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사목자 리더십


9장 친교의 리더십과 의사결정과정

    1. 새로운 리더십의 친교 교회론

    2. 의사결정과정의 사목자 리더십

        1) 적절한 의사결정과정

        2) 의사결정과정의 참여자

        3) 의사결정과정의 새 모형

        4) 의사결정과정의 변수

        5) 의사결정과정의 기준

        6) 의사결정과정을 위한 사목자(사목팀)의 리더십 이정표

    3. 본당에서 맺는 새 리더십의 삼위일체적인 친교




9장 친교의 리더십과 의사결정과정




이 장에서는 친교의 리더십과 의사결정과정을 1항 새로운 리더십의 친교 교회론과, 2항 의사결정과정의 사목자 리더십을 적절한 의사결정과정과 의사결정과정의 참여자, 의사결정과정의 새 모형, 의사결정과정의 변수, 의사결정과정의 기준, 그리고 의사결정과정을 위한 사목자(사목팀)의 리더십 이정표로 나누어 살펴보고, 3항 본당에서 맺는 새 리더십의 삼위일체적 친교를 그려본다.



1. 새로운 리더십의 친교 교회론

이 항에서는 새로운 리더십과 관련된 친교 교회론의 최근 연구를 데니스 도일과 진 마리 틸라드 그리고 수잔 우드와 크리스토퍼 루디를 통해 알아본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변화된 세상에 걸맞는 교회의 사목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의 모형을 친교인 교회로 삼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활발해진 친교 교회론에 대해 가톨릭 친교 교회론자 데니스 도일Dennis Doyle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교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접근이다. 그것은 교회의 신비적, 성사적, 역사적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법적 제도적 이해를 넘어서는 시도이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인간들과 하느님 사이의, 성인들과의 통공을 이루는 구성원들 사이의, 본당의 구성원들 사이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주교들 사이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지역 교회들과 전체 교회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친교 교회론은 교회가 단순히 계시의 수용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계시 그 자체와 연결되어 있다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1)

친교 교회론자 틸라드는, 초대 전승이 이해한 것처럼, 교회의 본성을 친교Koinonia로 압축한다.2) 데니스 도일은 기존의 다양한 친교 교회론의 공통된 네 가지의 요소를 설명한다.

첫째, 친교 교회론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만 가톨릭과 개신교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의 구분 이전 초세기 그리스도교인이 전제한 교회의 비전을 다시 소생시키고 있다. 둘째, 친교 교회론은 교회의 제도적 법적 측면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접근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우정이나 친교의 요소를 강조한다. 셋째, 친교 교회론은 성체성사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상징적으로 구현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일치의 필요성에 높은 가치를 둔다. 넷째, 친교 교회론은 교회의 일치와 다양성 사이에 그리고 전체 교회와 지역 교회들 사이의 역동적이고도 왕성한 상호작용을 증진시킨다.3)

친교 교회론자들은 교회의 기원을 삼위일체 하느님과 위격들 사이에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공유했던 사랑에서 찾는다. 그것이 교회에 전승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산다는 것은 한 분 하느님의 세분의 위격들의 사랑과 생명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틸라드는 하느님의 교회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3장 6절에서 10절에 걸쳐 나오는 신적 친교인, 신비musterion로 계시되었다고 말했다.4) 틸라드는 교회적 친교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형제적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적인 친교의 표징이라고 정의 내렸다.5) 친교 교회론자들은 교회가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또는 우정이라고 강조한다. 교회의 본성은 개별적 인격과 내적 연결성을 기반으로 한다. “교회에 대한 사랑, 수용, 용서, 헌신, 그리고 친밀함.”6)

틸라드는 또한 교회가 친교로 게시되었다고 말했다.7) 성령강림절에 사도행전에 기술된 친교의 공동체가 교회, 즉 하느님의 교회로 드러났다.8) 하느님의 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의 차원에서 찾았다.9) 하느님께 있어서, 모든 것은 친교 안에서 구원으로 다 함께 연결되었다.10) 성령강림절의 초세기 하느님의 교회는 구원을 친교라고 불렀다.11) 이 친교는 성찬의 신비에서 그 온전한 실체를 드러냈다.12) 성체성사는 단순히 은총의 샘이 아니라 그 본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그리고 구성원 각자가 서로 화해하여 여러 민족들이 모이기 위한 것이다.”13)

