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의 영성



심흥보 지음






도움의 말


"어릴 때부터 큰 이모님 손잡고 매일 아침 미사를 나오시더니 성소를 받으셨군요." 하신 유치원 때 원장 수녀님의 말처럼,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냉담기를 제외하곤 생애의 거의 많은 시간 동안 매일 미사를 드렸던 것 같다. 유치원 때와 초등학교 시절 그 추웠던 중림동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복사를 서면서 배웠던 성가들이, 그 경건하고 거룩했던 분위기와 함께 홀로 성당에 앉아 주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릴 때나 신자들과 함께 성가를 부를 때 지금의 성가로 다시 들려오곤 한다.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당에 그것도 거의 매일미사를 참례하러 오곤 했던 내 모습을 되돌이켜 볼라치면, 하느님께서는 끔찍이도 나를 사랑해주셨고 꾸준히 그리고 당신의 품안으로 나를 이끌어 오셨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리만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나의 지난 세월 동안 무엇이 그렇게도 나를 미사로 이끌었는지? 어린 나이에 어떤 이유로 그렇게 미사를 계속 참례하였는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매력이 있었는가? 어린 나에게 주님은 어떻게 임하셨는지? 한편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주일 9시 어린이 미사에 참례하지 않고 텔레비젼에서 하는 '타잔' 프로를 보다가도, 10시 미사 영성체 시간에 맞춰서 부지런히 뛰어 성당 맨 뒤에 살짝 숨어들어 성체를 영하고 올 정도로, 주님으로부터 떨어지거나 거부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중고생 시절 성당 친구들과 함께 써클 활동을 하면서도 매일 미사 안에서 보호되고 성장했던 그 모든 것이 너무나 나에겐 소중하고, 그것이 지금의 내 신앙을 지탱해 주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셨다."란 창조교리를 어린 아이들 앞에서 가르치기엔 멋쩍어하면서도,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란 초등학교 1학년 8과의 교리만을 힘주어 말하고 방학 때만 되면 의레히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매일 미사에 나오도록 했을 정도로 미사는 내 생애의 일부다. 아니 미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탱해주고 살게 해주었던 생명의 양식이었다.

그러다가 신학생 때 미사전례의 생성과정과 신학적 의미에 대해 배웠다. 그러면서도 한편 장난기 어린 의구심이 피어오르곤 했다. 이를테면 아침 일찍 일어나 성당에서 미사를 참례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면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고 가슴을 칠 때마다, '고해성사도 규칙적으로 다 보았고, 어제 잘 때 밤에 끝기도 다 바치고 잠잔 것밖에 없는데 무슨 아침마다 죄를 고백해야 하나?' 하는 등의 것이었다. 우습고 어처구니없는 발상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과연 미사의 각부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아니 아직도 이르지만 미사의 각 부분을 통해 교회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주님 희생제사의 의미를, 성서 즉 우리 인간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 그리고 그 생애를 주시고 함께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찾아보고자 쓰게 되었다.

이 책을 형제, 자매들과 함께 사용하려면 우선 미사의 각 부분에 해당하는 주제와 본문을 읽고, '느낌'을 통해 사람들의 반응을 들으며, 자신은 어떤지 '나는'이란 항목에서 서로 발표를 하면서 느낌을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말씀'에서 미사전례의 기도문이 해당되는 성서구절을 읽고 묵상한 후, '새김'을 통해 복음의 해설을 읽고 각자 스스로의 정리시간을 잠시 가진 후, '응답'에서 서로의 회개를 위한 은총의 시간을 가지면서 새 생활의 방향과 실천약속을 하게 된다.

한편 이 책으로 구역 반모임에서 복음나누기 7단계를 하려면, 각 과의 '말씀'을 가지고 5단계까지를 하고 6단계 첫부분에서 '새김'을 읽으며 공부를 한 후에 실천약속을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주님의 생애가 요약되어 있고, 우리 천주교 신앙이 함축돼 있으며, 그 전례적인 배열과 내용 면에 있어서 우리 교리 교과서와도 같으며 매일 미사에 참례하다 보면, 마치 영신수련을 받고 있는 듯하기에 미사에 매일 참례하도록 권하고 싶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주님과 가까워져 있으며, 마치 주님이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면서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마르 4,26-28)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사가 우리 신앙생활의 정점이요 원천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살게 되기를 바란다. 이 작은 시도가 미사에 참례하는 분들께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다 더 깊은 신앙 안에서 미사를 관조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겸손되이 주님께 봉헌한다.

아울러 이 책을 우리 본당의 성소모임인 '등대'회 회원들에게 바친다. 그들이 이 다음에 교회와 하느님 백성을 위해 봉사하게 될 때 더욱 더 깊은 신앙 안에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이 글을 준비하는데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꼼꼼하고 세세하게 교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본당의 홍 스테파니아 수녀님과 이 방송원고를 책으로 출판해 주신 성바오로 수도회 이 창욱 신부님과 직원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평화방송을 통해 이 원고를 듣게 될 애청자 여러분께도 미리 감사드린다.


천주강생 1996년 7월 15일

성 보나벤뚜라 주교학자 기념일에

심 흥 보 베드로











차 례




도움의 말·3

빵을 떼어 주시자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2.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3.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4. 성서의 말씀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5. 빵을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6. 감사 기도

7.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8.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9.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10 주께서 오실 때까지

1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12. 우리를 구하소서

13.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14. 하느님의 어린 양

15.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16.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부록 1 미사 통상문

부록 2 성서 찾아보기

빵을 떼어 주시자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미사

"미사는 그리스도의 행위이며 교계적 질서를 갖춘 하느님 백성의 행위로서, 세계 교회와 각 신자들의 교회 생활의 중심을 이룬다. 미사야말로 하느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하시는 행위의 절정이며, 사람들이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를 흠숭하는 성부 공경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중을 통하여 미사로써 구원의 신비가 기념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전자와 일반 신도는 주님의 만찬인 미사에 각자의 신분대로 참례함으로써, 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체와 성혈로써 미사 성제를 제정하시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도록 사랑하시는 당신 신부인 교회에 맡기실 때 목적하신 그 효과를 충분히 받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개정 공포된 '미사 경본의 총지침', 1-2항 미사의 중요성)


느낌

어떤 사람들은 미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는 신부님이 드리는 것 아닌가요?!"

·"신부님이 미사를 드릴 때 난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가만히 서있으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묵주기도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미사가 십자가상 제사와 부활의 사건이라고 하는 데 구체적으로 언제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지…?"

·"미사와 내가 세상 사는 것과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나요?"

·"미사는 주일만 드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주님께서 일주일에 한 번 쉬는 우리를 꼭 미사에만 잡아 두실까요? 때에 따라서는 부모님도 찾아뵈어야 하고, 결혼식도 가야 되고…. 정말 경우에 따라서는 쉬는 날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거나, 놀러도 가야하지 않을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하루가 찌뿌둥하다."

·"미사에만 가면 편안해요!"

·"처음엔 몰랐는데 계속 미사에 참례하다 보니까, 뭔지 모르게 내 삶이 변하는 것 같고 뭐라고 꼭 찝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좋아요. 그냥 좋은 것 말고요, 확실히 달라졌어요."

·"미사에 참례하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느낌이 스며들어와요!"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님을 실제로 본 것 같아요. 거양성체 때 주님이 성체 안에 앉아 계신 것이 겹쳐 보여요. 옛날에 어른들이 자꾸 그래서 저 노인네 망령들었나 했는데 이젠 저도 보여요. 나이가 들면 그렇게 보게 되나 봐요!"

·"미사에 참례하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요."

·"미사에 참례하면 예수님께 희망을 두게 되고, 힘이 생겨요."

·"미사 참례하는 힘으로 사는 것 같아요!"


나는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례합니까?

·왜 미사에 참례합니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여러분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거나 변화를 가져옵니까?


말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루가 24,13-35)

24 13바로 그 날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가면서 14이 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15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 가서 나란히 걸어 가셨다. 16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17예수께서 그들에게 "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18그리고 글레오파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9예수께서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에 관한 일이오. 그분은 하느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하신 일과 말씀에 큰 능력을 보이신 예언자였습니다. 20그런데 대사제들과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분을 관헌에게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21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 22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인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 보았더니 23그분의 시체가 없어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나타나 그분은 살아 계시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24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과연 그 여자들의 말대로 였고 그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25그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26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28그들이 찾아가던 동네에 거의 다다랐을 때에 예수께서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이자 29그들은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하고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30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31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32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33그들은 곧 그 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가보았더니 거기에 열한 제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34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35그 두 사람도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김

이 성서구절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주님 자신에 대해 설명해 주시고 성체성사를 통해 증명해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주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의 사명이 무엇이고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를 깨닫게 되어, 다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주님의 부활을 선포한다는 이야기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란 이 성서구절은 우리에게 미사의 분위기와 구조를 연상하게 한다.

첫째, 13절과 14절에 나오는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쯤 떨어진…동네로 걸어가면서, 이 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 묘사는 주일 (아침)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길에서 서로 만나 인사하고 자신들의 안부와 공통 관심사를 나누면서 성당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 다소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분위기 안에서 사제가 입당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토론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 가서 나란히 걸어 가셨다."(15절) 미사가 시작되었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아직 신자들은 그 주일의 의미나 미사 전례의 내용을 깊이 알지 못한다. 또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가 부족한 상태이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16절)

둘째, 참회 시간을 갖기 위하여 사제가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하고 말하면서 침묵에 들어가면, 신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들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마치 미사에 참례한 신자 각자에게 "예수께서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17)시는 것 같다. 신자들은 각자 자신들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17)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현실을 돌이켜보면서 주님께 우리의 애로사항과 바람을 합쳐 미사 지향으로 보고하는 것과 같다. '주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이런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왜 내게 닥쳐왔는지, 그리고 이 문제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그리고 정작 어떻게 이것에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레오파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무슨 일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다."(18-19)

우리가 겪는 우리의 현실은 다름 아닌 갈등이다. "…관한 일이오. …였습니다. 그런데들과들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됩니다."(19-21) 어떤 일이 생겼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반면에 다른 이들은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과 삶의 진행상황들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황이 반전되면서 입장도 바뀌어 웃음이 울음으로, 때로는 사건자체가 미궁으로 빠져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는 상황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졌더랍니다. 그뿐만 아니라것이었습니다. 그래서못했습니다."(22-24)

셋째, 이제 이러한 갈등 속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말씀 전례. 구약과 신약의 5개의 독서와 응송들 안에서 우리는 우리 문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 말씀은 그날 그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혼의 양식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성서 전체에서 …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25-27) 말씀 전례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게 된다.

넷째,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우리의 삶 속으로 주님을 초대하게 된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초대하는 우리의 청원은, 미사 성제 안에서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봉헌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들은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묵어 가십시오.' 하고 붙들었다."(28-29) 우리가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께 다가서는 자세는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과정이다.

이러한 우리의 봉헌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감사 기도의 시초에 성령께서 오신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감사기도 제 2 양식)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집으로 들어가셨다."(29)

다섯째, 감사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성변화의 순간에, 주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시고 완성시키신다.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30절) 그럼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히 드러난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31) 우리는 성체를 영함으로써 주님과 하나 된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 안에 스며들어 없어져 버리신다. 사랑은 스스로 녹아드는 것이라고나 할까! "예수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31)

그분은 말씀 전례에서 우리가 들어서 깨닫게 된 말씀을 성찬 전례에서 증거하심으로써 우리를 확신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우리도 그 말씀을 살도록 북돋우신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32절)

여섯째,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문제의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사신 십자가상의 제사, 즉 성찬을 통해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얻는다. 이는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얻게 되는 우리 제자됨의 시작이요, 제자가 사도로서의 사명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힘이다. 이렇게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된 우리는 교우 형제·자매들과 함께 세상으로 복음을 선포하러 나아간다. "그들은 곧 그 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가보았더니 거기에 열한 제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주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도 길에서 당한 일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33-35)

이상에서 우리는 루가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란 성서기사를 미사의 순서에 맞추어 살펴보았다. 물론 이 성서기사가 미사의 형태를 의미하기 위해 씌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사에서 미사의 의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이 기사에서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느낀다. 주님은 동틀 무렵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후, 바로 이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성서의 말씀과 연관시켜 설명해 주시고 빵의 나눔을 통해 깨닫도록 하신다. 이렇게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제자들을 직접 가르쳐주시고 먹여주시면서 키우시느라 애쓰신다. 똑같이 우리는 십자가상 제사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미사 성제를 통해 이 사랑의 절정과 완성을 본다.

엠마오의 이 기사는 바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처참하게 돌아가신 의미가 무엇인지', '돌아가심으로써 어떤 일이 생기게 되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내용을 이해시키고 믿게 하려고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는 사랑의 곱빼기 수고이다. 미사 역시 주님의 십자가상 제사를 전례의 형식으로 기념하고 재현함으로써, 오늘 미사를 봉헌하는 바로 여기서 다시 주님 구원이 계속된다.

둘째, 제자들은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본다. 주님은 빵의 나눔이라는 표징을 통해 자신을 알아보도록 계시하신다. 우리는 지금 미사 성제(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을 만난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심으로써 신앙의 신비를 알려주신다. 제자들은 빵의 나눔을 통해 성서에서 언약되고 해석되고 증거되어 우리가 알게 된 주님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과 만남이 바로 미사에서 얻게 되는 생명의 양식이다. 이 생명의 양식이 우리의 힘이다. 우리는 그 힘으로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에 휘말리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고 따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거듭 생명의 양식을 얻기 위하여 깨어 기도하면서 미사에 참례함으로써, 우리 삶의 방향과 방법을 교정하고 주님의 안배하심과 보호하심과 이끄심 안에서 주님과 점점 일치되어 간다.

셋째,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는 표현은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사실적인 현상("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는데"31)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 대한 '기억이 나고', '생각이 나며', '느낌이 들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까지 포함한다. 또한 우리가 "미사 중에 주님을 만난다!"는 표현 역시 주님과 주님께 대한 직접적인 대면만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즉, 자신의 현실("이 즈음에 일어난 모든 사건"14절)을 일어난 사건과 현상 그대로만 알고 있는 우리가("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람으로서 요새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다니, 그런 사람이 당신 말고 어디 또 있겠습니까?"18절) 그 사건과 현상 너머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미사의 독서와 강론을 통해 알게("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25-27)되었을 뿐더러, 그 깨달음을 지식이나 지적인 흥분에 그치지 않고, 받아 들이며, 믿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며 살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영함으로써 확고히 심게 된다. 성체성사는 바로 십자가상의 제사로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주님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므로 미사가 우리 생명의 양식인 것이다.

이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는 사실이, '주님께서 십자가상 제사를 바치심으로써' 명백히 드러났고 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성체성사(미사)를 통해 일러주시고 심어주셔서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양식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우리 생명의 양식을 얻게 됨으로써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살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가 받아들인 만큼밖에 숨쉬지 못하지만, 지속되는 우리의 활동과 미사 참례를 통해 교정되고 다시 심화된 우리의 활동 속에서 완전해진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

그러므로 미사는 우리가 주님과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신앙의 원천이며, 주님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함께 하자고 미사를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파견하신다.


응답

·주님은 왜 우리를 미사(성체성사)에 부르십니까?

·미사에서 얻어야 할 생명의 양식을 받아 나누고 있습니까?

·오늘 미사를 참례하고 나서 나는 어떤 식으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양식을 나누시렵니까?

·누구와 함께 누구에게 내 생명의 양식을 나누시렵니까?

차례..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호경과 인사

성호경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인사

†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와 함께.

"주의 만찬인 미사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주님을 기념하여 미사 성제를 봉헌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사제를 중심으로 한 자리에 모인다. 이같은 지역적 교회 집회에서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으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가장 뚜렷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십자가상 제사의 계속인 미사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단체 속에 실제로 현존하시며, 사제의 인격과 당신의 말씀 속에 현존하시며, 본체적으로는 온전히 성체의 형상 속에 현존하시는 것이다."(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개정 공포된 '미사 경본의 총지침', 7항 미사의 구조)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호경이 특별히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냥 습관아녜요?"

·"사람들 많이 보는 데서 성호를 그으려면 왠지 쑥스러워서 못하겠어요."

·"성호 긋기가 두려워요. 내가 성호를 그을 때 누가 옆에서 '저는 잘 살지도 못하면서…', '저런 주제에 신자인체 한다.' 고 흉보는 것 같고, 또 한편 오히려 주님께 누를 끼치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혼자 있을 때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성호를 그으면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없어지고 편안해져요."

