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체험... “형제들은 하느님의 선물”



'20/10/1 목요일

오늘은 추석, 한가위입니다. 매년 이 날이 되면 특별히 더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부모님이 만들어 준 새 옷을 입고 지금과는 달리 조금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나가 친척 어른들을 맞으며 제사를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추석인지 명절인지 모르게 시끌벅적하게 지내왔던 과거와는 달리,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소박하고 단촐하게 주님 품 안에서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은공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부모님과 조상님을 온전히 기리는 오붓한 오늘이 새삼 귀하고 값지게 다가옵니다.

제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강론을 준비하다가 문득 교황님께서 새로 펼쳐낼 ‘형제애’라는 글에 꽂혀 참으로 가족과 형제를 기리는 추석 한가위에 알맞은 글귀라고 여겨서 여기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번에 발표하는 문헌의 주제는 ‘형제애 그리고 사회적 우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들’이란 누구인가? 이에 대해 내밀하게 밝히는 성인의 대답을 그의 유언의 시작 부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언에서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끄심으로 그가 역겨워 했던 나병환자들과의 만남 이후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형제들을 주셨지만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거룩한 복음의 형태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들은 하느님의 선물과 같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이었으며, 고통 없는 선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인이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도록 이끌었으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우리의 ‘전리품’이 아니며, 우리가 원하고 상상했던 모습도 아닐 수 있습니다. 형제들은 창조주의 살아있는 작품이며, 그분의 자유로 우리 각자에게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형제들은 주어지는 이들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택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형제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뿐입니다. 그들의 약함과 다양성까지도 말입니다. 그 차이 혹은 가끔은 불협화음은 결국 주님만이 조화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했던 것처럼 “조화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명확히 드러나고 그의 지상여정의 마지막 유언에서 확인되는 것이 ‘형제애’입니다. 성인에게 형제애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이며 인생을 변화시킨 체험입니다. 이 사실과 함께, 그 출처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이 사실과 함께,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한 자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있어서 형제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모두 형제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공통된 사랑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면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친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벨을 죽인 이는 친형이었습니다. 카인은 자신의 눈을 닫아버린 미움 때문에 동생을 살해했고, 아버지의 사랑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동생조차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형제애’는 ‘정적인’ 선물, 곧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형제애는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커집니다. 그리고 언제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형제들과의 관계는 ‘길’, 곧 ‘친교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시작하는 길’을 걷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프란치스코 성인으로 하여금 그의 형제들과의 만남을 겪고 난 뒤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나아가 그는 복음을 따라 사는 차원을 넘어 복음과 자신을 일치시켰으며 거룩한 복음이 지닌 그 형태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근본적인 방법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애용하는 적절한 표현인 ‘진정제 없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주보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다른 이를 자기 자신처럼 돌보는 것은 복음선포를 위한 길이며 특별한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한 형제가 고립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모순이고, 증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성인에게 있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커질수록 형제들을 향한 사랑도 커졌으며, 그 형제들의 얼굴에는 하느님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안에서 사랑은 우주적 사랑으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애는 모든 피조물을 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태양을 형제로, 달을 자매로 불렀습니다. 8세기가 지난 지금, 이기주의가 불어나고 갖가지 형태의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은 형제애와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릅니다. 세상은 이것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형제로 맞아들이고자 했던 아시시의 가난한 성자의 증언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또 다른 한 명의 프란치스코(교황)와 함께 형제애의 길을 함께 걷자고 권합니다.

전문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명절의 고유명절인 추석 한가위를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바라며, 형제들과 행복한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은 추석 한가위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한가위



(다해) 루카 12,15-21; ‘19/09/13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추석 한가위를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오늘 부모님과 조상님들과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해주신 사회 각계각층의 의사와 열사들의 은덕을 기리는 이 추석 한가위에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조상님들께 제사를 드릴 때, 우리 조상님들이 우리 가문을 부흥시키고 커다랗게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 공을 기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인 면에서 볼 때, 완벽하고 훌륭하셔서 그분들을 공경하고 감사드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경하고 감사의 정을 표하며 떨어져 있는 이 순간에도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착하고 공부를 잘하고 능력이 특출 나며 사회에 헌신적으로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귀여워하고 아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 하느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맡기셨고, 우리 또한 열 달 배 아파하면서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님이, 우리 부부가, 우리 가정이 꼭 존경할만하고, 꼭 도움이 되며, 꼭 자랑스러워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주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고 우리가 선택하여 가꾼 가족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고 덮어주고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고 믿어주고 지지해주면서 성가정을 만들어 나갑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우리 가정을 이 지상 생애 동안 내 안식처요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함께 대화하며 고안해내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나갑시다.

