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대축일

(가해) 요한 20,19-23; 17/06/04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난 4월 16일 부활대축일에 99분의 예비신자와 69분의 쉬는 교우를 합하여 168분을 성당에 모셔오기로 다짐하며 주님께 봉헌했습니다. 이어서 우리 본당 신자들이 주님 사랑 안에서 화합과 일치하고, 우리가 봉헌한 예비신자 및 쉬는 교우들을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선교분과와 구역분과 주관으로 전신자가 고리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선교 노력을 어여삐 보아주시고 이분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청하며, ‘본당의 친교와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묵주의 고리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7일(토) ‘성모의 밤’을 계기로 36일간의 청원기도를 마치고, 지금은 오는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까지 36일간의 감사기도를 매일 바칩니다.

다음 주일인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제가 피정 들어간 사이에, 전 서울대교구 사목국장이셨던 정월기 신부님으로부터 선교 특강을 받음으로써, 지금까지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우리의 선교 역량을 더욱 높일 예정입니다. 그리하여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11시 미사에 거행할 예비신자 환영식에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허락하신 예비신자들을 우리 주님 앞에 모셔오기로 합시다.

아울러 우리의 선교 역량을 불태우는 이 시기에 6월 20일부터 7월 23일까지 진행되는 초등부 어린이들의 ‘첫영성체 교리’에도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특별히 올해부터는 서울대교구의 다른 많은 본당들처럼 어린이, 어머니, 아버지 반을 운영하게 되오니, 어린이들의 첫 영성체를 기념하여 부모님과 온 가정이 신앙을 쇄신하고 한 층 더 성화되는 노력을 기울여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삶

우리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남들보다 물질이 많지 않거나 신분이 높지 않아도, 주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도 행복하게 삽니다. 또한 그 믿음으로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고 이웃과도 사이 좋게 지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교가 됩니다. 구역미사에 다녀보면 많은 신자들이 자기 집 주인이나 자기 옆집에 좋은 천주교 신자가 있어서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는 증언을 듣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그러므로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활동

그런데 가끔은 우리가 좋게만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움직이는 경계 너머에 있어서 만나고 접촉할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도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그렇기에 선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문화 안에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남들이 나의 좋은 점을 알아서 따라올 때까지 이러저러한 것을 요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사양하고 기다리는 것, 아니 자신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뭔가 모자라거나 점잖지 못하거나 다소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대중들의 사고와 선입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름답고 효과적인 방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14.17)

또 다른 문제는 진정 내 삶이 다른 이들이 나를 보고 주님을 믿고 따라올 정도로 그렇게 모범적인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네’라고 답하기도 어렵고, 앞으로도 그렇게 모범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평생 인격적으로 더욱 더 잘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지만, 언제나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부족한 모습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이 부족한 것이지 주님이나 복음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나는 완전하지 못해도 내가 믿고 모시는 주님은 온전한 분이시니 온전한 분께 믿고 맡기며 말로라도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선교는 성령의 활동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의 선교 활동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방인 선교의 선구자인인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6-27)

그리하여 우리가 매 순간 다 잘하고 모범적이지 않아도,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몸소 활동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세치 혀와 병든 몸뚱어리도 주님의 자랑거리로 삼아주시고, 우리에게 하느님을 설명하고 전하도록 맡기셨음에, 너무나도 부끄럽고 송구스럽지만 황공하게도 우리에게 주님을 대신할 역할을 주셨으니 진심으로 감사드릴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우리는 단지 도구일 뿐이고 주님께서 몸소 움직이시고 활동하시니, 선교의 활동을 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원하시는 방법대로 열매 맺어주시기를 주님께 의탁합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아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고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청합니다.

‘주님,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며, 저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저희를 부르셨으니, 저희의 선교열정을 어여삐 보아주시고, 성령을 보내주시어 몸소 저희의 활동을 열매 맺어, 저희가 감당할 만큼만 모아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아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성령강림대축일

제49차 홍보주일 교황 담화

사랑의 은사 안에서 탁월한 만남의 자리인 가정의 소통

(나해) 요한 20,19-23; 15/05/24

가정은 교회의 깊은 성찰의 중심 주제이며, 두 차례의 세계주교대의원 회의, 얼마 전에 개최된 그 임시 총회와 오는 10월에 있을 정기 총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가정은 무엇보다 우리가 소통을 배우는 첫 자리입니다. 이에 초점을 맞추면 좀 더 참되고 인간적인 소통을 할 수 있고 가정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장면의 복음 구절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루카1,39-56 참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1-42).

이 장면은 무엇보다도 소통이 몸의 언어와 밀접하게 결부된 대화임을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에 가장 먼저 응답한 것은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기뻐 뛰노는 아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기쁨은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배우는 것으로, 모든 소통의 원형이며 상징입니다. 우리를 맞아들이는 어머니의 태는 경청과 신체적 접촉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의 첫 ‘학교’입니다. 이는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받는 환경 속에서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안심하며 바깥세상과 친숙해지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아주 친밀하면서도 아직은 서로에게 낯선 두 인격적 존재의 이러한 만남, 약속들로 가득 찬 만남은 우리가 처음 경험하는 소통으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경험입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난 뒤에도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태’ 안에 있습니다. 그 태는 바로 가정입니다. 서로 관계를 맺는 여러 사람들로 이루어진 태인 가정은 “우리가 서로의 차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곳”입니다(「복음의 기쁨」, 66항 참조). 가정 구성원들은 성별과 세대 차이가 있지만 그들 사이에 유대가 있기에 서로를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폭이 더욱 넓어지고 연령층이 더욱 다양해질수록, 우리 삶의 환경은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우리는 유대를 통하여 말을 배우고, 말을 통하여 유대를 강화합니다. 우리는 말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을 전해 받았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모국어’, 우리 조상들의 언어를 배웁니다(2마카 7, 25.27 참조). 우리보다 앞선 이들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가 생명을 낳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우리는 받았기 때문에 줄 수 있습니다. 가정이 그 안팎으로 소통을 나누는 능력의 중심에 이러한 선순환이 있습니다. 더욱 일반적으로 이는 모든 소통의 전형입니다.

