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가해) 루카 24,13-35; 17/04/30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실패했다고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나실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고, 자신들은 그분의 왕좌로 인하여 곧 국무총리나 도지사는 되어 세상을 통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다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돌아가신 후 끈 떨어진 연을 바라보듯이 허망해 했습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져 낙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두 명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타나서 성경을 통해 주님 자신에 대해 설명해 주시고 성체성사를 통해 증명해 보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주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의 사명이 무엇이고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를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다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복음기사는 우리에게 ‘미사의 분위기와 구조’를 연상하게 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요한 24,13.14) 라고 한 묘사는 마치 신자들이 주일 (아침)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길에서 서로 만나 인사하고 자신들의 안부와 공통 관심사를 나누면서 성당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또 다소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분위기 안에서 사제가 입당하는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15절)

미사가 시작되었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아직 신자들은 그 주일의 의미나 미사 전례의 내용을 깊이 알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6절)

둘째, 참회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사제가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하고 말하면서 침묵에 들어가면, 신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들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마치 미사에 참례한 신자 각자에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17ㄱ 절)시는 것 같습니다. 신자들은 각자 자신들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17ㄴ 절)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현실을 돌이켜보면서 주님께 우리의 애로사항과 바람을 합쳐 미사 지향으로 보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이런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왜 내게 닥쳐왔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그리고 정작 어떻게 이것에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18-19절)

우리가 겪는 우리의 현실은 다름 아닌 갈등입니다. “…… 관한 일입니다. …… 셨습니다. 그런데 ……들과 ……들이 …… 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됩니다.”(19-21절) 어떤 일이 생겼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반면에 다른 이들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과 삶의 진행상황들입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황이 반전되면서 입장도 바뀌어 웃음이 울음으로, 때로는 사건자체가 미궁으로 빠져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는 상황 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더랍니다. 그래서 …… 그대로였고, ……였습니다.”(22-24절)

셋째, 이제 이러한 갈등 속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말씀 전례.’ 구약과 신약의 5개의 독서와 응송들 안에서 우리는 우리 문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은 그날 그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 성경 전체에 걸쳐 ……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25-27절) 말씀 전례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를 깨닫게 되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게 됩니다.

넷째,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우리의 삶 속으로 주님을 초대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초대하는 우리의 청원은, 미사 성제 안에서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 는 봉헌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29ㄱ절) 우리가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께 다가서는 자세는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봉헌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감사 기도의 시초에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기도 제 2 양식)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29ㄴ절)

다섯째, 감사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성변화’의 순간에, 주님께서는 친히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시고 완성시키십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그럼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히 드러납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31ㄱ 절) 우리는 성체를 영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 안에 스며들어 없어져 버리십니다. 사랑은 스스로 녹아드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31ㄴ 절)

주님께서는 말씀 전례에서 우리가 들어서 깨닫게 된 말씀을 성찬 전례에서 증거하심으로써, 우리를 확신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우리도 그 말씀을 살도록 북돋우십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여섯째,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문제의 해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살아내신 십자가상의 제사, 즉 성찬을 통해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얻습니다. 이는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얻게 되는 우리 제자됨의 시작이요, 제자가 사도로서의 사명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힘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된 우리는 교우 형제?자매들과 함께 세상으로 복음을 선포하러 나아갑니다.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33-35 절)

지금까지 우리는 루카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란 성경기사를 미사의 순서에 맞추어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이 성경기사가 미사의 형태를 의미하기 위해 씌여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사에서 미사의 의미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이 기사에서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낍니다. 주님은 동틀 무렵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바로 이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성경의 말씀과 연관시켜 설명해 주시고 빵의 나눔을 통해 깨닫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제자들을 직접 가르쳐주시고 먹여주시면서 키우시느라 애쓰십니다. 똑같이 우리는 십자가상 제사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미사 성제를 통해 이 사랑의 절정과 완성을 봅니다.

엠마오의 이 기사는 바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처참하게 돌아가신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가심으로써 어떤 일이 생기게 되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내용을 이해시키고 믿게 하려고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는 사랑의 곱빼기 수고입니다. 미사 역시 주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전례의 형식으로 기념하고 재현함으로써, 오늘 미사를 봉헌하는 바로 여기서 다시 주님 구원이 계속됩니다.

둘째, 제자들은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은 빵의 나눔이라는 표징을 통해 자신을 알아보도록 계시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미사 성제(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심으로써 신앙의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은 빵의 나눔을 통해 성경에서 언약되고 해석되고 증거되어 우리가 알게 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만남이 바로 미사에서 얻게 되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 생명의 양식이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듭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면서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우리 삶의 방향과 방법을 교정하고 주님의 안배하심과 보호하심과 이끄심 안에서 주님과 점점 일치되어 갑니다.

