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50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비폭력, 평화를 위한 정치 방식

17/01/01

1. 새해를 맞이하여 저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국가와 정부의 수반들, 종교와 사회와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평화를 빕니다. 저는 모든 어른과 어린이에게 평화를 빌며,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지니기에 우리가 서로를 무한한 존엄을 부여받은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갈등의 상황에서 이러한 인간의 “심오한 존엄성”을 존중하고 적극적 비폭력을 우리의 생활 방식으로 삼도록 합시다.

올해로 세계 평화의 날 담화가 제50차에 이르렀습니다. 제1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복자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단지 가톨릭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인간 발전의 유일하고 참된 길이라는 사실이 마침내 매우 분명해졌습니다. 야심적인 민족주의가 야기하는 긴장, 폭력을 통한 정복, 그릇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억압은 그러한 길이 아닙니다.” 바오로 6세께서는 “국제 분쟁이 이성적 방법, 곧 법과 정의와 공정에 기초한 타협이 아니라 억압적이고 잔인한 폭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의 위험”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6세께서는 당신의 선임 교황이신 요한 23세 성인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인용하시며 “진리, 정의, 자유, 사랑을 토대로 하는 평화에 대한 감각과 사랑”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50년 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고 긴급한 이 말씀은 매우 타당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평화를 위한 정치 방식인 비폭력에 관하여 숙고하고자 합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어 우리 모두 우리의 정서와 개인적 가치관의 심연에서 비폭력을 길어 올리기 바랍니다. 인간관계, 사회관계, 국제 관계에서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과 비폭력을 따르기 바랍니다. 폭력의 피해자는 복수의 유혹을 떨쳐버릴 줄 알아야 비폭력적 평화 구축 과정의 가장 믿을 만한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적인 일상 차원에서 국제 질서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비폭력이 우리의 결정과 관계와 행동, 그리고 모든 정치 형태의 특징적인 방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깨어진 세상

2. 지난 세기는 두 차례에 걸친 잔악한 세계 대전으로 초토화되었고 핵전쟁의 위협과 다양한 분쟁들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는 끔찍한 산발적 세계 대전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에서 폭력이 과거에 비하여 늘었는지 아니면 줄었는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매체와 우리 시대의 특징인 유동성 덕분에 우리가 폭력을 더 잘 인식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폭력에 더 익숙해진 것인지를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다양한 방식과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자행되는 이러한 폭력은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나라와 대륙들에서 발생하는 전쟁, 테러와 조직범죄와 예측 불가능한 무장 습격, 이민과 인신매매의 피해자들이 겪는 학대, 환경 파괴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폭력이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목적을 이루도록 합니까? 폭력이 이룩한 것은 고작 복수와 파괴적인 분쟁의 악순환만을 야기하여 극히 일부의 군벌들만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닙니까?

폭력은 우리의 깨어진 세상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 기껏해야 강제 이주와 커다란 고통만이 야기될 뿐입니다. 엄청난 자원이 군사적 목적에 전용되어 젊은이, 궁핍한 가정, 노인, 아픈 이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박탈당하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경우 폭력은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을 육체적 정신적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

3. 예수님께서도 폭력의 시대에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폭력과 평화가 대립하는 본디의 전장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이 나오기”(마태 7,21-22 참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적극적인 답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환대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지치지 않고 선포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마태 5,44 참조)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고소한 이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지 못하게 하시고(요한 8,1-11 참조)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말씀하시며(마태 26,52 참조) 비폭력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곧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비폭력의 길을 가셨으며, 십자가로 평화를 이룩하시고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16 참조). 그래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폭력을 깨닫고 하느님 자비로 치유받을 줄 알게 됩니다. 이리하여 그러한 이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권고대로 자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평화를 말로 선포할 때에 그 평화가 여러분 자신, 더 나아가 여러분 마음 안에 확실히 자리 잡도록 하십시오.”

오늘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은 비폭력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도 의미합니다. 저의 선임 교황이신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에 따르면 이러한 가르침은 “현실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너무 많은 폭력과 너무 많은 불의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선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극복될 수 없습니다. 이 더 많은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이어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다음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폭력이란 단순한 전략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이며 하느님의 사랑과 힘을 강하게 확신하는 이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는 사랑과 진리라는 무기만으로 악에 맞서는 것을 두려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 혁명의 핵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하는 복음의 명령은 마땅히 “그리스도 비폭력의 대헌장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는 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 선으로 악에 응답하여(로마 12,17-21 참조) 불의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폭력보다 더욱 강력한 것

4. 때로는 비폭력이 굴복, 불관, 수동성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식 때에 적극적 비폭력의 메시지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가정에는 폭탄과 무기가 필요 없고 평화를 이루고자 파괴를 자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함께하면서 서로를 사랑하면 됩니다. ……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무력은 기만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기 밀거래상들이 장사하는 동안, 힘없는 평화의 일꾼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그저 한 사람을 돕고, 그러고 나서는 또 다른 한 사람, 그 다음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을 도울 뿐입니다.” 이와 같은 평화의 일꾼들에게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는 “우리 시대의 표징이며 모범”이 됩니다. 저는 2016년 9월에 콜카타의 데레사를 성인품에 올리는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저는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가 “환대와 태아들, 유기된 이들, 배척된 이들의 인간 생명 수호로” 모든 이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내어준 것을 칭송하였습니다.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는 길가에 죽도록 내버려져 기진맥진한 이들 앞에서 몸을 굽혔습니다. 성녀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존엄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콜카타의 데레사 성녀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여 그들이 직접 야기한 가난이라는 범죄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범죄입니다!” 이에 맞선 성녀의 대응은 피해자들에게 관대와 헌신으로 다가가 모든 상처 입은 몸을 하나하나 어루만져 감싸주며 모든 좌절된 생명을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녀는 수천, 아니 수백만의 사람들을 대변하였습니다.

단호하고 일관되게 실천된 비폭력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인도의 해방을 위하여 노력한 마하트마 간디와 칸 압둘 가파르 칸의 업적과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마틴 루터 킹 2세의 업적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여성들이 종종 비폭력의 선도자가 됩니다. 라이베리아의 리마 보위와 수많은 여성들이 바로 그 예입니다. 이들은 기도 집회와 비폭력 시위를 조직하여 라이베리아의 2차 내전의 종식을 위한 고위급 평화 협상을 이끌어 냈습니다.

우리는 유럽의 공산주의 정권의 몰락으로 그 막을 내린 획기적인 시대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지속적인 기도와 담대한 활동으로 이에 기여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의 직무와 가르침은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1년에 발표하신 회칙 ' 백주년'(Centesimus Annus)에서 1989년에 벌어진 사건들을 숙고하시며 종족과 민족과 국가들의 삶의 결정적 변화는 “진리와 정의의 무기만을 사용하는 전적으로 평화적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평화적 정치 변화는 어느 모로 “늘 폭력의 충동에 굴복하기를 거절하면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을 발견한 사람들의 비폭력적 행동과 역할”로 가능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든 폭력을 배제하고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며, 내부 분쟁에서 계급 투쟁을, 그리고 국제 분쟁에서 전쟁을 배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많은 국가들에서 평화 증진을 위한 비폭력 전략들의 실천에 노력을 기울이고 심지어 극단적 폭력 집단에도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 건설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였습니다.

불의와 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가톨릭 교회만이 지닌 선이 아니라 많은 종교 전통들에 속한 것입니다. 이 전통들에 “연민과 비폭력은 본질적인 것으로 삶의 길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어떤 종교도 테러 정신을 지니지 않는다.”고 힘주어 단언합니다. 폭력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치지 말고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평화만이 거룩합니다. 곧 전쟁이 아니라 평화만이 거룩한 것입니다!”

비폭력 정치의 뿌리가 되는 가정

5. 폭력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이 비폭력의 길을 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혼인과 가정에 관한 2년에 걸친 교회의 숙고를 마치며 2016년 3월에 발표한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에서 제가 설명한 사랑의 기쁨의 요소에는 비폭력이 포함됩니다. 가정은 반드시 필요한 용광로와 같은 자리로 그 안에서 부부, 부모, 자녀, 형제자매가 소통하고 사심 없이 서로 돌보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긴장이나 나아가 갈등도 힘이 아니라 대화, 존중, 상대방 행복의 추구, 자비, 용서로 극복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기쁨은 가정에서 세상으로 흘러들어 사회 전체에 빛을 비춥니다. 궁극적으로 형제애의 윤리, 인간들 사이와 민족들 사이의 평화 공존은 공포와 폭력과 폐쇄의 논리가 아니라 책임과 존중과 참된 대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군비 축소와 더불어 핵무기의 금지와 폐기를 호소합니다. 핵 억지와 상호 확증 파괴의 위협은 결코 형제애 윤리의 바탕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또한 가정 폭력과 여성 학대와 아동 학대의 중단을 간곡히 호소합니다.

2016년 11월에 폐막된 자비의 희년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하느님 자비를 그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라는 초대였습니다. 이 희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사회단체들이 무관심한 대접을 받고 불의에 희생되고 폭력을 당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들도 우리의 가족입니다. 이들도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그러므로 비폭력 정치는 가정 안에서 시작되어 온 인류 가정으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우리가 사랑의 길을 가고, 평화와 우정의 씨앗을 뿌리는 친절한 말, 미소, 모든 작은 몸짓을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권유합니다. 또한 온전한 생태계는 폭력, 착취,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단순한 일상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개인적 초대

6. 적극적 비폭력을 통한 평화 건설은 필수적인 요소이며 교회가 폭력 사용을 도덕규범으로 제한하고자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것과도 일치합니다. 교회는 국제기구의 활동에 함께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차원의 입법 활동에 효과적으로 기여하며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산상 설교에서 이러한 평화 건설의 전략 지침을 주십니다. 행복 선언은(마태 5,3-10 참조) 우리가 행복하고 선하며 참된 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는 세계 전체의 정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 국제기구의 책임자들, 기업과 대중 매체의 경영인들이 각자의 책임을 수행하는 데에 참행복을 적용하는 계획이며 도전입니다. 이는 그들이 평화의 일꾼으로서 활동하며 사회와 공동체와 기업을 꾸려나가야 하는 도전인 것입니다. 이는 인간 배척, 환경 파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윤추구를 거부하여 자비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방식의 활동은 역사의 건설과 사회적 우애의 구축에서 연대의 방식을 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극적 비폭력은 일치가 갈등보다 더 강력하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이는 확실히 갈등을 빚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건설적이고 비폭력적으로 대처하며 “긴장과 대립이 다양한 형태의 일치에 이를 수” 있어 “귀중한 양립 가능성이 보존”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가 적극적 창의적 비폭력을 통한 평화 건설의 노력에 함께할 것을 보증합니다. 2017년 1월 1일부터 온전한 인간 발전 촉진을 위한 교황청 부서가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 부서는 교회가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정의, 평화, 창조 보전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증진시키고 “이민, 궁핍한 이들, 아픈 이들, 배척된 이들, 사회적으로 차별된 이들, 무력 분쟁과 자연 재해의 희생자들, 감옥에 갇힌 이들, 실업자들, 모든 형태의 노예살이와 고문의 희생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취지의 모든 활동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폭력 없는 세상의 건설에 기여할 것이며 이는 정의와 평화를 향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결론

7. 전통에 따라 저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12월 8일에 이 담화문에 서명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평화의 모후이십니다. 성모님의 아드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천사들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땅 위의 모든 선의의 사람들의 평화를 기원했습니다(루카 2,14 참조). 성모님께서 우리를 앞으로 이끌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우리 모두는 평화를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날마다 작은 몸짓으로 평화를 건설합니다. 많은 이들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인내하며 평화 건설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기도와 활동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에서 폭력을 몰아내는 사람이 되어 공동의 집을 돌보는 비폭력적 공동체의 건설에 노력을 기울입시다. “우리가 기도하며 하느님을 향하면 그 무엇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가 평화의 장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티칸에서

2016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for the Celebration of the Fiftieth World Day of Peace, Nonviolence: a Style of Politics for Peace, 2016.12.8., 독일어와 이탈리아어 참조>

영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peace/documents/papa-francesco_20161208_messaggio-l-giornata-mondiale-pace-2017.html

독일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de/messages/peace/documents/papa-francesco_20161208_messaggio-l-giornata-mondiale-pace-2017.html

이탈리아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peace/documents/papa-francesco_20161208_messaggio-l-giornata-mondiale-pace-2017.html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서울대교구장 2016년 신년 메시지


"더 나은 희망이 주어져,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다가갑니다.”(히브 7,19)

16/01/0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새해에도 새로운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맡겨 드립시다.

올해는 특히 병인박해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박해는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0년 전 병인년에는, 많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분들의 신앙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온전히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도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더 잘 돌보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올 한 해도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자비로운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희망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사회가 더 정직해지고 믿음과 신뢰가 흘러넘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신앙인들이 솔선수범하여 믿음을 지니고 서로 일치하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도 공존하고 친교를 나누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 공동체는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불행이 행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느님 구원의 은총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가득히 내리기를 기도드립니다. 북녘의 동포들에게도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리며, 또한 특별히 우리 교구가 시행하고 있는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성당의 회복을 위해서 매일 기도 중에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올 한 해 동안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6년 새해첫날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약)


무관심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룩하십시오

루카 2,16-21; 16/1/1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은총과 선물로 주시는 새해를 맞아 전쟁과 분쟁이 끝나고, 고통과 전염병, 자연재해에 따른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으며, 이들의 자식들은 형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하느님을 닮은 부모처럼 존엄을 지닙니다. 형제자매는 다양성과 차이를 보여주고, 본질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형제애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가정을 키워나가는 데에 근본이 되는 관계망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현실적으로 형제애를 끊어버리고 훼손시키는 죄악이 있습니다.

오늘날 노예 제도가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이전부터 인간을 노예로 삼는 현상이 있어왔습니다. 국제 공동체가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린이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살이와 다름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에서조차도 가사 노동, 농업, 제조업이나 광업에서 많은 이들이 노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은 합법적으로 체류하기 위하여 비인간적인 생활과 노동의 조건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굶주림을 겪고 자 유를 박탈당하며 재산을 빼앗기고 육체적, 성적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성년자들이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많은 여성들이 강제 혼인과 정략결혼에 시달립니다. 장기 적출, 강제 징집, 구걸, 마약의 생산과 판매와 같은 불법 행위, 국제적인 위장 입양을 위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미성년자와 성인들도 있습니다. 테러 집단에 납치되고 구금되어 이용당하는 이들도 고통 중에 있습니다. 이런 노예살이의 원인은 빈곤과 교육 기회의부재, 부족한 일자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이들의 부패, 무력 분쟁, 폭력, 범죄, 테러입니다.

노예살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수도회들이 피해자들을 돕고, 재활과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 피해자 보호, 가해자에 대한 사법 처리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가들은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고 법들이 올바로 적용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정부간 기구들은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협력하고, 기업들은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근로 조건과 적정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웃이 누구이든 그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도록, 무관심과 경제적 이유로 눈감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네 형제에게 무슨 짓을 하였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연대와 형제애의 세계화를 위한 일꾼이 되어 그들에게 희망을 되찾아 주고, 용기 있게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전문: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200&bid=13011767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서울대교구장 2015년 신년 메시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6)

15/01/01

+ 찬미예수님!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 그리고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아시아의 첫 방문지로 결정하신 대한민국에서 교황님은 초기 순교자들을 시복해 주시고, 아시아의 젊은이들을 만나 희망을 주셨으며,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봉헌해 주셨습니다. 또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위로해 주셨습니다. 교황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한해였습니다.

새해도 이런 교황님의 말씀과 행동을 따라서 우리 주변의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주고, 또 그들을 위해서 따뜻하게 위로하고 기도해 주며 그들과 함께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흘러넘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주님께서 선물로 주시며 주님과 함께하는 평화입니다.(요한 14,27)

2015년 올 한 해 모든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가정생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성가정의 거룩한 선물이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을 이루신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가 우리의 삶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기쁨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새해에도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5년 새해첫날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제48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약)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15/01/01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은총과 선물로 주시는 새해를 맞아 전쟁과 분쟁이 끝나고, 고통과 전염병, 자연재해에 따른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으며, 이들의 자식들은 형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하느님을 닮은 부모처럼 존엄을 지닙니다. 형제자매는 다양성과 차이를 보여주고, 본질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형제애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가정을 키워나가는 데에 근본이 되는 관계망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현실적으로 형제애를 끊어버리고 훼손시키는 죄악이 있습니다.

오늘날 노예 제도가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이전부터 인간을 노예로 삼는 현상이 있어왔습니다. 국제 공동체가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린이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살이와 다름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에서조차도 가사 노동, 농업, 제조업이나 광업에서 많은 이들이 노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들은 합법적으로 체류하기 위하여 비인간적인 생활과 노동의 조건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굶주림을 겪고 자유를 박탈당하며 재산을 빼앗기고 육체적, 성적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성년자들이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많은 여성들이 강제 혼인과 정략결혼에 시달립니다. 장기 적출, 강제 징집, 구걸, 마약의 생산과 판매와 같은 불법 행위, 국제적인 위장 입양을 위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미성년자와 성인들도 있습니다. 테러 집단에 납치되고 구금되어 이용당하는 이들도 고통 중에 있습니다. 이런 노예살이의 원인은 빈곤과 교육 기회의 부재, 부족한 일자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이들의 부패, 무력 분쟁, 폭력, 범죄, 테러입니다.

노예살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수도회들이 피해자들을 돕고, 재활과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 피해자 보호, 가해자에 대한 사법 처리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가들은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고 법들이 올바로 적용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정부간 기구들은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협력하고, 기업들은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근로 조건과 적정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웃이 누구이든 그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도록, 무관심과 경제적 이유로 눈감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내 형제에게 무슨 짓을 하였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연대와 형제애의 세계화를 위한 일꾼이 되어 그들에게 희망을 되찾아 주고, 용기 있게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바티칸에서

2014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제48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15/01/01

1.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은총과 선물로 주시는 새해를 맞이하여, 저는 모든 이, 세계의 모든 국민과 민족들, 국가와 정부의 지도자들, 여러 종교 지도자들에게 진심어린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저는 전쟁과 분쟁이 종식되고, 인간이 자초한 고통, 온갖 전염병과 엄청난 자연 재해에 따른 고통이 사라지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저는, 세계의 화합과 평화를 증진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선의의 모든 사람과 협력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소명에 따라 우리가 인간 본성을 거슬러 행동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해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충만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이들과 우애를 나누며 그들을 적이나 경쟁 상대로 보지 않고 형제자매로 받아들여 끌어안도록 해 주는 형제애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바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정의와 사랑에 힘입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완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 자유, 자율의 인정과 존중이 인간 발전의 기초가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라는 한층 더 확산된 참상은 존중과 정의와 사랑으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 우리의 소명과 친교의 삶에 심각한 해악을 끼칩니다. 이러한 끔찍한 현상은 타인의 기본권 유린과 그들의 자유와 존엄의 말살을 초래하며, 이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저는 이러한 형태들을 살펴보아,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가 모든 사람을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자매로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인류를 위한 하느님 계획에 귀 기울이기

2. 올해 담화의 주제는 바오로 성인이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의 구절에서 선택하였습니다. 그 서간에서 사도는 그의 협력자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스를 환대하여 줄 것을 부탁합니다. 오네시모스는 전에는 필레몬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바오로에 따르면 형제라고 여겨질 자격이 있습니다. 이민족들의 사도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필레 1,15-16). 오네시모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필레몬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것, 곧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탄생(2코린 5,17; 1베드 1,3 참조)을 의미합니다. 이는 가정생활에 바탕이 되는 유대와 사회생활의 토대인 형제애를 낳습니다.

창세기(1,27-28 참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어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모가 되도록 하신 아담과 하와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축복에 맞갖게 살아 최초의 형제 관계, 카인과 아벨의 형제 관계를 낳았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한 배에서 나왔기에 형제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그들의 부모와 같은 혈통과 본성과 존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애는 또한 형제자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과 차이를 보여줍니다. 형제자매가 출생으로 맺어지고 동일한 본성과 존엄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형제자매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혈통과 본성과 존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형제애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류 가정을 키워나가는 데에 근본이 되는 관계망을 형성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창조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 사이에는 죄의 부정적인 현실이 존재합니다. 이 새로운 탄생으로 믿는 이들은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마 8,29)이신 분의 형제자매가 됩니다. 죄의 부정적인 현실은 인류의 형제애를 번번이 끊어버리고, 한 인류 가정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끊임없이 훼손시킵니다. 카인은 아벨을 몹시 꺼려했을 뿐만 아니라 질투에 눈이 멀어 아벨을 죽여 최초의 형제 살해를 저지르고 맙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형제가 되어야 하는 그들의 소명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비극적인 증거입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창세 4,1-16 참조)는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과제, 곧 하나 되어 살아가며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상기시킵니다.”

또한 노아와 그 아들들의 가족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창세 9,18-27 참조). 함이 아버지 노아에게 불충하여 노아는 무례한 아들을 저주하고 아버지를 공경하는 다른 아들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한 배에서 나온 형제들 사이의 불평등이 빚어졌습니다.

