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마태 28,16-20; 15/05/31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도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자기 자신을 차선으로 하고 자식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알아차리고 감사하는 마음의 정이 들라치면, 이른바 ‘남자와 자식은 철들면 죽는다.’고 하는 말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미사 시작 때, 사제는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고, 하느님의 외아들 성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시고 구하시려는 은총을 베푸시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주시고 구원해 주시려는 성부와 성자께 이끌어 주시고 마침내 연결시켜주십니다.

이토록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가 처한 시간과 기회와 상황과 처지에 맞춰,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적절히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에,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돌봐주시려고 서로 돌아가며 노심초사 애쓰시기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내리 사랑으로 흘러 넘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향해 흘러 넘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주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보답으로 주 하느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며 감사를 드립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다가오시는 그 사랑의 보답으로, 우리는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우리 이웃을 바라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에게 향하는 그 사랑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주 하느님께 사랑을 돌려드리며 감사를 드리게 하는 선교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님께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사랑을 나누도록, 즉, 선교하도록 명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해주고 감사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선교가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그 사랑은 자신과 이웃에게 생기를 북돋아 주고 기쁨을 샘솟게 하며, 서로를 묶어 하나되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웃을 모른 체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면, 그 사랑은 서로를 구분하고 갈라놓으며, 서로에게 단절과 아픈 추억을 안겨줍니다. 저 하나 좋을라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저나 다른 저들인 나머지 모두에게 해가 됩니다. 마치 죄악처럼.

그러기에 사랑은 내리 사랑이 되고 은총이 되는가 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그 순간에 우리를 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4-15)

우리가 주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주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통해 드러나고 완성되어 갑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우리가 주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순간, 주님은 우리를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하고, 삼위일체 주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하나되게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평안하게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물론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교회의 계명을 지키는 사랑은 수고와 노고를 동반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마치 산 정상에서 느끼는 기쁨이 한 걸음 한 걸음 땀 흘려 오르는 수고를 동반한 후에 얻어지는 것처럼.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교황님께서는 오월 마지막 주일인 오늘 청소년 주일 담화에서, “기도와 성사 안에서 주 하느님께서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주 하느님께 한 걸음 내딛도록”, “성경을 자주 읽으면서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만나도록”을 권유하십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로 사랑하는 삶 안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권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형제자매의 얼굴을 통해 주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해 짐으로써 주 하느님을 깊이 깨닫게 되도록” 청하십니다. 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깨끗해진 마음은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마음으로 자신을 굽히고 자신의 삶을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과 나눌 줄 알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라고 역설하십니다.

교우 여러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일체 주 하느님께서 각각, 그리고 교대로, 시대와 상황과 처지에 따라 번갈아 돌봐주시고 지켜주시며 이끌어주시는 사랑 안에서, 평안하시고 행복하게 사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며 펼쳐주시는, 그 평안하고 행복한 여러분의 삶이,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주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선교가 되기를 빕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 받으소서.”(묵시 1,8 참조)



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요한 3,16-18; 14/06/15

지난 월요일 여러분이 모아주신 장난감들을 들고 지적 장애아동들이 살고 있는 원주교구의 ‘천사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제게 ‘신부님 머리는 다 어디로 갔어요?’ 하고 묻는 등 그야말로 천진난만 그 자체였습니다. 장난감들을 받고, 어떤 아이들은 곧바로 칼 싸움을 하고, 조금 큰 아이들이 나이 어린 꼬마아이를 장난감 차에 태워 밀어주며 신나게 뛰어다녔습니다.

그 아이들의 모습이 제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햇볕이 쨍쨍 내려 쬐는 야외의 시원한 그늘에서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마냥 즐겁게 뛰어 노는 아이들이 모습을 바라보며, 아마 이게 에덴동산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가 사는 것과는 너무나도 비교가 되어, 도대체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쌓고 익혀서,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기 위해 안간힘을 다 씁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도나 운동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이, 바쁘고 삭막해 보일 정도로 각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평화와 기쁨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쉼이나 여유, 안정과 보람, 평화와 기쁨 등은 뒤로 미루고 앞을 향해 중단 없이 정진해 나가는 데 반해 정작 그렇게 꿈꾸는 성공이 우리에게 정작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지는 재검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서문에서 “삼위일체 안에서 가장 뛰어난 기원과 원리를 찾을 수 있는 신앙의 일치가 강화되고 세상 끝까지 뻗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큰 기쁨) 라고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받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하며(232항),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며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 ‘구원의 역사(救世史)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결합시키시기 위한 길과 방법의 역사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234항) 라고 선언합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경에 포함된 표현을 이어받아 성자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신 분”(242항)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같은 공의회에서는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spiratio).’”라고 재확인합니다(246항).

교리서는 “가톨릭 신앙은 이러하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로, 삼위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같이 영원하다.”(266항) 라고 확언합니다.

인간에 대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창조의 업적과 인류의 범죄 이래 구원의 역사 전체와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 안에 전개된다.”(257항) 라고 하며, “하느님 세 위격의 공동 작업”(258항)이며,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궁극 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260항) 라고 가르칩니다.

이상의 가르침을 몇 마디로 줄인다면, 삼위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 사랑하심으로써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시고, 각 위는 상황과 조건에 맞추어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함께하시며, 구원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지어내시고, 외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은총으로 구하시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이끌고, 믿는 이들과 함께 공동체적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어 하나되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첫 번째 독서에서 주님과 친교를 이루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해 선포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9)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 중에 하느님의 본성을 소개합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

교회는 왜, 삼위일체 하느님을 기리는 오늘’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언급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살고 있으면서도 그분의 말씀과 뜻을 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무엇을 잘하지 못하고 있는지 반어적으로 지적하며 새로운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2코린 13,11-12)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기리는 오늘, 교회는 하느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와 함께하시며,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를 구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받고 있는 우리도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래서 복음 환호송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은 영광 받으소서.”(묵시 1,8 참조) 라고 찬미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사그라지지도 않고, 빼앗기지도 않을 친교를 누리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요한 16,12-15; 13/05/26

우리는 매 미사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이신 한 분 하느님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시고자 하는 표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내셨습니다.

