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봉헌 축일 경축 이동 축성(봉헌)생활의 날 담화문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1요한 1,1)

(가해) 루카 2,22-40(32); 17/02/05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진실하고 충실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은총과 지혜, 그리고 인내심의 덕을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매 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과 함께 길을 나서자고 초대하시면서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성’과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일깨워 우리 주님의 이 초대의 목소리와 그분 사랑의 힘에 민감해져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수도생활의 쇄신·적응에 관한 교령’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각 단체는 그 회원들이 인간 조건과 시대 상황 그리고 교회의 필요를 적절히 인식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그 회원들은 현대 세계의 상황을 신앙의 빛으로 지혜롭게 판단하고, 사도적 열정으로 불타올라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된다.”(서론 2항).

오늘날의 세상은 더더욱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과 진리가 무언지, 그리고 참으로 올바른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 삶의 참된 가치가 무언지 등에 대해 전에 없이 더 분간할 수 없는 흐릿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불확실성’과 ‘불안’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빛을 밝히며 희망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모습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내면 깊숙한 우리의 존재성에서부터 진리와 참됨, 그리고 절대적인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대중적인 운동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개인들과 상황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 속에서마저도 이런 희망을 볼 수 있는 이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요한의 첫째 서간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계셨던’ ‘그분’, 우리가 보고 있고, 듣고 있으며, 접촉하고 있는 ‘그분’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시대에 더 결연한 마음으로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그분을 보고 그분의 초대에 응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그분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때 나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의 반대말이 ‘불신’이나 ‘의심’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두려움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크신 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어둠과 폭풍의 상황 속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시며 우리 발걸음에 힘을 넣어주십니다.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형제자매 수도자들에게 이 ‘깨어 일어남’의 행진대열에 앞장설 것을 촉구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이 잘 보지 못하는 ‘빛’이신 분을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더 크게 눈을 뜨고 보아야 하고, 세상이 듣지 못하는 ‘예수님의 희망의 목소리’에 온 정성으로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는 통합된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성실한 동업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과 거짓의 권력자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동료 수도자 형제자매 여러분과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기도 영으로 충만한 채 관상의 시각을 지니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자들의 행렬에 초대해주시는 그분을 따라나서도록 합시다! 한 해의 첫 자락에 우리 주님의 강복과 특별한 은총을 여러분과 우리 민족,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해 청해봅니다!

“온전한 사랑이요 정의이신 주님, 저희 모두와 우리 민족, 그리고 이 세상에 강복해주시고 평화를 주소서!”

- 한국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호명환 가롤로 신부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다해) 루카 2,22-32; 16/01/31

작은 형제회 조상연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은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 40일과 겹치기 때문에 예전에는 마리아의 정화 축일로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40일에 관한 것은 레위기의 정결례 규정(레위기 12장)을 보면, 남자 아이는 40일간 정결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기간이 지나면, 속죄 제물을 사제에게 바치고, 사제가 부정을 벗겨주면, 깨끗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69년부터는 세상의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봉헌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고 온 세상에 구원을 주신 우리 구세주 예수님을 찬미하면서 초를 축복하거나 촛불 행렬을 하기로 합니다. 특별히 오늘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4단에서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기념하면서 "봉헌 생활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봉헌"의 의미와 "수도자들의 봉헌"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4년 대림 제1주일인 11월 30일부터 2016년 2월 2일까지를 "봉헌 생활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특별히 수도자 관련 내용이 담긴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인류의 빛)과 수도 생활 쇄신에 관한 교령(완전한 사랑) 반포 50주년을 맞이하여,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과거를 바라보고 다음으로 열정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며, 마지막으로 희망으로 미래를 끌어안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의 법에 따라 예수의 부모는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쳤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태를 열고 나온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바치라'고 모세에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생명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하느님께 승복하고 감사드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봉헌"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드리는 것", "바치는 것" 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위해 따로 구분하고, 하느님에 대해 봉사하기 위해 특별히 바쳐지는 것입니다. 즉, 봉헌에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에 대해"입니다. 그리고 바탕은 하느님께 대한 승복과 감사입니다.

초대교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하느님을 찾으며 살았습니다. 산 속, 사막, 섬 그리고 광야를 비롯해서 다양한 곳에서 찾았습니다. 봉쇄구역을 통해, 극기와 고행을 통해 때로는 말씀을 자주 듣고 묵상하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찾았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이러한 전통들은 새로운 형태의 삶의 양식이 되었고, 교회의 위기와 유혹 속에서도 불씨가 되어 간직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법은 이를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최상으로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 생활 양식"이라고 정의합니다.

