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사목자 리더십


7장 교회의 모형과 사목자상

    1. 제도인 교회-사제인 사목자

    2. 성사인 교회-그리스도의 대리자(제2의 그리스도)인 사목자

    3. 청취자인 교회-예언자인 사목자

    4. 종인 교회-종/봉사자인 사목자

    5.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양성장이자 구도자인 사목자

    6. 주님의 고난받는 종인 교회-대속자인 사목자

    7. 친교인 교회-삼위일체 신비를 사는 사목자

    8. 기타 사목자상

        1) 자애로운 공동체의 상처받은 치유자

        2) 예언 공동체의 정치적 신비가

        3) 무지개 교회의 노예가 된 해방자

        4) 교단-이후 교회의 실천신학자

        5) 지구 마을의 공적 사목직무




7장 교회의 모형과 사목자상




이 장에서는 교회의 모형들을 알아보고 각 모형에 걸맞는 사목자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서 나오는 교회의 모델과 사목자상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 입각한 1항 제도인 교회와 사제인 사목자, 2항 성사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대리자(제2의 그리스도)인 사목자, 3항 청취자인 교회와 예언자인 사목자, 4항 종인 교회와 종/봉사자인 사목자, 5항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와 양성장이자 구도자인 사목자, 6항 주님의 고난받는 종인 교회와 대속자인 사목자, 7항 친교인 교회와 삼위일체 신비를 사는 사목자이다. 그리고 8항 현대에 들어 새롭게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목자상을 자애로운 공동체의 상처받은 치유자와 예언 공동체의 정치적 신비가, 무지개 교회의 노예가된 해방자, 교단-이후 교회의 실천신학자, 그리고 지구 마을의 공적 사목직무로 나누어 살펴본다.



1. 제도인 교회-사제인 사목자

애버리 둘스Avery Dulles는 「교회의 모델」에서, “하나이며 진리인 교회는 이 땅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합법적인 주임 사제들의 통치 아래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과 같은 성사의 친교로 연결된 사람들의 집회다. 참된 신앙 고백, 성사 안에서의 친교, 합법적인 주임 사제들께 순명 이 세가지 요소가 정의를 구성하고 있다.”1)는 로버트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o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의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다. 교황 비오 12세는 이 정의를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Mystici Corporis Christi)」에서 확인했다. 그 8항과 22항에서 로마 교황과의 연계 안에서 교회의 교계제도와 합법적인 권위를 보여준다.

둘스는 교회의 제도적인 구조를 네 가지 영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첫째, 교회 지침과 규정(신조, 교의, 교회법적인 저술- 성경, 공의회 발표문), 둘째, 공적 예배의 형태(성사와 다른 승인된 예식), 셋째, 통치 구조(힘과 의무를 가진 당직자), 넷째, 법률과 관습(신자 행동 규정)2) 이렇게 네 가지 영역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도인 교회 모형’3)을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다 불러 모아 주님의 피로 그들을 하나로 만드시고 새로운 계약의 제도를 세우셨다. 그분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 안에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제도를 제정하셨다. 그분은 그분 교회의 전체 구성원들의 공동선을 위해 다양한 직무 제도를 신설하셨다. 그분은 또한 제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책임을 맡기셨고 그에게 베드로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으며 그를 통해 보이는 교회의 일치와 친교를 이루어 내셨다. 교회는 사회에 봉사하는 제도들 중의 하나다. 교회 내에는 수도회 제도들도 많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그것은 일반사회와는 사뭇 대조되는 비전과 가치 그리고 삶으로 증거하는 대조 사회였다. 수도 단체들은 14세기경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어받아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이 주님의 사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도 단체들은 세상과 제도 교회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새로운 표지였다. 그들은 정결과 가난과 순명이라는 복음 삼덕을 자신들의 삶으로 보여 주고 있고, 형제애와 자매애로서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싸우는 이 세상에 하나의 대조사회를 드러내고 있다.

이 제도 교회 모형은 그리스도교 교계제도와 그 체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 모형은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를 드러내는데 아주 유용해 보인다. 세계적인 조직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권위와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교회의 외부 구조적인 면을 전체적으로 볼 때 교회의 이 제도적인 모형은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에 적절하게 따르며, 부서진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는 카리스마적인 제도가 될 때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게 된다.4)

영국 교회의 주교인 웨슬리 카르Wesley Carr는 「사목 연구 개론: 그리스도교 직무의 앎과 실습」에서, 제도인 교회 모형에 걸맞는 사목자상을 ‘사제인 사목자’라고 본다. 사제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사제가 다른 이들을 위해 있다고 기대되며 그래서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사목자는 삶과 죽음 그리고 하느님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중개자로 기대된다. 특별히 장례 때 그렇다. 사람들은 사제직이 중개적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인 신자들이 일상에서 묻는 때를 벗겨주고 닦아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기대한다. 오늘날 사목직무를 고려할 때 사제나 사목자가 하는 일은 무엇보다 고해성사에서 사람들을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고 용서해주며 성찬례를 집전하는 일이다. 강론을 일대일로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공동체를 사목하고 공동체의 기쁨과 슬픔을 위해 기도하고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제도인 교회상의 사목자상이다.5)



2. 성사인 교회-그리스도의 대리자(제2의 그리스도)인 사목자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성사이셨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성사다. 교회는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을 교회와 세상에 현존케 하며 사람들이 그분의 손길을 느끼도록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사는 거룩한 것의 표징이며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게 한다.”고 정의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교회의 성사를 통해 신자들에게 쏟아 부어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사인 교회 모형’6)을 기술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결합과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다.”(「교회 헌장」 1, 9, 48)교회는 구원의 보편적인 성사요 주님께서 내려주신 새로운 계명의 성사며, 교회가 근본적으로 모든 이들의 대속을 위한 도구라고 적혀 있다.

