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일)

(다해) 루카 23,35-43; 16/11/20

언젠가 예비신자 면담을 하면서 ‘어떻게 성당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이런 답변을 하셨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서울에 사는 집주인이 부도가 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넘어가게 되었단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전세금마저 못 받게 되었단다.’ 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때 세상살이는 잘 몰랐지만 어머니가 우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서, 그 때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 우리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십시오.’ 그런데 우연인지 내가 기도한 것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는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집주인은 그나마 전세 값을 돌려줬고, 어머니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작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떨어졌습니다. 재수를 하려고 서울에 올라와 자취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꼭 붙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등학교 때 자기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 생각이 나서 올 3월부터 기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번에는 서울대학교에 꼭 합격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한 세 달 정도 기도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것 달라고 하면 이것 주고, 저렇게 해 달라면 저렇게 해 준다면 그게 무슨 하느님인가? 내가 지금 무당처럼 미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하느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아서 믿고 싶어서 성당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예비신자분들 중에는 성당에 오기 전에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나오게 되었다는 분이 몇 분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을 베푸실 때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 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2) 라고 말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이유가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45절) 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믿게 하시려고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매 번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 하느님은 우리 각 개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남자만 오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도록 빵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배불리 먹고 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매몰차게 몰아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그러시고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7.29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율법 교사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강도 만난 유다인을 보고 정작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다 그냥 모른 채 지나쳐가 버렸지만, 평소에 원수같이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가엾이 여겨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봐주고 뒤처리까지 해주었다고. 그렇게 대답해주신 다음, 그 율법 교사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라고 일러주십니다. 그러면 그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고.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자 하시고,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려고 하십니다. 언제 어떻게 채워주시는지는 주님께서 나의 처지와 주위의 상황을 고려하여 결정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어린아이처럼 부모님께 땡 깡을 부리듯 계속 청하기만을 바라시지는 않으실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고 채워주시면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며 드리는 흠숭과 찬미를 기꺼이 받아주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채워주신 것을 바탕으로 행복하게 살면서,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총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길 바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제34주일을 맞아 생각해 봅니다. 올 한 해의 내 삶이 누구의 덕분일까? 주님께서는 올 한 해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그런 의미를 되새겨보면, 왜 교회가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인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7-20)

우리 삶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제단 위에 저렇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형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형제자매들을 바라봅니다.

세례 때에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간절한 염원을 주님께 청합니다.

여러분의 청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청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울러 우리는 기억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며 또 세례성사를 받아 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때를 기억하며, 그 때 했던 결심을 되새깁시다.

앞으로 세례를 받고서 내가 어떻게 살기로 했는지를!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흡하여 주님께 찬미를 부르며 그에 대한 보은으로 주님의 사명을 함께 이루는 협조자와 사도가 됩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일)

(가해) 마태 25,31-46; 14/11/23

언젠가 어느 본당에서 미사 시간에 신자들을 앞자리에 나오라고 부르고 뒷자리에 불을 끄곤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앞 자리를 텅 비워 놓고 뒷자리를 고집하며 불필요한 전기 낭비를 방지하고자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만, 내적으로는 ‘내가 여기 있으니 주님께서 오셔서 빛을 비춰주십시오.’ 하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우리 삶의 빛이신 그리스도 주님께로 나아가자는 취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주님, 제가 하는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주님, 제가 하는 일을 축복해주시고, 열매 맺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면,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줄 알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경우에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거나 그 보답으로 형제자매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반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주님께서는 날 도와주지 않으시냐?’ 고 원망합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 청하고, 내가 건강하고 몸 성히 지내기를 바라며, 내가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는지에 대한 성찰도 없이 무조건 주님이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적인 욕심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의 결실을 자신의 것만으로 여기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온 세상을 우리에게 맡겨 잘 관리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라고 하신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면 내 주님이고,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주님이 아니다.’ 라는 식의 기도는 미신이지 그리스도교 주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주님으로 믿으며 따르는 신자들은 자신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에서 “주님께서는 왜 이 일을 겪도록 하시는지?”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지?” “주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를 찾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서 찾습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을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그러시고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려는 율법 교사에게, 강도 만난 유다인을 치료해주고 보호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시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친구로 삼아주시고, 친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13-15절) 그리고 주님의 명령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인 제자들과 우리 인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상에서 목숨을 내놓으십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 뜻과 의미를 미리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16,26-28) 그리고 그 일을 우리에게 계속하라고 명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주님의 명에 따라 사랑하다가 지치고 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1-23)

아울러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우리에게 주님을 보다 더 잘 알게 해주시고, 주님께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19-20.26)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다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요한 16,15.23)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는데 힘을 보태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에페 3,16-17)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지,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를 죄악과 어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구원해 주시는지와 하느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성경에 기록한 복음사가는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라고 밝힙니다.

