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베드로,

주님




베드로의 영신성숙과정을 벗삼아

주님과 나의 정들기를 살피는

8일 피정·기도 안내서

심 흥 보 베드로










성 바오로 출판사

도움의 말


이 책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영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꾸몄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었지만 현실적인 박해 앞에서 배반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주님을 보다 정확히 알아모시게 되어, 다시 주님께 다가서서 주님의 사도로 성숙하는 과정을 신약성서의 각 부분에서 묵상할 수 있도록 모아 놓았다.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고 지금까지의 '주님과 나의 모습'을 비교, 형성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반성은 하지만 죄책감과 좌절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지난 생애를 통해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끌어 오셨는가를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내가 주님의 섭리와 안배 안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임을 재확인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주님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여, 주님께서 나를 온전히 이끄시도록, 나를 당신 복음을 이루는 도구요 사도될 수 있도록 봉헌해야 하겠다.

이 원고는 지난 '96년 6월 25일부터 7월 6일까지 평화방송 '방송교리' 시간을 통해 송출된 방송원고이다. 물론 그 전에 '94년 6월 16일 본당의 구역·반장들의 피정에서, 그리고 '96년 4월 30일 가톨릭 회관에서 있었던 서울대교구 여성 총구역장 연수회에서 사도직을 위한 강의를 할 때 사용했던 묵상자료이다. 이제 좀더 깊숙이 그리고 근원적인 선택을 통해 주님의 사도가 되길 바라면서, 이 묵상자료를 8일 피정이라는 형태로 내 놓는다. 주님을 따르는 사도로서의 길을 좌절과 배반의 번복 속에서도 충실히 걷기를 바라고 또 나 스스로 다짐하면서 드린다.

이 묵상자료는 우선 주님 앞에 나아가 (또는 홀로 묵상할만한 조용한 시간을 내서, 그것도 가급적이면 무책임하다고 말할 정도로 주님과의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우리 인생의 순간별로 정리한 "저는 양이오니, 주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를 먼저 가볍게 소리내어 읽으면서 훑어본다. 이렇게 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당신이 나름대로 지금까지 맺어 온 주님과의 정을 되새긴다.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를 기록한 성서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안에서 예수님께 향한 베드로의 영혼의 움직임을 살펴본다.('예수님과 베드로') 그리고 이런 베드로의 반향과 주님의 부르심을 통해, 당신 자신의 지금 삶과 그 영혼의 상태를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발견하고 그에 대한 주님의 용서와 치유, 부르심과 축복을 통해 사도직을 수행할 힘을 얻을 수 있다.('주님과 나') 이 때의 내 영신사정을 노트에 기록하면 좋겠다. 한 부의 묵상이 끝날 때마다 그 동안의 기록을 되돌아보면, 내 영혼의 상황과 나를 이끄시는 주님을 더 확연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과정 속에 있을 때 더욱더 주님께서 당신을 끌어당겨 주셔서 당신의 가슴 속에 주님의 사랑을 심어 주시고, 당신이 주님의 정을 느껴 주님과 복음의 사도직을 수행할 힘을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드린다.

끝으로 방송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해 준 본당의 황 리드비나 자매님과 그 녹음을 일일이 풀어 써준 김형근 학사님, 그리고 출판을 독려하면서 교정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준 홍 스테파니아 수녀님과 이 책의 취지를 기꺼이 받아주신 성 바오로 출판사 이 창욱 신부님과 최기영 수사님, 그리고 수고해 준 편집실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천주강생 1996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심 흥 보 (베드로)

저는 양이오니, 주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 해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은 저를 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은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에 참례할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에 참례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은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헤맬 때 주님은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은 성체성사로 적셔 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은 못 본 체해 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일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은 채워 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은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 앞에 와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더욱 더 깊이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저를 휘감아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히 쉬게 해주십시오.

아멘.



차 례


도움의 말·

Ⅰ. 제자가 되는 소명과 응답·

1일 소명·

2일 신앙고백·

3일 수임·

4일 사도-십자가의 길·

Ⅱ. 갈등과 배반·

5일 갈등·

6일 장담, 그러나 배반·

Ⅲ. 사도로서의 재출발·

7일 재회의 기쁨·

8일 신앙고백과 재수임·

8-1일 부속가·




Ⅰ. 제자가 되는 소명과 응답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마태 16,15-16)



1일, 소명


말씀 고기잡이 기적; 첫번째로 부르신 제자들(루가 5,1-11)

5 1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예수를 에워싸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2그 때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둔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 3그 중 하나는 시몬의 배였는데 예수께서는 그 배에 올라 시몬에게 배를 땅에서 조금 떼어놓게 하신 다음 배에 앉아 군중을 가르치셨다. 4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하셨다. 5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6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7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같이 고기를 끌어 올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두 배에 가득히 채웠다. 8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그의 동료들과 10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는데 그들은 다 시몬의 동업자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11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님과 베드로

이제부터 우리 각자의 인생사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 자신의 생애를 통해 드러난 우리 신앙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과정은 당신의 삶 속에서 주님을 경험하고 주님과 함께 했던 그 순간들을 되새겨보는 시간들이 되겠다.

우리 자신의 영적 여정을 살펴보고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온전히 의탁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시몬 시절부터 베드로로, 제자로부터 출발해서 사도가 되기까지의 영적인 여정을 성서를 통해 찾아보기로 하자.

편의상 예수님과 베드로의 영적 여정을 3단계로 나누어 보기로 하자. 첫 단계 예수님으로부터 시몬이 제자로 부름을 받는 것, 즉 예수님이 시몬을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루가 5,1-11)고 부르시고, 시몬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베드로가 된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고 또 예수님으로부터 제자가 된 후에 겪게 되는 시련들을 살펴본다. 시련과 갈등, 고민, 혼란, 세상의 위협 앞에서 겪어야 하는 어려움들과 현실 세계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그의 신앙상의 모든 괴로움들. 그런 면에서 그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 주님의 사도가 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베드로가 다시 주님을 알게 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사도로 임명을 받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구원을 위한 희생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사도의 영적 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여 우리도 영신 (성숙의) 과정을 밟을 수 있다.

오늘은 그 첫 단계, 제자로 소명을 받는,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베드로를 살펴본다. 루가 복음 5장 1절부터 11절까지 나오는 '첫 번째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 이란 성서 장면이다. 우리는 이 루가 복음에 나오는 기사 안에서 베드로의 소명사화, 소명사건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켜 시몬으로 하여금 주님의 엄위하심에 감탄하고 감격하여 제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4절)고 하신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반발부터 한다. 시몬이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5절) 그러나 거역해서는 안 될 권위라도 보았는지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5절) 라고 답한다. 여기서 우리가 참고로 바라볼 것이 하나 있다. 복음서 저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부를 베드로라고 하지 않고 시몬이라고 일컬음으로써, 그가 아직 베드로로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시몬이라는 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내가 어부인데, 그리고 내가 여기서 계속 고기를 잡아왔고, 여기 살고,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인데, 내가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더 잘 알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니?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보면 우리가 쉽게 말하고 또 자주 듣는 이야기 중의 하나일 수 있다. 내가 더 잘 알고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우리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다. 아니, 할 말이 아주 많다.

그런데 시몬에게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오늘은 지금까지 해 왔던 방법대로 그렇게 했는데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만 있다면 잡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빈털터리로 돌아와야 했던 시몬은 오늘 주님과 마주칠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편 시몬은 모르지만, 시몬에게 명령하는 이는 우리와 우주 만물을 지어내신 분이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찌 자기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따를 수밖에…. 어쩌면 주님 앞에선 우리 모두의 모습이리라. "싫어요." "못해요." "안돼요, 자신없어요." 하면서 뒤로 빠지고…. 또 한편 성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리라 생각하여 감히 엄두도 못내는 우리. 그에 반하여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면,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신부님, 수녀님)이시니 믿고 따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라시니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겠지요." 하고 따르리라.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쳤더니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

그래서 베드로가 응답한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8절) 주님 앞에 섰을 때 인간 모두가 느끼는 이 감정. 그러나 그 감정은 표현 그대로의 거부와 결별의 감정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표현은 오히려 청원에 가깝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시몬을 제자로 임명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10절) 이 말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나를 따라 오너라. 너는 내가 믿어 사랑하는 내 사람이다. 어서 가서 아버지의 나라를 세워라."



