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4년 가정성화주간 담화문 ‘가정과 가난’

(다해) 루카 2,41-52; 15/12/27

지난 번에 무심코 묵상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같이 살고 싶어하는구나!” 기껏 생각해 놓고 나서 보니,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당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가족이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살고, 함께 살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름 대단한 것을 깨달았다고 여겼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이 현실에서 괴리를 가져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즉, ‘사랑하지 않는데 같이 살아야 한다면?’ ‘같이 살면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지옥 같고, 하루 하루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러면 정말 비극이겠구나!

지난 대림특강에서 김웅태 신부님께서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가정이 화목할 뿐만 아니라, 그 자녀가 힘차게 자라나고 또 자라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면, 서로 사랑하게 되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된다.” 는 사실을 각국의 실례와 통계 수치를 들어 설명해주신 바 있습니다.

성가정 축일에 여러분의 가정이 주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나되어 화목하고 단란하여 행복하시길 빕니다. 아울러 그 결과로 우리 교회와 사회가 조금 더 훈훈하고 살맛 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조환길 대주교님께서 2015년 제15회 가정성화주간 담화문을 발표해 주셨습니다. 함께 보겠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사랑이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외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탄의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며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기원합니다. 가톨릭교회는 1921년 주님공현대축일 다음 주일을 ‘성가정축일’로 제정하였으며,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팔일축제 내 주일로 옮겨서 지내오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2001년부터 성가정축일로 시작하는 한 주간을 ‘가정성화주간’으로 정해, 가정과 가족 구성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가정의 의미를 특별히 되새기고 있습니다.

작년 10월 ‘가정사목과 복음화’라는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3차 임시총회가 열린 데 이어, 올해 10월에는 ‘교회와 현대세계에서의 가정의 소명과 사명’을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4차 정기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교회역사상 연이은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적이 없었던 만큼, 가톨릭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정의 중요성과 위기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는 혼인과 관련하여 중대하고도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곧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종교적 윤리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회의감,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의 확산, 그리고 그에 따른 성의 상품화와 생명 경시 현상의 가속화 등으로 불륜과 피임과 낙태를 거리낌 없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과도한 경쟁과 고용시장의 불안으로 젊은이들은 혼인을 주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미혼 남녀의 과반수 이상은 결혼을 선택 사항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동거를 선호하는 개방적 태도 역시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혼인 연령은 높아지고 출산율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정의 붕괴와 해체를 가져오는 이혼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혼인에서 이혼에 이르는 기간도 점차 짧아지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선전하며 이혼을 부추기는 대중매체, 이혼과 관련한 법률제도의 홍보, 그리고 합리적인 재산분할제도의 발달 등에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인마저도 교회 가르침에 무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가 직면한 혼인과 가정의 위기는 한 개인이나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개인과 가정의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며, 사회에 노출되는 그러한 부정적 현상은 다시금 개인과 가정으로 고스란히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심으로써(창세 1,27 참조)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살도록 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습을 취하실 때에도 가정의 일원이 되시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심으로써 성가정의 모범을 남기셨고(루카 2,51 참조), 첫 기적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으키셨으며(요한 2,1-12 참조), 신자들 간의 혼인을 성사로 제정하셨습니다(마르 10,1-12 참조). 바오로 사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시어 거룩하게 하신 부부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드러내는 큰 신비(에페 5,21-33 참조)이므로, 가정은 사람에게 지워진 굴레가 아니라 그를 고양하고 완성하는 은총의 보금자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이 믿음의 보화는 등경 위에 놓인 등불처럼(마태 5,15 참조) 세상을 비춤으로써 기쁨과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부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너무나도 다른 우리 인간을 존중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인 부부 역시 배우자의 차이와 다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느님의 유일한 계획인 ‘사랑의 친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름과 차이를 수용할 때 인격과 인격 사이에 깊은 친교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도출되는 문제의 핵심은, 참된 대화에 이르지 못하는 가운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할 인격이며, 이 인격의 존엄성이 갖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모든 사회적 행위의 미덕입니다. 가정은 이러한 사회적 행위의 미덕을 근원적으로 수호하고 지키는 파수꾼과도 같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가정성화주간을 통해 참된 사람이 누구이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숙고해 봅시다. 참된 사람은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십니다. 바로 그 사랑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결코 계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기적인 욕심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이야말로 부부와 가정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행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본받아 항구히 사랑의 소명을 수행해 나갑시다. 그래서 성탄의 거룩한 빛이 모든 부부와 가정공동체에 밝게 비쳐지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조 환 길 대주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014년 가정성화주간 담화문 ‘가정과 가난’

(나해) 루카 2,22.39-40; 14/12/28

성탄절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기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에 드러나는 참으로 기쁜 때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성탄의 기쁨을 나누며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성가정 축일인 오늘부터 이번 한 주간 동안 가정의 의미를 특별히 되새기는 ‘가정성화주간’을 지냅니다. 교황청 가정평의회와 국제 카리타스는 올해 가정사목을 주제로 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임시총회를 준비하면서, 개별교회가 ‘가정과 가난’을 주제로 다뤄줄 것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가정을 위협하고 무너뜨리는 온갖 형태의 가난, 곧 경제적, 도덕적, 영성적, 사회적, 문화적 가난 등에 주목하면서 현대 가정이 직면한 문제들을 성찰하고자 합니다.

이 시대는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면서 인간 삶이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해졌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으며”(마태 26,11 참조), 가난한 모습은 세상 어디서나 목격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재해와 환경오염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크고 작은 분쟁으로 성적 착취는 물론 생명 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대륙 간 불균형으로 생필품과 의료 혜택의 빈곤을 호소하는 국가들이 있는가 하면, 빈약한 경제력으로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국민들도 있습니다. 심화되는 노령화와 후진국의 출산율 증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고 있으며,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실업과 절망으로 몰아세워 그 가족의 삶을 파탄내고 있습니다.

