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17/03/26

우리는 살면서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을 한 뒤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죽을뻔한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던지,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났다던지, 일상에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했다던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던지 할 때 우리는 힘이 샘솟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한 번 은총을 입었다고 해서 다시는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시 그런 은총을 또 입는 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체험들은 일생 동안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되어 힘겨울 때마다 우리 삶의 영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게 되면, 과거에 읽었던 성경구절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고, 새로운 의미로 우리를 일깨워주고, 우리 마음을 새롭게 불러일으켜 줍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환하게 비춰줍니다. 마치 천둥번개를 치듯, 끊어졌던 숨이 되살아나듯, 우리에게 새로운 쾌감과 힘을 던져두고,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비춰주시고, 현세의 난관을 극복하고 펼쳐나갈 새로운 길을 비춰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명을 따라 사울의 뒤를 이을 왕을 선택하러 갑니다.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 중에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1사무 16,6) 하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1사무 16,7) 라고 하시며 사무엘을 말리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뽑을 때 사울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1사무 10,23) 고 합니다. 이렇게 출중했던 사울은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주 하느님은 “나는 사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는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내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1사무 15,2) 라고 하시며 사울을 왕좌에서 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아버지 이사이조차 아들로 취급하지 않는 막내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찾고 이행하려고 하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님 백성의 지도자로 선택하십니다. 힘과 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께 의지하려는 자녀 된 마음으로 주님과 백성들에게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시편 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입장에서는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고 눈먼 사람에게 '~까지 가서 씻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눈먼 사람이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하는 사실이나, 눈먼 사람의 답답하고 힘에 겨운 삶은 안중에도 없고 안식일 계명이 지켜지고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요한 9,16) 하는 정당한 문제제기도 무시돼 버립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이번 기적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무효다!'라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미나 군중에게 끼칠 영향이나 효과를 충분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그 부모와 눈을 뜬 사람에게 예수님이 안식일에 '(고치는) 일'을 했다고 자백하도록 유도합니다.

눈 뜬 사람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었다는 사실, 즉 기적이란 사실은 증명해 주면서도,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침묵해 버립니다. 이러한 부모의 움츠리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바리사이파들은 그 눈멀었던 사람을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24절) 하고 윽박지르며, 그도 죄인이라고 동의해주기를 요구합니다. 드디어 주님을 섬기기 위한 안식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진정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눈 뜬 사람은 유다인들이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그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분도 (더 자세히 알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27절)

눈 뜬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여부에 대해 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다인들에게 오히려 그 기적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말로써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31.33절)

자신들의 속이 드러나 버린 유다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회당에서 쫓아냅니다.

눈 뜬 사람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밝힙니다. "내가 (거지였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9.33절) 그리고 예수님께 "주님, 저는 믿습니다."(38절) 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납니다(3절).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에페 5,8-11) 라고 일깨워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되새겨 봅니다.

첫째, 오늘 복음에서 눈을 뜬 사람처럼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 물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말할 수 있을지 자문해 봅시다.

두 번째, 바리사이들처럼 사람이 자기 이해관계 안에 갇혀서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변질되고,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하느님은 머무실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요한 9,28-29)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39. 41절)

세 번째, 예수님께서 앞을 보게 된 이를 찾아 가셨듯이 우리가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눈 뜨게 되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복음의 하느님 나라로 이끄십니다.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세상의 어두운 관점에서 벗어나, ‘주님이 어떤 의미에서 내게 빛이신지?’ ‘어떻게 하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간직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빛의 관점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접하는 사건과 상황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맞이하여, 주님께서 빛처럼 깨우쳐주시고 비춰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나가도록 합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14/03/30

