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 기념 교구장 특별 사목서한

(가해) 요한 14,1-12; 17/05/14

친애하는 사제, 수도자,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정치적, 외교적으로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 시기에, 특별히 한반도의 평화와 북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올해, 2017년은 파티마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7년 5월 13일, 천상의 어머니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파티마의 작은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한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도록 당부하셨고, 그 해 10월까지 매달 발현하셨으며 태양이 춤을 추는 기적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 온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는 5월 12일과 13일, 파티마에 방문하셔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복자 히야친타 마르토와 프란치스코 마르토를 시성하십니다. 우리 모두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 새로운 성인 탄생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특별히 성모님께서 100년 전 세 어린이에게 당부하신 메시지를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성모님 발현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이미 여러 교황님들이 묵주기도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처럼, 묵주기도가 지닌 보화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우리 모두가 더 열심히 묵주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권고합니다.

1. 묵주기도는 성모 신심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그 단순한 구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의 요약입니다.

복자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사실, 로사리오기도의 특징적인 요소인 성모송의 반복은 그리스도께 대한 끊임없는 찬미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 묵주기도는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훌륭한 관상기도입니다.

성모님은 관상의 차원에서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탁월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고 키우셨던 성모님만큼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이는 없습니다. 성모님의 눈길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께 흠숭과 경탄을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묵주기도를 바칠 때 그 관상적 차원을 생각하면서 차분히 기도해야 합니다.

3. 묵주기도는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평화는 묵주기도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는 평화의 임금님이시며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성모송을 조용히 반복하면서 묵상하는 특징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며, 부활하신 주님의 특별한 선물인 참된 평화를(요한 14,27; 20,21 참조)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주변에 전파하게 합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이 세상의 어려움과 도전들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닌, 평화의 일꾼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4. 묵주기도는 가정의 기도이며, 가정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교우촌에서는 저녁마다 가족이 함께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가정의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이 귀중한 유산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정은 하나로 일치되어 서로 안에서 한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매일 우리 가정을 위해서 묵주기도를 함께 바칠 것을 권고합니다.

5. 우리 모든 가정과 신자들은 우리의 자녀들, 미래 교회의 희망인 어린이들과 청년들이 묵주기도를 배우고, 그들이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기도로써 도움을 받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묵주기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이 기도를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자녀들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서 성모님께 맡기신 자녀들, 그리하여 성모님의 관심에서 벗어난 적 없는 성모님의 귀한 자녀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성모송과 묵주기도의 보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6. 성모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최초의 감실이 되신 성모님을 본받아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삶을 꾸며 나가야 하겠습니다. 미사성제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기 때문입니다.

7. 우리는 지난 한 해 ‘자비의 희년’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참으로 풍부하게 전해진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에서 강조하신 다음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다시 확고하게 고해성사를 중시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자비를 직접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고해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참된 내적 평화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자주 받도록 권고합니다. 교구의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는 고해성사가 매일 집전되고 있습니다.

8. 교구내의 모든 교형자매, 수도자, 사제들께, 2017년 5월부터 10월까지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 지향으로 매일 묵주기도를 드려 주시길 권고합니다.

이 기간 중에는, 교구 내 6개 성당을 돌며 순례기도가 마련될 것이며, 한반도와 모든 신자 가정의 평화,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한 기도 모임도 주교좌 명동 대성당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많은 이들이 함께 참석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2017년 5월 8일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부활 제5주일 노동절 담화문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나해) 요한 10,11-18; 15/05/0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신과 가족을 위해 힘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노동자 여러분, 취업을 희망하며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청년 여러분,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인한 아픔으로 힘든 발걸음을 재촉할 취업희망자 여러분께 창조와 육화, 부활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며 창조 완성 과정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 노동의 신성한 가치

성모님의 달을 시작하는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이며 노동자 ‘성 요셉 축일’입니다. 교회가 세계 노동자의 날에 응답하며 성 요셉 축일을 제정한 것은 1955년의 일이지만, 노동의 신성한 가치에 대한 교회의 확신은 하느님의 계시에 근거를 둡니다(「노동하는 인간」 4항 참조). 하느님의 모습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다스려라”(창세 1, 28)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순간,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노동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닮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요한 5,17)라고 증언하셨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힘든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노동의 땀과 고통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노동하는 인간」 27항). 교회는 노동의 목적은 인간이며, 노동은 생산의 원인이지만 자본은 생산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노동하는 인간」 12항)고 가르치며 노동에서 인간이 그 독특한 존엄성을 얻는다(「노동하는 인간」 1항)고 천명합니다.

2. 암울한 우리의 현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암울한 한국 현실을 바라봅니다. 교육과 직업 훈련을 마치고 일을 하려는 진지한 소망과 공동체의 발전에 책임 있게 이바지하겠다는 각오를 지닌 청년들이 높은 실업률 앞에 희망을 잃어갑니다.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청년이 급증하며, 출산율은 급감합니다. 늘어나는 부채 앞에 신음하는 청년들은 정규직 진입을 꿈꾸며 비정규직의 차별을 감내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갑니다.

