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부활성야미사 강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할 권리를 주십니다”

(가해) ’20/04/12

“안식일이 지나고”(마태 28,1) 여인들은 무덤으로 갔습니다. 오늘 파스카 성야의 복음은 이렇게 안식일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날은 파스카 성삼일 가운데 어쩌면 우리가 가장 소홀히 여기는 날이기도 합니다. 성금요일의 십자가로부터 부활 주일의 알렐루야로 건너가겠다는 떨리는 기대감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는 올해 성토요일을 그 어느 때보다 위대한 침묵의 날로 느낍니다. 우리는 그날 여인들이 느꼈던 감정 안으로 우리 자신을 이입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여인들의 눈은 고통의 드라마,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예기치 못한 비극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보았고 마음으로 죽음을 겪었습니다. 고통에 두려움이 따랐습니다. 나도 “스승님과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재건해야 한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상처받은 기억, 억눌린 희망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니 말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때는 그 여인들에게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여인들은 꼼짝없이 주저앉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슬픔과 회한의 어두운 세력에 굴하지 않았고, 비관론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으며,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하면서도 특별한 무언가를 이행했습니다. 각자 집에서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준비했던 겁니다. 그들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어둠 안에서 자비를 밝혔습니다. 성모님도 장차 당신에게 봉헌될 이날(안식일, 토요일)에 기도하고 희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고통이 들이닥쳐도 주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비록 그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 안식일의 어둠 속에서 “주간 첫날 새벽”, 곧 역사를 바꿀 그날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심겨진 씨앗처럼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고 계셨습니다. 여인들은 기도와 사랑을 통해 희망이 꽃피우도록 도왔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슬픈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인들처럼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요! 돌봄, 사랑, 기도의 작은 몸짓을 통해서 말입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 여인들은 무덤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천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기 때문이다”(마태 28,5-6). 무덤 앞에서서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희망을 주시는 분,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천사의 선포를 확인시켜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10절). ‘두려워하지 마라, 겁내지 마라.’ 바로 이것이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 어둔 밤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반복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밤 우리는 아무도 우리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얻습니다. 곧, 희망할 권리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새롭고 살아있는 희망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그저 어깨나 두드려주며, 지나가는 미소로 상황을 격려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혼자 힘으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아름다움에 의지하고 마음에서 격려의 말이 우러나오게 하면서 이 몇 주 동안 ‘모든 게 잘 될 겁니다’고 꾸준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두려움은 커지고, 가장 담대한 희망도 사라져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희망은 다릅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잘 되도록 바꾸실 수 있다는 확신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하느님은 무덤에서조차 생명이 움터 나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들어간 사람이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나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주시려고, 돌이 놓였던 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려고 부활하셨습니다. 무덤 입구에 있던 큰 돌을 치우신 그분은 마음을 봉인했던 돌덩이를 없애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체념에 굴하지 말고, 희망 위에 돌을 올려놓지 맙시다. 우리는 희망할 수 있고 또 희망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처한 매상황마다, 고통, 근심, 죽음의 순간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의 빛은 무덤의 어둠을 비췄습니다. 오늘 그 빛이 삶의 가장 어두운 뒤안길을 비추길 원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비록 희망이 마음속에 파묻혔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더 크신 분입니다. 어둠과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시는 하느님과 함께, 용기를 내십시오!

용기. 이 단어는 복음에서 항상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단 한 번 다른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눈먼 이)에게 말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 10,49). 도움이 필요한 우리를 일으키신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정 중에 힘없고 나약하여 넘어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이 여러분을 붙들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하지만 여러분은 아본디오 신부처럼 “용기란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것”(만초니, 『약혼자』, 25장 참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용기를 줄 수 없지만, 용기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선물처럼 말이죠. 기도 중에 마음을 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빛이 들어오도록 마음의 입구에 놓인 그 돌을 치우십시오. 그분을 이렇게 초대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소서, 주님. 저의 두려움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저에게도 ‘용기를 내어라!’고 말씀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주님, 당신과 함께라면 저희가 시련을 겪더라도 혼란에 빠지지 않습니다. 저희 안에 그 어떤 슬픔이 있더라도 희망해야 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십자가는 부활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의 어둔 밤에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불확실함 가운데 확실함이 되시고, 우리의 침묵 속에 말씀이 되십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길러주시는 당신의 사랑을 결코 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스카 선포, 희망의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두 번째 부분, 곧 파견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천사는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마태 28,7)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보다 먼저, 항상 우리를 앞서 가십니다. 그분이 우리 앞에 걸어가시고,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기 위해 우리의 삶과 죽음을 찾아오셨음을 아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에게 일상생활, 가족, 직업을 떠올리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곳에, 매일의 삶 속에 희망을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갈릴래아는 제자들에게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첫 부르심의 장소였습니다. 갈릴래아로 돌아가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았고 부르심 받았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갈릴래아가 있습니다. 나의 갈릴래아에서, 바로 거기서,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의 부르심으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떠올리며,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위기의 순간이나 시련의 때에 이곳은 우리가 항상 다시 출발해야 할 지점입니다. 나의 갈릴래아에 대한 기억 안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더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그들이 있던 곳, 곧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 곳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멀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도성의 신성함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다양한 신을 섬겼던 서로 다른 민족이 살았던 지역으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우리를 파견하시고, 그곳에서 다시 떠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희망의 선포가 우리의 신성한 테두리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가 위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 손으로 만져 본 “생명의 말씀”(1요한 1,1 참조)을 누가 전하겠습니까? 위로하고 (서로) 남의 짐을 져 주고(갈라 6,2 참조) 용기를 북돋우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는 죽음의 때에 생명의 선포자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이기에, 각자의 갈릴래아에서,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에게 속한 인류의 모든 지역에서, 생명의 찬가를 전합시다! 죽음의 울부짖음을 그치게 합시다. 전쟁은 안 됩니다! 무기 생산과 거래를 중단시켜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총이 아니라 빵이기 때문입니다.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낙태를 멈춰야 합니다. 생필품이 부족한 이의 빈손을 채워주기 위해 가진 이의 마음이 열리길 바랍니다.

