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가해) 마태 17,1-9; 17/03/12

찬미예수님!

교형 자매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 고 상열 리카르도 수사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저희 수도가족에게 이 자리와 시간을 배려해 주신 주임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여기 서서 보면 웃고 계신 분들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 망태 때문에 그러시지요?

저희 수도회가 탁발 수도회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망태를 메고 올라왔습니다. 오늘 저희가 수색 성당을 찾아온 이유를 아시겠지요?

가난하고 병든 이웃들에게 사랑을 증거 하는데 필요한 후원금을 탁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500년 전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서 시작되어 1572년 탁발수도회로 인준되었고, 총본부는 로마에 있으며, 현재 세계 53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1958년 진출하여 지금까지 20개의 정신보건 및 사회복지 시설에서 자신의 필요와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는 정신장애인, 독거노인 및 치매 어르신, 지적·자폐성 장애인과 말기 암 환자, 가족이 돌볼 수 없는 장애인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도회가 이들을 위해서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영성은 환대입니다. 환대란 주인이 손님을 맞아들여서 예수님 말씀처럼 먼저 마음 열고 다가서고, 무엇이 필요한지 헤아려서 나누는 것입니다. 환대 영성은 성경 여러 곳에 배여 있는데 저희는 루카복음 10, 25-37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복음적 토대로 살아갑니다.

이 영성은 “멈추고, 보고, 행하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머물다!!>라는 의미를 묵상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그 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정작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고 강조 하십니다. 어디서든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럼 수도자로써 어떻게?

구원의 역사가 되는 수도자(평수사)들의 삶에 대해서 교회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복음의 아름다움을 적절히 드러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표지가 있습니다. 곧 가장 작은이들을 위한 선택,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입니다.”(교회안의 형제 수도자들의 정체성과 사명, 67쪽)

더 깊이 있는 말씀을 드릴 수는 없지만 저에게 있어서 예수님 사랑 안에 함께 머물러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희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병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멈추어서 보고 다가서야 합니다. 지금 저에게 예수님 사랑 안에 함께 머물러야 하는 이들은 함께 살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입니다.

저희 집에는 저의 아들 또는 황태자라 부르는 28세의 남자 입주인이 있습니다. 다운증후군이고, 150m의 왜소한 체구에 언어로는 어떤 의사표현이 어렵고 오직 눈빛과 몸짓으로 소통합니다.

누구보다 더 마음이 기우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처음 우리 집에서 식사할 때 본 모습이 시작입니다. 음식을 씹지 않고 본능적으로 삼키는데 그 음식이 다시 코로 넘어 나오는 일이 반복되어 병원진료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를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입천정과 코가 동전만한 크기로 천공되어있다.”

의학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것도, 많은 치료비가 들어간 것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통과 아픔을 조금만 헤아렸다면...., 그가 말로 불편과 고통을 표현할 수 있었거나 가족이 있었다면, 그 누군가 그 사정을 미리 헤아렸다면 26년 하루 세끼를 그렇게 살았을까?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좋은 일 하십니다.’ ‘수사님들이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물론 인간의 눈, 가치로 보면 복지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는 일은 다릅니다.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하는 사도직은 남달라야하고 고통에 민감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셨던 저희 창립자는 세상에 선한 일을 보여주었으며, 인간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었습니다. 연민 이라는 것은 마음 안에서 뭔가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즉 타인의 아픔을 느끼고 그들의 소리를 민감하게 듣는 것입니다. 피가 흐를 때 우리는 산 것입니다. 심장이 뛰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장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인간 중심의 삶일 것입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따뜻한 돌봄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따뜻한 손을 내어 주십시오.

저희 이웃들을 꾸준하게 도와주실 수 있는 후원회원 가입은!!

본당에 들어오실 때 받으셨던 팜프렛의 가입 신청서를 절지하셔서 작성해주시고 미사 후 저희 수도자들에게 주시면 됩니다. 부탁드릴 것은 가급적 지로용지 보다는 자동이체를 선택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계좌번호가 기억이 안나 시더라도 이름과 전화번호만 명확하게 적어주시면 1주일 안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수도회에서는 매주 월/화 은인들을 위한 미사, 매월 후원회 미사를 봉헌하고, 저희 수도자들의 기도 중에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기도지향을 원하시는 분들은 신청서 뒷면 <메모 하세요>에 구체적으로 적어주세요.

경청해주신 모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후원계좌: (예금주-천주의성요한수도회)

국민은행: 004-25-0008-049 농협중앙회: 047-01-253723

우 체 국: 010017-01-002730 우리 은행: 019-272532-13-002

외환은행: 028-13-60685-5 신 협: 131-013-453755

후원회 사무실 전화: 02)2664-3162




사순 제2주일

(나해) 마르 9,2-10; 15/03/01

최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593개 초중고교 재학생 1만5천978명을 대상으로 희망 직업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교사가 전체 응답자의 15.8%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초 중학생들은 2위가 의사이며, 3위가 연예인인데 반하여, 고교생에게는 6위가 의사, 7위가 연예인이었습니다.

초등학생들의 4위가 운동선수인데 반해 중학생은 10위로, 초등학생의 5위가 교수였는데 중학생에게는 6위로, 초등학생들의 6위인 법조인이 중학생에겐 4위였지만, 운동선수, 교수, 법조인 모두 고등학생에게는 열 순위 안에 들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초 중학생에겐 7위였고, 고등학생에게는 8위였습니다.

고교생에게는 1위 교사에 이어 2위엔 회사원, 3위엔 공무원, 4위엔 자영업과 개인사업이 자리했습니다. 5위의 간호사가 6위의 의사보다 한 단계 위에 있었고, 과거에 두드러지지 않았던 경찰이 10위권 안에 초 중고등학생 전부에게 희망직업이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경제적인 면을 따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은 2년 전 조사에 비해 공무원과 회사원의 순위가 높아졌고, 경찰이 10위권 안에 포함된 것이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직업군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아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저는 이 발표를 보면서 왜 그 직업을 지망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을 택하는데 있어서 그 직업이 자신에게 어떤 생활을 보장해 주는지를 기준으로 삼는가 싶기도 했습니다. 세대가 흐르면서 자식들에게 직업을 권하는 기준들이 변화되어 왔습니다. 50년대 법조인, 60년대 의사, 70년대 회사 사장 등.

