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1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순 시기 담화요약


하느님 말씀은 선물입니다. 타인은 선물입니다.

(가해) 마태 5,17-37; 17/03/0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는 부활의 파스카, 곧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분명한 목적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시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회개를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사순 시기는 교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성화의 도구, 곧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 삶을 깊이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모든 것의 바탕이 됩니다. 저는 특히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보겠습니다(루카 16,19-31 참조). 이 이야기는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실천하여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해 주며, 우리에게 진심어린 회개를 권유합니다.

1. 타인은 선물입니다.

이 비유는 두 주요 인물들의 소개로 시작되는데 가난한 이가 훨씬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다시 일어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누워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기꺼이 배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몸은 종기투성이였고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습니다(루카 16,20-21 참조). 이는 모욕당하고 가련한 사람의 매우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그 가난한 이의 이름이 라자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훨씬 더 극적입니다. 약속으로 충만한 이 이름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현실 상황에서는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았지만, 하나의 선물, 곧 매우 소중한 보화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사람입니다.

라자로는 우리에게 타인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비유는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 시기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때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생명은 선물이기에 환대와 존중과 사랑을 받아 마땅합니다.

2. 죄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이 비유는 부자가 어떤 모순에 빠져있는지를 신랄하게 보여줍니다(루카 16,19 참조). 가난한 라자로와는 달리 그는 이름도 없이 그저 “부자”라고 불립니다. 그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루카 16,19 참조). 우리는 그에게서 죄에 따른 타락을 극적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1티모 6,10)라고 말합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타락의 근원이며, 시기와 갈등과 의심의 원천입니다. 돈은 결국 우리를 지배하여 포악한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돈은 우리가 선행을 하고 타인과 연대하는 데에 수단이 되지 못하며, 사랑을 용납하지 않고 평화를 방해하는 이기적 논리로 우리와 세상을 옭아맵니다.

또한 이 비유는 부자의 탐욕이 그에게 허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부자는 자신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를 타인에게 과시하면서 자신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의 겉모습은 내면의 공허함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의 가장 저급한 단계는 자만입니다. 부자는 마치 임금이라도 된 듯이 옷을 입고 신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이 언젠가는 그저 죽을 운명에 놓인 것을 잊습니다. 부에 대한 사랑으로써 타락한 자들에게는 자기 자신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에 대한 집착은 일종의 맹목을 낳는 것입니다. 부자는 굶주리고 상처투성이인 채로 모욕당하여 지쳐 누워있는 가난한 이를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물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이 돈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3. 하느님 말씀은 선물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에 관한 복음은 다가오는 부활절을 우리가 잘 준비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겪었던 것과 매우 유사한 체험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제는 우리의 이마에 재를 얹으며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는 결국 모두 죽었고 이 비유의 중요한 부분은 저승에서 진행됩니다. 이 두 사람은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1티모 6,7)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저승의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게 됩니다. 부자는 아브라함과 긴 대화를 나눕니다. 부자는 자신이 하느님 백성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아브라함을 “할아버지”(루카 16,24.27)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소한 표현이 그의 삶을 훨씬 더 모순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때까지 부자는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부자의 삶에는 하느님을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신은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초를 당하면서 비로소 라자로를 알아봅니다. 부자는 그 가난한 사람이 약간의 물로라도 자신의 고초를 덜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가 라자로에게 요청한 것은 그가 [세상에서]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것과 유사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저승에서 일종의 정의가 회복되어 [세상의] 삶에서 나빴던 것이 좋은 것으로 보상됩니다.

이 비유는 계속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부자는 자신의 아직 [세상에] 살아있는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경고해 줄 것을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라고 응답합니다. 이에 부자가 반론을 제기하자 아브라함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이렇게 하여 부자의 본래 문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부자가 저지른 악행의 뿌리는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것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결국 더 이상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자신의 이웃을 경시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있는 힘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켜 그 사람이 다시 하느님을 향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이라는 선물에 우리의 마음을 닫아 버리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선물에 마음을 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과 성사와 우리 이웃 안에 살아 계십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하는 길을 가리켜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이라는 선물을 새롭게 찾고, 우리를 눈멀게 하는 죄에서 정화되고, 어려운 형제자매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참된 회개의 여정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세계 곳곳에 있는 많은 교회 기관들이 주관하는 사순 행사에 모든 믿는 이가 함께하여 이러한 영적 쇄신을 드러내며 하나의 인류 가정 안에서 만남의 문화를 촉진할 것을 권유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도록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나약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의 문을 열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온전히 체험하고 증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사순 제1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순 시기 담화요약


희년 여정에서의 자비의 활동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다해)루카 4,1-13; 16/02/14

1. 복음화 되어 복음화 하는 교회의 모습이신 마리아

하느님 말씀의 경청, 특히 기도하며 하느님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을 향하여 선포된 말씀으로, 특히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선포를 직접 체험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을 들으신 마리아께서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신 자비를 예언적으로 노래합니다. 요셉과 약혼하신 나자렛의 처녀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완전한 모습이십니다. 처녀이신 마리아께서 잉태하시도록 하신 성령의 힘으로 교회는 복음화 되었고 지금도 복음화 되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전통에서 자비는 이미 어원적 차원에서 히브리어 라하밈(rahamim)과 헤세드(hesed)와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라하밈은 모태를 뜻하고 헤세드는 혼인 관계와 친척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관대와 충실과 연민이 넘치는 선함을 뜻합니다.

2.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계약인 자비의 역사

하느님 자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역사에서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비로 충만하시고, 깊은 온유와 연민으로 당신 백성을 대하실 준비가 늘 되어 계십니다. 특히 백성의 불충으로 계약 관계가 깨어져 정의와 진리로 더욱 견고한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할 때에 그러하십니다. 여기에 참으로 놀라운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께 당신의 한없는 자비를 쏟아 부어 주시어 그 아드님께서 강생하신 자비가 되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셔마(Shema)로 모든 유다인에게 요청되는 하느님께 온전히 귀 기울이는 것을 체현하십니다. 이 셔마는 오늘날에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이것은 바로 사도들의 케리그마(kerygma)의 살아있는 핵심이며, 그 안에서 하느님 자비는 중심적인 근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이며, 첫 선포인 것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가 거듭 들어야 하는 것이고, 교리 교육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 모든 단계와 시기에 언제나 우리가 거듭 선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죄인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저질러 당신을 등지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에게조차도 다가가시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당신 신부의 완고한 마음을 달래고자 하십니다.

3. 자비의 활동

하느님 자비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 자비는 인간이 충실한 사랑의 경험을 통하여 자비로워질 수 있도록 합니다. 하느님 자비가 우리 저마다의 삶을 비추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의 전통에서 자비의 영적 육체적 활동이라고 불리는 것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도록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기적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우리 이웃을 육체적 영적으로 도와주고자 하는 일상의 구체적 활동으로 신앙이 드러나는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비의 육체적 영적 활동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는 가난이라는 비참함에 무뎌진 우리의 양심을 다시 일깨워 주고, 또한 복음의 핵심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가난한 이들 안에 있기에, “고문당한 이들, 상처 입은 이들, 채찍질 당한 이들, 굶주리는 이들과 난민들의 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알아보고 만지며 정성껏 돌보아야 합니다.” 흠 없는 어린양의 수난이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기막힌 신비입니다. 이는 거저 주시는 사랑의 불타는 떨기로 우리는 그 앞에서 모세와 같이 신을 벗을 수밖에 없습니다(탈출 3,5 참조). 가난한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으로 고통을 받는 우리의 형제자매일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죽음만큼 강한 이러한 사랑 앞에서는(아가 8,6 참조),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가 가장 가난합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라고 여기지만 사실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입니다. 이는 그가 죄의 노예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죄로 그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또한 불쌍한 거지일 뿐이라는 깊은 의식을 억누르는 데에 이용합니다. 그의 권력과 부가 크면 클수록, 이러한 무분별한 기만도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문 앞에서 구걸하는 라자로를 알아보지 않으려고 하는 지경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루카 16,20-21 참조). 그런데 가난한 라자로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의 회개를 간절히 바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라자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만 우리가 어쩌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회개의 기회입니다. 이러한 무분별함에는 종종 우리가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오만한 망상이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악마적인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창세 3,5 참조)라는 생각이 사악한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망상은 20세기의 전체주의 체제들과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사고와 과학기술의 이념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정치적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무의미한 존재로 여기고 인간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시켜 버립니다. 이러한 망상은 또한 배금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그릇된 발전 모델에 관련되는 죄의 구조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이는 부유한 개인과 사회가 가난한 이들의 미래에 무관심해지도록 하여 그들이 문을 닫아걸고 가난한 이들을 보는 것조차 거부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이 희년의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자비의 활동을 실천하여 우리의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우리는 자비의 육체적 활동을 통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찾아 주어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만집니다. 또한 우리는 조언, 교육, 용서, 권고, 기도와 같은 자비의 영적 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자비의 이러한 육체적 활동과 영적 활동은 결코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가난을 통하여 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만지며 자신도 불쌍한 거지임을 자각하는 은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에 나온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도 이 길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품에 안기고 과분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이들을 위해서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식과 권력과 부라는 우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무한한 행복과 사랑에 대한 갈망은 오직 이러한 사랑으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과 권력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의 문을 끝까지 열지 않으면 결국 그에 대한 심판을 받아 영원한 고독의 심연이라는 지옥에 빠지게 될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다음과 같은 간절한 말은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그러한 주의 깊은 경청을 통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신랑의, 죄와 죽음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기념할 준비를 매우 잘하게 될 것입니다. 신랑께서는 당신께서 오시기를 바라는 당신의 신부를 깨끗하게 하여 주고자 하십니다.

