 데에 인터넷이 독특한 보완과 지원 역할을 해 줄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4. 그러나 복음화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할 때에 야기되는 몇 가지 불가피하고도 명백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실 인터넷의 진수는 거의 무한한 정보의 홍수를 제공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대부분 곧 사라져 버립니다. 하루살이 문화에서는 가치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믿는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터넷은 광범위한 지식을 제공하지만 가치를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가치를 경시하게 되면 우리의 인간성 자체가 손상되며, 인간 존엄의 탁월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인터넷은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잠재력이 크지만, 일부 저급하고 해로운 방식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음이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공적 권력 기관들은 이러한 뛰어난 도구가 공동선에 이바지하고 해악의 근원이 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인의 심리적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규정합니다. 눈에 보이고 유용하며 즉시 이용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쏟고, 더욱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게 하는 자극이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삶과 삶의 신비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찰하며 자기 자신과 주변 세상을 점점 더 성숙하게 다스릴 수 있도록 하는 시간과 내면의 평화를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분별력과 지혜는 세상을 관조하는 눈을 통하여 얻는 열매로서, 아무리 흥미로운 것이라 해도 단순한 사실의 축적만으로 얻을 수는 없습니다. 분별력과 지혜는 사물들의 상호 관계와 또 전체적인 실재와 갖는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더욱 깊이 꿰뚫어 보는 통찰력의 결과입니다. 또한 사실상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거의 아무 것도 지속되는 것이 없는 공간인 인터넷은 상대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조장하며 때로는 개인의 책임과 약속에서 도피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보가 아닌 통찰력에서 오는 지혜, 곧 옳고 그른 것의 차이를 분별하고, 그러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가치의 척도를 유지해 주는 그러한 지혜를 어떻게 계발할 수 있겠습니까?

5.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하여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접촉을 늘여 간다는 사실은 복음 선포를 위해서도 훌륭한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자 매체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참된 복음화에 필요한 직접적인 인간 관계를 결코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복음화는 언제나 복음 선포를 위하여 파견되는 사람의 직접적인 증언에 달려 있습니다(로마 10,14-15 참조). 교회가 인터넷을 통한 접촉을 그리스도 선포에 필요한 더욱 깊은 교류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최초의 정보 접촉과 정보 교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발전하는 세계에 전자 혁명이 매우 긍정적인 진보를 약속해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보와 통신의 격차가 벌어짐에 따라 지금의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는 정보와 통신 혁명이 교회의 복음화 사명과 밀접히 관련된 인간 발전과 연대를 세계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이렇게 불안정한 시대에 이러한 질문을 던져봅시다. 처음에는 군사 작전의 맥락에서 고안된 이 놀라운 도구를 오늘날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평화를 꽃피우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대화와 참여와 연대와 화해의 문화에 인터넷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교회는 그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교회는 평화의 임금님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하고 이 새로운 광장에 과감히 들어섭니다.

6. 인터넷 덕분에 지구상의 수많은 컴퓨터 화면으로 엄청나게 많은 영상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무수한 영상과 음향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얼굴이 보이고 그분의 목소리가 들릴 때에만 세상이 우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화의 목표입니다. 또한 이 목표는 인터넷을 참으로 인간적인 공간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공간이 없으면 인간을 위한 공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홍보 주일에 저는 모든 교회에 이 새로운 문턱을 용감하게 넘어 인터넷 깊숙이 그물을 치도록 권고합니다. 그리하여,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복음과 문화 간의 원대한 약속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2고린 4,6)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이에게 주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02년 1월 24일,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님 승천 대축일