직업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편입니다. 그와 동시에 직업은 그 사회의 어떤 역할을 담당하며, 그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볼 때, 직업의 선택은 자신이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차원과 동시에 왜 그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동기도 아주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사회 공동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개인의 직업관과 선호도도 중요하겠지만, 사회에서 맡는 역할과 비중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틴어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란 단어입니다. ‘너는 이 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 ‘그것이 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직업을 선택한 이들이 책임지고 수행해야만 하는 그 직업의 사회성과 봉사성과 기여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직업이 먹고 살기 좋은가가 아니라, 그 직업을 선택하여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를 꿈꾸며 직업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휘두르기 전에, 자신에게 권한을 준 사회 구성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책무가 있기에, 그 책무를 수행하기 위한 권한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3) 라고 전합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라고 청합니다. 복음사가는 “그 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 라는 말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기 보다, 불편해 하셨음을 간접적으로 전해줍니다. 이어 예수님의 함구령이 내립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9절)

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셨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사실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이유를 루카 복음사가는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라고 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모습을 보고, 그 영광된 모습을 잘 지키고 걸맞게 모시기 위해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에 고개를 숙여 경배하는 것이 당연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 9,5)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화려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기회를 주시기 위해 영광스럽게 변모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희생해야 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실현하려고 하시기에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그런 것을 기대합니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나의 편익과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진정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청하십니까?

우리가 세례받은 주님의 자녀요 사도로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기여하고, 온 인류가 구원될 수 있도록 헌신하며,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킵시다.

어떻게 하면, 온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주님의 사랑과 축복 안에서 이룸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앞당깁시다.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기리며, 주님의 사도로서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노력합시다.

오늘 그리스도의 자녀로 선발될 예비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비단 세례후보자로 선발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 사랑의 말씀을 전하고 실현하도록 선발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하여 주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과 활동 안에 실현하며 거룩해지시기를 빕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8)



사순 제2주일

(가해) 마태 17,1-9; 14/03/16

예뻐지고 싶은 것, 아름다워지고 싶은 것은 우리의 꿈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반기고, 이목을 집중하며, 잘 따를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많은 일들이 잘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장점을 다 제쳐놓고서라도 내가 아름다우면 우선 내가 기분이 좋고 힘이 납니다.

문제는 ‘어떻게 아름다워지는가?’ 하는 방법과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가치와 의미의 제정입니다. 가치와 의미에 따라 단기 목표와 방법도 설정하게 되고, 투신하는 정도가 다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때 보면 내 노력과 내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닌 경우에는 아름다움이나 돈이나 자리는 내 것이 아니기에 튼실하거나 견고하지 않아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냥 쉽게 사그라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가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마태 17,2)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형수술을 하고 난 사람들처럼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고 잘 보여지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도 바오로는 오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하신 모습과 연관하여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우리는 혜택을 누리기 위해, 고생하고 어려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하루 빨리 쉽게 성공하기 위해, 이른 바 손에 물 묻히지 않기 위해 아름다움을 얻으려고 하는 데, 얼토당토않게 갑자기 왜 고난이란 단어가 튀어 나오는가?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어서 빨리 예뻐지고, 대학 합격과 승진과 성공과 대박을 얻으려는 우리에게, 난데 없이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라는 소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모르셔도 너무나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체하시는 너무나 매정한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스스로는 수행하기조차 힘들어서 주님의 힘에 의지하여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바람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며, 정말 우리의 보통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라면, 주님께서 불러 주시고, 보여 주시며, 우리가 걷기를 바라는, 우리가 취하기를 바라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복음을 따라 삶으로써 얻게 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새로운 생명입니다(2티모 1,10 참조).

그런 의미에서만 오늘 첫 번째 독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는 하되, 그 복은 나의 입신양명을 위한 복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쁨과 도움을 주기 위한 도구로서의 복을 내려주신다는 말입니다. 복을 받은 우리는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3절) 라는 말씀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내가 잘 되면, 내가 잘 되는 득을 우리 이웃이 보는 것이고, 내가 잘 되는 그 자체가 이웃에게 득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웃에게 득이 되는 것이 내가 잘 되는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현세적으로 우리는 손해 보는 것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제서야 오늘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게 됩니다. 아름답게 변화된 예수님을 바라보고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하느님 아버지는 주님의 뒤를 따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손해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될 제자들에게,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길에 대한 확신을 보증해줍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그제서야 주님께서는 두려움으로 엎드려서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절) 하고 이르십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과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구원사업의 도구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주님께서는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1절) 라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데, 그 선택과 선택에 따른 복은 결국 아브라함을 하느님 구원사업의 도구로 쓰시기 위한 선택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은 아브라함이 주님의 구원사업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축복은 개인에게 내려지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영달이 아니라,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오늘 세상 한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께서 깨우쳐주시는 진리를,

그리스도께서 심어주시는 선함을,

그리스도께서 만들어주시는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선택하신 예비신자와 교우 여러분,

오늘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도록 교회를 통해 선발되신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기 위해 주 예수님과 천주교회를 선택하신 여러분,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희망의 길을,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십자가를 선택하신 여러분,

여러분이 선발되심을 축하 드리며, 여러분의 선택에 감사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발되신 여러분, 오늘 복음을 들으며 갈구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오늘 나와 내 가정이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며 우리를 선택하시는가?

주님께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나와 내 가정에 내려주시는 사명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나와 내 가정이 그 선택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축복을 내려주셨는가?

나와 내 가정이 주님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축복을 청해야 할 것인가?