셋째,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표현은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적인 현상,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31ㄱ절),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대한 ‘기억이 나고’, ‘생각이 나며’, ‘느낌이 들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또한 우리가 “미사 중에 주님을 만난다!”는 표현 역시 주님과 주님께 대한 직접적인 대면만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현실,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14절),을 일어난 사건과 현상 그대로만 알고 있는 우리가,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 사건과 현상 너머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미사의 독서와 강론을 통해 알게 되었을 뿐더러, “이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25-27절), 그 깨달음을 지식이나 지적인 흥분에 그치지 않고, 받아 들이며, 믿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영함으로써 확고히 심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십자가상의 제사로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주님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미사가 우리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이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는 사실이, ‘주님께서 십자가상 제사를 바치심으로써’ 명백히 드러났고 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성체성사(미사)를 통해 일러주시고 심어주셔서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우리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됨으로써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받아들인 만큼밖에 숨쉬지 못하지만, 지속되는 우리의 활동과 미사 참례를 통해 교정되고 다시 심화된 우리의 활동 속에서 완전해진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1-12)

그러므로 미사는 우리가 주님과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신앙의 원천이며, 주님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함께 하자고 미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오늘 현실이라는 커다란 벽에 가로막혀 실패하고 좌절하여 엠마오로 떠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가 읽고 듣는 복음의 말씀을 깨우치게 해주시고, 부활하시는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새 생명의 힘으로 복음 말씀을 실현함으로써 선교와 복음화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부활 제3주일

(가해) 루카 24,13-35; 14/05/04

지난 4월 23일부터 5월 2일까지 서울대교구 사제 연수로 스페인 성전건축기행을 다녀왔습니다. 교구 성전건축위원회위원 신부님들과 몇몇 본당 신부님들 그리고 보좌 16년차를 마친 베드로 연수 2기 신부님들과 함께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역 성당들을 순례했습니다. 1960년대에 지어진 이 성당들은 세계 제2차 대전을 마친 후 다소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에 처한 스페인 남부 지역의 신자들이 형편이 어려우면서도 나름대로 기도하는 집으로 주님께 봉헌한 성당들이었습니다.

후에블라의 푼타 움브리아 지역의 카르멘의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은 바닷가 어민들의 상황이 너무나 가난하여 그 동네에 흔한 벽돌과 작고 가는 철근들을 이용하여 천장 트러스트를 여러 개 짜지었습니다. 심지어는 유리를 구매할 돈이 마땅치 않아 철문 두 개로 벽을 만들었다가 미사를 봉헌할 때는 철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고 미사를 드리지 않을 때에는 벽으로 사용하도록 설계했습니다. 미구엘 피삭이라는 스페인의 유명한 설계학자가 바닷가 어민들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지역 신자들의 경제적 처지에 맞는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까디즈와 말라가의 성당들에는 제단 전면에 ‘십자가에 못박힌 구세주이신 예수님’ 보다 ‘마리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두드러지도록 보여주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아예 십자가 대신에 고통과 근심 중에 잠긴 이들을 품어 안으시는 여신과도 같은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바라보며 우리들이 얼마나 깊은 고통 속에 잠겨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하느님께 위로 받고 싶어하는지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늦게 잠들 때까지 다소 빡빡한 일정의 연속이었고, 식사시간이 우리와 달라 건강관리에 다소 힘겨웠지만, 스페인의 성당들을 돌며, 훗날 다른 나라 신자들이 우리나라를 찾아 올 때 ‘우리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해 보았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한국적이며, 실용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인가를 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더 이상 성당 건물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이듯이, 또한 성당도 성전 건축물과 그 안에 돈으로 사고 인간의 손으로 꾸밀 수 있는 성물들을 배열해 놓은 공간만이 아니라 신자들의 고통과 번뇌 그리고 기쁨과 희망이 축적되고 아로새겨지는 생활 공동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각각의 성당들은 그 성당 신자들이 처한 시대와 처지에 따라 지어졌고, 그 성당의 외관과 내부 시설과는 별도로, 그 안에서 일생에 걸쳐 기도하고 전례를 거행하는 신자 공동체의 흔적들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신자 각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주님을 찬미하고, 오늘 자신이 처한 절박함과 갈등 안에서 주님께 간절히 청하면서, 주님을 우리 공동체 안에 생생하게 살아 숨쉬게 하고 성당 공간을 주님께서 살아계신 곳으로 만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아니 자신들의 두 눈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서 현실에서는 끝나버렸다고 여겼습니다. 그 중 두 명은 한 없는 절망 속에 빠져 엠마오라는 시골로 정처 없이 떠나게 됩니다. 자기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이렇다 할 계획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이, 그냥 도망치듯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어느 곳에도, 그 어떤 곳에도, 희망은커녕 안심하고 발을 뻗기조차 두려운 제자들은 그야말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 (루카 24,27)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전혀 모르는 것을 처음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나타난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고통을 겪으며 희생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고,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그 핵심은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며, 그것이 또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도 보여주십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 생명을 구하는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구원행위를 부활에 이르는 영광의 열쇠로 보여주십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30) 특별히 빵을 떼어 나눠주는 행위를 통해 구원의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제자들도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그리스도께 대한 내용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받아들이지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실제로 모시고 다니던 제자들조차도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도 알았고,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도 스승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에 써 있는 이야기지 실제로 자신들이 목숨처럼 지키고 이루어내야만 할 정도로 꼭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는 믿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겪고 체험한 예수님의 죽음만을 믿었지, 주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시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희망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으면서도 제자들을 찾아와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주신다는 의미로 빵을 나누어주셨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예수님의 현실적인 행위를 통해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믿게 되었고, 그들이 보지 못했던 희망을 보았습니다.

