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7,11-54; 17/04/09

살다 보면 주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 난 한 평생 살면서 남에게 모질게 대한 적도 없고, 그렇게 뭐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기가 기대했던 만큼 살지 못하는 자신과 남과 비교해 보아 만족스럽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푸념하듯 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이 공평하다고 보십니까? 정직하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습니까?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까? 나쁜 일을 일삼는 사람의 말로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억울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모두 복을 받고 구원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고생하며 살게 되고, 악한 사람이 오히려 선한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현실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어찌 된 일인가? 이런 부정한 현실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 현실에서는 마치 ‘상선벌악’이라는 원칙이 거부되는 듯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이 잘못 살았거나, 죄를 지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시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자 제자들은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우리도 가끔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는 식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상선벌악의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같이, 인과 응보의 법칙도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선하게 살면 상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 전통적인 원인과 결과의 원칙, 즉 인과 응보의 법칙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자기와 자기 자식들, 특히 맏아들과 외아들의 죽음, 후손의 결핍, 고국에 대한 향수, 주위 환경의 박해와 적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조롱과 경멸, 고독과 소외감, 양심의 가책,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친지들과 이웃들의 불성실과 무례함 그리고 자기 동족의 비운 등이 인간 고통의 형태로 나옵니다.

이렇게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고통과 악이 서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고통받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존재적으로 선하다고 규정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회칙 ‘구원에 이르는 고통’ 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은 “왜?”라는 ‘물음’을 던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 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상을 향해 묻지 않고, 세상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그 인간이 지은 죄의 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그 죗값으로 고통을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을 겪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욥기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 고통받는 욥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불의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집니까?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악을 제거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구원자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이란 예언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 4ㄷㄹ. 6ㄷㄹ)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연다고 할 수 있으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고통스러운 수난을 겪으셨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겪으시고,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ㄴ) 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고통관처럼, 주님의 희생제사와 그 구원효과를 믿고 자기에게 닥친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기로 합시다.

인간 고통의 세계는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인간을 발견할 때마다 모든 개인 각자는 고통 속에서 사랑을 증거하도록 ‘직접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느끼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 고통 앞에 ‘멈춰 서서’ 그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천주교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고 더 나아가 이웃의 잘못과 죄로 인한 폐해를 대신 겪고 그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늘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과 내 죄와 직접적인 관련 없이 겪어야 하는 사회의 죄악 속에서 우리의 고통을 주님의 수고 수난에 합치고,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두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배려하며 서로 도우면서, 우리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희생제사를 지낼 때 우리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지 곰곰이 찾아내고, 그 뜻을 우리 삶 속에서 하나씩 실현해 나갑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나해) 마르 15,1-39; 15/03/29

이번에 본당의 성경 공부팀과 성모발현지를 방문했더니, 성모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대통령이나 임금이나 정치 지도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 세례 받아. 그리고 너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 세례 줘!’ 라고 하셨다면, 금방 선교가 이루어졌을 텐데. 아니면, 부자들에게 나타나 ‘너 가진 돈 뚝 떼어서 가난한 이들 구제에 써. 사회복지시설 지어서 어려운 사람들 받아주고 편안하게 살게 해 줘!’ 라고 하셨다면,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큰 혜택이 돌아갔을 텐데. 예수님과 성모님의 방법과 처사가 아쉽다고나 할까, 아니면 세상 물정을 몰라 어리석다고나 할까? 그런데 우리가 그런 분들을 믿고 청하고 있다니, 우리가 어리석은 것인지, 아니면 그분들이 정말 잘못된 것인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성모님은 왜 아무 힘도 없고, 혼자 힘으로는 커다란 영향도 끼칠 수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역사적으로 돌아 볼 때, 지금의 터키 지역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주 무대인 이 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로마의 권세가 펼쳐지는 모든 나라와 지역의 사람들에게 다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교가 커다란 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민족의 침입으로 동로마제국의 터키 지역은 허물어졌고, 그에 따라 그 지역 그리스도교도 없어졌습니다. 권력에 의한 집단 개종은 다른 더 큰 권력에 의해 또 집단개종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전쟁 이후 복구시기에, 성당에서 밀가루를 얻어 먹으며 신자가 되었던, 일명 ‘밀가루 신자’들은 밀가루가 떨어지면서 더 이상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돈과 현세적인 필요를 위해 찾은 종교는, 신앙이 되지 못하고, 또 다른 현세적 필요를 찾아 표류합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올바르고 적절한 방법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교회가 패망과 허망한 결과를 또 다시 겪지 않게 될지를 골몰하며 몸부림을 칠 뿐입니다. 외적인 힘과 현세적인 필요가 아닌, 하느님 사랑체험과 내적 회심에 의한 굳건한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 나왔듯이, 예수님께서는 왕이나 정치 지도자들의 아들이나 부자들의 아들로 태어나시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후에도 헤로데 왕이나 산헤드린 등의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사회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히고 버림받은 목동들과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꿈나무나 유망주나 실력자나 떠오르는 샛별이 아니라, 무지렁이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십자가에서 못박는 배은망덕한 유다인들에게 일갈하시거나, 권능의 힘을 펼치시어 한 순간에 제압하시며,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실 수 있으셨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실패자처럼, 무능력자처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적을 통해 가르치고, 벌도 주시며 당근과 채찍으로 훈육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자신이 대신 죽어주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어처구니 없는 방법인지!

