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다해) 마태 10,17-22; '25/07/06

언젠가 천주교 의정부교구 가톨릭 사회복지회에 ‘하느님은 삼등’이라는 게시물이 올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삼등


일등은 하고 싶은 일, 이등은 해야 하는 일

삼등은 하느님 만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해야 하는 일도 다 마치고

그 후에 여유가 있다면 하느님을 만나줍니다.

하느님은 삼등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도 하느님은 삼등입니다.

내 힘으로 한 번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그나마도 안 될 때 하느님을 부릅니다.

하느님은 삼등입니다.


거리에서도 삼등입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나 자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그 다음에야 저 멀리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삼등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나는 일등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부르기만 하면 도와주십니다.

내가 괴로워할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오십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다고 생각이 들 때는

홀로 내 곁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니다.

나는 하느님께 언제나 일등입니다.


나도 하느님을 일등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만나고

작은 고비 때마다 손을 꼭 붙잡는 내게

일등으로 가까이 계신 하느님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일등이신 하느님을

나도 일등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습니다. 양반 가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습니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떠났습니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5개 국어도 하고, 한국 최초의 지도인 ‘조선 전도’도 제작하셨고, 감옥에서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당시에 서양 문물을 공부한 몇 안 되는 인재인데, 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그냥 그렇게 1년 만에 순교하실 것이 아니라, 당시 조국인 조선 정부에 호의적으로 협조하고, 그것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선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정부와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인심을 얻으면 선교하는 데 더 좋지 않았을까?

시기와 방법론적으로 적당히 현실에 순응하고 협조하며, 천천히 선교 사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예, 아니오’라는 이분법적이고 대결적인 국면으로만 몰아가 순교하셔야만 했을까?

한쪽으로는 아쉽기도 한 김대건 신부님과 뜻있는 선인들의 순교를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누구인지, 그리스롤 믿는 신자인 내 신분에 따라 적절히 드러내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모든 것을 사제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쌓았고 발휘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짊어지고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에, 교회 공동체와 사회와 인류가 자신에게 그 때 그 순간에 짊어져 주기를 바라는 십자가를, 외면하거나 미루지 말고 기꺼이 짊어져, 주님 사랑의 도구가 됩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처세술,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재물들을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회의 가치관에 맞춰 드러내고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주일에 오륙일은 직장과 생업에 종사하느라 성당에 와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공휴일이나 쉬는 날에는, 남모르게 열 일 제쳐놓고 성당에 와서 기도합니까?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지만, 지금 평소에 없는 시간을 찌 내어 성당에 와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시간이 생겨도, 몸에 기도하는 습관이 들어 있지 않아서 기도하기 무척 어려워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내어주신 주 하느님과 우리를 죄악의 굴레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새 생명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과 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고 계신 성령께, 우리는 잠시 잠깐만의 기도할 시간도 못 내드리는 것인지, 기도할 마음이 없는 것인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기도할 정도로 믿고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식별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자투리 시간이라도 내어 기도합시다. 그렇게 하느님께 되로 드리고, 말로 되받는 은총을 체험하며 살아갑시다.

우리는 종종 “가정이 먼저 아닙니까?”라는 말을 하고 또 듣습니다.

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직장과 일 앞에서도, 가정을 먼저 생각하십니까?

입원비와 수술비 앞에서도, 가정을 먼저 생각하십니까?

혹시라도 그 말을 핑계 삼아, 자신에게 십자가를 짊어져 주기를 바라는 공동체의 청원을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허울좋은 함정에 빠지지 맙시다. 진심으로 자기 가정의 화목과 안녕을 위해 주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헌신하는 그리스도인 자녀가 됩시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또 듣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자기가 아쉬울 때,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고, 하느님께서 그의 청원을 들어주셔야 한다고 욕심 사납게 생각하고, 또 자신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떠나려고 하는 이기적이고 현세적이며, 탐욕적인 자기 투사에 빠지지 맙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굳건한 믿음 안에서 자신의 삶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합시다. 설사 그로 인해 오늘 이 지상 생애에서 우리 삶에 손해와 고통이 따를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향한 우리의 희망으로 주님을 향해 꿋꿋이 살아 나갑시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가해) 마태 10,17-22; '24/07/07

예전에 한번 한국교회사연구소와 가톨릭신문이 공동으로, 김대건 신부님께서 주교님과 선교사 신부님들을 모시기 위해 중국까지 왕복한 라파엘호를 복원하였습니다. 라파엘호는 약 11명 정도 탈 수 있는 배입니다. 복원 기념으로 라파엘호를 끌고 중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기념행사를 치뤘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서 돌아오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최측에서는 김대건 신부님께서 귀국하고자 했던 그때 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신부님들과 참석자들이 작은 라파엘호에 올라타서, 큰 배에 라파엘호를 매달고 출항하고자 했더니, 중국당국에서 출항허가를 내주지 않았답니다. 이유인즉, “너희 나라에 가서 죽으라.”라는 것이었답니다. 너무 위험해서 출항허가를 내주지 않았답니다.

지금은 물론 그때도 목숨을 내놓고, 설사 성공하여 조선으로 귀국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체포령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의 자유가 이루어진 다음에 시도하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위험한 길을 선택했을까?’

라고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울지 않은 아기 젖 안 주듯이, 원치도 않는 종교자유를 다른 누가 선물해 줄리 없기 때문에, 그 위험한 선교의 길을 택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오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겸 교황 주일을 맞아, 왜, 무엇 때문에, 성인들을 비롯한 우리가 죽음을 무릅쓰고까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지, 교회의 소명을 되새겨 보기로 합시다.

첫째로,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선교와 복음화’를 위한 공동체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서로 사랑하셔서 그 사랑의 열매로 세상이 창조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이 굴러가듯이,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 끝까지 사랑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라(마태 28,19-20 참조)고 하신 명령에 따라 선교합니다. 이 선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고, 마지막 날 우리를 구하러 다시 오시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며, 그 기쁜 소식을 따라 변화하는 복음화입니다.

그러기에 교황 바오로 6세는 ‘복음 선교는 그리스도를 알리고 세례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현대의 복음선교 17항),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 사항, 사고방식, 영감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19항)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교회가 할 일은 ‘사도양성과 공동체 건설’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로 지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대리하여, 이 땅에 복음을 선포하며 하느님 나를 완성하기 위해, 교회를 이룰 성직자를 양성합니다. 아울러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처세방법에 따라 살지 않고,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복음삼덕을 살아감으로써, 교회의 빛과 기둥이 되는 수도자들도 양성합니다. 그리고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삶과 자신이 맡은 역할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실현할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양성합니다.

이렇게 교회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인도로, 주님과의 친교 안에서 서로 하나되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는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고 양성합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이웃과 사랑나눔’을 합니다.

이웃과의 사랑 나눔은 단지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함께함으로써 마음을 열고, 마음을 모아 함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세 번째 소명의 예를 발견합니다.

사제도 종교 지도자들도 강도 만난 사람을 못 본 채 지나쳐 갔는데, 평소에 원수로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우리 사랑 나눔의 원형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영적, 물적으로 어려운 이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함께하는 일이, 우리 교회가 채워야 할 세 번째 소명입니다.

선교와 복음화, 사도양성과 공동체 건설, 이웃과의 사랑나눔, 이 세 가지는 우리 교회의 세 가지 소명이자 신자 생활의 세 가지 기준입니다. 이 세 가지 교회의 사목활동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받은 예수님의 사도들로부터,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비롯한 모든 성인 성녀들, 그리고 그분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오늘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방법이자 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점검하고,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로 합시다.

아울러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101위 순교성인들의 뒤를 이어, ‘124위 순교복자’분들이 성인 품에 오르시도록, 그리고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조선 왕조 치하의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순교자분들’과 근현대 신앙의 증인인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님과 동료 80위 순교자분들’과 ‘베네딕도회 덕원의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36위 순교자분들’과 ‘하느님의 종 소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하루 빨리 시복 시성되어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을 드높일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민족과 사회에 신앙을 증거하고 사랑을 나눔으로써, 이 땅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희생봉사합시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가해) 마태 10,17-22; '23/07/02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나신 1821년에는 이미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도 20여년이 지난 이후입니다.

1800년 6월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자 노론벽파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섭정을 통해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를 없애고자 했습니다.