교회는 성사들을 통해 교회를 더욱더 교회답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신비체 구성원들 간의 일치와 친교를 누리게 한다. 성령께서는 교회의 성사적인 표지를 통해 활동하신다. 교회는 찬미하고 기도하고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신자들이 성사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교회가 주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셨고 교회를 주님의 성사로 만드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개신교회들도 성사인 교회라는 표현을 썼다. “교회는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표지이며 도구이다.”7) 이 모형은 신학적으로나 우리 주 예수님을 묵상하고 교회 자신을 이해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이 모형은 신자들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복음화하는 데 아주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8)

카르는 성사인 교회의 사목자상을 ‘그리스도의 대리자(제2의 그리스도)인 사목자’로 삼는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제2의 그리스도라(Alter Christus)는 표현이 가톨릭의 정신이상자들의 소리로 비춰졌지만, 프로테스탄트들도 교회를 성사로 바라보면서부터 사목자(역사적으로 볼 때는 사제)를 제2의 그리스도로 보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성사인 교회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바로 세상과 사회의 한계에 놓여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사목자들도 한계에 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한계지킴이’(boundary keeper)가 되어야 한다.  제2의 그리스도라는 주제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의 세가지 공통점은 리더십과 대변 그리고 판단이다. 첫째, 지도자로서 사목자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교회와 사회 사이에, 개인과 교회 사이에 서있는, 그 경계의 한계지어진 사람들을 위해, 어디가 경계인지 식별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려내도록 기대를 받는다. 신자들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던지, 강론대에서 한계에 처한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기도 중에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둘째,  사목자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대변하듯이, 하느님께 사람들을 대변하는 중개자로 비춰진다. 그래서 사목자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지도자요 대변자이다. 이 사목직무의 전통적인 표현은 중개이다. 사목자들은 기도와 예배 중에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중개하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다. 사목자들은 그들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대변하여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하느님 앞에 서있다. 셋째, 사목자들은 신자들을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늘 판단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판단하여야 하는데, 성경의 전통을 보면, 그것은 종종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부터 나온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교회나 수도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의 경계에서부터 흘러나오고, 그 목소리에 의해 교회가 판단받는다. 그래서 사목직무 리더십은 늘 깨어 한계 기능을 한다. 그리고 제2의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그리스도를 구현한다는 의미이다. 로만 가톨릭과 영국 교회가 성직자들에게 성무일도를 바치도록 요구하듯이, 제2의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사목자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영성생활로 교회와 그 임무를 위해 자신들의 기도를 연결시키는 것이다.9)



3. 청취자인 교회-예언자인 사목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청취자인 교회’10)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계시 헌장』과 「일치교령」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모형과 연관하여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을 듣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을 구해야 할 교회에게 있어서 커다란 선물이며 지침이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기쁜 소식을 듣고 또 찾아야 한다. 교회는 또한 교회의 미래를 주님의 말씀에 두고 그 말씀에 희망을 걸며 그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교회는 성령의 감도 안에서 신심 깊고 헌신적인 태도로 성경과 사도적 전승을 듣도록 가르쳐야 한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들어온 기억을 전수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들을 새로운 청취자로 삼았다. 그것이 오늘의 복음이 되었고 현재까지 대대로 기쁜 소식이 되어 왔다. “일치 운동 공동체에서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또 저마다 자기 교회이며 하느님의 교회라고 한다... 이러한 형제들의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자라나고, 세례의 은총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길러진다.”(「일치 교령」 1. 23)

교회는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들은 말씀을 자신들의 일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며 그들의 삶의 조건들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그 복음 말씀은 주님과 교회 그리고 교회 구성원간의 친교의 원천이며 기준이 된다. 교회는 복음 말씀에 따라 스스로 복음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화된 교회는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적 선후가 아니라, 영적인 선후다. 교회가 스스로 복음화 되는 만큼 세상을 복음화시킬 수 있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노력이 교회 스스로 복음화되도록 반영되고 요청된다. 이 복음화의 과정에서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회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가 말씀에 의거한 복음화에 나서면서 공동체원들 사이에 그리고 세상과 친교를 맺게 된다.11)

카르는 청취자인 교회 모형의 적절한 사목자상을 ‘예언자인 사목자’로 잡는다. 카르는 청취자로 번역되는 단어(herald)를 또한 복음 선포자로 이해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데, 사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예언자이며, 사회에 전해진 복음 말씀은 그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는 죽음으로 진리를 증거하는 순교자들에게서 드러난다. 사목자들의 예언자적 역할은 사목자가 마주치는 질문을 확산하여 보다 커다란 맥락에서 해석하고 대상자들과 함께 대상자들을 위하여 행위의 형태로 그려내는 데 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사목자는 하느님의 대변자로서 그들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하느님과 복음에 대해 말해야 한다. 실제로 다소 모호하더라도, 내담자들도 사목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대한다. 복음의 권위는 언제나 결실을 맺는다. 순교자의 이미지는 사목자 스스로 복음을 증거하기를 기대한다.12)



4. 종인 교회-종/봉사자인 사목자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에서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미천한 종이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모형의 개념을 ‘종인 교회’13)로 밝혔다.「교회 헌장」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교황과 주교와 사제들은 하느님 백성을 위해 봉사하도록 선발된 그리스도의 종인 것처럼, 하느님의 사제적 백성인 교회는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주교가 교회의 종으로서의 대표인 것처럼, 교회는 세상 구원을 위한 종으로서 대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벗이며 협력자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처럼, 교회는 단지 종으로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업무의 벗이며 협력자이다. 「사목 헌장」은 교회가 스스로 인류 가족의 한 부분임을 자각하고 모든 인류의 남은자로서 같은 관심을 나눌 것이라고 밝힌다. 교회는 세상에 봉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거하고, 세상을 판단하기보다는 세상을 구원하며,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러 세상에 오셨다”(「사목 헌장」 3. 92). 교회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과 통치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 사회를 위한 누룩과 일종의 영혼으로서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며, 수도자들도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고 통합하는 교회의 사명에 참여한다.