태어나게 해 달라고 청한 적도 없는데 사랑으로 우리를 세상에 내 주시고, 달란 적도 없는데 사랑으로 생명과 이웃과 자연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선물로 주십니다. 급기야는 지금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더 많이 세속적인 것을 얻고 싶어 몸부림치느라 생긴 폐해를 우리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는데, 주님께서는 필요성도 못 느끼는 철부지 우리들을 위해 온 가슴으로 안아주시고 메워주시고 지워주시고 갚아주시려 대신 생명을 바치십니다.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랑의 방식 때문에 사랑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성모님도 당대 정치, 종교, 사회, 문화 지도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한 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당신의 뜻을 이룰 수 있으셨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모든 재원과 자원을 다 동원하여, 가능하면 한 번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최고의 효율적인 결과를 얻도록 기획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참으로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주위에 이렇다 할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하는 별볼일 없는 이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방법과 하느님의 방법은 너무나 차이가 나 보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나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입신양명과 우리가 펼치고자 하는 것을 주님께서 밀어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급기야 우리는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주 하느님을 우리 육신 생명과 사회적 삶의 후원자요 담보자로 격하시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하는 일이 잘 풀려나가면 하느님께서 내 원과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생각하고, 잘 풀려나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내 원과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신관을 가지고 살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잘 되면 자신이 잘 된 것에만 의기양양하고 파티는 열지언정,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거나, 그에 보답하는 의미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잘 안되면, 하느님께서는 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자기를 도와주시지 않느냐고 원망을 하거나,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하느님은 필요 없다.’ 라고 까지 선언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나 하느님 구원사업의 협조자이기를 원치 않거나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아예,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시는지?’,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조차 없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신앙과 영성이나 교리, 교회 정신을 언급하면, 우스개 소리로 치부해 버립니다.

교회의 정신이나 교회법은 존중하고 따라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결혼하여 잘 살려고 하는 것을 가로막는 웬 장애물인가 싶어하는 눈치를 보이고, 항변마저 합니다. 성직자 수도자 성소를 이야기 하면, 어린아이들조차 ‘결혼하고 싶어요.’ 하며, 아예 긍정적인 응답은커녕 진지한 반응조차 드러내지 않습니다. 주일학교보다는 학원을, 기도와 성사와 성실하고 충실한 신앙 생활보다는 일류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이 더 급하고, 더 중요하며, 오히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주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 필요하지, 좋은 천주교 학생과 좋은 천주교 직장인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봉사(직)를(을) 권하거나 희생을 요청하면, 더 바쁘고, 더 급하고, 더 현세적으로 필요한 일들에 기여하기 위하여 돌아서 버립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마음에 담고, 일상에서 실현하며, 주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우리 앞길을 펼쳐주고 보장해줄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주 예수님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십자가상에서 내려오실 수 없고, 예수님을 탐욕과 시기와 질투로 묶고 있는 그 못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목말라하시며 부르짖으십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로 합시다.

오늘 우리를 향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실현하여, 거룩해지기로 합시다.

오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호소에 응답하여, 이 땅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킵시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이사 50,5)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7,11-54; 14/04/13

‘가정축복과 소공동체 반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떤 분이 암판정을 받아 생존 가능성 15%란 말을 들었는데 아직 살아있다고 하시면서 기뻐하셨고, 또 어떤 분은 46세에 판정을 받으셨지만, 1-2년도 아니고 84세가 되는 지금까지 살아계시다며 자랑스러워 하셨고, 어떤 예비신자분도 죽을뻔한 상황에서 무사히 살아났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 납득할 수 없는 주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대단한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사실이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졌다고 깨닫는 일은 더욱 더 기쁘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셔서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주신 분은 앞으로도 쭉 지켜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하느님께 올리던 기도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기리며 예수님께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시편 22,2-3.8-9) 라고 읊조리던 한탄과 하소연으로 시작하는 시편 22장은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멀리 계시지 마소서. 저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생명을 칼에서, 저의 목숨을 개들의 발에서 구하소서. 사자의 입에서, 들소들의 뿔에서 저를 살려 내소서.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시편 22,20-23) 라는 체험에 이어 “세상의 모든 권세가들이 오직 그분께 경배하고 흙으로 내려가는 모든 이들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내 영혼은 그분을 위하여 살고 후손은 그분을 섬기리라. 장차 올 세대에게 주님의 이야기가 전해져 그들은 태어날 백성에게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리니 주님께서 이를 행하셨기 때문이다.”(시편 22,30-32) 라고 희망과 확신에 넘친 노래로 종결됩니다.