주님과 나

예비자들 중에는 나이가 들어서 오시는 분도 많다. 그분들에게는 지금까지의 인생과 삶에서 정말 어떤 의미로는 실수나 어려움과 고통은 있었지만 잘못 살았다거나 부족한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왜 교리반을 찾아왔을까? 그분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마치 신앙의 가르침으로 인해 자신의 경험과 사고들이 새로 깨어지고 거기 맛들이는 이런 여정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고 어떤 계기가 그들에게 주님을 찾아 나서도록 했을까? 그리고 여기 예수님과 베드로의 소명기사를 읽고 있는, 당신은 왜?

예비자들이 교리를 듣고 예비자 과정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맛들여 가는 과정에서의 그 기쁨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는 고백이 우리 안에서도 있었다. 그 설레임과 흥분으로 우리를 휘감고 뭔가 새롭게 들으면서도 그 중에 뭐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우리를 주님과 교회로 휘몰아 주던 그 때 그 시간을 기억해 보자.

그리고 오늘 다시 한 번 그 순수하고 감격스러웠던 그 때 그 순간을 되새기며, 우리 부르심의 순간을 오늘로 끌어올려 주님께 맞추는 시간을 갖기로 하자.

그리고 오늘 우리를 이렇게 주님 앞에 서게 만들어 준 계기를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고자 하시고 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들어보자.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출애굽기 3장 1절-22절(모세의 소명사화), 이사야서 6장 1절-10절(이사야의 소명사화), 예레미야 1장 4절-10절(예레미야의 소명사화), 에제키엘 2장 1절-3장 27절(에제키엘의 소명사화), 사도행전 9장 1절-17절(사울-바오로의 소명사화), 마태오 복음 6장 25절-34절(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차례..

2일, 신앙고백


말씀 베드로의 주님 체험(마태 14,22-33)

14 22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군중을 돌려 보내셨다. 23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 24그 동안에 배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25새벽 네 시쯤 되어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26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27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28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29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그에게로 걸어갔다. 30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질렀다. 31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32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33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과 베드로

주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베드로는 제법 기뻤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따르기 시작한 주님은 병자도 고치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마저 살리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오늘도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5,000명을 먹였을 뿐 아니라, 남은 것을 모았더니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한 부족 한 부족에게 다 나누어 줄 만큼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기적을 마치신 후 주님은 군중들을 돌려보내시고 기도하시러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다. 반면에 제자들은 배를 타고 떠났다. 제자들은 이런 기적을 연출하신 주님이 무척 자랑스러웠을 것이고, 또 한편 그 기적으로 군중들에게 빵을 나누어 줄 수 있었던 자신들이 마치 직접 기적을 베풀기라도 한 양 들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돌아가는 배 안에서 술이라도 한 잔 받아놓고 흥겨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풍랑이 일었다. 새벽 4시가 될 때까지 제자들은 거센 바람과 풍랑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인 자랑스런 주님의 사도들이 자연의 풍랑 앞에서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갑자기 유령 같은 물체가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고 느꼈고, 마침내는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구하러 오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 남편이 문을 두드리자, "누구세요?"하고 묻는 집안의 목소리에 "나야!"라고 답하는 남편처럼 주님은 "나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미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주님의 말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안심해라. 겁내지 마라. 인간 생명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만들고 주관하는 내가 왔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사는 것 같다. 즐기는 것도 한순간이지 어떤 때는 머리만 더 아프다. 그런데 어머니 품같이 아무런 부담 없는 주님! 그냥 그대로 안겨 있어도 아무일 없을 것 같은 편안함, 바로 그걸 주시는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감격해서 묻는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28절) 주님께서는 기꺼이 베드로의 원의를 받아 주신다. "오너라."(29절) 그러나 주님을 따라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는 거센 바람이 마치 자기를 덮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 저자는 형상이나 물체가 아닌 바람을 '느낀다' 거나 '맞는다' 라고 하지 않고 '본다' 라는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베드로가 겁에 질린 거센 바람은 베드로를 실제로 물 속에 빠뜨릴 만한 실체가 아님을 넌지시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물에 빠진 것은 베드로가 한 눈을 팔다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물에 빠진 것이지 거센 바람에 휩쓸려 빠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베드로는 곧 "주님, 살려주십시오!"(30절) 라고 주님께 청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참으로 베드로의 위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한편 우리는 그가 주님께 청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베드로는 주님이 오라고 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에서 내려 주님께로 가다가 물에 빠졌으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길을 포기하고 다시 배로 돌아오려고 했거나 뒤돌아서서 자기 동료들에게 살려 달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자기가 살 길이 예수님께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본능적으로 주님을 택했던 것 같다.

한 번 봉사하다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채 끝마쳤다거나, 잠깐 실습하고는 다 아는 듯이 멈춰 서 버림으로써, 주님을 맛들이지 못하고 그냥 떠나 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베드로는 떠나는 순간에도 주님께로 숨는다고나 할까, 주님께 매달린다.

그래서 그가 끝까지 주님께 신뢰하며 주님께 청한 공로로 주님은 그를 구해주신다. 그리고 주님은 순간적으로나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고 거센 바람에 자신을 빼앗겼던 베드로를 건져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2절) 하고 말하였다.

이상의 기사에서 우리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 혼란을 맞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혼란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제자들을 구해 주시러 오신다. 혼란은 제자들을 죽일 수 없지만 제자들이 그 혼란에서 스스로 지쳐 쓰러질 수는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선택하고 또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베드로를 받아주신다. 그리고 가령 그가 주님을 따르다가 좌절하거나 쓰러져도 그를 다시 바로 이끌어 주신다. 그래서 그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다시 한번 함께하려고 할 때 비로소 주님은 그와 함께 세상을 당신 품 안으로 거두어들이신다.



주님과 나

당신은 주님과 떨어져 있어서 혼란과 곤경을 겪은 일이 있는가? 또는 그 때 나나 우리 구역, 반 공동체가 주님을 모심으로써 안정을 찾은 적이 있었는가? 그 때 고통 속에 있는 당신 백성들을 구하러 오신 주님을 맞이한 적이 있었는가? 눈을 감고 묵상 중에 물(곤경, 혼란)에 빠진 나를 건져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껴 보자.

당신은 당신과 함께 살도록 당신에게 보내주신 가족과 이웃을 진정한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한창 혼란 속에서 헤매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자신들을 구하러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유령' 으로 받아들이고 놀라 경계하고 피했던 것처럼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가?

거센 바람은 베드로에게 무섭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었고 그래서 그는 무서운 생각과 거센 바람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걸어갔던 그 은총의 생활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들게 된다. 제자들의 첫 번째 유혹이라고 할까? 시련이라고 할까? 세례를 이제 받으려 하고 세례를 받고 주님의 길을 실제로 따라 걷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리라. 마치 실습생처럼 사도의 첫걸음을 시작하자마자 겪게 되는 어설픈 믿음의 현주소라고나 할까.

그러나 한편 베드로는 자신을 억누르고 괴롭히고 있던 현실의 아픔 속에서 벗어나 주님께로 나아간다. 당신은 주님을 온전히 선택하고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데서 오는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가? 뇌물의 구조악 안에서 홀로 떨어져 마치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는가?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우화에 나오는 것 같이 아무 것도 없는 꼭대기를 향해 먹이사슬과도 같은 욕망의 탑 속에서 인생의 정력과 영혼을 소비하며 혼란 속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는가?

베드로는 물에 빠지자마자 "주님, 살려주십시오."(30절) 하고 청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베드로처럼 이렇게 주님께 애원하는가?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유혹 속에 빠졌을 때, 우리는 유혹에서 헤어나려는 생각과 주님께 되돌아가고자하는 결심을 하는가 하면, 오히려 어떤 때는 정반대로 그 유혹이 더 좋다고 느낄 때도 있다. 마치 이가 썩어 가는 줄도 모르고 지금 달고 맛있는 사탕을 입에 물고 계속 빨아대는 어린아이처럼. 그 유혹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고 싶고, 심지어는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저 있다. 그리고 기도는 성당에서 하지마 세상을 사는 것은 나니까 내가 살 수 있을 만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어쩔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결코 그 유혹에서 나와 주님께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교회 안에서도 창피함 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망설이고 가까이 다가서거나 직접적으로 주님께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한번 미사를 빠지게 되면 계속 빠지게 되니까 못 가게 됐다고 하는 아주 작은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람들 앞에서 스캔들이 될 만한 부끄러운 일들을 했을 때. 신앙공동체 안에서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거나, 또는 자기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곧바로 고해성사를 보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는 에이!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누가 나를 반기지도 않고, 내가 어려울 때 위로해 주지도 않았기에 반발심으로, 사람들이 나를 아는데 나를 반겨줄까 하는 이유로, 자기 스스로 자격지심 때문에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충분히 도와 주지 않거나, 또는 자기한테 먼저 와서 가자고 청하지 않은 이웃을 애써 핑계대면서, 스스로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더 많은 냉담의 시간과 주님과의 결별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경우도 본의 아니게 있는 반면에, 베드로는 이렇게 용기를 내서 물에 빠지자마자, 유혹에 빠지자마자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즉시 주님께 청한다.

