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세례 축일



(나해) 마르 1,7-11; ’21/01/10


성탄을 맞으며, ‘주 하느님께서 왜 오셨을까?’ ‘주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그 관리를 맡기셨으면 되었지, 굳이 인간으로 오셨어야 했을까?’는 질문들을 던져 봅니다.

사실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시고 나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26) 라고 하시고는,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식을 세상에 내 놓고는 그냥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먹이고, 재우고, 돌봐 주어야 합니다. 또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신경을 쓰고 마음이 갑니다. 심지어는 자녀들 간의 관계마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부모의 처지이기도 합니다. 쉴 틈이 없습니다.

이처럼 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좋은 곳으로 지어내시고 피조물들이 서로 돌보며 사이 좋게 살도록 하셨지만, 피조물들은 각자의 이기적인 태도와 조급하고 탐욕스러운 습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의심 때문에, 지구라는 공동의 유산을 유지하며 공존하며 살지 못해왔습니다. 그 때마다, 주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거듭 달래고 경고하며 일러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뿐! 우리는 잘 잊어버렸고, 주 하느님과 같아지려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이후에도 우리의 탐욕은 커져만 갔습니다. 악마가 우리 마음 속에 심어준 탐욕은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충동하였고, 인간의 죄는 점점 커져 마침내 악의 세력을 형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죄악의 세력은 인간을 죄악의 굴레에 가두고 노예로 만들기까지 하여, 급기야 사회구조악이라고 표현됩니다. 이 구조화되기까지 한 원죄의 유전 정도는, 주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심어 주신 하느님의 모상과 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손상하는 정도까지 다다랐습니다.

심지어는 주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 자체도 인간 조건과 환경에 맞춰져 제도적으로 구조화되어, 주 하느님을 섬기는 순수함과 진실성이 표출되지 못하고, 마치 의무방어전을 치루는 듯 일정 기간과 방식에 따라 예식화되고 규격화되는 이른 바 하나의 체계와 체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도와 규정은 그 안에 내재화된 마음과 정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규격화 됨으로써 어딘지 모르게 진실성과 열정을 약화시키는 부작용마저 가져왔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종교체제하의 유다인 신앙생활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이사 29,13) 라고 지적합니다.

그럼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형성되고 축적된 유다 종교는 사람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고 기쁘게 살도록 하는, 본연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또 하나의 굴레처럼 사람들을 종교 계율과 규범 속에 가두는 현상마저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사는 사람’과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사람’이라는 구분이 아니라, ‘종교 규율을 지키는 사람’과 ‘종교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는 구분을 가져오는 오류마저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게 다시 주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생생하고 기쁘게 살도록 하는 사목적 접근이 아니라, 그 접근법 중 극히 작은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 규율을 잘 지키도록 하는 방법에 치중하는 아쉬움마저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종교 체계와 신앙 생활에 대해 여러 번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신 주 하느님의 품 안에서 점점 떨어져 나가고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죄악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셨고, 마침내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아들 주 예수님을 인간계에 보내시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주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이 죄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스르고 강제로 막는 초월적인 신비한 힘을 가진 능력자로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과 똑 같은 인간 조건과 처지를 가지고서도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주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 본성을 지니셨고, 또 그러기에 유혹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현실의 한계 안에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악마의 유혹에 타협하여 죄를 짓지 않으시고, 심지어는 심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하시면서 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아들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주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오늘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그런 의미와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지만, 다른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굳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지만, 하느님의 본성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어 오신 것처럼, 자신의 특권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십니다.

주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이 처한 조건과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죄를 짓고 죄악의 굴레에 빠져 사회구조악 같은 죄악의 노예가 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3,15)

그래서 그분은 세상을 지배하는 죄악의 세력에 의해 죽음에 처하시게 됩니다. 사도 성 베드로는 그 날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사도 2,23) 그렇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그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24절)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현실에서 주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24절) 사도 성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잡혀 죽을 것만 같은 위기에 처하여, 우리처럼 현실의 벽 앞에 두려워하며, 다락방에 숨어있다가, 성령을 받아 과감하고 용감하게 선교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35절)

사람들이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37절)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38-39절) 사도행전의 저자는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43절) 라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악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롭고 기쁘게 사는 방법은 바로 복음의 빛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로 나는 길입니다. 세례를 받고 복음이 일러주는 하느님 나라를 내 일상과 이 땅에 구현하는 길입니다. 지난 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유다인들은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나시기로 되어 있음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동방박사가 와서 알려주기까지 눈치재지 못한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믿기는 믿지만, 선뜻 현세의 벽 때문에 그리고 전례와 종교계율과 머리 속에서만 살아있는 신앙 때문에, 주 예수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망설이고 주저하며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에 힘입어 사도 성 베드로처럼 새로 나 복음을 전하고 이루기로 합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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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꽃꽂이




주님 세례 축일


고통받는 교회돕기 한국지부장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강론




(가해) 마태 3,3-17; ‘20/01/12


찬미 예수님!