2000년 전 뚜렷한 혐의도 없이, 이렇다 할 재판도 없이, 십자가상에서 생을 바치신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단지 감사드릴뿐만 아니라, 기쁘고 힘이 샘솟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우친다면,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과 영원에 대한, 미래와 완성에 대한 희망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말리라는 확신으로 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희망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차서 힘차게 살아나가는 예언자의 목소리를 들어 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4-7)

우리에게는 일생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와 주님과 교회와 가정과 사회공동체가 나에게 짊어져주기를 바라며 안겨준 십자가와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으로 대신 짊어지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예기치 않게 그리고 심지어는 억울하게, 갑자기 고난과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힘이 없어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 고난과 박해를 주님의 십자가로 여겨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 역시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수난하시는 노고에 참여하는 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우리를 새 생명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이며, 우리 구원을 향한 희망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주님께서 심어주시고 펼쳐주시는 새 생명에로의 부르심을 깨우쳐 봅시다. 고난과 죽음 앞에 처해진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그 사랑에 감사하며 새로운 생명에로 향한 희망을 간직해 봅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부활을 꿈꾸는 오늘, 나와 우리 인류의 구원과 완성인 희망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첫걸음을 시작합시다. 주님과 함께!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다해) 루카 23,1-49: 2013/03/24

언젠가 한 번 ‘부부 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부부가 하는 대답이 ‘용서’라는 말이었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무너질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계속 부부로 살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용서는 비단 배우자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만 말하기 어렵습니다. 기대와 신뢰가 무너지는 마당에 배우자에 대한 육적인 사랑이 어찌 용서하는 이유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어쩌면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 놓은 하느님 사랑과 그 사랑에 힘입어 선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의 자기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자문해 봅니다. ‘왜 용서해야 하는가?’

그럼 먼저 용서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 그 사람과 관계가 멀어지거나 원수지게 됩니다.

둘째, 내 마음이 멍들게 됩니다.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보기 싫어 숨거나 그를 피해 돌아가게 되고, 그를 보면 불편하고 가슴 속에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리고 또 그런 유형의 사람만 보면 가슴이 뛰고, 또 당할까 봐 긴장하게 됩니다.

셋째, 내 영성 생활이 파괴됩니다. 내 마음 속에 증오와 원망만이 들끓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라도 할라치면, 그 사람이 주님과 내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넷째, 악의 포로가 됩니다. 내 안에 미움과 증오라는 악이 생겨나고, 아니, 악이 나를 노예로 삼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내 안에서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선과 사랑이 밀려나가고 빼앗기게 됩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나를 괴롭히도록 충동질시키고 사주한 악은 나에게 그를 향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도록 충동질하고 사주하여 나를 악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다섯째,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을 한 그 사람도 내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 나빠지게 됩니다. 그런 그를 보며 저러다 더 나빠지면 어떻게 되나 싶어 걱정도 하게 되지만, 속으론 쾌재를 부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나도 일정부분 악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악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됩니다.

악은 이런 식으로 악을 저지르는 사람과 악을 악으로 대적하는 사람들을 통해 죄악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악은 인간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빼앗기게 하고, 인간 상호간의 신뢰 관계를 상실케 하며, 우리 스스로를 불편케 하여 좋은 인성을 파괴합니다.

이러한 인간 세계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자식들이 서로 싸울 때, 찢어지는 마음을 움켜진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치 걸러 두 치라고 우리는 인간 관계가 너와 나지만, 그래서 나에게 잘못한 상대가 잘못 되도 괜찮고 오히려 고소하기도 하지만, 하느님도 반목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처럼 아파하시고 남처럼 그냥 넘어가지 못하십니다.

부모와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악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파멸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 대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고자 합니다. 주님 최고의 사랑과 노고로, 이른바 주님의 모든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만들어 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노예가 되어 파멸되는 것을 두고 보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내시기로, 태초에 우리를 만드실 때 심어주신 하느님의 모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를 우리를 구하는 죄값으로 대신 삼으시고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도 용서받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용서를 받았을 때 어땠습니까?

여러분이 용서를 해주었을 때 어땠습니까?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사람 때문에 상처 난 여러분의 마음을 치유 받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사람도 용서받고 치유되어 새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가 죄악에게서 해방되어, 주님의 나라에서 새 삶을 사시겠습니까?

용서를 청하지 않고, 용서를 해주지 않는 사람은 악마에게 사랑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진정으로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악에게 상처입고 손상된 마음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회복한 사람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을 쳐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나해) 마르 15,1-39; 12/04/01

어떤 사람이 새로 들어와서는 아주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썩 반가워하지 않더랍니다. 정반대로 그를 경계하고 그와 함께 일하기를 꺼려하더랍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바라보기에는 그가 자신들의 일거리를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비교되어 자신들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결과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 성실하고 탁월하면 박수를 치고 칭찬해 주기 보다는, 왠지 모르게 거부감을 느끼고 저 선수 언제 실수라도 한 번 안 하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끔 나를 기준으로 삼아 나보다 낫거나, 잘 하거나, 높은 사람을 불편해 합니다. 더군다나 나를 존중해 주고,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 감사와 존중을 표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착각하고, 자신을 존중해 주는 상대에게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우습게 여기거나 편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기까지 합니다.

악마가 하느님께 물었답니다. ‘하느님, 그렇게 자꾸 사람들을 용서해 주면 사람들이 고마워할 듯싶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은 그래도 되는 것인 줄 알고, 바늘 도둑 소 도둑 되듯 점점 더 나쁜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보다는 벌을 주는 것이 더 교육적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빌라도 앞에 잡혀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시기와 증오에 가득 차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서는 마치 자신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고 여겨 아무렇게도 해도 된다는 듯이 조롱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이런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면서 예수님께서 부르짖으십니다.