인류 가정의 근원에 관한 이야기에서 하느님과 아버지 상과 형제에게서 멀어지는 죄는 친교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 됩니다. 이는 노예살이의 문화(창세 9,25-27 참조)를 만들어 내어 그에 따른 영향들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거부, 인간 학대, 존엄과 기본권의 침해, 그리고 불평등의 제도화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이 충만히 내린다”(로마 5,20-21 참조)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성된 계약으로 끊임없이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마태 3,17 참조)께서는 인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는 누구나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마태 12,50)가 되어?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에페 1,5 참조).?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고 다시 말해 자유롭게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성스러운 명령에 따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곧 아버지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베드로의 이 요청에 신앙과 자신들의 삶으로 응답한 모든 이는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형제 관계를 맺었습니다(1베드 2,17; 사도 1,15-16; 6,3; 15,23 참조). 이들은 유다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1코린 12,13; 갈라 3,28 참조)으로, 출신과 사회적 지위가 다양했음에도 저마다의 존엄이 손상되지 않았고, 그 누구도 하느님 백성에서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형제자매가 사랑 속에서 친교를 나누는 자리입니다(로마 12,10; 1테살 4,9; 히브 13,1; 1베드 1,22; 2베드 1,7 참조).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과 주인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도 회복시켜 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묵시 21,5) 만드십니다. 복음은 종과 주인의 공통점을 밝혀줍니다. 곧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애의 유대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어제와 오늘의 노예살이의 여러 모습

3. 유사 이전부터 여러 사회에는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는 현상이 있어왔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노예 제도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법제화 되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법은 태생적인 자유인과 노예를 규정하였고, 또한 자유인이 그 자유를 상실하거나 다시 얻을 수 있는 조건도 명시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법 자체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소유물로 여겨질 수 있거나 그렇게 여겨져야만 하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노예는 물건처럼 사고팔거나, 소유물처럼 넘겨주거나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류의 의식이 긍정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인간성을 거스르는 범죄로 여겨지는 노예제도가 전세계적으로 공식 폐지되었습니다. 국제법에서 노예나 예속 상태에 있지 말아야 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공동체가 온갖 형태의 노예살이를 없애기 위하여 수많은 협약을 맺었고, 이러한 현상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다양한 전략들을 실행하였음에도, 오늘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 어린이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살이와 다름없는 상황으로 내어 몰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 분야에서 노예 노동을 하는 미성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 가사 노동, 농업, 제조업이나 광업에서 노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노예 노동은, 노동 관계법이 국제적인 규범과 최소한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나라들에서 벌어질 뿐만 아니라, 법이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나라에서조차도 불법적으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수많은 이민의 삶의 처지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고달픈 여정 속에서 굶주림을 겪고 자유를 박탈당하며 재산을 빼앗기고 육체적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그들 가운데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혹독한 여정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하여서도 종종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 억류된 이들을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 때문에 불법 체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도 생각합니다. 또한 합법적으로 체류하기 위하여 비인간적인 생활과 노동의 조건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도 생각합니다. 특히 이주 노동자들이 고용주에 구조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국내법이 조장하거나 허용하는 경우에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합법적인 체류가 노동 계약에 좌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노예 노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 매매를 강요당하는 이들과 성 노예들을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미성년자들이 성 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강제 혼인에 내몰린 여성들, 정략결혼을 위해 팔린 여성들, 남편의 사망으로 그들 스스로 동의를 하거나 거부할 권리 없이 사망한 남편의 친척들에게 상속된 여성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또한 장기 적출, 강제 징집, 구걸, 마약의 생산과 판매와 같은 불법 행위, 국제적인 위장 입양을 위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모든 미성년자와 성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저는 테러 집단에 납치되고 구금되어 이용당하는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테러 요원이나, 특히 여성들의 경우 성 노예로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행방불명되고, 어떤 이들은 여러 차례 되팔려지며 고문을 당하고 불구가 되거나 살해됩니다.

노예살이의 몇 가지 근본 원인

4.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노예살이는 인간을 물건처럼 다룰 여지가 있는 인간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죄가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우리를 창조주와 이웃에게서 멀어지게 할 때 우리의 이웃은 더 이상 우리와 동일한 존엄을 지닌 존재로, 곧 똑같은 인간성을 지닌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받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힘이나 속임수, 또는 신체적 정신적 억압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타인의 소유물로 전락되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 곧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거부하는 것 말고도 현대의 노예살이의 형태에는 또 다른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무엇보다 빈곤과 저개발과 배척, 특히 여기에 교육 기회의 부재, 또는 드물거나 아예 없는 일자리가 더해지는 경우를 들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인신매매와 노예살이의 피해자들은 극빈의 상황을 벗어나려다가 일자리를 주겠다는 거짓 약속에 속아 오히려 인신매매 조직에 넘어가는 이들입니다. 이 범죄 조직들은 세계 곳곳에서 젊은이들을 현혹시키고자 최신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이들의 부패를 노예살이의 원인으로 꼽고자 합니다. 사실 노예 노동과 인신매매는 반드시 중개 역할을 하는 이들의 부패를 통한 공모로 이루어집니다. 이들 가운데는 일부 사법 당국자, 공무원, 또는 국가 기관이나 군기관의 관계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경제 제도의 중심에 있을 때 발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이 있는 인간이 모든 사회 제도나 경제 제도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물신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할 때 가치의 전복이 일어납니다.”

노예살이의 또 다른 원인들로는 무력 분쟁, 폭력, 범죄, 테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납치되어 팔려가거나 테러 요원으로 강제 징집 되거나, 또는 성적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 고향, 집, 재산, 가족까지도 남겨 둔 채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은 그들의 존엄과 생명을 잃을 위협을 받으며 이 끔찍한 상황에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빈곤과 부패와 그 해로운 결과들에 희생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노예살이 극복을 위한 공동 노력

5. 인신매매와 불법 이민 거래의 실상과 알게 모르게 노예제의 모습을 한 여러 현상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 벌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저는 수도회들, 특히 수녀회들이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위하여 오래 전부터 묵묵히 기울여 온 대단한 노력들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수도회들은 때때로 폭력이 지배하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 활동하며, 피해자들을 인신매매범과 착취자들에게 매어있게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사슬은 피해자들이 착취자들에게 매어있게 만드는 교묘한 심리적 책략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고리들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 책략은 피해자들과 그 가족친지들에게 가하는 공갈과 협박만이 아니라, 신분증의 압수와 신체적 폭행과 같은 물리적 방법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수도회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곧 피해자들을 돕고, 그들의 심리적 교육적 재활을 위해 일하며,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사회 또는 떠나온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용기와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하는 이 대단한 노력은 온 교회와 사회의 칭찬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간 착취의 참상을 없애지 못합니다.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 피해자 보호, 가해자에 대한 사법 처리라는 삼중의 노력 또한 필요합니다. 또한 범죄 조직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국제적 연계망을 활용하고 있으므로,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 각계 인사들의 세계적 차원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국가들은 이주, 취업, 채용, 기업의 해외이전, 노예 노동 상품의 판매에 관한 국내법들이 인간의 존엄을 실질적으로 존중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권을 수호하며, 인권이 유린된 경우 이를 회복시키는 올바른 법들이 필요합니다. 이 법들은 또한 피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고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해야 합니다. 또한 이 법들이 올바로 적용될 수 있게 하는 효과적인 통제 장치를 마련하여 부패와 부정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또한 인정받아야 하며, 이를 위한 여건이 특히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조성되어야 합니다.

정부간 기구들은 인신매매와 불법 이민 거래를 총괄하는 조직범죄의 초국가적 연계망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협력해야 합니다. 다양한 차원의 협력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국내외 기구와 국제기구, 시민사회단체와 재계가 포함됩니다.

기업들은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근로 조건과 적정 임금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노예 노동이나 인신매매의 형태들이 유통 과정 안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소비자의 사회적 책임과 함께 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구매는 단순히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인 행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시민 사회단체들은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워 노예살이 문화에 맞서 싸우고 이를 근절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동을 독려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황청은 최근에 인신매매 피해자들의 고통과 이들이 자유의 길을 가도록 돕는 수도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이 참상을 없애기 위하여 각계 기관들이 협조와 협력을 하도록 국제 공동체에 거듭 호소해 왔습니다. 또한 인신매매 현상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면서 각계 주요 관계자들의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회의를 마련해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학계와 국제기구의 전문가들, 이민의 출발지, 경유지, 도착지 나라의 치안 담당자들, 그리고 피해자들 편에서 일하는 교회 단체 대표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노력들이 앞으로 계속 확대되고 강화되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노예살이도 무관심도 아닌 형제애의 세계화

6.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를 선포”하면서 교회는 인간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활동을 끊임없이 펼쳐왔습니다. 교회는 모든 이에게 이웃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도록 이끄는 회개의 길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회개는 이웃이 누구이든 그를 인류 가정 안에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진리와 자유 안에서 그의 내적인 존엄을 인정하도록 이끕니다. 이를 우리는 수단 다르푸르의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의 이야기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성녀는 아홉 살 때 노예상인에게 납치되어 잔인한 주인들에게 여러 차례 팔렸습니다. 갖은 고통을 겪은 뒤, 마침내 수도회에 입회하여 다른 사람들, 특히 가장 작고 약한 이들을 섬기면서 신앙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살았던 이 성녀는 오늘날에도 노예살이의 많은 희생자들에게 희망의 모범적인 증인입니다.?또한 “오늘날 인류에 몸에 난 상처, 그리스도의 몸에 난 상처”인 인신매매에 맞서 싸우는 데에 헌신하는 모든 이는 이 성녀에게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여러분 모두 노예살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역할과 책임 안에서 형제애를 보여주는 행동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인신매매의 피해자일 수도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상대할 때, 또는 타인을 착취하여 생산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상품의 구매를 망설일 때, 개인이나 공동체로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낍니까?

우리 가운데 더러는 무관심에서, 또는 경제적 이유로, 일상의 걱정거리에 사로잡혀 눈을 감아 버립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가운데 더러는 적극적인 행동을 할 것을 결심합니다. 곧 시민단체에 참여하거나 일상의 작은 몸짓들, 예를 들어 따뜻한 말 한 마디나 인사나 미소를 건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몸짓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이는 돈 한 푼 안 들면서도 희망을 주고 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사각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이 현실에 맞서도록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공동체나 국가의 능력을 넘어서는 세계적인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규모의 동원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저는 선의의 모든 사람과 고위 당국자를 포함하여 가까이에서나 멀리에서나 노예살이의 참상을 목격하는 사람에게 호소합니다. 곧, 이 악의 공범이 되지 말고, 한 인류 가정 안의 형제자매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유와 존엄을 빼앗긴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당신의 “가장 작은 형제들”(마태 25,40.45 참조)이라고 부르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고통 받는 몸을 어루만져줄 용기를 낼 것을 호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는 네 형제에게 무슨 짓을 하였느냐?”(창세 4,10 참조) 하고 물으실 것임을 압니다. 오늘날 수많은 형제자매들의 삶을 짓누르는 무관심의 세계화에 맞서, 우리 모두 연대와 형제애의 세계화를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연대와 형제애의 세계화는 그 형제자매들에게 희망을 되찾아 주고, 그들이 용기 있게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헤쳐 나아가며, 새로운 전망을 얻게 해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여는 이 새로운 전망은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바티칸에서

2014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제4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약)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

14/01/01

세계 평화의 날에 제가 처음으로 보내는 이 담화에서, 저는 모든 사람이, 모든 개인과 민족들이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형제애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형제애가 없으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도 없고, 확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도 없습니다. 형제애의 기초는 하느님의 부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막연하고 역사적으로 비현실적인 유전학적 부성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하고 매우 구체적인 인격적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6,25-30 참조).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뵙고 하느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하느님의 가정에서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결합시키기 때문에, 곧 성자 안에서 자녀가 되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수많은 사회에서,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의 관계가 견고하지 못하여 관계의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빈곤은,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형제적 관계를 재발견하고 중시할 때에만, 살아가면서 겪게 마련인 기쁨과 슬픔, 어려움과 성공을 서로 나눌 때에만 비로소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절대 빈곤이 줄어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 빈곤이 심각할 정도로 증대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애의 원칙을 증진하는 효과적인 정책이 필요합니다. 또한 소득의 지나친 불균형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저는 무력을 통하여 폭력과 죽음을 확산시키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찔러야 할 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의 형제나 자매임을 깨달으십시오. 무력의 길을 포기하고 대화와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 주위에 정의와 신뢰와 희망을 다시 세우십시오!

형제애는 발견하고 사랑하고 경험하고 선포하고 증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만이 우리가 형제애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체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정치와 경제에 필요한 현실주의는, 이상도 없고 인간의 초월적 차원도 간과하는 단순한 기술적 요령으로 전락될 수 없습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 얻게 되는 그 폭넓은 차원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정치와 경제는 형제적 사랑의 진정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질서를 이루고 온전한 인간 발전과 평화의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의 지체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끌어안으시고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27). 그러므로 모든 활동은 사람들, 특히 가장 멀리 있고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한 봉사의 자세를 특징으로 하여야 합니다. 봉사는 평화를 이룩하는 형제애의 혼입니다.

바티칸에서

2013년 12월 8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제4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

14/01/01

1. 세계 평화의 날에 제가 처음으로 보내는 이 담화에서, 저는 모든 사람이, 모든 개인과 민족들이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충만한 삶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이들과 우애를 나누며 그들을 적이나 경쟁 상대로 보지 않고 형제자매로 받아들여 끌어안도록 해 주는 형제애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바람을 지니고 있습니다.

형제애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은 우리가 서로를 참된 형제자매로 여기고 대할 수 있게 해줍니다. 형제애가 없으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도 없고, 확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이룩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제애를 가정에서 먼저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의 모든 구성원,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의 책임 있고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통하여 형제애를 배웁니다. 가정은 모든 형제애의 원천이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중요한 길입니다. 가정은 그 소명에 따라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상호 연결과 의사소통이 점증함에 따라 우리는 여러 나라 사이에서 일치와 공동 운명체 의식을 강력하게 느끼게 됩니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리고 다양한 민족 집단과 사회와 문화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소명의 씨앗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 소명은,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고통에 점차 ‘둔감해지고’ 우리 자신 안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무관심의 세계화’라는 특징을 보이는 세상에서 여전히 자주 거부되고 무시됩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기본 인권, 특히 생명권과 종교 자유의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다른 이들의 삶과 곤경을 무자비하게 악용하는 인신매매라는 비극적인 현상은 그러한 침해의 충격적인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무력 충돌과 더불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잔혹한 전쟁이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생명과 가정과 기업을 파괴하는 수단들을 통하여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세계화는 우리를 이웃으로 만들어 주지만 형제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불평등과 빈곤과 불의의 여러 상황은 형제애가 매우 부족할 뿐 아니라 연대의 문화도 결여되어 있다는 표징이 됩니다. 만연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의 소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버리는’ 사고방식을 조장합니다. 이는 사회적 유대를 약화시켜서 가장 힘없는 이들과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이들을 경멸하고 방치하도록 이끕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공존은 점차 실용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으로 오로지 받으려고 주는, 단순한 ‘주고받기’(do ut des)처럼 되고 맙니다.

이와 동시에 분명히 현대의 윤리 체계는 형제애의 참다운 유대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공동의 아버지를 궁극적인 기초로 삼지 않는 형제애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참다운 형제 정신은 초월적인 부성을 전제로 하고 또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부성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할 때 사람들 사이의 형제애는 확고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 참조)

2. 형제애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소명을 좀 더 온전히 이해하고 또 형제애의 실현을 저해하는 장애물을 더욱 분명히 인식하며 이를 극복하는 길을 찾으려면,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계획을 잘 알고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창조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부부인 아담과 하와를 공통 조상으로 삼는 후손들입니다(창세 1,26 참조). 이 부부는 카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이 첫 가정에 관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회의 기원, 그리고 개인들과 민족들의 관계의 발전을 보게 됩니다.

아벨은 양치기이고 카인은 농부입니다. 그들의 활동과 문화가 다르고 그들이 하느님과 피조물과 맺는 관계가 다르지만 형제가 되는 것이 그들의 소명과 근본 정체성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형제가 되어야 하는 그들의 소명을 근본적으로 거부한 비극적인 증거입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창세 4,1-16 참조)는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과제, 곧 하나 되어 살아가며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상기시킵니다. 카인은 가장 좋은 양을 하느님께 바친 아벨을 하느님께서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창세 4,4-5). 그래서 카인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벨을 살해합니다. 이렇게 하여 카인은 아벨을 형제로 여기려고 하지 않고,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 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을 돌보고 보호할 책임을 지면서 하느님 앞에서 살아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며 카인 자신이 저지른 짓에 책임을 지도록 하십니다. 카인은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그러고 나서 창세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줍니다.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왔다”(창세 4,16).

우리는 카인이 형제애의 유대를 무시하고 또 자신을 형제인 아벨과 결합시킨 친교와 호혜적 유대를 무시하도록 한 진짜 이유들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물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악과 결탁한 카인을 친히 꾸짖으시며 나무라셨습니다.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창세 4,7). 그러나 카인은 죄악에 맞서기를 거부하고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창세 4,8) 하느님의 계획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하여 카인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형제애를 실천하라는 원초적인 소명을 저버렸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우리가 형제애의 소명을 물려받았지만 또한 그러한 소명을 저버릴 수 있는 비극적인 능력도 지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수많은 전쟁과 불의의 뿌리가 되는 우리의 일상적인 이기주의적 행위에서 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친교와 헌신을 위하여 창조된 호혜적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형제자매들의 손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3.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과연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심어 주신 형제애에 대한 갈망에 온전히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무관심, 이기주의, 증오를 극복하고 형제자매들에게 당연한 일반적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답을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9 참조). 형제애의 기초는 하느님의 부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막연하고 역사적으로 비현실적인 유전학적 부성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하고 매우 구체적인 인격적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태 6,25-30 참조). 그래서 이는 형제애를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부성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일단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삶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변화시켜 연대성과 참다운 나눔에 우리 자신을 열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형제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생겨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형제애의 바탕이 되는 결정적인 ‘자리’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를 사랑하시며(필리 2,8 참조)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새로운 인류로 만들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온전히 일치하게 하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는 우리 형제애의 소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일도 담겨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아버지를 으뜸으로 여기시며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죽음에 내어 맡기셔서 우리 모두의 궁극적이고도 새로운 원칙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자녀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알아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계약이십니다. 곧,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우리가 서로 형제자매로 화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서 민족들의 분열이 종식되었고, 계약의 백성과 다른 민족들 사이의 분열도 종식되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약속의 계약에 참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에페소서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당신 안에서 화해시키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평화이십니다. 계약의 백성과 다른 민족들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들을 가르는 분열의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새 인간, 하나의 새로운 인류를 만드셨습니다(에페 2,14-16 참조).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분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뵙고 하느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화해를 이룬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이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 결과 모두에게 열린 형제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이들은 이방인이나 경쟁자, 심지어 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로 환대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하느님의 가정에서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결합시키기 때문에, 곧 성자 안에서 자녀가 되기 때문에, 결코 ‘버릴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침해할 수 없는 존엄을 누립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우리 형제자매에게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

4.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애가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의 선임자들께서 쓰신 사회 회칙들이 귀중한 도움이 됩니다.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과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사회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에 나오는 평화에 관한 정의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민족들의 발전」에서 우리는 민족들의 온전한 발전이 평화의 새 이름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사회적 관심」에서 평화가 연대의 열매(opus solidaritatis)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국가들 또한 형제애의 정신으로 서로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 같은 호의와 우정으로써, 이같이 성스러운 마음의 결합으로써 우리는 인류 공동체의 행복한 내일을 위하여 함께 활동을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이 과제는 무엇보다 가장 혜택을 누리는 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의 의무는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형제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세 가지 측면으로 드러납니다. 곧, 부유한 나라들이 아직 덜 발전된 나라들을 도와야 한다는 연대의 의무, 강한 민족들과 약한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더욱 공정한 의미에서 재정립해야 한다는 사회 정의의 의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더욱 인간다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고 한 쪽의 발전이 다른 쪽의 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보편적 사랑의 의무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평화를 연대의 열매로 여긴다면, 형제애가 평화의 중요한 바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평화를 나뉠 수 없는 선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모두의 선익이 되지 않으면 그 누구의 선익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양질의 삶과 더욱 인간답고 지속적인 발전으로서, 평화는 실제로 이룰 수 있고 또 누릴 수 있습니다. 오직 모든 사람들이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 항구한 결의”인 연대 의식을 가질 때에만 그러합니다. 이는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을 포함합니다. 남을 착취하는 대신 그를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을 억압하는 대신 “남을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간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일종의 도구로 [보지 않고], 저가로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과 체력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더 이상 효용이 없을 때에는 내버릴 것으로 보지 말고, 우리 ‘이웃’으로, ‘돕는 이’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연대는 이웃을 “나름대로 권리와 다른 이와의 근본적인 평등을 갖춘 인간”으로만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산 모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고 성령의 항속적인 활동을 입고 있는 모상”으로서, 우리의 형제자매로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 만인의 아버지이시고 만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며 - 그로 말미암아 ‘성자 안에 만인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 성령의 현존과 생명을 주시는 활동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우리의 세계관은 그것을 해석하는 새로운 기준을 얻게” 됩니다.

형제애, 빈곤 극복을 위한 전제 조건

5.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저의 선임자께서는 민족들과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결여가 어떻게 빈곤의 주요 원인이 되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회에서,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의 관계가 견고하지 못하여 관계의 심각한 빈곤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유형의 궁핍과 소외와 고립,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병적인 의존이 심해지는 것을 보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빈곤은,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형제적 관계를 재발견하고 중시할 때에만, 살아가면서 겪게 마련인 기쁨과 슬픔, 어려움과 성공을 서로 나눌 때에만 비로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한편으로는 절대 빈곤이 줄어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 빈곤이 심각할 정도로 증대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같은 지역 또는 같은 역사 문화적 상황 안에 사는 사람들과 집단들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형제애의 원칙을 증진하는 효과적인 정책이 필요합니다. 곧, 동등한 인간 존엄과 기본권을 지닌 사람들에게 ‘자본’, 서비스, 교육 재원, 보건과 기술을 보장하여, 누구나 자기 인생 계획을 세우고 실현할 기회를 가지며 인간으로서 온전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또한 소득의 지나친 불균형을 완화시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른바 사회적 저당권(social mortgage)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적 저당권을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씀처럼, “인간은 재화를 소유할” 수 있고 소유할 필요가 있지만, “소유자는 그 재화를 자기만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하며, 그러한 의식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도록” 그 재화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끝으로,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형제애를 증진하고, 또 그렇게 하여 빈곤을 물리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양식을 선택한 사람들의 초탈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 다른 이들과 형제적 친교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본입니다. 이는 청빈을 서원한 봉헌 생활자들의 경우만이 아니라 수많은 가정들과 책임감 있는 시민들의 경우도 해당됩니다. 이들은 이웃과의 형제적 관계가 가장 귀중한 재화임을 굳게 믿습니다.

