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해) 요한 6,51-58; 17/06/18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 덕에 무사히 피정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저 혹시 보고 싶으셨나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저는 여러분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미사 시작할 시간이구나.’ ‘이제 강론이 끝났겠구나.’ ‘이제 집으로 가시겠구나!’ 하면서 여러분을 생각했습니다.

피정 중에 다른 교구의 동창신부가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월간 ‘참 좋은 당신’과 월간 ‘레지오 마리애’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고 반가워서 안부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제가 ‘피정 중’이라고 했더니, 대뜸 한 다는 말이 “컴퓨터 가지고 들어왔니?” “응, 가지고는 왔는데 아직 안 열었어.” 했더니, “절대 컴퓨터 열지 말고, 푹 쉬었다가 돌아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5시 30분에 일어나 샤워하고 빨래하고 6시에 기도 들어가서 7시에 잠시 쉬었다가 7시 30분에 아침기도 하고 8시에 식사한 후 잠시 쉬었다가, 9시 30분에 강의 듣고 10시부터 11시까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잠시 쉬었다가 11시 30분에 낮기도 들어가고, 12시 식사후 묵주기도 40단을 바치고 잠시 쉬었다가 4시부터 5시까지 기도하고 5시 20분에 미사한 후, 6시에 저녁 먹고 몇몇이 함께 묵주기도를 한 후에 저녁 7시 30분 성체조배를 시작하며 졸기 시작해서 8시에 끝기도를 바치고는 그냥 방으로 돌아가 쓰러져 잠들어 버렸습니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난다고, 오랜만에 컴과 떨어져 공기 좋은 곳에서 기도와 잠만 자니 몸은 고단하다 못해 결리는 것 같았지만, 정말 상쾌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대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3절) 라고 시비를 걸었고, 이 말을 전해 들은 로마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가리켜 ‘식인종’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절)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그리하여 그분의 생애를 받아들이고, 말씀을 통해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펼쳐주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4-55절)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같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같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진정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희망이 될 듯싶습니다.

오늘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에 세례를 받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내가 살아야 하니 네가 나를 위해 죽어줘야겠다.’ 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심으로써 대신 우리를 살려주셨고, 우리에게 새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6절)

우리는 가끔 우리의 처지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합니다. “내가 시간만 조금 더 있다면, 봉사활동도 하며 살 텐데. 나중에 은퇴해서 시간 많아지면 봉사활동도 하며 살겠다.” “내가 돈만 조금 더 있다면, 기부도 하면서 살 텐데.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기부하면서 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착해진 다음에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겠다고 하지도, 우리가 회개하고 나면 새생명을 주시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7-8)

주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를 세상에 내 놓아주셨음 같이, 주 예수님도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 죄많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 가시면서까지 새생명을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고 따라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급기야는 주님의 전생애를 우리에게 각인시켜주시기라도 하듯이, 성체성사를 남겨주셨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7절)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사회에서 배우고 닦은 데로 해왔던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사회의 그러한 요구를 따라온 우리가 진정 평화와 안녕을 누리고 있는가?

사회에서 하라는 대로 해온 우리가 지금 기쁘고 행복한가?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우리는 오늘 새 생명의 길을 주 예수님 안에서 찾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우리에게 살라고 했던 그 방식 대로가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초대해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방식대로 살고자 주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지상 생애의 화려함과 물질적인 풍요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찾고 또 그 가치가 주 예수님께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고백하며, 그분을 따라,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고 이루기 시작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새롭게 살겠다는 세례를 받습니다.

여러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초대해주시는 이 성체성사의 새로운 생명의 길을 굳건히 걸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4-55)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나해) 마르 14,12-16.22-26; 15/06/07

