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 안에서,

그이와 함께


심흥보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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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 1 부 나 를 찾 아 서

추천의 말

다른 길

서울 구경

사랑의 방법론

이렇게도 힘든가

노동자 새 세상

그래, 이거야

다시 남

여기에 우리와 함께

제 2 부 갈 등 과 성 숙

이럴 땐 어떻게 해

실천약속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씩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꽃

개인 보고서

희선이 어머님의 죽음

지원근무

매듭을 풀며

깨져버린 이상

증거자

이게 아닌데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

주님 제가 왔어요

여긴 자리가 없네

기다림

활동의 원천이요 양식이신 주님

성탄 일반회

제 3 부 복 음 의 투 사 들

연민, 사도의 첫 걸음

활동의 열매

고난의 현장에서

나눔의 광장

젊음, 노동, 신앙 1. 연합회

젊음, 노동, 신앙 2. 본당과 팀

젊음, 노동, 신앙 3. 하기 수련회

새 신부와 투사 선서

복음을 살며

양성하며, 양성되며

자기를 이기는 용기

평신도 사도직

사랑의 힘

사랑하는 회원들에게





추천의 말


저는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전국 연합회 총재 주교로 일을 할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젊은 노동자들에게 주님을 알려주고 교회의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직장인들을 위한 특별한 교리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젊은 신자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살면 된다는 어떤 모델이라고 할까, 모습을 보여줄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얼마전 젊은 심흥보신부에 의해서 '일하며, 쉬며, 또!'라는 이름으로 직장인 교리서가 나왔고, 이번에 한국판(?) '사람 낚는 어부'라고나 할까 젊은 신자 직장인들에게 신앙의 길을 보여준 책이 나오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 책은 여러모로 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회합과 활동 및 회원들의 삶의 모델을 우리 천주교회 내에 알릴 수 있습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우리 교회 안에서 노동헌장 반포 40주년 회칙이 발표된 이후에 평신도 사도들의 활동 기준이랄 수 있는 '관찰', '판단', '실천' 이라는 아주 소중한 보물을 실제 삶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도직 단체입니다. 그러한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신앙 안에서 정확히 전달하고 받아들여 양성하는 것은 그 동안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둘째로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처음 들어오는 회원들에게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한국에 들어온지 무려 40주년이 되어갑니다. 그 동안 회원들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오던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전통과 핵심 정신들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여 방향을 잡고자 하는 시도를 이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셋째로는 교회와 세상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의 삶과 활동을 정확히 알려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위험한(?) 단체라는 선입관을 고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많은 오해와 박해마저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늦게나마 이 책을 통해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단순히 노동 조건만을 고치기 위한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라,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의 일터와 직장과 가정과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의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 사도직 활동단체라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직장 내의 천주교 신자 동우회나 사우회원들에게, 주님을 알고 따르고자 하는 일반 신자들에게도 복음화의 과정을 나름대로 제시해 줄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전개 과정에도 그러한 흔적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1부에서 우리는 성당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사도직 단체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신앙을 맛들이고 자기 삶에 신앙을 구체화하기 시작하는 단계를 봅니다. 이 1부에 나오는 여러 다른 경우의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독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이 어느 방향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2부에서 등장인물들은 단순히 영세 받은 신자에서 출발하여 주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기쁜 소식, 즉 복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등장인물들과 함께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지금까지 사회와 문화 안에서 알게 모르게 스며든 비그리스도교적인 요소들을 정화시키며 복음화하기 위해 자신과의 어려운 투쟁을 시작하며, 넘어지고 쓰러지는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윽고 제3부에서 우리는 주님과 주님의 말씀인 복음의 힘을 받아 다시 일어서서, 드디어 주님의 사도가 됩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가 내가 아니라 진정한 우리 안의 '나'들이 되고,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며 동시에 그 문제를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공통적인 문제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의 힘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그러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사도로서의 길, 그 길은 참으로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루가 9,23)하는 길입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해 보이지만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하신 말씀대로입니다. 바로 그 길은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과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영양가 있는 밥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아울러 이 책과 같이 복음적인 삶을 드러내는 책들이 많이 나와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요로워 지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안에 말씀으로 거듭 태어나시는 1994년 성탄에

두 봉 주교

차례




제 1 부 나 를 찾 아 서

다른 길

서울 구경

사랑의 방법론

이렇게도 힘든가

노동자 새 세상

그래, 이거야

다시 남

여기에 우리와 함께







다른 길


페인트 칠한 지도 오래 된 듯, 벽 곳곳에 먼지가 말라붙은 흔적이 보이지만 그래도 아담하고 어딘지 모르게 푸근한 회합실에 남, 녀 6명이 앉아 있다. 모임이 시작되고 꺼먼 옷을 입은 사내가 나머지 5명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남자 둘과 여자 둘에 대한 질문이 끝나고 마지막 여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예요?"

"…"

"이름이 뭐예요?"

"김...희...정이에요"

"뭐 합니까?"

"…"

"무슨 일 해요?"

희정이는 당황하면서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것을 묻지? 아까부터 참석한 사람들에게 마치 파출소에서 조서 꾸미듯이 부모님, 나이, 직업, 취미, 주소, 전화번호, 오게 된 동기 등등 하나하나 꼬치꼬치 묻는 이유가 뭐지? 강의는 언제 시작하지? 이런 것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희정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고, 고개를 숙이자 그 사내는 눈치를 챘는지 더 이상 희정이의 답변을 보채지 않았다.

"그래요, 다음에 소개해도 돼요. 처음부터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희정이는 점점 의아스러워 졌다.

'다음에 한다고? 이상하다. 나는 노동이나 노동 운동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왔는데, 아마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그냥 인사 정도겠지! 다음부터는 제대로 잘 하겠지?'

이렇게 첫날은 인사와 가벼운 대화만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면서 희정이는 자기를 노동자 교리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해 받는 예비자 교리의 일종으로 청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리이다. 이 교리반은 강의식으로 교리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 직장인들이 서로 자신의 삶을 교리와 성서에 맞추어 나누는 식으로 진행한다.) 에 소개시켜 준 동생에게 물었다.

"희연아, 오늘 왜 강의는 안하고 개인사정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기만 하니? 원래 그런 거니? 이상하더라."

"음, 차차 알게 돼. 언니가 생각하는 것하곤 좀 달라. 그런데 왜 아까 대답 안 했어?"

"그런 것까지 대답해야 될 필요는 없잖아. 왠지 말하기 싫더라."

"함께 활동하려면 서로를 자세히 알아야 하잖아? 그래서 그런거야."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어, 그런데 뭐가 이상하긴 이상해.'

"참, 근데 아까 그 사람 있잖아, 그 사람은 술술 대답 잘 하더라."

"응? 누구? 아, 경석이 오빠?"

"야, 내가 경석인지 누군지 어떻게 아니?"

"아까 인사했잖아, 그러니까 누가 말할 때 잘 들어야 돼. 책이나 강의를 들어야만 배우는 게 아니고,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배우는 거야."

서로를 통해 배운다고? 그래 그 사람은 자기가 선반 (쇠를 깍아 가공하는 기계) 노동자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떳떳해 보였어. 그럼, 자존심이나 자부심부터 배우라는 것인가? 서로를 통해 배운다고… 갑자기 희정이는 초라하고 왜소해진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된다. 중학교 2학년 초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지금까지의 8년. 서울에 올라와 끽소리 한 번 못하고, 하루 16시간 가량 잔업 철야로 미싱 앞에서 일하다 지쳐 허물어진 몸 때문에 쉬어야 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 인생에도 남에게 가르쳐 줄 게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난 왜 대답 못했지? 그리고 왜 묻다가 말았지?"

희정이가 동생에게 반발적으로 물었다.

"그럼 왜 나한테는 아까 다른 사람처럼 끝까지 다 물어보지 않고 묻다가 말았지?"

"응, 그건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내가 대답할 때까지 안 기다렸잖아."

"응, 뭐라 그럴까!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열고 자연스럽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아니, 얘가!'

희정이는 속으로 감탄사를 외치며,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자리에 누웠어도, 수많은 질문과 대화를 했으면서도, 피곤에 지쳐 떨어진 희연이를 옆에 두고 누워 희정이는 밤잠을 못 이루고 갖은 상념에 시달렸다. 지긋지긋한 노동 앞에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노예처럼 부려 먹힌 듯한 자신의 생애가 자랑스러울 수 있고, 남에게 가르쳐 줄 게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희정이는 곁에 누워 자고 있는 동생을 피부로 느끼며 생각했다.

"희연이는 뭔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틀림없이 다른 길을! 같은 배에서 나왔고, 같은 고생을 했고,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동생은 뭔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색다른, 다른 길을!"

다음 날 희연이는 월급을 받고 동료들에게 줄 선물을 사들고 일찍 성당 회합장소로 왔다. 혼자 회합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연아, 너 왔구나! 별일 없었니?"

"네, 참 저 월급 탔어요. 그래서 팀원들에게 주려고 선물 사왔어요."

"뭐, 선물, 오늘 누구 생일이니?"

"아뇨."

"그럼, 오늘 무슨 선물나누기 하기로 했니?"

"아뇨."

"그래? 저녁 먹었니?"

"아뇨. 이따가 회합 끝나고 회원들과 함께 먹으려고요!"

"월급 탔다고 네가 한턱 내려고?"

"네."

"그런데 말야, 처음부터 이렇게 너무 열심히 하면 오래 못한다. 그리고 네 고운 마음은 알지만 월급을 이렇게 다 써버리면 어떻게 하지? 네 노동의 대가인데…"

"저도 알아요. 하지만 오늘만 한 번 그러는 거에요."

신부님은 언제나 물질 면에서 냉엄했다. 물질로 베풀면 자기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또 자기가 땀 흘려 번 돈을 헤프게 쓰면 자기 노동의 질도 헤퍼진다는 것을 항상 지적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선물도 항상 경계하시는 눈치다. 우리가 가난해서 그런 다기 보다는 선물은 자기 마음을 표하는 아주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꽃이나 물건보다 마음을 담은 편지 한 장이나 메모 한 장을 더 귀하게 여기셨다. 희연이는 신부님이 한 번 지나가는 것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깊이 얻으려는 욕심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런데 말야! 너희 언니는 원래 말이 없니?"

"아뇨. 처음이라 그래요. 우리 언니 말 잘해요."

"그래? 난, 하도 대답이 없길래 기분나빠 하는 줄 알았어. 괜히 너무 자세히 질문하면 부담이 돼서 다음 주부터 안 나올까봐 걱정했단다."

"겉으론 그래도 신부님이 자주 물어봐 주기를 바래요. 좋았다고 그러던데요."

"그래? 뭐가 좋았다고 그러니?"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좋다고 얘기한 건 없지만, 색다르고 좋았다고 해요. 언닌 사실 노동자 운동 단체인 줄 알고 왔거든요. 그래서 어떤 강의를 하나 하고 기대했대요. 그런데 기다리는 강의는 안 하고, 인사소개 하자면서 서로의 삶을 나누자고 하니까 당황했나봐요. 신부님이 좋대요."

"내가? 에이! 그냥 할 말이 없어서 해 본 소리겠지, 뭐. 근데 예비자 교리라는 걸 얘기 안했니?"

"처음인데요, 뭐! 예비자 교리에 대해 설명해도 잘 모르잖아요?"

"그럼 뭐라고 했니?"

"그냥 와서 보라고 했어요."

"그래? 대단한데. 그럼 이따 팀회합 할 때 보자."

"네."

"그리고 다음부턴 선물 사갖고 다니면 안된다. 받으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괜히 부담느끼면 어떻게 하니?"

"네. 걱정 마세요."

차례




서울구경


며칠 동안이나 지루하게 비가 내리더니 모처럼 날씨가 개었다. 혼자 방구석에 앉아 있자니 먹을 것도 마땅치 않고, 여기저기 비가 들이치고 샌 곳에서 슬금슬금 물 마르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가자! 나갈 준비를 해야지!"

희동이는 물을 두 사발 들이키고 맑게 개인 하늘 햇빛을 양식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강원도 원주시.

"어이, 어쩐 일이야?"

"응, 바람 쐬러 나왔어."

"너 지금 뭐하지?"

"나?"

"할 일 없으면 나 일하는 데 같이 가서 일하자."

희동이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더니 친구 덕에 살았네. 이렇게 쉽게 직장을 구하다니. 그렇게 찾아다녀도 안 되더니…. 모를 일이야.'

공명 인쇄소.

어두컴컴한 조립식 건물 속, 웅웅거리는 기계 덩어리 좌우에서 기름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프린트와 옵셋을 하는 일이었다. 희동이는 하루하루 일을 배워가 며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로부터 한 달이나 되었을까? 희동이는 친구와 함께 오랜만에 성당에 갔다가 우연히 수녀님을 만났다.

"베로니카 수녀님, 안녕하세요?"

