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20/11/09 월요일

예전에 성전이라는 건물은 그냥 ‘기도하기 위한 집’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이 슬레이트이 집든지, 벽돌 집이든지, 경량식 철골조의 집이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성지순례를 하러 가서, 외관을 웅장하게 짓고 또 그 내부에 아름다운 그림들이 설치된 유명한 성전을 보러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많은 사람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생각 속에 떠나지 않는 기준은 ‘그 성전에서 또는 오늘 우리가 머물러 있는 이 성전에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진실하게 기도할까?’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반응을 보고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17절) 라는 성경구절이 떠올랐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십육 년이나 걸려 지은 성전을 향하여 덧붙이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성전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으면, 뭇 사람들이 저 높고 그럴싸해 보이는 집 안에, ‘하느님이 머물러 계신 것 같다.’ 라는 기대를 하고 많이 온다고도 합니다. 관광하기 위한 집인지 기도하기 위한 집인지 의구심이 들면서도, 결론적으로는 기도할 만한 공간이면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교우들에게 기도할 만한 환경과 공간을 꾸미는 것으로 성전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고 결국 그 안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진실성과 성실성이 그 성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기도가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기도로 그치지 않기를 겸허히 바랄 뿐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이 성전을 향한 우리 자세에 빛을 비춰 줍니다.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에제 47,1.9) 아울러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도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주님의 집에서 기도하며 주님 생명의 말씀을 마시고 새로 태어나,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과 그 말씀을 따른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 사람들을 죄악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구원의 주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합시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 '19/11/09 토요일

우리 성전 건물은 지난 1990년 5월 26일에 축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근 30년 된 건물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 성전에서 주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모두 몰아내시며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라고 이르십니다. 실상 성전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제사를 봉헌하거나 성전세를 내기 위한 환전 등으로 재료와 필수부속물들이었는데도, 주님께서는 비단 그것들을 이용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넘어서 주 하느님께 직접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바치기를 원하셨는가 봅니다. 그러시면서 이어 주님의 그러한 노력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발하는 유다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나리라는 의미로서의 성전을 이야기하신 것임을 제자들이 회상하게 됩니다.

저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인 오늘 주 하느님께 성전을 짓고 기도한 솔로몬의 청원을 되새겨 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의 눈을 뜨시고 낮이나 밤이나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겠다고 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구를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누구든지 이웃에게 죄를 짓고 자신에게 저주를 씌우는 맹세를 하게 되어, 이 집에 있는 당신 제단 앞에 와서 맹세하면, 당신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동하시어, 당신 종들에게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죄 있는 자에게는 그 죗값을 돌리시어 그의 행실에 따라 그 머리 위로 갚으시고, 의로운 이에게는 무죄 판결을 내리시어 그 의로움에 따라 그에게 갚아 주십시오.

그들이 당신께 죄를 지어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이 땅에 기근이 들 때, 흑사병과 마름병과 깜부깃병이 돌거나 메뚜기 떼와 누리 떼가 설칠 때, 적이 성읍을 포위할 때, 온갖 환난과 온갖 질병이 번질 때,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개인으로나 전체로나 저마다 고통과 슬픔을 느끼며, 이 집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무엇이나 기도하고 간청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 모든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당신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그들은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 사는 동안 언제나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의 길을 따라 걸을 것입니다.

이제 저의 하느님, 당신의 눈을 뜨시고 이곳에서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2역대 6,20-23.26-31.40) 그 외에도 솔로몬은 이방인들이 청할 때나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유배살이를 할 때에도 주님의 집을 향해 청하는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면서, 성전이 주님의 기도를 전하는 하나의 통로와 주님 축복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오늘 성전에 이렇게 와서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우리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고, 주님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어 나와 어려운 이웃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희생 봉사하는 사랑의 삶을 살기로 다짐합시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 '17/11/09

