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가해) 요한 11,1-45; 17/04/02

우리는 살면서 주위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가 하는 탐색 외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보조를 맞추고 함께 살기 위해 눈치를 봅니다. 그렇게 또 눈치보고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 이제는 마음의 병처럼 나를 망설이게 하고 주저 앉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과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 마치 영혼의 병처럼 이중의 십자가를 안겨 주는 듯합니다.

실제로 또 나이가 들면서 여기 저기 아파오고, 또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마치 약속이나 초대라도 받았다는 듯이 찾아오는 감기나 몸살 같은 몸의 이상 증상들이 우리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도록 경고합니다. 이러 저러한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일들과 사정들이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영적 전선에 장애와 벽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장애와 벽 같은 한계에 갇혀 있다면 그 장애와 벽은 우리에게 한계가 되겠지만, 그 장애와 벽을 극복하고 넘어서면 그것은 우리를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고리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는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한계에 갇힙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을 찾았을 때 이미 라자로는 죽어 무덤에 묻혔고, 그 가족은 눈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한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 마르타는 예수님께 오빠 살아생전에 오셔서 기도해 주시지 않고 죽은 후에나 오셨다고 아쉽고 야속한 마음을 담아 하소연합니다.

마르타의 원망에 대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 주님은 마르타에게 예수님을 의사나 예언자를 넘어서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까지 믿지 못하고, 그저 사람이 그 생을 다하고 죽은 후,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 때에 죽은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유다교의 믿음에만 충실한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4)라고 답합니다.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재차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 그제서야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

그러나 아직 다른 이들은 라자로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33)고 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시기라도 할양으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34) 그들은 절망적으로 대답합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34)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답답하셨거나, 라자로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동하셨거나,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음에 갇혀 무덤에 묻혀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36) 라고 말합니다.

복음사가는 반신반의하며 친지가 죽었다는 사실에만 몰두하여 전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의 대응을 바라본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워라”(3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머리와 말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라고 고백했지만, 아직 마음으로는 아니 현실에서 그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의 오빠를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사실을 상상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결과적으로 믿지 못하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제지합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3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부드럽고 강력하게 마르타를 일깨워 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 드디어 사람들이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웠습니다.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41-42) 아버지의 응답에 힘입어, 아니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해 있는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권능에 힙입어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

그러자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그를 묶고 있는 수의들을 걷어 내어 주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 가게 하여라.”(44) 그제서야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 그리고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라자로를 문상 왔던 친지들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을 헤아려봅시다. 우리가 알면서도 또 하고 싶으면서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미련이 크거나,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그러한 미련과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을 영적으로는 죄악 또는 죄악의 지배아래, 죄악의 노예상태에 놓여있다고 하며 그것을 빗대어 우리의 삶 속에 죄악의 뿌리가 그처럼 깊이 박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악의 뿌리를 다 뽑아내고 희망도 없는 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몰이해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이해와 사고방식을 깨우쳐주고 치워줄 신앙의 형제자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마치 라자로에게 돌을 치워줄 이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리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 그를 묶었던 수의로 대표되는 우리 삶의 거품들과 껍질들을 벗겨줄 신앙의 형제 자매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의 형제 자매인 교회 공동체의 역할은 바로 죄악에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주님 말씀의 힘으로 되살리도록, 그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 주님 말씀의 힘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그를 막아 놓았던 장애와 돌을 치워주는 일이며,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났을 때 그에게 신앙 안에서 더욱 더 앞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죄악에 묶여 있는 이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르타처럼 머리와 말로만 주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자 결심을 하고 실제로 실천해 나갈 때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하신 여러분을 죄악에 묶어 놓고 있는 장애는 무엇입니까? 어떤 장애와 죄악이 여러분의 자유를 구속하고 선행을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죄악의 뿌리에서 헤어나 주님의 영광스러운 새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도록. 부활이요 생명이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얘야, 이리 나와라!”

그리고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신앙 안에서 죄악의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구하러 나가라고. 형제 자매들을 사로잡고 있는 허망한 꿈과 그릇된 취득과 분배방식이라는 “돌을 치워라.” 그리고 그를 묶고 있는 꺼풀을 벗겨 “그를 풀어주어 걷게 하여라.” 라고 초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죄악과 세상의 죄라는 어둠 속에 갇혀있다고 여기신다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헤어나고 싶다면, 주님을 향해 희망의 눈을 뜨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장애에서 해방되어 다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장애에서 벗어나 여러분과 같은 장애로 헤매는 여러분 친지들의 돌을 치우고 풀어주어 걸어가도록 주님께 청하고 도와 줍시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사순 제5주일

(나해) 요한 12,20-33; 15/03/22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저를 구하여 주십시오.’ 또 성모님께도 기도합니다. ‘성모님,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게 해주십시오.’ ‘성모님, 저희를 예수님께 이끌어 주십시오.’ ‘성모님, 우리의 아픔과 어려움을 주님께 간언해 주십시오.’ 우리는 주님과 성모님께 우리의 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청합니다. 주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주님은 정말 구세주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되돌아 봅시다. 우리는 정작 우리가 믿고 모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분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루카 복음 사가는 마리아가 임신 중에 베틀레헴으로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6-7) 라고 기록했습니다. 마리아는 산파도 없이, 아기를 낳았고, 그나마 배냇저고리는커녕 낳은 아이를 뉠 곳조차 없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 밥통에 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황망하고 처절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언젠가 첫영성체 교리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왜 가난하게 태어나셨을까?”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건만, 초등부 한 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무나 뜻밖의, 그러나 정확한 답변에 순간 멈칫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서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설명하면 예수님의 케노시스(비움)를 설명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었으니까요. 성령께서는 그 아이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인간과 같은 조건과 같은 처지를 취하신 주님. 가련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가련한 처지로 오신, 그것도 가련한 인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련하게 오신 예수님. 오히려 인간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실 정도로 철저하게 인간 가난을 선택하신 주 예수님. 가련한 생활을 하는 목동들보다도 더 가난하게 오셔서, 목동들의 위로를 받으셔야 했던 예수님. 가난한 이들조차 자신의 가난을 부유하다고 느끼게 해주셨던 주 예수님.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분은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되고, 지금보다 더 잘 살고자 하는 우리의 탐욕을 채워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진정 가난하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애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분 곁에는 늘 당대 법률로는 구제받을 수 없는 사람들, 당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당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환자들이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돌봐주시기를 청하며 쫓아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처절하고 척박한 상황을 보시고 고쳐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어디 하나 의지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진정 구세주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주위에는 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당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힌 이들이 쫓아다녔고, 예수님은 그들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배려해 주셨기에,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오히려 예수님을 시기하고 예수님의 명성을 깍아내리기 위해, 에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요, 신성모독자란 죄목을 뒤집어 씌워,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려고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예수님을 죄인으로 모는 상황에 자주 처하셔 고생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모는 이들을 탓하시거나 벌하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렵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와 사정을 모른 채 하실 수도 없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본질인 사랑 때문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쉽게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곳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뿐이시고, 이 세상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 7-8) 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이익과 평안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 24-25)