가난의 진정한 문제는 인간의 존엄에 어긋나는 사회적, 심리적, 문화적 요인들로 인해 악순환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막대한 부를 소유한 소수는 더욱더 부를 축척하는 반면에 그 옆에서는 비참한 빈곤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번영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가난, 외로움, 희망 없는 절망감 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이 줄어들고, 폭력이 증가하며, 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사용하다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에서 출발한 허무한 발전의 최종 희생자는,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래서 많은 가정이 환상적 행복이 낳은 고통 속에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채 헤매고 있습니다. 적잖은 가정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살기 위해서 인간의 품위마저 저버린 채 고군분투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가족의 유대가 약화되고 가족관계도 선물과 무상성의 법칙이 아닌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돈의 논리에 자주 휘둘립니다.

그런가 하면, 도덕적으로 빈곤하고 윤리적으로 가난한 가정 역시 위험한 공동체입니다. 가정의 문제를 경제적인 문제로만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라 해도 올바른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가정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가정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고 육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기본단위로서, 보편적 가치관이 전수되는 자리이며 사회적 문화적 소양을 기르는 곳입니다. 가정은 한 사회의 정신적 도덕적 영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초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가치관과 사회규범이 가정 안에 확립되어야만 자녀에게 풍부한 정신문화를 전수해 줄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빈곤하고 정신적으로 가난한 가정은 사회의 건강과 행복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한 사회의 건강과 행복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가정들의 도덕적 기초와 정신적 수준에 달려있습니다.

사실상 가정과 사회는 상호연대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가정이 올바로 서지 못하면 사회도 제대로 서지 못하고, 사회가 올바로 서지 못하면 그 영향은 고스란히 가정에 전달됩니다. 자녀들은 자기 부모가 사회 안에서 사람들과 유대를 맺고, 그들과 관심사를 공유하는 모습을 보면서 똑같은 방식으로 관계성을 형성해 나갑니다. 부모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가운데 가정의 교육적 역할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혼자만 행복해질 권리도 없다는 연대의식을 배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은 사회화와 사회연대를 위한 탁월한 장소입니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연대성이 취약한 가정들이 그릇된 사이비 종교의 공격에 쉽게 노출됩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그리스도인 가정에 직간접으로 미치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것은 결국 우리 가정과 가족에게 ‘해악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 시대 가정들이 떠안은 어려움들은 ‘교회와 사회의 미래인 가정’에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가정의 본래 모습을 생각하고 가정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용기를 내어 혼인의 신비로움과 가정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라는 표징이자 초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받고 있는 도전과 위기는 선교하는 교회,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교회, 특히 사회의 변두리로 향하는 교회가 되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교회인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충실성과 인내, 생명을 향한 개방성, 노인들에 대한 존경, 그리고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드러납니다. 이 모든 것의 비밀은 가정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십니다(에페 3,20 참조).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참된 사랑’이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먼저 찾아가는 사랑이었고, ‘벗을 위하여 목숨마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요한 15,13 참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으며”(2코린 8,9 참조), 실제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일평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분은 성부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인해 부유하셨고, 같은 사랑 때문에 가난하게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정의 중심으로 모시고 그분만을 주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다른 가정들과 함께 기도하며 서로 나눠야 합니다. 세상의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의 위협을 극복하는 길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와도 같습니다. 온갖 형태의 가난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그들의 가난에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동행합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과 손길로 다가가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이 존엄성을 되찾고 삶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합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들이 함께 살지 못하는 가정들, 집이 없거나 일자리를 찾지 못한 가정들, 그 밖의 이유들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향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다가갑시다. 도덕적으로 빈곤하고 윤리의식이 빈약한 가정들에게는 복음적 가치관과 건강한 의식을 전달합시다. 위기에 놓인 부부들과 이미 별거 중인 가정들에게도 화해할 수 있도록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갑시다. 그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참으로 행복한 가정, 참으로 복된 가정으로 거듭 태어나길 기원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조환길 대주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해) 마태 2,13-15.19-23; 13/12/29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족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매일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까 싶습니다. 가족이 뭐가 좋습니까? 무엇보다 가족은 허물이 없어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무슨 말을, 무슨 일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고, 늘 내 편이 되어줄 것 같고, 늘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따지고 보면 우리 일가족, 친척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다 내게 잘 해주고, 편안하게 해주고, 다 받아주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도 가족 중 어느 누구는 반갑고 잘 대해주는데 다른 어느 누구는 그렇게 썩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가족이 아름답게만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꿈꾸는 가정보다는, 그야말로 지지고 볶고, 아주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인간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4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첫째 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 카인이 둘째 아들 아벨을 죽입니다. 카인은 왜 아벨을 죽였습니까? 카인은 아벨이 싫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봉헌물은 받아주시지 않고, 아벨의 봉헌물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세상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이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가 그 누구에게 뒤처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카인은 자기가 선택받지 못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거기다가 카인은 다른 사람 아닌 동생이 선택되고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습니다. 자신이 동생에 비해 뭐가 모자라서 선택받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기 말고 아벨을 선택하신 것은 잘못되었고 부당한 처사라고 여겼습니다. 아벨이 미웠고, 하느님과 아벨을 원망했습니다. 결국 자기 이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할 수 없었던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카인은 자신만이 선택받아야 하고, 자신만이 사랑받아야하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과는 같이 살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을 없애서라도 세상 천지에서 자기 혼자만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카인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카인에게 부모님인 하느님은 편애주의자였고, 형제는 자신의 길을 방해하여 제거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카인은 가족과 인류사회가 자신을 부당하게 처우하는 세상이었고, 가족과 세상은 카인이 자기밖에 모르는 문제아였습니다. 카인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불평불만자였고, 부당한 세상에 항거하는 방랑자였습니다. 세상은 카인을 왕따시켰고, 살인자로 내몰았습니다.