수색 성당 교우 여러분, 2020년 경자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인사드립니다. 경사스런 일들로 가득하시고 자랑거리 많은 일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책 '소유나 존재냐'에서 인간의 참된 복(福)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Having)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Being)이라 하였습니다.

신·구약성경은 인간의 참된 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성품과 하느님 그분 자체가 복되다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모시고 섬기는 자체가 복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 1서 6장 15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둘째, 성경에서의 복은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축복을 뜻하는 영어 단어 Bless에서 잘 드러납니다. Bless는 피를 뜻하는 영어 단어 Blood와 어원상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삶을 도와주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받기보다는 주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고, 그래서 성경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그 자체가 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섬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였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실체입니다. 이렇듯 교회는 섬김과 선교로 존재하지요. 마르코 복음 10장 45절에서 에수님은 당신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그 제자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그렇다면 섬김은 하느님으로부터 교회를 통하여 받은 은총과 능력으로 교회 공동체 안은 물론 교회 밖 세상 속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7년, 당시 교황이셨던 비오 12세께서는 전후 세계, 특별히 유럽 사회에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제시하셨습니다. 이 호소에 응답하고자 네덜란드 출신의 한 젊은 사제가 과거 자신의 나라를 침공했으나 이제 패전국이 되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독일의 가톨릭교회를 돕는 데서 '고통받는 교회돕기 (Aid to the Church in Need, ACN)'는 시작되었습니다. ‘평화의 전사’라는 이름을 지닌 베렌프리트 판 슈트라텐(Fr.Werenfried van Straaten) 신부님은 돈을 기부할 형편이 되지는 않지만, 도움의 손길을 주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서 베이컨 등의 음식을 기부받았고, 그래서 심지어 ‘베이컨 신부’라는 별명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베렌프리는 신부님은 다른 사람의 삶을 도와주는, 특히 예수님을 믿다가 박해받는 고통 속의 신자들을 돕는 일을 인간의 참된 복으로 여기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박해받는 신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을 시험받습니다. 하지만 박해받지 않는 신자들은 그들이 간직한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시험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한 우리는 사랑을 지녔다는 것도 증명해야 합니다. 박해받는 교회의 어두운 밤에 불꽃처럼 타오로는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종교적 견해나 신념에서 비롯된 무서운 폭력과 무관용 행위의 고통 속에서 소중한 생명을 기꺼이 내놓으며 믿음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교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믿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고통받는 돕기 ACN'은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가톨릭 자선 단체는 물론 국제적이며 공적인 신앙 단체로 인정받았으며,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2014년 교황청 재단으로 교회법상 인준하셨습니다. 세상 각처에서 신앙을 이유로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증거와 순교에 특별히 더 주의를 기울이시며 아파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오늘날 초 세기보다 더 많은 순교자가 존재한다.”며 “박해받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에 성탄시기를 마치며, 교황청 재단 고통받는 교회 돕기 ACN은 ‘신앙의 선물’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고통받는 교회 돕기 ACN에서는 시리아와 남수단, 스리랑카를 돕고자 합니다. 오늘 수색 성당에서는 그중 하나로 시리아 한 방울 우유(A Drop of Milk)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정기 회원 가입을 간절히 청합니다. 저희가 준비한 동영상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시리아의 제2의 도시이며 북부 지역의 최대 도시인 알레포(Aleppo)에는 2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1년 3월 ‘아랍의 봄’을 맞아 튀니지, 이집트, 예멘, 리비아를 거쳐 시리아에서도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주변 국가와 자국 내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와 갈등으로 8년이 넘는 내전이 지금도 여전히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이 내전 속에 그리스도인의 85%가 이곳을 떠나 현재 남아 있는 이들은 27,000명 정도입니다. 오랜 내전 속에 일자리를 잃으며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이지만 오히려 국제 기구와 구호 단체들의 지원은 줄고 있습니다. 오직 가톨릭교회와 교회 내 여러 단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을 펼치고 있지만 턱 없이 부족합니다. 이에 2017년부터 고통받는 교회돕기 ACN은 ‘한 방울의 우유’사업에 재정 지원을 펼치고 있습니다. 11세 미만의 어린이 명단을 작성하여 모유 수유를 받지 못하는 아기에게 특별히 영아용 우유를, 1세부터 10세까지의 어린이에게는 가루우유 1kg식 지급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오랜 내전 속 박해받는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작년 2019년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과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고통받는 교회돕기 ACN이 주도한 기도 캠페인 ‘나의 백성을 위로 하여라.’(Console My People)를 펼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리아를 위해 묵주 6천 개와 성모 마리아 이콘을 축복하셨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과 124위 순교 복자를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성장한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입니다. 박해받은 교회에서 박해받는 교회에게, 도움받던 교회에서 도움을 주는 교회로 나아가는 데 저희 고통받는 교회 돕기 ACN이 앞장서겠습니다. 부디 함께하여 주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5,14 참조).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그치시는 사랑이야말로 고통받는 교회의 신자들에겐 믿음을 굳건히 지키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후원회 주실 분은 아래로 도와주십시오.