마침내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습니다(마태 28,9 참조). 우리를 만나러 오시기 위해, 무덤에 들어갔다가 나오기까지 긴 여정을 걸었던 그 분의 발을 말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짓밟고 희망의 길을 열어준 발을 껴안았습니다. 희망을 찾는 순례자들인 우리는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 당신께 매달립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등을 돌리고 생명이신 당신께 우리 마음을 활짝 엽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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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원문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교황의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6

(다해) 요한 20,19-31; ’19/04/28

제5장 사랑의 결실

사랑은 언제나 생명을 낳습니다. 아이들은 부부애의 살아있는 표상이고 부부일치의 영원한 징표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존재의 생생하고 불가분한 종합입니다.

새 생명의 환대

가정은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며, 하느님의 선물로 환대하는 자리입니다. 모든 새 생명을 통해서 “우리는 온전히 무상으로 주어진 사랑을 이해하게 되고, 이는 계속해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것은 먼저 사랑받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이들은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부터 사랑받습니다.” 이는 언제나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수위성을 반영합니다. 사랑받을만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이미 사랑받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의 실수 때문에 아이들이 거부되고 버려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인권과 어린이들의 권리에 대해 엄숙한 선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부모에게 맡기신 새 아이라는 선물은 수용으로 시작되고 계속 평생 보호를 받으며 최종 목적인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과 임신

임신은 힘든 기간이지만 경이로운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협력하여 새 생명의 기적을 낳습니다. 임신한 여성은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아이에 대해 꿈꾸게 됩니다. 어떤 부모들은 적절한 시기가 아닐 때 아이가 생겼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새 생명이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지, 부모 마음에 드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또는 부모 계획이나 기대에 적합한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은총을 청하십시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아이는 태어나면서 양육과 보호와 더불어 사랑에 대한 영적 능력의 보장을 선물로 받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주님께서 지니신 아버지의 면모와 어머니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태어나서 처음 몇 달 동안은 어머니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성의 위대함은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이며, 사회에 필요한 여성성에서 비롯된 모든 권리를 포함합니다. 여성의 고유한 능력, 특히 모성에도 의무가 주어집니다. 사회는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여성의 사명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합니다. 어머니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될 것입니다. 가장 힘든 때에도 어머니는 언제나 온유함과 헌신과 도덕적 힘을 증언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함과 연민으로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는 그 아이가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세상이 그를 환대해 주는 좋은 곳이라는 것을 경험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 사회가 ‘아버지 없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남성성,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해방된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오늘날 아버지가 위압적인 존재라는 것이 더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 곧 아버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버지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 자신의 성취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합니다. 이는 아이들의 적절한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가까이에서 모든 것, 곧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놀 때나 노력할 때, 용기를 내거나 두려워할 때, 방황하거나 바른 길로 되돌아 올 때에 아버지가 늘 현존합니다. 아버지의 ‘현존’은 ‘통제’라는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찾습니다.” 아이가 이런 면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확대된 결실

혼인한 많은 부부들이 자녀를 가지지 못합니다. 입양은 모성과 부성을 매우 너그러운 방식으로 실현합니다.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며, 가정이 없는 아이에게 가정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불임의 경우뿐만 아니라, 입양이나 위탁 부모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은 혼인의 체험에서 특별한 결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이 평범하게 공동체에 속하며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는 소박한 가정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는 가정에 세상을 ‘가정화’하는 소명을 주시어, 사랑의 힘을 체험하는 혼인한 부부가 사랑으로 버림받은 이의 상처를 감싸주고 만남의 문화를 형성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형제애, 사회적 감수성, 약자 보호, 빛나는 신앙, 활기찬 희망이라는 색으로 회색 사회를 사랑으로 밝게 칠합니다.

몸의 식별

성찬례 거행은 모든 이가 “자신을 돌이켜보고”(1코린 11,28) 자기 가정의 문을 열어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과 더 깊은 친교를 이루고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는 성찬례적 사랑의 성사를 받으라는 지속적인 요청이 됩니다. 가난한 이들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다양한 형태의 분열과 증오와 불평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모령성체를 하는 것입니다.

확대 가정의 삶

핵가족과 개인주의를 넘어 우리 모두는 자녀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받은 첫 번째 선물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넷째 계명은 인간 사이의 모든 존중에 뿌리입니다. 부부는 신뢰와 대화를 증진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혼인은 남편과 아내에게 자녀 되기의 새로운 방식을 찾는 도전이 됩니다.

노인들이 부당하게 소외되고 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살아있는 일원이라고 느끼게 하려면 감사와 존중과 환대의 집단의식을 일깨워야 합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조부모 덕분에 그리스도교 생활에 입문했습니다. 조부모들은 지금 오래된 길의 상속자이며, 그러기에 존중받아야 합니다. 역사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 때는 그 때였고, 지금은 지금이다.’ 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노인들을 내버리는 사회는 뿌리가 뽑힌 사회입니다.