1801년(신유년) 국상이 끝나자, 전국에 '오가작통제'를 통해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이때 초기교회 지도자인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고,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로 간주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되었습니다. 충청도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참수되었습니다.

다음해 한국에 처음 들어온 중국인 주문보 신부가 자수해 참수되고, 주 신부님을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초대 여성회장 강완숙 골롬바도 아들 홍필주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전주의 유항검 이 누갈다 동정부부와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이 개입해야 한다는 백서를 쓴 황사영도 순교했습니다.

신유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명,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합 500명에 달했습니다. 이 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험으로써, 외적으로는 무너진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꾸준히 교회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짊어지신 김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내포지방 `솔뫼' 마을, 즉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명은 재복 본명은 `지식'이었습니다. 김 신부님은 6세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사합니다.

1836년 15세 때 그 곳 `은이 공소'에서, 모방 나 신부님으로부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성세성사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토마, 최방제 방지거와 함께 중국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837년 6월 7일부터 1842년 2월 15일까지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중 민란으로 1837년 8월과 1839년 4월 6일 두 번에 걸쳐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했습니다. 한편 최 방지거는 1838년 12월 27일 말라리아에 걸려 병사했습니다. 1844년 2월말 김 신부님은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훈춘을 방문했습니다,

김 신부님은 1844년 12월 17일 당시 조선교구 임시 교구본부였던 만주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에서 고 페레올 주교님께 사제수품을 받았습니다. 1845년 8월 24일 상해 횡당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하고 31일에 라파엘호를 타고 9월 28일 제주도를 거쳐 10월 12일 강경 나바위를 통해 입국했습니다.

김 신부님은 1845년 11월부터 1846년 4월 13일까지 경기도 이천의 골배마실과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약 1년간 사목생활을 하셨습니다. 김 신부님은 최양업 부제와 다른 신부들을 입국시키려고 배편으로 서해로 나갔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시다가 1846년 9월 16일 군문효수형을 받아, 새남터에서 순교하시고, 10월 26일 미리내에 안장됐습니다.

신부님은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르셨습니다. 1949년 11월 15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김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로 결정하고, 7월 5일을 축일로 지내기로 했으며,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의 해인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셨습니다.

어찌보면, 김대건 신부님은 자신이 관헌에 잡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야말로 악착같이 귀국하여, 그 다음 해인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제 생활 1년', '사목 생활은 겨우 5개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9년 동안 고생 고생 공부하고 1년여 남짓한 사제생활을 하고 당신 생애를 마감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조금만 더 사셔서 커다란 업적을 남기실 수도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은 금방 데려가시는 것만 같아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신부님께서는 한평생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그 하느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주님께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죽기까지 신뢰하고 의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분은 수차에 걸친 귀국행에서 죽음의 순간을 여러 번 맞았지만, 의식을 잃으면서까지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하셨고, 그 덕분에 다시 살아서 돌아가실 수 있었고, 마침내 사제가 되어 순교의 영광에까지 이르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한 번은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포교여행 중에 배가 표류하게 되었을 때, 신부님은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하셨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중국으로 되돌아가셔서는, 한국 교회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께 봉헌하셔서, 우리 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매년 12월 8일 축일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아울러 장상과 스승님들께는 깍듯한 존경과 순명을, 최양업과 동료 사제들에게는 부모님을 대신 돌보는 형제적인 사랑을, 평신도들에게는 참 목자로서 순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선교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갖가지 어려움에 깊이 동참하고 배려하심으로써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사목하셨습니다. 그분은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분은 박해의 순간에도 교리전달 뿐만 아니라, 신앙의 생활화로 성숙된 신앙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립 1,21-23)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볼 때 죽음은 하나의 낭패요 마침으로 보이지만, 거꾸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탄생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순간인 것입니다. 특별히 순교를 하느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의 희생제사와 연결시켜 생각할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접할 때마다,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순교자들을 이렇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에 충실하도록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힘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먹고 사는 데 도움이 안 되면, 얼른 버리는 것이 생존의 법칙인데, 그 본능적인 방법을 버리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아니 그 죽음을 그리워하기까지 하며, 앞다투어 죽어 가는 순교자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까지 자신의 꿈을 실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이 우리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가? 성찰해 보게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순교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고귀한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도 같은 주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청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금 내 인생의 이정표로 떠올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도록 합시다. 비록 우리의 육체와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서 구조적이고 물질적인 소유나 채움은 아니더라도, 거룩함에 이르는 순교자들의 정신과 순교에 이르기까지 몰두하고 충실했던 신앙의 고귀함을, 우리 생으로 채우고 완성시켜 성인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꽃꽂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마태 10,17-22; '22/07/03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무엇을 꿈꾸며 사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봤습니다.

김 신부님은 주 하느님을 향한 신앙이 인도하는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고자 했습니다. 1846년 9월에 쓴 그분의 마지막 옥중 편지를 보면, “<전략>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도우면서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환난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립시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삼구(三仇)에 맞서서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대들의 영혼을 위한 큰일을 경영하십시오…… 모든 교우들과 천국에서 만나 영원한 삶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후략>” 라고 신자들을 권면함으로써, 마지막 날 주 하느님과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염원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아울러 김 신부님은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라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비단 종교적인 신심에 그치지 않고, 현실 안에서 신앙을 이루려고 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직자들이나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목자로 칭송을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 인간이 누려야 할 ‘복음의 기쁨’에 대해 말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기쁩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내려주시며, 살게 해주셨기에 우리는 기쁩니다. 주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구하셨기에 우리는 기쁩니다. 이 기쁨을 어떻게 우리끼리만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쁘게 선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에 입각한 교황님의 이런 글귀들이 마치 공염불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실상 우리는 그렇게 기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슬퍼하기도 하고 고통을 겪기까지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생명을 주시면서, 주 하느님의 사랑과 마음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사랑과 인격적, 윤리적 가치를 존중하고 따르기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어떠한 인간적 사회적 관습이나 상식 등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을 더 선호하기까지 합니다.

사회생활도 현실의 물질적인 기반을 토대로 하기에, 물질적인 소유와 그에 따른 사회적 기회부여에 충분히 다가서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은 결핍되고 버겁기까지 한 육적인 삶을 삽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사회현상 앞에서 심각한 유혹을 받습니다.

간혹 우리는 주 하느님을 믿으며 사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거나 열등감마저 느낍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신비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어 행복과 평안한 삶을 누리도록 가정을 꾸려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생적인 사랑을 나눔으로써 하나되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를 안겨주기보다, 가족끼리도 자신의 이기적인 존립을 위해 서로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긴장과 갈등 속에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교황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나 살기 바빠서 내 주식의 포인트가 떨어지는 것에 민감하면서도, 어려운 이웃 하나가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소외를 시키며 살기에, 우리 각자 외롭고 힘겹게 살아갑니다.

결과적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기쁨과 안녕보다는 슬픔과 근심과 부담을 가득 안은 채 신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위협과 물질적인 결핍과 빈곤 속에서도, 주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믿음으로 영적 심리적 여유를 간직하고 기쁨과 평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대축일을 맞아, 오늘을 사는 사목자와 평신도 사도로서,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복음을 통해 비춰주시는 내일의 희망을 바라봅시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경축이동 꽃꽂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마태 10,17-22; '21/07/04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님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재복'이었고 보명은 '지식', 관명은 '내선', 본관은 '김해'입니다.

신부님은 1821년(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재준과 상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 때부터 천주교회에 입교, 순교하였으며,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모방 신부님은 1836년 4월 5일 부활절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고,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여 세례를 주었습니다. 모방신부님은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토마), 최방제 신학생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세 신학생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했습니다. 그런데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이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님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님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님의 성성식에 참석한후 주교님의 지시를 받고 184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이 만24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김대건 부제님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지나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 기간은 1년 남짓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으로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 주교님으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가,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세 체포되어 10일 해수 감영을 거쳐 다음 달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포청에서 3개월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나이 26세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에는 신부님의 두개골을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옮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상이 김 신부님의 일년 남짓한 사목생활의 선교적인 측면의 공식 기록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의 내용을 일면 살펴보면, 김대건 신부님은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님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 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신부님도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천주교 사목 사제인 김 신부님과 최 신부님이 선교를 하면서 스승에게 청하는 내용에서 직접 선교에 필요한 성물이나 상본 등에 앞서 일반인들의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청하는 내용은 참으로 천주교회의 사목활동과 교회의 선교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선교사제들의 신학 원칙과 종교 신심에 지나치게 충실하다고들 하는 얀세니즘적인 엄격한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고국에 귀국하여 선교하면서 그들에게 신학과 사목을 가르친 스승에게 이러한 청을 한다는 것은 그분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선교의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한 방편이라고 교육받았거나 그분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보아온 사목의 형태를 선교지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 선교 온 매스트르 신부님도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 이전, 1854년 프랑스 성영회의 재정지원으로 ‘영애회’ 고아원을 설립했고, 1857년에는 영애회의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약소를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주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분들이 받은 교육은 정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견할 때 첫 번째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교육과 두 번째로 그 교리가 현실로 드러나는 이른바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사랑으로서의 사회복지 그리고 세 번째로 그러한 사업을 계속할 사도양성을 지시하였습니다(마태 9,35-38 참조).