오랫동안 노동을 생산의 원인이 아니라 생산의 도구로 여겨 온 정부의 경제 정책과 기업의 태도는 노동의 존엄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고용의 기회를 감소시키고 있습니다. 개인 존엄성과 가정생활의 기반인 노동의 기회를 잃은 가장의 깊은 한숨과 고뇌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임금 및 처우의 극심한 차별이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고 공동선을 증진시켜야 할 노동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3. 연대성과 공동선을 향하여

고용기회의 축소, 대량 해고 등을 통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교회가 재앙이며 죄악으로 선언하는 실업이라는 참으로 암담한 비극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사회 전체를 향해 연대성의 정신을 촉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를 사랑하라”(요한 13,34)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교회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은 연대성의 형태로 제시되는 도움을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은 모든 형태의 연대성의 도움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연대성,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연대성, 기업에 속한 근로자들 사이의 연대성과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연대성 등이 그러한 것이다.”(「가톨릭 교회교리서」 1941항)

노동조합은 공동선 증진을 위한 중요한 연대활동입니다. 노동조합은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또한 지나온 시간 속에 노동조합의 헌신적 활동이 노동자들의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의 신성한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노동이 지닌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힘-노동을 하는 사람과 생산수단을 경영 또는 소유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합된 공동체를 건설하는 사회적 힘-을,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동선 증진을 위해 긍정적으로 드러내기를 기대합니다.

한편, 일자리를 마련하고, 공정한 임금을 지불하며, 노동자와 그 가족의 존엄성을 증진시키는 정부와 기업의 노력은 연대성 증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술의 변화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사람을 위한 기술교육을 강화하거나 정규직 직원의 수를 늘려 노동자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기업과 자신의 발전을 위해 투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 고용주의 부당한 횡포를 통제하는 법적 제도를 마련하는 일, 기업이 공동선의 지평에서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선택을 하는 사회적 제도를 모색하는 일,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자립 동기를 부여하고 여건을 조성하는 일, 미래 시대의 예비 경영자들에게 공동선의 가치와 의미를 교육하는 일 등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고향을 떠나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인종차별이나 인격 침해, 불리한 계약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그들을 지켜주는 연대성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의 주요임무는 노동자와 생산자가 동등하게 그들의 노동의 결실을 즐길 수 있고, 이렇게 효과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노동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안전하게 보장”(「백주년」 48항) 해 주는 데 있습니다. 더불어 국가는 “공동선이 요구하는 형태와 목적에 따라 노동의 공정분배와 배치에 간여할 의무”(「어머니요 스승」 44항)를 지닙니다. 고용과 실업 문제는 국가가 해결해야 할 임무로서 이는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에만 의존해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정부가 노동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을 위해 시급히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노동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저소득층을 위한 적극적 보호정책과 사회복지 실현을 통해 이들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4. 가톨릭 기업인들에게

특별히 가톨릭 기업인들을 향해 촉구합니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가 2012년 발간한 ‘기업리더의 소명’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소명을 받은 기업리더가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에 입각한 경영을 실천할 것을 요청합니다. 세계화와 금융화, 통신기술의 발달, 문화적 변화 등으로 파급되는 전 세계적인 불평등과 자본의 지역화, 정보의 홍수, 이기주의의 심화 및 상대주의와 실용주의라는 윤리체계를 동반하여 공동선의 실현을 어렵게 만드는 현실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덕과 사회, 윤리적 원칙들을 따라 기업을 경영하는 신자들이 이 시대의 등불이며 소금이 되어주셔야 합니다. 이 시대의 징표가 제시하는 도전과 기회를 분명하게 식별하고, 이를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윤리적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신앙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원리를 실천하여 하느님과 세상에 봉사하는 기업인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부의 불평등은,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진정으로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불평등의 근원을 해결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시장의 절대적 자율성, 금융 투기 등을 포기하고, 부의 불평등 구조를 없애겠다는 결심을 먼저 해야 한다”(2015.2.7.)고 촉구하셨습니다. ‘부의 불평등 구조’에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과 ‘노동에 대한 자본의 우위’라는 왜곡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기업인들은 ‘부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일상의 삶과 기업 경영의 실천을 분리시키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경영, 노동자와 가족의 존엄성을 보장하며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앞장섭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화를 도구 삼아 노동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노동의 인간화가 달성된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 건설합시다. 교회 내, 교회와 관련된 기관과 기업들도 가장 모범적인 자세로 이를 실천합시다.?

5. 도전 그리고 희망

저항하기 힘든 큰 파도로 밀려오는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거스르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과 사랑의 힘이 이기주의를 거슬러 공동선을 선택할 용기를 줄 것입니다. 교회는 이전보다 더 깨어있는 자세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증거 하는 가운데 축적되는 영적 풍요를 여러분과 나눌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풍요가 증거 하는 신앙의 열매가 시대적 문제인 물질적, 도덕적, 영적 가난을 헤쳐 갈 유일한 등불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말씀에 따라 ‘자비’를 주제로 특별희년의 시작을 선포하고, 특별희년 준비에 관한 칙서를 발표하셨습니다. 특별한 영적 은총이 주어지는 성스러운 특별희년의 해를 준비하며 우리 마음에 자비의 씨가 자라나서, 노동을 통해 인간 존엄성이 실현되며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는 사회로 한발 다가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연대의 마음으로 모든 노동자와 취업을 준비하시는 분들, 특별히 청년 취업준비생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절망이 여러분을 덮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를 선으로 이끌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2015년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



부활 제5주일

(가해) 요한 14,1-12; 14/05/18

지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논산 씨튼 영성의 집에서 ‘교구사제 영성’이라는 주제로 주교회의에서 개최하는 사제 피정에 다녀왔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으며 예수님의 뒤를 이어 십자가를 지고, 성체성사를 집전하라는 말씀을 들으며, 밤 10시에 자고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기도하고 묵상강의 들으면서 쉬다 왔습니다.