회개하기에 매우 좋은 이 사순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거저 주어진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을 접하시고는 당신의 비천함을 가장 먼저 깨달으시고(루카 1,48 참조) 당신을 주님의 겸손한 종이라고 하신(루카 1,38 참조) 동정 마리아의 어머니다운 전구를 통하여 이를 간청합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사순 제1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순 시기 담화요약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야고 5,8)

(나해) 마르 1,12-15; 15/02/22

사순 시기는 온 교회와 모든 공동체와 신자에게 쇄신의 때, “은혜로운 때”(2코린 6,2)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가 멀어질 때 우리를 애써 찾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지내고 편안할 때, 잘 지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무관심 속에 빠집니다. 이 담화에서 제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무관심의 세계화입니다. 이웃과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무관심해지지 않고 쇄신을 위하여 세 가지 성경 구절을 묵상할 것을 제안합니다.

1.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 - 교회

하느님의 사랑은 교회의 가르침과 그 증언을 통하여 무관심이라는 사슬을 끊어버립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에 좋은 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성사들을 받을 때, 특히 영성체를 할 때에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체이기에 무관심이 몸 안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사를 공유하며 이 은사는 다른 이들을 위하여 나눕니다.

2.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 참조) - 본당과 공동체

이 모든 것은 우리 본당과 공동체의 생활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상 교회와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사랑으로 무관심을 이긴 공동체가 됩니다. 천상 교회의 성인들은 우리의 여정에 늘 함께 합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 지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고통 받고 신음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승리에 대한 천상 기쁨은 완전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신을 벗어나 가난한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함께하라는 부르심을 받아 파견됩니다. 침묵하지 않는 사랑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이웃 안에서 형제자매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자매가 지닌 모든 것은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한 선물입니다. 우리 본당과 공동체가 무관심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자비의 섬이 되어야 합니다.

3.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야고 5,8) - 모든 그리스도인

우리는 무관심의 유혹을 받고 있으며, 자신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기에는 무능력하다고 느낍니다. 이 두려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의 일치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의 힘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3월 13일과 14일에 ‘주님을 위한 24시간’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선 행위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한 인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때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고통은 회개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형제자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겸손되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혼자 힘으로 세상과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사악한 유혹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무관심과 혼자 힘으로 충분하다는 우리의 자만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열려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형제자매에게 다가가도록 사랑의 길로 이끄시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거저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이 사순 시기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께 이렇게 간청하고자 합니다.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는 굳세고 자비로운 마음, 세심하고 너그러운 마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무관심의 세계화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사순 제1주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사순 시기 담화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야고 5,8)

(나해) 마르 1,12-15; 15/02/22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온 교회와 모든 공동체와 신자에게 쇄신의 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혜로운 때”(2코린 6,2)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주시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우리 저마다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이름까지도 알고 계시고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가 그분에게서 멀어질 때 우리를 애써 찾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 지내고 편안할 때 곧잘 다른 사람들을 잊어버리고(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결코 그러시는 일이 없으시죠), 그들의 문제와 고통, 그들이 당하는 불의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은 무관심 속에 빠지게 됩니다. 내가 비교적 잘 지내고 편안하면, 잘 지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관심이라는 이러한 이기적인 태도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무관심의 세계화를 논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맞서 싸워야 할 난제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사랑을 향하여 돌아설 때 역사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담화에서 제가 살펴보고자 하는 가장 긴급한 문제는 바로 무관심의 세계화입니다.

우리 이웃과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해마다 사순 시기에 우리는 목소리를 높여 우리 양심을 일깨우는 예언자들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성자의 강생과 지상생활과 죽음과 부활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 하늘과 땅 사이에 문이 영원히 활짝 열립니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성사 거행, 그리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참조)의 증언으로 이 문을 열어두는 손과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 안에 갇혀있어 하느님께서 세상으로 들어오시고 세상이 하느님께로 가는 이 문을 닫아버리곤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인 손이 거절당하고 치이고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내적 쇄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무관심해지지 않고 자신 안에 갇혀있지 않게 됩니다. 이 쇄신을 위하여 저는 세 가지 성경 구절을 묵상할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1.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 - 교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 안에 갇히는 무관심이라는 이 치명적인 사슬을 끊어버립니다. 교회는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교회의 가르침과 특히 그 증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한 것만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신의 선함과 자비, 곧 그리스도를 입혀주시어 그가 그리스도처럼 하느님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성목요일 전례의 발씻김 예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방법의 본보기가 되기만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발을 그리스도께서 씻어 주실 수 있도록 먼저 내어맡긴 이들만이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들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몫”(요한 13,8)을 나누어 받으며, 이렇게 하여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시도록 내어맡기며, 그렇게 하여 우리가 더욱 그분을 닮아가기에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성사들을 받을 때, 특히 영성체를 할 때에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갑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관심이 이 몸 안에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단 하나인 몸의 지체이기에 그분 안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이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26).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입니다. 이는 성인들이 교회에 함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가 거룩한 것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모든 은사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사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이들의 응답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이 거룩한 것들의 공유 안에서 모든 이가 그 어떤 은사도 자신만을 위하여 소유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나눕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위하여, 결코 우리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그분의 구원 계획에 열려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리기 때문입니다.

2.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 참조) - 본당과 공동체

우리가 보편 교회에 관하여 말한 모든 것은 이제 우리 본당과 공동체의 생활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 구조는 우리가 한 몸의 지체임을 체험하도록 해 줍니까?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고 나누는 한 몸입니까? 교회의 가장 약하고 가장 가난하며 가장 작은 지체들을 살펴보고 돌보는 몸입니까? 아니면 온 세상을 두루 사랑한다는 구실로 우리의 닫힌 문 앞에 앉아 있는 라자로를 보지 못합니까?(루카 16,19-31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 풍요로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가시적인 교회의 담장을 딛고 나아가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천상 교회와 함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지상 교회가 기도할 때 서로를 섬기며 선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이 공동체는 하느님 앞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완성에 이른 성인들과 더불어 우리는 사랑으로 무관심을 이긴 그러한 공동체와 함께 하게 됩니다. 천상 교회가 승리를 만끽하는 것은 이 세상의 고통에 등을 돌리고 홀로 즐거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무관심과 완고함과 증오를 단번에 물리쳤다는 사실을 이미 기쁘게 성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승리가 온 세상에 파고들 때까지 성인들은 우리의 여정에 늘 함께합니다. 교회 박사인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이 지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고통 받고 신음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승리에 대한 천상 기쁨은 완전하지 않다고 확신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결코 천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바람은 교회와 영혼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는 것입니다”(??서간집??, 254, 1897.7.14.).

우리는 성인들의 공로와 기쁨을 나누고, 또한 성인들은 우리의 투쟁과 더불어 평화와 화해를 위한 우리의 바람을 함께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성인들의 기쁨은 무관심과 완고한 마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둘째,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신을 벗어나 자신이 속해 있는 더 큰 사회의 생활에 참여하라는 부르심, 특히 가난한 이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함께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교회는 본성상 선교적으로, 자기 안에 갇혀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파견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아버지께 이끌기를 바라시는 분을 끈기 있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침묵하지 않는 사랑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아가는 길을 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사도 1,8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이웃 안에서 형제자매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받은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자매가 지닌 모든 것은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한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가 있는 모든 곳이, 특히 우리 본당과 공동체가 무관심의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자비의 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야고 5,8) - 모든 그리스도인

우리는 개인으로서도 무관심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전하는 소식들과 혼란스러운 영상들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 도움을 주기에는 무능력하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무기력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우리는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의 일치 안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의 힘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3월 13일과 14일에 온 교회를 통하여, 교구 차원에서도 행해지길 바라는 ‘주님을 위한 24시간’ 행사는 기도의 필요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자선 행위를 통하여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수많은 자선 기관들을 통하여 멀리 떨어져있든 가까이 있든 모든 이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한 인류 가족에 속한다는 것을 미약하나마 구체적으로 보여주어 다른 이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드러내기에 좋은 때입니다.

셋째, 다른 이들의 고통은 회개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들의 요구는 우리 자신의 삶이 불확실하고 우리가 하느님과 형제자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되이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고 우리 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마련하신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혼자 힘으로 세상과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사악한 유혹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무관심과 혼자 힘으로 충분하다는 우리의 자만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가 이 사순 시기를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양성할 기회로 삼기를 권유합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1항 참조).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나약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강하고 굳세며, 유혹자에게는 닫혀 있으나 하느님께는 열려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를 형제자매에게 다가가게 하는 사랑의 길로 이끄시도록 내어맡기는 마음입니다. 사실 이는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거저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를 위하여 이 사순 시기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께 이렇게 간청하고자 합니다.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Fac cor nostrum secundum cor tuum, 예수 성심 호칭 기도). 그러면 우리는 굳세고 자비로운 마음, 세심하고 너그러운 마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무관심의 세계화에 현혹되지 않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으로 저는 모든 신자와 모든 교회 공동체가 사순의 여정을 지내며 열매 맺기를 기도드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동정 마리아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사순 제1주일

(가해) 마태 4,1-11; 14/03/09

2014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사순 메시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이 됩시다(에페 4,22-24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을 빕니다.