여러분 성당에 오면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기쁨을 누리고 계신지요? 성당에 오셔서 평화의 안식을 누리고 계십니까? 성전에 오셔서 무엇을 어떻게 할 때 그 기쁨과 안식을 누리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천사가 에제키엘 예언자를 데리고 성전 오른쪽으로 데리고 가서 생명의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8-9.12)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신자들과 친교를 누릴 때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받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와서 신자들 사이에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성전에 와도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행사만 참여하고, 그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샘물을 받아먹지 못해 생기를 찾지 못하고 목말라하고 힘겨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그 물을 받아 생기가 돋고 새롭게 살게 됩니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와 전례에 참여하며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순간에, 성찬의 전례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힘을 얻는 순간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성체의 힘으로 현실에서 실천하고 이룰 때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새 생명을 누리기 시작하고, 그 새로운 생명으로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며 생생이 활동하실 때 우리는 새 생명을 얻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 '16/11/09

‘기억의 정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했던 것들, 그중에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고 기억하기조차 싫은 것들, 우리 마음 속 깊이 상처로 남아있는 것들이 가끔은 우리 일상의 선택을 좌우하기도 하고 신앙생활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순수하고 겸허하고 온전히 충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모든 아픈 경험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경험세계에서 한계라고 느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초월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무한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도록 해주십시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 '14/11/09

제가 도농 복합 도시에서 첫 주임사제를 할 때입니다. 처음 부임해 보니, 성전은 상가 5층에 있었고, 사제관은 5분여 거리의 아파트에 있었습니다. 상가 성전과 아파트 사제관을 출퇴근하면서 느낀 점은, 사제는 성당 구내, 그것도 성전의, 성체 근처에 살아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1년 만에 조립식 성전을 짓고 조립식 사제관에 누워 첫날밤을 지내는데 그렇게 편안하고 안심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본당 수녀님이 중고등부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참 의외였습니다. 아이들이 “전에 신부님이 아파트 사제관에 계실 때는 매일 가서 라면도 끓여 먹고, 떡복이도 해 먹고, 삼겹살도 구워 먹었는데, 신부님이 성당 사제관에 들어가시니까, 전처럼 쉽게 찾아 갈 수도 없고, 들어가도 왠지 부담스러워요!”

저에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저나 성전 건물은 생겨서 기뻤지만, 학생들이 보기에게는 자신들의 집과 구조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니까, 뭔가 생소하고 거리가 느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이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성전으로 걸어가고,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함께하던 그 많은 시간이 생략되었고, 또 주일학교 때만 보고 나서, 저는 성전의 사제관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파트 집으로 따로 따로 떨어져 가다 보니까 그만큼 만나는 시간도 줄어들어서 거리가 느껴진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나서 주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1열왕 8,28-30[4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솔로몬 대왕이 짓던 취지와는 정반대로 인종별, 성별 차별과 물질로 가득 차버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요한 2,14-16)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부당한 폭력을 일으키는 것으로 취급하며, 반발하는 유다인들에게 선언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훗날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해설합니다.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21절)

루카 복음 19장 4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이사 56,7) 라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며,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대로 ‘강도들의 소굴’(예레 7,11)이 되어버린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성전이 건물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 속에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과 사랑해 주시는 마음과 정신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라는 것도. 사도 바오로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성전은 건물로 짓고 그 안에 들어가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짓는 교회 공동체가 성전이며,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인격적으로 살아 숨쉬도록 초대하는 기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성전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성전에 가서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이가 (들어가) 기도하는 곳이 성전이 됩니다.

기도하러 가는 곳이 성전이 아니라, 기도하는 이가 주님과 함께하는 순간과 공간이 성전입니다.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 구성원 서로가 서로의 삶 속에서 성령께서 살아 움직이고 계시며, 성령께서 그의 삶을 통해 어떻게 움직이고 계신지를 발견할 때, 비로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공동체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19) 그리고 그 때 비로소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본질인 사랑과 사랑의 또 다른 말인 선교를 이룹니다.

우리가 살면서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예상하지 않았던 일을 겪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해주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전에 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드는 신자들이며, 이 성전은 주님께서 머무시는 집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와서 주님께,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청하고, 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을 통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고, 또 그렇게 되어 주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기를 청한다면, 우리는 이 성전을 하느님 나라로 만드는 제자들이며, 주님의 영이 이 성전에 머물러 우리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이 성전에 와서 주님께 간절히 청하고, 그렇게 청해서 얻은 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누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을 우리 삶 안에 모시게 되고,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이 땅에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여,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성되는 데 기여하는 주님의 진정한 사도들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불신과 질시와 원망과 죄악으로 가득한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에서 부활하시어 우리 공동체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때가 이루어져, 이렇게 기도하는 여러분을 기다리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23.34)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 '13/11/09