·"성호를 그으면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 것 같아서 힘이 생겨요."

·"어떤 때는 너무 습관적으로 바쳐서 그었는지 안 그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안 바치면 너무나 허전해요."


나는

성호를 자주 긋습니까?

성호를 그을 때 옆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성호를 그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긋게 됩니까?

성호를 그을 때 어떤 느낌이나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까?


말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16)

4 7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0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11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13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15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계십니다. 16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새김

우리는 미사를 시작하며 성호를 긋는다. 사제의 입당과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호를 긋는다. 이렇게 성호를 긋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공간과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고나 할까?

성호를 그으면 마치 미사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자들이 숙연해지고 집중하게 되는데, 한편 이 때 하늘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신자들이 미사 전에 웅성거리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하느님 삼위께서 우리 중에 누가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할까 의논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주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면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불러들이시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성호를 그을 때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약속하시고, 우리가 사랑의 사도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7절)

성호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사랑으로 결합된 삼위 일체이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9) 아버지 하느님은 지상으로 당신의 아들을 내려보내셨다. 그리고 그 외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권한을 다 주셨다. 아들은 그 권한을 다 받고도 자랑하거나 뻐기거나 남용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주시는 데 다 써버리신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로 얻은 영광은 아버지께로 또 다 돌린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항상 바라보고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일치하게 되고 또 일치의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피어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아버지와 아들을 계속 한 마음 한 몸으로 만드신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로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로 그대로 다 이루신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제물이 됨으로써 사람들의 죄값을 갚으시는 것까지인데도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마다하지 않고 따르시고 다 이루셨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9-10)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호경을 바칠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가 받은 그 사랑으로, 아니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며 하느님 그 사랑에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1-12)

이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나신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3절) 성령은 우리에게 주님을 알려주시고 주님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주님을 느끼는 것 같은 기분과 깨달음, 그리고 주님을 보지 못했으면서도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상을 불러일으켜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계십니다."(14-15)

우리가 더 이상 '나'만이 아니고 '너를 위한 나'일 때 기쁘고 우리 존재와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으로 자신을 몽땅 다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았고, 또 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6절)

또 한편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로와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모든 서간에서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을 전달받아야 할 분들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평화와 친교의 일치가 이루어지기를 청한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신 로마의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깃들기를 빕니다"(로마 1,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 눈에 띄는, 아니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고 책임지도록 맡겨주신 주님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한다. 마치 화살기도를 바치듯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을 주님 안에서 기억하고 또 주님의 뜻대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주님께 나와 그 형제·자매를 봉헌하고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는 아들같이 사랑하는 디모테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선포하는 사명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그대에게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2디모 1,1-2)

그래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청하고 주님과 함께 활동하며 살아간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 들이면 곧 나를 받아 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응답

지금 이 자리에서 성호를 그으며 주님을 느껴 봅시다.

요즈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은 누구입니까?

미사를 드리며 주님께 봉헌하고 또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차례..

2.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참회-자비를 구함

참회

†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 전능하신 하느님과

◎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

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

◎ 아멘.

자비송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밤에 자기 전에 끝기도까지 하면서 잘못한 것 다 반성했는데 잠만 자고 난 아침에 잘못한 게 뭐 있나? 그리고 매일 미사 때마다 반성할 만큼 지은 죄가 어디 그렇게 많은가 뭐?"

·"왜 내 탓인가요?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나만의 문제입니까? 손바닥도 둘이 마주 쳐야 소리나는데…"

·"뭐 하느님께 빌 것이 있나요? 사는 게 해결된 다음에야…. 그리고 또 그 나머진 하느님께 무책임하게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또 바란다고 될 일도 아니고, 내가 직접 발벗고 뛰어야 될 일인데…."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뭐 꼭 잘못한 일이 있어서 죄의 용서를 바란다기 보다, 더욱더 거룩해지고, 더욱더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자신을 정화시키고 정진시키는 방법이죠."

·"너와 내가 싸운 일만이 아니죠.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나와의 연관 속에서 또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삶의 조건과 사회의 연대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나와 반드시 직접적인 연결은 안 되었더라도 간접적이거나 때로는 공범자로서 나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로 하여금 현실의 제반문제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끼도록 촉구하고 있죠."

·"특별히 내가 내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주님께 바랄 것은 없고요.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고요. 그보다는 하느님, 세상과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 내 생을 불안과 악의 없이 영위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죠. 행복과 평화 그리고 구원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청하는 것이죠."


나는

·미사 때 무엇을 주로 반성합니까?

·미사 때 무엇을 주로 청하십니까?


말씀

예리고의 소경(루가 18,35-43)

18 35예수께서 예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사람들이 나자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38그 소경은 곧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 39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을 데려 오라고 하셨다. 소경이 가까이 오자 41"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그가 대답하자 42예수께서는 "자,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43그러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어 하느님께 감사하며 예수를 따랐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새김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참회예절을 갖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 참회예절은 주님을 만나러 달려온 사람에게 다시 만나기 위한 준비를 시키는 듯할 정도로 중복되고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모시고자 한 사람들은 이미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보았을 것이며, 최소한 주님을 만나려고 미사에 참석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참회예절을 또 시키는 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그야말로 밤에 끝기도까지 하고 잠밖에 잔 것뿐인데 아침에 일어나 새벽미사에 참여하자마자 또 반성하라니?

우리는 미사경본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부분을 신약성서에서 루가 복음 18장의 '예리고의 소경'의 외침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38) 또한 마태오 복음 15장의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이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고 계속 간청하였다."(마태 15,21-22) 인용된 이 두 성서구절에서 드러나는 자비를 청하는 기도는 일견 반성의 의미로서의 참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간절한 바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루가 복음에서 나오는 예리고의 소경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면 그에게 한 번 자신이 "볼 수 있게 해"(41절)달라고 청하겠다고 작정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자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자 그 소경은 곧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37-38절) 그는 단순히 밑져야 본전이겠지 하는 마음에서 한 번 청하는 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경은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떠들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39절)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간절했는지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 소경을 데려 오라고 하"(40절)실 정도였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자기를 고쳐 달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그가 자기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만난 것이 아니라 그는 작정을 하고 그 자리에 와서 나자렛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처럼 보인다. 이 간절하고도 확신에 찬 소경의 청원을 우리는 가나안 여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계속 졸라대는 데도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23)고 게다가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 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23)고.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하고 말씀하셨"(24절)는 데도 그치지 않고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25절) 그 여자에게 또 다시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26절)는 데도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27절)하고 청한다. 이 여자는 자신을 강아지에 비유할 정도로 자신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아예 본능적으로 매달린다. 이 여인의 청원은 예수께서 자기 딸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주님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두 번씩이나 거부하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강아지에게 비유하기까지 할 정도로 당당히 청한다. 그래서 전혀 비굴하기보다는 자식이 부모에게 청하는 것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주께 자비를 청하는 예리고의 소경이나 가나안 여자에게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루가 18,42)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마태 15,28) 하고 칭찬하신다. 주님은 그 둘에게 '내게 비는 너의 청은 참으로 내게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라는 인정 아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향하는 근본자세이다. 곧 하느님을 알고 믿기에 그분 앞에 주저함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마치 주님 앞에 대령이라도 하듯이.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그를 주님 앞에 달려가 서게 만든다.

그런데 왜 주님 앞에 서서,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는 우리의 모습을 참회로 규정지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예리고의 소경이나 가나안 여인이 주님을 뵈옵고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루가 18,38)라든가 또는 "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마태 15,22) 라고 말하지 않고, 먼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가 18,38.39; 마태 15,22)라고 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소경과 여인의 표현을 주목해 보자. 이 표현은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해 겸손과 가련함을 내세우는 모습일까? 아니면, 당시에 랍비나 예언자들, 혹은 사제들이라는 선인들에게 하는 일상적이고도 습관적인 표현일까?

그러한 접근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입장을 루가 복음 5장 1절부터 11절까지에 나오는 '첫번째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내용을 이렇다. 어부들이 밤새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4절)하신 대로했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같이 고기를 끌어올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두 배에 가득히 채"(6-7절)우게 되자 "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8절) 이 장면을 루가는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집어 먹었"(9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 너무 많은 고기가 잡힌 사건 앞에, 즉 자신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이 자기들 앞에서 이루어져 펼쳐진 기적 앞에 인간은 겁을 집어먹고, 또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한다.

이렇게 주님 앞에 서고 주님을 만났을 때 초라한 자신과 주님 앞에 가소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비를 청하게 된다. 이 모습은 또한 루가 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성전에 들어왔지만 성전의 하느님 앞에 서지 못하고 자기의 업적 앞에 서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업적을 선포한다(루가 18,10-12절 참조).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가르쳐 "자기네만 옳은 줄 알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신다.(루가 18,9) 그래서 그는 하느님 앞에 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절)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13절)한다.

그럼 이제 우리의 문제가 정리되었다. 하느님 앞에 서는 사람,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보게 됨으로써 주 앞에 송구스러운 자세로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은 바로 이 자비를 청하고, 또 그 청을 들어 주는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회는 단순히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이거나 그 반성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인위적인 예절로서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참회는 인간이 주님 앞에 서고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인간이 구조적으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요, 본능이다. 아울러 이러한 참회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바로 참회자의 믿음이요, 그 믿음은 바로 주님께 대한 확실한 선체험(先體驗)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주님을 이미 체험하지 못했다면, 주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전해들음으로써 주님을 믿고 기다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미사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전번 은총사건의 체험이거나 또는 주님께서 선조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사건, 특별히 그리스도교 신자 일반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사건의 체험에서부터 미사는 시작한다. 이렇게 참회는 주님을 맞이하는 과정의 첫걸음이다.


응답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까?

·그럼 두려움 없이 다가서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청해보십시오.

·"주님, 저에게 오십시오. 그리고 저를 받아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여러분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모든 부끄러움을 주님 앞에 보여드리고 자비를 청하십시오. 주님의 자비를 받아 편안해 질 것입니다.

·자 지금 해 보십시오.

·순수한 믿음의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차례..

3.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대영광송

대영광송

†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

○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 주님 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

○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 주 하느님, 성부의 하느님

○ 하느님의 어린양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아멘.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매 미사마다 다 하는 것도 아니고 주일이나 가끔(?), 그 외엔 평일의 대축일에 한 번 하느라 잘 외우지도 못해 부담만 된다."

·"사순시기에는 또 안 바치고 넘어가니까 혼란스럽고, 실수하기 딱 알맞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느끼게 해주어서 참 기쁘다."

·"주님께 대한 대영광송을 소리 높여 바칠 때면 속이 후련해진다."

·"기나긴 사순절을 마치고 부활전야 미사 때 대영광송을 바칠 때면 온몸이 다 풀어지고 편안해진다."


나는

·어떤 때 영광을 받았다고 느낍니까?

·영광은 언제 어떻게 하면 드러나게 됩니까?

·무엇을 영광으로 여기고 삽니까?


말씀

천사들의 환호, 목자들의 기쁨(루가 2,8-20)

2 8그 근방 들에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9그런데 주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10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11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12너희는 한 갓난 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 보는 표이다." 하고 말하였다. 13이 때에 갑자기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그 천사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5천사들이 목자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간 뒤에 목자들은 서로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사실을 보자." 하면서 16곧 달려 가 보았더니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고 과연 그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다. 17아기를 본 목자들이 사람들에게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이야기하였더니 18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일을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19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0목자들은 자기들이 듣고 보고 한 것이 천사들에게 들은 바와 같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새김

이스라엘의 성지 베틀레헴에 있는 '목자들의 들판' 성당의 벽화를 보면 할아버지, 아버지, 어린 아들 이렇게 3대의 목동을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벽화는 천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장면과 천사의 말대로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틀레헴의 동굴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찾아 인사하는 장면. 그리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확인한 후 돌아오는 장면. 이렇게 3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처음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났을 때, 할아버지 목동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거룩함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 듣는다. 반면 그 아들은 눈이 부신 듯 한 손으로 빛만 가린채 무슨 일인가 하며 쳐다보고 있고, 어린 손자는 마치 천사에게 달려라도 나갈 듯이 한 발을 세우고 얼굴 가득히 환희로 반긴다. 한편 아기 예수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그린 마지막 그림에 나오는 각 사람들의 태도도 너무나 인상적이다. 젊은 아버지 목동은 자신이 지금 본 사실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 안에서 자신의 갈 길을 그냥 걸어가는 듯 양들에게 피리를 불며 몰고 갈 뿐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시메온을 연상케라도 하듯이, 현실에서 자신의 꿈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져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황홀함에 빠져 눈의 초점마저 잃고 하늘만 바라보고 걷는다. 한편 그 손자 목동은 아테네 군의 승전보를 알리려는 마라톤처럼, 어서 가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 손에 들고 춤을 추듯 맨 앞에 서서 활짝 핀 웃음으로 걷고 있다.

물론 그 그림은 이름 모를 한 예술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지만, 그 그림들에 나타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둘러 싼 목자들 각자의 얼굴 표정과 자세는 복음을 향한 우리 인간의 한 단면들을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무엇 때문에 목동들은 기뻐할 수 있었을까? 어린 아기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그것도 자신의 몸 하나 제대로 누일 곳조차 없이 동물들의 동굴 속 말 구유에 포대기 하나 걸치고 초라하게 누워 계신 예수님, 그분의 가난한 탄생.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서 빨리 부자가 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신들보다 더 가난하게 태어난 아기 예수는 오히려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도 우리와 같이 가난하게 오셨다. 아니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로 오셔서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우리편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공감과 희망을 불러 일으키셨다. 한편 물질적인 여유 속에서 그저 자기 한 식구 잘 먹고 편하게 사는 것 이외에 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에 대한 감각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치장과 소유라는 자기 생명의 담보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 수 있도록,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꾸미고 그릴 수 있는 하느님다운(?) 권위와 외적인 힘을 모두 포기하시고, 오히려 보호를 받아야 할 연약한 아기로, 그것도 말구유에 포대기 하나 걸치고 오셨다.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가난해 지신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가난을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6-7)라고 설명하였다. 또 이러한 가난의 성격을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라고 풀이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하게 되어 버린 이들에게 풍요와 여유로 오신 것이다.

또한 눈만 뜨면 다가오는 세상의 위협 속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버거운 생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참으로 인생의 여정에 지치고 지친 이들에게, 그저 주어진 삶을 마치는 것 외에 더 이상의 희망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버림받은 이들에게 그분은 위로와 희망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세상의 권력 싸움 속에서 그리고 세태의 변화 속에서, 결국 변절하고 쓰러지고 말 그런 한 세대의 풍운아요 영걸로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히브 5,7-10)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노래는 오늘 이 시대에도 울려 퍼지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요,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를 가졌기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문구가 오늘의 인간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오히려 물질적인 욕망의 무한한 늪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의 희생을 전제하고 요구하는, 너무나도 배타적인 이기주의의 먹이사슬 속에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동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한 오늘의 인간 군상들. 그러나 천사들의 말을 듣고 베틀레헴으로 달려 왔던 목동들에게서, 그리고 목동들의 말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서, 2천년 전 자신들의 부족들이 믿고 의지하며 살던 신심과 사상을 너머 이스라엘이라는 이교 백성들과 이교도에게서 구세주를 찾아 헤로데 왕과의 외교적인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처럼 참 진리를 향한 제한과 편견 없는 행렬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구세주가 탄생하시리라는 천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마리아와 그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주님의 명을 따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감으로써 주님의 평화 속에 있는 교회에서 하느님의 영광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서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영혼과 그 삶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서 하늘 높은 곳으로 울려 퍼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신부님, 구역반 미사를 저희 집에서 지내게 되어 얼마나 큰 영광인 줄 모르겠습니다."

영광을 자신의 출세나 입신양명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힘과 지배가 불가능한 저 너머의 진정으로 거룩한 분과 그분과의 연관관계 안에서 찾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은 오늘도 드러나고 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조종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그 영광을 빛내는 이들에게서. 이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평화를 사는 사람들이다. 즉 십자가의 길을 강요받았음에도 거부하지 못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요, 또 한편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여 걸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성탄 밤 천사와 함께 하늘의 군대가 부른 이 노래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가난해지도록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가난한 이들이 외치는 기쁨의 노래이다.


응답

·우리는 삶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어떤 기쁨과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영혼의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대와 목표는 무엇입니까?


차례..