청소년 주일 담화문 - 청소년은 주님 사랑과 은총의 대상

(2001/05/27)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청소년 주일인 오늘, 우리는 청소년 세대를 바라보라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엔(N: Net)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의 청소년은 밝고 발랄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데있어 솔직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할 줄 알며, 미래에 대해 열려 있고, 의미 있는 곳에 자신을 아낌없이 투신할 줄 아는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이 겪고 있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인터넷 중독, 사회성 결여, 개인주의, 과도기적인 학교제도, 가난한 청소년의 소외감,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등 청소년을 둘러싼 생활 환경이 청소년의 건강한 삶을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소년의 현실에 대해서 가정과 교회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학교와 사회가 주지 못하는 것, 바로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채워 주는 것이야말로 가정과 교회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즉 입시 위주의 교육환경 속에서 시달리는 자신감 없는 많은 청소년에게, 다양한 미래의 진로 속에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는 청소년에게 편안한 쉼터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는 안내자가 되어 주여야 합니다. 또한 오늘의 청소년에게 필요한 공동체 체험의 기회, 서로를 수용하는 개방성, 정서적인 능력 그리고 영성적 능력 등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시대의 요청을 생각할 때, 교회 공동체는 참으로 청소년을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들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된 공동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가르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청소년들을 안내하려 하는 그 이상적인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께 먼저 당부드립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았으므로 자녀를 하느님의 뜻대로 올바로 양육할 첫째 스승으로서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를 주일학교에 보내는 것은 신자 부모의 의무입니다. 부모는 가정 안에서 자녀들이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성서를 읽으며 주님 맛들이기를 할 수 있게 독려해 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교구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 청소년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이미 1999년 9월 청소년 전문 법인 '재단법인 서울 가톨릭 청소년회'를 설립한 바 있습니다. 이는 청소년을 향한 사회 복음화의 하나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기 위한 대 사회적인 청소년 활동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2000년 11월에는 각 본당 학생회의 지구 및 교구 연합체인 '서울대교구 가톨릭 청소년 연합회(CYA)'를 설립되었습니다. CYA는 청소년이 청소년을 선교하고,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청소년 조직입니다. "청소년 스스로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한 청소년을 구원하는 가장 효과적인 일"이라는 조셉 까르딘의 가르침에 따라 사목자와 어른들은 CYA를 지지하고 지도해 주기를 당부합니다.

청소년 여러분께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젊음은 보물입니다. 젊음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패기, 그리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젊음을 잘 간직하십시오. 어머니와 같은 교회는 여러분을 신뢰하고, 여러분이 선의를 가지고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함께 기뻐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놀이터이고 하느님을 배우는 벽돌 없는 학교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놀며, 하느님을 익히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하느님을 심는 일꾼이 되십시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날과 같이 미래가 불투명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오히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더 가가이 계심을 느기는 좋은 체험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현재가 청소년을 위한 은총의 시간임을 깨닫고 청소년의 삶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리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겠습니다.

모든 청소년과 부모님들, 그리고 청소년 사목을 위해 헌신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드립니다. 아멘.

2001년 5월27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정 진 석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16차 청소년 주일 담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1. 해마다 여러분과 만나는 이 날을 큰 기쁨과 애정으로 맞이하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제 눈과 마음은 로마의 토르 베르가타에 있는 '성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15차 세계청년대회 전야가 시작되던 지난 해 8월 19일 저녁에, 저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내려다보시는 가운데 5대륙에서 온 다섯 명의 청소년과 손을 맞잡고 그 성문을 통과하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청소년 여러분과 함께 제삼천년기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교회와 세계 안에서 바로 여러분을 통하여 지속되는 젊음을 주신 하느님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토르 베르가타 강론(2000.8.20.) 참조>.

저는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히브 13,8)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보여 주시면서 지난 20년 동안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저는 제가 사도로서 세계 곳곳을 순례하는 동안 청소년들이 저와 함께 해 주었고 저를 후원해 준 것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제15차 세계청년대회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교회의 신앙을 기념하고 선포하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임무를 계획하고, 구원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습니까? 청소년의 대희년이 맺은 참된 열매는 수치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과 정의의 활동 안에서만, 그리고 흔히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매우 귀중한, 성실한 일상 안에서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특히 그 뜻깊은 행사에 참석했던 청소년들에게 세상에 지속적으로 복음을 증언할 임무를 맡겼습니다.

2.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가득 안고 각자의 가정과 일상 생활로 돌아갔던 여러분은, 이제 각자 자기 교구의 사목자들과 함께 제16차 청소년 주일을 거행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주일을 맞아 저는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셨던 조건들을 성찰해 보자고 권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루가 9,23)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나 권력의 메시아가 아니십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로마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도 않으셨고,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번영을 약속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참된 종으로서 연대, 봉사, 죽음의 굴욕을 통하여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틀에도 맞지 않았고, 아무 환영도 받지 못하셨으며, 성공과 힘의 논리, 곧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과 활동을 확인하는 데 흔히 쓰는 세속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메시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아버지의 뜻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신을 믿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 사명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데 필요한 조건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증명하는 것은 희생입니다<교황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Salvifici doloris), 17-18항 참조>.

