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경축이동

루카 5,1-11; 16/10/30

한 때 우리는 어렵게 살았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충분치 못해서 이래저래 고생하면서 살았습니다. 옷은 매일 남의 것을 대물려 입고, 고기도 명절이나 기제일이 되어서나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콩 한 톨도 칼로 잘라 나눠 먹으면서 우애를 키우며 자라났습니다. 심지어는 한국 천주교회 사회복지사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 선조들은 성당을 짓기도 전에 먼저 양노원이나 고아원, 시약소(초기 보건소)를 먼저 지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빈곤했고, 가난했지만 그나마 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삶으로써 나름 행복했습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먹을 것이 풍족하다 못해 다 먹지도 않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싸놓고 있다가 상해서 버리기까지 합니다. 부부가 맛벌이를 해도 남는 돈이 없다고들 하지만, 아이들 공부시키랴 유학보내랴 엄청난 돈을 퍼부어 넣고, 정작 부모는 휴가 때 어디 가질 못해 성당에 옵니다. 도로는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고 노는 날이면 유원지마다 인산인해입니다. 비행기는 늘 만석이며 세계 관광지 곳곳에 한국 사람 없는 곳이 없습니다.

현대는 삶의 질의 향상과 소비성향의 다양화와 고급화로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에 비해 여러 가지로 풍족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풍족해 졌으면서도 덜 행복해 하면서 살아갑니다. 물질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기회적으로 더 많이, 더 자주, 더 먼저, 더 좋은 것을 갖고 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함과 박탈감이 우리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뭘 몰라도 정말 한참 모르시지, 가난한 사람들이 뭐가 행복하다는 말씀이신지. 간신히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차려 입을 정도가 되었는데, 다시 그 가난의 시절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신가? 어이가 없고, 정말 싫다. 그러니 성당에 오고 싶지 않다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성당에 오면 자꾸 가난하게 살라고 하니,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왜 자꾸 언급하는지?

교회는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는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을 찬미하거나 권고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빈곤 상태를 좋게 여기지 않으며,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믿음과 이웃 돕기를 연결하여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7) 여기에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실천을 곧 굶주리는 이웃 돕기라고 단적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강조하는 가난은 곧 이웃에게 나눠줌으로써 가난해지는 선택한 가난, 다른 말로 이웃 돕기로 말미암아 없어진 가난을 이야기 합니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가난해져야 하는가? 교회는 나와 내 가정의 오늘과 내일의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유지할 만큼의 여유를 남겨놓고 나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민족과 사회의 형편에 비추어 각자가 정합니다.

이웃 돕기를 많이 하기 위해서는 내가 돈을 많이 벌고 또 교회 내에 부자가 많아져야 하는가? 꼭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심정을 잘 알기에 더 잘 도와줍니다. 아니 동감하고 동정하기에 누구보다 먼저 나누게 됩니다.

가만히 앉아 따져보면, 미래를 위한 저축은커녕 오늘 나 살기도 빠듯한데 이웃과 나눌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누는 것만큼 아니 어떤 때는 물질뿐만 아니라, 나누는 기쁨과 보람까지 합쳐 10배 이상을 다시 채워주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의 믿음을 통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다섯 번째 행복을 자기 성취와 실현 너머의 나눔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눔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받는 것도 나눔입니다. 없던 것이 들어와서 기쁜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찾아와 나와 함께 자신을 나누는 그 형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서 또 기쁘고 행복합니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근대 사회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데 대해 노동자들이 반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가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당대 재산의 불균형과 소득의 불공정한 분배 상태를 미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이 구절을 통해 가난을 찬미하면서, 나중에 죽으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터이니 지금 가난하게 살아도 된다고 노동자들을 호도한다는 평가와 그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1833년 파리 대학의 프레드릭 오자남과 6명의 동료 대학생들은 이 구절이 현실에서 이루어 지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도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물질적 정신적인 것들을 제공해주자고 나섰고, 그로부터 성 바오로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설립되어 오늘날 전세계 교회의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우리 본당에서도 활동 중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교인인 우리가 가난한 형제들을 외면하게 된다면, 또 다시 세상은 교회에게 도전해 올 것이며, 우리가 듣고 나누고 믿는 예수님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위선과 방해물이라고 평가하고 단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2의 니체와 제3의 니체가 나타나 그리스도교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는 죽었다고 외칠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난은 비단 물질적인 결핍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인간 삶을 위협하는 모든 형태의 어려움을 가난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불안정과 외로움, 사회적인 소외와 고립, 제도적으로 제한된 기회와 정보, 물질 만능주의와 매스 미디어를 통해 영향력을 가중시키고자 하는 큰 손들의 횡포, 전통 문화와 가치의 몰락과 편중 등등의 어려움에서 헤매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그로 인한 기쁨이 참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삶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인의 대축일 미사를 앞당겨 봉헌하며 본당 신자 여러분 모두의 세례와 영명축일을 기념하는 오늘, 특별히 세례성사 받은 지 25주년이 되어 은세식을, 세례성사 받은 지 50주년이 되어 금세식을 맞은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한 번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다미아나 원장 수녀님의 은경축도 축하드립니다.