틸라드는 하느님의 교회는 성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복음은 성령 없이 실천에 옮겨지지 않기 때문이다.14) 이 교회들의 친교는 교회를 하늘나라와 연관시켜 준다.15) 그는 교회가 신자들이 체험한 교회의 친교에 의거하여 신앙이 선포된다고 말했다.16) 주님의 원초적인 친교가 아버지와 맺은 것처럼, 교회 친교, 특별히 “사제적 공동체”는 주님과 그 친교를 맺어야 하며,17) 그 “사도적 증언”을 전파하여야만 한다.18) 그래서 직무적 공동체적 연대가 직무의 등록 여부에 제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전례적인 거행에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 교회의 봉사와도 연관된다고 했다.19)

도일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의 연관 관계 안에서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설명한다. 세 분의 위격과의 관계 안에서 한 분의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의 관계성과 유일성은 상호 의존적이며, 다른 위격보다 우선성이 없다.20) 친교 교회론자인 수잔 우드는 다양성과 토착화 그리고 비중앙집권주의로 표기된 전체 교회와 지역 교회들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21) 우드는 허브 레그란드Herve Legrand의 말을 인용하여 지역 교회는 전체 교회의 외부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의 실체라고 말한다.22) 그녀는 또 패트릭 그란필드Patrick Granfield의 말도 인용하여 친교 교회론은 친교의 두 가지 성경적인 의미를 발전시킨다고 말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쟁취하시고 성령께서 수여하신 구원의 선물에 참여하는 친교와 둘째, 하느님과의 우리의 일치에서 우러나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또는 우정의 끈이다.”23)

틸라드는 성령께서 지역 교회에 내려 주신 것과 그 교회가 성찬례에서 선포한 것이 그 교회의 존재와 행위 안에 배어든 모든 진리라고 말했다.24) 친교 교회론자 크리스토퍼 루디는 틸라드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적인 예루살렘의 하느님의 교회는 성령강림절에 모든 이에게 내려진 충만한 하느님의 선물이 문화적으로 지역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 안에 토착화되어 지역이며 동시에 전체였다.” 루디는 각 지역 교회가 특정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느님의 교회의 확장이라는 틸라드의 교회론적인 관점을 설파한다.25) 루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틸라드의 지역 교회 신학이 복음과 성체성사의 친교이며, 믿음과 성사의 친교라고 말한다.26) 루디에게 있어서, 틸라드의 하느님의 교회는 지역 교회들의 친교이다.27)

지역 교회와 전체 교회 사이의 친교 안의 일치는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소공동체와 본당 공동체 사이의 친교 안의 일치와 연관된다. 소공동체의 네 번째 특징이 바로 전체 교회와의 일치이다. 소공동체는 소공동체의 구성원마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복음을 나누고 사명을 실현함으로써 한 공동체를 이루고, 본당은 본당의 소공동체들이 각 지역별로 처해진 상황의 특이함 때문에 서로 다르지만 함께 본당 전례와 행사를 짜고 그 역할을 나누고 진행하면서 그 특질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본당 공동체를 이룬다. 한 소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 간의 친교가 다른 소공동체들과 더 나아가 본당이라는 커다란 공동체와의 친교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당 공동체의 공동체들의 친교가 본당과 교구, 세계 교회와의 친교로 확산된다.

도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친교 교회론과 연관하여 교회 쇄신을 위해 다섯 가지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말한다. 첫째, 한 분 하느님 안에 세 분 위격의 사랑과 신적인 삶을 나누자는 초대로서, 둘째,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과 성인들과의 통공으로서, 셋째, 전체 교회의 구체화와 지역 교회에 동시에 존재하는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성사적인 공동체로서, 넷째, 역사를 거쳐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다섯째, 세상의 누룩으로서 교회가 나아가야 한다.28)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사람들은 실현하기도 어려운 이상과 규정을 핑계로 차디차고 돌 같은 교회를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 각자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직접 느끼기를 원한다. 신자들은 커다란 교회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각자가 개별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 친교 교회론은 교회의 규모와 관계없이 주님과 교회 구성원들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친교를 강조한다. 신자들은 사제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친교인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하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받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친교 교회론은 제도인 교회와 신자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인 교회에 참여하고, 성령의 힘으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여 그들이 처한 삶의 조건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여 공동체들의 친교communion of communities를 이룬다.