오늘 나와 내 가정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의 능력을 받아, 주님께서 나와 내 가정을 선택하시고 내려주신 사명을 실현하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나와 내 가정을 환하게 변화시킵시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사회도 우리 가정의 변화된 새로운 빛으로 비추어 봅시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사순 제2주일

(다해) 루카 9,28ㄴ-36: 2013/02/24

지난 은경축 미사 때 강론한 신부님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유영훈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라고 부평 장애인 종합사회 복지관을 맡고 있는 인천 교구 동창신부님입니다. 그 신부님은 제가 처음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저를 데리고 신학교 뒷산인 낙산을 돌며 이 나무가 느티나무고 저 나무가 무슨 나무고… 나무 이름에서부터 자연의 섭리까지 도시에서 자라난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비단 저에게 친절하게 해 준 것만이 아니라, 그 신부님은 청소에서부터 모든 동기 신학생들의 각종 행사와 일의 뒤처리를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똑같이 주어진 빠듯한 신학원 생활 속에서도 그 신부님은 남 몰래 그리고 남들이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나는데 반해, 그분은 미리 나가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 준비해 주었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기들끼리 무슨 회합을 해도 그 신부님이 한 마디를 하면 그것이 결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이 책임지고 마무리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님은 남보다 잘난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훤칠한 키에 잘 생기고 노래도 잘하지만, 그보다는 변하지 않고 확실하게 끝마무리를 해주는 것이 동료들의 신임을 얻은 탓이었습니다. 가끔 살펴보면, 너도 나도 좋은 안을 내세울 수는 있지만, 꼭 그 안대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요, 그 안이 모두 다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 안을 제시한 사람조차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기면 자기가 제안한 안 대로 실현하지 않는 경우조차 있었지만, 그 신부님은 말없이 꾸준히 끝까지 마무리 지어 주었기에, 동료 중에 그 누구도 더 이상의 말을 할 필요도 없었고, 딴 소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는 하늘에서 선택한 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하실 것이고 또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더욱 환하게 빛나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보다 낳고 좋은 미래를 위해 너도 나도 노력하지만, 서로가 그 좋은 미래에 얻을 혜택만 생각하고 그 좋은 미래를 이루기 위해 오늘 함께 참여하여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는 한 좋은 미래는 다가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혹자는 모두 다 귀한 인생인데 어느 누구 하나의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다같이 상생의 길을 걷자고도 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 같이 어느 한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는 시대와 처지가 다시 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부류나 어느 한 세대에게만 좋은 열매가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열매, 곧 공동선을 얻을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관련자들의 이해관계 속의 야합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안과 기획이 마련되고, 다 함께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실현 의지와 헌신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좋은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힘을 가지고 있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하거나 자신의 생각만이 좋은 결정이라고 여기지 말고, 동시대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공감대와 동의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위한 미래를 함께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참여케 하며, 우리 스스로 그 일을 위하여 개인적인 친분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인류 사회의 공동선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변화되도록 합시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순 제2주일

(가해) 마태 17,1-9; 11/03/20

지난 주일 새벽 괜실히 아파서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신자 여러분들께 신경 쓰시게 해드려서 송구스럽고, 염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전에 다른 신부님들이 주일 새벽에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씀들만 전해 들으면서, 왜 하필 주일날 입원했을까? ‘신부가 주일날 아프면 어떻게 하나’ 했을 뿐, 그런 일이 정작 저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저에게도 일어났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눈도 점점 침침해 지고, 소화력도 약해지면서, 10년만 더 젊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통계를 보면 90%의 노인들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리와 여유를 구축하기 위해 고생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반반인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의 성숙과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조금 더 젊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들을 위해 쓰고 싶은 책이 많고, 하고 실은 일이 아주 많다 보니, 시간은 절대적으로 모자란 듯하고, 그에 비해 몸은 뒷받침을 못해주는 듯한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가끔 아파서 고생할 때마다 이렇게 마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욕심처럼 스며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습이 변하셨다고 합니다.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변하셨을까? 그냥도 멋있으셨을 텐데 제자들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닐 테고, 군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서 자신을 잘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이셨을까? 새삼 왜 이 시점에서 모습이 변하셨을까 궁금합니다. 그것도 모세와 엘리야를 대동하고 무슨 과시할 일이라도 있으셨는가 의문을 던져봅니다.

이 마태오 복음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복음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루카 복음사가가 말하는 내용은 명확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대신 바치시는 위대한 분이시기에 그렇게 환하게 빛나실 분이라는 사실을 죽기 전에 여기서 미리 제자들 앞에서 환하게 빛나는 분을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증명입니다.

그런데 철없는 제자들은 주님께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하고 말씀을 올립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형제들을 위한 수고 수난의 결과요, 그 수난의 열매라는 것을 아직 깨우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저도 주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님과 함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던지겠습니다.’ 하는 봉헌 결의도 아니고, ‘주님과 똑 같이는 못하더라도 후원이라도 하면서 뒤 따르겠습니다.’ 하는 마음 속의 동반 결의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환하게 빛난 그 위대함이 좋고 그 위대한 분을 자기 주위에 모시는 것에 만족하고 욕심을 부립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차지하는 방법은, 그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취해서, 혹시라도 남이 손대거나 그 노하우가 공개되거나 달아날까 봐 몰래 감추어 두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영광을 개인적인 이익과 연관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애초에 인간 전체에게 주어진 영광의 효과를 퇴색시키고 변색시켜 버립니다. 그런 세상에 살면서 그런 세상을 바라본 제자들은 자신들도 세상의 방법대로 그 영광을 자신들의 것으로 차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의 마태 16장에서 제자들을 나무라신 적이 있습니다.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다인들에게 수난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22)하고 막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하고 강하게 단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구름과 구름 속의 목소리로 대신 제자들을 제지합니다. 5절을 보면,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17,5)

그렇다면 이 환하게 빛나는 위대하신 영광의 주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루카 9,23 참조) 차이가 있다면, 루카 복음은 ‘날마다’라는 말을 덧붙여, 한 번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듭 그리고 계속 주님을 따라서 매일 매번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장점과 우리의 소질, 우리의 특질은 누구의 것이며,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겠습니까? 신앙인인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다시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장점과 특질을 주면서 인류 모두에게 봉사하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그 특질들을 사용하면서 먹고 사는데 필요한 봉사료와 수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더 많은 우리의 사적인 이익이나 사적인 욕구만족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의 향상과 성숙을 위한 헌신과 봉사 및 계발이 우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더 큰 영광을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시고 마침내 빛나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7)

자, 그러면, 지역사회와 인류 세계의 공동체를 위해 나를 어떻게 나누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봅시다.