3.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 이 말씀은 망설임이나 주저함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선택을 뜻합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당황했을 만큼 어려운 요구였으며, 이 때문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주저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철저한 선택 덕분에 교회의 길을 튼튼하고 단단하게 다졌던 거룩한 삶과 순교의 훌륭한 모범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말씀은 걸림돌이 되고 어리석게(1고린 1,22-25 참조)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위하여 마련하신 길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제자들도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길은 두 갈래가 아니라 오직 하나, 곧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뿐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다른 길을 새로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앞장서 걸으시며 당신께서 하신 대로 따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그러므로 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는 빈손으로 너희에게 왔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재물을 다 버리라고 말한다. 나는 내 백성 대다수의 반대와 거부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어떠한 반대나 거부라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기 있게 그분과 같은 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인 상황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길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가능한 한,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의지, 그리고 아버지께서 개개인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을 끝까지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는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4. "자기를 버려야 한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사소하고 하찮은 계획들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꼭 필요한 회개의 길이며, 이 길을 걸었던 바오로 성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을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서만 주실 수 있는 새롭고 충만한 삶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중심으로만 살고,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뿌리깊은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사람은 자신에게 열중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을 정복과 소유가 아닌 거저 받은 은혜라고 봅니다. 오로지 자기를 내어 줌으로써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이며 하느님과 또 이웃과 친교를 이루는 자유로운 삶입니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24항 참조>.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가치도 나름대로 정당한 자리와 중요성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 재물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은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많은 재물을 가졌지만 죽음이 닥치면 허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루가 12,13-21 참조). 그러므로 존재와 소유, 충만한 삶과 공허한 삶, 진리와 거짓 사이에 선택이 놓여 있게 됩니다.

5.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가 겉치레로 전락할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도 그저 말에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십자가는 엄청난 굴욕과 거부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주로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어 내라는 뜻도 아니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한 고통의 승화를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 그 자체로서 추구하는 고통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온전한 자기 증여와 사랑의 징표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가장 위대한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주시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십자가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면서 "나를 너희의 모범으로 삼아라."고 거듭 당부하실 뿐만 아니라, "내 삶과 내 선택을 함께 나누고, 나와 같이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너희의 삶을 바쳐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앞에 '삶의 길'을 열어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길은 '죽음의 길'로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과 멀어지게 하며, 분열을 불러오고, 내부로부터 사회를 허무는 죄가 바로 이 죽음의 길입니다.

'삶의 길'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지속시키고 새롭게 하며, 신앙과 회개의 길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길은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을 믿고, 그분께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자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도록 이끌어주는 길입니다. 또한 쉽게 분열되고 혼란에 빠지며 갈등을 빚는 사회에 구원을 가져다 주는 길이며, 때로는 일상의 극적인 상황 안에서도 끝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현존으로 채워 주기 때문에 실패나 곤경, 소외,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이며, 평화, 자제, 마음의 기쁨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6.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삶과 참 행복의 길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고 믿어 왔으며 또 그렇게 선포해 왔습니다.

기분을 맞춰 주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거품 문화가 널리 퍼져 있으며, 이런 문화는 행복해지려면 십자가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 줍니다. 눈앞의 성공, 빠른 출세, 책임감이 결여된 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흔히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채 자기 주장에만 치중하는 생활 등이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잘 지켜 보십시오. 이것은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라앉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 9,24-25) 힘든 것처럼 들리는 말씀이지만 마음에 평화를 주는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참된 삶을 사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로마의 청소년들에게 하신 담화(1998.4.2.) 참조>.

그러므로,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젊음으로, 이제 막 시작된 제삼천년기에 젊음의 특징인 희망과 열정을 불러일으키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분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하고 이 약속을 매일 성실하게 이행한다면,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새 시대를 맞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가장 뛰어난 제자이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모님의 보호에 맡기셨던 십자가 아래 충실히 서 계셨습니다. 제가 사도로서 애정을 듬뿍 담아 보내 드리는 축복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2월 1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제7회 생명의 날 담화문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신명 32,39)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므로 하느님께서 이 생명의 유일한 주인이심을 믿는 것이 우리 모든 신자의 신앙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시는"(1사무 2,6) 분이시기 때문에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다"(신명 32,39)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최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인간 생명에 관한 몇몇 논의들은 인간 생명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기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낙태

우리 나라의 낙태 현실은 그야말로 비참합니다. 실정법이 낙태를 금지하고 있음에도 낙태 때문에 처벌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이러한 현상은 이 사회에 만연된 죽음의 문화를 대표하는 모습의 하나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논리가 인간의 생명보다 앞설 수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또한 사회 현실이 이미 낙태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하기 때문에 실정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명권은 인간이 가진 모든 권리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권리이며, 생명권을 무시하면서 다른 권리를 논의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생명이 극히 위태한 경우의 간접 낙태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낙태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약하고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보여왔으며, 이는 자신에 대하여 최소한의 방어 능력도 가지지 못한 태아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관련하여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공 출산

가톨릭 교회는 동물의 인공 수정 기술이 인간의 생식에 적용됨으로써 마치 그것이 생명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체외수정 방식의 인공 출산 기술들이 실제로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의사의 손이 부부를 대신하여 수정란을 만들고, 그 수정란을 자궁에 착상시키는 일 등의 인공 출산 과정들은 인격의 고유성에서 비롯되는 인간 생식의 존엄성과 고유성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될 인간 배아의 손실은 곧바로 인간 생명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체외수정의 환경과 결과를 보더라도 인공 출산은 결코 윤리적으로 용인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와 같은 문화 환경에서 불임 부부들이 겪는 고통이 충분히 인공 출산의 동기를 부여한다고도 하지만, 자녀를 갖고자 하는 열망이 아이를 가질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권리의 주체로서 자신의 인격성이 온전히 존중된 상태에서만 수정될 권리를 지니기 때문입니다([의료인 헌장] 25항 참조).