친교인 교회 모형에는 한 가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친교 교회론이 주님과 또 인간들 상호 간에 맺는 친교 관계를 추구하는 반면, 기존의 구성원들이 그들이 접하는 현실에서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를 찾는 것에 주력하고, 교회의 이상이나 사명을 그들의 현실과 상황에 맞춰 끌어내리고, 종교적인 신심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현실에서 그들 사이에 친교를 누리는 것에 만족할 수도 있다.

신자들에게 교회가 추구하는 사명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다. 교회가 신자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것이 무엇이고, 또 그 과정 중에 신자들이 갈등하는 것이 무엇이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교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살피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교회 신자들이 교회 내에서 기쁨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번뇌를 나누고 함께할 때, 교회가 진실한 친교를 맺는 공동체가 된다.

교회가 신자들을 대신해서 무슨 일을 해결해 줄 수도 없고, 현실적인 일에 직접 개입할 수도 없다. 그러나 교회가 사람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해 주고 염려하고 위로해 주며 배려하는 친교를 맺을 때, 주님과 교회가 맺고 있는 친교가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확산되어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된다. 그리고 소공동체의 기초 단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때, 반의 상위 단위인 구역과 지역에 협조를 청하여 함께한다. 그리고 소공동체들의 집합인 본당에 협조를 청하여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기쁨과 희망, 그리고 슬픔과 번뇌를 겪는 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통해 세상과 친교를 맺게 된다.29)



2. 의사결정과정의 사목자 리더십

친교의 교회론은 비단 전체 교회와 지역 교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인 교구와 본당들 사이에, 그리고 무엇보다 본당을 이루는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전체 본당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는 친교가 교회를 그 본질을 드러내는 교회답게 하고 교회를 이 세상에 쪼개 나누어진 빵으로 설 수 있게 해준다. 교회 구성원들을 친교로 이끄는 방법 중의 하나는 교회 사목 활동을 기획하고 결정하고 수행하고 평가하는 의사결정과정에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느끼도록 참여시키는 것이다.

사목상 세운 계획들이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실패 이유는 대부분 의사결정과정과 관련하여 빚어진다. 공동체가 풀어야 할 문제가 공동체의 능력보다 크기 때문에, 공동체가 한 번에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기에, 공동체가 적절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을 때, 문제를 풀고자 하는 계획이 신자들의 갈망과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닐 경우, 계획을 하면서 신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경우, 계획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설명되고 요구됨으로써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의를 받지 못했을 경우, 모든 신자들이 동의했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신들이 계획 속에 포함되었다고 느끼지 못했을 경우,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등 구체적인 세부 사항 없이 계획되었을 경우, 계획이 소수나 특정 단체 또는 특정 그룹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 계획을 수행하는 데 너무 많은 돈과 노력이 들어가야 할 경우, 계획의 동기가 너무 약하거나 그 과정에서 변하거나 잃어버렸을 경우, 계획이 그리스도의 교회 정신에 부적절한 경우, 주님께서 공동체원 각자들과 이웃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가와 주님의 정신에 가장 가깝고 실현 가능한 계획인가를 찾지 않았을 경우, 구성원들이 계획의 첫 번째 단계를 실행하는데 너무 어려웠거나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 등이다.30)


이 항에서는 의사결정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본 사목자 리더십을 적절한 의사결정과정과 의사결정과정의 참여자, 의사결정과정의 새 모형, 의사결정과정의 변수, 의사결정과정의 기준, 그리고 의사결정과정을 위한 사목자(사목팀)의 리더십 이정표로 나누어 살펴본다.

그러면 이제 본당의 친교를 이루기 위한 본당 사목 활동에 대한 의견수렴과 기획, 수행과 평가하는 의사결정과정을 다음 여섯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첫째, 무엇이 적절한 의사결정과정인가?

둘째, 누가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가?

셋째, 어떻게 의사결정과정을 풀어 나갈 것인가?

넷째, 무엇이 본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사이의 의사결정과정을 가능하게 하고 방해하는가?31)

다섯째, 무엇이 의사결정과정을 위한 적절한 구조인가?

여섯째, 무엇이 의사결정과정을 위해 사목자(사목팀)가 가져야할 리더십의 자세인가?


1) 적절한 의사결정과정

무엇이 적절한 의사결정과정인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식이 있다. 사람이 모이면 그 원의와 그 원의를 실현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바람을 표현하는 형식과 그 바람을 듣고 모으는 형식 그리고 어떻게 그 바람들을 실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형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만장일치제이든, 과반수이든, 다수결이든 또는 또 다른 어떤 형식의 의사결정이든. 한국 문화에서도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왕이나 책임자가 최종 결정을 내리고 그 밑의 사람들이 그 결정을 따르게 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하부 조직에 결정 권한과 실행을 위임하거나, 적어도 담당 실무자들과 의논하여 결정한다.

