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가해) 요한 14,15-21; 17/05/21


구역미사를 드리면서 신자분들이 ‘왜 어떻게 성당에 나오게 되셨는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기쁨이 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구역에서 한 분이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누군지 모르게 나를 도와주시는 것 같았다.”고 말했고, “그 도와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신자분의 말처럼 우리는 주님을 두 분으로 직접 뵙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을 명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성품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전혀 모르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우리는 그분이 무엇을 좋아하시고 어떻게 사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앞의 신자분 말처럼 명확하게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고 계시다든지, 밀어주고 계시다든지, 보호해주고 계시다든지 등의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체험적으로 압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그분에 대해 많이 알려주셔서 지식으로는 어느 정도 알지만, 구체적으로 그분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 무미건조할 뿐이지 그렇다고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희망을 주십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 나 혼자 동떨어져 내 힘만으로 내 인생을 개척하면서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나에게,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절)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막연하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남들의 말을 통해 알고 있는 정도만 아는 그분을 직접 느끼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절)

그나마 그렇게 감이 잡히게 되면, 더 이상 그분은 성경에서 말하는 그 어떤 분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고 계시다는 것을 명확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주님은 우리의 희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있는 저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실패한 모습의 대명사로 저렇게 죽어간 분에게 저희가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 압니다. 저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어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주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음에서 건져 부활시켜 주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주님 삶의 방식을 따라 구원을 위한 희생을 살면, 우리는 물론이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나 홀로 구원받을 수 없고, 내가 내 탐욕과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 함께 구원되는 길을 발견하고, 또 나뿐만 아니라 너와 우리가 그렇게 걷게 되면, 우리 모두가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발생시킬 것을!

그리고 너와 내가 함께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발생시키면, 우리 안에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실 수 있게 되며, 주님의 말씀처럼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우리의 길이 바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주님을 아는 길, 주님의 사랑을 받는 길,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길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일러주신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발생시키는 일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지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예수성심 성월에 세례를 받게 될 예비신자들의 선발예식을 거행했습니다. 예비신자 때나 세례를 받은 지금이나 아니 앞으로도 우리가 죽어 주님의 품 안에 안길 때까지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알 수 없으며, 그 때가 되기 전까지는 늘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며, 시간과 공간이 제한된 이 세계에서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다소 답답하고 허무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길을 걷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5-17절)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느끼고, 조금 더 명확하게 알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셔서 고단하고 힘겹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셔서, 힘있게 이 세상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셔서 어둡고 외로워 깜깜한 밤을, 주님을 알게 된 기쁨으로 기쁘고 보람찬 희망의 나날로 바꾸어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우리보다 어렵고 힘겹게 오늘을 보내고 있는 부족하고 나약한 이들에게 주님 은총을 나누는 무상의 벗이 되어 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함께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발생시킬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부활 제6주일


(나해) 요한 15,9-17; 15/05/10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거나 좋은 감정이 생길 때, 스스로 물어야 할 지 모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가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 삶의 스타일 중의 일부가 나와 비슷하고, 나의 취향에 맞으며, 나와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 좋은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전체가 좋은 것이라 나도 좋은 것인지?’ ‘그가 무엇을 바라며,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며 사는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가지 더 살핀다면, 그가 추구하고 사는 삶이 현세에 국한되지 않고, ‘현세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영원한 생명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 어디가 살면서 배웠다고 하는 (율법)학자들과 내노라 하는 권세가들과 현실 생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치가들과 대립하거나 싸우지 마라. 결국 죽기밖에 더 하겠니!” “나처럼 고집부리다가 죽지 말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들어주면서,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라.” “하느님 때문에 싸우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더라도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좋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가 죽는 것보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니!”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지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현실 생명을 부정하거나, 미래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과 현세 삶이 전혀 다른 것처럼 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를 언급하실 때,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가 놓이게 될 처지와 연관시켜 자주 말씀하십니다.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자에게)“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36.40)

그러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나오듯이,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현실에서 죄악의 굴레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9) 그 사랑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귀하고 아쉬워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악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대표되는 죄악에게, 우리의 몸값으로 주님 목숨을 지불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해내신 것입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7-8)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해내신 주님의 사랑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예수님께서 지상생애를 살아가시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아버지와의 일치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지키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샘솟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면서 누리신 충만한 기쁨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얻을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을 계명으로 삼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2-13절) 그렇게 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의 도움만 바라고 주님의 은총만을 구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아니라, 주님의 협조자가 되고 친구가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주님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청하는 피조물로 머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 사업을 이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복음화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ㄱ)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청하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6절ㄴ)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방법이자 사명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인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주신 주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이제 우리도 마냥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계속 이것 저것 달라고 청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보답과 주님 사랑의 결실로서, 이 땅에서 주님 사랑의 사업을 이어 나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7)



부활 제6주일 - 제3회 생명주일 담화문


인간생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존귀합니다

- ‘연명치료 중단 논의’와 관련하여 -

(다해) 요한 14,23-29; 13/05/05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 우리는 제3회 생명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생명주일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인간생명을 임신(수정)되는 순간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주교회의가 설정한 인간생명 수호 주일입니다. 올해 생명주일에는 최근 우리 사회에 제기되고 있는 인간생명의 마지막 단계의 연명치료 중단에 대하여 숙고하고자 합니다.

인간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있지만, 생명은 그 모든 것의 근본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중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살아 있기에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생명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이며 희망의 기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생명을 얻어 살기를 바라십니다(에제 33,11 참조). 따라서 우리가 희망을 잃고 삶을 포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죽게 하는 일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선물을 받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웃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보살핌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인 인간생명을 보호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진정한 친교는 병들고 약한 이웃과 함께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교회가 거행하는 병자성사는 병들었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이웃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주님의 품에 안기도록 돕는 것입니다.

2. 현대의 의료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한편으로는 각종 질병 치료와 건강 증진에 기여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과 건강을 돌볼 책임의식을 고취하기보다 의료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자연스런 죽음을 인위적으로 지연시키며 오히려 고통을 연장시키는 상황을 낳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죽음이 임박한 말기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어려운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만 하고, 따라서 무엇이 올바른 결정의 기준인가에 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환자의 고유한 질병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균형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합리적 치료’의 원칙(교황청 신앙교리성, 「안락사에 관한 선언」; 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 「의료인 헌장」, 64항 참조)을 생명 말기의 치료에 관한 윤리적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스런 죽음의 과정을 인위적으로 방해하거나 재촉함이 없이 “온전한 책임과 존엄성을 지니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안락사에 관한 선언」)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임박할 때,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을 보호해 줄 뿐인 치료법을 거부할 수 있는 결정은 양심 안에서 허용된다. 단, 유사한 병증의 환자에게 요구되는 정상적인 간호는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안락사에 관한 선언」)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어떤 치료 수단이 환자의 상태에 의거하여 과도하고 불균형적인 수단이라고 신중히 판단된다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양심 안에서 허용됩니다. 그러나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생명을 의도적으로 단축시키는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은 용인될 수 없습니다. 영양과 수분 공급, 통증 조절, 위생 관리 등 기본적인 돌봄에 해당하는 것을 중단하거나 거부하는 일도 용인될 수 없습니다.