우리는 가끔 성지순례를 갑니다. 성지순례나 세례성사 등 인생의 귀중한 시점에서 그리고 신앙의 귀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기도에 기꺼이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우리의 소원을 청합니다. 성지순례와 신앙의 귀중한 시점에서, 주 하느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은 참으로 자녀다운 좋은 자세입니다. 주님의 자녀와 못지 않게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그 중요한 시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그 귀한 시점에 이르게 해주신 데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서, 또 신앙의 본질인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삶의 출발을 다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맞아들인다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지난 삶의 가치관과 처세술을 버리고, 주 하느님의 삶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회개의 발걸음을 다짐합니다. 곧 주님을 몰랐던 때에는 ‘내가 살기 위해 네가 희생하라.’고 요구했다면, 오늘 주님을 알고 따르겠다는 신앙의 길목에서 우리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겠다.’는 다짐과 서원을 발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성체성사를 제정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 주시는 몸은 ‘생명의 빵’(요한 6,48) 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이 생명의 빵은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이며, 영혼의 양식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3.35)

주님께서는 성체성사의 성혈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요한 14,6)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참 생명의 길을 비춰주시며 이끄십니다.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로 가르쳐 주시고, 성체성사의 가르침을 예수님의 일생에서 실제로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의 이 커다란 사랑에 감사드리며, 우리는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주시며 우리를 구해주신 주님을 믿고 따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그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5-57) 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희망의 길을 미리 일러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그러고 보면, 우리가 받아 모시게 되는, 예수님의 참된 양식인 살과 참된 음료인 피는,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참 생명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우리가 짊어지고 걸어나가야 할 계명이자, 우리 구원인 사랑의 십자가 길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가 우리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 희생제사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성체성사를 영하는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라고 일러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따라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또 마땅히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길로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을,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하시는 사랑’을 지키고 살아가도록 초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4.17)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사랑을 퍼부어 주시면서,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며, 우리가 그 길을 걸어 오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순교 영성으로 민족화해를”

(가해) 마태 18,19-22; 14/06/22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 민족이 한 형제이면서도 총부리를 겨누고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 전쟁을 치른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 땅에 전쟁이 멈춘 지 60년이 되었는데도 우리 민족은 화해를 하지 못하고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이 더해가고 절망이 깊어가고 있는 이때에 그동안 따뜻한 말씀과 미소와 행동으로 온 세계에 기쁨과 위로를 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십니다.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주례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특히 방한하시는 교황님께서는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한반도에 따듯한 위로와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계심을 알고 있기에 기쁨이 더욱 큽니다. 교황님께서는 교황 즉위 직후인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베드로 광장에서 메시지를 통해 “아시아, 특히 한반도의 평화를 빈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올 1월 외교사절단과 가진 신년하례식에서는 “대한민국과 외교관계 50주년을 기하여 한반도에 화해 선물을 주십사 하느님께 빈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민족들의 발전」을 인용하시며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19항)하고 재천명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오늘 하루를 어떻게 봉헌해야 할지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분단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것 보다, 지금 여기에서 얼마나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지난 세월호 참사는 우리 민족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그리고 인간 사이에 꽃 피어야 할 질서와는 너무나도 멀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민족의 부끄러운 얼굴을 확실하게 보여준 세월호 참사 앞에서, 사랑과 책임, 생명존중과 희생이라는 윤리가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깊은 큰 참회와 성찰을 해야 함을 느낍니다.

평화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생명과 하느님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평화와 통일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께 기도드리고,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실천 할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순교 영성으로 민족화해를!

이제 우리가 새로워 질 수 있는 길은 바로 ‘순교 영성으로 민족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순교는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뜻합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무한한 헌신입니다. 103위 순교성인과 곧 복자가 되실 124위 순교자들은 생명을 바쳐 우리 민족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반석 위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민족화해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념과 체제 때문에 갈라져 반목하며 분열된 우리민족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는 속죄와 구원의 길입니다. 그 원동력이 순교 영성입니다. 순교 선열들이 보여준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헌신의 마음 없이 민족화해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체제와 이념의 벽을 넘습니다. 순교 선열들은 체제와 이념의 벽을 뛰어 넘어 하느님을 향한 무한한 신뢰의 길을 따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화해의 제물이 되는 것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체제와 이념의 벽을 구실 삼아 “형제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다는 신념”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북녘 형제들을 형제적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화해해야 한다는 신념 자체를 두렵게 만드는 분단현실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사려 깊게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분단현실을 책임진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확인하고 서로 나눌 수 있도록 이들을 변화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에 소홀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민족화해의 길은 더욱 더 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를 허락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은 오늘 이 시대에 알맞는 방식으로 그분들의 순교 영성을 본받는 길 뿐입니다. 비록 우리의 생명을 바치지는 못하더라도 기도와 희생을 통한 순교의 길을 힘껏 따라나서야 합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본받아 순간순간 우리 스스로를 화해의 제물로 봉헌하는 순교 영성의 길, 그 길이 바로 민족화해의 길입니다.

