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자만 하시면

-예수님의 병자들





주님의 처분만 바라는

병자들의 심정을 느끼며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의 사도로

거듭나기를 청하는 묵상




성바오로 출판사







도움의 말


1월 신년 피정을 하면서 연중 1주간과 2주간의 복음을 묵상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주님께서 어려운 병자들을 돌보시고 고쳐 주시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그 기회에 주님께서 만나신 병자들을 중심으로 묵상을 이어 나갔다.

새벽 5시 10분에 일어나 아침기도와 미사를 드리고 묵상하고 쉬고 또 묵상하고, 낮기도 후 점심 먹고 쉬고 묵상하고 쉬고, 저녁기도 후 저녁 먹고 쉬고 성시간을 갖고 쉬고 묵상하기를 반복하면서 푹 쉬었다. 간간이 휴식시간에 찾아 본 요한의 집 어린이들의 모습과 할머니 수녀님의 선종이 나를 더욱 더 깊이 묵상에 잠입하도록 해주었다.

기도가 계속되면서 맛을 들일 수 있었고, 주님과의 정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러면서 복음 내용과 연관하여 지나쳐온 형제 자매들을 만났다. 나를 아는 것이 행복일 수 있게 하고 싶다던 어릴 때의 내 꿈과는 달리 부족한 나 때문에 서운하고 못마땅해했던 이들을 주님께 봉헌하며 주님께서 친히 어루만져 주기를 청했다. 24시간의 하루 속에서도 유난히 자기 속에 갇혀 있는 나 때문에 갈증을 채우지 못한 신자들에게 송구스러워하면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감싸 이끌어 주시길 청했다.

오늘 피정 묵상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부끄러운 나를 발견한다. 가끔 우리 신자들에게 "더 좋은 신부가 왔었으면"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리고 지난날이 떠올라 탄식도 한다. 그러나 한편 부족함이 멍에가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지 않는가. 나를 부족하게 만드시고 그 부족한 나를 사도로 삼으시는 주님께서 채워 주시고 이끌어 주고 계시지 않는가. 죽음에 다다를 때까지 나를 길들이시고 이끄셔서 완성시켜 주실 주님께 나를 맡기며 오늘을 살 힘을 다시 얻는다.

그 동안 부족한 나를 용서해주고 받아들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감싸주고 지지해주면서 묵묵히 함께해 주었던 교우들과 이 개인 묵상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주신 성바오로 출판사 마태오 수사님과 임직원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천주강생 2001년 2월 11일

세계 병자들의 날에

심 흥 보 (베드로)





차 례



도움의 말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

악령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

오그라든 손을 펴주신 예수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베짜타 못가의 병자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

라자로의 죽음

구원에 이르는 고통

병자를 위한 기도

선종기도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한 기도

세상을 떠난 형제, 자매, 친구, 은인을 위한 기도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



1 29얼마 뒤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 들어 가셨다. 30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께 알렸다. 31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마귀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 왔으며 33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며 자기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귀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 29-34)

요즘 강아지를 키운다. 처음 가져온 두 마리는 생후 3개월이 지난 다음에 가져온 것이라 키우기가 쉬웠다. 그런데 새로 온 강아지는 태어난지 겨우 15일만에 왔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아기라 신경이 많이 쓰인다. 자다 보면 갑자기 "끄억 끄억"하며 토하려고 한다. 그때마다 일어나 잘 토하도록 하고 물먹이고 또 토한 것을 다 치우고 배를 쓰다듬어 주면서 편안하게 다시 잠들 때까지 안아 준다.

조금만 이상하면 기침을 하고 토하는 강아지를 키우면서 정말 부모들이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애지중지 키워야만 하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자랄 땐 자라는 것이 귀여워 힘든 줄도 모르고 키운다고 한다.

귀여운 것도 귀여운 것이지만 옆에서 토하고 아파하는 강아지를 보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강아지도 그런데 자식은 오죽하랴? 한번 잠에 곯아 떨어지면 쉽게 깨지 않는 내가 기겁을 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 내 마음속에도 고통받은 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이 살아 있나 보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셨다. 죽은 인간을 살릴 수 없는 우리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포기한다. 하지만 인간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은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그래서 더욱 더 예수님의 사랑은 각별한 것 같다.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자마자 손님들의 시중을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난 생명을 보시며 기뻐하셨을 것이다. 우리도 우리가 기도해준 사람들이 다시 소생되거나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기쁜가?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 수녀원과 수도원의 칠판에는 기도 지향들이 빼곡하다. 그중에 2/3이상이 병자들이다. 그런데 전에 비해 더 절박하고 기이한 병들에 시달리는 것 같다. 너무나도 절박한 이들은 나를 보며, "신부님이 꼭 살려주셔야 해요!"하며 매달린다. 몸부림치는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가족들의 아픔이 가슴 깊이 저려온다.