세상 한 가운데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앙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매일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고 계신 신자 여러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매달리십시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면제받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동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마음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보아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자녀요 사도로 받아주시는 주님께 믿고 의지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평안과 안녕에 장애가 되는 가족이나 이웃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화되기를 바라거나 없어져 주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자기에게 주어진 가족과 자신에게 딸린 일가친척이나 형제자매들의 상황을 자신의 십자가로 삼아 짊어지고 돌봐주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27-28절)

우리의 아쉽고 다급한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어떤 면에서 더 다급하고 절실한 이들의 상황과 처지를 헤아리며, 주님께 대신 간구해 줍시다.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주님께 우리 형제들의 마음을 대신 청함으로써, 형제들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내 어려움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것도 헤아려 주시고 아울러 들어주실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도 헤아리고 곰곰히 고민하여, 마침내 주님의 뜻을 내 몸으로 실현해 봅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사순 제5주일

(가해) 요한 11,1-45; 14/04/06

제가 21년 전에 본당 주임사제로 처음 부임을 받아 사목활동을 하면서 본당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혼을 돌보는 사목이라는 것이 제가 열심히 일일이 직접 한 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안 한다고 누가 대신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하자니 불완전하고 그렇다고 또 안 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주임사제로서 영혼의 목자요 아버지라고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정말 아버지같이 다 돌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저에게 맡겨진 그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그 사정과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 부분적으로 안다고 해도 어디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지 않는 한 단편적인 내용만 알게 되고, 신자분들이 또 안 좋은 상황은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기도 하여, ‘내가 말로만 주임사제지, 책임만 많고 아무 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혼란과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도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가 없구나!’ 한탄하며 주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임사제로서 신자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자들을 위해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성무를 집행하고, 주님께서 몸소 우리 신자들을 지켜주시고 돌봐주시기를 기도하며 청하는 일이 우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 예전 본당에 함께 살던 선배 주임사제분들이 어떻게 했던가를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신부님은 한 달에 반은 밖으로 다니시며 이 일 저 일을 하시는데도, 본당에 뭐 큰 일이 생기거나 신자들에게 큰 사고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던 상황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무엇이 그 신부님의 사목 비결인가?’

그 때 그 신부님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체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한 창 젊을 때라 같이 일어나긴 했어도 그 옆에서 졸기가 일쑤였는데, 그 신부님은 주임사제라 그러신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막중함 때문인지, 매일 일찍 일어나 주님께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제가 볼 때는 그 신부님이 매일 아침 주님께 본당과 본당의 신자들의 안위를 맡기고 청하신 결과로 그 본당이 평화스러웠지 않았는가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본당 주임 사제이던, 보좌 신부이던, 아버지던, 어머니던, 가장이던, 사회에서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지고 있던지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위의 환경과 조건에 잘 맞아떨어지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만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다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돌봐주시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각이며, 그러기에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며 봉헌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에게 닥쳐올 새로운 환경과 뜻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일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생겨나더라도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께 매일 기도를 바칩니다.

또한 우리가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하여 방황하고, 잘 안 풀려서 어둠 속에 갇힌 것마냥 헤매 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사 하고 청하며, 주님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기고 따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 하지 못하는 부분을 주님께서 몸소 채워주시고, 마침내 주님의 뜻 안에서 열매 맺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드리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며,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평화로이 쉬면서, 주님의 영을 통해 우리 삶을 펼쳐나갈 힘을 받아 새롭게 일어서는 것이 기도 중에 우리가 누리는 은총입니다.

특별히 혼란과 어둠 속에 있을 때,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그 혼란과 어둠 속에 빠져 헤매게 됩니다. 바쁘고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겠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내미는 손길을 아쉽게도 거절하는 셈이 될 것이며, 주님의 힘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을 홀로 고집스럽게 그 일을 풀어나가기 위한 씨름을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으며, 고통스러운 장벽에 갇혀 지내게 될 것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로마 8,9)

그러한 청원의 근저에는 ‘우리가 주님의 자녀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실 수 있으시며,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체험과 믿음이 우리 안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라고 믿음과 희망에 차서 기도하시고, 인간을 구하시고자 하는 지극한 사랑으로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그래서 그를 막고 있는 돌을 치우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고, 그의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수건과 그를 가두고 있는 손과 발의 천을 “풀어 주어 걸어가게”(요한 11,44) 해주십니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 삶의 뿌리에 각인되어 있지 않으면, 한 때 어려워 기도하다가 해결되면 그것이 다 인양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자기가 청한 대로 해결되지 않거나 현실적인 다른 대안이 있다고 여기면, 그냥 주님께로부터 떠나버리게도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가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기쁘고 평화스러운 은총의 삶에서 벗어나 죄중에 살거나 그릇된 방법과 체계에 갇혀 늘 불안하고 힘겨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우리 삶이 내일에 대한 희망과 오늘 하루의 기쁨이 없이 짐만 가득하고, 여유와 안식도 없이 어깨와 머리만 무거우며, 오늘과 내일이 무의미하고 힘겹기만 하다면, 우리가 라자로처럼 죽어 돌무덤에 갇혀 있는 꼴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마리아와, 현세와 이웃에 대해 원망만 하고 있는 마르타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저 슬퍼하고만 있습니다(요한 11,20). 마르타는 오빠의 죽음이 마치 예수님께 책임이 있기라도 한 듯이, 주님께 투정과 원망을 쏟아 붓기만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마르타는 또 이렇게 주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고 여기면서도, 지금 당장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아주 먼 훗날 죽음 이후의 생애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관념적으로 믿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24.39)