신한은행 100-031-121620 고통받는교회돕기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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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세례 축일 꽃꽂이




주님 세례 축일 작은 형제회 조상연 스테파노 새신부 강론

(다해) 루카 3,15-16.21-22; 13/01/13

성탄시기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육화의 신비를 경축합니다.

전례력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데, 특히 주님 공현 대축일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탄생이 공적으로 드러난 것을 기념합니다. 공현의 으뜸 주제는 예수님의 세례이며, 이와 함께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현자들의 경배, 카나의 기적 등도 기념합니다. 즉, 성탄과 세례는 육화의 신비를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전례시기이며, 육화의 신비는 성체성사를 통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 이 곳에서 매 순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는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지극히 거룩한 태중에 그분을 품으신 것만으로도 그토록 지당한 공경을 받는다면,그리고 복된 세례자가 두려워서 감히 하느님의 거룩한 머리에 손을 대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분이 잠시 동안 누워 계셨던 무덤도 경배를 받는다면, 하물며 이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계시어 영광을 받으신 분이며 천사들도 보고 싶어하는 분을 손으로 만지고, 마음과 입으로 영하며, 다른 이들도 영하도록 해주는 사람은 얼마나 거룩하고 의롭고 합당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사제로 서품 받았습니다. 삼위 하느님께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무한한 은총으로 감싸주시면서 커다란 위로를 주십니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했을 때, 성소의 여정에서 저에게 영감을 주었던 인물이 셋 있습니다. 바로 외할머니와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그리고 사부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외할머니께서는 3남 2녀를 두셨는데, 그 중에 장녀가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신앙을 간직한 이른바 구교 집안이었던 외할머니께서는 큰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마침내 권유하십니다. 큰 아들 즉, 저의 큰 외삼촌은 신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외할머니께서는 장남이니까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결국 큰 외삼촌을 붙잡으셨습니다. 다음으로 둘째 아들에게 사제의 길을 권유하셨는데, 둘째 삼촌은 처음에는 좋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싫다고 하면서 신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할머니께서는 남아있는 막내아들로 위안 삼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막내 아들이 성장하자, 사제의 길을 권유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막내 삼촌은 처음에는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다가 결국 싫다면서 신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외할머니께는 주님께서 원하셨던 아들은 큰아들인데, 인간적인 마음에서 붙잡은 것 때문에 다른 두 아들도 안 받아 주셨다고 생각하시면서 신앙생활을 이어오시던 무렵, 외손자인 제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직장에 다니시는 부모님 때문에 외가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자연스럽게 성당을 놀이터로, 신부님, 수녀님과 우정을 키우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에는 늘 “신부님”이라고 적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식구들이 모두 커다란 묵주를 함께 잡고 묵주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어머니께서는 서울대교구 예비신학생 모임에 보내셨고, 고3이 될 때까지 계속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이후, 수녀 이모님께서는 저와 어머니에게 수도회를 알려주셨고, 마침내 수도회에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강한 신념은 저에게 성당과 기도에 대한 친근함을 심어주었고, 사제직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그리고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식별하면서 신학교에 입학했고, 수도회에 입회했으며, 수도서원을 했고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제가 장래 희망에 신부님이라고 쓰고, 성소모임을 다니면서 부르심에 대한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저는 단순하게 외할머니의 바람과 어머니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 외할머니는 당신의 간절함으로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참된 길을 가르쳐 준 울림이었습니다.