그런데 월요일 밤 자는데 새벽에 갑자기 혈당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잠이 깨었습니다. ‘무엇인가 빨리 먹어야 하는데!’ 하다가 몸을 일으켜 무엇을 먹지는 못한 채 다시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혈당을 재어보니 108이었습니다. 집에서 180에서 230을 넘나들던 혈당이 갑자기 그야 말로 하루아침에 100이상이 떨어지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계기에 얼마 전 비슷한 이유로 새벽에 하늘나라로 돌아간 동창신부를 생각하게도 되었습니다.

아침 기도 시간에 묵상하면서 ‘이것이 내 육신 생명의 종말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정말 하느님의 집에 오니 편안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오늘 복음이 떠올랐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세월호의 희생자들도 다 아버지의 집에 받아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우리 중에는 지금,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도와주기는 해야 하는데 도와주면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까 봐 돕기를 주저하는 사람도 있고,

도와주고는 싶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과 처지 때문에 안타깝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싶어 남몰래 숨어 몸사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희생자와 곤경에 처한 이들의 추이만 바라보며 안타까움과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허망하고 우울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손가락질 하고 비판하고 비난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유다인들에게 팔아 넘길 것이라는 배반 예고 앞에서,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하고 말만 했을 뿐이지 결과적으로 다 도망가고 배신해 버렸듯이,

실상 나도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겸허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 죽어가는 이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자기 한 몸 살겠다고 현장을 박차고 나오는 이들도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모든 이를 죽던 살던 받아주고 계시고 바라보고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처지가 참으로 쓰라릴 정도로 가슴 저며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나 혼자 만의 힘으로는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고,

같이 있는 너와 손잡기 위해 너를 바라보자니 너 하는 일이 답답하고 믿을 수 없으니,

과연 어찌 살아야 할지 그저 막막하기가 그지없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막막하고 하늘만 쳐다보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계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오늘 내가 살기 위해서 너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형식 상으로는 내가 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음이다. 그러나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것이라면 너와 내가 함께 사는 길이다. 너와 내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를 희생해야 우리 모두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육신 생명이든 영적 생명이든, 죽어서 가는 세상이든 살아서 만드는 세상이든, 세상에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나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귀결입니다. 문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문제겠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너인 우리를 구하기 위한 희생제사를 바치셨기에, 오늘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다시 생명을 받아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나타나신 주님을 통해 우리는 삶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죽기 싫어하며 현실적인 보장을 바라며,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정작 실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신 주님 자신을 증거로 보여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너 나 할 것 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있어 나를 살리는 것보다 나를 포기하고 양보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라는 신앙의 신비는 선뜻 이해하기도 실현하기도 어려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통해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나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당신 사랑 안에서 품어 안아주시고 보듬어주시는 주님께 간구합니다. 오늘 이 사회에서 죽은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오늘 이 사회에서 죽음을 향해 치 달리며 살아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부활하신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새생명을 향해 온갖 탐욕과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저주와 주저에서 죽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부활 제5주일

(다해) 요한 10,27-30; 13/04/21

여러분 덕분에 피정 잘 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피정은 요한 복음 묵상 대침묵 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첫날 입문강의를 마치고 지도 신부님께서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 버리시고, 단체개인피정으로 전환되어, 지도 신부님께서 나눠주신 자료에 따라 피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대침묵 피정이라고 해서 ‘아이고, 체하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말 시키는 사람도 없고, 이것 저것 신경 쓸 이도 없고, 음식도 짜지 않고, 맵지 않고, 달지도 않은 음식만 먹고, 기도만 하고 잠만 잤더니 혈당도 내려가고 너무 편안했습니다. 지도 신부님이 안 계시는 바람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도하고 방에 앉아서 책을 쓰면서 보냈습니다. 책을 쓰니까 몸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고,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힘이 생기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정 중 돌아가면서 나이 순으로 미사 강론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한 신부님께서 요한 복음을 쓰면서 평생 안 보이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평생 한쪽 눈이 안보여서 글을 읽어도 대강 훑어 보고, 글씨를 써도 그냥 대강 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을 주석서들을 다 펴놓고 한 글자씩 읽고 묵상하면서 쓰다 보니 눈이 보이기 시작하셨답니다. 지금은 눈이 처음보다 네 배는 좋아졌고, 글씨를 쓰는 손에 힘이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사 년 전부터는 운동도 안 나가고 앉아서 요한 복음을 쓰면서 주님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고희를 맞으셨는데 미국에서 친 형제 자매들이 축하해 주러 오셨답니다. 그런데 와서는 신부님이 눈이 보이게 되었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누나들이 한 쪽 눈을 가리고 글씨를 써보라고 하시기에 그을 쓰기 시작하니까 누님들이 눈물을 흘리시며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렀답니다. 의학적으로는 어떻게 풀이할지 모르겠지만, 그 신부님은 요한 복음을 묵상하며 주님의 말씀을 깊이 파고들며 기도하다 보니 자기 몸에 기적이 생겼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일상 속에서 실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을 잘 쓰면 쓸수록 주님께서는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드리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묵상하며 쓰시는 그 신부님께 내려주신 기적처럼.