이 추석 한가위에 성모님을 통하여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다같이 주 하느님께 청해봅시다.


우리 본당 신자 가정이 모두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가정의 모범이신 성 요셉과 성 마리아와 예수님이 서로 믿어주고 아껴주며 덮어주고 지지해주었듯이, 우리 가정도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가정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위해 다른 한 쪽 배우자가 희생해 주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함께 짐을 짊어지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서로가 다른 가정과 다른 배우자들을 바라보며 비교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서로 감사드리며 살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에게 고치라고 요구하기보다 부족해 보이는 점을 채워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서로의 자기 계발과 인격 성숙을 위해 자발적으로 배려하며 기여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가정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용서하며 지지해주고, 한마음으로 함께하면서 헤쳐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 요셉과 성 마리아를 본받아, 부부가 예기치 않은 일을 겪을 때마다 자기 가족에게 주어진 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명하여 가족을 지키고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 요셉과 성 마리아가 어린 예수의 인생을 인정하고 따랐듯이, 부모가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며 자녀의 부족해 보이는 결정도 지켜봐 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 요셉과 성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사랑하고 존중해 주었듯이, 자녀가 실패하여 배울 때까지 기다려주면서 끌어주고 함께하며 밀어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감싸 안고 보호하여 가정의 병풍이 되어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세상의 수많은 여인들 중에 자신의 아내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주 그 사실을 행동으로 표현하며, 아내와 가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내가 인생의 동반자임을 인정하여, 가정사를 아내와 함께 나누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수행해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내와 가족을 믿어주고 인정해주며 지지하고 감싸 안아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참 보호자요 담보자로서의 남편이요 가장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언제나 가족을 용서하고 받아주며, 조건 없이 믿어주고 지지하여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노동자 성 요셉처럼 인생의 선배로서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며 사회에서 자신이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는 모범을 드러낼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을 본받아 아내와 자녀의 어려움을 지켜봐 주며 기다려주고, 지지하고 북돋아주며, 변치 않는 가족의 뒷배가 되어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버지 성 요셉을 본받아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넓은 아량과 깊은 포용력을 갖추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내가 남편의 사랑하는 평생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하여, 남편을 굳게 믿고 존경하며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뜻대로 뜯어고치려고 하기보다 채워주려는 마음으로 함께 가정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성모님을 닮은 인자하신 어머니로서 온갖 궂은일과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언제나 남편과 가족과 함께하며 가족을 품어 안아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자애로우신 어머니 마리아를 본받아 남편과 가족이 사회에서 겪는 모든 피로와 어려움을 풀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가정의 귀염둥이요 자랑이 되어 가정이 화목하게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불완전한 부모의 부족함과 결점을 보고 알면서도 부모를 사랑하고 잘 따를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세상의 죄악에 때묻지 않고 맑고 활기차게 자라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허상에 현혹되지 않고 묵묵하고 충실히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부적절한 방법으로 쉽게 얻고 누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땀 흘려서 갈고 닦아 이루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와 위치에서 사회에 기여할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우리 아이들이 주 예수님께서 비춰주신 복음의 길을 충실히 밟아, 교회를 지키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지혜와 은총을 내려주소서.