교회 전승과 신학적 가르침에 따르면, 룸코 소공동체 교회론의 의사 결정을 내리는 방식은 만장일치제다. 만일 투표로 결정을 내리게 되면, 공동체가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양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표의 형식을 통해 비록 하나의 결정이 선택은 되었어도, 선택되지 않은 소수 쪽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의 일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교회와 교회 사업의 운영과 관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을 돌보는 사목이다. 특별히 사람들을 돌보는 사목은 그렇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아질 수는 없어도, 의견을 하나로 모을 때까지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가운데에서 이해 당사자 모두가 공감할 때까지 지속적인 대화와 협력을 모색하며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것이 섣불리 일을 진행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소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보다 좋다. 이 방식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끌어안기 위해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와 주님의 뜻을 따를 때까지 기다리시는 모습과도 부합한다(2 베드 3,9 참조).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하신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교회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열려있고, 마침내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그 날,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필리 2,10‐11) 될 때까지 끊임없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한 가지 일을 잘 처리하여 한 번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구원의 하느님 나라로 불러 모으고 그 안에서 하느님 구원의 뜻이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교회가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의 진정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교회 사업의 운영과 관리는 해당 실무자들에게 과감히 권한을 위임하고, 사건과 상황의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호의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때까지 의견을 조율하고 하나로 모은 후에 사목을 위한 의사결정과정을 진행해 나가는 것이 적절한 의사 결정 방식이다.32)


2) 의사결정과정의 참여자

누가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가?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그 의사 결정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 그리고 그 의사 결정을 통해 결론이 도출되어 혜택을 입을 사람들 그리고 그 의사 결정을 진행하고 수행할 사람들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사람들은 주위의 눈치를 많이 본다. 그 눈치를 본다는 것은 좋은 면에서는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함께 사는 이들의 요청과 압박의 결과이기도 하다. 주위 사람들은 한 사건이 결정되면서 그것이 전통이 되고 다른 사건의 사례와 선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결정이 훗날 자신들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 두고두고 자신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기 때문에 무언의 압력을 가해 의사 결정의 이해 당사자들이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사 결정을 통해 주위에서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사람들을 가능하면 참여시키거나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그 의사 결정을 신학적으로 점검해 줄 신학자와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다. 신학자와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는 그 의사 결정이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 안에 있는지의 여부를 점검해 주고, 그 의사 결정이 교회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면 어떻게 복음과 교회의 정신에 맞추도록 할 것인가를 조정해 주어야 한다. 교회 내의 한 조직 그리고 한 소공동체나 한 단체가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그것이 그 해당 이해 당사자 그들만의 결정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신비롭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정의 결과가 지역사회와 교회 공동선에 부합하도록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사건과 상황의 해당자들과 이해 당사자들, 교회 신학자들과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그리고 그 일에 관련된 것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사목적인 대응책을 찾아 사목자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제공하는 사람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다 함께 모여 논의하고 한 번에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지속적이고 심도 깊게 다룰 상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 본당 내에 조직된 기구가 「교회법」 정신과 서울대교구 시노드 후속 교구장 교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에 의하면 본당의 사목 평의회와 구역장 회의다.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에 의하면, 구역장 회의는 본당 사목 평의회의 도움을 받아 본당의 미래를 위한 사목적 예지와 대안을 공유하며, 정기적인 회의를 통하여 본당의 사목적 현안을 논의하고, 구역과 반의 자율성과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촉진한다.33)