창세기 27장부터 36장까지 보면,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첫째 에사우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소극적이고 얌전한 둘째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에사우와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경쟁관계가 됩니다. 둘째 야곱은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이 탐이나 첫째인 에사우가 받을 축복을 부정한 방법으로 가로챕니다. 그러나 야곱이 형이 이어받을 지위와 재산을 가로챘다고 여기는 순간, 그는 첫째인 에사우의 보복을 피해 근 20여년 동안 알거지가 되어 남의 종살이를 하며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 에사우는 에사우대로 동생과 결탁하여 장자권 이임질서를 문란케한 어머니와 그에 속아 넘어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삐뚤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야곱과 에사우에게 가족은 무엇입니까? 야곱과 에사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쌍둥이 형제였지만, 평생 견원지간으로 지냈고, 서로 사이 좋게 살기는커녕 평화 속에서 공존하지 못했습니다. 나눔이 아닌 독점적 탐욕으로 서로를 배제하고자 했고, 서로를 쫓아내기에 바빴습니다. 재산과 권력에 눈이 먼 형제는 가족을 자기 생애의 둘도 없는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의 몫을 극대화하려는 탐욕의 경쟁자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보호하고 보호받으며 살아나갈 수 있는 혈연의 가족관계를 파괴하고, 평생 서로를 피하며 원수처럼 공격하며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자신을 내어주거나 나누기 보다는 자신을 챙기고 뺏고 뺏기며 살았습니다.

인간이 장단점을 가진 인격체라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자신들 인생의 풍요와 동반자들의 인류 공동체에 평화로운 공존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야곱과 에사우 형제는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를 부정한 방법으로 제거하고 남의 것을 탈취하며, 현세적인 경쟁과 물질적인 탐욕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일생을 긴장과 불안 그리고 적대관계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요셉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잘난체를 하자, 나머지 열한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했고, 급기야는 이집트로 팔아버렸습니다. 똑똑하고 잘났던 요셉은 이집트에 팔려갔어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소질을 발휘할 수 있었고 우여곡절 속에 이집트의 국무총리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을 팔아버린 형제들이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이집트까지 찾아와 요셉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먹을 것을 팔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야말로 요셉이 그렇게도 칼을 갈면서 절치부심하며 기다렸던 복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마치 승자의 여유라도 부리듯 형들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5.7-8)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사우는 인간사회의 약육강식을 따라 살아남기 위해 형제와 이웃을 원수로대하고 싸웠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눈 앞에 펼쳐진 자신의 현세적인 처지와 물질적인 핍박을 해결하기 위해 가족과 적대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더 올라가고 하나라도 더 취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가족이라 하더라도 어떻게든 밟고 제거하면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와 세상과 가족관계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보고 재해석하며, 자신을 팔아버린 형제들의 가련한 처지를 바라보며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제거하기 위해 이집트에 팔아버리는 죄악을 저질렀지만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죄악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고자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을 내어줍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은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여러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기 보다 그의 전체를 바라보기 위해, 그가 어릴 때부터 어떻게 자라왔고, 지금까지 어떤 경로를 통해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며, 그의 전인격을 이해하고 대하기로 합시다.

오늘 집에 가셔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장점을 최소한 열 가지 이상씩 적어보며 가족간의 이해와 사랑의 첫 걸음을 시작해 봅시다. 그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만 맡겨진 그 인격을 바라봅시다. 그를 낯설어하고 낙인찍고 경계하는 세상의 눈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내주신 그 사랑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나를 경쟁과 통제의 인격이 아니라 희생과 봉사의 선물로 가족에게 내줍시다. 그래서 내가 가정에 그렇게도 바라던,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어떻게 되던 나를 편안하게 받아주고 옹호해 주기를 바라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하며 성가정을 이룹시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족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우리 성가정을 이룹시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1,2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다해) 루카 2,41-52: 2012/12/30

예전에 어린이집 어린이들에게 토끼를 선물하기 전에, 인간과의 적응과정을 거치느라 방에서 토끼를 길렀습니다. 그러다가 성탄 전날 어린이집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하필 왜 이 추운 날 토끼를 내놓았을까 하면서 안쓰러웠는데, 마침 성탄 구유를 꾸미고 난 지푸라기가 한 리어카 정도 있어서, 그것을 토끼집 안에 넣어 주었더니, 토끼가 그 지푸라기를 깔고 덮은 셈이 되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고통'이라는 회칙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고통은 그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자리 뉘일 곳도 없어서 동물들의 마구간으로 왔지만, 예수 아기님을 찾는 목동들과 동방박사들 모두는 뭐 하나라도 갖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인정이라고 부르거나 온정이라고도 표현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들은 그야말로 자기 살기 바빠서 아기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성경 기자는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루카 2,43) 라는 표현을 씁니다. 실제로 세상은 내가 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많은 일들이 생겨납니다. 옛말에도 '품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부모, 배우자, 자녀들이 세상 한가운데서 무슨 일을 겪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더욱 더 복잡다단해지고, 수많은 변수가 우리를 새롭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붙잡아 주시기를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애타게 찾았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응답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인간에 대한 신뢰. 그것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죄로 얼룩진 세상에 힘센 장군이나 갑부로 오지 않으시고, 누군가가 돌봐주어야 하는 연약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 그분의 탄생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극한 신뢰와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설사 배우자의 부정과 거짓이 반복되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에 대한 신뢰, 즉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하시고자 끊임없이 다가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또 그러기에 믿습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연약한 우리 인간 속에서 엄연히 살아 활동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언젠가는 우리 가정을 성가정으로 이루어 주시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성가정을 이루어 나갑니다.

아울러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인정을 나누고 온정을 베풉시다. 머물 곳 없어 마구간에 누운 아기 예수를 바라보면서, 가정이 없는 이들에게 가정이 되어 주고, 가정이 가정으로서 더 훈훈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교회로 초대하고 나눕시다.