여러분은 주님께 어떤 은총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께 받은 은총을 어떻게 발휘하시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해주시고 계십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34절)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서 심어주신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말하는 대로, 그 사랑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자됨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5)

여러분 각자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려주신 은총을 육성하고 계발하여, 가정과 교회와 사회 형제자매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여러분 삶에 커다란 기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부활 제5주일

(나해) 요한 15,1-8; 12/05/06

여러분의 기도와 배려로 사제 피정을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찾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고 밥차려 먹고 산책하면서 책 쓸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이번 피정 중에 신약성경을 훑어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지 깨달을 수 있었고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여기 삼성동에 와서 사목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더욱 더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피정 중에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견진 교리로 2개월간 신약성경을 훑어보는 ‘성경말씀 맛들이기’를 집필하였습니다. 이번 피정 중엔, 특별히 신약 성경 속에서 ‘감사’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눈에 띄었고, 오래 머물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감사라는 단어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해주신 주님과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고 하십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주님의 구원사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사제에게 순종하여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하겠지만, 동시에 사제도 신자들의 형편 사정을 잘 헤아리고 배려하여야 적절한 사목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15,7)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 개인의 이익이나 집착 또는 탐욕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을 따라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하늘 나라를 건설해 나간다면 주님께서는 꼭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부임하여 지금까지는 제가 주도적으로 끌어 당기고 밀면서 왔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드릴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활동하면서 여러분이 제 사목 스타일도 다 알고, 제가 한다고 해도 결국 여러분이 활동하는 것이니, 여러분이 여러분 수준에서 여러분이 이루고 싶고 또 이룰 수 있는 일들을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계획하여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이 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여러분이 예전부터 “내가 구역반장이 되면…, 내가 사목협의회원이 되면…” 하면서 꿈꾸시고 그리워왔던 좋은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나가시길 빕니다.

시키는 일만하면 언제나 피곤하고 힘겹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기획하고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나씩 한 걸음씩 이루어 나간다면 여러분은 더욱 더 창의적이 될 것이고, 기쁨과 보람찬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게 되시리라고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선사하신 자유를 주님과 함께 풍요롭고 은혜로운 업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기쁘고 행복해지며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시길 기대합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15,8)



부활 제5주일

(가해)요한 14,1-12; 11/05/22

지난 주간 신학교에서 사제 연수가 있었습니다. 고요하고 그윽한 곳에서 사제연수를 하면서 참 좋았습니다. 매일의 연수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참 좋았습니다. 만 이틀을 저녁 먹고 8시부터 다음 날 7시 30분까지 근 12시간을 실컷 자면서 그야말로 푹 쉬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셨지만,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는 기회만 되고 청하기만 하면, 신학교에 자리와 방을 만들어 몇 일이고 머물며 쉬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기도도 원없이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니 주님과 교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요한 14,2ㄱ)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하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2ㄴ) 말씀하시고, 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토마스가 주님께 도대체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게 갈 수 없다.”(5) 우리가 주님께서 제시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 가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께서 진리이심을 깨닫게 되며, 또한 그 진리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7)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 라고 마치 자신은 더 이상의 다른 욕심은 없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 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자 주님이심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믿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것들을 체험하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도 바쳐드립니다.

그런데…! 말로 고백하고 머리로 믿으면서도, 또 경우에 따라서는 때때로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리면서도, 어떤 때는 마음 한 구석에 더 많은 필요와 욕구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욕심과 허영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악마의 허망한 꼬임에 빠져들어 그 허망한 유혹이 실제인양 그것을 취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와 입으로는 주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 살 때는 재물과 자리와 기회와 권력이 내 마음에 주인처럼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서 현실과 재물로 대표되는 거짓 유혹들과 그 거짓 유혹들에 부하뇌동 하는 내 탐욕들만 보이고, 진리이신 주님과 주님께서 제시해주는 길은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보다는 진리도 아니며, 생명을 주지도 못하는 현세의 소모적이고 허망한 길을 조급하게 애태우며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마음 속에서 헛된 탐욕과 허망한 꿈을 벗어 던지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믿고 맡기며 나아간다면 우리는 진리이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참 인간의 길을 걸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4,4-5)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서 기꺼이 받으실 수 있는 살아 있는 돌로 만드십시오. 아니,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진리이신 주 예수님을 따라 참 인간의 길을 걸으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부활 제5주일

(나해) 요한 15,1-8; 06/05/14

산책을 하다보면 길가에 나무가 많습니다. 나무들은 보기도 좋고 마음도 가라앉혀 주고, 산소도 많이 줘서 정말 좋습니다. 이 봄날엔 더욱 더 그 나뭇잎 색깔이 여러 가지로 빛이 나고, 햇빛을 받는 부위마다 색이 다르게 반사하여 신비한 마음마저 들게 합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나무는 죽은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도 있습니다. 땅에 떨어진 그 나뭇가지가 자기 스스로 나무에서 분리되고 벗어나고 싶어서 땅에 떨어진 것도 아닐 텐데 아쉽습니다. 나무에 나뭇가지가 달려 있을 땐, 보기도 좋고 열매도 맺을 수 있지만, 나무와 떨어져 땅에 굴러다닐 땐 그저 쓰레기처럼 보이고 아무 쓸 데 없어 보입니다.