"안녕, 희동이. 요새 뭐해요?"

"조그만 인쇄 공장에 다니고 있어요."

"기술 배워요?"

"기술이랄게 뭐 있나요? 아직 시작 단계인데요."

"그럼 혹시 서울 가서 목공기술 배우고 싶은 마음 없어요?"

"서울요?"

"그래, 서울에 살레시오 수사님들이 기술학교를 세우고 기술을 가르쳐요. 우리 희동이가 거기 가면 좋겠다. 서울에서 편지가 왔는데, 적당한 친구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서울? 괜히 설레이는 단어이다. 서울하면 떠오르는 것, 뭐든지 될 것 같고,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같이 여겨졌다. 희동이는 집으로 돌아 오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서울 구경한다는 기분으로라도 갈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저 서울 가서 기술 배울까요?"

"서울? 얘가 서울 가면 뭐가 다 되는지 알아."

'또 시작이군.'

"아니, 성당 수녀님이 소개시켜 주셨어요. 서울에 계신 신부님, 수사님들이 기술을 가르쳐 주신 대요."

"신부님이 무슨 기술을 가르쳐? 너 괜히 서울가고 싶으니까 딴 소리 하는 거지? 이놈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인제 정신차려 일이라도 하나 보다 했더니 또 무슨 바람이 들어서, 너 이리 와 봐."

"아녜요. 정말이에요. 수녀님이 가 보라고 했어요. 베로니까 수녀님이 정말 저보고 직접 가 보라고 했어요."

1983년 1월 13일 새벽 4시 5분.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

아무리 서울에 처음 온 희동이지만 자신이 보기에도 건물이 커 보였다. 집보다 더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 희동이는 처음 해보는 공동체 생활, 코가 큰 외국인들, 새롭게 접하는 용어 (교회 용어) 들, 수녀님들이 해 주는 밥….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자신의 삶에 생기와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 같았다.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무엇보다 중학과정을 밟는다는 것이 꿈에서만 그리던 일이라 그런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희동이는 자신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희동이는 이것 저것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기쁨에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희동이는 서울에 올라와 서울 구경은 한 번도 못해 봤지만, 무리한 탓으로 평생 흘려 보지도 않았던 코피도 몇 번 구경할 수 있었다.

돈 보스꼬 센터 기술 훈련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훈련원에서는 실습비를 3만 원씩 주었다. 1만 5천 원은 기숙비, 천 원의 자치회비로 공제하고, 3천 원 적금, 용돈 2천 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시골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시원찮게 생각하는 용돈이었지만 희동이에게는 큰 돈이었다. 그나마 이 돈도 모두 쓰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희동이는 명절에 집에 갈 차비를 마련해 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다 생활 7개월이 지났다. 희동이는 친구들의 동정(?)과 우정어린 도움으로 조장이 되었다. 첫 작품으로 약장을 만들었다. 희동이는 그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은 내 첫 작품이다. 그냥 팔려 가도록 할 수 없다. 어디든 요긴하게 쓸 데가 없을까?"

희동이는 그렇게 고심을 한 끝에 조원들과 함께 신부님을 찾아 갔다.

"신부님, 청이 하나 있는 데요?"

"청, 뭔데?"

"저기, 저… 이건 저희들이 처음 만들었는데 다른 데 아무 데나 그냥 팔지 말고 어디 좋은 데로 보냈으면 하는데요?"

"응, 그러고 싶니? 그렇잖아도 그건 '성라자로 마을' 이라고 나환자 마을에서 주문한 거니까 잘 됐다. 근데 잘 만들었니?"

"네."

"어디 한 번 볼까? …대단한데, 잘 만들었어! 이담엔 훌륭한 목공 기사가 될 거야."

어느 날 저녁 야학 시간이 끝날 무렵 훈련원 기숙사 사감이신 고스마 수사님이 들어오셔서 실습생들에게 말씀하셨다.

"혹시 이 중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고 싶은 사람 있으면, 끝나고 나한테 올래?"

"저기, 저는 영세는 어릴 때 받았는 데요. 아직 성체를 못 모셔요."

"응, 아직 첫 영성체를 안 했나 보구나. 너 성당에서 국민학교 때 첫 영성체 교리라고 받아 본 적 없니?"

"아뇨? 그게 뭔데요?"

"응, 어릴 때 너처럼 영세를 받은 것을 유아세례라고 해. 그런데 유아세례만 받으면 성체를 모실 수가 없어.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알아야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실 수 있게 되지.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아이가 커서 글씨를 읽을 줄 알고 교리를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되면, 첫 영성체 교리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배워서 영성체를 하게 되는 거야"

교리 첫 시간. 희동이는 '정 리디아' 라는 여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셔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프라도 수녀회의 박 세실리아 수녀님, 기숙사 지도 신부님이신 고 요안 신부님도 모두 좋았다. 희동이는 무엇보다 평소에 멀리만 느껴지던 고 요안 신부님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1984년. 희동이는 목공훈련원을 졸업함과 동시에 첫 영성체를 했다.

희동이에게는 그간 어려웠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렵고 지루한 교리, 아니 희동이 보다 선생님들이 실습생들에게 쉽게 설명해 주시느라 더 어려워했던 것 같았다.

희동이는 자신의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의 가출, 배고파 나무껍질을 벗겨 죽 쒀 먹던 일, 아버지의 술타령으로 동생과 함께 배급받은 옥수수를 소주와 바꾸느라 추운 겨울에 장갑도 없이 울며 밤거리를 헤매던 일, 부모님의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성당에 가도 자신은 친구들처럼 제 때 첫 영성체도 못하고 그저 친구들을 부러운 마음으로 늘 바라보아야만 했던, 그 시절의 그 모든 슬픔과 아픔이 다 사라지고, 새날이 열린 것만 같아 너무나도 기뻤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시여!"

희동이는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던 어느 날 자신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신 수녀님을 찾아갔다.

"수녀님, 저 왔어요."

"그래요, 안드레아 왔어요? 요새는 어떻게 지내요?"

"그냥 그렇게 지내요!"

"'그냥 그렇게'가 뭐에요? 이제 기술도 배웠으니까 열심히 신앙 생활하고 살아야지요?"

만나면 항상 듣기 좋은 소리만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희동이는 그 수녀님들이 좋았다. 사복을 하시고 우리처럼 허름한 집에 살면서 공장일, 파출부 일을 하는 수녀님들이 참 좋아서 무슨 일이 있으면 희동이는 항상 이 집을 찾았다.

"참, 요새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요?"

"헤헤…!"

"그러지 말고 내일 여기 구로 3동 성당에서 노동자들이 모여서 모임을 한다는데 함께 가 볼래요?"

희동이는 노동자라는 말에 다소 부담이 가기는 했지만 수녀님께서 가신다니 괜찮을 것 같았다. 희동이는 마지못해 응답을 해 놓고는 숙소에 돌아와서 머뭇거리다, 다음 날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남부 연합회 구로 3동 본당 정기총회'

그 자리엔 노동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지 않아서 그런지, 희동이는 다소 안심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직장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신자로서 활동했는지를 발표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비슷한 환경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 친근감이 느껴졌고 호기심 속에서 점점 그들의 발표에 빠져들어 가게 되었다.

희동이는 두 귀를 곤두 세우고 정신을 집중하여 점점 더 깊이 빨려들어 가다가 자신을 꽝 하고 때리는 듯한 말에 멈춰 버렸다.

'내가 왜 진작 가노청(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약자)을 알지 못했을까?'

희동이의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가노청이 무엇인가? 저 사람이 말하듯 가노청이란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인가? 나도 한번…'

희동이는 자기도 한번 해 보고 싶었다. 자기도 여기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아무도 귀담아들어 주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러나 터질듯 자기의 가슴 속에서 울부짖는 이야기를. 누구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없는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삶을. 이들이라면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희동이는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가노청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차례





사랑의 방법론


영숙이는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영숙이의 발길은 언제나 무겁기만 했다. 그래서 영숙이는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 구경이나 가고, 흥미도 붙이지 못한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다 늦은 시간이 돼서야 겨우 자신이 붙어 사는 외사촌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늘도 영숙이는 퇴근 시간이 다 돼 가자 일을 정리하고는 책상에 앉아 생각해 본다.

'우리 집이 아니라 그런가? 항상 기쁜 일만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부모님 살아 계신 내 집이 그리워진다. 벌써 5월이다. 서울 온 지 2개월이 됐는데도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런지 딱히 갈 데도 없다. 오늘은 학원도 휴강인데 어디로 가야 하나?'

그 때 갑자기 영숙이를 이 정밀전자 회사에 소개시켜 준 경자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자 언니는 영숙이 언니의 친구다.

"영숙아, 집에 안 가니?"

"응, 가야지."

"어느 방향이지? 나랑 같이 갈까?"

"그래."

영숙이는 가방을 들고 일어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경자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바빠?"

"아니, 왜?"

"언니, 바쁘지 않으면 나하고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얘기 좀 할래?"

"무슨 일 있니?"

"아니, 그냥!"

"그래."

"요 앞 레스토랑에 갈까?"

"언니가 아는 데로 가."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 경자는 돈까스를, 영숙이는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회사 안에서 있었던 일을 의미도 없이 늘어놓다가 경자가 물었다.

"참, 너 아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응, 별거 아냐."

"지금 외사촌 집에서 산다고 그랬지? 있을 만하니?"

"응, 괜찮아."

"나도 처음 올라 왔을 때는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친척집에 좀 머물렀었는데, 내 집 같지 않더라. 넌 어떠니?"

"근데, 왜 그런지 집 생각만 나고 정이 안 들어."

"그냥 셋집에 사는 것하고도 다를거야! 너 혹시 기숙사에 들어가 살지 않을래?"

"기숙사?"

"응, 공단 근처에 '선화기숙사'라고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여성 근로자 기숙사가 있어. 거기 괜찮아."

"수녀님? 난 잘 모르는데."

"응, 거긴 뭐 신자만 받아 들이는 곳은 아니고, 나도 거기 살다가 가족이 서울로 다 이사와서 나왔는데 괜찮아. 안전하고, 처음 사는 사람은 괜찮아. 한 방에 4명이 사는데 기숙사비도 싸! 한 달에 4만 원인가 하고 아침하고 저녁은 주고, 점심은 회사에서 해결하고. 혼자가 아니니까 외롭지도 않고, 시설도 깨끗하고 괜찮아. 도서실도 있고, 학원 안 가고 자체적으로 꽃꽂이나 문화교실을 운영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배울 수도 있고. 참! 옆에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의원도 있어서 참 좋아.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규율이 좀 엄해서 늦어도 열시 삼십 분까지는 들어가야 하지만. 생각해 보고 가고 싶으면 말해, 내가 알려 줄께."

경자 언니의 제안을 듣고 나서 영숙이는 생각했다. 외사촌 집에서 뭐라고들 할까? 남들하고 살아 보지 않았는데 하며 망설이다, 오히려 출퇴근하기 힘든 외사촌 집보다 가깝고 어떤 면에서는 더 편할 것 같아 옮기기로 정했다. 선화기숙사에 가서 수녀님과 면담을 하고, 병원에 가서 건강진단을 받고 해바라기 방에 자리를 잡았다. 평생 안 해보던 공동체 생활을 하며 '함께 산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잔잔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한편 영숙이는 함께 사는 동료들이 낮에는 현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까지는 당연히 부모가 자식을 교육시켜 주어야 하는 것으로만 여겨 왔던 영숙이는 새삼 부모님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얘 미란아! 수녀님들 6시만 되면 어디 가시는 거니?"

평소에 새벽 6시만 되면 문을 열고 나서시는 수녀님들을 보고 이 새벽에 어디 가나 하고 의아해했던 영숙이는 같은 방 친구인 친구 미란이에게 물었다.

"응, 그 시간에는 성당에서 미사 드려."

"미사가 뭐야?"

"제사라고도 할 수 있고, 잔치라고도 할 수 있고. 쉽게 말하면 기도하는 거야!"

'무슨 제사를 매일 바쳐? 수녀님들이 많아서 매일 제사를 드리나? 근데 잔치는 또 뭐야? 특이하게 제사를 드리나 보지.'

"근데 저 옆방에 있는 애도 가던데?"

"응, 가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가도 돼. 왜 한 번 가 보고 싶어? 내일 나랑 한 번 같이 가 볼까?"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바람에 그러겠다고 해 버렸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모처럼 일요일이라 아침도 안 먹고 푹 자겠다고 결심하고 한참 곤히 자는 영숙이를 누가 막 흔들어 깨웠다.

"왜 그래?"

"어제 미사 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랬나?"

영숙이는 같은 방 식구끼리 첫 약속인데 거절할 수도 없고해서 일어나 보니 5시 30분이었다.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내키는 걸음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외출할 준비를 하고 나섰는데 6시가 벌써 넘었다. 늦은 줄 알고 빨리 뛰어 내려온 영숙이를 바라보면서 미란이는 웃으며 물었다.