믿지 못해서 따르지 못했고, 지키지 못해서 잃어버렸던 희망이 현실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2-35)

오늘 우리와 세상에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죽음과 악이 판치는 세상 앞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는 것을 다짐하는 ‘생명주일’이며, 세월호의 영혼들을 기리며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의 어둠과 우울함 속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희망을 새롭게 일깨워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우리가 믿고 지켜야 할 사항들을 그대로 믿고 실제로 지킴으로써,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희망을 살아가기로 합시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


부활 제3주일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다해) 요한 21,1-19: 2013/04/14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북녘 땅 갈라진 형제들에게도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미사 중에 하느님께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며,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한반도를 위해 전구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참된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유산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요한 14,27) 세상은 힘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힘의 논리만을 앞세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오히려 불신과 증오만 커져 더욱 평화를 이루기 어렵게 만듭니다. 진정한 평화는 진리, 정의, 사랑, 자유, 인내 안에서 하느님께서 만드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 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한반도에 지속되고 있는 위협과 긴장은 남북 분단으로 마음의 큰 상처를 가지고 있던 우리 국민들에게 또 다시 아픔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실정에서 우리 국민들은 남북 간의 끝없는 대립과 대치를 아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남과 북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온갖 전쟁 행위는 하느님과 인간 자신을 거스르는 범죄입니다. 남북한의 지도자들은 우선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호해야 하며, 모든 문제를 폭력이 아닌 상호 이해와 대화로써 해결해야 합니다.

인간 생명이 존중되고 증진되려면 평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다 함께 평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이가 함께 공존하는 지혜와 슬기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내적 평화뿐 아니라 세상과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분쟁과 갈등이 없는 외적 평화에 대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참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도 아니고, 또는 적대 세력들 간에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만도 아닙니다.

참 평화는 하느님의 정의가 온전히 실현될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선익 보호, 자유로운 의사소통, 개인과 민족의 존엄성 중시, 형제애의 꾸준한 실천 등이 없이는 세상에 평화가 실현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우리 민족의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고 민족 화해와 일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평화를 이루는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먼저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이야말로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분단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여!

남북한이 진정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올 수 있도록

하느님께 전구해 주소서. 아멘”



2013년 4월 12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대주교





부활 제3주일

(다해) 요한 21,1-19: 2013/04/14

가끔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믿었던 친구나 배우자나 자식에게서 배반을 당했을 때, 또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거듭되는 실수와 무능력과 부적응이 자신을 약하게 합니다. 자신의 온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회복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정도의 경제적인 손실로 이어질 때 우리는 좌절하기도 합니다. 무기력과 낙담이 원망과 자책과 어울려 주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예수님이 세울 새로운 세상에서 한 자리라도 차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헌신과 추종이 최소한 자신들의 사회 경제적인 삶에 도움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자신들의 삶에 커다란 전환기를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던 예수님께서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버리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남은 것은 입신양명이나 도움은 고사하고, 실패와 좌절 그리고 육신 생명에 대한 죽음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야 했습니다.

좌절과 낙담 속에 몇몇 제자들은 다락방에 숨기도 하고, 몇몇은 뿔뿔이 흩어져 외부와 인연을 끊고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드로는 슬픔과 아픔도 잊을 겸 고기라도 잡아 생계라도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고기잡이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요한 21,2-3 참조).

밤 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온 어부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그러자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6절) 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7절) 라고 소리칩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자신들이 처음 예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던 그 때 그 순간 자신들에게 보여주셨던 물고기의 기적이 재현된 것을 보고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너무 기뻐 배가 아직 뭍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7절)어 예수님을 향해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물고기의 기적이 다시 재현되는 것을 되새기며, 첫 번째의 기적을 기억해 낼 수 있었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자신들에게 현세적인 축복과 안녕이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예수님의 부활기사를 묵상하며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때 현세적인 축복과 은총을 받습니다. 동시에 사회에서부터 오는 박해와 어려움도 겪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24,13) 라고 말씀하셨듯이, 지금 당장 자신의 실수와 죄악과 관계 없이 사회적인 환경과 상황에 따라 힘겹기는 하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다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에게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셨던 그 때 그 순간을 기억에서 끄집어 내봅시다. 그 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그 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축복을 내려주셨는지 되돌아 보면서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그 때 그 순간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하셨는지 반성해 보면서 주님의 축복을 재현하기로 합시다.

과거 주님께서 함께해주셨을 때, 아니 자신도 어떻게 주님께서 함께해주셨는지 알지 못한 채 이루어졌던 축복과 풍요에 대해 감사드립시다.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벌어진 물고기의 기적을 일으켜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7절) 라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그 때 그 순간 그 축복의 요인이 ‘주님께서 함께해 주셨음입니다.’ 라고 현실을 직시하며 겸허하게 고백합시다.