동시에 가족과는 다르지만, 질병이라는 면에서 더 깊이 병자의 병고를 이해하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간병인들의 수고도 빼놓을 수 없다.

예수님 앞에 몰려드는 여러 병자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병자들을 하나 하나 정성껏 돌봐 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조아리게 한다.

그러나 한편 지금껏 미처 돌보지 못하고 또 무심코 그냥 지나쳐 버렸던 병자들을 기억하며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한다.

'주님, 친히 돌봐 주소서!'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질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야고 5, 15-16)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고 발을 뻗는다.

차례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


1 40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41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42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43예수께서 곧 그를 보내시면서 44"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하고 엄하게 이르셨다. 45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 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다.(마르 1, 40-45)


용인에 가면 인보성체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중증 지체 장애아 요양원인 '요한의 집'이 있다.

겨울방학 때는 아이들이 대부모 집이나 자매결연을 맺은 가정으로 놀러가고 남은 아이들만 한 곳에 모여있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갔다. 광호와 준식이하고 간지럼 태우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나를 향해 오는 것 같았다. 잠깐 놀고 있는데 갑자기 울음 소리가 났다. 나를 향해 오던 아이가 내가 다른 아이와 놀고 있으니까 오다 말고 선생님께로 향했나 보다. 그런데 선생님도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면초가. 자기 한 몸 둘 데가 없었다. 그래서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사이를 그야말로 맴돌다가 갈 곳이 없으니까 울고 만 것이다.

그 아이를 보면서 정말 몸 둘 곳이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점점 이상해지고, 또 이상해지니까 더욱 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아서 맴도는 사람들. 감싸주고 안아주지 않아 방황하는 수 많은 영혼들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많은 아이들이 다 나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자기에게 오지 않나 해서 말이다. 그 중엔 침대에 눕혀져 주사바늘로 위에 직접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만 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한 아이들도 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도 큰짐을 진 아이들이다. 애처롭다는 감상적인 표현보다는,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는 표정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서글프고 안타깝다.

나병환자는 주님께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나도 한 동안 매일 같은 지향의 기도를 해왔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주님의 거룩한 사도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나는 요한의 집 아이들을 보면서 그 기도는 내가 주님께 청할 기도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주님께 그리고 그 집을 찾는 이들에게 하는 청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 손길이 자기에게 스쳐가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이다. 적극적으로 요구할 기력조차 없고, 저항하고 극복할 아무런 희망조차 간직하지 못한 아이들. 그저 남이 자기에게 다가와 먹여 주고 안아 주기만을, 그야말로 처분만 바라는 아이들이란 것을 느꼈다.

나병환자는 유다 사회에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간주하고 동네 밖에서 기거하도록 했다. 또 나병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천형을 받은 것으로 여겼기에 그러한 상황에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해 버렸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다시 사회에 복귀시키기 위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라고 엄하게 이르셨다.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떠오른다. 나의 처분만 바라는 이들은 요한의 집에서뿐 아니라 본당의 내 교우들 그리고 본당 관할구역 내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가슴 속에 익명으로 남아 호소하고 있다. 우리 성당을 향해 거는 지역사회의 기대들. 정의와 진실 그리고 선행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더욱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 같다. 얼마나 할 일이 많은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에제 36, 25-26)

'주님, 주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새로 나게 하시어 가난한 이들의 사도로 삼으실 수 있나이다!'

차례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


2 1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2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 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3그 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4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보냈다. 5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6거기 앉아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7"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중얼거렸다. 8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10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11"내가 말하는 대로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하고 말씀하셨다. 12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르 2, 1-12)


아버지는 뇌일혈이셨다. 그래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노력이 문제였다. 운동을 하시기 위해 나가시면 집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번 집을 나가시면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이따금 파출소에서도 전화가 왔다. 아버지를 데려가라고. 그래서 난 아버지가 제발 집에만 계시길 바랬다.

어머니는 뇌출혈이셨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누워 계셨다. 첫 휴가를 부모님 모시고 제주도라도 가고 싶었지만 모시고 갈 처지는 못되었다. 늘 누워 계신 어머니는 욕창과 씨름하셔야 했다. 그래서 난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움직이실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런데 어느 날 난 생각했다. 동물은 매어놓기라도 한다지만 동물도 아닌 아버지가 집에만 계시기를 바라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또 어머니께서 한 번만이라도 일어나서 우리와 함께 소풍이라도 가길 바라는 것은 누구의 생각일까? 모두 내 생각이요, 내 입장에서 바라는 것들이었다.