‘앞서 있는’ 이러한 유대의 체험으로 가정은 소통의 가장 기본적 형태인 기도를 전수하는 자리가 됩니다. 부모가 갓난아기를 재울 때, 종종 하느님께 그들의 아기를 보호하여 주시도록 간청하며 맡깁니다. 아이가 좀 더 자라면 부모는 아이와 함께 단순한 기도를 드리며 다른 사람들, 조부모, 친척,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 그리고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이를 마음속에 떠올립니다. 우리 대부분은 소통의 종교적 차원을 가정에서 배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거저 주는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에게 힘이 되며 동행하는 능력,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알며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함께 웃고 우는 능력을 키웁니다. 서로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들의 경우에 특히 그러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소통의 의미를 곁에 있음의 소중함을 깨닫고 서로 더욱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다가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거리를 좁히면 우리는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인사말과 아기의 기쁨에 찬 태동은 엘리사벳에게는 축복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아름다운 마리아의 노래에서 마리아는 자신과 그의 민족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계획을 찬미합니다. 믿음으로 응답하는 ‘예’는 우리 자신을 뛰어 넘어 온 세상으로 두루 퍼져나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방문한다는 것’은 문을 연다는 것, 곧 우리의 좁은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가정 또한 자신을 벗어나 밖으로 문을 열어 숨을 쉴 때 살아있게 됩니다. 이를 실천하는 가정들은 생명과 친교의 메시지를 전하고 가장 상처받은 가정들에 위안과 희망을 주어 가정들의 가정인 교회의 성장에도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보다 가정에서 우리는 날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한계와 다른 이들의 한계를 경험하고, 또한 함께 평화로이 살아가는 데에 뒤따르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완전함과 나약함, 심지어 갈등마저 두려워하지 말고 이러한 것들에 건설적으로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정은 우리의 한계와 죄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서로를 사랑하는 자리로 용서의 학교가 됩니다. 용서는 그 자체가 역동적인 소통의 과정입니다. 뉘우치고 용서할 때 약해지고 끊어진 소통이 회복되고 증진됩니다. 가정에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 존중하며 말하는 법, 다른 이의 관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기 관점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아이는 사회에서 대화와 화해를 증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장애아를 둔 가정들은 한계와 소통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운동 장애, 감각 장애, 또는 지적 장애는 자신 안에 갇혀 있으려는 유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와 친구들의 사랑 속에서 오히려 마음을 열고 서로 나누며 모든 사람과 소통을 하도록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장애는 학교와 본당과 단체들이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모든 이를 더욱 환대하는 곳이 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너무도 자주 다른 이들에게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불화의 씨를 뿌리고, 우리의 인간적 환경을 험담으로 더럽히는 세상에서, 가정은 소통이 축복임을 깨닫게 해 주는 학교일 수 있습니다. 증오와 폭력의 지배가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상황, 다시 말해 가정들이 돌담, 편견과 원한이라는 단단한 담으로 서로 갈라질 때에, 또는 “집어치워!”라고 말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일 때에도 그러합니다. 사실 저주하는 대신 축복하고, 배척하는 대신 방문하며, 맞서 싸우는 대신 환대하는 것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선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하며 자녀를 형제애로 교육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날 특히 젊은이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대 매체들은 가정 안과 가정들 사이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체적 접촉을 피하고 모든 침묵과 휴식 시간을 채우는 수단으로 매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은 커뮤니케이션의 필수 요소이며, 침묵이 없으면 말에 알찬 내용을 담을 수 없다.”(베네딕토 16세, 2012년 홍보 주일 담화 참조)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사연을 나누고 멀리 있는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다른 이들에게 감사하거나 그들의 용서를 구하고 늘 새로운 만남의 문을 연다면 매체는 소통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만남, 이 ‘새로운 가능성’의 중요성을 날마다 더욱 잘 깨달으면 우리는 기술에 지배당하기보다는 기술을 현명하게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부모는 으뜸 교육자이지만 혼자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녀들이 매체 환경 안에서 인간 존엄과 공동선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교육하는 데에 부모에게 도움을 주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커다란 도전은 단순히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입니다. 현대의 영향력 있고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은 정보의 생산과 소비만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정보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너무도 흔히 정보가 사실들을 단순화시키고, 다양한 입장과 관점이 서로 맞서게 하며, 사람들이 사실을 전체적으로 보기 보다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가정은 논쟁의 대상이나 이념의 전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은 곁에 있음을 체험하면서 소통을 배우는 환경이며 소통하는 주체, ‘소통하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함께 하고 행복하게 살며 생명의 열매를 맺는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가정이 문제가 되거나 위기에 빠진 제도가 아니라 부요한 인적 자원으로 계속 존재할 것임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매체가 가정을 살아있는 실체가 아니라 수용하거나 배척하고, 또는 옹호하거나 공격해야 하는 추상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는 가정을, 주고받는 사랑 안에서 소통하는 것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자리이기보다는 이념적 갈등의 장으로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소통은, 우리의 삶이 얽히고설키면서도 하나로 잘 짜여 있는 사연으로 그 안에 담긴 목소리들은 다양하며 각각의 목소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입니다. 가장 훌륭한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의 아름다움과 부요를 증언하며 적극적으로 소통할 줄 압니다. 우리는 과거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신뢰로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미래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성령강림대축일

(가해) 요한 20,19-23; 14/06/08

우리 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식들을 다 똑같이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어느 자식 하나를 더 사랑하고 애착이 갈 수는 있어도, 어느 하나를 미워할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을 잘 표현한 듯합니다.

하나의 사건과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어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가 있고 그 피해자를 직간접적으로 가해한 가해자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사건과 상황을 자신들의 이해관계 안에서 이기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제각기 자기 자신을 주장하고 고집합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기회적 이용자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며 그 아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과 상처가 깊어져 가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사회가 살기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불편해지고 각박해져 살기가 더 힘겨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얻게 되는 작은 기쁨이 생의 힘을 보태주기도 하지만, 작은 아픔이 그 아픔을 계기로 결속되고 개선되어 희망으로 등장하지 못하고 아픔으로만 남을 때 우리 삶의 무게가 한층 더 버거워짐을 느낍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싸워왔고, 이젠 남남 갈등으로 서로 지역갈등이니, 보수니 진보니 하며 서로 갈라져 싸우는 사회 분위기는 물론, 근현대와 작금에 벌어진 사건과 상황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각자 개인의 역사 안에서도 쉽게 반길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이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5) 라고 하신 주님 앞에 선 우리를 참으로 부담스럽고 부끄럽게 합니다.

“부모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우산 장수를 하는 아들을 보며 흐뭇해 하는 반면, 소금 장수를 하는 또 다른 아들 때문에 근심에 잠긴다.”는 말도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처한 일상의 조건들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단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가족 중의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도 힘겹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 중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한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마치 천벌이나 받은 듯, 얼마나 발기발기 찢어진 기분을 간직한 채 살아나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우리 인간도 가슴 아픈데, 인류 가족을 만들고 그 어느 누구 하나 잘못 되는 일 없이 다 잘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애통스러우실까 싶고,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생명을 바치시고 부활하신 주님 앞에 또 다시 십자가를 짊어지시라고 하시는 듯하여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죄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8) 라고 하셨고,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3)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강림절을 맞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진정 기억하고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만나고 마주치는 모두가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겠구나 싶습니다. 언젠가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어떤 제자가 스승님께 ‘언제 새 날이 오겠습니까?’한 물음에 결국 ‘창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네 가족으로 여겨질 때 새날은 온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를 더욱 더 화해와 일치를 향한 회개의 길로 초대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문이 모두 잠겨 있는 방안에 들어오시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19) 실패와 실의, 죽음의 공포와 불신, 나약함과 무기력 속에 빠져, 불안하고 불편하게 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심어주시며 제자들에게 주님의 평화를 전하러 가라고 하십니다.

절망과 불신 속에 빠진 제자들에게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해주심으로써 죽음으로 실패하고 다 끝나 버린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있는 제자들이 믿음에서 얻는 새 희망으로 불타오르게 해주십니다.

끝으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견지하고 희망을 간직하기 위한 평화의 조건으로 용서와 화해를 제시해주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평화를 가져다 주는 용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 강림 대축일인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네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라. 불가능해 보이는 불목과 불신, 저주와 원망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용서의 힘은 성령께서 주시리라. 성령의 힘을 받아, 믿고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러면 내가 주는 평화를 얻을 것이다.’

얼마 전 피정 중에,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해지는 밤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지고 나니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듯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달은 아기가 새로 탄생이라도 하듯이, 그야말로 피어 오르고 있었고, 어둠은 마치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리를 내주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전체가 어두운데 반하여, 달은 아주 작디 작아 보였지만 세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다 덮은 듯한 어둠이 결코 그 빛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그 빛이 비록 작고 약하지만, 어둠이 결코 넘보거나 누를 수 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어떻게 살리고 구원하시는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떠올라 세상을 훤히 비추시는 태양만큼은 못해도, 기우는 저녁에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기리며 반사시키는 달이, 오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듯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강림대축일

(다해) 요한 20,19-23; 13/05/19

살면서 이럴 때가 있습니다.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커다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부끄럽고 위축될 때,

특별히 뭔가에 대해 불만스러운 것도 아닌데 마음이 불편할 때,

특별히 부족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지 모르게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때,

할 것 다 하고, 진행될 것 다 잘 진행되는데 어딘지 모르게 아쉬울 때,

마땅히 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울 때,

하고 싶으면서도 하지 못하고 계속 다음으로 미룰 때,

기회를 기다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눈 앞에 여건이 되었는데 실현하지 못할 때??