1977년부터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 초기,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 등의 사목자들과 신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형제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실현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후대 사목자들은 성당 건물보다 고아원이나 시약소, 양노원을 먼저 짓고 운영함으로써 사회복지 활동을 선교보다 우선시하거나 적어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등하게 간주하였고 평신도들도 자신들의 삶으로 이러한 신앙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활동이 고난과 박해의 피난시절과 형장에까지도 그리고 박해자들에게까지도 드러남으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초기교회 때부터 사회복지로 통칭되는 이웃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이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교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한국의 초기 교회가 신앙 전파와 동시에 박해가 이어져 공개적으로 신앙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는 없어도,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교회의 사목 활동은 단순히 가난한 이에게 대한 일회적인 적선으로 그치지 않고 교우촌을 이루어 공동체차원에서 ‘한줌의 쌀’ 운동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실현해 나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으며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선교와 교회 역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대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사목과 신자 신앙 생활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의 이러한 신앙 형태는 오늘날 하느님께 바치는 순수하고 지고한 봉헌이 우리의 관심과 돌봄을 기대하는 이웃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펼쳐지는 교회 사목활동과 신앙생활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하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의 기준이요 기쁨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경축이동 꽃꽂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20/07/05

어떤 때 하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계획된 대로 잘 되지 않으면, 아예 끝내 버리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포기해 버리고 나면, 가슴 속에 남는 실패감과 좌절감 그리고 두고두고 후회감이 나를 오히려 짓누르듯 짐이 됩니다. 요즘 같을 때 사업을 접어야 할지 이직해야 할지를 고민할 때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접는 것만이 포기이며, 접지 않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버티기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더욱 더 그렇기는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이 먹고 싶고, 입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희생하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자식에게 돌아가는 선익 때문에 오히려 행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식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희망으로 자신의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고 보면, 포기는 실패와 좌절에서 오는 자조적인 아픔을 남깁니다. 그에 반하여 희생은 적극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내가 희생하는 대상에게 기여하는 선익의 증가로 기쁨과 보람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 뿌듯한 감정을 선사해 줍니다. 그리고 나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행복은 파괴적이거나 소모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교가 심리적인 불안정과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순종 행위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순교는 자신을 세상에 낳아 주시고 지금까지 함께해 주시며 사랑해 주시고 돌봐주신 주님께 대한 사랑의 보답이자 신의이자 자기 고백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다가올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순교는 현세 사회에서 적응을 실패한 이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지금 당장 눈앞에는 십자가의 고통과 실패와 좌절만이 보이지만, 이어서 다가올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교의 순간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우리의 부족한 지혜를 일깨워 주시고 우리 신앙을 북돋아 주시리라는 희망도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우리가 어릴 때 교리시간에 수녀님들이 해 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가 졸려서 조금 더 자려고 할 때, 왼쪽에서는 악마가 ‘조금만 더 자고, 성당에는 늦게 가거나, 정 피곤하면 안가도 된단다.’라고 유혹하고, 오른쪽에서는 천사가 ‘어서 일어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 오거라.’하고 권고한단다.”

사도 성 바오로도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순간을 이렇게 풀어갑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7,18-21) 그러면서 절망 속에서 울부짖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24절) 그리고 그 해결책을 성령의 도우심에서 찾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4-26)

아울러 주님께서는 박해와 순교의 순간이 계속 이어지는 순간에 신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오늘 이 순간에는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를 박해하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배교하지 않으면 죽음을 택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피의 순교는 이제 지구상의 몇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직간접적으로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거절하고 배반하도록 강요합니다. 남보다 먼저 획득하도록, 남보다 많이 가지도록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 윤리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규정들을 어기고 무시하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부축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누가 유혹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악마와 손잡고, 그 유혹의 부작용이나 후폭풍은 생각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해서라도 남보다 좋은 자리에 앉아 잘 살고 싶은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3-15) 이제는 나 개인과 사회를 살아가면서 오는 유혹의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백색의 순교를 살아가야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이 노동과 이성과 사상과 문화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대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의 순교로까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성 바오로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1-2) 우리 역시 세상에 살지만 우리는 세상이 살라고 요구하는 대로 살기보다 주님께서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5-16)

그렇다고 우리가 선하고 좋은 일만 하는 사람도 아니요, 정직하고 티없이 깨끗하기만 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통해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고자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시선과 마음에 맞추고서,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그렇게 우리가 주 하느님께서 펼쳐 주시는 부활의 영광에 희망을 두고 살아나갈 때, 주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흘리신 피와 땀의 보람을 느낄 수 있으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5-6절)

보장되지 않은 내일을 바라보면서, 늘 스스로 점검하고 결정하여 살아갑시다. 현실에 실제로 눈을 띄어 주고 손에 쥐어 주고 입에 넣어 주어야만 믿고 움직이는 토마 사도처럼 마음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지 말고, 손해와 위험이 될지 모르는 순간에도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주님의 순교자가 됩시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성령께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념하며 오늘 첫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을 축하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 하느님께서 펼쳐 주시는 복음의 길을 비춰 주시고 그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경축이동 꽃꽂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18/07/01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시몬 부제님 강론


오늘은 7월 5일인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옮겨서 지냅니다. 사실 이 축일(7/5)은 1925년에 있었던 79위 순교자들의 시복식 이 있던 날입니다. 교회는 이 날을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서 실행하면서 사는 이 땅에 사는 사제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할 것으로 정했습니다. 그 이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성인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축일이 정해졌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김대건 신부님만이 아니라, 사제들 넓게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저는 요즘 독신의 의미를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아무래도 이제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이 와 닿고 있어서 그런가 싶습니다. 예전에 독신이다 하면, 혼자 사는 것. 결혼하지 않는 것만 떠올렸습니다. 그렇기에 혼자 밥 먹고, 청소하고, 강론 준비도 하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남들보다 좀 더 긴 생활 방식으로 사는 것을 독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꼭 독신이어야 하나? 나는 애기도 좋아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교황님께서 독신을 풀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의 교황님도 그건 안 된다고 말씀하시네요.

독신은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서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사제의 삶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순히 혼자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혼자 사는 삶, 바로 이것이 독신입니다. 그렇기에 혼자 산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신념을 가지고 산다는 것, 그 신념을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사제 독신의 삶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신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예언자들을 보면서 느낍니다. 예언자들은 대부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라.’하고 부르짖다가 왕에 의해, 왕과 결탁한 집권층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합니다. 그러한 예언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오늘의 제 1독서에서 나오는 즈카르야 사제입니다. 즈카르야 사제가 살아갈 당시의 왕과 대신들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여러 예언자가 말하였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에 즈카르야 사제가 나섭니다. 왕과 대신들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2역대 24,20) 이 정도 강하게 말했으면 정신을 차릴 줄 알았으나, 일은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세상에서 권력자의 앞을 막는 방해물을 치워버리듯, 권력의 기득권층은 음모를 꾸며서 즈카르야를 죽여 버립니다.

신념있는 삶은 그 모습만으로도 타인을 힘들게 할 수도, 힘을 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거슬리는 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에 따라서 ‘그럼 지금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거야’라고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듣는 것에 따라서 감사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내 삶의 문제가 뭐지’라며 돌아볼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앞선 예언자의 바람은 후자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힘 있는 자들이 다시 고민해 보고, 하느님께로 백성을 이끌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는 예언자의 좋은 마음이 전달이 될 수도 있고, 독서에서처럼 전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달되지 않을까봐 걱정에만 있는 것보다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이 사제의 삶이 아닐까요.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그 말 한마디를 잘 전달하기 위한 것이 사제 독신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 고민 합니다. 타인이 거부할 수도 있는 말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욕먹을지 모를 선택을 계속 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믿음을 어떻게 실천하고 살지 늘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그 고민의 끝에 순교가 있습니다. 1925년에 있었던 79위 순교자들의 시복식의 그 날을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며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순교,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라는 것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라면, 끝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복음은 말해 줍니다.