3) 의사결정과정의 새 모형

어떻게 의사결정과정을 풀어 나갈 것인가? 본당 신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키는 조직이나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불충분하다는 설문 조사의 결과가 있었다. 그러므로 공동체와의 친교 속에서 의사 결정을 진행해 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의견이 다 받아들여지고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목자(사목팀)가 끊임없는 대화와 관심을 통해 본당 신자들과의 깊은 친교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전통 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군자(주임 사제-사목자)는 중용과 조화를 이루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한 쪽으로 기울어서도 안 되고 한쪽에 특혜를 주어도 안 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한국의 왕들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 각 계층과 각 특성에 맞는 모임으로 조참(朝參: 아침 회의)을 가졌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의 신분이나 회의의 안건에 따라 여러 가지 조참이 있었다. 이것은 마치 사목 평의회와 구역장 회의처럼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의 신분이나 모임 주제에 따라 여러 가지의 모임을 가지는 것과 같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친교의 교회론을 통해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백성들 사이에 그리고 하느님 백성들 사이에 친교를 이룬다고 했다. 그리고 본당 사목 평의회와 구역장 회의는 평신도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할 수 있는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좋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아울러 본당의 친교 속에서 사목자와 함께 하느님 백성을 사목적으로 잘 돌볼 좋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떻게 의사결정과정을 풀어 나갈 것인가? 결과적으로 사목적 의사 결정은 교회와 복음의 정신 안에서 중용과 조화를 지켜야만 하며, 그 과정을 신속하게 하고, 그 결과를 본당의 하느님 백성의 친교 안에서 공유해야 한다. 각 기관들은 명백하게 독립적이지만 본당 내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와 친교를 나누어야 한다. 중용과 조화를 지키고, 그 과정을 신속하게 하며, 본당의 친교 안에서 그 결과를 나누기 위한 새 구조를 짜는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한다.34)


4) 의사결정과정의 변수

무엇이 본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사이의 의사결정과정을 가능하게 하고 방해하는가? 사목자가 본당 사목을 위해 신자들과 함께 가장 좋은 사목 정책이 무엇인지 모색하고 그 사목 정책을 신자들에게 교육하고 설득하여 그 사목 정책을 수행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열성이 의사결정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사목자가 신자들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 찾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진행해 나갈 때 신자들의 반대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설사 그 사목 정책이 좋은 것이라고 할 때도 말이다. 그리고 사목자는 신자들의 의견을 더 잘 들으려고 하고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신자들은 사목적 의사결정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 문화에서 「논어」와 「중용」을 읽어 보면, 군자(주임 사제-사목자)는 중용의 겸손이라는 면에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경하고, 중용의 절제라는 면에서 신자들에게 사목자의 의견을 따르라고만 요구하지 않고 신자들의 갈망과 원의를 기꺼이 들어주어야 한다. 현대 한국 사회로 오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깨고 기대가 높아졌다. 그래서 왕과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고 함께 논의하고 함께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관련된 의사결정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랐다. 다른 한쪽으로 한 사람의 지도자가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다 얻을 수 없고, 또 현대 사회의 모든 부문과 각기 다른 처지에 놓여 있는 여러 다양한 사람들의 갈망과 원의들을 혼자서 다 채워줄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모습 중의 하나를 하느님 백성으로 삼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같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자신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수행하도록 불림을 받았다. 아시아 주교회의는 “아시아의 교회는 평신도,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들이 서로를 자매와 형제로 인식하고 받아들여 공동체들의 친교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준성사적인 현존으로 간주되는 주님의 말씀으로 다 같이 소명을 받았으며, 그 말씀은 그들을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소공동체)의 형태(즉 이웃 그룹, 기초 교회 공동체 그리고 ‘계약’ 공동체)로 이끄신다.”고 밝혔다. 거기에서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나누고, 자신들이 일상에 그 복음을 적용하며, 또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치하며 서로를 지원하고 함께 일한다. 사목자가 자신의 동료 사목자들과 사목협조자인 수도자 그리고 본당 신자들을 자매와 형제로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면, 사목자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의사결정과정을 밟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우월감으로 인해 스스로 외로워질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목자의 사목적 결정은 자기 신자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지 못할 것이다.

의사결정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목자가 동료 사목자와 사목협조자인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를 통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깨닫고 의도적으로 추구하며 신뢰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 자신뿐만 아니라 본당의 하느님 백성 전체와도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사목자가 깨닫고 확신할 때 가능하다. 의사결정과정을 방해하는 것은 사목자의 확신의 결여나 미성숙이나 독재 또는 메시아니즘이며 신자들의 무지나 탐욕, 기득권과 이해관계 또는 이기심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서로를 의사결정과정으로 초대하고 받아들일 만큼 변화될 때가지 식별하고 기다려야 한다. 사목자는 홀로 무엇이 신자들을 위한 최상의 것인가를 찾을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과정에 자신의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다. 사목자는 본당 신자들의 무지를 핑계로 주님과 신자들과의 친교 안에서 서로 이해하며 사목 직무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도피하기 보다는 본당 신자들에게 복음과 교회의 정신을 가르치고 양성시키며 자신의 사목 정책을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35)