아버지 사랑의 표현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현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결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결실이라는 믿음과 자긍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을 주실 것을 알기에 더 청합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더 많이 들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커서 젖과 이유식을 끊을 때까지 밥을 주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그 때까지 또 그 방법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악의 거짓과 탐욕스런 유혹을 선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저버리고 악의 유혹을 선택함으로써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유혹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대신 죄의 굴레를 짊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잘 되려고 선택한 죄악이 우리의 자유와 기쁨을 빼앗고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보다 죄악의 유혹을 선택했고, 죄악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죄악의 굴레에 빠져 헤매고 신음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주님과 함께 누리던 에덴 동산에서의 기쁨과 축복을 차버린 데 대해 안쓰러워하셨고, 세상으로 나가는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동생을 죽이고 마을을 떠나는 카인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표를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큰 비를 내리셨지만 노아와 다른 이들을 구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과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서라도 세상을 구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3)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맏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악의 굴레에 갇혀 있는 것을 보시고 아파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의와 평화와 기쁨과 행복의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는 죄를 끊어버리고 죄악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구원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6.18)

아버지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0-21)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셨지만, 우리는 타고난 나약함과 불완전성 때문에 여전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20.22)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성령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해주시고, 우리가 연약함과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좋은 꿈을 이룹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과 성령과 함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우리를 구하시고자,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마저 보내주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주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그리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으리라고 알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모든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로마 15,13)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여러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아멘.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마태 28,16-20; 12/06/04

요즈음 시간 나는 대로 격주 수요일에 가정축복과 소공동체 반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자분들의 각 가정을 방문하며, 그 집안에 사는 분들을 축복하고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기도해 달라고 청할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라고 하면서, 신자분들의 고민이나 걱정거리 기도요청거리들을 듣게 됩니다. 이번에 가정 방문을 하면서 제가 신자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과 사제로서 신자분들의 고민과 기도요청을 듣고 기도해 드리는 것이 참 기쁨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주님께 청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어느 하나도 뺄 것은 없습니다. 어머니요 할머니이신 신자분들이 공통적으로 청하는 첫 번째 기도거리는 남편과 자식의 건강과 안녕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녀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을 찾기 보다 자식들의 안녕을 바라기에 자연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가 되고 또 그렇기에 그 부모의 자녀들이나 그 가정에 있어 부모님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고 커다란 영향력을 끼칩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에 저는 이 부모의 마음이 우리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하는 하느님의 마음은 우리가 어떻게든 주님께서 우리에게 따라 걷도록 펼쳐주신 진리의 길을 향해 걸어가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과 같다고 느낍니다. 현세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육적인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것들을 취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며, 그 생활의 연장과 결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부모 같은 하느님의 마음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어내시고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부모가 첫 아기를 가질 때의 기뻐했던 것처럼 주님도 우리를 만들어내시고 참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옷을 입혀주고 싶고 좋은 장난감을 사주고 싶고 좋은 교육의 혜택을 받도록 하고 싶은 마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갖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을 사용하면서 에덴동산에서 사는 모습을 보고 행복하셨습니다. 자식들이 우리 앞에서 재롱을 떨고 잘 자라날 때 좋았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우셨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시는 듯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 (마태 28,19)어 내 자녀로 만들어라.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좋은 것을 선택하고 좋은 길을 잘 걷도록 조바심 속에서 속 끓이며 애태우는 그 마음이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간직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20절ㄱ) 그리고 어떻게든 자식들이 잘 되도록 도와주고 싶고, 심지어 자식이 힘겹고 아파하고 고민하며 겪어야 하는 어려움은 부모가 대신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처럼 주님도 그런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21절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지어내시면서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을 다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성의 협력자까지도 선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잘 사용하여 더 좋은 것을 만들어 내고, 더 좋은 세상을 꾸며나가는 길로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사이 좋게 나누어 사용하며 서로를 위해 봉사하며 살기도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고, 남의 것을 가지려 하고, 남의 노고로 이룬 것을 빼앗으려고 함으로써 죄악이 생겨났고, 세상에는 악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탐욕과 시기와 죄악이 들끓기 시작하자 사람은 자신이 만든 탐욕에 스스로 빠져들어 죄악의 노예가 되고 말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한 두 사람의 관계나 처지가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의 공통적인 악에 거꾸로 지배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원죄의 상황에 사람들은 신음하기 시작했고,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그 죄악의 상황에 빠진 사회 속에 편입되어 들어가 헤매게 되자,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사람들에 의해 죄악이 창궐하고, 죄악의 세력이 커져가자 물로 다 휩쓸어 버리시고 새로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슬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창세 6,7) 사람의 잘못으로 동식물과 자연의 모든 세계가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착한 노아 때문에 세계는 멸종되지 않고 사람과 동식물의 한 쌍씩 살아남았습니다. 노아가 주님께 새 생활과 새 역사의 제사를 올리자 하느님께서는 무지개를 새 시대의 표징으로 걸어주시며,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8,21)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화가 나고 후회스럽긴 하셨지만, 죄 때문에 그 생명을 앗아가는 부작용과 더 큰 아픔은 반복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처럼 성경기자는 서술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죄악으로 기우는 경향으로 인하여 점차로 죄악이 인간 세계를 지배하게 되자, 하느님께서는 심히 아파하시면서, 이번에는 다 없애고 다시 만드시기 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우리를 구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처지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가 누릴 세상의 행복과 구원을 보여주셨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드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걸어나가야 할 올바른 길과 올바른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하시며, 말과 행적으로 우리를 참 인간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따르지 않고 거꾸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런 반응에 탓하며 벌을 주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요구가 어떤 것인지, 그들이 바라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악상을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로마 백인대장의 입을 빌어 대신 말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죄 없으신 예수님은 억울하고 부당하게 닥쳐온 세상의 요구를 마지 못해서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기꺼이 짊어짐으로써 우리 구원의 죗값을 치루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의 생명을 인간의 죄를 사하는 속죄제사의 제물로 받아주셨고, 그로써 우리는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죄없는 아들 예수님의 인류를 구하기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셔서 사람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아들 예수님은 부활시키셔서 우리 인간의 주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우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뒤를 이어 하느님께로 이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4-15)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내 식구들의 부모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 공동체와 사회, 민족, 세상의 부모가 되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어려운 이들과 뒤쳐진 이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를 염려하고 배려하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사랑으로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늘 나라를 이루어 갑시다.