이러한 고백을 기초로 하여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청하고, 그 때 그 순간의 자세와 방법을 오늘에 새롭게 적용함으로써,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하는 축복과 은총을 얻어 누리기로 합시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


부활 제3주일

(나해) 루카 24,35-48; 12/04/22

사람들은 저마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직자나 수도자, 선생님 그리고 자신의 보스나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자녀들에게 나름대로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늘 그 기대치는 인정과 존경의 정도와 비례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그 기대치가 당사자에게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 주기도 하는 반면 경우에 따라서는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개인 나 하나 뿐만 아니라 나로 비롯하여 그 그룹 전체의 평가와 기대가 연결되기도 합니다. 가끔 “천주교 신자가 왜 그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 등등의 힐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땐 왜 내가 잘못했는데, 천주교까지 들먹이나 싶어 불쾌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소리를 듣는 나에 대한 불만이니 누구에게 뭐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기대치에 따라 내가 좌우될 수는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상대가 내가 지켜주고 채워주길 바란다는 면에서는 마치 의무처럼 여겨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치에 80점만 받으면 된다고도 하고, 상식이 통하는 정도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1요한 2,4)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제자들의 의심을 해소시키기 위해 못자국이 선명한 주님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심지어는 구운 물고기를 손수 잡수시기까지 하면서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몸소 확실히 보여주시고 체험하게 하여 믿게 해주십니다(루카 24,36-43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수고 수난하셔야만 했던 내용을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구절을 들어 설명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44-46절 참조).

어린이들이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인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게 되듯이, 우리 신앙인도 믿음이 성숙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변화통을 겪게 됩니다. 처음 주님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는 그저 머리로만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과거에 일어난 하나의 사실로만 여기고 배워왔던 교리조목들이 이제 자신이 선택하고 일생을 통해 따라야 하며 증거마저 해야 하는 신앙조목들로 마주섰을 때 변화통이 시작됩니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이 되고, 믿는 것이 실현해야 하는 것이 되어가면서 겪는 이 변화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기대치와 성장통처럼 의무감과 부담이 아닌, 주님께 대한 감사와 보은으로 이루어져야만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회개는 단순히 새로운 삶을 향한 자신의 의지적인 결심에서가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 죽으시면서까지 사랑해주셨던 그 사랑에 의한 감화로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그런데 이 감사와 보은은 단지 주님만을 향한 신심적이고 영적이며 일방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보은은 주님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살라고 맺어주신 가족과 이웃 형제자매들에게 대한 감사와 보은으로 드러나기에 회개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 하신 주님의 그 말씀으로 보답해야 하기에,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선택, 새로운 행동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곧 나를 구하시기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내 형제자매를 구하기 위한 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보답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감사와 보은의 정으로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모습들을 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들, 교회의 교부들과 성인들 그리고 우리의 선배 신앙인으로부터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신앙의 모델을 누구에게서 발견하고 따르고 계십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도 중의 한 분이십니까? 여러분의 주보성인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신앙을 일깨워주셨거나 인도해 주셨던 분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마음으로 존경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신앙인이 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바라보는 어떤 사람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치를 여러분 자신에게 제시하면서, 여러분도, 어릴 때부터 마을을 건질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을 찾다가 스스로 큰 바위 얼굴을 가지게 된 동화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부활 제3주일 어버이날, 성모성월을 시작하며

(가해)루카 24,13-35; 11/05/08

언젠가 다리를 다치고 난 다음 집안에 있으면서 많은 시간 동안 어머니 생각을 했습니다. 시동생과 시누이 줄줄이 그야말로 말 많은 집안에 들어오셔서, 남편 하나 바라고 사셨고 자식 하나 잘 되기를 바라면서 사셨던 어머니. 자식 등록금 하나 제 때에 못내는 형편인데도 시동생들과 시누이들이 와서 우는소리를 하면 여기 저기 변통해 내어 주면서까지 맏며느리 역할을 다 해주셔야 했던 어머니, 그러고도 시누이들의 뒷소리를 들으면서 남모르게 우셔야 했던 어머니…….

그래도 자식의 성적이 조금이라도 오르거나 남의 칭찬을 받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시며 자신의 노고를 잊으시고 보람을 느끼셨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그런 어머니이셨기에 돌아가신 후 몇 년이 지난 오늘도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서면 부모님 생각에 눈물만이 앞을 가립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의 느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환경의 차이는 있었을망정 우리 모두의 어머니에게 해당하는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어머니에 대한 느낌이요 관계입니다. 우리에게 어머니는 참으로 누구와도 비교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진정 우리 삶과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무어라 묘사하거나 형용할 수 없는 진정 어머니이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분들은 자랄 때는 부모님께 불평도 많이 하고, 원망도 많이 한다던데… 여러분의 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로서의 성인 남성과 여성으로 바라보지 않고, 여러분과의 관계를 떠나, 여러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가 자라온 그 시대의 사회상 안에서 바라본 성인 한 남성과 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을 인생역정을 객관적으로 그려보시면 어떨런지요?!