사순 제2주일

(나해) 마르 9,2-10; 06/03/12

우리 ‘성 정하상 바오로 천주교 타코마 한인 성당’은 지금부터 30년 전인 1976년 9월 20일 창립되었습니다. 1976년 4월 4일 ST. JAMES 주교좌 성당에서 첫 모임을 가진 신자들이 5월부터 ST. PETER & PAUL 성당에서 미사를 함께 봉헌하게 됩니다.

1979년 7월 3째 주일부터 ST. PETER & PAUL 성당에 한국명 차미도 (Richad Parle) 신부님께서 타코마에 내려와 한국말 미사를 봉헌해주기 시작하셨고, 1982년 부활절에는 18명의 한인들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 때 약 100여 가구의 신자 가정이 있었습니다.

1983년 7월 대전교구 조병기 바오로 신부님께서 시애틀 타코마 한인 공동체의 초대 주임사제로 부임하게 되어, 레지오와 ME가 발족되고, 500여명의 신자로 늘어나게 됩니다.

1984년 1월 올림피아 지역의 신자들이 LACEY의 SACRED HEART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하고,

1984년 4월부터는 타코마 한인 공동체가 8년간 미사를 봉헌했던 ST. PETER & PAUL 성당을 떠나, 지금의 이 ST. ANN 성당으로 이사 오게 됩니다.

1985년부터는 사제관을 시애틀과 타코마 중간 지점인 페더럴웨이 북부에 마련하게 됩니다.

1987년 9월에는 시애틀, 타코마 한인 공동체에 조장윤 베르나르도 신부님께서 주임사제로 부임하시게 됩니다.

1988년 12월에는 타코마 성전 건축 위원회가 구성되고, 1989년 4월 GOLDEN GIVEN ROAD로 사제관을 옮기게 됩니다.

1990년 9월에는 조장윤 신부님께서 타코마 공동체만을 전담하시게 됩니다.

1991년 3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타코마 성당의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창립 기념일을 9월 20일로 정하게 됩니다.

1991년 8월 구일모 베드로 신부님께서 부임하십니다.

1993년 3월 인보 성체 수도회 최명미 마리 데레사 수녀님과 박미숙 에메릿다 수녀님께서 부임하십니다.

1994년 3월에는 연령회가 창설되고, 4월에는 한국 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100여명의 학생들이 한글과 한국문화를 공부하게 됩니다.

1995년 말에는 꾸르실료 교육을 통해 울뜨레아가 발족하게 됩니다.

1995년 말 임순조 헬가 수녀님께서 부임하시게 됩니다.

1996년 2월 유호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께서 부임하셔서 신자들에게 각종 교육과 피정을 실시하게 됩니다.

1998년 12월에 유 신부님의 은경축을 맞았고, 정경보 까리따스, 함은순 마리아 수녀님께서 부임하셨고, 1999년 3월에는 강옥인 막달레나, 최순금 루시아 수녀님께서 부임하십니다.

2000년 2월 최종건 미카엘 신부가 부임하셔서 본격적인 성전건축을 시작하게 됩니다.

2000년 8월 성당 로고를 만들고, 11월부터 성전 건축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고, 성서 쓰기와 묵주 기도 200만단 봉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2001년 3월 26일 FIFE 소재의 새 성전터와 사제관, 수녀원을 매입하고, 사순절부터 155만불의 성전 건축 신립금을 받고, 6월 9일에는 성전 건축을 위한 서북미 한인 골프대회를 열었고, 바자회를 했읍니다.

2002년 2월에는 김인자 아가다 수녀님께서 부임하셨고, 2003년 3월에는 정경숙 마리아 막달레나 수녀님께서 부임하십니다.

2003년 10월 새성전 설계와 성전 거축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최 신부님께서 이임하셨습니다.

2003년 10월에 제가, 2004년 2월에는 이행자 요안나 수녀님께서 부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2006년 3월 12일 사순 제2주일 오늘, 우리는 22년간 정겨웠던 ST. ANN 성당을 떠납니다.

그동안 우리를 돌봐주시고 갖은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VINCENT PASTRO 신부님을 비롯한 역대 주임 사제님들과 ST. ANN 신자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이제 지난 30년간 그토록 꿈꿔왔던 새 성전을 짓고 이사를 가게 됩니다.

떠날 때가 되니까 더욱 더 이 ST. ANN 성당에 비춰진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 이 성당에 처음 들어올 때와 지금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1976년 본당이 설립된 후 은경축을 하고도 5년을 지나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 본당의 모습은 어떤가 하고 되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 본당의 자화상은 어떨까?

우리를 아는 동포들과 이민족들이 우리 신자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우리가 성당에 나오면 나올수록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우리가 거룩한 신자가 되었고,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눈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게 해줍니다.

p>나 자신은 신앙을 가지고 얼마나 또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속한 우리 구역이나 단체는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우리 성당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되새기게 해 줍니다.

오늘 제자들 앞에서 눈부시게 변화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도 거룩하게 변화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자로서 살면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겠다.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야겠다.

우리가 이 지역민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달하고 나눠주는 하느님의 중개인들이 되어야겠다.