그 나뭇가지가 영양분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떨어질 수도 있겠고,

누군가 지나가면서 뜯어냈을 수도 있겠고,

새 같은 자연적이고 번개 같은 물리적인 힘이 그 나뭇가지를 나무에서 떨어뜨릴 수도 있겠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스스로를 ‘죄인들의 교회’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주 예수님이신 진리를 간직하고 있지만, 그 신자들은 그 진리를 얻고 지키려고 노력하기 위해 모인 것이지, 그 교회에 모인 모든 이가 진리를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죄를 짓고 통회하고 반성하고 다시 주님의 축복을 받으러 모이기 때문에 죄인들의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성당에 나오던 때만큼 또는 꾸준히 성당에 열심히 나올 때에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열매가 종교적인 것이든, 신앙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현실적인 것이든.

예수님께 기도만 하는 것만으로는 온전치 않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제자 공동체인 교회에 함께 할 때 비로소 믿는 이로서 누릴 수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우스워 보이고, 다 어리석어 보이고, 다 비난 받을 사람으로 보여도, 그 사람들을 탓하면서 떠날 때, 나는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 떠나는 사람을 더 이상 끌어안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사람으로서의 부끄러움으로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어떤 가게에 또 가보면, 분리되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른바 조화라고도 하는데 나뭇가지를 필요에 따라 나무 이쪽에 이렇게 붙이고, 저쪽에 저렇게 붙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크기와 모습을 사람 마음대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산 나무를 심을 수 없는 곳에서는 생나무 대신 장식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생명력이 없어 죽은 나무처럼 보입니다. 아니 모양만 나무지 살아있는 나무처럼 나무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햇빛과 물과 좋은 땅이 필요한 것처럼 신앙도 그렇습니다. 성당에 나온다고 다 예수님과 붙어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마음으로 성당에 나와 좋은 분들과 함께 주님과 일치하여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열매를 맺도록 도와줄 좋은 마음을 가지고 성당에 옵니까?

나는 남이 믿고 의지할 만한 좋은 분입니까?

설사 내가 그렇지 못하고 심지어는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가급적이면 스스로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야말로 좋은 분이 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씩 매일 노력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3,20)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

사도 요한은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우리에게 전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1요한 3,22-23)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요한 3,24)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요한 15,8)

우리 인간들의 질투와 미움과 얽히고설킨 원망을 짊어지시고 돌아가시면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서신 주님께, 겸손되이 나 스스로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 서로 사랑하여 이 땅에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냅시다.



부활 제5주일

(가해) 요한 14, 1-12; 05/04/24

독일 출신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님께서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되셨습니다. 교황명은 베네딕토 16세로 정하셨습니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역대 8번째 독일인 교황님입니다.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아주 가까운 조언자로서 '교황의 오른팔', '요한 바오로 3세'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새 교황님은 지난 4월 8일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미사 강론에서 전 교황님을 회고하면서 "우리의 사랑하는 교황께서 아버지의 집 창문가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축복을 내리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이제 우리는 그의 유해를 불멸의 씨앗으로 땅에 묻는다. 우리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기쁨에 찬 희망과 깊은 감사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2일 선종(善終)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을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18일 전세계 6개 대륙을 대표하는 추기경 115분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추기경님들은 18일 오후 4시30분 시스티나 성당에 입장해 교황 선출과 관련된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 뒤 콘클라베에 들어갔었습니다.

콘클라베 이틀째에 새 교황이 선출된 것은 아주 이례적으로 빠른 것이라고 교황청 라디오 방송은 전했습니다. 항간에 개혁과 보수의 이해차이로 꽤 오랜 시간을 끌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4-5번의 투표 끝에 선출되신 것으로 봅니다.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 흰 연기가 솟아오르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이 우렁차게 울린 뒤 호르게 아르투로 메디나 에스테베스 추기경님께서 교황님께서 선출되셨다는 표시로 "하베무스 파팜"을 외치셨고,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발코니에 나서서 베드로 광장의 신자들에게 첫 강복을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위대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으로, 추기경들께서는 주님의 포도원의 단순하고 보잘것없는 일꾼인 저를 뽑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또한 부족한 도구를 통해서도 일하시고 활동하실 줄을 안다는 사실로 저를 위로하며,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의 기도에 의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 속에서 항구한 그분의 도움을 힘입어 계속 앞으로 나갑시다. 주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고 그분의 거룩하신 어머님이신 마리아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아멘."

지난 16일로 만 78세가 된 새 교황님은 1927년 4월 16일 독일 바이에른주 파사우 교구 마르크틀 암 안에서 반나치주의자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프라이징 대학과뮌휀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였고, 1951년 24세 때 사제수품을 받고 뮌휀-모자크 성 마르틴 성당의 보좌신부로 임영되셨습니다. 1954년부터 프라이징 대학과 본 대학, 뮌스터 대학, 튀빙겐 대학 등을 거쳐 69년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교의신학을 가르치셨습니다. 1962년교황 바오로 6세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전문가로 참가하셨습니다.