교황님께서는 가정이 없는 이들에게 교회가 가정이 되어 줄 테니 교회로 오라고 초대하신바 있습니다. 또한 자녀가 없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1958년 스페인의 가브리엘 칼보(G. Calvo) 신부님께서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돌보다가, 문제아의 뒤에는 문제를 가진 부모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부모들의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아이들의 문제도 함께 풀어나가도록 청소년을 위한 부모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1962년 스페인에 이어 1966년 베네주엘라에서 첫 주말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1987년 8월 주말에 노틀담 대학에서 첫 주말을 가졌고 여기에 참여했던 많은 분들이 부부를 위한 이 프로그램을 전 세계에 퍼트리기 시작하여 지금은 57개국에 퍼져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76년 2월 메리놀회 마진학(Donald Maclnnis) 신부님을 중심으로 첫 주말이 시작하여 신자든 아니든 차별없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삼성동 성가정 본당은 2001년 5부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70부부와 사제1, 수도자2명 총 143명이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지속적인 부부 나눔의 후속 모임을 통해 성가정을 이루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매리지 엔카운터’(Marriage Encounter), 줄여서 ‘엠이’(ME)라고 부릅니다.

매리지 엔카운터는 설립 신부님의 지향을 따라 부부간의 문제를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혼인한 부부가 대화를 통하여 더욱 깊고 친밀한 부부 관계로 성장하고, 하느님 계획대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 기쁨이 넘치는 혼인 생활을 갖도록 하는 운동입니다.” 매리지 엔카운터를 우리 말로 하자면, ‘부부 새로운 만남’, ‘부부애 운동’, ‘부부 일치 운동’, ‘행복한 부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엠이를 들어간다고 부부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운동을 통해 부부와 가정의 문제를 풀고 화목하고 거룩해지도록 노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굳이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부부생활을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자신의 배우자를 향해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대화가 안 돼.” “말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어.” 등등의 고착된 평가로 무시해 버리고 포기하기 보다는, 더 나은 부부생활을 위해 단 둘이 만나 주제별로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더 나은 결혼생활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신혼여행 이후 단 둘이 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낮까지 2박3일 동안, 하느님께서 여러분 부부에게 이 기간을 선물로 주셨다고 여기고 축복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 해를 맞이하는 이 시기에 새로운 부부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도 좋은 설계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미사 후에 내려가셔서 가정분과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부부생활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도 잘 꾸려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냥 품 안에 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변화된 환경 속에서 급변하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하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자주 대화를 통해 서로를 나누고 변화하는 과정에 함께함으로써 명실공히 인생의 동반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대화는 먼저 듣기 위한 것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했는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 등을 듣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대화에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은 두 번째라고 봅니다. 어릴 땐, 처음엔, 내 말을 듣지만, 커가면서, 여러 번 같은 경우와 처신을 겪으면서 더 이상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게 되고, 마음 속으로 갈등하면서 피하게 되고, 거절하여 엇나가게 되기도 합니다. 먼저 상대의 말을 듣고 그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서 서로 나누게 되고 함께하게 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주느냐도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먼저 상대의 마음을 들어주고 나눔으로써 대화하게 됩니다. 힐난하고 문책하는 질문이나 답을 정해 놓고 유도하는 질문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며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가족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가정기도와 가족회의 등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마련하여 지속적인 일치를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하셔서 행복한 가정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서로에게 어떤 장점을 주시고 어떻게 배려하고 어떤 점을 채워주어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눈에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라 감춰진 면모를 바라보면서 서로를 향한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면 좋겠습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은 오늘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 사랑의 은총이 가득하여 여러분 가정이 주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며 거룩해져서 성가정을 이루시도록 기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좋은 그리스도인 가정이 되어, 가정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평안하고 행복하소서. 아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해) 마태 2, 13-15. 19-23; 04/12/26

가끔 천주교 신자들에게 사회 친구들이 놀려대는 이야기가 하나 있단다. 그것은 “어떻게 평생 한 남편, 한 부인만 데리고 사느냐?”는 농담이란다. 그러나 곧이어 재혼은 초혼보다 더 어렵다고 실토한단다.

재혼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결혼한 자기 배우자의 어떤 점이 싫어서 헤어지고 다시 또 다른 배우자를 만났지만 그 전 배우자에게서 자기가 원치 않았던 점은 사라졌을망정 만족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새 배우자가 가진 또 다른 하나의 단점이 자기를 괴롭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 배우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부부생활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굳이 결혼생활을 거론하지 않아도 친구나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또 한 눈에 반한 사람은 그저 자기 상대의 한 부분이 그의 모든 부분을 대표하고 그 한 부분이 그의 모든 것을 감싸주고 있기 때문이며 그 한 부분 때문에 다른 모든 부분이 감춰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한 점이 어떤 사람에게 또는 어떤 분야에서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사랑도 하고 취직도 하고 성공도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람이나 분야에서는 그가 그저 하나의 평범하게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결혼과 부부생활은 직업과 달라서, 상대에게 받아들여지는 장점 하나로만 해결하기는 힘들다. 직업은 자기가 하는 일에 필요한 그 전문성 하나로만도 성취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지만, 결혼은 일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와 생애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의 장점만으로는 자기의 전 생애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삶은 한 인간의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전 존재를 요구하며 대응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장점을 개발해 나가는 동시에 자신의 단점이 자기의 장점을 침범하지 않도록 절제하고 통제하며 조절해야 한다.