오늘 성경주간을 시작하며 성경 안에서 우리 삶의 빛과 인생의 길을 발견하고, 주님을 따라 성령의 이끄심에 힘입어 그 길을 걸어나가, 마침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우리 인류 모두가 구원되는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다같이 노력합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다해) 루카 23,35-43; 13/11/24

어제 우리는 이 삼성동 성당에서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다가 떠나신 교우들을 위해 합동 연도를 바쳤습니다. 연도대회 준비하시고 또 직접 참석하셔서 연도 바치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11월 위령 성월에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 인생에 기여해주셨던 은인들과 선인들을 기억합니다. 동시에 우리 민족과 사회 그리고 인류사회를 위해 희생하셨던 열사들과 의사들을 비롯하여, 우리의 지상 생애와 신앙 생활을 위해 순교, 순국, 순직하신 모든 분들을 기억합니다. 또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영혼들과 불쌍하고 억울하며 비참하게 돌아가신 영혼들도 함께 기억합니다.

저는 독일 수도원 체험 피정 때 신부님들과 나치치하의 첫 번째 포로수용소였던 ‘다하우 포로 수용소’(Dachau Concentration Camp)를 방문하고, 수용소 한 귀퉁이에서 수용소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일생 기도하며 희생을 바치고 있는 깔멜 수녀원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지난 8월 20일 슈테펜 자이베르트 독일 총리가 방문하여 세상의 이목을 다시 집중시켰던 다하우 수용소는 지난 1933년 어린 시절 성당에서 복사를 서던 아돌프 히틀러가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우리의 마지막 희망 히틀러!” 라는 구호를 내걸고 권력을 잡은 직후 만든 정치범 수용소로 유대인과 동성애자, 집시, 전쟁포로, 장애인 등 20만명이 수용된 곳입니다.

뮌헨에서 약 1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 수용소 정문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는 성경구절을 개절하여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문구를 통해 강제 노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미군이 1945년 4월29일 이 수용소를 장악하기 전까지, 군수픔 공장 등지에서 강제 노동으로 닭장 같은 수용소에서 하루 한 끼를 먹으며 기아나 질병으로 숨지거나 살해된 이는 천주교 신부 2,579명을 비롯하여 41,000 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중 사제 38분과 수사 3분, 평신도 3분 총 44분이 지난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족이 있기에 살려달라고 하는 사형자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놓으신 막시 밀리언 콜베 신부님은 1982년 시성되셨습니다.

미군이 공격했을 당시 수용소에는 약 3만 명이 있었는데 수용소 열차에서 2,000여구 이상의 처리하지 못한 시신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이에 분노한 미군들이 항복한 독일 경비병들을 사살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하우 소용소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해 적지만, 독일 강제 수용소의 모델이 되는 최초의 수용소였고 또한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았던 곳입니다. 저체온에 대한 생존력 테스트를 위해 사람을 얼음물에 담궈 놓고 죽을 때까지 매시간 피를 뽑거나 나체로 영하의 날씨에 서 있도록 하면서 신체반응을 테스트 했고, 항생제의 효력을 시험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사람들을 박테리아에 감염시켜 가스괴저를 일으키거나 파상풍에 걸리게 했으며, 압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사람을 방에 넣고 진공상태를 만들어 실험했다고 합니다.