언젠가 유기서원소에서 생활할 때,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거친 메마름과 하소연할 수 없는 시련에 빠져 있는 어둠 속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 나타나면서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것처럼 내가 유혹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느낌과 강한 확신이 들었는데, 바로 외할머니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외할머니는 저에게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을 해주시며,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먹고 사는 수도자에게 일용할 양식과도 같습니다.

다음으로 성 스테파노입니다. 저의 사제 서품 성구는 사도행전 6잘 8절의 말씀인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을 때 외할머니께서는 김수환 추기경님처럼 훌륭한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례명을 스테파노로 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순교의 피를 통해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고, 교회는 예수님과 유사하게 순교로 진리를 증언한 첫 번째 인물에 대한 상징으로 예수 성탄 대축일 다음 날을 스테파노 축일로 지냅니다.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은 사도행전 6장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나는데, 그리스도인 간에 음식을 나누는 특정한 일에 봉사하기 위한 일곱 부제 가운데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언어와 관습을 지닌 과부들과 유다인이지만 지중해 지역에서 생활하다가 들어온 이방 지역의 문화를 지닌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사이에 마찰과 불균형이 있었고, 사도들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일곱 사람을 뽑아 임무를 맡겼습니다. 스테파노는 과부들을 위해 봉사하는 직무에 머물지 않고, 설교가이자 호교론자로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결국 논쟁을 벌이다가 체포된 스테파노는 최고 의회에서 긴 설교를 하는데, 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긴 설교입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당하는 스테파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와 유사하게 자신의 영을 조용히 맡기면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스테파노는 순교를 통해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우쳐주고, 새로운 길을 열어줌으로써 우리를 주님께로 이끕니다. 또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끄심은 스테파노를 통해 교회가 처음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스테파노 이후 순교는 굳은 신앙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결정적인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진리를 고백하고 박해 속에서 끝까지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을 연관지었을 때, 성부 하느님과 가장 밀접하게 관계된 인물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모세입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긴밀하게 관계 맺은 인물은 사도 바오로입니다. 제3위격인 성령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은 바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스테파노입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욕심보다는 지혜를 바탕으로 주님의 영이 거룩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백성들 가운데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스테파노를 주보성인으로 모시면서 그 모범을 본받고, 스테파노처럼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사부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면서 “제2의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 안에서 육화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특히, 사부님은 사제직에 대해 권고하면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말씀으로 거룩하게 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보고 또 믿습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신비에 봉사하는 사제는 규정에 따르면서 신학적으로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자애로우신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 손에 내어주시고, 사제는 그분을 만지고 입으로 받아 모십니다.”

또한,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미사를 거행하려고 할 때마다, 어떤 지상적인 것을 위해서가 아니고 또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자들처럼 어떤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애정에서가 아닌, 거룩하고 깨끗한 지향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참다운 제사를 공경심을 가지고 순수한 사람이 되어 순수하게 드리도록 하십시오. 또한 지극히 높으신 주님 바로 그분의 마음에만 들기를 바라면서, 은총의 도움을 받아 가능한 한 모든 원의가 하느님께 향하도록 하십시오. 미사에서 홀로 그분만이 당신 마음에 드는 대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거룩하시니 사제들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봉사직 때문에 주 하느님께서 사제들을 모든 사람 위에 영예롭게 하셨기 때문에 사제들은 모든 사람들 위에 그분을 사랑하고 받들고 공경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를 알게 된 이후, 제가 느끼는 프란치스코는 바다입니다. 커다란 바다에는 수영하는 사람, 고기잡는 사람, 바다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바다와 관계맺으며 자유롭게 머물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 안에 공통적으로 바다라는 보편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생활해도 받아주는 깊고 넓은 바다입니다. 이러한 바다 속에서 사는 저에게 주님께서는 새로운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이미 불러주셨지만, 이제서야 삶으로 응답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관상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에는 무엇보다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는 주님께 간구하고, 우리 모두는 서로를 위해 격려하고 기도합니다. 교회의 사제로 수품받을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제로서 성사직무를 통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대사제이신 당신을 따르며, 신앙인들에게 성사를 통해 당신의 현존을 증거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조스테파노 형제 올림.



주님 세례 축일

(가해) 마태 3,13-17; 11/01/09

(연수회 강의 잘 들으셨습니까? 그동안 독학하시느라 어딘지 답답하고 아쉬우셨을 텐데, 이번 기회에 강의를 들으면서 확 뚫리셨는지 므르겠습니다. 좋으셨습니까?)