"어디 가?"

"미사 가자며?"

미란이는 놀라는 영숙이를 보고 말 없이 웃기만 하다가 말했다.

"가자!"

미란이는 문을 열고 나가더니 기숙사 바로 뒤의 수녀원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가까워?"

미사를 마치고 기숙사 사감 수녀님과 내려 오면서 영숙이는 수녀님께 자기도 성당에 다닐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녀님은 흔쾌히 대답하시면서 성당에 다니려면 예비자 교리를 받아야 한다고 약 10분 거리의 구로 3동 성당을 소개시켜 주셨다. 영숙이는 구로 3동 성당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아 '87년 12월에 영세를 받았다. 하지만 영숙이는 스스로 원했으면서도 특별하게 마음 속에 와 닿는 부분은 없었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에 사니까 신앙이 늘어가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실제로 신앙생활을 유지, 발전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한편으로는 개신교 신자인 친구가 뭐 좀 같이 하자고 하면 교회 간다고 빠지는 모습을 보고 영숙이는 영세받아도 '믿음에 구속되지 말자.' 라고 다짐했고, 또 다른 한편 산을 좋아했기 때문에 일요일마다 산을 찾으면서 주일 미사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느끼지 못해 차츰 자신도 모르게 냉담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무거운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는 영숙이에게 어느 날 옆 방 친구 매희가 말을 걸어왔다.

"예, 영숙아! 너 요새 성당도 안 나가는 것 같던데. 요즘 뭐 바쁜 일이 있니?"

"아니."

"그럼, 성당가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냥 한 번 두 번 빠지니까 잘 안 가게 되더라. 가긴 가야 하는데."

"그러지 말고 무슨 단체에 가입해서 사람들하고 같이 활동도 하지 그래? 혼자서 신앙생활 하려면 참 어려워. 어려울 때 서로 도와 주고 활동도 같이 하면서, 각자가 서로 자기가 만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잘 할 수 있어."

"단체? 단체에서 사람들하고 활동을 같이 하라고? 무슨 활동을 하는데?"

"우선 내가 하고 있는 단체에 한 번 같이 가서 보고 마음에 들면 같이 하고, 아니면 내가 다른 단체를 소개시켜 줄게."

숙연이는 매희가 자기와 함께 하자는 말을 듣고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 알고 싶어 따라나섰다. 그 때 영숙이가 매희를 따라간 모임이 구로본동 성당에 있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였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 회합에 처음 참석할 때,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은 생활나눔을 하고 있었다. 영숙이는 회원들이 자기하고 처음 만났는데도 자신들의 생활을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때 영숙이는 이 나눔의 자리가 작은 고해소와 같다고 생각했다. 내성적인 영숙이는 그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은 이들처럼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을까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후 영숙이는 '촛불'팀에서 나눔을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영숙이는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다른 회원들은 현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현장이나 노동조합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상황이 잘 연상되지 않았다. 영숙이는 그 동안 공단의 어려움을 자주 들어 왔지만 막상 접하고 나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영숙이를 회원들은 이해해 주었고, 함께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관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영숙이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차츰 자기에게 관심을 베풀어 주는 만큼 점점 다른 회원들에게 관심을 주고 연락하기 시작했다. 영숙이는 이 때 회원들을 통해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 방법은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차례





이렇게도 힘든가


"아버지 나 쉬!"

"또? 자주도 간다. 빨리 갔다와."

여기저기서 "내려, 내려."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막 열차 속의 화장실에서 나온 연길이 앞으로 쏟아져 내려갔다.연길이는 순간적으로 내려야 하는가 보다 싶어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을 따라서 같이 내렸다. 그러나 연길이는 그 길이 부모님과 평생 헤어져서 서로를 알지도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운명의 시작이 된 것을 연길이가 안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여기 저기 수용소를 거치며, 이 고생 저 고생을 하던 끝에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성심원이라는 고아원에 들어갔다.

"기도하러 가자!"

"싫어."

"기도해야지!"

"싫다니까 왜 그래? 기도하면 뭐해? 하느님께 기도하면 수녀님이 막을 텐데!"

"뭐!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수녀님한테 이른다."

"일러라!"

"여기 나가기만 하면 내가 성당에 다니나 봐라!"

이윽고 그 녀석의 고자질로 원장 수녀님이 오셨고, 연길이는 사무실로 끌려갔다.

"연길아, 요새 무슨 일이 있니?"

"없어요."

"그런데 왜 기도하러 가지 않니? 예수님이 싫어?"

"예수님은 좋지만, 예수님께 기도해도 아무것도 안 변하잖아요? 예수님이 수녀님편만 들어 주니까 싫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산타 할아버지는 모두 같은 선물만 나눠 주시잖아요?"

"얼마나 좋아! 모두 다 공평하게 산타 할아버지가 주시는데?"

"우리는 각자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달라고 크리스마스 때 기도했는데 항상 모두 다 똑같은 선물만 받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기도할 필요도 없고요, 또 기도 안 하는 애도 주시잖아요?"

연길이는 자신의 지난 어린 시절을 되돌이켜 보면서, 그때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이유가 그곳 생활의 전면 아니 후면 두 곳의 극과 극의 생활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교회 앞에서는 신앙 생활에 깊이 파묻혀 있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집단 수용소의 많은 이들이 서로 성격도 다르고 모습도 다르고 꿈이나 생각하는 것도 달랐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한 테두리에 집어 넣고 질서유지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개인적이고도 사소한 부분들마저 배제시켰던 것이다.

1988년 1월. 연길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썰렁한 기운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 오고 있었다. 연길이는 자기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이 가슴! 내 머리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대학이 아닌가? 이 패배감이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는구나! 이제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재수를 할 수도 없고. 그래! 지금까지 아무런 걱정도 없이 의문만을 무성하게 낳고 자라 온, 그렇다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이 집도 이젠 떠나야 하는구나! 어떻게 하나! 이제 어디 가서 뭘 먹고 사나! 배운 기술도 없이 가진 거라곤 형편 없는 이 맨 몸뚱아리 하나로, 또다시 사회로의 진출 아니 객지생활로의 막이 올라가는구나!'

그간 귀찮기도 했던 수녀님의 목소리가 오늘은 너무나도 아쉽게 들렸다.

"연길아!"

"네."

"연길이, 떨어졌다구!"

"죄송합니다."

푹 처진 연길이와 어쩔 줄 모르는 수녀님. 둘이는 말없이 시공을 잡아 먹고 있었다. 그래도 원생들을 살려야 하는 수녀님이 먼저 입을 떼었다.

"내가 일자리를 하나 알아봤으니 거기 가서 일해 볼래?"

연길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맨 몸뚱아리로 거리를 헤매며 수용소를 돌던 연길이에게는 오히려 수녀님의 배려가 감사하기만 했다.

안양.

연길이는 차디찬 겨울 바람을 맞으며 얼굴과 온몸에 기름을 묻히고, 다 터진 장갑으로 타이어를 갈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첫일을 시작했다.

"휴!"

너무나 힘들다. 차디찬 겨울 바람이 두 뺨을 쓰리게 문대고 지나는 한 길가에서 연길이는 자동차 밑에서 미션을 내리고, 오일을 교환하며, 엔진을 갈고, 타이어를 갈고, 빵구를 때우고, 동장군 앞에서 고목처럼 버티고 서 있는 자동차들에게 무거운 밧데리를 이고 달려가 시동을 걸어 주고…. 연길이는 이런 정도의 추위라면 날이 풀리면 좀 나으리라는 희망을 걸고 열심히 일했다.

이제 손이 좀 부드럽다. 추위로 꽉 굳은 연길이의 몸도 긴장이 풀린다. 봄이 온 것이다.

"야, 사장님이 모두 다 들어오래."

"무슨 일이야? 오늘 회식이라도 하나?"

동료 3명이 사장님 앞에 가서 여기저기 꾸부정하게 앉았다.

"여기 터가 안 좋은가 봐!"

"네?"

"이제, 그만해야겠어!"

"그만하다니요?"

"내가 자네들 일자리는 알아 놨으니까, 내일부터는 그리로 출근해."

좁은 사무실 한가운데 난로 위의 주전자 구멍에서 흘러 나오는 수증기는 정말 무심하게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왜 다 그런지! 연길이는 들어서자마자 코를 진동시키는 본드 냄새와 둥둥 떠다니는 화공약품들 때문에 눈에서 물을 짜낸다.

"죽겠군!"

연길이는 그나마 고맙다고 생각했다. 수녀님이 소개시켜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새 직장이라도 알선해 주니 그게 어디냐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감지덕지하기엔 너무나도 심하다. 연길이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럼 어쩌나? 갈 데도 없는데. 그래 해 보는 거야!"

그날 밤. 한숨 속에서도 다시 한 번 장래에 대한 꿈을 꾸고.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본 그런 멋진 구두를 만든다는 소박한 자부심을 안고 연길이는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누구 망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이게 뭐야?"

"아니, 그건 제가 그런 게 아니고…"

"어쭈, 이 새끼! 시다 주제에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해?"

그날부터 고참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으며 무슨 문제라도 터지면, 꼭 화살은 연길이에게 돌아왔다. 연길이는 객지에 나와서 일하는 사람들끼리인데 서로 도와 주고 다독거려 주면서 일을 하면 분위기도 좋고 괜찮아지리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이었다. 막상 의자에 앉아서 본드 통을 만지는 순간부터 주눅이 들고, 오늘 하루도 빨리 이 시간이 다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이연길!"

"네!"

첫 월급이었다. 연길이가 자신의 꿈을 이룰 첫 거름이다. 가슴을 졸이면서 희망이 날아갈까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고 액수를 확인해 보던 연길이는 맥이 풀리고 온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10만 원. 밧데리 가게에서는 15만 원을 받고 일을 했는데, 이곳에서는 잔업과 철야를 하고 나서도 아직 더 해야 한다고 할 때마다 시키는대로 꾹 참고 일한 대가가 겨우 10만 원이라니!

'내가 겨우 10만 원 짜리 인생인가? 정말 허탈하다! 억울하다. 그간 30센티미터도 안되는 낮은 의자에 앉아서 하루 종일 본드 냄새를 맡으며 몽롱해진 머리와, 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의자에서 일어날 때면 잘 펴지지도 않던 내 허리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싫다, 싫어!'

연길이는 정말 일하기 싫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이게 뭔가? 연길이가 지금까지 배우고 그려 온 사람의 모습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은 힘들게 일하며 찌든 때로 얼룩진 작업복을 입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입어야만 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서류를 정리하며 어딘지 힘있어 보이는 그런 모습이 연길이의 두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는데, 저쪽에서 연길이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연길! 월급 받았다고 일 그만할 꺼야? 빨리 이리 와서 이거 안 해!"

그날부터 연길이는 술을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저녁때는 술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잘 정도였고, 공장 기숙사 사람들이 과거에 했던 것처럼 주정과 쌈박질로 저녁을 보내고 그 다음 날 또 아무런 희망도, 의미도 없이 일을 했다. 매스컴에서는 "세계는 서울로 … 1인당 지엔피(GNP) 얼마 얼마, '86아시안 게임의 대성공, 고도경제성장, 이제 우리 모두는 '88로" 라는 슬로건이 자기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길이는 자기 가슴을 쥐어 짜며 힘 없이 중얼거렸다.

"왜 나는 고작 이런 데서 요만큼 밖에… 원래 타고났나? 내가 싫다."

무심코 킨 텔레비젼에서 '인간 만세'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청년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 같았다. 연길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절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이 수철이 형의 커다란 손바닥을 통해 연길이의 얼굴을 덮쳤다.

"욱!"

"이 자식이 청승맞게 왜 울어!"

연길이는 허겁지겁 수철이 형의 또 다른 몸부림을 뒤로 한 채 공장 앞 뜰로 뛰어나왔다. 캄캄한 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연길이는 지난날들을 회상해 보기 시작했다. 지난 13년 동안은 장래에 대해 힘들게 걱정하지 않고 철부지로 지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자기 혼자다. 자기 혼자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정이 가지 않는 사람들의 늪 속에서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감이 연길이를 더욱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결심했다.

"그래 뭔가 해야지, 뭔가에 몰두해서라도 일어서야지! 여길 나가자, 나가서 환경을 바꿔 다시 시작해 보자!"

차례





노동자 새 세상


안양 근로자 회관(노동자 기숙사 및 노동자 문화서클 회관).

여기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활발하지? 나보다 뭐 더 특별히 좋은 조건도 아닌데…. 한번 끼어 볼까? 게시판에 쓰여 있는 여러 서클 광고 중에서 풍물과 노래 단체를 골랐다. 그리고 노동자로서 빠질 수 없는 노동법 강의도.

"덩덩 덩더쿵!"

"덩덩 덩더쿵!"