다하우 수용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가 순교 성인들 뿐만 아니라, 12월 28일 죄없는 아기순교자들 축일처럼, 인간의 구원을 부르짖으며 인간을 위해 봉사한다던 인간에 의해 무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도 제정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성과 과학 기술을 주장하며 인간의 진보를 기치로 내걸었던 근대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뜻에 동참하거나 따르지 않았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결국 그들이 외치던 인간 발전은 인간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남겨놓고 허망한 꿈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교회는 가진 자들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교의를 전파하는 단체에 불과하고, 현세에서는 힘이 들어도 마지막 날에 죽어서 행복하게 될 것이라며 가난한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외치며, 종교와 도덕과 예술을 한낮 신념으로 강등시키고, 이성과 과학 기술을 근거로 한 경제와 정치 발전을 도모하던 근대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 전쟁과 전쟁 중에 저지른 인간들의 무참한 폭력으로 인하여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라는 말을 남기게 했고, 인류의 진보를 외치던 근대화의 기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보다 낳은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다른 한 쪽의 인간과 자연을 희생시키는 어리석음을 통해 우리는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료 발전을 생체 실험, 이념과 종교 이데올로기를 기치로 한 전쟁과 인종 핍박, 고문, 납치, 인신 매매, 학살,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재해, 온난화 영향으로 빈번하고 거대해진 자연재해, 생각하기 조차 싫은 상황들이 오늘 우리가 사는 곳곳에서 벌어지며 거꾸로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사람들에 의해 사건 사고가 생겨나는 데도 자신들을 되돌아 볼 줄 모르고 그 대신 그 책임을 하느님께 묻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느님께서는 뭘 하시는가?” “왜 선하신 하느님께서 이런 악을 용인하시는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런 인간의 잔악한 행위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사랑 때문에 아파하시고, 오히려 인간의 잔악한 행위로 피해를 당한 다른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시며 죽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그런 물음을 던지며 우리가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단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다.”는 말 외에는 우리가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주님 앞에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겸허히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죽은 모든 이들을 기념하는 11월 위령 성월에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의 죽음을 연상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 지상 생애를 살다가 언젠가는 우리의 외적인 육을 떠나 영으로 새 세상으로 건너갑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지상 생애를 마치고 새 세상으로 가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우리는 남겨진 가족과 인류 사회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하며, 새 세상으로 떠나시렵니까?

내 유언장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쓰셨습니까?

육적인 것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생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어간다면......, 어디서 어떻게 헤매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도 없이 가버린다면, 너무나도 아쉽고 억울하고 어쩔 줄 모르는 체 생을 마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지상 생애를 마칠 시간과 장소를 우리 스스로 정할 수 없음을 염두에 두고, 언제일지 모르게 다가올 새 세상행을 위해 미리 준비하기로 합시다. 내일 부활의 영광을 위해 오늘 우리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따라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기로 합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는 오늘 우리 삶 속에 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꿈과 희망 그리고 우리 삶의 목표와 가치를 주님과 주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에 두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헌신하며, 우리의 마지막 생애를 불태우며, 육의 마침과 영의 시작을 준비합시다.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생애로 넘어가는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기로 합시다. 물질을 넘어 영으로, 한계를 넘어 영원으로 향하는 우리의 생애를 미리 준비하기로 합시다. 육의 제한 속에 갇히지 않는 우리의 꿈과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오늘 여기서 새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기로 합시다.

영원을 향한 우리의 꿈을 미리 앞당겨 살도록 하는 우리의 신앙을 통해 시들지 않고 꺽이지 않는 영원을 향한 우리의 꿈을 준비합시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나해) 요한 18,33ㄴ-37: 2012/11/25

최근 경제가 어려워 제2의 IMF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전망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외적인 요인보다 우리를 압박하는 더 큰 고통은 가정과 사회의 내적인 응집력이 무너져서 받는 고통이라고들 합니다. 실제로 지난 IMF 때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는 내적인 결속력이 무너져버려, 가정이 파괴되고 친지와 형제들을 잃어버린 일이 허다한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간디도 "우리 인도인이 영국인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우리 인도인끼리의 차별과 지배를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립은 자립에서 오는 것이며, 안정은 난세를 극복하려는 내적인 힘과 응집력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서기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고 로마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던 유다인들의 반란은 마사다에서 그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이를 예견하고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예루살렘을 보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1) 하고 한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라고 하십니다. 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그리고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과 무관하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이라고 하는 우리 사회와 저 세상이라는 하느님 나라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오늘 구조조정을 전제로 하는 신경제원리는 우리에게 사람보다 물질을 선택하라고 옭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눔보다 경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미노 현상'이라는 경제원리도 있습니다. 그것은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에 물건을 팔던 나라도 더 이상 물건을 팔지 못해서 같이 망한다는 원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돈과 물질을 선택하라 하고, 하느님 나라는 인간과 생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우리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 투자하고 미래를 위해 비축해야 살아남는다고 요청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어려울수록 이웃과 나누어야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친지와 형제들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요한 6,27 참조), 예수님, 바로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이끄심에 힘입어 그분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실현하며, 그분께서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순례하기로 합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제27회 성서주간 담화문: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가해) 마태 25,31-46; 11/11/20