3. 의료인과 사목자는 삶의 마지막 시기를 맞이한 환자가 자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심리적 안정을 얻고 가족을 비롯하여 사람들과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한편 자신이 고통 중에 있을 때나 이웃의 고통을 목격할 때 우리는 특별히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하고 그 고통에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40년 전부터 줄곧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 제14조의 삭제를 위하여 애써왔고, 30여 년 전부터 국내에서 호스피스와 가정 간호를 시작하여 병자들과 말기환자들을 돌보는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낙태반대운동은 인간생명의 초기 단계를 보호하는 운동이고, 호스피스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지닌 존엄성과 품위를 존중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활동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문화,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생명의 시작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생명 존중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 사회에 태아 보호와 호스피스의 문화가 더욱 정착되고 제도적으로도 뒷받침이 될 수 있도록 신앙인들과 정부 관계자 모두가 보다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주시기를 바라며, 생명운동에 헌신하는 분들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2013년 5월 5일

제3회 생명주일에

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장봉훈 주교



부활 제6주일


(나해) 요한 15,9-17; 12/05/13

구약에서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 축복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특별히 신명기계 신학은 하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의 성소인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의 율법을 지키며 하나의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과 하나되고 백성들이 하나되어 구원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와 예배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아주 중시했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살고자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면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으로 하나인 백성이 분열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자신들이 주님께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회개하여 다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복을 받으리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다 왕국이 이방인들의 공격으로 결정적으로 패망해 바빌론 유배를 가면서 되짚어 보았답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했는가?’ ‘우리가 주님께 죄를 짓긴 하였겠지만, 우리를 잡아온 바빌론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잘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이렇게 패망하여 귀양까지 오게 되었는가?’

그렇지만 믿음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는 자신들만을 구원하시려고 하지 않으시며, 자신들을 교육시키시기 위해 다른 민족들을 통해 벌하실 수 있으며. 자신들이 너무 보잘것없는 민족이기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강대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이민족들에게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이 아무리 힘겹더라도 꾸준히 진실하게 주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면 다시 주님께서 축복의 선물로 주신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고 70년 유배생활 동안 회개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일상에서 주님의 현존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고민합니다. 미사드리고 기도할 때는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일상에서는 주님과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고 거의 주님 생각도 안 나고 또 생각도 안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예수님을 일상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담고 사는 것입니다. 평소에 자신에게 힘을 주고 위안을 주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쉽게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그리고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그 말씀을 실현하면, 단순히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기쁨보다 더욱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 실제로 영적 성장도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깊이 했는가 보다 기도와 묵상 중에 얻은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얼마나 실현하느냐가 영적 성장의 직접적인 진보와 관련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는데 역경이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에겐 더 큰 확신과 신앙생활의 힘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에서 지키고 이루어야할 계명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라는 말씀으로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정도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라는 말씀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의 사랑에 정말 무어라 말할 수도 평생 되갚을 수 없을 만큼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막상 그 말씀을 실현하려니 겁이 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부정하거나 약화될 수 없지만, 액면 그대로 그 사랑을 따르기가 부담스러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수 없어서, 그 사랑을 모른채 할 수 없어서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란 말씀을 통해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가끔 사회에서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라는 비슷한 말을 듣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을 넘어 상대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도록 요청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혹여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부담스러워 할 것을 미리 아시기라도 하시는 듯 우리에게 용기를 안겨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될 것이다.”(요한 15,14)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드리며 그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형제들과 나누는 사랑은 비단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자발성만이거나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선택만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이라고까지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16ㄱㄴ)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청하는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안겨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16ㄷ)

오늘 성모의 밤(달)을 맞이하여 성모님의 생애를 되새겨 봅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으로 창조되었으면서도 자신이 처한 인간 조건이나 상황을 거부하거나 주저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온전히 신뢰하며 끊임없이 아들을 따르셨던 어머니! 자식이 처음 태어날 때부터 이렇다 할 자리조차 마련하지 못해 말구유에 눕히셔야 했고, 크면서 청소년기를 지내는 예수 아기 때문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마음을 조렸으며, 급기야는 커서도 부모를 봉양하거나 입신양명에 힘쓰기는커녕 밖에 나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나 하고, 결국 사람들의 비난과 원망 속에서 ‘신성모독죄’라는 오명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며 애태우셨던 어머니! 그러나 그러한 고통스러운 순간들 속에서도 단 한 번이라도 아들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인생에서 떼내려고 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처음 아들 예수를 점지해줄 때 주님께서 내려주셨던 약속,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1-33)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하고 답하며, 그 신비가 하나씩 베일이 벗겨지듯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2,19.51)한채 아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묵묵히 지지하며 따랐던 어머니. 그래서 오늘 주님의 어머니로서 하늘에 올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께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각기 다른 축복을 주시며 세상에 내려 보내준 귀한 인격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여길 때마다, 왠지 우리 인생이 힘겹다고 여길 때마다,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낄 때마다 신명기계 유다인들이 자성했듯이, 성모 마리아께서 겸허히 순종하며 따랐듯이 우리도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말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우리 일상에서 실현해 나가는데 꾸준히 충실하여 우리에게 약속된 참 기쁨과 참 평화의 하늘나라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7)



부활 제6주일


(가해) 요한 14,15-21; 11/05/29

지난 주간에 뭘 하나 새로 사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쓰던 물건이 오래되어 제대로 작동을 안 해서 쓸 때마다 분심이 들고, 사용하고 나면 기분이 나빠진다는 소리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평안함을 느끼고 행복을 찾고 있는가?’ 그러면서 이런 성찰 항목들을 하나씩 적어보았습니다.

첫째, ‘물질과 삶’에 대해

-어떤 사람은 물질 무엇 하나가 없으면, 하나라도 빨리 장만해서 쓰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물질 무엇 하나가 없으면, 누가 사주지 않나 싶어 기대하며 산다.

-어떤 사람은 물질 무엇 하나가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불편한 대로 산다.

둘째, ‘돈과 삶’에 대해

-어떤 사람은 돈이 생기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를 비상시를 대비해 비축한다.

-어떤 사람은 돈이 생기면 즉시 필요한 것을 산다.

셋째, ‘채움의 행복’에 대해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자기 것을 남에게 나누면서, 행복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최소한의 물질을 취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는 행복으로 산다.

넷째, ‘공동체 안의 나’에 대해

-어떤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자기가 무엇을 구해와 내 놓음으로써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나의 그런 행동에 공동체원들은 크게 기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외감을 준다.

-어떤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함으로써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 나의 삶이 공동체원들 안에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공동체의 밑거름이 된다.

여러분은 여기 이 항목 속에 어떤 분에 속합니까? 아니면, 여기 나열한 사람들의 모습과는 또 다른 어떤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평안함을 느끼고 행복을 찾습니까? 요즘 혹시 우리 나이 때의 다른 사람과 돈 씀씀이, 생활 형태 그리고 나의 영성이 어떻게 다른지 성찰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면서 닥치는 여러 가지 상황과 사건 속에서 만나는 주님,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 어떤 것을 요구하십니까? 동시에 그분은 우리에게 위로를 안겨 주시고 힘을 더해 주시고자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6-17)

우리가 무엇을 보태고 더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찾고 또 그 찾은 뜻을 이루며, 아니, 주님의 뜻이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아 서로 아끼고, 감싸고, 품에 안으며,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며 지지해 주면서 서로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성령께 의지하며 주님의 뜻대로 형제 자매들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갑시다.