들어서면서부터 울려 퍼지는 아니 빨아 당기는 굿거리 장단 소리와 아울러 회원들의 열기가 연길이의 얼굴과 마음에 뜨겁게 덮쳐왔다.

연길이는 난생 처음 신명나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풍물반에 들어갔고, 노래도 배웠으며 이성 친구들도 사귀었다. 그리고 노동법 시간에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을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규정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후속 모임을 통해 토론도 하여 자신의 처지와 노동계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서고에 쌓인 많은 책들을 한 권 한 권 읽고 서로 나누어 가면서, 마치 이 책들과 이 세상이 연길이 자신을 위해 있는 것 같았고 여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로 나누게 되면서 토론을 하는 법과 사람을 사귀는 법도 배웠다. 또한 천주교회에서 '노동헌장'과 '노동하는 인간' 등의 책들을 펴내 1891년부터 아주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사회에서 어떻게 복음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왔다는 것과 그러한 교회의 사회교리 정신이 미국에서부터 제정하게 된 노동법의 실제적인 기틀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그 동안 멀리만 했던 신앙에 대해 새로운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기득권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세상. 사실은 노동이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연장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들의 노동이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보호하며 재창조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을 주도하시는 선생님들의 말씀처럼 우리같이 하찮아 보이는 사람도 정말 중요한 일 중의 한 부분에서 일하고 있고 자신들의 자학과 열등감은 극복될 수 있다는 자부심과 희망이 또다시 연길이를 부풀게 했다.

풍물을 치려고 지하로 내려가다가 연길이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1층 게시판 한 구석에 못 보던 광고가 하나 붙어 있었다.

주제 : 노동자 교육

일시 : 10월 6일 늦은 8시 30분

장소 : 회관 회의실

주최 : 가톨릭 노동 청년회 수원교구 연합회

"어, 이게 뭐지?"

지금껏 회관의 모든 프로그램을 통해 생기를 얻다 못해, 방방 뜨던 연길이가 여기라고 놓칠 리가 없었다.

"8시 반? 좋아!"

10월 6일. 연길이는 퇴근하자마자 후다닥 씻고 식당에 가서 후딱 밥을 먹고 뛰어 내려갔다. 그런데 회의실엔 몇 사람 없고 연길이가 보기에는 분위기도 영 '아니올시다' 아닌가! '여긴 왜 이래?' 하지만 일단 들어 왔으니까 뭐 하는지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 중 한 땅딸막한 여자애 하나가 일어서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가톨릭 노동 청년회 하기 노동자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노동자 교육은 '노동의 존엄성'이라는 주제로 강의 및 사례발표가 있겠고 조별로 나눠 나눔을 하고 전체발표로 마치겠습니다."

연길이는 어이가 없었다.

"시작하다니? 사람이 겨우 8명 밖에 없는데… 좀더 기다리거나 사람 좀 불러오지, 뭐 이래? 준비가 엉망이구만!"

그런 연길이와 참석자들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땅딸막한 여자애는 진행을 강행해 나갔다.

"다 같이 '철의 노동자' 한 번, 소리 높여 불러 보고 교육에 들어가겠습니다."

"민주노조 깃발 아래 …"

"그럼 오늘 첫 번째 순서는 철산리에서 노동사목을 하시는 '나 은총' 수녀님의 주제 강의를 듣겠습니다."

연길이는 외국인 수녀님의 단조롭고 낯선 주제 강의를 들으며 낮의 피로감을 못 이기고 졸음에 빠져 들었다. 갑자기 박수 소리에 잠을 깼는데 사회자가 구석의 한 청년을 지적하며 소개를 했다.

"이번에는 서울 남부연합회에서 투사선서를 하신 한연수 라파엘 회원의 개인 보고서를 사례발표로 듣겠습니다."

사례발표? 삐쩍 일어나 멋쩍게 웃는 깡마른 그에게서 연길이는 별게 있겠는가 하면서, 요것만 들어 주고 이따 조별 모임할 때 살짝 빠져나가자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는 1965년 11월 24일 충청도 공주의 가난한 촌가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농사일로 저희를 가르치셨고, 저의 사 남매는 그런 대로 순탄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를 항상 웅크리게 했고 주눅들게 만들었던 가난은 세월이 지나도 면할 길이 없었고 빚만 잔뜩 지게 되었습니다. 논을 지으며 버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아버지께서는 소장수 등 여러 가지 장사를 시작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실의에 빠져 술로 사시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욕을 해대고 어머니를 구타하는 일들이 자주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 고3 때 학력고사를 한 달 앞두고 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삶이 너무 힘드셨고 술로 인한 많은 실수와 장남이었던 저와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이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시에는 항상 말썽을 부렸고 다른 집 아이들처럼 듬직하지 못하고 촐랑거린다고 밉게 보였던 까닭입니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고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온 나는 서대문의 작은 봉제 공장에 취직해서 돈벌이를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내가 일만을 위해서 태어났나 할 정도로 장시간의 노동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4시부터 밤 11시, 12시 까지…. 그래도 저는 '봉제공장은 다 그런 거구나.' 하며 불만을 표현하지 못했고, 다른 직업만을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8개월간 생활하다가 이모님의 소개로 가리봉동에 있는 가나만 지물포에 취직해서 도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방에 들어가서 깨끗하게 꾸며 주고 나온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고, 내가 무엇인가 한 가지를 완성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세상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참 좋도다."라는 감탄과 기쁨의 표시를 했던 것처럼 도배하는 것이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도 깨끗해지려고, 항상 새것이 될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하느님의 한 도구로서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지물포 사장님 댁에서 숙식하며 12만 원의 봉급 생활을 하다가 자취방을 얻어 독립하게 됐고, 한 곳에서만 일을 하다보니까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싸구려 벽지를 부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을 몰랐습니다. 어쩌다가 고급일이 들어오면 외부에서 일류라고 하는 기술자를 불러 일을 했는데, 그분들이 일하는 것을 보며 도배에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됐고, 다른 세계로의 동경을 하게 되면서, 신씨라는 기술자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저씨께서는 한군데서 일을 하면 기술도 못 배우고, 자유가 없으니까 자기와 같이 다니며 일을 하자고 했고, 시내일이 편하고 깨끗하다며 나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장에 '네'라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지물포 사장님으로부터 처음 일을 배우면서 도움을 받고 인간적인 잔정을 많이 느껴왔기 때문에 내 욕심만을 채운다는 것이 양심에 찔렸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2시까지 일한 집에서 잔돈 5천 몇백원을 깍아 주고 왔다고, 심한 꾸지람을 하며 입에도 담지 못할 욕들을 전화에 대고 마구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전후 사정도 듣지 않고, 내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장이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장님 댁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배은망덕한 놈, 나쁜 놈! 너 한번 잘 되나 보자.' 하면서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사장. 노동자는 밤 12시까지 일을 시켜 놓고는 자기는 일찍 들어가 잤으면서, 그깟 돈 오천 원 덜 받았다고 아침부터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해대는 사장이 너무 미웠고, 그 동안 헌신적으로 일해 준 것이 억울했습니다.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한 집에 가서 내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덜 받은 돈을 받아서 갖다 주고는 이 사건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물포 사장님의 입장은 당신이 일을 맡으며 다 흥정했기 때문에 더 깍아 줄 것이 없었던 까닭에 집주인에게는 뭐라 말을 못하고, 만만한 종업원에게만 화를 낼 수밖에 없었고, 내 마음대로 물건 값을 깍아 준 것이 굉장히 건방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해야 될 일을 한 품으로 줄여 일을 따냈기 때문에 노동자 입장인 나로서는 당연히 화나는 일이었고, 집주인이 아무리 깍아 달라고 해도 내 소관이 아닌 이상 내 입장을 올바로 밝혀야 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사건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신씨 아저씨와 일을 같이 하게 되면서, 많은 기술을 배우게 됐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데 대해서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두 달이 지나니까 이 아저씨도 저를 당신의 종처럼 생각하며 가방을 들어다 집에 갔다 두고 오라고 한다든지, '다른 데 일은 전혀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보내는 일만 가야 한다.' 하면서 나의 자유는 전혀 생각해 주지않았습니다.그리고 술만 먹었다 하면 일하면서 잘못했던 일들을 되새기고, 큰 잘못도 안했는데 욕을 해댔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왜 도배를 배웠나 하는 후회도 하고, 눈물도 흘렸지만,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참는 데까지는 참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일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신씨 아저씨 도배팀에 이정직이라는 젊은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형과 자주 이야기했고, 같이 상의한 끝에 젊은 사람들끼리 도배팀을 조직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그 형과 같이 나와서 여기저기 명함을 돌리며 일하다가 지금 친목계를 하고 있는 다섯 사람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모든 생활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이었으며,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던 은총의 시간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억압받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셨고 사십 년 동안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그를 준비시켜 이스라엘을 억압의 땅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지도자로 세우셨듯이 그때까지의 나의 삶은 준비 기간이었고 가노청 활동을 통해 소외받고 가난한 노동자들 틈에서 그리스도 안의 노동해방을 위한 일꾼이 되기 위한 훈련 기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진정한 일꾼이 되려는 나의 이 다짐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통한 응답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 후 1985년도 11월. 우리 가족은 서울 독산동으로 이사를 하게 됐고 이모님의 권유로 가족들은 가톨릭 신자로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가정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독산 성당에서 청년 활동인 한우리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성 신부님으로부터 가노청을 소개받고 가노청 수련회를 인연삼아 1988년 8월 28일 첫 회합을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2년 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수련회 때 처음 본 회원들의 모습과 분과 나눔 시간에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직업을 떳떳하게 말하는 회원들을 보며 마음 깊은 구석에서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봉제 공장에서 시다 노릇을 하지만 하느님께서 만드신 귀한 선물이었고, 막노동판에서 노가다 일을 하지만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진정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이 생겼고, 예수님도 30년간 목수 생활을 하시며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셨다는 데, 나도 한 노동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생활 자체가 기도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늘 힘든 노동을 하면서, 얼마만큼 하느님께 의지하고, 십자가 상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합니까? 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바쁜 시간이지만 내 시간을 쪼개어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직장에서의 어려움, 동료들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하느님께 맡기는 자세로 기도생활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셨던 투사님과 신부님, 그리고 모든 회원들께 감사드리면서 앞으로 훌륭한 투사로서의 모범된 활동을 잘 하는지 관심 있게 지켜 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가 발표한 개인보고서는 연길이를 조별 모임으로 향하게 했고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새 세상을 보았다. 그 곳에서 연길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주 초라해 보였지만 그들은 토론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자신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은 신선하리만큼 멋있어서 연길이의 귀를 열어 주었다.

연길이는 그 다음 날 뭔가 손에 꽉 쥐어진 듯한 뿌듯한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그런데 아침 조회를 하러 나온 사장님이 연길이를 놀라게 했다.

"오늘부터 점심시간은 없다. 하는 만큼 줄 테니까 쉬고 싶으면 쉬고, 일하고 싶으면 일해! 느네 시간만 까먹으면서 하루하루 보낼려고 하나 본데, 여긴 자선사업소가 아냐! 나도 물건 팔아서 사는 거야! 이러다간 물량도 딸리고 들어오는 것도 없어 못 해먹겠다. 알아서들 해! 알았어? 그럼 가서 일해!"

갑자기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었고, 연길이는 또 다시 어깨가 늘어지고 맥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루 온 종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시달리기를 몇 일. 견습이나 자기 같은 시다는 쉬지도 못하고 기술자의 생활 습관에 매달려야만 했다. 연길이는 이렇게 나가다간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노동자 회관에서 배운 노동법을 어설프게나마 꿰맞춰 직접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야? 일 안하고 여긴 왜 왔어?"

연길이는 막상 쳐들어오듯 들어왔지만 사장 앞에선 말이 잘 안나왔다. 어떻게 입을 열고 어디서부터 무얼 이야기해야 할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기가 죽는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갑자기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노동법에도 휴식시간은 보장되어 있는데 왜 휴식시간을 없애는 거예요?"

"노동법? 노동법 좋아하네! 이게 어디서 노동법 같은 것은 주어 듣고 와서 마구 지껄이는 거야? 싫으면 관둬, 일하기 싫으면 나가면 될 거 아냐!"

너무나 일방적으로 막 나오는 사장하고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일하기 싫어서 그런 거지. 인제 시다인 주제에 무슨 권리를 주장하는 거야?"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이래도 되는 거요?"

"아니 이 녀석이!"

일어서는 사장을 밀어붙이고 연길이의 입에서는 폭포수 같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앉아 봐요! 사장이면 다요? 사장이면 다 사장이냐구요?… 사장이 일을 시키려면 뭘 좀 알고 시켜야지,… 그냥 막무가내로 '오늘부터 휴식시간 없다'하고 한 마디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이런 식으로 하니까 물량이 딸리고 애들이 뻔질나게 나가지! 노무관리를 합리적으로 해야지!…"

무작정 덤빌 줄만 알았던 사장은 노무관리를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는 연길이의 말에 귀가 솔깃했는지, 아니면 긴장감을 덜기 위해선지 연길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네도 앉게. 앉아. 앉아서 차근차근 말해야 내가 듣지. 이러면 대화가 되나, 대화가!"