우리가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어두움 속에, 고통 속에 있을 때, 정말 예수님이, 예수님의 흔적이 코끝만큼이라도 보일 때, "예수님!"하고 청하는, "주님 저를 당신의 제자로, 당신의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당신을 따르도록 불러주시고, 힘을 주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오로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좀더 잘살기 위해서, 좀더 얻기 위해서, 더 많은 재물과 부를 누리기 위해서, 또는 나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청하는 것은 쑥스럽기도 하고 왠지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니까. 주님께 청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제자로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더욱더 당신께 가까이 가게 해주시고, 이 어려움 속에서 나를 제자로 다시 받아 주시고 나를 불러 주십시오. 나에게 이 길을 헤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건져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청할 일이고 혼란 안에서 헤쳐나갈 길이다.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열왕기 상권 18장 20절-40절(가르멜 산 위에서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 마태오 복음 5장 1절-12절(산상 설교)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차례..

3일, 수임


말씀 베드로의 고백과 수임(마태 16,13-28)

16 13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하고 물으셨다. 14"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15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셨다. 16"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18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반석'이라는 뜻)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20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은 왕의 부정을 나무랄 정도로 당대의 의인으로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또 한편 '엘리야.' 그는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이 가나안족의 농사의 신인 바알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농사를 풍요롭게 해주는 신이 바알인지 야훼 하느님이신지를 기적을 통해 판가름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현실적인 이득과 신앙의 갈림길에서 참 신앙의 길을 걷도록 한 예언자이다.

'예레미야.' 그는 자신의 예언이 사람들에게 한낱 비웃음과 조롱거리밖에 안되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계속 예언해야 했다.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을 섬겨야 살 수 있다고 하셨다는 것을 전함으로써 사람들의 저주를 받아 죽어야 했던 비운의 예언자이다.

그리고 '예언자 가운데 한 분', 그 사람은 그냥 예언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성격상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준 '모세'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당대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이라고 기대하던 예언자들을 예수님과 연결시키며 자신들의 메시아관을 예수님께 투사시켰다. 또 한편 예수님이 자신들의 그 기대와 바람을 들어주기를 바랬다.

그런데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라고 고백한다. 사람들의 머리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그려져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 속에 함께하시는 하느님. 나와 함께 사시는 하느님. 바로 그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우리를 찾아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우리 앞에 서 계신 인간 예수. 그분은 하느님의 약속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는 선생님께서 가르쳐 준 대로 또 자기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사람들에게 들었던 대로, 그리고 자기 민족이 그렇게도 기대해왔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고백한다. 어떻게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명확하게 지명하여 말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어도 신앙인들로부터 그리고 교회의 교리시간에 듣고, 신앙공동체의 분위기 안에서 어렴풋이 느껴 "그분이 주님이다." "예수님이 구세주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확실한 체험 없는, 그 온전하지 못한 인식에서 나온 베드로의 고백을 부정하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17절)-그저 그냥 듣기 좋으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너를 통해서 이야기하시도록 너에게 계시하고 심어주셨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인간에게 산앙을 주시는 주님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자연인으로 매일매일 먹고사는데 누리는 은총과는 별도로, 마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권리처럼 제자로서의 일을 수행하고 따라가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이 있다. 직책 때문에 지게 되는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직책을 통해서 오는 은총이다. 물론 직책을 통해 오기 때문에 직책을 떠나면 그런 은총은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으로는 오히려 반대로, 주님 앞에서 영세를 받을 때 견진을 받을 때, 또는 책임 있는 직책을 맡을 때, "아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자격이 없어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일이 많아요. 저는 안돼요…" 등등.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하면 야박한 것일까?

우리는 모든 어려움, 능력, 자격 등과 같은 것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 한낱 핑계일 뿐!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직접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령 나에게 분에 넘치고, 또 실제로 할 수 없는 일인데도 사람들이 그냥 나에게 떠맡긴 것이라면, 또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되지 않을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이라면, 교회를 통해서 들려 오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부르심이라면, 우리 부족한 것과 관계없이 하느님께서 그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없이 나를 부르신 대로 봉헌하고 주님께 맡기면 된다. 그 외에, 오히려 우리가 내세우는 조건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부의 형식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그렇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직책을 주신다. 교회 즉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백성을 베드로에게 맡기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18절) 주님이 인간을 바탕으로 당신 교회를 세우시려 한다. 영광스럽고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것만해도 벅찬데 하늘 나라의 열쇠를 줄 테니까 땅에서 열면 열리고, 땅에서 닫으면 하늘에서도 닫게 된다고 하시다니. 고해성사의 사죄권을 포함한 하느님 권능의 위임은 정말 조심스럽다 못해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주님을 따르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 그리고 당신 전능의 위임에 감사한다.



주님과 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인가?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인가? 당신의 사업에 부도를 막아 줄 은행장인가? 또는 당신의 건강을 책임져 주는 의사 정도로 격하되어 있지는 않는가? 심지어 당신의 잘못에 대한 손해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당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살게 되도록 기도함으로써 예수님을 당신의 사적 수호신이나, 결국 미신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어떤 교우는 그 동안 교리시간이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 주님이시다." 라는 얘기를 쭉 들어 왔지만 참 피부로 와 닫지 않았는데 마태오 복음 14장을 묵상하다가 자기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 자기를 다시 살려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아, 주님이시다, 주님!" 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주님이라는 단어와 나의 주인, 나의 생명을 살려주시는 주인, 주님임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당신은? 주님이 당신 생애와 삶의 진정한 주인인가?

욥에게 종기 부스럼이 생겨서 그의 부인이 하느님을 욕하고 저주하라고 했을 때 욥이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욥 2,10)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나에게 다 겪어야 할 것, 또 내가 해야할 것, 필요한 것을 다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은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하느님은 다 주시는데 그것을 좋다 나쁘다 하고 판단하는 것은 편식하는 우리 자신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이냐 아니냐, 좋은 것이냐 아니냐 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결국 지금 내게 이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작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편식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대로 사는 것이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는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은 어떻게 사는가?

신자들은 본당 신부가 왕이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주임사제가 겪는 부담이 있다. 교회 공동체의 책임자요, 주님의 대리자라는 입장에 섰을 때, 사목자로서 수행하는 일의 성격이 신적인 것이며 또한 그 일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기에 그렇다. 한 인간이 겪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찬 권한 위임이기에 보람있지만 동시에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사제가 주님의 일을 할 때마다,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식별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시간도 걸리고 또 많은 변수들 안에서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결정하여 받아들이기까지에는 상당한 진통과 실천적이고도 (교회의) 역사적인 식별과정을 거쳐야 한다.

실제로 '이것이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부담이고 짐이 되겠지만, 한편 주님께서 우리를 신뢰하시고 맡겨주셨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성탄때 성모님의 품에 안겨있는 예수님을 묵상하고 기억할 때마다 예수님이 성모님 품에 안겨 있다기보다는 성모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두 손으로 떠받들고 넘겨 주시는 듯하다. 그 조각상들을 볼 때마다 하느님이 인간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 곧 자기목숨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다. 예수님의 목숨을, 그러니까 성모님이 혹 실수라도 뚝 떨어드리면 아기 예수가 다치고 위험하게 되는데도 인간에게 당신을 맡기시는 하느님은 무모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고 신뢰하시지 않는가? 정말로 커다란 주님 사랑의 표현이다. 이러한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맛보면서 우리는 주님께 희망을 두게 되지 않는가?