지난 주 월요일 아침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몸이 안 좋았습니다. 빨리 드리고 쉬어야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제 머리 속에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이 미사 한 대뿐이야. 이 미사를 마지막 미사처럼 드려야 돼.’ 하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 때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 해지면서, 미사 경본의 글씨가 평소보다 아주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고, 몸에 생기가 돋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을 한 뒤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죽을뻔한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던지,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다던지, 기상천외한 방안을 찾아냈다던지 등의 체험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났다던지, 일상에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했다던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던지 할 때 우리는 힘이 샘솟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한 번 은총을 입었다고 해서 다시는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시 그런 은총을 또 입는 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체험들은 일생 동안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되어 힘겨울 때마다 우리 삶의 영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기도와 신앙의 체험은 늘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적용되기 때문에 과거의 만남의 힘과 기쁨은 사라지지 않지만 과거와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 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은 언제나 자유롭게 나타나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그분께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분의 오른손이, 그분의 거룩한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다.”(시편 98,1) 그처럼 주님도 우리에게서 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어하시는가 싶습니다. “하느님, 제가 당신께 새로운 노래를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시편 144,9) 주님과 함께하고지 하면, 과거에 읽었던 성경구절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고, 새로운 의미로 우리를 일깨워주고, 새롭게 우리 마음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환하게 비춰줍니다. 마치 천둥번개를 치듯, 끊어졌던 숨이 되살아나듯, 우리에게 새로운 쾌감과 힘을 던져두고,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비춰주시고, 현세의 난관을 극복하고 펼쳐나갈 새로운 길을 비춰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명을 따라 사울의 뒤를 이을 왕을 선택하러 갑니다.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 중에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1사무 16,6) 하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1사무 16,7) 라고 하시며 사무엘을 말리십니다. 사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뽑을 때 사울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1사무 10,23) 이렇게 겉모습이 출중했던 사울은 주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주 하느님은 “나는 사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는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내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1사무 15,2) 라고 하시며 사울을 왕좌에서 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라고 하시고는, 아버지 이사이조차 아들로 취급하지 않는 막내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선택이라는 면에서, 사울을 선택하고 시련에 잠긴 사무엘에게 지도자에 대한, 하느님 백성을 다스릴 하느님의 사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찾고 이행하려고 하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선택하십니다. 힘과 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께 의지하려는 자녀 된 마음으로 주님과 백성들에게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그 눈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안 보이던 눈이 보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보게 된 이후에, 이어지는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안식일과 예언자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눈을 뜬 다음부터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한 9,9) 라고 하는 그였지만, 종전에 사람들이 보아온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요한 9,8.9절 참조). 그는 새롭게 눈을 뜨게 되면서, 다른 사람처럼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요한 9,16)가 기준이 아니라, 사람에게 실제로 “눈을 뜨게 해준”(요한 9,17) 그분이 “예언자이십니다.”(요한 9,17) 라고 답함으로써, 안식일 계명 준수 여부와 예언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시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배척됩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을 찾아온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분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이며, 예언자이며, 마침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주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8,12)고 하시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에페 5,8-12) 라고 일깨워줍니다.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성경말씀이지만, 오늘의 삶 속에 새롭게 다가오는 성경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새로워지기로 합시다.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나는 배우자와 가족이지만, 주님께서 어떻게 새롭게 바라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지 믿고 의지하며 살아갑시다.

우리를 어둠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각과 관점에서 벗어나,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간직하기로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빛의 관점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접하는 사건과 상황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맞이하여, 주님께서 빛처럼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선과 의로움과 진실의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사순 제4주일

(다해) 루카 15,1-3.11-32: 2013/03/10

많은 사람들이 다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재의 편함과 이득을 위해 부끄러운 일을 계속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이 들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들키더라도 그것을 알게 된 다른 이가 모른 척 해주기를 바라고, 피해를 끼친 상대에게 용서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보상을 해야 하거나 벌을 받더라도 가급적이면 계속 일하고 사는 데에 문제가 없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잘못임을 깨닫고, 그 잘못을 뉘우치며, 잘못을 다시 바른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릴까 봐, 벌을 받을까 봐, 지금의 자기 자리와 상황을 상실할까 봐 두려워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바른 참회의 길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하느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에게 어떠한 패악을 끼쳤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며, 다시는 안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피해를 끼친 상대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청하며,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면 가능한 되돌리고 보상하며, 되돌리거나 보상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기워 갚으며, 실제로 자기 자신도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 비로서 회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고백했을 때, 우리가 용서받으리라는 믿음이 없다면, 아니 우리가 커다란 벌로 완전히 파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면, 우리는 죄를 뉘우치지도, 고백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희망과 그 희망 때문에 자기 잘못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는 아버지나 선생님이나 하느님 아버지께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 안에서 나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도 용서해 주시고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사랑의 체험에서 나온 확실한 믿음이 우리를 회개의 길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집 나간 아들은 쫄딱 망해서 아버지 집 밖에는 갈 곳도 없고,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그래 너는 죄인이니 나가 죽어라 또는 나는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으니 가서 호적 파가거라.’ 라고 하지 않고, ‘지금까지 네가 쓴 돈을 다 복구할 때까지 노예로 살라.’ 고 하지 않으며, ‘잘하는지 못하는지 두고 보자’ 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라고 하시며 반기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는 한 때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아들에게 그가 무엇을 잘못했고, 그가 가정에 끼친 경제적인 손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힙니다.’(22절ㄱ) 마치 그가 자기가 한 잘못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왜소해지거나 가족 중 다른 누구에게 차별이라도 받을까 걱정하여 더 큰 대접으로 배려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22절ㄴ) 그 아들이 집을 나가기 전에 주인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들의 지위를 상징하던 그 반지를 다시 끼워주고 아들이 싣는 신발을 다시 신겨 그를 복권시켜 줍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23절) 그리고 말합니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24절)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그의 형 즉 아버지의 집에 있던 다른 아들이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형은 그렇게 돌아온 동생도, 그를 다시 집안에 들여준 아버지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형은 동생이라는 존재보다는 그가 저지른 잘못을 그냥 두고 넘어가기가 싫었고, 그런 잘못을 까발려 고발이라도 해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았고, 정의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으로 인해 자기가 감내해야 할 손해도 떠맡기 싫었습니다. 또 그를 받아들이면 자기가 지금까지 누리던 독보적인 혜택이 반으로 줄 뿐 아니라, 앞으로 또 자기에게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지 모르는 계산이 자기 동생을 받아들이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그 동안 자기 피부에게 와 닿을 정도로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 마디나,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양 새끼는커녕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던 아버지가 가문에 수치를 안겨주고 집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도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동생을 그래도 아들이라고 반기는 아버지가 야속하고 섭섭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잔치까지 벌여주시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29-30절)