사제들의 수호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기억하는 오늘 사제들을 비롯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강한 신념을 두고, 세상에 나가기를 바랍니다. 세상과의 만남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마지막에 다가오는 환난과 어려움들을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사제들과 세상에서 묵묵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실천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경축이동 꽃꽂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17/07/02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님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재복'이었고 보명은 '지식', 관명은 '내선', 본관은 '김해'입니다.

신부님은 1821년(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재준과 상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 때부터 천주교회에 입교, 순교하였으며,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모방 신부님은 1836년 4월 5일 부활절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고,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여 세례를 주었습니다. 모방신부님은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토마), 최방제 신학생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세 신학생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했습니다. 그런데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이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님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님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님의 성성식에 참석한후 주교님의 지시를 받고 184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이 만24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김대건 부제님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지나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 기간은 1년 남짓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으로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 주교님으로부터 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가,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세 체포되어 10일 해수 감영을 거쳐 다음 달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포청에서 3개월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나이 26세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에는 신부님의 두개골을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옮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상이 김 신부님의 일년 남짓한 사목생활의 선교적인 측면의 공식 기록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의 내용을 일면 살펴보면, 김대건 신부님은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님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 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신부님도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천주교 사목 사제인 김 신부님과 최 신부님이 선교를 하면서 스승에게 청하는 내용에서 직접 선교에 필요한 성물이나 상본 등에 앞서 일반인들의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청하는 내용은 참으로 천주교회의 사목활동과 교회의 선교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선교사제들의 신학 원칙과 종교 신심에 지나치게 충실하다고들 하는 얀세니즘적인 엄격한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고국에 귀국하여 선교하면서 그들에게 신학과 사목을 가르친 스승에게 이러한 청을 한다는 것은 그분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선교의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한 방편이라고 교육받았거나 그분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보아온 사목의 형태를 선교지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 선교 온 매스트르 신부님도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 이전, 1854년 프랑스 성영회의 재정지원으로 ‘영애회’ 고아원을 설립했고, 1857년에는 영애회의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약소를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주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분들이 받은 교육은 정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견할 때 첫 번째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교육과 두 번째로 그 교리가 현실로 드러나는 이른바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사랑으로서의 사회복지 그리고 세 번째로 그러한 사업을 계속할 사도양성을 지시하였습니다(마태 9,35-38 참조).

1977년부터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 초기,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 등의 사목자들과 신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형제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실현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후대 사목자들은 성당 건물보다 고아원이나 시약소, 양노원을 먼저 짓고 운영함으로써 사회복지 활동을 선교보다 우선시하거나 적어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등하게 간주하였고 평신도들도 자신들의 삶으로 이러한 신앙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활동이 고난과 박해의 피난시절과 형장에까지도 그리고 박해자들에게까지도 드러남으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초기교회 때부터 사회복지로 통칭되는 이웃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이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교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한국의 초기 교회가 신앙 전파와 동시에 박해가 이어져 공개적으로 신앙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는 없어도,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교회의 사목 활동은 단순히 가난한 이에게 대한 일회적인 적선으로 그치지 않고 교우촌을 이루어 공동체차원에서 ‘한줌의 쌀’ 운동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실현해 나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으며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선교와 교회 역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대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사목과 신자 신앙 생활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의 이러한 신앙 형태는 오늘날 하느님께 바치는 순수하고 지고한 봉헌이 우리의 관심과 돌봄을 기대하는 이웃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펼쳐지는 교회 사목활동과 신앙생활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하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의 기준이요 기쁨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14/07/06

예전에 한 예비신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부님, 일요일이 놀라고, 달력에도 놀라고 빨간 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왜 일요일날 놀러 가라고 하지 않고, 성당에 와서 주일미사를 드리라고 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일요일은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놀라고 빨간색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제 삼 계명 때문에 빨갛게 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찬미의 제사를 올리게 해 달라는 청원을 올렸습니다. 그렇지만, 로마 당국자들은 이 청원을 거절했고, 청원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죽여버렸지만 청원은 박해와 순교로 중단되지 않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청원으로 겨우 얻어낸 빨간 색, 곧 주님의 날입니다. 영문 선데이(Sunday)로 표기되는 ‘태양신의 날’은 태양을 신으로 모시던 로마인들의 관습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태양신에 적용하여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현세의 빛인 태양으로 여기기 시작한 데서 기인합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은 긴 순교의 행렬 끝에, 일주일에 하루,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주간 첫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Sunday)로 정하게 되었고, 로마의 현실에 맞춰 주님의 날은 태양신의 날인 주간 첫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아울러 구약에서 유다인들이 주간의 제 7일인 토요일에 주 하느님을 기리는 안식일(출애 20,8-11; 신명 5,12-15)에서, 신약에 와서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마태 28,1; 마르 16,12; 루카 24,1; 요한 20,1 참조)을 기념하여, 주간 첫 날 로마 태양신의 날을 ‘주님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게 된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주일, 흔히 말하는 일요일은 ‘쉬는 날’이 우선이 아니라, ‘주일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쉬는 날’에서 기인했고,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늘날까지도 이 날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의 날, 곧 부활하신 주님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날 무엇보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한 주간을 잘 지내게 해주신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오는 한 주간을 기쁘고 사랑 가득한 가운데 지낼 수 있기를 청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리고 한 주간의 피로를 풀고 힘있게 다시 일하기 위해 쉽니다.

또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 친척을 찾아가 인사하고 돌봅니다.

어떤 때, 구교우분들은 주일미사뿐 아니라 아침 저녁 공과나 삼종기도 그리고 대소재를 바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척 죄스러워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이 기도와 단식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기에, 그 중 한 축인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공동체 기도 생활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일례로, 레지오나 연령회, 빈첸시오 등 각종 신심 봉사활동 단체에 들어 함께 기도하며 활동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중요한 교회 공동체 신앙생활로 자리 잡혀 있습니다. 주님께 기도를 바치며 자신의 활동을 성모님이나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면서 기도하고 활동하는 신심적인 신앙생활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커다란 장점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마태 18,19)

현대에 와서 교황님들은 비단 과거의 개인 신심을 바탕으로 한 성인 공경 중심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무척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방향과 행위를 복음에 기초하고, 나와 우리 인류 모두의 복음인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함”(마태 6,10)으로써 건설되어 가는 하느님의 영역, 곧 이 땅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개인과 사회 공동체 복음화의 핵심으로 삼고 계십니다.

교황 바오로 6세에 이어 현대의 교황님들은 복음 말씀을 우리의 일상과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직접 실천하는 것이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세우는 최고의 신앙생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복음 선교는 그리스도를 알리고 세례를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17항),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 사항, 사고방식, 영감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19항) 라고 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회의 선교사명」에서 복음화는 교회가 인간과 전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이며(2항), 선교를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선교,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복음화, 즉 재복음화로 나누었습니다(33항).

선교 방법에서는 ‘실천을 통한 증거’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 선포’, ‘그리스도교적인 회개와 세례’, ‘지역 교회 설립’, ‘복음화의 힘인 기초 교회 공동체 육성’, ‘복음과 민족 문화와의 융합’, ‘타종교인들과의 대화’, ‘양심 교육을 통한 인간 발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선교의 아홉 가지 방법으로 잡았습니다.

그중 “주교들과 주교회의들이 사목 활동의 우선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기초 교회 공동체, 즉 소공동체는 가정이나 그와 비슷한 한정된 환경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교리를 공부하고 인간과 교회 문제들을 공동 노력으로 해결하고자 토론하는 그리스도인 모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공동체들은 교회 안에서 활력의 표지이고 신자 양성과 복음화의 도구이며, ‘사랑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51항) 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대교구는 주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현실에 접목하기 위해 함께 연구하고, 함께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사목정책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복음화의 방법을 ‘구역반 소공체의 복음 나누기’로 정했습니다.

