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다해) 마태 2,1-12; 16/01/03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길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말연시를 맞이한 그분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기쁨과 설렘으로 들떠있는 모습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지치고 뭔가에 쫓기는 듯한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요즘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들 하더니 정말 힘들긴 힘든가 보다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고, 왠지 모르게 기쁨도 여유도 없이 다람쥐 챗바퀴처럼 꽉 짜인 세상사에 인생을 내맡기고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대림절 성탄 예고 복음기사에서,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성령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그리고 구세주가 아기로 오시리라는 예정은 이미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22절) 이라고 알려줍니다. 직접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 7,14) 하신 말씀을 실례로 들어줍니다. 복음 사가는 친절하게 임마누엘의 뜻마저 번역하여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23절)

모두다 힘들다고 하는 세상에 아무런 힘도 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은 과연 인간과 무엇을 어떻게 함께하시는가? 주 하느님께서 일찍이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을 때 모세를 시켜 탈출시켜 주셨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유다인들이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먹고 살라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가끔 빵의 기적을 베푸실 뿐,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과 사회에 나가 이 꼴 저 꼴 다 당하며 비굴하게 사는 모습을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도록 먹을 것을 내려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럼 과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 주는 것도 없이 그저 함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이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이 무한경쟁의 세계 속에 홀로 내팽개쳐지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 텐데, 이 냉혹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힘들다. 힘들다!’ 하는 이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자기 혼자 다 풀어나가야 하고, 자기 혼자 일해서 가족과 일가를 책임져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면, 얼마나 인생이 고달프고 더 힘겨울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거친 세상에 나 홀로만 내 던져진 것이 아니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혼자 헤쳐나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며 나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힘이 샘솟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면서 어려움이 닥쳐도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믿기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꿋꿋이 지켜 나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고 축복해주시며 이끌어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얼마나 인생이 고달프고 무겁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이고 의식적인 인식의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아주 많지 않아도, 지금 당장 굶어 죽지 않기에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과 은총의 힘으로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사회가 아주 좋지 않아도,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무한한 자비가 있기에 서로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세상 최고가 아니어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에 오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불완전하기에 만족할 수 없고, 나 스스로도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답답하고 자신감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죄마저 짓고 살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사랑해 주시기에, 현실에서 안분자족하며 미래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기쁨마저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동방박사들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선 공현 축일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가 보기 좋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뿔뿔이 찾아나서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신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인식과 의미를 믿음 안에서 되새기고 충만해져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합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올 1월 1일 신년사에서 “희망은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시며, “올 한 해도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자비로운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지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병인박해 150주년인 새해에, “순교자들이 온전히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여기며, “우리도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더 잘 돌보며 사랑하는 삶을 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올 2016년 새해에 여러분 모두가 주 하느님께서 펼쳐주시고 이끌어주시며 함께해주고 계심을 믿기 때문에, 어려운 현세를 꿋꿋이 살아내고, 새롭게 펼쳐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으로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얼마나 높고, 얼마나 좋은 조건에 놓여있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고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고 평안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회에서 능력 있고 가진 것이 많은 신자들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가득 받아 우리 공동체의 마음 속에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여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서로 힘을 북돋아주기 때문에 신앙으로 풍요하게 되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신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보고 싶어하고, 함께하고 싶어하고, 나누고 싶어하여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 그렇기에 사람들이 함께하고 싶어하고, 같이 살고 싶어하고, 기대고 싶어하는 좋은 사람들이 모인 신자 공동체가 되도록 기대하고 노력합시다.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가득히 내려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두를 불러모아 하나의 교회 안에서 주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에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 마태 2,1-12: 2015/01/04