남북통일 기원미사/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마태 18,19ㄴ-22; 2011/06/19

1980년대 말에 중고등학생 미사를 드리면서 ‘남한과 북한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때 중고등학생들의 대부분은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고, 그 이유를 우리 민족은 하나이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중고등학생들의 대부분이 통일이 안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통일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우리 학생들)은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나라의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남이면 사랑이라도 할 텐데, 서로 같은 한 민족, 한 나라 국민이라고 외치면서도 적과 원수보다도 더 경계하고 원망하면서 수십 년을 보내는 우리의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이 아프기만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과 의무를 서로가 서로의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서로가 그 문제에 직접적인 원인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미해결의 원인과 책임을 상대에게 떠 넘기면서, 자기의 문제조차도 남에게 돌려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겪는 모든 문제의 한 쪽 끝에는 늘 이 국토의 분열과 민족의 불화인 분단과 통일의 문제가 우리의 한 쪽 발목을 잡고 있어,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우리를 죄와 악처럼 옭아매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마음이 맞는 둘이나 셋이 서로의 간절한 염원을 위해 빈다면 주님께서는 지체 없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둘이나 셋이 북이나 남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모으기 조차 어려울 것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자체도, 기도 자체도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얼키설키 엉키고 뒤섞인 현실 속에서 신음하면서, 우리 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남과 북으로 갈라진 국토의 통일을 위해 우리는 주님께 청합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는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느님은 땅에 있는 성자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권한을 다 주십니다. 땅에 있는 성자는 자신이 받은 권한을 행사하며 그 열매로 얻어진 모든 영광을 전적으로 다 아버지께 돌립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늘과 땅을 헌신적으로 오가며 그 둘 사이를 끊임없이 일치시켜 줍니다. 그래서 삼위의 하느님께서 한 분 하느님이 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하나되신 하느님 그분의 사랑이 넘쳐 흘러 우리에게까지 다다르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방법론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걸어나갈 길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가장은 집안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아내는 남편의 신뢰와 전적인 위임을 바탕으로 집안 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에게 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께서 자녀인 너에게 주라고 하신 것임을 밝힐 때, 자녀는 아버지의 존재와 사랑을 느끼며,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가 삼위일체적인 사랑으로 한 가족이 됩니다.

또 우리가 활동을 하면서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우리의 활동 대상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때, 우리는 우리 활동 대상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우리 활동 대상자는 우리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일치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저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지금 당장 우리 국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 적처럼 죽이고 비난하면서 평화를 깨트리는 일 없이,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 용서하고 껴안고 도와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재일치를 위한 운동까지 하는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도 이교인들 앞에서 나는 개신교인이 아니라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굳이 말해야 하는 서글픈 상황처럼,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 사람이라는 것을 굳이 차별하여 말해야 하는 서글픈 상황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우리 민족의 상처들을 보듬어 주시고 치유해 주시어,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시던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도록 허락하시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평화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삼위일체 대축일

(가해) 요한 3,16-18; 05/05/22

창세기 1장 26절부터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이 구절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왜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내셨을까?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왜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을까? 아메바처럼 양성생식도 있다는데... 굳이 사람을 중성이나 양성으로 지어내시지 않고 남성과 여성으로 지어내셨을까?

그리고 또 마태오 복음 19장 3절부터 6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부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과 또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하고 대답하셨다.”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 좋아서 만나고 결혼해서 산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으실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리고 또 남자와 여자가 서로 결혼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하실까?

하느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남편과 아내를 둘이라고 규정하지 않으시고, 부부를 왜 굳이 한 몸으로 묶어주시고,

또 왜 서로 만나서 사는 것을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라고 축복해주시는가?

저는 혼자 살아서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느낍니까?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떨어져서 살면 어떻게 됩니까?

둘이 한 몸이 아니라 서로를 서로 다른 인격체요 서로 독립된 객체라고 인식할 때 부부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부부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 아니라 저 좋아서 만난 것이고, 언제든지 남편과 아내 한 쪽에서 불신하거나 또는 제 삼자가 부당하고 부정한 의도로 개입하게 되면 부부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또 있습니다. 부부만이 아니라 가정에는 부부와 함께 가족을 이루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살면서 결혼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기쁨과 위안도 있겠고 또 그 반대로 어려움과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면서 기쁘고 행복할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어렵고 힘들 때 더욱 더 이 하느님의 말씀과 의도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가는 것을 느낍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루고 서로의 사랑과 그 사랑을 맺어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느님 은총의 결실로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창조사업의 연장이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요소며 동시에 주체가 됨으로써 하느님 창조사업의 협조자가 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성부께서는 성자를 낳으시고, 성부와 성자의 사랑으로 성령께서 나신다.”는 삼위일체 교리를 우리 현실을 사는 인간의 사고를 통해 설명하게 되면, 불완전하게나마 우리는 이렇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사랑하시고 또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성자를 낳으셔서 세상에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하늘의 아버지와 땅에 파견된 아들이 서로사랑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성령께서 나셨다. 그러기에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애쓰시고 마침내 죽으시면서까지 성자로서의 사명을 다 완수하는데 함께하시면서 아버지 하느님의 힘을 실어주셨다. 그리고 성자께서는 하늘에 돌아가시고 나서 지속적으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한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그 사랑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실현되도록 해 주고 계시다.’

이렇게 하느님의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현실에 제대로 적용해서 설명한다는 것이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가정사에 비추어 생각하자면 삼위일체의 신비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의 일치와 사랑을 통해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인 동시에 또한 사회의 결과입니다.

사회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하며 또 사회는 가정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을 성가정으로 꾸며 행복한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주님의 가정이 되고자 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처럼 구원의 길을 열고, 구원 사업의 추체이며 하느님 구원사업에 동참하여 구원을 이루는 하느님 구원사업의 협조자가 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 그 당시 사회에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고, 유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얼마나 영향을 끼치셨는가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였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애를 사셨다는 것이 성가정의 본질이며 모습입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성삼위께서 서로 사랑으로 일치하고 서로 사랑하는 그 힘으로 세상을 구하신 것처럼, 우리 신자 가정도 가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여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하며 그 화목하고 행복한 기운으로 주위에 기쁨과 행복을 따스한 햇살처럼 펼쳐주십시오.

또 여러분의 결혼생활과 가정생활이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성가정이 됨으로써, 여러분의 가정이 사회에 굳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으로 자리를 잡고, 여러분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맺은 사랑을 나눠 주시기를 빕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가정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이 충만하기를 기원하며, 성가정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과 하나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 12-15; 2004/06/06

지난 한 주간 동안 시애틀 대교구의 사제 연수와 미국 주교회의의 아시아 태평양 사목위원회에 다녀왔다. 그 동안 안 되는 영어를 하느라고 힘들었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나마 오션쇼에서 열린 시애틀의 사제 연수는 낮에는 좀 여유가 있어서 바닷가를 걸으며 묵주기도를 하고 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샌프란치스코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사목위원회의 연수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강의에다 무슨 무슨 회의가 그렇게 많은지 식사시간 마저 회합하는 식으로 운영을 해나가서, 아침 먹기 전에 잠시 바닷가에서 묵주기도하면서 산책한 것 외에는 그야말로 호텔에 갇힌 생활 같아 힘들었다. 게다가 교구에서 비행기표를 하루 전날 것을 끊어주는 바람에 샌프란치스코 한인 성당에 가서 하루 신세마저 져야했다.