인간 모두는 자기 처지에서 생각하고 바란다. 그렇다면 내가 부모님 대신 인생을 살아줄 수도 없는데, 부모님께서 구태여 내 바람에 맞춰 주실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그분들의 처지에서 나름대로 원하시는 것을 먹고 원하시는 일을 하실 권리가 있지 않은가. 먹을 것, 입을 것 머물 곳만 해결된다고 해서 인간이 다 산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아 드리기로 했다. 도와드리고 보호한답시고 신경 써서 해드리는 일이 오히려 그 분들을 더 괴롭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나름대로 원하시는 만큼 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오히려 효도일 수 있다. 그리고 막말로 해서 창피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내 부모님이 아닌가.

그렇다 중풍병자들은 이성이 육을 통제해야할 정상적인 인간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오히려 육이 이성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성이 소멸되고 육의 노예가 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는 전혀 다른 표정과 행동을 하게 된다. 기쁠 때 슬픈 것처럼 울고, 슬플 때 웃고. 보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그래서 옛날엔 노인네가 망령이 들었다고 해서 노망이라고 했다. 바로 요즘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치매다.

대부분 뇌졸중을 앓는 이들은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자각하면서 스스로 당혹해하고, 밀려드는 고통과 패배감으로 좌절하고 인생의 상실감으로 우울증에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처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구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자기는 밥도 안 줘서 굶는다느니 등의 과정 섞인 엉뚱한 말로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가족을 깍아내리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참하게 보이도록 전함으로써 위로를 받으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신다. 죄 사함은 진정 중풍병자가 겪고 있는 상실감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다. 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을 이루어주신 것이다. 그야말로 육에 갇힌 영혼이 자유를 얻게 됨으로써, 새로운 몸이 되어 새 인격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벌떡 일어"난 것이다.

날아갈 것 같지 않았을까? 그 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자신의 인생이 저주스러웠을까? 진정 해방된 자유의 행복을 맛보았으리라. 살맛 난다는 표현이 진정 이것일 수 있으리라.

우리의 이상을 사로잡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다. 그뿐만 아니다. 자기 한 몸조차 우리의 이상대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저주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성사를 보면 날아갈 것 같다지만, 곧 뒤이어 반복되고 연결되는 죄악의 상황이 우리네 인간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그 안에서 누리는 작은 위안과 기쁨이 우리를 그 안에 머물도록 잡아놓고 있다. 순간의 미련이 내일을 못 오게 막고 있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는 지붕을 뚫어서라도 그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호천사 같은 네 명의 협조자들이 있었다. 어떤 때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안타깝게 청한다. 그러나 이내 또 다시 생각한다. '아니지, 내가 도와주어야지. 내 작은 희생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주님 사랑의 손길이 되어야겠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6. 28)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일하고 함께한다면 우리 문제는 그 사랑 안에서 녹아 없어질 것이다. 그럼 우리는 우리가 도운 이들과 함께 주님의 사랑 앞에 뿌듯이 설 수 있지 않겠는가. 벌떡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가는 어제까지의 중풍병자를 흐믓하게 바라보면서 말이다.

차례




악령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


1 21예수의 일행은 가파르나움으로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 가 가르치셨는데 22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23그 때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24"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읍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 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하고 외쳤다. 25그래서 예수께서는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하고 꾸짖으시자 26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 갔다. 27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28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마르 1, 21-28)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이 있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습관.

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만 반복되는 죄.

알콜, 도박, 마약, 성, 도벽…

이런 문제로 심각한 가정이 의외로 많다.

중풍이 육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라면,

악령이 들렸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외부의 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한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로마 7, 18-20)

이것은 개인과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는 물론이고 우리 믿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도 그렇다. 교회사를 보면,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관용령으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공적인 박해가 없어지자 더 이상 순교의 영광을 얻을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주님을 더 깊이 알고 따르고자 성지를 순례했다.

오늘날도 신자들은 성지순례를 아주 뜻깊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도보성지나 지하철 또는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 보다 대절버스를 많이 이용한다. 세상 일에 치이고 시간도 많지 않고 또 교우들끼리 친목을 다질 별다른 기회를 갖기도 어려운 신자들이라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공기 맑고 경치 좋고 잘 꾸며진 성지를 우선적으로 찾는다.

물론 매일 기도만 하고 희생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신자들도 쉴 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른 곳 아닌 성지를 찾아서 좋은 말씀이라도 듣고 온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고 일년에 한 번 신자들이 다 같이 성지를 찾는 것도 좋은 교회 프로그램이 아닌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또 하나의 언덕이 있다.

"내 돈 내고 내가 왜 가? 내 돈 내고 갈 바에야, 온천에 가서 몸이나 담그고 편히 쉬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놀러갈 때는 자기 돈으로 가지만, 성당에서 갈 때는 성당 돈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위한 신앙인지.