우리를 세상에 내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로 이끄시어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또 주님의 사명을 이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도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세상에 난 이들, 우리와 함께 세례를 받은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먼저 주님 곁으로 돌아갔는지 회고해 보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회상해 보면서, 지금 우리는 어쩌면 덤으로 받은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지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늘날까지 나를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도 되돌아 봅시다.

세례로 받은 새로운 생애를, 세례성사 25주년, 50주년을 맞아, 다시금 더 순수하고 충직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를 맡기고, 주님께서 이끄시고 비춰주시는 대로 어렵고 힘겹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보답하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더 큰 영광을 통해, 우리 모두 성인이 되기로 합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6,12)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 5,1-12ㄴ; 15/11/01


언젠가 빵 한 조각을 앞에 두고 기도를 바치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았습니다. 1918년 미국 미네소타 주 보베이라는 작은 탄광촌 사진사 에릭 엔스트롬(Eric Enstrom)은 백발이 성성하고 세상사로 몹시 지쳐 보이는 신발의 흙털이를 팔러 온 노인에게 빵과 수프를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 한 조각의 빵과 수프를 앞에 두고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사진사는 노인이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것을 보면서, “이 노인은 재물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 그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노인이 기도하는 사진을 찍었다고 합니다. 훗날 사진사의 딸 로나 나이버그(Rhoda Nyberg)가 아버지의 흑백 사진을 보고 유화로 그림을 그렸고, 그림의 이름을 ‘은총’(The Grace)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는 반면에, 죽음의 수용소라고 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상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의 ‘밤과 안개’라는 책을 읽어보면,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에게 주는 급식은 하루에 빵 한 개라고 합니다. 그 빵 한 개로 연명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남의 빵을 훔쳐먹거나, 병이 들어서 빵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빵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저 사람의 빵을 뺏어 먹는 바람에 그 사람이 쓰러진다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루 한 개 그것도 일하는 수용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빵 한 개를 병들어 누워있는 동료 머리맡에 남겨두고 일하러 나가는 수용자들이 종종 있었다는 증언을 듣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더 고생하고,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지금의 이 수고가 무엇이 대수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간다고 여기며 삽니다.

행복은 무엇입니까?

행복은 과연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가톨릭 대사전에 나온 행복주의에 따르면, 그리스 윤리학의 중심개념인 행복은 직접 도달할 수는 없고, 선하게 충만한 덕에 따라 나아갈 때 비로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윤리적인 덕을 실현하고 충실하게 의무를 다할 때 행복의 길을 찾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얻는 선이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영혼의 정화를 통해,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마음의 내적 독립성과 자유, 즉 깨끗한 평정심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이에게 개방된, 자유로운 도덕적, 정치적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준 삼아 사회적 행복주의를, 에피쿠로스나 홉스는 행위자의 개인적 행복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성서신학사전에서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생명, 평화, 기쁨, 휴식, 축복, 구원 등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들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이 만든 백성들을 크게 염려하고 계시다는 면이 다르며,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오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정의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행복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지혜 문학에서는 하느님을 경외하며 영도자가 되고 축복을 받아(시편 112,1-2), 많은 자손을 가지게 되고(시편 128,1-3), 생명, 구원, 축복, 부유를 확실히 얻으려면(잠언 3,1-10) 하느님의 길을 택해(시편 1,1), 율법을 따르며(시편 119,1), 지혜에 귀를 기울이고(잠언 8,34-35), 이를 찾아내어(잠언 3,13-14), 그것을 실천하고(집회 14,10),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 주면(시편 41,2) 행복을 얻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착각과 실망의 괴로운 체험을 통해(시편 118,8-9; 146,3-4), 자신의 소망을 정화시키며, 유한하고 불안정한 현세를 넘어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섭니다. 자녀가 없어도 덕이 많은 의인이 되어 정신적인 자녀들을 많이 얻음으로써 행복해진다(지혜 3,13-15)고 봅니다. 가난한 이들은 주님을 향한 신뢰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시를 읊조리며(시편 73,23-28) 신약을 기다립니다.