4. 성서의 말씀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말씀 전례

말씀 전례(독서1, 응송, 독서2, 복음 전 노래, 복음)

"교회 안에서 성경이 낭독될 때에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시어 그 말씀 속에 현존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 낭독이 전례의 중요한 요소이므로 모든 신자들은 존경심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 성서 낭독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리고 이해될 수 있으나, 전례의 한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설교, 즉 산 사람의 입으로 이루어지는 성서 해석으로 그 효과는 더 커지는 것이다."(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개정 공포된 '미사 경본의 총지침', 9항 하느님 말씀의 낭독과 설명)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 끝나고 나가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그냥 잊어버려요."

·"마음이 딴 데 가 있어서 그런지 듣기는 하는데,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나가 버려서 항상 죄스러워요."

·"하나도 다 기억하기 힘든데 무슨 독서를 5개씩 하는 지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주일 날 미사 시간에 들려 오는 말씀이 정말 생명수 같아요."

·"미사 때 들려 오는 주님의 말씀과 강론으로 한 주일을 사는 것 같아요."

·"주일의 말씀이 꼭 그 한 주간에 일이 생길 때 나보고 그 말씀대로 하라고 어떻게 그렇게 꼭 맞춰서 미리 일러 주는지 참 신기해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전례 주년에 맞춰 나한테 일이 생기고, 말씀대로 살도록 이끄시는 것 같아요."


나는

·미사 때 듣는 말씀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미사의 말씀이 내 실생활에 연관된 적이 있습니까?

·말씀대로 살아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된 적이 있습니까?


말씀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루가4,16-22)

4 16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22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였다.


새김

복자 안트완 슈브리에 신부는 자신의 사제 서품 10주년을 맞은 성탄절날 구유 앞에 꿇어앉아 육화의 신비를 묵상하다가, "나는 지금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름대로 열심히 일해 왔지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는 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고 했다. 누구나 열심히 그리고 충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를 원하지만 무조건 열심히 일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분의 뜻대로 하여야만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이고, 열매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였다. 나는 그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대로 말하는 것뿐이다."(요한 12,49-50)라고 하셨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막연한 종교심을 가지고 그저 착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진 삶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뜻과 명령을 주님의 말씀인 복음에서 찾고, 따르기 위해 연구한다. 미사 중 말씀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이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해설하는 강론을 통해, 우리가 지금 살면서 겪고 있는 현재 문제를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전례 안에서 우리가 듣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요한 12,50)는 주님, 바로 그분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말씀을 주는 이 말씀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한다. 즉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기쁜 소식인 것이다. 또한 말씀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 알게 되고, 복음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해준다. 그리고 이 주님의 말씀인 복음은 힘을 가지고 우리를 활동에로 이끈다. 복음의 말씀은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심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에게 나아가도록 한다. 그리고 이 복음은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어느 한 개인의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공동체 모두에게 내려지는 축복으로 이어진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루가 1,48.55)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가 4,18衁遁) 복음은 참으로 주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에게 내려진 주님 사랑의 표현이다. 주님은 밤을 새워 일해야만 하는 목동들(루가 2,8)에게, 또 현실이라는 이 세상의 한계를 넘어 하늘로부터 구세주가 오시기를 별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동방박사들(마태 2,2)에게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1.14)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6)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이 가난한 이들에게 가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또한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루가 19,10)고 잘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복음은 오늘 우리 인생의 고비와 여정 중에서 길을 찾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주어지는 하늘나라'(마태 5,3 참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 때 하늘나라에서 울려 퍼지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주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는 이 말씀은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루가 4,18)준다. 마리아의 노래를 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가난하기 때문에 오는 모든 어려움에서 해방되리라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돈이나 물질 외에는 다른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부유한 이들에게는 물질과 물질적인 풍요에 자신을 의지하려는 허구적인 보호막과 안전망에서 해방되라고 외치고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루가 1,50-53) 이러한 해방의 선포는 물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알리는 산상설교에서 더욱더 명쾌하게 드러난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가 6,20-21.24-26) 우리는 실제로 이러한 해방이 예수님를 만난 예리고 지방의 세관장 자캐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루가 19,7-9)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야 믿는 토마에게 당신 상처를 보여 주시자 토마는 자신의 자연적 이성적인 사고로부터 해방되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하고 대답하게 된다.

또한 "눈먼 사람들은 보게"(루가 4,18)한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에로 이르는 길이 바로 당신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4,9鑁; 10,30)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길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당신께 나아가는 길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하신다. 또한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8)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주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길을 보도록 하신다.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할 것이며…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6,9.13; 10,27-28) 이렇게 생명에로 이르는 길을 당신 자신의 생애를 통해 제시하신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제자들과 달리,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거나 자기 삶의 만족을 느끼지 못한 부자 청년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자신의 부족을 보게 해준다. "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이) 재산이 많(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마르 10,21-22) 이와 연관하여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39.41)고 하심으로써 단순히 눈이 먼 사람을 고쳐 보이게 해주시는 것을 너머 (영적으로 눈을 떠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진리의 길을 보도록 하신다.

그리고 말씀은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루가 4,18) 누리도록 해준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짓누르는 위협과 제한 앞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실제로 예수님님은 당신 자신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아버지의 뜻을 확인함으로써 자유롭게 십자가를 선택하여 지시게 된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주님은 일찍이 베드로에게 말씀이신 주님을 믿음으로써 무서움과 그로 인한 혼란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4,30-31)

이렇게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그 "말씀을 이루심"(루가 4,21)으로써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루가 4,19)신 아버지의 명을 완성하신다. 주님 친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한 14,15)하셨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하셨다. 그러므로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현상인 주님과의 일치는, 말씀을 받아들여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알려주셨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자기 생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들("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38;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루가 1,43.45)에게 주님은 또한 그 말씀을 이루게 해주시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해 주심으로써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 그 말씀을 이룰 힘을 주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루가 5,10)

아울러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말씀을 이룰 힘을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얻게 된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35.57)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알고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일치하여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이끄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16.26)

이렇게 우리는 말씀의 전례를 통하여 성찬의 전례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되고 주님의 길을 찾아가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이 책으로 하느님의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2디모 3,15-17)


응답

시몬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8.69)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에 우리 인생을 걸 수 있습니까?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라고 요한 사도는 말했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고 싶으십니까?


차례..

5. 빵을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봉헌

빵의 봉헌

†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 하느님, 길이 찬미받으소서.

포도주의 봉헌

†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 하느님, 길이 찬미받으소서.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바쳐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봉헌이 하느님께 바치는 것인가요? 아니면, 교회에 바치는 것인가요? 교회의 운영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면, 교회 운영비 정도만 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봉헌 시간에는 하느님 대전에 나의 삶을 바친다고 생각하니 가장 뿌듯해요."

·"봉헌을 하기 위해 제단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땐, 마치 내가 주님 대전에 나아가는 것만 같아요."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봉헌합니까?


말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창세 22,1-18)

22 1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2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 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3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은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4길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그 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5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거라. 나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저리로 가서 예배드리고 오겠다." 하고 나서 6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씨와 칼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길을 떠나려고 하는데, 7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불렀다. "아버지!" "얘야! 내가 듣고 있다."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8"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 9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10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11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고들 한다. 15야훼의 천사가 또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16"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17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새김

'예언자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1열왕 17,1).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비가 안 오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우제를 지냈다. 특별히 농사를 잘 짓게 해준다던 '바알'신에게까지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삼년'(1열왕 18,1)이 흘렀다. 그래서 엘리야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훼가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18,21) 그리고 "엘리야는 일찌기 야훼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신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게서 나온 지파의 수대로 돌을 열두 개 모았다. 엘리야는 그 돌 열두 개로 야훼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는 곡식 두 가마 정도 들어 갈 만큼 큰 도랑을 팠다.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송아지를 잡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물을 네 동이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그는 그렇게 한 번 더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세 번을 붓자 물이 제단 주위로 넘쳐흘렀고 옆 도랑에 가득 괴었다."(18,31-35) 그리고 나서야 엘리야는 기도를 바쳤다. "야훼여,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분이 당신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18,37)

엘리야의 기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봉헌과 연관하여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엘리야가 기우제를 준비시키는 가운데, "물을 네 동이씩 세 번 제물 위에 부어 제단 주위로 넘쳐흘러 옆 도랑에 가득 괼" 정도로 물을 제물 위에 부으라는 내용이 나온다. 자, 삼 년이나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리고 남은 물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고이고이 신주 모시듯이 아끼고 아껴야 할 물을 제물 위에 부으라니! 그것도 엘리야가 제단을 쌓을 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여 열두 개의 돌을 모았다면, 네 동이씩 세 번 부은 물은 이스라엘에 남은 물 모두를 주님께 바치라는 요구였다.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했을까? 아까워서 그리고 불안해서 못 내놓는 이들에게 한 번 더, 한 번 더해서 결국 열두 지파의 것 모두를 바치라고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신약에서도 행실 나쁜 여인이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요한 12,3)을 때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았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요한 12,4-5) 만일 엘리야와 함께 하느님께 기우제를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한다면, 믿더라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워 물마저 다 말라 버릴 줄 알고 아까워했더라면, 엘리야의 지시대로 물을 주님 대전에 가져다 부을 수 있었을까?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요한 12,6 참조) 주님은 주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 주셨다. "마침내 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1열왕 18,45)

이러한 봉헌의 자세는 같은 열왕기 상권 17장에 나오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에게서도 드러난다. 가뭄 중에 엘리야가 과부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12절)이라고 답한다. 그런데도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 놓으라고 하자 "과부는 곧 집안에 들어 가 엘리야가 말한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엘리야와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15절)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통해 미사 전례에 드러난 봉헌의 전형적인 모습,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대로 그의 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0세에 얻은 자신의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아브라함(창세 21,5)의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아들 예수님의 믿음을 발견한다. 또한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등에 지고"(6절) 야훼이레로 올라가는 이사악의 모습에서 예수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 그리고 또 한편 인간에게는 인간이 애지중지하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치 않으셨던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상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 이것이 봉헌을 가능케하고 이루는 주님의 사랑이시다. 예수님님은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그리고 예수님님은 그냥 단순히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정말로 옳은 것이기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23,34) 하느님 아버지께 향한 아들 예수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 그리고 그 희생 제사는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 라는 희생 제사이며, 미사 봉헌의 의미이며 본질이다. 그리고 이 봉헌은 그냥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아니 그칠 수도 없는 부활의 영광을 향한 희생 제사이며 구원의 십자가이다.

주님을 따르는 이러한 봉헌이 이웃을 구원한다.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6-18)

이제 봉헌의 시간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세상의 문제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눈앞에 닥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또 우리가 섣불리 응답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에 스스로 알아서 살아 나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워 강변하며, 엄두도 나지 않고 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오늘도 부담 속에서 자신을 애써 합리화하며 지나치려는가? "이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요한 6,7)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들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먹도록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4,15)

아니면, 매일 나와 우리 한 가족 먹을 것조차 넉넉지 못하지만 "이것이라도 써 주십시오." 하며 바치겠는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 주님께 다시 드리오니 써주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우리의 봉헌은 하늘 나라를 이룬다. "여기 왠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 때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요한 6,9.11.13) 그러므로 "여러분도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1베드 2,5)


응답

·주님 대전에 무엇을 바치렵니까?

·오늘 내 일상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차례..

6. 감사기도



감사기도

감사송, 감사 기도

"사제에게 속하는 부분 중에서 첫째가는 부분은 감사기도로,, 이는 미사 봉헌 전체의 정점이다. 다음은 여러 기도문으로서, 본기도, 봉헌기도, 영성체 후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제가 집회를 사회하면서 모든 교우들과 참석자들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사회자의 기도' 라고 칭한다."(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개정 공포된 '미사 경본의 총지침', 10항 사제에게 속하는 부분)

"감사기도는 미사 성제의 중심이요 정점이다. 즉 감사와 축성의 기도이다. 사제는 교우들의 마음을 기도와 감사로 하느님께 향하도록 권유하고, 교우들과 함께 전 공동체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바친다. 이 기도의 뜻은 신자들의 집회가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찬양하며 제사를 봉헌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된다는 데에 있다. 감사기도는 감사, 환호, 변화기원, 성체제정 서술과 축성, 기념과 재현, 봉헌, 전구, 끝영광송. 감사기도는 본질적으로 모든 이가 존경과 정숙으로 경청하며 규정된 환호로써 참여해야 한다."(54-55항 감사기도)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건데.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는데."

·"하느님이 지금까지 나에게 해준 것은 없어요. 남들은 그나마 행복하게 살기나 하는데, 난 그렇지도 못하잖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나름대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하느님께서 도와주신 것이 뭡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정말 매일 매일 매 순간 하느님께 감사드려요."

·"살다 보면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요."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면, 주님께서 정말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느껴요."


나는

·나는 어떤 면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까?


말씀

대사제의 기도(요한 17,1-26)

17 1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 2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3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4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5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내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6"나는 아버지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뽑아 내게 맡겨 주신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아버지의 말씀을 잘 지키었습니다. 7지금 이 사람들은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8나는 나에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참으로 깨달았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9나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세상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신 이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10나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다 나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내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11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3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 16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17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20"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21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22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25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6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새김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 감사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사보다는 원망이 앞선다고도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이 잘 이루어지면 하느님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이 아무리 영적인 분이시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사람이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돈을 더 벌고 물질적으로 풍요하면 풍요할수록 좋은 것이고 하느님이 도와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좀더 깊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거꾸로 장사가 잘 되면 잘 될수록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바빠질 대로 바빠져 자신의 건강도 버리고, 집안이나 이웃 관계에 신경을 쓰지 못한채 그 장사에만 매달려야 하는데도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인간답게 살기는커녕 일과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인데도 그런 상황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자랑으로 삼기도 하고 당연하게 여기기도 한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고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인간의 사고와 행동 방식은 현실적이다 못해 물질적이다. 그리고 그 배경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며 그러기에 또한 이기적이다. 다만 장사가 잘 돼, 돈이 잘 벌려야 하느님이 도와주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이 계신 것이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현실적인 이해관계 안에서 종교를 선택하거나 바꾸기도 하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하느님을 찾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반대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하느님은 의미 없는 분이고 그런 하느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런 하느님은 결코 하느님이 아니며 오히려 죽어 마땅한 것이다. 바로 이 모습을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안에서 발견한다. 내가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면 하느님이고 주님이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나에게 손해라도 끼칠 양이면 그분은 하느님도 아니오, 아니 내 뜻을 망치기 때문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한에 있어서만 내 하느님!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느님이 인간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어느 한 민족이나 인종의 이해관계 속에 있는 하느님이라면, 그 하느님은 그들의 수호신이거나 그들이 만들어 낸 우상일 수는 있을 수 있어도 하느님은 아니다.

어떤 신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그 신을 믿는 이들의 삶이 바뀐다. 신관, 즉 하느님은 누구시며 자기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이웃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느님을 섬긴다면 그들은 이웃도 이해관계 안에서만 바라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같거나 자기들에게 적어도 피해를 안 끼치는 한에 있어서의 (나와 같은) 너는 존재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를 반대하거나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너는 있을 수도 없고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부족들 사이에 서로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종교와 문화, 그밖의 사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거부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본 것처럼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 와 '형제들과 맺는 일치' 는 깊은 함수관계에 있다. 즉,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람들의 행위는 형제들과 일치하고자 하는 현상으로 드러난다. 마치 십자가의 수직선과 수평선과도 같다. 또 한편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는 인간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출발할 때 애증의 번복과 혼란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라면 인간의 뜻대로 이루어질 텐데 인간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세상의 주인마저 죽이는 동료 인간들과 함께 살다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는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과 그런 세상의 주인에게 갖는 감정이 다분히 혼란스러울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사랑을 느끼고 감사를 드리기 참 어려울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의 뜻이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면 다행스럽겠지만….

사도 요한은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1요한 4,10)라고 했다. 우리 인간이 인간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으로 변화된다면, 우리는 쉽게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 가득히 느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명을 달라고 청한 적도 없는데 우리에게 하느님 당신 생명을 나누어 주셨고, 우리에게 부모와 가족을 주셨고, 또 이웃을 그리고 자연을….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아주 쉽게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나인 '너'와 '우리'가 맺는 불완전한 관계 때문에 오는 모든 죄악마저 없애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1요한 4,10)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모든 사람에게 주게 된"(요한 17,2) 것이다.