존경과 감사의 정을 한 몸에 받으셔야 할 예수님께 오히려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 백성들 앞에서 주님께서는 그 답답함과 아쉬움을 뒤로하며 아버지께 시편 22장을 천천히 읊기 시작하십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

저희 선조들은 당신을 신뢰하였습니다. 신뢰하였기에 당신께서 그들을 구하셨습니다.

당신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고 당신을 신뢰하여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이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

저를 보는 자마다 저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어 댑니다.

“주님께 맡겼으니 그분께서 그자를 구하시겠지. 그분 마음에 드니 그분께서 구해 내시겠지.”

그러나 당신은 저를 어머니 배 속에서 이끌어 내신 분 어머니 젖가슴에 저를 평화로이 안겨 주신 분.

저는 모태에서부터 당신께 맡겨졌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하느님이십니다.

제게서 멀리 계시지 마소서. 환난이 다가오는데 도와줄 이 없습니다.

수많은 수소들이 저를 에워싸고 바산의 황소들이 저를 둘러싸

약탈하고 포효하는 사자처럼 저를 향하여 입을 벌립니다.

저는 물처럼 엎질러지고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

저의 힘은 옹기 조각처럼 마르고 저의 혀는 입속에 들러붙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죽음의 흙에 앉히셨습니다.

개들이 저를 에워싸고 악당의 무리가 저를 둘러싸 제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제 뼈는 낱낱이 셀 수 있게 되었는데 그들은 저를 보며 좋아라 합니다.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께서는 멀리 계시지 마소서. 저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생명을 칼에서, 저의 목숨을 개들의 발에서 구하소서.

사자의 입에서, 들소들의 뿔에서 저를 살려 내소서.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야곱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께 영광드려라.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아, 주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

큰 모임에서 드리는 나의 찬양도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니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서원을 채우리라.

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고 그분을 찾는 이들은 주님을 찬양하리라. 너희 마음 길이 살리라!

세상 끝이 모두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 민족들의 모든 가문이 그분 앞에 경배하리니

주님께 왕권이 있고 민족들의 지배자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권세가들이 오직 그분께 경배하고 흙으로 내려가는 모든 이들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내 영혼은 그분을 위하여 살고

후손은 그분을 섬기리라. 장차 올 세대에게 주님의 이야기가 전해져

그들은 태어날 백성에게 그분의 의로움을 알리리니 주님께서 이를 행하셨기 때문이다.”(22,1-32)

주님, 저희는 주님의 강인함과 굳건함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전적인 의탁과 신뢰로 오늘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아옵니다. 저희를 주님 사랑 안에서 강건하게 해 주시고, 복음의 길을 따라 옳고 좋은 일을 하는데 망설이거나 약해지거나 포기하지 않게 하시며, 언제나 올곧은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성실하고 진지하게 주님의 일을 수행하며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6,14-27,66; 11/04/17

살다 보면 주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 난 한 평생 살면서 남에게 모질게 대한 적도 없고, 그렇게 뭐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기가 기대했던 만큼 살지 못하는 자신과 남과 비교해 보아 만족스럽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푸념하듯 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이 공평하다고 보십니까? 정직하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습니까?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까? 나쁜 일을 일삼는 사람의 말로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억울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모두 복을 받고 구원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고생하며 살게 되고, 악한 사람이 오히려 선한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현실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어찌 된 일인가? 이런 부정한 현실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 현실에서는 마치 ‘상선벌악’이라는 원칙이 거부되는 듯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이 잘못 살았거나, 죄를 지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시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자 제자들은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요한 9, 2). 우리도 가끔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는 식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상선벌악의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같이, 인과 응보의 법칙도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 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선하게 살면 상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 전통적인 원인과 결과의 원칙, 즉 인과 응보의 법칙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자기와 자기 자식들, 특히 맏아들과 외아들의 죽음, 후손의 결핍, 고국에 대한 향수, 주위 환경의 박해와 적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조롱과 경멸, 고독과 소외감, 양심의 가책,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친지들과 이웃들의 불성실과 무례함 그리고 자기 동족의 비운 등이 인간 고통의 형태로 나옵니다.

이렇게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고통과 악이 서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고통받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존재적으로 선하다고 규정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회칙 ‘구원에 이르는 고통’ 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은 “왜?”라는 ‘물음’을 던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 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상을 향해 묻지 않고, 세상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그 인간이 지은 죄의 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그 죗값으로 고통을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을 겪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욥기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 고통받는 욥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불의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집니까?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악을 제거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구원자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이란 예언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이사 53, 4ㄷ.ㄹ. 6ㄷ. ㄹ).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연다고 할 수 있으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고통스러운 수난을 겪으셨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겪으시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고통관처럼, 주님의 희생제사와 그 구원효과를 믿고 자기에게 닥친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구원 사업에 참여하기로 합시다.