사장이 '반말'에서 '하게체'로 말이 바뀌고 대화를 하자는 말에 연길이는 좀 수그러 들었고, 그 동안 느꼈던 시다로서의 어려움과 아울러 이번 조치로 인해 손해 보는 것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차근차근 설명을 했다. 이야기를 다 마치고 이젠 됐구나 싶었는데 사장은 엉뚱한 소리만 계속 늘어 놓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나? 자네 같이 일 잘하는 직원들 말고 다른 애들은 그냥 시간만 보내고 불량만 만들어 내고…. 요새는 또 전과 달라서 우리가 아주 딸려요.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하청업체 아닌가? 요새 대기업의 노조 파업문제로 수금도 안되는데,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그나마 주문도 끊길 사정이야…!"

결국 사장이 한다는 이야기는 연길이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네. 이렇게 어려울 때 같이 좀 참으면서 일해야지. 아니면 나도 너도 못살아. 휴식시간 없앤 것은 그냥 하루 아침에 내린 결정이 아니고 내가 며칠 밤 낮을 고민하면서 내린 결정이야! 자네들의 고충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나 사정이 이런데. 조금만 참아 주게, 정 힘들면 할 수 없고 …."

점점 이야기의 결론은 이제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야지 절이 나갈 수는 없다라는 식이었다. 연길이는 결국 그날 그 시간만 모면하려는, 자기 조치만 타당하고 정당하다는 사장의 이야기만 긴 시간동안 장황하게 듣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부터 연길이는 미운 오리 새끼였고 전후좌우에서 어떻게든 자기를 내 보내려고 갖은 꼬투리를 잡는 바람데 결국 외톨박이가 되어 버렸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자기들을 대신해서 한 일인데도 알아주기는 커녕 모두 외면하는 눈치였다. 관리자나 기술자뿐 아니라 견습공마저도, "나도 쥐 죽은 듯 일하고 있는데 건방지게." 라는 식의 멸시와 모멸찬 눈총만을 보냈다.

그렇지만 연길이는 그냥 나간다는 것은 너무도 당치 않은 일이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연길이는 자신을 위해서도 일을 했지만 회사를 위해서도 일을 했다고 자부했다. 더군다나 1년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그냥 나가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불쾌하고 모욕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형들의 모욕적인 언행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에는 한사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년이 되던 날 연길이는 퇴직금을 거머 쥐었다. 퇴직금이라 봐야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나마도 못 받는다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 퇴직금을 거머 쥔 채 평소에 알아두었던 도급제를 찾아서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그렇게 편할 줄만 알았던 도급제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인숙을 전전하며 이곳에서 한 달. 여인숙 주인과 안 맞으면 또 옮겨 저곳에서 며칠, 이렇게 수십 군데를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길이가 같이 손잡고 일하는 기술자 형은 술고래였다. 가불이 되는 토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3-40만원씩 빼서 그 날로 몽창 술을 마시고 화투놀음으로 마구 날려버리는 형 때문에 연길이는 돈을 모으기는커녕 몸만 계속 축나고 있었다. 식대만 해도 연길이 월급은 어림도 없었고 여인숙비, 술값까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형이 여전히 스탠드 바, 룸싸롱들을 전전하며 다니는 바람에 결국 헤어졌다. 대림동으로 온 후 다른 형과 마음이 맞아 일을 시작하려 했지만 연길이는 정작 아파오는 등, 허리 때문에 구두를 만드는 일은 그만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나 1시까지 해야만 하는 일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연길이는 점점 온몸이 쑤시고 아파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분간 쉬기로 하고 허탈한 마음을 달랠 길 없던 연길이는 평소에 자신을 아껴 주던 안양 근로자 회관장 말가리다 선생님을 찾아 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니, 이게 누구야? 연길씨 아냐? 그래 그 동안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죠. 바빠서 인사도 한 번 못 오고…."

"바빠야지! 젊은 사람은 바빠야 돼! 그런데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이 있어요?"

"일은요, 뭐. 그냥 허리가 좀 아파서 다시 일할 때까지 좀 쉬기로 했어요."

"조심해야지! 그것도 직업병이야. 매일 허리 굽히고 앉아서 구두만 만들어 대니 허리가 성할 수가 있나. 먹고 살만큼만 일해야지, 그렇게 밤낮 일만 하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고생해요! 참 인사해요!"

말가리다 선생님은 들어올 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옆의 아가씨를 가리켰다.

"안녕하세요? 김 명혜 안나에요!"

"예, 안녕하세요? 전 이연길 가브리엘이에요!"

"어디서 무슨 일하셨어요?"

"서울 대림동에서 구두 만들었어요."

"아, 대림동. 대림동이라면 그 근처에 구로 3동 성당이 있는데. 가 보셨어요?"

"아뇨. 성당에도 가 봐야 하는데, 바빠서!"

"그냥 성당에 가 보라는게 아니라, 거기 가서 친구도 사귀고 단체 활동도 하지 그래요? 혼자선 심심하고 신앙생활하기도 힘들텐데!"

"아, 참! 연길씨, 그 때 여기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교육에 참여하고 나서 굉장히 좋다고 했잖아요?"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말가리다 선생님이 끼여 들었다.

"가노청요? 좋죠!"

"거기 구로 3동에도 가노청이 있어요. 거기 가서 같이 활동해 보지 그래요?"

명혜가 맞장구를 친다.

"명혜씨도 가노청을 아시나 보죠?"

"알다마다. 이 이는 가노청 전국본부 여회장야!"

말가리다 선생님의 이 소개에 연길이는 깜짝 놀랐다. 전국본부 여회장이라니!

오랜만에 단비를 맞듯 거기서 한 참을 보내고 바로 구로 3동 성당에 가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찾았다. 연길이가 성당에 갔을 때, 가노청에서는 마침 새로운 팀을 하나 만들려는 준비 중이었다. 연길이는 거기서 김희동 안드레아 투사와 3명의 동료를 만나 가노청 팀회합을 시작했다. 1990년 5월. 연길이와 동료들은 올바른 일에 앞장서자는 의미에서 팀명을 '선봉대'라고 지었다. 어쩔 때는 일이 피곤해 회합에 나가기도 힘들었고 이 핑계 저 핑계로 회합을 빠지기도 했지만 연길이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많은 교육과 행사에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하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안으로 흡수되어 갔다. 돈이나 명예나 자리나 머리만이 아닌, 삶을 사는 새 세상인 가톨릭 노동 청년회 안으로!

차례




아, 이거야!


"신경성 위장병입니다."

의사의 진단을 듣고 나서 영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내 나이 이제 겨우 스물에 위장병이라니 그것도 신경성이라고?' 약을 받아 들고 병원문을 나서면서 영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식욕은 떨어지고 의욕도 시들하고 피곤함만 쌓여 벌써 몇 번째 병원 신세인가? 게다가 신경성 위장병이라고? 병원 간다고 조퇴했으니, 오랜만에 미정이나 만나고 들어가야겠다.'

세종문화회관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일이 바쁜지 미정이는 제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 6월의 따가운 햇빛을 피해 영희는 계단 끝 그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1990년 1월.

하늘은행 입사.

영희는 은행원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국비로 다니는 대학에 희망을 걸었지만 아무래도 무리였다. 사실 영희가 고등학교 3년 동안 배우고 느낀 것은 끊임 없는 경쟁과 긴장이었다. 매일 밤 늦게 까지 자율학습, 학원, 비밀과외. 대학이라는 골대 앞에선 아무리 친한 친구도 경쟁자일 수밖에 없었다. 항상 시험점수와 '사당오락'이라는 붉은 글씨를 바로 코앞에 붙여 놓고, 그 것을 볼 때마다 다시 긴장하고…. 그런 생활의 반복만이 영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땐 그런 입시지옥을 만들어 놓은 이 시대의 어른들과 사회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꼭 대학을 가지 않아도 주님이 주신 건강한 정신과 몸만 있다면 아무 걱정 없다고 영희는 자부했기 때문에, 모든 친구들이 다 대학에 갔지만 친했던 친구와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소외감에서 오는 섭섭하고 외로운 감정은 뒤로 한 채 홀가분하게 직장을 선택했다.

그러나 직장인으로서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영희는 매일 늦게 까지 야근을 해야 했고, 현금사고는 또 왜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지 그때마다 눈 앞이 캄캄해 오기만 했다. 매일 똑같은 일!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씻고 출근해서 매일 기계처럼 단말기 앞에 앉아서 두드리고, 끝나면 집에 와 자신의 지친 몸을 가눌 길 없어 그저 씻고 밥 먹자마자 잠자리에 드는 일의 반복뿐이었다. 사회 초년생인 영희는 차츰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매일을 그렇게, 그렇게 보내 왔다. 또 영희의 아버지는 계속 사업에 실패했고 좌절하셨다. 그 때부터 영희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사람은 역시 많이 배워야만 남들을 누르고 잘 살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영희는 어둡게 살아가는 도시 빈민들의 모습,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좌절하는 친구들의 모습, 학력문제로 고민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주님도 약한 사람, 말없이 일만 하는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그저 착하기만 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점점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희는 직업을 바꾸기 위해서, 또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에서 벗어나 전문 직업인이 되고자 다시 대학 공부를 시작해 개방대학에 들어갔다. 그 때 영희에게는 자신의 직장이 희망을 이루는 곳이라기 보다는 그저 단순히 경제적인 것만을 해결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영희에게 긍지라든가 직업인으로서의 보람 등이 있을 리 없었다. 영희는 은행에서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날 그날 학원으로 달려 갔다. 옆 창구의 동료가 현금이 안 맞아서 밤 늦도록 퇴근을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저 바라다만 볼 뿐 영희는 자신의 일을 해야만 했다. 점점 영희의 직장생활은 피곤하기만 했고, 동료들도 업무상으로만 대했다. 한 마디로 직장은 영희에게 단순히 돈 버는 장소 이상은 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에 대한 의욕은 없고, 직장과 학교의 이중생활에서 오는 피곤함이 점점 영희의 몸을 무겁게 해서 급기야는 오늘 여기까지 왔다. 신경성 위장병.

"얘, 영희야! 오래 기다렸니?"

"아니. 좀 일찍 왔어."

"웬일이야?"

"병원 갔다 왔어."

"병원,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니?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

"얜? 누가 무리하고 싶어서 무리하니? 넌 왜 이렇게 늦었니?"

"응, 너 만나려고 일 일찍 마치고 아주 퇴근했어."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좋았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였으니까 더욱 더 그랬다. 미정이와 어울리면서 영희는 이 것이 얼마만에 갖는 여유인가 하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자신은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다시 그 황금 같던 여유는 깨지고 말았다.

"미정아 나 학교 가야 돼."

"오늘 하루는 쉬어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 돼!"

"넌 알아 줘야 한다니까. 몸 조심해!"

하지만 그렇게 강하던 영희는 전철에 앉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이미 내릴 곳을 훨씬 지난 구로역이었다. 다시 돌아가자니 이미 늦었고, 집에 들어 가긴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영희는 오랜만에 성당에 가서 기도나 하고 가자고 마음 먹었다. 소성당에 들어가 앉은 영희에게 이상한 기운이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도록 이끌고 있었다. 영희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튀어 나오는 질문에 응답해야 했다.

"왜 배워야 하지? 내가 무엇 때문에 뛰어야 하지?"

한참을 그 질문에 시달리다 영희는 성서를 폈다. 요한 복음 1장 38절.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이 자신을 따라 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질문이었다. 영희는 주님의 이 질문이 자신에게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구절을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그간 무시해 왔던 주님의 가르침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신감 있게 살아야 한다는 그 가르침은 영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영희는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편안한 마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영희가 소성당의 문을 닫고 나오는데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얘, 영희 아니니?"

하는 신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이니?" 요새 어떻게 지내니?"

그 순간 영희는 작년 5월 본당 청년 피정 때, 신부님께서 본당에서 활동하라는 것을 1년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자신의 말이 생각났다.

"작년에 약속드렸잖아요. 오늘이 그날이에요!"

"그래. 안 잊어버렸어? 너 오늘 바쁘니? 무슨 약속이라도 있어?"

신부님은 아직 영희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 영희가 자신의 일에 바빠서 아직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아뇨."

"너 조금 늦게 들어가도 되니?"

"네, 아직 시간이 있어요."

"오늘 모임이 있는데, 너도 함께 하고 가지!"

"무슨 모임 인데요, 신부님?"

"응, 와 보면 알아. 내 방으로 가자."

영희는 사제관으로 따라 올라갔는데, 신부님의 방에는 이미 다른 친구들이 몇 명 와 있었다.