신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행복이 이루어짐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어, 하느님께서 인간의 결핍과 비참을 제거하시고, 자비와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갈증을 채워주시고,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마태 11,29)심으로써 행복을 구현하십니다.

마리아는 믿었기 때문에(루카 1,45) 구세주 예수를 낳을 수 있었고, “행복한 사람”(루카 1,48; 11,27)으로 불렸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루카 11,28), 보지 않고 믿는(요한 20,29)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줍니다.

구약이 부유와 성공을 지상적인 가치로 여기며, 가난과 실패 속에서 바라보는 정의의 가치를 모호하게 연결시켰다면, 신약의 예수님은 이 지상적인 모호함을 없애버리시고, 굶주리고, 울고, 가난하고, 박해를 당하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포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그리고 그 모든 행복의 한 가운데 주님 자신이 계심을 알려주심과 아울러 행복과 보상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베드로 사도는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하여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두렵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1베드 3,14; 4,14) 라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이어 전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한 개라도 더 얻고 하나라도 더 성취함으로써 가졌다고 여기는 지상의 영예가 우리에게 완전한 행복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거꾸로 제가 강론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앓고 있던 병자의 머리맡에 자신의 빵을 대신 놓고 간 이들의 생생한 삶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행복과 새생명을 가져다 주고 계심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 인간을 구하기 위해 주님 자신의 생명을 내주신 행위의 뒤를 이어 죽음의 한계 상황에서도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주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고 갚아주시리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 예수님을 믿으며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은 하늘 나라를 얻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 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참 행복을 발견하고, 또 그렇게 살아 실제로 행복하기를 빕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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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5,1-12 : 14/10/26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 덕으로 피정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피정 가서 잠도 많이 자고, 기도도 많이 하고, 집에서는 숨쉬기 운동만 하는데 거기서는 아침 점심 저녁 먹고 근 한 시간씩 걷기도 했습니다. 건강하시고 무고하셨는지요?

이번 요한 복음을 주제로 한 교구 연중 사제피정에서 피정 강사 신부님께서 저희들에게 여쭈셨습니다. 여러분은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살고 계십니까? 신앙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합니까?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 복음이 ‘참행복’이어서 그 질문과 꼭 맞아 떨어지는 주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경제적, 사회적인 성공보다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이웃의 아픈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의 행복에 대해 더 깊이 바라보십니다.

오늘은 행복선언의 한 구절씩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 당하는 가난 안에서 - 가난한 사람들, 괴로워하는 사람들, 하느님만이 도울 수 있는 가련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난을 싫어하고, 가난한 처지를 불행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가난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이는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닥친 가난한 상황 안에서, 서로의 인격과 인정을 나누며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

2)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 안에서 - 자신의 시간과 능력과 가진 것이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들은 주님처럼 다른 이들에게 다 줌으로써 가난해진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만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 남에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어서 자기가 대신 당하거나, 이웃이 나쁜 일이 생겨 괴로워하는 것 때문에 함께 슬퍼하는 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모여와’ 이웃을 도와 주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세상의 행복과 구원을 막고 지연시키는 불의와 사리사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슬퍼하는 이들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과, 다른 이들을 위해 살지 못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항상 불만족하고 불안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 언제나 동료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고, 친절하고 자상하여 편하게 해주는 사람, 기다려 주고 용서해 주며, 기꺼이 함께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세상의 주인이며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힘을 믿어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성령의 열매 - 갈라 5,22-23)를 간직한 채, 겸손한 종이신 그리스도, 주님 곁에 모인 그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넷째,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 거짓을 싫어하고, 미움을 받더라도 나쁜 일에 함께하지 않으며, 죄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사랑으로 떠맡는 사람들, 일예로 낙태라는 죄를 조장하기보다 미혼모 보호와 입양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성실하게 공정을 펴며,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는”(이사 42,3-4) 사랑의 투사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며, 하느님을 ‘목말라’(요한 19,28)하기에, 하느님께서 그들의 갈증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다섯째,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 죄인을 용서하고 죄인의 인간 존엄성을 중시하는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대신 용서를 청하시며, 십자가상에서 죄를 뉘우치는 다른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자비를 입어,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여섯째,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 자기 죄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 불안해하고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거나 다른 생각(꿍꿍이 셈)을 하여 믿을 수 없는 이도 있습니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그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밝혀 준다.”(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 헌장 16항)