그리고 부부생활의 경우라면, 자신의 장단점의 계발과 통제는 물론이요 동시에 자기 배우자가 지닌 장단점을 받아들이고 자기도 하기 힘든 계발과 통제과정을 부부가 함께 인내하고 동참하며 적절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부부생활의 제3자로서의 자녀에게도 자기 배우자와 함께했던 계발과 통제를 또 하나의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짐이라면 짐이고 기회라면 기회이다. 자기가 힘들 때는 상대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도와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도와주어야만 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데 상대가 다행히도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한 면에 있어 그 시점과 그 면에서 함께 인내하고 도와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상대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거나 상대 역시 자신의 문제로 함께해줄 수 없을 때면 서로의 요구가 충돌하여 분쟁의 국면으로 전환된다. 그러면 부부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때도 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모든 부부들이 다 매일같이 싸우고 갈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듯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상대에게 요구하면 상대가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그러기에 자신도 채워지지 않지만, 거꾸로 자기의 필요를 뒤로하고 상대의 필요와 요구에 함께할 때 상대도 나아지고 자신의 문제도 그 과정에서 함께 치유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인간적인 노력과 처세술 너머에서 우리 가정의 유지와 화목에 있어서 더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가정이 가정으로서 꾸며지고 유지되도록 하는 하느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이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예수 아기가 탄생한 후 동방에서 예수 아기의 별을 발견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러 찾아오다가 길을 잃어 헤로데 왕에게 그 길을 묻는다. 그러자 헤로데는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 유다 베틀레헴에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도자가 될 아기가 태어나리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자기의 왕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두 살 이하의 어린 아기를 다 죽이려고 한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시켜 요셉에게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와 요셉을 고를 때부터 또 그들을 정혼시키고 예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의 전생애를 통해 천사와 성령을 통해 성가정을 이끄시고 도와주신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무리 하느님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먹지 않고, 자지 않으면서 산 것이 아니지 않는가. 결국 그 이야기는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생활이 말로만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실제로 남편과 아내로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을 겪었다는 말이다. 그럼 요셉과 마리아는 부부싸움을 한 번도 안했을까? 요셉과 마리아에게 있어서 결혼을 파기할 만한 일이 한 번도 안 일어났을까? 어린 예수는 부모님께 걱정 한 번 안 끼치고 칭찬만 받고 자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아기와 요셉과 마리아는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이다.

그리고 성가정을 이루는데 있어 요셉과 마리아라는 인간측의 몫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청하고 하느님의 개입을 받아들이려는 자기 개방과 열망이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자.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면서 하느님께서 예수 아기와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주시고 도와주시었는지를 복음 안에서 바라보고 깨달으면서, 주님께서 우리 가정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주시고 도와주시고 계신지 믿어야겠다.

요셉에게는 꿈에 나타났지만, 꿈결과도 같이 우리 가정을 이끌어주신 사건과 상황과 사람들을 통해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함께해 주셨는지. 우리의 지난 가정사를 되돌아보면서 주님께서 함께해주셨던 순간들을 기억해 내자.

그리고 오늘 우리의 가정에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해주고 계신지 확신에 이를 때까지 찾아내어 느껴보기로 하자.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달라고 청하면서 주님을 향해 우리의 관심과 열망을 펼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모시기로 하자.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가정에도 ‘주께서 예언자와 복음서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15. 23 참조)지도록 하자.

부부와 가족 모두가 각자의 역할과 노력을 다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할 책임을 다하면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을 열매맺어주시고 또 그 너머에서 우리를 축복해주셔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성숙시켜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며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기로 하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성화주간 담화문 - "가정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2003/12/28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가정은 교회와 세상의 미래

해마다 한 해를 마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맞이하는 가정주일은 신앙 안에서 '가정'이라는 귀중한 삶의 터전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묵상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또한 '가정'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찾고 결심해야 하는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올해로 세 번째 맞이하는 '가정성화주간'을 기념하는 것은 교회가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명인 가정을 보살피고 바로 세우는 일을 실행해야 함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일입니다.

이미 각 교구별로 활발한 가정사목이 전개되고 있으며 가정이 사목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다가오는 2004년에는 한국에서 열리게 될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총회에서도 '가정'이 중심주제로 다루어질 예정이고,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가정'을 주제로 공동사목교서가 발표될 계획이어서 그 어느 때보다 교회 내에서 가정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최근 들어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정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징표이며, 가정이 교회의 미래와 세상의 미래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2. 교회는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는 지금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다른 생명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안락을 유지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문화가 온 사회를 뒤덮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다고 해서 모든 희망을 잃은 듯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심지어 온 가족을 죽음의 길로 끌고 가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과 죽음의 문화 속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곳은 가정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정이 처해 있는 이러한 현실은 가정의 정체성이 전체적으로 무너져 가고 있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관계와 가족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혼인에 대한 가치관의 붕괴로 말미암아 거룩한 혼인계약의 의미가 상실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이혼률의 급격한 증가와 저출산 문제는 앞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위기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결손가정이 증가함으로써 발생하는 부부와 자녀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性)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급증하고 있는 동거문화와 혼전 성교, 그로 말미암아 증가하는 낙태와 성의 문란 현상은 우리 사회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정이라는 기초적인 세포가 건강을 잃게 되면 그 사회는 내부로부터 치명적인 병을 앓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사회의 기반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이 가정의 문제에 교회는 물론 온 세계가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가정 문제의 위험 수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살리는 일에 교회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쓰러져 가는 가정을 지키고 올바로 세우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교회가 이 시대에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사명이며, 세상과 교회의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는 일인 것입니다.

3.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가정

그리스도인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러야 합니다. 혼인의 계약으로 탄생한 가정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고 그 은총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길은 서로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랑과 생명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인간의 성숙이 이루어지는 못자리이며 가족관계를 통해서 체험한 사랑과 생명을 사회생활에 확대해 나가는 원천지입니다. 세상을 향해 가정에 대한 깊은 관심과 노력을 끊임없이 촉구하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불가해한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인간의 구원자」, 10항)고 말씀하시며, 가정은 인간이 인간으로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자리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또한 "사랑에 의해 세워지고 생명을 받는 가정의 첫째 임무는 진정한 인간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데 계속적 노력을 쏟으면서 일치의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며, 그 임무의 내적 원리, 영원한 원동력, 최종적 목표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이 가정이 인간들의 공동체일 수 없고, 또한 사랑 없이는 가정이 살아남고 성장하여 인간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 없다."(「가정 공동체, 18항」)고 호소하십니다. 따라서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하며 각 가정이 목표로 삼아야 할 가장 소중한 사명입니다. 가정이 본연(本然)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사랑의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족 서로가 끊임없이 사랑하기로 결심하며 실천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가정-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정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리스도를 가정의 중심으로 모시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시며 당신의 온 삶을 통해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세상의 참된 가치가 무너지고 인간의 삶이 점점 더 비인간화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자유와 개방의 선택은 우리의 삶을 자기만족과 이기심의 노예로 이끌었으며, 헛된 것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것들을 다 탕진하고 타락과 자포자기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자기 몫을 챙겨 자신의 환상과 꿈을 좇아 아버지를 떠났지만, 이내 가진 재산을 다 탕진하고 짐승들의 먹이로 허기를 채우던 아들이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 발길을 돌려 아버지의 집으로 향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멀리 떠나왔지만 지금이라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우리의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향한다면 이 세상은 다시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풍요로운 세상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이 겪는 모든 사건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생생하게 유지시켜 주고 일깨워 주는 것은 가정기도입니다. 각 가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치셨던 기도를 바치며 그분의 말씀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고 느낀다면, 가정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가족들의 유대는 더욱 튼튼해지며 가정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을 향해 비출 수 있을 것입니다.