1. 머리말

현대 사회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불과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성과를 이루어 냄으로써 오늘의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와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으며,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득세로 하느님을 닮은 인간성이 창조 질서 안에서 오히려 열등하게 비치기까지 합니다. 또한 정보화의 지나친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인류는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해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일들을 실제로 경험하였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는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자연재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자연 이변들은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행하는 지나친 환경 파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를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난 3월 일본 동북부 지역에 있었던 지진과 쓰나미에 이어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너무나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장담하던 인간은 가능성이 몇 백분의 일도 안 되는 극히 적은 예외적인 사고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 놓고 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고 오랫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또 세계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라고 하는 미국 뉴욕 월가와, 세계 경제 대국의 한가운데에서 연일 일어나고 있는 시위는 오늘의 경제 형태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왜곡되어 있는지를 강변합니다. 상위 1%의 부자들이 전체 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상당수의 하류층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한 나라에서 일어난 경제적 난국이 이웃나라로, 전 세계로 번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이어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일반서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세계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지만, 첨예한 이해관계를 따지느라 해결책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새롭고 확고한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하며, 절대적 판단의 기준이 새로이 요청됩니다.

2. 새로운 복음화의 필요성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을 때, 많은 군중이 와서 끼니를 잊을 정도로 귀한 말씀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특히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억압받거나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더 많이 와서 경청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희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고 선포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삶의 변화와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성체성사의 신비를 계시하셨을 때, 군중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고 비난하며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이 복음은 내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복된 말씀을 듣던 한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7-2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성모 마리아에게만 유보된 특권보다 더 가치 있다는 이 선언은 우리에게 새로운 각오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라고 기도하고, 이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곧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생활할 때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정성스럽게 듣고 실천하도록 노력할 때 비뚤어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복음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묻혀 있는 보화와 같습니다. 성경 말씀을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귀 기울여 듣고 그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 공부, 성경 필사, 성경 외우기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친숙해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잘 만들어진 신·구약 성경과 주석 성경이 있으며, 성경에 관련된 여러 가지 입문서와 참고서들이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고귀함을 깨닫고 그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라면,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읽도록 권장해야 합니다. 혼자서 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이 할 때 더욱 힘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선 본당 단위로 청년, 어르신, 초·중·고등부를 포함한 모든 신자가 모임을 만들어 추진해 볼 것을 권장합니다. 또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들도 성경 공부를 통해 우리 사회와 본당 공동체에 받아들여지고 동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맺는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현세의 야심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파스카로부터 나오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히 봉헌하는 것입니다.

2011년 성서 주간을 맞으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와 공동체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의 관계를 맺으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희망하며, 여러분의 참 행복을 주님 안에서 기원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요한 6,27 참조).

2011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이형우 아빠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가해) 마태 25,31-46; 05/11/20

I-5 고속도로의 출구 114로 나가면 니스콸미 생태 환경 보호 공원이 있습니다.

니스콸미를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

그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말합니다. “키가 작다.”고. 키가 작으면 옷감이나 물자를 조금 쓰죠. 거꾸로 보면, 보통으로 만들어 놓은 물자를 나에게 맞추느라고 후질러 놓았다고도 할 수 있죠.

친구들이 말합니다. “착하다.”고. 착하다는 말은 거꾸로 보면, 바보라는 소리도 맞습니다.

그럼 남과 다르게 나에게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은 무엇인가?

신부들은 아니 신자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다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또 따지고 보면 제가 남보다 강론을 잘 하거나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누구나 기도하고, 누구나 묵상하지만, 전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얻은 느낌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인양 소중히 여기고 그걸 형제들과 나누려고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제 달란트요 제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저는 위대한 명상가도 아니고, 훌륭한 영성가도 아닙니다.