5) 의사결정과정의 새로운 구조

무엇이 의사결정과정을 위한 적절한 구조인가? 사목적 의사 결정은 복음과 교회의 정신 안에서 ‘중용’과 ‘조화’를 지켜야만 하며, 그 과정을 신속하게 하고, 그 결과를 본당의 하느님 백성의 친교 안에서 공유해야 한다. 각 기관들은 독립적이지만 본당 내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와 친교를 나누어야 한다. 이렇게 사목자(사목팀)가 중용과 조화를 지키고, 그 과정을 신속하게 하며, 본당의 친교 안에서 그 결과를 나누기 위한 의사결정과정의 새로운 구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새 구조는 피라미드식 구조를 피해, ‘위’와 ‘아래’의 개념이 없는 원형 구조로 한다. 사목자와 동료 사목자들과 사목 협조자들이 자신들이 내린 결정 사항과 교회 운영의 원칙과 규정들을 설명하려고 하기 전에, 하느님 백성이 현재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듣고 헤아려야 한다.

둘째, 새로운 구조의 개념은 ‘친교’와 ‘공유’이다. 공동체 내의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서로에 대해 잘 알아야 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여야 한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의 정보를 가급적 공유해서, 본당 구성원 모두가 공동체의 한 식구라는 것을 느끼고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새 모형은 하느님의 일에 집중되지 않고 하느님 백성 각각의 인격에 집중되어 있다. 무엇이 언제까지 어떻게 행해져야만 한다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제약은 가끔 하느님 백성을 놓치고 만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 하는 일이 그 일의 논리에 빠져, 정작 하느님 백성을 소외시키고 손상시키는 경우가 발생한다.

넷째, 새 구조의 중앙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다른 모든 부분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동등하며, 구분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교회의 한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존의 구조에서는 표현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당연히 함께하시고 내재하고 계시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분께서 보이지 않고 또 교회의 모든 일이 그분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도적이라도 그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놓는 것이 좋겠다. 교회 내에서 하느님을 잠시라도 잊게 되면 교회는 현실 세계에서 자칫 성공과 실패, 자만과 좌절, 성장과 퇴보라는 사회적인 논리와 잣대에 휘말리게 되어, 교회의 본모습을 잃게 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느님께 속하여 세상에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그 목표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많고 적고, 크고 작으며, 좋고 나쁜 것처럼 평가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기준은,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각각의 인격,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몸소 활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와 그 신비에 응답하는 교회 신앙의 깊이와 성숙, 그리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그에 따른 교회의 사랑 행위를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새로운 구조 내에는 두 개의 조직이 있다. 하나는 본당 사목팀이고, 다른 하나는 본당의 기본 조직이다. 복잡하고 다양하며 전문화되는 세상 안에서, 교회는 이제 어느 한 카리스마적인 사제(지도자)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러 사목 협조자들의 협력을 통해 각자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지혜와 은총을 모으고, 사목 대상자들에게 풍요한 사목적 혜택을 가져다줌으로써 좋은 사목적 열매를 맺기 위해 사목팀으로 함께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36)


6) 의사결정과정을 위한 사목자(사목팀)의 리더십 이정표

무엇이 의사결정과정을 위해 사목자(사목팀)가 가져야할 리더십의 자세인가? 본당 신자들을 살아있게 하고 능동적으로 교회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사목자(사목팀)가 의사 결정 과정을 내리는 데 있어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리더십 이정표를 다음과 같이 꾸며본다.


① 사목자(사목팀)가 각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귀중한 존재로 여긴다.

② 사목자(사목팀)가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맡겨주신 재능과 잠재성을 발견한다.

③ 사목자(사목팀)가 각 사람의 갈망에 귀를 기울인다.

④ 사목자(사목팀)가 그 사람이나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그 사람이나 공동체와 상의한다.

⑤ 사목자(사목팀)가 공동체를 위한 최상의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공동체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의견들을 수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⑥ 사목자(사목팀)가 깊은 배려 없이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사람이나 공동체 스스로 자신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고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를 찾아 낼 때가지 충분히 기다린다.

⑦ 사목자(사목팀)가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위한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들의 갈망과 원의 그리고 그들이 처한 삶의 조건들을 명확히 안다.

⑧ 사목자(사목팀)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실행하기 전에 그 사람이나 공동체의 동의를 겸손히 구한다.

⑨ 사목자(사목팀)가 자신의 제안이 실제 상황에서 그 사람이 이룰 수 있고 또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좋은 제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⑩ 사목자(사목팀)가 자신의 좋은 의견을 따르도록 요구하기보다 제안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긴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쁘게 자신을 따를 수 있게 한다.

