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 서울대교구장 2017년 사순 메시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가해) 요한 4,5-42; 17/03/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다가올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무엇보다 사순 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은총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느님 말씀은 선물입니다. 타인은 선물입니다”라는 주제로 올해 사순 시기 담화를 발표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생명은 선물이기에 환대와 존중과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시며 “하느님 말씀에 힘입어 우리는 눈을 열어 생명, 특히 취약한 생명을 환대하고 사랑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죄는 가난한 이를 멸시하고 차별하며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뿌리는 사람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돈에 대한 사랑은 타락의 근원이 시기와 갈등과 의심의 원천이며 결국 돈의 노예가 되게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성경은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과 향락, 육욕과 탐욕, 재물에 대한 애착을 엄하게 단죄합니다. 인간이 이기주의에 빠져 세속적인 욕심만을 탐욕스럽게 추구한다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웃이 굶주리고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부만을 축적한다면 죄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도 “가난한 이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준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선물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행위보다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느님 말씀은 살아있는 힘으로 인간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일으켜 인간이 다시 하느님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끕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자주 접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나라는 현재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잘 극복하고 더 발전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치가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당리당략과 이기심보다는 나라와 국민들의 공동이익이 무엇인지를 잘 헤아리는 진정한 지도자들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특히 신자들이 먼저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회개로 사회 전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 사순 시기에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사순 시기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사순 제3주일

(나해) 요한 2,13-25; 15/03/08

가끔 신자들이 묻습니다. “신부님 성당 언제 다시 지을 거에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무너질 위험이 있으면 다시 짓죠!” 우리가 바라보는 성전은 그저 주 하느님께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에 대해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건물입니다. 훌륭한 성전은 보기 좋은 성전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전은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성전은 또한 외적으로 화려하고 특별한 건축물로서 평가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의 본질인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상 한 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도 일찍이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이라면, 우리를 하느님의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이끄시고 계시다는 면에서 우리 신자들을 성전이라고 가리키십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 6,19)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는 백성으로서의 충실한 신앙생활보다 종교계율을 글자 그대로 지킴으로써 신앙생활의 본질을 다 채우는 것으로 여기는 유다 백성들에게 율법주의에 의한 그 허구의 유혹적 실상을 지적하시며,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라고 선언하십니다.

교회는 오늘 첫 번째 독서 탈출기에서 새로운 성전인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주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키도록 명하신 십계명을 듣게 합니다(탈출 20,1-17).

하느님께서 우리가 살면서 꼭 지키라고 주신 계명(TORAH-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또한 그 사랑의 길이 인간의 완성과 구원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교육하십니다. ‘누가 자신들을 구원해 주었는지’, ‘구원된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다시 또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십계명을 통해 명확히 심어 주십니다. 십계명의 내용은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주 하느님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지키고 이루어야만 할 길이요 방안인 ‘십계명’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인간 존엄과 평등의 근거이신 하느님). 하느님을 믿고 찬미하며 감사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 기도를 들어주면 하느님이시고, 안 들어주면 하느님께서 안 계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보다 자기에게 좋고 편한 것에 집착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셨으니 하느님만을 섬겨야 하고, 다시는 누구도 다른 인간에게 지배당해서는 안 되며 다른 인간을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만이 우리 삶의 최우선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틀렸다고 하거나 무시하고 미워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여야 합니다.

둘째,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나를 위해 하느님을 파는 거짓 맹세 등으로 하느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느님을 믿어서 그렇게 바르게 사는구나!” 할 정도로 삽시다.

셋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주일(일요일)은 하느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지난 한 주간을 잘 지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오는 한 주간을 기쁘고 사랑 가득한 가운데 지낼 수 있도록,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께 기도 드리는 날입니다. 주일은 힘있게 다시 일하기 위해 쉬는 날입니다. 주일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친척을 찾아가 인사하고 돌보는 날입니다.

넷째,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모에게 대한 순종과 공경, 권위를 인정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자녀의 자세를 말하며, 또한 부모는 자녀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다섯째, 사람을 죽이지 마라. 사람을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모상(영, 얼, 모습)을 심어 주셨습니다. 사람은 사랑 받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하거나 이용하려 하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고 이웃의 고통을 모른 체하면 간접 살인에 해당됩니다.

여섯째, 간음하지 마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과 가정 생활을 사회적으로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좋은 것을 넘어,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아울러 무절제한 사랑으로 태어나는 아기의 인권과 생명의 고귀함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스스로의 때를 채우고 기다리는 노력으로 참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일곱째, 도둑질을 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을 자기가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거나, 줄 것을 주지 않거나, 몰래 가져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와 사랑을 무시하고 가로채는 것이 됩니다. 이 계명은, 7년마다의 안식년과 7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희년에 담보 잡힌 각종 소유권과 지배권을 해소시켜 해방되게 합니다. 이는 가난하고 억울한 이를 되살리는 규정입니다.