경제 안에서 형제애의 재발견

6. 현대의 금융과 경제의 심각한 위기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느님과 ‘이웃’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고 물질적 부를 탐욕스럽게 추구한 데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인 관계와 공동체 관계가 약해진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위기는 수많은 사람들을 건전한 경제 논리를 벗어나 소비와 이득 속에서 만족과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도록 부추겨 왔습니다. 1979년에 이미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위험을 지적하셨습니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이 엄청난 진전을 가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지배권의 본질적인 맥들이 끊길 위험이 현실적으로 피부에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인간이 자기의 인간성을 세계에 예속시키게 버려두거나, 공동체 생활의 조직 전체를 통해서나 생산 제도를 통해서나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압력을 통해서나 여러 방도로 자신을 조종 ─ 비록 흔히는 그 조종이 직접 감지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 에 맡겨 버릴 위험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연이은 경제 위기에서 우리는 경제 개발 모델을 제때에 재고하고 생활양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람들의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면서도, 예지와 절제와 정의와 용기의 사추덕을 되찾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추덕은 어려운 시기들을 이겨내고 우리를 서로 묶어 주는 형제적 유대를 재발견하도록 도우며, 이와 더불어 인간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보다 더욱 큰 그 어떤 것이 필요하며 또 이를 실현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특히 사추덕은 인간 존엄을 바탕으로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형제애가 전쟁을 없앤다

7. 지난해에도 우리의 수많은 형제자매들은 참혹한 전쟁을 계속 겪었고, 이는 형제애에 심각하고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무수한 갈등이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서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무기가 초래한 공포와 파괴로 얼룩진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저는 저 자신과 온 교회가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평화를 위한 기도를 통하여, 사람들이 잊어버린 전쟁들에서 무방비 상태로 피해를 겪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상처받은 이들과 굶주린 이들, 난민들과 강제 이주민들, 그리고 공포 속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책임자들에게 들려주고, 온갖 형태의 적의와 폭력, 인간 기본권의 침해를 멈추게 하고자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무력을 통하여 폭력과 죽음을 확산시키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찔러야 할 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의 형제나 자매임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무기를 든 손을 거두십시오! 무력의 길을 포기하고 대화와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 주위에 정의와 신뢰와 희망을 다시 세우십시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세상 사람들에게 무력 갈등은 언제나 국제적 합의를 고의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심각한 분열과 함께 치유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는 깊은 상처를 만들어 내는 것임이 자명합니다. 전쟁은 국제 사회가 자체적으로 정한 경제적 사회적 큰 목표들을 이루려는 노력을 실제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거래되는 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새로운 핑계 거리는 계속 찾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저의 선임자들과 한 목소리로 무기 확산 금지와 모든 당사국들의 군비 축소를 호소합니다. 이는 핵무기와 화학 무기의 축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국제 협약과 국내법만으로는, 물론 꼭 필요하고 매우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무력 분쟁의 위협에서 인류를 보호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형제자매를, 모든 이를 위한 충만한 삶을 일구고자 함께 일해야 하는 형제자매를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종교 기관들을 포함한 시민 사회가 평화 증진을 위하여 펼치는 수많은 활동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정신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노력하여 계속 열매를 맺고, 또 평화에 대한 권리가 인간의 기본권이자 다른 모든 권리 행사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서 국제법으로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형제애를 위협하는 부패와 조직범죄

8. 형제애의 지평은 또한 모든 사람의 충만한 실현에 대한 요구와 관련됩니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정당한 포부가 좌절되거나 침해당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 포부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들의 희망도 꺾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포부가 권력의 남용과 혼돈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서로 존중하면서(로마 12,10 참조) 경쟁하여야 합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마련인 불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형제자매이고 따라서 우리 이웃을 물리쳐야 하는 원수나 적으로 여기지 않도록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형제애는 사회적 평화를 낳습니다. 형제애가 자유와 정의 사이에, 개인적 책임과 연대 사이에, 개인의 선익과 공동선 사이에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 공동체는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이 모든 것을 증진하고자 활동하여야 합니다. 시민들은 공권력이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들 자신을 대표한다는 것을 자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시민들과 제도들은 파벌의 이해에 따라 갈라지곤 합니다. 이는 그 관계를 왜곡시키고 지속적인 갈등 분위기를 조장합니다.

진정한 형제애 정신은, 자유롭고 서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역량과 상충되는 개인의 이기주의를 극복합니다. 그러한 이기주의는 사회적으로 전개됩니다. 곧 이는 오늘날 만연한 부패 형태로 드러나거나, 소규모부터 세계적 규모에 이르는 조직화된 범죄 집단들을 양산합니다. 이들 집단은 법과 정의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합니다. 이러한 범죄 조직들은 하느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며 피조물에 해를 끼칩니다. 무엇보다도 이 조직들이 종교적 색채를 띨 때 더욱 그러합니다.

저는 도덕률과 국법을 무시하며 이득을 챙기는 마약 밀매의 가슴 아픈 비극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천연 자원의 고갈, 환경 오염, 노동 착취의 비극을 생각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을 빈곤으로 내모는 불법 화폐 거래와 자본 투기도 생각합니다. 날마다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매매춘을 생각합니다. 이는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미래를 앗아가 버립니다. 또한 저는 혐오스런 인신매매와 미성년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와 학대, 그리고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지역에 존재하는 끔찍한 노예제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인간 존엄을 해치는 불법적인 착취의 희생자가 되곤 하는 이민들의 비극은 자주 간과되고 있습니다. 요한 23세께서 쓰신 대로, “다만 폭력으로 유지되는 인간 사회는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자신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 어떤 자극을 주고 추진하는 대신에 실제로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고 제한하는 일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회개할 수 있고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저는 이것이 모든 이에게, 심지어 끔직한 범죄를 저질러 온 이들에게도 희망과 확신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여 사는 것을 바라시기 때문입니다(에제 18,23 참조).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폭넓은 맥락에서 범죄와 형벌에 대하여 살펴볼 때, 우리는 많은 교도소의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수감자들은 흔히 그들의 인간 존엄을 침해당하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재활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염원이 짓눌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환경에서 대부분 조용하게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가 더 많은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하고 장려합니다. 또한 이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용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대하여 국가 당국도 공정하고 정당하게 지원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형제애는 자연 보전에 도움이 됩니다

9. 인류 가족은 창조주께 자연을 공동의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관은, 자연에서 혜택을 얻되 책임감 있게 이루어지는, 자연에 대한 개입의 정당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개입은 자연에 새겨져 있는 ‘법칙’을 인정하고 자원들을 모든 이를 위하여, 또 모든 살아있는 것과 생태계 안에서 그들의 역할이 지닌 아름다움과 목적과 유용함을 존중하는 가운데, 현명하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연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고 우리는 이를 책임 있게 관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고 조작하고 착취하려는 탐욕과 교만에 이끌려 자연을 보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자연을 우리가 미래 세대들을 포함하여 우리 형제자매들이 이용할 수 있게 돌보아야 하는 은혜로운 선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특히, 농업 분야는 인류에게 식량을 공급하고자, 천연 자원을 보호하고 가꾸는 막중한 소명을 지닌 1차 산업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세상에 굶주림이 지속되고 있다는 부끄러운 현실 속에서, 저는 여러분과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구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현대 사회는 생산의 측면에서 우리가 지향하여야 하는 우선 순위에 대하여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지구 자원을 사용하여야 하는 것은 참으로 절박한 의무입니다. 이를 위한 시도들과 가능한 해결책은 많지만 생산 증가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현재의 생산량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계속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일구어 낸 결실을 모든 이가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더 많이 가진 자와 부스러기로 만족해야 하는 이들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것이 정의와 평등과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의 근본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서 반드시 필요한, 재화의 보편적 목적을 모든 이에게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이 원칙을 존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고 가질 권리가 있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재화에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접근할 수 있게 돕는 근본 조건입니다.

결 론

10. 형제애는 발견하고 사랑하고 경험하고 선포하고 증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만이 우리가 형제애를 받아들이고 온전히 체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정치와 경제에 필요한 현실주의는, 이상도 없고 인간의 초월적 차원도 간과하는 단순한 기술적 요령으로 전락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린 자세가 없으면, 모든 인간 활동은 피폐해지고 사람들은 착취당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 얻게 되는 그 폭넓은 차원으로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정치와 경제는 형제적 사랑의 진정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질서를 이루고 온전한 인간 발전과 평화의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의 지체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공동선을 위한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4,7.25; 1코린 12,7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 곧 당신 생명에 동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어 모든 이를 당신 자신에게 이끌어 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그 폭넓고 깊은 사랑에 따라, 호혜와 용서와 완전한 자기 증여를 특징으로 하는 형제 관계의 바탕이 마련된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요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곧, 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까지 포함하여 다른 이들의 고통과 희망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공감하고,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의 선익을 위하여 기꺼이 온 힘을 다해 헌신할 줄 아는 그 사랑의 힘든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끌어안으시고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마음과 정신의 문을 열고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강압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6-27). 그러므로 모든 활동은 사람들, 특히 가장 멀리 있고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한 봉사의 자세를 특징으로 하여야 합니다. 봉사는 평화를 이룩하는 형제애의 혼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 저희가 날마다 아드님의 성심에서 샘솟는 형제애를 깨닫고 실천하여, 소중한 이 땅에 사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도록 저희를 도와주소서.

바티칸에서

2013년 12월 8일



서울대교구장 2014년 신년 메시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마태 5,3 참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꿈과 희망으로 2014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올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과 늘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여러분의 소망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북녘의 갈라진 형제들에게도 주님 은총이 충만히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사실 행복은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미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소한 것이라도 다른 이와 나누며, 이웃과 사랑하는 삶을 산다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쉽게 행복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 참조) 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삶이란 겸손한 자세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복의 진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작지만 풍요로운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 사랑과 나눔 안에서 큰 기적을 이루어 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정에서부터 사랑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 가족 간의 사랑과 일치로 이루어진 성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올해는 우리 모두 더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도록 노력합시다. 특히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더 밝아지고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희망찬 새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이 늘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대주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46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약)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12/01/01

해마다 새해에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촉진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 50주년인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모든 이를 위한 평화 증진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유혈 분쟁과 전쟁의 위협, 극심한 빈부 격차,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하여 우리를 걱정스럽게 합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평화를 이루려는 수많은 노력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참 행복은 약속들입니다. 참 행복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요구하는 것들을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메시아의 선물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이뤄집니다. 이 평화는 인간의 잣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토대 위에서 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공존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화는 진리, 자유, 사랑, 정의를 토대로 인간의 참여를 요구하며, 자신이 지닌 이성적 본성에 따라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존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참다운 평화의 일꾼은 생명을 온전히 사랑하고 수호하며 증진하는 이들입니다. 평화는 꿈이나 이상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평화를 실천하는 첫걸음입니다. 낙태와 안락사 등은 생명에 대한 기본권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태아를 비롯하여 가장 힘없는 이들의 생명권을 수호하지 않고서 어떻게 평화 실현이나 민족들의 발전, 환경 보호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개인과 공동체의 종교 자유의 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노동의 권리 역시 오늘날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경제 발전을 빌미로 노동이 점점 더 경시되고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올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위한 근본 선으로서 노동의 개념을 강화하는 윤리 원칙과, 정신적 가치에 바탕을 둔 새로운 노동관이 필요합니다. 이윤과 소비의 극대화를 요구하는 지금의 지배적인 경제 모델은 극심한 불평등을 자아냅니다. 오로지 경쟁력으로만 개인을 평가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일꾼은 공동선을 위하여 경제 활동에 참여하며 자신의 이익을 넘어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고, 심각한 식량 위기에 관심을 쏟아 평화의 선을 이룩하여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가정과 수도 공동체, 문화 단체, 학교와 같은 단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가정은 생명을 증진해야 하는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 가정은 하느님 사랑의 기준에 따른 인격 성숙의 못자리이며, 도덕과 신앙 교육을 통해 생명과 사랑의 문화를 촉진하는 미래의 일꾼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곳입니다. 아울러 모든 민족들이 형제애를 나누며,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가 이룩되기 위해선 평화의 일꾼들에 대한 교육이 무척 중요합니다. 활동, 연민, 연대,용기, 인내를 담고 있는 평화 교육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일구며 선의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그럴 때 자신의 잘못과 불의를 인정하고 화해를 향하여 함께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며, 인간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시어,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참된 믿음을 가져다주시도록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서울대교구장 2013년 신년 메시지

사랑을 실천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13년 새해를 맞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까지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포하신 ‘신앙의 해’로 지내고 있습니다. 신앙의 해를 보내는 우리 신앙인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나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류와 체험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올해 특별히 우리 주위에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기다리는 소외된 이웃은 없는지 살피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사회 구조의 변화로 ‘소외된 이웃’의 모습도 조금 더 다양해졌습니다. 물질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내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로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남기셨던 마지막 말씀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를 우리도 자주 말하고 실천한다면 ‘이웃 사랑’의 계명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우리가 한 해 동안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지침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의 시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선물로 받은 이 시간을 주님 안에서 기쁘고 감사하며 살 때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은총을 덤으로 내려주실 것입니다.

기쁘고 희망찬 새해, 하느님의 평화와 축복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2012년 신년 메시지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잠언 4,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새해에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올 한해 원하시는 소원들이 하느님 뜻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새해에는 우리가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지혜는 사리를 분별하며 이치를 깨우치고 사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정신적 능력입니다.

성경에서는 지혜의 원천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진정한 지혜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즉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수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바른길로 이끌어줍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삶과 선택은 늘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보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지향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이익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참으로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착한 마음, 작은 행복에도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날마다 지혜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올 한해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 지혜의 빛으로 평화와 기쁨의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2년 새해 첫날에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4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요약)


젊은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교육

12/01/01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인 새해를 맞아, 모든 이에게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며 정의와 평화가 확고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여야 하겠습니까?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시편 130(129),6) 더 굳건한 희망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이 2012년을 이러한 확신에 찬 믿음으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제4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를 “젊은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교육”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립니다. 젊은이들과 그들의 관심사에 동참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는 것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한 사회 전체의 첫째 의무입니다. 교회는 젊은이들이 진리를 찾고 공동선을 수호하며,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일들”(이사 42,9; 48,6)을 바라보도록 격려합니다.

평화와 정의에 대한 참교육은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가 첫 교육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익히는 첫 학교입니다. 부모는 자녀와 함께하면서 그 삶의 여정에 더 깊이 동참하고 연륜으로 얻은 경험과 확신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부모들이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자녀들이 진정한 정의와 평화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도록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모든 가정과 교육 기관들이 그들의 교육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도록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젊은이들에게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진정으로 봉사하는 투명한 정치상을 보여 주십시오. 젊은이들도 정의와 평화 교육을 비롯한 자신의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만 인간 자유의 의미도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이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입니다. 참된 자유는 아무런 제약도 없는 방종이 아닙니다. 참된 자유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자유를 행사하기 위하여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리와 선과 악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하고, 양심의 법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유는 자연 도덕률과 관련되어 있으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존의 기초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올바른 사용은 정의와 평화 증진의 핵심입니다.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존재와 생활 방식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여기에서 상호 신뢰, 용서를 할 수 있는 힘, 주고받는 사랑, 연민, 희생을 할 각오가 생겨납니다. 이 요소들이 없다면, 평화와 정의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그저 빈말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평화는 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떠맡아야 할 과업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일꾼이되려면, 우리는 스스로 교육하여, 연민, 연대, 협동, 형제애, 능동적인 공동체 활동을 배워야 합니다. 평화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추구하여야 하는 목표입니다. 미래 세대가 평화의 겨레가 되고 평화의 일꾼이 되도록 교육하여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저는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사회를 위한 소중한 선물입니다. 어려움에 부딪혀 좌절하지 마십시오. 흔히 가장 쉬운 길로 보이는 그릇된 해결책에 기대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투신하십시오. 힘든 일과 희생을 직시하고, 성실과 인내, 겸손과 헌신을 요구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의 젊음을 믿으십시오.

바티칸에서,

2005년 12월 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4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전문)


젊은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교육

12/01/01

1.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인 새해를 맞아, 저는 모든 이에게 커다란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며, 우리 앞에 놓인 이 시간에 정의와 평화가 확고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여야 하겠습니까? 시편 130(129)편에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 나옵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신앙인은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6절) 주님을 더 기다립니다. 굳건한 희망으로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는 빛과 자비와 구원을 가져다주시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선택받은 백성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참모습을 바라보며 어떠한 고난에도 굴복하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2012년 한해를 이러한 확신에 찬 믿음으로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지난 한 해 동안 사회와 노동계와 경제를 뒤흔든 위기로 좌절감이 깊어졌습니다. 이 위기의 뿌리는 무엇보다 문화적이고 인간학적인 것입니다. 마치 어둠이 우리 시대를 뒤덮어 한낮의 빛을 환히 보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어둠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은 시편 저자가 말한 새벽을 끊임없이 기다립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특별히 젊은이들에게서 간절하고 두드러지기에, 저는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사회 공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제4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로 “젊은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교육”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젊은이들이 이상과 열정으로 이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담화는 부모와 가정, 교육자, 그리고 종교,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책임자들에게도 향해 있습니다. 젊은이들과 그들의 관심사에 동참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단순히 유용한 것만이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한 사회 전체의 첫째 의무입니다.

따라서 젊은이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을 전하고, 선에 봉사하며 살겠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떠맡아야 할 과제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표명하는 관심사는 확고한 희망으로 미래를 바라보려는 그들의 열망을 보여줍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많은 걱정을 하고 삽니다. 더욱 깊이 있게 현실을 직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교육을 받고자 열망합니다. 가족을 이루고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어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인간답고 우애 넘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정치, 문화, 경제 분야에 이바지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습니다.

이러한 불안과 그 바탕에 있는 이상에 사회의 모든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희망과 신뢰로 젊은이들을 바라봅니다. 교회는 그들이 진리를 찾고 공동선을 수호하며,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일들”(이사 42,9; 48,6)을 바라보도록 격려합니다.

교육 책임자

2. 교육은 삶에서 가장 흥미롭고도 어려운 모험입니다. 라틴어 educere에서 나온 서양의 ‘교육하다’라는 말은 젊은이가 충만한 성장으로 나아가도록 자기 자신을 벗어나 실재를 만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어른과 젊은이의 자유, 이 두 자유의 만남으로 촉진됩니다. 이는 제자의 책임을 요구합니다. 제자는 현실 지식에 대한 지도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교육자의 책임도 요구합니다. 교육자는 언제든 자신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그저 규칙과 정보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 진정한 증인이 필요합니다. 매우 폭넓은 삶의 경험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증인이란 자기가 제안하는 그 삶을 먼저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평화와 정의에 대한 참 교육은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부모가 첫 교육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세포입니다. “바로 가정에서 자녀는 건설적이고 평화롭게 더불어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가치를 배웁니다. 바로 가정에서 자녀는 세대 간 연대, 규칙 존중, 용서, 환대를 배웁니다.” 1) 가정은 우리가 정의와 평화를 익히는 첫 학교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삶 자체가 계속 위협 받고 종종 해체되기도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흔히 가정의 책임을 다할 수 없게 하는 노동 여건, 미래에 대한 걱정, 정신없이 돌아가는 바쁜 삶, 단순한 생존만이 아니라 적절한 생계 보장을 위한 잦은 이주, 이 모든 것은 자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부모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을 어렵게 합니다. 부모는 자녀와 함께 하면서 그 삶의 여정에 더 깊이 동참하고 연륜으로 얻은 경험과 확신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과 확신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만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들이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자녀들이 진정한 정의와 평화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도록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교육 기관의 책임자들에게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교육 기관의 책임자들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이 언제나 존중받고 소중히 여겨지도록 보장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젊은이가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을 개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또한 교육 기관의 책임자들은 모든 가정에 자기 자녀들이 그들의 양심과 그들이 믿는 종교 원리에 상충되지 않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십시오.

모든 교육 현장은 초월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대화와 결속과 경청의 자리가 되고, 거기에서 젊은이들은 개인의 능력과 내적 부요를 인정받고 형제자매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날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데에서 기쁨을 맛보며 더욱 인간답고 형제애 넘치는 사회 건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청합니다. 모든 가정과 교육 기관들이 그들의 교육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도록 구체적인 도움을 주십시오. 부모들이 그들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적절한 지원을 해 주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어느 누구도 교육의 기회를 거부당하지 않고 모든 가정이 자기 자녀를 위하여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는 교육 구조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 주십시오. 생활비를 벌려고 헤어져 있는 가족들이 다시 함께 살 수 있도록 힘써 주십시오. 젊은이들에게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진정으로 봉사하는 투명한 정치상을 보여 주십시오.

저는 또한 언론계가 교육에 고유한 기여를 해 주도록 호소합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대중 매체는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대중의 사고를 형성해 가는 특별한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대중 매체는 젊은이 교육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교육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인격 형성에 좋든 나쁘든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적용하는 높은 기준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지혜롭게 선용할 수 있는 힘을 찾아야 합니다. 젊은이들도 정의와 평화 교육을 비롯한 자신의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리와 자유 교육

3.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인간은 진리보다 무엇을 더 간절히 바라는가?”(Quid enim fortius desiderat anima quam veritatem?) 2) 한 사회의 인간다운 모습은 이 억누를 수 없는 물음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교육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참으로 교육은 도덕적 정신적 차원을 포함하여 인간의 궁극 목적과 그가 속한 사회의 선익에 초점을 맞춘 전인적 양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가르치려면 맨 먼저 인간이 누구인지 알고 인간의 본성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그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며 이렇게 묵상합니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으로 빚으신 하늘하며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바라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시편 8,4-5). ‘인간이 무엇이기에?’는 우리가 물어야 하는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인간은 마음속에 무한한 것에 대한 갈망, 곧 진리에 대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부분적인 진리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밝혀 줄 수 있는 진리를 갈망합니다.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의 드높은 존엄을 찾고 모든 인간 개인의 불가침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육의 첫걸음은 인간 안에서 창조주의 모습을 알아보도록 배우는 것이며, 그에 따라 모든 인간을 드높이 존중하고 다른 이들이 이 지고의 존엄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다운 인간 발전은 모든 차원의 인간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3)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초월적 차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어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인간이 희생될 수 없다는 사실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만 인간 자유의 의미도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이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입니다. 참된 자유는 아무런 제약도 없는 방종이 아닙니다. 또한 자기를 절대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을 절대시하면, 곧 그 무엇이나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진리와 모순되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히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특히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입니다. 참된 자유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자유는 매우 소중한 가치이지만 부서지기 쉬운 것입니다. 자유는 오해되고 오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육 활동에 특히 해로운 장애는 우리 사회와 문화에 널리 퍼져 있는 상대주의입니다. 이 상대주의는 아무것도 확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자유처럼 보이는 상대주의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각자 자기를 자신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감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대주의적인 지평에서는 참 교육이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빛이 없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사람은 실제로 자기 삶의 가치와 그 삶이 이루는 관계를 의심하고, 또 다른 사람과 함께 무엇인가를 이룩하고자 하는 노력의 타당성도 의심하게 됩니다.” 4)

자유를 행사하기 위하여 인간은 상대주의적 지평을 넘어서서 자신에 대한 진리와 선과 악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양심의 깊은 곳에 있는 법을 발견합니다. 이 법은 자신이 부과하지는 않았지만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양심의 소리는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고 악을 회피하도록 자신을 부르며, 자신의 선행과 악행에 책임을 지라고 합니다. 5) 따라서 자유의 행사는 자연 도덕률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자연 도덕률은 그 특성상 보편적이고 모든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며 인간의 근본적 권리와 의무의 기초가 됩니다. 결국 자연 도덕률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존의 기초를 이룹니다.

그러기에 자유의 올바른 사용은 정의와 평화 증진의 핵심입니다. 자유 행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존재와 생활 방식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존중에서 상호 신뢰, 건설적 대화 능력, 늘 받기만 바라고 베풀기는 어려운 용서를 할 수 있는 힘, 서로 주고받는 사랑,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희생을 할 각오가 생겨납니다. 이 요소들이 없다면, 평화와 정의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그저 빈말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정의 교육

4.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효용과 이윤과 물질적 소유라는 기준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만연하여, 선의를 내세우면서도, 인간의 가치, 인간 존엄과 인권의 가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정의의 개념을 그 초월적 근원과 분리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정의는 단순히 인간의 협약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결정하는 것은 실정법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오한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통합적 인간관이야말로 정의의 개념을 계약이 아니라 연대와 사랑의 지평 안에서 찾을 수 있게 해 줍니다. 6)

합리주의적 개인주의적 경제 원리 위에 세워진 현대 문화의 일부 사조가 정의의 개념을 사랑과 연대에서 분리시켜 그 초월적 근원에서 단절시켜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지상의 도시는 권리와 의무의 관계로 세워질 뿐만 아니라, 감사와 자비와 친교의 관계를 통해서 더 커지고 더 튼튼해집니다. 사랑은 언제나 인간 관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이 세상의 정의를 위한 모든 노력에 신학적 구원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7)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하느님과 그들 자신과 형제자매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올바른 관계에 주리고 목말라하기 때문에 그들은 흡족해질 것입니다.