형제자매와 더불어 성장하면 상호 배려, 곧 도움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부부와 자녀뿐만 아니라 확대된 대가족 형태는 혼인과 가정 공동체의 기반이고 영혼입니다. 이렇게 확대된 가정은 많은 사랑으로 미혼모, 부모가 없는 아이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많은 애정과 친밀함이 필요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 중독에 맞서 싸우는 젊은이들, 미혼자들, 헤어졌거나 사별하여 홀로된 이들, 자녀들이 돌보지 않는 노약자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심지어 삶의 패배를 경험한 이들”까지도 감싸 안아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확대된 가정은 부모의 취약함을 보완해 주고 자녀들이 폭력, 심지어 학대로 고통받을 수 있는 상황을 발견하고 알리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부모가 온전한 사랑과 안정된 가정을 보장해 줄 수 없는 경우에도 이를 자녀들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 확대된 가정에 배우자의 부모와 모든 친지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친지들은 경쟁자나 위험한 존재나 또는 불청객으로 여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사랑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부부결합은 부부의 타당한 자율성과 친밀함을 유지하면서도 부부 서로의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고,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비판을 삼가고, 서로를 보살피고 소중히 여길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또한 배우자에 대한 너그러운 사랑의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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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꽃꽂이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나해) 요한 20,19-31; ’18/04/08

최근에 어느 분이 “잠 좀 푹 자고 일하고 싶어요.” 라는 소원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잠이라도 한 잠 푹 자고 일하고 싶은데 쏟아지는 일감이 너무 많아서 하고 또 해도 업무량을 제대로 채우지 못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한다는 여건을 하소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여건들과 상황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자식새끼 키우느라 어쩔 수 없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납기일을 맞춰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야근에 특근까지!” “가정이 조용 하려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이 참아야지!”

한 번쯤 생각해 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에 구애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해보고 싶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비슷한 하소연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시간만 많으면, 나도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싶습니다.” “내가 돈만 많으면, 기부도 하고 남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 “내가 몸만 성하다면, 나도 남부럽지 않게 봉사활동 좀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세상의 죄악을 쳐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들이 돌아왔습니다. 이 부활시기에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미루고 미루었던 그 좋은 꿈들 중에 하나라도 미련 없이 해 보았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시어 가운데 서시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처해있는 갖가지 조건과 처지와 상황들 때문에, 조급하고 불안하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갖가지 장애와 장벽들을 쳐이기시고 오늘 부활하시어 그 동안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던 상처들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20절)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절)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그러시고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온갖 장애와 장벽들에게서 벗어나 일어설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말씀하시고, 직접 부활하신 주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우리는 우리가 그 동안 주님을 못 본채하고 무시하며 배반해 왔던 것들을 용서해주십사고 청해도 부족하여 얼굴을 조아리는데, 거꾸로 주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용서의 사도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어주시면서 우리에게 용서의 힘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죄를 짓고 반목하면서 너 스스로 가둬놓고 짊어지고 살았어야 했던 죄악의 멍에에서 너도 해방될 것이다.’ 라고. ‘용서하면, 그렇게 서로를 잡아 놓고 있던 짐과 장벽, 부정적이고 얼어붙은 인관 관계에서 오는 멍에와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라고. ‘그렇게 용서함으로써, 서로가 죄악의 노예에서 풀려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자녀로 회복되고 다시 자유롭게 살도록!’

나 혼자 용서하면 나만 손해보고, 나만 억울하게 될 것이라고 여기며, 스스로에게 죄악의 멍에를 씌워 결과적으로 죄악의 굴레 속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 초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자기 고집과 자존심 그리고 감정과 원한 속에 갇혀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죄의 상태에 더욱 더 깊이 빠져들어가 마치 죄악에 미련이 남아있기라도 하는 듯 늪처럼, 습관처럼 아예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불행하고 힘겹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절)

이번 부활시기에는 그 동안 마음만 먹고 하지 못했던 일을 시도해 봅시다.

이번 부활시기에는 같이 사는 누구 남들을 두고 나쁜 말은 안 하고, 적어도 좋은 것만 기억해 주고 좋은 말만 해주자.

이번 부활시기에는 용서하기에는 너무나도 한이 맺혀서 용서까지는 못해도, 적어도 없던 것으로라도 하자.

이번 부활시기에는 성령을 받아 적극적으로 용서를 해주기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못 본 채, 모른 채라도 해주자.

이번 부활시기에는 그 동안 여러 가지 여건과 처지 때문에 마음속에서만 간직한 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시간만 있으면, 여유만 있으면 하려고 했던 좋은 신앙의 덕목을 하나 실현해 봅시다.

이렇게 나쁜 기억과 나쁜 말이라도 하지 않고 좋은 것만 기억하고 좋은 말만 하면서 부활시기를 보내게 되면, 우리 안에 악이 점차로 설 자리가 없어져 스물 스물 사라질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안에 주 예수님의 사랑이 조금씩 조금씩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안타까움이나 섭섭함과 원망이 줄어들어 어느덧 우리를 괴롭히던 조급증도 홧병도 가실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같은 맥락에서 반문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 5,5) 우리 안에 주 하느님의 사랑을 점차로 회복되게 되면,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의 새 생명으로 새로 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사람으로 오셨다가 다시 하느님이 되신 주 예수님! 부활의 새 생명과 빛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으며, 우리도 새롭게 태어나기로 합시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내실 때의 그 맑고 고운 모습, 아름다운 생각, 사랑하는 마음, 죄악을 끊어버리고 선을 향하는 의지 등으로 돌아갑시다. 부활하시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우리도 우리 삶의 밝고 평안한 모습을 꾸며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부활 제2주일 꽃꽂이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부활 담화문 (로마와 온 세상에(Urbi et Orbi)

(가해) 요한 20,19-31; 17/04/23

교형자매 여러분,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전 세계의 교회는 초대교회 제자들이 전했던 놀라운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외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던 대로 진실로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던 고대의 파스카 축제가 바로 여기서 실현됐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부활로 우리를 죄와 죽음이라는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켰고, 우리 앞에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굴복하는 삶을 살고 바른 길을 놓치고 잃어버린 양과 같이 제 갈 길을 벗어날 때, 목자는 우리를 찾으러 오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은 몸을 낮춰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려놓고 기꺼이 양떼를 위해 죽으셨던 착한 목자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알렐루야!”

