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의 날

마태 5,1-12; 11,25-30; 14/11/02

어떤 이들은 “죽으면 그만!”이라고도 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다 사라지고 해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안 보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 지금 당장 보이는 것도 아니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듣기에 따라서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음 이후에 개인적으로는 사심판과 연옥에 이어지는 천국과 지옥이 엄연히 있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비록 염치는 없지만, 우리가 주님의 하해와 같이 자비로운 사랑으로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그 나라에 들어가,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지금은 하느님을 믿지만 때때로 의심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도 온전치 못해서 가끔 슬프기도 하고 낙담하기도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완전해 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1코린 13,9-11)

마지막 날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을 뵈올 것이라고 희망에 차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2절)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아들 예수님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2.13절)

요한 복음 11장을 보면, 마르타라는 여인이 자신의 오빠 라자로가 죽자 슬프게 울면서, 상가를 방문한 예수님께 하소연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기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 11,21)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여기 저기서 앓는 이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기억하며, 예수님께서 우리 오빠가 아플 때 여기 계셨더라면 고쳐주실 수 있으셨을텐데, 아쉽게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 오빠가 죽었다고 원망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셔서 좋은 데로라도 가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를 다시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마르타는 그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이미 오빠는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4절)

예수님께서는 답답하고 애통한 심정으로 마르타를 타이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절) 그제서야 마르타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화급히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인간의 죽음을 애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며, 마르타와 마리아 앞에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하며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라자로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무덤에서 걸어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44절) 하시며 그를 죽음의 억압과 굴레에서 해방시켜 온전히 살려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각박한 세상에서 내일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마치 뚫고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장벽과 헤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둠과 악의 굴레 속에 갇혀라도 있듯이, 하루 하루를 불안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 품에 안아 세상의 모진 풍파와 불신과 질시와 모함에 지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고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 가는 과정에서 피해 갈 수도 없고, 빠져 나오기도 싫을 정도의 미련을 품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3-12)

세상에서 정작 나쁜 소리를 듣고 억울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는 참 아프고 병이 도질 정도로 정말 힘겹지만, 훗날 되돌아보면서 곤경 중에 함께해 주시고 이끌어 주신 주님의 섭리와 안배에 새삼 감사드리게 됩니다.

오늘 위령 성월 둘째 날, 죽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에, 우리 인간 조건의 마지막 제한과 장애라고 할 수 있는 죽음 앞에서 선 우리에게, 새 세상을 보여주시고 일러주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부모님과 조상님들, 은인들과 후원자들, 인류를 위해 헌신한 모든 이들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이들의 죄를 사해주시고,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소서. 아멘!



위령의 날

05/11/06

지지난 주 월요일, 10월 24일은 제 어머니 기일이었습니다.

그날 레이니 산에 올라가서 묵주기도를 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렸습니다.

늦게 들어오는 가족들을 보고, “왜 늦었니?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못하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고 걱정하잖니?” 하셨습니다.

지금 이 말이 주님께서 “바쁘면 바쁘다고 화살기도도 못하냐?”하시는 말처럼 들립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하도 추위를 많이 탔기 때문에 겨울에 학교에 갔다 오면 따뜻한 물에 추위에 언 제 발을 담궈 주시고 씻겨주시기 위해 물을 끓여 대야에 담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간식을 만들어서 기다리셨습니다. 세시 세끼뿐만 아니라, 때맞춰 매일 간식을 손수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먹는다는 것이 저희 삼남매들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이상했습니다. 그저 저희는 무슨 일이 끝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습관처럼 몸에 배었습니다. 집에서는 항상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도, 그저 자식들이 하고 싶어 하니까, 죄나 악이 아니라면 그냥 문제나 사고만 안 나면 되겠지 하시면서 참아주시고 아버지 몰래 밀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 위해 고생할 때마다,

힘에 겨운 일들을 지고 버거워할 때마다

어머니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그리고 어머니 품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주고 계셨습니다.