지난 연말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수많은 폭죽에 둘러싸이기를 좋아한다.”고 하시면서도 “이는 분명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밖에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도 태어나는 때가 있고 죽는 때가 있다며, 새해는 생의 유한함과 인생행로의 끝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한 때 크리스마스 캐롤이 사라진 도시를 언급하던 우리 사회는 새해 첫 날부터 해돋이 행사와 제야의 종소리 등의 화려함으로 뒤 덥혔습니다. 그 화려함 뒤에는 정말 교황님이 자주 말씀하시던 바와 같이 비참한 가난이 광대하게 우리 주변에 펼쳐져 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의 안부를 묻다 보면, 우리 주변에는 환우와 가난 등으로 힘겹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그야말로 널려있다고 말할 만큼 자주 눈에 띄고 또 그분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이 확인하기조차 명확하지 않은 별을 향해 먼 길을 떠납니다. 그 별이 유다인들의 임금을 가리키고는 있지만, 정확히 어느 곳을 향하는지도 모른 채 동방박사들은 길을 떠나옵니다. 그래서 헤로데 임금에게 와 묻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이 질문이 헤로데와 당시 집권자들에게 커다란 파장을 가져옵니다. 자신들의 집권이 평생을 가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갑자기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해야만 하는 사건이 생겨나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깜짝 놀랐다.”(3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만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일해왔다면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소식에 흥분하여 기쁨에 넘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인들의 새 임금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분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이 언급했는지를 확인하고서도 정작 함께 찾아 나서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동방박사들에게 그 정보를 알려주며, 베틀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합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6절) 훗날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16절)는 후속 기사를 통해, 헤로데의 주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헤로데와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앉아있는 자리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주관심과 주업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안위를 추구하기 보다, 자신들의 안위와 집권유지에 더 애썼거나, 백성들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펼치고 싶은 것들을 권좌에 앉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 눈에 별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빛들은 우리를 사로잡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빛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그 빛을 얻고자 나아갑니다. 그 빛을 실제로 얻을 때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난관을 거치고, 무수한 노고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얻고자 하는 그 별을 움켜 잡았을 때, 그 별은 우리에게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화려함과 최고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져다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그 빛을 통해 얻고자 하는 평화와 안녕은 주지 못할 듯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엔 모두 빛의 의미를 찾아 구하지만, 정작 빛을 받고 나서는 그 빛을 받고 그 빛을 계속 받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 빛을 비추어야 할 곳에는 관심이 줄어들게 되나 봅니다. 그런가 하면 또 그 자리에서 처리해야만 하는 일에 파묻혀, 정작 그 일을 통해 돌보고 지켜주어야 할 미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도 되나 봅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번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점차 우리의 관심과 행동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이 있는지?

그 꿈과 소망은 무엇인지?

왜 그 꿈과 소망을 이루고 싶은지?

그 꿈과 소망을 이룬다면, 그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런지?

그런가 하면, 우리는 지금 어떤 별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별이 우리의 꿈과 소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 별이 우리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지?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고 전합니다.

우리 각자가 추구하고 있는 꿈과 소망들을 다 합친 궁극적인 희망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와 우리가 현세에서 바라보는 별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며 우리의 길과 인격을 다듬어 갑시다. 올 한 해 새롭게 펼쳐지는 매일을 맞아 형제자매들과 함께 우리 삶과 활동에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을 고민하고 적용하여 새로운 복음화의 별을 걸고 그 빛을 비춰나갑시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주님 공현 대축일

(가해) 마태 2,1-12: 2014/01/05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부모님께서는 제가 법관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 후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의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경영학과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각 세대와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각 직업에 대해 기대하고 평가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에 따른 꿈도 다릅니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와 아울러 왜 그것을 가지고 싶고, 왜 그 자리에 앉고 싶은가도 중요한 묵상거리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내 한 생을 바칠 것인가 하는 것도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것을 생업으로 하고 어떤 것을 취미로 할 것인지도 선택의 요소입니다. 어릴 때 그리고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청년 시절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내 생애를 살아갈 것인지도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남은 여생을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숙고도 우리 인생의 결론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러 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즈음하여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2,1-2) 라고 전합니다.

그분들이 어떤 분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어도, 박사라는 칭호를 쓴 것을 보면, 그분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해 민감하게 움직이기 보다는 자신이 그 동안 배워왔고 몸담아 왔던 지식이나 체제 등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찾으러 움직였을까?

우리는 반드시 뭐가 모자라고 아쉬워서라기 보다는 가끔 기존의 틀에 박힌 삶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들기도 하고, 내세나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이나 간절함 등을 가슴 속에 품기도 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하는 요즈음, 사람들은 진리를 상대화 시킴으로써 절대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잊어버리게 되자, 거꾸로 뭔가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어떤 것이나 현상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와 예술, 도덕을 개인의 신념 차원으로 격하시키고, 과학적 이성을 기초로 한 경제와 정치 발전만을 중요한 것으로 추진해 왔던 근대주의가 세계 제2차 대전으로 몰락하고, 인간 이성의 부작용과 폐해를 겪으면서 탈근대주의가 생성했습니다. 탈근대주의는 오히려 과거에 배척했던 기적은 물론이요 미신마저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 이성주의를 의심하는 대신 뱀파이어, 외계인, 환상, 마술 등 불가사의 하고 초자연적이며 기이한 현상에 심취하고 있습니다. ‘해리 포터’, ‘다빈치 코드’ 등도 이 새로운 현상에 포함됩니다.