1977년 50세 때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의 대주교로 수품되자마자, 곧바로 추기경으로 서임되셨습니다. 1981년에 신앙교리성 장관,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장,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직하시다가, 지난 2005년 4월 19일에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되셨습니다.

교황이 되신 라칭거 추기경님은 2005년 4월 타임지에 의해 '세계 100대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 시작 전 미사 강론에서 '파벌'과 '이념', '자유주의', '무신론', '불가지론'(不可知論), '상대주의'(relativism) 등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차기 교황은 교회의 절대적 진리를 수호해야한다는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교회의 교리에 바탕을 두고 확고한 신앙을 갖는 것이 오늘날에는 근본주의로 불리는 반면, '온갖 이론의 바람에 휘둘려' 이리저리 들까불리는 상대주의가 현대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것도 확실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의 자아와 욕망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 상대주의의 독재를 향해 가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분은 교황으로 선출되시기 전에 미국 주교들에게 낙태를 옹호하는 정치인에게는 영성체를 베풀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셨는가 하면, 유럽은 기독교 지역이므로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도 하셨습니다.

또 최근 유럽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되찾아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동성결혼과 이혼, 인간복제 등에 반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격변하는 시대의 가치'라는 저서를 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의 저서 중에 '그리스도 신앙과 어제'라는 책이 1974년 장익 주교님에 의해 국어로 번역되어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신앙교리성성 장관 시절에 1980년대 남미 가톨릭계를 주도했던 해방신학에 대해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과 '그리스도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을 통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사제 독신제'를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내와 자녀를 포기함으로써 세상에 하늘나라를 드러내 보이는 증거"라고 하셨고, 여성사제수품에 대해서는 "교회가 여성을 사제로 서품시킬 권리가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이번 교황님의 선출을 보고 언론들은 "전세계 가톨릭은 '강한 교회'를 선택했다. 정통성 유지냐, 현실을 감안한 개혁이냐라는 큰 방향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던 로마 가톨릭은 엄격한 교리해석과 강한 보수주의자로 평가되는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을 제265대 교황(베네딕트 16세)으로 선출했다."고 평했습니다.

그분은 엄격한 보수성과 나이, 유럽 출신 등이 교황으로서의 단점으로 지적되었지만, 불안정한 상황과 과도기 관리자가 필요한 시점에 보수적인 가톨릭 분위기가 오히려 그의 풍부한 경험과 깔끔한 관리능력, 탁월한 외국어 실력 등을 장점으로 부각되었다고도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주님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셔서, 우리 교회를 현세의 유혹과 어둠의 세력 앞에서 굳건히 지켜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잘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합시다. 아멘.



부활 제5주일-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평신도 사목위원회 가정 폭력에 관한 담화

2004/05/09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이들을 비추며 우리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루가 1,79)

“가정폭력 없는 생명의 가정, 평화의 공동체를 이룹시다.”

생명의 소중함과 가정의 평화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성모성월과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특별히 가정폭력의 종식에 관심을 두고 이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1. 가정의 평화와 인간 존엄성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기관과 개인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역대 교황님을 비롯하여 세계 주교회의, 아시아 주교회의와 한국 교회는 언제나 가정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교회 내 많은 기관과 본당의 여러 활동단체, 그리고 수많은 개인이 가정의 소중함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교회 안팎으로 가정 해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가정은 생명의 공동체요 사회생활의 배움터입니다.

가정은 생명이 움트고 양육되는 곳입니다. 부부와 부모 자녀 간에 이뤄지는 사랑과 친교를 통해 가정은 생명 보호가 보장되는 “생명의 성역”(「생명의 복음」, 92항)이 됩니다. 부부는 배우자를 통해서 자신의 존엄과 동등함을 가장 실감나게 체험하고, 또 자녀는 부모를 통해서 인간관계를 배우고 사회를 배웁니다. 이렇게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권위와 안정과 사귐의 생활은 사회 안에서의 자유와 안전과 형제애의 기초가 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07항).

“자녀들은 부부애의 살아 있는 표상입니다”(「가정 공동체」, 14항). 불안정하고 신뢰가 깨진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폭력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가정에서 인격적 존엄성과 건강한 관계를 체험하면 사회관계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의 기초이고 핵심 단위인 가정이 평화로우면 사회가 평화롭고, 가정이 불안하면 사회가 불안해지게 마련입니다. 가정 문제는 곧 사회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의 평화를 위협하는 주요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정폭력입니다.

3. 가정폭력에는 부부 사이의 폭력뿐만 아니라, 자녀학대와 노인학대 등이 포함됩니다.