우리 모두 "자격이 없다." "사는 게 죄다." "완전하지 않다." 라고 말하는데, 완전하신 그분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신다 표현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맡겨주신다. 이것은 참으로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우리들의 입과 행동 그리고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기로 우리를 택하셨다. 내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서 평가받는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권한을 떠맡은 나의 입장에서보다 나에게 당신을 넘겨 주시고 맡겨 주신 주님의 입장에서 돌이켜 볼 때,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베풀어 주고 계시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또 한편 우리는 실제로 그분이 맡겨 주셨기 때문에 행할 뿐이고, 실제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몸소 하신다. 그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라고 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처럼 그분이 하시는 일을 염두에 두고 걸어나가면서, 그분이 스스로 열매 맺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참으로 우리가 얼마나 커다란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 안에 놓여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늘 나라는 시작된다는 참으로 신비스러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하느님의 영광은 단순히 인간이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네,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지요." 라고 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다니 얼마나 기적 같고 신비스러운가? 마치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한 마디 말씀으로 "…이 되어라 하시자, …라 하신 그 말씀대로 되"(창세기 1장 참조)는 것과도 같이 말이다. 나무를 키울 때 씨를 심고 물을 주고 나서, 봄에 싹이 틀 때 얼마나 탄성을 올리게 되는지! 딱딱한 흙 속에서 떡잎이 나오기 시작할 때, 그것이 정말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신선함과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이고, 그 업적이 주님이 선택한 나를 통해서 일어나도록 섭리하신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땅에 씨를 심는 것 정도인데도 주님은 그 씨를 땅에 심을 나를 필요하다고 부르신다. 또 나에게 주님의 씨를 맡기고, 나를 통해 씨를 심고, 거름을 주어 싹트고, 자라게 하시고자 하는 하느님 신앙의 역사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사랑과 주님 은총에 참여하라는 초대에 감탄과 기쁨을 동시에 갖게 된다.

당신은 당신을 주님 사랑으로 초대하시고, 그 사랑의 잔치인 세상 구원사업에 참여하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의 그러한 초대에 겸손되이 응답하며 그런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는가? 또 자신의 뜻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좇아 나서고 있는가?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열왕기 상권 19장 1절-18절(엘리야가 호렙산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만나다.), 루가 4장 16절-30절(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차례..

4일, 사도-십자가의 길


말씀 수난에 대한 첫번째 예고와 예수를 따르는 길(마태 16,21-28)

16 21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 주셨다. 22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된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말리었다. 23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 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24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5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27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28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예수님과 베드로

마태오 복음 16장 21절에서 23절까지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 장면에서 하느님의 일과 대비되는 사람의 일, 사람의 일 때문에 지연되고 연기되는 하느님의 계획. 더 나아가서 사람 때문에 포기되고 무시당하는 하느님,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베드로는 자기를 사랑해 주시고 자기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겨 주셨을 뿐 아니라 자기 미래를 책임져 주셔야 할 분이 이렇게 갑자기 죽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눈 앞이 캄캄해졌으리라. 그것도 오히려 주님을 뵈오면 참으로 감격하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주님께 권좌를 내드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에 부풀었던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거꾸로 잡혀 죽는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자기 개인의 의식구조 안에서도 훌륭한 분, 좋은 분이 왜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고 있어서도 안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님, 안 된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22절)

그에게는 그러한 죽음이 하느님의 구원 방법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날 기회라는 것을 깨닫기엔 아직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에겐 선하신 분이 왜 악인처럼 죽어야 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주실 분이라고 믿고 기대왔던 베드로에게는 아예 자신에게 떨어지는 날벼락이었으리라.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지탱하고 있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인간세계의 가치관과 행동방식에 대해 쐐기를 박는다.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움직임, 또 세상에서 생각하는 가치관을 주님에게 적용하지 말라. 그리고 한술 더 떠서 그것과 연관하여 주님을 거기에 따르라고 말하지 말라. 주님은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행동방식, 세상의 질서를 따르러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 하느님의 삶,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하시면서, 주님의 길을 막는 베드로에게 심지어는 사탄이라고까지 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23절) 네 입장에서, 너와의 이해관계에서 보지 말라.

"하느님의 일은 곧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요한 6,29)

또 한편 하느님의 일은 현실적이고도 물질적인 어떠한 보상도 보장도 없다. 오히려 십자가와 죽음만이 기다린다는 표현이 더 현실적이리라. 애초부터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기"(로마 14,17)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하늘 나라는 어느 누구 한 개인의 것이 아니기에 혼자 들어갈 수도 어느 누구 한 사람의 계획과 구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느 누구 하나가 하느님 백성을 구원한다고 나서기 시작하면 그는 사탄이 될 것이다. 하늘 나라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께서 통치하는 나라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만들고 또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과 가치관 등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구조와 사고방식 및 행동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세례를 받으러 성당에 나왔다는 그 자체가 주님을 따르려고 왔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실제로 성당에 왔고 교회의 일을 시작한다는 그것이 벌써 주님을 따르는 일이다. 그런데 잡음이 생긴다. 우리가 볼 때 우리 자신이나 모든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보이지 않고, 나도 온전히 주님을 따른다고 확답하거나 자신 있어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복음을 실천하고 교회를 건설하는데 장애가 될 정도로 거대한 장애물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뇌리 속에 끝까지 남아있어, 포기하기 힘든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기 수준과 자기를 떠나서는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주님의 일이고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고 단지 나는 도구일 뿐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임할 때 주님의 뜻과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이해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이해는 자연스럽게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자기의 일처리 방식대로 하거나 또는 자기의 생각대로 풀려고 하고 자기의 방식대로 하려고 하면,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걸림돌이 되고 결국은 자기라는 장애물 앞에서 부딪치게 된다. 처음엔 주님을 따른다고 시작했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나섰다. 그러나 점점 자기 안에 주님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주님이라는, 주님의 일이라는 껍데기와 같은 그럴듯한 명분 안에 자기라는 공룡이 대신 남아 있는 것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자기를 버리지 않으려고 하고 또 자기 공동체의 부분을 자기의 아픔과 어려움으로 감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이 될 것이고 결국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렇게 계속 자신의 입장과 상황을 강조하고 강변하다 보면 주님을 점점 더 따르게 되는 것이라 오히려 주님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자기 십자가! 누구나 한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맡아야 할 역할이 있다. 물론 자기의 개인적인 단점이나 어려움, 부족한 자격, 이런 것도 십자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공동체 입장에서 본다면 공동체란 말이 의미하듯이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원들 모두의 것이다. 그런데 공동체 구성원 중 어느 하나라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남이 따라오도록 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하려면 차라리 공동체의 역할을 맡지 말아야 한다. 맡지 말아야 한다기 보다는, 맡을 사람은 자기 생각과 계획을 버리고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들을 듣기도 하고 또 모아서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서 결정하고 진행해야 된다. 그런 면에서 구체적인 직책을 가졌느냐 갖지 않았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사람들과 함께함으로써,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자신을 바쳐 기여해야 할 역할, 그것이 바로 자기의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주님과 나

우리 신자들이 가끔 "신부님이 알아서 하세요. 저희는 신부님이 하시는 대로 하죠. 저희는 다만 신부님이 하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라고 말한다. 물론 신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마음을 못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야기는 하지만 신자들은 속으로 "신부님이 이렇게 하시겠지" 하면서 자신 나름대로의 결정을 이미 짓고 있기 일쑤이다. 대부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이 생각해서 무리가 가지 않는 방법대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신부님이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큰 무리가 없었으면, 또 어떤 의미로는 지금 자기가 누리고 생각하고, 지켜왔고, 하려고 했던 계획과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또 아니었으면…. 그런데 만일 실제로 신자들이 생각하는데서 벗어나면, 말로는 "신부님이 알아서 하세요." 했지만 실제로 신자들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아니 거기에다 현실적이고 재정적인 이해관계라도 개입되게 되면 오히려 정반대가 되기도 한다.

과연 하느님의 일,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사제의 입장에서 보자. 사제가 해야 하고 또 한편 사제에게 주어진 그 수많은 일, 그 중에서도 정말 하느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사제라는 직책을 가지고, 사제만이 할 수 있고, 사제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일은 바로 사제생활의 첫 번째로 꼽는 복음선포, 성사집전, 성사적인 행위들이며, 바로 그러한 일 안에서 주님을 찾고 드러내는 일이다.