모든 시대에 걸쳐, 다시 살아나신 목자는 끊임없이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당신의 형제자매, 바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자비로운 사랑의 상처이자 수난의 흔적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길인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오늘날, 그분은 모든 다양한 형태의 악으로 짓밟힌 우리 형제자매를 당신의 어깨로 짊어지십니다.

다시 살아나신 목자는 고독과 소외라는 미로에 갇힌 모든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분은 존경과 친절로 이들 형제자매에게 다가가는 이들을 통해 갇힌 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하느님과 다시 우정을 맺기를 바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분은 비인간적인 노동, 불법 인신매매, 착취와 차별, 심각한 형태의 중독 등 신구 형태의 노예살이로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그분은 천진난만함을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걱정하고 계시며,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행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목자는 전쟁과 테러, 기근, 압제 등으로 강제로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분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이런 강제 이주자들이 형제자매를 만나 그들의 여정 안에서 빵과 희망을 나눌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혼란스럽고 때로는 극적인 환경의 오늘날의 세상에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각국의 지도자에게 분쟁의 확산과 무기거래를 막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특히 주님께서 계속되는 전쟁으로 공포와 죽음의 먹잇감이 되고 있는 시리아의 민간인에게 평안과 위안을 가져다 주기 위한 노력을 지속시켜 주실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지 예루살렘부터 이라크와 예멘에 이르기까지 중동지역 전체에 평화를 가져다 주기를 기원합니다.

착한 목자께서 계속되는 분쟁을 겪고 있으며 심각한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아프리카의 남수단과 수단, 소말리아, 콩고 민주공화국 국민과 함께 머물기 바랍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치적·사회적 긴장이 폭력으로 번지고 있는 남미 등지에서 공동선 증진에 헌신하는 이들의 노력을 지속시키길 바랍니다. 부패라는 재앙에 대항해 계속해서 싸우고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 대화라는 다리를 놓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발전을 이루고 법치주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강화하길 바랍니다.

착한 목자께서 여전히 분쟁과 유혈사태로 고통 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도와 우크라이나에 다시 화합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분쟁 피해자의 비극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한 모든 노력에 함께 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는 유럽 대륙에 계속해서 축복을 내리고 계십니다. 특히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로 위기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순간 주님의 희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부활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한 목소리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던 대로 진실로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위대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이라는 어두움을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길 기원합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나해) 요한 20,19-31; 15/04/12

언젠가 어떤 분이 술에 잔뜩 취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께는 나타났는데, 왜 저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십니까?” 주님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주님의 사랑 안에 푹 잠겨 살아가고 싶지만, 잘 느껴지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하소연한 것이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만, 머리 속으로만, 허상처럼, 현실을 떠난 영처럼, 기도 속의 신비체험으로만 주님께 잠기고 싶은 마음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고민 속에서 몸부림치며 탄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여러 번 여러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시기와 증오 속에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 16,21)

예수님께서는 왜 죽으셔야 하는지 그 이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주님께서 왜 죽으셔야 하는지,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모두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죽음의 의미와 죽음에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지 않았고, 그저 제자들의 마음 속엔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오르실 때에 그 밑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언제 어떻게 누리게 될 것인가 하는 일념만이 새겨져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사도 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해야 할 사명은 망각한 채, 계속 예수님 부활의 확신과 부활 이후에 이어지는 영광 속에 참여할 공과논쟁과 자리다툼 그리고 이익추구에만 골몰하는 제자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소연하십니다.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7-8)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재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형제들을 위해 봉사하여야만 할 우리 자신의 본분은 망각한 채, 토마처럼 계속 자신의 마음만을 채워달라고 탐욕스럽게 외칩니다. ‘주님, 저희에게 나타나소서!’ ‘주님, 저희를 구하소서!’ ‘주님,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주님, 이러 저러한 것들을 주소서!’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자식으로서 부모의 말씀을 존중하고 효도해야만 할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고, 배우자와 가족을 돌보며 살펴야만 할 자신의 의무는 망각한 채, 토마처럼 자기 개인의 편의와 아집에 빠져 외칩니다. ‘내 생각에 맞춰주세요.’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오늘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내보내시면서 각자에게 이루도록 하신 서로 다른 소명은 무시한 채,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라고, 하느님의 요구와 초대보다 세상의 요구대로 살아가라고 요구하며 외칩니다. ‘넌 내가 낳고 내가 기른 내 자식이니까, 내가 펼쳐주는 세상에서 내가 준비해주고 내가 열어준 대로 살아야 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해!’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잡혀 죽을까 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주님 곁에 다가서서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예수님께서는 서로 경쟁하며 상대를 밟고 올라서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예수님께서는 토마처럼 자신을 봐달라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토마처럼 빠지고 제외되는 이 없이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니, 토마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축복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만의 세계로 숨어들면서,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고 스스로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는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내려지는 주님 사랑과 은총을 느껴 빛과 행복의 나라로 들어가시길 빕니다.

눈 앞에 닥친 어둠과 시련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말고, 주님 부활의 힘으로 살아나가시길 빕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기에, 오늘의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신앙의 힘으로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내실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휘감아 주님의 사도로 만들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형제자매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고 구원의 희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



부활 제2주일

(다해) 요한 20,19-31: 2013/04/07

부활절 잘 보내시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21)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그리고 오늘 제자들과의 첫 번째 만남에 끼지 못해서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토마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보면,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평화’와 ‘용서’와 ‘믿음’을 연결시켜 말씀하십니다.