또 신체에 가해지는 상해뿐만 아니라 정신과 정서를 파괴하는 것, 경제적이고 언어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도 해당됩니다. 우려되는 것은 가정폭력에 대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신자 가정도 일반 가정과 별 차이 없이 가정폭력이 30%이상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인 집안 일로 치부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생명 존중과 평화로운 사회 건설을 크게 위협하는 사회적 범죄입니다. 또한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창세 1,28) 존엄하고 평등하게 지어내신 뜻을 명백하게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특히 급증하고 있는 아동학대와 노인학대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경제적으로 약한 처지의 그들이 생활고 등을 이유로 방치되고 버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아동은 부모의 소유물처럼 취급되어 학대와 동반자살의 대상이 되는 등, 만연한 생명경시와 물질만능주의 풍조 속에서 가장 큰 희생자가 되고 있습니다. 아내학대도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성의 존엄성과 권리가 증진되는 희망적인 지표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정폭력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현실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차별하며, 또 아내를 때리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는 그릇된 가치관이 여전히 존재함을 말해 줍니다. 이는 남편과 아내 사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바탕을 둔 ‘상호순종’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여성의 존엄」, 24항)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납니다.

4. 누구보다도 교회 구성원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데 앞장서 주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의 사건과 문제, 어려움, 상황을 통해서 부부가 계속 혼인 안에 머물도록 부르십니다”(「가정 공동체」, 51항) 그러므로 부부는 경제적으로 힘들고 서로 부족한 점이 있어도 위로하고 채워 주는 속에서 부부애와 신앙을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고통받는 이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고 용기를 내기 바랍니다. 가정평화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은 자신의 변화만이 사랑과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는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지속적으로 관심과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목자와 수도자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지원 체계를 갖추는 일, 가정의 중요성과 올바른 부부관계에 대해 교육하는 일 등에 관심과 정성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다시 한 번 일상적 폭력으로부터 가정과 사회의 평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수고하는 모든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이 “자기의 모범과 증거로 세상에 죄악을 밝히고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도록”(교회헌장 35항), 생명과 평화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기도드립니다.

2004년 5월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위원장 염 수 정 주교



부활 제5주일

(나해) 요한 15, 1-8; 2003/05/18

박쥐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음이 착해서 여기 저기서 요구하는 것을 다 거절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열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 욕심으로 그런 것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선과 악이 확연히 구별되지만,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는 세상에서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선택하고 지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중용(中庸)이라는 단어가 있다. 심지어는 그것을 덕이라고까지 일컫는다. 중용의 덕. 이냐시오 성인도 영신 수련과정에 있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5)고 말씀하신다. 누구도 예수님께서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어떤 문제에 닥칠 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에게서 떠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붙어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돈을 꾸기만 하고 갚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내게 와서 돈을 꿔 달라고 하면, 망설이게 된다. 이 돈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할까?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안 꾸어 줄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필요해서 꾸는 것이니까 꾸어줄 것인가? 그 어느 쪽을 택해도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꾸어주기 싫어서 안 꾸어주거나, 되돌려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안 꾸어준다면 문제거리겠지만!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느님께 중심을 두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있다면 그래서 사랑으로 하는 행위라면 그 어느 쪽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와 악에 관련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이다. 하느님께 희망을 둔다는 것은 현실 이해관계에서의 이탈 또는 초월을 의미한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1요한 3, 23)라고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소유에서 공유에로의 이전을 의미하며, 죽음에서 부활에로의 전이를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부활 제5주일

(가해) 요한 14, 1-12; 02/04/28

가끔 예수님을 꿈에서라도 한 번 직접 만나고 싶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주님을 뵙는다는 것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어 두렵기도 하다. 살던 죽던 어떠한 경우에서든 주님과의 만남은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특별히 선택하신 이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이기에 부럽긴 하지만 우리가 어쩔 수는 없다. 단지 청할뿐.

한편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서 살기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머리, 여기부터는 몸 등으로 구분이 되고, 그 부분의 움직임과 그로 인한 소리 등이 시공 안에서 시청각으로 관계해서 듣기도 하고 볼 수도 있지만, 시공 안에 제한되지 않으신 주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거나 들리거나 느끼게 되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주님께서 여러 사람 가운데서 주님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도 가끔 사람들은 기도 중에 "주님을 뵈었다." 또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은 것과 같은 느낌과 위로, 만족과 확신 등의 효과를 얻은 경우를 일컫는다.

주님과 생전에 함께 지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들이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제 시공에 한정된 육을 떠나 생전과는 달리 영과 육이 결합된 새로운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부활이라는 새 생명은 우리를 죽음으로 한계지어지는 현세에서의 해방과 영육이 하나인 구원된 새로운 삶을 예시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마지막날 구원되어 누릴 영원한 생명을 여기 이 땅에서부터 미리 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구조에 맞추어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 6) 우리가 주님을 뵙기를 청하며 기대하는 기쁨 곧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는 주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산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1베드 2, 5)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를 내 몸으로 봉헌하면서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 12)