오늘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습니다.”(요한 20,19)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19ㄴ-20절ㄱ)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습니다.”(20절ㄴ)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해도, 누가 내 말을 믿어줄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전한다고 해도, 변하는 것이 없는데 그렇게 해서 뭐하나?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면 나는 가만히 놔둘까?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신앙 조목에 대한 불신과 불편함과 두려움이 나를 주저 앉히고 망설이게 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십니다. 성령께서 두려움과 무력감 속에 갇혀 있던 제자들을 해방시키시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만들어 주십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그날 베드로와 사도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이들이 삼천 명 가량 늘었다고 합니다(41절).

성령께서는 두려움과 망설임 속에서 있는 제자들에게 사도적 열정을 불러 일으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사도적 열정은 비단 어떤 교회적, 그리스도교적인 일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적 열정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도적 열정은 선교와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사도적 열정은 비단 사도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여기는 기적을 이루도록 합니다. 기적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없고,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과 불가능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말씀의 구현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하느님 말씀의 구현 중의 하나는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어쩌면 나 조차도 바라지 않는 화해와 일치의 원의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주님께서는 성령께서,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도록 이끌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 마음속에 미움과 원망으로 벽을 쌓고 갈라진 분열의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주님께 향한 신앙 안에서, 우리를 사랑의 일치 안으로 이끄신다고 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3.13)

성령께서는 제자들을 갈등과 분열로 이끄는 죄악의 유혹에서 지켜주시고, 신앙을 굳게 하고 사도적 열정을 불러 일으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에 감화된 제자들은 마음을 합하여 형제적인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그 때 그 사도들의 삶을 이렇게 일러줍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7)

오늘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령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도록 이끄십니까?

오늘날 우리가 성령께 의지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용서를 통한 일치’를 가져와야 할 점과 분야는 무엇입니까?

성령께 힘입어 내 가정에서 불가능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용서하며 화해할 점은 무엇입니까?

성령께 힘입어 내 일터에서 불가능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용서하며 화해할 점은 무엇입니까?

성령께 힘입어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불가능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용서하며 화해할 점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우리들 마음 깊숙이 다가 오셔서,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님께 향한 믿음을 굳세게 해주시고, 그 믿음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이루고 실현하며, 그 현실적인 방안으로 용서와 화해를 통한 일치를 가져와 하늘나라의 새로운 첫 발을 내딛기로 합시다.

성령을 받고 싶으십니까?

성령을 받아 주님 사랑에 잠기고 싶습니까?

성령을 받아 사도적 열정에 불타오르고 있습니까?

오늘 성령칠은과 성령의 열매를 뽑으시면서, 여러분에게 성령께서 열매 맺어주시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불신과 의심, 답답함과 아쉬움, 우울함과 서운함, 채워지지 않는 갈증, 미지근하고 주저하는 여러분을 성령의 불로 타오르게 하시어 사도적 열정으로 불타오르도록 간절히 청하시고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강림대축일

(나해) 요한 20,19-23; 12/05/27

지난 금요일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과 함께 순교자 현양 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서울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평신도 44분이 순교한 서소문과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성지를 순례하며 순교자들의 행적과 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하다가, 예비신자 교리를 다 받은 어떤 세례대상자가 그 성지순례에 가서 순교자들에 대한 강론을 듣다가 나는 저런 신앙을 간직할 수 없겠다고 세례를 포기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참 안타깝기도 하고,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핑계거리를 대는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이들은 순교 사건은 아주 오래 전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고 여기며, 그 중요성이나 신앙 고백의 자기결단과 일생전환의 회심 등에 대한 긴장감을 의식하지도 않고 살거나,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는 신자들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순교의 갈림길에서 ‘예!’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자기 목을 내 놓을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이 주님의 선물이듯이, 순교도 주님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순교자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쉽사리 내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순교자들이 주님을 뵈옵고 힘을 얻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과 주님께서 월계관을 들고 저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며 휘광이의 칼 날 아래 자신의 목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첫 번째 독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주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유다인들에게 잡혀 죽지나 않을까 해서,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두려워 떨며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2-4)고 전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잡혀 죽을까 봐 두려워 떨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거꾸로 자신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유다인들 앞에 나서서, 용감하게 유다인들이 잡아 죽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성령은 그 옛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만 활동하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을 증거해야 하는 매 순간에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주님을 뵙도록 해 주고,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어 주님을 증거하게 해 줍니다.

오늘도 신학교나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까지 다 받고, 양성과정을 다 밟고 나서도, 서품이나 서약을 할 만하다고 여겨 선발하지만, 본인 스스로 “자신이 없다.”고 연기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당사자의 겸손과 솔직한 자세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과연 주님 앞에 자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살면서 ‘자신’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신감이 자만으로 변하여 실패하고 누를 끼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주님께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를 선발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하니까 실패하라고, 망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하니까 우리에게 힘을 보태 주셔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 땅에 하늘나라를 만드는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코린토 신자들에게,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 직분…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3-7) 라고 선언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현실에서 불가능해 보이고,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012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사는 우리에게 있어 평화는 아득한 일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지금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어야 할지 걱정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것을 허물어뜨리거나 손상시키지 않으며, 오늘 다른 이들에게 뒤쳐지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얻기 위해 조바심과 두려움 속에서 투신하고, 내가 하는 일이 잘못되거나 파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직업과 직장의 건실함과 발전, 부모와 자식의 건강과 안녕, 친척과 친우들간의 우애와 화목, 우리 공동체가 수행해야할 소명과 사명들이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이렇게 해야 잘 될 것인가 저렇게 해야 잘 될 것인가 하고 고민하며, 심지어는 같은 뜻과 같은 지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지향을 이루는 방법 때문에 마음을 상해가며 아파해가면서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2)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평화의 전제조건으로 용서를 제시하십니다.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면 용서하여라. 스스로와 남을 용서해야만 자신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리고 그렇게 용서해야만 악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고, 미움과 원망과 복수라는 악의 굴레에 예속되거나 악의 사슬에 휘말리지도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날 도와주지 않는다고 부모나 가족과 친지들을 원망하지도 말고, 잘 안 풀린다고 그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말고,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스스로를 탓하거나 열등감에 젖지 말며, 자신을 비롯하여 자신의 인생과 관련된 모든 분들을 용서함으로써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를 얻고 주님의 뜻대로 스스로를 구하고 형제들을 구하도록 합시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



성령강림대축일

(나해) 요한 20,19-23; 06/06/04

언젠가 한 번 어떤 신자가 산에 올라갔다가 바위에서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 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등 뒤에서 자기를 받쳐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덕분에 떨어져 죽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 신자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가 한 번 씩은 다 기적 같이 주님의 도우심을 받은 체험들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이 순간 그것을 다 기억하지 못하거나, 우리가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 것이라고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쳐 버렸거나, 하도 많거나 남도 다 그렇게 주님의 기본적인 도움을 받으면서 사니까 그냥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살기 때문에 무미건조할 뿐입니다.

그 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명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 때 그 신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기라도 했다면 하느님은 안 계신 것일까?

만일 그 때 그 신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무슨 일이라도 났다면 하느님은 안 계신 것일까?

아니 최소한 하느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커다란 사고가 아니라 작은 사고가 났다고 다행이며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고 여긴다면, 세상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그들은 도와주지 않으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지 그 순간 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다른 선택을 하신 것뿐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선택은 우리가 개입하거나 조종할 수 없는 하느님만의 온전한 자유다.