대리모 출산

인공 출산의 한 방법인 대리모 출산도 체외수정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동일하게 혼인의 일치성, 인간 출산의 존엄성, 여성의 존엄성에 위배되므로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어느 여성의 자궁에 그와는 유전적으로 다른 배아를 이식시키거나, 아기가 태어나면 고객에게 인도한다는 조건으로 임신하는 행위는 임신과 모성을 분리시키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부모가 임신하고 출산하고 또 교육하여야 할 아이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인하는 일이며, 나아가 출산을 인큐베이터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의료인 헌장] 29항 참조). 이렇듯 대리모 출산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결국 이는 가정과 사회 질서의 혼란, 가족 관계의 분열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안락사

얼마 전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후 우리 나라에서도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매우 활발해졌습니다. 인간의 생명권은 언제나 존중되어야 하고, 비록 불치병의 말기 환자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극심한 고통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삶이 의미가 없고 따라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어느 누구도 무고한 인간 존재, 갓 잉태된 태아든 좀 자란 태아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천명합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든 아니면 자기가 돌보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든,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살인 행위를 요청할 수 없고, 동의하여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권위로라도 그러한 행위를 합법적으로 권고하거나 용인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며 생명을 거스르는 범죄요 인간성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입니다([안락사에 관한 선언] 참조).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임신된 순간부터 죽음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어떠한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표현하거나 보호할 능력이 없는 태아든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불치병 환자든 예외 없이 생명은 소중하고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질적으로 구분하려고 하는 어떠한 시도도 단호히 배척합니다.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기시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5).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 모두 생명을 사랑하여 생명의 주님께서 마련하시는 생명의 잔치에 참여합시다.

2001년 5월 27일 생명의 날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제35차 홍보 주일 담화

"지붕 위에서 외쳐라."

전지구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복음

(2001년 5월 27일)

1. 올해 2001년 홍보주일을 위해 선택된 주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분은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마태 10,27).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들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진리를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합니다.

현대 세계에서 거의 모든 지붕은 언제나 세계 구석구석까지 소식을 주고받는 송신기와 안테나의 숲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 수많은 메시지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날 지붕 위에서 신앙을 선포하는 것은 역동적인 커뮤니케이션 세계를 통하여 그 세계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2. 오늘날과 같은 전지구적인 변혁의 시기에는 물론, 사람들은 어느 문화, 어느 시대에서든 삶의 의미에 대하여 언제나 근본적으로 같은 질문을 해 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악은 왜 존재하는가? 이 삶이 끝나면 무엇이 있는가?([신앙과 이성], 1항 참조).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교회는 인간 마음 속의 가장 깊은 의문들에 궁극적으로 만족할 만한 한 가지 대답을 해 왔습니다. 그 대답은,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시는"(사목 헌장, 22항)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인간이 열망하는 구원의 말씀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찾는 값진 진주를 우리에게 줍니다(마태 13,45-46 참조).

따라서, 교회는 급성장하는 커뮤니케이션 세계에 더욱 깊이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지구적 통신망은 날마다 점점 확대되고, 더욱 복잡해지고 있으며, 매체는 문화와 문화 전달에 점점 더 뚜렷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매체가 사건을 보도했다면, 오늘날은 매체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사건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현실과 매체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고, 이러한 현상은 양면성이 짙습니다. 한편으로는 진실과 허상의 구분이 모호해질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더욱 폭넓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수 있습니다. 교회의 임무는 후자의 경우가 실현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3. 매체의 세계는 때때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도덕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매체 문화가 대체로 포스트모더니즘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유일한 절대 진리란 절대 진리가 없다는 것이며, 절대 진리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무의미할 것이라는 의식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각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뉴스나 오락거리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진리의 문제는 옆으로 제쳐두고 싶은 유혹에 거의 저항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매체 세계는 때때로 사도 시대의 이교 세계보다 복음화 환경에 더 우호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초기 증인들이 반대에 부딪쳤을 때 물러서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오늘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16)고 한 성 바오로의 외침이 아직도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체 세계가 이따금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불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온 인류 가족에게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흔히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종교 행사들을 방영하는 위성 방송이나 모든 장벽과 국경을 넘어 종교에 관한 정보와 가르침을 전하는 인터넷의 실질적 능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광범한 청중은 우리보다 앞서 복음을 전파했던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교회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매체 활용입니다. 전세계의 지붕들에서 복음이 울려 퍼지도록 가톨릭 신자들은 주저 없이 그리스도께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문을 활짝 열어 드려야 합니다.