오늘날 각 민족과 국가들은 경제와 체제상의 국경선을 긋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적대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과 세상을 분열과 죄악으로 내 모는 일에 가세하면 악의 세력 속에 속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악이 파놓은 함정 속에 빠져 인류 공동체 전체의 안위와 관계없이 자신만 편하고 더 잘살기 위해서 스스로의 인간성과 이웃과의 관계를 파멸시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요한 17,14-15) 그래서 우리는 악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죽음으로, 실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만 같은 주님의 희생제사를 다시 우리의 몸으로 바친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9)

그런데 만일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본능을 더욱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하고 파멸시키려고 기승을 부리는 악의 유혹을 극복하고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훌훌 벗어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향해 하나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서로 비슷한 마음과, 같은 이해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끼리 더 좋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담합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리고 누구의 입장과 의견에 동조, 일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아버지 하느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신 우리의 주님, 또 그러셨기에 인간 어느 하나가 아니라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공번된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시는 주님과 일치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주님의 사도들에 의해 사도들로부터 사도들에게로 이어져 내려온 주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감사드리는 하느님과 예수님,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일치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 감사드리고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사랑으로, 같은 자세로 일치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고 그 영원한 생명을 이웃 형제들과 나눌 것이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1) 이러한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맺는 형제들과의 일치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또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일치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19-20)

그리고 이러한 일치를 통한 사랑을 가져다 주시고 또 그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고 또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3.16) 그래서 성령은 주님이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요한 17,17)도록 그리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요한 17,21)어 형제들에게 가도록 이끄신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고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악마의 주문(마태 4,1-4 참조)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 앞에 모인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기적을 베푸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기적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다.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 주셨다."(요한 6,11)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살리도록 생명의 권한을 주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행동을 맞춤으로써 아버지와 일치하여 그 권한을 사용하신다. 주님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 주시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 11,41-42)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려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면에서,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권한과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감사는 같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동전,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 됨.

이렇게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 곧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의 몸을 바치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이 성체성사이다. 하느님께 감사드림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이룬 것이 성체성사이다. 이런 면에서 감사기도와 성체성사는 하나이다. 우리는 미사의 감사기도를 통해 성체성사를 드리고,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모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아버지께서 주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한을 모두 주시면서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우리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형제들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5-26)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또 하나의 성체성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파견된 성체성사. 세상에 파견된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사랑이란 권한을 받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하느님의 성체성사인 우리 하느님의 자녀!


응답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어떻게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주님의 감사기도를 통해 성체성사를 영하며, 구체적으로 어느 영혼을 구하고자 하십니까?

차례..

7.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성변화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된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가요."

·"예수님의 몸을 모시면 뭐가 달라지나요? 무슨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나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미사를 드리다보면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고 깊어지는 것만 같아요."

·"미사 때 성체성사를 이룰 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 오를 때가 있어요."

·"정말 예수님 밖엔 청할 데가 없어요. 아마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몸까지도 몽땅 다 주시는 주님이라 그런가 봐요."


나는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십니까?


말씀

생명의 빵(요한 6,26-40.47-59.66-69)

6 26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8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9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0그들은 다시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그들을 먹이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32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33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35"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맡기시는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올 것이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38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39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40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 47정말 잘 들어 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48나는 생명의 빵이다. 49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50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2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53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54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이것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이다.

66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 67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8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69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새김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1고린 13,11) 내가 어릴 때는 부모님이 세발 자전거를 사주셔야만 좋은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사주시나 안 사주시나를 확인하여, 다른 아이의 부모님과 내 부모님 중 어느 쪽이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시나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부모님과의 관계는 변화되어 갔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또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를 확인하는 판단기준도 바뀌어 갔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학교에서 가는 소풍을 쫓아오시는 부모님이 부담스러웠고, 마침내 부모님은 소풍에 오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어릴 때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사주고, 나와 놀아주고,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주지는 않지만 지금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그분들이 내게 해주셨던 것을 지금은 내가 거꾸로 해드리고 있지만, 그분들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분들은 여전히 나의 부모님이시다. 한때 나의 보호자요 담보자이셨던 분이 나의 동업자였고 지금은 나의 부양가족이 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모님께 대한 나의 입장과 관계도 바뀌었다. 그분들보다 내가 변해온 것이다. 특별히 그 부모님이 하느님 아버지라고 생각할 때 그분은 변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철이 들어(?) 그분을 하느님답게 알아모시게 된 것이다.

한 젊은 여성이 자기가 예비자 교리반을 찾아 온 동기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와 보니 어머니가 막 울고 계셨어요. 그 때 제 생각에는 무엇이 과연 우리 어머니를 저렇게 한스럽게 울도록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비록 그때 제가 신자는 아니었지만 하느님께 빌었습니다. '제발 우리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바쳤는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경우와는 달리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를 울게 했던 전세금은 다시 찾을 수 있었고 어머니는 눈물을 거두실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하느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지금 재수생입니다. 대학을 떨어지고 나서, 다시 지난 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던 하느님께 이번에는 제가 대학을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달 동안 기도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느님은 진정 누구이신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기 위해 계신 분인가? 내가 하느님을 뭘로 만들고 있는가?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셔야 하는 하느님 말고 진짜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도대체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왜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하느님이 내게 무엇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여 믿고 있는가? 하느님께 향한 나의 기대치는 무엇인가?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혹시 부자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가득히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나 병자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은 죄를 지었거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현세적 상관관계에 하느님이 깊이 개입하고 계신가? 그렇지는 않다. 그런 식으로 개입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잘했을 때는 복을 주시고,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벌을 주시는 그렇게 얄팍한 분이 아니시다. 다른 차원으로 말해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 우리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서 움직이시고 영향을 받으시는 그런 분은 아니시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현세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신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현세적인 모든 일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현세적인 일 속에서 우리의 입장에 따라 우리 일을 좌우하시려고 하시는 분은 아니시지만, 우리가 현세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을 겪을 때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며 또 아파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늘나라를 기대하고 계시다. 정말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의 자유를 손상하지 않으시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도록 은총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길흉화복을 가져다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겁을 먹고 눈치를 보고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하는 감시자나 절대자가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올바른 길을 걷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구원자이시다. 심지어는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함으로써 생겨난 악의 결과를 우리에게 되묻지 않고, 당신이 대신 그 책임을 짊어짐으로써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를 죄값으로 대신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우리를 구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그러므로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처럼 이것저것을 달라고 조르고, 또 우리가 달라는 것을 얻으면 하느님이시고 얻지 못하면 하느님이고 뭐고 없다는 식의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을 상대로 뻗대는 어리석은 고집쟁이 철부지처럼 굴지 말고, 먼저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환경보다도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하고도 적절한 것 곧,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도록 힘써야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요한 6,31-33)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느님께서는 주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6,27) 이렇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들을 통해 오시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29)

또한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한 6,33)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은 우리가 먹고 살 생명의 빵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세상에 구세주로 파견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요한 6,38-40)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4-57)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모여 와서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자 신자생활을 하는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8-69)

그러나 한편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주님을 믿어 주님 앞에 와 서있으면서도, 주님을 앞에 두고서도, 정작 우리가 찾아서 얻어야 할 주님을 두고, 다른 것에서 다른 방식으로, 내 만족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찾기도 하고, 심지어는 주님의 뜻에 부합하지도 않으며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마저 주님께 청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내가 청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신데도 말이다. '세상을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 살 수가 있어요. 이것이 꼭 있어야 돼요.' 하며 헛된 것을 얻으려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28) 그리고 현세적인 유혹에 눈이 멀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루가 9,62) 그러나 주님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것에서 행복을 얻으려다 실패한 사람들, 그래서 자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을 지금도 거듭 부르고 계신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 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 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이사 55,1-3) 그리고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하시며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또한 주님을 알면서도 아직도 세상 걱정과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주님께 온전히 다가서지 못하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9)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루가 10,41-42) 그 필요한 것은 주님 바로 그분이시다. 바로 그분이 지금 우리에게 우리 생명의 빵이신 당신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신 당신 자신을 주시고자 하신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응답

·주님의 몸을 받아 영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으십니까?

·주님의 몸을 받아 영하며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을 실천할 힘을 얻으십니까?


차례..

8.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성변화 2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하고 싸워서 성당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가슴 속에 미움이 가득해서 성체를 영할 수가 없었어요."

·"상대가 잘못한 일로 내가 마음 상할 필요가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감정이 스며들어서 주체할 수가 없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빨리 고해성사를 보고, 용서의 은총을 달라고 청하면 용서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 같아요."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러 오신 분이라고 생각할 땐 더욱 힘이 솟고 죄책감에 빠져 좌절하기보다는 감사의 정이 들어요."


나는

·사람이 밉고 괴로울 때 어떻게 합니까?


말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루가 23,26-49)

23 33해골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형에 처하여 좌우편에 한 사람씩 세워 놓았다. 34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35사람들이 곁에 서서 쳐다보고 있는 동안 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 하며 조롱하였다. 36군인들도 또한 예수를 희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권하고 37"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 하며 빈정거렸다. 38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적혀 있었다.

39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0그러나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42"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43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44낮 열 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을 덮어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태양마저 빛을 잃었던 것이다. 그 때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두 폭으로 갈라졌다. 46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47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사람이야말로 죄없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말하였다. 48구경을 하러 나왔던 군중도 이 모든 광경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49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모두 멀리 서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김

우리 나라에 '목마른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저자 도미니크 라피르의 원작 '기쁨의 도시'(la cite de la joie)를 영화화한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를 보면, 한 시골에서 올라온 농부가 도시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갖은 수고를 다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인도의 빈민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기 딸을 남부럽지 않게 시집보내기 위해 결국 자기 목숨을 바치게 된다. 딸의 정조를 위해 권력가의 아들과 싸우다 칼에 심한 상처를 입었어도 딸의 결혼 지참금을 채워 주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고서는 딸의 결혼식 피로연 도중에 죽는다. 딸에게 부모로서 할 바를 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죽음도 모르고 일하다가 지참금을 채워 주고 죽음으로써 결국 자기 딸에게 자기를 바쳤던 주인공 아버지의 사랑이 장엄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며 젊은이의 결합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지참금 제도가 결국 인간을 괴롭히는 사회의 굴레로 등장하게 된 우리 인간 세상의 어둠을 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같은 사건 안에서 자식을 위해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자신의 몸을 바치는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또 그의 말도. "자식의 지참금을 마련하는 것은 아버지의 의무이기 이전에 권리입니다!" 사랑은 용서해 주어야만 하는 의무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에게 주어지고 그래서 또 한편 하느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권리다. 그러므로 그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 앞에 죄없는 인간으로 서기 위해 우리를 위해 몸바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닮았다. 마치 딸의 결혼 지참금이라는 멍에를 메고 죽어간 영화의 주인공처럼, 참으로 주님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제도적 사회적인 굴레의 희생자가 되어 주셨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죄와 악의 멍에와 굴레에서 해방시켜 다시 하느님이 천지창조 때 우리에게 새겨 주신 아버지의 모상을 가지고 살도록 해주셨다.

철없는 자식을 달래기 위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처럼, 주님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다시 말해서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면서 무절제하고 대책없이 저지르는 인간의 죄악에서 인간을 살리기 위해 희생해 주셨다.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주님을 죽이는 이들의 행동은 참으로 철없어 보인다. 예수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하기는커녕, 그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지'(루가 23,34)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보고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어디 자기도 살려 보라지!' 하며 조롱"(35절)하고, "군인들도 또한 예수를 희롱하면서 가까이 가서 신 포도주를 권하고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 하며 빈정거렸다."(36-37절)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중 하나도 예수를 모욕하면서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39절) 이들은 자신들이 죽이는 이가 주님이라고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비인륜적인 모습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마저 없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 주님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의 잘못을 비호하듯이 역성을 든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34절) 그리고 주님은 자기 죽음의 의미를 알고 계시고, 자기 죽음으로 인간을 다시 구하실 수 있는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46절; 시편 31,5참조)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올리브산 게쎄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라고 기도하셨던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 사람은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적혀 있었"(38절)던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를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죽여 버렸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이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런 의미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7-18) 그리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되돌이켜 보면, 우리는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아주 명확히 볼 수 있다.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그러나 한편 우리는 같은 루가 복음 23장에서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발견하고 주님께 청한 사람들도 본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모욕하는 것을 본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40-42)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이방인인 로마인들의) 백인대장은 '이 사람이야말로 죄없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말하였다."(47) 또한 "구경을 하러 나왔던 군중도 이 모든 광경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48) "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따라 다니던 여자들도 모두 멀리 서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49) 그리고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찬동을 한 일이 없었고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살다가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내기 위해 빌라도에게 청했던 의회 의원 중에 요셉이라는 사람"(50-53)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43절)라고 응답해 주셨다. 이렇게 주님의 응답을 받은 다른 죄수의 자세 안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선 인간의 기본자세와 처지가 어떠해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처지를 택하여 오셔서 우리와 같은 취급을 당하신 주님, 우리의 잘못으로 욕먹고 비난받는 우리 주님의 사랑 앞에 선 인간의 청원. 차마 청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죄스러운.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주님 앞에 선 우리의 청원. 미사의 기도문 안에서도 이러한 청원을 본다.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평화의 기도 중에서)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 평신도 사도로 선발되었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사랑은커녕 사랑의 전제라 할 수 있는 용서가 왜 그리 어려운지? 용서하자니 억울하고 내 감정이 허락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용서하지 않고 잡고 있을 때면 내 가슴 속에 숨어 있다가, 내가 한가할 때나 기도할 때마다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잡고 있는 사람과 사건, 상황들. 내가 용서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잡혀 있는 셈이다. 나의 미움이라는 감정 속에 사로잡혀, 주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내 모습 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괴롭기만 하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로마 12,14.17-21) 사도는 우리에게 그저 우리의 어머니들이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대우와 아내와 어머니로서 당해야 하는 시집살이와 시가댁과의 관계 안에서 그러해 오셨고 또 그대로 일러 주셨던 것처럼 "남이 뭐라든지, 어떻게 하든 내 할 바나 다하라."고 가르친다. 원수 갚는 일은 주님의 몫이니까 말이다.

베드로 사도 역시 불공평한 세상을 탓하며 억울해하고 불평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2베드 3,8.9.15)

한편 우리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구약성서 기자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와 관용을 전제로 제시한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 자기도 죄짓는 사람이 남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누가 그를 용서해 주겠는가? 네 종말을 생각하고 미움을 버려라. 한번은 죽어 썩어질 것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생각하고 네 이웃에게 원한을 품지 말아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생각하고 남의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 28,2-7) 또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마태 6,12.14-15)

실천적인 면에서 사제가 성작을 들고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하면서 성혈을 축성할 때, 내가 용서할 수 없고 내 마음 속에 얹힌 것처럼 맺혀있는 가련하고 한 서린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도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영성체를 영하십시오.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다시 회복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회복된 사랑으로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빌면서. 동시에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용서해 주고 마지막으로 용서의 대명사인 자비로우신 주님 앞에서 나의 용서를 청하십시오.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받아 주소서."


응답

·주님을 섬기고 모시기 위해,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내 죄의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기 위해 용서해야 할 사람이나 일이 있습니까?


차례..

9.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성변화 3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성체한다고 뭐 달라집니까? 깍쟁이 그대로인데…."

·"신자를 데려오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 말고 할 일이 또 뭐 있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아무런 일도 안하고 있는 제가 너무 죄스러워요."

·"착한 일을 할 때나 저를 희생할 때마다 주님이 더욱더 저와 함께 있다고 느껴져요."

·"죽어야 한다는 것, '십자가를 져야 일이 된다.' 는 말이 특별히 어려운 고비 때마다 새삼 더 깊이 다가옵니다."


나는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어, 계속 영성체를 하면서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말씀

주님의 성찬(1고린 11,23-26)

11 23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24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5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6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


새김

사도 바오로는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1고린 11,24)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신자들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그런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예를 행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주교님께서 새로 사제로 서품되는 후보자들에게 교회 공동체에 나아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을,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불림받은 우리 평신도들에게 맞추어 다음과 같이 재편집해 볼 수 있다.