1년 동안 공부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한 학년을 마치시고 새학년으로 올라갑니다. 기쁘시죠? 오늘 연수회를 마치면서 2학년은 1단계를 수료하고 2단계 1학년으로, 또 4학년은 2단계를 마치고 3단계 1학년으로, 그리고 6학년은 드디어 모든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게 됩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6학년 여러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보시겠어요. 우리 그동안 수고한 이 분들을 위해 박수쳐 줍시다. 축하합니다. 아마 오늘 같은 날 주님께서는 이분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딸이다”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사생활에서 공생활로 넘어가는 관문이었다면, 오늘 수업을 마친 여러분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배운 것을 토대로 이 세상 안에서 사도로 활동하시게 될 것입니다. 수고한 우리 모두를 위해 서로 격려와 축하의 인사로 박수를 치며 자축합시다.

학생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어떤 분은 등록할 때도 제일 먼저 하시고, 책을 받자마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 줄 한 줄 줄을 치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마감일이 오기도 전에 답지를 보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분은 학기 초에 일단 책과 문제지를 받을 때는 아주 기쁘고 좋아서 빨리 해서 보내야지 하다가도, 이러 저러한 일로 바빠서 미루면서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내용을 다 아는 것처럼 뿌듯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제출 시간 며칠 전에 후다닥 해치우듯 해내느라고 밤도 새시고 마감 당일 퀵 서비스로 보내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처음 큰 마음먹고 신청했던 때와는 달리 정작 수학기간 중엔 문제 답쓰기 바쁘신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인생이 결심하는 대로 그렇게 다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때 보면, 생각하고 행동하고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사는 것 같습니다. 일할 때마다 임지에서 느끼는 것은 ‘나보다 능력 있고 더 좋은 신부님이 오셨으면 이 분들에게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바람을 가지고 삽니다. 일 할 때는 한 다고 했는데, 지나고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그 땐 일처리도 미숙하고 대인관계도 원만치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비단 이런 감정은 나뿐만 아니라 여러 수도자들의 소망에서도 듣게 됩니다.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고자 하시면, 그에 걸맞은 능력도 주시지.”그런가 하면, 어떤 평신도 지도자들은 평신도 봉사자들의 자격과 조건에 대한 교회법의 내용에 자신들이 부적합하다고 읍소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라는 자위성 표현을 자주 보고 듣습니다. 이 표현을 표출하게 되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나약성은 가끔 죄스러운 감정마저 동반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과 관련된 순수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샘솟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저 못나서 그런 것인데 누구를 탓하랴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탄과 새해를 맞으며 최근 다른 한 면을 발견합니다. 아니 다 아는 사실인데도 새삼스럽게 다시 새겨집니다. 그동안 아니라고 자신을 억압하고 우기면서 부인했던 스스로를 다시 발견하고 인정한 덕분이라고나 할까. 정말 겸허하게 우리 자신을 표현한다면, 이 불완전성과 나약성은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나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니 우리 자신의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허히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주님께 더욱 더 희망을 둘 수 있게 된 것을 기쁨과 감사로 여깁니다.

사도 바오로는 율법과 은총을 비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로마 7,15.17)

그러면서 그 원인을 하느님에게서 찾으며, 인간의 불완전성과 나약성에 대해 죄책감을 안겨주기 보다는 희망을 찾도록 안내합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로마 8,20)

그리고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24-26절)라고 하면서

우리의 불완전성과 나약성이 오히려 희망을 간직하도록 하는 원천일 수 있으며, 이 희망을 찾아나서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시고,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의 섭리로 열매를 맺어주시리라고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28절)

그런데 우리의 희망은 진정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꿈을 이루려고 얼머나 노력했는가? 그런데도 우리가 꿈을 이루기는커녕 우리 자신의 결점조차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나보다도 낮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점점 더 힘들어지고 점점 더 나태해 지는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젊고 활기차고 의욕이 넘칠 때의 그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집니다. 더군다나 나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반 복음적 환경의 세상 앞에서 나는 더 없이 나약해 보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과연 희망은 이루어 질 수 있는가?

