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가해) 마태 17,1-9; 17/08/06

예전에는 천주교에서 자살을 금지하기 때문에, 자살자에 대해서는 연도도 안 해주고 장례미사도 드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은 하느님에게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자기 생명이라도 해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므로 스스로 생명을 끊을 수 없다는 교리 때문입니다.

지금은 자살자가 명시적으로 신앙을 거부하는 의미로 고의로 생명을 끊는 것이 아니라면, 천주교 장례절차를 다 따르게 해줍니다. 현대 의학윤리와 윤리신학에서도 자살 할 때는 사람이 제정신으로 정상적으로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자살을 죄라고만 단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자살을 하게 되기까지 아무데도 의지할 데 없고,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그 사람이 자살하기까지 전혀 돌보지 않았던 우리 믿는 이들의 무관심과 소홀함을 자책합니다.

그런데 자살이란 단어조차 입에 담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시절에, 어느 신자 한 분이 자신의 아버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을 두고 어려움을 겪었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야말로 억울하고 비참하게 자신의 생명을 끊어버린 안타까운 마음을 성당에 와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데 그나마 성당에서 받아주지 않았답니다. 그 당시 성당에서는 자살을 죄로만 단죄하고 멀리할 뿐, 결과적으로 자살함으로써 죄인이 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위로와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는다고 느꼈답니다. 그 성당의 냉담한 반응에 낙담한 그 신자는 여기 저기 쫓아다니며 아버지의 넋을 위로해 드릴 방안을 고심하게 되었고, 그날부터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오랜 냉담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신부님께서 그 신자분에게 “주 예수님께서는 자살하신 너의 아버지를 위해서도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셨다.” 라고 말씀해 주셨답니다. 그 한 마디가 한 평생 짐처럼 그 신자의 가슴 깊이 멍울로 맺혀 있던, 아버지의 자살로 인한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셨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주셨고,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이 확 다가왔고, 오랜 냉담을 푸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죄와 상처로 인하여 갇혀있던 자신을 해방시켜 주어 구원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를 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제사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이 빛처럼 하얗게 변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나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 17,4) 라고 고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에 대한 반전이라도 펼치듯 곧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5절) 라고 전합니다. 아울러 제자들이 이 소리를 듣고 반가움에 환호하기 보다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6절) 라는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주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의 제안을 전혀 반기지 않는 것으로 비춰집니다.

왜 주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의 충심 어린 봉헌과 접대를 거부하셨을까? 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제안에 숨겨진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베드로는 특별히 다른 이유 없이 단지 어른들이 오셨으니 대접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주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세와 엘리야와 논의하는 가운데 그 거룩한 소명으로 인하여 영광된 환한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세상 사람들을 위한 희생이라는 주 예수님의 본질적인 소명을 포기하고, 여기 이 땅에서 자신들과 영화와 평안을 누리자고 하며 유혹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청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주 예수님의 사명을 재확인하며, 제자들을 저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훗날 예수님의 십자가상 제사가 부활에 이르는 희생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그 때서야 영광스러운 오늘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9절)

문득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6-8)

이 현성용 기사를 바라보면서 오늘 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기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2베드 1,19)

오늘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화하신 사건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소명을 되새겨봅시다.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소명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 자체로는 부담스러운 명제이지만,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동생들을 위해 맏이가 희생하듯이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발로가 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나해) 마르 9,2-10; 06/08/06

찬미 예수님!

안녕하십니까?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빛의 신비 제3단 ‘예수님 하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빛의 신비 제4단 ‘예수님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묵주기도를 하다가 이 빛의 신비 4단에 이르면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새로워지기도 합니다. ‘내가 듣고 내가 묵상하고 내가 아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내가 주님의 모습을 닮아 변화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게 되기도 하고, 다른 한 쪽으로는 ‘내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아는 것을 실제로 이루어야겠다’는 다짐이 솟아나 새로워지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빛의 신비 제5단 ‘예수님 성체 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합시다.’

성체성사를 이루는 삶은 ‘어떻게든 내가 살고 봐야겠다. 사는 것만이 선이다’라는 것도 아니고 ‘네가 희생하여 나를 살리라’는 요구는 더더욱 아니요, ‘나를 희생하여 너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섬뜩하기까지 한 이 주님의 위대한 사랑, 그 사랑을 기억할 때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희생으로 살게 된 것에는 감사하기 그지없고, 헤아릴 길 없는 주님의 사랑에 찬미를 드리건만, 우리가 그 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할라치면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희생하고 있지 않은 것은 또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위해 희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 그리고 이웃 친지까지 서로를 위해 희생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남모르는 양식처럼 이웃에게 조건없이 희생 봉사했을 때 내 마음에 채워지는 뿌듯한 보람은 참으로 생명의 양식입니다. 직업이라는 것도 희생 봉사하고 받는 수고료가 있을 뿐이지, 수고료를 받는다고 해서 희생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수고료를 받아서 살아야만 계속 희생 봉사할테니까 말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정과 자식을 위해서 그리고 사회를 위해 희생 봉사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희생 봉사하느냐 하는 것이겠습니다.