4. 이 새 천년기를 시작하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만민 선교를 명심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 60억 인구의 약 3분의 2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의 뿌리를 가진 나라들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세례받은 사람들은 모두 신앙심을 잃어버렸거나 자신들을 더 이상 교회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주님과 그분의 복음에서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현대의 복음 선교], 33항 참조). 물론, 이러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매체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전에 맞서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커뮤니케이션 세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모든 종류의 매체가 직접적인 복음화뿐만 아니라 인간 존엄을 뒷받침하고 강화하는 진리와 가치들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매체 안에 자리잡는 것은 사실 성령께서 전세계 교회에 요청하시는 새로운 복음화의 요구인 복음 토착화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온 교회가 성령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이 때, 커뮤니케이션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언자적 임무, 곧 소명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거짓 신들과 우상, 곧 물질주의, 쾌락주의, 소비주의, 편협한 민족주의 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윤리], 31항). 특히 그들에게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통하여 계시된 인간 생명과 인간 운명에 관한 빛나는 진리를 선포할 의무와 특권이 있습니다. 사회 커뮤니케이션 세계에 종사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지붕 위에서 더 더욱 대담하고 기쁘게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여 모든 사람이 사랑의 이야기를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바로 하느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히브 13,8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전달하시는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입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기념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34차 홍보 주일 담화

(2000/06/0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34차 세계 홍보 주일의 주제는 '새 천년 새벽에 매체를 통한 그리스도 선포'입니다. 이 주제는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직시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빛과 용기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의 새벽으로 돌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본질은 언제나 예수님 자신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 전체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물론 세계의 미래는 그분의 현존으로 빛을 받습니다"([강생의 신비], 1항).

사도행전의 처음 몇 장은 그리스도의 첫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우러난 신심 깊고 설득력 있는 선포였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명령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그리고 제자들은 비록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사도 4, 13)일지라도 신속히 그리고 기꺼이 응답합니다.

사도들은 마리아와 주님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며 시간을 보낸 다음, 성령께서 촉구하시는 대로 행동하면서 오순절에 선포 활동을 시작합니다(사도 2 참조). 이 놀라운 사건을 읽을 때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의 역사가 일종의 여정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여정은 오만한 바벨탑 계획과 그것이 야기한 혼란과 상호 몰이해로 인한 붕괴(창세 11, 1-9 참조)에서 시작하여 성령 강림과 혀의 선물, 곧 성령의 활동을 통한 예수님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에 이르는 회복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선포는 사람들이 믿음과 사랑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애 안에서 만나도록 해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 형제 자매들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중개자가 되셨습니다.

성령 강림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보복의 위협조차도 사도들이 주님을 선포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도 4, 20) 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의회에서 말합니다. 사실, 재판 자체도 선교의 도구가 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 심한 박해가 시작되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고, "흩어져 간 신도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사도 8, 4).

사도들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생생한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곧 죄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베드로는 백인 대장 고르넬리오와 그의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자기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정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모든 예언자들도 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증언하였습니다"(사도 10, 39-43).

2000년 동안 환경이 엄청나게 변하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리스도를 선포할 필요성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우리 삶에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그분의 현존을 증언할 의무는 첫 제자들만큼이나 지금 우리에게 현실적이고 절실합니다. 우리는 들을 마음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선포는 필수적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파하는 다른 전통적인 형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오늘날의 선포는 매체 안에서 매체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가 오늘날 이 힘있는 수단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앞에 죄송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교황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 선교], 45항).

매체가 현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보 사회의 도래는 실질적인 문화 혁명으로서, 매체를 사실과 생각과 가치들이 끊임없이 교류되는 "현대의 첫째 가는 아레오파고"([교회의 선교 사명], 37항)로 만듭니다. 매체를 통하여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사건과 접촉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견해를 가집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매체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경험은 대부분 매체를 통한 경험입니다(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 [새로운 시대], 2항 참조). 그리스도 선포는 이러한 경험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을 선포하면서 당연히 교회 자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서적, 신문, 정기 간행물,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그 밖의 수단들을 적극적이고 능숙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가톨릭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은 새로운 선포 매체와 방법의 개발을 위하여 대담하고 창의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속 매체에서 얻을 수 있는 기회들도 또한 되도록 많이 이용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매체들은 이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희년 기간에 수많은 특별 프로그램들이 위성 텔레비전 방송을 통하여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그 매체들이 일부 세속 문화권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에 대하여 무관심, 심지어는 적대감까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종교적 도덕적 신념에 대한 선입견이나 존중심 결여를 더욱 엄중히 일깨워 줄 일종의 '양심 성찰'이 매체들에게는 종종 필요합니다.