기도와 사랑의 실천

민족화해를 위한 방법은 ‘기도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 교회가 민족화해를 위해 처음 시작했던 활동은 기도운동이었습니다. 민족화해위원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북한선교후원회는 추운 겨울에도 임진각 벌판에서 미사를 드리고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매달 그곳을 찾아왔던 분들의 가슴에는 “기도로 통일을” 이라는 리본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말하셨듯이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령 그 누가 통일의 지혜와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하고,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끝은 허망할 것입니다. 오늘 남과 북 사이에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길이 바로 민족화해의 길입니다.

순교의 영성으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사랑 실천의 길을 묵묵히 따라 가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징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불신과 증오를 떨쳐버리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 민족화해의 새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소명인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한 끼 식사비를 절약해서 북한 동포 한사람이 한 달간 먹을 수 있는 국수를 마련”하는 ‘사랑의 국수 나누기 운동’을 펼쳤고, 끊임없이 밀가루를 비롯해 식량을 지원했던 일들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정치지도자들은 아무리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형제적 사랑 회복’이 계속될 수 있도록 식량지원을 비롯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종교인들의 남북교류와 민간인들의 여러 가지 교류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이 우리 한반도에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남북한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 6월 22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 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해) 루카 9,11ㄴ-17; 13/06/02

요즘 어떤 분들은 어렵다고 합니다.

우환을 겪고 있는 시댁과 친가 식구들, 기대만큼 썩 믿음이 가지 않는 배우자, 편치 않은 자식과의 관계, 잘 풀리지 않는 일, 확실히 보장되지 않은 미래 등 때문에 힘겹다고 합니다.

세상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기에,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또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뭐든지 다 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해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때가 되고 여건이 되고 주님께서 허락하셔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주님께서 관련 당사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모아주시며, 사물과 여건을 준비시켜 주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뭐가 어떻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기에 힘겹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기에 역경에 부딪혀도 외롭거나 포기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에 행복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기에 허상과 탐욕에서 벗어나 사실 그대로의 내용 자체에서 오는 힘을 얻기에 행복합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25절)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채워주시기에 평안합니다. 우리가 불확실한 돈이나 연줄이나 자리에 연연하여 불안해 하기 보다 주님께 맡기기에 평안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26절)

우리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에 지치거나 목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물질이나, 유한한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한숨에서 벗어나 생생한 힘을 얻습니다.

“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성체송가 23절)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알려줍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 9,12)

주님께서는 현실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초월적인 선택을 요청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13절)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좋은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오늘을 이겨내고 오늘을 꿋꿋이 살아나가기 위해 기도합니다.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13절)

그 일이 이루어질 그 날, 우리가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데 함량 미달이거나 우리의 과오 때문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준비하며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14절)

그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영적으로 굳세게 무장시켜 주시기를 청하며 꾸준히 그리고 진실하게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16절)

그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열매 맺어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17절)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 주시고 채워주시고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아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 11회 생명의 날 담화문- '삶의 질'이 생명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해) 요한 6, 51-58; 05/05/29

올해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회칙 '생명의 복음'을 반포하신 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회는 일찍이 인간의 존엄성과 그 전반적 소명에 부합하는 윤리를 제시하고자 노력해왔고 (생명의 선물, 1항), 특히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나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사랑과 헌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에 위임된 기본적인 사명을 꾸준히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 기술 분야의 놀라운 성과로 인간 생명의 기원과 죽음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라는 간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새로운 윤리적 차원의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한 윤리적 가르침을 포함하는 ‘생명의 복음’을 우리 시대를 위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회칙 '생명의 복음'이 '죽음의 문화'로 규정하는 오늘날의 생명 경시풍조의 배경에는 "하느님 의식과 인간 의식의 실종"(생명의 복음, 21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의 기승은 인간들에게서 창조주 하느님을 빼앗아버렸고 하느님 의식의 실종은 결국 인간 의식, 곧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대한 존중 의식마저도 빼앗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더 이상 하느님의 빛나는 선물로, 자신의 책임에 맡겨진, 따라서 사랑으로 보살피고 '존중'해야 할 '신성한 어떤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 결과 생명 그 자체는 단순한 '사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 24항)