주님, 우리 가정이 이 땅에서 주님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함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나감으로써, 마침내 마지막 날 주님 나라에서 우리 가족이 부모님들과 조상님들과 주님의 사랑받는 많은 영혼들과 다 같이,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광의 행복을 누리게 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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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시몬 부제님 강론

루카 12,15-21; 2018. 9. 24(월) 한가위

찬미 예수님,

오늘은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아무쪼록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먼저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실천하여 싸움보다는 웃음이 피어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우리는 “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풍성하다는 의미는 넉넉하고 많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에 대부분 사람들이 농사를 짓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풍성한 한가위는 ‘곡식이나 과일의 수확이 가득하길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즉, 풍년 기원 인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농사를 짓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돈벌이를 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그럼에도 인사말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풍성한 한가위’라는 것은 무엇을 기원하는 것일까. 이 때만큼은 먹고 살 걱정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넉넉하게 지낼 수 있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도 배불리 먹는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엘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4.26) 오늘날에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집에서 자길 바라며, 그렇게 되면 저는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 잘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먹는 것을 넘어서 모두 집이 있어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음식걱정, 집 걱정이 없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잘 살기 위한 바탕, 풍성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음식이 많은데 넘쳐나서 쓰레기가 되면 풍성하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집이 큰데 사람이 오가지 않으면 이 또한 풍성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풍성한 한가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심’을 말씀하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잘 살기 위한 바탕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루카 12,16) 그런데 그 다음에 그가 한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이 가진 곳간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헐고 더 큰 것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카 12,19)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재화만 늘리고, 자신만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려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가 재화는 있지만, 부유하다고 불리지 못한 이유는 그가 가진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생명까지도 하느님에게 온 것이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잊으면 내 주위가 황폐해지고, 기억하면 내 주위는 풍성해 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더 채우려는 욕심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풍성한 한가위가 되는 방법입니다. 단, 우리 중에 누구라도 바탕은 잘 마련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저 나눔이라는 마음 뿐 아니라,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자비를 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한가위 명절 연휴에 비단 어려운 사회복지 시설을 꼭 일일이 다 찾아다니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홀로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그리고 가족 없이 지내는 일가친척들에게라도 인사를 다님으로써, 외로운 예수님을 달래드리기로 합시다. 더 이상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은인들과 은사들에게도 안부 전화라도 하면서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나누기로 합시다. 풍성한 한가위가 되기 위하여 복음의 부자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낫을 휘두르시어 당신의 말씀이 잘 뿌리내린 이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묵시 14,13)

진정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비롭게 대해 주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한가위



루카 12,15-21; '17/10/04

한 30여년 전에 구로공단 근처의 어려운 본당의 보좌신부로 봉직하던 때였습니다. 하루는 아마도 명절 근처의 어느 날 본당의 성모회장님이 한복과 두루마기를 맞춰서 가져오셨습니다. 그 때 저는 그저 신부로서 검소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성모회의 한복 선물을 정중히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성모회장님과 임원들이 제가 선물을 거절했다고 울고 계시다는 소식을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수녀님의 간절한 청원을 못 이겨 한복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받기는 했지만, 제가 한복을 따로 입고 있을 일이 없어서, 착용을 차일 필 미루고는 옷장에만 걸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왕이면 새해와 한가위 명절 등 우리나라의 고유 명절 때 한복에 영대를 걸치고 미사를 봉헌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복을 입고 미사를 봉헌해왔습니다.

작년 추석날은 옛날에 비해 온도가 무척 올라가서 그런지 몹시 더워서, 한복은 벗고 두루마기만 입어도 5분 내에 땀이 쏟아져서 그냥 수단만 입고 한가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올 추석이 다시 다가오면서 인터넷에서 값싼 두루마기를 찾다가, 본당 수녀님과 사목협의회장단에서 안쓰러워하면서 새로 한 벌을 맞춰주셔서 오늘 입고 올라와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외국의 전통의상을 색다른 맛으로 바라보듯이, 외국인들도 우리나라 고유의상인 한복을 아주 신기한 모습으로 바라보며 감탄해마지 않습니다. 외국인들과 함께 국제모임을 할 때 가끔 한복을 입고 각 나라의 문화행사를 가지게 됩니다. 요즘 광화문 등지에 나가보면 한복을 입고 나들이를 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우리 신자들이 개인적으로는 다소 번거롭기도 하겠지만,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이나 성모의 밤, 순교자의 밤, 성탄 때 한복을 입고 미사를 봉헌하시는 모습을 보면, 주님께서 참 기쁘고 어여쁘게 바라 보시리라고 여깁니다.