너와 나의 경험을 비교하기 이전에, 내 기도 중에도 어느 기도는 들어주시고 또 다른 어느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지 않는가?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이 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만큼이나 그대로 잘 된 적만은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우리에게 이익이 되거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고, 우리에게 손해가 되었거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우리의 하느님 체험이 우리가 느끼는 대로, 우리가 여기는 대로, 우리가 생각하기 나름대로, 우리가 재해석하는 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요, 합리화하듯 애써 위로를 받을 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기적 같은 체험도 없거나 옛날에 한 번에 그쳤고 지금은 없다고 느끼거나 또는 어렵고 고통스럽거나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이 아니어서 주님께서 눈에 드러나게 그리고 확실하게 느끼도록 해 주시지 않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움직이심을 이해하고 느끼면서 주님과 함께하고 일치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매일 매순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고 살지는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내 지금의 삶이 긴장감 없는 안정적인 삶이라 주님께서 특별히 찐하게 느끼게 해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계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그것은 기억과 재현 그리고 그러한 삶의 연속적인 체험 속에 새겨진 정이다.

우리는 결혼할 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한 평생 부부로서 살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부부생활이 뭐 그렇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매일을 지나간다면, 외식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그 무료함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도 하겠지만, 그러한 노력도 또 하나의 평이함으로 남고 또 부부가 생존을 위해서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편이나 아내 한 쪽이 없어도 되고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는가? 기쁘고 슬픈 일이 긴박하고 드라마처럼 반전되지 않으면서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부부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그냥 사는 것처럼 살도록 보호해주시고 감싸안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

슬프고 지쳤을 때 과거의 기쁘고 행복할 때를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오늘을 이겨나가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주님과의 우정을 되새기면서 살아간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살려주시고, 지켜주시고, 이끄셨는지 되새겨보고 기억해 내서, 내 인생 속에 주님께서 함께해주신 기억들을 직접적으로 되살리고 되새김으로써 오늘의 우리 신앙의 깊이를 더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어린 시절을 우리의 성장기간을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를 끌어안고 오늘에 이르게 해 주셨는지 미루어 짐작하면서 주님을 되새길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아이들 주변에 얼마나 큰 위험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관찰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긍정적이고도 가치를 지니고 있는 모든 가능성과 동시에 우리 아이들이 자칫하면 위험에 처할, 아니 어떤 경우에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럴 때마다 섬뜩 섬뜩하다. 그 모든 위험성과 갖가지의 유혹과 어려움을 우리도 모르는 새에 다행스럽게 지나쳐 오고 또 이겨내고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보이지 않게 드러내지 않고 보살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게 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주시고 그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계신 주님을 발견하며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 있다. 나 같으면, 아니 저 정도면 떠나고 포기하고 마칠 수도 있을듯한 인생이지만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주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시고 함께해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에게 내려주신 주님의 은총이 마치 나에게 베풀어 주신 것처럼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된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과 맺은 지난 일들을 기억하게 하고 또 기억나게 하고, 기억나는 사건들을 되새겨 주님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오늘에 다시 상기시키고 다시 현실에서 적용시키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의 경험과 오늘의 적용을 고리로 연결시켜 이어지게 하고, 그러한 이어짐이 우리 마음속에 더욱 깊고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더욱더 주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해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생생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되새김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그 평화와 기쁨을 형제들에게 전하십시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성령강림대축일

(가해) 요한 20,19-22; 05/05/15

찬미 예수님.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첫영성체를 할 우리 어린이들을 보니 정말 반갑고 축하드립니다.

참 곱고 맑은 얼굴을 하고 촛불을 들고 입장하는 우리 친구들의 모습이 마치 천사같이 보였어요. 그동안 첫영성체 교리 공부를 통해 첫영성체를 준비해 주신 수녀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도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 본당의 모든 신자들도 여러분의 첫영성체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여러분을 사랑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계시며, 부모님들도 여러분들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기쁘시죠?

신부님이 질문 하나 할께요.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잘 해주세요?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나요, 안 용서해 주시나요?

왜 부모님이 여러분에게 잘 해 줄까요?

여러분이 부모님 말씀을 잘 들어서 여러분에게 잘 해 주시나요?

여러분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여러분에게 잘 해 주시나요?

아니면, 왜 잘 해 주시나요?

여러분의 부모님은 여러분이 자식이기 때문에 잘 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자식인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 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부모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니까, 계속 잘못하고 나쁜 일만 골라서 할까요?

아니죠! 부모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니까, 우리도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하겠어요.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부모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우리가 잘못할 짓이 들킬까봐 걱정하고, 벌을 받을까봐 무섭고, 내가 잘못한 사실 때문에 불안하고 괴로워요.

반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친구도 내가 부모님께 잘못했을 때처럼 괴롭고 불안해요.

그리고 나도 마음이 불편해요.

나도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보기 싫고, 화가 나고, 말도 하기 싫고, 복수하고 싶고, 그 친구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친구의 마음도 불편하고 내 마음도 불편해요.

그래서 편하려면 용서해야 해요.

우리가 용서하면 내 마음도 편해지고, 친구의 마음도 편해져요.

그런데 보고 싶지도 않고, 화가 나고, 말도 하기 싫은 친구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잘 안돼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래요, 예수님께 기도해야 해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해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 21)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어요.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22)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성령의 힘으로 용서하게 되면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거에요.

예수님께서는 왜 세상에 오셨나요?

그래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어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부모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이제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하나가 될 어린이 여러분!

앞으로는 다시 죄를 짓지 말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따라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어린이가 되세요.

그리고 잘못하면 용서를 청하고, 또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면서 서로 서로 화목하게 지내세요.

오늘 첫영성체를 하면서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친구를 용서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오시도록 청하세요.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뵙게 해주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친구들을 용서해 주고 착한 일을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될 거에요.



성령강림대축일 생명의 날 담화-"나는 생명이다"

2004/05/30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올해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해 있는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자 '생명의 날'을 지내기로 한 지 1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아직도 우리 가운데는 생명에 대한 위협이 크게 자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낙태, 자살, 안락사, 가정폭력, 동물복제 및 유전자 조작, 전쟁, 테러, 환경오염 등등이 우리들을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명백한 도전입니다.

1.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간

인간의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시작되기에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하며, 그 권리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는 모태에 있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불가침의 권리마저도 보장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생명의 복음', 60항)

현재 우리나라의 낙태 현실은 참으로 심각합니다. 실정법이 낙태를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낙태를 시술하고도 처벌받은 이는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모자보건법이라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하루에 4-5천 건의 낙태가 아직도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의학적인 이유로 산모의 생명이 극히 위험한 경우에 행해지는 간접 낙태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직접 낙태 곧 목적이나 수단으로서 의도한 낙태는 도덕률의 중대한 위반임을 분명히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71. 2274항)

모름지기 인간의 첫째 권리는 생명권입니다.(인공유산반대선언문, 11항) 그 생명권을 이미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뿐만 아니라, 수정란도, 배아도, 태아도 모두 똑같이 지니는 것입니다. 이 생명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누구도 해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므로 마땅히 인정받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2. 자살은 살아 계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거부

요즈음 우리 사회 안에서 두드러지는 반생명적인 현상은 바로 자살자의 증가입니다. 경제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한 서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가족들을 살해하고 동반 자살하는 사건이 계속되고 있으며, 사회지도층 인사들마저도 여러 다른 이유로 스스로 그들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살이 비록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이유들로 궁지에 몰린 이들이 취하는 최후의 선택처럼 비추어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자살은 분명 반생명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인간적인 행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생명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의 관리자이지 소유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습니다.('생명의 복음', 66항) 아울러 자살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고 영속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적 경향에 상반되는 것이며, 또 올바른 자기 사랑에도 크게 어긋납니다. 더 중요한 점은 자살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281항)