그런데 성주간이나 성탄 때 사제가 사람들 판공성사 주고, 예절연습하고, 전례를 계획하다보면 정작 아기 예수께 대한 깊은 기대와 감사, 열정과 기쁨 그리고 은총이 사제의 마음 속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에 지치고 피곤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다.

참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먼저 거듭거듭 복음을 이루고, 복음이 현실로 드러나도록 하는 그 일이다. 마치 주님의 발치에 앉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에 목말라하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또 그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생명과 은총의 새 삶으로 초대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갈망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삶이고, 우리 사람의 일보다 우선으로 하며 또 앞장서서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하고,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일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일, 내가 맡고 나에게 맡겨진 일을 먼저 함으로써 또 모든 것에 앞서 그 일이 복음적이고 그분의 뜻과 복음을 이루는 것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내 입장에서 나만이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할 하느님의 일은 무엇인가?

한편 우리가 신앙을 가르치고 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의 행사나 전교사업을 할 때,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교의 방법과 일치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현존하실 수 있는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과 새롭게 받아들여 더 심화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 식별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주변을 점검해보자. 본당에서 체육대회를 한다고 할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무엇인가? 어느 부류 사람들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가? 준비하는 사람들이 자신들 부류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꾸미고 있지는 않은지? 그 계획 속에 유아와 어린아이의 게임이 몇 퍼센트나 차지하는가? 또 만일에 중고등학생이 어른을 상대로 게임을 할 때 청소년들에게 어느 정도의 가산점을 주는가?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에게 더 점수를 가산해 주기는 커녕 학생들의 원의와 관계없이 어른들이 일방적으로 "너희는 어른들과 함께 하는데 다소 억울한 판정이 있더라도 너희들이 참고, 어른들을 공경해야지." 하면서 오히려 어른들에게 내용적인 가산점을 준다면…. 이것은 사회의 통념에 따르는 것일 뿐이지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듯 결코 보호받아야 하고 또 기억되어야 할 가난한 이들의 범주에 드는 청소년들에게 주는 기회라고 말할 수 없다. 또 어린아이와 연관된 문제만이 아니다. 노인들에게 시간을 얼마나 할애하고 있는가?

물론 한 행사를 진행할 때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없고, 또 아이들이나 노인들만을 위해서 할 수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중 우리가 준비하는 연령층이나 또는 계획하는 사람들의 연배와 부류 그 한계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함께 즐거움을 찾고자 할 때, 그것이 사회의 방식과 뭐가 다른가?

체육대회뿐만 아니라 주일학교에서 캠프를 간다고 할 때 사회캠프나, 우리가 집집이 끼리 끼리 모여서 놀러 가는 단체 캠프하고 성당에서 준비한 캠프하고 무엇이 다른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성당 캠프 안에서는 주님이 정말 함께하고, 주님의 모습이 드러나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만나 볼 수 있도록 '주님이시라면 무엇을 어떻게 하실까?'를 고려하고 염두에 두면서 우리가 계획하고 프로그램 짜고 진행해 나가는지? 아니면 세상에서 좋다는 것, 재미있다는 것을 가져다 놓고는 이렇다 할 뚜렷한 주제도 없이 단지 사랑이라는 큁나 마디 안에 다 포함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전에 사회에서 했던 그 방식 그대로 똑같이 그 일을 반복하면서 "재미있었다. 좋았었다." 라고 하는지? 과연 좋고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냥 놀러가는 것인지? 과연 성당 캠프를 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계획하는 대로됐을 때 주님께서 현존하시고 주님이 머무시어 공동체 안에서 나눔과 섬김, 친교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행사와 공동체의 장이 되는가?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예레미야 12장 1절-6절(예레미야의 탄원과 그 질문에 답하시는 주님), 루가 복음 9장 57절-62절(예수를 따르려면), 로마서 8장 35절-39절(하느님의 사랑)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Ⅱ. 갈등과 배반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요한 6,67-69)



차례..

5일, 갈등


말씀 생명의 빵(요한 6,22-69)

6 (빵의 기적이 있은 후) 25그들은… 예수를 찾아내고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30그들은 다시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읍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하고 말했다.

42"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51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2유다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53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54"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56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58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 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60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다.

66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67그래서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8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69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과 베드로

오늘부터는 베드로의 영적 여정을 통해 본 개인 신앙의 역사, 그 두 번째 주제로서 갈등을 보자.

우리가 갈등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주님을 따르는 데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우리가 본질적으로 복음을 따르는 제자와 사도로서의 갈등은 복음 앞에 선 인간이 그 복음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게 됨으로써 자연히 부닺치게 되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복음을 산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까지 누리고 생각해왔던 세상살이를 바꾼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구조 안에서 내가 세상 안에서 살아왔고 그 안에 속해 있었는데 세상의 가치관과 행동방식이 복음이 요구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민을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갈등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습관이 복음과 다르거나 복음에서 세상에 거스르는 가르침을 듣게 될 때 생기는 갈등이다.

요한 복음 6장을 보면 하느님 나라와 세상 사이에서 인간이 겪게 되는 갈등의 흔적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나온다. 주님께서 5,000명을 배불리 먹인 기적을 베푸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는 배에 타지 않고 제자들끼리만 타고 떠난 것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과 함께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나선다. 티베리아에서 예수님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가파르나움으로 떠났다. 호수를 건너가서야 주님을 찾은 그들은 아주 반갑게 예수님께 인사한다.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25절) 그러나 예수님을 그렇게도 애타게 찾아 나선 이유는 간단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26절)이고 다시 배불리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동기는 바로 수고없이 공짜로 들어올 돈이다.

그들의 요구는 참으로 끈질기고 오직 하나 뿐이다. 하느님의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모세는 우리 조상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먹였습니다."(30절) 라며 정말 돈이면 다라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인간의 내면적이고 영원한 미래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도록 하고 오직 그들에게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풍요만을 추구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러한 현세주의적인 가치관은 오히려 육적이며 물질적인 관심사로 인해 인간의 인격과 정신 그리고 내면세계와 영적인 실재, 그리고 그 가치를 향한 그들의 눈을 가리게 하고 질시와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42절) 그들이 아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그의 육신의 아버지가 목수인 요셉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수인 요셉이 그렇게 사람들이 굽신거리고 어려워할 정도의 힘과 재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나자렛같은 데서 결코 신통할 것이 나올 수 없다.(요한 1,46 참조)고 느끼듯이 말이다.

이들의 의도와 바람은 예수님을 재촉하다 못해 분노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웃기고 있네. 무슨 말라빠진 소리야! 먹을 걸 달라는데 먹을 건 주지 않고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고귀함과 존엄함이 밥 먹여 준대?

일부의 제자들조차 주님이 너무하신다고 느낀다. 밥을 주려면 빨리 주지. 왜 저들이 온지 뻔히 알면서 이렇게 장황하고 어렵게 이야기만 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기를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니, 정신병자가 아냐? 내가 따르기엔 너무나 고차원적이야. 내가 받아들이고 몸담기엔 현세적인 부담이 너무 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0절) 그래서 "이 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66절)

그러나 베드로는 역시 베드로이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67절)는, '이제 내게서 더 나올 것도 없고, 네가 지금 보듯이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해서 너에게 아무런 현세적인 이해상 이득을 줄 수 없는 나에게서 꾸물대지 말고, 아예 지금 그냥 떠나지 그래?' 하는 주님의 질문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8절) 라고 대답한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 빵으로 육신의 허기를 채워주셨듯이, 말씀으로 인생의 갈증과 바램을 채워주시고 완성시켜 주시는 주님. 우리가 따르는 분은 바로 이분이며, 그러기에 갈등을 가져오는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관심사를 아예 버리고 떠나서, 주님의 발치에 와 앉아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뜻에 따라 생명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생명의 나라는 주님을 믿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림으로써 시작되는 나라이다.