여덟째,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나를 위해 다른 사람 핑계를 대거나 거짓말을 해서 그 사람이 대신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 증언은 죽음의 벌을 받아 마땅한 거짓말을 가리킵니다.

아홉째, 열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내가 어려워도 함께 사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부모님, 형제, 자매들 그리고 친구들과 이웃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또한 너와 내 안에 있는 악을 없애기 위해 노력은 하되, 인간을 미워하지는 맙시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이다.” 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자제하며 인격적인 성숙을 맞이합시다.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새 성전이며 새 교회인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들어주신 주 하느님께, 주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고 사는 우리가 주 하느님의 성전으로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는 마음으로 십계명에서 제시하는 길을 걸어 나가, 주님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하기로 합시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사순 제3주일

(가해) 요한 4,5-42; 14/03/23

우리는 제사상을 차릴 때, ‘조율이시,’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두동미서’ 등의 지침을 따릅니다. 미사 전례를 봉헌하면서도 전례지침을 늘 염두에 둡니다. ‘초가 몇 개냐?’ ‘어디에다, 몇 번, 어떻게 절을 해야 하느냐?’ 는 등등 여러 가지 세세한 일들에 신경을 많이 쓰고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 최고의 정성을 다해 좋은 것을 바치고, 우리의 예를 다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다인처럼 보이는 예수님께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라고 물으면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차이와 구별을 언급하며 구원받을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사마리아 여인은 유다인으로 보이는 예수님께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요한 4,20) 하면서 어느 곳이 진정으로 예배드릴 곳이냐며 예배장소에 대해 묻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 4,21.24) 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사의 형식과 예절 규정을 넘어, 진정으로 감사드리며 은혜를 청하는 이들의 마음이 우선이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읍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1-2) 라고 말합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같이 살라고 보내주신 이 시대, 이 자리의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라고 하신 주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합시다.

사도 바오로가 공동체 업무 안에서, “저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로마 12,3-6) 라고 한 말에 따라,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잘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합시다.

또 공동체 인간관계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19.21) 라는 사도의 말에 따라,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거나 놓지 말고 사랑을 견지합시다.

셋째,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거나 포기하지 말고, 스스로 지켜내고 이루어냅시다!’

그리고 우리가 영과 진리 안에서 ‘새로 나기’가 힘들고 ‘주님의 말씀을 이루기’가 힘들 때, 주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맡깁시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에제 36,25-27) 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보일 듯 보일 듯 하면서도 선명치 않고, 들릴 듯 들릴 듯 하면서도 확연치 않기에, 알 듯 알 듯 하면서도 온전치 않아,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갈증을 깊게 하고, 섣불리 알았다 싶으면 우상을 만들거나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나, 그나마 찰나의 만남들이 우리의 타는 목마름을 적셔주고 우리를 살찌워줍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우리에게 심어주신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우리 삶의 기준이요 힘으로 삼고, 영과 진리의 삶으로 예배하며 살아나갑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사순 제3주일

(다해) 루카 13,1-9; 2013/03/03

요즘 이런 유머가 돈다고 합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벌어오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고, 그저 그런 아들은 내 아들이라는 부모님들의 한숨 섞인 자조적인 농담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던지 간에 모든 자식들에게는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다 포기하고, 자녀들에게 올인합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다 똑똑하고 잘 난 자식만 되는 것도 아니고, 잘 자란다고 하더라도 가끔은 속을 썩입니다. 그 중에는 부모에게 커다란 아픔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실수건 순간적인 흥분이던 의도적이던 악의적이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비난을 해도, 또 부모마저도 그 자식의 범죄를 이해하기 힘들어도, 부모는 자식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다른 나쁜 친구들의 꾐에 빠져서 그런 것이라고, 결코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그 부모를 통해 세상에 사람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살려둬서는 안 되고, 그가 지은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여달라.’고 하는 아들을 실제로 죽여 없애는 부모는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그래 너는 죄인이니 나가 죽어라 또는 나는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으니 가서 호적 파가거라.’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교회는 아버지의 사랑에 빗대어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죄인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은 또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땅이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아서 한 평생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리라.’고 하시자, 카인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창세 4,14) 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하느님께서는 이 카인과 아벨의 기사를 통해 ‘비록 내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세상에 내지만,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의 것도, 그 부모의 것도 아니고 내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이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8)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왜 주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가? 왜 미루시는가?’는 등의 논란이 커지자 사도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종말을)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주님께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시면서 생명을 거두지 않으시고 참으시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상은 사형이 흉악한 범죄가 다시 저질러지지 않도록 하는 예방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형제도로 인해 많은 사형수가 죽었어도 흉악범죄는 없어지지 않고 더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유엔은 1988년과 2002년에 두 차례 사형제도와 범죄억제 효과의 연관성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사형제도가 폐지되고 생명존중 문화가 정착된 곳일수록 범죄율이 낮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제인권옹호연맹 한국지부의 조사결과 우리나라 법관 3명 중 1명이 오판의 경험이 있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판정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나서는 무죄로 밝혀진다고 해도 이미 죽은 다음이라 되돌릴 수 없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58년 간첩죄로 사형을 당하고 나중에 무죄로 판명된 진보당 조봉암 선생입니다. 그리고 1975년 4월 9일 새벽 사형선고가 확정된지 18시간만에 8명을 사형시켜버리고 2007년에 와서야 전원 무죄로 판명된 민혁당 사건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사형이 집행되는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사형이 언제 집행되는가 살펴본 결과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사형을 언도 받고, 그 죄값으로 바로 사형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사형수를 교도소에 가둬두다가 정부에서 사회의 국면전환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그 사형수를 데려다가 죽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짓고 죽어야 한다고 사형을 언도했으면 그 죄를 물어 그 때 바로 죽였어야 하는데, 세상은 그를 다른 이유로 죽인 것입니다.