오늘 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새생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실적으로 믿는다고 해도 그만 안 믿는다고 해도 특별히 이득이나 손해를 보지 않는 관념적이고 전례적인 믿음에 그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의 생활이란 여태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주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고 억울하다고 느껴왔던 것이 사실은 그게 아니라, 영적인 이득이며 죄악이 인간 세상에 심어놓은 증오와 미움에서 해방되어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믿고 사는 새생활입니다.

지금까지는 용서하면 버릇만 나빠지고, 용서하면 나만 손해 본다고 세상 속에 살면서 경험해 온 대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해 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험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아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적과 원수를 만들고, 미움과 증오로 들끓게 됩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사람을 피하고 원망 속에 불편하게 살게 되고 오히려 스스로의 분노와 증오에 갇히게 되기도 합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으십니까?


평화롭게 살고 싶으면,

용서를 받고

또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없던 것으로 해주세요!


없던 것으로 합시다!


용서를 해주면 나도 편해지고 상대도 편해지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교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를 용서와 화해로, 자유롭고 기쁜 새생활로 초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통해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2000여 년 전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생명을 바치심으로써 다시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달려와 죄를 고백하고 주님과 형제들에게 죄를 용서 받고,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께 용서의 힘과 은총을 받아 형제들을 용서해 주면서 우리도 부활하기로 합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빕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1.23)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12/04/15

날이 갈수록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나에게 잘못한 일도 없는 데도 왠지 싫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싫어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것도 아닌데,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하는 것보다 거부감과 원망을 삭히기 더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은 경우에 따라서 참아도 되는데 미움은 스며드는 감정이어서 그런지 사랑보다 더 감추거나 지우기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용서는커녕 아예 눈에 안 띄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부정적인 감정인 미움은 긍정적인 감정인 사랑보다 더 지독해서 그런지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 미움을 삭히고 용서하는 긍정적인 감정이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은 나를 편하게 하고 기쁘게 하지만, 미움을 불태우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부정적인 감정은 나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슬프게 하고 심지어는 불쾌하고 부끄럽게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더 인생이 힘겹고 풀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 마음 안에서 사랑이 미움에게 짓밟히고 압박 받을 때 우리 인간 실존 자체와 우리 인격이 흔들리고 방황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믿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그리고 불신하는 토마스에게는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고 주님의 부활을 깨닫게 하시고 토마스의 믿음을 회복시키시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이라는 고백을 토마스에게서 받아내십니다.

그러시고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고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엮어 보면, ‘내가 너희를 보내 노니, 네가 나처럼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나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한 것처럼 너희도 너희에게 죄지은 이를 용서하게 되면, 그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너희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결론짓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도 청하지 않는 사람을 왜 용서해야 하느냐?’는 질문과 ‘그를 용서해 준다고 그가 감사를 한답니까 아니면, 변하기라도 한답니까?’ 등등의 외침과 ‘용서해 주면 나만 손해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식의 아우성들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부활하신 주님 자신을 증거 삼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들어오신 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죽기까지 희생하면 죽음에 버려지지 않고 다시 생명을 얻으며 영광을 받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너도 용서를 통해 평화를 얻고, 영광되이 새로 태어나겠느냐?’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가해)요한 20,19-31; 11/05/01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데… 그분이 사람 살듯이 걸어 다니신 것입니까? 부활하셨다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지난 주간 부활8부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발현 사화를 보면,

월요일 마태 복음 28,8-15에 여자들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은 “평안하냐?”고 물었고, 갈랠래아에서 제자들과 만나자고 전해달라는 말 외에는 특별히 그분의 모습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분은 제자들이 누구냐고 묻지 않아도 누군지 알 정도로 생전의 그분 그 음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요일 요한 복음 20,11-18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생전의 그 모습을 간직하고 계시지 않으셨는지, 마리아가 정원지기인 줄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실 때 마리아가 알아 듣고, 또 후에 제자들 앞에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부활하신 주님은 생전의 예수님의 목소리를 그대로 간직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수요일 루카 복음 24,13-35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성경을 풀이해주셨지만, 남자 제자들이어서 그런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주님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속에서 자신들의 마음이 타오르는 감정만을 느꼈을 뿐이었습니다. 그 후 저녁 때 숙소에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실 때 비로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뵈옵게 됩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발현사화는 음성도 다르고 생긴 모습도 겉으로 보아서는 달랐으되, 제자들이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방법과 은총에 따라 알아볼 수 있게 하셨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목요일 루카 복음 24,35-48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그 모습이 생전의 모습과 달랐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령이 아니라 손과 발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손과 발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씹어 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날 나타나신 주님은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가 제 기능을 다 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금요일 요한 복음 21,1-14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고기의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먹으셨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물고기의 기적을 보고 사랑하는 제자가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고, 나머지 제자들도 기적이 있은 후에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겉모습을 보아서는 못 알아차리고 그 기적행위를 보고 알아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목요일 복음과 같이 함께 빵과 고기를 씹어 먹었다는 내용을 전해 줍니다.

토요일 마르코 복음 16,9-15에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서도 믿지 못하는 이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이르십니다.

오늘 부활 제2주일 요한 복음 20,19-31에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는데도 들어오신 것을 보면, 그 몸이 생전의 몸과 같이 시공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는 주님 손가락에 남아있는 못 자국과 상처가 난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입증해 주심으로써 토마스의 믿음을 이끌어 내십니다.