인간 고통의 세계는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인간을 발견할 때마다 모든 개인 각자는 고통 속에서 사랑을 증거하도록 ‘직접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느끼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 고통 앞에 ‘멈춰 서서’ 그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천주교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고 더 나아가 이웃의 잘못과 죄로 인한 폐해를 대신 겪고 그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늘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과 내 죄와 직접적인 관련 없이 겪어야 하는 사회의 죄악 속에서 우리의 고통을 주님의 수고 수난에 합치고,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두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배려하며 서로 도우면서, 우리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희생제사를 지낼 때 우리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지 곰곰이 찾아내고, 그 뜻을 우리 삶 속에서 하나씩 실현해 나갑시다.

아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6, 14-27, 66; 05/03/20

우리는 가끔 살면서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릴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오해와 시기질투에 시달릴 때도 있다. 그래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내가 한 것처럼 소문이 날 때가 있고, 내가 하고자 했던 방향과는 정 반대로 사건과 상황이 흘러가기도 하고, 사람들의 의심과 질투 속에서 내가 하려는 일이 아주 힘들게 진행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그동안 자신이 헌신적으로 일해 왔던 노고가 억울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쏟아왔던 정열과 애정이 아깝고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의례,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도움을 주면 주었지 손해를 끼친 것은 없는데, 나는 나 나름대로 하느라고 했고 또 도와주느라고 고생했는데, 나는 한 평생 희생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것도 다 감수하고 살아왔는데, 나를 이런 식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 이렇게 끝나버릴 수 있을까?

특별히 부부간에 그리고 가족과 친지간에는 그동안 아니 본능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리고 상실되어 버리면서 그 배신감과 허망함의 아픔이 배를 더한다. 그리고 생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봉사활동 분야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다시는 보고도 싶지 않고, 다시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고, 그런 일엔 끼고도 싶지 않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약해지고 지쳐서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자학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폐쇄의 경우에는 자폐아처럼 사람들을 피해 숨거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 홀로만의 세계로 들어가 스스로를 격리하고 은폐된 삶을 살게 된다. 아니면, 복수심에 불타게 된다.

결국 어둠의 세력에 자신을 빼앗기고 만다.

어둠을 걷어내고 빛을 가져오기 위해 헌신했지만, 어떻게든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해왔지만, 악과 어둠의 농간에 의해 그의 일도 중단되고, 그 자신도 빛에서 어둠의 세력에게 휘말리게 되고, 그 영혼마저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기대하고 의지했던 사람들이 빛을 향해 걸어가면서 겪을 수 있는 최고의 유혹이요 함정이다.

지난달까지 한국에서는 ‘마더 데레사’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 영화에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해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도 만들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도와줘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어라.”

오늘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베푼 기적과 사랑의 대상인 인간들로부터 철저히 버림 받으신다.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

어떻게든 하느님의 율법의 본 뜻을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가르치며 설득했던 종교지도자들...

어떻게든 하느님의 감추어진 진리와 사랑을 깨우치도록 가르치며 몸소 양성했던 제자들...

어떻게든 하느님의 사랑을 기적으로 드러내면서까지 가르쳐주고 고쳐주려고 했던 백성들...

그들 모두 예수님께 등을 돌리며 죽이려고 덤벼드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좌절은 얼마나 컸을까? 그리고 그 고통 앞에서 예수님의 선택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힘이 없어 포기하고 만다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벌하고도 남을만한 힘이 있으면서도, 그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손아귀에 자기를 맡기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실패와도 같은 현실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도 않으셨고, 예수님의 사명을 억지로 이루기 위해 기적의 힘을 사용하지도 않으셨다. 아니 그 사명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줌으로써 죽고 마는 사랑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선택하셨다.

악마는 예수님께서 사명을 포기하고 실패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시기와 질투와 원망으로 들끓게 했고, 예수님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모욕을 안겨주었다. 악마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실망하고 분노해서 그 사명을 포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보복하고 벌하기 보다는 백성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너그럽게 헤아려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 하느님께 대신 용서를 청하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 34)

그리고 또 악마는 광야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마태 4, 6)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했듯이 십자가 위에서도 유혹한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 40)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말고.”(42)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 보시라지.”(43)

그리고 악마는 자기 뜻대로 예수님을 제거했는데도 여전히 두려워 또 다른 일을 꾸민다. 3일 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했으니 3일까지는 무덤을 잘 지켜야 한다고.(63-63 참조) 악마는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악마는 언제나 불안한 그래서 어두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에 악이다. 희망도 탈출구도 없기에 악마는 어둠이요 악이다.

악마가 겪은 예수님은, 어둠과 죽음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귀한 뜻을 포기하거나 자기를 챙기거나 생명을 구걸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고, 또 예수를 보내신 하느님께서 뒤에 버티고 계셨다. 그래서 악마는 결코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악마가 계획한 대로라면, 예수님이 분노로 들끓던, 실망으로 자책하던, 불신으로 사명을 포기하던 예수님의 마음속에 악을 심어 악마가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예수님을 지배했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악을 심지 못했고 그래서 사로잡지도 못하고 결국 지배하지 못해 불안한 것이다.