그야 말로 오갈 데 마땅치 않고, 의지할 곳조차 변변치 않은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잠시나마 느꼈다고 한다면 사치겠지만 그래도 혼자서 세상을 헤쳐나가야만 하는 어려움을 느꼈다. 국제 모임에 갈 때마다 남들은 영어도 잘 하는데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뭐했나 하는 자책감이 나를 더욱 더 답답하게 해서, 말 못하는 괴로움에 더해져 2중고를 겪었다. 그런가하면 함께 갔던 시애틀 교구의 아시아 태평양 사목위원회원들이 우리 성당 짓는데 일일 찻집처럼 저녁파티를 해서 성전건립기금을 모아주겠다고 제의를 해와서 정말 감사했고, 일면으로는 소수민족들의 연대감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 아시아 태평양 사목위원회에서는 아시아의 53개국과 태평양의 26개국에서 온 대표들의 모임이었다. 다 모인 것은 아니지만 주로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와 우리 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모였다. 모임에서는 처음에 버클리 신학교의 박사과정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이민 역사를 듣고는, 각자가 언제 어떻게 이민 와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북받쳐 우는 사람들도 많았고 각나라의 이민 역사들을 들으며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왜 우리 나라 한국의 이민 역사에 관한 체계적이고도 신학적인 연구가 없는가 하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주제는 '다양성 안의 일치' 또는 '믿음 안에서의 조화'(Harmony in Faith)였다. 낯선 땅에 이주해 와서 사는 이들과 낯선 땅을 찾아오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서로 맞섬과 경쟁의 적대관계가 아니라, 각자가 살아온 삶 속에 배어있는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서로 보완하여 발전해 나가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아시아 태평양 소수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장점, 즉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 어른들을 공경하고, 가족과 친척들의 화목함과 강한 연대감, 주님과 교회에 대한 깊은 신심과 전인적인 봉헌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이웃과 사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진실하고 성실하며 꾸준한 노력으로 자기를 계발해나가는 등의 장점들을 이 미국 땅에 사는 이들에게 우리가 선물로서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레위기 19장 34절에 나오는 "너에게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을 네 나라 사람처럼 대접하고 네 몸처럼 아껴라. 너희도 이집트 나라에 몸 붙여 살지 않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출발점으로, 마태오 25장 34절에서부터 35절까지에 나오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서 "미대륙의 교회"(Ecclesia in America) 7항에 나오는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회개와 친교와 공동일치로 가는 길"(7항)이라는 말씀도 들었다.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은 이 세상에 현존하시고 살아계시는-특히 가난한 이들, 낯선 이들, 이민자들 그리고 난민들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하시는-부활하신 예수님에게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보았다.

첫째, 회개로의 부르심

교회인 우리는 미국 내에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통하여 진정한 회개로 초대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치의 성사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반 이민 정서를 뛰어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현재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반 이민정서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자국민 보호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소수민족 공동체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당 안에서 함께 지내고 있으면서도 서로간에 소원한 소수민족 공동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교회인 우리는 복음화에 앞장서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선교는 우리 문턱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 종교간의 대화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렇게 새로 오는 이민자들은 우리 역시 이민자들의 후손임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고,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원으로서의 세례성사적 유산을 되돌아보게 한다.

둘째, 친교로의 부르심

새로이 도착하고 있는 이민자들을 그 동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무뎌진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변화시킨다. 이 변화를 통해 우리는 진실되고 합당하게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고, 또한 같은 식탁에서 한 형제자매로서 함께 나눌 수 있고, 이 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을 위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조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을 보다 충만한 친교로 이끌 수 있다.

고린토 전서 12장 13절에 나오는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보다 후에 이주해 온 이들이 우리의 돈 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이민 사회를 이루어나갈 동료요 협조자로 환영해야 한다.

친교로의 부르심은 교회의 일원인 우리 모두가 진정한 환영의 마음을 가지도록 촉구하고 있다. 우선 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은 문화간의 대화에 지속적인 인내로 노력을 기울여 우선 새로 오는 이들에게 은총 가득한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셋째, 공동 연대로의 부르심

우리 안에 함께하고 있는 이민자들과 난민들 그리고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하고 친교를 맺은 결과이며 열매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2000년 세계 이민의 날 담화 6항에서 "교회는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강제로 헤어지게 된 가족들, 오늘날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그 어느 곳에서도 안정된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듣습니다. 교회는 아무런 권리도 방어 수단도 없이 온갖 착취에 내던져진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불행한 처지에 있는 그들을 지원합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시고 배려하심으로써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신비를 기억하는 오늘 교회인 우리는 되돌아봅니다.

우리가 공동체에 찾아오는 이민자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이민에 반대하는 의견을 들었을 때 어떻게 정중히 대응하는가?

지역사회에 있는 이민자, 난민 그리고 이주자들을 돕는 봉사활동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이중 문화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민사회의 청소년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가?

가톨릭인으로서 우리는 새로이 도착하는 이민자들을 환영하고 그들 문화를 존중하며 그들이 우리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새로온 이들과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가 풍성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삼위일체 대축일

2003/06/15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또 어떻게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지를 삼위일체라는 교리로 설명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 생의 구체적인 순간 순간에 함께하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시고, 우리의 호소를 들어서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시고, 결국 우리를 구해내시고야 만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사제적 백성, 사도로 삼으신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에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었고, 하느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이끄시어(출애 13, 21 참조), 그들은 무사히 주님께서 약속해주신 땅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이시며,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살려주시는 분이야말로 자신들을 만들어 내신 '창조주 하느님'이시며, 마지막날 자신들을 구원하실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신앙고백을 드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해, 왕정을 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잘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은 왕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메시아를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 죗값으로 치르셨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돌아가신 주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의 몸으로 부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이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실현할 힘을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교회로 부르셔서 주님의 뒤를 이어 복음을 선포하고 세상을 구원하도록 하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어내시고, 살려주시기 위해 아드님을 대신 죽게까지 하시고, 성령을 보내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변치 않는 같은 사랑으로 오신다.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주님께 보답하는 의미로 형제들에게 같은 사랑을 나누기로 하자.