평화 교육

5.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만도 아니고, 적대 세력들 사이의 균형을 보장하는 데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선익 보호,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사람들과 민족의 존엄성 중시, 형제애의 끊임없는 실천 등이 없이는 평화는 지상에서 실현될 수 없습니다.” 8) 평화는 정의의 열매이고 사랑의 결과입니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진정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 분열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18 참조). 그리스도 안에는, 사랑으로 화해한 한 가족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떠맡아야 할 과업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일꾼이 되려면, 우리는 스스로 교육하여, 연민, 연대, 협동, 형제애, 능동적인 공동체 활동을 배워야 합니다. 국가적 국제적 문제들에 대한 각성에 관심을 가지고, 부의 재분배, 성장 추구, 개발 협력, 분쟁 해결을 위한 적절한 방안을 모색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모든 이를 위한 평화는 모든 이를 위한 정의의 열매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역량과 책임에 따라 정의를 촉진해야 하는 본질적 임무를 회피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이상을 힘차게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각별히 권유합니다. 비록 시류를 거슬러야 하고 희생이 따르더라도, 무엇이 정의이고 진리인지 알아보는 힘을 기르십시오.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이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십시오

6. 정의와 평화라는 길을 걷는 어려운 도전 앞에서, 우리는 시편 저자의 말로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노라. 나의 구원 어디서 오리오?”(시편 121[120], 1).

모든 이들에게,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저는 간곡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이념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 우리의 창조주, 우리 자유의 보증인, 진정한 선과 진리의 보증인 옳은 것의 척도이시며 동시에 영원한 사랑이신 하느님께 조건 없이 돌아가야 구원을 받습니다. ……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9) 사랑은 진리를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진리와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투신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기 때문입니다(1코린 13,1-13 참조).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사회를 위한 소중한 선물입니다. 어려움에 부딪쳐 좌절하지 마십시오. 흔히 가장 쉬운 길로 보이는 그릇된 해결책에 기대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투신하십시오. 힘든 일과 희생을 직시하고, 성실과 인내, 겸손과 헌신을 요구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의 젊음을 믿으십시오. 행복, 진리, 아름다움, 진정한 사랑을 위한 깊은 갈망을 믿고 살아가십시오. 열정에 가득 찬 인생의 이 시간을 풍요롭고 충만하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어른들에게 모범이 되고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이 불의와 부패를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그만큼 더욱더 그리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잠재력을 깨달으십시오. 결코 자기 자신만 찾지 말고 모든 이들의 더 밝은 미래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신뢰하고, 여러분을 따르며, 여러분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에게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선물, 곧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고 정의와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평화의 대의를 간직한 온 누리의 모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평화는 이미 얻은 축복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추구하여야 하는 목표입니다. 더 큰 희망으로 미래를 바라봅시다. 우리의 여정에서 서로 격려합시다. 우리 세상이 더 인간답고 형제애 넘치는 얼굴을 지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현재와 미래 세대에 대하여 공동 책임감을 가집시다. 특히 미래 세대가 평화의 겨레가 되고 평화의 일꾼이 되도록 교육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저의 성찰을 여러분에게 맡겨 드리며 모든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의 교육”이라는 이 커다란 목표를 위하여 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물질적 자원을 함께 모읍시다.

바티칸에서,

2005년 12월 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의 제3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진리 안의 평화

06/01/01

1. 전통적으로 새해를 시작하며 발표하는 이 세계 평화의 날 담화로 전 세계의 모든 사람, 특히 폭력과 무력 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드리며 평안을 빕니다. 새해에는 더욱 평온한 세상, 점점 더 많은 개인과 공동체들이 정의와 평화의 길에 투신하는 세상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2. 우선, 평화의 탁월한 일꾼이셨던 저의 선임자 교황 바오로 6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참행복의 정신에 따라 재임 기간에 일어난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에서 끊임없이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적 개입을 식별하셨습니다. 지칠 줄 모르던 복음 선포자였던 교황 바오로 6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을 전 세계의 화합과 평화를 위한 노력의 출발점으로 삼도록 끊임없이 당부하셨습니다. 저의 첫 번째 평화의 날 담화인 이 글을 통하여, 저는 제 선임자들의 고결한 가르침의 길을 따르고, 평화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봉사하는 교황청의 확고한 결의를 다시 한 번 밝히고자 합니다. 베드로좌에 선출된 날 제가 선택한 이름인 베네딕토는 바로 평화에 대한 저의 개인적 다짐의 표시입니다. 이 이름을 선택하며 저는 전 유럽에 평화의 문화를 심어준 베네딕토 성인과 제1차 세계대전을 ‘무익한 대학살’로 단죄하고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숭고한 요구를 재인식시키고자 노력한 교황 베네딕토 15세를 함께 기억하고자 하였습니다.

3. 올해의 성찰 주제인 “진리 안의평화”는, 언제 어디서든 진리의 빛으로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인간은 자연히 평화의 길을 걷게 된다는 확신을 나타냅니다. 40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폐막하며 발표한,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은 인류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참으로 더욱 인간다운 세계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평화의 진리를 향하여 돌아서지 않고서는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평화의 진리’라는 표현은 실제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하려면, 우리는 평화를 단순히 무력 전쟁의 부재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며 “인간 사회 안에 그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질서의 열매”, “언제나 더욱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류가 실현하여야 할” 질서의 열매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계획하시고 바라신 질서의 열매인 평화는 본질적으로 불굴의 진리를 담고 있으며 “우리 안에 있는 억누를 수 없는 염원과 바람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4. 이렇게 볼 때, 평화는 천상 선물이며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모든 차원에서 가장 막중한 책임 행사를 요구합니다. 곧 진리와 정의와 자유와 사랑 안에서 인류 역사가 하느님의 질서를 따르도록 할 책임입니다. 현세 사물의 초월적 질서에 충실하지 못하고 인간 마음에 새겨진 보편적 도덕률인 대화의 ‘원리’를 존중하지 않을 때에, 인간의 전인적 발전과 기본권의 수호가 방해받거나 거부될 때, 무수한 사람들이 참을 수 없는 불의와 불평등을 강요받을 때, 어떻게 평화의 선이 실현되리라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그러한 선의 진리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평화를‘평화로운 질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궁극적으로 인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존중하고 실현시킬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5.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리고 무엇이 평화의 실현을 방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의 맨 첫 권인 창세기는 요한 복음사가가 “거짓의 아비”(요한 8,44)라고 말한 두 갈래의 혀를 지닌 동물이 역사의 시초에 한 거짓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거짓은 또한 성경의 마지막 권인 묵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죄악 가운데 하나로서, 거짓을 일삼는 자들은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 (묵시 22,15) 거짓으로 비롯된 죄의 비극과 그것의 잘못된 결과로 개인과 민족들의 삶은 황폐해졌고 또 계속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릇된 이념적 정치적 체계로 진리가 고의적으로 왜곡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착취되고 살해됨으로써 가정과 공동체 전체가 파괴된 지난 세기의 사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우리가 어떻게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위협적인 죽음의 시나리오를 날조하는 우리 시대의 거짓들 앞에서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진정한 평화 추구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가 모든 사람의 문제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지구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6. 평화는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억누를 수 없는 염원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위대한 선에 이바지할 의무를 느껴야 하며, 어떠한 형태의 거짓도 인간관계를 해치지 못하게 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한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차이점만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일은 이러한 근본 진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공동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문화에 속한 이들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는 가운데 우리의 역사적 문화적 차이점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들이 평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순수한 의향으로 자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이러한 진리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각으로 평화를 이해하게 됩니다. 곧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가 다스리는 사회, 각 개인을 위한 선익이 최대한 실현되는 사회에서 개별 시민이 사이좋게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화의 진리는 모든 이가 풍요롭고 진실한 관계를 맺도록 요구하고, 용서와 화해의 길을 추구하고 이 길로 나아가며 다른 이들과 투명한 관계를 맺고 약속에 충실할 것을 촉구합니다. 특히, 이 세상에 교묘하게 현존하는 악에 대항해 스승이신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시는 해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다.”(1베드 2,22; 이사 53,9 참조)는 것을 알고 신뢰로써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스스로 진리라 정의하셨고 묵시록 저자의 환시 속에 나타나시어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묵시 22,15)에 대한 철저한 반감을 표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인간 역사의 완전한 진리를 드러내 보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은총의 힘으로 진리 “안에” 머무르고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전적으로 진실하시고 충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진리이십니다.

7. 평화의 진리는 전쟁의 비극 한가운데서도 은혜로운 진리의 빛을 발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사목 헌장’에서 “불행히도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적대 편의 모든 행동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민간인들에 대한 전쟁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국제 공동체는 국제인도주의법을 만들었습니다. 교황청은 평화의 진리가 전쟁 상황에서도 존재한다는 확신으로 여러 다양한 상황과 배경에서 인도주의법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으며, 그 법을 존중하고 즉각적으로 실천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국제인도주의법은 평화의 진리의 본질적 요구를 가장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모든 민족은 이 법을 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제인도주의법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 법이 올바르게 적용될 수 있도록 보장하며, 오늘날의 무력 분쟁과 갈수록 새로워지고 첨단화되는 무기 사용의 가변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적절한 규범으로 이 법을 쇄신해 나가야 합니다.

8. 국제인도주의법의 적용을 위하여 일하시는 모든 분들과 국제기구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는 어려운 임무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군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조국 봉사에 몸바쳐 군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역군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임무를 올바로 수행할 때에 그들은 참으로 평화 정착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군종 교구들은 이러한 힘겨운 일선에서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군종 교구장뿐만 아니라 군종 신부들이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평화의 진리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기를 권고합니다.

9. 오늘날 테러리즘으로 평화의 진리가 계속해서 심각하게 훼손되고 또한 거부되고 있습니다. 테러의 위협과 공격으로 전 세계가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의 선임자이신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께서도 테러범들의 엄중한 책임을 자주 지적하셨으며, 동시에 그들의 무분별하고 치명적인 전략을 단죄하셨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전략들은 흔히 비극과 혼돈을 야기하는 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테러 행위로 살인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인간성과 인생과 미래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증오와 파괴의 대상입니다.” 허무주의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흔히 근본주의로 불리는 종교 광신주의도 테러범들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주고 이를 조장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광신적인 근본주의가 나타내는 극도의 위험성을 깨달으시고는 이를 신랄하게 비난하시며, 진리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다른 이들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제시하기보다는 이를 폭력으로 강요하는 행위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강요하려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새겨 주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10. 자세히 살펴보면, 허무주의와 광신적인 근본주의는 똑같이 진리와 비뚤어진 관계에 있습니다. 허무주의자들은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진리를 힘으로 강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허무주의와 근본주의는 그 기원이 다르고 그 문화적 배경도 다르지만 인간과 인간의 생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자체를 경시하는 위험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공통됩니다. 실제로 이러한 공통된 비극적 산물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진리를 왜곡한 결과입니다. 허무주의가 하느님의 존재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적 현존을 부정한다면, 광신적 근본주의는 하느님을 자체적으로 만든 우상으로 대치시킴으로써 그분의 자애롭고 자비로운 모습을 왜곡시켜 버립니다. 오늘날 테러리즘 현상의 원인들을 분석할 때에는, 정치적 사회적 원인들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욱 뿌리 깊은 문화적 종교적 사상적 동기들도 고려하여야 합니다.

11. 인류가 우리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위기들을 생각할 때에, 전 세계 곳곳의 모든 가톨릭 신자는 무엇보다도 ‘평화의 복음’을 더욱더 온전히 선포하고 실현하며, 하느님의 온전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평화의 진리를 강화하는 첫째가는 절대적인 조건임을 보여주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하시는 사랑이시며, 당신 자녀들이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고 그들의 다양한 재능을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위하여 책임 있게 사용하기를 바라시는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의미를 주는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이십니다. 하느님, 오로지 하느님만이 선과 평화를 위한 모든 활동을 성취시켜 주십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느님을 지워버리려고 하느님께 저항하면 결국 인류는 두려움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결국은 헛된 결정에 이르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충분히 입증해 왔습니다. 이를 깨달음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타종교인들, 그리고 선의의 모든 사람과 폭넓게 협력함으로써 평화의 일꾼으로 불가분의 진리이며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확신에 찬 증언을 하여야 합니다.

12. 현대 세계의 상황을 바라보며, 우리는 평화를 구축하는 일에서 몇 가지 희망적인 표징들을 볼 수 있음을 기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무력 분쟁의 수적 감소를 그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평화의 길을 따라 나아가면서, 우리는 물론 아직은 불안정한 단계이지만 그럼에도 특히 예수님의 땅인 팔레스타인의 고통 받는 사람들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일부 지역의 주민들에게 더욱 안정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몇 가지 진전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평화와 화해를 위한 계속되는 노력이 긍정적인 열매를 맺기를 오랫동안 고대해 왔습니다. 그러한 희망의 표징들은 특히 전쟁 방지와 진행 중인 전쟁의 평화적 해결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국제 공동체와 그 기구들의 끊임없는 일관된 협력과 활동을 통하여 확인되고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13.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순진한 낙관주의로 귀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아직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족간의 유혈 분쟁과 전쟁의 참화가 계속되고 있어서 눈물과 죽음의 씨를 뿌리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잿더미 속의 불씨처럼 잠재되어 있던 갈등에 새로 불이 붙어 크게 폭발할 위험을 안고 있는 상황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평화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다른 민족들을 향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정치 권위들은 무거운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특히 위험 지역들에서 힘겨운 협상으로 겨우 얻은 불안한 균형을 위협하고 인류의 미래를 더욱 불확실하고 어둡게 만들 따름입니다. 또한 자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핵무기에 의존하는 정부들은 어떻습니까? 무수한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그러한 시각은 해로울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핵전쟁에서 승자란 없고, 희생자만 있을 뿐입니다. 평화의 진리는 공공연하게 또는 비밀리에 핵무기를 보유한 정부들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가지려고 계획하는 정부들을 포함한 모든 이가 분명하고 확고한 결정으로 진로를 선회하여 합의를 통한 점진적인 핵 철폐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여 절약된 자원은 자국민과 그 가운데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발전 계획에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14. 이와 관련하여, 유감스럽게도 군비가 계속 증가하고 무기 매매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군비 축소를 촉진하기 위하여 국제 공동체가 이룩해 온 정치적 법률적 과정은 일반적 무관심 속에 난항에 빠져 있습니다. 무기 생산과 신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에만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의 미래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국제 공동체가 지혜롭고 용기 있게 새로운 확신을 가지고 합심하여 군비 축소의 과정을 다시 시작함으로써 평화에 대한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국제 공동체의 여러 기구들은 평화의 선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활동을 펼쳐나가는 데에 필요한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5. 군비 축소에 대한 단호한 결정의 첫 수혜자는 가난한 나라들입니다. 이 나라들은 과거에 수없이 약속받은 발전에 대한 권리가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는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연합의 최근 정기 총회에서도 장엄하게 재천명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국제연합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면서, 광범위한 세계화 현상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세계의 변화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국제 연합의 제도와 운영의 쇄신을 바라는 바입니다. 국제연합기구는 세상에 정의와 연대와 평화의 가치들을 증진하는 더욱 효율적인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 창설자에게서 받은 사명에 충실하여 어디서나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투신합니다. 교회는 평화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이에게 필수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참되고 영원한 평화는 반드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되새겨 줍니다. 이 진리만이 정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랑과 연대를 받아들이게 하며 모든 사람이 참으로 자유롭고 일치된 인류 가족을 위하여 일하도록 격려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 위에서만 참 평화의 기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16. 이 담화를 마치며, 저는 특별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깨어있고 늘 준비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권유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날마다 복음에 귀 기울이고 사랑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진리 위에 평화를 구축하는 법을 배웁시다. 모든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평화의 진리를 더욱 온전히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자각시키기 위한 교육과 증언 활동을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동시에 저는 더욱 기도에 열중하기를 당부합니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간청하여야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평화의 진리에 대한 선포와 증언은 분명히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되고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신뢰와 효성으로 평화의 임금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바라봅시다. 이 새해를 시작하며 성모님께 하느님의 모든 백성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요한 8,32 참조) 진리의 빛을 따라 어디에서든 평화를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성모님의 전구로 인류가 이 근본적인 선인 평화를 더욱 존중하고 이 세상에 평화를 더욱 견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함으로써 더욱 평화롭고 안정된 세상을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티칸에서,

2005년 12월 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38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

05/01/01

1. 한 해를 시작하면서, 세상에 평화를 건설하여야 할 필요성을 잘 알고 계시는 각국 지도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인사 드립니다. 저는 이번 2005년 세계 평화의 날 주제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바오로 성인의 말씀,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12,21)라는 말씀을 골랐습니다. 악은 결코 악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길을 선택하게 되면, 악을 무찌르기는커녕 악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바오로 사도는, 평화는 선으로 악을 물리칠 때에만 얻을 수 있는 힘들고 기나긴 싸움의 성과라는 근본적인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제 살해의 참혹한 비극과 그러한 전쟁이 불러오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불의를 생각할 때,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건설적인 유일한 길은 바오로 성인이 말씀하셨듯이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로마 12,9 참조).

평화는 선으로 증진하여야 할 선이며, 개인과 가정, 국가, 전 인류를 위한 선입니다. 또한 평화는 선으로 내린 결단과 행동으로 유지하고 증진하여야 할 선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성인이 하신 또 다른 말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로마 12,17)라고 하신 말씀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악에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 내십시오.”

악과 선, 그리고 사랑

2. 인류는 태초부터 악의 비극을 겪어 왔으며, 악의 뿌리를 찾아 그 원인을 밝히고자 애써왔습니다. 악은 인간과 상관없이 세상에 작용하는 비인간적인 어쩔 수 없는 힘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악의 비극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을 지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 짓는 자유가 있습니다. 악은 언제나 이름과 얼굴이 있습니다. 악에는 자의로 악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역사의 여명기에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께 반항하고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고 이야기합니다(창세 3-4 참조). 이러한 최초의 잘못된 선택 이후 세기를 내려오며 수많은 잘못된 선택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선택들은 각기, 개인의 구체적인 책임과 각 개인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맺는 근본적인 관계가 내포된 고유한 도덕적 차원을 지닙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악은 사랑의 요구를 거부하는 비극입니다. 반면 도덕적 선은 사랑에서 생겨나며, 사랑으로 드러나고, 사랑을 지향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러한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로서 주님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도덕적 선의 살아 있는 원천인 그리스도교 사랑의 내적 논리는 자신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이끕니다.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로마 12,20).

보편적 도덕률의 ‘원리’

3. 오늘날의 세계 상황을 살펴보면, 사회 혼란에서 무질서와 전쟁에 이르기까지, 불의에서 폭력과 살인 행위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사회적으로 갖가지 형태의 악이 만연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의 대립 사이에서 방향을 잡으려면 인류 가족은 하느님께서 몸소 주신 도덕 가치라는 공동 자산을 시급히 보존하고 존중하여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 성인은 선으로 악을 이겨 낼 결심을 한 사람들에게 숭고하고 사심없는 태도로 다른 이에게 좋은 일을 해 주고 평화로이 지내라고(로마 12,17-21 참조) 격려하였습니다.

십 년 전, 저는 국제연합 총회에서 평화에 이바지할 공동의 의무에 대하여 연설하면서 보편적 도덕률의 ‘원리’를 언급하였습니다. 교회는 평화와 관련한 여러 발언에서 보편적 도덕률의 원리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도덕률은 공동의 가치와 원칙들에 영향을 줌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인류를 일치시키는 불변의 법칙입니다. “자연법은 사상과 풍속의 흐름 속에서도 존속하며, 그 사상과 풍속의 진보를 뒷받침한다. …… 설령 자연법의 원칙들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것을 파기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서 제거해 버릴 수도 없다. 자연법은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 안에서 언제나 되살아난다.”

4. 이러한 도덕률의 공통 원리는 개인과 민족들의 생활이 존중 받고 발전하도록 보장해 줄 더 큰 의무와 책임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세상을 괴롭히는 사회적 정치적 악들, 특히 폭력에서 비롯된 악들은 엄중하게 단죄하여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랑하는 아프리카 대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땅 팔레스타인의 위태로운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폭력과 보복 행위로 고조되는 갈등 때문에 상호 이해가 정의와 진리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세계를 두려움과 고통의 미래로 내몰고 있는 듯한 우려스러운 테러 폭력 현상은 또 어떻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불확실과 불안의 비극적인 상황을 야기한 이라크의 비극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라는 선을 얻으려면, 폭력은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이며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폭력은 우리 신앙의 진리, 우리 인류의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입니다. 폭력은 평화가 수호하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과 생명과 자유를 파괴합니다.” 교회가 선포하고 증진하는 완전한 형제애에 대한 지지를 통하여 양심을 형성하고 젊은 세대에게 선을 가르치려는 크나큰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각 개인의 존엄과 자유, 기본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 경제 정치 질서의 토대가 됩니다.

평화의 선과 공동선

5. 선으로 악을 이겨 냄으로써 평화를 증진하려면 공동선과 그것이 사회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신중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차원에서 공동선을 증진할 때, 평화도 증진됩니다.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본성, 곧 자신이 다른 이들과 ‘함께’ 또 다른 이들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완전한 발전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공동선은 개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사회적 본성의 표현인 가정, 집단, 단체, 도시, 지역, 국가, 민족 국가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모든 개인은 어떤 면에서 공동선을 위하여 일하도록 요구받고 있으며, 언제나 다른 이들의 선을 자신의 선처럼 여겨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은 특별한 방식으로 모든 차원에서 정치 당국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안에 전인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하는 전반적인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도록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선은 인간과 인간 기본권을 존중하고 전체적으로 증진하도록 요구하며, 아울러 세계적인 차원에서 민족들의 권리 존중과 증진을 요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날로 더욱 긴밀해지고 점차 전세계로 확산되는 상호 의존성에서, 공동선은 오늘날 더욱더 전세계적인 것이 되고 거기에 온 인류와 관련되는 권리와 의무를 내포하게 되었다. 어떠한 집단이든 다른 집단의 요구와 정당한 열망, 더욱이 온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미래 세대를 포함한 인류 전체의 선을 위해서는 모든 나라가 이바지하여야 하는 참된 국제적 협력이 요구됩니다.