3.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인간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창세 1, 11-13. 20-31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생명들을 보시고 "참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선한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생명이 세상 안에 충만하기를 원하셨고, 특별히 인간 생명을 위하여 당신의 독생 성자 그리스도를 강생하게 하셨습니다.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분의 모상이고, 각인이며,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생명의 복음', 39항)

4. 생명의 길 - '생명31 운동'

그리스도의 길은 "생명에 이르게"(마태 7, 14)하고, 그 반대의 길은 "멸망에 이르게"(마태 7, 13)합니다. 곧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길의 차이는 큽니다.(디다케, 1,1)

작년부터 한국 천주교회가 벌이고 있는 범국민 생명문화운동인 '생명31 운동'은 바로 '생명의 길'을 선택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이 땅에서 수없이 많은 어린 생명을 무고하게 앗아간 모자보건법 제정 31년째를 맞이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의 지난 30년을 청산하고, 생명을 살리는 원년이 되자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운동을 이 사회에 크게 확산시켜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고 그에 봉사하는 '생명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생명 하나 더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시며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성부께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 제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저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중략)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요한 17, 1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강생이 하느님께서 창조한 모든 생명 특별히 인간 생명의 보호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우쳐 줍니다.

'생명31 운동'이 금년에는 '생명 하나 더'라는 표어를 내걸고 이 세상 안에 한 단계 더 깊숙이 다가가려고 합니다. 이는 우리들이 그동안 무심히 만나고 지나쳤던 생명들 하나 하나에 대한 소중함을 새롭게 하자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의식이 우리들 삶안에 깊이 자리하게 될 때에 지금처럼 우리 안에 스며있는 '죽음의 문화'는 서서히 걷히게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생명의 백성들인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시며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올바로 응답하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김과 동시에 우리 이웃들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울러 모든 생명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인정하면서, 그동안 하느님의 뜻에 도전하였던 낙태, 자살, 안락사, 가정폭력, 동물복제 및 유전자 조작, 전쟁, 테러, 환경오염 등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여야 합니다.

생명의 주님께서 이 세상을 생명이 충만하게 해 주시도록 다함께 기도드리며 우리모두 '생명의 문화' 건설에 앞장 섭시다.

2003년 5월 30일 생명의 날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이기헌 베드로 주교



성령강림대축일 청소년의 날 담화-"예수님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

2004/05/30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1. 올 2004년은 2005년 독일 쾰른에서 열릴 제20차 세계청년대회라는 큰 행사를 앞둔 마지막 해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에게 제가 제19차 청소년 주일의 주제로 선정한 "예수님을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2, 21)라는 성서 말씀을 성찰함으로써 여러분의 영적 여정을 더욱 철저히 준비하도록 당부 드립니다.

이 성서 말씀은 몇몇 '그리스 사람들'이 어느 날 사도들에게 찾아와 간청하며 드린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였습니다. 단순히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인상을 주는지 살펴보러 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의 의문을 풀어 줄 해답을 찾았다는 예감과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하였던 것입니다.

2.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는 여러분도 "예수님을 뵙고자"하는 열망에 이끌려 필립보에게 와서 간청하였던 그 '그리스 사람들'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단순히 지적 호기심에서가 아니라(이것 역시 긍정적인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풀어 줄 해답을 찾고자 하는 내적 충동에서 예수님을 찾기를 바랍니다. 복음서의 부자 청년처럼, 여러분도 예수님께 찾아가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마르 10, 17) 하고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필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요한 1, 48)고 말씀하시는 또 다른 장면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이 조금도 없는(요한 1, 47 참조) 그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에서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요한 1, 49)라는 훌륭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아무런 편견이 없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들을 알아보시고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엄의 가장 고귀한 측면은 바로 삶을 변화시키는 깊은 눈길을 주고받으며 하느님과 통교하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뵙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바람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 깊이 내재해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빛을 보고, 진리의 광채를 체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서 더욱더 간절해지도록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들여다보실 수 있게 하십시오.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또한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느님께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이 간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 얼굴을 찾고 있사오니, 그 얼굴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소서"(시편 27, 8-9). 우리가 찾는 그 얼굴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도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올 2004년 청소년 주일에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입니다. 너무 서둘러 대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먼저 침묵에 잠기십시오.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이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움터 나오게 하십시오. 때로는 그 열망이 어지러운 세상사와 쾌락의 유혹에 억눌리기도 하지만, 그 열망이 움터 나오도록 할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 뵙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강생을 통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신앙 안에서 만나 뵙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열정적으로 찾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일상 생활의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나 기도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영혼의 눈으로도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분에 관한 모든 성서 기록에서 영감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17항].

4. 예수님을 뵙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억누를 수 없는 갈망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인간이 왜곡시킬 수도 있는 갈망입니다. 죄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길을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돌려 대신 하느님의 피조물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였던 그 '그리스 사람들'도 "우리는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라는 분명한 결단으로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그들의 갈망을 나타내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선택할 힘을 가졌다는 것과,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청소년 여러분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겠지만, 이 땅 위의 모든 좋은 것, 모든 직업적 성공, 여러분이 꿈꾸는 인간적인 사랑까지도 결코 여러분의 가장 깊고 내밀한 갈망을 완전히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에만 여러분의 삶은 충만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됩니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confessiones), 제1권, 제1장]. 여러분은 이렇게 주님을 찾는 일에서 멀어지지 마십시오. 꾸준히 주님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의 성취와 여러분의 기쁨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5.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이 성체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의 형제자매들,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도 알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받아 모시고 열정으로 흠숭하는 성체는 사랑의 계명을 이행하기 위한 자유와 사랑의 학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에 대해서, 또 우리 목숨을 내어놓기까지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놀라운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입니까?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독점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성체성사의 학교는 피상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참되고 좋은 것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도록 가르쳐 줍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도록 해 주며, 감정적인 사랑에서 실질적인 사랑으로 넘어가도록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익을 늘 앞세우는 의지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내적 자유와 그러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 안에서,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당신을 찾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캘커타의 데레사 복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는 '명함'을 나누어주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이고, 기도의 열매는 신앙입니다. 또 신앙의 열매는 사랑이고, 사랑의 열매는 봉사이며,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움과 또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 마음속에 심어 주신 사랑으로, 모든 인간적인 고통을 대면하러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형제적 사랑의 위대한 예언적 표징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설득력 있는 삶의 증거로써 어떻게든 예수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교황 교서 '새 천년기', 16항 참조).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지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변함 없이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당신을 보여 주시고 사람들이 당신께 다가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의 본당과 단체와 공동체에서 서로를 환대하며 여러분 사이에 친교를 이루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죄 때문에 곧잘 흐려지긴 하지만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표지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의 앞길에 십자가가 놓여 있더라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요한 12, 23-26 참조)? 예수님께서는 죽음에게 내어 주신 당신의 생명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이렇게 암시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죽음은 더 이상 끝이 아닙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십자가를 생명의 원천이며 사랑의 징표가 되게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은 나약함 때문도, 또 고통받기를 원하신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거룩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1984년 구원의 성년을 마치며 제가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맡기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진리입니다. 그 후 그 나무 십자가는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나라들을 이동하며 순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가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으면서 자신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힘을 얻은 젊은이도 많았습니다.

구원의 성년 20주년이 되는 올해, 그 나무 십자가는 베를린으로 장엄하게 옮겨질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곳에서부터 독일 전역으로 순례를 시작할 것이고, 내년 쾰른에서 그 순례를 마칠 것입니다. 오늘 저는 1984년 구원의 성년을 마치며 당부한 말을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맡깁니다! 이 십자가를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상징으로 전세계에 짊어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얻고 구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십시오."