5. 가정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가정은 그 자체로 교회의 모습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가족간의 일치는 교회 일치의 분명한 계시와 실현입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평범한 일이나, 특별한 일이나 하느님 구원사업의 일부분이며 그리스도인의 믿음, 희망, 사랑의 살아 있는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정 안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마음과, 가정 안에서 말씀의 식탁을 차리는 일, 가족이 함께 기도하는 일을 충실히 함으로써 가정이 다양한 형태의 성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삼위일체의 사랑과 친교를 반영하는 성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을 증거하며,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우리의 미래를 지켜 줄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면서 나자렛 성가정의 거룩한 모범으로 세상의 못자리인 가정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려는 모든 가족들에게 성령께서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을 믿으며 모든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성화주간 담화문 -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으십시오"

02/12/29

1.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2002년 한해를 돌아보며 마지막 주일을 지내는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며 가정 성화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 주간에 우리는 나자렛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와 요셉께서 보여 주신 성가정의 모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가정이 온갖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과 일치하여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였는지를 깊이 묵상하여야 하겠습니다.

2. 이 세상에 가정보다 더 소중하고 근본적인 공동체는 없습니다. 가정 제도는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구세주 예수님도 이 가정에서 30년 동안 구원 사업을 준비하셨습니다. 가정에서 새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사랑이 전수됩니다. 가정은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길러내는 최초의 학교이며 사회를 인간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고 원초적인 장소입니다(가정 공동체 21항, 43항 참조). 인류의 미래가 이 가정에 달려 있습니다.

3.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참으로 많은 가정이 해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선물인 귀한 생명이 기피되거나 아예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 나라의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출산율의 급감과 이혼율의 증가 그리고 수많은 낙태는 바로 생명의 성역인 가정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편의와 안락만을 쫓는 그러한 세태는 노동 인구 급감과 노령화 사회를 초래하고 국가 경제도 위기에 빠지게 합니다. 가정이 생명을 거부하면 그 가정이 무너지고, 가정이 흔들리면 사회와 국가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4. 가정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바로 세우는 주체는 바로 가정입니다. 우리는 이기적 물질주의와 퇴폐적 향락주의의 거센 물결을 극복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나자렛 성가정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자주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를 바칠 때에 나자렛에 계셨던 주님께서 그 가정에도 현존하십니다(마태 18, 20 참조). 가정 기도는 가족의 성화를 위한 첫 단계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묵주기도의 해’를 선포하시며, 가정의 위기 극복을 위하여 온 가족이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권고하셨습니다('묵주기도' 6항 참조). 묵주기도는 언제나 가정의 기도이고 가정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분명 가족들을 서로 가까이 묶어 줍니다. 가족이 모이기가 어렵더라도 시간을 내어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는 가정은 나자렛의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묵주기도' 41항 참조).

5. 교회와 사회는 마땅히 가정을 도와야 합니다. 가정의 위기는 곧 교회와 나라의 위기입니다. 가정의 두 기둥은 생명과 사랑이고, 생명과 사랑은 종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을 경시하게 되고, 생명과 사랑을 소홀히 하면 가정은 해체되기 쉽습니다. 가정이 해체되면, 교회는 약해지고, 사회는 황폐해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 사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때입니다. 그리고 새로 출범하게 될 정부는 미래 한국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진지하게 인간 중심의 가정정책을 수립하기 바랍니다. 과거 정부는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경제 중심의 가족계획사업을 추진하였고, 1973년 2월8일에는 낙태를 일부 허용하는 모자보건법까지 제정하였습니다. 그 뒤 30년 동안 이 법률의 비호 아래 무려 수천만의 태아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갔습니다. 교회는 이 법률의 폐지를 지속적으로 촉구하여 왔고, 새 정부에도 거듭 촉구합니다. 또한 산부인과 의료인들에게 생명 존중을 호소하며, 동시에 의료인들을 낙태로 몰고 가는 의료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을 촉구합니다.

6.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가정의 성화를 위하여 우리 모두가 노력하여야 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이 기도에 열중하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였듯이, 온 가족이 함게 기도하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도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여야 합니다. 교육열과는 전혀 다른 '교육 부재'의 현실 속에서 부모는 첫 스승으로서 모범을 보이며 자녀들에게 삶의 참된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의 모범과 산 증거야말로 자녀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교훈이 될 것입니다. 또한 가정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첫 학교이니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정 안에서부터 배우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회복지기관 방문과 봉사는 물론이고, 주변의 결손 가정, 이혼한 편부모 가정, 혼자 사는 노인 등 어려운 가정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온 가족이 함께 베푼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다가오는 2003년 희망찬 새해에 모든 가정이 나자렛 성가정의 보호 아래 화목하게 함게 기도하고 봉사의 삶을 실천하기를 바라며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2002년 12월 29일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회 가정성화주간 담화문 - "가정의 기본을 바로 세우십시오"

01/12/30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2001년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며, '가정성화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가정이 날로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해체되고 있는 이 때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 춘계 정기총회에서 해마다 성가정 축일 주간을 '가정성화주간'으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가정을 통하여 세상에 오신 이 뜻깊은 때에 인류의 미래가 달린 가정의 소중한 가치를 재확인하며 가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다 함께 정진하여야 하겠습니다.