최근 우리 사회 도처에서 안락사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소위 '삶의 질', 또는'품위 있는 죽음' 등의 이유를 내세워 안락사를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습니다.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이기 때문에 영양 공급을 중단하여 죽도록 하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라든가, 말기환자가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등 반생명적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죽음을 매우 커다란 고통으로 이해하여, 하루 빨리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위해 의료적인 도움을 받아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 안락사를 마치 최선의 선택인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또한 말기환자의 주위에서는 '삶의 질'의 이유를 내세워 불필요한 치료를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인 치료나 영양공급까지도 무의미하다고하여 그 중단을 법제화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임종을 앞둔 말기환자라 하더라도, 비록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정상적인 간호가 필요하고, 유용한 영양공급과 함께 의약을 투여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 치료받고자 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온당한 소망이 병자를 돌볼 의무를 지닌 사람들로부터 거부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락사에 관한 선언, 4)

인간의 생명은 인간이라는 그 사실 때문에 고유한 가치를 지닙니다. 곧 인간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질'로서 인간을 평가하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을 소유가치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삶의 질'이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경제적 효율성, 무절제한 소비주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쾌락으로 해석됩니다. 더 나아가 인간 상호간의 심오한 관계, 영적 및 종교적 차원과 같은 더 심오한 차원들은 무시되고 맙니다. (생명의 복음, 23항)

'삶의 질'로 인간의 생명을 판단하려고 하는 시도는 이미 질 높은 삶을 살고 있거나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만을 참된 인간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의 질'이라는 개념은 보호받을 인간의 권리와 인간을 보살필 사회의 의무를 세우는 윤리적 기준이 될 것이고, 나아가 인간을 정의내리는 데에도 이용될 것입니다. 어떤 생명들은 표준 능력에 충분히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질 높은 생명이 누리는 것과 동등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사회의 병자, 고통 받는 사람들, 어린이, 노약자들은 누가 보호하겠습니까?

'안락사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삶의 질' 논쟁이 아니라 참된 '인간 의식의 회복'을 위한 고뇌입니다. 더 이상의 치료가 불필요한 환자란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환자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삶의 마지막 순간을 초라하게 맞이하고 있는 말기 환자라 하더라도 이 마지막 시간은 그의 일생 중 완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러한 환자에게 의료인과 가족들은 환자에게 의료적인 도움과 함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함께 동반하는 동행자로서 다가서야 할 것이고, 동시에 환자에게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동참과 현존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감사한 마음으로 체험케 해주는 의미의 전달자로서 다가서야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품위 있는 죽음이란 이렇듯이 참된 인간적 관계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병자들과 임종자들에게 끝없는 친절과 정성어린 사랑의 위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하게 필요한가를 늘 기억하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그럼으로써 '생명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길 기대합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의 관심과 도움을 통하여 생명의 하느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삶으로 건너갈 것이며, 우리 또한 그들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2005년 5월 생명의 날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생명윤리연구회 위원장 안 명 옥 주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해) 루가 9, 11-17; 2004/06/13

오늘 복음은 마치 '쉬어 가는 페이지'같다. 너무나 풍요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니 말이다.

오늘 복음은 시편 23편 '주님의 나의 목자'를 연상하게 해준다.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누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시편 23, 2)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다가오는 군중들을 다 돌보아 주신다. 먼저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시고, 또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을 들어주시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시고, 병든 이를 고쳐주시고,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하나씩 하나씩 다 들어주신다.

그러는 새에 날이 저문다. 하루가 지나는 지도 모르게 예수님은 사람들과 또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기쁜 하루를 보냈다.

이제 저녁이다. 슬슬 시장기가 돌기 시작한다.