그리고 제 책이 베스트 셀러도 아닙니다.

그러나 단지 제가 기도하면서 얻은 것을 그냥 흘려버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게 알려주신 것이라고 여겨, 묵상이 끝나자마자 글로 적어서, 형제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제 달란트고 그것을 키우고 성장시켜 지금까지 25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제가 주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학교에 가서 학자들이나 책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도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지만

다른 한쪽으로 내게만 있는 장점을 발견하고 성숙시키는 것도 커다란 성장입니다. 물론 남에게 배우고 난 다음에 잘 깨달아서 내 장점을 식별하고 성숙시킬 수도 있겠죠.

하느님께서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 선물을 주셨다는데 나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인지 깨닫고

그 달란트를 소중히 키우고 가꾸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합시다.

그래서 형제들이 내 달란트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잘 가꾸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어떤 부분을 키우고 있습니까?

오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먹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면서 살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간절히 바라고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0)

우리는 돈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누는 것이 주님께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가져갈 것은 눈에 보이는 유형의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입니다.

그리고 내 것이라고 하는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게 형제들과 나누라고 나에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선물을 어떻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드러내도록 바라시는지?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선물을 어떻게 형제들과 나누기를 바라시는지?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선물을 누구와 어떻게 나누기를 바라시는지?

하느님께서 우리 공동체 식구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여겨 우리가 나누길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실행하면서

나와 우리의 삶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합시다.

아멘.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루가 23, 35-43; 04/11/28

얼마전 동아일보에 이런 글이 실렸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말아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말아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한 번쯤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기사였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비롯한 우리의 인격과 일상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실제로 위의 지적처럼 기도할 때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하면서도 살 때는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보다 나의 이익을 더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주님은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게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25. 32-33)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씀과 기적으로 몸소 보여주셨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유다인들이 주님께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35)하는 조롱과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37)라는 빈정거림이다. 그리고 결국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38)이라는 죄목으로 묶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다.

그런데 이일이 비단 유다인들의 일로서 그치고 만 사건인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렇다고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가? 불행하고 수치스럽게도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현세를 살면서도 주님 앞에 고개를 들고 살기 어려운 처지를 알고나 계신 듯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강도의 모습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여지를 남겨 주신다. 우리에겐 다행인지 아니면 주님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주님을 따르기는커녕 배반하고 거꾸로 주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당시 해골산에는 예수님 외에 두 명의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한 죄수가 예수님께 말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39) 그런데 또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40-41)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42)하고 간청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죄수를 향해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43)

한 명의 죄수는 자기의 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조롱하였고, 다른 죄수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면서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그 죄수의 고백과 청원이 우리를 대변하는 듯 하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초대를 들으며 우리의 삶을 다시 주님께로 향하기로 하자.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성서주간 담화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 6)