7. 이 시대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만난 그분,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분의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죽음보다도 더 강한 용감한 사랑의 증인이 되십시오.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능과 젊은 열정을 바쳐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시오. 예수님을 뵙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 특히 그분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하는 예수님의 열성적인 친구가 되십시오.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그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우정 안에서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거룩한 사랑의 원천으로 이끄십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분의 친구와 이 시대 모든 사람을 복음화하십시오.

복되신 동정 성모님께서는 일생 동안 변함없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눈길 아래 여러분을 끊임없이 지켜 주시고(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10항 참조) 쾰른에서 개최될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지금부터 책임감과 적극적인 열정을 가지고 세계청년대회를 향하여 출발하라고 당부 드립니다. 자비로우시고 인내로우신 어머니이신 나자렛의 동정 성모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관상의 마음을 심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이 덧없이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한 저 세상의 예언자가 되도록 예수님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도록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애정을 담아 여러분이 나아갈 길에 함께할 특별한 축복을 보내 드립니다.

바티칸에서,

2004년 2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령강림대축일

요한 20, 19-23; 2003/06/08

기도가 잘 안될 때가 있다. 오랜만에 기도해서 다시 감잡기가 힘들거나, 시간을 낼 수 없거나 또 시간을 낸다 하더라도 마음이 세상 걱정으로 바빠서 주님께 집중하지 못해 안 될 때도 있다. 내가 자신을 절제하고 집중을 할 수는 있어도,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막막하거나 뿌옇기만 해서 힘들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청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나를 주님께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주님과 온전히 하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주님을 뵈옵고 기쁨에 잦아들기 위해 기도할 때 방해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미움과 원망과 섭섭한 감정이다. 그 감정이 자신에게 향할 때 통회해야 하는 것이고, 남에게 향할 때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 "성령을 방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2-23절) 그 미움과 원망의 찌꺼기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해도 편할 수 없다.

그라나다의 루드비히의 기도문에서 주님께 향한 우리의 염원과 갈증을 발견한다. "제 영혼은 하느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모든 은총이 모여 있는 당신의 면전에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언제쯤 주님의 성소를 향해 걸어가게 되겠습니까? 언제쯤 주님의 집에 들어가게 되겠습니까? 언제쯤 당신 현존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되겠습니까? 언제쯤 제가 유혹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언제쯤 이 슬픈 죽을 운명의 벽을 지나가게 되겠습니까? 오 영원한 광휘의 원천이시여! 제가 나왔던 그 심연으로 돌아가게 해주시어, 당신께서 저를 알고 계시듯 저도 당신을 알게 해주시며 당신이 저를 사랑하시듯 저도 당신을 사랑하게 해주시고, 선택된 이들의 무리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영원히 바라보게 해주소서. 아멘"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용서의 은총을 내려주시어, 우리가 나 자신과 내 마음 속에서 움켜잡고 있는 너를 용서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령강림대축일

요한 20,19-23; 2002/05/19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아 서로 용서함으로써 평화를 얻으라고 하신다. 교황님께서는 매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에 우리가 평화를 위해 해야 할 활동에 대해 말씀해 오셨다. 지난 10여년을 돌아보면;

1990년에는 '창조주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는 평화'를 이룩하도록 말씀하셨다.

1991년에는 각기 다른 환경과 조건을 존중하여 "평화를 원하면, 모든 사람의 양심을 존중하라."고 하셨다.

1994년에는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인 "가정은 인류 가족의 평화를 창조한다."고 말씀하셨다.

1995년에는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려는 열망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평화를 간직한 성모님을 따라,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 평화를 가르치는 교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1997년에는 상처받은 세계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치유하고 진리와 정의에 의한 공정성 확립에 이어 베풀고 받는 용서의 강렬한 기쁨은 치유가 불가능할 것 같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며, 그 관계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 굳게 뿌리박도록 해 준다며 "용서를 베풀고 평화를 얻으"라고 말씀하셨다.

1998년에는 정의가 침해당하고 법이 무시당하며 불의가 만연하면 평화가 위태로워지므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평화로 나아가는 정의를 추구하도록 "모든 사람의 평화는 개인의 정의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셨다.

1999년에는 생명권에서 자기 성취의 권리에 이르는 "인권 존중은 참평화의 비결이다."라고 말씀하셨다.

2000년에는 세계 빈곤상황 속에, 평화와 인권의 증진, 내전과 무력 분쟁의 해결, 소수 민족과 이민의 보호, 환경 수호, 질병 퇴치, 마약과 무기 밀매상과의 전쟁,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부패의 척결을 위해 전 인류 공동체가 공동대처하도록 촉구하면서 "땅에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씀하셨다.

2001년에는 여러 대륙과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이해를 통해 평화와 생명, 용서와 화해 등의 공통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사랑과 평화의 문명을 위한 문화간 대화'를 말씀하셨다.

올 2002년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 앞에 테러로 맞서지 말고 '평화는 정의와 사랑의 작품'이라고 하시며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고 용서가 없으면 정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는 우리에게 성령께서 불같이 내려오셔서 용서와 화해로 새세상을 이룩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에게 보내는 경축 메시지

2002/05/19

친애하는 불자 여러분,

1.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올해도 저는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를 대표하여 여러분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세계의 모든 불자 여러분들이 기쁘고 행복한 축일 맞이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2. 이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드리면서 저는 지난 해 9월 11일에 발생했던 저 비극적인 사건을 회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이후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의 와중에서, 보다 평화로운 미래 세계를 위해, 희망을 고무하고 또한 이 희망에 기초한 하나의 문화를 건설하는 일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과 불자들이,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앞장서 해야 할 중요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3. 우리는 위대한 기술 진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보는 또한 인간적인 가치의 증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바로 이점에 대해 저는 여러분과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인간적 가치 가운데 하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생명에 대한 권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명은 수태의 순간부터 자연적인 죽음의 순간까지 보호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생명에 대한 권리가 바로 오늘날의 고도로 발달된 기술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하나의 ?죽음의 문화?를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죽음의 문화 안에서 낙태와 안락사 나아가서 인간 생명 자체에 대한 유전학적 실험 등이 이미 그 합법적 지위를 획득했거나 바야흐로 그러한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가장 순진무구한 생명, 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생명, 그리고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죽음의 문화와,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9.11과 같은 테러 공격을 서로 연관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양자가 공히 인간 생명에 대한 경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입니다.

4. 불교의 가르침과 전통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비록 그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존중하라고 지시합니다. 만일 외견상 보잘것없는 한 생물에게조차 그러한 존중이 주어진다면, 하물며 인간에 대해서야 얼마나 더 큰 존경이 주어지겠습니까? 이 인간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존엄성 및 이 존엄성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권리는 분명히 현대 가톨릭 신자들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바로 이 인간 존재에 대한 공통된 존경 위에 우리 그리스도인과 불자들은 하나의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야 합니다. 이 생명의 문화는 생명에 대한 권리가 수태에서부터 자연적인 죽음의 순간까지 온전히 보호되며,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문화에 대항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입니다.

5. 인간 생명에 대한 존경이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실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처를 정한다는 것이 또한 우리의 공통된 믿음입니다. 여기서 저는 젊은이들에 대해 각별한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젊은이들의 마음은 그들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작금의 비극적 사건들에 의해서 악영향을 받고 또한 고통받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생명에 대한 존경을 가르치는 교육은 우리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각기 자신들의 종교 공동체와 기관들을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고유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으며, 이로써 생명에 대한 강한 윤리적 신념 내지 하나의 생명 문화가 젊은이들 안에 퍼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의 생명의 윤리, 생명의 문화가 사회 전체에 퍼지는 정도에 따라서만, 생명에 대한 존경의 원칙이 사회 전반의 태도와 법제도 안에 제대로 반영되기를 우리는 희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친애하는 불자 여러분, 이상이 제가 올해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은 생각들입니다. 우리 함께 희망을 갖고 미래를 바라봅시다. 또한 이 미래가 보다 평화롭고 번영되 세계를 모든 이에게 가져다 주시기를 기대합시다. 부디 행복한 축일 지내십시오.