"여러분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가르치는 직무를 책임지고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꺼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이에게 전하십시오. 하느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며 읽는 것을 믿고, 믿는 것을 가르치며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의 교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양식이 되고, 여러분의 성실한 생활은 여러분과 함께 세상에 사는 인류의 동료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말과 모범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임무도 수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결정하고 행동함으로써 교회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제사와 결합되어 완성될 것입니다. 사제가 성전의 제단에서 미사를 거행하듯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제단인 가정과 이웃, 사회, 특별히 직장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사제와 함께 피흐름 없이 봉헌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평신도 사도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즉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이루어야 하는 일을 명확히 깨닫고 그 내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거행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성세성사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 받고, 환자 방문을 통해 병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십시오. 또한 여러 가지 거룩한 예식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매일 여러 차례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사제와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과 함께 봉헌하며 여러분 자신이 사람을 위하여 사람 중에서 선발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임명되어 세상에 파견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참된 사랑과 변함없는 기쁨으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이익을 찾지 말고 예수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머리이시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십시오. 교회의 주교와 주교를 대리하여 여러분에게 파견된 사제와 결합하여, 그 지도에 따라 한 가족으로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회 내외에서 봉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고, 길 잃은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모범으로 삼기 바랍니다."(사제서품예식 중에 사제서품자들에게 하는 주교님의 훈시 재편집)

이상의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어떤 의미로 종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여러분이 기꺼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이에게 전하십시오. 하느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며 읽는 것을 믿고, 믿는 것을 가르치며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의 교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양식이 되고, 여러분의 성실한 생활은 여러분과 함께 세상에 사는 인류의 동료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말과 모범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라는 것이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듣고, 그 말씀을 말과 모범으로 실천해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가르침의 모범적인 모습을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동생활'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사도 2,43-47)

또한 사도 야고보는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3-17) 그리스도교 신앙을 단순히 신비체험이나 사회 발전에 따르는 병폐를 이완시키기 위한 심리적인 안정제 정도로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

또한 단순히 그리스도교 교회 내의 종교적인 모임과 회합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서 모임을 통해 성서연구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보다 자신이 연구한 성서의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실행하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지 아는 것으로 그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모임과 회합의 방향을 과감히 세상 안으로, 그것도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고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놓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고 그 연구한 방법을 실천하는 쪽으로 변화되어야 하겠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평생 연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있겠는가? 아니 어느 정도 알 때가 언제 그리고 그 어느 정도란 말이 실제로 어느 정도 하면 되었다고 스스로 만족하여 활동할 수 있겠는가? "믿기 위해 알고, 알기 위해 믿는다."는 성인의 말을 오늘 이 시대에 이렇게 되풀어서 말할 수 있다. '알기 위해서 활동하고, 활동하기 위해 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의 모습은 이웃을 향한, 그것도 버림받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기억하여 우리가 행할 예이다.


응답

·주님을 기억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렵니까?


차례..

10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성변화 후 환호

† 신앙의 신비여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지 이천년이 되었는데 변한 게 뭐가 있나요?"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

·"신자랍시고 일요일날 교회나 나가면 다인지, 도대체 뭐 그런 사람들이 다 있어?"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질 때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껴요."

·"누군가 십자가를 짊어지긴 해야 하는데,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주님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고요."

·"말로 백 마디 하는 것보다 한 번 십자가를 짊어져야 이루어져요. 할 줄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안하니까 안 되는 거지요."


나는

·어떤 식으로 주님을 전하고 있습니까?

·천주교 신자로서 무엇을 자랑삼아 전하고 있습니까?


말씀

예수의 마지막 분부(루가 24,36-49)

24 36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37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38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40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는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42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44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45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46"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47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49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새김

"성당에 가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우리는 이런 류의 질문들은 믿지 않는 친지들과 심지어는 부모와 배우자에게서 들어 왔다. 그렇다. 성당에 다닌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생기기는커녕 내야 한다. 가끔은 "돈 없으면 성당에도 못 다닌다."는 이야기마저 듣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손해인데도 왜 사람들은 성당에 나오고 교회를 이루려고 애쓰는가? 그것도 죽자 사자 성당 일에 매달리는 사람마저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실제로 교회의 역사 안에서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고, 게다가 우리는 103위 순교 성인들을 자랑으로 삼는 후예들이 아닌가? 현세적인 이득도 없는데, 무엇이 우리를, 어떤 매력이 우리를 이렇게 교회로 모이게 하는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돈이 된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할 것 같은 사회 안에서 그리고 과학과 의학으로 무엇이든 다 해결할 것 같은 이 사회에서 이런 일이 생겨난다는 것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우리는 이 신비를 요한 복음 6장에 나오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본다.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 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난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다 모아 들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요한 6,11-13) 곧 한 소년이 내어놓은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주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이다. 내 것을 내어놓으면 나는 죽을 텐데 죽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먹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신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럼 이 기적을 돈 내고 돈 먹기 또는 돈 나눠 먹기(?)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복음서 저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루가 9,23-24)임을 알리고자 함이다. 인간이 여기서 '나' 라고 이야기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지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왔던 방법과 처세적인 습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내 놓은 본인도 먹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다 먹게 된다는 이 기적을 통해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 54-57)

그리고 그분이 빵을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몸을 우리 영생의 양식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당신이 우리 생명과 존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안위를 걱정하신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 동안 이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 되었구나.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르니 그들을 굶겨 보내서야 되겠느냐?"(마태 15,32)

그렇다면 우리를 그렇게 따르지 않으면 미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우리의 인생을 걸머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가 먹고 마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먹고 마시며 우리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이라는 분은 누구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그분은 우리 현세에서 실패한 분이다. 그분은 인간사회에서 죄인들과 함께, 죄인으로서도 아주 최극형에 해당하는 십자가형으로 죽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주인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우리 생명의 길이라고 여기며 따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이 죽음의 세력을 쳐부수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를 찾고 있으나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마태 28,5-6)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그렇다면 십자가의 의미,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열쇠요 전제조건이다. 부활하고자 한다면, 아니 영원히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면 죽어야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그리고 죽는 것이 신자의 근본이요, 기본이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럼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우리는 바로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이해관계로부터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이해관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고 체험하여 얻은 내 존재와 삶의 사고방식과 이해관계를 버리고, 주님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밟고 일어서는 방법에서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방법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가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요 가르침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또 그렇기에 예수님님은 당신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십자가를 짊어지셨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 마태 26,42; 마르 14,36) 사도 바오로는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이유가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뜻보다 우선하고 더 낫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2-25)

지금까지 보아 온 바와 같이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를 우리의 주님으로 선포하고자 하고,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본모습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부활은 열매이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과정이요 전제조건이다. 부활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의 하느님 나라이지만, 십자가는 오늘 여기서 십자가를 짊어진 주님의 자녀들에게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하늘나라의 문이요 그 열쇠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그것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희생해야 할 순간에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루가 24,38)을 것이 아니라 기꺼이 짊어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우리의 자랑이요 권리로 여길 수 있어야겠다.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1고린 2,31)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바로 주님의 은총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알 것이며, 우리를 통해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도 회개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루가 24,46-48) 그때 비로소 십자가가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짊어지는, 주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요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5)


응답

·지금 내가 짊어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 십자가를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게 주셨다고 받아들여 짊어지실 수 있습니까?


차례..

1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의 기도 1

†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입으로 기도를 중얼중얼 외우기만 하면 뭐해요, 우리가 바라는 기도를 우리 입으로 바치는 것이 더 낫지 않나요?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해야 되지 않나요?"

·"아버지의 나라는 걱정도 근심도 아쉬움도 없는 지상의 천국이 아닌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주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당신을 주시고자 하셨는지 가슴 속 깊이 저며 와요."

·"주의 기도를 바치면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의 기도를 바칠 때면, 내가 주님께 무엇을 청해야 하고, 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말씀

주의 기도(마태 6,9-13)

6 9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새김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많은 것을 청하면서 산다. 실제로 하느님의 은총만을 바라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시편 127,1) 우리가 하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가 숨이나 쉴 수 있겠는가? "사람을 먼지로 돌아 가게 하시며 '사람아, 돌아가라.' 하시오니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시편 90,3-5)

주님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항상 부족하고 모자란다고 불평하면서 욕심꾸러기처럼 더 달라고, 더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며 조르고 있다. 한편 정반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한 쪽으로 감춰 두거나, 감사히 쓸 줄을 몰라 낭비해 버리기도 한다. 남에게 주자니 아깝고 내가 쓰자니 만족할 수 없어 한 쪽에 내버려둬 나도 남도 못 쓰게 돼 결국 썩거나 폐기처분해 버림으로써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지구상의 다른 한쪽의 사람들에게는 그것 때문에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데도 말이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 적어서 고생이 아니라, 어느 소수의 사람들이 모두가 다 나누어 먹고 살아야 할 에너지를 독차지하고 썩히고 있어 고생이다. 어리석고 욕심 많은 고집불통의 인간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가 계속 하느님께 이것저것 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한 번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벌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마태 6,8)는 하느님께서는 거꾸로 우리가 무엇을 청하기를 원하고 계신지도 물어 보자.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가 11,1) 이렇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님께 묻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사는 길이 우리가 걸어가야 하고,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니겠는가? 주님이 우리가 청하도록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의 기도이다. 그 기도는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고 따르셨던 주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주님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곧 하느님의 나라다. 주님은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 살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나라에서 진짜 사는 것같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마련해주신 나라. 그러므로 이 나라는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다리고, 기대하고, 고대하는 그 나라여야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가? 주님께서 온몸을 다 바쳐 뛰셨고, 마침내는 죽으시면서 까지 그토록 간절하게 이루시고자 하셨으며, 이 나라를 마저 완성하도록 우리를 뽑으셔서 사명을 주시기까지 하셨는데도 정작 우리는 이 나라를 원하고 있는가? 여기 주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주님께 청해야 할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이루는 길을 알아보기로 하자.

주님이 살아 계시던 세상은 로마의 식민지 세상이었고, 사람들은 정치적인 힘을 가진 메시아가 오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무리 참된 인간의 길과 가치를 이야기하고 기적을 베풀어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죽이려는 움직임마저 일기 시작했다. 그 참담한 세상에서,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신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저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시오!"(루가 22,42; 23,34 참조)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나라인지를 잘 알아듣고, 그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에서 누리는 영생을 차지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다. 그 나라는 우리가 현세적인 욕망과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함"(마태 6,33)으로써 들어가기 시작하는 나라이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고 나면 흔히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지…." 또는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며 분을 달랜다. 이러한 말이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여 자신의 위안이나 처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말에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과 절규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 6,9) 하느님이 땅에 계신다면 욕심 많고 힘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씀은 하느님은 사람이 조종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이다.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잠언 30,4)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이들과 약한 자들,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9.10) "그의 영광은 하늘 위에서 빛난다…. 높은 데에 자리를 잡으시고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이시거늘. 약한 자를 티끌에서 끌어올리시고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끌어내시어."(시편 113,4-7) 그분은 하늘에서 의인의 죽음을 기억하시고 원수 갚아 주실 것이다. "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2역대 24,22-사제 여호야다의 아들 즈가리야의 유언) 또한 하늘에서 땅의 인간들에게 희망을 주신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이사 63,19)

그러나 한편 이렇게 거룩하신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하늘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그분은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힘을 주고 계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탈출할 때 이러한 주님의 이끄심과 보호하심을 직접 체험했다. "야훼께서는 그들이 주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어 주셨다. 이렇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출애 14,21-22 참조) 그리고 그들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다른 어느 민족도 감히 대항하거나 건드릴 수조차 없는, 최고의 거룩하고 완전하신 분, 그 하느님을 체험해 왔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실 뿐 아니라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그러자 백성들은 일제히 '야훼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출애 19,4-6.8)

이러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느님, 바로 그분이 신약에 와서 예수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1.23)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루가 1,31-32) 이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를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당신의 아들로 만들어 주셨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 4,6)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로 주셨다. 이를 가리켜 예수의 성 데레사는 "예수님은 가장 낮은 데까지 스스로를 낮추어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기에 이르시고, 천하고 불쌍한 것들의 동기간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식으로 삼게 하시려고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오직 아버지의 이름으로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을 뿐 아니라 상속자로, 양자로 입양 시켜주셨으며 적자로 입적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들 마음에 불을 질러 주시고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과 결합하시게 함으로써 좋으신 아버지 곁에서 즐거워하고, 그분의 품안에 안길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예수의 성 데레사, 최민순 옮김, 완덕의 길, 27장, 200∼204쪽, 성 바오로 출판사, 1992)라고 말했다.

하느님은 이토록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해 주시려고 하는데 반하여 세상은 어떤가?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총에 감사드리는가? 세상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이웃과 자연에게 봉사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힘을 우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익만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용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이런 가운데서 사람이 자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모실 줄 알고, 그 하느님이 만드신 또 다른 '나'인 '너'를 자기 생존의 도구요 희생물로 삼으려는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머리와 자기 손을 믿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섬겨야 한다.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하려면,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받들 때 가능하다. 이러한 신앙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유일한 희망의 절규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마태 6,9)라는 청원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간들끼리의 사랑의 실천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청원과 연관하여 예수의 성 데레사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힘이 너무 모자람을 보시고, 이 세상에서부터 당신의 나라를 마련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영원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기리고 높이고 거룩히 빛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좋으신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빌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은혜를 내리시는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완덕의 길, 30장, 218∼222쪽)라고 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란 우리의 기도문은 '거룩히 빛나야 할 아버지의 이름'이란 면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곧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 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 3,7-8.14.15) 그러므로 인간 사회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 모두에게 명확하게 드러나고, 심어지기를 기대하는 희망이며 요청이다. 우리는 이 표현을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란 청원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느 곳에 있는 어떤 나라인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6,10) 아버지의 나라는 장소나 영역이 아니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자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을 믿지 말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광야에 나타났다.' 해도 나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 해도 믿지 말아라."(마태 24,23.26)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함께하심과 드러나심 그리고 지배하심을 뜻한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

그러므로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임으로써 들어가는 나라"(마르 10,15)로서, "하늘 나라를 차지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처럼 "밭에 있는 보물을 얻기 위해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마태 13,44)듯이 "새로 나"(요한 3,3)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잘 깨달아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마태 13,21)이 들어가는 나라이다. 그래서 혹시 하늘 나라를 펼치기 위하여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마태 5,10)이 될지언정, 비록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는 겨자씨"(마르 4,31-32) 같이 작은 우리의 믿음을 세상이란 땅에 심어 놓으면 마치 "밀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 마침내 밀가루의 온 덩이를 부풀어 올리는 누룩"(루가 13,21)처럼 하늘 나라는 퍼져나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4,17)의 나라를 이룰 것이다.

그러기에 "음행하거나 더러운 짓을 하거나 탐욕을 부리는 자, 사악한 자,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에페 5,5; 1고린 6,9.10)는 들어 갈 수 없으며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마태 7,21)해야 하며,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마태 5,20)기 위해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 지키도록 가르치"(마태 5,19)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살과 피처럼 썩어 없어질 것으로는 이어 받을 수 없"(1고린 15,50)으며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1고린 4,20)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도 무서워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루가 12,32)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모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 내어 구원하셔서 당신의 하늘 나라로 인도하여 주"(2디모 4,18)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루가 9,62)처럼 현세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고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둘"(루가 9,60)정도로 급박하고 우선적으로 이 나라를 선포하면,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루가 9,27)가 비록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어도 "이미 와 있는 것"(루가 11,20)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청원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지배하소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지배하려는 이들을 걷어 내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당신께서 직접 다스려 주셔서 억울하고 악에 시달리는 일이 없게 해주소서. 이 세상에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소서!" 하는 염원을 읽을 수 있다.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올바르게 살라는 요청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나라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히브 11,3)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25)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본 바와 같이 '우리에게 하느님이 함께하심과 드러나심 그리고 지배하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와 환경 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해 주시리라. 다시 말하면 아버지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와 생명을 나누시기 위해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의 모상을 심어주시고,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떠난 후에도 당신과 하나되기 위해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계시는 그 아버지의 애정이 우리와 세상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4,17)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하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우리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고 스며드는 미움과 복수 그리고 절망의 유혹을 극복하고,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겠다는 다짐이며, 더 나아가 사람은 자신의 악한 뜻에서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의 힘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악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먼저 "스승님은 우리가 당신 아버님께 무엇을 드리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아버지께 바치시며, 우리한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시며 "주의 뜻이 무엇인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마음 속으로부터 비는 이들을 하느님은 어떻게 하시는지 알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그분이 어떠한 결심을 가지시고 당신의 의지를 몽땅 바치면서 기도하시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시련과 고통과 모욕과 박해를 거쳐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이 그분 안에 얼마나 완전히 채워졌는가를 깊이 우러러보십시오."(완덕의 길, 32장, 233∼237쪽)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데레사 성녀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까지도 바쳐주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님은 당신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당신을 위하여 많이 참을 수 있음을 아시고, 적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적게 참는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기에 나는 큰 십자가, 혹은 작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은 사랑의 무게에 달렸다고 봅니다. 사랑을 가졌으면 다만 하느님께 정중한 말씨를 드림으로써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니, 용기를 가지고 당신의 뜻하신 바를 끝까지 해내십시오. 하느님께 온전히 우리를 바치는 것, 당신의 뜻에 우리의 뜻을 두는 것, 그리고 피조물을 이탈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님, 당신의 뜻이 내 안에 채워지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그대로 다 이루어지소서.