그러면 우리 안에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14,20)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참 기쁨과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14,21).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사랑과 평화의 은총을 받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부활 제6주일


(나해) 요한 15,9-17; 06/05/21

작년 5월에 성당 공사를 시작할 때, 도로에 인도를 만들면서 나무 8구루가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공자에게 부탁해서 8구루를 옮겨달라고 했습니다. 그중에는 소나무도 있었는데,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고향의 나무인 소나무가 무척 애착이 들었습니다. 아무렇게나 그냥 파서 옮겨 놓은 소나무를 사무장과 손님 신부님과 수녀님들과 구덩이를 파고 간신히 파묻고는 축복까지 해주면서 매일 매일 물을 주었습니다. 옮기면 죽으니까 그냥 버리자던 권유도 있었지만, 나무 이파리도 닦아주고, 흠뻑 흠뻑 물을 주면서 소나무는 옮겨 심으면 6개월 정도가 사느냐 죽느냐의 고비인 만큼 살아주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물을 주었습니다. 하루 하루 지나면서 소나무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소나무가 살아난 것을 보면서 아주 기뻤습니다.

왜 기뻤을까요? 나무 한 구루 사는 것이 왜 기쁜 일이었을까?

첫째, 나무가 생생하게 자라나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나무라 할지언정 살아있다는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둘째, 나무 하나를 내가 살렸다는 느낌이 나를 보람있게 했고,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제 사제관 앞의 8구루의 나무를 보면서 오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0)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여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시기 위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요즘,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 부모가 자식 하나 잘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부모가 자기 먹고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식 농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식을 위해 애쓰는 것이 또 하나의 일처럼 보입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자식이 잘 되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은 부모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다 잘할 수도 없고, 자식이 달라는 것을 다 줄 수도 없고, 다 해결해 줄 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전신전력을 다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이 정도라면 우리를 지어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계실까 하는 생각에 감사드리며, 우리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위안이 되고 안심이 됩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1요한 4, 9-10)

그런데 부모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식이 자라주기를 바라지만, 자식이 모두 그렇게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도 않고 또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해도 다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정작 부모가 원하는 것 보다는 자식이 자기 멋대로 자신의 일을 처리해 버릴 때면 자기 일이기도 하지만 부모와 상의하고 부모의 뜻을 따라주었으면 하는 부모의 심정에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말에도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말입니다. 그런 한쪽으로는 안쓰럽고 걱정스럽고 막상 의견이 엇갈리고 부딪힐 땐 불편하기도 하지만 자식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훗날 두고 보면 대견한 일이기도 합니다.

화단의 나무처럼 자식을 부모가 잡아둘 수도 없는 것인데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9) 말씀하십니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이 부모의 도리인데, 왜 키웠으면 그만이지 자기 소유처럼 자기 안에 가둬두려고 하느냐고 항변할 만도 한데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까? 과연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신 자유를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2)

그리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3) 고 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미루어 보듯이,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들끼리 지키고 간직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입니다. 우리가 서로 존중받으려면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 반대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배려까지 해 줄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상대의 원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까지 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존경까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4-15)

자식과 부모가, 형제들끼리, 이웃들끼리, 함께 일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동반자로 여기고, 서로를 존중하며, 아끼고 도와주며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자기가 머무는 그곳에서 주님의 사람으로서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될 것이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기도 전에 얻게 되고 또 주님의 사랑 안에서 기쁘게 살기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서로 사랑하여라.”(17) 는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일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들읍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