우리는 다시 사순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거룩한 사순 시기는 죽음을 상징하는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으로 시작됩니다. 이 사순 시기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회개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일깨워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순 시기에 무엇보다 죄인들인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들의 삶 전체에 깃들어 있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로움의 손길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되찾는 은총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번 사순절 메시지에서 “도덕적 결핍은 사람들을 죄악의 노예가 되게 하고 자살 위험을 높인다”며 “이 같은 도덕적 결핍은 경제적 파탄을 일으켜 영적인 결핍을 초래,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사랑을 거부하게 만든다”고 우려하시며 무엇보다 “우리의 양심이 정의, 평등, 나눔에 귀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진정한 양심의 회복을 강조하신 것이며 이것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회개입니다.

사순 시기는 한마디로 참회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지난날의 잘못된 점을 겸손하게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회개란 하느님을 향해서 돌아가는 삶의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이 사순 시기에 회개를 통해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사순 시기에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회개의 구체적인 표현인 단식과 자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겸허한 뉘우침과 절제와 희생은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순 시기에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묵상하고, 탐욕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회개와 보속,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은 인간의 죄와 교만으로 물질만능주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섬기는 믿음이 없고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통하여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 회개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썩어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에페 4,22-24 참조).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주님의 수난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위해 생활 속에서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자선과 희생을 실천합시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서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배려하고, 할 수 있는 작은 선행부터 실천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한 기도와 참회,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갖고 사순 시기의 여정을 시작합시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사순 제1주일

(다해) 루카 4,1-3: 2013/02/17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창세 3,19 참조)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다시 인류 구원의 신비,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한마디로 ‘회개의 때’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오고 멀어졌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묵상하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순 시기의 첫날, 참회의 상징으로 머리에 재를 얹으며 한줌 재로 돌아갈 인간의 유한성을 고백합니다. 이 거룩한 예식은 우리 신앙인에게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전통적으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회개, 단식과 자선,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도록 권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새로운 모습으로 가다듬고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옛 생활에 젖은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이 되도록 합니다.(에페 4,22-24 참조) 또한 단식과 자선도 더불어 실천해야 합니다. 단식재는 죄와 욕정의 사슬을 끊고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 사순 시기의 단식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의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여 가난한 이들과 단식을 통해 모은 것을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2코린 8,1-5 참조) 그러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이 시기에 행하는 모든 신앙 활동의 목적과 근거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해’를 지내고 있는 지금,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사순절 메시지에서 “사순절은 신자 개개인에게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이겨내는 수단으로서 금욕과 자선이라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하며, 자비와 희생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이며,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현하지 않고 자신의 형제자매들에게 진정한 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중요한 면을 성공적으로 증진시키는 경우에서조차 자비가 없다면 모든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 된다”며 모든 신앙의 행위에 ‘사랑과 자비’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순 시기의 보속과 희생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외적이고 사회적’(전례헌장 제110항)인 의미를 지녀야 합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적극적인 자선과 희생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이번 사순 시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히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하고 있는 에너지 절약에 신앙인들이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낭비되는 전기와 가스 에너지가 없는지 확인하고, 에너지 절약을 습관화하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유한한 지구 자원의 절약을 위해 일회용품 사용 안하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에 동참하여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도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행동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 우리 자신의 회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 동안 하느님의 넘치는 은총을 체험하고 다가올 주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 깨어 기도할 수 있도록 복되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사순 제1주일

(가해) 마태 4,1-11; 11/03/13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 동안 여러분이 실천할 계획들을 하나씩 잡으셨나요? 언젠가 한 번은, “신부님, 우리 아버지 사순시기에 술 끊은 것 무효로 해 주세요.” 라고 청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잘 살려고 술도 끊고 노력하는데 왜 그럴까?’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가족들이 하는 얘기가 “우리 아버지가 술을 끊으면 괜히 화를 더 많이 내고, 집에 콱 틀어박혀 앉아서 어디 나가지도 않으시고 우울해하시니까 가족 모두가 다 우울해져요, 차라리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해 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순시기에 뭐하나 덜 하고, 좋은 것 하나 참는다고 자신도 고통스럽고 짜증스러워 이웃에게 더 힘들게 하면 아니 한만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기나 집안 어른이나 은사들에게 전화하고 방문하기, 소원해진 친구에게 먼저 연락하기, 가족에게 사랑 표현하기, 20분 먼저 일찍 일어나 남편이나 자녀 도시락 싸주기, 복지관 봉사하기, 이웃에게 웃으면서 말 걸기, 선교나 불우 이웃 돕기 후원하기, 군종, 교도, 사회정의, 환경, 생명운동, 고아원 후원하기, 사후 장기 기증하기 등등 가급적 적극적으로 뭐 하나 더 잘해서 자신도 뿌듯하고 이웃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더 좋은 결과를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올 사순시기 담화의 주제를 콜로사이서 2,12절에 나오는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되살아났습니다”로 잡으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례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며, 이 만남은 세례 받은 이에게 하느님 생명을 주고 진정한 회개로 불러 그의 전 실존을 형성시켜 줍니다.”라고 하시면서 사순시기를 주님 구원 은총을 체험하는 좋은 시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부활 성야와 세례를 연결시켜 왔다고 하시면서, “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위대한 신비, 곧 사람이 죄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동참하게 되며,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 하느님의 영을 받는 위대한 신비가 실현됩니다.”라고 하면서, 사순시기는 예비 신자 기간과 같은 여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비 신자들은 새로 나는 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세례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더욱 온전히 바치며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새롭고도 단호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날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을 꿰찌르는 말씀을 전해주시고, 우리는 그 말씀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우리 의지를 다지게 된다고 하십니다.

교황님은 아울러 사순시기 신앙생활의 3대 축이며 전통적인 실천인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적극적인 단식으로 하느님 사랑이 이웃사랑이 되게 하자고 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특별히 사순 시기 동안 자선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선 행위는 하느님의 우선권을 일깨우고 우리의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 돌려, 우리 아버지께서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지를 다시 깨닫고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을 날마다 실천하고자 그 말씀을 묵상하고 새기면서 소중하고 필수적인 기도 방법을 배웁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사순 시기의 여정은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필리 3,10) 우리 삶에서 깊은 회개를 이루게 합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의 나약함을 깨닫고 우리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해성사의 새롭게 하는 은총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향하여 결연하게 나아가는 은혜로운 때입니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는 날마다 더욱 헌신적이며 참되게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세례성사가 의미하고 실현하는 것을 체험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이러한 여정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신앙과 육신으로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 우리를 맡겨 드립시다.”고 담화문을 끝맺으십니다.

서울대교구장님이신 정진석 추기경님께서는 이번 사순시기에 마태오 복음 3,8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는 말씀을 주제어로 삼으셨습니다. 정 추기경님께서는 이 사순시기에 신자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길 빌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과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고 본받는 사순 시기에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라고 강조합니다.

교구장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일반적인 단식에 기도가 더해지는 특징이 있다고 하시며, “단식으로 육체와 정신을 맑게 비운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사랑의 실천을 위한 연대의 표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 됩니다. 또한 자선은 공동체의 일치를 누리는 기쁨의 열매를 선사합니다. 특별히 신앙인들이 행하는 자선은 이 세상에서 진정한 행복이 재물이 아니라 사랑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사순절을 어둡고 슬픈 시기라기보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기쁘고 즐거운 시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기쁜 마음이 넘칠 때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 역시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시며,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며 담화문을 끝맺으십니다.

여러분 이 사순시기에 여러분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획안을 잘 짜고 일상에서 꼭 실천하셔서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손 쉽게 할 수 있고 보람있는 일을, 가정이나 단체 등 공동체적으로 부담 없이 할 수 있으면서도 가치 있는 일을 잡아 실천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기쁘고 우리의 기쁨을 나누는 이들에게도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손에 주님 부활에 대한 희망과 그 희망을 실현하는 사랑의 증거가 맡겨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 삶에 희망과 믿음에 따른 사랑의 실천이 넘치게 하도록 합시다.

아멘.



사순 제1주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사순 시기 담화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태 9, 36)

06/03/0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자비의 샘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내적 순례를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이 순례 동안 주님께서 친히 가난하고 메마른 우리 마음에 함께 하시며, 부활의 강렬한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시편 저자가 말하는 “어둠의 골짜기”(시편 23,4)에서 악마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거나 우리가 하는 일에 헛된 희망을 안겨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여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 어른, 노인을 가리지 않고 괴롭히는 불행과 외로움, 폭력과 굶주림의 비참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어둠이 세력을 떨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저의 선임자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셨듯이, “악에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한계”가 있으니, 그것은 곧 자비입니다(Memory and Identity, 19면 이하). 저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올해 사순 시기 담화의 주제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는 복음 말씀을 골랐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오늘날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한 가지 주제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발전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연민의 ‘눈길’로 개인과 민족들을 계속하여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시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에 그들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계획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들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자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서라도 늑대들에게서 양떼를 지키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개인과 군중을 감싸고 당신 자신을 속죄의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어 그들을 모두 하느님 아버지 앞에 데려다 주십니다.