"봉헌"에 대해 설명할 때, 용어나 표현이 익숙하지 않아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만, 교회의 전통을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즉, 하늘에서는 성령의 감도를 받고, 본인들이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려는 신자가 가난, 순명, 정결인 복음적 권고를 선서함으로써 하느님 영광, 교회 건설, 세상 구원의 목적으로 헌신과 봉사, 사랑의 완성을 추구하면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오롯하게 하느님께 봉헌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삶을 봉헌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를 포기하고,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처럼 순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처럼 정결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등잔이나 등불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시요,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챤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분의 비추심을 통해 빛을 받아 우리도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하느님의 빛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빛은 은총에 의해 우리의 본성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빛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는 그리스도의 빛을 의미하며, 그 빛은 그리스도가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과 성인들과 함께 나누신 빛입니다. 봉헌초를 밝히는 것은 곧 신자들의 봉헌입니다. 수많은 봉헌초를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성인들의 성상 앞에 환히 타오르게 하는 것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와 함께 나누신 하느님께 큰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초는 겸손하게 자신을 태우면서 그 무엇보다도 빛과 가까이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예수님의 봉헌과 수도자들의 봉헌의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은총으로 우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빛에서 멀리 떨어져 어둠의 자녀들과 어울려서야 되겠습니까?

주님 봉헌과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의미를 깨닫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정 하느님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의미를 깨달았을 때, 우리의 신앙, 우리의 성소, 우리의 봉헌도 깨닫게 됩니다.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나해) 루카 2,22-32(40); 15/02/01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준비하면서 문득 ‘심청전’(沈淸傳)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심청전은 연대 미상, 작가 미상의 한국의 고전소설입니다. 심청전은 신라시대 거타지설화(居陀知說話)와 경상북도 경주의 연권녀 설화, 또는 효녀 지은 설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심청전은 춘향전과 함께 조선시대 이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고소설 작품입니다. ‘심청황후전’이라고도 하는 심청전은 한문본과 국문본, 목판본, 필사본, 활자본 등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집니다. 판소리로 시작되어 소설로 정착되었습니다.

완판본을 중심으로 보면, 심청은 가난한 심봉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자란 뒤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셨습니다. 심청은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의의 제물로 자기 몸을 팔았습니다. 심청은 인당수에서 물에 빠졌는데,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은 심청을 연꽃에 태워 다시 인당수로 보냈습니다. 그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이 이 연꽃을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연꽃에서 나온 심청은 왕과 혼인하였습니다. 왕비가 된 심청은 고향을 떠나 떠도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맹인 잔치를 열었는데, 맹인 잔치에 온 아버지는 딸을 만나자 반가움과 놀라움에 눈을 떴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청전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기마다 다른 평가를 내립니다. 저는 오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딸아이의 효성스러운 마음에 주목합니다. 이 모습은 나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캘커타의 빈민들을 위해 헌신했던 복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직접적인 자책사유 없이 죽음을 맞아야 했던 사형수를 대신해서 자기 생명을 바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교회는 성탄 대축일로부터 40일째 되는 오늘,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께서 예수 아기를 성전에 봉헌하심을 기념하여, 매년 2월 2일을 ‘주님 봉헌 축일’로 정했습니다. 탈출기 13장과 민수기 18장에서 유래하는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 산모가 아들을 낳은 경우에는 1주간의 부정기간과 33일의 정결기간을 보내고 40일째 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물을 바치며 산모의 부정을 벗는 정결예식을 치르고, 첫 아들의 봉헌예식을 거행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주님 봉헌 축일을 ‘봉헌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봉헌 생활의 날은 봉헌 생활회, 즉 수도회과 재속회(성직자와 봉헌된 평신도), 사도 생활단을 위해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로도 불립니다.

그리스도교의 봉헌은 일반적인 종교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봉헌과는 다릅니다. 바치는 이가 무엇인가를 신에게 바치고, 바치는 이에게 혜택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일종의 거래가 아닙니다. 힘있는 이에게 자신의 입신양명을 기대하며 선물을 건네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의 봉헌은 감사의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을 주님께 되돌려 드리고, 주님께 봉헌하는 의미로 가난하고 어려운 형제들과 자신의 영육을 나눕니다. 그러기에 순수하고 자발적인 봉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수도회, 재속회, 사도 생활단의 삶을 봉헌 생활이라고 부르고 존중과 기대와 후원을 하게 됩니다.