그럼 그렇다고 해서 회개하지 않는 흉악범죄자들을 그냥 사회에서 살아 돌아다니도록 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감형없는 무기징역형’ 즉 ‘종신형’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난 1997년까지 920명을 사형에 처했고, 김영상 정부에서1997년 12월 30일 23명을 사형시킨 후 16년이 넘도록 더 이상 사형을 집행하지 않아서 지금 국제사회에서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2010년 2월 헌법재판소에서 사형제도를 5대4의 합헌으로 판결을 내리고 난 뒤 찬성한 5분 중 2분이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며 개선이 필요하다고 표시하였습니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정식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권고하고 15-18대 국회에 사형제폐지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아직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미뤄져 왔습니다.

교회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일이 무엇이고’, ‘그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괴로워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자는 것입니다. 비록 교도소의 영어의 몸으로 일생을 보내더라도, 평생 바른 삶으로 기워 갚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이 사회를 사는 동료 우리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제19대 국회에 낼 사형제도 폐지와 종신형 제도 입법화를 위한 입법청원 서명지를 보내왔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용서해 주고 다시 죄를 뉘우치고 회복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넘어 생명의 빛을 향해 생명의 문화를 다시 꽃피운다는 의미에서, 생명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도 사람의 존엄한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폭력과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이 때 생명존중 문화를 정착시키기로 합시다.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입니다.” 라고 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을 되새기면서 사형제도폐지와 종신형제도 입법 청원에 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루카 13,8-9)



사순 제3주일

(나해) 요한 2,13-25; 12/03/11

지난 주일 전임 주임사제였던 김숭호 신부님께서 오셔서 캐나다 위니팩 한인 성당의 교육관 건립을 위한 모금이 있었습니다. 2차 헌금으로 1,370만원이 봉헌되었고, 또 개별적으로 전해달라고 미리 맡기신 분들이 555만을 봉헌해 주셔서 총 1,925만원을 전달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전임 사제분들의 사목활동이 그분들이 봉직했던 시기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평가될 수는 있어도, 저에겐 모두 동료 사제이고 우리 모두를 위해 봉사하셨던 본당 신부님들입니다. 이렇게 사제와 사제의 사목사업에 헌신적으로 협조해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내심 김 신부님의 동창 신부님이 계신 본당에서 1,500여 만원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보다 적게 나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 신자들이 전임 본당 신부님이 와서 모금하는데 천만원은 넘겨주시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이렇게 많이 모아 주셔서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이 정도면 체면차례는 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평소에 본당 헌금도 이 만큼 나오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ㅋㅋㅋ..!

여러분도 기쁘시죠? 왜 기쁩니까? 내 것을 내 주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받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을 받는 것도 기쁩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하나가 더 생기는 것보다 하나가 없어지는 것인데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기쁩니다.

실제로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고 다른 한 그룹은 무료봉사를 하도록 했답니다. 연구진이 노동을 마친 학생들의 체내 면역기능의 변화를 조사했더니, 무료봉사를 한 쪽 학생들에게서 나쁜 병균을 물리치는 항생체가 나타났고 면역기능도 크게 강화되었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마더 데레사’의 전기를 읽게 한 다음 인체변화를 조사했더니 봉사활동에 참가하지 않고 마더 데레사의 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인체의 생명능력은 크게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버드 의대 연구진은, 단지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거나 타인에 대한 봉사를 생각하거나 그 봉사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항체 'lgA'가 증가되는 것을 두고 ‘마더 데레사 효과 The Mother Theresa Effect’라고 공식적으로 이름 붙였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랑의 봉사를 하고 나면 며칠이나 몇 주간 동안 인간의 심리적 포만감인 '헬퍼스 하이'(Helper's High)가 좋아진다고 합니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좋아지고 엔도르핀이 평소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봉사와 나눔은 남을 위한 행위지만, 오히려 봉사하고 나누는 나에게도 삶의 의미와 기쁨, 그리고 영육적인 건강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16)

여러분은 성당에 왜 오십니까?