소공체의 복음 나누기와 그에 이은 공동실천은 구교우들이, 하면 다행이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으로 여기지 않고, 마치 빼먹으면 벌이라도 받을 듯이 꼭 바치는 개인 신심기도만큼 중요하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인 우리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하는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새로운 복음화 방법론입니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초대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 신자들이 현대의 변화된 복잡 다양한 한국 사회 안에서, 함께 사는 형제자매들과 복음을 나누고 실현함으로써,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과 이 사회의 복음화에 그 사명을 다하기로 합시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먼저 열심히 기도하며 시간 나는 대로 봉사하는 개인적 신심생활을 넘어 스스로 복음화되며, 혼자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주님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나가며 복음 말씀을 일상에서 함께 실현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 소공동체로 엮어진 본당 공동체의 친교와 지역복음화에 매진하기로 합시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마태 10,19)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11/07/03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님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재복'이었고 보명은 '지식', 관명은 '내선', 본관은 '김해'입니다.

신부님은 1821년(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재준과 상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 때부터 천주교회에 입교, 순교하였으며,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모방 신부님은 1836년 4월 5일 부활절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고,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여 세례를 주었습니다. 모방신부님은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토마), 최방제 신학생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세 신학생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했습니다. 그런데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이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님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님과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습니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님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님의 성성식에 참석한후 주교님의 지시를 받고 184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이 만24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김대건 부제님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지나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과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 기간은 1년 남짓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으로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 주교님으로부터 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가,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세 체포되어 10일 해수 감영을 거쳐 다음 날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포청에서 3개월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나이 26세였습니다. 신부님의 사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에는 신부님의 두개골을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옮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이상이 김 신부님의 일년 남짓한 사목생활의 선교적인 측면의 공식 기록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의 내용을 일면 살펴보면, 김대건 신부님은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님에게 보낸 열 번째 서한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 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신부님도 "이 모든 질병이 물의 비위생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니 물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시면 분명하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천주교 사목 사제인 김 신부님과 최 신부님이 선교를 하면서 스승에게 청하는 내용에서 직접 선교에 필요한 성물이나 상본 등에 앞서 일반인들의 공중 위생을 위한 물의 정화 방법을 청하는 내용은 참으로 천주교회의 사목활동과 교회의 선교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선교사제들의 신학 원칙과 종교 신심에 지나치게 충실하다고들 하는 얀세니즘적인 엄격한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이 고국에 귀국하여 선교하면서 그들에게 신학과 사목을 가르친 스승에게 이러한 청을 한다는 것은 그분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선교의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한 방편이라고 교육받았거나 그분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보아온 사목의 형태를 선교지에서도 자연스럽게 적용하고자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조선에 선교 온 매스트르 신부님도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워 신학생을 양성하기 이전, 1854년 프랑스 성영회의 재정지원으로 ‘영애회’ 고아원을 설립했고, 1857년에는 영애회의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약소를 설치 운영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주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한편 이분들이 받은 교육은 정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제자들을 파견할 때 첫 번째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교육과 두 번째로 그 교리가 현실로 드러나는 이른바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는 이웃사랑으로서의 사회복지 그리고 세 번째로 그러한 사업을 계속할 사도양성을 지시하였습니다.(마태 9,35-38 참조)

1977년부터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 초기, 김대건, 최양업 신부님 등의 사목자들과 신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형제들, 그 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생활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실현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김대건 신부님과 후대 사목자들은 성당 건물보다 고아원이나 시약소, 양노원을 먼저 짓고 운영함으로써 사회복지 활동을 선교보다 우선시하거나 적어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동등하게 간주하였고 평신도들도 자신들의 삶으로 이러한 신앙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활동이 고난과 박해의 피난시절과 형장에까지도 그리고 박해자들에게까지도 드러남으로써, 한국천주교회는 초기교회 때부터 사회복지로 통칭되는 이웃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응답이요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자신의 몸을 바쳐 순교하듯이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비록 한국의 초기 교회가 신앙 전파와 동시에 박해가 이어져 공개적으로 신앙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사회복지 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는 없어도,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교회의 사목 활동은 단순히 가난한 이에게 대한 일회적인 적선으로 그치지 않고 교우촌을 이루어 공동체차원에서 ‘한줌의 쌀’ 운동 등을 통해 조직적으로 실현해 나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으며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선교와 교회 역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대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교회 사목과 신자 신앙 생활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의 이러한 신앙 형태는 오늘날 하느님께 바치는 순수하고 지고한 봉헌이 우리의 관심과 돌봄을 기대하는 이웃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고 펼쳐지는 교회 사목활동과 신앙생활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하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의 기준이요 기쁨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06/07/02

지난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를 위한 기도의 날에 교황님께서는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강론을 묵상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마음 깊이 다가 온 부분은 예수님 앞에선 베드로의 자세입니다. 오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에,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대꾸하는 베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기로 합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못잡고 돌아오는 것을 보시고는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가 5,4) 처음에는 베드로와 그 동료들이 반발하다가, 마지못해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갔는데,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6)자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을 불러 간신히 끌어올립니다. 그 엄청난 기적 앞에 베드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는데도 주님 앞에 엎드려 하소연합니다. 주님,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쓰십시오. 저는 자격도 없고,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랍니다. 저는 감히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주님께서 처음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하시며 부르시자, 우리는 어쩌면 다소 주저하면서, 뒤돌아보고 이것이 정말 우리의 길일까 망설이며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다가 어디쯤에선가 우리는 고기잡이 기적 이후 베드로가 겪은 것과 같은 경험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막대한 임무와 초라한 우리 자신의 부족함에 겁먹고 돌아서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기적 같은 신앙의 열매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주님의 위대하심에 경탄함과 동시에 그 기적 같은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 잘 알기에 두려워하고 망설이기도합니다.

어떤 때는 정말 몰라서 못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알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하기 싫어서 고사합니다. 모르면 모르니까 얼떨결에 대답하기도 하는데 반해, 아는 사람은 일도 일이거니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싫어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 교황님께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풀이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절히도 우리 손을 잡으시고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나를 떠나지 마라!’”

그런가하면, 우리는 살다가 무슨 일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주님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이번 일만 해결해 주시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습니다.’ ‘이번에 도와주시면 앞으로는 착한 사람이 되서 열심히 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꼭 기워 갚겠습니다.’

베드로는 베를 타고 가다가 풍랑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자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다가, 예수님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하시자, 베드로가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29) 우리도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야 말로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도와주셔서 살아가지만, 그뿐만 아니라 선교도 하고 교회 일도 하면서 좋은 일도 기적 같이 많이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하여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자기를 향해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두려워져서 물에 빠지기 시작하자 주님께 외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30) 그러자 주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땐, 설사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구해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왔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이부분을 풀이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손을 잡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부력’을 주셨습니다. 곧 믿음에서 비롯되어 우리를 위로 떠오르게 하는 가벼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손을 뻗어 우리를 잡아 주시고 끌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축해주십니다. 우리의 눈길을 언제나 주님께 고정시키고 주님께 손을 내밉시다. 그분의 손이 우리 손을 잡게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가라앉지 않고, 죽음보다 강한 생명과 미움보다 강한 사랑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몇 번이고 다시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있고, 그 믿음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가끔 베드로와 우리가 다른 것은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가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면 주님께 간절히 청하는데 반해, 우리는 신앙의 위기가 오면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다가 조금만 섭섭하거나 자기 심기가 불편하면 불평 불만을 일삼고 마음으로 때로는 몸으로까지 냉담하게 됩니다.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건 저래서 문제다. 그래서 성당 안나간다.’ 심지어는 부부끼리 싸워도 성당에 와서 더 간절히 기도하고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싸우긴 자기가 싸웠으면서도 ‘왜 이런 남편을, 왜 이런 아내를 주셨느냐’고 자기 불만족의 책임을 주님께 돌리며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라, 세상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님께서 자기 비위를 맞추기라도 해야 하고 자기 일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부모에게 삐져 집나가는 철부지 어린이들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콱 코 빠지고, 팍 고꾸라지기라도 해서 죽을 지경이라도 되면 주님께 매달리는데, 적당히 힘드니까 심술이나 부리고 투정이나 부렸다는 것을 지나고 보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주님의 도우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믿는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이 한 없이 죄스럽고 제 자신이 한스러운 것은, 주님께서 건져주시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곧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기만 하지, 정작 주님께 바치기로 했고, 바쳐야할 부분에 대해서는 입씻어 버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마음속에서 기적을 바라면서도 기적을 이루기 위해 내가 쏟아 부어야 할 열정과 희생을 생각하노라면 피하고만 싶습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주님께 청할 줄만 알았지, 주님께 되갚고 주님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르는 진정 이기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과는 전혀 아랑곳없이 그저 자기 자신만의 안위를 생각하는 우리의 철저한 이기주의가 우리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와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를 반복하고,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살아왔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이익만을 계산하면서...