- 다원주의 안에서 복음의 위상-

2003/11/23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느덧 무르익어 가는 결실의 계절 가을의 길목에서 성서주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금년 성서주간의 표어를 주님의 위대하신 선포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 6)로 정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21세기 다원주의의 흐름 속에서 성서사도직 봉사자가 구심점으로 삼고 갖추어야 할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비전과 신적 힘의 원천이시며 말씀 자체이신 주님께로 다시금 방향이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년 레바논에서 열린 가톨릭성서연합 제6차 총회 결의문에서는 향후 6년 동안 여러 차원에서 성서사도직이 수행해야 할 우선적 과제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차대한 과제는 문화·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계에 직면해서 성서사도직의 과제와 역할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연구하는 일이라고 천명되었습니다. 새롭고도 불확실한 다원주의의 흐름 속에서 첨예화되고 있는 상대주의와 가치관의 혼란은 새 천년기의 말씀 봉사자들이 혼신을 다해 극복해야 할 위협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복음화 활동에서 '말씀의 봉사자'가 되고자 우리 자신을 풍부한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야말로 새 천년기의 여명을 맞는 교회가 무엇보다 우선하여야 할 일"('새천년기' 40항)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당면한 이러한 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다음 세 가지 현상에서 관측해 보고 21세기를 사는 말씀의 봉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자연종교의 확산입니다. 지금까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의 훼손이 가져다 준 생태 위기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정복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풍조가 주변에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신성시하는 세계관의 영향은 계시종교를 배제하고 자연종교와 유사한 성향의 종교를 더 선호하게 합니다. 동양종교와 같은 자연종교가 강세를 보이고 계시종교인 그리스도교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둘째, 신영성 운동의 범람입니다. 뉴에이지와 같은 신영성 운동의 이름으로 반그리스도교적인 종교 현상과 운동들이 가톨릭 교회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신영성 운동은 개인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건강이나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동원될 수 있다는 새로운 종교 운동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종교 선택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물든 신자들은 초월명상, 선, 기공, 요가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인 종교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부정하는 감각적이고 열광적인 신비 체험에만 몰입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서 인격적인 하느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말씀을 통해 인간과 대화하시는 하느님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일찍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이러한 거짓 영성 운동을 경계한 적이 있습니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디모 4, 1).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입니다. 인간의 자기 본능과 감각과 느낌을 충족시키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권위를 흔들고 있습니다. 감성에 충실한 것은 모두 선하다는 상대주의적 가치 기준에 기초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인해 그리스도교적인 절대적 가치 기준이 무너지고 상대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현상이 혼합되어 효력을 발휘하면서 신자들의 신앙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융합과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뒤섞인 이러한 혼합주의의 영향은 결국 경계와 영역과 정체성을 파괴하여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경계선까지 허물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에 입각한 이러한 움직임들은 신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켜 신앙인들에게조차 교회는 재미없고(교회전례), 고리타분하고(교리교육), 부담스러운(교회윤리)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러한 다원주의의 사조와 풍조에 직면해서 말씀의 봉사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우리의 삶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한 14, 6)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완전한 중개자로서 우리의 길이시며, 계시자로서 우리의 진리이시며, 구세주로서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 삶의 최고 가치인 길, 진리, 생명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전한다면 그만큼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히브 4, 12)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자연 영성, 평화, 자기 계발 등도 이 말씀 속에 이미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의 봉사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먼저 다원주의의 긍정적인 고유한 가치들은 올바로 수용하면서도 말씀이 정화되어 뿌리내리는 길을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항상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2003년 11월 23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권혁주 주교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성서주간 담화문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셨나이다"(사도 2, 28; 시편 16(15), 11)

2002/11/24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성서주간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살아 있기를 빌며 인사드립니다(골로 3,16 참조). 금년 성서주간의 표어인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셨나이다”라는 말씀은 사도 베드로께서 오순절 설교 때에 인용하신 시편 말씀입니다(사도 2,28; 시편 16[15],11). 이 말씀은 우리 신자들 모두가 ‘생명의 길’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계시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서 말씀을 더욱 열심히 경청하고 묵상하고 전하자는 취지에서 선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생명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신약성서에 의하면 ‘생명에 이르는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한 마디로 ‘사랑으로 섬기는 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남기신 핵심 가르침도 바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한 13,1-17; 마르 10,42-45 참조). 예수님은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시면서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당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희생제물로 만들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무서운 사자처럼 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린양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는 삶을 사셨습니다(이사 53,10; 요한 1,29.35 “하느님의 어린양”; 마르 10,45 참조).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부터 먼저 불신과 폭력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빛’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죄에 뒤엉켜 ‘불신과 폭력의 악순환’ 속에 빠져 있는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출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2002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가을의 그윽한 정취를 채 느껴 보기도 전에, 때 이른 겨울 날씨가 찾아왔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이제 곧 새 해가 시작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얼마만큼 주님께서 알려주신 ‘생명의 길’을 걸어왔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욕심에 현혹되어 주님이 보여주신 ‘생명의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들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합과 평화로 ‘생명’을 살리는 길은 가지 않고,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생명’을 억압하거나 없애는 길을 걷지는 않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반성과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성서 말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느끼게 해주고 그분과 대화하도록 초대합니다. 성서를 자주 읽고 묵상하며 성서와 함께 기도를 하면, 성서는 우리의 삶 안에 서서히 영향을 주어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히브 4,12) 때문입니다. 새 싹이 어둠 속에만 머물러 있으면 죽게 되고 햇볕을 받아야 자라나듯이, 우리의 생명도 하느님의 빛을 받아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성서가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의 빛을 받으며 자라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으신 ‘생명의 싹’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정성을 들입시다. 개인으로뿐 아니라, 공동체로도(가족, 소공동체, 또는 본당 단위로)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서 말씀을 더욱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노력합시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생명의 싹’을 키우는 가장 좋은 길 중의 하나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2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권혁주 주교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성서주간-“주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다해)01/11/25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시편 118[119],105)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어느덧 2001년 한 해도 곡식과 과일이 고맙게 무르익은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빈 들녘과 잎을 여읜 숲은 희망의 새 생명을 배태하려는 침묵에 잠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물어가는 올해는, 화평과 일치의 새 천년기를 열자던 해였음에도, 지난 9월 11일 미국에서 일어난 경악할 대참사와 그에 이은 무력보복의 악몽을 벗지 못한 채, 마치 온 세상이 상호 배척과 증오, 원한과 복수, 끝이 안 보이는 공포와 불안의 시대로 빠져들고 있는 형세입니다. 나라 안에서도 경제 난국에 더하여 정치와 사회의 혼란, 가치관과 가정의 와해 앞에서, 아니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을 쓰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함께 모색해야 할 때를 맞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말없는 대다수 개개인과 가족들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한결같은 성실과 인내로 희망을 지니고 서로 아끼고 도우며 어질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선의의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더러는 사회의 품에서 소외되어, 방황과 허탈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우리의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산다는 우리마저도 하릴없이 세파에 밀려 갈피를 못 잡고 있지나 않습니까.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흔들림 없이 바라보아야 할 별빛, 우리가 꿋꿋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등불은 오직 참 생명의 말씀뿐입니다. 그래서 올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간인 이번 성서주간의 표어를 우리 모두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시편 118[119],105).