고생을 시키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시면, 고생과 힘을 내게 주소서.

박해와 병고와 망신과 가난을 주시는 것이 당신의 뜻이시면, 여기 대령했나이다.

얼굴을 돌리지 않으리이다. 내 아버지시여, 어찌 감히 얼굴을 돌리겠습니까?

이미 당신 아드님이 전 인류의 이름으로 '내 뜻'을 당신께 온전히 바쳤사온데,

내 탓으로 그 말씀이 헛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내게 은혜를 내리시어 당신의 나라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드님이 나를 위하여 비신 대로 당신 뜻을 채우게 하여 주소서.

나를 당신 것처럼 당신 뜻대로 다루어 주소서.'

당신은 아버지의 뜻을 얻는 길을 아시기 때문에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아버지를 섬길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32장, 237∼241쪽)


응답

·오늘 나에게 내려 주시는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


차례..

12. 우리를 구하소서



주의 기도 2

†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기도를 바칠 때, 특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는 부분을 바칠 때면 유난히 배고파요."

·"아버지께서 음식을 다 주신다는 데 굶어죽는 사람은 왜 생기나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주의 기도를 바칠 때면 회개의 눈물이 흘러나오고 용서할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아마 주의 기도가 주님께서 바친 것이라 그런지 크게 소리내어 바치면 아버지께서 굽어보시고 들어주시는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요."

·"어린이 미사 때 어린이들이 주의 기도를 노래로 바치면서 끝부분에서 큰 소리로 '아-아-멘' 하고 소리를 지를 때, 정말 주님이 우리들 모두를 반기고 맞이해주시는 것 같아요."


나는

·어떤 때 우리가 원하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악의 상태에 빠져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내가 고치려고 해도 자꾸만 저지르는 습관적인 잘못이나 죄가 있다면 어던 것입니까?

·악이 나를 지배하면, 내가 지금 화해해야 하는데도 화해하고 싶지 않거나, 고쳐야 하는데도 고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내게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까? 언제, 무슨 일입니까?


말씀

주의 기도(마태 6,9-13)

6 9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새김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와 동시에 주님은 주의 기도 후반부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과 조건에 대해서도 알려 주신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마태 6,11) 우리는 기도만 하고 살 수 없다. 우스운 소리 같지만 실제로 먹어야 산다. 먹지 않으면 기도할 육체도 없어지니까 말이다. 주님은 우리가 육체에 갇혀 있어,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신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우리 인간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2고린 5,2) 그러나 또 동시에 우리는 육체를 통해 복음을 실현함으로써 우리를 완성시킨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가 복음의 일을 하기 위해 살 수 있도록 양식을 달라고 청하신다.

그리고 한편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비단 씹어 먹는 육신의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의 양식을 포함한다. 주님 친히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는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여 유혹하는 자를 물리치신 바 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시몬 베드로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요한 6,68)이란 양식이다. 그리고 그 양식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 자신이기도 하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먹음으로써 십자가상 희생제사를 바치셨다. 주님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다.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양식이 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요한 4,32.34) 참으로 이 양식은 현세의 어느 누구나 어떤 사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 본성의 근원적인 갈증과 외로움, 갈망을 채워준다. 마치 우리가 봉사활동을 하고 난 후나 또는 마땅히 해야 하고 채워야 할 일을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자부심을 갖게 되고 인격이 채워지는 듯한 뿌듯함을 갖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워준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렇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모두 살릴 것이다."(요한 6,35.38-40)

그렇다. 주님께 우리가 청해서 얻을 빵은 우리가 걸어 나아가야할 우리 인생의 길이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가 얻게 될 생명이다. 길이신 말씀과 생명이신 성체성사로써 진리이신 사랑을 이루신 주님은 우리를 살리신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7-58)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한다. 세상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몰라서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그 양식을 받아먹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고, 또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양식을 이웃과 나누게 해주십시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풀이한다. "좋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바치신 그 일이 나약한 우리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아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우리에게 한 방법을 보여주시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쳐야 모든 것을 얻는 만큼, 당신처럼 바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해롭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효과 있는 방법을 주시지 않았던들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신 이 말씀을 온전히 지킬 사람은 거의 없을 뻔하였습니다. 아드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게 한번 내어 주신 이상, 아드님은 이미 우리의 것으로 세상 마칠 때까지 다시는 우리한테서 도로 거두어가지 마시고 날마다 우리를 돕게 해주시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아드님은 인간성을 지니시기에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주십니다마는 당신의 의지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으로서 이미 당신 것이 되어버린 인성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께 알려드리는 것이니, 이 때문에 '우리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주님.' 나날의 우리의 빵(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 함은 곧 당신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오늘'이란 말은 내 생각에 하루, 즉 더도 말고 세상에 사는 한동안이 아닌가 합니다. 당신이 '하루'만의 빵을 비시는 것은, 이미 언제까지든지 있을 지극히 거룩한 빵을 우리에게 주신 까닭이니, 즉 하느님께서 그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시어 인류가 먹고 살 만나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아드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 탓이 아니면 굶어 죽을 리 없고, 영혼은 먹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지 그 맛과 위안을 지극히 거룩한 성사에서 다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거기에 맛들이기 시작하면 아쉬움도 없을 것이고, 고생도 구박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예수님의 성 데레사, 최민순 옮김, 완덕의 길, 33-34장, 242∼254쪽, 성바오로 출판사, 1992)

그런데 가끔 먹을 것과 물질에 대한 소유와 그 처리방식 때문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삶과 생명을 나누는 일 속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서로가 자신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단죄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물질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배불리 먹고 혼자 고립되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남을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인생보다는 남과 함께 사는 인생이 더 행복하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이 기도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는 절대로 남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들의 잘못과 가끔 우리에게 위로를 청하는 이들이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못 본 체하고 지나친 우리들의 빚을 용서해 주시고 청산해 주시기를 비는 것이다.

주님은 일찍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셨다. 주님은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그들을 없애버리기 보다는 용서하고 다시 가르치는 길을 택하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시고자 하면 그것을 하실 힘이 언제든지 있"(지혜 12,18)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호세 11,8-9) 그리고 주님은 "추수 때까지 내버려두"(마태 13,30)신다. 주님은 "권능을 알고도 주님과 감히 맞서려는 자들을 응징하"(지혜 12,17)실 뿐아니라, 오히려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셔서 당신 자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지혜 12,19)신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 기도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잘못이 없는 한 천상의 음식만 가지면 모든 것이 수월해지고, 우리 안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시라 말씀하신 그대로를 잘 지키실 줄을 아십니다. '우리가 용서하듯이'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방금 말한 이 큰 은혜를 청하는 사람, 하느님 뜻에다가 자기의 뜻을 둔 사람은 남을 용서하는 일을 벌써 끝냈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깨우쳐 주소서. 우리는 스스로를 알지 못하며 빈 손으로 당신께 나아가나이다.

당신은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내놓고 용서를 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 큰 은혜를 당신께 비는 아드님만을 보시옵소서.'

자비이신 분에게 그토록 가까워져서 그 자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남이 자기를 모욕했기로서니 당장 쉽게 마음을 풀지 못하거나, 씻은 듯 부신 듯 부드럽게 대할 수 없다는 것이 나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면, 주님께 받은 은혜와 위로를 생각하고 거기에서 그 크신 사랑의 보람을 느끼는 만큼, 미흡하나마 자기의 사랑을 보여드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완덕의 길, 36장, 259-267쪽)

우리가 마음 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 생명을 나누고 싶어도, 또 용서를 하고 다시 화해하고 싶어도 우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막는 듯이 잡고 딴생각을 갖도록 하고 우리의 결심을 약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악과 악의 유혹이다. 그것을 사도 바오로는 죄요 악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로마 7,15-17.21) 그러면서도 한편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로마 8,20)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희망이 있"(로마 8,20)다고 한다. 한편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이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혹을 반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 욕심에 이끌려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야고 1,13).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로마 7,25)실 것이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衁遁) 우리는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한 상황 안에서,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거부하며, 육을 따라 살지(갈라 5,19-21) 아니하고 영을 따라 살기(갈라 5,22-23)를 바라면서 청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의 전생애는 끊임없는 죽음'이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행여나 우리가 깨달음 없이 속아 살세라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이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기를 허락지 마시고, 그 해독을 알려주시며 빛과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사 구합시다. 주께서 숱한 영혼을 없앤다 해도 실상은 그가 꾀하는 악에서 선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속마음을 보시는 까닭이니,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 섬기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뜻인 이상, 우리가 기도 중에 당신과 함께 있으면 하느님께서는 진실로써 우리를 대하십니다.

맛이나 위로에 있어서는 그래도 자기가 받는 줄 알고 더욱더 섬길 마음이 생긴다 하지마는, 한편으로는 자기가 주는 듯이, 혹은 섬기거나 하는 듯이 주님께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므로 차츰 커다란 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겸손이 약화되는 한편, 이미 그 덕을 닦은 줄로 믿기 때문에 덕닦기를 게을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주십사고 영원하신 아버지께 빌고 또 비는 것이 그것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덕이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가령 인내를 가지고 말해봅시다. 우리는 참을 결심을 하고, 계속 주님을 위하여 더 많이 참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실상 많이 참는 것같이 생각되어지고, 따라서 마음은 무척 후련해집니다. 악마가 그렇게 믿도록 손을 썼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여러분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 한마디만 하더라도 그 인내는 곧 땅에 떨어지고 말 터이니 말입니다. 참다운 겸손은 결코 영혼을 불안과 초조와 당황으로 몰아넣지 않고 도리어 평화와 기쁨과 안정을 가져다 주는 법입니다."(완덕의 길, 37-42장, 268-296쪽)

우리는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이 이루어지기를 감히 청한다. 아버지의 뜻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이루어지고,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버지의 뜻을 알아듣고 깨달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아멘"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가 "아멘"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우리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주님밖에는 우리의 희망을 채워 주실 분이 없고,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믿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3-26.28)

예수님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내가 정말 못 견딜 일은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 뜻을 당신이 기꺼워하시는지, 이것을 똑똑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허구 많은 악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행복이 있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비오니, 당신의 이름이 하늘과 땅에서 항상 빛나시고, 당신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소서, 아멘."(완덕의 길, 42장, 297-300쪽)하면서 기도를 마친다.


응답

·요즈음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멘' 하고 힘주어, 주님께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차례..

13.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평화 예식

†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 아멘.

평화의 인사

†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와 함께.

† 평화의 축복을 서로 나누십시오.

◎ 평화를 빕니다.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가 무엇인가? 전쟁이 없고, 병에 걸리지 않고, 집안 조용한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평화를 빈다고 해서 밑지는 것은 없으니까, 그냥 빈말로 나눈다고 인사하는 것이 아닐까?"

·"설날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고 축원하는 것과 평화의 인사가 서로에게 축복을 빈다는 면에서 같은 의미가 아닐까?"

·"예수님이 주신다는 평화는 무엇인가?"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평화의 축복을 빌 때면, 나도 남에게 착한 일 한 번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진정으로 받고 싶어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선 정말 편해요. 감사하고요."


나는

·어떤 마음으로 평화를 빌어 줍니까?


말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요한 20,19-29)

20 19안식일 다음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24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동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새김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 14,27)고 하셨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을 버리도록 유혹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이것을 보아라. 이것을 가져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을 배워라. 그리고 내 말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살 수 있고 네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한번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세상이 주는 평화는 이웃을 밟고 올라서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경쟁사회! 다른 이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그 희생이 나의 이익으로 합쳐질 때 비로소 내 행복이 보장된다.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사회!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라면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나의 기쁨이 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기쁨보다는 씁쓸함과 비애를 안겨 준다. 그리고 내가 빼앗았던 그것을, 언제 다시 다른 이에게 빼앗길 지 몰라 불안해한다.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그것이 경쟁과 경제사회 안에서는 미덕과 성공이 될지 모르지만, 인간사회 안에서는 죽음과 공포다. 이것이 육체적인 세상에서 주는 평화다.

다른 한편 우리가 찾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우리가 찾는 평화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얻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다 채워질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가?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한두 개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에 한계가 있는가? 하나 채우면, 또 다른 하나, 또 다른 하나를 채우면, 또 더 큰 하나…. 얻고 채웠을 때의 기쁨과 평화는 그냥 그때 그 순간에 그치고 만다. 곧 싫증을 내고 또 다른 것을 찾아 얻으려고 나아간다. 처음에는 목표와 방향이 긍정적이고 바람직하였지만 점점 채우고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자칫 올라감에 더 비중을 두게 되고 그 방향과 목표는 뒷전에 놓이기 십상이다. 요것만 더 가지면, 좀더 여유가 생기면…. 그런데 오히려 없을 때보다, 그리고 모를 때보다, 가지면 가질 수록, 알면 더 알수록, 더 많고 다양한 것이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삶과 의지의 방향을 잃고 혼란 속에 빠지게 한다. 마치 욕망의 굴레와도 같이!

그렇다면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라고 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물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의 품이다. 그렇다면 그 교회의 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곳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 재현되는 곳이다. 주님의 사랑이라면 바로 주님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가리킨다. 즉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이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14,20; 20,21)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함께함으로써 생겨나고 누리게 되는 평화. 그 평화를 이루는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서 아버지께 마음 모아 구하면 무엇이든 다 들어 주시리라는 약속이다. 우리는 이 약속을 들으며, 우리 부모님들의 특별히 한국의 노인들의 이마에 명예처럼 그려져 있는 주름살을 연상한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기 때문에, 심지어 자존심마저 다 내어주었기 때문에 노년에 자신의 것으로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다만 그 흔적으로 남아있는 인생의 훈장인 주름살과 쪼그라진 얼굴과 손과 몸매.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 남자 또는 여자로서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우리에게 주장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개별적인 삶을 위해 우리 자식들을 희생시켜 본 적이 없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너를 살리기 위한 주님의 희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8장의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평화를 얻기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주님께 마음 모아 청하는 과정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용서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님의 약속을 들으며 베드로는 주님께 묻는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마태 18,21) 참으로 현실적인 질문이다. 아니 마치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고 강변하는 탄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너를 살리기 위한 나의 희생! 그런데 희생이랄 수 있는 용서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마음먹기에 달린 것도 아니다. 간혹 이성으로는 용서가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과 행위가 상대에게 어떤 고통과 피해를 끼치는지 모르고 저지르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자신들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리가 없지 않는가? 자신들을 위해 더 빌면 빌었지. 그러나 가슴 속에 스며들고 맺힌 감정을 어떻게 지울 수 있겠는가? 복수는커녕 다시는 보고도 싶지 않은 그 얼굴 그 모습을.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그리고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로마 8,26-27)

주님이 토마에게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고 말씀하셨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인간이기에 힘듭니다." 하는 우리의 강변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한낱 핑계나 거부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의 죄악을 쳐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주님! 그 주님을 믿고 청하자. 십자가와 성체성사의 주인이신 주님께! 용서와 화해의 대명사인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화해의 은총을 청하자. 그리고 주님과 일치하여 평화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자. 진정으로 평화를 빌어 주자. 단순히 자존심을 접어두는 심리적인 변화를 넘어, 적극적으로 너를 살리고 다시 일으키기 위한 나의 희생과 노고를 주님께 봉헌하면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2)


응답

·주님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식과 가족에게 자신을 주세요.

·주님 평화의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웃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일으켜 주세요.

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차례..

14.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하느님이 죄인을 벌하지 않으시고 죄없는 당신의 아들을 속죄제물로 내놓으셨나요?"

·"예수라는 한 인간이 죽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구원과 연관되나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미사 때 신부님이 성체를 들어 올릴 때, 그 성체 뒤의 성당 벽면의 십자가와 일치할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요."

·"성체가 들어 올려질 때마다 내가 주님 대전에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껴요. 나도 주님을 따라 세상 앞에 들어 올려지는 것 같아요."