2. 오늘날 한국의 가정은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오랜 기간의 경제 제일 정책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긴 하였으나, 윤리적 사막화와 물질주의 만연으로 가정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와 핵가족화로 과거의 좋은 전통이 사라지고, 부모를 외면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이혼 건수는 지난 1970년 이후 열 배나 올라 하루 세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하는 상태이고, 우리 나라 이혼율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 이후 한 여성이 평생 출산하는 아기의 숫자를 뜻하는 출산율은 1999년 1.42명이라는 최저치를 기록하여 저출산율 국가에 속하게 되었고, 매일 5,000여 건의 낙태로 생명의 성역인 가정과 생명의 산실인 병원이 오히려 '죽음의 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의 미래는 곧 사회의 미래입니다. 가정의 기본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사회 번영의 길도 제대로 열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3. 먼저 가정에 '부모 공경'의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효(孝)는 예로부터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 하였습니다. 성서에도 "아비를 공경하는 것은 자기 죄를 벗는 것이며 어미를 공경하는 것은 보화를 쌓아 올리는 것이다."(집회 3,3-4) 하고 가르치며, "자녀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골로 3,20-21) 하고 권고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여라."(출애 20,12) 하는 계명은 성서의 기본 가르침이며 축복의 조건이고, 자연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기초한 초자연적 덕성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낳아 주신 부모님은 하느님 다음으로 첫째 은인들이시기에, '부모 공경'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와 관련이 있습니다([가정교서], 15항 참조). 그러니 이 땅에 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루가 2, 51)하시며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께 "죽기까지"(필립 2,8)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을 경외하고, 힘써 부모를 공경하여 진정한 효도 문화를 바로 일으켜 세워야 하겠습니다.

4. 부모 공경은 일방적이기보다는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은 부모들도 마땅히 자녀들의 공경과 사랑을 받을 만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자녀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잉태되는 최초의 순간부터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가정교서], 15항 참조).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에 봉사하는 것은 가정의 기본 임무이고, 생명의 전수로써 부모들은 영예롭게도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 양육으로써 하느님의 부성적이고도 동시에 모성적인 교육 방법에 참여합니다. 특히 가정이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지니고 있는 영역은 분명히 종교 교육의 영역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통하여 가정이 "가정 교회"로서 성장할 수 있게 하고, 가정이 '가정 사도직'의 주체가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5. 가정은 사랑의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의 "계약"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가정교서], 7항 참조). 곧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신을 서로 주고 서로 받아들이는 부부의 "친교"가 가정 공동체를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 관계는 상호 존경과 사랑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가정은 화목한 공동체일 수 없고, 또한 사랑이 없이는 가정이 살아남고 성장하여 인간 공동체로서 완성될 수도 없습니다([가정공동체], 18항 참조).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가정이 대화를 잃어버리고, 가족간의 무관심은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설문에 의하면 거의 매일 가족간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정은 절반 정도이고, 사회 여건 또한 가족이 함께 모일 시간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우리는 다시 친교의 기본인 대화와 사랑을 되찾아야 하겠고, 이를 위해서는 귀가를 서두르고 텔레비전과 컴퓨터도 잠시 끄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6. 가정의 기본을 바로 세우려면 그리스도인 가정이 가정 제도의 제정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듣고 실천함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가 함께 모여 공동으로 바치는 가정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가정공동체], 59항 참조). 그리스도인 가정이 '가정 교회'의 사명에 실제로 참여하는 정도는 기도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열매 많은 포도나무와 일치하는 정도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가정공동체], 62항 참조). 그럼에도 많은 가정에서 가정 기도가 매우 소홀히 여겨지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가정 기도를 한다고 볼 수 있는 가정은 소수이고, 일년에 한두 번 또는 전혀 하지 않는 가정이 대다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각 가정은 하느님을 가정에 모시기 위해 매일 촛불을 밝히고 가정 기도를 충실히 바쳐야 하겠습니다. 그 기도 안에서 가족은 자신들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 그리고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 함께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정의 위기는 곧 사회의 위기"라고 지적하고, 혼인과 가정의 온전한 가치를 증진시키는 것만이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가정은 가장 중요한 길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길이며,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길입니다([가정교서], 2항 참조).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 정부와 교회는 이 가정을 바로 세우는 데 최우선적인 '정책적', '사목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실직자 가정, 무주택 가정, 결손 가정, 독거노인 가정 등 어려운 상황의 가정에 우선적인 관심과 배려가 요구됩니다. 또한 대중매체의 강력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 종사자들이 외설과 폭력의 영화나 텔레비전 등의 프로그램을 벗어나 가정을 건전하게 지키고 돕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정 자신이 가정을 바로 세우는 주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합니다([가정공동체], 72항 참조).

이제 다가오는 2002년 새해는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더욱 이루는 새해가 되길 소망하며, 사랑과 생명의 문화 건설을 위하여 애쓰는 각 가정과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

2001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다해) 루가 2, 41-52; 2000/12/31