삼위일체 대축일

제8회 생명의 날 담화문 새로운 생명 문화의 건설을 위한 제언; 2002/05/26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생명의 날을 맞이하여 하느님 의식과 인간의식의 실종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문화를 제거하고 새로운 생명의 문화를 건설하자는 취지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재인식하기 위해 오늘날의 현실을 반성해보려고 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 사이에는 극적인 투쟁'(생명의 복음 95항)이 있다는 말씀으로 오늘날 생명의 위기를 표현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말씀처럼 오늘 우리의 세상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한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간복제와 관련된 생명과학기술의 윤리적 문제는 그 자체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참된 가치와 진정한 필요성을 분별할 수 있는 예리한 비판적 감각의 개발을 통해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를 새롭게 건설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시점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의 건설은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인간복제의 배경이 되는 생명과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인간 생명의 근본적인 의미와 그 기본적 가치들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생명과학은 비교적 최근에 발달한 학문으로 산업적으로는 유효한 생산물을 만들거나 생산공정을 개선할 목적으로 생물자원 또는 그로부터 유래하는 물질을 연구하고 활용하는 학문으로 출발하여, 오늘날 특히 인체와 관련된 유전자 재조합, 유전자 치료, 수정란 연구, 동물복제, 더 나아가 인간복제의 영역까지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명과학은 그 학문의 특성상 한계를 모르는 급진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매우 복잡한 문제까지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명과학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 펼쳐지는 생명과 건강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기초과학입니다.

물론 생명과학은 인간의 지적 탐구의 자유와 의료 및 산업발전을 통한 인류복지의 증진을 위해 마땅히 보호되고 육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오용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그 같은 자유와 보호는 인간과 사회와 생태계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현대 사회 안에서 지켜지지 못하고 생명과학으로 인한 윤리적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고 그 기준과 유용성에 대해서도 관점의 차이에 의한 논란이 많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생명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생명이 하나의 실험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며, 질병의 치료나 더 나은 인간사회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인간 생명에 대한 생물학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사고에서 인간 생명에 대한 심각한 경시사상과 창조질서의 파괴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침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고의 영향으로 비윤리적인 과학자들은 '과학에 의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으며 과학기술에 대한 우상화와 신격화를 추구하고 있어 그로 인한 심각한 윤리적 문제는 인류 전체에게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생명과학 분야에서 급속히 발전되고 있는 몇몇 내용에서도 실제적인 죄의 구조가 작용하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인간은 이제 자신이 창조한 기술의 세계에서 먼저 창조주의 손길을 감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자신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근본바탕에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깔려 있으며, 인간이 자신의 건설자가 되고, 또한 자기 역사의 건설자가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끝없는 오만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간복제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간 생명에 대한 침해와 파괴에 대해 교회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을 잃어가고 있는 현상임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현대인들의 생명이신 하느님의 상실은, 곧 하느님 의식의 실종, 인간의식의 실종이며, 이는 곧바로 현대 사회를 실천적 유물론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무신론의 지배에 놓이게 만드는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참조 생명의 복음 23항).

형제자매 여러분

사실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인간의 창조적 자유에 맡겨져 있어서 인간은 세계를 재형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변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과 과학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며 온갖 과학적 진리에 대한 성실한 추구와 갈망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성적 능력의 활용이므로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인간의 고유한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러한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됩니다. 세계와 지상 사물 그리고 그것을 탐구하는 인간의 과학적 능력은 모두 하느님의 창조사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도외시한 끝없는 기술문명의 환상은 인간 고유의 내적, 영성적, 윤리적 가치를 잃어 버리게 만들어 인간의 비인간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따라서 과학적, 기술적 지식과 윤리적 지식이 병행하지 못할 때, 그 과학과 기술은 결국 인류를 파멸로밖에 이끌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술의 인간화, 나아가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의 윤리화가 시급하며, 과학과 기술보다 영적 윤리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사고의 형성이 더욱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생명문화의 건설을 위해 교회 공동체 모두는 생명과학이 근본적으로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생명과학이 되어야 하며, 그 어떤 경우에서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전제로 하는 생명과학이어야 하며, 또한 절대적으로 인간 생명에 봉사하는 생명과학이 되어야함을 세상 모든 사람과 그리고 생명과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의 증거를 통해 강력하게 주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2002년 5월 26일 생명의 날에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이 기 헌 주교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담화문-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이며 빛입니다(마태 5, 13-14); 02/05/26

청소년 주일을 맞이하며 저는 교구민 모두에게 청소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합니다. 우리 청소년은 지금 매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이나 건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그 어느 분야의 책임자들도 청소년에게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삼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백년대계이어야 할 교육정책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변하여 청소년의 미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수많은 정보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학교생활의 무게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짓눌려 있는 청소년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순간의 즐거움이나 쾌락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교구 시노드의 정신대로 우리는 미래의 교회 주인공들인 청소년이 무슨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를 묻고 이들과 함께 내일을 계획해야 할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제17차 청소년주일 담화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걸고 있는 교회의 기대와 희망을 피력하십니다.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된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전 인생을 거는 인격적인 결단임을 보여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젊은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빛나는 영웅적 덕행을 세상에 보여 준 수많은 성인들, 특히 젊은 성인들이 있었음을 강조하시면서 지금의 청소년들도 이 분들을 본보기로 삼아 삶으로써 제삼천년기를 밝게 여는 주인공들이 되어 줄 것을 당부하십니다.

교구 시노드 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매일 기도하듯이 교황께서도 젊은이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권고하십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맛이 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로마 6,4 참조). 특별히 청소년은 세속에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2). 우리는 청소년이 내용 없는 유희와 덧없는 유행에 빠지거나, 시류에 영합하여 사소한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오히려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또한 교황께서는 젊은이들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라고 말씀하신 분은 온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춥고 어두운 밤과 같은 세상에서 공포와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태양이 떠오름을 알리는 아침의 파수꾼이 되라고 권고하십니다(이사 21,11-12 참조). 복음의 정신에 따라 인생의 계획과 결단을 내림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사랑의 징표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마태 5,15).