이러한 파스카의 진리로 밝혀진 교회는 우리가 완전한 발전을 이루어 나가려면 인류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을 그리스도에 비추어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의 물질적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일과 그들 마음의 깊은 바람을 충족시키는 일을 따로 떼어 생각하기란 어렵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더욱 분명해지고 절박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급변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사실은 한층 더 강조되어야 합니다. 존경하는 선임자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저개발과 같은 부끄러운 문제는 인류에 대한 모욕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 6세께서는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에서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저 보상도 받지 못하는 물질적 결핍”과 “지나친 자애심 때문에 윤리적 빈곤에 자신을 묶어놓은 사람들”, 그리고 “사유권과 권력의 남용, 노동자들의 착취, 부정한 상거래로 조성된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비난하셨습니다(21항). 그러한 악에 대한 해독제로서 바오로 6세께서는 “인권 존중, 청빈에의 노력, 공동 복지를 위한 협력, 평화의 염원”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고의 선과 그 선의 원천이요 극치이신 하느님을 인정하는 일”을 제시하셨습니다(21항). 이러한 맥락에서 바오로 6세께서는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선의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의 정신적 일치”를 제안하셨습니다(21항). 따라서 군중들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눈길’은 바오로 6세께서 “개인의 인간 전체와 전 인류의 완전한 발전”이라고 하신 “완전한 휴머니즘”의 참된 의미를 확인하도록 우리를 재촉합니다(42항). 이런 까닭에, 인류와 민족들의 발전을 위한 교회의 가장 큰 공헌은 단순히 물질적 수단이나 기술적 해결책을 제공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길러주시고 인간과 노동의 참된 존엄을 가르쳐 주시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선포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모든 문제들에 참된 응답을 줄 수 있는 문화를 증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끔찍한 빈곤의 문제 앞에서, 무관심과 이기적인 회피는 그리스도의 ‘눈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교회가 기도와 더불어 사순 시기에 특별히 제안하는 단식과 자선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눈길’에 맞출 수 있는 적절한 방법입니다. 성인들의 모범과 교회 선교 활동의 오랜 역사는 가장 효과적으로 발전을 지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소중한 지표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상호 의존 시대라 할지라도, 어떠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계획도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의 논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강생하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인 신앙을 실천하며, 그분을 본받아 이웃의 물질적, 영적 요구의 짐을 기꺼이 짊어집니다. 그들은 이를 마르지 않는 신비, 무한한 정성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신비로 여깁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아무 것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캘커타의 데레사 복자가 자주 말했듯이 가장 큰 가난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얼굴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다면, 문명은 견고한 토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 덕분에 교회 안에는 병원, 대학, 직업 교육 학교, 소규모 사업 등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자선 활동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사업은 복음 말씀에 감동받은 사람들의 참된 인도주의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다른 형태의 사회 복지 활동들을 훨씬 능가합니다. 이러한 자선 활동들은 인류의 참된 선에 초점을 두는 세계화를 이루는 길, 따라서 참된 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군중들을 보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처럼, 오늘날 교회는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이 모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발전에 기여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성패를 시험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은 종교의 자유입니다. 참된 종교의 자유란 단순히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기리는 자유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활기를 띠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참된 종교 가치의 중심적 역할, 곧 인간의 가장 깊은 관심에 응답하고, 개인적 사회적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윤리적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인식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지도자들의 정책을 평가할 때 사용하여야 할 기준입니다.

역사상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한 이들이 저지른 과오가 많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중대한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때, 흔히 그들은 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것이 먼저이고 그런 다음에 주변 사람들을 돌보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박한 요구들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외적인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교가 일종의 윤리주의로 전락하여 ‘행동’이 ‘신앙’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전임자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음 지적은 적절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단지 인간적 지혜나 행복을 위한 일종의 학문으로 깎아내리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세속화가 심화된 현대 세계에서 ‘구원의 점진적인 세속화’가 진행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인간의 선익을 위하여, 그러나 그저 수평적 차원으로 전락해버린 온전하지 못한 인간의 선익을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시러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 11항).

사순 시기는 우리 앞에 이러한 온전한 구원을 제시하며,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악을 이기시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바라보게 합니다. 거룩하신 스승이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귀의하며 고해성사를 통하여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깊이 바라보시고 군중에게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눈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는 또 회의주의에 굴복하지 않는 이들에게 신뢰를 회복시켜 주어 그들 앞에 영원한 참 행복의 전망을 열어줍니다. 전 역사에 걸쳐, 심지어 증오가 만연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의 사랑에 대한 빛나는 증언은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희망의 샘”(단테, '천국편'[Paradiso], 33, 12)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당신 아드님께 이끌어 주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사순 여정을 그분께 맡겨 드립니다. 특히 가난의 고통 속에서 도움과 지원과 이해를 간절하게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을 성모님께 맡겨 드립니다. 이런 마음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사도로서 진심어린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05년 9월 2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사순 제1주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사순 시기 담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 생명을 택하는 길이요 오래 잘사는 길이다.”(신명 30,20)

05/02/1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 시기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을 열고 기도와 참회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위대한 신비를 되새기기 위한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는 먼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에 더욱 경건히 귀 기울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을 수 있게 하는 금욕을 더욱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저는 신명기의 다음 구절이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매우 현실적인 주제를 여러분 앞에 제시하고 싶습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택하는 길이요 오래 잘사는 길이다.”(30,20)라는 성서 구절입니다. 이 말은 모압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님과 맺은 계약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며 한 말입니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그것은 너희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30,19-20). 하느님의 계약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미래에 대한 보증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 잡고 오래 잘사는 길이다”(30,20). 성서의 해석에 따르면, 노년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은혜와 자비를 입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장수(長壽)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여겨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번 사순 시기에 이 주제에 대하여 성찰해 보도록 권유하는 것은 사회와 교회 안에서 노인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더 깊이 인식하여, 노인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환대의 마음을 지니도록 하라는 뜻에서입니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오늘날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고 그 결과 노인들의 수가 증가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노년’ 층에게 더욱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노인들이 그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여 공동체 전체에 이바지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모든 신자, 특히 노인 문제가 두드러지는 서구 사회의 교회 공동체 신자들은 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노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2. 인간 생명은 삶의 모든 단계에서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할 귀중한 선물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계명은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인간 생명을 존중하고 증진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것은 병들었을 때에나, 몸이 쇠약해져서 혼자 살아갈 능력이 떨어질 때에도 적용되는 계명입니다. 늙어 가는 것과 그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변화를 신앙의 빛 안에서 평온하게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삶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십자가의 신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노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으며, 선의의 모든 사람들도 사순 시기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기여를 하도록 당부 드립니다. 그러면 많은 노인들이 공동체와 때로는 가족들에게조차 스스로를 짐이라고 생각하여, 외롭게 살아감으로써 세상과 단절되거나 절망하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노인은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을 여론에 환기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노인들이 사회생활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경제적 지원과 법률적 노력을 강화하여야 합니다. 사실 지난 십 년 동안 사회는 노인들의 요구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의학의 발달로 통증 완화 치료가 병자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과 함께 특히 장기 입원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3. 노년기에는 여가 시간이 풍부하여, 노인들은 이전에는 다른 절박하거나 우선시 되었던 문제들 때문에 제쳐 두었던 근본 문제들을 직시하게 됩니다. 최종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앎으로써 노인들은 본질적인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시간이 흘러도 소멸되지 않는 것들에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바로 이러한 조건 때문에, 노인들은 사회에서 각자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앞서 간 사람들의 유산에 기대어 살고, 자기 민족의 문화적 가치가 자신에게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한다면, 노인들의 지혜와 경험은 더욱 완전한 문명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여정을 밝게 비추어 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세대는 서로를 풍요롭게 해 준다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회개와 연대를 강하게 촉구하는 사순 시기는 올해 우리에게 모든 사람과 관련된 이 중요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도록 이끕니다. 우리의 형제이며 자매인 이들 노인들이 늙고 병들어 능력이 떨어진다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사고방식에 하느님의 백성마저 굴복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가정을 비롯한 모든 공동체가 노인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고 그들을 따뜻이 맞아 준다면, 공동체는 참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는 사순 시기 동안, 모든 공동체가 노인들을 사랑으로 이해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봅시다. 또한 “어미의 복중에서 나를 엮어 내시고”(시편 138[139],13 참조) “당신 모습을 닮기를”(창세 1,26 참조) 바라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리라는 것을 깨닫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하느님과 궁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자신 있게 죽음의 신비를 성찰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사순 시기 동안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모님께서는 모든 신자, 특히 노인들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삶의 궁극적 이유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하느님이신 당신 아드님의 충실한 종이신 성모님께서 안나와 요아킴 성인과 함께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에게 축복을 보냅니다!