둘스는 개신교와 영국교회의 “세속적 대화secular-dialogic” 신학에 대해 말했다.14)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안내와 예언적인 비판을 제공할 수 있다.15)” 세상의 구체적인 조건들은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화하려는 교회의 사명을 드러내고 반영하고 실현시키는 교회 사명의 자료들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실제로 처한 세상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현실세계에 드러난 복음의 빛으로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해야 한다.

이 모형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육화와 수난과 부활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그것은 교회의 근본과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모형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환영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현세의 권력을 등에 진 교회가 겸손해지는 모습을 볼 것이며,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인정해 줄 것이며, 교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필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형은 성사인 교회 모형과 모습을 공유 한다. 다른 한 면으로 이 모형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교회의 사회단체 역할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미 내재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측면을 놓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전승적으로 강조해 왔던 각 개인의 회개 없이 사회체제 변화를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종으로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은 그 자체로 주님과의 친교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세상과 친교를 맺는 교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16)

카르는 종인 교회 모형의 적절한 사목자상을 ‘종/봉사자인 사목자’로 삼는다. 그는 종인 교회 사목직무와 종인 사목자란 인식이 가장 널리 퍼져있다고 본다. 종은 주인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뽑히고 임명된다. 그리고 종의 권위는 그 주인에게서 온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피서 2장 6-7절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종의 모습을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임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 대가를 얼마나 지불하던지간에, 임명된 바대로 봉사하고 싶어서 종직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목자도 타인에게 봉사함으로써 사목자의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17)



5.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양성장이자 구도자인 사목자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14-15) 예수님의 부르심은 주님과 함께 지내게 하기 위해,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의 정신으로 교회와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파견하시기 위함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을 보고, 느끼고, 알고, 경험하여 사명을 준비하여 세상에 파견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18)를 진행시킨다.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셨던 주님께서 다시 교회에 성령을 보내신다. 주님의 모든 제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스스로 살아 있는 희생제물로서 거룩하고 기쁘게 하느님께 봉헌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정화하고, 새로 나서, 기도하고, 바라고, 성사를 거행하고, 봉사를 통해 세상에 주님을 명백히 드러내 보인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인 교회를 부르셔서 사랑과 겸손으로 아버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거룩하게 되도록 부르셨다. 이 제자됨은 제자들 즉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이다.”(요한 19,26)하심으로써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와 수도 생활에서 또한 드러난다.

둘스도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본다.19) 교회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이 성령의 힘으로 아버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루시는 주님을 따르도록 하기에, 교회가 제자들의 공동체가 된다. 제자양성은 한 순간의 결정이나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가지 매일매일 계속되는 삶의 연속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루카 9,23 참조).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은 “모든 것에서 떠나는 것이다”(마르 1,16-20; 2,13-14 참조).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고(요한 21,15-19 참조), 그래서 그들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사도 1,15-26; 6,1-7; 1 티모 3,1-7. 8-13; 티토 1,6-9 참조). 제자됨은 또한 공동체와의 연대 속에서 습득되는 것이다. 교회 제자단은 그들에게 내려진 주님의 사명을 기억하며 그것을 함께 채워나가기 위해 주님의 식탁에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이다(마태 26,29 참조).

이 모형은 청취자인 교회와 성사인 교회 사이에 있다. 이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모형은 파견을 준비하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활동에 중점을 두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모형은 주님 앞에 선 교회의 기본적인 태도를 보여 주기에 아주 적합하다. 이는 세상에서 활동하는 교회의 지침이 될 수 있다. 성 베네딕토의 말씀, “기도하고 일하라.” 와 연결시킬 수 있다. 사도로서 활동하기 전에 기도 중에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걸어야 할 첫걸음이다. 소공동체는 주님과의 깊은 친교 안에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체험하는 제자단 내부의 친교를 통해 주님과 더욱더 견고하게 결속됨으로써, 동료 제자들과 함께 친교 안에 연대하여 사도로서 세상에 파견된다.20)

필자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목자상을 ‘양성장이자 구도자인 사목자’로 삼는다. 사목자들은 신자들 앞에서는 가르치는 책임자인 양성장이지만, 주님 앞에서는 끊임없이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길로 다가가려는 구도자이다. 로만 가톨릭 사제 서품 때 교회는 사제후보자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며, 읽는 바를 믿고, 믿는 바를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라고 훈시한다.21) 사목자는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잘 지키고 따르는 제자로서의 스승이다(루카 9,23 참조). 사목자는 주님의 길을 따르고 주님의 사명을 실현하면서,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의 한계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오히려 무기력 속에서 더욱 드러나는 주님의 힘을 몸소 체험하며, 주님께 의탁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구도자이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사목자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라는 사명이 한 인간인 자신에게나 지상 교회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짐인 줄 잘 알지만, 주님께서 내리신 사명 주님께서 몸소 이루시리라는 희망으로 주님께 의탁하며 언젠가 이루어주실 주님 나라의 완성을 앞당기는 교회의 사명을 성령의 도우심을 빌며 수행해 나간다.