2002년 5월 19일 부처님 오신 날,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장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



성령강림대축일

(다해) 요한 20,19-23; 2001/06/03

얼마전 대학진학에는 실패했지만 가톨릭 사회복지대학원의 사회교육원에 다니면서 앞으로 평생 장애자들을 위해 살기 위해 지금 한 달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사회복지시설에 봉사활동을 다닌다는 젊은 친구가 자기가 지금 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잘하고 있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주겠다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주님께서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고(요한 14,26) 주님을 "증언할 것"(15,27)이며, 우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16,13)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받아 오늘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리고 내가 하는 이 일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주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해 주"시고(로마 8,26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사도 4,31) 해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행할 수 있게 되고 열매까지 맺게 된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뵌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요한 20,20)고 한다. 그런데 이 기쁨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그리던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기들의 마음을 채워주고 안정시켜 주었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라"하시면서 "숨을 내쉬시며"(22)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단순히 우리가 어떤 것을 얻음으로써 얻게 될 기쁨을 넘어 우리가 나가서 베풀고 나눔으로써 얻게 된다. 우리가 땀흘려 일하면 보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나를 이웃에게 내주고 나면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긍지가 샘솟는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희생제사로 죄를 용서받고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그 기쁨과 보답으로 우리도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다가서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서해주고 아량으로 받아주며 우리 서로의 가슴들 안에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사랑을 일깨우고 생성시키면 평화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들 마음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시고, 주님 사랑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온전히 깨닫고 또 깨달은 그것을 내 일상에서 꼭 실현할 수 있도록 간구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맡기고 따릅시다. 한 번에 안되면 두 번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주님께 향한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진실되이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기 위해 달려 나갑시다.



성령강림대축일

(나해) 요한 20, 19-23: 2000/06/11

어떤 때는 자기에게 이득이 될 것 같아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을 보면, 인간관계도 이해관계 속에 있는 거구나 하는 느낌 때문에 허전하다. 또 지금까지 내가 벌고 취득한 재산을 따져보아도,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복권에 당첨된다던가 무슨 떼돈이 들어오던가 하지 않으면 그렇게 큰 부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을 보아도 어릴 때부터 내가 생각하고 계획해 왔던 지난날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하여 나 자신의 몸과 인격을 쌓는다는 것도 아주 힘든 것 같다. 심지어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보면 내 생애 한 마디로 허망해 보인다. 인생은 의미가 없는 것 같고, 나 역시 남들처럼 그냥 그렇게 한 생애를 살다가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에게 진정 희망은 없는 것 같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희망이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이사 8, 16-17 참조). 그리고 우리가 충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희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실 것이며(호세 11; 애가 3, 22-33; 이사 54, 4-10; 예제 35, 29), 구원은 늦어지더라도(하바 2, 3; 스바 3, 8)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고 예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하느님과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심어준 희망에 충실하시기 때문이다(예레 14, 8; 17, 13-1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외로움과 실망에서 건져줄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시며(마태 4, 17), 현세와 물질 세계를 넘는 영원한 생명(마태 18, 8-9)에 희망을 두라고 하신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2고린 1, 20)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부활시켜 주실 것(로마 8, 23)을 신뢰하며(1데살 5, 24; 1고린 1, 9; 히브 10, 23) 우리 자신이 받을 보상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깨달아(필립 3, 8) 이웃을 사랑함으로써(2디모 4, 8) 주님 사랑에 응답하도록 촉구한다. 요한 사도도 현실에서는 가끔 악과 사탄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것 때문에 우리가 시련을 겪기도 하겠지만 절대로 패배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고 희망으로 이끌고 있다고 한다(요한 19, 11-16; 20, 1-6).

성령은 우리의 희망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현세에서 오는 외로움과 실망에서 건져주시고 우리의 이상을 이루어주실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일깨워 주신다. 성령께서는 주님을 굳게 믿게 하시고 우리가 이웃에게 헌신하면서 우리 자신을 찾고 희망을 간직한 채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다. 오소서 성령님!



성령강림대축일

(가해) 요한 20,19-23; 99/05/23

오늘 성서는 제자들에게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사도 2,3)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4)고 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두려움과 나약함을 걷어치우시고 그들이 용감히 복음을 전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다 하지 못합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마땅히 해야하는 것이 도리인줄 알면서도 다 하지 못한 체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하기 싫어서는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을 막고 연기하도록 하는 것은 나도 주님의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로마 7,15.17) 그렇게 우리는 하고 싶어도, 또 안 하려고 해도 죄와 악의 힘에 짓눌려 노예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 힘은 마치 벽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서있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우리를 짓누르는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를 죄와 악의 구렁에서 건져주시고, 저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시어 저희가 올바르고 거룩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은 오늘 이렇게 두려움과 나약함 속에 갇혀있는 우리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기 위해 "성령을 받아라."(22)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용서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3) 용서는 상대와의 관계 여부를 넘어 우리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우리의 미련과 두려움과 벽을 넘어서서 죄와 악의 구렁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성령을 받으시어, 나와 상대를 어둠 속에 잡아 놓고 있는 악의 세력에서 해방되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1고린 12,3)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으시고 죄와 어둠 속에 갇혀 사는 이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시오.



성령강림대축일

(다해)98/05/31

서울대교구장 제13회 청소년 주일 메시지(요약)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자 교회가 정한 청소년주일입니다. 청소년을 교회로 초대하기 위해서는 각 본당이 학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로, 좋은 선생님이 많이 필요합니다. 사제와 수도자 뿐만아니라 신자 개개인이 훌륭한 선생님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또 더 나은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하는 본당은 곧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꼭 보내고 싶은 좋은 학교로 자리잡게 될 것이며, 청소년들에게도 머물고 싶은 장소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청소년들이 안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갖추는 일입니다. 청소년들이 하는 이야기가 본당에서 경청되고 그들이 하는 작은 결심과 행동이 어른 신자들에 의해 격려되고 인정받을 때, 그들은 자신이 곧 교회의 주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에 걸맞은 모습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청소년들을 위한 좋은 시설입니다. 우리 본당에 청소년들을 위한 체육시설과 교육 및 문화의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본당내의 청소년 교육, 문화 시설이 멀티미디어 교육을 받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게 갖추어지도록 모든 신앙인들이 노력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좋은 학교의 모습을 갖출 때, 청소년들은 우리의 본당에서 마음놓고 몸과 마음을 가꾸며,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하시기에 항상 그들 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던 날, 성모님과 제자들은 함께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하시며, "불 혀"(사도 2,1-4) 모양의 성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내려주시며,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보내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좋은 학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애쓰는 부모님의 마음으로, 그리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좋은 학교의 모습을 우리 교회 안에 갖추어 나갈 수 있도록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주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1998년 5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서울대교구장 제13회 청소년 주일 메시지(전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자 교회가 정한 청소년주일입니다.

교회는 수 년 동안 청소년 복음화의 중요성을 반복 강조하며 다각적인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청소년 사목이 신앙을 가진 청소년들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더 많은 청소년들에게 하느님을 소개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청소년들을 교회로 초대하고 그들 스스로가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일이 마음만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합니다. 많은 수의 봉사자가 필요하고 공간과 시설이 필요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연구가 모아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한 마디로 지속적인 투자 없이 청소년 복음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준비 없이 손님을 초대하는 일과 같습니다.

청소년을 교회로 초대하기 위해서는 각 본당이 이런 가치를 전달하고 훈련시키는 학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준비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좋은 선생님이 많이 필요합니다.