바티칸에서,

2004년 9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순 제1주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2004년 사순 시기 담화

-"누구든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 5)

2004/02/2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거룩한 사순 시기는 재를 머리에 얹는 상징적인 예식으로 시작됩니다. 사순 시기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근본적인 회개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누구든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 5). 올해의 사순 시기 주제인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린이들의 상황을 되짚어 보게 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당신께 부르시며, 그들을 당신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본보기로 내세우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린이들이 우리 가정과 사회, 교회 안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 살펴보도록 촉구합니다. 어린이들은 또한 신자들이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짐을 나누어지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본받아, 순수함과 신뢰를 재발견하고 키워 나가도록 자극합니다. 아시시의 글라라 성녀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는 구유에 눕혀지시고, 가난하게 사시다가 십자가 위에서 알몸으로 돌아가셨다."(증언, 출처: 프란치스코회, 2841항)고 즐겨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순수하고, 삶을 즐기며, 자연스럽고, 신앙을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기"(삼종기도 메시지, 1994. 12. 18.) 때문에 어린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공동체가 두 팔을 벌려 가슴을 열고 어린이들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 5). 예수님께서는 "형제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곧, 고통받는 사람, 가난한 사람,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 이방인, 헐벗은 사람, 병자, 죄수들을 어린이들과 나란히 놓으십니다. 그들을 따뜻이 맞아 주고 사랑하느냐, 아니면 그들을 무관심과 경멸로 대하느냐에 따라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그런 사람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복음은 나자렛의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된"(루가 2, 52)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어린이가 되심으로써 우리의 인간적 경험을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 7-8). 열두 살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남아 계신 줄도 모르고 걱정스럽게 당신을 찾아 헤맸던 부모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 49).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대한 신뢰와 효심 깊은 순종으로 두드러졌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4) 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자주 강조하셨습니다(마태 18, 3; 마르 10, 15; 루가 18, 17; 요한 3, 3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어린이는 어린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거룩한 스승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제자들의 특별한 표상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 4).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것'과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는 주님께서 우리 시대에 당신 제자들에게 되풀이하여 강조하시는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자신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낮추는 사람만이 우리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3. 많은 신자들이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려고 성실히 노력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기꺼이 대가족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들, 자신들의 직업적 성공과 출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보다는 자식들에게 삶에 참된 의미를 주는 인간적 종교적인 가치들을 전해 주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또한 혜택받지 못한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모든 사람과, 전쟁이나 폭력, 식량과 물 부족, 강제 이주, 그밖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불의로 신음하는 어린이들과 그들 가정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노고를 깊이 치하합니다.

그러한 아낌없는 헌신과 함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린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른들의 이기심입니다. 성 학대, 강제 매춘, 마약 판매와 사용에 끌어들이기 등 어른들의 폭력으로 젊은이들이 깊은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강제 노동이나 전쟁터에 끌려나가는 어린이들, 가정의 붕괴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어린이들, 파렴치한 장기 매매나 인신 매매를 당하는 어린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가져온 비극과 그 참혹한 결과는 또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 대다수가 출생 때 감염되었다고 합니다. 인류는 그러한 끔찍한 비극 앞에서 결코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4. 이 어린이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러한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난처한 물음에 답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할 것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그러한 고통의 심연을 이해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립 2, 8)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짊어지셨고, 당신 부활의 찬란한 빛으로 그 고통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당신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한번에 영원히 죽음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사순 시기 동안, 우리는 가장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우리의 삶 전체에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는 파스카 신비를 다시 체험할 준비를 합니다. 성주간 동안 우리는 부활 성삼일의 상징적인 예식을 통하여 이 구원의 신비를 다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열렬한 기도와 참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무장하여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사순 시기 여정을 시작합시다. 특히, 이번 사순 시기가 우리 가정과 온 사회의 어린이들의 요구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은 인류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5.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하느님께 의지하고,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시다.

사순 시기 동안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칩시다.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기도를 바칩시다.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이고, 우리가 서로 형제자매임을 더 잘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8, 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우리 마음을 열기가 더욱 쉬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을 안고, 저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복이 가득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순 제1주일 서울대교구장 사순절 담화문

- 진리를 따라 생활하는 새 사람이 됩시다(에페 4, 24)

2003/03/09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극심한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다가올 부활 축제를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시기에 기도와 자선과 금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회개와 보속, 희생과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생활을 쇄신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가정과 사회, 세상과 인류 전체의 평화 증진을 위해서도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 노력하며 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순 시기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큰사랑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 16)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고 증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셨지만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 곳곳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무신론 사조와 물질만능주의, 생명 경시 사상과 이기주의 등이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각종 사고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은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얼마나 부실하고 허약한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무수한 희생자가 난 이번 참사는 유가족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모든 국민들에게도 큰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순 시기에 회개를 통해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죄를 뉘우치는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에페 4, 22-24).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회개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때 비로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사순 시기의 시작되는 3월5일 재의 수요일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평화, 특히 중동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단식할 것을 촉구합니다. 오늘날의 분쟁을 평화적이고 적절한 수단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결정의 혜안과 마음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모든 성모 성당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열렬한 묵주기도가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가정과 본당에서 온 인류의 공동선이 달려 있는 평화를 위한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당부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이 사순 시기에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마음 모아 은총을 간구합시다. 오늘날 북한의 핵과 관련된 문제는 한반도뿐 아니라 주변국가들과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하루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선의의 노력을 다하며, 아울러 하느님께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큰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평화의 모후이시며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께 특별한 도움을 간구합시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나라와 이 세상 곳곳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 진 석 대주교



사순 제1주일

2002/02/17


교황님 사순시기 담화문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우리는 핵심적인 신앙의 신비,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대한 장엄한 기념으로 나아가는 사순 시기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 사업을 묵상하도록 권고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구원 계획은 독생 성자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기꺼이 그리고 완전히 내어 주심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8) 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시려는 결심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구세주께서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시며 참으로 위대한 사랑의 선물을 확인해 주십니다.

회개를 위한 섭리의 시기인 사순 시기는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도와 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뿌리로 되돌아가 구원이라는 엄청난 은총의 선물을 묵상함으로써,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러한 구원의 신비를 묵상하도록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신 주님의 말씀을 올해 사순 시기 담화의 주제로 선택하였습니다.

2.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과연 누가 이러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 3,23-24).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생긴 통탄할 분열 상태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우리의 나약함을 굽어보시고, 오히려 그 나약함 때문에 더욱더 당신 사랑을 새로이 풍성하게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러한 무한한 자비의 신비를 선포하며, 인간을 단죄하기보다는 인간을 당신께 되돌리시어 당신과 친교를 맺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와 바람을 찬양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부활 주일까지 참회의 순례를 계속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한가운데에 이 복음 말씀이 울려 퍼지기를 빕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되새기는 이 사순 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음 속 깊이 그러한 위대한 선물의 신비를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의 온 삶이 바로 하느님 자비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시작과 놀라운 성장, 이것이 바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생명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인간을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생명은 선물이기 때문에 결코 소유물이나 사유 재산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의학과 생명 공학의 업적에 도취된 인간은 때때로 자기 자신을 창조주로 여기고, '생명 나무'(창세 3,24)에 손을 대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면서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과학 연구는 치하할 만하지만, 고통과 한계를 지녔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선물이며 소중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언제든 받아들이고 소중히 하며, 거저 받아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거저 내어 주는 선물입니다.

3. 사순 시기는 우리를 위하여 해골산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서 생명을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특별히 도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시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처럼 고귀한 선물을 그리스도인들은 기쁘게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고 하였습니다. 이 생명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사 거행, 복음 증거를 통하여 개인으로서든 공동체로서든 우리가 받은 생명에 성실히 부응함으로써 그 생명을 지속적으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거저 받았기에, 우리도 형제 자매들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요청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장 먼저 주어야 할 선물은 거룩한 생명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그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의 여정이 모든 신자에게 우리의 이 특별한 소명에 더 깊이 참여하라는 끊임없는 부름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줌으로써 '거저' 받은 생명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4. 바오로 성인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 아닙니까?"(1고린 4,7)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형제 자매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할 신자들의 의무는 더욱 절실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이기주의를 버리고 참된 복음적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 5,46) 세상은 이기주의와 사리 사욕에 바탕을 둔 인간 관계를 높이 사고 있어서, 흔히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을 부추깁니다. 모든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 별로 없더라도 장점과 단점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환영받고 사랑 받아야 합니다. 사실 그들의 시련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사랑을 더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교회가 수많은 기관들을 통하여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사랑을 증언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의 사도가 되고 사랑의 문화의 건설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매우 깊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가까이 다가와 있는 하느님 나라가(마태 10,5 이하 참조) 제자들의 아낌없는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전파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사도들은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으며, 사도들을 만난 사람들은 사도들을 위대한 메시지를 지닌 이들로 여겼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신자들의 선행은 신앙에 대한 징표이자 초대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 주었을 때, 그들의 선행은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이며, 생명과 바람과 사랑의 충만한 의미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베풀면서 이 사순 시기를 지낼 준비를 합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수많은 선물에 보답하는 것임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거저 줍시다!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필요로 하는 거저 줌의 증거를 보여 주기에 사순 시기보다 더 좋은 시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그 사랑은 이번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도록 촉구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랑을 증언해 주시는 전세계의 모든 평신도, 수도자, 사제 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어떤 처지에서 살아가든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사랑을 증언하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희망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께서 올 사순 시기의 여정에 우리의 안내자가 되시고 힘이 되어 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기도 중에 여러분을 사랑으로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히 날마다 자선 활동의 선봉에 서서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사도로서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순 제1주일