교황께서는 교회가 청소년을 부르고 있음을 강조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따뜻이 맞이하며, 여러분의 가정이 되고 친교와 기도의 학교가 되고자 합니다." 교회는 모든 청소년에게 집이요 학교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청소년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가는 준비를 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함께 친교를 나누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교우, 수도자, 성직자들은 모든 청소년을 자신의 자녀로 생각하고 이들이 교회를 부모의 집으로 그리고 삶의 지혜와 신앙을 성숙시키는 학교로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청소년이 교회 안에 함께 모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핵가족화된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은 다른 연령층과는 달리 모든 면에서 역동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돌발적이며 무계획적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이므로 무엇이든 시도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면 어디서나 때로는 무질서하고, 때로는 시끄러우며 기도의 집이어야 할 교회의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어른들은 청소년이 바로 우리 자신의 자녀이고 따라서 당연히 그 안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교구에는 청소년들이 아무 때고 쉽게 찾아가 마음 놓고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교구에는 200개도 넘는 본당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곳이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모임의 장소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효율적인 교육과 사목을 위해서 교구, 지구, 본당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청소년에 대한 효율적인 교육 그리고 청소년의 자발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모두 사심 없는 협력과 지원을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야말로 새 천년 새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 교회 안에 초대 교회의 거룩한 활력을 그들의 존재 자체로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연령층인 것입니다.

이제 부모님과 청소년 여러분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모님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라도 자녀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망각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자녀들과의 대화 그리고 가족이 함께 기도를 바침으로써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청소년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슴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선사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살 맛나게 하는 소금이 되고, 암담한 세상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는 빛으로 타오르기를 기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요한 16,12-15; 2001/06/10

신앙의 목표는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셔서 한 몸이 되셨기에 우리도 주님과 사랑을 주고 받아서 주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미래가 활짝 열려있거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가 앞으로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던 지난 날보다도 더 부족해지고 나약해지지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그러면 구원의 희망없이 끝나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책벌하지 않으시고 우리 죗값으로 외아들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하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거듭 씻어주시고 나약함을 채워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신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렇게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을 받기 위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다락방에 모여서 성모님과 함께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사도 2,14) 저는 매일 텅빈 우리 성당에 홀로 앉아 기도하면서, 어떻게 신자들이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사람들은 요즘 종교가 신비체험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고급화와 대형화를 탓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살기 바쁘다는 핑게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육적이고 물질적인 풍요가 평화를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평화는 열심히 뛰어서 성공해서 얻게 되는 것이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공에서 오는 제한적인 풍요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혼돈하고, 관광이나 오락에서 오는 육체적인 안이와 휴식이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오는 평온과 충만을 대체하고 또 그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시간이 나면 기도하길 원하는가 쉬기를 원하는가? 노는 날 피정을 가려고 하는가 관광을 가려고 하는가? 우리가 받지 않으면 주님도 줄 수 없다.

주님을 찾아야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주님을 찾는 길이 주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 중에 그 뜻을 깨달으려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는가?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마태 28, 16-20: 2000/06/18

교회는 신앙생활의 목표를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은 삼위의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시고 그 하나된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삼위일체 사랑의 신비에 참여한다는 것은 삼위의 제2위이신 성자께서 성부의 뜻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희생제사를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우리가 살고 또 이웃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우리를 봉헌하라는 것이다. 또 그렇게 우리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이다.

그럼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웃을 향한 우리의 봉헌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 18-20)고 하셨습니다. 복음선포는 인간을 어둠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의 세력을 이기고 주님께서 승리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 내부에 기생하면서 아집과 질투, 이기적 본능과 탐욕을 불러일으켜 폭력과 살인과 전쟁이라는 비극을 가져오도록 하는 악의 세력을 주님께서 사랑으로 쳐부수셨고 지금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기쁜소식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 이 민족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서로를 아끼고 돌보면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 사회와 민족의 이상을 발견하고 선포합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줄 기준이요 목표입니다.

지난 13일과 14일 평양에서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나 "더 이상 서로 싸우지 말고 화해하며 서로를 돕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실로 분단 55년만에 우리가 가져보는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밝게 그리고 좋게 꾸밀 이상을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나 혼자 착하면 나만 손해보고 사회는 변하지 않으니까 모두 착하게 변해서 다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20절)고 하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바뀔 수 있도록!



삼위일체 대축일

1999년도 제 14차 청소년 주일 서울대교장 담화

1999/05/30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요한 16,27 참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제14차 청소년 주일을 맞아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우리 청소년들이 하느님 사랑 안에 성장하여 복음적 가치와 문화를 살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주제 말씀을 정하셨습니다. 이는 또한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며 성부의 해를 보내고 있는 시점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청소년 모두를 초대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천년기에 우리는 현재보다 더욱 빠르고 다양한 변화의 세계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시대적, 문화적 사회 현실 속에서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가야 할 지 고심하고 있습니다. 특히 삶의 모습이 완전히 굳어지지 않고 변화가 많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사목에 있어서는 예측이 정말 어렵습니다. 차제에 교회가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만 청소년들을 찾고 만나는 사목의 재래적 틀을 넘어서서 보다 다양하고 구체적인 청소년들의 삶의 자리로 다가가야 함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보여집니다. 지난 세기의 청소년들은 일정한 삶의 양식을 지녔었고 그들의 삶에 교회가 개입할 자리가 있었지만, 새로운 세기의 청소년들은 가정이나 학교를 통해 의식을 만들기보다는 그들만의 자리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서울대교구는 이제는 과감하게 우리 청소년들의 삶의 자리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청소년 사목이 교회내 청소년들에게만 집중된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청소년 사목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세상의 모든 청소년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청소년들은 이 자리를 통해 그들이 만나는 사람과 프로그램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안내받을 것이며, 교회가 항상 그들 한가운데 있음을 청소년들 스스로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새 세기의 청소년들은 다양한 문화 양태를 보일 것이며, 그 패러다임의 변화 주기 역시 아주 빠르고 급격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청소년 사목도 거기에 맞는 유연성과 역동성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의 삶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그들이 접하는 다양한 현대적인 매체를 복음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서울대교구에서는 이런 기능을 담당할 '청소년 사목 교재 편수실'을 교육국 안에 설치하려고 합니다. 이 장치는 단순히 주일학교 교재만을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창출할 수 있고, 청소년들의 놀이와 여가 문화가 복음적이고 건전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모든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고 프로그램화하여 각 본당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새 세기의 청소년들이 복음적인 청소년 문화에 맛들일 수 있는 근본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육이란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 이 세 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로 협조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성부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일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전해주시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아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청소년과 그 부모님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삼위일체를 이룰 때 청소년 복음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교회 전체가 그리고 교우 여러분 모두가 이 사목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 세기의 청소년들을 위한 이런 교회의 사목적 목표를 위하여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기도와 물심양면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전국의 모든 주일학교 교사들, 청소년 사목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 위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풍성하기를 간구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정진석


삼위일체 대축일

1999년도 제 14차 청소년 주일 교황 담화

"하느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요한 16,27 참조)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1.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희년을 바라보며, 1999년은 "신앙인들의 시야를 넓혀 그들이 그리스도의 전망 안에서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하려는"([제삼천년기], 49항) 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을 받으셨고 또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같은 곳). 사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요한 20,17 참조) 향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기념할 수도 희년을 경축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되돌아가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고린 12,3) 하고 말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라고 부르며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 여러분에게 온 교회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요한 16,27 참조)는 것을 알려 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에 감사와 경탄의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도록 당부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14차 청소년 주일의 주제로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하느님께서 먼저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1요한 4,19)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분께서 맺어 주신 평화의 계약도 결코 파기되지 않을 것입니다(이사 54,10 참조). 이러한 확신을 단단히 붙드십시오. 삶에 의미와 힘과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이 확신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두셨습니다(이사 49,16 참조).