성당에 와서 무엇을 하십니까?

성당에 와서 주님께 무엇을 청하십니까?

우리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탁하는 것보다 부탁을 받는 것이 더 편하듯이, 기도도 마찬가지처럼 느껴집니다. 주님께 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보다, 내 형제 자매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주님께 대신 청하는 것은 내 것을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편안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봉사할 때 진정 행복하고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주 쉽게 느낍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목숨을 바쳐주셨고, 또 그렇게 우리를 살리셨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다시 생명을 주셔서 부활하게 하시고, 오늘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를 맞아, 평소에 하나라도 더 얻고 더 채우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정화하여, 인류를 구하시는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해지고 이웃에게 넘쳐 흐르기를 기도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



사순 제3주일

(나해) 요한 2,13-25; 06/03/19

안녕하십니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늘 그렇게도 꿈꾸어왔던 새 성전에 들어와 첫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와 정성을 쏟아왔고, 희생과 노고를 바치면서 기다려왔습니다.

성전을 짓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염원과 노력을 받아주시고 이렇게 열매 맺어주신 하느님과 교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88년 12월 성전 건축 위원회가 발족하고, 지난 1996년 10월 27일 토마스 머피 주교님으로부터 새 성전 건립을 승인 받고, 2005년 5월 22일 알렉스 부르넷 대주교님께서 성전 기공 미사를 봉헌해주신 이래 오늘 2006년 3월 19일 사순 제3주일에 새 성전을 건립하고 입주하여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성전건립을 위해 수고해 주신 역대 사목협의회장과 사목위원들, 역대 성전건축위원장님들과 위원들, 구역장, 단체장, 봉사자 여러분 그리고 성전건축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헌신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세월을 거쳐 수고하고 하느님께서 그분들의 노고와 우리 모두의 염원을 허락하시어 이렇게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주차장 입구나 뒤편 호수의 주변도로 등 아직도 많은 부분에 공사를 계속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사는 기술자들이 하는 것인 반면, 우리도 새 성전 공사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공사는 이 성전에 모여서 날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술자들이 땀을 흘려 지어 놓은 이 성전에 여러분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새겨 놓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기쁘고 행복할 때, 세례와 견진 그리고 혼인과 매일의 미사와 고해성사와 각종 성사가 집전될 때마다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은총과 그 은총을 받아 여러분이 감사드릴 때!

여러분이 삶의 순간 순간에 기쁘고 행복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릴 때!

여러분이 힘들어 지칠 때, 고통 속에서 방황할 때의 그 간절한 염원과 유혹과 악에서 헤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흔적들을 이 성전에 아로새겨 이 성전이 참으로 하느님 백성의 안식처요 기도처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사람들이 지은 이 건물을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시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성전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얼과 의지와 땀과 정감들이 이 성전 곳곳에 아로 새겨져,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기도하도록 이끌고 기도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여야 하겠습니다.

열왕기 상권 8장 22절부터 53절을 보면, 솔로몬이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 이런 기도를 바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23)

“그러나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 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 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27-30)

솔로몬은 또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적에게 패배하였을 때’ (33), ‘죄를 지어 비가 내리지 않을 때’ (35), “기근이 들었을 때, 흑사병과 마름병과 까부깃병이 돌거나 메뚜기 떼와 누리 떼가 설칠 때, 적이 성읍을 포위할 때, 온갖 환난과 온갖 질병이 번질 때,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개인으로나 전체로나 저마다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며, 이 집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무엇이나 기도하고 간청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어 용서해 주시고 행동하십시오.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아시니, 그 모든 행실에 따라 갚아 주십시오. 당신만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그들은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 사는 동안 언제나 당신을 경외할 것입니다.” (37-40)

“또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속하지 이방인이라도, 그가 당신 이름 때문에 먼 고장에서 찾아오거든, 곧 그들이 당신의 위대한 이름을 듣고, 당신의 강한 손과 뻗은 팔이 하신 일을 듣고 와서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면,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 이방인이 당신께 호소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루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의 이름을 알아모시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당신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가 지은 이 집이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41-43)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님께 간청합니다.