제자들은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하루 종일 성경을 풀이해주고, 왜 주님께서 죽으셔야 했는지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꿈이 산산이 부서져 버려 정작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나타나셔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생전처럼 세상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사명을 자신의 삶으로 사시는 예수님! 그 주님의 모습을 제자들은 주님께서 빵을 떼어주시는 성체성사, 곧 세상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주님 그 분 자신의 생애와 그분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모습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참 주님으로 알아차리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주신 구세주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은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또 성모성월을 시작하며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님께 대해 나누겠습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첫째,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초대교회부터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른 것은 마리아가 여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성모님은 예수님의 형제자매, 곧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이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모님께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구해 주시도록 청하는 교리입니다.

둘째,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입니다. “동정으로 잉태하셨으며, 동정으로 출산하셨고, 출산 후에도 동정으로 머무신다.” 성모님의 동정은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는 신비이며, 하느님이신 말씀이 인간이 되신 강생의 신비의 표징입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였음을 드러내는 교리입니다.

셋째,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입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셨다.” 성모님은 성경에서 계시한 대로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며,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임을 나타내는 교리입니다.

넷째,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입니다. “원죄 없으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 생애의 여정이 끝난 다음 그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 안에 받아들여지셨다.” 성모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인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이 성모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음을 나타내는 교리입니다.

교리 이외에도, 성경에 나타난 한 인간 마라이님의 기사를 바라보면서, 성모님의 영적 성숙 과정을 발견해 봅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나타나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예고에 대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이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주님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기다림은 마치 구원을 기다리는 우리 인간 모두의 갈망을 대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이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매일 아침 일어나서 밥 먹고 일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 이른바 일상의 단조로움을 넘어, "뭔가 새롭고 화끈한 것이 없을까?" 뭔가 뿌듯하고 흐뭇하게 잠자리에 들, 인생을 참으로 값지고 생기 있게 꾸미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갈망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청원응답입니다.

마리아의 일생을 보면서 우리는 마리아의 영적 성숙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잉태했을 때부터, 아기를 낳고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왔을 때(루카 2,8-20<19>, 마태 2,1-12)나,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할 때, 시메온이 아기를 향해 기쁨에 넘친 찬미의 노래를 불렀을 때, 그리고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시며,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때!(루카 2,22-35<34-35>), 또 아기 예수를 잃어버렸다가 성전에서 사흘 만에 되찾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하고 혼내려 할 때, 어린 예수가 태연한 자세로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하고 되물었을 때(루카 2,41-52<48-49>)에도 평범한 여인 중의 한 어머니에 그치지 않았던 마리아로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자기도 모른 채 마음속에 이상한 사건으로써, '참 대담한 아이로구나!'하는 당혹감을 가지고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두어야만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들을 찾아 오셔서 세상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다렸지만, 매 번 주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냥 마음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그렇게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고 해서 그것이 마리아에게 명확하게 어떤 의미를 지닌 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예수를 다시 찾은 후, 예수는 부모에게 자기가 지닌 하느님의 모습을 더 드러내지 않고, 그냥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루카 2,51).

마치 이런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은 우리가 가끔 집에서 아이를 키우다가 새삼스레 아이가 컸다는 식으로, "아, 어제 얘가 글쎄 ∼ ∼ 소리를 하잖아, 참 모를 일이야!" 등등의 상황 이상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인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지금까지 아기인 줄로만 여겨왔던 아기가 어느새 커, 자아를 갖게 되었다든지, 의식이 깨었다든지 정도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예수 아기는 거듭 자신의 모습을 동방박사들을 통해 그리고 시메온이나 성전 학자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지만 그의 부모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게다가 성전에서 예수가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반항까지 하였건만 그의 부모에게 예수는 단지 어린애에 불과했고, 내 뱃속에서 난 내 아이! 내가 키우고 가르쳐야 할 내 아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어린 시절을 책임지고, 보호하고, 키웠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예수가 좀 키우기 까다롭고 말썽꾸러기 사내아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때를 기다리면서 양아버지 요셉을 따라 묵묵히 나자렛 시골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며, 인간 세상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바라볼 때까지 인간이 되어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어른이 되어 공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예수가 악령에 들려 미쳤다(마르 3,31-35<30>)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그를 잡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예수의 사촌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때를 시작했던 예수는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자신의 독립을 선포합니다. 마르코 복음 3장 31절부터 34절을 보면,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다. 둘러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님의 이 독립선언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리아는 자기가 천사에게 했던 청원응답을 아들 예수의 입을 통해 다시 전해 들으면서, 비로소 그 창원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 마리아가 이제 아들의 입에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라는 소리를 듣고는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한 그 기도의 뜻과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또 그 말씀대로 살도록 해 달라는 그것만이 자신이 아버지께 청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성숙의 첫 단계를 마칩시다. 이 단계는 우리가 영적 성숙의 첫 단계로서 '깨어남' 또는 '새로봄'의 단계가 되겠습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자신의 일상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어 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의 단계입니다.

그럼 우리의 일상에서 이 첫 단계를 적용해봅시다.