세계 각국, 각처, 각 민족에게서 문화적 신조나 관습으로 구체화되던 전통 문화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딱히 의지할 데가 없고, 장차 일어날 사태에 대한 두려움마저 간직하고 있습니다. 구체화하자니 너무 심각하고 마주하기엔 공포스럽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불안스런 상황을 피해 술과 약물에 빠져들거나 자살하기도 하고, 재물과 소유를 통해 안정을 얻으려고도 하고, 스포츠나 오락, 섹스에 빠져 삶의 근심을 외면해 보려고도 합니다. 이렇게 탈근대화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행동 방식 중의 하나는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입니다. 안전하고 마음 놓을 수 있었던 과거의 원칙, 관습과 관례, 신념이나 정체감으로 돌아가고 싶은 신보수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도 생겨납니다.

불확실성과 불안이 점증하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정신, 문화세계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신비주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서구에서는 ‘요가’ 등의 동양의 수행과 명상 등의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교회 내에서는 고대 그리스도교 명상 전통을 대중화했다고 하는 ‘향심기도’(centering prayer)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는 성 프란치스코, 성녀 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이냐시오 로욜라 등 과거 신비가들에 대해 심취합니다. 사람들은 신비주의를 통해 행복하고, 즐겁고, 자신만만하고, 겸손하고, 사랑스럽고, 자유롭고, 편안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런가 하면, 육체적 질병을 포함한 심리 치료를 위해 삼담 치유사를 찾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치유사들에게서 내적 평화와 활력, 온전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속에서 영성을 찾고자 하는 ‘뉴에이지’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단순한 영적 통찰 작업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프랑스의 교회 일치 수도원이자 피정 센터로 일년 내내 젊은이들이 수천 명씩 찾아와 일주일간 머물고 가는 ‘떼제 공동체’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자유로움’에 있다고 합니다. 떼제 공동체는 어떤 교리나 교의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떼제 공동체는 전례를 길게 진행할 뿐 설교는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동아리나 끼리끼리 모여 영성이나 성경이나 자신들이 원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합니다. 오랫동안 침묵하고, 단순하고 고요하게 기도와 노래와 찬양만을 반복합니다. 가르침이나 원칙, 규정이나 기준도 없이, 그저 참가자들의 개인적인 느낌과 자기 이해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만이 있는 우리 시대의 징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디서 무엇을 찾고 어떤 면에 심취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맞는 것 같은 기도 방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호감이 가고 편안한 신심행위는 무엇입니까?

여러 민족과 여러 종족이 교회를 이루듯이 교회 내에는 각자에게 맞는 여러 가지 기도 방법과 신심 행위, 신앙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도 방식이나 성경공부 프로그램 그리고 신앙 실천 방법들은 결국 우리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화 과정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유다 이스라엘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이러 저러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 이러 저러한 기도방법을 찾아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에게 맞고 유익하다고 여기는 이것 저것을 찾아 여기 저기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마주치는 매일 매일의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주님의 뜻을 실현하며, 스스로를 성화시켜 나가기로 합시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주님 공현 대축일

(다해) 마태 2,1-12: 2013/01/06

고등학생시절에 선생님이 “인생에 기회가 두 번 온단다. 그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꽉 잡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던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은 기회를 잘 잡으셨습니까? 그 선생님의 말 대로라면 가끔 이러 저러한 제안이 올 때마다 이것이 기회인지 모험인지 유혹인지 식별해야 하고, 또 우리 전 생애를 걸고 투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기회인지 여부도 식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찾아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이역 멀리 길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옵니다. 동방박사들은 실업자가 되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온 것인지, 새로운 창업을 위해 여기 저기 미래전망적인 사업거리를 발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인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피정이나 창업연구소나 기술연구소나 문화연수를 온 것인지 모르지만, 그분들은 무엇을 보고 어떤 면에서 그 때 그 순간을 기회라고 여기고 이스라엘로 들어왔겠습니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어떤 면에서 기회를 발견하십니까? 그것도 하던 일을 멈추고 새삼스레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날 만큼 중요한 포인트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동방박사들을 움직이게 한 동기와 상징이었던 별은 무엇입니까?

동방박사들이 실업자도 아니요, 새로운 창업과 인생의 변환기에 놓인 사람들도 아니라면, 그리고 자기 생의 한 순간을 먹고 사는 생업에서 잠시 쉬어가도 될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또는 경제적인 문제와는 별도로 마치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점쟁이거나 인생의 의미나 철학적 사상이나 문화적 가치를 찾아 나선 이들인지도 모릅니다. 또는 여행 전문가이거나 문화탐방 개척자들처럼 자기 생업과 자기 생의 탐구가 동일한 이들의 방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직종과 각기 다른 업무형태에서 자신의 인생을 투신하여 자신을 이루면서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갑니다. 별을 발견하고 자신의 거처를 떠나 이스라엘의 마구간으로 향하게 한 동방박사들이 오늘 우리에게 지금 투신하고 있는 생의 형태를 버리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듯합니다.