형은 화가 났는데 아버지는 왜 기뻐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존재가 아들이 벌어오거나 잃은 재물보다도 중요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괴롭히거나 남의 돈을 빼앗거나 사기치는 등등의 더 큰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그나마 거기서 그치고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것이 기특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아들이 다른 누구에게 가서 빌붙거나 노예처럼 살지 않고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께 의지하며 돌아온 것이 아버지로서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타이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돈은 앞으로 더 벌어도 되고, 더 못 벌더라도 조금 줄여서 살면 되지 않니? 지금 보기에는 따지기도 싶고 얄밉기도 하지만, 네 동생이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빼앗겨서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인생을 포기하여 자살이라도 하거나, 자기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려 삐뚤어져 더 큰 범죄라도 짓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더 슬프겠느냐. 악마에게 빼앗긴 것보다는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그는 한 때 선과 사랑을 잃고 죽었다가, 다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과 빛과 사랑을 발견하고 따라왔으니 그를 구한 것이고, 그가 살아난 것이 아니니. 그러니 우리가 어찌 기쁘지 않니?’

여러분, 이런 아버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실에서는 이런 아버지를 찾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아버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시며, 이런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지금까지 살려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돌보아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돌아오기를 매일 집 밖에 나와 우리가 떠나왔던 바로 그 길 언저리를 바라보며 우리가 이제나 돌아오나, 저제나 돌아오나 하면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용서를 청하시느라,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죗값으로 주님의 생명을 바쳐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런 주님의 사과와 보상을 우리 죄의 값으로 받아주시고, 그 대신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19.21)

우리를 구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그리스도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며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살면서 혹시 여유와 마음이 닿으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식과 이웃을 전후 좌우 이득 손실을 뒤로하고, 죄악의 상황에서 떨어져 나오고 벗어난 이들을 용서하며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나와 생각이 다르고 행동방식이 다르다고 화를 냈던 부모나 기대했는데도 내가 바라던 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섭섭해하던 어른들도 용서하고 배려하고 돌봐주기로 합시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4.31)



사순 제4주일

(나해) 요한 3,14-21; 12/03/18

지난 월요일 인목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제 얼굴을 보더니 좋아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샤워하고 왔어요!” 했는데도, 계속 좋아졌다고 무슨 일이 있냐고 하길래, “우리 본당에 보좌 신부님이 오셨다”고 했더니, 그것만으로는 얼굴이 그렇게까지 밝아질 수가 없다고 하길래… “박 신부님 오셔서 예전처럼 제가 새벽미사 드리고 한 시간 성체조배 해서 그런가? 뭐 별로 전보다 달라진 것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요즘 제 얼굴이 밝아 보입니까? ㅋㅋㅋ

그랬더니 한 신부님께서 ‘다이돌핀’(didorphin)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엔돌핀은 기쁠 때 체내에서 생성되는 것인데, 다이돌핀은 감동을 받을 때 생성된답니다. 예를 들어, 심금을 울리는 감상적인 노래를 듣거나, 아름다운 외적 풍경에 감동을 받을 때, 스스로 전혀 새로운 진리(사실)를 깨달았을 때, 엄청난 사랑의 감정에 빠졌을 때, 마음의 심층에 파문을 일으키는 감동을 받을 때 우리 체내에 다이돌핀이 생겨난답니다. 그리고 이 때 생겨난 다이돌핀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 아주 강한 긍정적인 힘이 되어 암이나 기타 환부를 공격하기도 한답니다. 어떤 의학자들은 다이돌핀이란 호르몬은 엔도르핀의 4,000배 정도의 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17)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잘잘못을 지적하시거나, 우리에게 죄책감을 안겨주시거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키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고, 그 증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 짋어지시고,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우리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들의 생명을 우리 죗값으로 삼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에페 2,8)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고 하는 것도 사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적으로 병들지 않고 외적으로 강한 세력이 나를 괴롭히지 않아 내가 사는 것이고, 나를 둘러싼 그 내외적인 환경들이 나를 휘감거나 사로잡지 않도록 안배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은총과 선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9)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고, 우리 생명과 시간과 재물의 일부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도 사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10) 예전 공동번역의 예를 들어도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리 2,13)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선행을 하면, 시나이 산에서 40일 동안 기도한 모세처럼 얼굴이 환하게 빛나게 되고, 지난 주 말씀드린 마더 데레사 효과나 다이돌핀이 생성되어 좋아집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못하고, 좋은 일도 못하고, 게다가 하지 말아야 할 나쁜 일 마저 하게 되거나, 힘겨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괴로워지고 그야말로 우리 얼굴에 표가 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 사랑하도록 창조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근심에는 개인적인 것뿐 아니라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 그리고 나라 안팎으로 겪게되는 여러 가지 근심거리들도 있습니다. 2000년 전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주님의 그 고뇌에 찬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주님 자신의 생명을 바치며 희생하셨던 주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성사를 기억하며,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우리이기에 주님께 감사와 의탁의 기도를 바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5)