봉헌생활은 또한 수도자들과 재속회원들과 사도생활단원들만의 봉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재능, 열정, 부를 내려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주님께 그리고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 주위에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이웃에게 되돌려 주는 봉헌이기에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의 삶입니다.

일찍이 욥 성인이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라며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감수 인내했듯이,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아들 예수님을 기꺼이 주님과 새 세상의 형제자매들에게 바쳤듯이,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우리의 생명과 영육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질을 잘 계발하고 성숙시켜 그 가치와 의미를 드높임으로써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빛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아름답고 거룩한 재능을 형제 자매들의 삶에 풍요와 혜택이 돌아가도록 봉사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거룩한 재능과 열정과 그에 따른 부를 어려운 형제들과 나눔으로써 주님과 형제 자매들에게 봉헌하는 삶을 삽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과 한나라는 예언자는 평생을 경건하게 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루카 2,26.37 참조). 그리고 성전에 봉헌된 어린 아기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성을 발견하고 감사와 찬미를 올립니다(28절.38절 참조). 특별히 시메온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9-32절) 우리가 매일 자기 전에 성무일도 끝기도를 바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우리도 시메온과 한나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의 삶에 함께해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낌으로써, 어렵고 힘겨운 상황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순간의 기쁨과 위로를 안겨주며 희망을 안겨주는 주님의 손길을 알아차림으로써,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의 노래를 불러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움직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주님께 봉헌하고 형제 자매들과 내 재능과 열정과 부를 나누며 감사와 찬미의 삶을 봉헌하기로 합시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봅니다.”(루카 2,30)



주님 봉헌 축일

(가해) 루카 2,22-40; 14/02/02

작은형제회 조상연 스테파노 신부 강론

1. 미사 전례에 참석하면서 다양한 성경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주일은 3년 주기로, 평일은 2년 주기로 하여 독서와 복음이 바뀌면서 하느님 말씀의 풍성한 식탁에 초대됩니 다. 특별히 축일과 대축일에는 기념하는 주제에 맞도록 독서가 바뀌고,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는 루카가 전해주는 복음,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 것에 관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교회는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합니다.

구약의 출애굽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모태를 열고 나온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바치라고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출애 3,1-2; 22,28-29).이는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승복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과 성모님도 모세의 규율에 따라 아기 예수를 봉헌한 것입니다. 평소에도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환희의 신비 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냅니다. 왜 40일이 되어서야 봉헌하신 것일까요? 구약 레위기에 있는 정결례 규정(레위 12,1-8)을 보면, 남자아이는 40일간, 여자아이는 80일간 정결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기간이 지나면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 가난한 경우에는 비둘기 두 마리를 속죄 제물로 사제에게 드렸고, 사제가 이 제물로 산모의 부정을 벗겨주면 깨끗하게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2. 옛날 옛날 한 옛날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다음,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와 성령을 약속하신 다음, 승천하셨고, 제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형성하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믿음을 바탕으로 공동으로 소유하고 어려운 이들과 나누면서 가난을 실천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독신을 지키면서 극기와 기도 생활을 통해 주님과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면서 덕을 닦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후, 사도들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로 순교했고, 순교는 신앙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믿음의 자유가 찾아온 시기부터는 순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결을 지키는 동정생활을 통하여 신앙을 드러냈습니다.

박해로 인해 사막으로 피신했던 이들 가운데 한적한 사막에서 하느님과 보다 쉽게 통교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했습니다. 속세를 떠나 고독 속에서 오직 주님만을 찾으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고, 더욱 철저하게 자신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하루에 한끼만 그것도 검소하게 먹었고, 잠을 줄이면서 간편한 옷차림으로 기도에 전념하면서 자연스럽게 가난을 실천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함께 어려움을 인내하면서 애 덕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공동생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순종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구성원의 결속을 중시했고, 일정한 장소에 머무르면서 기도의 전통을 계승해 나갔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일하면서 때로는 침묵 속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이런 이들은 사제 수품을 받으면 겸손의 덕을 지키기 어렵게 되고, 홀로 하느님만을 찾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신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후 사목상의 필요 때문에 점차 수도자들이 수품을 받게 되었고, 수도생활은 점차 성직자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회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바뀌면서 점차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이 나타납니다.