2001/03/04


교황님 사순시기 담화문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1.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마르 10, 33).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길을 떠나자고 초대하십니다. 그 길은 갈릴래아에서 출발하여 주님께서 구원 사명을 완수하시게 될 장소에 이르는 길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예수님의 지상 여정의 절정으로 제시하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스승을 따르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의 표본입니다. 또한 현대인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요청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특히 사순 시기에 이러한 요청을 하십니다. 사순 시기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깊이 참여하기에 알맞은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는 신자들이 삶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현대 세계에는, 복음에 대한 헌신적인 증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라는 벅찬 요구에 냉담하게 거부하거나 때때로 공공연히 반항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을 피상적으로 하여 하느님 말씀이 삶 속에 깊이 스며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해성사조차도 무의미하게 생각하고 주일 전례 참여는 단지 의무로 여기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순 시기에 우리에게 하시는 회개의 초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감동을 주는 전례 메시지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부활절로 인도하는 이 시기는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은혜로서, 우리 내부로 시선을 돌려 우리 안에 울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2. 일부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진리를 절박하게 직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영적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고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방해받지 않으려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어라."(루가 6, 27)하시는 말씀은 흘려버리거나 무시합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말씀은 받아들이기도 어려울뿐더러 삶에서 일관되게 실천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려면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욕을 받거나 상처를 입을 때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권유를 무시하고 자기 연민이나 복수 같은 심리 작용에 굴복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일상사는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인간적 쇄신과 사회적 쇄신을 가져오는 데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명백히 증명합니다. 이는 대인 관계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 인류를 괴롭히는 수많은 비극적 갈등은 때때로 종교적 오해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갈등은 민족들 사이에 증오와 폭력에서 비롯되는 상처를 남겨 놓았습니다. 이따금 한 민족 내에서 집단이나 파벌 간에 그러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따금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믿었던 사소한 분쟁들에 서글픈 무력감을 안고 다시 휘말려 들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의 사람이 구체적인 해결책을 계획하지도 않고 희생에 희생을 낳게 될 멈출 수 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말려들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평화에 대한 염원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원하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처럼 경종을 울리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무관심하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얼마 전 폐막된 대희년에 저는 교회와 교회의 자녀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소리 높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죄가 티없이 깨끗한 얼굴을 다소 어둡게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얼굴에서 악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신뢰할 때, 또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 길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 많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를 회복할 때 가장 잘 드러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억의 정화"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새로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다양한 차원에서 그러한 고백을 매번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도록 요청받습니다.

4.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함으로써 새로운 인간 관계가 가능해지고,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이 중단되며,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옥죄고 있는 악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화해를 추구하고 개인과 민족 간의 평화 공존을 희망하는 국가들에게는 용서받고 용서해 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 44-45). 주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울려 퍼지는 가르침은 얼마나 유익하고 풍부합니까! 당신을 공격하는 상대방을 사랑할 때, 상대는 적의를 풀게 되고 전쟁터는 상호 지원과 협력의 장소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민족, 온 인류와 관련되며, 특히 가정과 관련이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려 용서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기 자신에게 죄가 있을 때 화해하기는 이미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죄가 있을 때 화해하는 것은 부당한 굴욕으로까지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받아들이려면 내적 회개를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간질시키는 사람뿐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도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마태 5, 23-24 참조). 그리스도인은 부당하게 모욕을 받고 공격을 받았다고 느낄 때조차도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따름으로써 형제적 구원에 협력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시대에, 용서는 진정한 사회 쇄신과 세계 평화 증진에 점점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선포하면서, 교회는 서로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을 모든 인류의 영적 유산 안에 고취시켜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소 힘들지만 희망으로 가득한 방식입니다. 이 때 교회는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 당신을 향하는 사람을 결코 저버리시지 않는 주님의 도움에 의지할 줄 압니다.

5.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1고린 13, 5).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이 말씀에서, 사도 바오로는 용서가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고귀한 형태 가운데 하나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순 시기는 이 용서라는 덕의 의미를 더욱 깊게 새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성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 안에 살아가게 하며, 다른 사람을 적이 아니라 형제로 여기게 해 줍니다.

참회와 화해의 이 사순 시기에 신자들이 모든 인간적 차원을 망라하는 진정한 사랑의 표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는 그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라 5, 22 참조),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새로운 마음으로 물질적 도움을 주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마음은 관대한 마음입니다. 이 거룩한 사순 시기에, "베풂"은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단지 양심의 짐을 덜고자 남는 것의 일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고통스런 얼굴과 비참한 상황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최소한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만이라도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순 시기의 베품은 이를 행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또 형제 자매들과 친교를 맺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인 원한과 냉담함에서 벗어나 있을 때, 더욱 풍부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행동으로 친교와 연대의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요한의 말씀은 밝은 빛을 던져 줍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 17)

형제 자매 여러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을 설명할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험난한 길과 희생에 대하여 일러 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자기"를 버리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과 맺는 친교를 통하여"(그리스 교부 총서, 58, 619)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에 의지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6. 그러므로, 이 사순 시기에 저는 모든 신자에게 주님께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도록 권유하고 싶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은 주님의 자비를 새로이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선물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즐거이 또 아낌없이 받아들이고 그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1고린 13, 5-6).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모든 신자 공동체의 사순 여정에 자비의 어머니의 보호를 간구하며, 여러분 각자에게 사도로서 진심어린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사순 제1주일


서울대교구장 사순절 담화문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삼 천년기의 첫 번째 사순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주님의 부활을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40일 동안 준비하는 특별한 때입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수난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을 정화하며 기도와 선행을 실천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첫 설교에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르 1, 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참다운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밭에 익어 가는 곡식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셨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와 들에 핀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고 보살피면서 살리시는 하느님을 깊이 깨달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평생동안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큰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도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태 26, 39)라는 기도를 바치면서까지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사셨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1요한 4, 9)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그분의 은총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그분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생활 안에서 실천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을 하느님 나라처럼 구원된 모습으로 변화시키기를 권고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은 우리 주변이 더욱 따뜻해지고, 감사로운 자리가 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면, 눈앞의 이익과 안일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부정과 부패, 불신과 죄악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몫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결과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 무신론과 세속화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죄의식이나 자기반성 없이 부정과 부패, 사기와 거짓, 향락과 사치, 투기와 과소비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간, 계층간, 빈부간의 갈등과 대립이 점점 심화되는 가운데 정신적인 황폐를 겪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배운 삶의 방식은 다른 사람을 이겨야 하고, 많이 가져야 하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방식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며,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며,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낮추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사순 시기는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찾아 나서는 거룩한 여행과도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사순 시기에 회개와 기도, 용서와 화해, 자선과 금식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죄악에 물들었던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첫 자리에 두고 새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회개란 낡은 인간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는”(에페 4, 22-24) 것입니다.

이 시기에 강조하는 기도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인의 특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앙인이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그의 믿음은 약화되고 메마른 생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항상 새로운 힘을 얻고 세상의 온갖 유혹 속에서도 하느님의 방식으로 올바로 살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과 이웃, 일상적인 생활과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인 자선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재산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필요 이상의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몫일 것입니다. 자선은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베푸는 사람에게도 내적인 풍요로움을 안겨 줍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눔으로써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사순 시기에 신자들은 금식과 금육제를 지킵니다. 신자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절제하는 금식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고통과 사랑을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이웃이 겪는 고통과 아픔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구조 조정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모은 재화를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실직자나 노숙자, 북한 동포와 외국인 노동자 등과 나눔으로써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40일 후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축제를 맞이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순 시기를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금년의 부활축일이 갖는 의미는 각각 다를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축제에 온전히 동참하기 위해서 사순 시기에 기도와 회개, 자선과 금식을 통해 주님과 이웃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사순 시기의 여정에 참여하고 있는 교형 자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남북한에 있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축복이 골고루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1년 사순 시기를 맞이하면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 진 석 대주교



사순 제1주일

(나해) 마태 28, 20: 2000/03/12


사순 제1주일 교황님 사순시기 담화문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 2000년 대희년에 맞이하는 올해의 사순 시기는 회개와 화해의 시간으로 특별한 성격을 띱니다. 사순 시기는 사실상 회개와 화해 여정의 절정이며, 주님의 은총의 해인 희년은 모든 신자에게 이 여정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충실하고 새 천년에는 새로운 열정으로 그분의 구원의 신비를 선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원으로부터 감추어져 온 신비"(에페 3,9)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과 마주하도록 도와 주고,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성령의 구원 활동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2. 바오로 성인은,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상황을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에페 2,5 참조)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어 그 인성을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날마다 이러한 노예 상태를 경험하면서 자기 마음 깊이 죄가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마태 7,11 참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단과 개인을 잔인한 폭력의 희생자로 만들면서 그들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20세기의 커다란 비극들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의 죄는 때때로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강제 이주, 조직적인 민족 말살, 인간의 기본권 무시와 같은 행위들은 오늘날에도 인류를 모욕하는 비극들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는 온갖 형태의 기만과 증오, 살인, 거짓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그 희생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인류는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 비극적 상황은 바오로 사도가 사람들에게 외친 경고를 상기시켜 줍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로마 3,10; 시편 14,3 참조).