제겐 어머니가 계시기에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위령미사를 드릴 때마다, 위령 감사송을 힘주어 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머리로 이해하고 또 마음 속 깊이 믿으면서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기일 날 산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문득,

‘나를 한평생 기다려주신 그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다면 나도 주저 없이 하늘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의 의미와 그 현실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던 저에게 또 다른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새 세상을 깨우쳐 보여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인성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과 위안을 가져다주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드리며 저도 감히 하늘 나라를 꿈꾸어 봅니다.

어머니처럼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

그 주님의 품 안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영원한 평화와 위안을 얻고 싶습니다.

나를 고집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늘 떠나 왔던 제가

이제는 어머니처럼 포근하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오늘 위령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성모님께 씌워주셨던 그 영광의 월계관을 씌워주시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분 한 분 제대로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죽은 모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위령의 날

마태 5, 1-12; 2003/11/02

어떤 사람이 말했다. "성당에 가기 싫어요." "왜요?" "성당에 가면 가난하게 살라고 해서 싫어요. 저 어릴 땐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어요. 그래서 부지런히 일해서 편안히 살고 싶은데 자꾸 가난해지라고 하니까 싫어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궁핍하게 살라는 가난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이 없는 5천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빵의 기적을 일으키셔서 굶주리는 이들을 먹여 살리셨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무엇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서에서 말씀하신 가난을 예수님의 생애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는 하느님이셨지만 배고파서 먹어야 하고, 피곤해서 자야만 하는 부족한 인간 조건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분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취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토 8, 9)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굶거나 헐벗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먹보라고 지적을 당하실 만큼 많이 먹으셨고 모자람 없이 사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것이 없으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는 것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시에 결혼을 한 가장들이었지만 가정을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의 가정이 굶주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굶주렸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르 10, 29-30) 오늘날 교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이 가족의 단란함과 행복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하여 교회에 자신을 바칠 때 같은 선물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성직자 수도자가 아닌 일반 평신도들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역대 교황님들은 노동헌장 이후 많은 사회회칙에서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한 충분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충분한 임금이란 단순히 먹고 입고 자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충분한 정도를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 뿐 아니라 미래의 것까지도 보장될 만큼 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 정도가 얼마 정도일까? 미국차를 사느냐, 한국차를 사느냐, 일본차를 사느냐 하는 차이도 있겠지만, 그러자면 한이 없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평신도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을 살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먹고사는데 있어서 검소하게 살고 남는 것을 미래를 위해 저축하면서 한 가지 더 가난한 이웃을 고려하자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을 생각하면 얻어도 얻어도 모자라는 물질 세계와 현실 세계지만, 우리가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나눈다면 우리는 형제 하나를 더 얻는 셈이며 그 형제와 함께 우리는 하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추위가 시작되는 이 때, 주위의 형제 자매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내 도움이 필요한 형제 자매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베풀어 우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하늘 나라를 만들기로 합시다. 오늘 이 시간에 내 도움이 필요한 형제 자매 하나를 떠올리며 주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기를 청하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하고 그 결심을 성당을 나서서도 현실에서 이룰 수 있도록 다짐하며 주께서 이끌어 주시도록 간구합시다.

그리고 이젠 죽어서 자기 힘으론 어쩔 수 없고, 우리의 기도만을 기다리고 있는 연옥영혼들을 위해서도 11월 한 달 위령미사를 봉헌하며 정성껏 연도를 바쳐줍시다. 아멘.



위령의 날

97/11/02

위령의 날 첫째미사(마태 5,1-1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우리 눈에 봐서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행복할까요? 다들 가난을 극복하고, 피하려고만 하는데 어떻게 가난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일에 가난해서 주눅들고 사람들에게 괄시를 받아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어떻게든 빨리 돈을 긁어모아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일반적으로 '돈독'이 단단히 든 사람은 오늘 행복하지 못합니다. 언젠가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다 거머쥐게 된다면 몰라도. 그런데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요. 우선 오늘 그 사람의 마음속엔 돈이라는 주인이 자리잡고 앉아 그는 가난하지 않고 소유욕으로 가득한 부자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재화만으로도 안분 자족하듯 사는 더 나아가 이웃과 함께 우환을 나누며 사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서 정말 하느님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사람을 주님은 행복하다고 하셨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의 소유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나한 사람 중에는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원해서 가난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존재와 생애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먹어야 하고, 졸립고, 쉬고 싶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하느님으로서 누리고 계신 모든 것을 버리셔야 했습니다. 또 한편 그분은 당신이 가지신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분은 가난해 지셨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결론지으시면서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바로 '나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나누어줌으로써 가난해진 사람입니다. 영예도 칭찬도 감사와 영화도 다 버린 채 가난해진 행복한 사람입니다.