사순 제2주일

(가해) 마태 17, 1-9; 02/20/05

사람은 변한다. 태어날 때의 그 작은 손가락과 발가락이 자라면서 변하듯이 그 속도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변했다!”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듣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새로운 직책을 가지게 된 사람, 새로운 직장으로 전업했거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전한 사람들에게서 겪는 뜻밖의 반응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자랄 때 그 아이가 속한 사회가 실수가 용인되고 잘못이 인정되는 사회였다면 그 아이는 솔직하고 대범하게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회였다면, 그는 그 반대로 변했을 것이다. 아이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었어도 그가 몸담은 사회의 정도에 따라 그는 변한다.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다가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사회가 그에게 어떤 처분을 했느냐가 그의 다음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그의 여생의 행로를 좌우하게 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노력과 그 결과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반응을 보며 자란 사람은 처세술이란 명목으로 인생을 산다. 이들은 자신의 인격과 의지로 자신의 뜻을 성취해 나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주위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쉽게 변화하며 인생의 커다란 부침을 계속하게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주도적인 노력과 그에 대한 사회의 반응 또는 그 반대로 사회의 반응에 대한 자신의 적응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 사회에서 그리고 이 사순절에 기억하고 싶은 변화는 바로 죄인의 변화이다. 누구나 한 번은 실수하고 잘못한다. 아니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이 같은 잘못을 여러 번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낙인이 찍힐 정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제 그랬다고 해서 오늘 또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늘이 지난 내일이 된 다음에야 확인할 뿐이다. 만일 어제 그랬다고 오늘 또 그런다고 단정한다면 아니 실제로 그렇다면, 우리 생엔 희망이 없는 것이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로마 8, 25)이고, 현세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식이 잘못하면 실수요, 남이 잘못하면 범죄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식에게서 희망을 바라보기 때문이고, 그 희망은 바로 자식 사랑에서 비롯되고, 그 사랑은 자식을 믿는 부모의 믿음에서 출발한다.

내일 또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안고서도 오늘 그에게 또다시 내일을 허락하는 사랑은 바로 희망과 그 희망을 가능케 하는 믿음이다.

오늘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담겨져 있는 그 어떤 사람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평가에 그 사람을 가두어두지 말고 그가 다시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도록 놓아주기로 하자. 그리고 또 우리 마음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놓아주어야 할 사람은 그 어느 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동안 하느님을 배반해 왔고,

또 앞으로도 배반하리라는 것을 알고계시면서도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우리를 배반의 죄악에서 다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 주셨다.

하느님의 그러한 계획은 우리 인간들의 배반으로 십자가 위에서 끝나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조차도 고려하신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배반의 죽음에서 건져 부활시켜서 새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다.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몰라서 주님을 배반했지만

우리가 배반한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나타나

그 배반은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우리 배반의 행위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고,

우리의 배반은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가 다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그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변화하신다.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2)

마치 앞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실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시려고 하신 것처럼 환하게 변화하신다.

“그리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3)

예수 앞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성인이다.

그런데 그 성인은 죄도 없고 전혀 잘못한 일도 없는 이들인가? 또 그러기에 그가 성인이 되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단지 그가 자신의 모든 한계와 잘못을 극복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서서 인생을 마쳤기에 성인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 오늘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들까지도 우리는 지금 당장 세상 모든 사람 앞에서 성인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 성인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또한 우리자신도 성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럼 우리 앞에 성인이 되어 나타나기를 바라는 그 누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희망이며 그 희망이란 사랑은 그에게 기회를 제공해주고 우리도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계획하고 노력하는 사랑이다.

자신을 배반하는 인간들 앞에서도 그 인간들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고, 그 인간들을 구하고야 말겠다고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믿고 자신을 바친 예수님의 사랑처럼.

현실을 탓하고, 과거의 기억 속에 사람을 묶어두고 흉만 보고 탓만 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그래서 제자들처럼 그저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 바치고, ‘우리 곁에서 우리의 소원이나 들어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날 새로운 미래와 인간 구원이라는 희망을 잠식하고 만다면 우리는 신앙인이 아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생각을 넘어 주님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의 빛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신앙인의 빛을 고이 간직하고, 현실에 머물지 않고 미래의 새 환경과 나 자신의 새로운 생애, 새로운 인격을 구하고 이루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기도와 노고를 주님께만 봉헌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비롯한 형제들에게 희망의 기회를 선사하여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와 감실 속에만 주님을 모셔두지 말고, 미래를 향한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고 형제들의 새로운 날들을 허락하기로 하자.

“두려워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라.”(7)



사순 제2주일

(다해) 루가 9, 28-36; 04/03/07

우리 나라 말로 '7가지 유혹'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현혹됨'(Bedazzled)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그 영화는 악마가 인간에게 7가지의 소원을 들어줄 테니 대신 자기에게 영혼을 팔라는 계약에서부터 시작된다. 악마와 계약한 인간은 햄버거와 빅맥에서부터 시작하여 돈과 권력, 명예, 아름다운 여인, 감상적인 인간 등 여섯 번째까지 소원을 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소원이 즉시 이루어지고 또 그 상태를 누려보긴 하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도 없었고 또 그 상황을 오래 유지하지도 못한다. 결국 그는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남은 한가지 소원을 마저 대고 영혼을 내 놓으라는 악마의 재촉에, 자기가 그렇게도 가지고 싶었던 여인의 행복을 빌어준다. 그러자 악마와의 계약은 깨지고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남을 위해 소원을 비는 순간부터 악마와의 계약은 끝난다는 것이 계약파기의 비밀조항이었다는 것이다.

그 영화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원하는 상황은 누릴 수 있지만, 그 상태와 상황이 행복이라든지 등의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갈증과 원의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원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향해 빌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소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산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 식구 그리고 우리 사회와 민족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의 꿈과 욕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더 얻고 싶어하고, 하나를 이루면 하나를 더 이루고 싶어할 뿐 만족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늘 불평불만과 아쉬움 속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자포 자기 할 때도 있고, 자기 자신과 사회를 원망하기까지 한다. 현재 상황이 다 좋다고 만족하면서 살 수는 없다하더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그저 고통뿐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리 얻고 성취하고 채워도 부족하고 모자라고 결핍을 느끼지만, 이웃을 위해 일한다거나 조금 나누기라도 한다면 나눈다는 그 자체로 자기가 얻은 것보다도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니 말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처럼 사랑은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줌으로써 받는 것이기 때문인가 보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영광에 쌓여 계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면서 엉겁결에 모시고자 한다. 베드로가 성인들을 뵈면서 잘 모셔야겠다는 지극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존재로 모셔두기를 바랬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신다. 마치 '나는 죽으러 왔지 접대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듯 합니다. 이 모습은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 28)하신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하신 이유와 상황은 바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 즉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루가 9, 31)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기도 중에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빌지만,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마태 6, 10)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 그리고 다시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42) 하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와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 인간이 그리는 영화처럼 너도 이기도 나도 이기며, 너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해피엔딩으로 마쳐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생애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실제로 고통스럽게 생애를 마감한다. 그것도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신 분에 걸맞지 않게 수치스럽고 처참하게 죽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애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그냥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즉 주님은 죽으셨지만, 아니 인간으로서의 한계인 죽음을 겪으시고 받아들이셨지만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또 믿는다. 그것은 그분의 죽음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위한 삶이었고 죽음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활시켜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또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살아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싶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우리의 믿음이다.