⑪ 사목자(사목팀)가 공동체의 원의가 복음과 교회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을 때 공동체에게 “아니오.” 라고 말한다.

⑫ 사목자(사목팀)가 그 상황에서 그 사람에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깨닫도록 도와주고, 그 결과를 함께 식별한다.

⑬ 사목자(사목팀)가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사람들의 목표가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⑭ 사목자(사목팀)가 직무를 열매 맺게 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새긴다.37)



3. 본당에서 맺는 새 리더섭의 삼위일체적 친교

본당 신자들은 사목자(사목팀)가 자신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그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을 내릴 때 신자들은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 때 본당 신자들은 사목자와 깊은 친교를 나누게 된다. 사목자는 또한 신자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주님께서 그 의견에 대해 어떻게 여기실지를 묵상하면서 주님과 친교를 맺는다. 그리고 사목자가 주님과의 친교 안에서 자신이 묵상한 바를 신자들과 함께 복음의 빛으로 비춰 보고, 주님의 뜻 안에서 그 의견들을 나누고, 결정하고, 수행할 때 신자들과 진실한 친교를 누리게 된다.

사목자가 사목팀과 함께 곤란에 처한 사목 대상이나 본당의 어려운 문제들을 발견해 내고,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 사목적인 대안을 마련하여, 그 대안을 사목팀과 수행해 나가면서 사목자와 사목팀과의 친교가 더욱 깊어지고 마침내 형제애를 느끼게 된다. 사목자와 사목팀은 단순히 일을 위한 관계도 아니고, 책임 때문에 대응하는 관계도 아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들을 감싸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며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공동 협력자의 관계이다. 복음이 현실에서 적용되고 복음에 따라 사목 대상이 변화되고 그 주변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함께 겪으면서 진정 하늘나라의 기쁨을 나누고 주님과 사목자와 사목팀이 사목 대상자들과 함께 삼위일체적인 친교를 나누게 된다.

주님과 주님의 사도들이 주님의 기적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관계와 똑같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고 싶으셨던 것처럼(마르 3,14 참조) 사목자도 사목팀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고, 주님 구원 사업의 협조자요 주님의 일을 계속하여 수행할 사도가 되길 바라셨던 것처럼(요한 15,15‐17 참조) 사목자도 사목팀을 사목자의 말씀에 순명해야할 평신도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구원의 사목을 펼칠 동료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함께 사목을 펼쳐가면서 협조자와 동료로서 구원의 사목을 실현해 나가는 한 팀이 된다. 사목자가 사목팀과 함께하게 되면 홀로 사제관에서 다 들을 수 없는 백성들의 소리를 더 깊숙이 들을 수 있게 된다. 이기적이거나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정 함께 걱정해주고 사목적으로 대응하기에 적절한 의견들을 함께 모색하고 나눌 수 있다. 사목자는 홀로 하기엔 벅차고 부담스러운 일을 본당 사목팀과 함께하면서 보다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 이런 관계는 사목자와 일치한 사목팀이 주님과 사목 대상자와 함께 삼위일체적 친교를 나누는 관계이다.

이렇듯 친교의 교회론에 있어서의 의사 결정 과정은 친교를 이루어가는 과정인 동시에 주님과 또 신자들과 함께 친교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또 친교 안에서 주님의 사목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사목자가 본당 사목팀과 또 각 지역 소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전문 위원들과 사도직 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본당 신자들과 본당의 현안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춰 보며 의사 결정 과정을 밟아 나갈 때, 이 친교는 성령의 안배하심 속에서 주님과 사목자 그리고 본당의 전 신자들과의 삼위일체적인 친교로 확산된다. 그 때 본당이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누리는 삼위일체적인 친교의 공동체가 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본당 내에 이러한 삼위일체적인 친교의 관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사목자는, 하느님께서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성령을 교회에 보내 주셨음과 같이, 주님께서 평신도들을 사목자의 사목에 협력하여 함께하도록 보내 주셨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그리고 사목자는 평신도들을 통치나 구원해 주어야 할 사목의 대상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데 함께하는 동료요 협조자가 되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양성시켜 마침내 주님의 친구로 만들어 주시고 주님의 일을 계속 수행하도록 하셨다. 사목자도 주님 사랑의 마음으로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님과 교회의 참 좋은 제자요 사도가 되도록 교육하고 양성시켜 함께 일해야 한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38)








1) Dennis M. Doyle, Communion Ecclesiology: Vision and Versions,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2000, 12면.