일부 왜곡된 인간관은 공동선을 단지, 사회 경제적 행복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는 어떠한 초월적 목적이 없이 행복의 심오한 의미를 앗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목적이시기 때문에, 공동선은 초월적인 차원을 지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참된 공동선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분명하게 깨우쳐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며 그분 안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모든 인간적 실재는 그리스도 덕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느님 안에서 완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평화의 선과 지상 재화의 사용

6. 평화의 선은 모든 민족의 발전과 긴밀히 연관되므로, 지상 재화의 사용에 대한 윤리적 요구를 언제나 고려하여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인류 가족의 일원으로서 공통 기원과 공동 운명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세계 시민이 되어 그에 따른 의무와 권리를 지니게 됩니다. 임신되는 순간부터 태아는 보살핌과 관심을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으며, 누군가는 태아를 보살필 의무가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를 단죄하고, 소수민을 보호하며, 유민과 난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조성하는 것이 바로 세계 시민 정신의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길입니다.

7. 오늘날 평화의 선은 과학 기술의 진보에서 파생된 새로운 재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역시 지상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원리를 적용하여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에 이바지하여야 합니다. 국제적 차원의 적절한 활동들은 개인이든 국가든 모든 이가 발전에 동참할 수 있는 기본 조건들을 보장함으로써, 재화의 보편적 목적이라는 원리를 실질적으로 충만하게 이행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러 민족을 소외시키는 장벽과 독점이 제거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평화의 선은 국제 공동체가 이른바 공공 재화에 대하여 더욱 큰 책임을 질 때 더욱 확실히 보장될 것입니다. 공공 재화는 비록 그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였거나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이바지하지 않았어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누리는 재화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적 차원의 사법 제도나 방위 체계, 고속도로망, 철도망과 같은 재화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우리 시대에 확산되고 있는 세계화 현상은 점점 더 많은 공공 재화가 범세계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결과 공동 이익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예로서, 빈곤 퇴치 노력, 평화와 안보 증진, 기후 변화와 질병 관리에 대한 관심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국제 공동체는 공정성과 연대의 보편 원리에 따라 공공 재화 사용의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더욱 광범위한 법률적 합의를 이룸으로써 이러한 이익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8. 또한 재화의 보편 목적이라는 원리는, 특히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빈곤 문제에 더욱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합니다. 국제 연합은 새 천년기를 시작하며 2015년까지 빈민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노력을 지지하고 장려하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실질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우선의 사랑을 보여 줄 것을 권유합니다.

빈곤의 비극은 가난한 나라들의 외채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음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15년 전에 저는 가난한 나라들의 외채가 “해외 투자, 주요 국제 기구들의 올바른 기능, 원자재 가격과 같은 일련의 다른 문제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중의 관심을 촉구하였습니다. 주로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중점을 두어 부채를 삭감해 주려는 최근의 동향으로 경제 성장의 질이 향상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성장은, 특히 새 천년기의 목표들과 관련해 볼 때, 양적인 면에서 아직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나라들은 악순환의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곧 저임금과 저성장이 저축을 제한하는 한편, 저조한 투자와 예금의 비효율적 운용이 성장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9.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언급하셨고 저 자신도 여러 번 강조하였듯이, 국가들이 심각한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유일한 수단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해외 재정 원조를 통하여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원조는 공정하게 통제되는 국제 통상 관계의 구조 안에서 합리적인 조건으로 제공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들을 위하여 이미 이루어진 합의를 존중하면서도 그러한 합의가 일부 국가에 지나친 부담으로 드러날 때 이를 재검토할 채비를 갖추는 도덕적 경제적 자원 동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공 개발 원조를 새롭게 추진하여야 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새로운 형태의 개발 자금 지원을 모색하여야 합니다. 몇몇 정부들은 이미 이를 위한 효율적인 체계를 신중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활동들은 보조성의 원리를 존중하면서 진정한 나눔의 정신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가난한 나라들의 개발에 쓰일 재정 자원은 제공자와 수혜자 모두 건전한 경영 관행을 성실히 지키며 운용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노력을 권장하고 이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지원과 개발에 헌신하는 많은 가톨릭 단체들의 중요한 공헌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0. 2000년 대희년을 마치면서 저는 교황 교서 ?새 천년기?에서 세상에 희망의 복음을 전파하려면 ‘사랑의 새로운 독창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수많은 무력 분쟁, 극심한 빈곤으로 악화되는 전염병들, 만연된 안보 불안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불안정과 같이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는 수많은 난제들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필요성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은 아프리카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방침을 요구합니다. 곧 새로운 형태의 양자간 다자간 연대를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아프리카 민족들의 행복이 세계의 공동선을 이루는 데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더욱 확고히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아프리카 민족들이 그들 자신의 미래와 그들 자신의 문화 국가 사회 경제 발전의 주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가 단순히 원조의 수혜자에 그치지 말고 확실하고 생산적인 나눔의 책임 있는 주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특히 국제 협력 분야에서 새로운 정치 문화가 요구됩니다. 다시 한 번 저는, 거급된 공공 개발 원조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무거운 외채 문제를 여전히 미결 상태로 남겨 두거나 국제 통상 관계에서 이들 나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평화에 심각한 걸림돌이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한 걸림돌들을 시급히 처리하고 해결하여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확실한 조건은 잘 사는 나라들과 못 사는 나라들이 상호 의존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개발이라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동으로 혜택을 나누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꾸준한 진보를 보이는 지역에서까지도 퇴보의 과정을 겪거나 둘 중의 하나임이 분명해집니다.”

악의 보편성과 그리스도인의 희망

11. 이 세상의 수많은 비극적 상황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한 신뢰의 마음으로, 개인과 민족들이 악을 이기고 선을 이루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값을 치르고”(1고린 6,20; 7,23)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모든 이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은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지탱해 주는 불굴의 희망을 키웁니다. 개인적 사회적인 죄가 모든 인간 활동에 물들어 있지만, 희망은 정의와 평화에 대한 노력뿐만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굳은 확신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악의 세력”(2데살 2,7)이 이 세상에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 하더라도, 구원 받은 인류는 이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고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신”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모든 신자는 선의 승리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신 성령’의 일은 ‘온 세상에 충만하십니다’(지혜 1,7). 그리스도인들, 특히 평신도들은 “이러한 희망을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지만 말고, 끊임없이 회개하며 ‘이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악령들’(에페 6,12)을 거슬러 싸움으로써 세속 생활의 구조를 통해서도 이 희망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12. 선의를 지닌 사람들은 누구도 선으로 악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싸움은 오직 사랑을 무기로 삼을 때에만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선이 악을 정복할 때 사랑이 승리하고, 사랑이 승리하는 곳에 평화가 흘러넘칩니다. 이러한 복음의 가르침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선포됩니다. “인간 완성과 세계 개혁의 근본 법칙은 사랑의 새 계명이다.”

이는 사회와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민족들의 관계에서 평화를 지킬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모든 덕의 여왕이며 모후인 사랑”을 자기 안에서 키우고 다른 사람들 안에 불타오르게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자신 있게 증언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을 통하여, 개인과 사회가 완성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며, 사랑은 역사의 흐름을 선과 평화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성체성사에 바쳐진 올 한 해 동안, 교회의 자녀들이 지존한 사랑의 성사 안에서 구세주 예수님과 또 그분 안에서 온 인류와 이루는 모든 친교의 원천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성찬례 거행 때마다 성사적으로 재현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악에서 구원되어 선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새 생명을 통하여 우리는 언어와 국적과 문화는 달라도 서로 형제자매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가족’이며, 다 함께 정의와 자유 그리고 평화의 가치들을 토대로 세상을 건설하는 데에 각자 효과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2004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3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언제나 평화를 가르치십시오

2004/01/01

평화를 증진할 의무가 있는 모든 국가 지도자들,

국제법을 강화하는 협정과 조약을 제정하며 평화로운 합의에 이르는 길을 추구하는 데에 헌신하는 법률가들,

모든 대륙에서 이해와 대화로써 젊은이들의 양심을 형성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교사들,

테러라는 용인할 수 없는 수단에 의존함으로써 투쟁의 이유 자체를 근본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는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베드로의 후계자가 하는 진심 어린 호소에 귀 기울이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 드립니다.

2004년 새해를 시작하는 지금도 평화는 가능합니다. 평화가 가능하다면, 평화는 또한 하나의 의무입니다.

실질적인 활동

1. 1979년 1월 1일의 저의 첫 세계 평화의 날 담화의 주제는 "평화에 이르려면 평화를 가르치십시오."였습니다.

그 담화는 해마다 1월 1일에 세계 평화의 날을 거행하기를 바라셨던 존경하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닦으신 길을 따른 것입니다. 저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68년 새해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 삶의 여정의 지표이자 척도가 되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희망과 약속의 징표로서 세계 평화의 날을 해마다 거행함으로써, 올바르고 건전한 균형을 지닌 평화가 앞으로 펼쳐질 역사를 지배하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선임자 교황 바오로 6세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저는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날을 세계 평화를 위한 성찰과 기도에 바침으로써 이 숭고한 전통을 계속 이어 왔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허락해 주신 교황직 25년 동안 저는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평화의 대의를 위하여 이 근본 선을 이루는 일에 이바지함으로써,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더 나은 내일을 보장하라고 권고하면서 교회와 세상에 호소하였습니다.

올해도 저는 다시 한 번 모든 대륙의 모든 사람이 새로운 세계 평화의 날을 거행하도록 진심으로 초대합니다. 이기심과 증오, 권력욕과 복수심에 가득 차 있는 인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화합의 길을 되찾아야 합니다.

평화의 학문

2.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발표하신 열 한 번의 세계 평화의 날 담화들은 점차 평화의 이상에 이르는 길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참된 '평화의 학문'의 다양한 장들을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제시하셨습니다. 이 기회에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담화의 주제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이 담화들은 하나같이 오늘날에도 시의 적절한 것입니다. 사실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전세계, 특히 중동 지역에 유혈 참사를 빚고 있는 전쟁의 비극이 있기 전에 이미 그 담화들은 때때로 예언자적 권고의 어조를 띠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입문서

3. 저는 지난 25년 간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존경하는 선임자께서 닦으신 길을 따라 나아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새해를 시작할 때마다 저는 선의의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공존의 여러 측면들을 신앙과 이성에 비추어 생각해 보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평화에 대한 종합적인 가르침, 곧 이 근본적인 주제에 대한 일종의 입문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입문서는 옳은 뜻을 지닌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류의 미래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큰 노력을 요구합니다.

평화의 프리즘이 비추는 여러 빛깔은 이제 충분히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평화 공존의 이상과 그 구체적인 요구들이 개인과 민족들의 의식 안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종교의 가장 핵심에 있는 평화를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투신하여야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평화의 복음"(에페 6,15)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모든 사람을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마태 5,9 참조)이 되게 하는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일입니다.

평화를 가르치는 일

4. 저는 1979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이렇게 호소하였습니다. "평화에 이르려면 평화를 가르치십시오." 오늘날 이 호소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합니다.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히는 온갖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마치 평화는 이룰 수 없는 이상인 것처럼 체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평화는 가능하다는 매우 단순하고 자명한 이치를 언제나 가르쳐 왔으며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평화는 하나의 의무임을 끊임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복자 교황 요한 23세께서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서 말씀하셨듯이, 평화는 진리, 정의, 사랑, 자유라는 네 기둥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모든 인류의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새 세대에게 이러한 이상들을 가르칠 의무를 지닙니다.

법 존중을 가르치는 일

5. 평화를 가르치는 이러한 임무에서 특히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개인과 민족들이 국제 질서를 존중하며 그들을 합법적으로 대표하는 권위의 책임을 존중하도록 이끄는 일입니다. 평화와 국제법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법은 평화를 뒷받침합니다.

문명이 처음 시작된 이래 발전을 거듭해 온 인간 공동체들은 독단적인 권력의 행사를 막고 모든 논쟁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협정과 조약들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개별 민족의 법 체계와 더불어 만민법(ius gentium)으로 알려지게 된 또 다른 일련의 규범들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법 체계는 점차 확대되었고, 여러 민족들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다듬어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근대 국가의 탄생으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16세기 이후, 법률가와 철학자, 신학자들은 다양한 국제법들을 발전시키고 그 법들이 자연법의 근본 원리에 기초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점점 더 힘을 얻어, 각국의 국내법에 우선하고 국내법보다 우위에 있으며 인류 가족의 일치와 공동 소명을 고려하는 보편 원리들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의사로 합의된 "협약은 준수되어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원칙입니다. 이것은 책임 있는 계약 당사자들이 맺는 모든 관계에서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핵심 전제입니다. 이 원칙을 어기면 어김없이 법이 침해되는 상황에 이르러 불화와 분쟁이 발생하며, 그 부정적인 여파가 지속될 것입니다. 특히 법의 힘보다는 힘의 법에 호소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시기에는, 이러한 근본 원리를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류가 겪은 비극, 이전에 알려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던 폭력과 파괴와 죽음의 구렁텅이는 분명히 이러한 순간의 하나입니다.

법률 존중

6. 공포와 끔찍한 인권 유린을 동반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법의 질서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폭넓게 현대화된 규범과 법제도의 핵심에는 평화 수호와 증진이 자리잡았습니다. 각국 정부는, 세계 평화와 안전을 감시하고 인류의 이 근본 선익을 보존하고 보장하도록 모든 나라의 노력을 촉구할 임무를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기구, 곧 국제연합 기구와 광범위한 자유 재량권을 가진 안전보장이사회에 맡겼습니다. 이 제도의 핵심은 무력 사용 금지였습니다. 잘 알려진 국제연합 헌장 제7장에 따르면, 이 금지는 두 개의 예외 조항만을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 조항은 국제연합의 테두리 안에서, 따라서 필요와 균형이라는 전통적인 한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행사되어야 할 자연법의 권리인 정당방위권을 확인시켜 줍니다.

또 다른 예외 조항은 집단 안보 체제와 관련된 것으로서, 결정권과 충분한 재량권을 가지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안정보장이사회에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국제연합 헌장을 통해 발전한 이 제도는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게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수십 년 동안, 국제 공동체는 적대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세계 일각에서는 냉전이, 다른 지역들에서는 무력 분쟁이 발발하였으며, 냉전 직후 이념과 기대가 점점 무너지면서 테러리즘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새로운 국제 질서

7. 그러나 국제연합 기구는 상당 부분 회원국들의 과실로 한계를 드러내거나 늑장을 부리기도 하지만, 인간 존엄성 존중과 민족들의 자유, 개발에 대한 요구를 증진시킴으로써 평화 건설을 위한 문화적 제도적 토양을 마련하는 데에 현저하게 공헌해 왔습니다.

각국 정부의 활동은 특히 비정부기구와 인권 운동에 참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룩한 실질적인 평화와 연대 활동을 통하여 국제연합의 이상이 널리 확산되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은 국제연합 기구가 스스로 천명한 목표의 추구를 위하여 효과적 운영이 되도록 개혁에 착수하는 중요한 동기입니다. 다음과 같은 그 목표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새롭고도 더욱 어려운 진정한 발전 단계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세계의 사회들과 경제들, 문화들에 기여할 수 있게 국제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국가들은 이러한 목표를 지혜와 결단을 요구하는 분명한 도덕적 정치적 의무로 여겨야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제가 1995년에 한 격려의 말을 되풀이하고자 합니다. "국제연합 기구는 행정 기구라는 냉정한 지위에서 점점 더 벗어나 전세계 모든 국가가 편안함을 느끼고, 함께 있다는 공동 의식, 다시 말해 국가들의 가족이라는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도덕적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테러의 재앙

8. 오늘날 국제법은 현대 세계의 변화된 환경에서 발생하는 갈등 상황들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에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 상황은 흔히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붕괴 이후 파생되거나 독립 운동과 연관된 단체 또는 훈련된 범죄 조직과 연관된 집단들과 연루되어 있습니다. 주권국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수단으로 수세기에 걸쳐 확립된 규범들로 이루어진 법 체계는 전통적인 의미의 국가로 볼 수 없는 단체들과 연루된 분쟁들을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특히 테러 집단들과 관련된 경우에 그러합니다.

테러의 재앙은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극심해졌고, 잔인한 대량 학살을 불러옴으로써 대화와 협상의 길을 더욱 어렵게 하여 특히 중동 지역에서 긴장을 증대시키고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테러 행위를 물리치려면 반 테러 투쟁을 단순히 억압과 징벌을 위한 군사 행동에만 맡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무력 사용이 필요한 경우라도 테러 공격의 이면에 숨은 이유를 용기 있고 명석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 테러 투쟁은 또한 정치적 교육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자주 더욱 절망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내모는 불의의 상황에 대한 원인들을 제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상황의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교육, 곧 인류의 일치는 개인과 민족을 가르는 그 어떤 임의적 구분보다도 강력한 실재라는 것을 강조하여야 합니다.

반드시 필요한 반 테러 투쟁에서, 현재 국제법은 범죄 예방과 감시, 억제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하는 법적 도구를 발전시키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부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무력 사용이 법규범 원칙의 포기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적 결정이 인간의 근본 권리들을 고려하지 않고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적이 결코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여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평화라는 광대한 터전에서 일할 것을 권유하는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 평화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염원과 바람에 부응하지 않았다면 어찌 인간 마음 속에서 그처럼 강력한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습니까? 하느님께서 본성 상 평화의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을 어찌 하느님의 자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전세계에 선포하는 구원의 메시지에는 국가들 사이의 평화 공존에 필요한 원칙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교리적으로 중요한 근본 요소들이 담겨 있습니다.

"질서를 지키면 질서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다."(Serva ordinem et ordo servabit te)는 옛 격언대로, 평화 건설은 윤리적 법률적 질서에 대한 존중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줍니다. 국제법은 더욱 강력한 자의 법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보장하여야 합니다. 국제법의 근본 목적은 "물리적인 무력의 힘을 도덕적인 법률의 힘으로" 대체하여 가해자들에게는 적절한 처벌을, 희생자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인간 존엄과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국의 내정 문제라는 식의 받아들일 수 없는 핑계를 내세우는 정부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저는 1997년 1월 13일에 교황청 주재 외교단에게 한 연설에서 국제법은 평화를 추구하는 주된 도구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오랫동안 국제법은 전쟁과 평화의 법이었습니다. 저는 국제법이 정의와 연대 안에서 구상된 전적으로 평화의 법이 되기를 점점 더 요구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국제법은 도덕의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도덕은 정의와 선의 길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법을 만드는 데에 준비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철학적 신학적 고찰에 따라 이루어진 교회의 가르침은 국제법이 전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지향하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해 왔습니다. 특히 현대의 교황님들께서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두어들인다."(야고 3,18)는 확신에서, 평화의 보증으로서 국제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는 교회 고유의 수단을 사용하여 복음의 영원한 빛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기도의 도움에 기대어 이 길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사랑의 문화

10. 이러한 생각을 마치면서 저는 세상에 참된 평화를 이룩하려면 정의가 사랑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풀이할 필요가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평화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은 법이며, 사람들에게 그 법을 존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정의를 완성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 길의 끝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정의와 사랑은 때때로 반대 세력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둘은 동일한 실재의 양면일 뿐이며, 서로 통합되어야 하는 인간 삶의 두 차원입니다. 역사적 경험이 이를 증명하며, 또한 그것은 정의가 흔히 원한, 증오, 심지어는 잔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정의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정의는 사랑이라는 더욱 깊은 힘에 열려 있지 않으면 스스로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자주 그리스도인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개인과 민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왔습니다. 용서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저는 특히 팔레스타인과 중동에서 계속되고 있는 위기를 생각하면서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단순한 정의의 논리를 초월하여 용서의 논리에까지 열려 있는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 지역 사람들에게 너무도 오랫동안 고통을 주어 왔던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이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이유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의 대답으로 기다리시는 것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들 사이에 맺을 수 있는 가장 지고하고 고귀한 형태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활력을 주고, 국제 질서에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문화'가 다스릴 때에만 인류는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저는 모든 언어와 종교, 문화의 사람들에게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는 옛 격언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세계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결국 사랑이 승리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승리를 앞당기는 데에 투신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바람입니다.

바티칸에서,

2003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36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지상의 평화: 영원한 과업

2003/01/01

1. 40 여년 전인 1963년 4월 11일 성목요일에 교황 요한 23세께서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발표하셨습니다. 발표 후 두 달 만에 돌아가신 저의 선임자께서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이 회칙의 첫 문장에서 [지상의 평화]의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하셨습니다. "지상의 평화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집니다"([지상의 평화], 머리말: [사도좌 관보] 55[1963년], 257면).

분열된 세상에 평화를 말하기

2. 요한 23세께서 회칙을 쓰시던 당시에, 세계는 깊은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20세기는 진보에 대한 커다란 기대를 품고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가 시작된 지 60년이 채 지나지 않는 동안 세계는 두 차례의 대전과 파괴적인 전체주의 체제, 헤아릴 수 없는 인간의 고통 그리고 교회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를 치렀습니다.

[지상의 평화]가 발표되기 불과 2년 전인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그 도시를 둘로 가르고 서로 대치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지상의 도시를 이해하고 건설하는 방식도 갈라놓았습니다. 장벽의 이쪽과 저쪽에서는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는 가운데 상반된 통치 법칙에 따라 서로 다른 생활 양식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세계관에서나 실생활에서나 베를린 장벽은 인류 전체를 가르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고스란히 자리잡아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보이는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회칙이 발표되기 6개월 전이며 로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막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세계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핵전쟁 직전까지 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겪었습니다. 평화와 정의, 자유의 세계로 가는 길이 막혀버린 듯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침략 행위나 불상사로 인류 역사상 최악이 될 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도, 인류가 언제까지나 '냉전'이라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언제든 이용 가능한 원자 폭탄을 비축하고 있다는 것은 전쟁으로 인류의 미래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평화의 네 기둥

3.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회칙 [지상의 평화]를 통하여, 평화는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진리와 함께 베를린 장벽뿐 아니라 다른 모든 분열의 장벽 이쪽과 저쪽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회칙은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모두 한 인류 가족이라고 말하였으며, 안정과 정의, 미래에 대한 희망 속에 살고자 하는 전 세계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에 빛을 밝혀 주었습니다.