우리는 청소하고 빨래하고 집안에서 일하며, 그 일이 하느님의 구원사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발견하고 의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직장에서 일하며, 그 일이 하느님의 구원사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발견하고 의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마치 마리아가 마음에 두는 것처럼 마음에 담아 놓고 있습니까? 그리고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또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그 일을 통해 하느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여러분의 의식세계 안에서 그 상황과 그 상황들의 변화의 의미를 인식하고 그 때마다 그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되새김질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작업이 우리가 신앙에 눈뜨는 첫 단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우리 삶 안에서 깨닫고 받아들여 믿는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단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미사를 드림으로써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영세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다고,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말씀을 새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처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눈뜨고 깨어나는 영적 성숙의 첫 단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기도와 지향의 내용이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오늘 이 순간부터 확인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성모 마리아의 일생을 모범 삼아, 가톨릭 교회를 통해 주님의 신자가 되어 나가기로 합시다.

아멘.


부활 제3주일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장 강우일 주교 부활 담화문

05/04/10

해외의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길었던 겨울이 물러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듯이 이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던 사순시기가 막을 내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 축제의 주역이 되어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수난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간 것은 우리 인간들의 터무니없는 죄와 악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몇몇 유다인들의 근거 없는 비방과 고발로 중죄인의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죽음을 바라본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디론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극소수의 여인들만이 예수님의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던 예수님께서 겪으신 무참한 고통과 죽음의 기억이 아직 이 여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채찍질 당하시는 예수님의 신음이 아직 그들의 고막을 끊임없이 때리고 있었습니다. 가시관에 찔리어 피투성이가 된 그분의 얼굴이 그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는 망치소리와 이에 뒤섞인 예수님의 비명이 그들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치는 예수님의 마지막 울부짖음이 여전히 메아리치며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또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소식을 듣고서도 여인들은 여전히 두려움에서 헤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들을 견디기 힘든 충격의 심연 속에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그들을 그 깊은 두려움의 늪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천사가 먼저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분은 여러분에 앞서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여러분은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면 거기서 나를 볼 것이라고 알리시오.”(마태 28, 9-10)

오늘날 우리도 다양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심찮게 찾아오는 지진과 해일 같은 자연의 재앙, 치명적인 전염병이나 불치병이 우리를 두렵게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더 끊임없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재앙들입니다. 세계 어디서 누가 당할지 모르는 무자비한 테러 공격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에서는 당장 국경을 사이에 놓고 가공할 화력의 무기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서로 겨냥하고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도 일상생활의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노인들은 자식들에게서 외면당하고 버림받을까 두렵습니다. 지금 잘 나가는 직장인이라도 언제 경쟁에서 밀려나고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지 몰라 두렵습니다. 부부는 해가 갈수록 서로의 무관심과 독선이 두렵습니다. 며느리는 시댁 식구들이 두렵고, 사위는 처가 식구들이 두렵습니다. 부모는 대화가 안 통하는 아이들이 두렵습니다. 청소년은 학교에서 성적 때문에 두렵고 동료들의 따돌림이 두렵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다양한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모두 힘들다고 한숨을 푹푹 쉬며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그 두려움을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고 절망하며 삶을 포기합니다. 지난 2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자살률이 3배나 증가하여 지금은 한 해 1만 3천여 명,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살벌한 곳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면 거기서 나를 볼 것이라고 알리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의 권세와 싸워 이기셨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을 안겨주는 세력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신 분이시고 우리 모두를 온갖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기 위하여 갈릴래아로 갑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는 특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래아는 그들의 고향이고 친지와 이웃과 함께 사는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우리의 갈릴래아는 우리 동네, 우리 본당, 우리 교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우리 가족, 우리 이웃이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 곁에 와 주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둘이나 셋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서로 섬기고, 나눔을 실천하며 친교를 이룰 때 거기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형제들이 한데 모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희망을 북돋아주는 자리에 주님께서도 와 주십니다. 주님을 뵈오면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갈릴래아로 부활하신 주님을 뵈러 떠나십시오!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강우일 주교


부활 제3주일

(다해) 요한 21, 1-19; 2004/04/25

열심히 일 하다가 그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반대로 얽히고 설키거나 실패로 끝나버린다거나, 기대하고 기다리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말 허망한 마음으로 하늘만 쳐다볼 때가 있다. 오늘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말자 맥이 빠지고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꼴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뭔가 자신들도 예수님과 함께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 같아 기뻤고 곧 다가올 하늘나라가 자신들 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던 희망이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자 제자들은 그야말로 허망함도 그런 허망함이 없었으리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는 하나 갈릴래아에서 만나자는 말씀만 던지시고 또 사라지시니 제자들은 언제 오실 지도 또 어떻게 만나게 될 지도 모른 체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베드로는 오늘 이렇게 앉아 있자니 차라리 고기라도 잡으러 가는 것이 낳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막상 고기는 잡히지 않았다. 밤새 노력했어도 고기는 제자들을 피해 도망치듯이 사라져 버려 허탕만 쳤다.