‘얼마만큼, 어느 정도 나를 내어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내가 누구를 위해 희생 봉사하느냐?’ 하는 것이

내 모습이 변한 정도이고 주님의 모습을 내 삶 안에서 내 몸으로 실현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 생애는 결국 성체성사를 이루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생을 주셔서 죽을 때까지의 시한을 줄테니 내 생애의 완성을 이루라고 숙제를 주셨고, 그 생애의 완성은 성체성사를 이루신 주님의 길을 각자의 삶 속에서 이루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숙제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그것을 다 이루고 채우고 나서 마침내 우리는 하늘에서 주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다 이루고 채우기까지 우리는 현세에서 고생하며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는 세상만사를 다 휘어잡고 거머잡고 싶어서 두 손을 꼭 쥐고 나오지만,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어서 두 손을 피고 간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의 교리문답 제1항에서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태어났습니까?”라는 질문에 “사람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므로 영생을 얻어 무한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를 지어내시고 우리를 죄와 악에서 구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보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과 그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몸소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쳐주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를 거듭 하느님과 연결시켜주시고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도록 우리를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성령님, 이 사랑의 삼위일체 하느님을 향해 변해가기로 합시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가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2베드 1,19)

아멘.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나해) 마르 9, 2-10: 2000/08/06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옛날에는 회갑 넘기기도 어려웠다는데 여든까지 간다고 하고 또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뜨겠다"는 이야기를 보아도, 우리 자신이 변화된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 같은 이야기다. 왜 변화되기 힘든가? 몰라서 못하는가? 아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발등에 아직 불이 안 떨어졌거나 지금 현재 사는데 지장도 없으며, 오히려 변화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자기에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자신이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이기주의적 본능과 그에 편승한 악의 세력은 아직도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죽이고 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은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 3)고 잘라 말한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새로 나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례성사 때 한 번 새로 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새로 나야 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로마 8, 7) 주님께서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의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3절)하신 것같이, 우리도 "성령의 힘으로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13절)

주님께서는 오늘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 변화되신 때는, 그분이 인간 구원을 위해 "죽었다 다시 살아날"(마르 9, 9) 일에 대해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이야기하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구름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심과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말을 잘 들어"(7절)야 한다는 확인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사도 베드로도, 그것은 신화가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2베드 1, 19)라고 권고합니다.

한편 약하디 약한 우리의 본성을 이겨내고 오늘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실 분은 성령이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대신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 26) 그래서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29절)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우리도 성령의 힘을 받아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 자신을 투신할 주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

(다해) 루가 9,28ㄴ-36 : 95/08/06 중고등부 주보 '하늘마음' 강론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한다. 동물은 애인을 만날 때가 되면 자연적으로 몸이 예쁘게 변한다. 그런데 사람은 동물적인 본성('사랑을 하면 예뻐져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인공적인 방법을 가미한다. 화장품에서부터 신체부위의 수술까지… 그리고 선물공세를 편다든지 또는 피아노 등의 악기를 연주한다던지… 비데오 카메라 같은 귀중품이나 또는 여러가지 기능을 소유함으로써 사랑받고자 한다.

그리고 또 한편 사랑받고 사랑하려는 마음보다 어떤 때는 그 사랑스러운이나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물건이라면 소유할 수 있지만, 사람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랑받고 싶은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찔한 경우도 있다. 더욱 아찔한 것은 사람의 생명(특히 태아의 선별과 남아 선호사상에 의한 여아의 낙태)이나 하느님마저 소유하고자 하는 경우다. 그러한 노력은 상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려고 한다지만 그 결과는 결국 상대를 망치거나 상대에게 버림받게 된다.

베드로는 잠자다가 갑자기 아름답게 변하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는 놀랍고 황홀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루가 9,33a)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제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 알지 못한다. 주님은 세상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주님의 죽음'(루가 9,31b)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청은 결국 그에게 죽음을 포기하라는 말이 되고, 주님의 사명을 그만두라는 말이 된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루가 9,33ㄴ)

여기서 아버지께 사랑받으려는 주님의 노력과 주님께 사랑받으려는 베드로의 노력 차이를 볼 수 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명, 곧 인간 죄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하신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자신만의 주님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께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루가 9,35)하는 인정을 받지만 베드로는 침묵하게 된다.("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참조) 사랑받으려면 "그의 말을 들어라!"(루가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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