악마에게는 승리도 승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에 가까웠다. 미움과 과오로 예수님에게 죽음을 선고한 악의 세력에게 예수님께서는 악으로 대항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악마의 계략이 녹아난 것이다. 악마의 계략대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로 끝나지 않고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으로 승화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54)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신앙

죽음으로 꺼지지 않는 희망,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예수님의 사명이 오늘 우리 교회에 맡겨져 있다.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커다란 사랑을 심어주시어

내가 분노와 실망과 포기와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를 봉헌하며

주님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도 구원을 향한 희생의 길을 따라가기로 하자.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다해) 루가 22, 14-23, 56; 2004/04/04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상영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등장하는 폭력 때문에 답답하고,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처참하리만큼 커다란 고통을 겪으시며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수난이 우리의 마음속으로만 그리는 단순한 고통과 수난이 아니라 실제로 당하신 수난임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리의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유다인들의 문화 즉 유다교 신앙 속에서 바라볼 수 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처음 알게된 사건은 출애굽이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될 수는 없었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을 믿기 시작했다. 즉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어려운 노예살이를 굽어보셔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을 노예로 부려먹던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을 내보내려고 하지 않자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풀어줄 때까지 한 가지씩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셨다. 그 재앙이 아홉 번째에 이르러도 이스라엘을 내놓지 않자, 하느님께서 열 번째는 이집트의 맏배인 동물의 첫 번째 새끼와 사람의 맏아들을 치려고 하셨다. 그 열 번째 재앙에서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집안을 구분하기 위해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두도록 했다. 죽음의 천사가 왔을 때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안은 이스라엘의 식구라는 것을 알고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쳐감으로써 이집트의 맏자식들만을 치셨다. 이렇게 죽음의 천사가 지나쳐가는 것을 과월절이라고 했고 영어로는 패스 오버(pass over)라는 말을 써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했다(출애 12장).

또한 이스라엘에는 다른 민족들과 다른 특수한 형태의 제사가 있었는데 그 것이 바로 속죄제사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내리신 속죄제사의 규정을 따르면,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씻으려면 그 죄를 지은 사람이 동물을 잡아 자기 죄를 씌워서 그 동물의 피를 속죄판에 뿌리면 그 사람의 죄가 씻어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것이 레위기 4장과 16장에 나오는 속죄의 제사였고, 이스라엘의 죄를 씻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두 가지 신앙 문화 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것이 자신의 죄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죗값을 속죄하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아주 쉽게 이해된다.

예수님께서도 생전에 이미 이에 대한 언급을 하셨다.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 28; 마르 10, 45)라고 하셨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 27-28; 마르 14, 24; 루가 22, 20)라고 미리 당신 죽음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셨다.

요한 사도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 10)라고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씻고 인류를 죄악에서 구하시기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요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려 예수님께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 29)고 밝히도록 했고, 또한 19장 31절에서 예수님 죽음의 시간을 과월절 양을 잡는 준비일이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출애굽과 연관하여 예수님을 단순히 죽음으로 그치고 말 인류의 운명에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전했다.

그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과거 2000년 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주시고 마셨을 뿐 지금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루가 복음사가와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도 고린토 전서 11장에서 '주님의 성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 23-25)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인한 속죄의 제사는 그 한 번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지만 그 때의 그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는 이들을 통해 계속 된다는 것을 말했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이어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 26)라고 명했다.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하셨습니다."(히브 9, 1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 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28)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유일무이하고 항구한 희생제사로 선포했다.

결국 교회는 주님께서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희생을 오늘도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재현하며, 그 속죄의 신비를 오늘 우리는 교회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수난을 겪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왜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며,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죄로 인해 수난당하시고 죽으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죄의 부당함과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의 죄를 반성하고 우리 죄로 인한 사회악의 확산과 연대를 끊기 위해 우리 사랑의 행위로 보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우리 사랑의 보속은 주님 십자가의 효과를 이 세상에 확산시키는 데에 공이 될 것이며 주님 수난의 신비를 열매맺게 하는 데에 우리를 참여케 할 것이다.

우리를 구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사랑의 보속으로 구원을 위한 주님의 희생제사를 계속하기로 하자.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나해) 마르 14, 1-15, 47; 2003/04/13