오늘날 무한경쟁이라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들은 무엇입니까? 최고, 일등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해 주는 것 같고 기대하게 합니까? 일단 세계 최고, 첫 째는 우리에게 현세적이고 경제적이며 물질적인 풍요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유물론적인 풍요는 내 현실세계의 생존과 생의 안정 및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첫째와 최고는 끊임없는 도전과 추격에 직면하여 계속 그 첫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이, 더 높고, 더 빠르며, 더 짜릿하고 뭔가 특별한 변화와 체험을 위한 환골탈태를 요구합니다. 최고가 아니더라도 매일 새로운 것과 멋있는 것을 제공해야 하는 직종에 있는 이들은 아주 심한 압박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 경쟁세계의 일상과 그 끝은 물질을 제공해주는 듯하나, 지속적인 안정이나 행복을 제공해주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 모습은 마치 모래 위의 유리성에 갇혀 지내는 것처럼 언제 깨질지, 언제 회오리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려 빈털터리가 되고 말지 몰라서 더 불안하고 조급해 하며 거듭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주위를 처단해야 겨우 유지할 정도로 삭막하고 야박하여 불행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님 당대에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라고 하는 최고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새로움은 무엇이며, 임금이라는 자리는 무엇이었을까? 박사가 바라보는 새로움은 자신의 분야의 현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그 이상의 무엇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어떤 것 자체라기 보다는 그 어떤 것을 대하는 자세와 그 어떤 것을 통해 인류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랄 수 있습니다.

흔히 과거부터 조심해왔고 터부시해왔던 명예와 권력과 재물에 대해 오늘날 현세적인 가치와 비중을 존중하되 그 가치들이 지향하는 바를 개인이나 그룹의 안정이나 치부에 두지 않고, 그 가치들이 본래 향해야 하는 대상과 향방을 염두에 두면서 인류사회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박사라는 이른 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있어 더 이상의 가치충족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사상과 능력과 재력을 쏟아 보다 나은 인간의 미래를 위한 투신이 아니겠습니까?

박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투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한 것이고, 그 먹고 사는 것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해결된다면 그 다음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과 가치들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동방박사들처럼 자신의 위치와 일상에서 최고의 가치 곧 우리에게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복음의 실현이며, 예수님의 복음에서 시작되었고 그 복음이 가리키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류세계의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하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던 주님의 마음이 우리 가슴 깊숙이 울려 퍼지기를 기도하며 기대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라고 기도했고, 또 현실과 물질이라는 벽에 부딪히며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24절)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구현에 대한 희망으로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26절) 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27절) 라는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우리 신앙의 희망을 펼칩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여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바라보며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진리 앞에 유한하고 편협한 우리가 겸손되이 고개를 숙이고, 나와 소수의 우리를 넘어 인류 사회를,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그러나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실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로 합시다.



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 마태 2,1-12; 06/01/08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에서 가스팔, 발타살, 멜키올 세명의 왕이 별을 보고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고, 별을 따라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사건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성탄 날 밤 밤을 새워가면서 일해야 하는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인 목동들에게 나타나시고, 오늘 동방의 세 박사 또는 세 왕에게 나타나심으로써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날임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바친 선물의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예수님께서 황금을 받으실 왕으로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죽은 이의 사체에 바르는 몰약을 받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죽으심으로써 아버지께 유향연기처럼 희생제사를 바치시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과 연관하여 러시아에는 ‘넷째 왕의 전설’이란 민담이 있습니다.

이 민담은 예수님을 찾아 나선 동방박사들이 원래는 네 명이라는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이 네 번째 알타반이라는 왕은 나머지 세 명의 왕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서 별을 따라 가다가 갑자기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아기, 미망인과 고아들 등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던 보석을 다 나눠줘 버리고 때도 놓쳐서 결국 예수님을 뵙지 못해서 나머지 세 명의 왕들만 예수님께 경배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아기가 우리를 위해 희생제사를 지내시고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셔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넷째왕의 전설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갖은 역경을 다 헤치고 예수님께 가서 경배를 드린 세 명의 왕은 길이 역사에 남겨 칭찬받고 그 사건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경배드리러 가다가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한 사람들을 도와준 이 네 번째 왕은 유혹에 걸려 넘어져버린 낙오자인가?

이 네 명의 왕 중에 어느 누구 한 왕은 도움을 주기 위해 남아있었어야 했지 않았겠는가?

이 네 번째 왕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지 않았다면, 나머지 세 왕이 예수님께 가서 죄스럽게 인사드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정작 그랬다면 그런 왕들을 예수님께서 기쁘게 맞이하시지 못하셨지 않았겠는가?