6. 주님의 고난받는 종인 교회-대속자인 사목자

필자는 교회의 또 다른 모형, ‘주님의 고난 받는 종인 교회’의 모형을 소개하고 싶다. 이사야 예언서에 주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대신 고난 받는 주님의 모습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4-6). 이에 앞서 희미하게나마 그 모습은 이사악의 희생 제사에서 드러나기 시작한다(창세 22장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고 하실 때 무죄한 이들을 위한 아브라함의 청원(창세 19장 참조)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무고한 욥의 고난에서도 드러난다. 왜 죄없는 이들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 받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주님의 고난 받는 종에게서 기술되기 시작해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주님의 고난 받는 종은 다른 사람의 구속을 위해 고난을 받고 있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셨다.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기 위해 고난을 받고 있다. 교회는 무죄한 이와 죄인들, 믿음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구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그분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 값으로 내놓으셨다는 믿음이 고난 받는 교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필리 2,5-8; 마르 10,45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님의 고난 받는 종인 교회’의 모형을 밝힌다.22) “우리가 환난과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머리에 결합된 몸으로서 그분의 고난을 함께 받는 것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는 것이다.”(「교회 헌장」 7) 흠없는 어린양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피로써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을 내어 주셨고 그분께서는 고통의 한계를 극복하는 법을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힘으로 죽음의 고통을 이겨 내 악과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부활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난과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봉사한다. 교회는 신적 희생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고, 성체성사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제물과 함께 바친다. 병자들의 거룩한 도유와 사제들의 기도를 통해 “온 교회는 병자들을 수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께 맡겨 드리며, 그들의 병고를 덜어 주시고 낫게 하여 주시도록 간청하는 한편, 병자들도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하도록 권고한다.”(「교회 헌장」 11)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와 세상에서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을 매우 강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교회는 신자들이 특별히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 그리고 정의를 위해 박해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증거하도록 가르친다. 이 고난 받는 이들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고난의 효과를 드러낸다. 교회는 가난과 불안정에 처하고, 환자들과 정의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시는 주님과 특별한 방법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안다.  만약 교회가 주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면, 그분과 협력하여 주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보여 주며 거룩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복음 안에서 축복해 주시면서 고난은 대단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에서 아주 잠시뿐이라고 말씀하신다. 한편 하늘에 있는 죽은 이들이 교회인 주님의 몸을 위해 자신들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

고난이 교회의 정확한 본성은 아니지만 부서진 세상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엄연한 얼굴이며 부분이다. 그것은 또한 교회의 길이며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교회의 사명이다. 이 모형은 주님의 인격에 아주 잘 부합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세에서 고난 없이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불편하고 두려운 짐이다. 적어도 부활의 그날, 아니 주님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까지. 현세에서 고난 받는 이 모형은 무의미해 보이고, 그것이 부활의 희망 안에서 인정되고 존중받을 때까지는 실현되기 힘들어 보인다. 종servant인 교회 모형이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데 반해, 이 모형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 받고 희생하는 교회의 대속 역할에 그 초점이 있다.23)

필자는 주님의 고난받는 종인 교회의 모형의 사목자상을 ‘대속자인 사목자’로 삼는다. 오랜 시간 고해성사를 주고 고백소를 나오는 사목자의 얼굴은 참으로 초췌해 보인다. 고백소 안에서 신자들의 죄를 일일이 다 들으며 고백자와 같이 영적인 아픔과 고통을 겪고 고백자와 함께 주님께 그 죄를 사해주시기를 청하며 어둠 속에 갇혔던 순간들을 겪고 나오기에 더욱 더 초췌해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고해성사 때 고해사제는 고백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그 죄의 사함을 주님께 청하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사목직무를 수행하는 사목자로서 그 직무 자체에서 오는 짐이 있다. 본당 신부는 본당 신부이기에 짊어지는 십자가가 있다. 본당 신부는 본당의 사목 책임자로서 본당 신자들의 영적인 염려들을 짊어질 뿐만아니라 본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마저도 지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원의와 원망과 기대와 섭섭함 모두를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해결하도록 요구하고 그 죄목을 전가했듯이, 사목자도 사목 일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떠맡는 상징적인 구속자가 된다. 그러기에 사목자들은 십자가상에서 세상을 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힘겹게 기도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답답함과 도도한 악의 세력과 무지몽매한 이들의 집단적인 요구와 벽처럼 다가오는 처절한 한계 속에서 “목마르다.”(요한 19,28)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질적으로 일하시는 성령의 현동에 의지하고 의탁하여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시편 31,6 참조)라고 기도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7. 친교인 교회-삼위일체 신비를 사는 사목자

친교koinonia라는 단어는 신약에 19번 나온다. 바오로 사도가 그의 글에서 13번 썼다. 친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신자 서로의 내적인 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에 의한 ‘친교인 교회’24)를 선포한다.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교회 헌장」 4)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성령 안에서 주님의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의 친교로서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한 도구이다. 이 친교는 성령 안에서 주님의 성체성사에서부터 성체성사를 통해 다가온다. 신앙고백과 성사 그리고 교회적 통치와 친교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인 성령의 궁전(1코린 3,16; 6,19)을 따라 교회 친교의 보이지 않는 끈들이다.25) 지역 교회 사이에, 주교 사이에, 주교와 그들의 직무와의 관계 안에, 주교와 사제 사이에, 사제와 그 직무와의 관계 안에, 부제 사이에, 주교와 사제 그리고 부제 사이에, 부제와 그 봉사 diakonia와의 관계 안에, 수도자 사이에, 주교와 사제, 부제, 그리고 수도자 사이에, 신자 사이에, 주교와 사제, 부제, 수도자, 그리고  신자 사이에, 비가톨릭 그리스도인과의 관계 안에, 지상의 순례하는 교회와 하늘의 교회 사이에, 성인을 비롯한 죽은 이와의 관계 안에서 이 친교는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주요소이다.

1985년, 제2차 세계 주교 대의원회에서 친교인 교회를 설정했다.26) “교회는 성사이다. 즉,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표징이고 도구이며, 또한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과 맺는 친교와 화해의 표징이며 도구이다.”27) 만일 새로운 사도적 영성 운동들이 적절하게 교회의 친교 안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들은 커다란 희망의 전달자가 될 것이다. 시노드는 친교 교회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의 핵심적이며 근본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친교의 의미에 대해 적고 있다.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맺는 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친교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사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세례성사는 교회 안에서 친교의 문이며 기초다. 성체성사는 전체 그리스도인 삶의 자원이며 정점이다(「교회 헌장」 11 참조).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적 몸의 친교가 나타나고 생겨난다. 즉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모든 신자들의 친밀한 친교가 세워진다(1코린 10,16 참조).28)

친교 교회론은 또한 교회 질서의 기초이며, 교회의 일치와 다양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다. 그것은 친교라는 측면에서 동방교회에까지 확장된다. 주교 시노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따랐고 친교 교회론이 공동체들의 성사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참여와 공동 책임 의식을 가진다. 왜냐하면 교회는 친교이기 때문이다.