뉴스를 보면 세상에 사건 사고가 정말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건 사고를 제쳐 놓고서라도, 병원에만 가도 병실마다 환자로 넘쳐나고 있다는 안타깝고 안쓰러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모신심미사를 봉헌하며 복음에 카나의 혼인잔치 기사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성모님은 예수님께 세상에서 벌어지는 더 거창하고 절박한 상황에 대해 청하지 않으시고, 혼인잔치에서 하필 술이 떨어졋다는 사실을 말씀하실까? 적당히 반주나 하면서 마치면 될 것을 술잔치를 벌이듯이 그렇게 간절한 것이었을까? 그것도 예수님의 첫 기적사화로 길이 남을 사건이 되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저 멀리 그리고 더 절박한 사회적인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각자의 삶에서 지금 당장 그 자리에서 필요한 것을 청하고 또 돌봐주시나 봅니다. 그렇게 보면, 각 사람에게서 문제가 사라지면, 세상에 평화가 올지도 모르겠지요... 오늘 예수님의 첫 기적 사화를 읽으며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의 실질적이고 요긴한 필요들을 주님께 청해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요한 2,13-22 : '03/11/09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그저 물건을 사고 파는 곳으로 바뀌어 버린 것을 보시고 한탄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46년이나 정성들여 지은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시며, 사흘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와서 얼마짜리 어떤 예물을 사서 바칠까 하면서 고르고 흥정하는 행위보다,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더 원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변화되고 새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 인간을 다시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 다오."(호세 6, 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 9장 13절과 12장 7절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제사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녀가 되도록 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1요한 2, 2)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을 헐어버리듯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당신 자신을 죽이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성전 곧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의 영이 살아있는 성전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성전입니다. 교우들이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뭉친 성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건물을 세운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말은 우리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 안에 주님을 모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함께 모여 미사를 드릴 때 주님께서 내려오시고,

우리들이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주님께서 들어주시고,

우리들이 함께 모여 복음을 읽으며 계획하고 실현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함께해주셔서 기적같이 결실을 맺음으로써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게 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을 발견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드릴 때 주님을 만나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교우들과 함께 기도할 때 주님께서 내려오시고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느끼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구역모임과 단체에서 복음을 읽고 계획하고 실현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고 결실을 맺어주신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러기에 우리가 짓는 건물은 주님의 성전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성전을 지으려면 전보다 더욱 더 간절하고도 정성스럽게 꾸준히 기도하여야 할 것이며, 더욱 더 깊이 복음을 읽고 우리가 읽은 복음을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또 우리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 품어 안음으로써 우리가 하나되고,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우리 모임에 정말 오고 싶어서 기꺼이 오시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성전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즉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룰 때 비로소 건축가들이 짓는 성당 건물이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아멘.




라테라노 성전 봉헌축일



요한 2,13-22 : '97/11/09

어제 동생 수녀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동생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빠가 점점 다른 신부님 들과 똑같애져! 다른 신부님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은 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 제게 자극을 주기 위 해 동생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친절하기만 하던 오빠가 이젠 바쁘다고 잘라 말하기도 하고, 점점 권위주의적으로 바뀌고 있어. 많이 상처받았나 봐!" 저는 동생의 말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악에게 굴 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로마 12,21) 라고 하시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사제란 무엇일까요? 사제란 주님처럼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고, 사 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일이 바로 사목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은 주님이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고, 그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분이 바로 우리 인간의 쓰레기 같은 죄 를 대신 짊어지고 감싸주고 씻어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거룩함은 그냥 그렇게 티하나 없이 깨끗하고 빛처럼 환히 빛나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 사랑에 있고 그렇기에 그 사랑이 환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얼마나 깨끗하고,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믿는 우리 신자 삶은 경제적으로는 내가 검소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만족하고, 남 은 시간과 여력과 재력을 이웃의 구원을 위해 봉헌하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과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이 진정한 교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삶을 따르는 우리의 노력은 벽돌을 쌓아 성당 건물을 짓는 노력 이상으로 진실한 주님의 몸을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와 온갖 생물들을 살리게 되"(에제 47,1.9 참조)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서 사람들은 생명을 얻고 주님의 모습을 찾고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