위령의 날 둘째 미사(마태 11,25-30) - 중고등부 학생 미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25) 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알게 될 이 철부지 어린이들은 누구일까요? 물론 그 사람은 이어지는 구절,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27절)라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그 선택된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에게서 발견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막내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하여 자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자기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물론 자신의 직업과 명예와 기쁨, 행복도 같이 버린 철부지 어린이 같은 이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나 자녀가 여러분을 버리고 자신이 집안에서 채워야할 의무를 저버리고 신앙의 길로 접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끔찍한 일인가요? 축복해줄 일인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철부지가 되라고 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28절)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를 편하게 해 주신다는 것일까? 예수님을 따르려 해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성당에 다녀도 잔소리가 있고 또 신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마저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드려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착하게 살아야 하고, 교무금을 내야하고,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면 죄를 지은 것 같이 부담스럽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마저도 강요하는 등. 어떤 때는 그런 것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편하다니? 결코 편하지만 않은 것 같은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우리 영혼의 안식이 주님께서 주시는 편함이다.

세상 사람들은 경쟁과 물질 사회 속에서 돈을 벌 때 아주 고생합니다. 그런데 쓸 때도 고생합니다. 별로 살 것도 없고, 비싸기만 하고, 또 자기가 가진 것이 없어지거나 빼앗길까봐 또 불안해합니다. 자기 것이 항상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기쁨과 보람보다는 늘 걱정 속에 살죠. 그럼 성당에 다니면 어떤가? 물론 성당 다니는 신자도 세상 안에서 살기 때문에 고생하며 돈을 법니다. 그러나 한편 돈을 쓸 때는 평안과 보람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과도 나누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더 가져도 모자라고 쓰기엔 부족한데 자기를 위해서도 아닌 이웃을 위해 쓴다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일이죠. 그러나 거기엔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할 보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안식이죠. 그러기에 주님은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고 하십니다. 어때요, 편안하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그 길이 철부지 어린이 같은 길일지 몰라도!


위령의 날 셋째 미사(마태 25,1-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에 비유하여 설명하십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가지고 있었다."(마태 25,3-4) 처녀들은 밤에 올지 모르는 신랑을 위해 등잔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중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으나 나머지 다섯은 그렇지 못했다. 신랑은 밤늦게 도착했다. 그래서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충분히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나눠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슬기로운 이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 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9절)고 하고 거절하였다. 결국 뒤늦게 보충해 온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련한 이들이 되어버렸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말이 참으로 슬기롭기는 하지만 야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작 그 기름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일까? 등잔이 우리의 몸이라면 그 몸을 빛나게 하는 기름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우리 생애라는 등잔에 넣을 기름은 돈을 주고 사거나 나눠줄 수 있는 것일까? 인격과 믿음, 선행 등을 나눌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 "이 다음에 돈 많이 벌면 이 사람 저 사람 도와 달라는 사람 다 도와주지 뭐. 그 때까지만 참지 뭐." 그런데 그러다가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 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루가 12,28) 하신 주님 말씀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이들이 되면 어떻게 하지? 또 어떤 이는 "이번만 그냥 넘어가고 나중에 진짜 어려워지면 그 때 도와주지 뭐." 하겠지. 그런데 그가 진짜 어려워지기 전에 혹시 내가 먼저 어려워지면,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마태 25,12)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 6,8) 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삶에 대한 희망을 갖기 위해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마태 25,13)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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