주교들은 친교의 이름으로 기초 교회 공동체를 포용했다. “만일 새로운 기초 공동체들이 진실로 교회와 일치하고 있다면, 그들은 친교의 진실한 표현이며 보다 항구한 친교의 건설을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 삶의 커다란 희망의 원인이 될 것이다.”29)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새로운 운동들이 신실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 전제가 「현대의 복음선교」 58항에 이어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친교 교회론에 나타나는 일치 운동의 친교는 비가톨릭 교회와 공동체들과의 불완전한 친교에서 완전한 친교로 나아가는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와는 달리 굶주림과 억압, 부정과 전쟁, 고통, 테러리즘과 다른 형태의 폭력이 증가하여 증거하기에는 너무나도 열악한 상황이라고 보여진다고 하더라도, 친교인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성사다. 아울러 주교들은 친교인 교회 안에서 다양성과 일치 간의 토착화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원칙들을 말했다. 주교들은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죽은 이들과 그리고 정의를 증진하려는 노력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과의 친교를 잊지 않았다. 시노드는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1992년 신앙교리성(the Sacred Congregation of the Doctrine of the Faith: CDF)은 친교의 교회를 공포했다.30)

친교koinonia의 개념은 교회 신비의 핵심을 표현하는데 아주 적절하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론의 쇄신을 위한 열쇠가 될 것이다. 교회가 친교라는 사실은 실로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과제이며, 교회 신비의 신학적 반성을 위한 넓디넓은 폭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아주 높이 살 만하다. “교회의 본성은 이처럼 새롭고 보다 깊은 추구를 언제나 허용한다.31)

신앙교리성은 하느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에 친교의 신비인 교회를 연결시킨다. 친교의 개념은 교회의 자기 이해의 중심에 놓여 있다. 그것은 인간 각자가 삼위일체 하느님과 그리고 인류의 남은 자들과 맺는 신비한 일치이다. 이 친교는 지상의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의 종말론적인 완성에까지 이른다. 시노드는 교회의 친교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라고 말했다. 그것은 구원의 성사인 교회로 제정되었고, 세례성사로 인한 영성체에 그 뿌리와 중심을 두고 있다.

신앙교리성은 교회가 같은 성령 안에서 성인들과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신앙교리성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역 교회와 전체 교회 사이의 교회적 친교 안에서 일치와 다양성에 관해 설명한다. “교회의 전체성(보편성)은 한 손으로는 가장 견고한 일치와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일치를 저해하지 않는 오히려 ‘친교’의 성격으로 관련된 다양성과 복합성에 연계되어 있다.”32) 신앙교리성은 1985년 주교 대의원회와 같은 일치운동 선언을 강조한다. 끝으로 신앙교리성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과 일치 안에서 교회적 친교의 모형이라고 밝힌다.

정교회와 개신교회들은 이 친교 모형을 받아들였다. 프로테스탄트계인 세계 교회 협의회는 “친교라는 표현은 교회의 본성과 그 보이는 일치의 공통 이해를 소생시켜 주는 근본이 되었다…. 그 말은 교회의 본성과 목적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오늘날 교회 일치 운동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고 있다.”33)고 밝힌다.34) 

필자는 친교인 교회의 사목자상을 ‘삼위일체 신비를 사는 사목자’로 삼는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각자 구분되시는 위격들이지만 서로 사랑하고 지원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일치하신다. 사목자가 사목직무를 수행하면서 하느님과 사목자와 대상자 사이에 영적으로 펼쳐지는 사랑의 일치와 전이를 느낀다. 특별히 병자의 방문과 병자성사 거행 때 이러한 삼위일체 신비를 사는 사목자상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병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환자와 환자에게 연민의 정으로 다가가 위로하는 사목자와의 친교 안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사목자를 환자에게 파견하시는 하느님께서 사목자의 사목직무를 통해 병자에게 당신의 영육적인 치유와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가운데 교회 사목직의 삼위일체적 신비를 이루게 된다. 이 때 환자는 사목자의 사목직무를 통해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되고, 사목자는 환자와의 친교 안에서 몸소 활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된다. 이는 비단 병자방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목자가 교회의 모든 사목직무를 통해 그 대상자와의 친교를 누릴 때 대상자-사목자(사목협조자, 사목팀)-하느님 사이에 맺게 되는 삼위일체적인 친교이다. 또한 일반 사목직무를 수행할 때도 사목자와 사목협조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 그리고 사목자와 평신도 지도자들과 일반 평신도들 사이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삼위일체적 사랑과 일치의 신비가 펼쳐지는 것을 체험한다. 특별히 사목자가 사목직무를 진행해 나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목직무에 참여하고 대상이 되는 협조자들과 대상자들과의 영적인 일치에 집중할 때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러한 사목자의 사목형태는 ‘팀사목’의 성격을 띠게 되며, 평신도들이 교회의 사목직무와 운영에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사목자와 함께 공동책임을 갖게 한다. 이러한 변화는 평신도들을 성직자에게 교회에 대한 건의와 요구 일변도에서, 자신들도 교회의 구성원이며 실제로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스스로의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목자와 함께 교회 사목직무 기획과 집행에 참여하게 해준다.



8. 기타 사목자상

이 항에서는 현대에 들어 새롭게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목자상을 도날드 메서Donald E. Messer가 「그리스도교 직무의 현대 이미지」35)에서 본 자애로운 공동체의 상처받은 치유자, 예언 공동체의 정치적 신비가, 무지개 교회의 노예가된 해방자, 교단-이후 교회의 실천신학자, 지구 마을의 공적 사목직무로 나누어 살펴본다.