“눈을 뜨시어 당신 종의 간청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간청을 굽어보시고, 그들이 당신께 부르짖을 때마다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십시오.” (52)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이곳에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교회와 주님의 뜻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주님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주님의 봉사자들이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기쁘게 전하도록,

그리고 우리 삶의 순간 순간에 얻게 되는 온갖 기쁨과 희망들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우리가 바치는 감사의 기도를 맞갖게 받아주시도록,

또 우리가 겪는 슬픔과 번뇌들 속에서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이끌어 주시도록,

우리들과 우리들의 가족, 친척, 친지들의 안위와 평안을 허락해 주시도록,

우리들의 동료와 이웃들의 사정들도 주께서 헤아려 주시도록,

그리고 우리가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넘어가고 지나쳐가는 아픔과 아쉬움을 주께서 친히 채워주시고 지켜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매일 매일 간절하고도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친히 내려 오셔서 우리의 애환을 들어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심으로써 주님을 뵈옵고 주님과 함께 우리의 생을 일궈나가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이 성전에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이 성전을 기억하며 기도함으로써, 이 성전에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하시기를 저 역시 수녀님들과 함께 매일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사순 제3주일

(가해) 요한 4, 5-42; 05/02/27

옛날에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와 예수회 수사가 신학 토론을 하다가 이런 문제를 냈답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가 담배를 즐기는 예수회 수사에게 “기도하면서 담배필 수 있느냐, 아니냐?”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예수회 수사가 되물었답니다. “담배피면서 기도할 수 있느냐, 없느냐?”

기도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만, 기도는 늘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다른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회원들의 지론이었답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까 기도에 대한 규정들이 오히려 기도하는 자체보다 더 표면에 드러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당신은 유다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하고 묻는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원수같이 지내느라고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니가 유다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가 문제지, 니가 물이 필요하냐 안 필요하냐가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올 한 해를 교황님께서는 ‘성체성사의 해’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조배를 하는 이들에게 전대사를 베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체조배 하십니까? 우리 성당의 경우에는 하루 종일 보아도 성체조배하는 사람 몇 명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오죽하면 교황님께서 성체조배를 하는 사람들에게 전대사를 베푸시겠다고 하시면서까지 꼬셔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누가 뭐라기 전에 우리 자신의 생애와 우리 삶의 시간표는 우리가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또 다르게 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일뿐 아니라 운동하느라 시간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또 사람 만나는 재미로, 사회 활동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서 지내던 우리는 누구나 다 24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어서, 24시간 중에 자기가 필요한 일을 먼저 그리고 꼭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직장을 나가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를 삼습니다. 게으르거나 남의 돈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물론 가사노동을 하는 주부와는 다른 관점이겠지요.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평균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을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막말로 그렇게 일해야 먹고 살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육신의 삶을 위해서는 하루 8시간씩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우리 영혼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 몇 시간 기도합니까?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성당에 와서 성체조배할 시간이 하루에 단 한 시간도 없는가? 자기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손님도 접대하고, 운동도 하고, 술도 마시고, TV도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도는 여러분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지 않습니까? 육신의 양식은 하루 8시간씩 일해야 겨우 얻지만, 영혼의 양식은 하루 한 시간을 채우지 않아도 주님께서 다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더 기도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게 당연한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께서 다 돈 벌어다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데려다주니까 그냥 그게 당연한 거처럼 여기고 삽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굳이 시간을 내어 기도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지켜주시고 배려해 주니까 새삼스럽게 기도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고도 살지 않습니까?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내 주먹을 믿지 왜 하느님을 믿느냐?” 자기 스스로 맨 주먹으로 자기 재산을 일구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살아올 수 있었고 지금도 살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고 인정받지도 못하는 하느님께서 그가 그렇게 일하고 얻을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고 삽니까? 다 우리네 주먹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다하지 않습니까?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로는 주님의 힘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실상 내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내가 하는 것이지 주님께서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계획도 내가 하고, 일도 내가 하고 다 내가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주님께서는 한 번 제대로 도와주시지도 않고 이게 뭐냐고 원망합니다. 한 번 청하지도 않고 주님께서 몸소 일하시고 도와주시도록 맡겨본 적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10)

교황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성체조배를 하시도록 권면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조배를 할 수 없는 분들은, “제대의 성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적 현존에 대한 믿음으로 진심어린 열망과 더불어 영신적으로 성체를 조배하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주님의 기도와 사도 신경을 바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가장 한가한 시간에 한가한 곳에서 마음을 잡고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연상하며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하는가? 묵상과 관상의 깊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성체를 연상하기도 몇 분 집중하기 힘듭니다.

가끔 저는 성체 앞에서 기도하기 힘들 때, 분심이 많이 들 때, 묵주기도를 합니다. 앞에 수사님들처럼 성체조배하면서 묵주기도를 해도 되냐 안 되냐를 따지면 또 하나의 신학적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묵주기도의 신비 하나 하나를 연상하고 묵상하면 좋은 기도주제가 됩니다.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하면서 마리아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천사가 왔는지, 천사는 오늘 내 부모, 친지, 자식, 동료 누구의 모습으로 내게 나타나 하느님의 뜻을 전할까를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오늘 나에게는 무슨 하느님의 일을 가슴 속에 잉태시키시려고 하시는가? 내가 지금 당장 마음속으로 잉태하듯이 새기고 꿈꾸며 지켜 나가야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집중하며 그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 속에 잠겨 있는 것은 아주 좋은 기도의 주제가 됩니다. 마리아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하고 응답하듯이 내가 형제들을 통해 들려온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까지 이 묵상은 훌륭한 성체조배가 될 수 있습니다. 묵주의 20단 신비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나간다면 성당에 와서 성체조배를 하지 못해도, 자기가 있는 곳에서 성체 안에 실재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원효 대사는 불교적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수양도 되어 있지 않은 일반 대중들에게 돌아다니면서 말했답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쳐라. 자꾸 하다 보면, 뭔가 될 것이다.