이단에 맞서 설교를 통해 교회를 지켜야 했고, 학문에 집중하면서 신학을 집대성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면서 삶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살았고,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순종했으며,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립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완전한 순종과 학문 연구 그리고 선교를 하면서 발전했고, 시대와 교회의 요청에 따라 의료, 청소년 교육, 출판, 홍보 등 다양한 영역에 전문적으로 봉사하면서 복음을 생활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다양한 수도 생활의 형태들이 생겨 났다가 사라지면서 점 차 발전되었습니다. 마침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나타난 쇄신은 수도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도 생활은 제도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은사에 속한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가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생활양식을 본받으려는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이는 복음적 권고인 가난, 순명, 정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은 참으로 탁월하기 때문에 각 시대마다 새로운 측면에 부각되면서 본받게 되었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3. 복자 요한 바오로 2세는 오늘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특별히 수도자들의 삶과 수도 성소를 위해 기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그렇다면, 봉헌 생활은 무엇일까요? 특별히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수도자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일반적으로 천주교에 대해 갖는 생각은 남자는 신부, 여자는 수녀 입니 다.

교회법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성직자들과 평신도들로 구분하는데, 이를 하느님께서 제정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성직자와 평신도들 중에서 하느님께 봉헌되고 교회의 구원 사명에 이바지하는 이들이 있다고 덧붙이면서, “이들의 신분은 교회의 교계 조직에는 상관이 없지만 교회의 생활과 성덕에 속한다.” 또한, “봉헌 생활의 신분은 본성상 성직자도 아니고 평신도도 아니다.” 라고 규정합니다. 즉,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분은 성직자와 평신도인데, 수도자들은 제도가 아닌 다른 측면, 즉 생활과 성덕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한) 봉헌 생활은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하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 양식이다.”

수도 생활은 인격 전체의 봉헌이고, 모든 은혜를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처럼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 계속 경배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들의 삶(Vita Consecrata)을 '축성생활' 또는 '봉헌생활'이라고 번역합니다. '축성'은 사람이나 사물을 세속으로부터 격리시켜, 오직 하느님 경배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거룩한 것으로 유보시키는 종교적 의례입니다.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는 축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하고, 성품성사로 성직자들은 축성됩니 다. 전통적으로 '축성'은 세속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거나 하느님의 보호에 맡겨지는 새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봉헌'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뜻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사 중에는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치고, 교회를 위해 봉헌금이라는 예물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봉헌 생활이라는 것은 삶으로써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고, 그 봉헌의 방법은 기도, 전례 등을 포함한 모든 행위이며,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나의 의지를 포기하고 예수님처럼 되는 가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나를 맞추는 순종, 하느님만을 생각하면서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으로 사랑하는 정결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근거한 것으로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아 주님의 은총으로 항상 보존하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됩니다. 수도자들은 수도선서, 즉 가난과 순명과 정결하게 살아갈 것을 서약함으로써 교회의 생활과 성덕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전통에 따라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되었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인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도자들은 기도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기도를 먹고 사는 사람이며,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는 인간이지만, 동시에 전적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하느님의 것이고, 교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교회의 한 수녀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부분으로 여겨야 합니다. 또한, 수도자 자신도 개인적 생각보다는 교회의 사람으로서 교회의 사명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봉헌 축일

12/01/29

다음은 지난 1월 16일 부제서품을 받으신 작은형제회 조상연(스테파조) 부제님의 '봉헌생활의 날'을 주제로한 강론입니다.

T 평화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저를 불러주시어 복음을 실행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주신 소중한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서울대교구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갔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한 첫 발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수녀님이신 이모님께서는 수도회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당시 남자는 신부이고, 여자는 수녀라는 것만 알았던 저에게 수도회는 독특한 복장과 가끔씩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기억으로 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모수녀님께서는 몇몇수도회를 알려주셨고, 성소담당 수사님들을 통해 안내책자와 서적들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프란치스코회 성소피정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도회의 분위기와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점점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수도원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성소자들과 함께 방문해서 저녁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수사님들과 다과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성소자가 왔다고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은 줄어들었고, 어색한 그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마음은 온통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식탁 주위에 앉아 있는 수사님들을 관통해서 하나로 이어주는 역동적이고 커다란 움직임을 느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힘이었는데, 그것은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지루하고 시끄러운 것으로 가득찼던 마음에는 어느새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렬한 체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교리를 잘 알지 못했고, 더구나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입회를 위한 추천서를 받기 위해 심흥보 신부님을 찾아갔는데, 신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왜 사제가 되려고 하느냐?” “왜 수도회에 들어가려고 하느냐?”