주님과 나

주일날 일한다는 것. 주일파공 문제. 과거에는 많은 신자들이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해방될 때까지 이집트인들이 겪는 10가지 재앙과정 속에서 핍박당했던 노예신분인 이스라엘 백성들. 또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섬기는 제사를 드리고자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얻는 주님의 날, 주일.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주일이 우리들의 노는 날이 되어버렸다. 주일날은 일하면 안 된다. 그런데 한편 요즘은 주일날이 놀러가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정도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휴식, 레크리에이션이나 또 새로운 창조, 새로운 일을 위해서 쉬어야 하는, 보람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노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것이고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주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또 이웃에게 봉사함으로써 자기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다시 한 번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면 쉬고 노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주일날 일하지 말라는 것은 쉬라는 것과 아울러 자기 개인 생계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봉사하라는 것이다. 주일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우선 주님께 바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더 충실히 응답해야겠다.

그리고 또 한편 세상살이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낙태 문제다. 가정 속에서도 어려운 문제가 많다. 인구조절이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살인들. 옛날에는 나이가 많고 형제가 많으면 다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다복한 집안이 아니라, 세 명이 넘으면 "아이들이 몇 명이에요?" 라고 질문했을 때, "많아요." 하면서 대답하기 어려워하고 마치 죄인처럼 고개마저 숙여야 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생명은 자기가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아들 낳고 싶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싶어서 딸 낳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조절하려고 하고 자기 소유물인 양 자기 자신의 이익과 눈앞의 이해관계를 위해 마음대로 한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대해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죽여버리는 모습들. 선거 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다가오는 유혹들. 이런 것들이 갈등의 시작이 된다. 당신은 어떤가? 주님이나 주님의 교회가 당신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담고 있거나, 요구할 때가 있는가?

두 번째로 자신을 희생해야 할 때, 어떻게 보면 신앙을 갖는다는 것, 시간도 뺏기고 돈도 뺏기(?)는 일이다. 그렇다고 가정에 축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리고 진리는 그 자체로 실행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 하나만으로 희생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일이다.

또 세 번째로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동떨어진, 또 현실을 거스르는 신앙 앞에서 갈등을 안할 수가 없다. 매년 봄에 우리가 교사에게 보내는 촌지 문제 등, 참으로 돈 문제에 관해선 사회가 일종의 먹이사슬과도 같아, 그 안에서 복음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에 둘러 쌓여 있는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회악은 관행과 예의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지 않는 뇌물구조이다. 진정 벗어날 수 없는 문제인가, 아니면 벗어나기 힘들다고 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조장하고 있는 것인가? 주님 앞에서 그리고 사회와 후손들 앞에서 죄를 거듭 짓고 있다.

이러한 것들 외에도 우리에게 갈등이 되는 것이 있다. 그 네 번째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교회 안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나 행동들이 있다. 모욕을 당할 때, 상처를 주고받을 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 이런 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믿거라 하며 안심하고 내 진심을 얘기했는데 그 말이 퍼져나가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을 때, 또 한편으로는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닌데, 충고의 의미에서 또 사랑의 정신으로 해준 말인데 발끈해서 오히려 거꾸로 나에게 보복하려고 할 때, 정말 난감하다. 그 사람은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나에게 발끈한 것인데도, 내가 받아들일 때는 나에게 화를 내고 나를 무시하는 것 같고 나의 좋은 뜻을 거꾸로 보복하는 것 같아서 괴로움을 당한다. 직책에서 오는 십자가라고 할까? 악역을 담당해야 할 때 겪는 그런 어려움이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어떤 땐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형제들로부터 떠나게 만든다. 아니 우리가 이런 것을 핑계삼아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주님을 위해 온전히 희생하고 헌신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떠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갈등이다. 특별히 복음과 부딪히기 싫고 복음을 따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당신도 혹시 이런 장애에 걸려 넘어져 있지 않은가? 주님과 교회의 가르침이나 아픔을 당신의 것인 양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또 그런 갈등을 할 때 주님의 성체성사를 통해 힘을 얻어서 더욱더 주님의 사도가 되고 있는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시기까지"(1요한 4,10) 하신 하느님 그분의 사랑만이 실제로 우리를 살게 해주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에서 활동의 힘을 얻고, 어느 누구의 방식으로 활동하는가? 그리고 주로 언제 주님을 배반하거나, 놓치거나,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되는가?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예레미야 15장 10절-21절(예레미야가 다시 부르심을 받다)과 17장 14절-18절(예레미야의 기도), 18장 19절-23절(죽음 앞에선 예레미야의 탄원), 마태오 복음 19장 16절-26절(부자 청년; 낙타와 바늘귀)를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차례..

6일 장담, 그러나 배반


말씀 베드로의 장담과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마태 26,31-35.69-75)

6 31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 32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3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34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5베드로가 다시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69그 동안 베드로는 바깥 뜰에 앉아 있었는데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 와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 하고 말하였다. 70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71그리고 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자렛의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72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73조금 뒤에 거기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 오며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 패요. 당신의 말씨만 들어도 알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74그러자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바로 그 때에 닭이 울었다. 75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예수님과 베드로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라고 서약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서약의 근거는 베드로의 예수 인식과 예수 체험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요한 6,69) 이렇게 베드로와 함께 우리는 주님 앞에서 갈등하면서도 스스로 굳건해지려고 다짐하고 노력하며 주님께 서약까지 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주님은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26,31)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26,33) 라고 선언한다. 또한 요한 복음에서도 주님이 "지금은 내가 가는 곳을 따라 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13,36) 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13,37) 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신앙수준과 장담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라고나 할까? 순수하고 강인해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온실이라는 조건과 보호막 안에 서 있을 때뿐이다. 세상에 나와서는 죽거나 시들어 버리는 화초의 모습이 수난사화 안에서 드러나는 베드로의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모습은 현실사회 안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는 우리 신앙의 모습이기도 하다. 장담은 했건만 결국 배반자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나약한 인간 베드로.

마태오 26장 70절에서 대사제 관저 바깥 뜰에서 여종 하나가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 하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소." 라고 부인하였다. 또 72절에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라고 했으며, 다시 또 74절에서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그러나 한편 이어지는 구절에서 복음서 저자는 "바로 그 때에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26,74.75)고 기록함으로써, 베드로가 명확한 의지의 배교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성으로 인해 배반했음을 암시한다.

주님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참된 행복을 한마디로 종합해서 말씀하시면서 이 수난 장면을 예고하신 바 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5,11)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기꺼이 주님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지만 주님의 모습을 따르는 그 모습이 어설프기도 하다. 또 한편 아무런 시련도 예상치 못하고 또 겪지도 않은 상태에서 결심하고 다짐했던 모든 고백과 봉헌, 서약들이 드러나야할 정작 순간에 우리가 온전히 채우지 못하리라는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혹시라도 베드로가 좌절하여 아예 떠나버리거나 인생마저 파멸되지 않고,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베드로에게 미리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거든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다오."(루가 22,32)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우리의, 또 과거 우리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배반과 그 배반의 여정 안에서 거듭 일으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새롭게 태어나게 해 주시는 주님, 그 주님의 자비와 섭리에 의한 배려를 시편 기자와 함께 기억한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원수들 무색케 하시고자 불신자 복수자들 꺾으시고자,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우러러 당신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통틀어 양 떼와 소들과 들짐승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며 바닷속 지름길을 두루 다니는 것들이오이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시편 8,2-10)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그 사랑에 감흡할 뿐이다. 우리를 위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어 오셨고, 당신 생애를 다 바쳐 하늘나라를 알려 주셨으며, 우리 배반의 십자가 위에서 마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용서를 청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루가 23,34)이라는 희망마저 안겨 주셨다. 그리고 연약하면서도 목이 뻣뻣한 우리에게 당신 부활과 하늘나라의 승리를 알려 주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안식일 다음잘 아직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루가 24,1 참조) 저녁 늦게까지 ("이젠 날도 저물어 저녁이 다 되었으니" 루가 24,29 참조) 수고해 주셨다. 승천 후에도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몰말라하는 이들에게 오늘도 찾아 오신다. 끊임없이, 아낌없이, 제한없이, 찾아오신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앞에서 요나처럼 도망칠 곳조차 없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시편 8,4)


주님과 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문제들이 있다. 다 지치고 힘들어서 또는 어떤 누구하나 욕먹고 피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다. 누군가는 초가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히듯이 자기를 태워 사람들을 밝게 비춰 주기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또 아무도 스스로 죽고자 하지 않는다. 죽어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작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죽어야만 아니 죽음으로써만 부활할 수 있다는 그 부활의 참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다.