이 모든 부활사화의 공통적인 점은,

첫째,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것과

둘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직접 보여주셨다는 사실,

셋째,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라는 사명을 주시고,

넷째,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하시지 않고, 마치 세상은 제자들에게 맡겨놓으시는 것처럼 홀로 떠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사화를 통해 드러난 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을 종합해보면,

첫째, 부활하신 주님은 살과 뼈가 있으며, 실제로 빵과 물고기를 씹어 먹고 두 발로 걸으신 살아있는 존재였고,

둘째, 그런데 제자들이 즉시 알아 뵙지 못한 것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은 생전의 예수님과 똑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셋째, 그분은 문이 닫혀있는 데도 들어오신 것을 보면,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으시는 몸을 가지셨지만, 실제로 먹고 말하고 몸에 상처가 있는 살아있는 몸이십니다. 교회는 이를 가리켜 ‘부활하신 주님은 새로운 몸 즉, 육과 영이 결합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본래 형상을 가지지 않으신 분이셨는데, 인간의 형상을 취하셔서 세상에 오셨다가 부활하셔서 주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셨다. 또는 주님 자신이 되셨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현상과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시는, 육과 영이 결합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표현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됩니다.

주 예수님의 부활은 추상적이거나 머리 속의 환상이 아니고, 2011년 전 우리 삶의 현실에서 일어났던 실제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날아다니는 유령이나 천사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아 움직이는 육을 가지신 참 인간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여, 그도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너도 그 원망과 죄악의 세상에서부터 해방되거라. 그렇게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나면, 네 마음 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도록 악이 쳐놓은 함정과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고,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 마음 속에 심어주신 선하심과 사랑의 마음을 회복하여, 부활한 새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멘.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 19-31; 05/04/03

지난 주간에 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Unfaithful’ 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믿을 수 없는’ 이라는 뜻이겠거니 했는데, 선생님이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미국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결혼생활에서 오는 불성실한 관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부부관계가 처음 사랑으로 결혼할 때는 서로 생명을 바쳐 위하면서 살 것처럼 시작하지만, 부부 서로간의 신뢰가 깨지면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결혼할 때, 비록 내가 배우자를 선택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내 눈에 띄게 하시고 나에게 연결시켜 주신 하느님의 배려가 먼저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마치 산이 있어서 내가 산에 오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천생연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배우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점지해 주신 천생연분이라고 받아들이고 살면 좋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서로를 부부로 맺어주셨으니 서로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고, 서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기와 다른 점을 포용하고 배우자의 실수나 잘못을 눈감아주거나 용서하여야 계속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로가 더 좋은 미래와 굳건한 관계를 위해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을망정 그것이 서로에게 조건이 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서로를 사랑하기에 형식적으로는 조건을 내걸기도 하고 실수나 잘못이 재발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지만, 자기도 자기 자신을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삶의 습관 하나도 고치기 힘든데 어떻게 배우자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지향하는 것이고, 배우자가 못하기에 자기가 채워주려고 함께 노력할 뿐이죠.

저는 결혼해서 부부생활을 하지 못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저에게 말씀하시는 신자분들의 경우와 경험을 토대로 되새겨 보면, 부부간의 신뢰는 배우자에 의해 건실하게 세워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배우자와 관계없이 자기가 세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출애 19,5)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기가 좀 괜찮아지기만 하면 번번이 하느님께 배반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던 잘 안 따르던 관계없이 끊임없이 하느님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어주신 계약을 ‘언약’이라고 하지 않고 ‘은약’이라고 합니다. 은혜로운 계약, 은총의 계약이라는 것이죠.

그런 하느님이 계시기에 이스라엘이 잘못을 했어도 늘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못이나 실수로 인해서 돌아갈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 하나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물론 서로에게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각자 서로 다른 실수나 잘못을 할 뿐이지 누구나 어느 면에서는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뻔뻔하다고 할지는 몰라도 연약한 우리가 실제로 기댈 데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잘못을 저지르도록 만드신 것도 아니요, 우리를 주님께 묶어두기 위해 잘못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우리를 연약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방심하거나 자칫하면 또 다시 범죄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니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인 ‘자유의지’가 잘못 선택되는 데로 사용된다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기까지 하는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우리를 세살 먹은 어린 아기 길가에 처음 내보내는 것처럼 걱정하시고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자기 맘대로 사용하는 데만 익숙하지 그것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오는 자기 자신과 자기 이웃 그리고 세상에 끼치게 되는 폐해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아니, 하느님은 용서하고 받아들이시고 우리를 위해 죽어주실 수밖에 없는 사랑자체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사지 멀쩡하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 토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말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

그러자 토마가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에게 직접 나타나셨지만, 우리는 우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진실을 밝히 보여줄 수도 없고, 배우자에게 자기 뜻과 마음을 뒤집어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믿지 않을 때 부부 서로에게 돌아오는 것은 단지 믿지 않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합시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가 믿는 것은 단지 배우자의 결백과 진심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수하고 잘못했어도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이 안에서 몸소 활동하고 계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2-23)

또한 그러한 믿음은 배우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믿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힘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결국 영혼을 구원하였기 때문입니다.”(1베드 1,5.6.8-9)

주님 부활의 기쁜 시기입니다.

갖가지 문제들과 어둠을 제치고, 슬픔과 절망에서

주님, 부활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행복하게 사십시오!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 19-31; 2004/04/18

신학생 저학년 시절에는 부제 반에 올라가는 것이 큰 낙이었고 어느 한 부제님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이 큰 행복이었다. 부제 반에 올라가면 독방에 홀로 계신 부제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고, 저녁 시간에도 부제님과의 대화는 면담으로 인정받아 대침묵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운이 좋으면 부제님께서 부제들만의 휴게실에서 손수 라면을 끓여다 주시거나 간식을 챙겨 주시기도 하기 때문에 배고프고 어려운 저학년 시절에는 부제님을 찾는 것이 생활의 활력소요 휴식처이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부제가 된 뒤에는 저학년들이 이 방 저 방에 들락거리고 떠들고 다닐 때면 눈살을 찌푸리고 지금 대침묵 시간에 왜 이렇게 돌아다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의 저학년 시절의 큰 낙이었던 것을 되돌아볼라치면 그래 이렇게 해서라도 저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하고 묵인하고 오히려 배려까지 해주게 된다.