1) 자애로운 공동체의 상처받은 치유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육화를 바라보게 해준다. 하느님께서 부서진 인간성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것은 단지 다정다감하거나 적절한 친절함이 아니라, 슬픔의 표현을 짊어진 하느님의 증거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녀들과 어울리고 우정을 나누는 위험을 감수하셨다.36)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자애롭게 육화하셨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들의 비유를 들으셨고,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상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봉헌하셨다.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넘어 자애와 돌봄을 드러낸 이시기의 자비의 모습을 우리는 람보가 아니라 마더 데레사에게서 발견한다. 자비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성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립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 자비의 공동체인 교회가 되도록 불리었다. 예민하고 윤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애롭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선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자비의 생활로 초대되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기적인 죄인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안으로 들어가 자비의 사목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37)

교회에 대한 비전에서 부서진 대리인들은 이제 치유의 천사들로 변화된다. 헨리 뉴엔Henri J. M. Nouwen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삶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의 자원이자 영으로 변화시키는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 불렸다고 한다.38) 첫째, 상처 받은 치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하느님께 은총으로 받아들여진 자기 자신의 인생 여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뉴엔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치유의 공동체가 되는 이유는 상처를 치료하고 고통이 감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상처들과 고통들이 새로운 비전에 개방하고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39) 둘째,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구하러 오신 부서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자인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사목자는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질 수 있다. 상처받은 치유자인 사목자들은 치유와 건강과 온전성이 단순히 자신이 경험했거나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증거하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의 신앙과 사목직무는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고난받는 종40)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41)


2) 예언 공동체의 정치적 신비가

영혼-의-사목자-목자 역할은 예언자의 업무와는 너무나 다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사목직무의 표현으로서 정치적 신비주의상은 역설적이다. 우리 영적, 정치적 삶의 모순에서 공생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정치적 신비주의의 사목직무적 비유를 드러내고 있다. 정치에서 신비를 배제하면 그리스도교 사목자들은 답답함과 고통스러움 그리고 실망하게 되기도 한다. 사목직무는 일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사목자들의 소명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구를 지키고, 복음의 기쁜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기도와 정치를 나누는 것은 이단이다. 하느님께서 관상과 자비 둘 다를 통해 존재하시며, 기도와 성사를 통해사만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행위들을 통해 체험될 수 있다. 구티에레즈는 신비적 언어가 예언적 언어와 다르지 않고, 예언적 언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그리스도교 사랑에 대해 말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임을 보여준다고 한다.42) 하느님께서는 종종 가나한 이들 안에 익명으로 숨어계신다. 신비가가 묵상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의 선한 창조의지가 어떻게 뒤틀리고 있는지에 대해 비평하게 된다.43)

그리스도교 사목자들은 개인적인 실천가들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대표들이다. 예언 공동체인 교회는 정치적 신비주의에 절대적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공동체들은 교회를 박해자들과 대항하여 해방을 갈구하는 예언 공동체로 재건설했다. 예언적 흑인 교회도 미국 사회의 시민 권리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시카고의 로만 가톨릭 사제인 데니스 게아니Dennis J. Geaney는 본당이 평화와 정의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라고 말한다.44) 최근 미국 주교회는 무기경쟁과 경제에 관해 선도적인 예언을 시작했고, 침례교 연합도 뒤따랐다. 이들은 평화를 건설하는 것이 궁국적으로 영적인 현안이라고 했다. 예언적 신비가는 공동체나 문화적 강점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며 내적 자유를 가지고 살아간다. 기도와 성경 연구, 그리고 묵상을 통해 양성된 그들의 종교적 체험은 외적인 성공이나 눈에 보는 성과에 구애받지 않고 종교적인 확신과 신뢰의 깊이를 더해간다. 그들의 자유는 지지적인 관계성 없이 개인주의라는 가격으로는 살 수 없다. 정치적 신비가들은 관계성을 고양시키고, 의존하며 동료들을 영적 친구들이 되게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해 지불하신 가격이다.45) 정치적 신비가들은 첫째, 영적인 양성과정을 거친다.  둘째, 물질과 영적인 문제 사이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재, 세상의 선과 영예와 함께 빛으로 나아간다. 넷째, 꿈을 실천적인 예술이라고 믿는다. 넷째, 단순히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저항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확신으로 산다.46)


3) 무지개 교회의 노예가 된 해방자

삶이 부여하고 스스로-선택한 모순들의 노예살이 안에서, 우리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과 함께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조차 용서해주시고, 우리 삶과 우리 세상을 변화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약하다고 여길 때조차 힘을 주시는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47) 그리스도교 사목직무의 핵심에는 어떻게 우리 삶의 모순들과 씨름해야 하는지가 있다. 그리스도교 사목직무에 있어서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잔인한 모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구속하시는 사랑의 길이었다. 성경 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연설하신다(루카 4,16-30). 노예-파괴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수들과 문화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지기 위해 파괴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모델이 되신다. 코스타리카 성경학자인 엘사 타마즈Elsa Tamaz와 구티에레즈 그리고 니카라과에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는다.48)

새로 해방하는 공동체는 ‘무지개 백성’(People of the Rainbow)이라고 불린다. 이 새 공동체는 과거의 폐쇄된 족벌주의를 넘어 미래에 여러 색깔로 열린 대안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이다. 이 공동체는 다양한 민족들, 경제적 상황들, 신학들 그리고 사목직무들을 포용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계약은 무지개 백성의 마음이 새겨지고, 무지개는 영원한 조건없는 하느님의 약속을 상징한다. 첫째, 무지개 백성들 중 노예가된 해방자는 그리스도교 사목직무의 복음적 도전을 강조한다. 무지개 백성들 사이의 노예가된 해방자는 복음주의를 전체 창조질서와 전체 인격을 위한 해방의 복음을 봉헌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둘째, 무지개 백성들 중 노예가된 해방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선택을 선교적으로 이해한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선교 사명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해방 행위에 참여하여 노예 굴레를 걷어낸다. 그것은 가난을 이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것이다.49)