그런데 날이 밝아 올 때쯤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고기를 못 잡았다니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다."(6)

그제야 제자들중 요한이 베드로에게 말한다. "저분은 주님이십니다."(7)

그러자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들었다."(7) 언제나 요한이 먼저 알아차리지만, 행동은 늘 베드로가 앞선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에 자기가 배 위에 있는지 땅위에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주님께 다가가는 것만이 우선 이었다. "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잔뜩 걸려든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들이 들어갔던 곳은 육지에서 백미터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8)

그런데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9) 밤새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 주님께서는 아침을 차려주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와서 아침을 들어라."(12)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 주셨다."(13) 주님을 만난 즐거움에 주님께서 주시는 아침을 받아먹으니 제자들은 정말 더 이상 아쉬운 것이 없는 순간이었으리라.

식사를 마치시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묻는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 내가 잡혀갈 때 왜 나를 모른다고 했니?'하고 조용한 말로 물으시기라도 하실 텐데. 아니 적어도 '내가 잡혀갔을 때 무서워서 배반했지'하는 정도라도 말을 던지실 만도 하신 데! 예수님은 전혀 그러치 않으시고 오히려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마치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했고 어떤 사람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으신 듯 물으신다. 오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한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의 순수하고 단순한 예의 그 모습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이르신다.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생전에 주님께서 베드로의 배반을 미리 보시고 그에게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다오."(루가 22, 32)하신 그 때 그 말씀을 다시 들려주시는 듯 하다.

그리고 다시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16)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한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16) 그러자 주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16)하고 이르신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17) 예수님께서는 마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나서 절망과 수치스러움 속에서 울부짖으며 통회하는 모습을 보시기라도 하신 듯이 분부하신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17)

그리고 베드로가 어떻게 죽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시듯이 말씀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18)

그리고는 간결하게 말씀을 마치신다. "나를 따라라."(19)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물으신다.

"얘야, 너 지금 모든 것에 앞서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느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다시 물으신다.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 질문은 내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 것이다.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교회와 네 형제들을 돌보아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아멘.


부활 제3주일

(나해) 루가 24, 35-48; 2003/05/04

우리는 살면서 갖가지 경우를 겪게 된다. 그것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고, 유혹이 될 때도 있다.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계획에 불과한 것이기에 불안하다. 그러기에 아무리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한들 믿을 수가 없다. 또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뭔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당장 눈앞에 손해 볼 일 때문에 투자하기를 꺼린다. 불확실한 세상 안에서 우리가 갖는 아쉬움이다.

오늘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는 그야말로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41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게 하시려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42) 그러시고도 모자라서 또 성서를 통해 설명해 주시는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45) 기까지 하신다.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46)

그렇게 그들을 믿게 하시고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47) 그리고 제자들에게 제시하신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48)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울려 퍼진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고 회개하면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고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도 같은데. 그것은 바로 오늘 두 번째 독서에 나오는 말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1요한 2, 3)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세상에 나를 내어주기를 꺼리고 형제들이 나에게 청하는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고 자기 살기만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수난만을 기억하고 부활을 믿지 못하는 가짜 신자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자입니다."(4절)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5절) 누구나 각자 자기의 처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처지가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 제3주일

(가해) 루가 24, 13-35; 02/04/14

살면서 갑자기 닥치는 일들을 겪을 때마다 당황한다. 한 참이 지난 후에야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된다.

오늘 제자들도 그렇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나란히 걸어가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15-16절)

그들은 단지 자기들이 기대하고 의지했던 예수님께서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의 손에 맥없이 돌아가셨다는 사건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여인들의 말에 대한 황당함에 빠져 정작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충격에만 휩싸여 있었지,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리라는 사실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죽으면 끝나버린다는 현세의 고착된 사고와 선입견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현존을 고려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한계는 죽음에 그치지 않고 고착된 사고와 현세와 물질중심적인 사고에 있어 더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25절)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의 의미를 생전에 이어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신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26절) 그 때 그들은 감동을 느꼈다고 후술한다. 그러나 성서 말씀에 대한 깨달음만으로는 변화되지 못한다. 내면화되지 못하고 그냥 감동으로 그친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과 연관된 성사적 행위에서 강한 체험을 한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30절) 그리고 그 체험이 지난 후에야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변화되게 된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31절)

주님을 체험한 이들은 주님의 사도들이 된다. 주님은 우리의 안락한 현세적 삶의 담보자가 아니라, 우리 삶의 구원자신 것이다. "그들은 곧 그 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33절)

여러분께서 우리를 살려주시고 깨우쳐주시기 위해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고 모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 제3주일

(다해) 요한 21,1-19; 2001/04/2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펼쳐나갈 지도자로 생각하고 따랐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사제들에게 맥없이 잡혀가시는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이 아니냐고 묻는 질문에 엉겁결에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을 배반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기가 집과 아내까지 버리고 쫓아다녔던 일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고 스스로도 배반이라는 짐에 짓눌려 죄책감에 시달리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피신해야 했으니 참으로 허망했다.