부활 제6주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 미사 강론

05/05/01

추기경님 여러분,

친애하는 주교님과 사제 여러분,

존경하는 정부 지도자들과 외교 사절 여러분,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매우 중요한 일이 있었던 요 며칠 동안 우리는 세 번의 서로 다른 행사에서 성인 호칭 기도를 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미사 때드린 것이고, 두 번째는 추기경단의 비밀회의가 시작될 때 드린 것이며, 세 번째는 오늘 “주님 그를 보살펴 주옵소서(Tu illum adiuva). 베드로 사도의 새 후계자를 보살펴 주옵소서.”라는 화답송과 함께 드린 성인 호칭 기도입니다. 매번 저는 특히 이 화답송을 들으면서 커다란 위안을 받았습니다. 26여 년 동안 우리 삶의 여정에서 우리의 목자이며 안내자가 되어 주셨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선종하신 후 우리는 얼마나 쓸쓸함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시면서 다음 생의 문턱을 넘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혼자서 이 길을 가신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누구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외롭지 않습니다. 어느 때라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그분의 친구들이며 형제자매들인 모든 시대의 성인들에게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인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내세에서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실 때 그분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분께서 영접을 받으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계시며 참으로 편히 쉬고 계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선택하신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하여 추기경단 비밀회의를 시작하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의 이름을 식별해 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모든 문화와 국가에서 모인 115명의 추기경들이 주님께서 맺고 푸는 임무를 부여하시고자 하신 사람을 식별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한 번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며, 하느님의 ‘벗들’에 둘러싸여 안내를 받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이 순간 하느님의 미약한 종인 저는 참으로 모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이 엄청난 과업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이 일을 해내야 할까요? 저의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께서 조금 전 인간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 위대한 이름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성인들께 기원을 드렸습니다. 이처럼, 저 역시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제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저 혼자서는 결코 짊어질 수 없는 것을 혼자 짊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의 모든 성인들이 저를 보호하고 돌보시고 저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 여러분의 인내심, 여러분의 사랑,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희망이 저와 함께합니다. 실제로, 성인들의 친교는 앞서가신 잘 알려진 위대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과 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당신과 같게 만드신 그 선물에서 생명을 받은 우리 모두가 성인들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놀라운 경험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병드시고 돌아가신 슬픈 나날 동안 교회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놀랍도록 자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젊습니다. 교회는 세계의 미래를 자신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미래로 향한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기쁨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기에, 또 참으로 부활하셨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부활 기간 동안에 우리가 지켜 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얼굴에 나타난 고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신비를 관상하고 그분의 상처를 만져보았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심오한 의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의 어둠이 지난 후 주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을 당신 부활의 열매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살아있습니다. - 이 말씀과 더불어 여기에 모이신 존경하는 형제 추기경님들과 주교님들, 친애하는 신부님들과 부제님들, 교회의 일꾼들이신 교리교사 여러분에게 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인사드립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의 증인이신 남녀 수도자 여러분께도 인사드립니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로 확대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위대한 임무에 충실한 평신도 여러분에게도 인사드립니다. 또한 세례성사를 통해 다시 태어났으나 우리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지 못한 모든 분들에게도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확고한 약속에 근거한 공동의 위대한 영적 유산을 통해 우리와 결합되어 있는 유다교 형제자매 여러분에게도 인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물결처럼 저의 생각은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와 비신자 모든 사람을 향합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이 자리에서 저는 교황청의 운영 계획을 발표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 4월 20일 연설을 통해 저의 임무에 관한 생각을 표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기회가 또 있을 것입니다. 저의 진정한 운영 계획은 저의 의지대로 하고, 저의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역사의 이 시점에서 교회를 이끄시도록 온 교회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과 뜻을 경청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계획을 말씀드리기보다 저는 베드로 사도직의 시작을 나타내는 두 가지 전례적 상징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두 가지 상징은 오늘의 독서 말씀에서 선포된 것을 명료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상징은 제 어깨 위에 놓일 순모로 짠 팔리움입니다. 로마의 주교들이 4세기 때부터 착용한 이 오래된 상징은 그리스도의 멍에의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로마의 주교가 어깨에 두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멍에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이 의지는 우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앗아가며 우리 어깨를 짓누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고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 - 이것이 이스라엘의 기쁨이고 특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우리를 - 비록 그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 정화하셔서 우리 자신에게로 이끌어주십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섬길 뿐 아니라 전 세계와 전 역사의 구원에도 이바지하게 됩니다. 팔리움의 상징은 더욱 구체적입니다. 양모는 목자가 어깨 위에 들쳐 매고 생명의 물가로 인도하는 길 잃고 병들고 약한 양을 상징합니다. 목자가 광야를 헤매는 길 잃은 양을 찾는 비유는 교회의 교부들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의 상징이었습니다. 인류는 - 우리 모두는 - 광야에서 헤매는 길 잃은 양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이를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인류를 그렇게 비참한 처지에 내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제2독서와 복음 말씀에 나온 대로 십자가로 나아가는 모든 여정에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길 잃은 양을 찾으시기 위해 한 걸음에 내달으셨습니다. 목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열정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는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무관심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러한 광야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빈곤의 광야, 배고픔과 목마름의 광야, 포기의 광야, 외로움의 광야, 파괴된 사랑의 광야가 있습니다. 영혼이 메말라 인간 생명의 존엄과 목표를 인지하지 못하는 하느님의 어둠의 광야도 있습니다. 내적인 광야가 엄청나게 넓어져서 세계의 외적인 광야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재화가 모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하느님의 정원을 짓는 데에 더 이상 사용되지 목하고 착취와 파괴의 힘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전체 교회와 목자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광야에서부터 생명의 장으로, 성자와 나누는 친교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는 한 분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양의 상징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의 근동에서는 왕들이 자신을 백성의 목자로 여기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일종의 냉소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왕에게 신하들은 목자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양과 같았습니다. 모든 인류의 목자이신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양이 되셨을 때 그분께서는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는 양들 곁에 계셨습니다. 이리하여 당신 자신께서 참된 목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 이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징표입니다. 그분 자신이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좀더 강하신 분으로 나타나셔서 악을 단숨에 쳐부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시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모릅니다. 모든 권력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러한 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진보와 해방의 길에 놓인 모든 것의 파괴를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인내심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양이 되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통해 세상이 구원되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인내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조급함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목자의 기본적 특성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섬기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지금 이 순간 저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돌본다는 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고난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참으로 좋은 것, 곧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 말씀의 자양분, 우리에게 성체를 통해 주시는 그분 현존의 자양분을 양에게 줍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 지금 이 순간 저는 오직 이 말씀만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양떼, 곧 여러분, 성 교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더욱더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늑대가 두려워 피하지 않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가 서로를 이끌도록 우리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베드로 사도직의 시작을 나타내는 오늘 전례의 두 번째 상징은 어부의 반지의 헌정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들은 대로 베드로 사도가 목자로 부름 받는 것은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잡는 이야기 다음에 나옵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결국 그물을 거두고 난 다음에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강가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다시 한 번 더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물은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백쉰세 마리의 커다란 물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요한 21,11).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지상 여정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지상 여정을 시작하시는 이야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처음에도 제자들은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좀 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직 베드로라고 불리지 않았던 시몬은 이런 놀라운 대답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베드로 사도의 임무가 부여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가 5,1-11). 오늘날에도 교회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들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곧 하느님과 그리스도, 참된 생명으로 이끌도록 역사의 깊은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교부들께서는 이 독특한 임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말을 하였습니다. 물에서 살도록 창조된 물고기들이 인간의 양식으로 쓰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의 요소인 바다에서 건져 올려지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낚는 어부의 임무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빛도 없는 어둠의 바다에서 고통과 죽음의 소금물 안에서 소외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그물이 우리를 죽음의 물에서 건져내어 하느님의 빛의 광채, 참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진실입니다.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될 사명을 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온갖 형태의 소외로 절은 바다 물에서 인간들을 건져 올려 생명의 땅으로, 하느님의 빛으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느님을 인간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보는 곳에서 참으로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때에만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진화의 우연하고 무의미한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유의 산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사랑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존재입니다.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 경이를 느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분을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분과 맺은 친교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목자의 사명,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은 때로는 피곤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려는 하느님의 기쁨에 봉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자와 어부의 상징은 일치에 대한 명백한 초대입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요한 10,16). 이는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에 관한 비유 끝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를 잡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기쁜 설명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요한 21,11). 아아, 사랑하올 주님, 저희는 현재 그 그물이 터져 있음을 슬픈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으니 기뻐합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치의 길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주님께 간구하며 올리는 기도 안에서 이를 기억합시다. 예, 주님, 저희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소서. 저희가 한 양떼와 한 목자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그물이 터지지 않도록 하시고 저희가 일치의 종이 되게 하소서!

지금 저의 생각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이곳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직을 시작하셨던 1978년 10월 22일로 돌아갑니다. 당시 그분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제 귓가를 맴돕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향해 문을 활짝 여십시오!” 당시 교황님은 세계의 권력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 그들의 권력의 일부를 그리스도께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셨습니다. 곧 부패의 만연, 법의 조작, 그들 멋대로 하는 자유를 그들에게서 빼앗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나 존엄성, 또는 정의 사회 건설에 속하는 것은 하나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교황님은 모든 사람, 특히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면에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완전히 들어오시도록 한다면,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연다면, 그분이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가실까봐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뭔가 중요하고, 뭔가 독특하고, 뭔가 인생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우리의 자유가 감소되고 상실될까봐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다시 한 번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삶 안에 모시면 우리는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하는 그 무엇 가운데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오직 이 친교 안에서만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오직 이 친교 안에서만 인간 실존의 위대한 잠재력이 진정으로 드러납니다. 오직 이 친교 안에서만 아름다움과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오랜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강한 힘과 확신을 가지고 저는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두려워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으시고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께 바치면 우리는 백배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문을 넓게 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참된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2005년 4월 24일, 성 베드로 광장 즉위미사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회를 위한 미사 강론

존경하는 형제 추기경님들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

선의의 모든 분들에게!

1.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빕니다(1베드 1,2 참조)! 저는 지금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제 이곳 사도좌에서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 제게 맡겨진 책임 때문에 보편 교회 앞에서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과 인간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속 깊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례에서 노래하였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성자의 대리자를 뽑아 목자로 삼으시어 영원히 당신 양떼를 인도하게 하셨습니다(사도 감사송 1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그 모든 것에도 제 마음은 온통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에 대한 감사로 충만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존경하는 저의 선임자이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저를 위해 얻어 주신 특별한 은총 덕분입니다. 마치 그분의 힘센 손으로 저를 꽉 붙잡고 미소어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며 특히 지금 이 순간 제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선종과 이어지는 며칠 동안은 교회와 온 세계에 특별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선종이 가져다 준 큰 아픔과 마음속 빈자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위로는 한 물결을 이룬 믿음과 사랑과 정신적 연대 안에 드러났고, 장엄한 교황 장례식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은 어떤 면에선 하느님의 권능을 인식할 수 있었던 참으로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사랑의 일치시키는 힘으로 교회가 하나의 위대한 인류 가족을 형성하기를 바라십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항 참조]. 선종하시는 순간에, 스승이신 주님과 결합되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그리스도인 백성에게 신앙의 확신을 주시고, 그들을 당신께 불러 모으시어 온 인류 가족이 더욱 일치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 주심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은 그 긴 교황직의 최후를 장식하셨습니다.