주님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나 만날 분이 아니시며, 우리가 머리 속에서만 믿는 분이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주님은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 삶의 순간 순간에 함께하시면서 살아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지금 자신의 삶이 바쁘고 힘겨워 마치 돌무덤과 같은 장벽에 갇혀 있다고 여긴다면, 주님께 청하십시오.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기쁨과 평화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께 시간과 마음을 돌려드리며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 구원의 가르침과 힘을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에제 37,13-14)

오늘 죽은 라자로의 소생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이 지금 생기도 기쁨도 평화도 없이 무미 건조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 의미를 실어내지 못하고 무료함을 느끼며, 내 힘만으로는 헤쳐나가기 힘든 세상에 맞서 버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면, 주님 안에서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시편 130,2.5.7-8)

어떻게든 우리를 구하시고자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은총을 벗삼아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이끄심에 의지하여 주님과 함께하심으로써 부활의 새생명을 얻어 누리시기를 빕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사순 제5주일

(다해) 루카 8,1-11: 2013/03/17

우리 말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과거들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쁘고 부끄러운 것엔 여러 가지 이유도 있고, 정황도 있었고, 피치 못할 사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 앞에서 까발려지기 보다는 잊혀지고 싶고, 자신도 가능하면 잊고 싶습니다. 그리고 용서받고 싶고 없던 것으로 해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지난 주 두 번 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인들에게 한 말이 우리를 위로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2코린 5,19)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군중들 앞에서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 앞에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고발합니다. 그들은 사랑과 용서를 외치는 예수님도 확실하게 죄를 지은 여인을 벌주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이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별렀습니다. 그들은 극렬한 예를 가져와 예수님을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위선자로 몰아붙이려고 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4-5)

예수님께서는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왜 사문화된 법령을 끄집어 내느냐고 물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왜 남자들은 어디 가고 이 여인만 잡아왔느냐 등등의 이야기는 아예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복음기사는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6절) 라고 전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계속 촉구하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그러시고는 마치 누가 돌을 던지는지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또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8절)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복음사가가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9절) 라고 전하는 내용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죄도 많아지고, 자기 처지와 주제는 아는가 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잡혔을 때부터 잡혀서 예수님께 끌려올 때까지 수치스럽고 죽고만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난 유다인들에게 재판정은커녕 인민재판처럼 던져졌고, 예언자요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라는 예수님 앞에 내평개쳐졌습니다. 사람들이 보란 듯이, 드러내 놓고, 개망신을 주며, 예수님께 그 여인을 고발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언자의 추상 같은 호령과 벌을 받으리라고 예상했습니니다. ‘이젠, 정말 죽었구나!’, ‘예언자라니 이번엔 정말 에누리없이 돌이라도 맞아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귀를 의심이라도 하듯이, 예수님에게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소리가 들려 왔고, 돌 세례 대신 그 성난 발걸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이것 봐라! 이거 참 이상한데…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자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10절) 그 여자가 예수님께 답합니다.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11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절)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잔소리도, 아무런 조건도 내 걸지 않고 그냥 그렇게 놓아주십니다. 아마 그 여인은 정말 ‘가도 되나?’ 싶었을지 모릅니다.

지난 주 죄짓고 돌아온 아들을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전에 그가 누리던 모든 권한을 되돌려 주신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 그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오늘 예수님을 통해 죄 지은 여인에게 베풀어집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사랑을 받고, 용서를 받고, 도움을 받아 사는 존재입니다. 감사와 보은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치, 그야말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흠숭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십니다. 루치펠 대천사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반발하여 일찍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자꾸만 용서해 주시니까, 그 사람들이 그래도 되는가 보다 하면서 자꾸 그리고 점점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십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 3,8-9)

교회는 주님의 이 자비로운 용서를 성사로 만듭니다. 인간 공동체는 죄악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을 저지를 사람에 대해서도 조건 없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교회 공동체조차도 자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의 용서를 고해성사라는 성사로 만들어, 비밀을 보장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자비가 뉘우침 없는 사면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고해성사는 자신의 잘못을 기워 갚지 않은 채, 단순히 그 잘못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주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죄는 하느님의 자비로 조건없이 사해졌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은 자신이 입은 자비에 걸맞은 행위를 통해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자캐오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우리는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 자기가 잘못한 것을 뉘우치고,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 피해와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되돌이키기도 어렵고 보상하기도 어려운 것이라면, 교회는 어려운 이웃에게 대신 희사하고 희생 봉사하도록 제시합니다.

우리가 고해성사에서 자신의 과오와 죄악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고백하며, 용서를 받고자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방식을 버리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대로 살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과오를 인정하게 되는 것도 은총이지만, 자신의 과오를 드러내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과오로 생겨난 죄악을 씻고, 다시 자신의 과오로 빚어진 폐해를 회복시키는 것도 주님 은총의 힘으로 가능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필리 2,12-13 공동번역).