2. 언제나 의식적이고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깊은 향수가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그것을 이렇게 훌륭히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마음 속에서 '아버지께 오라.'고 속삭이는 생명수가 있습니다"(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간, 7항). 모세는 산 위에서 "주님,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출애 33,18)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께서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요한 1,18). 그렇다면 아버지를 알고자 할 때 아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필립보는 쉽게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필립보의 끈질김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하느님의 아들께서 강생하신 다음에는,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께서는 필립보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이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한 13,20 참조). 그와 반대로 "그분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분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하는 것입니다"(요한 15,23 참조). 이렇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새로운 관계, 곧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가능해집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 싶어하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들의 인생에 힘이 되도록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체의 요약"(테르툴리아누스, [기도론], 1항)인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이 기도에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분이 확인되고 있습니다(루가 11,1-4 참조). "한편으로, 이 기도의 말씀을 통하여 외아들께서는 성부께 받으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으로 당신의 형제 자매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이를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기도의 모범이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765항).

요한 복음서는 우리에게 성자의 생애에 대하여 직접 증언을 하면서 아버지를 알기 위하여 따라야 할 길을 가리켜 줍니다. "아버지"께 대한 청원은 예수님의 비결이고 숨결이며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외아들이자 맏아들이시며, 만물이 지향하는 목적이시고, 세상이 있기 전부터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까?(요한 17,5 참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요한 17,2 참조)과 선포할 메시지(요한 12,49 참조)와 완수하여야 할 일(요한 14,31 참조)을 받으셨습니다. 제자들조차도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을 주시며(요한 17,9 참조)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들을 악에서 보호할 임무를 맡기신(요한 18,9 참조) 분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실 시간을 앞두고 바치신 "사제 기도"는 아들의 마음을 잘 드러내 줍니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제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5). 그리스도께서는 최고의 영원한 대사제로서 구원받은 이들의 끝없는 대열 맨 앞에 자리잡고 계십니다. 수많은 형제들의 맏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흩어진 양 떼들을 한 우리에 모으심으로써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하셨습니다"(요한 10,16 참조).

예수님의 구원 활동으로, 삼위일체 안에 있는 그 사랑의 관계가 아버지와 구원받은 인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간청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쏟아부어 주신(요한 14,16 참조) 성령의 활동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사랑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영원하신 말씀께서 시간 속에 강생하시어 세례를 통하여 당신과 하나가 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 주신 것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활동이 없다면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이 그 사랑을 거부한다 하여도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언제까지나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진리입니다. "극히 단순하며 심오한 이 진리를 교회는 인간에게 선포하여야 합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34항 참조). 성자께서 단지 이 말씀만 들려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으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쁘 소식을 우리는 어떻게 선포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요한 6,45) 아버지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요한 14,23 참조)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요한 17,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를 온전히"(요한 16,13)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말과 모범으로 이러한 근본적이고 위안이 되는 확신을 선포할 줄 아는 "선교사"들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천년기에 어른이 될 오늘날의 청소년 여러분은 이 사실을 깨달아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우십시오." 교회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이 일상 생활의 다양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하는 믿음직한 증거자가 되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선택과 태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섬기며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존중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요한 14,21) 하시는 확신에 찬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놀라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겪는 갖가지 형태의 부성애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비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하느님의 협조자가 되어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고 여러분을 돌보아 주신 여러분의 부모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출애 20,12) 부모님께 감사하십시오! 또한 저는 사제들을 비롯하여 주님께 봉헌된 사람들도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믿음을 발전시켜 주고 기쁨을 더해 주기 위하여"(필립 1,25) 여러분에게 친구이자 증거자이며 인생의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끝으로 저는 자신들의 사랑과 지혜와 신앙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또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해 주신 참된 교육자들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인생 길에 함께 해 준 이러한 훌륭한 사람들을 주신 데 대하여 항상 주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4.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깨달은 신자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굳게 매달려 진정한 회개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깊은 의미에서, 고해성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욱 강도 높은 거행을 위한 본연의 맥락입니다"([제삼천년기], 50항).

"죄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87항). 죄는 세례 때에 받은 하느님의 생명에 따라 살기를 거부하고 참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방해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기원을 두고 있는(마르 7,20 참조) 죄는 진정한 사랑의 실패입니다. 죄는 이기적인 태도와 말과 행동으로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손상시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49-1850항 참조).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인간은 자유로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원한 드라마입니다. 인간은 흔히 굴종을 택하고 두려움과 변덕, 잘못된 태도에 굴복하며 자신을 지배하는 우상과 인간성을 타락시키는 이념을 만들어 냅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다"(요한 8,34).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진정한 회개의 기원에는 죄인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있습니다. 그 시선은 사랑에 찬 눈길이 되고 열정이 되며 마침내 십자가의 수난이 됩니다. 또한 무질서에 빠져있는 죄인에게도 변함없이 존중과 사랑을 보이시며 생활 방식을 바꾸도록 결단을 촉구하시는, 용서를 해 주시겠다는 의지가 됩니다. 레위(마르 2,13-17 참조), 자캐오(루가 19,1-10 참조),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요한 8,1-11 참조), 죄수(루가 23,39-43 참조), 사마리아 여인(요한 4,1-30) 등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랑을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불가해한 존재로 남게 되며 인생은 의미를 잃고 맙니다"([인간의 구원자], 10항).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체험한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 참조).

"돌아가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요한 8,11). 용서는 거저 주어지지만, 용서받은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응답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이 더욱 크게 드러날 때 죄인들이 결국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끊임없는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순간부터 아버지는 근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바라며 먼 지평선을 바라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괴로워합니다. 아들이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 꼭 껴안으며 기쁨에 겨워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내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우고 -계약의 상징-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새로운 삶의 상징- 신을 신겨 주고 -되찾은 존엄의 상징- 먹고 즐기자!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루가 15,11-32 참조).