"어머 손님이 있네요. 바쁘시면 다음에 올게요."

"아냐, 여기서 모임이 있단다. 너도 같이 참석하렴."

신부님께서 다시 잡으시려는 말씀을 그냥 뿌리치고 나오기도 뭐하고 해서, 참석한 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제가 있어도 돼요?"

"그럼! 여기 다 너같이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신부님이 그렇게 말쑴하시자 거기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의자를 내 주고 음료수를 따라 주면서 환영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제일 언니 같은 이가 영희를 바라보며 일어서서 말했다.

"저는 김정희 효주 아녜스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광화문에 있는 한창해상보험에 다니고 있고, 나이는 스물넷, 집은 길 건너 신흥연립 가동 105호에 살고 있어요. 집 전화번호는 894에 6275고요 회사 전화번호는 …"

"저는 정연희 …"

그들은 얼떨결에 끼어 들어 어색해 하는 영희에게 초면인데도 자기 소개를 아주 친절하리만큼 자세하게 했다.

"소개하세요."

"저요?"

"네."

"저는 이 영희 도미니카에요. 나이는 스물이고, 하늘은행 경복궁 지점에서 근무하고요. 구로 5동에 살아요."

"궁금한 거 질문해도 돼요?"

"질문요? 하세요."

"집 주소가 어떻게 돼요?"

"전화번호는?"

"아버지 성함은?"

한 번 시작한 질문은 동생은 몇 살이고 뭐 하느냐? 남자 친구는 있느냐? 몇 시에 출근하느냐? 등등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희는 이런 것까지 대답해야 하나 하며, 무슨 이런 곳이 있나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거북하고 의아해 하면서도 먼저 그 사람들이 자기 소개를 자세히 했으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답을 다 마치고 나자 그들은 영희를 향해 갑자기 박수를 쳐 댔다.

"이영희씨, 여울팀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합니다."

그들은 영희에게 손을 내밀어 한 사람씩 악수를 하고 다시 박수를 치고는 자기들끼리 영희더러 여울팀의 일원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여울팀이라고?"

영희는 자기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렇게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것에 어리둥절하며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신부님은 옆에서 벙긋이 웃고만 계셨다.

모임을 마치고 사제관 문을 나오면서 신 신부님께서 영희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질문 받을 때 정신 없었지?"

"아뇨. 괜찮았어요."

속으로 영희는 생각했다.

'아니긴, 휴! 간신히 넘겼네.'

그리고는 신부님께 질문했다.

"그런데 신부님, 이 모임이 뭐에요?"

"연희야, 네가 대답해라."

"우리 모임은 가톨릭 노동 청년회라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생활을 나누며…. 에이! 해 보면 알아요. 다음 주부터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해서 잘 보세요."

이렇게 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서울 대교구 남부 연합회 소속 구로본동 성당 여울 팀'에서 영희는 자신의 삶을 열어 내놓기 시작했다. 이때가 1991년 5월. 그 때부터 순간순간 모든 것이 영희의 생애 속으로 큰 의미가 되어 다가 오고 있었다. 그날 밤 영희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하루하루가 모험이다."

차례



다시 남


"축하해!"

"고마워요!"

"축하합니다."

"고맙습니다."

영세식이 끝나고 성당 문을 나서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축하와 격려의 인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축하 선물과 꽃다발을 한 아름 가슴에 받아 안고 숙연이는 어리둥절했다. 대모님도 어리둥절했는지 내일 직장에서 보자며, 묵주반지 하나를 끼어 주지도 못한 채 그냥 건네만 주고는 집으로 가셨다. 숙연이는 그 사람들 가운데 끼어서 놀라움과 반가움 속에서 생각했다.

'이게 행복이라는 건가? 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아 보는 것은 정말 내 생애 처음이다.'

숙연이가 영세 전 예비자 면담 때 신부님께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소개해 주시길래, 하겠다고 응했더니 오늘 영세식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이 몰려온 것이다. 회원들은 사제관 회의실에 다과를 차려 놓고 노래를 불러 주며 숙연이를 축하해 주었다. 숙연이는 마냥 기쁘고 좋기만 했다.

숙연이는 축하식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 자리에 누워서 그 기쁨의 하루를 그리고 지난 날들을 그려 보았다.

"바울라,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 순간부터 흘러내린 숙연이의 눈물은 기념 사진 촬영을 위해 대모님이 얼굴을 닦아 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사진사가 "우는 사람은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바둑이처럼 나올 겁니다." 라고 놀리는 바람에 웃음이 터져 나왔고, 겨우 눈물이 멎었다.

강숙연 바울라. 26세.

숙연이는 자기 나이 17세부터 시작했던 공장 생활 동안 얼마나 외롭고 힘든 생활이었는지를 되돌이켜보았다. 조그만 악세사리 공장에 처음 취직했지만, 그 불결한 작업 환경과 불규칙적인 잔업과 철야 때문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어 그곳을 나와야만 했다. 그러고는 큰 회사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구로공단을 찾아 혼자 돌아다니다가 피혁회사를 거쳐 두 번째 들어간 곳에서 지금 9년 째 근무하고 있다. 그 때까지 숙연이의 꿈과 목표는 부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자가 되려면 우선 돈을 모아야 했다. 가난은 이웃과 친척으로부터도 환영 받지 못하고, 멀리 대해지는 것을 종종 보아 왔기에 악착같이 적금을 부었고, 돈이 드는 일이면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숙연이는 상대가 먼저 베풀지 않으면, 절대 자신이 먼저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러한 면에서는 조금도 지지 않으려고 다투기도 했다.

숙연이는 또한 고향 친구 외에는 친구를 사귀려 하지도 않았고, 거의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입사 1년 만에 숙연이는 처음으로 영희라는 회사 친구 하나를 사귀어 가깝게 지냈었다. 그런데 다른 동료 한 명이 둘 사이에 끼여 들었고 영희가 그 동료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숙연이는 친구를 뺏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괴롭고 견디기 힘들어 했었는지 모른다. 예비자 교리 시간에 신부님은 함께 하는 삶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숙연이는 그런 것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땐 왜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열기가 힘들었는지 숙연이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숙연이는 그렇게도 가고 싶던 고등학교를 가정 형편 때문에 가지 못했다. 게다가 남들이 다 기피하고 우습게 보는 공순이라는 단어가 늘 무겁게 자신의 가슴을 짓눌렀고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우울했었다. 손가락 수술과 위장약으로 몇 년을 살면서도 회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숙연이의 몸에 배고 뇌리에 새겨진 가난의 위협 때문이었다. 명절 때나 휴가 때 숙연이가 집에 내려가면, 엄마는 숙연이에게 그 동안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하시고, 하시고 또 하셨다. 그런데 그 것들은 하나같이 속상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명절도 숙연이에게는 즐겁지가 않았고 자기 한 몸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러다가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숙연이는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정규 고등학교에 비길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공부를 다시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숙연이의 성격도 차츰 밝아질 수 있었고, 자기 스스로 벌어서 공부를 마쳤다는 보람을 안고 졸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숙연이는 공부라도 해서 자신의 텅 빈 가슴을 메워 보려고 방송통신 대학교에 진학했다. 방송 통신 대학교에 들어가 좀 더 좋은 직장도 구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현실을 탈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만두어야만 했다. 숙연이에게는 직장과 학교라는 두 생활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참으로 벅차고 어려운 길이었다. 건강만 극도로 나빠졌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을 실감하며 중단해야만 했다. 또 다시 닥쳐 온 좌절 앞에서 숙연이는 그 동안 자신을 지탱하게 해 주었던 의지가 꺾여 버렸고 그런 자기 자신이 너무 비참해 보였다.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지면서 어렸을 때 잠깐 나간 적이 있는 교회를 생각하며 그리워하곤 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그걸 아셨는지 숙연이가 하느님을 찾기 시작하는 그 순간 숙연이를 당신 곁으로 불러 주셨다. 숙연이는 구하면 받으리라고 들었었는데, 마침 함께 근무하던 서씨 아주머니란 분이 자기가 대모를 서주시겠다고 자청하며 숙연이에게 성당에 나오기를 적극 권유했다. 숙연이는 용기를 못 내고 망설이던 중, 평소 알고 지냈던 김 언니를 따라 대림동 돈 보스꼬 센타 성당에 가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남부 연합회 월례 미사에 참례했다. 숙연이가 보기에는 모두가 직장의 젊은 노동 청년들로서 서로 반갑게 맞아 주는 모습들이 무척 좋았고, 한편 따뜻한 느낌까지 감돌았다.

그 후 숙연이는 구로본동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숙연이가 처음 미사에 참례 했을 땐 무척 생소하고 어색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모두 숙연이만 쳐다 보는 것만 같아 얼굴을 들기도 힘들어 했었지만, 갈수록 숙연이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그때 숙연이가 처음 뵈었던 우 신부님은 너무도 인자해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돼서 숙연이는 우 신부님한테 직장 청년반 교리를 받기 시작했고, 6개월 뒤인 오늘 1990년 4월 15일 부활절에 숙연이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의 축하 속에 영세를 받게 되었다.

"바울라, 바울라. …!"

숙연이에게는 잊지 못할 이름인 것만 같았다. 바울라! 숙연이는 자신이 바울라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숙연이는 지난 날들의 아쉬움과 절망감을 세례 때의 물로 다 씻어 버리고, 하느님과 형제 자매들의 축복 안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밤 늦도록 뒤척이던 숙연이는 새벽녘이 돼서야 잠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 맡에서 울리는 괘종시계 소리도 못 듣고 잠에 취했다가 숙연이는 옆 친구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간신히 일어나 겨우 기초 화장만 마친 채 라인에 들어 갔다. 대모님과 몇 몇 신자들이 다가와 숙연이를 다시 축하해 주었다. 숙연이는 간 밤의 피곤도 잊은 채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오전을 마쳤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 김 동신 언니와 신자들이 다가 왔다.

"세례 받으니까 기분이 어떠니?"

"날아갈 것 같아."

"몇 층까지 날아갈 것 같니?"

이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모두 다 웃었다. 점심시간 종료 종이 울리자, 축하객들은 숙연이에게 일과 후에 다시 만나자고 하곤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하루를 마치고 사내 신자들끼리 다시 모여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며 파티가 벌어졌다. 숙소로 돌아 오는 길에서 동신이 언니가 숙연이에게 말했다.

"파랑새가 날아가 버리지 않게 조심해라!"

"파랑새?"

"응, 기쁨!"

"그럼 예수님이 나를 버리기라도 하나?"

"아니, 예수님이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네가 예수님을 버리지!"

"내가 버린다고? 내가 왜 버려?"

"아무도 버리고 싶어 하지는 않아!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성서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누리는 기쁨도 사라지고 말지!"

"언니는 어떻게 기도하는데?"

"나? 난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밤에 자기 전에 기도하고, 또 하루에 세 번 삼종기도 (천주교에서 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3번 기도하는 것 - 밀레의 '만종' 그림 참조.) 바치고 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기도하지!"

"어휴!"

"'어휴' 라니?"

"그걸 다 어떻게 바쳐? 난 게다가 다 외우지도 못하는데!"

"기도서에 있는 것을 다 외워야만 기도를 바칠 수 있는 게 아냐!"

"그럼?"

"기도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자기 삶을 예수님과 나누는 거야!"

"예수님과 나눠?"

"그렇지,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서는 '예수님, 다시 눈을 뜨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녁때는 '오늘 하루 감사합니다. 전 이제 자겠습니다.' 할 수도 있고, 길가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예수님 저 친구를 지켜 주세요.' 하고 또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일 속에 예수님께서 함께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기도가 되지!"

"그것 참 좋은데!"

"그럼, 기도서에 있는 건 뭐야?"

"기도서에 있는 기도문은 뭐랄까? 가령 할 말이 특별히 없다거나, 여럿이 같이 모여 함께 기도할 때 한 목소리로 마음을 모아 바칠 수 있는 것이지!"

"아, 그래!… 그런데 말야, 아까 언니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된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

"잘 안 되지, 잘 안 되니까 기도도 하고 실수도 하면서 차츰 돼 가는 거지. 넌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뛰는 것 봤니?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지고 뒤뚱거리고 걷다가 제대로 걷게 되고 그 다음에서야 뛸 수 있게 되는 거잖아."

"그럼 난 어린애군!"

"이를테면 그렇지, 그리고 어릴 땐 혼자서 못 걷지. 누가 함께 해 줘야 돼. 그리고 커도 혼자서는 못 살듯이 신앙 생활도 혼자서는 힘들어."

"그러면 어떻게해?"

"사람들이 이웃끼리 서로 나누듯이 신앙도 나눠야 해."

"신앙을 나눈다고?"