그런데 성지관광 정도는 문제도 안 된다.

정작 문제는 돈과 건강에 대한 집착 그리고 공금을 유용하려는 눈먼 양심, 개인과 집단의 극대화된 이기주의, 복음주의가 아닌 경제우선주의 시각과 사고방식 등이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지배하려고 한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덕목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 청빈과 정결과 순명, 겸손, 희생, 봉사, 봉헌, 양보 인내 등을 교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요한 21, 18)

그리스도교적 가난과 희생의 정신이 살아있을 때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교에서 운영하는 기업이 되고 만다. 그것도 맘몬의 법칙에 의해 운영되는 사기업이.

이 상황에서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어떻게 가능할까 고민 속에 잠긴다.

그리스도인들조차 현세와 물질에 허덕이는, 지금 세상의 모든 가치는 자본주의 경제질서라는 악령에 잡혀 신음하고 있다.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리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 21-23. 25)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당신께 저항하는 악령들에게 명하신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예수님께서는 악령에게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 주님의 자녀로 만드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하며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지게 된다.

그렇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악령을 제어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주님의 권위가 우리에게 내려오시길 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차례





오그라든 손을 펴주신 예수


3 1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 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 보고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3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4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5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6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마르 3, 1-6)


기계에 손이 잘린 청년이 있었다. 신자는 아니었지만 성당에 가끔 들렸다. 그 산업 재해 노동자는 의수를 했기 때문에 팔을 기부스한 것처럼 가슴에 얹고 다녔다. 그리고 의수에는 검은 가죽장갑을 끼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산재자의 팔을 들어주기라도 하듯, 팔장을 끼고 온 가톨릭 노동 청년회 여회원이 있었다. 얼굴도 예뻤는데 마음도 정말 예뻤다. 그 여회원이 산재자의 팔이 되어 줌으로써 그 산재자와 우리 교회 모두를 살렸다. 그가 교회의 정신을 자신의 몸으로 실현함으로써 교회가 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주심으로써 그에게 재생의 길을 허락하셨다. 그에게 손을 펴주심으로써 그가 세상에 다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일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심으로써 다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탈리다 쿰)하시면서 야이로에게 그 딸을 돌려주실 때(마르 5, 21-23. 35-43)에도 또 "열려라"(에파타)하시면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실 때(마르 7, 31-37)에도 그리고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시며 죽은 아들을 살려 과부인 그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시며 돌려주실 때(루가 7, 11-17)에도 주님은 당신 백성인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겉뿐만 아니라 속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다.

옳고 좋은 결정인줄 알면서도 선뜻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꼬투리 저 꼬투리 잡으면서 반신반의하며 참여를 미루다가 마지막에 마지못해 끌려가는 사람.

기존의 체제를 수호하고 자신의 유익을 고수하기 위해 스스로 오그라드는 사람.

여러번 속아 깊은 불신의 늪에 빠져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

상처받은 이웃의 상처를 전이 받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

이런 이들은 "손을 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아야 하겠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씀은 우리를 살려 공동체에 복귀시키고 더불어 살도록 한다.

사람의 아들만이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복귀는 공동체 회원들의 동의와 수용에 앞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을 제정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정의 곧 용서해주시는 자비에서 비롯된다.

가끔 내가 '교회를 위해 사는가', '백성들을 위해 사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와 주님의 백성들이 구분되어서는 안되겠지만 가끔 구별되기 때문이다. 전체의 부분이랄 수 있는 개개 사목 현장과 현실에서 겪는 필요와 부분들이 모인 전체의 필요가 서로 다를 때 오는 갈등과 동요가 있다. 작게는 반원과 반장의 결정이 다르고, 반과 구역, 구역과 본당, 본당과 교구간의 서로 다른 입장에서 오는 문제다.

그 때마다 되새긴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서 교회와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지향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윗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또 백성들에게 존중받지 못해도 나는 예수님을 따라 내 길을 걷는다. 또 내가 꾸준히 그리고 진실되이 주님의 길을 걸어 열매를 맺을 때 부분인 내가 전체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교회의 풍요한 품안에서 자라온 내가 나의 헌신으로 교회를 융성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용을 새롭게 할뿐이지 진리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환경과 조건은 바뀌어도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사랑'은 교회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적합하게 해 주시기를 빌며 선을 행하려는 여러분의 모든 의향과 여러분의 믿음의 행실을 당신의 능력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2데살 1, 11)

차례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5 24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 대며 따라 갔다. 25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26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27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 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30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으셨다. 31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하였다. 32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33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34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하고 말씀하셨다.(마르 5, 24-34)