요한 23세께서는 그분 특유의 깊은 통찰력으로 평화의 필수 조건들을 인간 정신의 네 가지 요구인 진리, 정의, 사랑, 자유로 규정하셨습니다([지상의 평화], 제1부: [사도좌 관보] 55[1963년], 265-266면 참조).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도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진리가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실제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이행한다면 정의가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로 느끼고 자신들이 가진 것, 특히 자신들의 정신적 심적 가치들을 남들과 나눈다면 사랑이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을 선택할 때 사람들이 이성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진다면 자유가 평화를 이룩하고 그 평화를 더욱 발전시킬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의 눈으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신 요한 23세 복자께서는 역사의 흐름을 더욱 깊이 통찰하셨습니다. 사물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전쟁이나 전쟁에 대한 풍문 가운데서도 교황님께서 바람직한 정신 혁명의 시작으로 보셨던 그 중요한 무엇이 인간사에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양도할 수 없는 인간 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

4. 요한 23세께서는 인류가 새로운 여정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쓰셨습니다([지상의 평화], 제1부: [사도좌 관보] 55[1963년], 267-269면 참조). 식민주의의 종말과 신생 독립국들의 출현,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 새롭고 환영할 만한 여성의 공공 생활 참여 등은 인류가 실제로 역사의 새로운 단계, 곧 "모든 인간은 타고난 존엄 때문에 평등하다는 확신"([지상의 평화], 제1부, 44항: 사도좌 관보 55[1963년], 268면)이 폭넓게 확산되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입증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교황님께서는 그러한 비극적 상황에서도 세계는 정신적 가치들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고 있으며, 평화의 네 기둥인 진리, 정의, 사랑, 자유([지상의 평화], 제1부: 사도좌 관보 55[1963년], 268-269면 참조)의 의미를 더욱 널리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지역과 국가와 국제 생활에 불러들이고자 노력하면서 인간은 그들이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들 삶의 든든한 토대이자 최고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의식하게 되었습니다([지상의 평화], 제1부: 사도좌 관보 55[1963년], 268-269면 참조).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발전적인 영적 통찰이 공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당시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나타난 인권 의식의 증대를 지켜보시면서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이러한 현상의 잠재력을 간파하시고 그것이 역사를 바꿀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나중에 중동부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분의 통찰력을 확인시켜 주게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회칙에서, 평화로 가는 길은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고 증진하는 데에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인간의 기본권은 특정한 사회 계층이나 국가가 부여해 주는 혜택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인간은 지성과 자유 의지를 갖고 있고, 인간 본성에서 직접적으로 나오는 권리와 의무를 지닌 주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보편적이며, 불가침적이고,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지상의 평화], 제1부 9항: [사도좌 관보] 55[1963년], 259면).

곧이어 역사가 보여 주듯이, 이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존엄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과, 사회는 그러한 확신에 따라 형성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커지면서 인권 운동이 불같이 일어났으며, 현대 역사의 커다란 힘 가운데 하나, 곧 평화를 위한 활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자유에 대한 추구를 정치적으로 공고히 표현하였습니다. 사실상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이러한 운동이 독재 정부를 좀더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정부로 바꾸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인권 운동은 실제로 평화와 진보는 오직 인간 마음에 새겨진 보편적인 도덕률을 존중할 때에만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국제연합 총회에서 한 연설, 1995년 10월 5일, 3항 참조).

세계 공동선

5. [지상의 평화]는 세계 정치 발전의 다음 단계에 주목함으로써 또 다른 면에서 그 예언자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계는 점점 더 상호 의존적이고 세계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인류의 공동선은 국제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이를 "보편적인 공동선"([지상의 평화, 제4부: [사도좌 관보] 55[1963년], 292면)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발전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국제적 차원에서 세계 공동선을 중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힘을 지닌 공적 권위에 대한 명백한 요구였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곧이어 그러한 권위는 강압이 아니라 오직 국가들의 동의를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기구는 "인간 권리의 인정, 존중, 수호, 증진"([지상의 평화] 제4부: 사도좌 관보 55[1963], 294면)을 기본 목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요한 23세께서 1945년 6월 26일에 창설된 국제연합 기구를 희망과 기대로 바라보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교황님께서는 이 기구를 세계 평화를 유지하고 강화할 확실한 기구로 보셨으며, 1948년의 국제연합 세계인권선언에 대하여 특별한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세계인권선언을 "세계 공동체의 법적 정치적 조직을 위한 중요한 진일보"([지상의 평화], 제4부: [사도좌 관보] 55[1963년], 295면)로 생각하셨습니다. 사실 교황님의 말씀 내용은 세계인권선언이 세계가 무질서보다는 질서, 힘보다는 대화를 특징으로 하는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도덕적 토대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국제연합을 통한 활발한 인권 옹호는 이 기구가 국제적 안전을 증진하고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토대임을 시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인권과 자유, 평화에 이바지하는 실질적인 국제적 공적 권위에 대한 교황 요한 23세의 전망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국제 공동체는 여전히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여야 할 의무에 대하여 많이 주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의무는, 갖가지 형태의 차별과 불의를 합리화할 수 있는 독단적인 선택을 제외한 모든 근본 권리에 영향을 미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새로운 번영과 새로운 기술의 결과로 선진 사회에서 증진되고 있는 일련의 새로운 '권리'들과, 특히 저개발 상황에서는 아직도 충족되지 못하고 있는 다른 더욱 기본적인 인권들 사이에 심각한 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예를 들어 식량과 식수, 주택과 안전,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권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보장받고 실현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격차가 하루빨리 좁혀지고 사라져야 합니다.

또 다른 고찰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 공동체는 1948년 이래 양도할 수 없는 인간 권리에 관한 헌장을 지니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에 따르는 의무는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권리를 임의적으로 행사하지 않도록 권리에 대한 한계를 설정할 의무입니다. 인간의 보편적 의무에 대한 인식의 증대는 평화의 대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의 질서를 함께 인식할 수 있는 도덕적 바탕 위에 평화를 정착시킬 것입니다.

세계의 새로운 도덕 질서

6. 많은 어려움과 방해가 있었지만 지난 40년 동안 교황 요한 23세의 숭고한 전망을 이행하는 데에 매우 큰 진전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전세계 국가들이 인권을 존중할 의무를 느낀다는 사실은 도덕적 신념과 정신의 통찰이라는 도구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보여 줍니다. 그것은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냈던 1989년의 비폭력 혁명을 가능하게 한 양심의 혁명을 통하여 뚜렷하게 입증되었습니다. 또한 방종과 같은 자유에 관한 왜곡된 생각이 아직도 민주주의와 자유 사회를 위협하고 있지만, [지상의 평화] 발표 이후 40년 동안 세계의 많은 지역이 더욱 자유로워지고, 국가 간의 대화와 협력 체계가 강화되었으며, 교황 요한 23세를 무겁게 짓눌렀던 세계 핵전쟁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감히, 그러나 매우 겸손하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올바른 질서, 곧 평화로운 질서'(tranquillitas ordinis)([신국론][De Civitate Dei], 19, 13)인 평화에 대한 교회의 1500년 된 가르침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 가르침은 40년 전에 [지상의 평화]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였으며, 현대 세계에서 개인은 물론 국가 지도자들에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국제 문제에 심각한 무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유롭고 정의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이러한 무질서를 몰아낼 수 있는 질서는 어떤 것일까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는 그러한 무질서 속에서도 경제, 문화, 정치 등 여러 방면에서 '질서'와 체계가 잡혀가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시급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됩니다. 바로 어떠한 원칙에서 이 새로운 형태의 세계 질서가 전개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광범위한 문제들은 평화의 문제라고 보아야 하는 세계 질서의 문제가 윤리 원칙의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달리 말하면, 평화의 문제는 인간 존엄과 인권의 문제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지상의 평화]가 가르치는 영원한 진리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는 [지상의 평화] 발표 40주년을 맞아 이를 기억하고 성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민족 간의 평화와 조화, 그리고 전체적인 발전을 참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인류 가족의 새로운 헌법 체계를 만들기 위하여 협력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것은 범세계적인 초국가적 헌법을 만들자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과정, 곧 정치적 권한, 나아가서는 국제적인 정치적 권위를 행사할 참여 방법에 대한 요구와 모든 차원의 공공 생활에서 투명성과 신뢰성에 대한 거의 전세계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지속적이고 심오한 과정을 뜻합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은 선성(善性)에 대한 확신으로 온 세계에 공공 생활과 공적 권위에 대한 더욱 숭고한 전망을 호소하셨으며, 현재의 무질서 상태를 넘어서 인간 존엄에 걸맞은 새로운 형태의 국제 질서를 모색하라고 과감히 촉구하셨습니다.

평화와 진리의 유대

7. 정치가 당파적 이익에만 매달리는, 도덕성과는 상관없는 필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하여,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지상의 평화]에서 인간 실재의 더욱 참된 모습을 설명해 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한 더 나은 미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인간 행위도 도덕적 판단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정치는 하나의 인간 행위입니다. 따라서 정치 또한 특별한 도덕적 감시를 받아야 합니다. 국제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 말씀하셨듯이, "자연법이 개인들의 관계와 각 정치 공동체들의 관계를 다스려야 합니다"([지상의 평화], 제3부, 80항: [사도좌 관보] 55[1963년], 279면). 국제 정치 생활이 도덕적 판단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난 20세기의 인권 운동이 국가와 국제 정치에 미친 영향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회칙의 가르침에서 예견하였던 이러한 현상은, 국제 정치는 도덕률이 지배하지 않는 '자유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분명하게 반박합니다.

아마 오늘날 중동과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상황만큼 정치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 잘 보여 주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서로에 대한 증오에 찬 배척으로 쌓인 앙금 그리고 폭력과 보복의 끝없는 악순환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이끌어 내려는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돌렸습니다. 불안정한 그 곳의 상황은 국제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이해 관계가 충돌하면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권력 행사 방식을 진정으로 개혁하고 그들 민족의 복지를 보장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평화를 앞당길 수 있을지 생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날마다 성지를 뒤흔들고 중동 지역의 눈앞의 미래를 결정지을 세력들을 분쟁으로 몰아넣는 동족 상잔의 전쟁은 인간 존엄과 인권 존중의 원칙 위에서 신념을 가지고 굳건히 정책을 이행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한 정책은 갈등을 지속시키기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훨씬 더 큰 이익을 줍니다. 선동, 특히 용납할 수 없는 의도를 숨긴 선동보다는 분명히 더 큰 자유를 보장해 주는 이러한 진리 위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평화의 조건

8. 평화의 활동과 진리의 존중은 서로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 제공, 평등한 법률 체계, 개방적인 민주 절차 등은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분쟁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며, 진실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추구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항구한 평화를 위한 참된 전제 조건들입니다. 지역적 국제적 차원의 정치적인 정상 회담은 각 당사자가 공동 협약을 존중할 때에만 평화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회담은 아무런 의미도 쓸모도 없는 것이 되기 쉽고, 그 결과 사람들은 점점 더 대화를 신뢰하지 않게 되며, 더욱더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입니다. 국가와 정부 수반들은 협약만 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 평화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합니다.

약속은 준수되어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옛 격언도 있습니다.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약속은 특히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 준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는 약속에 대한 믿음을 깨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원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불의를 한층 강화하는 것입니다. 가난의 고통에 신뢰감마저 잃어버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절망뿐입니다. 국제 관계에서 신뢰를 유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회적 자산입니다.

평화의 문화

9. 결국 평화는 본질적으로 구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법적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평화의 구조나 장치는 물론 필요하고 또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절망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수한 평화의 행위로 축적된 지혜와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평화의 행위는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평화를 키우는 사람들의 삶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마태 5,9 참조)의 마음과 이성에서 나오는 활동입니다. 평화의 행위는 사람들이 그들 삶의 공동체적인 차원을 온전히 인식하고 자신들의 공동체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의미와 결과를 파악할 때 가능합니다. 평화의 행위는 평화의 전통과 문화를 만듭니다.

종교는 평화의 행위를 장려하고 평화의 조건을 강화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교가 자체의 고유한 영역, 곧 하느님을 생각하고 보편적인 형제애를 촉진하며 인간적인 연대의 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전념한다면 이러한 역할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2002년 1월 24일 아시시에서 제가 여러 종교 대표자들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을 가졌던 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였습니다. 아시시 대회는 평화의 문화와 영성을 전파함으로써 평화를 키워가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지상의 평화]의 유산

10. 교황 요한 23세 복자께서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깊이 신뢰하시며 낙관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께서 신앙심이 깊은 환경에서 자라셨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분쟁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아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사셨던 그분께서는 주저 없이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가지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유산입니다. 올 2003년 세계 평화의 날에 우리 모두 그분과 같은 전망을 가지도록 결심합시다. 우리에게 형제애를 호소하시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믿으며, 다른 모든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하느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우리 동시대인들을 신뢰합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 땅에 평화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지금,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러한 희망이 저절로 샘솟습니다. 40년 전 [지상의 평화]에서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제안하였던 고귀한 사명에 모든 사람이 새롭게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 회칙에서 말한 "거대한" 과제란 "진리, 정의, 사랑, 자유 안에서 사회 생활의 상호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는 곧 "개인들 사이의 상호 관계, 시민들과 정치 공동체들 간의 관계, 그리고 개인들, 가정들, 종교 단체들, 국가들간의 관계, 다른 한편 세계 공동체간의 관계들을 바르게 건설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시며, "여기서 가장 고상한 과제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 안에서 참된 평화를 실현하는 것"([지상의 평화], 제5부, 163항: [사도좌 관보] 55[1963년], 301-302면)이라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지상의 평화] 발표 40주년은 교황 요한 23세의 예언자적 가르침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입니다. 가톨릭 공동체는 올해 이 40주년을 어떻게 경축하여야 할지 잘 알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가 교회 일치와 종교간 대화를 촉진하며 "그들을 갈라놓는 장벽들을 부수고, 상호 사랑의 결합을 강화하고, 다른 이들을 이해하며, 다른 이들이 끼친 손해를 용서하도록 마음의 불을 밝혀 주고자 하는"([지상의 평화], 171항: [사도좌 관보] 55[1963년], 304면) 진실한 바람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활동들을 펼치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저는 우리의 모든 선의 원천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 드립니다. 억압과 분쟁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위한 자유와 협력으로 나아가도록 촉구하시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이 교황 요한 23세 복자께서 당신의 역사적인 회칙에서 네 개의 기둥으로 지적하신 진리와 정의, 사랑과 자유 위에 더욱 확고히 자리잡은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도록 도와 주시기를 빕니다.

2002년 12월 8일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35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다

2002/01/01

1. 올해 세계 평화의 날은 지난 9월 11일의 비극적 참사의 그늘에서 거행되고 있습니다. 그 날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인종 배경을 지닌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 날 이후 전세계 사람들은 인간 개인의 철저한 나약함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심리 상태 앞에서, 죄악의 신비 곧 악이 인간사의 최후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확신으로 교회의 희망을 증언합니다.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의 역사는 세계의 모든 역사에 밝은 빛을 비추며, 모든 인간사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섭리가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완고한 마음까지도 움직이시며 완전히 불모지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습니다.

2002년을 시작하는 교회를 떠받쳐 주는 힘은 바로 이 희망입니다. 그것은 죄악의 힘이 다시 득세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열망이 승리하는 세상으로, 참 평화가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평화는 정의와 사랑의 작품

2. 저는 방금 말씀 드린 살륙을 비롯한 최근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자주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특히 젊은 시절 제 삶에 영향을 미쳤던 역사적 사건들을 기억할 때에 그렇습니다.

저는 나치와 공산 전체주의 아래 제 친구들과 친지들을 포함하여 여러 민족들과 개인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을 잊어버린 적이 없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물음, 곧 이토록 가공할 폭력에 휘둘린 도덕 질서와 사회 질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저는 자주 숙고하여 왔습니다. 제가 심사숙고한 끝에 이르게 된 확신은, 성서의 가르침으로도 확인되듯이, 정의와 용서를 겸비한 대책이 아니면, 무너진 질서를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평화의 두 기둥은 정의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3.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정의와 용서가 평화의 원천이며 조건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기가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은 정의와 용서는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원한과 보복에 대립되는 것이지 정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참 평화는 '정의의 작품입니다'(이사 32,17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한 대로 평화는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입니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78항). 가톨릭 교회는 1500여 년 동안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을 되풀이하여 왔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세상에 세울 수 있고 세워야 하는 평화는 올바른 질서의 평화, 곧 평화로운 질서라고 상기시킵니다([신국론], 19.13).

그러므로 참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정의는 권리와 책임에 대한 온전한 존중을, 또 이윤과 부담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윤리 덕이며, 법률적 보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는 언제나 깨어지기 쉽고 불완전하며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가 따라야 하며, 용서를 통해서 완성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뒤틀린 인간 관계를 근본부터 고쳐주고 다시 세워줍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더 나아가 국제적인 차원에서든 크고 작은 모든 상황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용서는 결코 정의와 대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까지 눈감아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용서는 오히려 충만한 정의입니다. 용서는 적대 행위의 잠정적인 중단을 훨씬 더 넘어서는 저 평화로운 질서로 이끌어주며 인간의 마음 속에 곪아 있는 상처를 밑바닥까지 치유하여 줍니다. 정의와 용서는 둘 다 그러한 치유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 담화에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의 평화입니다. 올해 세계 평화의 날은 온 인류가, 특히 국가 지도자들이 세계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 특히 조직적인 테러 행위라는 새로운 차원의 폭력 앞에서 정의의 요구와 용서에 대한 촉구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테러 행위의 실상

4. 오늘날 국제 테러 행위의 공격 대상은 바로 정의와 용서에서 비롯되는 평화입니다. 특히 냉전 종식 이후 최근의 테러 행위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공모하는 교묘한 조직망으로 발전해 왔고, 국경을 넘어 온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치밀하게 조직된 테러 집단들은 막대한 재원에 의지하여 광범위한 전략을 펼쳐,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테러 조직들이 무방비 상태의 양민들을 겨냥할 무기로 자기네 대원들을 이용할 때에, 죽음을 바라는 마음이 그들 안에 팽배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테러 행위는 증오심에서 나오며, 고립과 불신과 폐쇄를 낳습니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다음 세대들에게까지 계속되면서 이전 세대들을 분열시켰던 증오심을 모든 사람이 물려받습니다. 테러 행위는 인간 생명의 경시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테러 행위는 극악한 범죄입니다. 이는 또한 정치적 군사적 수단으로 테러 행위에 의존하기 때문에, 참으로 그 자체가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5. 그러므로 누구나 테러 행위에서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권리는 어디까지나 목적과 수단의 선택에서 도덕적 법률적 한계를 존중하면서 행사하여야 합니다. 범죄자는 분명히 밝혀 내어야 합니다. 범죄의 책임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므로 테러 분자들이 소속되어 있는 국가나 민족, 종교로 그 책임을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반테러 투쟁을 위한 국제 협력에는 테러 분자들이 그러한 계획을 품게 만드는 억압과 소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용기 있고 단호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사실 오랜 기간 동안 권리가 짓밟히고 불의가 묵인되는 상황에서는 테러 분자들을 모집하기가 더욱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가 결코 테러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여야 합니다. 또한 테러 행위의 목적대로 질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그 희생자는 누구보다도 국제 연대의 붕괴에 대처할 위치에 있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곧 이미 생존의 비좁은 변두리에서 근근히 살아가며 전세계적인 경제적 정치적 혼돈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는 저개발국의 국민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테러 분자들의 주장은 명백한 거짓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테러 행위로 살인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 인간성과 인생과 미래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증오와 파괴의 대상입니다. 테러 분자들은 그들이 믿는 진리나 그들이 겪는 고통이 무고한 생명까지도 희생시키며 벌이는 자신들의 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라고 주장합니다. 테러 행위는 흔히 자신의 진리관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강요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생기는 광신적인 근본주의의 소산입니다.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나마 진리를 전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는(창세 1,26-27 참조) 인간 양심을 존중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리로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강요하려는 행위는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당신 모습을 새겨주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근본주의로 일컬어지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철저히 대립되는 태도입니다. 테러 행위는 인간만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도 부당하게 이용합니다. 결국 테러 행위는 하느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용하는 우상으로 만들고 맙니다.

7. 그러므로 어떤 종교 지도자도 테러 행위를 묵과해서는 안 되며, 선동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테러 분자로 선언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모독입니다. 테러 분자들의 폭력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며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반대되는 것이며,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도 대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소서."(마태 6,12) 하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비를 베푸는 것은 곧 우리 삶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니(1요한 4,7-12 참조) 우리도 자비를 베풀 수 있으며 또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역사 안에 들어오시고, 성금요일의 수난사를 통하여 부활의 승리를 준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 102[103],3-4.10-13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아 구세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제자들은 언제나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의 요구

8. 그러나 용서의 참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왜 용서하여야 합니까? 용서를 성찰할 때 이러한 물음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1997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용서를 베풀고 평화를 얻으십시오.")에서 말씀 드렸던 것을 상기하면서, 저는 용서가 사회적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용서가 자리잡아야 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윤리와 용서의 문화가 지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태도와 법률로 나타나는 용서의 '정치'를 희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용서의 '정치'를 통하여 정의는 더욱더 인간적인 모습을 띠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무엇보다도 악을 악으로 갚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을 억누르는 개인의 선택이며 마음의 결단입니다. 그러한 결단의 기준은 죄인인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고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용서야말로 완벽한 본보기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원천과 기준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고 인간 이성의 빛으로 용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나약함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너그러이 대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 주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 안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습니다. 모든 인간은 눈을 들어 미래를 바라보며 믿고 노력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9. 그러므로 온전히 인간적인 행위인 용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결단입니다. 그러나 개인은 본질적으로 관계의 구조 안에 있는 사회적 존재이고, 좋게든 나쁘게든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사회에도 용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정, 집단, 단체, 국가 그리고 국제 공동체가 끊어진 유대를 새롭게 하고, 서로를 비난하는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며, 호소할 데 없는 이들을 차별하려는 유혹을 물리치려면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역량은 정의와 연대를 특성으로 하는 미래 사회상의 기초입니다.

반대로, 용서를 하지 못하고 갈등이 지속될 때, 이는 인간 발전에 막대한 손실을 입힙니다. 많은 자원이 발전과 평화, 정의가 아니라 무기를 위하여 쓰이고 있습니다. 화해의 실패로 인류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고, 용서의 실패로 발전은 그만큼 지연됩니다. 평화는 발전의 본질 요소이며, 참 평화는 오로지 용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용서는 왕도

10. 용서는 즉시 이해할 수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제안입니다. 여러 면에서 그것은 역설적인 메시지입니다. 사실상 용서는 실질적인 장기간의 이익을 위하여 표면적인 단기간의 손실을 감수합니다. 폭력은 정반대입니다. 표면적인 단기간의 이익을 선택함으로써 실질적이고 영구적인 손실을 입습니다. 용서는 나약해 보이지만, 용서를 해주거나 받을 때 커다란 정신적 힘과 도덕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용서는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성을 더욱 충만하고 풍요롭게 하며, 창조주의 광채로 더욱 빛나게 합니다.