저는 어떻게 하면 우리 신자들이 성체조배를 잘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하루 한 시간 성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십시오.

정 물리적인 시간이 안 된다면, 자신의 가장 한가한 시간에 한가한 곳에 앉아서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묵주의 신비에 나타난 20개의 장면으로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분심이 들면 주님의 기도나, 사도신경, 또는 성모송을 반복하면서 다시 집중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를 살려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나눠주시는 주님 성체의 신비에 참여하십시오.

묵주기도의 해에 이은 이 성체성사의 해에, 주님 사랑의 신비와 그 깊이를 깨우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24)



사순 제3주일

(다해) 루가 13, 1-9; 2004/03/14

미국에 와서 새삼스레 자주 듣는 소식은 사고 소식이다. 한인들에 대한 빈번한 총기 사고와 미국 내의 유괴 및 각종 범죄다. 한국에서도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얼마 안 되는 듯한 한인들에 대한 공격에 대한 소식이다.

여러 가지 사고들이 생겨나지만 그 중에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범죄행위는 참으로 피하기도 힘들고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사고에 대한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무슨 원수라도 진 관계도 아닌데 그야말로 억울하게 당해야 하기 때문에 왜 내가 당해야 하는 충격이 사고를 겪는 충격과 겹쳐 이중고를 겪게 된다. 그저 죄라면 한 사회에 함께 살고 있다는 죄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이의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일반적이고도 대표적인 이유를 든다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의 불합리하고 부적절한 제도와 그에 따른 소득과 분배의 불균형 그리고 이 사회의 역학관계 등이 나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와 나 개인의 행동 수준을 넘어서는 변수로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이들이라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사실의 원인관계를 넘어 신앙의 신비 차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구원에 이르는 고통에 관한 신앙의 신비는 다음 주 사순특강을 통해 듣는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희생제사를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씀하신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2-3) 그 뿐 아니라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는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4-5)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사고와 범죄를 별개의 행위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같은 사고를 당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일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을 못 받고, 또 사고를 당한 것이 내 범죄행위와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안전장치를 하고 주님의 보호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안전장치라면 보안장치를 들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안전장치라면 우리가 기회가 될 때마다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나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안전장치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행위로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이 사회의 형제자매들과 우리의 시간과 재물을 나눔으로써 우리 자신이 안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서 우리로 넘어가는 과정이고 작은 우리에게서 큰 우리 즉 다민족 사회의 일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어서 주님은 주인에게 소작인의 역성을 들어주는 포도원지기의 예를 들어 말씀하신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8-9)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주님께서 아버지께 우리의 역성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느낀다. 그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떠나고 주님의 말씀을 배반하면서 신앙의 문턱 앞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일으켜 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께 빌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고해성사를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감사드린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죄를 고백하기 힘들어 성당에 가기 힘들다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고해성사라는 제도를 통해서나마 용서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그나마 고해성사마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씻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시고 인도해주시지만 그 길이 연약한 우리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재생의 기회를 허락하시지 않았는가! 매번 마음만 먹으면 되돌아갈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이 우리에게 판공성사 때마다 아니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매일 매일 열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의 문을 열고 기다리시는 주님 앞에 회개하여 돌아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의 고집이 문제다. 그리고 또 고해성사를 보고서도 회개하여 새 삶을 시작하지 않고 매냥 고해성사 보기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별 문제만 없으면 그냥 그렇게 거기 안주해 머물고 싶어하는 우리의 부정직한 미련이 문제다.

오늘 이집트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출애 3, 7)하시면서 새 삶의 희망을 안겨주신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 인간들이 어려워하는 삶의 조건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시기에 거듭 우리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면서 우리를 희망과 구원으로 이끄시고 계시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초대하시는 주님께 기꺼이 다가가 새롭게 살도록 하자.



사순 제3주일

(나해) 요한 2, 13-25; 2003/03/23

예수님께서는 오늘 성전을 정화하신다. 성전을 정화하는 일은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따르라고 주신 십계명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길이다.

첫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셨으니 하느님만을 섬겨야 하고, 다시는 누구도 다른 인간에게 지배당해서는 안되며 다른 인간을 지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둘째,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나를 위해 하느님을 파는 거짓 맹세 등으로 하느님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느님을 믿어서 그렇게 바르게 사는구나!" 할 정도로 살자.