나는

·주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말씀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이사 52,13-53,12)

5213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하였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 14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5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우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 본 사람도 없다.

53 1그러니 우리에게 들려 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2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3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4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5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6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7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8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9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10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하리라. 12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


새김

구약성서의 시대부터 사람들은 죄를 많이 지으면 죽게 된다고 생각해 왔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죄는 죽음을 가져온다'(로마 5,12 참조 -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고 믿었다. 또 그와 연관하여 사람의 외관적인 흉함이나 질병, 그리고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죄로 인한 벌로 이해해 왔다. 이러한 인간의 인식 안에서 고대 근동지방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져달라고 기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원은 심지어 동물은 물론이요, 동료 인간을 인간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죽은 친·인척 특히 부모님들이 자신의 배우자중 한쪽의 사망시, 그 사체에 두고 "자식들의 질병이나 불행을 다 안고 가시라."고 청하는 우리의 풍습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죄로 인해 불행을 겪는다는 사고방식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가 우리 인간의 구세주란 사실을 선선히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고 있다. 구세주가 왜 죽어야 하는가? 그것도 죄인처럼? 실제로 우리는 일정한 한 공간을 차지하고 산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서 느끼면서 이웃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 우리는 어떤 대상의 내용과 속이 어떻든 간에 외적으로 우리 눈에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대상에 대해 좋다고 여긴다. 그리고 어디가 찢어졌다던가,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다거나, 기준이 모호하지만 균형을 이루지 않은 것을 보면 어딘지 좋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거나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호감을 보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경계와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비참과 벌의 상징인 죽음에 처해진 십자가상의 예수님과, 권능과 거룩함의 상징인 하느님이 인간의 편향된 사고 안에서는 서로 충돌과 긴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이사 53,1) 왜냐하면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이사 52,14)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에 관한 기사는 실제로 인간들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물로서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기사는 한편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져서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 수난받는 이스라엘의 의인들을 그린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모습 안에서 그리스도 수난의 신학적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4-6.8)

이미 구약성서의 욥의 기사를 통해 선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는가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 안에서 하느님은 죄인들의 죄값을 선하고 죄없는 인간에게 대신 물으심으로써 죄인들의 죄를 씻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그렇게도 비참하게 그리고 죽음으로 처해진 이유는 바로 그가 우리 인간의 속죄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이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이사 53,10)

실제로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러한 구약의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전승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님의 수난을 이해해 왔다.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님에 대해 선포하도록 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 그분은 바로 하느님의 성령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다.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요한 1,33-34) 또한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 40절(특히 32절-33절)에서 필립보가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성서를 풀이해 줄 때, 이 고난받는 야훼의 종을 예수와 연관시켜 설명해 준 후 그의 청에 따라 그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2장 24절과 25절에서도 그렇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 왔습니다."

교회는 성서의 구세사적인 전망 안에서, 탄생에서부터 죽으심에까지 이르는 예수님의 전생애를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사로 그리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1베드 1,20)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로마 5,6) 그리고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인들을 치던 하느님의 마지막 재앙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스라엘의 집 문설주에 바르던 양과, 예수님님 죽음의 의미가 일치함을 제시하면서 예수님님을 빠스카양에 비유한다. 유다인들이 파스카 양을 잡던 과월절 준비일의 낮 12시경에 돌아가신 주님. "그날은 과월절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시쯤이었다."(요한 19,14) 인류를 죽음의 운명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의 길에 접어들도록 해주신 주님. 그분은 바로 인류를 죄악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시는 속죄제물, 즉 구원을 위한 파스카의 어린양이시다.

한편 이렇게 자신의 수난으로 세상을 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 우리 주님을 믿는 우리 신앙생활의 자세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베드로 사도도 시련 속에 빠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서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병고와 아픔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죄로 인한 벌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내 이 고통을 부둥켜안고 주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난에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미사 때 우리는 성체성사를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며 외치는 사제의 함성 속에서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요한 3,14)던 주님의 음성과 주님 수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듣는다.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예절 당시 사제가 외치는 구원의 선포,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그것은 바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요한 3,15-16)시기 위해,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의 식탁에로의 초대이며 은총의 축제이다.


응답

·나는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주님의 수난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차례..

15.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영성체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체를 어떤 자세로 영해야 하나요?"

·"성체를 모시면 병이 낫나요?"

·"성체를 모시고 싶어도, 죄가 많아서 성체 모실 자격이 안 되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신부님이 성체를 들어 올릴 때 성체 안에서 빛이 나오고 한 분이 앉아 계신 것이 보여요. 그분이 예수님 맞죠?"

·"항상 죄 많고 부족하다고 느끼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겸손되이 모십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어요? 그건 오히려 겸손이 아니라 거부가 될까 봐 오히려 걱정이 돼요."

·"성체를 모시면 감격이 눈물이 나요. 주님께서 제게 얼마나 잘해 주시는지 알거든요. 저에게 진정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거든요."


나는

·성체를 어떤 마음으로 모십니까?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믿습니까?

·성체를 영하면서 무엇을 청하십니까?


말씀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신 예수(마태오 8,5-13)

8 5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예수께 와서 6"주님,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고 사정하였다. 7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시자 8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9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하고 대답하였다. 10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따라 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잘 들어라.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12이 나라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13그러고 나서 백인대장에게 "가 보아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간에 그 하인의 병이 나았다.


새김

로마의 백인대장은 주님께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간절히 청하면서도, 자신의 방법대로 주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 자기 눈 앞에서 자기와 함께 가서 자기 종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시는 등의 육체적인 수고를 굳이 하지 않으셔도, 주님께서 고쳐 주시기로 마음만 잡수신다면 그 마음만으로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확실히 믿었다. 또 다른 한편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인간이 주님 앞에 나서서, 정당하게 자기를 내세울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고백한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태 8,8) 그러므로 그의 고백 속에는 주님께 고쳐 달라는 청원과 주님께서 자기 종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자연스럽게 주님께 대한 의탁이라는 하나의 형태로 통합되어 제시된다.

주님은 이러한 백인대장의 고백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가 보아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0.13)

우리가 백인대장처럼 주님께 의탁할 때, 우리는 주님을 우리 영혼과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여기 생의 순간 순간을 통해 주님께 의탁하는 한 영혼의 기도를 본다.

주님,

주님은 제가 주님께 저를 바치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

제게 행복을 안겨 주셨습니다.

훗날 그 때의 저를 보셨던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던 것같이

그 때 저는 제일 편안했고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은 인간이 주님과 함께할 때 얻을 수 있다던 바로 그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그 행복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주님,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단 한가지 일만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은 바로 저를 향한 주님의 사랑 그 한 가지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해 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의 목자가 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은 저를 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은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를 드릴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를 집전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은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헤맬 때 주님은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은 성체성사로 적셔 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은 못 본 체해 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일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은 채워 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안스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은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제가 다시 주님 사랑의 빛 안으로 나오도록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끌어내 주시고

이 모든 일들을 저에게 겪도록 하심으로써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제 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그리고 저의 전생애의 역사가

주님의 오묘한 섭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주님 앞에 다가와서 청합니다.

주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와

주님이 저와 함께해 주셨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청합니다.

말씀으로 저를 일러 주시고

성체성사로 먹여 주시는

주님 앞에 서서 청합니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주님밖에 매달릴 분이 없어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주님이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에게 주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제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제가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를 복음의 사도로 써주소서.

제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 주시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언제나 주님께 다가와 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저를 불러 주소서.

주님은 제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제게 오셔서 저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소서.

아멘.


응답

·주님과 어떻게 생을 나누고 계십니까?

·여러분 생애의 역사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기억해 보십시오.


차례..

16.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파견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느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면, 다 잊어버려요."

·"미사는 의무로 당연히 바치면 되는 거고, 난 현실에서 열심히 돈벌며 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럼 다 아니에요? 그럼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시겠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미사를 참례하고 나면, 그날 들은 말씀이 그날이나 그 주간에 저에게 실천해야 할 의무사항처럼 다가와요. 마치 미사 때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테니까 이렇게 해라.' 하고 미리 준비시켜 주시는 것같아요."

·"미사에 참례하고 나면 정말 좋아요. 그냥 의무를 다했다는 정도의 심리적인 만족, 그 이상으로 편안해요. 그리고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땐 지옥같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현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왜 미사에 참례하십니까?

·미사에 참례하고 나면 뭐가 달라집니까?


말씀

제자들의 사명(마태 28,16-20)

28 16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 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17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새김

그냥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하나 먹고 사는, 거기에 내 일생의 기쁨과 희망과 의미를 두려고, 아니 달리 말한다면 좀 더 나은 현세적인 삶을 위해 신자가 된 것은 아니다. 주님은 나를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참여하라고 부르신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사도 13,2) 미사가 끝났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주님은 나를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따로 부르셔서 무슨 일을 맡기셨는가? 그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을 받은 후 대담하고 열정적으로 "예수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은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며, 마지막 날 우리를 구하러 다시 오실 것이다." 라는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 복음을 믿고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 교회를 이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체제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한다. 그래서 기존 종교와 사상에서 정치적인 권위와 권력에 절대권을 부여하여 사회를 통치하고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체제유지를 위한 종교적 처신을 배척함으로써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사랑의 희생봉사를 함으로써, 이해관계 속에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서 질투와 시기를 사서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박해를 받아들여 순교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교우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교하면 주님처럼 하늘나라에 올라 영생을 누리는 것이요, 부활하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꺼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들을 붉은 순교자라고도 한다. 한편 순교는 못했더라도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관용령으로 종교 자유를 얻기까지 로마의 지하 무덤(카타꼼바)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생애를 마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을 푸른 순교자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순교는 주님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루가 24,46-48)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한편 박해시기가 끝나자 순교에 이르는 박해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젠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개처형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교회는 전보다 더 활발히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진지하고 철두철미하게 살고자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은 수도생활이라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이런 수도자들을 흰 순교자라고도 했다. 수도자들은 인류를 구원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님의 뒤를 따라 교회에 순명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을 포기하시고 인간과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 오신 주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가나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가난하게 살았고,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나라만을 순수히 택하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헌신하신 주님처럼 온전히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교회만을 택함으로써 정결을 살고자 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하느님을 찬미하고 섬기기보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점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사람들이 서로를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를 위해 적대시하게 되어 결국은 전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교회는 참으로 신자들을 세상에서 끌어내 교회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기보다는 사회자체를 복음의 하느님 나라로 바꾸는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곧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을 이루며 사는 데 헌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생활을 양심의 순교자, 말씀의 증거자로 부르게 되었다. 평소에 이렇게 복음을 사는 양심의 순교자들이 마지막날 붉은 순교자도 될 수 있었으리라.

우리는 특별히 103위 순교성인들의 후손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 왔다. 그러한 피의 밭 위에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자라났고, 오늘 우리 사회 안에 우뚝 서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떤 교회를 물려 줄 것인가?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순교신앙을 오늘 우리의 삶 속으로 되살려 내야 하겠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가르치는 바와 어긋나고 반대되는 관습과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관으로 받아들여 변화시키면서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심고 가꾸어 나가야겠다.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2,000년대를 향한 교회의 복음화 운동'을 시작하면서 '1993년 서울대교구 사목교서'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복음화를 현대 세계에 맞추어 재확인한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을 인용하여 복음화에 대해 강조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이미 '현대의 복음선교'에서 복음화에 대한 명백한 선을 그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다른 성사를 주는 것'을 복음화 활동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7). 복음화는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 능력으로 모든 개인과 집단의 양심, 그들이 관계하고 있는 활동, 그들의 생활과 구체적 환경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8).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어긋나는 인간의 가치관, 사상,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19)."

지금까지 우리는 미사전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미사를 드리는 것은 주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것이요, 주님을 통해 생명을 얻고자 함이요.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우리가 머물고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선포하고 이루고자 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다. 미사는 바로 이 파견을 위한 것이다. 하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시키도록 파견하기 위해! 그리고 그 파견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참된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만들어 주신 그 행복과 구원의 모습으로 살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상에 성체로 봉헌한다.

이 글을 마치며,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분의 뜻을 기리고 이루고자 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 안에 살아 숨쉬실 수 있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드러나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주님 구원의 신비를 되새기며 마치고자 한다.

주님,

주님은 저희에게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님,

하느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님,

하느님 사랑의 말씀을 이루어 십자가상 제사를 바치신 예수님님,

부활하셔서 저희의 구세주가 되신 주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성모님 품에 안겨 오늘 저희 앞에 와 계시니 감사합니다.

성모님 품에 안겨 계신 주님.

가난한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당신 생명을 맡길 정도로

저희 인간을 신임하고 계신 당신을 느낍니다.

주님의 그 사랑 가득한 확신과 아량에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성모님 품에 다시 안겨 지상 생애를 마감하신 주님.

주님을 알아듣지 못하고 믿지 못해 죽이기까지 한 저희들에게

주님을 오늘 다시

또 맡기시니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자칫 말 많고 실수하기 쉬운 저희의 입에

주님의 진리를,

자칫 위선적이고 나약해져 그르치기 쉬운 저희의 행동에

주님의 사랑을,

자칫 무책임하고 배반하기 잘하는 저희의 삶에

주님의 생명을

맡겨주셨으니 주님의 무한하심과 어지심에 감탄할 뿐입니다.

부족하면서도 무엇이든 다할 수 있는 양

오만을 피우는 저희를,

나밖에 모르면서도 모든 이에게 도움이라도 되는 양

자기 정당성만을 외치는 저희를,

내 생각만이 진리인양

왁왁거리는 저희를,

내 행동만이 옳은 양

하느님인 체하는 저희를

믿고 당신 자신과 주님의 나라를 맡기셨으니

저희를 향한 주님의 중단 없는 신뢰와 관대하심에 감격할 뿐입니다.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저 당신의 찬미를 전하오리다.

주님, 제 발걸음을 인도하소서,

저 당신의 길을 펼치리이다.

주님, 제 눈을 뜨게 하소서,

저 당신의 진리와 영광을 반사하리이다.

주님, 제게 왕하옵소서,

저 당신의 나라를 이루리이다.

성모님 품에 안겨 계신 예수님,

저희를 신뢰하고 계신 주님.

성모님 손에 들리신 예수님,

저희를 의지하고 계신 주님.

성모님 품에 안겨 생을 마감한 예수님,

저희를 위안 삼아 기대하고 계신 주님.

주님은 저희를 고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 성령에 힘입어 주님께 청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믿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저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이 땅에 주님의 성체 되게 하소서.


응답

·오늘 미사 후에 무엇을 하시렵니까?

·주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차례..

부록 1 미사 통상문


1996. 추계주교회의에서 확정 공포된

개정된 미사 통상문

시작 예식

<입당>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인사>

†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 은총과 평화를 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주교는 아래와 같이 인사할 수 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위령 미사에서는 아래와 같이 인사할 수 있다.>

† 믿는 이들에게 희망과 평화를 가득히 내리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사제는 그날 미사의 뜻을 짤막하게 풀이할 수 있다.>

<참회>

†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잠시 침묵한 다음, 함께 죄를 고백한다.>

†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사제는 사죄경을 외운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잠시 침묵한 다음, 사제는 기도한다.>

†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는 주님께 죄를 지었나이다.

†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또한 저희를 구원하여주소서.

<사제는 사죄경을 외운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잠시 침묵한 뒤, 사제나 부제가 자비송과 함께 청원 기도를 드린다. 이 청원 기도는 그날의 전례나 축일에 맞게 바꿀 수 있다.>

†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하러 오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성부 오른편에 중개자로 계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사제는 사죄경을 외운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

아멘.

<주일 미사에서는 참회 예식 대신에 성수 예식을 할 수 있다.>

<자비송>

<앞의 참회 예식에서 ㉰형식을 바치지 않았으면 이때 바친다.>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대영광송>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 대축일, 축일 및 지역의 성대한 축제에서는 서서 대영광송을 합송 또는 교송으로 노래하거나 외운다.>

†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주님 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 하느님, 성부의 아드님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아멘.

<본기도>

† 기도합시다.

<사제와 교우들은 잠깐 묵묵히 기도한다. 이어서 사제는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본기도는 아래와 같이 맺는다.>

† …… 비나이다. <또는> ……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말씀 전례

<제 1독서>

<이어서 독서자는 독서대로 가서 성서를 봉독한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선창자는 시편을 읊거나 노래하며, 교우들은 후렴으로 응답한다.>

<제 2 독서>

<제 2 독서가 있을 경우에는 제 1 독서의 순서를 따른다.>

<복음 환호송>

<알렐루야 또는 다른 성가를 따른다. 사순 시기에는 알렐루야 대신 아래의 환호송 가운데 하나를 부를 수 있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받으소서.