"뭐든지 나누지 않으면 독불장군이 되거나, 어떤 것이 정말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인지 잘 몰라 혼란에 빠지게 되듯이 신앙도 마찬가지야. 이게 자기 생각인지, 그저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말(?)인지, 예수님의 뜻인지 혼자서는 판가름이 잘 안 날 때가 있어서 함께 나눠야 돼!"

"언니는 누구랑 나눠?"

"나? 난 모임이 있어."

"무슨 모임인데?"

"너도 알걸. '가톨릭 노동 청년회'라고."

"응, 나 영세식 때 모인 사람들?"

"그래. 영세식 때 모인 사람들. 참 너 인사도 할 겸 다음 주에 나하고 한 번 같이 가 볼래? 너말고도 새로 올 사람이 또 있어."

"새 사람? 그 사람도 요번에 영세받았어?"

"아니! 전에 영세받았는데 아직 혼자 지내다가 이번에 새로운 팀 만들면서 함께 하기로 했어. 우리 직장 사람이야. 너 왜 생산 2과의 염정희라고 알지?"

"응, 그 키 작고 예쁘장한 애?"

"응, 그래. 그애야."

"그 모임이 언제 있는데?"

"매주 목요일 저녁 8시에 성당에서 해. 너 한번 가 볼래?"

"글쎄."

"한번 가 봐. 신부님께 인사도 할 겸."

"신부님도 그 모임에 오셔?"

"그럼."

"신부님은 항상 바쁘신 것 같던데."

"바빠도 그 모임에는 항상 오셔."

차례




여기에 우리와 함께!


숙연이는 신부님을 다시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는 동신이 언니의 말에 신부님께 인사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연이는 전부터 영세 후에는 교리 때처럼 그렇게 매주 신부님과 대화할 시간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은근히 섭섭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임 날짜가 되자 동신이 언니를 따라 나섰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이게 누구야? 숙연이 아냐? 어떻게 여길 알고 왔지?"

"동신이 언니 하고 왔어요."

"벌써! 야, 대단한데. 우리 회원들 활동이 활발하구먼."

"신부님은? 뭐 한 사람 데려 온 것 가지고 그러세요! 오늘 예비팀 첫 모임인데."

"그래, 그래! 나도 그래서 누가 모였나 하고 보러 왔지."

모인 사람들은 새로운 팀을 축하해 주러 온 회원들이었는데 그 중엔 숙연이가 아는 사람도 몇 있었다. 오늘 보니 전에 김동신 언니를 따라 돈 보스꼬센타에서 연합회 수요미사를 참석해서 숙연이와 만났던 회원들이었다. 숙연이는 거기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번개처럼 자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이 사람들이 가톨릭 노동 청년회 사람들이었구나! 그 때 서로 반갑게 맞아주는 회원들의 밝은 모습이 무척 인상 깊게 남았었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숙연이는 회원들과의 만남이 새로웠고 기뻤다. 그래서 숙연이는 부담 없이 가노청에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동신 베로니까 언니의 소개로 양정옥 율리안나 언니를 만났고, 축하해 주러 온 회원들이 자기들 팀으로 돌아가자, 숙연이와 거기 남은 몇 명이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양 언니가 말을 꺼냈다.

"오늘 첫 모임인데 뭐 할까요?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

"제가 이렇게 물어 보는 것은 이 모임을 이끌어 가는 모임의 주체가 바로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함께 하는 것뿐이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나누는 모임입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이 다음 주에 할 주제를 정하고, 사회자도 정하고. 여러분이 스스로 나눠야 합니다. 당분간 여러분이 익숙하게 될 때까지만 제가 계속 사회를 보고 진행을 하기로 하죠. 괜찮겠어요? 누구 다른 더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이야기를 하세요. 함께 모였으니까 결정도 함께 하는 것이 좋겠죠."

"…"

숙연이는 아까 첫 질문은 양 언니가 준비를 안 해 와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자신들에게 주도권이 있어서 질문한다니 좀 색다르다고 생각했다. 또한 처음부터 질문에 대답을 하라니 딱히 할 말이 없는 숙연이는 어색했다.

'그냥 알아서 진행하시면 좋겠는데. 뭘 알아야지 말을 하지.'

숙연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양 언니는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

"첫 모임이니까 서로 소개하기로 할까요?"

숙연이는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모임이 시작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네."

숙연이가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그랬더니 정옥이 언니는 다른 두 사람을 번 갈아 돌아 보면서 또 다시 물었다.

"자기 소개하는 것 괜찮아요?"

"그렇게 하세요."

"네."

나머지 둘이 다 대답을 한 후에야 정옥이 언니는 말을 꺼냈다.

"누가 먼저 할까요?"

숙연이는 놀랐다. 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숙연이는 시작이 다소 길고도 지루하다고 느꼈지만 짜증 없이 자신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정옥이 언니를 보면서, 본래 이 모임은 그런가 보다 싶었다.

"그러세요. 언니가 먼저 하면 저희도 따라 할께요"

모두의 동의가 다 있은 다음에야 자기 소개가 시작되었다.

"그럼 저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양정옥 율리안나에요. 직업은 봉제 공장에서 미싱을 해요. 회사 이름은 아름산업이고 여자 의류를 만드는 회사인데 저는 거기서 레이스를 박고 있어요. 전화 번호는 862에 3372인데 낮 12시 30분부터 1시 30분 까지 점심시간에만 통화가 돼요. 그 회사에 들어간 지는 2년 6개월이 되었구요. 지난 회사에서 원치 않게 나온 뒤로 아직 소송 중이에요.

부모님은 전남 고흥에서 농사짓고 계시고 저는 시흥에서 동생들과 자취를 해요.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부터 술을 많이 드셨고요…. 그래서 전 아버지가 싫었고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빨리 커서 독립하고 싶었어요…. 국민학교 때는 한 시간도 더 되는 거리를 걸어서, 걸어서 학교를 다녔고…. 돈이 없어서 미술 시간에 그림 도구를 못 가져가서 복도에 나가 혼자 손을 들고 벌을 선 적도 많았어요…. 요샌 아버지가 술 때문에 몸이 안 좋아지셔서 누워 계시고 어머님이 병간호를 하고 계세요. 지난 추석 때 집에 내려 갔다가 우리를 키우시느라고 고생하신 어머님께서 우리가 다 서울로 올라와 버리자 또 아버지 병간호까지 혼자 떠맡아야 하는 모습을 보니 죄송스러웠어요. 여자들은 평생 뒷바라지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고 싫었는데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라는 엄마 말씀을 듣고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일을 기꺼이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저는 1남 3녀의 맏딸에요. 지금 바로 밑의 동생은 군대 가 있고 둘째 동생은 저와 같이 살면서 신림동에 있는 소아과 병원에 간호 조무사로 일하고 막내는 시흥의 영문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어요. 집 전화 번호는 866에 1242예요. 언제든지 무슨 일이 있거나 심심하면 전화하세요. 모처럼 일찍 끝났는데 갈 데가 없다든지, 이야기할 상대가 마땅히 없다든지. 생각나면 전화하세요."

숙연이는 처음 만나서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망설여졌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 자세히 드러내는 언니를 보면서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마저 꺼내게 되었다.

"저는 1966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어요. 가족은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저희 오 남매가 살았었는데 제가 국민학교 4학년 때는 언니 오빠들도 도시로 가고 네 식구만이 시골에서 살았어요.

아버지는 살아 계시기는 했지만 한 번도 같이 살아 본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객지로 돌아다니셨고 집안을 전혀 안 돌보셨어요. 우리에게 아버지는 말로만 가족이고 아버지였지 거의 남 같았어요.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가난과 3명의 이복형제 그리고 작은 엄마, 이 모든 것이 정말 싫고 고통스러웠어요. 가난보다도, 지금은 선뜻 8남매라고 대답이 망설여지는 이들 형제와 아버지보다 무려 스물 셋이나 아래인 작은 엄마가 바로 아랫 동네에서 살고 있었고 지금도 한 마을에서 살아요. 한 마을에 함께 살면서 두 집 사이에 벌어지는 일 때문에 계속 갈등과 수모를 겪었어요.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 받았던 그 서러움이 아버지를 미워하도록 했어요. 어쩜 그럴 수 있는지 다시 생각하기도 싫어요 ….

우리를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엄마는 그 힘든 농사일을 혼자서 다 감당했고, 학교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할 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도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중학교 일 학년 때 아버지는 다 돌아가실 때가 되니까 저희 집으로 돌아오셨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한 달 열흘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 때 하나도 슬프지 않았어요. 다만 내가 아버지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었는데, 한 마디도 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오빠, 언니들은 아버지가 자식 문제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제대로 학교도 못 갔어요. 언니는 집을 나가 이리 저리 방황하며 돌아다녔고,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가 행방불명이 돼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저는 엄마의 사랑 때문에 학교생활을 밝게 마칠 수 있었어요.

친구들도 우리 집 사정을 거의 몰랐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이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쓴다고 법석이었지만 난 그냥 한 쪽 구석에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했어요. 우리는 그 때 빚 독촉에다 끼니까지도 걱정을 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간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엄마는 제게 차마 가지 말라는 말씀도 못하시고 눈치만 보셨어요. 그 때부터 빨리 돈을 벌어서 엄마도 돕고, 하고 싶은 공부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숙연이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고 콧물까지 섞여 나와 목소리가 막히고 말았다. 한참이나 울었다. 하지만 정옥이 언니가 먼저 숨김 없이 자기 이야기를 다 했고, 또 숙연이가 말하는 동안 자기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기 때문에, 왠지 숙연이는 정옥이 언니에게 믿음이 갔고, 부끄럽다기보다는 마음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또 한편 곧 이어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숙연이는 그들도 다 자기처럼, 다 그렇게 어렵게 자라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숙연이는 그것이 자기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한편으로는 일체감마저 가질 수 있었다. 숙연이의 눈에는 자기 앞에 앉아 있는 회원들이 갑자기 지난 세월의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살아온 친언니, 친동생처럼 보였다. 그 동안 숙연이는 혼자서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했고,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 스스로 헤쳐 나가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제 숙연이에게는 직장동료나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고민들을 이 팀회합에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되었다.

이렇게 숙연이는 한 번 두 번 팀회합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열었고 자기를 찾기 시작했다. 숙연이는 한 명, 두 명 더 많은 회원들을 알게 되었다. 또 만날 때마다 회원들은 자신들을 더 자세히 알도록 드러내 주었다. 숙연이는 그 때마다 모두가 항상 기쁜 얼굴로 따뜻하게 맞아 주는 모습이 늘 좋아 보였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역경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이기고, 밝고 기쁜 모습으로 살아가는 회원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한 때 숙연이는 하느님을 거부했었다. 왜냐하면 숙연이네 식구 중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다녔던 사람은 큰 언니였는데 그 언니는 정신분열증세를 보일 때도 찬송가를 불렀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서는 더욱 더 하느님께 매달리며 기도했었다. 그런데도 결국 그 언니가 불행한 채로 버려진 것을 보고 하느님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느님을 믿었던 언니를 구해주지도 못한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하느님은 엉터리라고 거짓이라고 항변했었다.

그러나 그런 숙연이가 역경을 이기고 살아 가는 회원들을 만난 다음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숙연이는 사람에게서 고통이 없어져야만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고,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느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에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과 그렇게 받아들이면 그 때 주님께서 자신의 고통과 싸워 이길 힘을 각자에게 주신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숙연이는 이 느낌을 바로 고통의 한 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간직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그 고통 한 가운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으셨고 원망도 하지 않으셨다. 숙연이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은 예수님이 잘못했거나 능력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숙연이는 예수님이 그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이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당당하고 기뻤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숙연이는 자기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고통은 값진 것이고 부활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숙연이가 겪었던 고통은 자기를 영광스럽게 해 줄 망정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통은 단지 없어져 버려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도 바뀌게 되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생활 나눔, 복음 나눔, 교재 나눔, 기타시간 등으로 회합이 진행 되었다. 숙연이는 생활 나눔을 할 때에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복음 나눔 시간이 항상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아프다고 울며 매달릴 줄만 알았던 갓난아이 신앙을 가지고 있던 숙연이에게 복음은 무척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복음나눔 시간에 신부님이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라는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예수님이 바로 우리들의 직장 안에도 계시며 동료들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의아스럽고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분이 어떻게 우중충한 공장 안에 시커먼 작업복을 입고 초라하기 그지 없는 우리 같은 노동자들 안에 계시다는 건지….

숙연이는 그 동안 직장 안에서 남보다 좀 더 편한 일을 하기를 원하고 항상 자신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생활을 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동료들 안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난 후, 숙연이는 짜증을 내다가도 참게 되었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 사람 대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회원들과의 만남이 계속되면 될 수록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원들의 밝은 모습이 좋은 일만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려운 역경을 딛고 극복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회원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이러한 만남 속에서 숙연이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정신을 하나씩 둘씩 깨달아 가면서 변해 갔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의 어려움만 해결하려고 하던 노력을 동료들이 어려워 할 때마다 그들과 함께 하려고 애썼다. 동료들의 삶을 관찰하고, 동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동료들의 겉모습보다는 그 마음 안에 숨겨져 있는 동료의 참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 숙연이는 회원들이나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실천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차례




제 2 부 갈 등 과 성 숙

이럴 땐 어떻게 해?