에제키엘 예언자는 불완전성과 나약성으로 쉽사리 죄악에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하루 빨리 희망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알기라도 하는듯 이러한 위로를 줍니다. “나는 너희를 민족들에게서 데려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너희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그리고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에제 36,25-27)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리라.”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이 세례 축일에 주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가 저지른 지난날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죄악 그리고 사랑과 배려보다는 경쟁과 헤게모니 장악으로 뒤덮인 세상, 인정과 격려보다는 지적과 비난으로 점철된 비 그리스도교적 상황을 성령의 물로 깨끗이 씻어 주시고, 오늘 성령의 불로 우리를 뜨겁게 채워주셔서 오늘부터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바꿔주셔서, 주님께 향한 우리의 희망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도록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굽어보시고,

불완전하고 나약한 저희를 어여삐 여기시며,

못난 저희를 헤아려 주시어,

저희가 살면서 저지르는 모든 과오를 성령의 물로 씻어주시고,

저희를 새롭게 일어서게 해 주소서.

또한 주님께 향한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게 하시어

저희가 희망을 향해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서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살면서 다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성령의 불로 채워주시어

주님 영광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를 통해서도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멘.



주님 세례 축일

(가해) 마태 3,13-17; 05/01/09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할 때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떠올린다.

샤워의 굵은 물줄기가 머리를 적셔와 온 몸을 닦아줄 때마다 주님께서 내 죄를 씻어주시는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듯이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면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예수님은 요한에게서 하늘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지만,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내려주신 세례성사는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 성사다.

우리가 세례 때 물을 이마에 붓는 것은, 우리가 물로 깨끗이 씻어짐과 동시에 물속에 들어가 숨쉬지 못해 죽었다가 물 밖으로 나와 거친 숨을 내쉬며 참았던 숨을 몰아내듯이, 우리의 죄로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나 새사람이 되는 성사이다.

세례성사는 그러므로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요구하는 대로 그리고 내가 하고 싶고, 얻고 싶고, 채우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응답하는 선택이요 새로운 삶의 결단이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종교박람회’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한 친구가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친구가 가서 묻는다.

“야, 축하한다. 세례 받았다며, 어떻게 받았니?”

“그냥, 얼떨결에 받았어.”

“너, 교리 안 빠졌어?”

“응”

“너, 찰고 무사히 통과했어?”

“아니, 별로 대답 못했어.”

“12기도문 다 외웠어?”

“아니 다 못 외워”

“그럼, 주님의 기도는 외워?”

“외우지는 못하고 책 보고 따라할 수는 있어.”

“신기하다. 신기해. 어떻게 세례를 받았지?”

“글쎄, 나는 기도문도 잘 못 외우고 교리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세례성사 받기 전에는 매일 집에 술 먹고 늦게 들어가서 부인하고 싸우고, 회사일도 엉망이고 빚도 많았어. 그런데 세례성사를 받고 나서는 술도 줄이고 집에 일찍 들어가서 부인과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잘하지는 못해도 그냥 성실하게 일하려고 노력하고 그래. 그랬더니 빚도 조금씩 갚게도 되고... 뭐, 그렇게 살고 있지.”

세례성사는 교리를 듣고 세례를 예식으로 그저 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성사가 아니다.

그리고 예비자 교리 교육기간은 세례성사를 받을 때까지 신자가 되기 위한 한 과정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요,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이제 신자가 되었으니 다 끝나버린 것도 아니다. 세례성사는 입문 성사이다. 이제 시작하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내가 구원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성사는 계속 우리가 주님 앞에 계속 새로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성사이다. 마치 아침마다 눈 떠서 아침 기도를 바치며 주님께 안부를 여쭙고 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부탁하듯이, 세례성사는 우리 신자생활의 시작이며, 매일 주님 앞에 새로 태어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세례성사는 변화의 성사다. 기존에 내가 살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모두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과 생각 주님의 사랑의 가치관과 그에 따른 사랑의 방법론으로 변화되어 살라는 그리고 또 우리가 그렇게 살겠다고 이미 고백하고 결심하고 실제로 실천해 나아갈 성사다.

성당에서 머리에 물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성당에서 머리에 물을 받은 다음부터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시작한 변화된 신자다.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어느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세례를 받으면서 요한에게 했던 말씀 그대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1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가르침을 몸소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우리 주님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우리 삶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자.

그래서 주님께서 세례 때에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받으셨던 그 말씀을 오늘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듣기로 하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



주님 세례 축일

(다해) 루가 3, 15-16. 21-22; 01/11/04

제가 부제반 피정을 하고 있을 때 추기경님께서 오셨다. 그날이 바로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이었다. 추기경님은 미사 중에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추기경인 내가 판공성사를 보기 위해서 명동 성당에 쫙 늘어선 신자들 사이에 서 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은 추기경이 다 죄가 없는 줄 아는데, 추기경도 고백자들 사이에 껴서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생각해본다."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들처럼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죄인들 사이에 끼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계신다.