50줄에 들어선 어느 여인이 요실금에 대해 호소한 적이 있다. 자기가 원치도 않는데 망측하게도 질질 흘린다는 것이다. 하도 민망해 웬만하면 나가지 않고 나간도 해도 기저귀를 차고 다녀야 한단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우울증까지 걸렸다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더니 이 여인이 그짝이다. 열두 해 동안 이렇게 저렇게 다 손을 써보았지만 병만 더 깊어졌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으리라.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는 군중을 뚫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서 기어이 그 옷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런데 기적같이 낳았다. 아니 기적의 힘이 그 여인에게 흘러 넘친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하고 말씀하셨다.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하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던 시로페니키아 여인(마르 7, 24-30)에게도 또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하면서 자기 하인을 중풍병에서 고쳐달라던 로마 백인대장(마태 8, 5-13)에게도 그 믿음을 담보 삼아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다.

거부할 수 없는 신체의, 정신의, 성품의, 인격의 장애.

민망하고 망측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늙음. 육은 육이 가는 길로 간다고 하던가.

어찌할 수 없는 부모나 형제, 자매, 오누이, 배우자, 자식의 허물.

주어진 아픔이다.

골방에 가둔다고 감춘다고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어둠이다.

오히려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하는 악의 뿌리이다.

버리면 커지고 안으면 작아지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던가.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 주셔서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몸 안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1고린 12, 12. 24-25)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사랑이라 했다.

사랑은 믿음의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 16)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고 품어 안아야 한다. 그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고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덮어 주듯이 사랑으로 껴안아야 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요한 14, 2)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1요한 4, 12. 18)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면서도, 같이 아파하면서 내치거나 버리지 말고 함께 안고 가야한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우리에게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고 물으시지 않고, 누구와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 1. 4)

차례




베짜타 못가의 병자


5 1얼마 뒤에 유다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다. 2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3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5그들 중에는 삼십 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6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하고 물으셨다. 7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하고 대답하였다. 8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하시자 9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들고 걸어갔다. 그 날은 마침 안식일이었다.(요한 5, 1-9)


자기는 세상에서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사회에서 내게 준 것이라고는 불안과 소외뿐이라고 강변하는 이도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잘 안 풀리고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웃과 사회에 그 책임을 돌리고 원망한다.

술을 먹어도, 친구들과 떠들어대도, 여행을 해도, 밤새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보아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 다 그 때뿐이다. 우리 영의 갈증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주님 바로 그분께 나아가는 길뿐이다. 주님만이 우리를 채워주실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안다고 하더라도 고백할만한 신앙이 없다면,

신앙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깨달음이 없다면,

깨달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갈증을 채워줄 만한 감동이 없다면,

감동이 있다하더라도 우리가 복음 활동에 나서지 못한다면,

활동에 나선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도 못하는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1고린 13, 2)

우리가 주님 안에서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에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집중하지 않는다면,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결국 우리는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 12)

물론 현실에서 완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현실이라고 무조건 절망적이진 않다.

때맞춰 꾸준히 밥을 먹으면 배고프지 않다.

그런데 밥을 안 먹어 배고픈 것은 현실의 한계가 아니다.

오히려 먹지도 않고 배부르길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는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집중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갈증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심보일까.

바쁘다고, 사실 우리가 무엇에 바쁜가. 기도하기 귀찮은 것이 아닐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은 기도시간. 그 금쪽 같은 시간에 활동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교만이, 우리를 결과적으로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고 결국 우리 자신도 불안과 방황에 빠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 25)

끝기도를 바치며 하루를 되새겨보면, 우리는 이것저것 다 신경 쓰면서 별 소득도 없는 일을 하느라 자신을 소진시키고 있다. 어떤 때는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쏟아야 할 에너지가 남아 돌아 운동을 한답시고 시간과 열정을 소비하지 않던가.

38년이라는 세월을 베짜타 못가의 병자는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저어 주기를 기대하고, 물에 들어가면 병이 나으리라는 미신 같은 엉뚱한 노력을 기울이고

어떻게 하는가가 아니지 않는가.

주님께서 원하시고 허락하셔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않는가.

주님께서 허락해주시길 우선 청해야지, 주제넘게도 그냥 무턱대고 달려든다고 해결되는가.

문제가 풀어질 '때'와 '방법'을 가지고 계신 분은 주님이 아니신가.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빚어내는 엉뚱함.

'∼를 원하느냐?

그러면 나에게 오너라.