“주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열고 주님 자비의 품안으로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더는 세속의‘힘’과 잘난‘지혜’로만 헛되이 살려고 하지 말고, 참 믿음으로 성서말씀을 잣대 삼아 살아갈 때 올바른 방향도 찾고 역경을 헤쳐나갈 힘도 얻을 것입니다. 생명의 샘인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미움과 분열이 아니라 관용과 사랑으로, 일치와 평화로 이끌어 주십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나 하루 세끼 밥을 먹어 육신의 목숨을 기르듯이, 우리 모두 먹고 살라고 내어주시는 성서말씀을 날마다 정성된 마음으로 읽고 묵상하면서 삽시다.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금 굳게 고백합시다(요한 6,68).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

주님, 저희가 날마다 성서를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기도하며 살고 선포하게 하시어 성령 안에서 평화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001년 11월 25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장익 주교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나해) 요한 18, 33ㄴ-37: 2000/11/26

요즘 제2의 IMF가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달러 사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우리를 압박하는 외적인 요인보다, 내적인 응집력이 무너져서 고통을 받는다고들 한다. 실제로 지난 IMF 때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는 내적인 결속력이 무너져버려서 가정이 파괴되고 친지와 형제들을 잃어버린 일이 허다한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간디도 "우리 인도인이 영국인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우리 인도인끼리의 차별과 지배를 없애야 한다"고 했다. 독립은 자립에서 오는 것이며, 안정은 내적인 힘에서 온다.