셋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지난 한 주간을 감사드리고, 오는 한 주간을 청하며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께 기도한다. 또 쉬어야 한다. 그리고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친척을 찾아가 인사하고 돌보아야 한다.

넷째,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사랑해야 한다.

다섯째, 사람을 죽이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드셨다. 사람은 사랑받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미워하거나 이용하려 하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간음하지 마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과 가정을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또 단순히 좋은 것을 넘어,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아울러 무절제한 사랑으로 태어나는 아기의 인권과 생명의 고귀함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며, 각자 스스로의 때를 채우고 기다리는 노력으로 참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일곱째, 도둑질을 하지 마라. 어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거나, 줄 것을 주지 않거나, 몰래 가져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와 사랑을 무시하고 가로채는 것이 된다.

여덟째,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나를 위해 다른 사람 핑계를 대거나 거짓말을 해서 그 사람이 대신 피해를 입게 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은 죽음의 벌을 받아 마땅한 거짓말을 가리킨다.

아홉째, 열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함께 사는 이들을 존경하고 사랑하자. 또 너와 내 안에 있는 악을 없애기 위해 노력은 하되, 인간을 미워하지는 말자.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과 사랑이다"라는 것을 기억하고 자제하며 살아야 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자.



사순 제3주일

(가해) 요한 4, 5-42; 02/03/03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과 사마리아의 '그리짐 산' 두 곳으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며, 배타적으로 서로의 장소와 예배 형태만을 강조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23절)고 하신다. 과연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좋은 꿈과 이상을 정한다. 교회와 사회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좋은 꿈과 이상을 정한다. 예를 든다면,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고 지역사회의 유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올바른 가치관과 선과 악의 개념을 형성해 주고자 유아들에게 신앙교육을 하겠다는 꿈과 이상을 정한다.

둘째 좋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를 잡는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주일학교 교육만으로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없고 또 비신자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매일 복음을 전하고 자모이신 교회의 품안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유아의 신앙 교육기관을 세우겠다는 목표를 잡는다.

셋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단계와 계획을 설정한다. 유아의 신앙 교육기관을 세우기 위해서는 교회와 사회의 현실적인 제도를 살펴보고, 우리의 목표 실현에 적절한 형태를 정한다. 개인의 적은 비용 부담으로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정부보조의 어린이집을 선택하고, 그 집을 지을 장소와 예산 및 건립과정과 건축공정을 잡는다.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가르칠 교과과정을 설계한다. 그리고 유아의 신앙 교육에 적합한 교육환경을 정한다.

넷째 우리가 세운 목표와 계획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인지 점검한다. 우리가 세운 목표와 그 계획들이 실제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인지 확인한다.

다섯째 주님께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꾸준히 노력한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세운 계획들이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이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기도는 장소와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자기 봉헌과 희생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결심과 계획을 세워 실현하는 일이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길이다.



사순 제3주일

(다해) 루가 13, 1-9; 2001/03/18

나쁜 짓을 한 사람이 겪는 불행을 보면서 천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나머지 우리는 모두 의인일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런 비유를 들었다.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룸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 버리십시오.'"(7-9절) 포도원지기의 이 말은 혹시나 하고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을 읽는 듯하다. 그런데 한 해만 기다리면 정말 될까?

사도 베드로도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리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 9)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이용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한 번 두 번 용서를 받다보니까 버릇만 나빠진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는커녕 '아 안해도 되는 구나!' '이렇게 해도 되는 구나!' 하면서 끝끝내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자기 위주로 살려는 사람마저 생겨난다. '용서해주시겠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날 벌하실 수 있는가?'하는가 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안하면, 그만이지 어떻게 하실꺼야!'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계신 것인데 우리말을 들어주셔야지 우리 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면 돼!' 그리곤 자기 맘대로 하고 자기 맘대로 안되면, 하느님과 주위 사람들과 사회를 원망하면서 자기 책임을 남에게 돌린다. 심지어는 누군가를 미워해야만 자기 죄책감이 씻어진다고 느끼는 사람마저 있다.

사도 바오로는 악을 일삼고 불평을 하다가 멸망한 조상들을 열거하면서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1고린 10, 12)라고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향해 경고한다.