또 한편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미리 지레 짐작해 버리고 쉬쉬할 뿐,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떠맡으려 하지 않고 아픔과 어둠 속의 상황인데도 '난 몰라요.' 하면서 뒤로 빠지는 이도 있다. 또 수하 사람들의 실수나 한계를 들춰 내는, 다시 말해 다 알고 있으면서도 탓을 하고 탓하는 쪽으로 많은 것을 부당하리 만치 돌려버린다. 오히려 아는 자로써 보충하거나 채워주려고 하지 않는다. 또 내가 한 일이 아니고 내일도 아닌데, 내가 그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가? 오히려 떠맡으려고 마음을 잡았어도 누가 나에게 떠맡으라고 요구하는 듯한 눈초리라도 보이면 불편한 감정마저 들어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 사람들이 감추고 싶은 부분을 감춰 주고 감싸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울하다는 감정을 안고 자기 변명과 책임회피와 책임 전가를 통해 상대의 과실을 굳이 드러내려 한다. 자기 살기 위해서 이웃을 딛고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사회의 논리인가?

우리가 무슨 일이 생길 때, "에이!" 라고 눈감아 버리고, "모두 다 그런 거지." 하면서 그냥 떠나 버리거나 포기해 버리고 또는 고발하고 단죄는 할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이기려고 고치려고 하지 않고 또 고치려고 하지만 자기 부담으로 그것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 데서 오는 문제도 있다. 또 어떤 때는 일을 도와주거나 새롭게 하여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밝힌답시고 탓만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책과 그 실천방안조차도 모색하지 않고 넘어가 버린다.

그냥 똑같이 오히려 배반자의 한 사람처럼 다 도망쳐 버렸으면서도, 직접적으로 유다가 배반하였다고 해서 유다만 탓하고, 자신들은 배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고 다시 돌아오도록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오늘 내 귓전에 메아리쳐 울리게 하며, 주님의 자비와 위로 앞에 잠겨 마음 속 깊이 통회와 회개를 하자.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시편 8편(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는가), 이사야서 43장 1절-7절(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되찾으신다.), 고린토 전서 13장(사랑)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Ⅲ. 사도로서의 재출발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요한 21,17)


차례..

7일, 재회의 기쁨


말씀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요한 21,1-13)

21 1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2시몬 베드로와 쌍동이라는 토마와 갈릴레아 가나 사람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그 밖의 두 제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3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이튿날 날이 밝아 올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미처 몰랐다. 5예수께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것도 못잡았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그물을 배 오른편애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 들었다. 7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 들었다. 8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잔뜩 걸려 든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들이 들어 갔던 곳은 육지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9그들이 육지에 올라 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10예수께서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1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쉰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12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13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 주셨다.


예수님과 베드로

우리는 지금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초대받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주님의 길을 걸어가면서 갈등과 고통을 겪으며 성장해, 오늘 우리 앞에 사도요 또 목자로 서 있는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이 신앙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보고 있다.

오늘은 사도로 재출발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를 거론한다면, 유다는 주님을 직접적으로 배반했다는 것이고 베드로는 주님이 잡혀갈 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쳐버렸기에 간접적인 배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배반한 후에 나타난다. 마태오 복음 26장 75절을 보면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후에,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라고 써있다. 한편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후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며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으나 대사제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자 은전을 성소에 내동댕이치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마태 27,3-5 참조) 유다는 이렇게 주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악의 유혹과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패망감과 좌절감으로 인생을 포기함으로써 악의 힘 속에서 파멸되어 버렸다.

그러나 베드로는 악에게 사로잡히고 넘어졌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고, 또 오늘 주님이 오셨다는, 저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는 겉옷을 둘러싼 채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주님께 달려간다. 베드로가 전에 주님으로부터 한 눈을 팔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부끄럼 없이 즉시 주님께 살려달라고 청했던 모습(마태 14,22-33)을 기억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배반한 후 참으로 주님 앞에 설 수도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체면이 말이 아니다. 또 두렵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저 주님이라는 동료의 말 한마디를 듣자마자 자기가 잘못했으면서도 그렇게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그 마음이 확 터지면서 단지 그분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물 속에 텀벙 뛰어들어 예수님께로 달려간다.

그 베드로의 순수함. 비록 약하고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분을 향한 열망이 변함없음을 베드로의 행동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좌절하고 거부하고 때로는 순명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할 때도 있지만, 또 그것이 자기 탓인지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계속해서 다시 부르고 계실 뿐 아니라 늘 자기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알기에, 그리고 주님께 돌아가면 다시 살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기에 달려가는 베드로. 또 그분께로 가서 다시 이야기하고 살고자 하는 베드로의 끊임없는 회개.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고 오히려 주님께로 향한 신앙이 커 가면 커갈 수록 점점 더 많은 실수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나락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안에서도 다시 일어나서 주님께 가고자 하는 끝없는 충실성과 항구한 믿음을 가졌다. 욥 성인은 아무 죄 없이 당하는 시련 앞에서도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 충실히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주님 앞에서 의화되어 그전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으면서 주님 앞에 섰다. 베드로는 그처럼 오늘 주님 앞에 나아간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리고 그냥 물 속에 뛰어들었다."(요한 21,7)

이러한 충실성과 항구한 믿음을 가진 베드로는 결국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9절)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마태 7,32)시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마치시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는 단지 그 잔치에 참석하기만 하면 된다. 시편 작가의 노래가 나를 주님께 실어간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곧은 살 지름길로 날 인도하셨어라.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게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향기를 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 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살으오리다."(시편 22,1-5)

그리고 "와서 아침을 들어라."(12절)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은 첫 번째 소명. 루가 복음 5장 1절부터 11절에서 고기잡이 시몬이 제자인 베드로로 처음으로 불름을 받았을 때의 소명과 응답을 재현하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12절)고, 또 오히려 주님께 다가갔을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양식을 주시고 더 키워주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 주셨다."(3절)

사람 낚는 어부에게 주어지는 주님 생명의 양식. 은혜로운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시다.


주님과 나

주님을 배반하였을 때 어떻게 다시 주님께 다가서는가?

루가 복음 15장에 나오는, 집 나간 작은 아들을 문 밖에 나와서 기다리던 아버지처럼 내가 주님을 배반하였을 때 나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주님을 느낄 수 있는가?

어떤 종류의 유혹에 빠졌을 때, 악이 나를 회복하기 힘든 패망감과 좌절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가?

주님께 대한 당신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 주님이 당신에게 그저 죄 안 짓고 결백하게, 착하고 완전하게 살기만을 바라신다고 생각하는가? 좋은 생각이고 바람직한 자세이긴 하지만 자칫 이데올로기에 빠지기 쉽다. 주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아신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 18절에서 30절까지 '고통에서 영광으로'라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희망으로 인도하심,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느 정도의 신앙을 가졌느냐를 따지기보다 주님께 사심없이 다가서고, 범죄한 후 부끄러움과 자존심이란 또 하나의 장애 때문에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 말고, 오히려 그 때 자기를 버리고, 끊임없이 주님께 돌아 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양식인 말씀과 성체성사를 모시고 주님의 사도로 다시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실수했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가자.

·배반했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돌아가자.

·회개의 눈물을 은총의 세례수로 받아 새기고 주님의 품에 안기자.

·내가 행한 범죄를 부담으로 삼지 말고 자기라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르자.

·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과 성체성사를 따라 행하여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요한 4,34)이라는 양식을 얻자.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시편 23편(야훼는 나의 목자), 로마서 8장(성령이 주시는 생명, 고통에서 영광으로, 하느님의 사랑), 요한의 첫째 편지 4장 7절-21절(하느님은 사랑이시다)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차례..

8일, 신앙고백과 재수임


말씀 예수와 베드로(요한 21,15-19)

21 15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6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7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18이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9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과 베드로

시련과 어둠 속에서 다시 일어나 갖은 풍파와 좌절과 고생을 다 겪고 자기 수정과 교정의 과정을 직접 삶으로 하나씩 밟으면서,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온전히 새롭게 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뿐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사도로서 임명을 받는 장면에 대해서 보자. 고통의 나락과 좌절이 그에게 주님과 형제들로부터 떠나도록 하거나 또는 하나의 불명예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완성되고 원숙되어 가는 새로운 의미로서의 충만된 모습으로 임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베드로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자격 무능력,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감싸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그런데 당신 죄로 인해 죽으신 것이 아니셨기 때문에 그냥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신다. 아버지로부터 또 스스로 부활하셔서 오늘 우리 앞에 착한 목자로 다시 오신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는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목자직을 주신다.