진정한 인간적 요구, 특히 약하고 상처 입기 쉬우며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매체 프로그램들은 주님을 함축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축적인 선포 이외에도 커뮤니케이션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용 매체와 시청자의 역량에 알맞은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죄와 죽음을 물리치신 그분의 승리에 관하여 명확하게 전해 줄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적인 훈련과 기술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이 더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자신이 그분을 만나고, 기도와 성찬례, 고해성사, 하느님 말씀의 봉독과 성찰, 그리스도교 교리 연구,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를 통하여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돈독히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것이 참되다면 이는 우리 자신의 일이라기보다는 성령의 활동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선포는 의무일 뿐 아니라 특권이기도 합니다. "제삼천년기를 향한 신자들의 여정은 지난 2000년 역사의 무거운 짐에서 오는 피로에 결코 짓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참 빛,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한다는 의식으로 고무되어 있습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나자렛 예수님을 선포하며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을 닮는 길'과 '더욱 인간답게 되는 길'을 열어 줍니다"([강생의 신비], 2항).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지 2000년이 되는 대희년은 주님의 제자들이 매체 안에서 매체를 통하여 놀랍고도 위안을 주는 우리 구원의 기쁜 소식을 증언할 기회이자 자극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은총의 해"에 매체가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분명하고 기쁘게 예수님을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 천년의 새벽에 매체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교회의 복음 선교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일 뿐 아니라, 매체의 메시지를 활기차게 하고 영감을 주며 희망에 넘치게 하는 풍요로움이기도 합니다. 광대한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세계에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선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복을 가득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티칸에서 2000년 1월 2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가해) 요한 28,16-20; 99/05/1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성서는 제자들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17)고 전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보지 못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도 믿지 않으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 장면을 보노라면 마태오 이사야 예언서 6장 9절을 인용하여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13,14-15)라고 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믿으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과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아 놓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못 믿는다는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부족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28,18-20) 그러시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실천할 엄두를 못낼까봐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0) 예수님은 또 제자들이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사도 1,10)을 줄 아시고, 미리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요한 16,7) 실제로 성령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두려움 속에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시어, "제자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사도 2,4) 복음을 선포하도록 내모셨습니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증거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1,19) 실제로 지난 번 서울대교구 선교교육 때 선교사례를 발표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몇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떨렸고 엄두고 나지 않았지만, 선교를 할 땐 주님께서 꼭 옆에 함께해주시면서 선교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평소에는 자신도 알 수 없던 일을 용감하게 답변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성령에 힘입어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 사명을 완수하기로 합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제 33차 홍보주일 담화문

1999. 5. 16

대중 매체 :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의 친근한 벗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우리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2000주년을 경축하며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의 문을 여는 대희년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희년 준비 마지막 해인 올해 교회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무한한 자비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나서 하느님께 되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와 여정을 함께 하시는 길동무이며 벗이십니다.

저는 올해 홍보 주일의 주제를 "대중 매체 :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의 친근한 벗"으로 정하였습니다. 이 주제는 두 가지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중 매체가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고 하느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삶에서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찾는 사람들에게 매체가 친근한 벗이 되어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주제는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사실과 그 이유를 담고 있습니다. 대중 매체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성의 영역인 자연의 책과 신앙의 영역인 계시의 책, 곧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줍니다.

끝으로 이 주제는 사회 홍보 분야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 삶의 핵심에 자리한 의미의 추구를 방해하지 말고 도와 주려고 더욱 노력하라는 권유와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2. 인간다움은 추구함에 있습니다.

제가 최근의 회칙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에서 강조한 것처럼, 인간의 모든 추구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추구입니다.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여 자기 자신에 관한 충만한 진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1항). 대희년은 인간의 모든 추구의 목적이신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될 것이며, 모든 인간이 흔히 죄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바라 마지않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찬미가 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처럼, 죄는 옳지 못한 장소에서 옳은 것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고백록], X, 38 참조). 우리가 하느님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하느님을 찾을 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 홍보주일의 주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 말합니다. 비록 옳은 장소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현대 문화에 미치는 매체의 특별한 영향과, 인간 생명과 존엄에 관한 진리, 자유와 상호 의존의 참된 의미에 대한 진리를 증언하여야 할 매체의 특별한 책임을 인정합니다.