왜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참석해서, 그것도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기 위해 서 계실까?

그 자리는 세례자 요한이 한창 인기보다는 주목을 받고 있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볼 때 요한이 정말 다가오실 그리스도냐 아니냐를 궁금해 할 정도로 예민한 자리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자리에 가셨다. 그리고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자청해서 받으신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자, 처음에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하며 굳이 사양하였다."(마태 3, 14)고 나와 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은 예수께서 하자시는 대로 하였다."(15절)고 나온다.

이 예수님의 표현을 보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 틈에 끼어 회개의 세례를 받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요한에게 갔고 세례를 받으려는 것이다.

그럼 아버지께서 왜 예수님에게 요한의 세례를 받도록 하셨는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 한 번은 첫영성체 어린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왜 우리를 구하러 오신 분이 하늘에서 힘센 장수나 돈이 많은 사장님으로 오시지 않고, 먹여주고 돌봐주어야 하는 약하고 가난한 어린 아기로 오셨을까?" 그랬더니 초등학교 3학년 어린아이가 이런 대답을 했다.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어린아이의 대답이, 어린아이의 대답치고는 너무나 현명하고 예수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꼭 가난하게 태어나지 않아도, 꼭 어린아이로 태어나지 않아도 가난한 이들의 상황과 인간들의 어려운 조건과 처지를 충분히 다 아실 수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연약하게 태어나신 이유는 예수님이 인간의 가난과 나약한 조건을 체험하기 위해서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연약한 이들에게, 주님께서 자기들과 같은 처지로 오셨다는 사실이 기쁨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힘이 되어 주기 위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게는 방 한 칸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나야 했다는 사실이 자신들보다도 더 가난하게 태어나셨기에 위안과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 9)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들과 같은 처지에 서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때마다 판공을 보면서 죄를 씻어야하는 죄인인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세례를 받고 새로 태어나야만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오늘 이 세례사건은 참으로 커다란 선물이다. 세례를 받으려는 예비자들에게는 하나의 표본이 되고, 세례 받은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의 세례를 기념하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던져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주님의 이 모습을 더욱 더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이사 42, 2-3)

그러기에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아들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흐믓해 하시며 축복하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 3, 22)

오늘 성탄 시기를 마감하는 주님의 세례 축일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진 것을 다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처지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고난을 겪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위안해 주시고 희망을 안겨다 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아멘.



주님 세례 축일

(나해) 마르 1, 7-11; 2003/01/12

어린 아기는 귀엽고 어린아이들은 사랑스럽다. 그러면서도 개나 가축과 달리 어린아이들에게 갖은 정성을 다 쏟는 이유는 그 아이들이 우리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쏟고 좋은 것을 깊이 심어준다면 우리의 미래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올바르고 좋은 가치관을 얻지 못한 아이들이 많으면 우리의 미래는 살자니 고역이요 불안한 말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늘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앞으로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달라고 계속 요구하고, 동료들을 지배하기 위해 경쟁과 투쟁이 심화될 것이고, 후손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사랑을 받기는커녕 더욱 더 삭막하고 아귀다툼의 세상 속에 휩쓸려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11)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을 선택하고,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려고 고개를 조아리니 더 사랑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서 사랑을 받으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할 사명을 수행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에게 구원을 기대하고 바라던 사람들에게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인 내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이사 42, 6-7)

그러기에 예수님의 세례사건은 우리가 왜 태어났고 또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우리가 우리의 밥벌이와 개개인의 이익에 급급하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건에 젖어 있다면, 누군가는 계속 우리들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이다. 서로 서로가 주님과 서로에게 감사하고 베풀줄 모르고 서로에게 베풀어주기만을 기대하고 있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부담된 삶의 연속이 될 것인가?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밀려나고 상처받은 개인과 가정을 헤아리고 배려해야 하는 교회를 통해 희생 봉사하며 헌신하는 삶이 오늘 예수님의 세례를 경축하는 신앙인의 길이다.