부활 제5주일

(다해) 요한 13, 31-33ㄱ.34-35; 2001/05/13

예전에 한 분이 자기가 사업을 할 때 자기 밑의 회계 담당 직원이 회사의 돈을 횡령하고 달아나 사업을 포기했던 적이 있단다. 그런데 그 회계담당 직원이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분은 천주교 신자이야기만 하면 화를 내고 싫어했다. 또 신자거니 하면서 돈을 맡겼다가 떼거나 빚보증을 잘못서서 손해를 보면 신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차라리 다시 받을 생각않고 잊어버렸다가 나중에 다시 돌려받으면 공돈이 생긴 것같아 기분이나 좋은데 그렇지 못하면 돈 떼이고 친구 잃고 손해가 크다. 주는 쪽도 자기 돈이거나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만 꿔주거나 보증을 서야 하는데 그 이상 해 준 것도 사실 실수라면 실수다. 꾸어가는 쪽도 자기 사업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탐욕스럽게 꾸어서 남에게 피해까지 주는 일은 삼가야 겠다. 게다가 자기가 땀흘려 일해 살지 않고 남의 돈으로 살 생각을 하는 것은 아예 떨쳐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엄밀한 의미에서 금전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성당마저 안 나온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자기 하나 잘못하면 전체 교회가 다 욕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열번 잘하다가도 한번 실수하면 그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니까 조심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또 이왕이면 선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을 빛내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32절)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는 선교도 성당에 나오라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이웃 사람들이 나를 믿고 의지할 정도로 살아야만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34절)라고 하신다.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다.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 일 안하고, 선한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여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이웃이 어려울 때 관심 갖고 도와 주고 거기다 주님의 이름으로 희생까지 한다면 우리는 신앙인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용서다. 사랑하기에 용서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따라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5절)



부활 제5주일

(나해) 요한 15, 1-8: 2000/05/21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하나라도 더 벌어야 되는데 벌기보다는 나눠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우리를 붙잡고, 좋은 일을 하고 나서도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에 편치 못하고 완전치 못해서 늘 마음에 부담과 반성거리만 안고 사는 것만 같아 힘듭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와 아픔이 있으면서도 우리가 계속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마음속에서 공통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 바로 그것입니다. 차마 떠날래야 떠날 수 없고 또 포기하기라도 하면 마치 우리의 생애가 끝나기라도 할 듯 더욱 거세게 솟아나는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인간을 향한 고귀한 사랑, 그 사랑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 13)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로마 5, 5)에 우리는 갖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딛고,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믿음에 헌신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헌신은 우리가 꿈꾸고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한 희망은 우리에게 더욱 더 신앙을 깊게 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만듭니다. 복음선포는 단순히 천주교를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대자연과 세상 만물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을 수 있게 하고 특별히 우리들의 사랑을 통해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찬 하느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이웃과 사회가 복음으로 변화된다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도 우선적이며, 우리 밖에 할 수 없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 복음선포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주교의 좋은 말씀과 교리들을 요령 있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그 말씀을 우리 스스로 실현하는 참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5)



부활 제5주일

(가해) 요한 14,1-12; 99/05/02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 곳을 마련해 주시고 또 거기 가는 길도 알려주실 뿐만아니라 거기에 데려가주시기까지 하시겠다니 얼마나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런에 우리는 정말 행복합니까?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낄만 합니까? "그러자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무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하고 말하였다.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하고 간청하였다."(5.8.) 예수님께서 다 베풀어 주신다는데 왜 우리는 불안해 하고 주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주셨는데 아직도 뭐가 더 모자란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하고 말씀하셨다."(6-7) 믿음이 부족한 탓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그 길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는데도 우리는 그 길을 온전히 따라 걷지 못하고 있다.

주님께서 걸으신 길이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 부활하신 삶이셨다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첫 번째로 성직자나 수도자나 사회복지사나 공무원들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삼거나, 두 번째로는 내 일을 하고 남은 여력을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 전력하거나, 세 번째로는 아예 우리가 하는 일 자체가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여겨 나에게 맡겨진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데 최선을 다함으로써 내 직업, 내 일을 통해 나를 바쳐야 겠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별도의 다른 두 개의 삶이 아니라, 내가 겸손하고 진실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사랑으로 용서하고 베풀면서 나의 일을 해 나가면 나는 내 일을 통해 세상에 하늘나라를 이루며 신앙을 완성하는 것이리라.



부활 제5주일

(다해) 요한 13,31-33ㄱ.34-35 : 98/05/10 ]

나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잘못 계산된 것 같고, 내가 겪어야 할 상황이 아닌 데 나에게 잘못 배당된 것처럼 느껴진다. 또 한편 받아들이기도 싫다. 그래서 거 기서 벗어나려고만 한다. 그래서 집안에서 겪는 어려움을 피해 밖으로 나가 활동하기도 한다. 그 러나 이렇게 밖에서 하는 활동이 바람을 쐐는 정도는 될 수 있을지언정, 내 문제의 해결이 되지 는 못한다. 오히려 내 문제는 더욱더 나를 죄어오고, 짜증스럽게 하며 그럴수록 점점 더 밖으로 나가고만 싶어진다. 다행스럽게 봉사활동을 통해, 또 다른 이들의 도움을 통해 내가 내 문제를 새롭게 보게 되거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해결해주지 못한다. 떨쳐버리고 싶지만 떨쳐버릴 수도 없고 또 떨쳐지지도 않는다. 지금은 어떻게 피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또 돌아와 결국은 해결해야만 한다. 피함으로써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숙제다.

예수님께서도 어려움을 겪으셨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그분은 무시와 배반과 당했고 사형을 당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 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요한 1,10-11)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려고 하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 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 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겪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셨지만, 현실을 통해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에 충실하셨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새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주님이 주신 계명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로 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현실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기로 하자.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 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 을 이겨내십시오."(로마 12,19ㄴ.21)


E-mail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