일곱째,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 화해를 시키고 일치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원수는 하느님이 갚아 주실 것(로마 12,19 참조)이므로 보복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정의에 투신하겠다는 소신을 가지고,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여, “주님, 저를 주님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마음으로 일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여덟째,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외톨이 친구를 도와주다 같이 따돌림당하는 사람, 질서를 세우고 회복하기 위해 일하다 누명을 쓰고, 심지어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익명(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늘 나라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하느님의 예언자요, 의인으로서 살다가 죽임을 당하는 주님의 후예들은 주님께서 받으신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참행복의 결론 구절입니다.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다가 오해를 받는 경우나, 위의 여덟 가지 행복을 찾다가 미움을 사고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위의 여덟 가지 행복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이며,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은 예수님의 행복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을 갈구하는 마음을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치신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이며, 유혹과 악에서 헤어나, 주님께로 가서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마태 6,7-15).

여러분은 이 여덟 가지 행복 중에서 어떤 행복을 누리고 싶습니까? 어떤 행복을 청하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신자 여러분, 주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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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5,1-12 : 13/11/01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에 힘입어 이번에 독일 수도원 체험 피정을 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기로 했던 수도원에 임 세바스챤이라는 신부님이 살고 계셨는데, 저희가 도착하기 바로 전 토요일에 그 신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도착한 다음날 장례미사를 봉헌했는데, 마치 한국에서 장례미사라도 참례하러 간 것처럼 23명의 서울대교구 신부들이 함께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고별사처럼 신학생 시절 애창곡이었던 '임쓰신 가시관'이란 노래를 불러드렸습니다.

1935년에 태어나 1965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그 해 9월 30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와 성주와 점촌 본당에서 사목하시고 성 베네딕도 시청각 종교교육 연구회와 분도출판사, 분도 미디어 등 한국의 출판문화사업을 일으키고, 1985년에는 가톨릭 통신 교리서 편찬위원장으로 활약하시며 평생 희생 봉사하시던 임 세바스챤 신부님은 전년도에 병환을 얻어 고국 독일 분도 수도원으로 돌아가셔서 투병 중에 올 10월 12일 만 78세의 일기로 주님께 돌아가셨습니다.

임 세바스챤 신부님이 생을 마무리하셨던 그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1884년 독일 보이른 지역 15개 수도원 소속 1,806분의 수도자들이 설립하였습니다. 성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라는 이상을 표방하며, 파견된 해당 교구에 가서 수도원을 설립하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학교 및 예술 활동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구 전체의 사목을 도왔습니다.

그 수도원은 아프리카 우간다에 선교사를 파견하다가, 1909년 2월 당시 서울대교구장 뮈텔 대주교님의 간곡한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사우어 신부등 2분의 선교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백동)에 처음 자리를 잡고 1911년 수도원을 세우고, 1913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10년에는 ‘숭공기술학교’를 세워 목공, 칠공, 원예 등 7개 작업분야를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숭신사범대학’을 세웠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교황청에서는 1921년 사우어 신부를 원산교구의 주교로 성성하고, 1927년 원산교구 자치를 위임하자, 우리나라 베네딕도 수도회는 함경도 덕원으로 수도원을 옮기고 신학교도 세웠습니다. 1925년부터는 투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회 수녀들의 협조를 받아 활발한 사목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8년에는 원산교구로부터 독립 설립된 연길지목구에 1922년부터 수도원을 세워 활동하기 시작한 연길 베네딕도 수도원은 1931년 11월부터는 스위스 캄의 올리베타노 수녀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사목활동을 펼쳤고, 1934년 8월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고, 같은 해 9월 5일 브레허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성성되고, 1937년 4월 연길 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주교로 성성되었습니다.