우리가 정말 착한 목자를 따르는 착한 양이라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함께 살고 지키고 키우고 보호하고 책임지도록 우리에게 맡겨주신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 그리고 사회에서 우리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목자로서 살아야겠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파견하신다.

그리스도님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에 따른 희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부르신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씩 되풀이하신다. 그런데 그 세 번의 질문은 점점 더 간결해지고 단순해진다. 첫 번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15) 이고, 두 번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16), 세 번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다. 이 세 번의 질문은 베드로가 마치 회개의 결정과 다짐 그리고 결단을 내리는 자기 정리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듯하다.

베드로는 응답을 해가면서 더욱더 주님께 솔직하고 진실하게 다가간다. 첫 번째 질문에서 베드로는 "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15) 라고 대답한다. 자기 기분에는 '그런 것 같고', '그럴 것 같고', 또 아니면 앞으로 '하면 될 것 같다'고 느낌을 표현한다. 두 번째 역시 "네,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16) 라고 응답한다. 첫번째 응답과 같지만 두번째의 이 응답은 "내가 완전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 기억과 생각 속에서는"(적어도 내가 보기에는…)이라는 단서 안에서 자신의 현실을 드러낸 것이다. 세 번째,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17) 하고 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베드로의 표현은 개인적으로는 섭섭하고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서 몰라준다고 생각한다면 억울하기까지 할지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세 번째의 질문을 받으면서 자기 배반의 과거를 떠 올렸으리라. 실제로 그가 자신의 본모습을 대면하는 순간 그는 자기 자신이 초라해 보였고("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루가 5,8 참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은 그를 슬프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곧 사람에게 내리시는 생명의 말씀을 청하고 귀 기울이게 만들고 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슬퍼하게 될 줄을 아시면서도 이렇게 세 번씩 질문을 던지면서까지 나약한 인간 베드로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 하나. 그것은 베드로를 사도로 파견하기 위해서이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15衁.16衁.17)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마치시고 그에게 사도직의 본질을 설명하신 후 사도직을 수여하신다. 참으로 그리고 이제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하고, 거절하고, 거부하고, 반대하며,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오늘 세 번이나 나를 거듭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 시점에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제 너는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리라. 이제서야 사도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 이제는 너의 일이 네가 하는 것이 아니기에, 너의 자랑이나 너의 수치가 될 수 없다. 또 이제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갈등과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의 그 비참함과 고통과 파멸의 순간 안에서, 네가 나를 찾고 따르지 않으면 네가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면 너는 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진정 나를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나를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사람들을 구하는 길은 바로 '구원을 위한 희생' 곧 '십자가의 길' 이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는 그 길만이 나와 일치되고, 죽음이라는 장애 같은 것 앞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간직한 채 더욱더 신앙을 가지고 하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의 말씀 앞에 깨어 있는 참제자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 은총으로 내려진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 사도로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오늘 이렇게 알려 주신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18절) 내가 원하지 않으면서도 짊어지고 가야하는 십자가. 자기의 생각과 억울함, 해명과 사리판단을 버린 채 백성들의 요구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는 십자가와 그 십자가의 길. 그 길이 세상을 구하는 길이다.

한편 고통과 괴로움을 자신의 몸으로 마저 다 채우고 일어서서 같은 고통과 괴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마치 '상처받은 치유자'가 걷는 길이다. 주님 안에서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세상의 죄악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짊어지는 순교의 길이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주님과의 재회와 치유.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은 사람이 걸어 나갈,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느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걷는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이데올로기나 자기 성취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포로가 되는 이들의 삶이다.



주님과 나

주님을 사랑하는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는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날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내 생애의 순간순간에 주님께서 어떻게 나와 함게하셨는지?'

'어떻게 나를 이끌어 오셨는지?'

되새겨 보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기 위하여, ""(필립 2,7)이 되어오신 주님 사랑에 감흡할 뿐이리라.

그리고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필립 2,13) 하느님께 우리를 봉헌하며 나아가자.

가끔은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간"(18절)다고 느껴 불쾌하고 섭섭할 때도 많다. 그리고 복음선포의 과정에서 남이 하면 못마땅하고 내가 해도 만족하지 못해 아쉬워할 때도 있다. 또 주님은 사랑하지만 나 자신이 내가 설정해 놓은 기준에도 못미쳐 애타하며 슬픔과 좌절 속에 잠기게 될지라도 나가 떨어지지 말고 주님께만 희망을 두자. 우리를 안아 주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걷자.

주님만 보신다면야…!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지칠 때마다 주님께 매달려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을 하자.

"저의 빛 저의 구원이신 주님, 저를 굽어보시고 저에게 주님의 위안과 힘을 주소서.

주님, 주님밖에는 제가 청할 곳이 없나이다.

주님, 주님밖에 제 사랑을 맡길 곳이 없나이다.

주님, 주님 사랑의 성심 안으로 저를 숨겨 주시고 저를 받아 주소서.,

주님, 저는 지금까지 저와 함께해 주신 주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을.

그래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데살 5,16--18)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우리 몸으로 이루어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약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필립 2,15)자.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시편 139장 1절-18절과 23절-24절(주님은 나를 샅샅이 아시나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20장 9절(7절-18절 하느님께 불평을 털어 놓다.)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차례..

8-1일, 부속가


말씀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요한 21,20-25)

21 20베드로가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 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굽니까?" 하고 묻던 제자였다. 21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22예수께서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다만 "설사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3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3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과 베드로

우리는 요한 복음 21장을 마무리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하는 길에 있어서, 다른 이와 비교하게 된다. 그런데 베드로가 보기에는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주님께 묻는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각기 다른 얼굴과 다른 성을 가지며, 다른 지역, 다른 문화 속에 살도록 창조하셨다. 주님은 이렇게 각기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서로를 도움으로써 인류공동체를 꾸미도록 만드셨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12장 4절부터 7절까지에서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가끔 인간 사회 안에서 서로의 소질과 장점이 그리고 그 것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역할이 동등하게 존중받지 못하고, 어떤 직업은 각광받고 어떤 직업은 중하게 취급되지 않음으로써 불평등이 생겨난다. 또 한편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내리 누르거나, 자신이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서 다른 이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제도적인 장치를 만드는 일을 벌이기까지 함으로써 하느님의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주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우리의 신앙고백 앞에서, 나와 다른 역할을 하는 사람과 또 그 사람이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여 자리를 잡기까지의 노력에 대해서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줄지언정, 부러움이나 시기를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보다 그에게 그러한 기회와 소질을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이리라. 그리고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내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하자.

다른 나라 사람,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이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던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단지 나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주님으로부터 받아 맡은 그 직책, 거기서 최선을 다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나에게 주신 주님의 사명이고 주님의 길이다.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 그리고 다함께 연대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 큰 은총의 선물을 간절히 구하십시오."(1고린 12,31) 곧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주님과 나

사도 바오로는 여럿이 아닌 한 분이신 성령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 각 사람에게 공동이익을 위해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신다고 하셨다.(1고린 12,4-11 참조) 그렇다면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은 무엇인가? 내가 나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꾸어 성숙시키고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을 부러워해 나의 것을 소홀히 하거나 잊고 내가 좋다고 느끼는 남의 선물을 얻으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는가? 자기 선물을 펼쳐서 힘있게 자기 자리를 잡자.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선물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풀어보아야 한다. 내 선물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각자 자신의 선물을 가지고 이 사회를 이루고, 서로 자신을 바쳐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나가도록 우리를 파견하시지 않았는가? 내가 나에게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이라 해서 불필요하거나 그가 겪는 아픔을 모른 체 할 수 있는가?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다른 것들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을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또 보기 흉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밉니다. 그러나 보기 좋은 지체들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도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 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1고린 12,21-26)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시대 이 자리에서 더욱 조심스럽게 감싸고 보기 좋게 꾸미며 도와주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맡긴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활동하는 사회의 영역과 직장에서 그리고 내가 사는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함께 손을 잡고 연대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루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협조자는 누구인가?

이 성서 구절과 연관하여 고린토 전서 3장 1절-23절(하느님의 일꾼)과 12장(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을 보충하여 묵상할 수도 있다.



E-mail : peters1@seoul.cathol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