현실에서는 손해보고 억울하게 죽지만,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된다는 믿음이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루가 9, 35) 이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될 마지막 그날에 주님과 함께 부활하기로 하자.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 20-21)

아멘.



사순 제2주일

(나해) 마르 9, 2-10; 2003/03/16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한 번 습관처럼 몸에 밴 버릇은 고치기 힘들다는 말이다. 또 혹자는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노력여하에 따라 정화될 수는 있다고 한다.

사순시기가 되면 신자들은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 한 가지씩 다짐한다. 그런데 정말 변화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끔 우리가 세운 결심이 작심삼일이란 말처럼 사그라지고 마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일을 갑자기 하려니까 잘 안 되는 것이고, 또 이미 틀이 잡혀진 기존의 삶의 구조와 흐름 속에 새로운 영역을 창출하려니 힘들고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기존의 삶에 안주하려는 육의 경향이 우리를 붙들고 늘어진다. 그런가하면 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 동기가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그렇게 간절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꼭 안 해도 사는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못하니, 그럼 그냥 그렇게 포기하고 자기 신세나 한탄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 8, 32) 우리는 우리의 결심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우리를 결심하도록 하게 한 바로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또 우리의 결심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고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 앞에서 새하얗고 눈부시게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되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시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대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 그 아들 이사악은 아브라함이 백세가 다 되어 얻은 외아들이다. 그런데도 자기 아들을 바쳐가면서까지 하느님께 충실한 아브라함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충실로 인해 아브라함의 후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세상 만민이 그 덕을 입을 것이라고까지 하셨다.

사순2주간을 맞으면서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기 위하여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희생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충실히 노력하자.



사순 제2주일 서울대교구 교구장 2002년 사순절메시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자(에페 4, 24)

02/02/24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통 당하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다가올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시기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 16).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면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한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의 어둠 속에 깊이 젖어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을 배척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요한 1,11). 예수께서는 배척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1베드 2, 24).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죄에서 구원되었고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방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아직도 세상은 온갖 죄악과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창조물에 불과한 물질을 우상처럼 섬기며 스스로 물질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창조된 한 형제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극심한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외는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고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명이나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듭거듭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 1, 1-31 참조).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더욱 좋은 모습으로 만드는 데 모든 힘을 다 쏟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시기에 기도와 회개, 자선과 금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기도와 회개를 통해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자선과 금식을 통해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에페 4, 22-24) 우리 개개인이 먼저 회개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이 사순시기에 우리 자신의 회개와 거듭남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습니다. 특히 누구보다도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 지도층 안에 각종 부정과 부패에 연관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정과 부패는 연관된 당사자들의 삶도 파괴하지만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며 기본과 원칙을 존중할 때 비로소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아모 5, 24 참조).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큰 책임을 통감하고 사심 없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부강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으로도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가오는 월드컵과 지방선거 및 대통령 선거를 치뤄 내적으로도 깊이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자신과 사회 공동체, 나아가 이 세상이 하느님 보시기에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청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와 천상의 성인들, 특히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의 통공을 청하며 온인류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 사순시기를 알차게 준비하여 머지않아 맞게 될 부활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받으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02년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사순 제2주일

(다해) 루가 9, 28ㄴ-36; 2001/03/11

지난 주일 '쉰들러 리스트'라는 주말명화를 했다. 쉰들러라는 독일 사업가가 나치 독일에 처형될 유태인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 아우수비츠 수용소로 끌려갈 유태인 1000명을 자기 공장의 직원으로 채용하고 약 일 년간 먹여 살린다. 그리고 불량 총알을 만들어 전쟁에 못쓰게 한다. 그는 전쟁 후에 사업에 실패해 사회의 낙오자가 되지만, 그가 살린 유태인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의 무덤을 찾는다.

오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일 정도로 환하게 빛나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니까 빛나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대신 죽기 때문에 더욱 빛나시는 것이다. "머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31절)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나서 한 생을 살고 돌아간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고, 어떤 이는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고 간다.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려면 여러 사람을 살려야 한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함께 해줄 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바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변한 모습을 본 제자 베드로는 엉겹결에 말한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33절) 이렇게 자신의 이득과 편함을 위해 자기 일생과 일생에서 자기에게 닥쳐온 기회를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샘과 원망마저 받게 된다. 사람들을 눌러 이기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쥐어짜며 자기 것을 늘리는 사람은 도망자가 되고 스스로도 추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한탄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오늘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는 예수님의 주윗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35절)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여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 21)라고 말했다. 우리도 우리 인생 길을 밝혀주고 인도해주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의 생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로 하자. 그래서 마지막날 웃으면서 주님께 돌아가자.



사순 제2주일

(나해) 마르 9, 2-10: 2000/03/19

아브라함은 하느님으로부터 후손을 강성하게 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100세가 다 되도록 아들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00세가 돼서야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분통하고 억울해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기에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데, 주님은 천사를 시켜 말렸습니다. 그리고 자식 대신 숫양을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관습을 거부하시고 아버지에게 자식을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던 아브라함을 더욱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식 귀한 줄 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는 당신 아들을 죗값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게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로마 8, 22)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눈부시게 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 자신이 희생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시고 기꺼이 그 뜻에 따르기로 결심하셨기에 엘리야와 모세 앞에서 더욱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런 결심을 하신 예수님 앞에서, 저희도 저희에게 주님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주님의 뒤를 이어 저희를 희생하겠다고 다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르 9, 5)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과 은총을 자기 혼자 누리고자 한 것이죠. 그래서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7)하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례 때 대부모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십시오"라는 소리를 들으며 초를 받으신 여러분, 그 빛을 비추십시오. 아니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빛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형제 자매들과 나누어, 어둠과 죄악이 가득찬 세상에 하늘나라의 빛을 비추십시오. 늘 부족하다고 느껴 좀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생이지만, 그나마 지금의 내 생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주님께 보답하는 의미로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나누기로 합시다.