1940년 교황청으로부터 덕원 수도원 자치구는 덕원 면속구로 승격되고, 원산교구는 함흥교구로 개명하여 12개의 본당과 89개의 공소 신자 11,000명, 신부 34명, 수녀 33명의 교세를 갖추게 되었고, 1946년 연길 대목구는 교구로 승격되어 중국교회로 소속을 달리하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1945년 해방 후 덕원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은 소련군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1950년 10월에는 독일 신부 6명과 우리나라 신부 5명이 처형되었고, 사우어 아빠스 주교를 비롯한 신부, 수도자 18명이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많은 수의 수사 신부님들이 외국으로 추방당합니다.

1951년 7월 피난길에 나섰던 한국인 수도자들은 대구 주교관으로 이사해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고, 1951년 9월 베넥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는 교황청의 재가를 받아 미국 뉴튼 수도원에 체류하던 이성도 디모테오 신부를 덕원 면속수도원과 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하여 1952년 6월 경북 왜관읍 왜관 성당과 낙산 성당에서 왜관감목대리구장으로 착좌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한국에서 추방되었던 비테롤리 신부와 21명의 수도자들을 왜관 수도원으로 다시 파견하여, 2007년 현재 사제 48명을 비롯한 종신 서원자 108명등 139명의 수도자들이 본당과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회사업과 문화 예술 및 피정의 집 등에서 활동하고 있고, 2009년 9월 25일에는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아울러 1949년부터 1952년 공산치하에서 덕원과 연길, 보이른 수도원과 원산 수녀원 및 함흥 교구 소속으로 순교하신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수사들을 파견했던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의 뮌스터 슈바르작 수도원 대성당의 입구 왼쪽에는 덕원 수도원에서 순교하신 독일과 우리나라 신부, 남녀 수도자, 신학생 38위를 모신 소제대가 있습니다.

저는 그 소제대를 바라보면서 부끄럽고 감사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까지 와서 헌신적으로 봉사했지만 정작 저를 비롯한 한국 교회에서 제대로 기억해주지도 못하고 있는데 반해, 그곳에선 먼 나라에까지 가서 순교한 이들을 위해 소제대를 마련하고 그분들 한 분 한 분의 영정을 마련하여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나라 신앙의 순교 선조들에 이어 피와 땀을 흘려 한국 교회의 자양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현세에서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이루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주님 때문에 모욕을 받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3-12)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특별히 봐주지 않아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기억해 주지 않아도, 주님만 바라보신 임 세바스챤 신부님을 비롯하여, 오직 한 분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불태우신 선교사분들께 감사와 존경 그리고 희망을 보탭니다.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은커녕 버림받고 배척받으며, 이상한 사람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제거당한 분들이 오늘 우리에게 성인으로 다가 오십니다.

우리는 가끔 복음 선교와 인류 사회 형제자매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희생에는 소극적이면서도, 인류 공동체에서 인정받고 부각되는 영광은 부러워합니다. 오늘 형제들에게 기억되기 위해 이리저리 애써도 내일이면 잊혀지고 말지만, 오늘 부각되지 못해도 복음에 대한 열정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어머니처럼 두고두고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 먼 훗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납시다.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3-12)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 5,1-12ㄱ : 12/10/28

교회는 매년 11월 1일을 맞이하여 모든 성인의 대축일을 지냅니다. 이를 기념하여, 제가 여러분 한 분 한 분 때 맞춰 축일 인사를 드리지 못하기에, 오늘 여러분의 합동 영명 축일을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우리 앞 뒤와 좌우에 앉아 계신 분들을 바라보며 서로 서로에게 축하의 박수를 쳐줍시다.

오늘 우리는 행복을 어디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것을 어떤 상태와 어떤 환경을 행복이라고 말합니까?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얻고, 이루고자 합니까?

학창시절 주 토론의 주제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구호는 8월 15일 광복절에 부르는 노래 가사로만 남아 사람들의 일차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난 듯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불의를 정화하려는 사회적인 노력은 극단적이고 대립적인 압력단체들의 그룹 이기주의로 변질된 듯하며,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던 시민적인 노력은 경제 제일주의와 글로벌 세계 경제 건설이라는 구호아래 묻혀져 버린 듯합니다.

우리 세대가 꿈꾸는 희망은 무엇입니까?