3. 교회는 어떤 형태의 협력이라도 모든 사람의 선익에 이바지할 것임을 알기에, 인간 탐구의 여정에서 매체와 친근해지고자 합니다. 협력은 또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때로 교회와 매체의 관계는 서로의 오해로 멀어져 우려와 불신을 낳을 수 있습니다. 교회 문화와 매체 문화가 서로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어떤 점에서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다르다는 것 때문에 우호와 대화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다름이 가장 깊은 우정 안에서 창의와 교류를 촉진합니다.

교회의 기억문화는 사라져 버릴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대중매체의 문화가 희망을 좀먹는 망각에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 주며, 매체는 교회가 사람들의 일상 생활 속에 변함없으면서 언제나 새로운 복음을 선포하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혜 문화는 매체의 정보 문화가 의미 없는 사실들의 축적이 되지 않도록 하며, 매체는 교회의 지혜가 최근의 새로운 지식들에 눈 떠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교회의 기쁨 문화는 매체의 오락 문화가 진리와 책임을 비열하게 회피하지 않도록 하며, 매체는 교회가 호소력 있게, 더 나아가 사람들과 기쁘게 대화하는 법을 익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상 몇 가지 예는, 교회와 매체가 우애의 정신으로 더 깊은 차원에서 더욱 긴밀히 협력할 때 의미와 자아 실현을 추구하는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4. 최근의 정보 기술의 발달로 세계 모든 곳에서 개인과 집단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더욱 많은 대화 소통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바로 그 힘이 자기 중심주의와 소외감을 증대시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위협과 약속이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러한 위협이 확산되어 더욱 심각한 인간적 불행에 이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져야 할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었던 한 세기의 끝, 아니 한 천년기의 끝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약속이 위협을 누르고 대화가 소외를 누르도록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매체 안에도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큰 희망을 품고 새로운 천년기를 바라봅시다. 그렇게 될 때, 매체 분야는 모든 사람에게 더욱 친근한 벗이 되어 기억이 가득한 '소식', 지혜가 가득한 정보, 기쁨이 가득한 오락을 사람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와 매체가 인류의 선익을 위하여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세상이 보장될 것입니다.

이는 매체의 힘이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창조하는 사랑이 되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만민의 아버지이시며,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시는"(에페 4,6) 하느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사랑입니다.

사회 홍보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벗이 되는 기쁨을 알고 또 하느님의 우정을 알아 하느님 아버지 집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든 이의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자와 성령과 함께 성부께서는 영원히 영예와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받으소서.



주님 승천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제 32차 홍보주일 담화(요약)


(다해) 98/05/2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희망을 지켜주시는 희망의 파수꾼이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 67항) 제32차 홍보주일 주제를 '성령에 힘입어 희망을 나눕시다.'로 정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희망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희망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 천국에 대한 희망,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 도래를 바라는 자신의 희망을 새롭게 다지며, 주위 세계에서 발견되 는 희망의 징표들을 더욱 예리하게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 희망의 징표들이란 인간 생명에 봉사하는 과 학 기술의 진보, 특히 의학의 진보, 환경에 대한 책임 의식의 증대, 평화와 정의가 침해된 곳에서 이를 회 복시키려는 노력, 특히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에서 민족간의 화해와 연대를 추구하는 열망 입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희망의 징표들이 있습니다. 곧 여러 은사를 받아들이고 평신도의 지위를 높이도 록 재촉하시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더욱 깊은 관심,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더 적극적인 투신, 다른 종교들과 현대 문화와 나누는 대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증대 등입니다.('제삼천년기', 46항 참 조)

교회가 복음 전파를 위하여 매체를 이용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현대의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문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심리"를 지닌 새로운 문화 안에 복음을 통합시키도록 촉구합 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언론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친교 를 이루며 동료 인간들의 친교를 촉진하는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제삼천 년기', 45항)이신 성령께 희망의 가르침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언론인들이 스스로 불러일으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 는 희망의 완벽한 모델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가난한 이들의 열망을 완벽하게 표현하셨으며,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약속에 자신을 의탁하는 이들의 빛나는 본보기이십니다."('제삼천년기', 48항) 교회 가 대희년을 향한 순례 여정에 있는 지금, 성령께 깊이 귀기울여 우리 희망의 근원인 위대한 강생 사건을 세상에 펼쳐주신 성모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제 32차 홍보주일 담화(전문)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2000년 대희년 준비의 둘째 해인 올해, 우리는 우리의 삶과 교회와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희망을 지켜주시는 희망의 파수꾼이십니다."('생명을 주시는 주님', 67항) 제32차 홍보주일 주제를 '성령에 힘입어 희망을 나눕시다.'로 정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희망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희망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 천국에 대한 희망,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 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히브 6,19-20)