기회나 때를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을 때도 있지 않은가? 우리말에도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임종을 보는 자식은 따로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 그 기회를 놓쳤다고 내가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뵈올 기회를 주님의 말씀을 실현해야하기 때문에 놓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다시 그 기회를 주실 것이고, 더 한층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찬미와 경배를 드린 세 왕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삶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이 네 번째 왕의 삶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네 번째 왕은 아니 세 명 이외에도 예수님을 찾아 나선 또 다른 네 번째의 다른 많은 왕들은, 아니 오늘도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만, 실제로 성당에 오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그리고 청하며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북한에 살거나 가족이나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겉으로 신앙을 드러낼 수 없는 조건 속에 살고는 있지만, 그리고 또 드러나게 영예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진정 주님을 갈망하며 그 갈망을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녹여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축복해 주실 것이며, 겉으로 드러나게 활동하고 노력하는 좋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어려운 조건과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숨은 노고와 갈망을 다 합쳐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 볼 때, 그럼 겉으로 드러나게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특별한 은총과 영예가 주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 경배한 세 명의 왕들에게 무슨 특권이나 특은이 주어졌는가? 그저 경배한 것뿐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구하러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예를 드렸을 뿐이고 그것이 다다.

단지 우리 각자가 처한 기회와 조건이 다르고 상황이 다를 뿐이지 누가 앞이고 뒤도 없으며, 누가 위고 아래도 없으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나아가는 같은 형제들입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일을 할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유혹에 빠져 스스로 포기하고 반항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살면서 루카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루카 17,10)라고 할 뿐입니다. 어떤 상을 언제 어떻게 주시는가는 주님의 몫이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진정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뵈옵고, 주님을 모시고 경배드리며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아니 그것이 다며 전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아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일을 한다는 그것이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이며 기쁨입니다.

넷째왕의 전설이라는 소설은 넷째왕에게 이런 기회를 선사합니다.

넷째왕이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그래도 모자라 노예를 풀어주고 자신이 대신 노예까지 되어 고생하고 있던 어느날 꿈에 누군가 자기를 흔들어 깨워 달려가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때였고 그 때 넷째왕이 예수님을 뵈오며 경배드리자, 주님께서 그에게 눈길을 돌리시며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라는 말씀을 해주시고 그에게 주님의 피를 적셔주시며 축복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나선 동방박사들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도왔던 네 번째 왕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하느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따름입니다.”(1역대 29,14) 라고 스스로를 희생하며 복음을 살아야 할 것이며,

먼저 가 영예를 누리게 된 세 왕처럼 현세에서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았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1고린 3,5)



주님 공현 대축일

(가해) 마태 2,1-12; 04/01/02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것 같이, 그냥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하면, 자기가 나를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는 나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득을 채우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배반당할지 모르고

세상 사람들이 다 경계대상으로만 보인다.

또 그렇게 몇 번 당하고 나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함께 살라고 모아 놓았는데 반해

우리네 사람들은 정작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지,

누구를 의지하면서 누구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되돌아보면, 인간관계는 조심해서만 되는 일도 아니요,

잘 해 준다고만 되는 일도 아니며,

처세술을 부린다 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만 통용되는 것이어서

인간의 무력감을 통감하면서

그저 하느님께 빌고 또 빌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또 자기와 연관되어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기에,

나의 외로움이, 나의 부족함이 더욱 더 그 골을 더해간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아니 바라게 된다.

내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나를 걱정해 주고,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고,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찾아온다.

이스라엘까지 그 별을 따라 오다가 더 이상 구체적인 장소를 찾지 못하자

이스라엘의 왕 헤로데에게 가서 묻는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2,2)

그러자 헤로데는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율벅 학자들을 모아 놓고 묻는다.

그러자 학자들은 대답한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하였습니다.”(5-6)

그래서 헤로데는 동방의 박사들에게 그 별이 언제 나타났는지 물어보고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라고 알려주면서 말합니다.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보시고.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 주시오.”(7)

왕의 말을 듣고 박사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그 별이 가리키는 왕, 예수 아기를 뵙고 경배드린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살지만, 그 박사들만이 어두운 밤 한 가운데서 그 특별한 별을 발견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특별한 별과 별들을 보지만, 그 박사들만이 그 별을 통해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 차렸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별을 보고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 박사들만이 구세주 예수께 경배하러 왔다.

유다에도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박사들만이 그것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경배하게 된다.

박사들은 자신들이 새 별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을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박사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왕의 출현을 경배하러 간다는 사실을 당시의 정치권이 알았다면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박사들은 자신들이 박사인데 자신들보다 더 낳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과 질투가 불러 일으켜지지 않았을까? 또 헤로데처럼 그것을 제거하고 자신이 최고이고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데,

박사들은 진리를 찾고 있었기에 그 별의 출현을 발견할 수 있었고

진리를 표상하는 별을 보고 진리를 발견하였으며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진정 박사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박사들이 고개를 숙인 세상의 왕,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셨으니

오늘 이 세상의 모든 인간 앞에 진리자체로서 찬연히 빛나고 계신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아서

그리고 새해 첫 주일을 맞아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기도하고 결심해 봅시다.