서울대교구장 2000년 사순절 담화문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자" (골로 3, 9-10)



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00년 대희년에 우리는 사순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사순시기는 인류 구원의 신비인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때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축제는 전례 주년의 중심이 됩니다. 사순시기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도와 회개, 단식과 자선,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도록 하며, 예비신자들에게는 세례 준비의 시기이고, 참회자들에게는 화해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 수난과 죽음을 겪으셨고, 이로 인해서 부활의 영광에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할 때 그분의 영광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세례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시기이자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는 시기입니다.



2.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이 시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새로운 모습으로 가다듬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양심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새롭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함으로써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골로 3,9-10).

또한 이 시기에 신자들은 단식과 자선을 실천합니다. 단식은 주님의 수난 고통에 참여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모든 단식에는 자선과 선행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선은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는 말씀처럼 자선은 세례성사, 고해성사와 더불어 우리의 죄를 씻어 줍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자선은 당신께 해준 것과 똑같다고 하셨습니다(마태 25,31-46참조).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 고통 당하는 이웃이 많습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어려운 이웃에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 시기에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며 화해의 삶을 가꾸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수없이 용서받고 있음을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용서를 통하여 화해의 삶을 가꿀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용서는 죄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에 대한 긍정입니다. 따라서 용서란 잘못한 사람을 다시 우리의 소중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순시기에 개인적인 회개와 보속 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회개와 보속도 함께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들이 주님을 믿으면서도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가족 이기주위에 사로잡혀 생명을 경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한 점에 대해서도 뉘우칩니다. 특히 6.25동란 때 남북한이 서로에 대해서 저질렀던 비인도적인 죄악에 대해서도 우리 신자들이 먼저 민족 전체를 대신해서 회개와 보속의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현재 식량난을 겪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북한 동포를 돕는 것은 회개와 보속의 표현이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앞당기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전반에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삶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지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선조들이 소중히 여겼던 도덕과 윤리 등 정신적인 가치는 소홀히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에는 각종 부정과 부패, 거짓과 불의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정치·경제·교육·사회 지도자들 안에서 이 같은 부정적인 모습이 더욱 자주 발견됩니다.



4. 다가오는 4.13 총선거는 새 천년기를 위한 국가 장래의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지금 국민들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민족이면서도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나라는 선거 때만 되면 동서로 갈라지는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은 지역 감정을 자극하여 총선에 악용하고 있습니다. 4.13 총선거에서는 혈연과 인연, 학연과 지연 등에 얽매여 투표했던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성숙한 정치의식을 가진 국민만이 성숙한 정치현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국민들은 각 정당의 정책과 후보자의 인격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양심에 따라서 올바른 주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치의 선진화와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40일 후면 우리는 2000년 대희년에 부활 대축일을 맞이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사순시기에도 일상적인 생활을 하지만 마음은 피정을 하는 사람처럼 거룩하게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장차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새봄의 햇살처럼 온 누리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주님의 은총이 남북으로 갈라진 채 오랜 세월을 살고 있는 우리 민족과 이 땅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두루 내리기를 기원하며 기도드립니다.

2000년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사순 제2주일

(가해) 마태 17,1-9 : 99/02/28

어떤 사람들은 평화를 빌러 성당에 옵니다. "성당에 오기만 하면 왠지 편안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신자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평화를 얻는다는 것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삶의 활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왜 오셨습니까? 우리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편안한 생활을 마련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고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일생 편안하시지 않았고 행복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고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17,2-3) 계셨습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본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환하게 변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신처럼 군림하고 천국을 거져 안겨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고, 그 하늘나라의 신비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서는 죽으셔야만 한다는 뼈아픈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당하실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처럼 보였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는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바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우리가 할 바를 다하고 이웃을 도왔을 때 나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평화를 비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없고, 평화를 달라고 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양식이 될 평화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구하시기 위해 희생하시려고 할 때 변화되신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성체성사를 영해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룸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1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순시기에 이웃에게 헌신함으로써 이웃에게는 복을 끼쳐주고, 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도록 합시다.


서울대교구장 사순절담화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너희는 진심으로 뉘우쳐 나에게 돌아오라. 단식하며 가슴을 치고 울어라. 옷만 찢지 말고 심장을 찢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오라"(요엘 2,12-13).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사순절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는 회개의 때입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간곡한 부르심을 지금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절제와 단식, 희생과 극기를 통하여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에 동참하도록 우리는 엄중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우리는 회개와 더불어 희생과 극기를 더욱 철저히 실천해야 합니다. 나라는 겨우 국가부도라는 파국을 모면하였으나 그 충격과 상처는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막막하고 안타까운 일은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의 아픔입니다.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실직자의 긴 행렬이 줄어들지 않는 한 우리 각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좌절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난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이지만 그 과정 중에 결코 인간 존엄성의 침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울러 경제난을 불러온 첫번째 원인이었던 총체적 부패의 뿌리가 곳곳에 온존해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어려움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삶을 즐기기도 합니다.

또한 죽음의 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반(反)생명 현상이 만연하고, 지역분열을 부추기는 시대역행적인 갈등과 불화 등 어두움의 현장도 여전히 널려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고통스럽고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겹쳐 있기에 2000년 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려 자신을 십자가상의 희생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 그 사랑의 극치인 수난사건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의미로 우리를 일깨워줍니다. '가슴을 치고 심장을 찢는' 참회가 요청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올해 1999년은 2000년 대희년을 목전에 두고 교황성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한 '성부의 해'입니다. 또한 제삼천년기라고 하는 미지의 새 시대를 여는 막바지 대전야(大前夜)이기도 합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며 지나온 천년기와 새로운 천년기가 교차하는 거대한 시공(時空)의 길목에 우리의 삶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우연하다거나 범상한 일만은 아닌 듯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성부의 해'를 맞이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마태 5,45)의 전망 안에서 이 세상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전망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으며 이 땅에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드러낼 것인지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교황성하께서 제시한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제삼천년기 51항)이라는 관점은 우리에게 매우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가난한 이, 버림받은 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감은 주님의 절대적인 가르침이기에 '교회의 우선적 선택'은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가 만약 그들을 위해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절제와 극기,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1고린 13)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의심할 바 없이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라며 주님께서는 이미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이사 58,6-7). 이 말씀은 이번 사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향한 주님의 엄중한 메시지입니다.