이제 주님을 바라봅시다. 이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세상 구원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해야할 우리 신자들의 의무를 실현하기로 합시다.

우리 한국 천주교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축일에 우리 각자에게 따로 따로 다르게 내려주신 선교 사명과 복음화의 사도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도록 합시다.

아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05/07/03

작년 오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우리 본당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오셔서 우리 본당의 젊은이 4명을 예비 신학생으로 축복해 주시고, 김 대건 신부님의 뒤를 이어 사제직을 걷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셨습니다.

지난 일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본당의 알렉스 리베라, 김규정 요셉, 이태호 요한, 김진호 미카엘 4명의 예비신학생들이 시애틀 대교구의 ‘쿼바디스 데이’라는 성소자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시애틀 대교구 예비 신학생 피정 도중에 걱정이 되서 우리 친구들을 보러 갔는데, 우리 친구들이 다른 나이 많은 미국 친구들과 어렵지 않게 어울리고 잘 지내는 것을 보고 흐뭇했습니다. 곱게 곱게 잘 자라서 사제의 길을 걷게 되길 기도합니다.

예비 신학생 피정에 가서 한 신부님께서 왜 자신이 신부가 되었고, 어떻게 성소를 받았는지 설명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성소에 대한 가르침을 설명하기보다는 신부님들과 주교님들이 자신이 왜 신부가 되었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성소자들의 마음속에 더 깊은 흔적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믿음에 대해서 설명할 때 “잘 모른다.”다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물을 때 우리는 잘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보다, 내 생애 동안 내가 만난 예수님, 예수님께서 내게 무엇을 가져다 주셨고, 나에게 어떻게 해 주셨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말하기도 쉽고 힘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체험이고 그 체험으로 인해 변화된 자기 삶의 일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리를 배워서 영세받고, 미사에 참석해서나 구역 모임에서 정해준 기도문을 줄줄이 외워서 또는 다 함께 바침으로써만 신앙생활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우러나오는 체험의 깊이를 더해갈 때 우리의 신앙이 더욱 더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6월 시애틀 대교구 사제 연수 때, 요즘 젊은이들은 ‘돈 많이 벌어서 잘 사는 것’이 꿈이라는 설문조사를 보았습니다. 1966년도에는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86%였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42$%였지만, 2003년에 와서는 반대로 의미가 39%였고 돈 많이 버는 것이 74%로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미국 교회에서 독신 사제보다는 종신 기혼 부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신앙에서가 아니라 물질적이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도 성소의 또 다른 위기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난을 싫어합니다. 또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은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그리고 편하고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꼭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부채질하고 그 욕구를 채워가기 위해 자신이 중요시하던 것들을 포기하고 배반해야 하는 갈등과 전쟁과도 같은 경쟁 속에서 생겨나는 긴장과 불안이 더해집니다. 그러한 갈등과 불안을 위기와 추락으로 결말시키지 않고 계속 자신의 삶을 받쳐주고 긴장을 완화시켜주며 우리의 마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할 가치와 의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전하고 교회라는 공동체적으로 증거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사제와 수도자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을 피하고 편하고 안락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거꾸로 인간 세계 안에는 연약하고 불안한 행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가정이 보잘것없는 충격과 작은 위기에도 어처구니없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불행과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고, 가난하고 어려움에 봉착한 이들을 위해 전적으로 기도하고, 미사 성제를 봉헌하며, 성사를 집전해 줄 사제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가정에 신앙과 삶의 깊이를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성사를 집전하며 하느님께 우리를 이끌어줄 사제들이 많이 생겨나도록 기도하고 우리의 귀한 아들 딸들을 세상의 구원을 신앙의 힘으로 이루고자하는 그리스도교 교회를 위해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2004/07/04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며, 어릴 때의 이름은 '재복'이었고 보명은 '지식', 관명은 '내선', 본관은 '김해'다.

신부님은 1821년(순조21) 8월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재준과 상흥 고씨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 때부터 천주교회에 입교, 순교하였으며, 아버지 '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 순교함으로써,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신부님의 가계는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루었다.

모방 신부님은 1836년 4월 5일 부활절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공소를 순방하던 중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를 방문하고, 김대건을 신학생 후보로 선발하여 세례를 주었다. 모방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김대건과 함께 최양업(토마), 최방제 신학생을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냈다. 세 신학생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했다. 그런데 마카오에 민란이 일어나 1837년 8월과 19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이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29일 남경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출동을 중지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교구장 베지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1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이 만24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사제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일 변문을 지나 15일 서울에 도착한 뒤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하여 상해로 도항할 준비를 하고 4월 30일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작은 목선인 라파엘호에 승선하여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8월 30일 상해를 출발 40여일 만인 10월 12일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활동 기간은 1년 남짓했다. 신부님은 조선 교구 부교구장으로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는 일에 충실했다. 신부님은 1846년 5월 14일 주교로부터 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에 편지와 지도를 탁송한 후 순위도로 왔다가, 거기서 6월 5일 관헌들에세 체포되어 10일 해수 감영을 거쳐 다음 날 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신부님은 포청에서 3개월동안 40차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26세였다. 신부님의 사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되었는데 40일후 이민식(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에는 신부님의 두개골을 혜화동 가톨릭대학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님은 25편의 편지를 남겼고, 한국 최초의 지도인 '조선전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지리 개설서를 저술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김대건 신부님은 당시 조선의 전통 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또 하나의 문명 세계인 서양의 학식을 신앙 실천을 통하여 전파하려 하였다. 신부님은 세계를 일종의 가부장적 공동체로 인식하여 하느님을 인류의 아버지라 하고 인류를 대가족이라 말하면서 모든 인류가 형제와 같이 결합되어 친구처럼 지내는 사해 동포주의를 열망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가 중국 정부를 통해 한국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요청하게 함으로써 민족 선교와 구원을 가져오려고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부터 신자들은 '대군대부'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하느님을 인류의 대왕이며 공동의 아버지로 믿었다. 김대건 신부님은 이러한 아버지 하느님을 '임자'라고 불렀고 또 그 아버지께 '효도'를 바쳐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형벌을 당하고 있다고 했으며, 또 신부님 스스로 순교를 통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효애심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은 현세를,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았고,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만날 기쁨에 가득 차서 살았다. 신부님은 박해를 영혼의 위기로 보았고 하느님을 공경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서 신자들을 전투장의 군사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쓸 때까지 신앙을 증거하며 살아나가도록 독려했다.

그리스도가 무수한 수난을 받고 순교로써 교회를 세웠듯이, 교회도 당연히 수난을 겪으면서 자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한국 교회가 겪고 있는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말하였다. 그러면서 시련을 견디는 충실한 신자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한 몸같이 형제애를 나누며, 낙담하지 말고 자시 자신에게 충실하며, 마음을 견고하게 다지고 박해에 임하도록 권고하였다.

신부님은 또한 성모님께 대한 신심도 강했다. 그는 배를 타고 항해일 때나 대륙을 여행할 때나 급하고 어려움을 당하면 성모께 깊이 의탁하고 보호를 청했다. 신부님은 성모님이 '하느님 다음'이라고도 하셨다.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회 설립 후 한국 교회의 기원을 이룬 첫 사제였다. 그분의 인격에 대해 당시의 조선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는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그에게 얻어 주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는 서양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조류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 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전각자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사람답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고, 하느님과 교회, 교회의 장상과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였다. 그는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다가 죽음으로써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다.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의 뒤를 이은 한국의 성직자들 그리고 신학생들이 김대건 신부님의 뒤를 이어 한국 교회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울러 함께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나가고 있는 수도자들과 봉헌자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사회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을 비롯한 평신도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마태 10, 20)의 인도를 받아, 삶을 통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요 증거자로서 복음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2003/07/06

사제직은 숭고하다고 한다. 사제직이 숭고한 이유는 사제직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희생 수난하신 구원사업을 이 땅에서 이어 수행하는 직책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보기에 따라서는 어느 한 사제가 잘나 보이기도 하고 못나 보이기도 하고 또,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못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그 사제를 통해 미사가 봉헌되고 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고 그 사제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 그러기에 자신을 위해 성무를 집행하는 그 사제가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두 마리 토끼도 잡을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전신자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예수님도 채우시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제 한 사람이 채울 수 있겠는가!