배가 고프기 시작한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한다. "여기는 외딴 곳이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근방 마을과 농촌으로 가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얻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루가 9, 12) 제자들은 예수님께 아주 적절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지 어떻게 교회가 자기들 먹을 것까지 챙겨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엉뚱하게도 제자들에게 커다란 숙제를 던지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3)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또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으시니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어려운 말인지. 우리는 가끔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야말로 흉내내기이지 예수님일 수는 없다. 예수님은 유일무이한 분, 이 세상에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다시없는 홀로 거룩하신 분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말한다. "지금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어디 가서 이 모든 사람을 먹일 만한 음식을 사오라는 말씀이십니까?"(13)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어디 가서 얻어오기 전까지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우리가 겪기엔 너무나 버거운 일들 앞에서 우리는 망설이고 방황한다. 기적이나 있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망연자실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모두 풀밭에 앉히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다."(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이루신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아들였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17)

성서 사회학자들은 이 장면을 이렇게도 설명한다. 어떤 소년이 자기가 점심으로 싸가지고 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놓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 것을 내 놓아 십시일반으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먹을 만큼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일리가 있는 해석이고, 예수님처럼 기적을 할 수 없는 우리네 인간들이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놓을 사람인가? 오늘 성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지, 누가 그 빵과 물고기를 내 놓았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좀 전에 보았던 요한 복음의 기사에는 어린아이가 내 놓았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것도 아니오, 제자들의 것도 아니오. 어린이의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어린이는 누구일까? 아니 누가 그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내어놓음으로써 주님께서 그것을 가지고 기적을 하시도록 할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 누가 그 어린아이 역을 맡을 것인가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를 놓고, 나 말고 네가 나서라 하면서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릴 셈인가? 그 어린아이는 바로 나다. 내가 그 어린아이처럼 나의 것을 먼저 주님께 내 놓고 우리 함께 내 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정말 나눔이다.

한 두 번은 희생적인 봉헌이 필요할지 모른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하셨습니다."(히브 9, 26)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계속 예수님께 희생해달라고 요구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예수님께 기적을 내려달라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나무 꼭대기만을 쳐다보고 누워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남의 도움만을 바라며 수동적으로 살 것인가.

기적을 이루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 계시지 않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주님 희생의 그 기적을 배우고 재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의 희생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자신의 몫에서 조금씩 조금씩 떼어 만들어 내어 기적처럼 나누는 것이다. 우리말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인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으로 받아 모시는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으면서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감사드린다. 우리를 위해 주님 생명을 내주시고 오늘 또 다시 성령을 통해 교회의 미사를 통해 주님의 몸과 피를 우리 삶의 양식으로 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께서 내 주신 생명을 받아먹은 우리는 형제들과 나눔으로써 성체 성혈의 기적을 이루어 나간다. 우리가 나눔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눈 것이 주님 사랑 안에서 기적처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 26)

아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문

2003/06/22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2천년 대희년을 맞이한 지 벌써 3년째에 접어들고 있으나 우리는 지금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과 어린 생명들이 무차별적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한반도에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대립으로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를 원하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된 목소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교회에 있어서 희년은 죄와 그에 따르는 벌을 사해 주는 용서의 해, 상반된 집단 사이의 용서의 해, 다양한 회개와 참회의 해”라고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대희년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참회하는데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1965년부터 사용해 오던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의 명칭을 ‘단절과 부정의 표현’이라는 이유로 1992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꾼 지 벌써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무관심 속에 북한교회는 여전히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국제사회에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한 이후 우리 교회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주민들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해왔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북한의 ‘조선가톨릭교협회’라는 천주교 단체와의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북한주민들에게 천주교를 알게 하고, 북한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지난 3월 2일 평양의 장충성당 신자들이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 일치의 상징인 명동성당에서 우리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북한주민들을 돕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함이 없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교회가 6·25전쟁이 발발한 날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설정한 이유는 민족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교회가 앞장서자는 의미와 함께 평화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거듭 새기자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참된 용서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과 분단의 아픔을 씻어내야 하며,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관용의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북한은 한편으로는 핵무기 개발을 통해 우리를 볼모로 하여 미국으로부터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써 참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 노력은 국제사회의 협력, 무엇보다도 우리의 협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와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북한이 잘못된 판단으로 돌출행동을 하지 않도록 그들의 변화 노력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소망은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고, 북한지역에 복음화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도와 회개, 그리고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그들을 무시하고 귀찮아하며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미움의 찌꺼기를 털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는 이 땅의 평화는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깃들 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속의 평화는 북한의 형제 자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같이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될 때 싹이 트고, 모두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 되이 받아들일 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실현되는 날까지 이어지고 삶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어려움에 처한 북한 주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나누어주고,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북녘 교우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남북한과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 참회하며 그리스도께 평화의 선물을 간청하도록 기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일부에서는 북한주민들의 인권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는 인권회복을 표방하는 전쟁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인권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인권을 되찾아주고 진정한 평화를 쟁취한다는 명분 하에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전쟁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어려워만 가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가고 있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특히, 지난 6월 14일에는 경의선 철도의 연결식이 거행되어, 머지 않아 지금 「민족화합의 대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이 곳 도라산역을 지나서 북한의 개성역을 거쳐 평양과 신의주까지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회개하며 용서와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허락하실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집시다. 또한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어려운 상황일수록 지혜를 모아 난국을 타개해 나갈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합시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북녘의 형제 자매들에게도 풍성하게 내리시길 바라며,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6월 22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김운회 주교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해) 요한 6, 51-58; 2002/06/02