오늘 주보 별지를 보시면서 생각하고 써 봅시다.

첫째, 2005년에, 주님께서 이것만은 꼭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것은 무엇인지?

쓰십시오.

둘째, 2005년에는, 그 동안 살면서 꼭 해야만 했는데도 못하고 넘어갔지만 올 해는 이 일만큼은 꼭 하겠다고 다짐할 것은 무엇인가?

쓰십시오.

셋째, 2005년 한 해 동안, 주님과 형제들에게 이렇게 봉헌하고 봉사하겠다는 것을 다짐하면서 구체적이고도 내가 실현가능한 것을 하나씩 정해 봉헌하고 봉사하기로 하자.

쓰십시오.

그리고 이 내용은 고해성사를 보아야만 할 정도의 서약이나 약속은 아니지만, 올 한 해 여러분이 지향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이주사목 위원회 위원장 성탄 담화문 - "'비움과 내맡김'이 구원의 길"

2004/01/04

예수님 찬미! 2천여년 전 들판에서 밤을 세우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천사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사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이니 이것이 여러분을 위한 표징입니다."(루가 2, 12) 천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를 '우리를 위한 표징'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러한 표징이 주어졌습니까? 이 표징에서 오늘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구하러 오신 구세주는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당시의 아기 포대기는 아기의 얼굴만 남기고 온 몸과 팔 다리까지 붕대를 감듯이 둘둘 감았습니다. 갓난아기는 어머니가 끌어안아 주지 않으면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도 없고 몸을 뒤척일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온전히 모든 것을 어머니께 내맡길 수밖에 없는 가장 힘없는 이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습니다. 구유는 가축의 먹이를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먹여 살리는 분이 당신 자신을 먹이로 내놓으신 모습입니다.

온 우주를 무에서 창조해 내시고 역사를 주도하는 힘을 지니신 분이 이렇게 가장 힘없는 이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셨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자신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송두리째 비우고 모든 것을 내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갓난아기 예수 안에서 바라본 표징의 의미입니다. 이 '비움과 내맡김' 이 세상을 온갖 죄악과 불행에서 구하는 유일한 길임을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류는 오랜 역사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달아 왔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존엄한 인권을 갖고 있고 누구도 이를 훼손할 수 없음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대에는 무시되고 보장받지 못하던 노동자, 서민의 권리, 여성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 이주민의 귄리도 훼손해서는 안 되는 똑같은 인간의 권리로 차츰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이 평등한 존엄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행스러운 인류의 진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권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내세우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권리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집단 사이에서, 국가 사이에서 서로의 권리가 대결과 충돌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자신의 권리만을 정당화하고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무시한 채 충돌할 때 가족 모두가 상처입고 가정은 파탄으로 치닫습니다. 노조와 사용자가 대결하고 각종 이익 집단이 충돌할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모두가 엄청난 손해를 보고 서로 불신과 미움만 떠안게 됩니다. 국가와 국가가 충돌하면 전쟁에 돌입하고 많은 이가 생명을 잃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이들이 정치권의 불의로 인한 실망감, 경기 불황과 실업 그리고 각종 이익 집단들의 대결로 인한 불안감, 가족 구성원들의 긴장과 가정 파탄으로 인한 좌절감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빛이 보이기보다는 어둠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세상에 오시는 것은 바로 이 어둠을 물리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실의에 빠져 손놓고 있는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오십니다. 구세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어둠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력을 규합하여 새로운 조직을 만들거나 모든 이를 앞장서서 이끄는 새로운 지도자로 등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포대기에 싸여 얼굴만 내밀고 모든 것을 어머니께 내맡긴 채 구유에 조용히 누운 연약한 갓난아기로 오십니다.

우리는 이 구세주께서 보여 주신 모습에서 구원의 지혜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내 권리를 찾고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을 예수님처럼 온전히 비우고 내놓으며 이웃의 권리를 먼저 우선하고 존중해 줄 때 세상에 빛이 비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땀흘려 얻은 당연한 내 몫을 이웃과 나누고, 당연히 되찾을 수 있는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고 내가 누릴 수 있는 당연한 특권을 형제를 위해 포기할 때에 우리는 세상을 어둠으로 몰고 가는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 마태 2, 1-12; 2003/01/05

2003년 새해는 계미년 곧 양의 해다. 기록에 의하면 양은 신석기시대부터 개 다음으로 인간이 길들인 가축이다. 양은 순하고 착해 보인다. 그런데 지난 2일 서울교구 신년 하례식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양은 근시라 앞을 잘 못 보기 때문에 목자가 먹을 것을 가져다 주거나 먹을 곳으로 데려가 주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여럿이 모여 살고 목자가 지켜주어야만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인도 사실 혼자서는 주님을 잘 알지 못하고 온전히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주님께 갈 수 있고, 주님께서 보호해 주셔야만 악의 권세에서 벗어나 살 수 있다."고 했다.