복음에 봉사할 직무를 받은 저로서는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직무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세계 모든 민족들의 관계에서 인간 정신이 널리 되살아나도록, 이번 주제에 대하여 진지하고 깊이 있는 성찰을 하게 하려는 바람에서 오늘 다시 한 번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11. 용서에 대하여 성찰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화의 원인인 뿌리깊은 증오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듯한 개인적 집단적 비극을 양산하는 몇몇 갈등 상황들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저는 특별히 하느님과 인간이 만난 복된 땅, 평화의 임금님이신 예수님께서 생활하시고 돌아가셨다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거룩한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혼란한 국제 정세는 긴장의 고조와 완화를 반복하면서 현재까지 50년 이상을 끌어 온 아랍 민족들과 이스라엘 민족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더욱 강력히 촉구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테러 행위와 전쟁에 의존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양편 모두의 희망을 앗아가고 있는 이러한 현실은 결국 협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의와 화해를 이루려는 의지만 있다면 또 그러한 의지가 있을 때, 양편의 권리와 요구가 적절히 고려될 수 있고 공정하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저는 거룩한 땅에 사는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상호 존중과 건설적인 화합의 새 시대를 위하여 일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종교간 이해와 협력

12. 이러한 모든 노력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들과 세계의 대종교들은 테러 행위의 사회적 문화적 원인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가르치고, 인류 가족은 하나라는 더욱 분명한 의식을 널리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와 협력, 그리고 종교간 대화와 협력의 구체적인 영역으로서, 이를 통하여 종교는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는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테러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테러 행위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도덕적 정당성도 부인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13. 고의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크나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예외 없이 한 목소리로 증언할 때, 세계 종교 지도자들은 정의와 자유 안에서 평화로운 질서를 추구할 수 있는 국제 사회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으로 건전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할 때 여러 종교들은 상호 이해와 존중과 신뢰에 이르게 하는 용서의 길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들이 평화와 반테러리즘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용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용서를 바라는 사람들은, 더높은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받아들일 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

14.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는 결코 평화 활동에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질서와 정의, 자유를 위한 평화 건설의 본질 요소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인간 마음에 넘쳐 흐르도록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당신 은총의 힘으로 장벽과 폐쇄만이 보이는 곳에 평화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끝없는 분열과 갈등의 역사에서도 인류 가족의 연대를 강화해 주시고 확대해 주실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국가와 민족들 사이에 정의와 올바른 질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자유, 특히 모든 개인의 인권과 시민권의 바탕인 종교 자유를 위한 기도입니다. 평화를 위한 기도는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며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용기를 주시도록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에서, 저는 2002년 1월 24일에,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아시시에 모이는 세계 종교 지도자들에게 평화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참된 종교적 신념이야말로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상호 존중과 화합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임을 보여 줄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폭력과 분쟁을 막는 주요 해독제입니다. 지금과 같은 엄청난 시련의 시기에 인류 가족은 희망의 확실한 근거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름다운 기도처럼, 아시시에서 우리가 모두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시기를 전능하신 하느님께 간청하며 이를 선포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희망입니다.

15.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담화에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인류 가족의 선익과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인류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막중하고 어려운 결정을 할 때에 언제나 인류의 진정한 선익에 비추어 또 언제나 공동선의 관점에서 결정을 내려주기를 간청합니다.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습니다. 저는 어떤 이유에서든 증오심과 복수심 또는 파괴욕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 경고를 되풀이할 것입니다.

이번 평화의 날에 모든 신자가 테러 행위의 희생자들과 슬픔과 충격에 빠져있는 그 유가족들을 위하여, 그리고 테러와 전쟁으로 끊임없이 고통받고 상처받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진심으로 더욱 간절한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무자비한 행동으로 하느님과 인류에게 큰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그들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기가 저지르고 있는 죄악을 깨달아 모든 폭력적 지향을 포기하고 용서를 바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온 인류 가족이 정의와 자비의 결합으로 태어나는 영구적인 참 평화를 얻게 되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01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34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01/01/01
사랑과 평화의 문명을 위한 문화간 대화

1. 새 천년기의 여명에, 인간 관계는 진정한 보편 형제애의 이상에 더욱 고무될 것이라는 희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안정된 평화를 보장할 길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징표는 많이 있습니다. 형제애의 중요성은 위대한 인권 헌장들에서 선포되었으며, 여러 국제 기구들, 특히 국제 연합을 통하여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경제, 문화, 사회의 점진적 통합으로 이끄는 세계화 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형제애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신자들도 모든 이의 공통된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가 인류의 형제 의식과 더욱더 형제다운 공존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사실을 한층 더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계시에 이 원리가 근본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2. 그러나 동시에 이 밝은 희망을 먹구름이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지니고 역사의 새 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인류는 피비린내 나는 격렬한 분쟁에 휩싸여 있으며, 같은 지역 안에 살지만 문화와 문명이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연대를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손쉬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오래된 증오와 심각한 문제들로 분노와 격노의 분위기가 일어나는 당사자들 사이의 차이를 해소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이민의 급속한 증가와 더불어, 문화와 문명이 다른 민족들 사이의 전례 없는 공존 상황으로 빚어지는 새로운 사회 형태의 문제들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평화의 미래가 위협받을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문화와 전통 간의 대화라는 주제에 대하여 성찰해 보도록 촉구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화는 화합의 세계, 자신의 미래를 평화로이 바라볼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길입니다. 이것은 평화 추구의 핵심 주제입니다. 저는 국제 연합 기구가 2001년을 "문명 대화의 해"로 선포하여 이러한 절박한 요구에 관심을 촉구하였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그와 같은 문제에 손쉬운 해결책이나 즉시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어떤 형태의 예측도 불허하는 상황을 분석하는 것만도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이론적으로는 양립 가능하지만 실질적 차원에서는 어떠한 손쉬운 통합에도 저항하는 원칙들과 가치들을 결부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이기주의와 인간적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인들에게 언제나 윤리적 책임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성찰을 함께 나누는 것이 유익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의도로 저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역사의 이 중요한 시기에 교회와 모든 인류에게 하시는 말씀(묵시 2,7 참조)에 귀기울이면서, 여기서는 몇 가지 지침만을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인류와 그 다양한 문화

4. 인간의 상황을 성찰할 때, 우리는 언제나 인간 문화의 복잡성과 다양성에 놀라게 됩니다. 모든 문화는 그 특수한 역사적 발전과 그에 따라 그 문화를 구조적으로 유일하고 독창적이며 유기적인 통합체로 만드는 특성 때문에 제각기 구별됩니다. 문화는 역사를 통한 여정에서 개인 차원이나 사회 집단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자기 표현의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자연의 재화와 가치를 계발하고"<1>, 사회 생활과 정치 생활, 안보와 경제 발전을 포함한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자신의 기본 지식을 더욱 차원 높고 체계적인 문화적 종합으로 통합시키며,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참으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러한 삶의 가치와 전망들, 특히 종교적 영역의 가치와 전망들을 강화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기 때문입니다.<2>

5. 문화는 언제나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요소들과 가변적이고 우발적인 요인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떤 문화를 일괄하여 살펴볼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문화와 구분되는 그 문화의 양상들에 놀라게 됩니다. 이러한 양상들은 뚜렷이 구별되는 요소들이 혼합된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을 각 문화에 부여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문화는 지리적, 역사적, 인종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독특하게 결합된 특정 지역에서 발전합니다. 각 문화의 "특수성"은, 지속적인 과정을 통하여 자기 문화의 영향을 받고 각자의 다양한 능력과 재능에 따라 자기 문화에 기여하는 그 문화의 전달자들 속에 명확히 반영됩니다. 모든 경우에 개인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문화 안에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가정과 그들 주위의 사회 집단을 통하여, 교육과 지극히 다양한 환경의 영향을 통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와 맺고 있는 관계 자체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문화로 구별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결정론도 없으며, 단지 개인의 적응력과 인간 자유의 작용 사이의 끊임없는 변증법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 발전과 문화 소속

6. 한 사람이 자기 고유의 문화를 인격의 구성 요소로서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은 특별히 인생의 시작 단계에서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사실이며, 그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특정한 '토양'에 굳건히 뿌리박지 않으면, 아직 상처받기 쉬운 나이에, 평화로운 균형 발전을 해칠 수 있는 지나치게 상충되는 자극들에 지배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인간은 가정, 지역, 사회, 문화의 차원에서 자신의 고유한 '기원'과 가지는 본질적 관계를 토대로 자신의 민족성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화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어느 정도 '민족적' 모습을 띠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 가족에 속하게 되심과 동시에 한 지역에 속하게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히 나자렛 사람, 나자렛 예수로 남아 계십니다(마르 10,47; 루가 18,37; 요한 1,45; 19,19 참조). 이것은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는 자연적인 과정으로서, 일반적으로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지역에 대한 사랑은 편협함이 아닌 인류 가족 전체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3>, 소속감이 자기 찬양, 다양성 거부, 국수주의, 인종 차별, 외국인 혐오 등으로 변할 때에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들을 회피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촉진되어야 할 가치입니다.

7. 따라서, 자기 문화의 가치를 평가할 줄 아는 것도 분명히 중요하지만, 전형적인 인간의 실재이고 역사적인 상황의 현실인 모든 문화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특정 문화에 대한 소속감이 고립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은 다른 문화에 대한 사심 없고 편견 없는 지식입니다. 나아가, 문화들을 주의 깊고 철저하게 연구하여 보면, 문화들은 흔히 그 외면적인 다양성 아래에서 중요한 공통 요소들을 보여 줍니다. 이는 문화와 문명의 역사적 연속성에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인간 자신을 보여 주시는<4>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천 년 역사의 경험에 의존하여 "모든 변천 속에도 변하지 않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5>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연속성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계획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화적 다양성은 인간의 일치라는 더욱 폭넓은 전망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일치는 근본적으로 역사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이며, 문화적 다양성의 심오한 의미는 이것에 비추어 파악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일치의 요소들과 다양성의 요소들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만이 모든 인간 문화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해석하게 할 수 있습니다.<6>

문화적 차이와 상호 이해

8. 과거에는 문화적 차이가 흔히 민족들 간의 오해의 근원이자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까지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부 문화의 다른 문화에 대한 공격적인 주장을 목격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불안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재난을 가져오는 긴장과 충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러한 상황은 자신의 문화와 다른 문화적 환경, 적대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사고와 행동 방식으로 기울기 쉬운 다수 문화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종적 문화적 소수민들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추어, 선의의 사람들은 특정 공동체의 문화적 경험을 특징짓는 기본적인 윤리적 지향을 검토하여야 할 것입니다. 문화는,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의 신비"(1데살 2,7 참조)에 얼룩져 있으므로, 그 문화들 역시 정화되고 구원될 필요가 있습니다. 각 인간 문화의 진정성, 그 문화의 근원을 이루는 정신의 건전성, 그 도덕적 의미의 타당성은 인간에 대한 문화의 기여, 모든 차원, 모든 환경에서 인간 존엄을 증진할 수 있는 문화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는 측정될 수 있습니다.

9. 문화가 외부의 모든 유익한 영향을 거부하게 만드는 근본주의적인 정체성 주장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나 서구 세계에서 비롯된 문화적 유형들에 대한 기타 문화들의 맹목적인 모방이나 적어도 그 핵심적 측면에 대한 독창성 없는 모방 역시 그 못지 않게 위험합니다. 그리스도교 기원에서 벗어나 있는 이러한 유형들은 흔히 세속주의나 실천적 무신론, 철저한 개인주의 형태를 그 특징으로 하는 생활 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이러한 현상은 대중 매체의 강력한 선전으로 뒷받침되고 있으며, 그 의도는 생활 방식과 사회적 경제적 계획,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른 모든 훌륭한 문화와 문명들을 그 내부에서부터 썩어 가게 하는 세계관을 전파하려는 것입니다. 서구의 문화적 유형들은 그 뛰어난 과학적 기술적 특색 때문에 유혹적이고 매력적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인간적, 정신적, 도덕적 빈곤의 심화는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유형을 만들어 내는 문화는 최고의 선이신 하느님을 제거함으로써 인류의 선을 보장하려는 파멸적인 시도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경고한 대로,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고 맙니다".<7> 더 이상 하느님께 준거를 두지 않는 문화는 그 혼과 방향을 상실하고, 죽음의 문화가 됩니다. 이러한 죽음의 문화는 20세기의 비극적 사건들로 충분히 입증되었으며, 현재는 서구 세계의 일부 특정 집단에 현존하는 허무주의에서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문화간 대화

10. 인간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다른 사람에 대한 아낌없는 자기 증여를 통하여 성숙해집니다.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만들고 인간에게 봉사하는 문화는 대화와 친교를 통하여 완전해져야 합니다. 이러한 대화와 친교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신"(사도 17,26)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인류 가족 최초의 근본적 일치에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세계 평화의 날 담화의 주제인 문화간 대화는 인간 본성 그 자체와 문화의 본질적인 요구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류 가족의 근원적 일치에 대한 역사적 창조적 표현인 문화들의 특수성을 보호하는 대화이며, 문화들 간의 이해와 친교를 돕는 대화입니다. 그리스도교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최상의 원형을 발견하는(요한 17,11.21 참조) 친교의 개념은 결코 우둔한 획일화나 강요된 동화나 융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러 형태의 다양성의 수렴을 나타내므로, 풍요로움의 상징이며 성장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세계 평화의 날 담화의 주제인 문화간 대화는 인간 본성 그 자체와 문화의 본질적인 요구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류 가족의 근원적 일치에 대한 역사적 창조적 표현인 문화들의 특수성을 보호하는 대화이며, 문화들 간의 이해와 친교를 돕는 대화입니다. 그리스도교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최상의 원형을 발견하는(요한 17,11.21 참조) 친교의 개념은 결코 우둔한 획일화나 강요된 동화나 융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러 형태의 다양성의 수렴을 나타내므로, 풍요로움의 상징이며 성장에 대한 약속입니다.

대화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으로 이끌어 주고, 일치에 대한 인류 가족의 근본적 소명이 요구하는 상호 수용과 진정한 협력으로 마음을 열어 줍니다. 이와 같이, 대화는 사랑과 평화의 문화를 건설하는 훌륭한 수단입니다. 저의 전임자이신 존경하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사랑과 평화의 문화를 우리 시대의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상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제삼천년기를 시작하며, 엄청난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 희망과 평화의 표징을 볼 수 없어 때때로 좌절하는 세계에 다시 한 번 대화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범세계적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과 위험

11. 개인 생활과 인간 생활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영향을 받는 오늘날에는 문화간 대화가 특히 절실합니다. 우리 시대는 과거의 유형들과 다소 단절된 새로운 문화적 유형의 노선에 따라 사회를 형성하는 범세계적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입니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세계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이 가장 최신의 정확한 정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범세계적 규모로 이루어지는 영상과 언어의 자유로운 흐름은 사람들 사이의 정치 경제 관계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까지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일부 부정적이고 위험한 측면들도 지니고 있습니다. 몇몇 나라들이 이러한 문화 "산업"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자국의 상품을 지구 곳곳의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있으며, 그 수효가 점점 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적 특수성을 해치는 강력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품들은 은연 중에 가치 체계를 내포하고 전달하므로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문화적 정체성의 박탈과 상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민 문제

12. 대화의 방식과 문화는 이 시대의 중요한 사회 현상인 이민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이를 때 특히 중요합니다. 지구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대규모 이동은 흔히 당사자들에게는 두려운 모험이며, 그와 함께 이민들을 보낸 나라와 그들이 정착하는 나라들에 현저한 영향을 미치면서 전통과 관습의 혼합을 초래합니다. 이민들을 받아들이는 나라들이 그들을 어떻게 맞아들이고, 이민들이 새로운 환경에 얼마나 잘 통합하는가 하는 것 또한 다양한 문화들 사이에 얼마만큼의 실질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문화적 통합의 문제는 오늘날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며,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의 권리와 의무를 균등하고 공평하게 보장할 최선의 방법을 자세히 명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민은 지극히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고,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여러 문명에서, 이민은 새로운 성장과 부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어떤 경우, 지역민과 이민들은 문화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서로 존중하고 관습의 다양성을 받아주거나 용인함으로써,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서로 다른 문화들의 만남과 관련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거기에 따르는 긴장은 주기적인 갈등 분출의 원인이 되어 왔습니다.

13. 그러한 복잡한 문제에서는 '마술 같은' 해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준거로 삼을 수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윤리 원칙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먼저, 이민들은 언제나 모든 인간의 존엄에 합당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민들의 유입을 통제하는 문제에서, 공동선을 마땅히 고려한다면 이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모든 인간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합당하게 맞아들이고 또 인간답고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새로 이민해 온 사람들과 지역 주민들 양편에 모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려하는 것입니다. 이민들이 가져 온 문화 관습은 자연법이나 인간의 기본권에 내재된 보편적 윤리 가치에 위배되지 않는 한 존중되고 수용되어야 합니다.

문화에 대한 존중과 서로 다른 지역의 '문화적 측면'

14. 이민들이 대다수 지역민들의 관습과 쉽게 양립될 수 없는 그들의 특정한 문화 관습을 공적이고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어느 정도 있는지 결정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진정 열려 있는 분위기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역사적 시간에, 주어진 장소, 주어진 사회적 여건에서 공동선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를 하여야 합니다. 이는, 가치에 대한 무관심에 굴복하지 않고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대화 참여 의지를 함께 지니게 하는 개방 정신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에 크게 달려 있습니다.

다른 한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태어날 때부터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균형 있는 발전, 특히 인생을 시작하는 민감한 단계에서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룩하도록 하는 한 지역의 특수한 문화적 능력을 과소 평가하여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화적 균형'을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문화를 참조하여 각 지역에 일종의 "문화적 균형"을 보장할 합당한 방법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균형은, 소수 민족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특정한 '문화적 측면'의 지속적인 현존과 발전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서 문화적 측면이란 한 민족의 역사와 그 민족 정체성의 불가분의 일부인 언어와 전통, 가치 등 기본적 유산을 뜻합니다.

15. 그렇지만 물론 한 지역의 문화적 측면의 균형을 보장해야 할 필요성은 법적 조치들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조치들은 주민들의 정서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문화가 특정 민족과 특정 지역에 활력을 주는 능력을 잃게 되면 그러한 조치들도 불가피하게 바뀌게 되어 있고, 박물관이나 예술관이나 문예관에 보존되는 유산에 불과하게 됩니다.

요컨대, 문화가 진정 살아 있는 한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죽어버린 문화라면 어떠한 법도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문화간 대화에서 각 문화는 상대 문화에 자기가 믿고 있는 가치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사람들의 자유와 양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인간 정신에 부드럽고 힘차게 파고드는 진리는 오로지 진리 그 자체의 힘으로 드러날 뿐입니다."<8>

공통 가치들에 대한 인식

16.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는 특별한 수단인 문화간 대화는, 모든 문화는 인간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모든 문화에는 공통된 가치들이 있다는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인류의 가장 참되고 독특한 특징들을 드러냅니다. 관념적인 편견과 이기적인 욕심을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이러한 공통된 가치들에 대한 의식을 일깨움으로써, 효과적이고 건설적인 대화에 이바지하는 그러한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문화적 '토양'을 육성하여야 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들도 이러한 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다른 종교의 대표들과 수 차례 만나면서 - 특히 1986년 아시시와 1999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가졌던 만남이 생각납니다 - 저는 서로 다른 종교인들 사이의 상호 개방이 평화의 대의와 인류 가족의 공동선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연대의 가치

17. 세상에 불평등이 증대하고 있는 이 때, 더욱 폭넓게 강조하여야 할 최고의 가치는 물론 연대의 가치입니다. 사회는 사람들이 가정에서 다른 중간 사회 단체로, 나아가 시민 사회 전체와 국가 공동체로 활동 범위를 넓히면서,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키는 기본 관계에 의존합니다. 국가들도 서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범세계적인 상호 의존의 현실은 전인류 가족의 공동 운명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고, 사려 깊은 모든 사람에게 연대의 덕목을 더욱더 소중히 여기도록 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상호 의존의 증대가 여러 가지 불평등을 폭로해 왔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곧, 부국과 빈국의 격차,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과 생활 필수품마저 부족하여 존엄성을 손상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각국의 사회적 불균형, 자연 자원의 무책임한 이용으로 야기되고 심화되는 인간의 타락과 환경의 파괴 등이 그것입니다. 일부 지역에서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균형이 악화되어 왔고, 일부 최빈국에서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정의의 증진이야말로 진정한 연대 문화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남는 것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는 문제가 아니라, "제외되거나 주변화된 온 인류 가족을 경제적 인간적 발전 범위 안으로 진입하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가 풍부하게 생산하는 잉여물에서 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활 양식, 생산과 소비 양식 그리고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는, 이미 확립된 권력 구조의 변화를 요구합니다."<9>

평화의 가치

18. 연대의 문화는 모든 사회, 그리고 국가와 국제 활동의 으뜸가는 목적인 평화의 가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들 간의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도정에는 세계가 직면해야 하는 여러 가지 과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룰 수 없는 선택을 부과합니다. 불안을 확산시키는 군비 증강과 핵확산 방지 노력의 미흡한 진전은 경쟁과 갈등의 문화를 조장하고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에는 국가들뿐만 아니라 준군사 단체와 테러 조직 등 비국가 단체들도 가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는 과거와 현재의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인 지뢰와 끔찍한 생화학 무기의 사용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국가 사이의 알력, 일부 국가의 내란, 만연된 폭력 등 국제 기구도 국가 정부도 거의 손 쓸 수 없어 보이는 상존하는 위협들에 대하여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위협들에 맞서 우리는 민족들 사이에서 평화와 이해의 대의를 촉진하는 구체적이고 시기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느껴야 합니다.

생명의 가치

19. 문화들 사이의 진정한 대화는 상호 존중의 감정은 물론 생명 자체의 가치에 대한 생생한 의식을 고취시킵니다. 인간의 생명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실재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선이 보호되지 않을 때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염원하면서 생명을 경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시대는 생명에 대한 아낌없는 봉사와 헌신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었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잔인함과 무관심으로 고통스럽고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슬픈 광경도 목격하였습니다. 저는 지금 살인, 자살, 낙태, 안락사, 신체 상해, 육체적 심리적 고문, 온갖 형태의 부당한 강압, 독단적인 투옥, 사형에 대한 불필요한 의존, 국외 추방, 노예 소유, 매춘, 여성과 어린이 매매 등 비극적인 죽음의 악순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연구를 위한 인간 배아의 복제와 이용과 같은 유전 공학의 무책임한 실태를 더 보태야 합니다. 이것은 자유, 문화의 발전, 인류의 진보를 꾀한다는 불합리한 명분으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힘없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 이러한 잔학 행위에 희생될 때, 인간의 가치와 신뢰, 존중, 상호 부조 위에 건설되는 인류 가족의 개념 자체가 손상될 위험에 놓입니다. 사랑과 평화에 토대를 둔 문화는 인간에게 부당한 이러한 실험들을 저지하여야 합니다.