어떤 남매가 공원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건너다가 오빠가 차에 치었다. 병원으로 급히 실려갔고 바쁜 와중에 동생의 피를 수혈해야 했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을 마치고 동생에게 "네 덕분에 오빠가 살아났단다."하자 그 동생이 "그럼 저는 언제 죽어요?"하고 물었다. 결국 그 동생은 자기 피를 오빠에게 주면 자기는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오빠를 위해서 자기 피를 내 준 셈이었다. 매년 성체 성혈 대축일이 되면 이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고, 주님의 희생제사에 감사드리며 우리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

성체를 영하며 우리는 이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성체 안에 살아 계심을 믿는다. 우리에게 말씀과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주시고, 급기야 그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서 생전에 빵을 나눠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태 26, 26)하시고 또 포도주 잔을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27-28절)하신 바와 같이 친히 이 성체 안에 살아 계시며, 영성체를 통해 오늘 방황하고 목말라하는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과 주님의 생명을 나눠주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

성체를 영하며 우리는 이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마지막날에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것을 희망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요한 6, 54-55)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세상의 죄악에 굴복하지 않고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의 힘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바란다.

성체를 영하며 우리는 이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기 위해 주님의 몸을 우리에게 내 주셨듯이 우리도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 34)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도 세상을 향해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

성체성사는 우리 구원을 위한 주님 생애의 완성이었지만, 우리에겐 완성을 향한 시작이다. 참으로 내 생애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적극적인 사랑의 봉헌으로 변화되기를 청하며 성체성사를 영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해) 루가 9,11ㄴ-17; 2001/06/17

어느 분이 전화로 "성체성사는 언제 생겼고, 왜 우리가 성체를 모셔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제정하셨다. 사도 바오로는 최후의 만찬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23-24) 우리가 미사 때 마다 받아 먹는 빵이 바로 이 예수님의 몸이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25)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죗값으로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사제가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들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그 말씀을 되새기면 성령께서는 빵을 예수님의 몸인 성체로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인 성혈로 축성하여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미사를 통해 다시 한 번 거행하게 되는 것이다. 성체성사를 통해 피를 흘리지 않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봉헌하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기억하고 재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몸을 받아 먹음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우리를 맡겨드리며, 주님과 하나되어 우리 자신을 아버지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아울러 성체를 모신 우리는 세상에 나아가 우리 자신을 또 하나의 성체로 바쳐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생명을 바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주님과 함께 우리를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우리가 첫영성체 이후에 계속 영성체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성체성사를 통해 거듭 우리 죄를 씻고 새로 나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실현하도록 명하신 말씀을 세상 안에서 실현할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하심에 나를 믿고 맡기며 동시에 나를 세상을 위한 제물로 바친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나해) 마르 14, 12-16. 22-26: 2000/06/25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르 14, 22)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빵을 내주신다. 세례와 첫영성체를 하기 전에는 영성체하는 신자들을 바라보면서, 교리를 빨리 마치고 성체를 모시고 싶어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모시고 싶어하는가? 성체가 맛있는가? 고단백 농축 음식인가? 만병통치약인가? 그렇지 않다. 성체는 어떤 면에서 우리의 육신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6장에서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49-50절)라고 하신다. 성체는 꼭꼭 씹어먹어야 소화가 되는 빵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녹아버리거나 먹으면 없어져버리는 아이스크림과는 다르다. 성체가 빵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씹어먹는 빵도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51절)라고 하신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이다. 즉 우리가 성체를 모시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56절)고 하신다. 성체를 모시면 예수님과 결합되고 또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되는 성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힘으로 살게 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힘은 예수님의 생명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 새 사람이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람, 예수님께서 세우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새 사람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7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가 우리 생의 목표임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필코 이루어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을 모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힘을 받는다. 우리는 그 힘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룩하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켜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라고 하신다.