자기의 올바르지 못한 생활 방식을 끊음으로써 자기 죄에서 죽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 생활 방식대로 살기 시작함으로써 주님 부활에 참여하기로 합시다. 조건 없이 용서해주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새 삶의 희망과 새 삶을 살아나갈 용기와 힘을 얻으셔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을 사시기 바랍니다.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나는 기쁨, 부활의 기쁨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사순 제5주일

(나해) 요한 12,20-33; 12/03/25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남자가 40대가 넘으면 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주저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연구 보고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성이 40대가 되면, 나약해 지는 것인가, 그 동안의 사회적 환경 때문에 혼자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모아 결정하기 위한 것인가?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밀알도 밀이삭을 내기 위해서는 땅에 썩어 죽어야만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오늘 누구 하나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루라도, 한 순간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하는 판인데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로마 5,6-7) 인간 누구 하나, 자기 살기 위해 악착같이 기를 쓸 텐데, 예수님께서는 거기다 남을 살리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겁고, 저주스럽고, 피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아버지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꼭 예수님의 생명으로 바꾸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죽음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인간에게 그야말로 개죽음처럼 아무런 가치도 없는 죽음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특별히 뾰족한 수도 없고… 그 고뇌가 얼마나 깊고 아팠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게 아닌데’ 싶고, ‘이대로 나가면 안 되는데‘ 싶어서, 아무리 좋은 방안을 제시해도 따라주지도 않고 딱히 들어주기조차 않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기적적인 힘이나 신적인 권능을 발휘하고 싶은 유혹을 몇 번이나 되씹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끝내 아버지의 뜻을 좇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무지몽매한 백성들의 어처구니 없는 선택과 요구를 받아들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고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7-8)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그분을 영광스럽게 했고, 그렇게 부활의 영광을 입은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형제와 이웃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기에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와 생각이 같고, 같은 부류이며, 자기와 친한 이웃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거부하고 죽이려는 이들까지도 구하시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죽음은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생명을 얻어 죽음을 이기신 것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부활의 길은 열려있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아멘.



사순 제5주일

(가해) 요한 11,1-45; 11/04/10

우리는 살면서 주위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가 하는 탐색 외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보조를 맞추고 함께 살기 위해 눈치를 봅니다. 그렇게 또 눈치보고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 이제는 마음의 병처럼 나를 망설이게 하고 주저 앉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과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 마치 영혼의 병처럼 이중의 십자가를 안겨 주는 듯합니다.

실제로 또 나이가 들면서 여기 저기 아파오고, 또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마치 약속이나 초대라도 받았다는 듯이 찾아오는 감기나 몸살 같은 몸의 이상 증상들이 우리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도록 경고합니다.

이러 저러한 몸과 마음 그리고 영적인 일들과 사정들이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영적 전선에 장애와 벽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장애와 벽 같은 한계에 갇혀 있다면 그 장애와 벽은 우리에게 한계가 되겠지만, 그 장애와 벽을 극복하고 넘어서면 그것은 우리를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는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대표적인 한계에 갇힙니다. 그리고 그 한계에 갇힌 라자로의 주변인들, 특히 가족인 마리아와 마르타는 커다란 슬픔에 잠겨 심히 아파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즉시 달려가시지 않고, 라자로가 그 병에 완전히 갇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마치 그 가족들의 슬픔이 깊어질 수 있을 만큼 깊어질 때까지를 기다리시기라도 하듯이 뜸을 들이셨다가 라자로를 찾아가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4)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을 찾았을 때 이미 라자로는 죽어 무덤에 묻혔고, 그 가족은 눈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 한계 상황에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한탄하듯 하소연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곁에 계셨으면 하느님께 기도하여 자기 오빠를 죽지 않게 해 주셨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빠 라자로가 죽은 후에야 도착하신 예수님께 아쉽고 야속한 마음을 담아 하소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타의 원망에 대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 주님께서는 마르타가 그저 사람이 죽기 전에, 사람의 살아 생전에 병에서 구해줄 수 있는 의사이거나 예언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던 예수님을 의사나 예언자를 넘어서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까지 믿지 못하고, 그저 사람이 그 생을 다하고 죽은 후,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 때에 죽은이들이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유다교의 믿음에만 충실한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4)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마르타에게 재차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

그제서야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

그러나 아직 다른 이들은 주님을 믿지 못하고, 라자로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하며 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33)고 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시기라도 할양으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34) 그들은 절망적으로 대답합니다. “주님, 와서 보십시오.”(34)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답답해서 그런지, 라자로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동하셔서 그런지, 사랑하는 라자로가 죽음에 갇혀 무덤에 묻혀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불쌍해서 그런지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36)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엉뚱하게도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37)라고 하며 빈정거리듯 말합니다.

복음사가는 반신반의하며 친지가 죽었다는 사실에만 몰두하여 전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의 대응을 바라본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워라”(3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머리와 말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라고 고백했지만, 아직 마음으로는 아니 현실에서 그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의 오빠를 다시 살려주시리라는 사실을 상상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결과적으로 믿지 못하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제지합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3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부드럽고 강력하게 마르타를 일깨워 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 드디어 사람들이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웠습니다.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머리와 말로만 예수님을 믿고 있는 마르타와 추종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죽고 난 저 마지막 날, 심판의 날, 부활의 날 때가 되어야만 이루어질 뿐이지 과학적 진리라고 하는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재생의 신비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표징을 보이는 것이오니 아버지께서 들어주십사 하고 청합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41-42) 아버지의 응답에 힘입어, 아니 아버지와 온전히 일치해 있는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권능에 힙입어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라자로야, 나와라.”(43)