성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 29)이라고 증언한다. 구약에서부터 양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속죄제의 제물로 이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제물로 바친 예수님의 생애를 정확히 표현한다. 세상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의 이 모습이 양의 해를 맞이하는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 오는가? 오늘 예수 아기를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 2)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기 위해서 온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아 우리도 세상 구원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다.

그런가하면 심정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 밖에 갈 곳이 없어서 온다. 우리가 아플 때, 억울할 때,, 외로울 때, 힘들 때, 고통스러울 때, 공허할 때 다른 어느 누구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나를 채워줄 수 없기에 주님께 온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신앙은 처절하고 절박하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더 깊고 그윽하다. 그래서 현세나 물질로는 채워지지 않는 인간 생과 실존의 근원적인 갈증을 주님께 와서 푼다.

그러면 인간 홀로 주님과 관계를 맺고 기도하면 되는데 왜 교회에 오는가? 우리는 우리 인간과 사회의 갈증과 문제들을 공감하고 주님 앞에서 함께 풀어나가기 위해 교회에 온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인들에게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대하고 바라기 때문에 교회를 두드린다.

오늘 구원의 빛으로 이방인들에게 드러나신 주님을 올 한해 우리 교회의 모습으로 삼고 이루기로 하자.



주님 공현 대축일

(가해) 마태 2, 1-12; 02/01/06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할 때면, 누구나 지난해의 과오와 부진을 씻고 새해의 약진을 계획한다.

오늘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사람은 많지만 유다인의 왕 별을 발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유다인의 왕 별을 발견한 사람들 중에서도 직접 찾아온 이들은 겨우 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성당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나마 줄어들고 있다.

동방박사들은 유다인들에게 물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동방에 사는 박사들은 유다 왕의 탄생을 알았는데 정작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왕이 탄생하셨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유다 베틀레헴에서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언제 오실지 몰랐고 또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지도 않았나 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네 사람들은 하느님께 은총을 내려주시기만을 청하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는 인색해 보인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주님 대신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한다고 했다. 요즘은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서 그 가치를 평가한다. 그래서 명예는 거의 무시되다시피 하고, 돈과 권력 중에도 금력이 사람들의 최우선 관심사이다. 권력을 잡아도 좋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돈을 더 많이 거머쥐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돈도 장학제도나 사회복지기금 같은 좋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잘 먹고 잘 놀기 위해, 이른바 즐기기 위해 모은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모아 즐기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한다.

그런데 정작 건강하고 돈 벌어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건설되는 것이라면, 질시와 복수의 눈길에 갇혀 편안하지도 오래가지도 못할 것이다.

올 새해 계획의 첫 자리는 무엇인가? 신앙과 인격과 고귀한 이상을 향한 노력인가? 건강과 신분상승과 재테크인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어디서 우리 인생의 의미와 완성을 찾는가? 올해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의 현세적 편익을 위해 희생하시라고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하겠는가?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를 구하러 오신 구세주 아기 예수께 머리를 조아리고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말씀을 받아 삼키고 실현함으로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사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주님 공현 대축일

(다해) 마태 2, 1-12; 01/01/07

어린이집에 토끼를 가져다 놓기가 무섭게 토끼장 주변에 고양이가 한 마리 나타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마치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대기라도 하고 있는 듯한 세상을 본다. 우리를 마치 물건을 팔아먹을 소비자로만 대하고 심지어는 우리를 속여서 빼앗아 가려는 세상처럼 말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왕에게서도 그 모습을 본다. 자기의 왕위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 위협이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려고 박사들에게 "찾거든 알려 주시오"(8절)하는 검은 의도가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위협 속에서도 주님은 빛으로 오신다. "그 때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마침내 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9절)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엎드려 경배한다."(11절) 그리고 그 빛은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세상을 비춘다. "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12절)

주님께서는 별을 보내 동방박사들을 이끄셨다. 오늘 우리에게도 앞선 별들을 보내주신다. 우리에게 신앙을 물려주신 선조들과 성직자, 수도자, 대부모, 부모님 그리고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과 증거자들.

그리고 또 다른 한편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그 많은 별들 중에서 구세주의 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방박사들은 세상의 주인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 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별을 따라나섰다. 자기가 지금까지 먹고살던 생활근거와 생활방식을 버리고 별이 일러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길을 나선 것이다. 박사라는 지위도 잊은 체 진리와 정의의 왕이신 주님께 나온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돈과 학력과 권력을 원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아귀다툼 속에 악착같이 끼어 들어 억지로라도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이 현실에서 찾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더 힘있는 사람에게 빼앗기지도 않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을 찾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끄는 신앙이라는 별을 향해 발을 내딛을 것이다. 동방박사들도 현실세계의 주인인 헤로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지시를 따랐다(12절 참조).