3. 죄의 어둠과 혼자 힘으로는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 앞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는 그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로마 3,2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던 어린양이십니다(요한 1,29 참조). 그분께서는 인간 생명에 동참하심으로써 인간을 악의 노예 상태에서 구하시고 인류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녔던 본래의 존엄성을 되찾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필립 2,8) 하셨습니다. 이러한 파스카 신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부활 대축일 부속가에서 노래하듯이, 생명과 죽음의 싸움은 생명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교회의 교부들은 악마가 전 인류를 공격하여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는 부활에서 오는 승리의 힘으로 죽음에서 해방된다고 단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죽음의 세력은 무너지고, 인류는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교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성령을 "첫 열매"(감사기도 제4양식)로 보내 주시어,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구원은 세상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과 인류, 사람들을 서로 화해시킵니다.


4. 희년은 성자 안에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신 성부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위대한 선물인 화해를 특별히 마음 깊이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따라서 올해는 그리스도인만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도 용서하시고 화해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지닌 쇄신의 힘을 경험하게 해줄 소중한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미온적인 사람과 의심하는 사람까지도 포함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보잘 것 없는 것과 그릇된 희망에 지쳐버린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충만한 생명에 이르는 길로 나설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0년 성년의 사순 시기는 탁월한 "자비의 때이며 …… 구원의 날"(2고린 6,2)이고, "하느님과 화해할"(2고린 5,20)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성년 동안 교회는 개인과 공동체 차원의 화해를 위한 다양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각 교구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러 갈 수 있는 특별한 장소들을 지정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또 고해성사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성지와 로마의 순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두 곳은 구원 역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역할 때문에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2천년 전 주님의 행로를 목격하였던 그 성지로 우리는 적어도 영적으로 순례를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요한 1,14)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루가 2,52).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9,35).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셨으며(요한 19,30 참조), 초기 교회에 성령을 가득 부어 주셨습니다(요한 20,22 참조).

저는 또한 바로 이 2000년 사순 시기 동안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었던 성지의 순례자가 되어 그리스도 강생 2000주년을 기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도로써 저와 동행하여 주시기를 부탁 드리며, 저 자신은 순례의 단계마다 교회의 자녀들과 온 인류를 위하여 용서와 화해를 청할 것입니다.


5. 회개의 길은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충만한 생활 곧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생활에 이르게 합니다. 이 세 가지 덕은 신비 안에 계신 하느님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대신덕"이라 하며, 대희년 준비 3년 동안 특별 연구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성년 거행은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덕들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의식적으로 실천하고 증언하도록 요구합니다.

희년의 은총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하도록 촉구합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의 선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날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바치며,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각자가 "예" 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각자의 "아멘"입니다.

유다인, 그리스도인, 이슬람교인 모두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고 명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릅니다. 신앙은 우리가 피조물 안에서, 사람들 안에서,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활동과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의 현존을 보여 주는 표징들을 발견하도록 도와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나 겉모습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 주는 저 초월성을 지향하도록 고무하십니다.

희년의 은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하도록 권유하십니다. 실제로 시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으며, 하느님과 끝없는 기쁨과 충만한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성찬의 식탁에서 날마다 미리 맛보는 영원한 혼인 잔치에 대한 기대로 특징지어집니다. 영원한 잔치를 기다리면서,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시며"(묵시 22,17), 시간을 단순한 반복에서 해방시켜 그것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는 희망을 북돋아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덕을 통하여, 역사는 모든 악과 한계를 초월하여 그 자체 안에 선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씨앗이 온전히 싹트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 없이 새 천년기를 바라보며, 주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확신 안에서 미래의 도전과 기대에 마주합니다.

마지막으로, 희년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불을 다시 지피라고 부탁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종말에 눈부신 빛으로 보여 주실 나라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미 현존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뚜렷한 표징인 친교와 평화와 사랑을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안고 있는 교회 공동체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야고 2,17 참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단순한 몸짓이나 이상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속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 동안,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든 이가 아낌없는 자선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권유받고 있습니다. 이 희년 동안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특별히 궁핍하게 살거나 기아와 폭력과 불의에 시달리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에 나오는 해방과 형제애의 이상, 성년이 우리 앞에 다시 한 번 제시하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옛 유다의 희년은 사실상 노예를 풀어 주고, 빚을 탕감해 주며,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 생활과 더욱 비극적인 형태의 빈곤이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제3세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희년의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은 이 고통과 절망의 외침에 귀기울이고 응답하여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무감각하면서, 또 모든 이가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갖추도록 일하지 않고서 우리가 어찌 희년의 은총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시작되는 이 천년기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마저도 갖지 못한 수많은 우리 형제 자매들의 절규를 듣고 거기에 자애로이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모든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원의 공정한 분배와 인간 개개인의 전인적 발전을 촉진하고 보장하는 실질적 활동을 벌여 나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6.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2000년의 이 사순 시기 동안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비로운 사랑의 산 징표이며 유효한 징표로 삼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시는 성부께 되돌아가라고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권유하십니다.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이시며 천상 자비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우리의 지향과 결심을 맡겨 드립니다. 그분께서 새 천년기를 걸어가는 우리의 여정에 밝은 샛별이 되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모든 분에게 하느님의 강복을 청합니다. 한 분이시고 삼위이시며,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마침이신 하느님께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찬양과 찬미의 노래를 불러 드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1999년 9월 21일, 카스텔 간돌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순 제1주일

(가해) 마태 4,1-11 : 99/02/21

예수님께서는 오늘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가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구상하러 간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굶주리는 사람이 보입니다. 저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먹을 것을 주어야하겠지. 그러시면서도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을 유혹이라고 단정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 6장에서 보듯이 5,000명이 넘는 이들을 먹이셨고,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달려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6),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하셨다. 그런데 군중들은 예수를 버리고 떠나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빵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원보다는 노예로 만드는 일에 한 몫 더 한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짠하고 내려오면, 예수님을 믿고 말을 잘 들을까? 교수의 말이라면, 텔레비죤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 잘 믿을텐데. 왜 그것을 유혹이라고 하실까? 그 기적은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또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하지만 자기 밑에 또 하나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일이리라.

그러자 악마는 다시 말한다. 나에게 절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가지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일이든 다 하라는 것이다. 악마는 끝까지 어떻게든 자기 일을 성사시키려고 다른 지배하려는 인간의 야심을 부추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땀흘려 찾아 얻도록 하라고, 각자의 자유를 허용하라고 하신다.

주님은 이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하도록 하신다. 배고픈 자기를 위해 돌을 빵으로 만드는 식으로 자신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헛된 기대를 버리고 누가 우리를 대신해주러 오지도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하신다. 우리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겪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겪게 된 사건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잘 헤아려 듣고,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을 잘 적용하고 실현함으로써 구원의 길로 접어들기 바랍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1999년 사순시기 담화

(사순 제1주일 99/02/21)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리라" (이사 25,6 참조)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지내려고 하는 사순시기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으로 성령 안에서 창조되고 새로워진 당신 자녀라는 것을 재발견하도록 도와 주시고자 하십니다.

1.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번 사순시기 담화의 주제인 이 말씀은 먼저 하느님 아버지의 모든 사람에 대한 은총의 섭리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섭리를 바로 창조 활동 안에서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섭리는 하느님께서 구원 활동을 시작하시고자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특별한 관계에서 확인됩니다. 마침내 이 은총의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나누고, 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을 약속 받았습니다(갈라 3,14 참조). 사순시기는 주님께서 모든 시대의 인류를 위하여 이루어 주신 놀라운 일과 특히 당신 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로마 8,32 참조) 구원에 대하여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기에 좋은 때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사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때 우리는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하느님을 찬미 찬양하게 됩니다. 성 바오로 사도와 함께 우리는 거듭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에페 1,3-4).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참회와 내적 정화의 여정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패배를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다시 한 번 발견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여 주시는 사랑을 체험한 우리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게 됩니다.

2. 사순시기의 여정으로 우리는 우리 구원의 신비인 그리스도의 파스카 기념을 준비합니다. 이 신비를 미리 맛보는 잔치가 바로 주님께서 성목요일에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셨던 잔치,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성찬례입니다. 제가 교황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에서 말하였듯이, 성찬례 거행 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제로 실체적으로 영원히 현존하시며, 생명의 빵이 미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으로 주어집니다"(39항). 잔치는 기쁨의 상징입니다. 잔치에 참가하는 모든 이가 긴밀한 친교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모든 민족을 위한 잔치(이사 25,6 참조)를 구현하는 것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깨닫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우리는 파스카 신비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지금 충만하게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파스카 신비 안에서 시작되지만 천국의 영원한 부활절에 결정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형제 자매들이 곤경과 질병의 비참한 처지를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언젠가는 천국의 영원한 잔치에 부름받게 되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시기는 우리의 시선이 현재를 넘어 역사와 이 세상의 지평을 넘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완전하고 영원한 친교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은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생명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합니다"(묵시 19,9).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미리 맛보는 이 잔치에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지상 생활에 새로운 품위를 얻어 주셨고, 무엇보다도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어 주셨습니다. 사순시기는 이 세상의 실재들을 결정적인 것으로 보는 유혹에서 벗어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필립 3,20)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초대합니다.