내게 와 네가 원하는 바가 내 뜻 안에 있고

또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라.'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루가 10, 41-42)

이제 사회는 다변화되어 있다. 다양하고 복잡함, 그것이 마치 현대 사회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사회는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남을 밀어내고 치열하게 경쟁하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도우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사회속에서는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진정 그럴까? 과연 다른 이들을 다 내쫓고 차지한 자리가 오래갈까? 과연 이해관계로 엮어진 공동체가 지속적인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할 때도 그 공동체 구성원에게 소속감을 줄 수 있을까? 아니 손해가 되면 단순히 탈회가 아니라 제명처분이 내려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 가운데 그 공동체는 부패와 내분으로 휩싸여 조직은 남지만 그 조직원은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늘 새로운 능력자로 대체될 테니까 말이다. 성공의 희열과 행복은 잠깐이고 늘 불안하고 답답한 생활이 아닌가. 그리고 거기서 내쫓긴 사람들이 느끼는 자신의 인생은 어떤가. 무상함과 허망함, 그 자체가 아닌가.

사회는 그 사회를 차지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후대들을 교육한다. 그 교육과정 중에는 기득권 층이 자리하는 지도자의 길이 있다. 그 길은 겹겹이 쳐놓은 그물망을 뚫고 욕망의 사다리같은 통로를 통해 소수의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정규과정을 밟을 기회가 성장과정 중에 주어지지 않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과정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은 다수인들이 걷지 않는 길을 걷게 된다. 그 중엔 기존사회에서 범죄로 취급하는 방법도 있다.

또 다른 방법은 기존사회의 불평등과 편향성을 개혁하기 위해 혁명 같은 방법으로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이런 역사 속에서 사회도 변하는 것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복지를 늘려야 한다는 기득권층의 생각은 그들 마음에 자비로운 동정심이 생겨나서가 아닌 듯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만이 누리는 이익이 탄로 나고 시기를 타 급기야 자신들의 것이 수탈 당할 것이 두려워서이다. 자신의 안정적인 지위와 지속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혁명이나 반란이 생길 정도의 불평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어야 한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자구책처럼 보인다.

그 외에 아주 색다른 방법이 있다.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권력을 잡으면 잡을수록, 명예를 획득하면 획득할수록 잘 사는 길이 아닌 정반대의 길처럼 보이는 길이다. 세상은 돈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지만 이 길은 자기의 이익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인간의 올바른 양심과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 즉 하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한다. 세상은 물질세계의 완성을 꿈꾸지만 이 나라는 정신세계의 완성을 꿈꾼다. 세상은 현실에서의 왕국을 설계하지만 이 나라는 영원한 왕국을 꿈꾼다. 그러나 이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1고린 1, 23)

그렇다고 모두가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 것처럼, 과거처럼 현실세상과 완전히 결별한 은둔사회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노동하는 인간 27항)고 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일입니다."(요한 17, 15)

그러므로 같은 사회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지배논리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원논리에 속한 사고체계와 삶의 방식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요한 17, 16)

아니 오히려 세상의 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 4)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현실 사회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 17, 17)

차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


9 5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6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7"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 왔다.

17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니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하고 다시 묻자 그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31"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2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 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적이 있읍니까? 33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34유다인들은 이 말을 듣고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하며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36"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하고 대답하자 37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다. 38"주님 믿습니다"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요한 9, 5-7. 17. 31-38)


누군가가 말했다. 데모 중에 가장 무서운 데모가 장님들의 데모라고.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무서운 것이) 없으니까 마구 덤빈다는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한 말이라지만 우습지 않다. 왜냐하면 사생결단을 하면서 달려들어야 하는 절박한 이들에게 걸 맞는 표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리고의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앞못보는 거지(마르 10, 46-52)는 예수님을 뵙는 것이 어쩌면 자기가 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데도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계속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주님의 은총을 입었다.

여기 이 소경도 태어나면서부터 앞이 안보였다니 긴 긴 세월을 얼마나 답답하게 살아왔겠는가. 마치 오늘 예수님께 치유되기 위해 그동안 기다려 왔던 인생같이 느껴진다. 서정주의 국화꽃 시와도 같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그야말로 그가 눈 먼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던 것만 같아 보인다.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소경의 이야기는 단순히 소경이, 눈을 떠 세상사물을 보게 되었다는 기적에 그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그 기적 이후 각 사람들의 행동에서 드러난 감춰진 의도와 속셈을 확연히 보게 해준다. 그래서, 무엇이 참이고 누가 주님인지를 깨달아 믿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유다인들이 보기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고 소경에게 '∼까지 가서 씻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까지 죄짓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사이파인들에게는 "소경이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하는 사실이나, 소경의 답답하고 힘에 겨운 삶은 안중에도 없다. 그들에겐 안식일 계명이 지켜지고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하는 정당한 문제제기도 무시돼 버린다.