어찌 이러한 증거로 힘을 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은총의 사건이 주는 힘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 저의 모든 예상을 깨고 뜻밖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섭리로 존경하는 추기경님들의 뜻을 통하여 위대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잇도록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는 이천년 전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한 베드로의 말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5-19)고 하신 예수님의 장엄하신 말씀이 제 귓가에 맴돕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저는 지금 이 복음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후계자인 저는 갈릴래아 출신의 그 어부가 걱정스럽게 한 말을 떨리는 목소리로 되풀이하며, 스승이신 하느님께서 안심시켜 주시며 하신 약속에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봅니다. 지금 나약한 제 어깨 위에 놓인 책임이 막중하지만, 하느님의 힘은 더욱 크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 16,18). 주님께서는 저를 교황으로 뽑으시어 주님을 대리하여 모든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반석’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의 나약한 힘을 채워주시어 당신 양떼의 용기 있고 충실한 목자로서 언제나 당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 드립니다.

제게 주어진 이 특별한 봉사직인 ‘베드로’ 직무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며 보편 교회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저를 온전히 맡겨 드리며 그 의탁을 새롭게 하려 합니다. “주님, 주님께 의탁하는 이 몸 끝내 부끄리지 않으리다.”(시편 30[31])

추기경님들, 제게 보여주신 여러분의 신뢰에 감사드리며 꾸준하고 적극적이며 현명하신 협조와 기도로 저를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형제 주교님들께서도 제가 참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 될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하여 제 곁에 머물러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하나의 사도단을 이룬 것과 같이, 공의회가 강조했듯이(교회 헌장, 22항 참조), 베드로의 후계자와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은 서로 긴밀하게 일치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단체적 친교는, 비록 교황과 주교들이 하는 역할과 임무는 다르지만, 교회와 신앙의 일치에 이바지하고, 현대 세계의 복음화 활동의 효과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따라서 저 역시 존경하는 선임 교황님들이 걸어온 이 길을 따라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을 이 세상에 선포하고자 합니다.

3. 특별히 제 앞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더 용기 있고 더 자유롭고 더 젊어진 교회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과 표양에 따라 과거를 차분하게 되돌아보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를 말입니다. 대희년을 맞이하여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대에 맞춰 권위적으로 재해석한 복음을 가지고 새 천년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가리켜 제삼천년기의 광활한 대양 속에서 우리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판’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하셨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57-58항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영성록에 이런 말씀을 적으셨습니다. “저는 앞으로 오랜 동안 새 세대들이 20세기에 있었던 이 공의회의 풍부한 유산의 덕을 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000.3.17.).

저 역시, 베드로의 후계자의 고유한 봉사를 시작하며, 제 선임 교황님들을 좇아서 그리고 교회의 오랜 전통을 충실히 이어가는 가운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끈 그 투신을 따르려는 확고한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고 싶습니다. 올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식(1965.12.8.)이 끝난 지 정확히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공의회 문헌들은 그 시대성을 잃지 않고 있으며, 그 가르침은 특히 교회와 세계화된 현대 사회의 새로운 요구들에 적절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4.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교회가 성체성사에 바친 이 특별한 해에 제 교황직이 시작됩니다. 제가 부름받은 직무의 특성이 이러한 섭리와 우연히 일치하고 있음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성찬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며 교회의 복음화 사명의 원천으로서 제게 맡겨진 베드로 직무의 영원한 핵심이며 원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찬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항구한 현존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당신의 성체 성혈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처럼 그분과 맺는 완전한 친교에서 교회 생활의 모든 다른 요소가 흘러나옵니다. 곧 신자들 사이의 친교,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기 위한 노력, 모든 사람, 특히 가난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흘러나옵니다.

따라서 올해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하게 거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찬례는 8월에 쾰른에서 열릴 세계 청년 대회와 ‘교회 생활과 교회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를 주제로 10월에 열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정기총회의 핵심입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몇 달 동안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신심을 더욱 키우고 특히 전례를 장엄하고 올바르게 거행함으로써 주님의 참 현존을 용기 있고 분명하게 표현하도록 당부합니다.

또한 특별히 사제들에게 당부합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각별한 애정으로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제 선임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수없이 강조하셨듯이, 사제 직무는 성찬례와 함께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진 다락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성목요일 담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제의 삶은 더욱더 성찬례로 ‘구현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2005년 성목요일 담화, 1항) 모든 사제 생활과 사명의 중심인 미사 거행을 날마다 정성들여 바치는 일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5. 성찬례로 자라고 성찬례에서 힘을 얻는 가톨릭 신자들은 그 다락방에서 그리스도께서 바라셨던 완전한 일치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촉구받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후계자는 자신이 거룩한 스승의 이 숭고한 바람을 특별히 유념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에게는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루가 22,32 참조).

따라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저는 베드로가 순교한 로마 교회 안에서 저의 직무를 온전히 깨닫고 이 직무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가시적이고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저의 첫째가는 임무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제가 품은 뜻이며 제가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호의를 표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 일치의 길로 가는 모든 진보의 전제는 바로 내적 회개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깨워 줄 수 있는,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양심을 움직이는 그러한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신학적 대화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선택들이 내려진 역사적 이유들을 깊이 검토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시급한 것은 ‘기억의 정화’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자주 일깨우셨던 이 기억의 정화만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든 생명의 대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서야 하며,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의 완전하고 가시적인 일치라는 커다란 선을 위해서 우리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언젠가는 그분께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이 문제에 직접 관련되어 있음을 통감하며, 교회 일치라는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 하겠습니다. 선임자들의 뒤를 이어, 저는 여러 교회와 교회 공동체 대표자들과 만남과 일치를 증진하는 데에 적절한 모든 활동을 장려하려는 굳은 결심을 합니다. 지금 이 자리를 통해서도, 모든 이의 한 분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보냅니다.

6. 지금 이 순간, 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돌아가신 뒤 그분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우리가 함께 겪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기억합니다. 맨 땅에 놓인 그분의 유해를 중심으로 국가 지도자들, 각계각층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모여서 기억에 남을만한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온 세계가 그분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해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확대된 그러한 열렬한 참여는, 두려움과 불안, 미래에 대한 의구심에 시달리는 현대 인류가 교황에게 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신 한 분 하느님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세상에 알릴 임무를 새롭게 자각하고 있습니다. 교황 직무를 맡으면서 저는, 제 직무는 그리스도의 빛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 자신의 빛이 아닌, 그리스도의 빛을 말입니다.

이러한 인식으로, 저는 다른 종교 신자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인류와 사회의 참된 선을 찾는 데에 있어서, 교회는 그들과 솔직하고 진지한 대화를 계속해 나가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저는 소박하고 다정하게 그들과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께 인류 가족을 위한 일치와 평화를 간청하며, 모든 가톨릭 신자는 온 인류의 존엄을 존중하는 참된 발전에 기꺼이 협력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저는 선임자들께서 시작하신 여러 문화와 나누는 유익한 대화를 추구해 나가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헌신할 것입니다. 상호 이해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을 생각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특별히 즐겨 대화를 나누셨던 젊은이들에게 저도 사랑의 인사를 보냅니다. 올해 세계 청년 대회 때 쾰른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대화를 계속해 나가면서 여러분의 기대를 듣고 여러분이 살아계신 그리스도, 언제나 젊으신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만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성체성사의 해를 맞아 발표하신 교황 교서의 제목이기도 한 이 간청은, 그리스도께서 불러 주신 제 직무를 시작하면서 마음에서 절로 우러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처럼, 저 또한 저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새롭게 약속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분의 교회에 온전히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오로지 그분만을 섬기고자 합니다.