이는 단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풀고 부수고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참된 의미를 실천하는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없이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한 인간으로서도 아무런 죄가 없으시면서도 마치 극악무도한 대죄인처럼 십자가 형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모욕과 조롱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에게서조차 절대적 침묵으로 외면당하셨습니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한 외로움 속에서 고통의 극한을 다 견디신 끝에 참혹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이를 내다보고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이사 52,14-15).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이사 53,2-3). 심지어는 "천벌을 받는 줄로만"(이사 53,4) 여길 만큼 비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본래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신데 어떻게 이처럼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하신것입니까? 그 누구 때문입니까?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이사 53,5).

그렇습니다. 이 모든 고통과 상처와 죽임이 바로 '우리의 악행'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통과 상처와 죽음을 통해 우리를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시고 구원으로 이끌어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성 대 레오 교황님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분의 육신이 우리 자신의 육신인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분의 고통, 그분의 죽음을 우리의 것으로 느낄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2고린 4,10)이며, "새 마음 새 뜻"(에제 18,31)을 품는 "새사람"(로마 12,2)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방황하는 많은 분들에게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바로 우리의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임을 고백하는 사순절의 위로를 보냅니다. 우리는 진실한 뉘우침과 절제와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대주교 정진석



사순 제2주일

(다해) 루가 9,28s-36 : 98/03/08


1998년 사순절 서울대교구장 담화(요약)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 하필 내가 이 고통을, 이 병고를 이 불행을 겪어야 하느냐?'고 묻게 되는 것 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왜 하느님의 아들 되시고 죄없으신 그리스도가 악당들로부터 박해를 받 고 십자가에 참혹히 처형되어야 하였는지, 하느님은 왜 이것을 막지 않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알아듣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고 영원히 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죽음을 이긴 생명, 불사불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힘과 지식, 지혜, 기술 등 온 세상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능력,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고, 그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인간의 상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 우리를 가이없이 사랑하시는 이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5)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의 이 힘과 지혜는 오늘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 곧 총체적 난국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내는 데 있 어서도 참으로 힘이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힘과 지혜는 나라를 구하는 데도 최선의 길입니다. 성령의 해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이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체험 하고,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1998년 사순절 서울대교구장 담화(전문)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다시 주님의 수난을 기다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우 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지시어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서 죽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수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며, 또한 이를 오늘 우리 자신의 삶 속에 구체화시키는 것이 이 시기의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른바 IMF의 구제금융 없이는 나라 전체가 부도를 내고 도산을 면치 못하는 참으로 엄청난 총체적 경제난국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자체의 힘만으로는 1,500억 달러가 넘는 외 채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라는 정부도 기업도 노동자도 가정도 마치 부자인 양 착각하 고 너무나 부실했던 탓으로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큰 시련을 겪고 있고, 그 중에서도 많은 중소기업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어떻게 살면 좋을지 모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실망과 좌절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한 다는 정신 아래 우리의 삶을 깊이 반성하고 국민의 힘을 합하여 경제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이 난국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나라 살리는 정신이 국민 운동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나라 살리기 금모으기'는 좋은 예 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위아래 없이 공동체 의식에 눈을 뜨고, 서로 위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분담하고, 가진 것도 나누는 애국애족심입니다. 바로 이웃 사랑 실천입니 다.

그 때문에 사순절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시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 사랑의 극치인 그분의 수난의 의미는 어느 때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 하필 내가 이 고통을, 이 병고를 이 불행을 겪어야 하느냐?'고 묻게 되는 것 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왜 하느님의 아들 되시고 죄없으신 그리스도가 악당들로부터 박해를 받 고 십자가에 참혹히 처형되어야 하였는지, 하느님은 왜 이것을 막지 않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알아듣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당신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함을 거듭 예언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1고린 ,23-24)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참혹히 처형된 그리스도가, 아무 것도 몸에 걸친 것 없을 뿐 아니라 "몰 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인간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이사 52,14), 인간의 마 지막 존엄성마저 빼앗긴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 되며, 하느님의 지혜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순절에 이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깨달을 수 있다면 진정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고 세상의 잣대로 잴 때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비극 자체입니 다. 그 이상의 불행, 그 이상의 패배, 그 이상의 고통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은 곧 죽음과 암흑과 절망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로는 - 한 때는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를 믿는 이 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정 섰던 바울로가 -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뿐더러 바울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1고린 2,2)고 말할 만큼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목숨 바쳐 전하였습니다. 바울로에게 있어서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십자가 없는 복음도 구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 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 3,8-10)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로는 결국 그리스도처럼 자기도 같은 고난을 나누고 같이 죽는 것을 가장 소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고 영원히 사는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죽음을 이긴 생명, 불사불멸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의 힘과 지식, 지혜, 기술 등 온 세상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의 능력, 곧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고, 그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인간의 상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 우리를 가이없이 사랑하시는 이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5)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이 힘과 지혜는 오늘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 곧 총체적 난국으로부터 나라를 구해내는 데 있어서도 참으로 힘이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때에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욕심을 따르기 쉽고 이기 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재기와 매점매석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 다수가 이렇게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에 빠진다면 이 나라는 망하고 이기주의에 빠진 국민 자신도 망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오늘의 난국을 극복하고 나라를 살릴 길은 국민 모두가 이미 서두에 언급한 대로 같은 운명 공동체임을 깨닫고, 모두가 서로를 위하고 고통을 분담할 줄 알며 가진 것도 내놓을 줄 아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그 정신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렇게 고통을 감내 하면서 이웃 사랑, 나라 사랑을 살 줄 안다면 우리는 기필코 이 난국을 극복할 뿐 아니라 우리 나라를 더욱 아름답고 빛나는 나라로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힘과 지혜는 나라 를 구하는 데도 최선의 길입니다.

성령의 해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깨닫고, 이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체험하고,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 하겠 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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