그러자 죽은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그러자 아직도 그를 묶고 있는 수의들을 걷어 내어 주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를 풀어 주어 걸어 가게 하여라.”(44) 그제서야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 그리고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라자로를 문상 왔던 친지들과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됩니다. 이상이 오늘 복음에서 살펴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오늘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서 헤아려봅시다. 우리가 알면서도 또 하고 싶으면서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미련이 크거나,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그러한 미련과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을 영적으로는 죄악 또는 죄악의 지배아래, 죄악의 노예상태에 놓여있다고 하며 그것을 빗대어 우리의 삶 속에 죄악의 뿌리가 그처럼 깊이 박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악의 뿌리를 다 뽑아내고 희망도 없는 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몰이해와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이해와 사고방식을 깨우쳐주고 치워줄 신앙의 형제자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마치 사람들의 눈에는 죽어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다시 살리기 위해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워줄 가족과 친지들이 필요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 그를 묶었던 수의로 대표되는 우리 삶의 거품들과 껍질들을 벗겨줄 신앙의 형제 자매들인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 신앙의 형제 자매들인 교회 공동체가 바로 여기 앉아 있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신앙의 형제 자매인 교회 공동체의 역할은 바로 죄악에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주님 말씀의 힘으로 되살리도록, 그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 주님 말씀의 힘으로 새로 태어나도록, 그를 막아 놓았던 장애와 돌을 치워주는 일이며,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났을 때 그에게 신앙 안에서 더욱 더 앞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죄악에 묶여 있는 이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르타처럼 머리와 말로만 주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자 결심을 하고 실제로 실천해 나갈 때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 라는 말씀이 라자로에게서처럼 지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하신 여러분을 죄악에 묶어 놓고 있는 장애는 무엇입니까? 어떤 장애와 죄악이 여러분의 자유를 구속하고 선행을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죄악의 뿌리에서 헤어나 주님의 영광스러운 새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도록. 부활이요 생명이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를 영원히 죽지 않고 살리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리고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신앙 안에서 죄악의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묶여 있는 형제 자매들을 구하러 나가라고. 형제 자매들을 사로잡고 있는 허망한 꿈과 그릇된 취득과 분배방식이라는 “돌을 치워라.” 그리고 그를 묶고 있는 꺼풀을 벗겨 “그를 풀어주어 걷게 하여라.” 라고 초대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죄악과 세상의 죄라는 어둠 속에 갇혀있다고 여기신다면,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헤어나고 싶다면, 주님을 향해 희망의 눈을 뜨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장애에서 해방되어 다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장애에서 벗어나 여러분과 같은 장애로 헤매는 여러분 친지들의 돌을 치우고 풀어주어 걸어가도록 주님께 청하고 도와 줍시다.

주님 안에서 평안한 한 주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순 제5주일

(나해) 요한 12,20-33; 06/04/02

1년 전 오늘, 2005년 4월 2일 교황청 창문 밖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신자들의 묵주기도 소리가 울렸습니다. 고통의 병고 속에서도 창문을 향하여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강복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분의 입술은 ‘아멘’하고 움직였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의 삶을 끝까지 따라 사셨던 교황님. 숨을 거두기 전 그분의 이 말씀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27년 전인 1978년 10월 16일, 성 베드로 광장. 새 교황을 기다리는 10만여 명의 인파가 모여든 가운데 위쪽 중앙 창문이 열렸습니다.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가 새 교황으로 호명되자 군중들은 새 교황이 너무나 뜻밖이었고 또 누구인지 잘 몰라서 의아해했습니다. 카롤 보이티와는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이름을 택하였는데, 이는 ‘미소의 교황’의 뒤를 잇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최초의 폴란드 추기경이요, 최초의 공산국가 태생이었습니다. 1522년 이래 최초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요, 1856년 이래 가장 젊은(59세) 교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안 될 것도 없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유다인이었으니 말입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 사제가 되기까지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zef Wojtyla).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입니다. 카롤은 1920년 5월 18일, 폴란드 남부 바도비체의 작은 마을에서 폴란드 민족이 목말라 하는 염원을 풀어헤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태어났습니다. 카롤이 태어나던 그 날은 바로 신생 독립국이자 카롤의 조국인 폴란드가 소비에트 연방을 무찌른 날이었습니다.

폴란드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에서 남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롤의 고향 바도비체는 작은 종이 공장과 철사 공장, 그리고 가톨릭교회에서 세운 성체용 빵 공장을 제외하고 산업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 카롤은 직업 군인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슬하의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나,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톨릭 가정에서 맑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에게 시련이 닥쳤습니다. 1929년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4년 뒤 의학을 공부하던 열네 살 터울의 형이 어머니의 뒤를 따랐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버지는 기도 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카롤이 목이 말라 가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시는구나.’ 어린 카롤은 아버지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가서 물을 마셨습니다. 아버지는 카롤에게 사제가 되라고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카롤에게는 아버지가 보여 준 행동 모두가 일종의 신학 교육이었습니다.

대학 진학과 동시에 카롤과 그의아버지는 문학과 연극의 도시 크라쿠프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카롤은 혼자 떠나려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나도 간다. 이 넓은 세상에 너와 나 단둘인데 함께 가야지….” 1941년 2월 18일 스물한 살이었던 카롤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쳤습니다. 지금껏 생의 동반자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던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의 시신 옆에서 무려 열두 시간 동안 기도하면서 카롤은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하라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되새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학대받는 유대인들의 삶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성직자의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문학과 연극을 향한 꿈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평화의 순례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된 카롤,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 성역’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역사상 가장 많은 해외순방을 한 교황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 사막이나 정글의 오지,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망설이지 않고 찾아 나서며 화해와 평화의 물결을 일렁이게 했습니다. 그분은 인간 세상의 거리와 광장으로 나아갔고 지칠 줄 모르는 순례자였습니다.

“성직자의 진정한 의무는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들 달려가야 하며 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26년 동안 102회의 해외순방을 통해 131개국, 600여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인간을 만나기 위한 자신의 여행을 ‘순례’라고 부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가 직면한 현실과 직접 맞닥뜨리고 부딪치면서 그들을 알고 사랑하고 존중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모든 여행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성지로의 순례입니다. 전 인류의 사랑과 평화, 우애를 위한 순례인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인간의 자유와 생명을 수호하고 기본권을 보장하는 문제였습니다. 폴란드인으로 살아오면서 나치주의와 공산주의를 경험했던 교황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자유를 빼앗긴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첫 번째 회칙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교황의 관심은 종교적 차원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을 향해 열려 있음을 당당히 선언했습니다.