교육의 가치

20.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려면, 문화간 대화는 민족 중심의 모든 이기주의를 극복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자기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겸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에 대한 책임입니다. 교육은 학생들에게 그들 자신의 뿌리를 인식시키고, 이 세계에서 각자의 위치를 규정할 수 있게 하는 준거를 제공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교육은 다른 문화들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합니다. 자신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초월하여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역사와 그들의 가치관에서 발견되는 풍요로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적절한 비판 의식을 가지고 건실한 윤리 구조 안에서 얻는 다른 문화들에 대한 지식은 자기 문화의 가치와 한계를 더 깊이 인식하게 하고, 동시에 온 인류에게 공통된 유산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렇게 지평을 확대함으로써, 교육은 더욱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교육은 생명의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 열려 있으면서 이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며 또한 다른 문화들과 그 안에 있는 영적 가치들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통합적 인본주의를 지지하도록 도와 줍니다.

용서와 화해

21. 예수님 탄생 2000년을 기념하는 대희년 동안, 교회는 화해에 대한 적극적인 요청을 강력히 체험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청은 문화간 대화라는 복잡한 문제의 맥락에서도 중요합니다. 대화는 사실 전쟁과 갈등, 폭력과 증오 등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비극적인 유산에 짓눌려 흔히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의사 소통의 단절로 생긴 장벽을 헤쳐 나가는 길은 용서와 화해의 길입니다. 많은 사람이 환멸에 찬 현실주의를 내세우며 그 길은 실현 불가능한 순진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길은 평화의 목표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신자들의 눈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 오른 편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는 돌아가시는 구세주의 이 마지막 말씀을 듣고 용서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원한 행복을 약속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은 우리에게 사람들 사이의 의사 소통과 대화를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을 허물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용서와 화해가 일상 생활과 모든 문화의 평범한 관행이 되며, 따라서 인류의 평화와 미래를 건설하는 실제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충만해집니다.

뜻깊은 희년의 체험인 기억의 정화를 염두에 두고,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증인이자 선교사가 되라는 특별한 호소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하느님께 열렬히 간청함으로써 이 땅의 모든 민족에게 해당될 수 있는 이사야의 놀라운 예언을 앞당겨 성취할 것입니다. "그 날에 이집트에서 아시리아로 가는 큰 길이 트여 아시리아 사람과 이집트 사람이 서로 오가며 이집트 사람이 아시리아 사람과 함께 예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아시리아 다음의 셋째 번 나라가 되어 세상에서 복을 받으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복을 주시며 이르시는 말씀을 들어라.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가 손수 만든 아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이사 19,23-25).

젊은이들에 대한 호소

22. 저는 이 평화의 메시지를 인류의 미래이며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는 살아 있는 돌들인 전세계 젊은이들에 대한 특별한 호소로 끝마치고자 합니다. 저는 최근 로마 세계 청년 대회에서 우리가 가졌던 감동적이고 희망에 찬 만남들을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참여는 기쁘고 진실되며 용기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동감과 활력,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 저는 더욱 평화롭고 인간적인 세계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저와 가까이 있음을 느끼며, 저는 다채로운 모자이크와도 같은 여러분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 관습과 사고 방식들을 통하여 교회의 놀라운 보편성, 교회 일치의 보편성을 바라보는 은총을 저에게 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저는 같은 신앙, 같은 희망, 같은 사랑의 일치를 통한 다양성의 놀라운 조화를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구원과 인류의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의 표지이며 도구인 교회의 놀라운 실재를 웅변적으로 표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10> 복음은 여러분에게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인류 가족 본래의 일치를 재건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언어와 문화의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신나고 드높은 임무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연대와 평화와 생명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가족을 이루는 형제 자매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인류의 창조자가 되십시오.

바티칸에서,

2000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53항.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국제 연합에서 한 연설(1995.10.15.) 참조.

3. 사목 헌장, 75항 참조.

4. 같은 곳, 22항 참조.

5. 같은 곳, 10항.

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한 연설(1980.6.2.), 6항.

7. 사목 헌장, 36항.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 1항.

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 58항.

1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1항 참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제33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00/01/01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 이것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천사들의 환호입니다(루가 2,14 참조). 우리는 장엄하게 대희년의 막을 여는 성탄절 전야에 이 기쁜 환호 소리를 다시 한 번 듣게 될 것입니다.

새 천년기가 밝아오는 이 때, 우리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전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시대, 평화의 시대에 대한 희망을 주십니다. 강생하신 성자 안에서 충만히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 평화의 토대입니다. 인간이 마음속 깊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인간 관계를 새롭게 하며, 폭력과 전쟁의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있는 형제애를 갈망하게 할 것입니다.

대희년은 이 사랑과 화해의 메시지에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인류의 진정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 이토록 뜻 깊은 새 해를 바라보며, 저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소원을 빕니다. 평화는 가능하다고 저는 모든 사람에게 단언합니다. 평화는 하느님께 간청하여야 할 은혜이지만, 우리는 또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정의와 사랑의 활동을 통하여 날마다 평화를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분명히 평화로 가는 길을 어렵게 만들고 때때로 좌절시키는 문제들은 많고도 복잡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깊이 뿌리 박힌 요구입니다. 그러므로 평화 추구의 의지를 결코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평화의 추구는 인류가 아무리 죄악과 증오와 폭력으로 일그러졌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한 가족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이 초월자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인간의 진보와 자연 세계의 존중에 동참하는 문화 속에서 개인과 민족들의 조화로운 관계 모색을 통하여 인정되고 이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메시지이고, 희년의 메시지이며, 새 천년기를 시작하는 저의 바람입니다.


전쟁은 인류의 패배입니다

3. 우리 뒤에 남기고 온 지난 세기에, 인류는 끝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전쟁과 분쟁,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전쟁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가정과 국가를 파괴시켰으며, 수많은 난민을 양산하고, 빈곤, 기아, 질병, 저개발, 막대한 자원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크나큰 고통의 뿌리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욕구, 권력의 이데올로기, 전체주의의 망상, 광적인 국수주의, 오랜 인종 증오가 불러일으킨 패권주의의 논리가 놓여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민족과 지역을 전멸시키거나 예속시키려는 잔인한 조직적 폭력은 무력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세기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경고는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깊은 증오심에 불을 지르고, 불의의 상황을 조성하며,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짓밟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대부분 투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막대한 피해를 가져오면서도 결국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맙니다. 전쟁은 인류의 패배입니다. 오로지 평화 안에서 평화를 통해서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수 있고 그 누구에게도 넘겨 줄 수 없는 인권이 보장될 수 있습니다.<1>

4. 20세기의 전쟁에 맞서, 평화를 대변하고 평화를 위하여 일했던 사람들이 인류의 명예를 지켰습니다.

인간 권리의 천명과 장엄한 인권 선언에 이바지하였던 사람들, 온갖 형태의 전체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주의를 종식시키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위대한 국제 기구들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던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비폭력의 가치 위에 삶을 일구어 왔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예언자적인 빛나는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보여 준 고결함과 성실함은 우리에게 값지고 빛나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모든 과학 기술 분야의 커다란 진보에 헌신하였던 사람들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무서운 질병을 퇴치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한 20세기에 교회를 이끄셨던 저의 존경하는 선임자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숭고한 가르침과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교회가 평화의 문화를 증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다방면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노력의 상징이 바로 교황 바오로 6세께서 1967년 12월 8일 세계 평화의 날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시의 적절하고 예언자적인 통찰이었습니다. 세계 평화의 날은 해가 갈수록 풍부한 성찰의 경험으로 또 미래에 대한 공통된 전망으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한 가족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

5.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복음서의 이 환호는 진정 이러한 물음을 불러일으킵니다. 곧 새로운 세기는 평화의 세기, 개인과 민족들의 형제애를 새롭게 의식하는 세기가 될 것인가? 우리는 물론 미래를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확실한 원칙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전 인류가 근본적으로 한 가족이 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될 때에만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류 가족 안에서만, 신분과 인종과 종교를 불문하고, 온갖 차이와 구별을 넘어 또 그에 앞서 개인의 존엄과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세계화 과정에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그 혼과 의미를 불어넣어 주고 그 방향을 제시하여 줄 것입니다. 세계화는 많은 위험을 안고 있지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를 통하여 인류가 정의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 위에서 한 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이를 위하여 완전한 시각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곧 어느 한 정치, 민족, 문화 공동체만의 행복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선익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느 특정 정치 공동체의 공동선 추구가 인류의 공동선, 곧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 천명한 인간 권리의 인정과 존중으로 드러나는 공동선과 상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흔히 강력한 경제적 이해 관계에 좌우되어 다른 모든 가치를 민족과 국가의 절대적인 요구에 종속시키는 사상이나 관행은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서 볼 때, 인류의 질서와 조직을 갖추는 정치적 문화적 제도적 구분과 구별은 그것이 하나인 인류 가족에 속하고 거기서 유래하는 윤리적 법률적 요구와 부합할 때에만 정당한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범죄

7. 이러한 원칙은 지극히 중요한 결론을 낳습니다. 곧 인권에 대한 침해는 인류의 양심에 대한 침해이며, 나아가 인류 자체에 대한 침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인권 수호의 의무는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지리적 정치적 경계를 초월합니다. 인류에 대한 범죄는 한 국가의 내부 문제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장소와 상황에 관계없이 자행되는 그러한 모든 범죄를 재판하기 위하여 국제 사법 재판소를 설립한 것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일보 전진이었습니다. 인권은 보편적인 불가분의 것이기에 국경이 없다는 신념이 각 민족과 국가의 양심 속에 증대되고 있음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8. 우리 시대에 와서 국가간의 전쟁 횟수는 줄어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위안이 되긴 하지만, 국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무력 분쟁을 생각할 때 그 양상은 매우 다릅니다. 슬프게도 이러한 내전은 실제적으로 모든 대륙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매우 폭력적입니다. 또한 그 대부분이 민족적, 인종적, 심지어는 종교적 성격의 오랜 역사적 원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사상적, 사회적, 경제적인 원인들도 거기에 가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전에는 보통 소구경 무기와 이른바 "경무기"들이 대규모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무기들은 사실상 매우 치명적이며, 외부의 이해 관계와 책임에 얽혀 들어 흔히 해당 국가의 국경 너머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분쟁은 극히 복합적인 것이어서 거기에 작용하는 원인과 이해 관계를 판단하고 평가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 내전의 결과로 극도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바로 민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반법이든 전시법이든 실제로 모든 것이 무시되기 때문입니다. 민간인들은 보호받기는커녕, 흔히 적군의 일차적인 표적이 됩니다. 무력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더라도 악순환의 결과로 상대편 민간인에게 희생되거나 살해됩니다.

우리 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죄 없는 어린이와 여성, 아무런 무기도 없는 노인들이 고의적인 표적이 되어 온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한 장면들이 너무도 많아서 사실 우리는 결단력과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방향을 전환하여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주의적 원조에 대한 권리

9. 어쨌든 이러한 비극적이고 복잡한 상황 앞에서 그럴듯한 모든 전쟁의 '이유'에 맞서, 인도주의적 법률의 탁월한 가치와 고통받는 민간인과 난민을 위한 인도주의적 원조의 권리를 보장하는 당연한 의무를 천명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고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이행할 때 분쟁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편의 이해 관계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도주의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는 데 실제적으로 최상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적인 수단이나 그 밖의 다른 모든 수단을 찾아내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의 도덕적 정치적 합법성은 사실 인간의 선익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며 인간의 모든 제도를 초월한다는 원칙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10. 여기서 저의 신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무력 분쟁에서 당사자간의 협상은 물론이고 국제 단체와 지역 단체를 통하여 중재와 화해를 충분히 시도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간의 협상은 그러한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또 일단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거기에 얽힌 이해 관계와 권리의 공평한 조정을 통하여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중재와 조정 기관들의 긍정적인 역할에 관한 이러한 믿음은 인도주의적인 비정부기구들과 종교 단체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들 단체는 다른 의도 없이 신중하게 적대 세력간의 평화를 증진시키고, 오랜 적대감을 극복하도록 도와 주며, 적군을 화해시키고, 새로운 공동의 미래를 향하여 길을 열어 줍니다. 저는 평화를 위한 그들의 고귀한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한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저는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다른 모든 신앙인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유합니다.


인도주의적인 개입

11. 물론 민간인이 불법 침략자의 공격으로 정복당할 위험이 있고 정치적인 노력이나 비폭력적인 방어가 아무 소용이 없을 때에는, 침략자를 무찌르기 위하여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것은 또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는 한시적인 것이어야 하며 목적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또 그러한 조치는 국제법을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위의 보장을 받아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무력 개입에만 의존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국제연합 헌장의 모든 규정을 충분히 그리고 최대한 활용하고, 더 나아가 국제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입을 위한 실제적인 수단과 방법을 정하여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연합은 결정 과정에서 모든 회원국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그 역할과 신뢰성을 약화시키는 특권과 차별을 없애야 합니다.

12. 이것은 우리 모두 진지하고 슬기롭게 개척해 나가고 싶어하는 분야, 곧 정치와 법률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토론의 장을 열어 줍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국제법의 개정과 국제 단체의 쇄신입니다. 이러한 쇄신의 출발점과 기본적인 조직 원리는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인류와 인간 개인의 선익을 최우선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전쟁의 모순을 고려할 때 이러한 쇄신은 더욱더 시급합니다. 최근의 분쟁들이 보여 주듯이, 군대는 최고의 안전을 누리고 있는 반면, 일반 시민은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떠한 전쟁에서도 민간인 보호 권리를 무시하여서는 안 됩니다.

법률적 제도적인 고려 이외에도, 개인적으로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의무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평화를 가르치고, 평화의 구조와 비폭력적 방법들을 발전시키며, 분쟁 당사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평화와 연대

13.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전쟁 문제에서 우리는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또 다른 문제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그것은 곧 연대의 문제입니다. 평화에 대한 숭고하고 막중한 임무는 한 가족이 되고 또 한 가족임을 인식해야 할 인류의 소명에 깊이 뿌리 박혀 있으며, 지구 자원의 보편적 용도에 대한 원칙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 재산의 개념과 관리를 확대하여 사유 재산의 필요 불가결한 사회적 기능을 받아들임으로서 공동선과 특히 사회의 가장 힘없는 구성원들의 선익에 도움을 줍니다.<2> 불행히도 이러한 기본 원칙이 대부분 무시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남쪽과 북쪽의 격차가 계속해서 증대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북쪽 의 선지 국가들에서는 일용품과 자원이 넘쳐 나고 노년 인구가 점점 늘고 있는 데 반해, 남쪽의 후진 국가에서는 젊은이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여전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지속적인 평화와 동일시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공평과 진리와 정의와 연대가 없이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상호 의존적인 불가분의 두 권리, 곧 평화에 대한 권리와 연대를 통한 완전한 발전에 대한 권리를 따로 떼어놓는 모든 계획은 실패할 것입니다. "개인들과 국가들 사이에 만연된 불의와, 경제 사회 분야의 지나친 불공정과 불평등, 시기, 불신과 교만은 끊임없이 평화를 위협하며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런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모든 활동은 평화를 이룩하고 전쟁을 피하는 데 이바지합니다."<3>

14.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는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간적 양심을 몹시 괴롭히는 한 가지 문제는 무수한 사람들의 빈곤입니다. 이러한 빈곤 상황이 더욱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 시대의 주요한 경제 문제들이 자원의 부족에 따른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가 참된 발전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든 번영하는 부유한 국가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사람을 위하여 더욱 의로우며 동시에 번영하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물질 재화의 용익권과 자신의 노동 능력을 유용한 결실을 위하여 제공할 권리를 주장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향상은 모든 사람의 윤리적이고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발전을 위한 큰 기회가 됩니다."<4> 가난한 사람들을 골칫거리로 보지 말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새롭고 더욱 인간적인 미래를 건설하는 주역이 될 수 있는 사람들로 봅시다.


경제에 대한 사고 전환의 긴급한 요구

15.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또한 많은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 사이에 증대되고 있는 관심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빈곤, 평화, 생태계, 젊은 세대의 미래를 포함한 새로운 문제들을 고찰하며 그들은 시장의 역할, 통화와 금리의 광범위한 영향, 증대하는 경제와 사회의 격차, 경제 활동과 관련된 다른 유사한 문제들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경제의 본질과 그 목적에 대하여 새롭게 더 깊이 성찰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번영' 자체에 대한 개념의 재고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 같습니다. 연대 의식과 이타주의 같은 가치들에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는 협착한 실용주의적 관점에 번영의 개념을 가두어 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16. 여기에서 저는 경제학자들과 금융 전문가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경제 활동과 관련 정책의 목적이 개개인과 전 인류의 선익이라는 것을 보장하여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권유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윤리의 요구일 뿐만 아니라 건전한 경제의 요구입니다. 경험이 확인해 주듯이, 경제적 성공은 개인에 대한 인정과 그 능력에 대한 더욱 진정한 평가, 더욱 온전한 개인의 참여, 개인들의 지식과 정보의 증대와 향상, 더욱 강력한 연대 의식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경제학이나 경제 활동과 무관하기는커녕 오히려 경제를 더욱 "인간적인" 학문과 활동이 되도록 도와 줍니다. 경제를 물질 재화의 합리적 건설적 사용으로 이해할 때에, 윤리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 개인과 인간 전체의 선익에 이바지하지 않는 경제는 실제로 '경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떠한 개발 모델인가?

17. 한 가족을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류가 아직도 빈곤으로 양분되어 있는 이 비극적인 사실 자체가 - 21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무려 14억이 넘는 인구가 극빈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 개발 정책 모델의 재고를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정당한 요구는, 20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이념적 오류에 빠지지 않는 가운데, 정치 참여와 사회 정의에 대한 요구와 더욱더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것은 연대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상호 의존 관계의 망상 조직(network)을 이루는 필수 부분이 되게 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을 통하여 공고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연대의 새로운 문화라는 관점에서 국제 협력을 재고하도록 요구합니다. 협력이 평화의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볼 때, 협력은 단순한 도움이나 원조, 특히 자원을 제공해 주고 그 대가로 이익을 얻고자 하는 도움이나 원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협력은 연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연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발전의 주역이 되도록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체적인 경제적 정치적 환경 안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창의력은 인간의 특성이며, 국가의 부 또한 이 창의력에 달려 있습니다.<5>

특히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가난한 국가들의 외채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동시에 기아와 영양 실조, 질병, 문맹, 환경 파괴와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재정 자원을 마련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8. 오늘날에는 갈수록 세계적인 차원을 띠는 현재의 온갖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보편적 도덕 가치들에 대한 의식의 강화가 과거보다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평화와 인권의 증진, 내전과 무력 분쟁의 해결, 소수 민족과 이민의 보호, 환경 수호, 질병 퇴치, 마약과 무기 밀매상과의 전쟁,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부패의 척결 등 이 모든 문제는 오늘날 어떠한 국가도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으며, 전 인류 공동체가 관심을 가지고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대처하고 해결하여야 합니다.

인류의 미래가 제기하는 문제들을 알기 쉬운 공통 언어로 토론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대화의 토대는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보편적 도덕률입니다. 이러한 정신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인간 공동체는 공존의 문제를 직시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존중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6>

신앙과 이성의 만남, 종교와 도덕의 만남은 민족과 문화와 종교 사이의 대화와 협력을 향한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선물이신 예수님

19.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은 대희년을 맞아 예수님의 강생을 장엄하게 기념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베들레헴 하늘에 울려 퍼졌던 천사들의 환호 소리를 다시 들으며(루가 2,14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의 선물이 되신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강생을 기념합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 인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라진 것을 하나로 합치시고, 죄악과 증오를 없애시며, 인류에게 일치와 형제애에 대한 소명을 일깨워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형제애와 진실과 평화의 정신으로 차 있는 이 새로운 인간의 기원이시고 그 전형이시며, 또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인간을 열망하고 있습니다."<7>

20. 교회는 이 희년 동안 자신의 주님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가 되라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평화의 표지요 도구가 되라는 소명과 사명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교회가 복음화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하여 일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하나인 양 떼로서 만민 가운데 솟은 깃발처럼 온 인류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하며, 천상 고향을 목적지로 삼아 희망을 안고 나그네 길을 가고 있습니다."<8>

가톨릭 신자들에게 평화와 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투신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투신은 다른 교회와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 다른 종교인들,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열린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들과 함께 평화와 형제애를 위한 공동 관심사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

21. 수많은 심각한 장애가 있지만 평화를 위한 노력은 많은 사람의 아낌없는 협력에 힘입어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의 표징입니다. 평화는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는 건물과 같습니다. 평화의 건설에 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평화의 모범이며 증인으로서 자녀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는 부모,

-모든 분야의 지식과 인류의 역사 문화 유산에 들어 있는 참된 가치를 전하여 줄 수 있는 교사,

-국제적 차원의 정의와 연대를 요구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노동의 존엄을 위한 오랜 투쟁을 확대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남녀 노동자들,

-평화와 정의의 증진을 위한 확고부동한 결단을 자신의 정치 활동과 그 나라 정치의 중심으로 삼는 정치 지도자들,

-"평화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 자신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최전선에서 흔히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활동하는 국제 기구 종사자들,

-세계 곳곳의 다양한 상황에서 연구와 활동을 통하여 갈등과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비정부기구 회원들,

-진정한 신앙은 결코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교회 일치 대화와 종교간 대화를 통하여 평화와 사랑의 확신을 전파하는 신앙인들이 평화 건설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2.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저는 특별히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학교와 대학에서, 일터에서, 레저와 스포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평화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내면의 평화, 여러분 주위의 평화, 언제나 평화, 모든 사람과 이루는 평화,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

불행히도 전쟁의 비극을 겪고 증오심과 적개심을 안고 사는 젊은이들에게 호소합니다. 화해와 용서의 길을 찾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하십시오. 그것은 물론 어려운 길이지만, 여러분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나라와 온 인류를 위한 희망 찬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대희년의 세계 청년 대회를 거행하기 위하여 다음 8월에 우리가 로마에서 만나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마지막에 남기신 한 연설에서 "선의의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자비와 용서의 복음"을 바탕으로 평화의 대의에 투신하도록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분명코 평화의 밝은 횃불은 그 길을 가면서, 전세계인의 마음에 기쁨의 불을 놓고 빛과 은총을 부어 주며, 모든 경계를 넘어 형제 자매의 얼굴을, 친구의 얼굴을 찾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9> 2000년의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서 형제 자매의 얼굴을, 친구의 얼굴을 보기 바라며 또 다른 사람들도 형제 자매와 친구의 얼굴을 보도록 도와 주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평화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는 이 희년에 우리는 자녀다운 신심으로 예수님의 어머니를 바라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은혜를 우리에게 너그러이 베풀어 주시고 인류가 연대와 평화 안에서 한 가족이 되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티칸에서, 1999년 12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9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항 참조.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 1991년 5월 1일), 30-43항: AAS 83(1991년), 830-848면 참조.

3.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17항.

4. [백주년], 28항.

5.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국제 연합 제50차 총회에서 한 연설(1995년 10월 5일), 13항: Insegnamenti XVIII, 2(1995), 739-740 참조.

6. 같은 곳, 3항: 같은 책, 732면 참조.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8항.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 2항.

9. 발잔상 시상식에서 한 연설(1963년 5월 10일): AAS 55(1963년), 45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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