5.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올라가시기 전에 교회에 화해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요한 20,23 참조). 그러므로 마음 속으로만 한 참회는 하느님의 용서를 얻는 데에 불충분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려면 교회 공동체와 화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성사 행위를 통하여 죄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교역자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사람들의 죄 인식은 무디어만 가고, 하느님의 용서에 의지하는 경우도 드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의 원인입니다. 저는 올해 여러분이 '잃었던 아들'의 비유를 주의 깊게 다시 읽고 고해성사로 받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은총을 다시 찾도록 당부합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기도와 묵상, 감탄과 확신의 자세로 말씀에 귀기울이며 하느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저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저는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하여 하느님을 의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죄보다 더 강하십니다. 저는 저의 삶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힘을 믿습니다. 지금처럼 하느님께서 저를 구원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저를 기억하소서. 저를 용서하여 주소서!"

여러분의 "내면"을 들여다보십시오. 죄란 법이나 도덕 규범을 어기기에 앞서 하느님을 거스르고(시편 50[51], 6 참조) 형제 자매들과 여러분 자신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시며 모든 형제 자매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이웃과 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그것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복음이십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에 대한 충실성은 곧 다른 하나에 대한 충실성을 보여 주는 척도입니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보십시오. 죄의 고백은 자신의 불충을 인정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화를 되찾고 많은 결실을 맺으려면 회개와 화해의 필요성을 인정하여야 하며, 죄의 시련을 겪는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연대 의식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45항 참조).

끝으로 사제가 베푸는 사죄를 감사의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회개하는 죄인에게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하시며 생명을 주는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입니다. 사랑의 샘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우리가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더욱 열렬히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6.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예수님께서는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과 동등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두 계명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지킨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계명이 각각 나름대로 중요하므로 둘 다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을 나란히 놓고 말씀하신 것은 두 계명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계명은 무시하고 다른 계명만 지킬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계명의 불가분적인 일치를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삶 자체로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명은 우리를 구원하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께 대한 그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다"([진리의 광채], 14항).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알아보려면 우리가 참으로 이웃을 사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진실성을 알아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지 자문해 보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4,20 참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요한 5,2).

교황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에 더 큰 역점을"(51항) 두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선택이 아니라 "우선적"인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세상 재화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인데도 부유하다는 나라에서조차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빈곤 상황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또한 사회적 정치적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빈곤 문제는 구체적인 상황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려는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이 그 상황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빈곤 상황은 "죄의 구조"입니다. 타인을 착취하지 않고 남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 남을 억누르지 않고 남을 "섬기는" 사람들의 협력 없이 이 죄의 구조는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사회적 관심], 38항 참조).

사랑하는 청소년 여러분, 저는 특히 여러분에게 가장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구체적인 연대와 나눔을 실천하도록 당부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여러분의 또래들이 펼치는 우애와 연대의 활동에 적극 동참하십시오. 이는 주님께서 좀더 운이 좋은 여러분에게 주신 많은 것 가운데에서 작은 것이나마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근본적인 선택에 대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표현이 될 것이며,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명확한 방향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7. 성모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전신비를 당신 자신 안에서 드러내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시는 딸"([제삼천년기], 54항)로서 하느님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 은총에 선뜻 응답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딸"로서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7) 하고 대답하신 마리아께서는 성자의 어머니가 될 자격이 있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진정 하느님 아버지의 딸이시기에,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오로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고자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주시려는 바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지극히 다정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끊임없이 신자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시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참조) 하고 당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인자하신 아버지"(2고린 1,3 참조)의 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올해 각 지역 교회에서 거행할 제14차 청소년 주일은 다가오는 대희년을 앞둔 마지막 청소년 주일이므로, 2000년 성년 준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저는 이번 청소년 주일이 여러분 각자에게 생명의 주님과 또 그분의 교회와 새롭게 만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여정을 성모님께 맡겨 드리며, 여러분이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을 선뜻 받아들여 그 사랑의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켜 달라고 성모님께 간청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저는 여러분이 신앙과 복음화 노력에서 풍부한 결실을 거두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바티칸에서,

1999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삼위일체 대축일

(다해) 요한 16,12-15 : 98/06/07

촛불은 타고 있습니다. 불은 어두움을 비춰주는 빛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빛은 열로 우리를 덥혀주기도 합니다. 초는 하나지만 우리는 초에서 불과 빛과 열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촛불을 보면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연상합니다.

불이 나갔을 때 촛불을 켜 어둠을 밝히듯이 우리는 일상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러나 그 일이 하느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찾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저지르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저지르는 수만가지의 일들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도록 하셨는지?', '그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금방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그리고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게 해주십니다. 평소에 우리가 읽던 성서의 말씀을 우리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를 성령님을 통해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아들었지만 쉽사리 실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끔은 주저하기도 하고, 전에 실패했거나 너무나 힘들어서 다시 또 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실천하면서도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뜻이고, 우리가 예수님 말씀대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용기 없는 우리에게 믿음과 힘을 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주저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주님의 말씀을 내 몸으로 채우고 이루면서 살기 위한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여 우리를 예수님께서 가신 구원의 하늘나라로 가도록 성령님께서 이끌어주시도록 청하고 그 인도를 따라갑시다.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마태 18,16-20 : 97/05/25(청소년 주일)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태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막을까?" 하고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상대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입 장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에게 갖는 감정이라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자기가 옳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으니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과 교회를 향해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하겠습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삼위일체이신 주님의 신비를 봅시다. 하느님 아버지는 아들 에게 모든 권한과 그 권한을 수행할 능력인 권능을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들 성자는 자기 몸이 자기 것이고, 자기 생각이 문제가 없고 그래서 자기가 생각한 대로 행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들 예수는 아버지의 권능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일 전에 그리고 일 후에, 심지어는 제자들을 뽑을 때와 십자가를 질 때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능을 자기를 위해서는 물론이요 자기 혼자의 생각대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권능을 주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해 아버지와 늘 상의하셨고 이러한 사랑의 교류 안에서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이 나서 아들을 언제나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아들 예 수를 광야로 이끌어 유혹 속에서 악마와 싸우게도 하였지만, 유혹 중에 그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상 기시켜 줌으로써 그가 악마를 쳐 이길 수 있도록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의 구원을 위한 사도가 되라고 우 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것이, 그리고 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인지 주님과 기도 중에 상 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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