사순 제4주일

(나해) 요한 3,14-21; 06/03/26

언젠가 누군가 제대 위에 올라가서 양손을 쫙 펴들고 “신부님, 저 어떻게 보여요?”하면서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기뻐하길래, 제가 뒤를 보라고 했습니다. 제대 뒤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서 사람들이 우러러보도록 하고, 사람들을 호령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찬사와 영광을 거머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오해와 멸시와 증오를 한 몸에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부활하여 사람들 앞에서 거룩하게 빛나시는 예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려하고 심지어는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치 TV에 나오는 스타처럼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러러 보이기 위해서 훌륭한 특기와 재주 또는 돈이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돌아가시기까지 사람들을 섬기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셨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르치신 것이 진리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기적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배불리 먹여주시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시고,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들의 한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셨으며,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함께하실 때에는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급기야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그것을 아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 되셨고, 그분이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게 되신 것입니다.

자리는 뺏어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존경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희생하고 투신한 만큼 희생을 바친 사람들에게로부터 또는 그 희생을 인정하는 사람들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리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없어지지만, 존경은 자기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없어지지 않고 기억되는 감탄과 감사의 정입니다. 희생은 하지 않고 강제로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질투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고,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유혹하는 악 때문에 예수님은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려 계셔야만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14)

예수님의 이 거룩한 수난과 희생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의 수난과 희생을 받아들여 인간을 죄와 악에서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5-16)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자격지심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괴로워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잘못과 악습을 뉘우치고 새롭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자격지심이나 죄의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죄책감과 죄의식을 안겨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7)

우리가 매년 사순절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그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형제들에게 희생 봉사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할 일은 주님의 영광의 자리를 넘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추악한 권모술수와 탐욕을 부리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 죄를 뉘우치며 주님의 구원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찬미드립시다.

그리고 세상의 죄악을 주님 구원의 빛으로 비추시고 씻으시는 주님의 은혜로움을 받아들이고 깨끗해집시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희생을 따라 형제들에게 희생 봉사합시다.

아멘.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 1-41; 05/03/06

우리말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가 맘에 들고 고마우면 처갓집의 말뚝조차도 반갑고 소중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반면에 마누라가 미우면 어떻게 될까요? 마누라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얄밉고 괘씸해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마저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그가 하는 일조차 싫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모두 마음에 안 들고, 좋은 일이라고 그가 주동하거나 그가 끼어 있으면 나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하면 욕이요 인격모독이고, 내가 하는 욕은 패러디이고 유머이다.

남이 글 쓰면 별 볼일 없는 낙서고, 내가 쓴 글은 예술이다.

남이 실직한 것은 능력부족이고, 내가 실직한 것은 경제가 안 좋아서다.

남이 파산한 것은 당연한 적자 도산이고, 내가 부도낸 것은 억울한 흑자 도산이다.

남이 비오는 날 강변을 혼자 거닐면 청승맞은 것이고, 내가 비오는 날 강변을 혼자 거닐면 낭만을 아는 사람이다.

남이 뚱뚱한 것은 많이 먹고 빈둥거리기 때문이고, 내가 뚱뚱한 것은 천성이 착하고 낙관적이기 때문이다.

남이 야윈 것은 성질이 까탈스러워 살조차 붙을 새가 없는 것이고, 내가 야윈 것은 지적인 활동을 많이 해 살찔 틈이 없기 때문이다

남이 외도하면 불륜이고, 내가 외도하면 로맨스다

남이 가는 휴가는 농땡이고, 내가 가는 휴가는 재충전이다.

남이 가는 해외여행은 외화낭비고, 내가 가는 해외여행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다.

남이 식욕이 왕성한 것은 가득 찬 욕심의 표현이고, 내가 식욕이 왕성한 것은 충만한 생명력의 표현이다.

남의 흰머리는 빨리 늙은 탓이고, 내 흰머리는 지적 연륜의 상징이다.

남이 천천히 차를 몰면 소심운전이고, 내가 천천히 몰면 안전운전이다.

남의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공처가고, 내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애처가다

남의 딸은 내 아들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내 딸은 남의 아들을 휘어잡고 살아야 한다.

남의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버릇없이 키운 탓이고, 내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주장이 뚜렷해서 이다.

남이 민소매를 입으면 지나친 노출이고, 내가 민소매를 입으면 개성과 패션이다.

남이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고방식이고, 내가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남이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고, 내가 술자리에 자주 가는 것은 인생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남이 술잔을 돌리는 것은 위생관념이 전혀 없는 것이고 내가 술잔을 돌리는 것은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자는 것이다.

남이 술 마시고 주정하는 것은 좋은 분위기 깨는 추태이고, 내가 술 마시고 주정하는 것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제스처다.