이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저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의 전구를 간구합니다. 성모님의 손에 저와 교회의 현재와 미래가 놓여 있습니다.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모든 성인의 전구도 빕니다.

이런 마음을 안고, 저는 존경하는 형제 추기경님과 이 예식에 참여하신 분들,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지켜보시는 모든 분들에게 특별한 사랑의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성 시스티나 경당에서 추기경단과 함께 드린

공동 집전 미사를 마치며 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미사 후 연설

2005년 4월 20일 수요일



부활 제6주일

(다해) 요한 14, 23-29; 2004/05/16

언젠가 그런 묵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다. 나 혼자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면 삶이 아주 피곤하고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자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 삶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건들 앞에서 거듭 긴장과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며 삶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만나고 싶고 좋아서 함께하고 싶어진다면 내 삶은 기쁘지 않겠는가?

우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진정 사심 없이 나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주고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니 내 마음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찾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오히려 내 욕심으로 취급하고 나를 피할지도 모른다. 내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듯이 다른 사람들도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찾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위해 희생해주기를 바란다면 세상은 오히려 각박해지기만 할 것이다. 좋은 사람을 찾고자하는 마음과 뜻은 고귀할지언정 그 현실이 다른 이에게 희생과 부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해 희생해줄 사람을 찾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희생하는 편이 내겐 더 쉬운 일일 수도 있다. 내가 남에게 잘해 준다고 그 사람도 나에게 잘 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심 없이 남에게 잘해주면 적어도 나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만일 그 사람이 나의 좋은 점을 반기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바치셨기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희생하라고 요구하며 또 그렇게 희생하면 감사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기가 더 예수님의 말씀을 살려고 하기보다, 그 말씀을 더욱 더 남에게 지키도록 요구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에게 죄책감과 좌절을 안겨 줘 힘겹게 살게 만들 위험마저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겸손 되이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죄악만 생겨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사심 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당에 나오는 사람은 기쁨을 얻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본인이나 남에게 부담과 분란만을 안겨줄 뿐이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삶의 위안과 희망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2, 24)

우리는 나 너 할 것 없이 누구를 예수님의 말씀에 빗대어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그렇게 지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야 할 것이다.

겉으로 어떤 직책을 얻고 남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힘겨운 삶인가.

그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고,

자기가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 중에 되새기고 힘을 얻어서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영광 속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14, 27)



부활 제6주일- 제18차 청소년 주일 서울대교구장 담화

새 아침을 알리는 파수꾼들

2003/05/25

친애하는 청소년 여러분

올해 우리는 교황님의 뜻대로 '묵주기도의 해'를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돈독히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청소년 모두에게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선사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가장 소중한 어머니 마리아를 선사하셨습니다. 갈바리아 언덕에서 하신 이 말씀은 주님 탄생 예고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천사가 예수 탄생을 알리는 순간 하느님의 아들에게 당신의 모태를 열어 주셨고, 십자가상 아래에서는 요한을 대표로 하는 온 인류를 당신의 가슴에 품으십니다. 주님 탄생 예고 때 하신 '예'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셨고, 이제 "어머니, 당신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라는 말씀을 들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당신의 자녀로 맞아들이십니다. 요한 복음에는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19, 2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를 모셨다고 하는 말은 장소나 물질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한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가 맺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성모 마리아를 여러분의 집에 모시기를 청하십니다.

교황님께서 '묵주기도의 해'를 맞이하여 발표하신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당신은 일생 동안 성모님의 사랑스런 현존을 체험하였고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성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음을 고백하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은총을 주시는 분의 어머니이시므로 '은총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더욱 신뢰하고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마리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좀 더 순수하고 친근한 관계를 갖게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마리아는 당신의 모범을 통해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분을 바라보도록 가르쳐 주는 선생이십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단순한 사상이나 도덕규범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 마리아보다 더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묵주기도의 해'가 선포된 후 즉시 묵주기도를 위한 길잡이 '장미 꽃다발'을 서둘러 수정 출간하였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닮기 위해 묵주기도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좀더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 훌륭한 기도에 맛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주기도야말로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훌륭한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성모 마리아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저도 교황님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여러분에게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기를 권고합니다. 교황님께서는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학교에 갈 때나 쉬는 시간에, 또는 직장에서 그리고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이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혼자서 하는 것도 좋지만, 부모와 형제, 친구 또는 단체 회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청소년의 순수한 열정과 용기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청소년이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서 조건 없이 주님께 '예'하고 대답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오늘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 아침을 알리는 파수꾼들을 필요로 합니다. 열린 마음을 지닌 용기 있는 청소년의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잘못된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우리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열정적인 청소년이 많이 양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도 아니고 청소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청소년들이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시는(루가 18, 27; 1, 37-38) 하느님께 신뢰하며 ?예?라고 응답하며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과 증오와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인간의 마음에, 그리고 지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끊임없이 묵상하고 그분의 삶과 하나가 됨으로써 작은 그리스도가 되도록 힘을 모읍시다. 그리고 이들이 삶의 현장에서 평화와 정의의 씨앗을 뿌리는 사도가 될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드립시다.

2003년 5월 25일

청소년 주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부활 제6주일- 제18차 청소년 주일 교황 담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

2003/05/25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1. 해마다 청소년 주일을 맞아 여러분에게 이렇게 특별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언제나 제게 큰 기쁨입니다. 이것은 또한 제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 드릴 수 있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 차례의 지난 세계청년대회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여러분과 제가 함께 어울려, 또 수많은 주교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우리는 모두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께 간청을 드리며, 전인류 가족에게 그분을 선포하였습니다. 저는 최근 토론토에서 여러분이 다시 한 번 보여 준 신앙의 증언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온타리오 호숫가에서 여러분에게 했던 초대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합니다. "교회는 오늘날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을 바라보며 여러분이 참 행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박람회장, 2002.7.25.: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2002년 7월 31일자, 6면)

전세계 교구에서 거행될 제18차 청소년 주일의 주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는 제가 묵주기도의 해와 관련지어 선택한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요한 사도에게 당신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구세주의 마지막 말씀이기에 장엄한 성격을 띠며 그분의 영적인 유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2. 가브리엘 천사가 나자렛에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루가 1, 28)고 한 인사는 해골산의 이 장면에도 빛을 비춰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시작이라면, 십자가는 성취를 나타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 때에 당신 태중에 계시던 하느님의 아드님께 인성을 부여하시고, 십자가 밑에서는 요한을 통하여 당신 품안에 모든 인류를 받아들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강생의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어머니셨으며, 성자 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마치는 순간에는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죄 없으셨던 성모님께서는 해골산에서 성자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짊어지셨던 죄의 고통을 당신의 전 존재로 '겪으셨습니다.' 탄생 예고 때에 '예.'라고 대답하심으로써 잉태하셨던 바로 그 아드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서, 성모님께서는 말하자면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요한 19, 26) '두 번째 예고'를 들으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성모님의 마음에 당신의 고통을 털어놓으실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는 자녀는 누구나 그러한 필요성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도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겪는 외로움이나 실패, 절망, 또 어른이 되어가거나 일자리를 찾으면서 겪는 어려움, 가족과 떨어지거나 가족을 잃는 아픔, 무자비한 전쟁과 무고한 이들의 죽음 등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겪는 힘든 청소년기에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요한에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를 보내 주시어 사랑으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도록 하실 것입니다.