바리사이파인들은 흠집내기를 시작한다. 이 기적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무효다!'라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미나 군중에게 끼칠 영향이나 효과를 충분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그 부모와 소경에게 그가 안식일에 '(고치는) 일'을 했다고 자백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 즉 기적이란 사실은 증명해 주면서도,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는 끼지 않으려고 침묵한다. 이러한 부모의 움츠리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바리사이파인들은 그 소경이었던 사람을 불러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하고 윽박지르며, 그도 죄인이라고 동의해주기를 요구한다. 드디어 주님을 섬기기 위한 안식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진정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유다인들의 속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소경이었던 사람은, 유다인들이 그가 눈 멀었을 때 거지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하자, 자신의 창피함을 무릅쓰고 "내가 그 사람이오"라고 이미 명백히 밝혔다. 그리고 그는 유다인들이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되묻는다. "왜 자꾸 묻는 거요?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그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들도 (더 알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여부에 대해 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다인들에게 오히려 그 기적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말로써 복음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회당 밖으로 쫓아낸다.

처음부터 소경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떳떳이 밝혔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그리고 그는 사람들과의 논쟁 속에서 주님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더 알게 된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그의 믿음은 깊어만 간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낸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말이 처음부터 부정적인 것으로 쓰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인간의 교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자기 외엔 아무도 없다는 식의 태도인 것만 같아서 씁쓸하게 한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우리 자신의 삶을 꼼꼼이 되새겨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전문성을 띤 집단일수록 더하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혹시 그것이 앞으로 버릇이 될까봐 마음은 아프더라도 발견했을 때 고쳐 주어야 한다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혼내신다면 우리 중에 살아 남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잘났다고 왁왁대는 우리가 아닌가.

남을 존경하고 칭찬하기는커녕 그의 장점을 인정해 주기가 그렇게도 어려운가. 그에게 밀려날까 두려운가. 아니 우리에겐 남의 장점을 발견할만한 좋은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겠지. 다른 이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함은 우리의 좁고 왜소한 삶 때문이리라.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 41)

차례




라자로의 죽음


11 17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 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21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23"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24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25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27"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38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39예수께서 "돌을 치워라"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하고 말씀드렸다." 0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하시자 41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42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 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43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44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45마리아를 찾아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요한 11, 17. 21-27. 38-45)


92세의 할머니 수녀님께서 돌아가셨다. 한 평생 주님의 딸로서 살다 가셨다. 마지막 몇 년은 극심한 고통 속에 계셨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5,000원 받는 용돈을 모아 어려운 신자들을 위한 생미사 예물로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봉성체 때마다 사제에게 감사하다는 인사와 미소를 잃지 않았고, 성체를 정말 감흡해 하며 모심으로써 주님과 일치하고 싶어하는 수녀님의 진실하고도 간절한 지향을 드러내셨다고 한다. 생애 마지막 순간에 총장 수녀의 방문 때 음료수를 권고 받자 "난, 이제 하늘나라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을거야!"하시면서 더 이상의 음식을 마다하시고 영면하셨다고 한다.

수녀님의 장례미사를 함께 봉헌하면서 불완전과 한계 때문에 자신을 탓하며, 죽어서나 이 안타까움이 없어질까 하고 애타하던 내게는 할머니 수녀님의 죽음이 한편 부럽기도 했다. 이제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스스로 약해지고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 때문에 감수해야하는 또 다른 멍에를 훌훌 벗고 완성된 길을 가셨구나. '이젠 주님의 품안에서 평안히 쉬실 수 있으시겠구나!'

우리 부모님대의 분들은 집안에서 누가 돌아가실 때, 돌아가시는 분께 첫째 아들, 둘째, 셋째 등 집안과 가까운 일가친척이 겪고 있는 질병과 어려움을 모두 가져가시라고 빌었다. 마치 액땜을 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사 동안 내내 할머니 수녀님께서 생애 마지막에 겪었던 그 극심한 고통은 마치 '고난받는 주님의 종'을 기억하게 해줬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이사 53, 4)

남들은 가면서 가져가라고 빌었지만, 수녀님께서는 주님께 가시기 전에 공동체의 아픔과 죄악을 대신해 그렇게 고통이라는 고통을 다 겪고 가신 것 같았다.

취학을 한 후 학교에서 생활기록부를 작성해 오라고 주면, 난 '장래 희망'란에 무어라고 써야 할 지 고민이었다. 그 때마다 아버님께서 물었다. 뭐 될까? 아버지는 60년대엔 판검사가 되라고 하셨고, 70년대 들어서는 의사나 경제인이 되기를 바라셨다. 그 희망은 그 시대가 인정하던 직업관에 의한 것이었다.

난 정작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전 과정을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살면서 자신들의 고운 이상과 꿈을 이루도록 해주고 싶었다.