오늘 복음도 이런 인간 세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눈이 먼 병자를 고쳐주자, 어떤 사람들은 반기고 기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아는 하느님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마땅히 지켜야할 안식일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심리가 뒤틀리자 눈을 뜨게 한 사실을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범죄행위로 규정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는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16) 그리고 심지어는 눈먼 사람이 눈을 떴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려고 듭니다.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19)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니까, 아예 예수님과 눈멀었던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웁니다.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24. 34)

지독한 자기 중심주의의 극치입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맘에 들지 않으면 하느님마저도 부정하고마는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어야만 하느님이지,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지 않는 분이라면 그는 하느님도 아니다 라는 식입니다. 게다가 내 뜻을 거스르거나, 내 앞 길에 방해가 된다면, 세상 그 누구도 제거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자기 중심주의 즉 인간의 교만에 의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속셈은 그들의 질문을 통해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눈이 멀었던 사람도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잘 몰랐지만, 반대자들의 질문을 통해 차츰 차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 못 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25. 31-33)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기들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듯 양심에 걸리게 되자 화를 내고 저주합니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34) 그리고 유다인들은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34)

자연스럽게 눈이 멀었던 사람은 자기가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처음에는 막연하고 불확실했지만, 질문과 사람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면서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다.”(35-37)

그러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은 “‘주님 믿습니다.’하며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38)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 물을 때,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지.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말할 수 있을 만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확실한 체험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모조차 자기들이 다칠까봐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23)하면서 피해갔지만, 눈멀었던 사람은 과감하고 명확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9)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17)

두 번째는 인간이 나를 내세우면서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서 떠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눈이 먼 사람을 보게 해주신 기적을 베풀었는데도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은 주님의 기적과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또 그래서 그 은총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너는 그 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28-29) 그러자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차라기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39. 41)

셋째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말을 듣고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좋은 마음과 의도를 헤아려주십니다. 사람들은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분이라고 증언하자 회당에서 쫓아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몸소 찾아가십니다.(35절 참조) 또 이런 모습은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사무엘이 주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왕을 뽑을 때도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사무 16, 7)



사순 제4주일

(다해) 루가 15, 1-3. 11-32; 2004/03/21

가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듣는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요구한다. 우리 같으면 배신감과 분노에 떨면서 따귀라도 갈길텐데,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준다. 마치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은 외면하면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청하는 것이나, 지금 자기가 살아 있고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 계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스스로 실패함으로써 재물의 가치를, 인생을 배우라는 듯이 작은아들에게 자기가 땀흘려 얻은 것도 아닌 아버지의 재산을 그냥 넘겨준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가 땀흘려 얻은 것도 아닌 재산을 제대로 간수하고 쓸 리가 없다. 그는 얼마 안되어 알거지가 되었고, 그가 재산을 가지고 있을 때 그가 아니라 그의 재산 때문에 그와 함께했던 어느 누구도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는 경제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파산한 것이다.

아버지를 떠나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작은아들은 자유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홀로 남겨진 불행한 자신을 발견해야만 했다. 아버지를 떠남으로써 얻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의 피조물과도 또 자신의 근거인 아버지와 떠났기에 자신도 잃어버린 것이다.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챙기고 자신을 찾으려다가 아버지와 큰아들을 소외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도 자기 가족에게서부터 소외돼버린 것이 되었다. 알거지가 된 다음에야 작은아들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아주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 소외를 풀기 위해 아버지께 돌아간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고, 자기 것을 찾는 마음을 접고, 자신의 자존심도 잊고, 수치스럽지만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면서 자기 가정으로 돌아간다. 먹을 것이 없어 살기 위해서 아버지의 집을 찾았지만, 그는 결국 자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아버지와 형, 가정을 다시 얻은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기 혼자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자만하고,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동료 피조물의 모임인 공동체와의 이기적인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얻은 것은 고립과 단절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우리의 공허함과 외로움 그리고 우리 존재의 근원적인 바램을 어디서 채울 수 있겠는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곳은 아버지 하느님의 품뿐이다. 세상과 재물을 얻기 위해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포기한 이들이 얻는 것은 외로움과 허망함뿐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을 얻기 위해 재물이나 세상을 포기한 이들이 얻는 것은 하느님과 형제들과 함께 누리는 기쁨과 사랑이다.

작은아들이 이렇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매일 문밖에 나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시리라는 것을 그리고 자기가 돌아가면 자기를 살려줄 것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20)

그래서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죄를 고백한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21)

그런데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주제넘은 기대가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더 큰사랑으로 맞아주신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22)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큰아들이다. 작은아들처럼 용기가 없어서 아버지께 자기 유산을 달라고 못했던 것이 작은아들과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정도로 큰아들은 작은아들이 돈을 날리고 돌아온 것에 대해 불쾌해 한다. 게다가 그런 동생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편애라고 느꼈다.