살다보면 내가 남에게 저지른 일들을 세월이 지난 후 또 다른 남에게 당하게도 되고, 철이 어느 정도 든 다음에야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와 잘못을 보면서 나의 죄와 잘못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속는 줄 알면서도 속아주고, 당하는 줄 알면서도 당해주기도 하고, 다음에는 변하겠지, 그 사람도 세월이 지나면 자기도 당하고 그러면서 또 깨닫게 되겠지 하면서 지금의 못마땅함을 모른 체하고 묵인해 주기도 하고, 그를 용서하고 받아주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3)

예수님은 어릴 때 부모님 속을 하도 많이 썩여서 지금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계시는가.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나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노여움을 참았고 나의 영광을 위하여 분노를 억제하였으며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였다."(이사 48, 9) 그리고 요엘 예언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 오라. 주는 가엾은 모습을 그냥 보지 못하시고 좀처럼 노여워하지도 않으신다. 사랑이 그지없으시어 벌하시다가도 쉬이 뉘우치신다."(요엘 2, 13)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아버지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다.

하느님은 사랑자체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부모가 자식에게 져주듯이 인간에게 져주신다. 부모들이 가끔 자녀들이 속썩이며 부모에게 대들 때 가끔 하는 소리가 있다. "너도 검은 똥을 눠 바라. 그런 소리가 나오나!"

예수님은 인간이 무지로 인해 저지른 죄악을 보고서 아파하시지만 탓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 옷을 가지고는 주사위를 던져 나눠 갖으며,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철부지 같은 일들을 행하고 있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청하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 사도 바오로도 인간의 무지로 인해 저지른 죄악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런데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똑같이 무지한 탓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사도 3, 17)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 모두 다 회개하여 돌아올 때까지!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곧 다시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왜 아직 안 돌아오시느냐고 묻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답한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 9)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까지 우리 죄를 씻어주었는데도 오늘 또 죄를 짓고 있는 우리를 그렇게까지 용서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사랑 바로 그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또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2베드 3, 14-15)

정말 몰라서 못하는 사람 그리고 믿지 못해서 용서 못하는 사람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기에 주님을 믿음으로써 주님으로부터 받아 누리게 되는 평화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고 경험한 이들은, 용서하시는 주님의 자비 속에서 평화를 누리고, 그 평화 속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그 평화를 나누게 된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래서 평화의 사도가 된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나를 죽이고 너를 용서해주는 사랑이 세상에서 미찌고 손해보면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새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그렇게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를 누린다.

예수님께서 오늘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토마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8)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나해) 요한 20, 19-31; 2003/04/27

하늘나라에 루치펠이라는 천사장이 있었다. 그런데 루치펠은 하느님의 인간 구원방법에 순종할 수 없었다. 루치펠은 자꾸만 인간을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외아들 예수님마저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반대했다. 그런 방법은 오히려 인간을 더 버릇없게 만들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따끔하게 벌을 주어야만 인간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잘못에 벌을 주지 않으면 인간은 고쳐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죄를 짓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하느님의 자비를 반대하던 천사장 루치펠은 천사장의 자리를 내놓고 죄와 악이 지배하는 지옥의 세력이 되었다.

얼핏 들으면 루치펠의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면 인간이 죄와 악의 사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하느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피조물 인간을 죄와 악의 노예로 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시면서까지 구하셨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새로 살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주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로 우리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죄와 악마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분노와 미움, 의심과 질투에서 비롯되는 죄악에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에게 맡긴 형제와 자매들을 죄와 악의 굴레에 몰아가지 않도록 용서하라고 하신다.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용서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 고착에 빠진 우리에겐 성령을 보내신다. 죄를 씻도록 하는 성령, 용서의 은총을 허락하시는 성령,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그리고 수난의 피를 흘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분이 예수이시고(1요한 5, 6)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루가 24, 47)을 믿고 용서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으라고 하신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8절)



부활 제2주일

(가해) 요한 20, 19-31; 02/04/07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용서와 믿음을 연결시켜 말씀하신다. 즉 평화를 얻으려면 용서를 해 주어야 할 것이며, 용서는 주님을 뵙고 모심으로써 가능하다. 주님을 뵙고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성령은 우리에게 주님을 뵙게 해주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해줄 뿐만아니라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커다란 사랑을 우리에게 안겨주신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그런가하면 성령은 주님을 믿음으로써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해 진다면 성령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우리를 주님께 연결시키신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사도로 만들어 주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그러면서 동시에 믿음은 주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믿음이 불완전해서 주님을 뵙거나 성령을 모실 수 없지만,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을 믿고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들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19절) 이렇게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먼저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우리"(26절)에게 나타나셔서 토마와 제자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신다.

베드로 사도는 비록 지금 우리의 믿음이 불완전해서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시련으로 단련을 받아 우리의 믿음이 순수하게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날에 우리의 믿음이 결국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1베드 1, 6-9 참조)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 구원을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에서 찾도록 제시한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사도 2, 45) 그래서 사람들이 이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신자들을 우러러 보게 되어 교회가 커 갔다고 고백한다(47절). 이런 교회의 모습이 오늘 예수께서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하신 말씀이 현대 세계 안에 이루어지도록, 자기 삶의 현실에서 믿음을 실현해야하는 우리 사명의 표본이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이웃을 주님께로 이끌게 되겠기 때문이다.