고등학생 수준에서 근원적인 물음들은 매우 어렵게 느껴졌고,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2000년 대희년에 신학교에 입학하고 수도회에 들어갔지만, 물음에 대한 모호함은 저를 더욱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군 복무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질문은 저를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왜 결혼도 안하면서 신부가 되려고 해?”

구교 집안에서 유아 세례를 받고, 성당을 놀이터로 수녀님과 식복사 누나를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에 ‘신부님’이라고 썼던 저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부분 칭찬과 격려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왜?”라는 물음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진정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성소가 있는 것인지?’ 등의 물음에 빠져 있을 때, 수도회 성소담당 신부님께서 격려의 말을 해주셨습니다.

“교리에 관한 부분은 신학교에서 배우면되고, 프란치스코에 대한 부분은 수도회에서 배우면 됩니다. 형제는 지금처럼 기쁘게 생활하면 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과연 진리는 무엇인지?’ 등의 물음으로 확산되었고, 계속되는 물음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치스코는 명예를 찾아 기사가 되려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해서 평생동안 복음을 전하고 실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프란치스코를 ‘제2의 그리스도’ 또는 ‘평화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너무나도 예수님을 닮고 싶어했고, 나중에는 주님 수난의 상처인 오상을 받게됩니다.

저는 이런 프란치스코를 따르고 싶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자유롭게,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하게, 프란치스코처럼 오직 주님만으로 기쁘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단순하게 형제들과 살면서 행복을 누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정동 관구본부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2009년에 성대서원을 했고, 지난 1월 16일에 거룩한 교회의 부제로 수품되었습니다.

사제가 되려는 저에게 주님께서는 프란치스코를 통해서 새로운 당신 뜻을 보여주셨고, 그 길을 가는 방법은 바로 수도생활을 통해서 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은 수도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한 것을 기념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신 그리스도이시며, 빛을 주시고 온 세상에 구원을 주신 구세주를 찬미하면서 초를 축복합니다.

초는 세상에 빛을 드러내고 자신의 온 몸을 태워 봉헌합니다. 즉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면서 빛을 전합니다.

봉헌은 사람이나 물건을 성스러운 용도를 위해 따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중에 빵과 포도주를 바치거나,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물질도 봉헌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존경하거나 봉사하기 위해 특별히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봉헌생활의 날로서 특별히 수도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물건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들의 삶을 뜻하는 것이 봉헌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봉헌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수도자들 특히, 본당의 수녀님들께 축하의 인사 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릴 적 사제가 되고 싶었던 열망은 수도회에서 살고 싶은 간절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저를 불러주지 않으셨더라도 내가 주님을 찾고 매달리면 사랑이신 분께서 나를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쇠가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사실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서원 즉 가난과 순명과 정결의 복음적 권고입니다. 이 복음적 권고를 프란치스코는 수도규칙의 시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작은 형제들의 회칙과 생활은 다음과 같습니다.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은 힘이나 이권에 의해 약자가 강자를 따르는 복종이나 무조건적인 맹종과는 달리 완전한 사랑이시고, 완전한 선이시며, 시작과 마침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을 올바로 깨달아 그 믿는 바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는 수도생활을 순종생활이라고 설명했고, 복음적 권고 중에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고,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난을 ‘소유 없이’라고 설명합니다. 라틴어로 ‘Sine proprio’인 ‘소유 없이’는 무능해서 가질 수 없는 빈곤의 측면이 아니라, 본래 주인이신 주님께 되돌려 드리고 나의 것으로는 남겨 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프란치스칸적인 가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의지까지도 주님께 되돌려 드림으로써 가난을 실천한 대표적인 성인으로 기억됩니다. 가난의 탁월성은 주님께 의탁하면서 전적으로 내어맡김으로써 하늘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결은 결혼을 안 하는 독신의 차원을 뛰어넘어서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을 포함합니다. 마치 하얀 도화지에 사랑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적 권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상을 통해서, 활동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은 기도하는 사람이요,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주님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수많은 성인, 성녀들은 대부분 수도자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수도자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리며, 봉헌생활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외아들인 저에게 많은 형제들을 주셨다는 기쁨이고, 거룩한 교회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기쁨이며, 매일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수도복을 입고 죽을 수 있다는 기쁨입니다.

올바른 신앙과 확고한 희망과 완전한 사랑 안에서 삼성동 교우분들과 함께 봉헌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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