우리 세대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희망과 관련하여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4-25)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로마 8,23) 까지 입니다. 희망은 영혼의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은 갈증에서 옵니다. 그리고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하고 답답한 현실에서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그 갈증을 풀어주실 분께로 향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상을 거꾸로 살아도 분수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 편안하게 살고 싶어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요,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까지 여기는 인간사회에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거의 괴변에 가까운 설교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가난은 우리 모두 반갑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하고 안되면 도움을 받아서라도 가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교회도 가난에 처한 환경을 개선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께서는 오늘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가난의 상황과 정도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부자를 욕하면서 어서 빨리 부자가 되기 위한 탐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속 좁고 인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부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자신만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셨다고 여기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형제들과 공유하고 나누려는 마음을 가진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또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 나눌 때 하느님께서 갚아주시고 채워주시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비단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재화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 신뢰와 배려 및 지지를 표하고 재능과 시간 및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을 보면,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사도 2,44-45) 라고 합니다. 또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을 보면,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5) 라고 합니다.

한국에 온 프랑스 선교사 달레는 박해시기의 한국 신자들이 “모든 재산과 권리를 몰수당하고 박해를 피해 이 산 저 산으로 쫓겨 다니면서도 서로 먹을 것을 나누었기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었다.” 라고 1874년 ‘한국천주교회사’에 기록했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어 식사 때마다 얼마 안 되는 음식도 나누어 먹었으며, 또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그 끼니에 먹을 쌀의 양에서 한줌의 쌀을 꺼내어 별도로 저장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좀도리 쌀” 혹은 “줌쌀”이라고 부르고, 한국 천주교회의 모든 자선 헌금과 헌미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행동 정신이 되었습니다.

박해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 하나 신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는커녕 고발하려고 두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척박한 상황에서 이렇게 자신을 나누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증거라는 말 외엔 다른 표현이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 향한 믿음과 주 예수님께서 내려주신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는 복음화 활동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모욕과 지탄을 받고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오히려 행복해야 합니다. 나 잘 살기 위해서나 내 돈 들여 내 일하다가 당하는 것이라면 억울하지나 않건만, 나를 위해서도 아니요 내 일도 아닌 주님의 사업을 하는데 겪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 할 말이 없고 알아줄 사람이 없어도 우리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뿐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도 그렇게 당해왔지만 그렇게 꾸준히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며 살아가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우리 가족이, 우리 구역·반이, 우리 사회가 이것만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애타게 기다리는 염원이 있습니까?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염원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게 정화시켜 주시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꼭 이루어주시기를 청합시다.

여러분의 영명축일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오늘 우리 모두의 축일을 기념하며, 우리가 진정 주님 앞에서 정당하고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기도 중의 하나는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휘감아 주십시오.’와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웃에게 봉사하는데 필요한 재능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시오.’ 하는 청원임을 새삼 느낍니다.

매 미사와 기도 중에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청합시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의 은총을 입게 되면, 형제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그 은총의 열매를 나눕시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 5,1-12ㄱ : 98/11/01

요즘 사회 사람들이 많이 힘들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어떤 분은 "아예 옴짝 달싹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힘들어서 포기한 듯 있으니까 주님이 다 알아서 겨우 굶지 않고 살 정도로 해주신다."고 하시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믿음을 전제로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믿음이 없이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 ㄱ) 그런데 아예 루가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루가 6,20s)라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돈이 없을 때 행복하세요? 돈을 어떻게 쓸까? 내가 돈 있는 낌새를 어떻게 알아서 여기 저기서 돈 달라고 할 때나 돈을 어디다 감출 때 없을까 하고 고민할 때나 '돈이 없었으면 편하겠다.'하는 생각이 들지 진정 돈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왜 주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까?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냥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어서 빨리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하고 돈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마음으로는 사욕에 가득 차서 이미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부자는 더더군다나 아니고요.

그러면 누가 주님의 말씀처럼 하늘나라를 차지할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바로 주님이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합니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 자식 하나 잘되라고 우리를 위해 사시느라 등이 굽고 얼굴에 주름살이 다 지도록 수고하셨고 아직도 우리에게 효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시면서도 우리를 염려해주시는 부모님에게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행복을 배웁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ㄴ) 돈은 빼앗길 수 있지만, 빼앗길 수 없는 행복. 그것은 바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 하느님께서 열 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내가 나누면 하느님께서 내가 나눈 것의 열 배 이상을 채워주시리라는 믿음과 희망 속에서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을 가족과 형제와 이웃들에게 바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믿음의 행복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믿어 주님께서 채워주시길 기대하면서 자신을 바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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