부활 제2주일

(다해) 2001/04/22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죽으러 오신 것인가? 결국 인간들의 이기심과 사악함으로 죽게 될 줄을 알고 계셨을 텐데 왜 오셨을까? 그런데 주님의 부활을 맞으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러 오신 것이구나! 부모가 사랑 때문에 자식에게 져주듯이. 그래서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구나! 자기 잘났다고 설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죄악의 결과를 보도록 만드셨구나. 그리고 그렇게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를 씻어 주셨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살려주셨고 오늘 부활하여 우리 주님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로 인도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용서하면 우리는 사람 하나를 살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의 뒤를 이어, 우리가 용서해서 살린 그를 주님께 데려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구의 죄든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그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처럼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해관계나 자기 자신의 자존심때문이라도 용서하지 못하고 고민과 갈등 속에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부활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다시 말해서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죽이는 자비로운 사랑을 이룩하라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19. 22절 참조).

주님께서는 또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을 믿고 용서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분노와 원망 그리고 복수심과 수치심 또 피해를 입음으로써 겪게 된 두려움과 절망이란 악에서 해방되어 부활신앙안에서 행복하게 살라고 하신다.

용서하는 길, 그길은 평화를 얻는 길이며 주님을 믿는 이들이 걸어갈 길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절)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얻도록 하자.



부활 제2주일

(나해) 요한 20, 19-31: 2000/04/30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평안하냐?"(마태 28, 9) 요즘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편안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갈등과 긴장의 긴 터널 속에 갇혀 헤매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는데도 아직 부활의 기뽄소식을 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2-23) 용서하긴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마음 먹은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설사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다시 그와 부딪히면 전보다 더 큰 미움이 앞을 가려 편안치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주신 주님의 영은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의 커다란 물결로 우리 마음의 불안과 갈등 그리고 아픔 속에서 용서하기를 꺼리고 억울해하는 우리를 모두 씻어 없던 것으로 해주실 것입니다.

토마는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소"(25절)라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의 신비를 납득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아직 평화롭지 못했습니다. 그런 토마에게 예수님께서는 몸소 나타나셔서 확인해주십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절)

토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비록 그의 태도가 부정적으로 비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적극적인 관심과 애원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확인까지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토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8절)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주님의 부활을 겪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의 삶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막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 '현실을 떨쳐버리고 벗어나지 못하는 미련', '사랑 받지 못해서 자기 속으로 숨고 스스로를 꽉 움켜잡고 있는 손상된 자존심' 등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서 기쁘게 서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31절)되기를 바랍니다.



부활 제2주일

(가해) 요한 20,19-31; 99/04/11

얼마 전에 60세 된 분께 물었습니다. "저는 아직 60평생을 살아보지 못해서 확인할 수 없어서 그런데, 정말 하느님께 믿고 맡기면 다 풀립니까? 실제로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랬더니 그분께서 실제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아요. 돈 문제, 가족 문제, 인간 문제, 직장 문제 무엇 하나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실제로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고, 또 안 맡기면 풀리지도 않고 이 고생 저 고생, 고생만 실컷 하고 마지막에는 결국 맡기고 말게 되요."

여러분은 요즘 어떠십니까? 경제는 풀렸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피부에 와 닿는 것은 작년 IMF구제 금융 초기에 겪은 한파가 지금 실제 생활에 영향이 미쳐, 정말 힘들다고들 합니다. 게다가 풀린다는 기색은 잘 보이지 않고, 또 보인다 해도 나한테 그것이 좋게 풀릴지는 미지수고, 비전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한편으로는 더 힘들 것만 같은 불안감마저 감도는 데,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줍니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정말 토마스의 심정이 오히려 솔직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5)

그러자 예수님께서 직접 토마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7) 그제야 토마스가 믿는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를 염두에라도 두시고 미리 말씀하신 듯,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고 하십니다.

또한 여러번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21.26)하시며 우리를 북돋아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문제들을 주님께 믿고 맡기고 충실히 살면, 우리를 지어내신 주님께서 우리를 굶어죽지 않고 살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에게 생명과 평화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시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 우리는 이 약속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6.25 전쟁과 숱한 난관을 겪고 일어나신 우리의 선배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활 제2주일

(다해) 요한 20,19-31 : 98/04/19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지요. 예수님의 사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두고 누가 훔쳐갔다거나 또는 또는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다던가…, 또는 자신들은 엉겁결에 도망쳤지만, 제자단의 책임자인 베 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배반한 사실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로 자신의 잘못을 통 감하는 반성과 책임을 묻는 성토와 대책을 강구하는 이야기들… 불안과 긴장의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들어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ㄴ)하고 인사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 게 닥친 일을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서로의 궁금점과 의혹을 하나 하나 다 풀려고 하지만 점점 골만 더 깊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오히려 화해를 위한 말마디가 쇠꼬챙이처 럼 마음을 후벼파기 일쑤입니다. 차라리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겪도록 허락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임하 시도록 청하십시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은 진정 예수님이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 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23절)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용서해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용서하자는 말이 의아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지나친 기대와 그에 따른 원망 등 을 접어두어야 하겠습니다.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는 나타나시고 자기에게는 나타나지 않으 신 예수님을 원망하고 투정하듯 예수님의 부활을 거부합니다. '내 앞에 나타나야만…, 내가 확인해야만…' 종인 인간이 주인이신 예수님께 오히려 대드는 듯한 인상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다시 토마스에게 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말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29절) 그리고 토마스는 주 님께 대한 믿음을 확고히 가지게 되면서 평화를 회복합니다.

불안과 아픔과 미움으로 얼룩지고 뒤틀린 심정 속에서 성령을 청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 시는 성령의 힘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여 평화를 회복하도록 하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 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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