4) 교단-이후 교회의 실천신학자

실천신학은 단순히 조직신학의 적용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 사고와 삶, 전통 신학 원리와 연구의 적용 분야 그리고 신학교와 지역교회인 본당 사이의 잘못된 간격을 극복하려는 방법으로 신학과 교회 그리고 세상과 관련을 맺으려는 시도이다. 아울러 예배와 설교, 가르침 같은 공동체적인 실천 뿐만아니라, 공공 정책과 전문적인 기준들, 사회적 편견 등의 윤리적 종교적인 수행을 가져오는 문화적 실천들을 포함한다. 실천신학자들은 명백하게 구체적인 역사 안의 공동체적인 실체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1949년 공산주의자들이 ‘외국’ 교단들을 몰아냈을 때, 중국교회는 새로운 환경을 맞아 프로테스탄트: 교단-이후 교회(Post-denominational Church)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중국 실천신학자인 팅K. H. Ting 목사는 장로교, 제7일 안식일교, 감리교, 영국교회, 복음교단들을 하나로 이끌었다. 문화혁명 때 교회들은 공장으로 변했고, 사목자들은 공장과 농장의 막노동자로 끌려갔다. 그렇지만 한참 후 중국교회는 살아남은 것만이 아니라 새로 탄생했다. 그들은 정통교리(orthodoxy)보다 정통실천(orthopraxy)을 강조한다. 미국의 시민전쟁 때 하느님께서는 흑인교회들과 함께하셨다.50)

다양한 실천신학자들의 공통적인 출발점은 예수 안에서 애쓰시는 하느님의 정의이다. 사목직무에 대한 준비는 지식뿐만 아니라 영적 양성을 동반해야 한다. 실천이나 실천(praxis)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개방과 인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 전승에 대한 존중, 전망의 대안을 마련하려는 의지 등의 반성적인 의사결정과정에 헌신함으로써 생겨난다. 실천신학자의 반성적인 사고 구조는 의심과 회상이라는 해석학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코어Paul Ricoeur의 의심의 해석학과 회상의 해석학과도 연결된다.51)그러나 반성은 비평-이후이다. 믿음과 이해의 해석학적 서클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에 있다.52)


5) 지구 마을의 공적 사목직무

상황과 시간은 바뀌었고 어제의 모델은 오늘에 와서 적절하지도 않고 채우기도 어렵다. 새로운 모델은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 낸다. 착한 목자상은 양들을 돌보는 긍정적이고 평화적이며 친근한 목자상을 전해준다. 그러나 사목직무에 있어서 목자의 모델은 불행하고 희망없는 현대의 시골과 도시 세대에는 ‘죽은’ 모델같아 보인다. 그런가하면 실제 현실에서 목동만큼 더러운 자리도 세상에 없다는 말처럼 도둑으로 여기거나 적어도 부정적인 모습이다.53) 반면에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 지구 마을로서의 이미지는 다소 진부하다. 어느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지구마을에 100명이 살고 있다면, 그중 6명이 미국인이고, 이 6명이 마을 전체 수입의 반을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반을 94명이 나눠쓰고 있다. 어떻게 부요로운 6명이 그들의 이웃과 어떻게 ‘평화롭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우리처럼 6명은 94명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착한 목자상이나 그 어느 다른 상들도 자신들의 양들만 배려하고 돌보지 말고 다른 우리의 양들도 돌보아 보다 넓은 지구 마을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그런데 우리가 진정 지구마을의 공적 사목직무를 하고 싶은가? 그러면 그 힘도 더불어 얻게 될 것이다.54)

공적 사목직무는 전개와 중재, 협력과 조직이다.55) 그리고 신심깊고 효과적이려면 상기와 해석, 저항과 지지 그리고 기획과 화해의 사목직무여야 한다.56)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가 인용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말을 되새겨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증오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이나 무법천지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지혜와 자비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정의의 느낌입니다... 그들이 백인이던 흑인이던...

그리스인들이 “사람의 야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 삶을 부드럽게 만들자.”라고 수천 년 전에 썼던 대로 우리 자신을 봉헌합시다.57)


그리스도교 사목직무의 역사적인 모델들을 점검하고 새로운 이미지들을 펼치는 가치는 특별한 라벨이나 타이틀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사목직무가 새로운 이름과 생동감을 가질 수 있도록 사목직무를 개정하려고 하는 가능성 안에 놓여있다. 스스로를 지구 사목 공동체로 이해하는 교회는 “야성을 길들이고” “이 세상의 삶을 부드럽게 만드는” 일을 많이 할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기도와 행동으로 옮깁시다.58)







1) Avery Dulles, Models of the Church, New York, Doubleday & Company, Inc., 1974, 14면.

2) Avery Dulles, A Churchto Believe In: Discipleship and the Dynamics of Freedom, New York, Crossroad, 1982, 22면.

3) 교회 헌장, 9. 18. 44. 45; 사목헌장, 87. 90 참조; 현대의 복음선교(Evangelii Nuntiandi), 69.

4) 심흥보, 공동체들의 친교, 44-46면.

5) Wesley Carr, Handbook of Pastoral Studies: Learning and Practising Christian Ministry, Bristol, The Longdunn Press & SPCK, 1997, 199-204면 참조.

6) 교회 헌장, 1. 3. 7. 9. 10. 11. 16. 22. 23. 29. 35. 48. 50. 사전 설명 주석 주의. 참조 11. 12. 14. 15. 21. 26. 28. 33. 37. 41. 42; 선교 교령, 1; 사목 헌장, 42. 45; 38. 48. 49 참조; 전례 헌장, 83.

7) World Council of Churches, Nature and Purpose of the Church, Faith and Order no. 43, 45.

8) 심흥보, The Parish Pastoral decision Making Process in the Korean Catholic Church, Thesis of Doctor of Ministry, Chicago Catholic Theological Union, 2008, 120-121면; 위의 책, 47면.