서기 70년 경에 예루살렘 성전은 산산히 무너져 버렸고 로마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던 유다인들의 반란은 마사다에서 그 마지막을 맞았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예루살렘을 보고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루가 19, 41-42 참조).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 18, 36)라고 하신다. 또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예수님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 26)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 63)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과 무관하다는 말인가? 이 세상이라고 하는 우리 사회와 저 세상이라는 하느님 나라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 구조조정을 전제로 하는 신경제원리는 우리에게 사람보다 물질을 선택하라고 옭매고 있다. 그리고 나눔보다 경쟁을 부축이고 있다. 그런데 '도미노 현상'이라는 경제원리도 있다. 그것은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에 물건을 팔던 나라도 더 이상 물건을 팔지 못해서 같이 망한다는 원리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돈과 물질을 선택하고, 하느님 나라는 인간과 생명을 선택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한 푼도 안 써야 살아남는다는 것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어려울수록 이웃과 나누어야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요구하고 있다. 친지와 형제들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람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할 빵인 예수님 바로 그분을 모시고 살아가기로 하자.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가해) 마태 25,31-46; 99/11/21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 40)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2000년 대 희년을 맞이하기 위해 용서 못한 사람 다 풀어 주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어려운 한 분에게 베풀어야겠구나.'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면서 동시에 교회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주일인 연중 34주일입니다. 이번 주간이 지나면 우리는 1999년을 마치고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게 됩니다. 희년은 구약성서 레위기 25장에서 유래합니다.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에 오는 해를 희년으로 삼고,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죄를 벗고 다른 사람을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희년에는 모두 다 용서해 주고, 풀어줘서 다 없던 것으로 합니다. 안식년처럼 아무런 생업도 하지 않고 자기와 자기에게 딸린 가족들과 일꾼들 땅, 동물 등 모든 생물이 쉬게 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희년에는 저마다 자기 소유지를 다시 찾아 돌아가도록 풀어줍니다. 그 동안 살기가 어려워서 땅을 팔아 남의 땅에서 살았다면 제 땅을 다시 사고, 남의 종살이를 했다면 다시 자유인이 되어 자기 가족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예외 규정은 있지만 모든 매매가 무효가 되고 인간을 억누르고 제한하던 모든 제약이 풀리는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들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더 발전해 신명기 15장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규정'에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시는 땅 어느 성에서 너의 동족 가운데 가난한 이가 있거든, 가난한 그 동족에게 매정한 마음을 품거나 인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의 손을 활짝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히 꾸어 주어야 한다. 그가 너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에게 죄가 될 것이다. 너는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줄 때에 아까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땅에 있는 궁핍하고 가난한 동족에게 너의 손을 활짝 펴 주라고 너에게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15, 7-8. 9ㄷ. 10ㄴ) 라고 까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1장 44절에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고 그가 무덤에서 나오는데 온 몸이 붕대에 싸여 있는 것을 보시고는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고 하십니다. 희년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죽음을 이기는 희망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 서로를 풀어주고 베풉시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다해) 루가 23,35-43 : 98/11/22

어린이 여러분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요? 예수님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더욱 더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어제 세례성사를 받은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또 부모님을 버리고 하느님께 가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면서 부모님의 자녀가 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성당에서 미사 드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어린이 반모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 말씀을 이룰 수 있습니다. 견진성사를 받으면 더욱 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할 수 있게까지 되겠지요.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를 이룹니다. 여러분이 말한 것 같이 성체를 모시는 영성체도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우리를 위해 쪼개 나누어진 빵'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기 전에,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몸을 빵으로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징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성체성사를 이루고, 성체를 모십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되새기고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나도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를 바쳐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첫영성체를 하는 우리 친구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좋은 생각을 버리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예수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꼭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성체성사로 힘을 얻어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34주)

(나해) 요한 18,33ㄷ-37 : 97/11/23

우리는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그 꿈이 이루어지신 분이 있고, 또 어떤 분은 자신의 꿈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되새기고 있습니다. 아니 잊혀져 버린 꿈도 있겠지요. 다행스럽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분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길을 계속 걷고 계신 분은 꿈을 이루는 길이 너무나 멀어서 다소 지치거나 조바심은 나실 줄 모르지만 희망이 있어 보람은 있으실 것입니다. 또 꿈과 전혀 다른 길을 걷는 분들은 인생의 신비로움을 느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의 꿈이 판사나 의사나 사장처럼 눈에 보이는 자리거나 위치이고 현실세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면 나의 노력 정도에 따라 그리고 사회가 나의 꿈을 받아들일 시기와 조건이 충족되면 언젠가는 나나 또는 나의 자녀가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 꿈이 우리의 내면에서 근원적으로 샘솟는 것이라면 현실세계에서 완전히 이루기도 또 이루어짐으로써 우리가 기대하던 것을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 특별히 영원과 항구적인 평화, 구원에 대한 갈증 등이 그것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주님께서는 오늘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 18,36)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사랑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 그 나라는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버지의 때가 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가 없거나 사라졌다고 생각하여 무시하거나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우리가 사는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진리에 대한 희망을 간절하게 간직하고 있을 때 진리는 더욱더 우리에게 가까이 와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시기라도 하듯이 주님은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요한 18,37) 하늘나라의 구원과 오심을 선포하시는 기쁜 소식이신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우리와 우리 삶의 주인이요 왕으로 임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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