2.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담긴 종말론적 희망은 이 세상 삶에서 행복과 완성을 추구하는 것과 깊숙이 이어져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희망은 지금 여기서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하느님께서 당신과 인간의 관계를 치유해 주시는 구원은 인간 상호관계의 치유와 함께 나아가며, 구원에서 비롯되는 희망은 이러한 이중의 치유를 기다립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이 제삼천년기의 여명인 대희년을 새로운 희망으로 준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 도래를 바라는 자신의 희망을 새롭게 다지며, 주위 세계에서 발견되는 희망의 징표들을 더욱 예리하게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 희망의 징표들이란 인간 생명에 봉사하는 과학 기술의 진보, 특히 의학의 진보, 환경에 대한 책임 의식의 증대, 평화와 정의가 침해된 곳에서 이를 회복시키려는 노력, 특히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에서 민족간의 화해와 연대를 추구하는 열망입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희망의 징표들이 있습니다. 곧 여러 은사를 받아들이고 평신도의 지위를 높이도록 재촉하시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더욱 깊은 관심,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더 적극적인 투신, 다른 종교들과 현대 문화와 나누는 대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증대 등입니다.('제삼천년기', 46항 참조)

3. 그리스도를 믿는 언론인들이 먼저 자신의 삶에서 희망을 체험할 때 그 희망을 신빙성 있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기도에 힘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1베드 3,15)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자 언론인들은 진리의 힘으로 현대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4. 대중매체를 통한 의사소통 과정이 단순히 흥미 유발이나 설득,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실리행위가 아님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념의 전파 도구는 더 더욱 아닙니다. 대중매체는 때때로 인간을 소비 단위나 경쟁적 이익 집단으로 전락시키고, 시청자나 독자들을 단순 기호로 조직하여 상품 판매든 정치 선전이든 그들에게서 어떤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대중매체의 임부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함께 모으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대중매체는 올바르게 사용될 때 정의와 사랑에 기초를 둔 인간 공동체를 창조하고 유지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그 수단은 희망의 징표가 될 것입니다.

5. 대중매체는 실제로 현대 세계의 새로운 '아레오파고'입니다. 곧 최선을 다해 진실된 정보와 건설적인 의견과 건전한 가치관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여 공동체를 창조하는 하나의 커다란 광장입니다. 이 광장은 이제 교회의 대중매체 접근에 도전을 제기하며, 교회가 복음 전파를 위하여 매체를 이용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현대의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문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심리"를 지닌 새로운 문화 안에 복음을 통합시키도록 촉구합니다.('교회의 선교 사명', 37항)

그리스도를 믿는 언론인들은 이러한 매체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교육은 전문 기술 교육, 그들의 전문 직업에 관련된 가치 규범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윤리 도덕의 교육, 인간의 문화·철학·역사·사회 과학·미학 등에 관한 교육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교육은 내적 생활, 곧 영성 생활의 교육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언론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친교를 이루며 동료 인간들의 친교를 촉진하는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복음화의 주역"('제삼천년기', 45항)이신 성령께 희망의 가르침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언론인들이 스스로 불러일으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희망의 완벽한 모델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가난한 이들의 열망을 완벽하게 표현하셨으며,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약속에 자신을 의탁하는 이들의 빛나는 본보기이십니다."('제삼천년기', 48항) 교회가 대희년을 향한 순례 여정에 있는 지금, 성령께 깊이 귀기울여 우리 희망의 근원인 위대한 강생 사건을 세상에 펼쳐주신 성모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주님 승천 대축일

(나해) 마르 16,15-20 : 97/05/11

우리 중에는 늘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 하나 개인을 보더라도 자랑스러울 때가 있고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 가지 순간의 여러 다른 모습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순간에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고 있지만, 우리는 다함께 주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훌륭한 사람들만을 골라 뽑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고자 하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에페 1,19)

주님이 원하시는 이들은 바로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주님을 찾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얼마 안되는 우리 중에서도 아는 사람끼리, 도움이 되는 사람끼리 모일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제한없이 그리고 진정한 의미로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교우들보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고 고생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더 만나고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에페 1,18)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물질적인 부귀와 현세적인 행복을 꾀하는 제자들처럼 "하늘만 쳐다보고"(사도 1,11ㄴ)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 주님의 증인이 되어 세상 곳곳에 복음을 전파한 사도들이 됩시다. 그리고 부족한 나와 형제들을 통해 섭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페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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