어린이집 어린이들에게 토끼를 선물하기 전에, 인간과의 적응과정을 거치느라 그동안 방에서 토끼를 길렀습니다. 그러다가 성탄 전날 어린이집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하필 왜 이 추운날 토끼를 내 놓았을까 하면서 안쓰러웠는데, 마침 구유를 꾸미고 난 지푸라기가 한 리어카 정도 돼서 그걸 토끼 집 안에 넣어 주었더니 토끼가 그 지푸라기를 깔고 덮은 셈이 되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고통'이라는 회칙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고통은 그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태어나신 아기 예수도 사람이 사는 곳에는 자리 뉘일 곳도 없어서 동물들의 마굿간으로 왔지만, 예수 아기를 찾는 목동들과 동방박사들 모두는 뭐 하나라도 갖다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인정이라고 할까요. 온정이라고도 하죠.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의 부모들은 그야말로 자기 살기 바빠서 아기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성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43절)라는 표현을 씁니다. 실제로 세상은 내가 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많은 일들이 생겨난다. 옛말에도 '품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부모, 배우자, 자녀들이 세상 한 가운데서 무슨 일을 겪는지 다 알지 못한다. 세상은 더욱더 복잡 다난해졌고, 수많은 변수가 새롭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켜주시고 붙잡아 주시기를 청해야겠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신뢰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애타게 찾았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응답한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인간에 대한 신뢰. 그것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예수 아기의 탄생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설사 배우자의 부정과 거짓이 반복되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에 대한 신뢰, 즉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하시고자 끊임없이 다가오고 계시다는 사실과 우리 연약한 인간 속에서 활동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겠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인정을 나누고 온정을 베풀어야 겠다. 가정이 가정으로서 더 훈훈하기 위해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나해) 루가 2, 22-40 : 1999/12/26

교회는 매년 오늘 혼인 갱신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게 될 혼인 갱신식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식을 시작하면서 사제는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혼인서약을 갱신하고자 하십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 말없이 사라지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밤새 도망가 버리는 가정, 어느 새 없어진 가족의 한 구성원 그래서 갑자기 홀아버지, 홀어머니 슬하에 놓인 아이들이 많습니다. 우리 가정에 닥쳐오는 어려움을 서로가 힘을 합쳐 이기려고 하는지? 아무도 힘 못쓰고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홀로 일어나 나만 바라보는 가족들을 위해 애쓰는지? 그렇다면 대답하십시오. "예 그렇습니다" 라고! 그리고 사제는 또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가정을 본받아 일생 서로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겠습니까?" 서로를 자기에게 맞추라고 끌어당기지 않고, 서로로서 놔두면서 자유를 보장해주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도 대답하시렵니까? 그러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십시오.

그럼 이제 그런 정신과 자세를 가지고 부부 서로 오른 손을 잡은 채 하느님의 어전과 교회 앞에서 부부의 혼인서약을 갱신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아무)는 주님의 은총으로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였음에 감사하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나는 이 서약을 참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를 대비해서 하며, 설사 당신이 이 서약을 안 지키더라도 나는 내가 믿는 하느님의 성실성에 의지하여 내 서약을 지키겠노라고.

주님은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아예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면서, 우리가 그 일을 기꺼이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두 분이 교회 안에서 고백한 이 혼인서약갱신을 주께서 친히 견고케 하시고 풍부히 강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에 감사로이 대답하십시오. "아멘."

그러면 사제는 다시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당신의 이름으로 강복하는 이 반지들에 축복을 내리시어, 이 반지를 주고받는 부부들로 하여금 서로 완전한 신의를 지키며 당신의 뜻대로 평화 속에서 항상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진정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빌면서 "아멘." 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그 축복 아래 우리의 길을 갑시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해) 마태 2, 13-15. 19-23 : 98/12/27

예수님은 성령으로 마리아님께 잉태되셨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걱정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결혼해 부부생활을 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예수 아기가 다윗의 자손 요셉과 그와 결혼하기로 예정된 마리아의 아들로 점지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결혼시키신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이 서로 좋아서 결혼하기로 선택했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이러한 선택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인간의 인생과 선택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아기를 탄생시키기 위해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남녀의 결합을 준비시켜주시고 기다려주시고 축복해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에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기가 태어나기 위해, 여러분이 서로 결혼하게 된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부부가 서로 좋아서 또는 어떠한 연유에 의해서 서로 결혼하게 되었지만 그 결혼이 하느님께서 준비하시고 기다려주시고 축복해 주신 결과가 아니라고 반대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 아기가 탄생한 이후에 헤로데가 아기를 죽이려고 하자 천사는 또 다시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에집트로 피신하게 하고, 헤로데가 죽은 후 다시 데려오십니다. 하느님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통해 가정을 이끄시고 계십니다. 가장인 아버지 요셉의 결정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가족 중의 다른 어느 누구도 확인할 수 없게, 오직 요셉의 꿈을 통해서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과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 주님의 뜻이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내가 낳은 아기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태어난 하느님의 아기가 아니라 여러분의 아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습니까?

요셉이 마리아가 아기를 밴 것을 알고도 결혼하고 또 마리아가 요셉의 결정에 따라 에집트까지 이사간 것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배우자를 신뢰하고 기꺼이 따라주십시오. 실망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의지하여 기도하면서 살게되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렸다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생애에 함께하시면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꿋꿋하고 화목하게 살아가십시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다해) 루가 2, 41-52 : 97/12/28

요셉과 마리아는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다 돌아오면서 아들 예수를 잃어버립니 다. 하루를 지난 후에서야 자신들이 아들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모의 실수를 통해서도 주님은 아들 예수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성가정의 첫 모습은 실수 없는 가정이 아니라 실수 중에서도 주님께 청하고 주님의 보호를 받는 가정입니다.

사흘만에 성전에서 찾아냈는데 예수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고 울고 있다거나, 구걸을 하고 있다거나 또는 골목길에서 다른 어린아이들의 돈을 뺏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는 학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가 왜 속을 썩였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가 2,49) 이 예수의 대답 속에서 우리는 예수가 자기 생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자각을 하고 있 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의 두 번째 모습은 이와 같이 자신의 사명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현실적으로 자기를 키워주고 계신 부모를 따릅니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루가 2,51ㄱ)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이 더 낫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권위에 순종하는 하느님의 아들 모습에서 성가정 의 셋째 모습을 발견합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부모님을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받아들였다 고나 할까요?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행동과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크게 나무라 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묻어 둡니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51ㄴ) 이 성가정의 넷째 모습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같은 생각과 같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지만 각자 다른 사명을 띄고 났고 하느님께서 서로 를 다른 길로 이끄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가정의 모습 안에서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고 성서저자는 이 기사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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