성체를 모시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셔서 여러분이 주님의 증거자가 되고 주님의 협조자가 되어 예수님의 힘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이루어 하느님 나라를 만드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해) 요한 6,51-58; 99/06/06

첫영성체 어린이들에게 '예수님 말씀 중에 마음에 와닿은 구절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어떤 친구들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하늘나라에 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가난해지기는 싫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그리고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 7-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할 우리의 주님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서 첫영성체를 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빨리 먹을 것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가난한 사람을 보면 먹을 것을 주고 싶습니다. 가난해지고 싶어서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주게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가난해집니다. 그러나 내가 남에게 내준 만큼 예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54) 예수님을 사랑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또 가난해집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55)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모른 체하고 재물을 사랑하면 부자는 될 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는 갈 수 없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57)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힘으로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해) 루가 9,11ㄴ-17 : 98/06/14

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너에게 네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하면 주겠니?" 그랬더니 그 친구가 "다는 못 줘도 반은 나눠줄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참 솔직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친구입니다. 그런데 자기 것의 반이면 결코 작은 양이 아닙니다.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똑같이 많은 군중들을 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돌려보낼 생각을 하는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먹이고 재울 생각을 하십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문제는 가난한 이들 스스로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가 봅니다. 제자들이나 우리는 너와 나는 남이다. 너와 나는 구별되는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한 식구로 보시는 진정 우리의 부모님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루가 9,13)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준 빵과 물고기로 기적을 베풀어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도 열두 광주리가 넘게 남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가문이 다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먹여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목숨을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목숨을 받으시고 예수님의 몸과 피로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미사통상문 성찬 감사기도; 1고린 11,24-25 참조)

우리가 오늘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이 몸은 바로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큰사랑"(요한 15,13 참조)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도 오늘 첫영성체를 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이 주신 사랑을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로 합시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나해) 마르 14,21-16.22-26 : 97/06/01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 가서 차렸으면 좋겠습니까?"(마르 14,14)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은 "이미 자리가 다 마련된"(15) 장소에 준비하라고 이르신다. 그리고 정작 제자들이 준비해야할 음식마저 주신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22ㄷ) 그리고 먹는 것을 주시는 것으로는 모자라 사람들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해 주님의 피마저 내 주신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24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이 어떤 집이고 얼마짜리이냐만 차이가 있을 뿐 - 특별히 집에 정착하여 사는 거주형태를 취하지 않는 집시나 떠돌이 등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 우리 중 대부분은 집에서 살고 있다. 이미 마련된 장소에 주어진 여러 재료를 써 집을 짓거나 지은 집을 이용하면서 산다. 먹을 것도 마찬가지다. 다 만들어 주신 세상에서 우리는 주어진 곳에서 주어진 것을 얻어먹고 살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생명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사마저 주어져 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살 것을 다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마저 씻어 주신다.

물론 물가로 데려간 말이 물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주어진 살 곳과 먹을 것을 얻고 먹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같은 이치 속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이 아무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제시해준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길로 걸어가지 않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얻어먹지 않으면 신앙은 '그림의 떡'이요, 우리는 '물가에 데려다 주었지만 물 안 먹는 말'이 될 뿐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25) 하신 듯하다. 편식하거나 더 고급만 찾으러 다니느라 엉뚱하게 인생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주어진 양식을 감사히 받아먹으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신앙과 선교사명을 우리 삶의 목표와 본질로 삼고 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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