주님 세례 축일

(가해) 마태 3, 13-17; 02/01/13

매주 금요일 점심마다 구역반장들이 노인대학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점심을 지어드린다. 그런데 지난 사목협의회의 노인분과장은 사목협의회 때마다 점심을 지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한다. 어떻게 보면 본당의 구역반장들이 본당의 예산으로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노인분들께 점심을 지어드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분은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오히려 재촉하고 좀 더 잘해달라고 요구해도 될 법한데 거꾸로 기뻐하신다. 자기 돈 들여 교구에 가서 교육을 받고 와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교육을 전수하는 노인대학 교사들이나 적은 예산에 자기 돈 들여가며 이틀씩이나 없는 시간 빼내서 밥을 준비하고 지어주는 구역반장들이나 회비까지 내시면서도 반찬투정 한 번 하지 않으시고 기쁘게 먹어 주시고 잘 받아주시는 노인대학생들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처럼 사랑으로 자기를 나누고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행복을 누린다. 사실 교회는 이러한 신자들의 자발적인 희생과 당연한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만족하는 신자들의 신앙으로 지탱해 나간다. 그러니 어찌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있으랴!

예수님도 오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라는 칭찬을 받으신다. 왜, 어떻게 하셨길래 칭찬을 받으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 하셔도 되는 일을 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 틈에 끼어 세례자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이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은 말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14)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15)고 대답하셨다. 성탄의 신비가 여기 있다. 인간에게 찬양을 받으시고 섬김을 받으셔야 마땅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에게 내려오신 것이다. 그것도 찬양을 받으셔야 할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약한 아기로. 오셨다. 높임을 받으셔야 할 분이 오히려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사도 10, 34. 35)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스스로 올바로 살며 당연히 여겨지는 것도 감사히 받아들이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나누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 세례 축일

(나해) 마르 1, 7-11 : 2000/01/09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경하기는커녕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자체만도 얼마나 어려운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며, 톡 톡 끊고 잘라버리는 세상사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커다란 위로와 잔잔한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이사 42, 2-4)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는데 결코 평등하지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우리는 오히려 주님의 은총으로 온전히 채워주시길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우리의 원의를 겪고 나서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사도 10, 34-35)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하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마르 1, 7-8)이라고 예수님을 선포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요한에게 와서 머리를 굽혀 세례를 받으신다. 어쩌면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신 듯도 하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모습을 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 11) 주 예수님은 이렇듯 사람들이 세상사에 시달리다 못해 지치고 인간 세계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어 하느님께 탄원할 수밖에 없던 그 겸손한 모습을 채워주신 분이시다. 그것도 그냥 서비스 정신 정도로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심으로써 또 마지막에는 인간들의 요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들의 요구를 통해 들려오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자기의 목숨을 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실 정도로 겸손하시다. 아니 진정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우리에게 겸손한 아기로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 감사드리자.



주님 세례 축일

(가해) 마태 3,13-17 : 99/01/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도 될까말까한데 거꾸로 입니다. 요한도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제게 오십니까?"(요한 3,14) 라고 말합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 틈에 끼어서 회개의 세례를 기다리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일반 사람들이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주님을 올바로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의미로서의 세례를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데, 왜 거기 서서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면서도, 현실에서 보통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받는 회개의 세례 절차를 밟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가? 예수님께서 보통 인간들이 겪는 현실의 절차와 습관을 존중했기 때문인가? 물론 예수님께서는 현실법에 어긋나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베드로를 시켜서 물고기 입 속에서 돈을 꺼내 세금을 내도록 하시고(마태 17,27),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고(마르 1,21; 루가 13,10) 또 안식일에는 계명대로 쉬셨습니다.(루가 23, 56)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마태 3,15)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훗날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라고 답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은 무었이었는가? 하느님은 예수님께 어떤 행동을 원하셨을까? 그것은 오늘 1독서에 나오듯이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이사 42,7)이다. 예수님도 루가 복음 4장 18절에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설명해 주셨다. 그럼 오늘 우리에게 있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시기를 원하실까?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에게 해당되는 구절을 찾아 실현해 보기로 하자. 새해의 실천 방향과 계획으로!



주님 세례 축일

(다해) 루가 3,15-16. 21-22 : 98/01/11

오늘 주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예수님께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가 3,22ㄷ) 예수님은 어떻게 하셔서 아버지로부 터 인정받고 사랑 받을 수 있으셨을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루가 3,16)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말 대로라면 요한이 오히려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거꾸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또 실 제로 죄도 없으신 분이 죄인들 사이에 끼어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선포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세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님은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민족에 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 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버 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이사 42,1-4)

둘째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은 오늘 온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선포되어 활동하 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예언서에서 "주님인 내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소 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이사 42,6-7) 라고 기록된 대로 '나자렛 예수'(사도 10,38ㄱ)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사 42,1-4)로 선포되어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사도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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