3.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 놀라운 초대를 묵상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 2000년 대희년의 준비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생명을 우리와 나누시는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하여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는 새로운 열정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1요한 4,10 이하 참조). 사랑은 제가 교황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신자들에게 1999년 한 해 동안 더욱더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강조하였던 향주덕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열린 마음으로 형제 자매들에 대한 봉사와 연대의 정신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교회가 세기를 이어오며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해 온 영역은 참으로 넓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여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영역은 무한합니다. 많은 이의 가슴을 짓누르는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절박한 문제들은 구체적이고 적절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폭력의 희생자들,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사랑과 보살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모든 사람을 당신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복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4.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순시기를 살아간다면, 이 시기는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자선 행위 안에서 드러나는 소중한 사랑의 때가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날마다 소비주의의 향연에서 소외된 이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의 문을 두드리는 라자로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보가 가져다 준 물질적 혜택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칠 줄 모르는 이 빈곤 상황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괴롭힐 수밖에 없으며, 개인으로든 단체로든 이러한 상황들에 대처하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려는 마음을 보여 줄 기회가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국제 기구, 각국 정부, 세계 경제를 통제하는 기관들은 모두 개별 국가에서만이 아니라 국제 관계에서도 지상의 재화를 더욱 공정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과감한 계획과 사업들을 추진하여야 합니다.

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사순시기의 여정을 시작하며 보내는 이 담화로 저는 회개의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을 격려하고자 합니다. 그 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두신 선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여 줄 것입니다. 자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회개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빕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계획을 아시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신 첫 번째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으셨기에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루가 1,42)이 되셨고, 고통 속에서도 순종하셨기에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누리는 첫 번째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확실한 희망의 표징"(교회 헌장, 68항)이 되어 주시고,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풍성히 내리도록 전구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1998년 10월 1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순 제1주일

(다해) 루가 4,1-13 : 98/03/01


1998년 사순절 교황담화(요약)

사순시기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신"(루가 4,1) 그리스도의 신비를 되새겨 줍니다. 이로 인 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 게 사막의 여정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체험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 울이게 되는 시간입니다.

"오너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내가 가난하고 버림받았을 때에 너희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마태 25,34-36 참조). 가난하면 우선 '충분한 물질 수단의 결핍'입니다. 삶의 필수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굴욕스런 처지에 빠집니다. 또 다른 가난은 '영적인 양식의 결 여, 본질 문제에 대한 응답의 결여, 삶에 대한 희망의 부재'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은 의미를 찾고 사랑을 갈망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며 구원을 가져다주고 고통 의 암흑 속에 빛을 밝혀 줍니다. 교회는 온갖 형태의 가난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촉구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 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사람의 표시입 니다. 영적인 가난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마음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봉사의 정 신, 다른 사람의 선익을 구하는 열린 마음, 기꺼이 형제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 이웃과 멀어지 게 하는 자만심을 버리는 노력 등입니다. 이번 사순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 의 표시를 통하여 자신의 회개를 드러내 보이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교회는 악과 고통, 죄와 죽음을 넘어서 는 새로운 희망에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희망의 말 씀'입니다. 특히 자신이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받고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부활절의 부속가를 보냅니다. "나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부활하셨네." 이 사순시기에 가난을 똑바로 바라보 고,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가난을 체험하고 그분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 가난한 형제들에게 봉사 하는 계기를 가지십시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8년 사순절 교황담화(전문)


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해마다 사순시기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신"(루가 4,1) 그리 스도의 신비를 되새겨 줍니다. 이 독특한 경험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전례시기를 신자들에게 마련해 주어,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적으로 새로워지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시는 그 사랑을 삶에서 표현할 수 있게 합니다.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올해, 교회는 성령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이 신비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도록 교회를 사막으로 이끌어냅니다. 예언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그를 꾀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호세 2,16) 따라서 사순시기는 우리 삶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성령 안에서 회개하는 여정입니다. 사 실 사막은 광야의 동의어로서, 메마름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동시에 그곳은 하느님께 매달리는 장 소이며, 묵상의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막의 여정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 을 체험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시간입니다.

2. 올해 저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모든 신자들에게 묵상 주제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오너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내가 가난하고 버림받았을 때에 너희는 나를 따 뜻하게 맞이하였다!"(마태 25,34-36 참조).

가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맨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의미는 충분한 물질 수단의 결핍입니다. 우리의 많은 형제들을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넣는 이러한 빈곤은 수치스러운 일입니 다. 빈곤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며, 갖가지 고통스러운 현상과 맞물려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필 수 수단과 기초 보건 수단의 결여, 집이 없거나 열악한 데서 오는 비정상적인 상황, 사회에서 버 림받은 힘없는 사람들과 생산분야 실업자들의 소외,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들의 외로움, 잔혹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전세계 난민들의 상황, 부당하게 낮은 임금, 가정의 부재와 거기에서 연유하는 마약이나 폭력과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살의 필수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굴욕스런 처지에 빠집니다. 이러한 비극의 앞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양심상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습니다.

이와 똑같이 심각한 형태의 가난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 수단의 결핍이 아니라 영적인 양 식의 결여, 본질 문제에 대한 응답의 결여, 삶에 대한 희망의 부재입니다. 이러한 가난은 영혼을 해치며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데, 흔히는 매우 슬프고도 의미 없는 인생입니다. 이러한 불행은 대개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안락하게 살지만 정신적으로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막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사람들은 의미를 찾고 사랑을 갈망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하는 복음선포는 이러한 가난에 대한 응답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를 전해 주며 구원을 가져다주고 고통의 암흑 속에 빛을 밝혀 줍니다. 결국 인간을 사로잡는 것 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위로가 없다면 인간은 언제나 궁핍 속에서 참 생명의 원천을 잃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교회는 온갖 형태의 가난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 순시기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형제들을 도와야 할 자신의 임무를 깨우치는 특별한 시간입니 다.

3. 성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촉구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없는 사람에게 적선하는 것은 주님께 빚을 주는 셈, 주님께서 그 은 혜를 갚아 주십니다."(잠언 19,17) 신약성서의 요한 묵시록은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하지 말라고 가 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자신과 똑같이 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측면 에 배여있는 물질주의가 갈수록 두드러지는 부유한 사회와 세계에서, 우리는 부자들에게 강한 어 조로 경고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됩니다.(마태 19,23-24; 루가 6,24-25; 16,19-31) 특히 "그분 께서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이 부유하게 되었다."(2고린 8,9)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 님의 아들이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여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 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7-8) 참으로 사람이 되시어 가난과 고통과 죽음까지 겪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가난해지시어 가난하게 사는 모든 사람과 참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러 기에 우리는 올해 사순시기 담화의 주제에 영감을 준 말씀을 최후 심판에서도 듣게 됩니다. 최후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당신 모습을 알아본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십 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러므로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히 인간과 하나 되시기 위하여 가난해지셨다는 것을 그들은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사람의 표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에게 입을 맞춘 것은 그에게서 고통받으 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4. 모든 그리스도인은 바로 하느님께서 감추여 계시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을 나누도 록 부름 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를 참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만 가능합니다. 사실 가난은 부정적인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복을 받는 가난도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그러한 가난을 "행복하다."(마태 5,3)고 합니다. 이 가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느님에게 서만 구원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 형제를 "자기보다 낫게"(필립 2,3) 여기며 형제에게 기꺼이 봉사 합니다. 영적인 가난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마음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순시 기에 그러한 열매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무르익어야 합니다. 그것은 봉사의 정신, 다른 사람 의 선익을 구하는 열린 마음, 기꺼이 형제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 이웃과 멀어지게 하는 자만심 을 버리는 노력 등입니다.

이러한 환대의 분위기는 오늘날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게 하는 온갖 요인들과 맞서 싸울 대 더욱더 필요합니다. 특히 수많은 난민과 망명자 문제에서, 인종 차별 현상에서, 또한 더 나은 삶의 조건과 일자리를 찾아 자기 나라를 떠나온 것말고는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불용 현상 에서, 자기네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에서, 이러한 환대의 필 요성은 더욱 명백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말씀은 일자리와 집을 찾아 헤매며 자녀들의 교육을 갈 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 앞에서 새로운 타당성을 얻습니다. 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 는 일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과제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존엄에 걸맞는 생활 조건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를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번 사순시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권고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 의 표시를 통하여 자신의 회개를 드러내 보이십시오. 가난한 사람 안에서 마치 얼굴을 맞대고 이 렇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내십시오. "내가 가난하고 버림받았을 때에 너희는 나 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5. 이러한 노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이 다시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교회는 악과 고통,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희망에 사 람들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사실, 우리를 괴롭히는 죄악들, 방대한 문제들, 고통받는 사람들의 그 엄청난 숫자는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어려움을 덜기 위하 여 물질적인 도움도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는 더 많이 줄 수 있고 또 더 많이 주어야 한다 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희망의 말씀입니다. 물질 수단이 고통을 덜어줄 수 없는 곳, 예를 들면 육체적 또는 정신적 병을 앓는 경우에, 교회는 예수님에게 서 나오는 희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부활을 준비하는 이 시기에 저는 다시 한번 희 망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특히 자신이 가장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받고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사람 에게 부활절의 부속가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려 드립니다. "나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부활하셨 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어둠으로 몰아넣는 악, 인간의 마음을 이기심 속에 가두어 놓는 죄, 인간을 위협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비치는 빛을 봅니다. 이 사순시 기 담화는 수많은 이들의 가난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권유입니다. 이 담화는 또한 우리에게 자신 을 양식으로 내어주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부활 때 만 나 뵙는 길을 제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번 1998년 사순시기가 모든 그리스도인 에게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가난을 체험하고 그분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 가난한 형제들에게 봉사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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