좋은 선생님이라고 하면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을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신앙인들이 그 역할을 나누어 수행할 때 더 효과적으로 청소년들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신자 개개인이 훌륭한 선생님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또 더 나은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하는 본당은 곧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꼭 보내고 싶은 좋은 학교로 자리잡게 될 것이며, 청소년들에게도 머물고 싶은 장소로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청소년들이 안심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갖추는 일입니다.

청소년들이 지내는 시기의 특성상 모든 말과 행동이 어른들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은 종종 무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하는 이야기가 본당에서 경청되고 그들이 하는 작은 결심과 행동이 어른 신자들에 의해 격려되고 인정받을 때, 그들은 자신이 곧 교회의 주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에 걸맞은 모습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청소년들을 위한 좋은 시설입니다.

과연 우리 본당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시설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혹시라도 마당에 농구대를 하나 놓고 그 앞에는 차량을 주차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시설이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까? 청소년들을 위한 시설을 말할 때,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적 문화적 공간도 중요합니다. 청소년들은 이미 정보화 시대 안에서 멀티미디어를 이용하는 교육을 받고, 그 안에서 형성된 문화를 수용하는 세대들입니다. 이들에게 어른들의 교육방식만을 강조하며 그들의 문화를 특이한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당내의 청소년 교육, 문화 시설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게 갖추어지도록 모든 신앙인들이 노력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좋은 학생을 원하는 학교는 분명히 좋은 시설과 훌륭한 선생님과 바람직한 환경을 갖추고 학생들을 모집합니다. 우리 교회가 좋은 학교의 모습을 갖출 때, 청소년들은 우리의 본당에서 마음놓고 몸과 마음을 가꾸며,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과정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하시기에 항상 그들 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시던 날, 성모님과 제자들은 함께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하시며, "불 혀"(사도 2,1-4) 모양의 성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내려주시며,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보내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좋은 학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애쓰는 부모님의 마음으로, 그리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청소년들을 위한 좋은 학교의 모습을 우리 교회 안에 갖추어 나갈 수 있도록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주님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1998년 5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성령강림대축일


(나해) 요한 15,26-27; 16,12-15 : 97/05/18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잘 안될 때, 혹시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로마 8,34) 오히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루가 8,32)

참으로 우리가 평화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물질적이고도 현세적인 풍요와 편이를 쫓다보면, 우리 역시 물질적으로 격하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진 사람이 최고야. 우선 내가 먼저 가지고 쓴 다음에… 그리고 가져야 베풀 것이 있지, 나 쓸 것도 없는데 나눔은 무슨 …!" 그리고 현세적인 것으로 우리를 국한시키고 맙니다.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 이렇게 물질적인 것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길뿐, 우리를 만족시켜주거나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할 사람은 없어지고 맙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3) 현실에 만족만 하며 살수는 없지만,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과도한 욕망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시고, 그것과 연관하여 갖게 된 다른 사람에 대한 실망과 저주와 원망의 감정에서 해방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을 것이고, 주님의 평화가 나를 휘감을 것입니다.※회합 후에 '교회 공동체의 일치와 쇄신을 위한 기도문'을 바쳐주십시오.



성령강림대축일

(다해) 요한 20,19-23 : 95/06/04

누구든지 한 번쯤은 술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술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외에 건강 때문에나 다른 이유로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술을 먹고 실수한 경험이 있어,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다신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끊고자 합니다.

단순히 술을 지나치게 먹고 주정을 하거나, 실수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자기도 원치 않고 자기가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행동을 하고 난 후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술에 취하면 "술이 술을 먹는다"는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술은 물체이지 사람의 행동을 움직이는 힘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술을 먹는 것도 술을 먹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도 틀림없이 사람인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행동이 자기도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이었을 경우에는, "왜 내가 그랬을까? 어떻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하고 물음을 던져도 스스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마르코 복음 9장 18절에 나오는 악령 들린 아이의 현상을 보면, "악령이 한번 발작하면 그 아이는 땅에 뒹굴며 거품을 내뿜고 이를 갈다가 몸이 빳빳해지고 맙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러한 현상을 그 아이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연관하여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7,18-21)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 행동은 그가 하지만 그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이 그를 사로잡고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조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령에 의해 또는 악령의 노예가 된 사람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악령이 부추기는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합니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입니다."(갈라 5,19-21a) 갖은 원망과 섭섭함, 울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들끓어 오르는 분노! 한편 습관적으로 계속 반복하여 저지르는 죄도 같은 유형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증상을 '중독'되었다고 하며, 만성적으로 악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더 비참한 모습은 자신의 행동이 악에 사로잡혀서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행동의 책임을 자기에게 돌림으로써 오는 문제입니다. 한편은 "내가 언제 그랬냐?" "술 취해서 한 일이다."는 식의 부정과 도피로 현상에 대한 거부의 형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맑은 양심 속에서 지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저주하고 좌절하는 형태입니다. 그 어느 것도 올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통제하거나 책임질 수도 없는, 이른바 악령에 사로잡힌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령을 지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대이상의 좋은 열매를 맺었을 때 "주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령의 움직임이나 악령의 움직임 모두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또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그 행동을 자신이 원치 않으면서도 악의 유혹으로 '다시 하고 싶어지는 것'이고, 마침내 '다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다…" 또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까지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입장이 개인 수준을 넘어 사회적인 수준에서 바라본다면, 이러한 입장을 사회악이요 구조악이라고 하며 신학적으로는 원죄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힘으로 악령을 이겨낼 수 없어 생기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그 방법은 첫째 자신이 악령에 사로잡혀 그런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려야 하고, 둘째 또 다시 악에 사로잡힐 유혹의 연결고리를 끊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며, 셋째 성령께 그 도움을 청해야합니다.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로마 7,25) 예수께서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되는 일이 없다."하시자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마르 9,23-24) 아무리 악의 세력이 집요하고 강력하게 다가오더라도, 또 경우에 따라서는 또 다시 악에게 사로 잡혀 그런 행동을 저지르더라도,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빛을 찾아 따라가십시오. 설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비춰주시는 빛을 실날처럼 희미하게 밖에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결코 중단하지 말고 따라가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하러 오셨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 낼 수 없다."하신 주의 말씀처럼 주께 희망을 걸고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도 '그'가 아니라, '악'이 그를 사로잡아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비판하기보다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그의 고통을 감싸 안고 그를 위하여 주께 간구합시다!


지난 주간에 저는 여러분에게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스러운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셔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하시고 또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여러분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에페1,17-19)하며,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호소가 모든 목자들의 소망이라고 강조해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오늘 어둠 속에서 악의 포로가 되어 신음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한 것이었고 또한 실제로 그래야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 내시고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여러 천신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또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 위에 올려 놓으셨"(에페1,20-21)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늘 복음에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살펴봅시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선물로 주시면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요한 19,20a) 주님의 이 행위는 바로 당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당신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씻어주기 위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20절b)고 그 상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왜 못자국이 나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흉측해서 돌아서지 않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까? 그들은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영생에 대한 희망, 그 희망은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부활을 믿고 기대하기는 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던 그 일이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께 희망을 두십시오. 오늘 자신의 추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에 주께서 나타나 주실 것이고, 여러분을 악의 사슬에서 풀어주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간절히 청합니다. 그리고 권고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술 문제가 아니라 이념과 재물과 이해관계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 등의 이러저러한 면에서 악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악의 사슬에서 풀어나기 위해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나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안에 주께서 주시는 평화가 가득할 것이며, 나아가 그 평화를 주시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여러분은 주님의 증인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6절)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으로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으려면, 우선 악에게 사로 잡혀있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이웃도 용서할 여유와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 부활의 힘이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심으로써 용서해주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일을 이루도록, 주님께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22b.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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