후세인 동상이 철거됐다. 사후에 후손들이 존경해 세우는 것이 동상이건만, 생전에 자기 손으로 세우는 오만한 독재자들이 사라지는 듯해 후련하다. 그러나, 있을 땐 그 앞에서 아부하고 돌아서면 욕하는 세상사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오늘날엔 누구도 책임을 지는 장(長)자리에 앉기를 싫어한다. 요즘에는 내신성적에 가산점을 준다고나 해서 그나마 아이들이 반장자리라도 앉으려하지 얼마 전에는 없었다.. 잘하면 그만이고 못하면 욕을 먹고 책임지고 물러나서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수님도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사람들의 탐욕을 다 들어주지 못하자, 사람들의 원망을 사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당신이 만든 세상이건만, 세상 사람들의 죄를 책임지고 세상에서 물러나야만 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인터넷에 한 신부님의 푸념 섞인 글이 게시됐다. 이 글은 비단 오늘날 사제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회에서 작게나마 책임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의 모습인 것 같아 옮겨 본다. "신부란 이래저래 욕을 먹어가며 살아야 하는가 보다. 강론을 길게 하면 성인군자 같다 하여 야단이고, 짧게 하면 준비하지 않았다고 야단이다. 목소리를 높이면 강론 시간에 야단친다 불평이고, 은근한 목소리로 강론하면 못 알아듣겠다 불평이다. 화를 내고 야단을 치면 무슨 신부가 저따위냐 쑥덕거리고, 화를 내지 않으면 얕보고 그의 말을 듣지도 않는다. 늘 집에 있으면 가정방문 하지 않는다 비난하고, 가정방문 하느라 사제관을 비우면 집에 붙어있지 않는다 비난한다. 희사금을 내라하면 신부가 돈만 밝힌다 야단이고, 그래서 아무소리도 하지 않으면 도대체 일을 하지 않는다 야단이다. 고해성사 때 친절하게 지도하면 너무 길게 훈계한다 짜증내고, 간단하게 짧게 하면 성사 주길 싫어하는 신부라고 못박는다. 차를 굴리면 세속적 인물이 되어간다 비난하고, 그렇지 않으면 융통성이 없는 신부라고 비난한다. 성당이나 사제관을 수리하기 시작하면 돈 낭비한다 야단이고, 그냥 두면 망가져 가는 성당을 그냥 내 버려 둔다고 야단이다. 신부가 젊으면 경험이 없다하여 훈계하려 들고, 늙었으면 어서 빨리 은퇴하라 야단이다. 어느 여자와 웃으며 이야기하면 그 여자만 좋아한다고 야단이고, 무뚝뚝하게 그냥 이야기하면 재미없는 신부라고 펌한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모두가 아는 척 하고 인사 하지만, 죽으면 아무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사제의 외로운 인생인가 보다."

오늘 나는 이 세상에서 죽이는 사람인가? 아니면, 죽어주는 사람인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13절)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6, 14-27; 02/03/24

오늘은 주님께서 당신 성도인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환영하던 백성들은 곧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외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백성들의 죄악과 원망을 한 몸에 다 짊어지시고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하루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기보다 급하게 하루 일과부터 챙기다보니 아침기도를 거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도 하루 종일 시달리면서 지쳐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밥 먹을 것 다 먹고 텔레비죤이나 신문은 보면서도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저녁 기도를 빼먹기도 합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바쁘지도 않은데 자신의 편의와 게으름 때문에 스스로 피치 못할 사정이라고 자위하며 주일미사마저 궐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마땅한 흠숭을 드리지 못하고 외면하고 거부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되고 힘들 때마다 자기 탓인줄 알면서도 주님을 원망하고, 그 원인을 다른 어느 누구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미워할 때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상의 관습과 관행이라고 자위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변하면서 부정을 저지르고 사회 악과 타협할 때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세례를 받고 다짐을 하고 매번 새로이 태어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말씀을 실현해야 할 순간에 주님을 외면하고 일반인과 똑같이 분노와 혼란, 미움과 아귀다툼, 시기와 질투 등에 휩싸일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앞에서 외로이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6절)

이제 우리의 현실적인 이기와 편의로 빚어진 죄와 악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또 주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계속 원망과 탐욕으로 붙들고 있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며 고백합시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 큰사랑으로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게 해주시고 새로 나게 해주십시오. 아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다해) 루가 22, 14-23, 56; 2001/04/08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신자들과 복음을 나눌 때면 신부가 나눌 복음의 내용을 일일이 다 설명한 다음 신자들이 복음을 자기 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그 복음에 맞는 설문을 만들어 제시해주고 또 잘 이야기 하도록 유도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성서는 교회만이 해석할 수 있다'는 원칙때문에, 신자들도 성서는 신부들만이 아는 것으로 생각해, 성서만 들이대면 쩔쩔매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92년 경에 서울대교구는, 복음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대형교회를 피하고, 교회를 지역별 소공동체로 나누어 그 지역에 함께사는 신자들끼리 복음을 실현하도록 하는 '소공동체로 이루어진 본당 공동체' 사목방침을 정했다. 이는 전세계 교회의 흐름과 아시아 주교회의의 결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서울교구는 여러 가지 복음 나누기의 방법론 중에서 우선 '복음 나누기 7단계'를 도입했다.

사제로서 이 '복음나누기 7단계'를 처음 접했을 때는 거부감 그 자체였다. 사제들은 성서본문을 대할 때, 그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생활환경과 신학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역사비판적인 해석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한다. 그리고 연구한 것을 적어도 1시간 이상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그 뜻을 헤아리고 난 후 현실 삶에 적용하는 과정을 밟도록 신학교에서부터 교육받아왔다. 그래서 성서본문에 나타난 주님 말씀의 의미와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는다'던지, 점잖게 앉아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그 내용을 음이해야 하는데 '세 번씩 외쳐야 한다'던지, 묵상한 내용을 깊이 간직하고 실현해야 하는데 그것을 '동료들과 나누어야 한다'던지 하는 방법들이 어색하다 못해 거북했다.,

그런데 신자들에게 복음나누기 7단계의 방법대로 복음을 나눠보라고 했더니 너무나도 쉽게 복음 속으로 들어갔고, 의외로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에 자연스럽게 적용했다. 성서신학자들에게는 잘 안 맞지만 성서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신자들에겐 너무나 쉬운 방법이었다. 또 완전하진 않지만 꾸준히 진실되이 복음을 생활해가는 신자들도 보았다. 다른 이들에게 자기 삶을 드러내야 하고, 사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 가는데, 주님의 말씀을 생활화하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또 강의를 듣고 연구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바로 형제들과 함께 복음을 현실에 적용해 하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 8)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나해) 마르 14, 1-15, 47(15, 1-39): 2000/04/16