우리 각자는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고귀한 꿈이 있다. 자기 스스로 건실하고 또 이웃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우리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냉정하게 내 현실을 바라보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할 길이 아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다 해도 또 우리 자신도 멀리 떨어져서 돌아가지 못할 것처럼 느낀다해도,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길로 우리를 되돌이켜 주실 수 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하고 말씀드렸지만, 주님은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신다.

"돌을 치워라."하신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루실 수 있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청하자.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을 들어보자.

주님께서 내 이름을 들어 나를 부르신다.

"흥보(라자로)야 나오너라."

주님은 우리를 막고 있는 모든 악습과 허물 그리고 세상에서 오는 장애마저도 없애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운 생애로 초대하신다.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저를 둘러싸고 있는 장애와 그 장애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매달려있는 저를 풀어주시고 해방시켜 주십시오.'

할머니 수녀님의 죽음과 주님께 안기심을 기리며, 주님께 청한다.

오늘 나는 주님께서 내가 청하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리라고 믿기에 청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원하는 바로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고귀한 이상과 꿈을 심어 주신 주님께서 정하신 그때 이루어주시리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의 부족한 나를 탓하면서도 꾸준히,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한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 13)

그리고 주님께서 그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나를 도구로 쓰시려고 부르실 때, 내가 함량부족이나 자격미달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나 자신을 준비한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 무어라고 하든, 또 내가 설사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고 불가능하게만 보일 때도 있지만, 주님을 믿고 주님께서 일러주시고 보여 주시는 길로 걸어가련다.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필립 1, 6)

그러면 주님께서 내 모든 허물과 장애를 없애 주시고 주님께 향한 나의 갈망과 열정을 이끄시어 새 인생의 빛을 열어 주시지 않겠는가. 라자로의 죽음을 보시고 눈물까지 흘리셨던 주님께서 같은 피조물인 나를 그냥 버려 두시겠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차례




구원에 이르는 고통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구원에 이르는 고통' 참조


인간의 고통은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한 벌이 아니라, 인간의 신비이다. 인간은 오히려 고통을 받아들이고 참여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첫째, 현실에서 거부되는 상선 벌악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모두 복을 받고 구원된다(상선 벌악)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계명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고생하며 살게 되고, 악한 사람이 오히려 선한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현실이 종종 벌어진다. 어찌 된 일인가? 이런 부정한 현실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

둘째, 인과 응보의 법칙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이 잘못 살았거나, 죄를 지은 결과라고 생각해 왔다. 예수님 시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자 제자들은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물었다"(요한 9, 2). 우리도 가끔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는 식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 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선하게 살면 상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전통적인 원인과 결과의 원칙(인과 응보의 법칙)은 무너져 버렸다.

셋째, 성서는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이다.

구약 성서를 보면 자기와 자기 자식들, 특히 맏아들과 외아들의 죽음, 후손의 결핍, 고국에 대한 향수, 주위 환경의 박해와 적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조롱과 경멸, 고독과 소외감, 양심의 가책,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친지들과 이웃들의 불성실과 무례함 그리고 자기 동족의 비운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 구약 성서에서는 고통과 악이 서로 일치되어 있다. 그래서 구약 성서는 고통받고 있는 모든 것을 '악'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한편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존재적으로 선하다고 규정한다.

넷째, 고통을 겪는 인간은 "왜?"라는 '물음'을 던진다.

사람들은 흔히 바로 세상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 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상을 향해 묻지 않고, 세상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는다. 구약 성서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그 인간이 지은 죄의 벌로 이해해 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고통을 요구한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을 겪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욥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욥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심 - 욥 1, 12; 2, 6 참조). 그러므로 한편 고통받는 욥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한다.

다섯째,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악을 제거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구원자이시다.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이사 53, 4.. 6. ).

그러므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연다고 할 수 있으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고통스러운 수난을 겪으셨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한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겪으시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 사도 바오로의 고통관)라고 믿고 자기에게 닥친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구원 사업에 참여한다.

여섯째, 인간 고통의 세계는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다.

고통받는 인간을 발견할 때마다 모든 개인 각자가 고통 속에서 사랑을 증거 하도록 '직접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느끼고, 그 고통 앞에 '멈춰 서서' 그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는 삶이다.

천주교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고 더 나아가 이웃의 잘못과 죄로 인한 폐해를 대신 겪고 그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하는 것이다.

차례



병자를 위한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 )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차례




선종기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저에게 선종하는 은혜를 주시어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영원한 천상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차례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한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며 은혜를 갚으라 하셨나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어머니)를 생각하며 기도하오니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아버지(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또한 저희는 아버지(어머니)를 생각하여

언제나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차례




세상을 떠난 형제, 자매, 친구, 은인을 위한 기도

사람의 구원을 기뻐하시는 하느님,

저희와 함께 주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구원의 길을 걸어온 저희 형제와 친척, 친구와 은인을 위하여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오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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