명절 때마다 부모님과 은인들이 새롭게 맞춰준 옷을 입으면서 새사람이 됩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도 새사람이 되어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다 못해왔던 것, 지금까지 뭔가 자식으로서 어른으로서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미뤄왔던 일들을 이번 추석 한가위를 맞아 실행하여 새사람의 첫 걸음을 시작해 봅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추석 한가위에 무엇을 하고 놀았나 생각해 봅니다.

서민들은 '줄타기', '연날리기', '제기차기', '씨름', '소맥이놀이', '널뛰기', '농악' 등을 하면서 놀았고, 양반들은 '바둑두기', '시조·창하기', '자수놓기', '글씨쓰기', '가야금 연주', '투호놀이' 등을 하면서 여가를 보냈습니다.

여자들은 주로 '자수놓기', '그네뛰기', '널뛰기',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투호놀이' 등을 하였고, 남자들은 '줄타기', '고싸움', '소싸움', '씨름', '농악놀이', '바둑두기', '북놀이' 등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바둑두기', '장기두기', '씨름', '강강술래', '소싸움' 등을 했고, 아이들은 '비석치기', '연날리기', '윷놀이', '제기차기', '말타기놀이', '가마싸움', '팽이치기', '풀각시놀이', '구슬치기', '썰매타기', '달맞이' 등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놀이를 가나다 순으로 간단히 살펴보면;

‘가마싸움’은 일명 가마놀이라고도 하는 학동들의 놀이입니다. 추석전각 서당의 학동 중 대표를 뽑고 각기 가마와 기를 만들며 가마싸움 준비를 합니다. 15일이 되면 가마를 끌고 마을을 누비고 다니며 기세를 올리고 나서,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려가 가마를 부딪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 놀이입니다. 이긴 편에서 그 해에 등과가 나온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강강술래’는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와 도서지방에 널리 전승되고 있는 여성들의 집단놀이로서 주로 한가위 밤에만 놀아왔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정월 대보름밤을 비롯하여 달이 밝은 밤에 수시로 놀아온 놀이입니다. 이 놀이의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고대 농경시대의 공동 축제 때 노래를 부르며 춤추던 놀이형태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면서 점차로 변화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강강수월래를 의병술로 이용해서 왜적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돌아가게 했는데 그것을 계기로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져 내려왔다고 봅니다.

‘반보기’는 옛날 시집간 여자들이 시집살이하면서 마음대로 친정에 갈 수 없자,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날짜와 장소를 미리 정해서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하여 한나절 동안 회포를 풀었다고 합니다.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뜻으로 반보기랍니다. 또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어울려 지내기도 했답니다.

‘밭고랑 기기’는 추석 전날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나이 수대로 밭고랑을 기어가는데 이렇게 하면 그 아 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뜻으로 전라남도 진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기도 한답니다.

‘소멕이 놀이’는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가 진행됩니다. 멍석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 소의 형상으로 꾸며서는 그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 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하고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합니다. 거북놀이와 비슷하지만 개인이나 가정의 복락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이 놀이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깊이 들어 있습니다. 중부지방에 널리 퍼져 있으며 황해도 일부 지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올게심니’는 추석을 앞두고 잘 익은 벼나 수수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 기둥이나 대문 위에 묶어 걸어두는 것입니다. 이 것은 다음 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고,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 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올렸다가 먹었다고 합니다.

‘원놀이’는 음력 설이나 추석 명절 때 청 장년들이 하는 놀이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모의 재판 같은 성격의 놀이입니다. 한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은 백성이 되어 사건을 놓고 판결을 받는 놀이입니다. 경북 영양 예천 문경 등지에서 전해 내려오던 놀이이며, 안동에서는 주로 서당 학동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입니다. 여러분이 미사 때 부모님들과 조상님들을 기억하듯이, 형제 자매들을 기억하고, 이웃 사촌이라고 하는 이웃과도 즐거운 한 때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사회복지시설이나 주위에서 명절을 더 어렵고 힘겹게 보내는 이웃들을 돌보며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명절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하셔서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시온의 자손들아, 주 너희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너희에게 정의에 따라 가을비를 내려 주었다. 주님은 너희에게 비를 쏟아 준다. 이전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쏟아 준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요엘 2,23-24.26)