"십자가에 못박으시오!"(15, 13) 예수를 향해 군중들이 외친 이 말마디는 오늘도 우리의 가슴속에서 메아리 치고 있다. 감히 겉으로는 말을 못해도 속으로는 무수히 저주하고 상상으로 난도질하면서 외쳐왔던 말이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15, 14) 이런 소리를 듣는 이들은 누구인가? 왜 그들은 그런 욕을 먹는가? 사회에서 공적인 역할을 맡는 이들이 공적인 일을 사적으로 처리하거나 사리사욕을 앞세워 처리할 때 이런 욕을 한다. 또 우리를 이용하고 괴롭힌 이들에게도 이런 욕을 한다. 처단해 버리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일을 잘못 처리하신 분도 아니고 인류를 이용하고 괴롭히신 분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욕을 받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실망시킨 사람에게도 이런 욕을 한다. 그들은 우리의 분노와 시기 질투의 희생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고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들에게 이런 욕을 한다. 예수님은 능히 백성들의 모든 바램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처럼 보이는 데 정작 백성들의 욕구를 채워주시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과 백성들이 바라는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려고 하신 반면에 백성들은 기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과 안녕을 구한 것이다.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기적만 베풀면 자기들이 일 안해도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편안히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조금 맛만 보여주고 더 주지도 않으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싫었다. 정치가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을 로마와 백성들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했고, 종교인들은 백성들에 대한 자기들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밥벌이가 끊어질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런 메시아보다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 말을 안 들어 주고 내게 이익이 못 될 바에야 오히려 걸림돌만이 된다는 이야기다. "대사제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빠를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11절)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반복된다. 예수님이 우리 삶에 신경쓰이는 장애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 삶에 진정 희망을 가져다주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신가? 어떻게 선택하시렵니까?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6,14-27,66 : 99/03/28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뵙고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27,54)하고 고백합니다. 점령군들이 자기들이 점령한 지역의 백성들을 아주 우습게 볼텐데, 너무 뜻밖의 반응입니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추앙이 아니라, 오히려 배척을 받아 죽어가는 한 인간에게서 어떤 '하느님성'을 발견했을까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장면만을 살펴봅시다. 빌라도 로마 총독이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11)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렇다 아니다 하고 딱부러지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것은 네 말이다."(11)라고 다른 차원에서 대답하신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묻는 질문에도 예수님께서는 "총독이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14) 예수님은 자기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로마 총독 앞에서 살려달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재판부의 권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당당하고 위엄을 지니신 분으로 비쳤다.

백인대장은 총독 빌라도가 그에게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죄목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군중에게 끌려온 것이 그들의 시기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18)고, 그를 죽이는 일을 아주 꺼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너희가 맡아서 처리하여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24)

그런데도 예수는 끌려가면서도 사형이 마치 자기의 일인 것마냥, 자기가 겪고 넘어가야만 하는 숙명처럼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 어떤 저항의 몸짓이나 저주의 말마디조차도 던지지 않았다. 또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떳떳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단지 한 마디. 하느님께 부르짖을 뿐이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46) 그런데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시작되는 이 시편 22편은 처음에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로 마친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찬미하며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방인들에게는 거룩하게까지 보였다. 그리고 덧붙여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자, 자신들이 죽인 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셨기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감사드리고 청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생애의 구체적인 순간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셨기에 여러분은 주님 앞에 나와 계십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예수에게서 구원의 은총을 받으시고 인생의 빛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다해) 루가 22,14-23,56 : 98/04/05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가르쳐주십니다. 최후의 만찬 때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먹이기 위해 밖에서 갖은 고생을 다해 먹을 것을 마련해 주듯이 당신의 몸과 피를 다 쏟아 부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성체성사를 세워주시고, 또 자식에게 잔소리하는 어머니처럼, 겸손하고 믿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하시고 미리 일어날 일까지 언급하시면서 그 대비책까지도 알려주신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루가 22,32) 또 어둠에 앞서 준비시켜주시고, 기도하시면서도 주님의 목숨보다는 우리 인간들의 구원을 생각하여 수난의 잔을 받겠다고 하시며 아버지께 그 잔을 받을 힘을 달라고 청하신다. 그리고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고쳐주시고, 이리 저리 책임을 회피하려는 대사제들과 빌라도와 헤로데에게 겁 한번 주시지 않으시고, 자기를 위로하는 여인들을 거꾸로 걱정해주신다. 심지어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23,34)

예수님은 진정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 "이 정도는 되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하고 그 모범을 보여주시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오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희망을 가져도 될 만큼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사순절엔 악마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희망을 잃고 포기하도록, 사랑을 중단하도록 갖가지 나쁜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우리가 얼마만큼 견딜 수 있나 시험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다가서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을 더해나가도록 합시다. 참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할만한 분이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오른쪽에 달려있는 죄수가 말합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가 23,42) 이 사람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곧 죽으면 그만인데, 그 죽어 가는 사람에게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그는 예수에게서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꽃을 발견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의 양식인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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