3. 복음서는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27) 고 기록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부터 다양한 주석이 덧붙여졌던 이 말은 단순히 요한이 살았던 곳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물질적인 측면을 뛰어넘어, 요한이 성모님을 모심으로써 성모님과 요한 사이에 맺어진 새로운 유대의 영성적 차원을 상기시킵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요한과 엇비슷한 나이이며,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도 같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성모님을 '여러분의 집'에 모시고 '여러분의 식구'로 맞아들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셨던"(루가 2, 19) 성모님에게서 하느님께 귀기울이는 마음의 자세와 겸손과 너그러움의 태도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자세와 태도를 지니셨기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첫 번째 협력자로 간택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어머니로서 당신의 임무를 이행하시며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형성되실 때까지 여러분을 가르치시며 형성하실 것입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15항 참조).

4. 그러기에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모든 것 주님의 것'이라는 저의 주교직과 교황직의 표어를 다시 한 번 되풀이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한평생 제 곁에서 사랑과 힘을 주셨음을 체험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저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날마다 저와 함께해 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은총의 주인이신 분의 어머니이시기에 거룩한 은총의 어머니이십니다. 성모님을 온전히 믿고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으로 빛날 것입니다. 성령의 숨결에 마음을 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용감한 사도가 되어 여러분 주변에 사랑의 불과 진리의 빛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학교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구체적인 투신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우선으로 삼으며, 그분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그리스도 신앙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며, 빈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한 인물, 살아 있는 위격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께서 사랑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여러분이 예수님과 더욱 참되고 더욱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도우시려고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모범을 통하여 여러분이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전구를 통하여, 성부의 얼굴과 인간의 참된 존엄을 보여 주시는 성자께 귀기울일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여러분 안에 심어 주십니다.

5. 2002년 10월 16일, 저는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하면서, 교회의 모든 자녀에게 이 오래 된 성모님의 기도를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행위로 삼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친다는 것은 성모님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모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는 오늘도 여러분에게 마음으로 묵주를 건넵니다. 여러분이 묵주 기도를 드리며 각 신비를 묵상할 때, 성모님께서는 여러분을 당신 아드님께로 안전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학교나 일터로 가는 길에서, 또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혼자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모임이나 단체, 회합에서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집에서 부모들과 형제자매들에게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자고 제안하기를 망설이지 마십시오. 묵주기도는 가족들간의 유대를 새로이 하고 강화시켜 줄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여러분의 신앙을 굳게 하고 사랑이 변치 않게 하며 희망 안에서 기뻐하고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신 성모님과 함께 여러분은 감추어진 삶의 기쁨과 열매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승 예수님의 제자이신 성모님과 함께 여러분은 예수님을 따라 팔레스타인의 거리를 걸으며, 그분의 선포와 기적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통고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함께 여러분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에 함께할 것입니다. 희망의 동정녀이신 성모님과 함께 여러분은 기쁘게 부활을 선포하고 성령의 귀중한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예수님께서만이 여러분의 마음 속의 생각과 간절한 바람을 아십니다.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만이(요한 13, 1 참조) 여러분의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 여러분의 삶에 의미를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밖에는 그 누구도 여러분에게 참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모범을 따를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조건 없이 '예.'하고 대답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기심이나 게으름이 차지할 자리는 없습니다.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새벽이 동터 오는 것을 알리는 '새벽의 파수꾼'이 되고 이미 싹을 틔우기 시작한 복음의 새봄을 알리는 망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시대의 조류에 용감히 맞서서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힘차고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자유롭고 용감한 젊은이들의 증거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러한 임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힘에만 의존한다면 이 임무는 절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루가 18, 27; 1, 37).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자기의 약점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은총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은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요한 15, 5 참조). 그리스도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특징은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의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았듯이 그들을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에페 1, 18-19).

7.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다음 세계청년대회는 2005년에 독일의 쾰른 교구의 도시에서 열릴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지만, 다음 대회까지 남아 있는 2년은 철저한 준비 기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준비를 돕고자 여러분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주제를 선택하였습니다.

- 2004년: 제19차 청소년 주일: "예수님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2, 21).

- 2005년: 제20차 청소년 주일: "우리는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

그 동안 여러분은 각자의 지역 교회에서 만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고, 주의 깊게 귀기울이며, 이 '지속적인 배움'의 기회들에 즐겁게 동참하여 여러분의 깊은 믿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면서 열심히 이러한 경험을 가지십시오. 동방 박사들처럼 여러분도 메시아를 찾아 그분께 경배 드리고자 하는 갈망으로 불타오르는 순례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을 용감하게 선포하십시오.

폭력과 증오, 전쟁으로 위협받는 이 시대에,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만이 이 땅의 모든 민족과 가정, 개개인의 마음에 참 평화를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여야 합니다. 평화와 정의, 친교를 추구하고 증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라는(마태 5, 9) 복음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 맡겨 드리며, 여러분에게 저의 신뢰와 사랑의 표시로서 특별히 사도로서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3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부활 제6주일

(가해) 요한 14, 15-21; 02/05/05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데, 잘 모르겠다는 분이 있다. 또 화끈하고 확실하게 체험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분도 있다. 그런데 부부와 가족의 관계가 매일 신혼 초나 어릴 때 한 방에서 식구가 다 함께 살 때처럼 그렇게 깊이 다가오지 않고 그냥 사는 것이라고 하듯이,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불같은 체험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16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바오로나 다른 사도들처럼 우리에게도 뜨거운 체험을 주시면서 어디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고, 여러 이방인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도록 하시고, 주님을 증거할 필요가 있을 때 순교할만한 힘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살고 있는 그 자체로 아니 사는데 필요한 정도의 체험만을 여러 경로로 주실 것이다. 그것이 부모님과 이웃의 따뜻한 사랑이던지, 따가운 충고던지, 가벼운 사고였던지 간에 말이다.

언젠가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로만칼라를 끼고 매일 미사를 드리는 것 자체가 사제직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주일미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 자체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주일미사를 갈까 놀러 갈까 유혹중일 때 천사에게 성당 쪽으로 끌어당기게 한다는 말을 듣고 자라왔다.

이렇듯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고 좋은 일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15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기에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21절)고 거듭 말씀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이끌고 우리가 그 좋은 것을 택하면 우리는 더욱 더 깊이 주님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순수한 마음으로 청하고 다가가기 위해 자주 미사드리고, 기도하고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말씀을 나누고 이루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깊은 신앙의 신비 속으로 초대해주실 것이다.



부활 제6주일

(다해) 요한 14,23-29; 2001/05/20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23) 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 사후 여기 저기서 서로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 누가 정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 식별해야만 했다. 실제로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에는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유다에서 내려운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사도 15,1)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져'(사도 15,2) 심각한 진통을 겪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이라고 항변한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하신 말씀인지,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근거하여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사람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이방인들에게도 내리셔서 우리와 똑같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의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하지 못했던 멍에를 그 신도들의 목에 메워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간섭하려 드는 것입니까?."(사도 15,8.10)라고 말했다. 그 결과 사도회의는 이방인들에게는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외에는 더 이상의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성령과 자신들의 결정임을 밝힘으로써 바오로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었다(사도 15,28-29). 그럼으로써 안티오키아 교회는 다시 일치와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평화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야합에서 나오는 평화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 말씀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인지 성령에 의해 되새겨지고 재확인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 말씀을 실제로 실현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평화이다.



