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나해) 마태 16,13-19; 15/06/28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6월 18일(목),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를 발표하셨습니다.

오늘 교황주일을 맞이하여, '찬미를 받으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회칙은 더불어 사는 집, 곧 지구를 돌보는 데에 관한 것으로 6장 246항에 걸쳐 기술만능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의한 환경 문제를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하며 온전한 발전을 위한 접근법으로 다양한 차원의 대화와 생태 교육이라는 회개와 행동을 촉구합니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인류는 힘을 합쳐 우리 공동의 보금자리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여전히 있다.” 라고 강조하며,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의 일과 모든 노력의 목표가 무엇인지? 지구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회칙의 주요주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구의 약함 사이의 긴밀한 관계’,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새로운 패러다임들과 기술로부터 유래한 힘의 형태들에 대한 비판’, ‘경제와 발전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들을 찾으라는 요청’, ‘각각의 피조물이 갖는 진정한 가치’, ‘생태의 인간적 의미’, ‘기탄없고 솔직한 토론의 필요’, ‘국제적·지역적 정책의 엄숙한 책임’, ‘쓰고 버리는 문화 그리고 새로운 생활양식에 대한 제안’입니다.

제1장 “더불어 사는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17-61항)는 현재 지구에 나타나는 생태 위기 현상에 주목합니다. 이는 지구가 겪는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 고통의 예로 회칙은 ‘오염과 기후 변화, 특히 화석 연료 사용으로 초래되는 지구 온난화’, ‘식수 오염’, ‘생물 다양성의 감소’, ‘낮아진 인간 삶의 질과 사회의 붕괴’, ‘세계적인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지도력의 부족’을 언급합니다.

제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62-100항)은 피조물에 대한 인류의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성경은 자연 환경은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모든 인류의 유산이며 모든 이가 책임져야 하는 것(95항)이라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죄가 창조 질서 전체의 균형을 어떻게 깨뜨렸는지를 성찰합니다. 이러한 손상이 바로 죄라고 합니다(66항).

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101-136항)은 현재 상황을 분석하여 그 증상과 심층적 원인을 철학과 사회과학과의 대화를 통하여 성찰합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 발전이 인류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온 인류와 세계를 지배하는 결과도 낳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올바른 한계를 정하고 바른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이 필요합니다(105항). 세계에 대한 인류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116항). 고용과 노동 문제도 온전한 생태학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기간에 걸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기업 행위라고 합니다(128항).

제4장의 제목인 “온전한 생태학”(137-162항)은 이 회칙이 정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안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환경의 문제와 인간 사회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우리는 자연계와 사회 체계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환경 생태학, 경제 생태학, 사회 생태학, 문화 생태학, 일상생활 생태학, 공동선의 원칙, 세대 간의 정의를 다룹니다.

제5장 “접근법과 행동 방식”(163-201항)은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대화는 인류가 자기 파괴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163항). 교황은 “교회가 과학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정치를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며, “특정 이익이나 이념이 공동선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솔직하고 열린 토론을 권장”합니다.

제6장 “생태 교육과 영성”(202-246항)은 모든 이에게 ‘생태적 회개’(216-221항)를 권유합니다. 뿌리 깊은 문화적 위기 상황에서, 교육과 훈련 없이 인간의 습관과 행동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모든 교육 분야, 무엇보다도 학교, 가정, 매체, 교리교육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환경 교육은 일상생활과 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고(211항) 생활과 소비의 방식을 바꾸면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206항). 사회를 사랑하고 공동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애덕의 탁월한 표현입니다(231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와 “그리스도인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바쳐주기를 청하며 회칙을 마무리합니다.



교황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가해) 마태 16,13-19; 14/06/29

옛날에 당나귀가 불상을 이고 다니다가, 사람들이 모두 불상에 절을 해대자, 당나귀가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자기에게 절을 하는 줄 알고, 기고만장하고 오만불손하게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실수로 불상을 땅에 떨어뜨리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불상을 일으켜 세우고는 당나귀에게 커다란 벌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되새겨보는 이야기이지만, 오늘의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불과한데, 마치 제 자신이 주님의 비서실장쯤 되는 양 착각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봅니다.

가끔 신혼부부들에게 “상대에게 기대하고 살지 말고, 서로 기여하면서 살아라.”고 하는데, 정작 저는 여기 와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기여했는지 되돌아 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속으로 거창하게 어떤 업적을 남기고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따지기 보다, 그저 한 인간으로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매달릴 때 정말 편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이렇게 다시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해 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의 목자가 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를 드릴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를 집전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는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께서는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맬 때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로 적셔 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께서는 못 본 체해 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께서는 제 대신 일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께서는 채워 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께서는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제가 다시 주님 사랑의 빛 안으로 나오도록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끌어내 주시고

이 모든 일들을 저에게 겪도록 하심으로써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제 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그리고 저의 전생애의 역사가

주님의 오묘한 섭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주님 앞에 다가와서 청합니다.