좀더 좋고 잘난 사람이 사제가 되어 오기를 바라지만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하신 주님 말씀처럼 잘난 사람들은 다 세상에 돈벌러 나가고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이가 사제가 되어 온다.

반면에 그런 신자들의 바램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사제의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어느 사제가 신자들의 욕을 먹고살기를 바라겠는가? 어느 사제나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사제 한 개인이 문제가 있다고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사제직이 세상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기대와 멸시, 애정과 증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다 받아야 하는 것이 사제직이고 사제가 한 평생 짊어지고 걸어야할 십자가다. 욕을 먹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야만 하는 것이 사제직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이 사제직을 선택하고 또 계속 사제로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때가 되면 사라지고 만다. 심지어는 사제 자신도 죽는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 안에 남아 있고 바꿀 수 없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다. 이것만이 사제를 사제답게 하고, 사제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며 매력이다.

여러분, 교회의 모든 사제들이 항구히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도록, 그리고 죽어야만 하는 주님의 사명을 포기하고 세상의 평판과 영예를 선택하라고 하는 악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2002/07/07

지난주간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나마 살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나약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죄악을 자비로이 용서해 주시고, 부족한 부분을 은총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니까 계속 범죄하고 또 은총으로 채워주시니까 그저 은총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회심이 있기에 또는 회심하도록 용서해주시는 것이고,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소명이 있기에 또는 소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으려면, 첫째,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 자주 기도하고, 평일 미사에도 참례하고, 내적 외적 봉헌 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 예수님을 닮고 싶어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 나머지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시고자 매일 기도하셨던 모습, 제자들을 양성하셨던 모습,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애쓰셨던 모습,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던 모습을 닮고자 해야 한다.

셋째,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고 싶어해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고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그 말씀이 꼭 실현되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도록.

넷째, 예수님처럼 세상의 박해를 이겨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예수님이나 순교자들처럼 사람들의 오해와 누명을 쓰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현세의 물질적인 대가가 없는 순수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뭔가 뒤로 들어오는 것이 있지 않을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몰이해와 박해를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과 교회 그리고 세상의 구원을 위한 꾸준하고도 충실한 노력이 필요하다(로마 5, 3-4 참조).

다섯째,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한다. 마지못해서도 아니고 사랑해야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주님이 좋아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주님을 사랑해서 우리가 추진하는 주님의 일이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청해야 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시고 주님을 깨달아 믿고 주님의 안내를 받아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희망을 일구어 나갈 수 있도록!(2절 참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2001/07/08

올해는 신유박해 200주년이 되는 해다. 1800년 6월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에 즉위하자 노론벽파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섭정을 통해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를 없애고자 했다.

1801년(신유년) 국상이 끝나자 전국에 '오가작통제'를 통해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초기교회 지도자인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고,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로 간주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참수되었다.

다음해 한국에 처음 들어온 중국인 주문보 신부가 자수해 참수되고, 주신부를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초대 여성회장 강완숙 골롬바도 아들 홍필주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전주의 유항검 이 누갈다 동정부부와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서양이 개입해야 한다는 백서를 쓴 황사영이 잡혀 순교했다.

신유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명,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합 500명에 달했다. 이 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해 외적으로는 무너진 것처럼 보였으나 꾸준히 교회를 이루어 왔다.

김대건 신부님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악착같이 귀국하여 그 다음해인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하셨다.

순교자들의 전기를 접할 때마다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과연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에 충실하도록 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힘이 부럽기까지 하다. 먹고사는데 도움이 안되면 얼른 버리는 것이 생존의 법칙인데, 그 본능적인 방법을 버리고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아니 그 죽음을 그리워하기까지 하며 앞다투어 죽어 가는 순교자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었다.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까지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꿈을 실현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이 우리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가? 순교자들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고귀한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도 같은 주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청하자.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5)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2000/07/09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에 탄생하셔서 1836년에 세례를 받으시고 1837년에 신학생이 되서 마카오로 공부하러 가시고 1845년 8월 17일 사제수품을 받으시고 1845년 10월 12일 귀국하시고 11월부터 1846년 4월 13일까지 사목생활을 하시다가 1846년 9월 16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제 생활 1년', '사목 생활은 겨우 5개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9년 동안 고생 고생 공부하고 1년여 남짓한 사제생활을 하고 당신 생애를 마감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조금만 더 사셔서 커다란 업적을 남기실 수도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은 금방 데려가시는 것만 같아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필립 1, 21-23)라고까지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볼 때 죽음은 하나의 낭패요 마침으로 보이지만, 거꾸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탄생시점에서 본다면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순간인 것입니다. 특별히 순교를 하느님의 뜻을 따른 예수님의 희생제사와 연결시켜 생각할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 속에서 주님을 향한 올곧은 마음이 어떻게 그분의 사목생활을 이끌어 갔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신학생 때부터 선교사들이 들어 올 귀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육로로, 해상으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오로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또한 선교를 하면서도 사람들이 천연두에 걸려 죽어 가는 것을 보고, 교수 신부님께 처방전을 알려달라고 청하기까지 하며 모든 사람들을 보살펴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잡혀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는 교우들이 신앙을 잃지 않고 굳건히 살아나가도록 감옥에서 편지를 보내 교우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아 주님께 대한 올곧은 믿음과 그분께 대한 희망으로 오늘을 살고 계신 교우 여러분, 우리도 우리가 그리워하는 주님의 품안에 온전히 안기기 위해 우리도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신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선택과 적극적인 실천을 해야 하겠습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가해) 마태 10,17-22; '99/07/04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내포지방 `솔뫼' 마을, 즉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명은 재복 본명은 `지식'이었습니다.

6세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사하고 1836년 15세 때 그 곳 `은이 공소'에서 모방 나 신부님으로부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성세성사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토마, 최방제 방지거와 함께 중국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837년 6월 7일부터 1842년 2월 15일까지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중 민란으로 1837년 8월과 1839년 4월 6일 두 번에 걸쳐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했습니다. 한편 최 방지거는 1838년 12월 27일 말라리아에 걸려 병사했습니다.

1844년 2월말 조선 입국로 개척을 위해 훈춘을 방문했습니다, 1844년 12월 17일 당시 조선교구 임시 교구본부였던 만주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았습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에서 고 페레올 주교님께 사제수품을 받았습니다. 1845년 8월 24일 상해 횡당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하고 31일에 라파엘호를 타고 9월 28일 제주도를 거쳐 10월 12일 강경 나바위를 통해 입국했습니다.

1845년 11월부터 1846년 4월 13일까지 경기도 이천의 골배마실과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약 1년간 사목생활을 하시다가 최양업 부제와 다른 신부들을 입국시키려고 배편으로 서해로 나갔다가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 군문효수형을 받아 새남터에서 순교해 10월 26일 미리내에 안장됐습니다.

1857년 9월 23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뒤, 1949년 11월 15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김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로 결정하고 7월 5일을 축일로 지내기로 했으며,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의 해인 1984년 5월 6일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셨습니다.

이상의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신부님께서는 한평생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그 하느님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주님께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죽기까지 신뢰하고 의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분은 수차에 걸친 귀국행에서 죽음의 순간을 여러 번 맞았지만 의식을 잃으면서까지 주님과 성모님께 기도하셨고 그 덕분에 다시 살아 돌아갈 수 있었고 마침내 사제가 되어 순교의 영광에까지 이르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한 번은 우리 나라에 들어오려는 포교여행 중에 배가 표류하여 성모님께 간절히 기도하셨고, 살아서 돌아가셔서는 한국 교회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께 봉헌하셔서, 우리 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매년 12월 8일 축일을 지냅니다.