큰아들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누가 봐도 잘못한 죄인인 동생을 그렇게 잘 해주는 것을 곱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큰아들이 볼 때 작은아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잘못한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을 오히려 없던 것으로 하고 전과 같이 대해줄 뿐만 아니라 잔치마저 차려주자 화가 난 것이다. 더군다나 큰아들은 작은아들이 자기 유산을 다 날리고, 이젠 자기 몫마저 나눠 주어야할 형편에 놓인 상황이 싫었다. 큰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작은아들에 대한 처우는 부당한 것이고 불합리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이런 윤리주의자들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하느님은 인간이 선한 일을 해야만 상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주는 계산적이고 조건적인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은 과거에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를 문제삼지 않고, 지금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다시 돌아온 것 자체로 기뻐하시고 상을 주신다. 그리고 재물의 증감보다는 인간 생명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신다. 아버지는 그저 자식이 돌아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기쁜 것이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31-32)

참으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마음은 안 그렇지만 다 하지 못했던 것들, 하지 말아야 했지만 눈앞의 유혹과 이해관계에 빠져 저질렀던 죄악들, 했어야만 했는데도 여러 가지 여건을 핑계삼아 지나쳤던 순간 속의 부끄러운 우리 죄인들에게 언제든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이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가 주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은총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진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주님께 희망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

주님은 진정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없던 것으로 해 주시고, 다시 처음부터 아니 더 큰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시고 부르시고 계시는 주님께 돌아가기로 하자.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씻어주시고,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채워주시며 하늘 나라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께 기꺼이 나아가기로 하자.

돈과 세상의 유혹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악마에게 빼앗긴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들을 다시 구해오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내 주셔서 우리를 구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녀의 본분으로 어서 빨리 다가들기로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고린 5, 18-20)

주님, 제게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고, 저를 주님 사랑의 도구로 써주소서. 아멘.



사순 제4주일

(나해) 요한 3, 14-21; 2003/03/30

한식이 되면 우리는 부모님의 산소에 간다. 부모님이 남달리 우리의 뇌리에 그토록 남아있는 이유는 단지 우리를 낳았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키우기 위해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쳤다는데 있다.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자식을 바치는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다시 아들을 돌려 주셨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는 정작 당신의 아들 예수를 제물로 삼으셨다.

우리 중에 하느님의 이 커다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 교회의 사제, 수도자, 평신도로 구성된 하느님 백성 어느 누구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저 사제 서품을 받았고, 수도 서원을 했고, 세례를 받았고,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솔직히 우리도 잘 모르는 채 직책과 역할을 맡았고, 그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고 채워주시는 은총에 힘입어 여기 이 자리에 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에페 2, 8)

그런데 세상은 어떤가? 세상은 서로 달라고 하고, 얻어 가려고 하고, 받으려고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섭섭하고 각박하고 원망스럽다. 만일 서로 주려고 하고 베풀려고 한다면 사회는 경쟁보다는 배려가, 전쟁보다는 용서와 나눔이 넘쳐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남들은 받고도 모자라 더 받으려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다 받았다고 느끼기에 또 나누고 나누어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채워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에 나눌 수 있다.

그러면 얼마나 나눌 수 있는가? 우리도 남들과 똑같이 이 세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돈으로 살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우리가 나누는 만큼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과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것은 진정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 사랑의 행진에 참여케 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 16)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 1-41; 02/03/10

"열심한 신자는 누구냐?"하는 질문에, "주일과 대축일 미사에 참례했는가?" "교무금은 꼬박 꼬박 냈느냐?" "판공성사는 보았느냐?"하는 외적으로 드러난 자료를 기준으로 삼아 평가한다. 그래서 이 기준을 채우지 않은 사람을 쉬는 교우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쉬는 교우들을 만나보면 "제가 비록 성당에 나가지는 않지만 언제나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믿는 주님을 행동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쉬는 교우들은 성당에 나와야 한다. 그러나 미사와 판공성사, 교무금 등의 객관적인 기준을 다 채우면서도 마음이 냉랭하거나 내적으로 공허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사무엘이 이새의 첫째 아들 엘리압이 선왕 사울처럼 장대하게 생긴 것을 보고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용모나 신장을 보지는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1사무 16, 7)라고 하시면서 사무엘의 생각을 뒤엎으신다. 오히려 아버지 이새조차 아들로 여기지 않는 '다윗'이라는 어린아이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세우신다. 성서는 이 모습을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 그 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러 있었다"(13절)고 기록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도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느냐 아니냐는 안중에 없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고치셨다는 것을 트집잡아, 그 기적이 무효라고는 못할지라도 불법이고 죄인이라고 몰아붙인다. 부모도 혹시 자신들이 그 일로 인해 불이익이라도 당할까봐 모른다고 잡아뗀다.

그러나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자기의 증언을 유도하여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려는 유다인들 앞에서 그분은 '예언자'(요한 9, 17)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33절)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으로 말미암아 회당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서 "주님, 믿습니다."(38절)하고 꿇어 엎드려 고백한다.

우리가 이 은혜로운 사순절에 성사도 보고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영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어야겠다. 소경이 자신을 고쳐준 분을 과감히 증언하고 고백하듯이, 우리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께서 진정 나를 살리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생생이 느낄 수 있어야겠다. 그래서 성령의 불로 타올라 주님을 향한 봉헌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희생적인 삶으로 드러내야겠다.