주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주님이 저와 함께해 주셨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청합니다.

말씀으로 저를 일러 주시고

성체성사로 먹여 주시는

주님 앞에 서서 청합니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주님밖에 매달릴 분이 없어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주님이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에게 주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제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제가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를 복음의 사도로 써주소서.

제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주시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언제나 주님께 다가와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저를 불러 주소서.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제게 오셔서 저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소서.

아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교황주일


(다해) 루가 9,51-62 : 13/06/30


교황주일




교황주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마태 16 13-19; 2003/06/29

어떤 사람이 성당에 와서 기도했단다. "주님, 이번에 불량 물건을 선적했는데, 걸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부족한 인간의 안타까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참으로 주님께서도 들어줄 수 없는 기도다. 그는 오히려 주님을 자기 범죄의 공범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나 기도했을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묻는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13절)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14)이라고 말하더라고 대답한다.?

그럼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하면 현실에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지를 제시한,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마태 14, 2-12; 마르 6, 17ㄴ-19; 루가 3, 10-14 참조). "엘리야"는 현실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길과 신앙이 가리키는 갈림길 사이에서,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한 예언자다(1열왕 18, 20-40 참조). "예레미야"는 어떻게든 이스라엘의 패망을 막으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조국이 패망하고 유배가는 것을 보아야 했던 비운의 예언자다. 그리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로 거론되는 인물은 이스라엘을 에집트 노예살이에서 구출한 '모세'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이 예언자에 비유한 것은 모세처럼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리라는 정치적이고도 현실적인 메시아(구세주)관에서 비롯되었다(출애급기 참조).

베드로는 대답한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 속에서 생각과 개념만으로 남아계시거나 기도할 때만 살아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희망과 고민을 다 아시고, 그때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와 함께 아파하시면서 생생이 살아 숨쉬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진정 살아 계실 수 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세상 한 가운데 하늘나라를 만들어 가신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런 고백을 들으며 복을 빌어주시고 교회를 맡겨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 앞에 불러 주님을 믿도록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에게 주님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이웃에게도 믿음을 심어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자신에게 현세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수난당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교황주일


(다해) 루가 9,51-62 : 98/06/28 (가해) 마태 10,37-42; 99/06/27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맞으며

주님,

주님은 제가 주님께 저를 바치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

제게 행복을 안겨 주셨습니다.

훗날 그 때의 저를 보셨던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던 것같이

그 때 저는 제일 편안했고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은 인간이 주님과 함께할 때 얻을 수 있다던 바로 그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그 행복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주님,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단 한가지 일만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은 바로 저를 향한 주님의 사랑 그 한 가지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해 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의 목자가 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은 저를 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은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를 드릴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를 집전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은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헤맬 때 주님은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은 성체성사로 적셔 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은 못 본 체해 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일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은 채워 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안스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은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제가 다시 주님 사랑의 빛 안으로 나오도록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끌어내 주시고

이 모든 일들을 저에게 겪도록 하심으로써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제 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그리고 저의 전생애의 역사가

주님의 오묘한 섭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주님 앞에 다가와서 청합니다.

주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주님이 저와 함께해 주셨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청합니다.

말씀으로 저를 일러 주시고

성체성사로 먹여 주시는

주님 앞에 서서 청합니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주님밖에 매달릴 분이 없어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주님이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에게 주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제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제가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를 복음의 사도로 써주소서.

제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주시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언제나 주님께 다가와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저를 불러 주소서.

주님은 제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제게 오셔서 저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소서.

아멘.




교황주일


(나해) 마태 16,13-19 : 97/06/29

주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병이나 낮게 해달라고 찾는 의사인가? 아니면 돈이나 많이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비는 은행장인가? 아니면 건강의 비결이나 되는 듯이 외쳐대는 텔레비전 박사인가? 주님께서 "사람이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마태 16,13) 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4절)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각자는 주님의 이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 생애의 순간 속에서 주님은 어느 분이신가? 내가 주님께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왜 주님을 믿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15절)고 제자들에게 직접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면서 그저 우리의 머리 속에서 알고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 베드로는 우리 각자의 삶 속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직·간접으로 개입하시는 살아계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아울러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도 주님이 살아 계십니까? 그리고 그분이 또 그분과의 관계가 여러분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시몬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찾아 얻는다기 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지요. 그것도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그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거기에 행복이 있고요! 주님이 나에게 필요한 분이시지만,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바로 그대로의 것을 주시는 담보물은 아니시지요. 내 욕심에서 풀려나와 주님을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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