또한 젊은 시절 채석장 인부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던 교황은 누구보다도 노동자들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각별한 애정을 쏟았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 3개월 후인 1979년 1월, 멕시코를 첫 해외순방지로 선택해 직접 노동자들과 만나 “이제부터 저는 침묵을 강요당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던 여러분의 ‘목소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생명의 신성한 가치를 강조하면서 전쟁, 폭력, 사회적 불의, 무기 매매, 환경오염, 자연파괴 등을 인간 생명에 반대되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또한 낙태와 안락사를 ‘약자에 대한 강자의 박해’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12월에 발표한 교서를 통해 전 세계에서 사형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간곡히 호소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반도 땅에도 입을 맞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마지막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화해와 통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한국을 찾았습니다. 교황의 도착에 맞추어 전국의 성당과 교회에서는 교황이 한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종이 일제히 울렸습니다. 은백색의 교황 수단을 입은 요한 바오로 2세가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환영 인파를 향해 두 손을 들어 따뜻한 인사를 보낸 교황은, 비행기에서 내려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한반도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시 교황을 가까이에서 영접했던 한 사제에 따르면 교황은 입을 맞추면서 “순교자의 땅, 순교자의 땅”이라고 되뇌었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삶은 온갖 사건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일련의 장대한 여행을 통하여 그는 세계 각지의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전하였고, 성 베드로 광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총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그의 조국 폴란드에서 시작된 세계 공산주의의 몰락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이후 자신이 각별히 애정을 쏟았던 ‘동구권 나라들’에서 민족적 이기주의가 다시 피어오르는 것을 근심스럽게 지켜보았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으로의 출발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가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3년 11월 위령의 날을 맞아 여러 차례 숨을 고르는 가운데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하신 강론 말씀입니다.

세파에 시달려 굽은 자기 몸을 이끌고 세상을 순례하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모든 이들에게 두 개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문을 활짝 엽시다!”

“인간을 구원합시다!”

우리의 마음 안에 꺼지지 않을 촛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



사순 제5주일

(가해) 요한 11, 1-45; 05/03/13

여러분은 어릴 때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싶었습니까?

여러분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대통령, 의사, 판사, 선생님, 간호사...

우리는 각자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지금까지 꿈꾸어 왔고, 또 그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지금도 나름대로 지향하는 바가 있다. 적어도 이렇게 살아야겠다하는 좌우명이라든가 삶의 철학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꿈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경제적인 면이든 삶의 지향점이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어렸을 때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지금의 내 지향이나 결심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살면 살수록 내 꿈과 결심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네 삶에 커다란 상실감과 아픔을 가져다주고 있다. 우리가 꿈꾸고 지향하는 좋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내게는 너무나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상실감이다.

그럼 우리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바라고 꿈꾸어 왔던가?

오빠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희망을 상실한 마르타가 아쉬움을 가득 안고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21)

우리의 꿈은 허망하고 이루어지길 바라고 또 이루어지어야만 된다고 생각해 왔던 좋은 것들은 그저 한 낱 이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

그렇다면 우리의 꿈은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야 마는 허상이요,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에 불과한 것인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이 지상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영원한 숙제처럼 우리의 좋은 꿈은 그저 우리 눈앞에 띄워진 풍선이란 말인가? 마르타가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24) 구원이라는 숙제는 우리가 죽은 후에나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럴 순 없다.

사람들이 구세주 예수님을 향해 말합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던 말인가?”(37)

우리의 삶이 그저 후세에서만 완성되기 때문에 오늘을 그냥 허망하고 무의미하게 다람쥐 쳇바퀴처럼 우리 생의 고난의 굴레를 돌고 돌아야만 하는가?

그럼 어떻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가?

우리는 그저 이 문제를 운명이나 사주팔자에 견주며 미래를 알아 맞춘다고 하면서 요행이나 행운에나 기대는 점장이들에게 맡길 순 없다. 그리고 또 자신의 육체나 심리, 정신이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세상만사를 자기 것으로 돌릴 수 있다고 하는 철부지 구도자들에게 맡길 수도 없다. 나와 너, 나와 세상, 나와 우주의 문제를 내가 주체적으로 풀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오만이거나 착각에서 비롯된 어리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을 일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이 한계와 제한된 세상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우리와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며 그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신 주인, 즉 하느님 안에서만 풀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하면서도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으면서 오늘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온전히 받아 누리지 못하면서도 감사히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부어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우리의 잘못이나 허물로 인해 슬픈 일도 겪고 고통스러운 일도 겪지만 그래도 우리가 현세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오늘 이렇게 무사히 살아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잘못이나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거듭 용서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우리를 주님 사랑 안에 머물도록 해 주시는 주님의 커다란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늙어가고 병고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이르는 영광의 부활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먼 훗날 죽은 다음에야 온전히 뵈올 수 있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영광은 죽은 다음에나 완전히 누릴 수 있지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주 예수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고 계시고, 이끌고 계시고, 구원의 생명을 건네주고 계신다고 믿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마르타의 믿음을 다시 세워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

사람들이 돌을 치우자, 주님께서 라자로를 부르십니다.

어둠과 죽음의 세력에 묶여, 희망도 잃고 기쁨도 잃고 그저 하루 하루를 감옥처럼 살고 있는 고단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43)

여러분을 얽어매고 있는 온갖 제한과 굴레와 구속으로부터 나오십시오.

그리고 혹시 우리에게 어둠과 죽음에 세력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빛을 비추고 신앙의 길을 걷게 하고 신앙의 신비를 살도록 일러주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44)

여러분이 부활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하고,

오늘 주님의 생생한 이끄심을 체험하며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형제들과 함께 기쁘고 보람있게 살아나가시기를 빕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 11)

아멘.



사순 제5주일

(다해) 요한 8, 1-11; 2004/03/28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그런데 죄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지나 보다. 아니 그 보다는 자신의 부족함과 부당함을 나이가 들면서 하나 둘 씩 깨닫게 되나 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잡아죽이려는 군중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 7)하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성서 기자는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9)라고 전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1)고 하시면서, 그녀의 죄를 씻어주시고 사람들의 단죄와 학살로부터 해방시켜 주신다.

예수님께서 왜 그 여자를 용서해주셨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고 용서해주셨을까?