주님께 다가서면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회개할 수 있고 또 용서하게 된다. 누군가가 미워질 때 기도하자, "저를 계속 용서해주시는 주님, 제가 이번 한 번만 더 참고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아니, 제 마음 속에 불평과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악마를 몰아내고 주님 사랑을 다시 회복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사순 제3주일

(나해) 요한 2, 13-25: 2000/03/26

초기 천주교회사를 보면, 김대건 신부님이나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목적 배려가 항상 수반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할 수 있다. 한불수호조약으로 종교자유를 얻은 후, 한국 교회는 본당을 설립하면서 대부분 각 본당마다 공통적으로 '고아원', '양노원', '시약소'(오늘날의 보건소)를 운영했다. 이것은 교회가 선교를 신자 늘리기나 개인적인 종교생활로 국한시키지 않고, 현세 사람들의 아픔과 필요에 복음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라고 여겨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정도인가?. 그렇다면 살 것 다 살고 죽기 전에 믿으면 되지 않겠는가? 성당에 온다는 것은 내세의 구원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현세를 살아가는 촉박한 인간들의 심리적이고도 정신적인 안정과 위로 그리고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는 어릴 때 중림동 성당을 다녔습니다. 그 성당에는 유치원도 있었고, 1974년도까지 성요셉 병원이라고 해서 자선병원이 있었습니다. 한편 저희 어머니도 일제시대에 성당에서 운영하는 가명학교를 다니셨습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어려운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성당에서 지역사회인들의 현실에 대해 복음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지금 서울대교구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대부분 본당에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곳은 아주 적습니다. 아니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지금보다 더 어려울 때도 없는 살림을 쪼개서 고아원, 양노원, 시약소 등등의 나름대로의 사목적인 배려를 했는데 비해 현대 교회는 이웃돕기에 해당하는 예산을 단체지원금이나 행사비로 쓰고 있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하느님의 집' 구실을 못하는 성전을 가리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마르 2, 19)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당 건물뿐만 아니라, 성령에 이끄심에 따라 복음을 믿고 가슴속에 담고 있는 우리들이 성전이며, 복음이 실현되는 그 장소가 성전이 된다고 말합니다.(1고린 3, 16; 6, 19 참조) 주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라'(루가 4, 18 참조)고 하십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뻐하겠습니까? 성당 차원은 물론이고 신자 개개인이나 구역 반모임에서 어떻게 이웃의 필요와 욕구에 응할 것인지 궁리하고 실현합시다.



사순 제3주일

(가해) 요한 4,5-42 : 99/03/07

가끔 자식들이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을 때면, 그리고 아직 철없는 젊은이들이 자기의 생각대로만 인생을 설계하고 세상을 살려고 할 때면 답답함을 느낍니다. 한편 자기가 경험한 세계와 그 경험 속에 갇혀 인간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안타까움마저 간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머리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계산하고 자기의 인생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꾸며나가야만 한다는 절박감 속에 사는, 자기 외에는 누구도 생각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도와줄 엄두도 못내는 이른바 폐쇄적이고 다소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2-33) 그리고 다른 한편 자기밖에 자기를 돌볼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덧붙여 예수님께서 주실 그 샘솟는 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4,13)

그럼 그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4,32)고 하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양식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4,34)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물은 예수님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는 일이다. 40주야를 단식하신 예수님 앞에 나타나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살라고 하는 악마에게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고 하신 예수님. 바로 그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살게 해주시는 원동력이다. 예수님을 갈망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며, 우리에게 들려온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일 그 일이 바로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다.



사순 제3주일

(다해) 루가 13,1-9 : 98/03/15

"One Time, See!" 미국에 간 한국인이 경찰에게 걸려서, 영어는 잘 모르고 콩글리쉬로 한 말 이었답니다. "한 번만 봐죠!"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이런 인생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 님께서는 포도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이라는 무화과나무를 심어 열매를 기다렸으나 삼년이 지나도 열리지 않아 베어버리려고 하자, 예수님이라는 포도원지기가 한 번만 더 봐줘서 우리를 잘 키워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는 열매를 맺게 기회를 주라 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고통받는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응답하고 계신가? 주님은 "나는 내 백 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 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나는 곧 나다."(출애 3, 7-8.14)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를 낳으시고 키우시고 지금도 우리를 염려해주고 계시다. 그런데 지금까 지 오늘의 우리를 이렇게 있게까지 해 주신 부모님께 한없는 감사와 효로 응답하고 있는가? 아 니면 지금까지의 부모님의 노고는 당연한 것이고, 그저 한 두 개의 작은 점이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나에게 불편하다고 해서 갖은 불평과 불만, 원망과 홀대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제와의 관계에서, 가정과 사회 그리고 세상 안에서 진정 나를 바치려는 노력을 기울 이기로 하자.

우리에게 진정 거룩함은 그저 한 낱 성서에 나오는 말씀일 뿐인가? 성서의 거룩한 말씀도, 교회에서 제시하는 성인 성녀들도, 인간의 자기 완성이라는 우리의 근원적인 목표도 다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리고 꿈과 이상 속에서 그리기나 할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의 이상과 꿈을 실현시켜 보자. 진정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구현하여 하 늘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 이 참회와 회개의 사순절에 주님께로 돌아가 주님의 사랑 안에 서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현하여 구원을 이루자. 하루하루를 그냥 그렇게 아쉬움과 포기로 그치 지 말고,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이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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