부활 제6주일

(나해) 요한 15, 9-17: 2000/05/28

어떤 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악과 싸운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에페 6, 12)라고 말합니다. 악은 어떻게든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형제 자매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합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 어떤 이유에서든, 나를 괴롭히는 이와 내 안에 공통적으로 숨어있는 악은 우리를 분열과 미움으로 이끕니다. 악의 유혹에 빠진 결과입니다.

우리 서로가 자유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다소 충격적일지는 몰라도 서로의 삶에 대해서 '나는 나고 너는 너'라는 엄밀한 구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형제 자매들 서로의 삶과 인생에 대한 소유적인 지배를 포기하고 그에 따른 간섭과 비난을 멀리할 때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도 용서입니다. 남의 잘못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대에 못미치고 나와 다르게 사는 이와 함께 살려면, 나와 다른 이에 대한 나의 기대를 아니 나의 욕심을 저버려야 하며 오히려 그런 지나친 기대를 투사하는 나 자신과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너에 대한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힌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악의 세력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용서가 전제되지 않고 서로의 주장만이 팽팽하게 수평선을 유지한다면 서로의 삶에 대한 질투와 지배욕에서 오는 비난과 폭력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 세상에서 우리를 완전으로 이끄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 7. 10)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우리 인간들의 질투와 소유 그리고 지배욕의 제물로 희생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우리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로 바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요한 15, 16).

악의 유혹을 멀리하고 주님 사랑 안에서 하나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삶에 대한 평가마저도 수용하고 존중하면서 주님 사랑 안에서 기쁘게 살아갑시다.



부활 제6주일

(가해) 요한 14,15-21; 99/05/09

어떤 때는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남아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잘 안될 때, 자기도 원하지 않는 실수와 결과가 자꾸만 반복될 때, 왠지 모르게 불안할 때,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신이 왜소하다고 느낄 때, 내가 내몰리거나 경제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을 때…. 이럴 땐 참으로 견디기 어렵고, 세상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우리의 과거를 되돌이켜 보면,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생애 지난 순간 순간을 되돌이켜 보면 주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살려주셨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19)

그리고 절망과 불안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희망을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16) 그 희망은 지금 내 눈 앞에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17)

또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18)고 약속하시며,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20)라고 일어주셨습니다. 그 희망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주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더하고 주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21)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희망'(1베드 3,15)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려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강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1베드 3,17)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저희를 휘감아 주시고, 저희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주님께 온전히 충실하게 해 주소서!



부활 제6주일

(다해)요한 14,23-29 : 98/05/17(장애인 주일)

서울대교구장 장애인 주일 메시지(요약)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가톨릭 교회가 장애인의 재활을 촉진하기 위하여 5월 셋째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정한 지 열 여덟 번째가 되는 날입니다. 모든 장애인은 신체적 조건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성과 가치를 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장애인 여러분!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을 개발하여 얻는 보람은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더해줍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비하와 좌절을 극복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사회와 인류공동체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회와 문화의 질을 재는 척도는 그 사회 안에서 가장 약한 처지의 사람들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장애인을 제대로 돕지 못한 이유를 흔히 경제 탓으로 돌리지만, 실상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나 장애인이며, 언제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애인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감싸주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의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장애인의 존엄성을 실감하게 되고 그들과의 일체감 속에서 뿌듯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억눌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권세 있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의 편에 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이며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건강한 지체들과 고통 당하는 지체들이 함께 모여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지역사회 내에 있는 장애 형제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분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눔으로써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역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장애인들은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하느님의 인격적 대오를 체험하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장애인 주일을 맞이하여, 어려운 IMF 경제 상황 가운데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장애인 여러분과 가족들, 그리고 장애인을 돌보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장애인 주일 메시지(전문)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가톨릭 교회가 장애인의 재활을 촉진하기 위하여 5월 셋째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정한 지 열 여덟 번째가 되는 날입니다.

정부가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정하여 여러 행사를 추진함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가 장애인주일을 다시 정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장애인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관심을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진정으로 본받기 위함입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 안에서 장애인을 위한 봉사는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성장이 있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성직자, 수도자, 봉사자 여러분, 그리고 자신의 장애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복지구현에 힘써오신 장애인 형제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 동안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도 '복지사회 구현'이라는 구호 아래 장애인에 대한 복지정책을 추진해오고는 있으나 장애인이 완전히 평등한 인간으로써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정책과 뒷받침은 미흡하기만 합니다. 모든 장애인은 신체적 조건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성과 가치를 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부 당국은 인간애에 기초를 두고 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제반 정책을 솔선하여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장애인 형제 여러분!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이 있으며, 그 능력을 개발하여 얻는 보람은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더해줍니다. 그러므로 장애인 여러분은 자신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비하와 좌절을 극복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사회와 인류공동체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회와 문화의 질을 재는 척도는 그 사회 안에서 가장 약한 처지의 사람들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장애인을 제대로 돕지 못한 이유를 흔히 경제 탓으로 돌리지만, 실상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누구나 장애인이며, 언제나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애인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감싸주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의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장애인의 존엄성을 실감하게 되고 그들과의 일체감 속에서 뿌듯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장애인 복지시설에 후원금을 얼마 보낸 것으로 장애인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한 사랑은 우리 자신을 나누는 데 있습니다. 장애인이 우리에게 맞추도록 강요하기보다는 우리가 허리를 굽혀 장애인의 눈 높이에 맞추고, 그들의 바람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같이 우리도 장애인을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시다.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억눌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권세 있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의 편에 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이며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건강한 지체들과 고통 당하는 지체들이 함께 모여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지역사회 내에 있는 장애 형제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그분들의 어려움을 함께 나눔으로써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역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장애인들은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하느님의 인격적 대오를 체험하며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모든 장애인을 형제처럼 보살피고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 세상에 전하도록 합시다.

장애인 주일을 맞이하여, 어려운 IMF 경제 상황 가운데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장애인 여러분과 가족들, 그리고 장애인을 돌보는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



부활 제6주일


(나해)요한 17,11ㄴ-19 : 97/05/04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여기서 주님 사랑의 품은 교회 공동체의 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이 처음에 교회 공동체를 찾아 올 때 자기가 원해서 찾아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이 아니면 신자가 되지못하고 도중 하차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 신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생겨나는 일을 통해 주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의 삶과 이해관계가 우선시 될 때에는 자기 주장을 펼치며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주님 곁을 떠나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왔으면 교회 공동체의 주인이신 주님을 믿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실현하려고 왔지 자기주장을 하고 자기 뜻을 펼치고 심지어는 자기의 이익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현실적으로 주님을 대변하시는 분은 교황님이시고 지역교회에서는 교구장 주교님이십니다. 서울교구장이신 김 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는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구역·반모임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를 복음화하고자 하셨고 이것이 한편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화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역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요한 15,1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다 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를 복음화의 일꾼으로 불러주시고 복음화를 이루도록 하시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름으로써 교회를 이루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형제들과 하나되어 누리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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