9) Wesley Carr, 위의 책, 190-196면.

10) 계시 헌장, 1. 10. 19; 일치교령, 1. 23.

11) 심흥보, 위의 논문, 121-122면; 위의 책, 48-49면

12) Wesley Carr, 위의 책, 186-187면.

13) 교회 헌장, 21. 27. 28. 29. 41; 48 참조; 사목 헌장, 3. 40. 41. 42. 92; 현대의 복음선교, 2. 15. 20.

14) Avery Dulles, Models of the Church, 89면.

15) Avery Dulles, 위의 책, 91면.

16) 심흥보,  위의 책, 49-51면.

17) Wesley Carr, 위의 책, 186-190면.

18) 교회 헌장, 5. 10. 15. 17. 19. 40. 42. 44. 48. 59.

19) Avery Dulles, A Church to Believe In: Discipleship and the Dynamics of Freedom, 7-18면.

20) 심흥보, 위의 논문, 122-124면, 위의 책, 51-52면.

21) 로만 가톨릭 사제서품 미사예식, 13. 훈시.

22) 교회헌장, 7. 8. 11. 23. 41. 48. 49; 사목헌장, 22; 현대의 복음선교, 18. 43. 88.

23) 심흥보, 위의 논문, 124-126면; 위의 책, 53-56면.

24) 교회 헌장,4. 7. 8. 9. 11. 13. 14. 15. 18. 21. 22. 24. 25. 26. 28. 29. 49. 50. 51; 참조 사전 설명 주석, 2.

25)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1코린 3,16)과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26) Second Extraordinary Synod, “The Church, in the Word of God Celebrates the Mysteries of Christ for the Salvation of the World,” The Final Report of the 1985 Extraordinary Synod, II.A.2.4; II,B.b.C; II.B.b.C.1.2.4.6.7; II.B.c.1.4.6.

27) Second Extraordinary Synod, “The Church, in the Word of God Celebrates the Mysteries of Christ for the Salvation of the World,”The Final Report of the 1985 Extraordinary Synod, II,A.2.

28) Second Extraordinary Synod, “The Church, in the Word of God Celebrates the Mysteries of Christ for the Salvation of the World,”The Final Report of the 1985 Extraordinary Synod, II.B.b.C.1.

29) Second Extraordinary Synod, “The Church, in the Word of God Celebrates the Mysteries of Christ for the Salvation of the World,”TheFinalReportofthe1985ExtraordinarySynod,II,B.b.C.6.

30) 교황청 신앙 교리성(the Sacred Congregation of the Doctrine of the Faith), “교회를 친교로 이해하는 몇 가지 면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주교들의 편지(Letter to the Bishops of the Catholic Church on Some Aspects of the Church Understood as Communion)” 서문,1.3.4.5..6.8.11.15.17.18.19.

31) 위의 문서, 서문 1

32) 위의 문서, 15 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일반 알현 연설에서 인용됨. John Paul II, Address, General Audience, 27-IX-1989, n.2: "Insegnamenti di Giovanni Paolo II" XII, 2, 1989, 679면.

33)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Nature and Purpose of the Church, Faith and Order paper no. 181.

34) 심흥보, 위의 논문, 126-128면; 위의 책, 56-60면.

35) Donald E. Messer, Contemporary Images of Christian Minist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

36) Joachim Jeremias, New Testament Theolg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1, vol. 1, 115-116; Gunter Bornkamm, Jesus of Nazareth, trans. Irene and Fraser McLuskey with James Robinson, New York, Harper & Row, 1967, 102. 107면; Donald E. Messer, Contemporary Images of Christian Ministry,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 84면 재인용.

37) Donald E. Messer, Contemporary Images of Christian Ministry, 83-86면 참조.

38) Henri J. M. Nouwen, The Wounded Healer, New York, Doubleday/Image Books, 1972. 16면; Donald E. Messer, 위의 책, 86면 재인용.

39) Henri J. M. Nouwen, The Wounded Healer, 72면. Donald E. Messer, 위의 책, 90면 재인용.

40) 이사 53,4-5.

41) Donald E. Messer, 위의 책, 91-93면 참조.

42) Gustavo Gutierrez, A Spirituality for Liveration, The Other Side, April/May 1985, 43. Donald E. Messer, 위의 책, 120면 재인용.

43) Donald E. Messer, 위의 책, 121-122면 참조.

44) Dennis J. Geaney, The Prophetic Parish: A Center for Peace and Justice, Minneapolis, Winston Press, 1983, 5면. Donald E. Messer, 위의 책, 124면 재인용.

45) Donald E. Messer, 위의 책, 129-130면 참조.

46) Donald E. Messer, 위의 책, 130-134면 참조.

47) Thomas P. McDonnell, ed., A Thomas Merton Reader, Garden City, Doubleday/Image Books, 1974, 16면 참조. Donald E. Messer, 위의 책, 135-138면 참조.

48) Donald E. Messer, 위의 책, 138-140면 참조.

49) Donald E. Messer, 위의 책, 140-150면 참조.

50) Donald E. Messer, 위의 책, 153-162면 참조.

51) Paul Ricoeur, Freud and Philosophy: An Essay on Interpretation, New He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 20-37면 참조. Donald E. 위의 책, 164면 재인용.

52) Donald E. Messer, 위의 책, 164-165면 참조.

53) Gerhard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VI,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85, 489면. Donald E. Messer, 위의 책, 172면 주석 재인용.

54) Donald E. Messer, 위의 책, 170-178면 참조.

55) Donald E. Messer, 위의 책, 178-186면 참조

56) Donald E. Messer, 위의 책, 186-189면 참조.

57) Arthur M. Schlesinger, Jr., Robert Kennedy and His Time, Boston, Houghton Miffline Company, 1978, 914면. Donald E. Messer, 위의 책, 190면 재인용.

58) Donald E. Messer, 위의 책, 19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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