그런데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사체가 없어졌다고 해서 급히 가보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었고 단지 빈무덤 뿐이었다. 그후 토마와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는 하지만 제자들은 유다인들을 피해 계속 숨어있어야 했고, 실제로 변화된 것이 없었다. 뭔가 되고 또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답답하고 무료한 순간을 회피하기라도 하듯 아니 이제는 다 끝난 일이니까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21,3)하며 나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하셨고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 들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의 그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고,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저분은 주님이십니다."(7절)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배가 육지에 닿기도 전에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 달려갔다. 주님께 달려가자 예수님께서는 빵을 나누어 주셨고 불을 피워 제자들이 잡은 생선을 구워주셨다. 예수님의 은총과 제자들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풍요로와진 것이다.

제자들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체험한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주님께 나아가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과 일치하게 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15-17절)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17. 19절)

세상에서 이렇게 저렇게 노력해도 불확실하고 불안하며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헤맬때, 주님을 바라보자.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할 때 주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어 그대로 이루어주실 것이다.


부활 제3주일

(나해) 루가 24, 35-48: 2000/05/07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47절) 회개란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하느님 사랑의 포로가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많이 받고 싶어서 그리고 또 자기도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그것을 행하려고 하는 곧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1요한 2, 3-5. 참조)

회개한 사람은 자기의 지난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살기 시작합니다. 지난 과거란 바로 자기가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건실하고 성공한 사람같이 보이지만 그의 성공과 행복이 다른 사람의 희생을 전제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다른 이들의 호소에 눈감고 귀막은 결과이기 때문에 결국 그는 다른 이들로부터 외면당합니다. 행복은 다른 이들의 시샘과 원망 속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정과 감사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다른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그것이며 그 죽음은 부활이라는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48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작은 희생을 통해 상대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함께 기뻐하며 또 그런 일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찾아도 찾아도 얻을 수 없고 가져도 가져도 채워질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고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된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어 증언하는 부활신앙입니다. 마치 우리가 많이 가지고 있기라도 해서, 마치 우리가 우리의 노후를 이미 다 준비해 놓기라도 해서 내어주고 나누며 사는 것이 부활신앙이며 부활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 죄의 고백이 되는 것이며 그런 우리 사랑의 행위는 우리 죄의 보속이 됩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는 사랑으로 사해졌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노후는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웃을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던 예수님을 부활시켜 주신 하느님께서 우리도 부활시켜 주실 것입니다.


부활 제3주일

(가해) 루가 24,31-35; 99/04/18

오늘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함께하셔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 어둠 속에 절망 속에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희망을 되살려주신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21) 예수님을 죽음으로 잃어버리고 낙향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낙담하고, 절망하여 막막하기만 하여 미래를 바라보지도 못하는 이들을 연상합니다. 꼭 될 줄 알았던 일들이 어긋나고, 의지했던 이들에게서마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듯 살게된 인생의 아픔들을 봅니다. '그러나'란 단어가 가리키는 어둠과 절망!

그런데 "예수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30)시는 모습 속에서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러 예수를 알아보았"(31)다. '그러나'란 단어에서 이제 '그제서야'라는 단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제자들은 새 희망을 찾고, 그 새로운 희망 속에서 자신들의 희망이 이루어지고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곧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33)

그럼 이들이 '그러나'에서 '그제서야'가 될 수 있었던 사건, 곧 자신들과 함께하던 사람이 예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는 장면'이다. 왜 그 장면인가? 그 장면은 바로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시는 징표로 보여주신 성체성사의 장면이고, 성체성사가 말해주는 바로 구원을 위한 희생의 장면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주신 바로 그 모습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모습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장면이 제자들에게는 의미있는 사건이고 약속의 장면이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32)

오늘 우리에게 있어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는 표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십자가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 희망과 구원의 표징은 바로 주님이 십자나무에 매달려 있는 바로 그 '십자가'다. 그 십자가가 우리 구원을 약속해주는 표징이 된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 1,23)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원을 향한 십자가에서 우리 새 희망의 삶을 시작하기로 합시다.



부활 제3주일

(다해) 요한 21,1-19 : 98/04/26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 에 던져 보아라."(요한 21,6ㄱ)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기적을 뒤로하고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내려진 물질적인 풍요보 다 그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신 예수님이 더 급하고 더 필요했나 봅니다. 우리는 언제 무슨 일이 생기 면, 이렇게 베드로처럼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갑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렇게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 을 보시고 먹을 것을 주십니다. 주님은 주님께 달려드는 이들에게 은총에 은총을 더해주십니다.

베드로가 아침을 먹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마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자신 있 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21,15)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물 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베드로도 다시 대답합니다. "예, 주님, 아 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21,16) 괄호 열고 '그러나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덧붙였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보다 예수님께서 주신 기적 같은 현실의 은총에 빠져 있을 때도 많습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 주님을 배반할 때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말 나를 사랑 하느냐고 물으실 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치 다짐이라도 받으시려는 듯이 다시 또 물으십니 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만이 라도 알아달라고 청하듯이 그리고 배반했던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신앙고백을 하듯이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십니다.(21,17) 그리고 "나를 따라라."(21,19) 하시며 당신 수난의 길을 걷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베드로와 함께, 주님 사랑이라는 수난의 길을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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