<향을 피울 경우에는 그 동안에 향을 준비한다. 복음을 봉독할 부제는 주례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축복을 청한다.>

* 축복하여 주십시오.

<주례는 조용히 말한다.>

†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어 그대가 복음을 합당하고 충실하게 선포하기를 빕니다. 성부와 †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부제는 대답한다.>

* 아멘.

<부제가 없으면, 사제가 제대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한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

<복음>

<그 다음에 부제나 사제는 (때로는 향로와 촛불을 든 봉사자들과 함께) 독서대로 가서 말한다.>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부제)와 함께.

† ( )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이때 사제(부제)는 복음서와 이마, 입술, 가슴에 십자를 긋는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향을 피울 경우에는 이때 피우고 복음을 선포한다.>

<복음이 끝나면 부제나 사제는 말한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어서 독서자는 복음서에 절하면서 속으로 말한다.>

† 이 복음의 말씀으로 저희 죄를 씻어 주소서.

<강론>

<강론은 그날 전례와 독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신앙 고백>

<주일과 대축일 및 지역의 성대한 축제에는 아래의 신앙 고백을 한다.>

†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밑줄 부분에서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인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때에 따라서 사도신경을 외울 수도 있다.>

†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모두 고개를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보편 지향 기도>

<보편 기도는 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45-47항의 규정을 따른다. 보편 기도는 (1) 교회, (2) 위정자와 세상 구원, (3) 도움이 필요한 이들, (4) 지역 공동체를 위한 지향으로 한다. 지향 등에 대한 응답은 아래와 같은 환호나 그 밖의 적절한 구절 또는 침묵으로도 할 수 있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주님,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이 백성을 기억하소서.

<위령 미사의 경우>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성찬 전례

예물 준비

<제대와 예물 준비>

<예물 준비가 시작되면 알맞은 성가를 부를 수 있다. 그 동안 봉사자들은 성체포, 성작 수건, 성작 및 미사 전례서를 제대에 놓는다.>

<교우들은 미사 거행에 필요한 빵과 포도주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교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예물도 바치는 것이 좋다.>

<예물 준비 기도>

<사제는 제대에 가서 빵이 담긴 성반을 조금 들어올리고 기도한다.>

†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하느님, 길이 찬미 받으소서.

<부제나 사제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물을 조금 따르면서 조용히 기도한다.>

<사제는 성작을 조금 들어올리고 기도한다.>

†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 길이 찬미 받으소서.

<사제는 허리를 굽히고 조용히 기도한다.>

<이어서 사제는 제대 한 쪽으로 가서 손을 씻으며 조용히 기도한다.>

† 형제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를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

<예물 기도>

† …… 비나이다. <또는> ……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감사 기도 제2양식

<감사송>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립니다.

†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분을 저희에게 구세주로 보내셨으니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나이다.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십자가에서 팔을 벌려 백성을 아버지께 모아들이셨으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는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아버지의 영광을 찬양하나이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주례는 감사 기도 가운데 공동 집전 미사의 노래 부분은 언제라도 노래할 수 있다.>

†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 피가 되게 하소서.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 신앙의 신비여,

◎ ㉮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

<기념과 봉헌>

† 아버지, 저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봉헌하나이다. 또한 저희가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성령청원 : 일치기원>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전구>

주님,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교회를 생각하시어 교황 ( )와 저희 주교 ( )와 모든 성직자와 더불어 사랑의 교회를 이루게 하소서.

<위령 미사에서는 애래 기도를 덧붙일 수 있다.>

(오늘) 이 세상에서 불러가신 교우 ( )를 생각하소서. 그는 세례를 통하여 성자의 죽음에 동참하였으니 그 부활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마침 영광송>

†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영성체 예식

<주의 기도>

†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평화 예식>

†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평화를 빕니다.

<빵 나눔>

<사제는 축성된 빵을 들어 성반에서 조개어 그 작은 조각을 성작 안에 넣으며 조용히 기도한다.>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를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성찬>

† 그리스도의 몸

아멘.

<성찬 후 기도>

† 기도합시다.

† …… 비나이다. <또는> ……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마침 예식

<강복>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파견>

† ㉮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

㉰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차례..

부록 2 성서 색인



창세기

4,9ㄱ;10ㄴ;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과 쪽)

22,1-18;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5과 쪽)

출애굽기

3,7-8. 14ㄴ. 15ㅁ;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11과 쪽)

14,21-22;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야훼께서 이끄심 (11과 쪽)

19,4-6.8; 너희야말로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11과 쪽)

열왕기 상권

17,1; 예언자 엘리야 시대의 가뭄 (5과 쪽)

17,12;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뿐인 과부 (5과 쪽)

17,15; 가진 것을 다 바친 과부는 양식이 떨어지지 않음 (5과 쪽)

18,1; 바알에게 기우제 드려도 비 안 옴 (5과 쪽)

18,21; 야훼와 바알 중 선택하라는 엘리야의 촉구 (5과 쪽)

18,31-35;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조건의 제단과 제물 준비 시킴 (5과 쪽)

18,37; 응답하소서. 이 백성이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5과 쪽)

18,45; 큰 비가 내림 (5과 쪽)

역대기 하권

24,22ㄷ; 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 (11과 쪽)

시편

31,5;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8과 쪽)

90,3-5; 당신이 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11과 쪽)

113,4ㄴ-7ㄴ; 약한 자를 티끌에서 끌어올리시고 (11과 쪽)

127,1; 주께서 집을 지어주시지 않으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다 (10과 쪽)

잠언

30,4 ;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11과 쪽)

지혜서

12,17ㄴ; 주님과 감히 맞서려는 자들을 응징하심 (12과 쪽)

12,18ㄴ; 무엇이든지 하시고자 하면 그것을 하실 힘이 있다. (12과 쪽)

12,19ㄴ; 죄를 지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희망을 안겨주심 (12과 쪽)

집회서

28,2-7;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면 기도할 때 네 죄도 사해질 것 (8과 쪽)

이사야 예언서

52,13-53,12;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넷째 노래 (14과 쪽)

55,1-3; 돈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7과 쪽)

63,19;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11과 쪽)

호세아 예언서

11,8-9; 나는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12과 쪽)

마태오의 복음서

1,21ㄴ. 23ㄴ;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 (11과 쪽)

2,2; 구세주가 오시기를 별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동방박사들 (4과 쪽)

4,1-4; 배고픔을 빵으로 채우라는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 (6과 쪽)

4.4;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12과 쪽)

5,3;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주어지는 하늘나라 (4과 쪽; 11과 쪽)

5,10;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11과 쪽)

5,11-12; 나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 (16과 쪽)

5,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 지키도록 가르쳐야 (11과 쪽)

5,20;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11과 쪽)

6,8; 구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11과 쪽)

6,9-13; 주의 기도 (11과 쪽; 12과 쪽)

6,12.14-15;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를 용서하실 것 (8과 쪽)

6,31-33;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7과 쪽; 11과 쪽)

7,21;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해야 (11과 쪽)

8,5-13; 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신 예수님 (15과 쪽)

10,6;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4과 쪽)

10,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7과 쪽)

10,39;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10과 쪽)

11,28-30;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7과 쪽)

13,21;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은 (11과 쪽)

13,30ㄱ; 추수 때까지 내버려두시는 사랑 (12과 쪽)

13,44; 밭에 있는 보물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산다 (11과 쪽)

14,15; 차라리 스스로 구해 먹으라고 돌려보내야 (5과 쪽)

14,30-31; 왜 의심을 품었느냐? 왜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4과 쪽)

15,21-22;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2과 쪽, 쪽)

15,28; 네 믿음이 장하다 (2과 쪽)

15,32;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보기에 안 되었구나 (10과 쪽)

18,19-20; 마음 모아 구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실 것 (1과 쪽; 13과 쪽)

18,21;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13과 쪽)

18,22;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13과 쪽)

19,29;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 (7과 쪽)

24,23.26;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라 (11과 쪽)

926,28;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8과 쪽)

26,42;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10과 쪽)

28,5-6;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는 다시 살아나셨다. (10과 쪽)

28,16-20; 제자들의 사명 (16과 쪽)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4과 쪽)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0과 쪽)

마르코의 복음서

2,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4과 쪽)

4,26-28;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도움의 말 쪽)

4,31-32; 작은 씨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 (11과 쪽)

9,37;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 (1과 쪽)

10,15; 순수한 마음으로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 (11과 쪽)

10,21-22; 자신이 재산이 많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떠나갔다. (4과 쪽)

14,24;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8과 쪽)

14,36;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4과 쪽; 10과 쪽)

루가의 복음서

1,31-32; 아기를 예수님라 하여라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 (11과 쪽)

1,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4과 쪽)

1,43.45;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 (4과 쪽)

1,48ㄴ. 55ㄴ; 주께서 여종의 신세를 돌보시고 자비를 베푸시리라 (4과 쪽)

1,50-53;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4과 쪽)

2,8-20; 천사들의 환호, 목자들의 기쁨 (3과 쪽)

2,8; 밤새워 일하는 목동 (4과 쪽)

4,16-22;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 (4과 쪽)

5,1-11; 고기잡이 기적과 베드로를 부르심 (2과 쪽)

5,10ㄴ;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4과 쪽)

6,20-21.24.26; 가난한 사람들아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 (4과 쪽)

9,23-24;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 (10과 쪽)

9,27;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가 올 것 (11과 쪽)

9,60;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11과 쪽)

9,62; 쟁기를 잡고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7과 쪽; 11과 쪽)

10,41ㄴ-42ㄱ;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7과 쪽)

11,1;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11과 쪽)

11,20;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11과 쪽)

11,28;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의 행복 (4과 쪽)

12,32;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11과 쪽)

13,21; 밀가루의 온 덩이를 부풀어 올리는 누룩 (11과 쪽)

17,21;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11과 쪽)

18,9-14;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기도 (2과 쪽)

18,35-43; 예리고의 소경 (2과 쪽)

19,7-9; 주님의 방문으로 회개하는 자캐오 (4과 쪽)

19,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4과 쪽)

22,20;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것 (8과 쪽)

22,42;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5과 쪽; 8과 쪽; 10과 쪽, 11과 쪽)

23,26-49;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8과 쪽, 11과 쪽)

23,34ㄱ;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5과 쪽; 11과 쪽; 13과 쪽)

24,13-35;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빵을 떼어… 쪽)

24,36-49;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 (10과 쪽)

24,46-48;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 (10과 쪽; 16과 쪽)

요한의 복음서

1,10.14; 말씀이 자기 나라에,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 (4과 쪽)

1,29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14과 쪽)

1,33ㄴ-34;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을 보고 증언하는 것이다 (14과 쪽)

3,3; 새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10과 쪽; 11과 쪽)

3,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14과 쪽)

3,15-16;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 (14과 쪽)

3,16-17;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고자 (7과 쪽)

4,32.34;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 (12과 쪽)

6,7;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겠습니다. (5과 쪽)

6,9.11.13;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베푸신 기적 (5과 쪽)

6,11;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예수님 (6과 쪽)

6,11-13; 아낌없는 봉헌으로 인한 풍요의 신비 (10과 쪽)

6,26-40.47-59.66-69; 생명의 빵 (7과 쪽)

6,33;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 (7과 쪽)

6,35.57;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4과 쪽; 7과 쪽; 12과 쪽)

6,38-40;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인 모든 이를 살리는 일 (7과 쪽; 12과 쪽)

96,54-5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 (10과 쪽)

6,57-58;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 (12과 쪽)

6,68;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 (12과 쪽)

6,68-69;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4과 쪽)

8,31-32; 너희가 내 말을 새기고 산다면, 제자이며 진리를 알게 될 것 (4과 쪽)

9,39.41;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 (4과 쪽)

10,17-18; 내가 스스로 매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8과 쪽)

10,27-28;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를 따라온다. (4과 쪽)

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4과 쪽)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0과 쪽)

11,41ㄴ-42ㄱ;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청하는 기도 (6과 쪽)

12,3;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아래 부었다 (5과 쪽)

12,4-5; 향유를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이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 (5과 쪽)

12,6; 가난한 사람보다 돈 생각이 나서 시비를 건 유다 (5과 쪽)

12,49-50; 아버지께서 일러 주신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4과 쪽)

12,50;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4과 쪽)

14,6;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 (4과 쪽)

14,6;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4과 쪽)

14,9ㄷ;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4과 쪽)

14,14;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이루어 주겠다.(1과 쪽)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 (4과 쪽)

14,20;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13과 쪽)

14,23;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키고 그를 찾아가 함께 살리라 (4과 쪽)

14,16.26; 협조자 성령은 내가 말한 것을 되새기게 할 것 (4과 쪽)

14,27; 나는 너희에게 내 평화를 주고 간다. (13과 쪽)

16,9.13; 나를 믿지 않은 것이 죄,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될 것 (4과 쪽)

17,1-26; 대사제의 기도 (6과 쪽)

17,17-19;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10과 쪽)

19,14; 그날은 과월절 준비일 낮 12시쯤이었다 (14과 쪽)

20,19-29;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13과 쪽)

20,21;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13과 쪽)

20,22-23;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 (13과 쪽)

20,27;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13과 쪽)

20,28; 토마의 신앙고백 (4과 쪽)

20,31; 이 책은 주님을 믿어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4과 쪽)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0과 쪽)

사도행전

2,43-47; 신도들의 공동생활 (9과 쪽)

8,26-40(32-33); 야훼의 종과 예수님 연결 설명 (14과 쪽)

13,2;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기로 정해 놓은 일이 있다 (16과 쪽)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7; 하느님과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가 (1과 쪽)

4,17;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늘나라 (11과 쪽. 쪽)

5,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다 (14과 쪽)

5,12;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쳤다. (14과 쪽)

7,15-17.21; 내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하는 것은 내 안의 죄 (12과 쪽)

7,25; 우리 주 예수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하신다 (12과 쪽)

8,20ㄱ; 피조물이 제구실을 못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 (12과 쪽)

8,20ㄴ; 거기에는 희망이 있다 (12과 쪽)

8,23-26.28; 성령은 우리 대신 간구하시고, 좋은 결과를 이루심 (12과 쪽)

8,25;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11과 쪽)

8,26-27;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해주십니다. (13과 쪽)

12,14.17-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 (8과 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22-2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다 (10과 쪽)

2,31;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10과 쪽)

4,20;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11과 쪽)

6,9.10; 나쁜 짓을 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 (11과 쪽)

11,23-26; 주님의 성찬 (9과 쪽)

13,11;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말과 생각과 판단을 버렸습니다. (7과 쪽)

13,12;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빵을 떼어… 쪽)

15,50; 살과 피처럼 썩어 없어질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11과 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5,2;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한다 (12과 쪽)

8,9; 그분은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3과 쪽)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4,6; 성령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게 됨 (11과 쪽)

5,19-21; 육을 따라 삶 (12과 쪽)

5,22-23; 영을 따라 삶 (12과 쪽)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5,5; 나쁜 짓을 하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 (11과 쪽)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6-7; 그리스도 예수님는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다. (3과 쪽)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1,24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다(12과 쪽; 14과 쪽)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

1,1-2; 하느님과 예수님의 은총과 자비와 평화 (1과 쪽)

3,15-17; 성경은 계시로 이루어진 책 (4과 쪽)

4,18; 모든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어 하늘 나라로 인도하심 (11과 쪽)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5,7-10;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심 (3과 쪽)

11,3;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 믿음 (11과 쪽)

야고보의 편지

1,13;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 꾐에 빠져 시험 당함 (12과 쪽)

2,13-17;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9과 쪽)

베드로의 첫째 편지

1,20; 천지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심 (14과 쪽)

2,5; 신령한 집을 지을 산돌이 되어 신령한 제사를 드리십시오. (5과 쪽)

2,24-25;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지시고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14과 쪽)

4,13;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14과 쪽)

베드로의 둘째 편지

3,8.9.15;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돌아올 기회를 주시려고 오래 참으심 (8과 쪽)

요한의 첫째 편지

4,7-16;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과 쪽)

4,10ㄱ;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 (6과 쪽)

4,10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아들을 제물로 삼으심 (6과 쪽)

4,13.16;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사랑이심을 압니다. (6과 쪽)

4,19-20;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 (6과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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