2) Jean-Marie Roger Tillard, Church of Churches: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tr. R. C. De Peaux, O. Praem, Collegeville, Minnesota, A Michael Glazier Book by The Liturgical Press, 1992. origin 1987, 29면.

3) Dennis M. Doyle, 위의 책, 13면.

4) Jean-Marie Roger Tillard, 위의 책, 45면.

5) 위의 책, 51면.

6) Dennis M. Doyle, 위의 책, 13면.

7) Jean-Marie Roger Tillard, 위의 책, 2면.

8) 위의 책, 5. 12면; 또한 Tillard, Flesh of the Church, Flesh of Christ: At the Source of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tr. Madeleine Beaumont, Collegeville, Minnesota, A Pueblo book, The Liturgical Press, 2000(origin1992 in French), 5-6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성령으로부터 오는 삶의 일치 안에서의 친교를 규정하는 새 생활의 근거로서 영적인 아담이 되었다(1코린 15,46,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 다음입니다. ho eschatos Adam eis pneuma zoopoioun).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12,!3)…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28).”

9) Jean-Marie Roger Tillard, Church of Churches: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28면.

10) Jean-Marie Roger Tillard, Flesh of the Church, Flesh of Christ: At the Source of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tr. Madeleine Beaumont, Collegeville, Minnesota, A Pueblo book, The Liturgical Press, 2000(origin1992 in French), 1면; 48면도 보라, 틸라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한다(Augustine, Letter 187.20, in Augustine, Letter, 5. Vols., tr. Sr. Wilfrid Parsons, S.N.D., Fathers of the Church, New York, Fathers of the Church, 1951-1955, 4,2.36-37):이제, 하나인 빵을 먹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 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12,11); 그러므로, 그분 스스로가 아니라 다양한 몸의 구성원들의 다양성으로 구분된다. 왜냐하면 귀는 눈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분되는 것이고, 그분은 그분 자체로서 한 분이시고 같은 분이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직무들이 여러 구성원들에게 조화롭게 나뉘어 주어졌다.”

11) Jean-Marie Roger Tillard, Church of Churches: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17면.

12) 위의 책, 24. 41면.

13) Jean-Marie Roger Tillard, Flesh of the Church, Flesh of Christ: At the Source of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ix면.

14) Jean-Marie Roger Tillard, Church of Churches: The Ecclesiology of Communion, 52면.

15) 위의 책, 53 면.

16) 위의 책, 145 면.

17) 위의 책, 169 면.

18) 위의 책, 175 면.

19) 위의 책, 209 면.

20) Dennis M. Doyle, 위의 책, 14면.

21) Susan K. Wood, The Gift of the Church: A Textbookon Ecclesiology in Honor of Patrick Granfield, O.S.B., ed. Peter C. Phan, Collgeville, The Liturgical Press, 2000, 159면.

22) 위의 책, 159면.

23) 위의 책, 160면.

24) Jean-Marie Roger Tillard, 위의 책, 223면.

25) Christopher Ruddy, The Local Church: Tillard and the Futureof Catholic Ecclesiology, New York, A Herder and Herder Boo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2006(origin1970), 74면.

26) 위의 책, 75. 94면.

27) 위의 책, 96면.

28) Dennis M. Doyle, 위의 책, 175면.

29) 심흥보, 위의 논문, 130-135면; 위의 책, 60-66면.

30) 아시아 통합 사목 연구소, “문제 해결 방식, A: 복음 나누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훈련 프로그램 A/8 “Problem Solving Scheme, A: Gospel Sharing,” Programs for Training the Christian Community, A/8, The Lumko Institute, 1992, 2‐3면 참조.

31) 심흥보, 위의 논문, 174-175면; 위의 책, 60-66면.

32) 심흥보, 위의 논문, 175-177면; 위의 책, 121-123면.

33) 심흥보, 위의 논문, 177-179면; 위의 책, 123-125면.

34) 심흥보, 위의 논문, 179-180면; 위의 책, 126-127면.

35) 심흥보, 위의 논문, 180-183면; 위의 책, 128-130면.

36) 심흥보, 위의 논문, 191면 참조; 위의 책, 143-145면.

37) 심흥보, 위의 논문, 201-202면; 위의 책, 155-156면.

38) 심흥보, 위의 논문, 202-204면; 위의 책, 157-15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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