세상의 어둠을 뚫고 오셔서, 여전히 빛이신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마태 2,1-12 : 2000/01/02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매년 주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을 기억하면서 오늘을 보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가 전하는 공현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고 생각하게 됩니다.

밤마다 별이 뜹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동방박사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늘 깨어 있으면서 현실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그 사건들의 의미를 정확히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 구세주의 탄생을 보면서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두 부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리고 기뻐하며 경배하려는 동방박사들에 반해, 오히려 불안에 떨고 제거하려는 헤로데의 무리들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언서들을 통해 구세주께서 어디에 태어나실 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 구세주가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또 알고 난 후에도 경배하러 가지 않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편 아무런 행위도 취하지 않는 역사의 방관자들입니다.

구세주를 반기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거부하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주님께서는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요한 18, 37)라고 하셨습니다. 또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요한 17, 17)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주장을,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이해득실을 먼저 따지는 사람은 진리 편에 선 사람이 아니고 주님을 반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매일 일상에서 주님과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늘 깨어 밤하늘을 관조하다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렸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각자가 처한 전문분야에서 주님의 표징을 발견하고 주님의 뜻대로 그 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1-32)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구역반모임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자주 읽고 익혀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도록(요한 3, 21) 합시다.



주님 공현 대축일

(가해) 마태 2,1-12 : 99/01/03

동방박사들은 오늘 아기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인사드리고, 예물을 드립니다. 진리를 찾는 박사들이 예수 아기에게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에 주님께 경배드립니다. 그들은 왕에게 드리는 황금과 하늘의 왕에게 올리는 유향과 세상의 구하기 위해 죽으심을 준비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그들은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의 별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이사 60,3) 동방박사들은 별 속에서 구세주의 빛을 발견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이사 60,1)

한편 즈가리야가 아기를 가지리라는 천사의 말을 안 믿어 벙어리가 되었다가, 아기를 낳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 그제야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루가 1,79)고 세상에 빛으로 오실 주님을 찬미했다.

예수님은 우리 생활에 빛으로 오셨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요한 12,46)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신자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빛 속에만 있지 않고 마치 어둠 속에 있는 것같이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며 죄까지 짓는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고 말씀하시면서 그냥 그렇게 머리로 이해하고 결심해서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하고 실제로 우리 삶을 통해 그 길을 따라 걷게 된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데살 5,5)고 말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 인생의 빛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혹시 혼란 중에 있다면, 어디에 희망을 걸고, 어디에 의지하며 살기에 그런 혼란이 있는지 성찰하고 다시 잡아 봅시다. "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요한 11,9)



주님 공현 대축일

(다해) 마태 2,1-12 : 98/01/04

오늘 동방의 박사들은 묻는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그러자 예루살렘이 술렁거린다. 예루살 렘은 구세주가 나실 곳이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 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고 하였습니다."(마태 2,5-6)

구세주는 구세주를 기다린다는 이스라엘에게는 나타내 보이시지 않고 동방의 박사들에게 나타 내 보이셨다. 일부러 이스라엘에게 감추신 것일까? 일부러 배제하신 것은 아닌 듯 싶다. 왜냐하면, 성탄 날밤 맨 먼저 주님의 탄생을 알게된 이들은 이스라엘인이었다.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쉬거 나 잠자고 있을 그 시간에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루가 2,8)며 일해야 하는 목동들. 그 가난 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오늘 동방의 이교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주의 탄생을 경배하러 왔다. 그들이 헤로데 왕에게 가서 유다인의 왕이 어디 계시느냐고 찾은 것을 보면 단순히 이웃나라의 왕자가 탄생했거나 새로 운 왕의 등극식에 참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왕,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왕에게만 드리는 황금과 하늘의 왕께 드리는 유향과 또 죽음으로 사명 을 완수할 구세주에게 바를 몰약을 들고서 구세주를 맞이하러 온 것이다. 또 탄생하신 날을 맞춰 온 것을 보면 그 예물들을 미리 준비하고 마치 "늘 깨어"(루가 21,36; 마태 24,42) 기다렸던 것 같 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왜 구세주의 탄생을 알지 못했을까? 누구보다도 먼저 기뻐하고 찾아와 야 할 그들이 왜 몰랐을까? 공생활 때 주님은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시고도 인정을 받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 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마태 13,57-58) 이처럼 머리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실제로 믿지 않았으며 또 아는 것을 실행하지 도 않았기에 결국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이 나라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 나 땅을 치며 통곡 할 것이다."(마태 8,11-12) 하고 말씀하신 대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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