사순 제4주일

(다해) 루가 15, 1-3. 11-32; 2001/03/25

누군가를 떠나 보내고 나면 항상 못해 주었던 것만 생각난다. 기도할 때도 못해 준 것, 안해 준 것만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다. 어릴 때부터 동생들에게 다 해주지 못했던 것. 부모님 살아 생전에 잘 해드리지 못했던 것, 같이 살던 동창과 동료들, 동반자들, 신자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누군가가 아프다고 할 때 얼른 찾아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애정어린 마음으로 기도해 주지 못했던 것,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내일처럼 아파하며 함께해 주지 못했던 것, 마음만 조금 더 쓰면 잘 되도록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고 심지어는 알면서도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렸던 일들이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무릎꿇고 기도할 때마다 내 고개를 더욱 더 깊이 숙이게 한다.

게다가 잘 해주기는커녕 비난하고 욕을 퍼부었던 일, 조금만 넓게 생각하고 받아들여 주었으면 되었을 텐데 시기와 질투 그리고 오만과 미움으로 들어주지 않고 훼방놓은 꼴이 되어버린 일들마저 생각나 마음이 괴롭다. 거기에 내 실책과 부족함 그리고 죄악마저 합쳐져 나를 우울하고 낙담하게 한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주님의 위로를 얻고 새희망을 받는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죄는 사해졌고, 우리는 우리를 살려 주신 주님 사랑의 힘으로 오늘도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의 죄로부터 해방되고 우리를 막고 있던 장애물을 걷어치울 수 있는 힘을 받아 살고 있다. 이것이 주님께 돌아선 우리의 행복이다. 거지가 되어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 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22-24절)고 기뻐하시며 잔치를 벌여주시던 아버지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새 삶을 허락하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챙기고 우리 마음대로 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을 멀리 떼어 놓게 하고 결국 나에게서 소외된 그들은 나를 소외시킨다. 작은 아들이 돈이 떨어졌을 때 그 곁에 아무도 없었던 것과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형으로부터 소외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만은 우리가 소외시켜 드렸어도 우리가 다시 찾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다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 살게 해 주신다. 어서 빨리 주님께 돌아가 주님 안에서 새로 살기로 하자.



사순 제4주일

(나해) 요한 3, 14-21: 2000/04/01

누구나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주님과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도하다가 또는 생활에서 문뜩 떠오르고 찡하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면서 강하게 다가온 느낌과 그 체험을 통해 '아, 이거다' 싶어 그것에 머무르면 자칫 나만의 우상이 되기 십상이고, 또 기도 안에서 주님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살거나 주님께 대한 체험도 없이 막연하고 밋밋하게 살 다 보면 주님이 안 계시신 것은 아니라고 해도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듯하고 가끔 애매할 때가 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17절) 2000년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라는 인물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진정 그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분의 죽음으로 내가 살게되었다는 확실한 체험과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고 싶다는 결심과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15절) 그런데 그 체험이 전부는 아니니까 그 첫 체험을 바탕으로 매번 새로 시작해야 한다.

또 한편 주님과의 체험이 계속되고 관계가 유지된다고 해서 주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기도해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고,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때가 있다. 망막하고 두렵기도 하고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마음만 급하고 혼란 속에서 방황하게 될 때도 많다. 그럴 때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어둔밤'을 헤쳐나가듯이, 한쪽으로는 꾸준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고 또 다른 한쪽으로는 속단과 오만을 피하면서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거부하거나 피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대응하면서 나아가면 -주님의 뜻에 꼭 일치하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와 우리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려는 의지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향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긴 과정 속에 내가 정화되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21절) 광야에서 구리뱀을 쳐다보았던 이스라엘처럼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 99/03/14

오늘 복음의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의 이야기는 단순히 소경이, 눈을 떠 세상사물을 보게 되었다는 기적을 넘어 그 기적 이후 각 사람들의 행동에서 드러난 감춰진 의도와 속셈을 확연히 보게 됨으로써, 무엇이 참이고 누가 주님인지를 깨달아 믿게 되었다는 기쁜소식입니다.

유태인들이 보기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고 소경에게 '~까지 가서 씻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소경이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하는 사실이나, 소경의 답답하고 힘에 겨운 삶은 안중에도 없고 안식일 계명이 지켜지고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하는 정당한 문제제기(16절)도 무시돼 버립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 기적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무효다!'라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미나 군중에게 끼칠 영향이나 효과를 충분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그 부모와 소경에게 그가 안식일에 '(고치는) 일'을 했다고 자백하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 즉 기적이란 사실은 증명해 주면서도,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는 끼지 않으려고 침묵해 버립니다. 이러한 부모의 움츠리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바리사이파들은 그 소경이었던 사람을 불러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24절)하고 윽박지르며, 그도 죄인이라고 동의해주기를 요구합니다. 드디어 주님을 섬기기 위한 안식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진정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유태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 소경이었던 사람은 사람들이 눈이 멀었을 때 거지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을 때, 자신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내가 그 사람이오"라고 이미 명백히 밝혔습니다.(9절) 그는 이 유태인들이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왜 자꾸 묻는 거요?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그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들도 (더 알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27절)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여부에 대해 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태인들에게 오히려 그 기적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말로써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31.33절)

그러나 유태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회당 밖으로 쫓아냅니다.