벌을 주면 일벌백계라고. 그것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율법에 따라 돌로 쳐죽이도록 하면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을텐데. 오히려 자꾸 용서해 주니까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되는 줄 알고 더 죄악만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다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오시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 아닌 걱정마저 든다.

그런데 실제로 형행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벌이 커진다고 범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형제도를 만들고 공개적으로 사형을 시킨다고 해서 흉악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형벌이 사람들의 기대와 예상과는 달리 범죄에 대한 예방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요즘엔 정치가들이 국면전환용으로 형벌을 사회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럼 벌로 다스리지 않으면 어떻게 인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느님의 이 고민을 누가 알까 싶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인간을 만드시고 당신 사랑을 나누고자 하셨다는 데, 거꾸로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상하셨을까?

하느님은 인간을 죄악에서 구하시는 방법으로 용서를 택하셨다.

용서하지 않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

우리는 이 물음을 우리 개인의 상황에 비추어 헤아려 볼 수 있다.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우리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이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무엇보다 괴롭다. 신자로서 사랑을 해야만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기에 괴롭다. 신자를 떠나서도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이 분노와 미움에 휩싸일 정도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고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은 악에게 자신의 영혼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분열과 고통뿐이다. 나에게 악한 행동을 저지른 사람을 대항하여 내 안에 복수와 저주를 간직하면 결국 내 마음도 악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악이 원하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고 죽음이 인간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악을 세상에 퍼트리고 악의 세력을 더 크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악에게서 내 마음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악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의 상황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용서다.

하느님도 하느님이시기 위해서는, 사랑자체이신 당신 자신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할 수밖에 없으셨다.

둘째,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는 더욱 더 악의 세력으로 빨려 들어가고 그를 통해 악마는 더욱 더 세상을 악하게 꾸민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악의 세력이 창궐하는데 협력하는 공범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처사에 반발하며 떠난 사람이 전보다 더욱 더 비참해지고 악해진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를 악마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먼저 찾아가 화해하려고 하고 붙잡으려고 하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보다는 마치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거나 아쉬워서 또는 자기가 잘나기라도 해서 우리가 수그리는 것처럼 생각하고 거꾸로 어긋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면 그는 더욱 더 악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그냥 둘 수 없는 일이기에 당신 아드님의 목숨까지 바꿔가면서 우리를 악에게서 구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류가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으셨던 것이다.

셋째는 이렇게 우리를 구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 12-15)

그러나 가끔 우리는 용서하기 힘들다고 하고,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밴댕이 속알지 같이 좁아터진 마음이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주님도 용서하시는 사람을 우리가 용서 못할 일이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했다고 느끼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 그러니 주님께서 갚아주시리라고 믿고 내 미움의 끈을 풀어야겠다. 우선 나부터 악의 고리사슬을 끊고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필립 3, 8) 또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12)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 사랑을 넘치고 넘치게 받을 수 있도록 다가가자.

내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주님 사랑의 감정으로 몰아내 주십사 청하면서 주님께 다가가자.

주님 사랑의 힘으로 나를 변화시켜 나를 짓누르고 나를 이용해서 악마의 나라를 만들려는 악을 쳐 이기고, 주님 부활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자.

그리고 주님에게서 떨어져나가고 나 자신도 괴로워지는 악의 세력에 휩쓸리지 않도록 다시는 죄짓지 말자.



사순 제5주일

(나해) 요한 12, 20-33; 2003/04/06

지난 3월 말 청주교구의 모 신부가 이라크 전쟁의 인간방패를 자청하며 떠났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전쟁을 막을 수 없자, 일반인으로서는 걸프전 때 영국의 황태자비 다이애나비가 사막에서 인간방패를 했던 것처럼, 포탄을 이국인의 몸으로 막아 전쟁을 종식시키자는 시민운동의 하나이다. 남의 일만 같아 구경만 하던 우리에게, 인종과 종교, 문화가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그들의 결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에 참으로 숭고하기까지 하다.

사도 바오로는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 5, 7)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 UN의 동의도 없이 침략자처럼 공격을 해대는 이나, 자기 일신의 안전과 정권의 유지를 위해 전국민을 전쟁으로 몰아붙이는 이는 물론이요 교황님이나 추기경님께 직접 인간방패가 되어 전쟁의 한 복판에 서서 죽으라는 이들 모두 다 똑같이 전쟁의 원인을 보여준다. 결국 이들은 모두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며,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주어야 한다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욕구로 서로를 죽이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하기를 바라십니다."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말고,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를 생각하며 실천하라고 하는 듯하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기는 삶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삶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25절)라고 하신다. 이 말은 또 "내가 하는 일과 요구를 왜 받아주지 않고 들어주지 않나?"하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하는 일이 진정 주님의 뜻 안에 있는지?"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추어 내 일을 이루어 나가야겠다."고 다짐하라고 하시는 듯하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26절)하신 말씀대로, 내 탐욕을 죽이고 주님의 뜻을 찾고 또 그 뜻을 받아들이며 행하려는 나의 수난이 주님의 수난에 더하여져 이 땅에 하늘 나라를 더욱 앞당기기로 하자.



사순 제5주일

(가해) 요한 11, 1-45; 02/03/17

많은 사람들은 오래 살고 싶어한다. 중국의 진시황은 늙지 않는 약초, 불노초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찾아 나서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짓누르는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완전해 지고자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얻거나, 한 사람이라도 더 지배하거나 제거하려고 한다. 반면에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정반대다. 하나라도 더 주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자기를 죽이는 방법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죽어가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 이 사순절은 우리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으신 주님의 그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라자로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을 예시해주는 한편 우리의 부활도 희망하도록 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내신다. 그러나 무덤에서 나온 라자로의 손발이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이 세상을 창조해주셨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인간을 얽매고 조이는 것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얽맬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도 얽매여 있는 경우도 많다. 주님은 이러한 인간조건에 놓여있는 우리를 풀어주시고 우리 역시 풀라고 하신다. 미움과 원망, 기대와 바램, 탐욕과 미련이 불노초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거기서 스스로 벗어나고, 우리가 마음 속에서 움켜잡고 있는 다른 이들도 풀어주라고 하신다. 우리가 잡혀 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우리가 잡고 있는 것을 놓아주면 우리는 자유를 얻을 것이고, 주님께서 얻으신 그 생명을 우리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결국 내가 의지하고 매달리던 것을 포기하고 벗어나는 것이 내가 풀려나는 것이며 내가 사는 길인 것처럼, 누군가를 풀어주는 것은 그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해 나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풀어주는 것은 살리는 또 다른 하나의 같은 방법인 셈이다. 주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시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풀어주도록 하신다. 이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풀려나고 풀어주면서 살아나야겠다.