좋은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한가위



'16/09/15

여러분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여러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가셨습니까? 아버지를 그릴 때 기억나는 상황이나 사건이 있으신지요? 저희 아버님은 제가 어릴 때 장기놀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장기판에서 장기돌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며 운용하셨는데, 저는 장기를 잘 둘 줄 모라서 제 졸도 제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상이고 마고 잘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어떤 이에게는 가족과 일가친척 그리고 함께하는 이들이 선물이요 형제자매가 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원수요 짐이 되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살라고 보내주신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장기판의 돌처럼 도구가 되기도 하고 짐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5)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재산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 년 내내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습니다. 세끼는 다 똑같이 먹는데, 사람이 우리의 재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무도 우리에게 찾아 인사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었던 순간들이 우리의 기쁨이요 보람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추석 이 한가위, 전부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 친지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고, 여유가 있으면 어려운 이웃들과도 나눔의 기회를 가짐으로써 선심공덕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한가위



루카 12,15-21; '15/09/27

안녕하십니까?

교우 여러분, 한가위 명절을 축하드립니다.

메르스와 남북 군사대결의 갈등과 긴장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명절의 한가로움과 가족과의 단란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오는 휴식이라 더 소중하게 여겨지면서도 다시 또 빼앗길까 두렵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이 한가위 추수시기에 우리에게 새 곡식과 새 결실들을 주셨습니다. 그나마 이 결실이 기쁘면서도,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이 결실에 비해 나갈 곳은 하도 많아, 들어 온 것이 들어온 것인지 조차 불투명하고 불안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탐욕에 빠져들지 않도록, 이런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많은 소출을 거두고 나서, 더 큰 창고를 지어 새 곡식과 모든 재물을 모아 두고, 스스로에게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하고 위로했답니다.

그러자 주 하느님께서 이 부자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우리 중에 누가 부자입니까? 무엇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으면 부자입니까? 어쩌면 100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아무도 부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게 된 듯싶습니다.

오늘 한가위를 맞아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내가 어떤 결실을 거두었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가졌는가?

내 인생에 무엇을 다지고 모아 놓았는가?

한 가위 이 명절에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참으로 되새기고 싶은 글이 하나 있어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과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예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 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 것을 내 것이라고 하던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이 세상에서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고통인 것을...!

피할 수 없으면 껴안아서 내 체온으로 다 녹입시다.

누가 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합시다.

스스로 나서서 기쁘게 일합시다.

언제 해도 할 일이라면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합시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 쏟읍시다.

운다고 모든 일이 풀린다면 하루 종일 울기라도 하겠습니다..

짜증부려 일이 해결된다면 하루 종일 얼굴 찌푸리고라도 있겠습니다.

싸워서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누구와도 미친 듯이 싸우기라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조금 양보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낮춰 놓은 눈높이

내가 조금 덜 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 보다 더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 공간이 됩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정말 고마움과 감사함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다 들어 알고 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한가위 여러분의 축제에 진정한 보화를 쌓으시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주까지 저희는 교황님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살펴보았습니다. 회칙 끝머리에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바쳐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오늘 대자연의 축복과 결실의 명절인 한가위에,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다같이 바치며 이 명절을 지냅시다.


아버지,

전능하신 아버지의 손으로 빚으신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찬미하나이다.

모든 피조물은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현존과 온유로 충만하나이다.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

주님에게서 만물이 창조되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모 마리아께 잉태되시어

이 땅에 속하시며

인간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셨나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부활하신 분의 영광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살아 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성령님,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빛으로

이 세상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끄시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피조물과 함께하시나이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저희 마음 안에 머무르시며

저희를 선으로 이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


삼위일체이신 주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의 놀라운 친교를 이루는 분이시니

모든 것이 하느님을 이야기하는 세계의 아름다움 안에서

저희가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에 대하여

저희가 찬미와 감사를 드리도록 일깨워 주소서.

저희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적 일치를 느끼도록

저희에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사랑의 하느님,

이 세상에 저희에게 맞갖은 자리를 보여 주시어

저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는 존재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나이다.

권력과 재물을 소유한 이들을 깨우쳐 주시어

무관심의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공동선에 호의적이며 약한 이들을 도와주고

저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돌보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이 땅이 절규하고 있나이다.


주님,

주님의 힘과 빛으로 저희를 붙잡아 주시어

저희가 모든 생명을 보호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마련하여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아름다움의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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