소경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밝혔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그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오."(9.33절) 그리고 예수님께 "주님, 믿습니다."(38절)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냈습니다.(3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도 유태인처럼 주님이 다가오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아니 기뻐할 수 없는 유태잍들처럼 오늘 이 시대에 기쁜소식을 거부하고 축소시키고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우리의 삶과 세상 속에서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응답합니까? 아예 그런 것을 못 봅니까? 아니면 본 것이 무서워 못 본체 합니까? 우리가 못본체 하며 본 그것은 계속 우리의 뇌리 속에 남아서 우리를 믿음과 회개로 부르고 있습니다.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선포하십시오.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그러면 참 진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빛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사순 제4주일

(다해) 루가 15,1-3. 11-32 : 98/03/22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동안은 눈코뜰새도 없이 일하느라고 성서 읽기는커녕 기도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고비만 넘기고 조금 여유만 생기면, 시간만 나면 성서도 읽고 기도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먹고 사는 게 먼저지 신앙이 먼저냐며 자신을 정당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IMF 구제 금융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귀가시간이 빨라졌답니다. 일찍 들어온 만큼 시간도 많아졌는데, 요새 우리 가정마다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데 몰두하고 있습니까? 혹시 바쁠 땐 바빠서 못하고, 한가해졌지만 그 동안 안 해봐서, 몸에 배지 않아서 못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기도해서, 하느님을 만나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은 아닙니까? 돈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편안함을 주는데, 하느님은 무엇을 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복음에는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오늘날엔 마치 집나간 작은아들이 부모님들 같고, 돌아올 때까지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처럼 보입니다. 그 동안 자녀들은 돈 번다고 늦게 귀가하는 부모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젠 집에 일찍 들어왔으면서도 부모가 자기 할 일을 안하고, 이웃들과 어울려 술이나 먹고 화투나 치느라고 또 가족들을 기다리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 버느라고 빼앗겼던 시간을 가족과 함께, 주님과 함께 나누십시오. 아내는 열성을 다해서 남편과 아이들이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은 가정을 준비하십시오. 남편은 언제 봐도 건실하고 믿음직한 가장이 되십시오.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성실하고 진지한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듬직한 가장이 되십시오.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과 가족에게 어서 빨리 돌아갑시다. 남편은 아이들의 아버지요 아내의 동반자로서 가정의 주인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고 가장을 믿고 의지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아내는 남편의 협조자요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가정의 안주인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고 사회생활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어깨를 숙이고 들어오는 남편과 오늘도 공부에 시달리는 자녀들을 품어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주님께 기도하면서, 가정의 행복과 안위를 청하십시오. 다 같이 성서를 쓰면서 생명의 말씀을 새기십시오.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 96/03/17 서울 주보

오늘 복음의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의 이야기는 단순히 소경이, 눈을 떠 세상사물을 보게 되었다는 기적을 넘어 그 기적 이후 각 사람들의 행동에서 드러난 감춰진 의도와 속셈을 확연히 보게 됨으로써, 무엇이 참이고 누가 주님인지를 깨달아 믿게 되었다는 기쁜소식이다.

유태인들이 보기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고 소경에게 '∼까지 가서 씻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뿐만아니라 남을 죄짓게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소경이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하는 사실이나, 소경의 답답하고 힘에 겨운 삶은 안중에도 없고 안식일 계명이 지켜지고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하는 정당한 문제제기(요한 9,16)도 없어져 버린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 기적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무효다!'라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미나 군중에게 끼칠 영향이나 효과를 충분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그 부모와 소경에게 그가 안식일에 '(고치는) 일'을 했다고 자백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 즉 기적이란 사실은 증명해 주면서도,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는 끼지 않으려고 침묵해 버린다. 이러한 부모의 움츠리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바리사이파들은 그 소경이었던 사람을 불러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24절)하고 윽박지르며, 그도 죄인이라고 동의해주기를 요구한다. 드디어 주님을 섬기기 위한 안식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진정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유태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소경이었던 사람은 사람들이 눈이 멀었을 때 거지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을 때, 자신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내가 그 사람이오"라고 이미 명백히 밝혔다.(9절) 그는 이 유태인들이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되묻는다. "왜 자꾸 묻는 거요?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그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들도 (더 알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27절)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여부에 대해 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태인들에게 오히려 그 기적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말로써 복음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31.33절)

유태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회당 밖으로 쫓아낸다.

소경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밝혔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그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오." 그리고 예수님께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냈다.(3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아니 기뻐할 수 없는 이들이 기쁜소식을 거부하고 축소시키고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우리의 삶 속에서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응답합니까? 아예 그런 것을 못 봅니까? 아니면 본 것이 무서워 못 본체 합니까? 못본체 한 본 것은 남아서 우리를 믿음과 회개에로 부르고 있습니다.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선포하십시오. 주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E-mail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