"라자로야 나오너라."(43절)



사순 제5주일

(다해) 2001/04/01

시노드는 교회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전 교구민이 함께 연구하고 논의하여 개선방안을 찾자는 회의다. 시노드는 교회의 쇄신과 개혁의 도구이며, 신앙과 선교의식을 높이고 재복음화를 시키는 교육의 역할과 성직자와 수도자, 일반신자의 규율을 확립해 왔다. 서울 교구장이신 정진석 대주교님께서는 2000년도 사목교서에서 시노드 개최의지를 밝히시면서 '변화와 위기의 시대를 맞아 하느님 백성 전체의 소리와 소망을 잘 들어서 제삼천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자'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시노드를 통해 신앙의 가르침, 다양한 윤리적 규범, 교회적 규범과 그 원리, 성사와 준성사, 본당과 교구의 조직 및 행정과 재정, 여러 활동 단체 및 신앙 운동에 관한 문제, 성직자와 수도자를 포함한 신앙인 개개인의 임무와 역할 등 교회와 신앙인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룬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대의원들을 뽑는다. 이번이 4번째인데 그전엔 성직자들만 참여했다.

우리 자신을 비춰 보는 가장 좋은 거울은 복음이다. 복음에서 말해 주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을 비교하여 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복음 정신을 구현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현재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서 구체적으로 밝혀 주는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다. 서울대교구 시노드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열리는 세계 모든 나라의 시노드는 바티칸 공의회의 구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기 위해 하느님 백성 전체의 소리를 충실하게 '듣는 시노드', '함께 하는 시노드', '기도하는 시노드'여야 한다. 시노드는 우리의 현실을 복음적 시각으로 '보고'(SEE), 바라본 결과를 복음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비추어 '식별'(JUDGE)하고, 그대로 '실천'(ACT)한다.

먼저 현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한 후, 무엇이 가장 중요하며 시급한 문제인지를 판단하여 시노드에서 다룰 의제를 정하고, 토론을 거쳐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는다. 그리고 의안을 확정하는 토론과 투표를 하고 교구장께서 그 의안을 받아들이고 서명해 교구 사목 방침이 마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구의 쇄신을 위해 각자가 생각하고 있던 바, 또 바라고 있던 바를 설문조사나 토론회, 의견 청취 모임등 기회 있을 때마다 기탄 없이 밝히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사순 제5주일

(나해) 요한 12, 20-33; 2000/04/0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고통스러워 하셨다. 복수를 할 수도 없고 포기를 할 수도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고생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도 이러한 관점에서 바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곳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 뿐이시고, 이 세상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사도 바오로는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 7-8)라고 말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 24-25)

그리고 또 보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26절)

세상 한 가운데서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자로서의 신앙생활에 헌신하고 계신 여러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매달리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우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동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마음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보아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자녀요 사도로 받아주시는 주님께 나아가기로 합시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27-28)



사순 제5주일

(가해) 요한 11,1-45 : 99/03/19

오늘 주님께서는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시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주님은 죽은 다음에서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각자는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고귀한 뜻과 이상이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건실하고 또 이웃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상과 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직 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이상과 뜻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다 해도 또 우리 자신도 멀리 떨어져서 돌아가지 못할 것처럼 느낀다해도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길로 우리를 되돌이켜 주실 수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39)하고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고 말씀하십니다. "돌을 치워라"(39)하신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청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어보십시오. "라자로야 나오너라."(43)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우리를 막고 있는 모든 악습과 허물 그리고 세상의 장애를 없애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주님은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를 모든 장애로부터 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44)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고 청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주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걱정하거나 조바심 내지 말고 꾸준히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그것이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주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향해 무어라고 하든, 또 내가 설사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고 불가능하게만 보일지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일러주시고 보여주시는 길로 걸어나가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장애를 없애주시고 새 인생의 빛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



사순 제5주일

(다해) 요한 8,1-11 : 98/03/29

누군가 "어떤 사람은 큰 죄를 지어서 한 평생 머리를 못 들고 사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작은 죄들을 수없이 많이 지었으면서도 죄중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태평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요한 8,4)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정말 너무나도 쉽게 단죄 받습니다. 그럴 수 가 있을까?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그 죄를 지은 여자가 나의 배우자라면 너무나 미워서 돌로 쳐죽이는 것 정도로 그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편 그 여자가 나의 딸이라면 창피하 기도 하면서도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지금 우리 가정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배우자의 불성실, 무능력, 성격적인 결함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결혼 계약은 왜 맺는 것인가? 기쁘고 좋을 때는 저 좋아서 살지 만, 어떻게 보면 결혼 계약은 슬프거나 병들 때를 위해 계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 서 우리 인간과 맺은 계약을 우리는 성약, 은약이라고 합니다. 성스러운 약속, 은혜로운 약속. 그 이유는 '하느님은 우리가 계약을 지켰느냐와 안 지켰느냐와 상관없이 당신이 맺으신 계약 자체 에 충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십시오. 배우자가 계약을 파기하는 행동을 했다하더라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선택하고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켜나가십시 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한 8,11ㄴ)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면서 적대 적으로 가족관계를 맺어나가면 우리 가정은 위기를 맞이할 것이고,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더 라도 '나밖에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람이라.'고 서로를 용서하며 사랑 으로 감싸고 품어 안는다면 우리 가정은 위기를 극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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