그분은 아울러 장상과 스승님들께는 깍듯한 존경과 순명을, 최양업과 동료 사제들에게는 부모님을 대신 돌보는 형제적인 사랑을, 평신도들에게는 참 목자로서 순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선교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일상에서 겪는 갖가지 어려움에 깊이 동참하고 배려하심으로써 아버지다운 사랑으로 사목하셨습니다. 그분은 서울 한양에서 1845년 3월 27일 외방전교회 대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에서, "조선에서는 어린 아기들의 대부분이 반점으로 얼굴이 흉해지는 병(즉 천연두)으로 죽어 가는데,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는 처방을 저에게 명확히 적어 보내 주시기를 스승님께 청합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분은 박해의 순간에도 교리전달 뿐만 아니라 신앙의 생활화로 성숙된 신앙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 공동체에 새로 태어나는 세례자들에게, 신앙 생활이 그냥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라 생활을 신앙의 정신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냥 일요일날 시간 돼서 성당 나가는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과 직장, 동네에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매순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서는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를 묻고 확인하여 실행에 옮기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성서를 읽어 주님의 말씀을 거듭 새기고 기도함으로써,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역 반모임에서 그리고 성서공부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기준이요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시길 바랍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 '98/07/05


지난 7월 3일 사제 서품 사제 서품식에 참여하면서, 과연 사제는 누구인가? 무엇이 사제를 가리키는 모습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교회 내의 신부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평신도 사도직을 사는 우리 신자 모두의 신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미사에 교회는 마태오 복음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10,18)라고 사도들이 앞으로 당할 박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으면 사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예고하시면 서도 "그러나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10,19-20)라고 하심으로써 위로를 주십니다. 이러한 위로를 받는 사제들은 '성령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사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2번째 독서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을 따라 보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에"(로마 5,5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로마 5,.2ㄴ)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께서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증거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날 우리 생활의 첫 자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 사랑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그 봉헌하는 삶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모습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늘 주님께 다가가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으려고 하고 우리가 알아들은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청해야겠다. 이렇게 늘 주님을 믿고 주님께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박해와 혼란을 극복할 수 있겠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취임 강론




일치와 친교를 위하여



지극히 공경하올 김수환 추기경님, 죠반니 바티스타 모란디니 교황대사님, 제위 주교님,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친애하는 성직자, 수도자와 교형자매 여러분, 만사를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로 마련된 이 자리에 대령한 저는 배달겨레와 한국교회에 주님의 풍성한 강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직면하여, 모세(출애 3,11-13; 4,1-17)와 요나(요나 1장; 2장)처럼 온갖 핑계로 그 두려운 소명을 피하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하느님의 손에 잡혀 지난 28년 동안 청주교구에서 하느님의 심부름을 성실히 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훌륭하신 분이 많이 계신데도,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부당한 저를 택하시어 책임이 더욱 막중한 직책을 맡기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길 없으나, 다만 참목자이신 주님께 의탁하고 교황님의 임명에 순명하여 감히 오늘 이 자리에 주님의 종으로 대령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2백십여 년 동안 순교자들의 피와 신앙선조들의 땀의 결실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격변시대를 헤쳐오는 100여 년 간 수많은 순교자들은 그 피로써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 교회 역대 지도자와 평신도들은 그 피와 땀으로 교회의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특히 지난 30년 동안 서울대교구는 물론이고 한국교회의 복음화와 우리 나라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신 김 추기경님의 영도 아래 한국교회는 사회적 사명도 충실히 수행해왔습니다.

저는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로서 요구되는 봉사직분을 맡으면서 하느님께는 지혜의 영을 간청하고, 교구 공동체에는 일치와 친교를 권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국민 개개인에게는 각자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성령이야말로 생명과 참된 행복의 원동력이시고, 공동체의 진정한 일치와 친교야말로 복음화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민 각자가 그 본분에 충실할 때에만 진정한 민주화와 나라 바로 서기는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세와 더불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때 나타나서 사도들을 감격하게 한 구약시대 대표적 예언자입니다.(마태 17,1-8; 마르 9,2-8; 루가 9,28-36). 그는 하느님의 분부를 받들어 진리와 정의를 일깨워즈는 충성 어린 직언을 한 까닭에 탐욕에 젖어 불의를 일삼는 왕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간난신고 속에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백성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로서 권위를 누릴 예언자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스승의 유업을 계승하는 막중한 임무를 인식하여 자기 스승보다 두 배의 영을 청원하였습니다(2열왕 2,9-15).

이제 2000년 대희년과 이로써 시작되는 제삼천년기를 내다보며 교회는 새로운 복음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교회의 새봄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세속화되고 경직된 교회의 모습을 쇄신하고 성령에 가득 차서 생명력이 약동하는 교회로 변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복음화를 통하여 배달겨레뿐 아니라 이웃 민족들에게도 하느님의 생명과 주님의 복음을 전달하는 사도직을 성심을 다하여 수행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고, 또한 교황님의 염원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서 교회는 일치와 친교의 공동체임을 새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일치와 친교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의 일치여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조그마한 한계 속에서 미소한 존재로 태어나 살다가 죽는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서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려면 영혼뿐 아니라 특히 육신의 절제와 자기 희생과 순교정신으로 자기 자신을 봉헌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교도권은 이 일치와 친교를 위한 봉사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교황님은 보편교회의 일치와 친교의 원천이고 중심이며, 주교는 개별교회의 일치와 친교의 원천이고 중심입니다(교회헌장 23항).

신자는 어느 누구의 강요나 지시에 의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진하여 믿음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의당히 그리스도의 분부대로 각자가 처한 사회환경에서 각자의 신분에 맞는 자발적인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하느님께 축성된 삶의 모범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수도자는 더더욱 거룩한 자발적인 동기에 따라 사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직무를 주교와 함께 나누어지는 공동운명체입니다. 각 사제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독특한 재능을 발휘하여 창의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주님의 생명과 평화에 이르도록 복된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주교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거룩하고 복되게 살도록 각 구성원들 서로간의 일치, 친교의 중심이 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동료 주교님들의 지도편달과 협조에 의지하여 신자로서의 삶과 성직자로서의 봉사와 함께 주교로서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도록 온 몸과 마음의 정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요한 21,17)고 대답한 베드로 사도를 본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는 것입니다"(1고린 9,22-23)고 선언한 바오로 사도의 삶을 이어받아 '모든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이 되도록'(Omnibus Omnia) 신명을 바치겠습니다.

저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주님의 은총과 성모님의 보살펴주심에 의지하여 저는 교구 공동체와 한국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분단된 조국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저의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부당한 저를 천거하여주신 여러 어른들께서 미천한 제가 이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아주시고 일깨워주시리라 믿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아울러 지나온 일생동안 음양으로 기도와 성원을 아끼지 아니하신 여러 은인들이 지상에서와 천상에서 지속적인 편달과 후원을 베풀어주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저와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인생의 길을 함께 가는 교형 자매 여러분이 저의 미숙한 점은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부족한 점은 보충하여주시리라 믿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하여 성원하여 주시는 모든 분들과 불가피하게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고 멀리서 함께 기도하여주시는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원합니다.



1998년 6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17-22: '97/07/06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려봅시다. 무엇이 그분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줄줄이 서서 끌려가듯 죽음의 행진을 계속해 가는 순교자들. 과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어갈 수 있었을까? 그것도 기쁘게 노래까지 부르며?!… 과연 자기 목숨까지 바꿀 정도로 그렇게 주님이 좋았을까?

한편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 미사 꼭 매주 드려야해요? 휴일 날은 들과 산으로 나가 쉬는 날 아녜요? 그리고 신앙이 우리의 긍지요 기쁨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부담과 짐으로 다가와 떨쳐버리고 싶고 세례 받은 것 물리고 싶기까지 할 때도 있지 않은가? 복음을 실천하다가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안 믿고 살지 뭐! 나에게 도움이 되어야 신앙이지 하는 유혹에 빠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이러한 가운데서 주님께 대한 신앙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꺼지지 않는 신앙의 불꽃으로 우리의 가슴을 태우고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킬 확실한 체험이 있어야겠다. 이러한 체험이, 그러한 믿음이 내 안에 자리잡기 위해 주님께 청해야겠다. 세대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을 굳건한 신앙, 항구한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영양분이 있어야겠다. 계속되는 체험의 영양분이 차곡차곡 쌓이고, 우리의 항구한 노력이 우리를 순교에 이르는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날, 우리가 주님을 증거해야할 그날에 성령의 인도에 따라 증거할 수 있도록.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 10,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