실천약속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씩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꽃

개인 보고서

희선이 어머님의 죽음

지원근무

매듭을 풀며

깨져버린 이상

증거자

이게 아닌데!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

주님, 제가 왔어요!

여긴 자리가 없네!

기다림

활동의 원천이요, 양식이신 주님!

성탄 일반회







이럴 땐 어떻게 해?


"쫙!"

"아-악"

몇 번의 고성이 오가다 둔탁한 파열음이 났다. 비명 소리가 2층에서 계단을 통해 1층까지 울려 퍼진다. 직원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2층으로 돌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뛰어 올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 잠시 후 미스 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2층에서 내려와 흐느끼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쏴!"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영희는 여느 때보다 빨리 점심을 먹었다. 오후 근무가 시작되기 전 4월의 나른함을 피하기 위해 잠깐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은행문을 밀쳤다. 그런데 창구를 휘감고 있는 이상한 분위기가 영희를 머뭇거리게 했다. 점심시간이라 손님은 몇 사람 없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얼굴이 다소 상기된 채 굳어져 있다. 쥐 죽은 듯한 침묵으로 일순 긴장감 마저 돌고 있다. 무슨 일인가? 영희는 급히 여직원 탈의실로 갔다.

"무슨 일이야?"

"이 계장이 미스 양을 때렸어."

"드디어 터졌군!"

"드디어라니?"

"계속 사이가 안 좋았잖아?"

"계속은 뭐?, 계속이야? 부서 이동 한지 며칠이나 된다고."

"왜 때렸어? 어느 정도인데?"

"결재판으로 치고, 따귀 때리고 한바탕했나 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를 패다니!"

"동에서 뺨 맞고 서에서 분풀이 하는군."

외환계 이정지씨는 이번 대리 진급시험에서 떨어졌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몹시 불쾌해 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전에 비해 불평이 많아졌고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았다. 이번 사건도 그런 변화의 연장선 안에 있다고 수군거렸다. 모두들 여자를 폭행한 이정지씨의 부당성과 비열함 그리고 은행 내의 남녀차별에 대해 입을 모았다. 그러나 비난만 했을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미스 양은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출근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본점의 인사부와 노조를 찾아가 부서이동을 청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대답은 듣지 못한 채 위로 아닌 충고만 들어야 했다. 사건 발생 삼일 째 되는 날 미스 양은 다시 지점으로 출근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웃으며 일해야 했다. 남자 직원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듯 고자세였다. 그 사건은 그냥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일어났던 분노는 그냥 숨어 버렸다. 익명성과 이기주의의 안일 안에서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나서서 공적으로 그 사건을 문제삼으려 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면서 그리고 조용히 마무리 되기를 바라는 듯,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간혹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 둘이 알아서 처리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영희는 우울했다. 자신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만 더 무거워졌다. 영희는 창구 여직원들의 대 고객 서비스를 책임지고 있는 그 지점의 '비둘기 텔러'이다. 하지만 갑자기 벌어진 사내 폭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랐다. 영희는 그 동안 아빠의 말씀과 대부분의 사람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주입돼 온 사회의 통념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 왔다. 더군다나 다소 부당한 것이 있어도 지적하면 사람들은 지적하는 자기에게 오히려 모가 났다 하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말하지 않고 따라야 한다는 막연한 겸양지덕 속에서 요구되는 침묵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영희에게 이번에 발생한 미스 양 언니의 사건은 참 난감한 문제였다. 어떻게든 뭘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섣불리 나서면 오히려 지점의 분위기가 더 흐트러질 우려도 있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시간만 까먹으면서 침묵하자니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웠다. 동료의 문제를 바라보지 않으면서 어찌 신앙인이라 할 수 있으며 가노청 회원이라 할 수 있으랴? 영희는 사태를 바로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영희는 용기를 내어 양 언니를 찾아 갔다.

"언니, 이따 나하고 점심 같이 할까?"

"그래."

점심시간이 되어 영희는 양 언니와 함께 근처 조용한 분식점에서 만났다. 언니는 울면서 말했다. 자신의 위치를 비관하면서.

"난, 모아 놓은 돈도 없어. 그간 벌어 놓은 돈은 어머니 약값으로 다 나갔고. 그래서 내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그만 둘 수도 없어. 그렇다고 부모의 힘도 없고, 은행을 그만둘 자신감마저도 없어. 동정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나와 마주치기를 모두 피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아쉬워. 여직원 회장이나 너에게 부담만 준 것 같고. 창피한 것보다 나 때문에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미안하기도 해. 한편으론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 내 자신이 비참해 보여. 은행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영희는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언니에게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구나! 이 언니만이 간직한 것이 있었는데도 모두 언니 탓으로만 돌리고 있었구나. 계속 만나서 나라도 위로를 해야겠다.'

두 번 더 식사를 하면서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 언니를 위해 은행 내에서 풀어야할 과제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먼저 이정지 계장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그리고 나서 침묵하고 있는 모든 여직원들을 모아 이 일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해야 되겠구나. 그리고 나서 은행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지금의 은행 구조는 지점 별로 창구 서비스를 평가하고 있다. 지점장이 책임자를 책임자가 창구 서비스를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구조는 결과적으로, 직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약한 점을 감추고 강한 사람의 그늘 아래에서 윗 사람의 눈치만 살피면서 승진의 기회만을 찾도록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문제가 있어도 바로 보려 하지 않고 그냥 묻어 버리게 된다. 즉 이러한 평가구조는 직원들로 하여금 은행을 평생 직장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쇠사슬이다. 이 문제는 주님께서 나에게 던져 주신 숙제다.'

차례


실천약속


그날 저녁은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일이었다. 영희는 생활반성 시간에 이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질문이 터져 나왔다.

"그 사람들이 누군 지 정확히 말해줘"

"남직원은 33세이고 이정지 계장이야. 이번에 대리 진급시험에 떨어져 좀 신경이 곤두서 있어. 그리고 피해입은 양 언니는 27세로 미혼이고 동료 여직원들과 아직 화합을 잘 못해서 아직 친구도 없는 상태야."

"그 남자 직원은 어떤 사람이야?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니?"

"그 여직원이 타지점에서 발령받아 이곳으로 오기 전에 서무계에서 나와 함께 근무했어. 그런데 그 언니가 오자 나와 자리를 바꿨어. 남직원들은 대체로 여직원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어. 남직원들은 자신들이 진짜 직원이라고 생각해. 그도 그럴 것이 남직원들은 밤 10시, 12시 까지 맡은 일을 다 처리하고 퇴근하지만, 여직원은 7시가 되면 퇴근해 버리거든. 이번 일도 업무상 처리 문제로 일어난 일이야. 남직원은 여자가 그런 일도 제대로 못한다고 몰아 붙였고 여직원이 대꾸하자 남직원은 평소에 품고 있던 불만을 퍼부었어. 전화벨이 3번이나 울리는데도 받지 않았다.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운다 이런 불만에 대해 그 언니는 '그 정도는 남자가 대신해도 된다.'고 대꾸했고.… 그러자 큰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고 화가 난 남직원은 폭력을 휘둘렀지."

"대개 그런 경우에는 해결하는 방법으로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리기도 하는데, 그런 얘기 없니? 발령 시기는 언제야?"

"그렇잖아도 그런 이야기가 오갔는데, 우리는 한 지점에서 3년 근무해. 짧으면 2년 6개월이고 별 일 없으면 3년을 채우고 가. 남직원은 가을 발령 케이스인데, 책임자가 바꾸게 할 수 없다고 지점장에게 말했나 봐. 자리는 적고 한 번 바뀌면 한 달 이상 업무가 마비되니까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놓고 싶은지 안된다고 했대. 그러니 그 언니는 하루하루가 피곤하고 힘들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한 은행에서 같이 일하면서도 아무것도 못하는 내 자신이 미워."

"왜 부모님을 원망하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니? "

"부모가 힘 없는 경우에는 정말 아쉬워. 2년 전부터 여자도 대졸사원을 뽑았거든.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그 때는 그 아버지가 운동장 지점장이었어. 그땐 여직원이 오히려 큰 소리치고 말싸움을 했어. 그랬더니 즉시 발령이 났어. 서로 떼어 놓는 것으로 해결했지."

"노조나 인사부에선 어떻게 했어?"

"본점에선 전화로 사태를 파악하고는 별다른 연락도 없이 계속 상황 판단만 받을 뿐 아무런 조치가 없어."

"만일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 꺼라고 생각해?"

"은행 분위기상, 업무 협조가 잘 되야 되고, 어떤 면에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데 이렇게 되면 일하기도 곤란해지고, 또 은행원을 천직으로 알고 직장생활하기는 어렵게 되지."

"은행 내에서 남직원과 여직원의 관계는 어때? 이번 사건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들은?"

"남직원이 대체로 여직원을 무시하는 분위기야. 점심시간이나 탁구 치러 갈 때나 동료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책임자들은 이 사건을 크게 보기보다는 직원 개개인들 간의 관계로만 여기는 것 같애. 책임자들은 본점에서 내려오는 캠페인 지시에 대한 실적이나 평가점수만 강조해. 직원들이 힘들어 하면 업무를 변경해 주어야 하는데, 자신들이 알아서 그냥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야. 여직원들은 모두 다 분노하지. 그런데 실제로 생각하기 싫어하는 눈치야. 또 그 여직원이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허심탄회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고 또 그 언니도 친해지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형도 아니고 해서 다 무시하고 있어."

"왜 여직원들이 그런 일에 관심을 안 갖지? 여직원들이 원하는 것은 뭐야?"

"대개 전직 하려고만 해. 모두 일찍 퇴근하고 학원에 가서 공부하거나, 전문 직업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 그래서 돈도 악착같이 모으고 긴장 속에서 살아."

"결혼하면 그만두어야 하니?"

"'80년부터는 바뀌었지. '80년부터 '90년까지는 편했어. 그런데 '90년도 민영화가 추진되면서 자기가 직접 예금을 예치하느라 행원 전부가 모두 다 발로 뛰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많아졌어. 실적이 곧 능력이라는 평가가 되니까 앉아서 업무만 충실히 하는 사람은 버티기가 어렵지.… 항상 약한 쪽은 여자야. 남직원들은,, 여직원들에게 잠시 머물다 가는 직장이라고 무시하는 면이 있어."

"업무상 차이나 구별이 있어?"

"조직 안에 이런 문제가 있어. 우선 피부로도 느끼는 것은 여직원은 창구 등 제일선에 배치되어 있어. 남직원은 업무 비중이 높은 것만 하고, 그 쪽으로만 일생을 쫓아 다녀. 반면에 여직원 창구는 항상 일이 많아. 또 업무 량도 남직원보다 더 많어. 게다가 요즘은 본점에서 계속 캠페인들이 추가 되고 있어. 하지만 여직원의 급여는 남직원보다 적은 거야!"

"차별하거나, 무시한다는 것은 반드시 일방적인 것만은 아닌데."

"물론 남직원이 여직원을 무시하는 부분도 솔직히 있다는 것을 인정 할 수 있어. 남직원은 업무상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밤새워 공부하면서 자기 개발을 꾸준히 하는 반면. 남직원들이 보기에 따라서는, 여직원은 겉모습을 치장하기에 더 바쁘다고 할 거야. 그래서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원인도 될 수 있을거야. 하지만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만든다고 볼 수도 있어. 왜냐하면 남직원의 경우에는 퇴사하면 경력사원이 되지만 여직원은 퇴직할 경우에는 갈 곳이 없어. 비단 폭력문제만 아니더라도 직장 내에서 그리고 어떤 때는 교회 내에서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엄연히 존재해. 우리 사회에 여성의 위치가 올라갔다고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이 계속되고 있고, 또 그런 사회는 여성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참고 개인적으로 혼자 울고 말아야만 좋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애. 또 한편 여성들은 결속력이 없어. 직원끼리도 서로서로 함께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분위기가 없어."

"그러면 이제 관찰은 이 정도로 마치고 판단으로 넘어갈까?"

"그러지."

"이 사건이 지니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본다면 사람들이 체념하고 개선해 보려는 노력이 없다는 거야. 반면에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면 여성들에게 각성하도록 채찍질한 것이라고 생각해.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업무 수행면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고, 일 이분 소홀히 하지 않고 성실해야만 힘이 생긴다는 것을 각성하게 한 것 같아. 그리고 무슨 일이든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여 혼자 넘기지 않고 노조나 인사부에 찾아 간 것은 큰 용기라고 생각해. 물론 지점 안에서 여직원들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서 행동했다는 것이 경솔한 것이긴 하지만."

"성서 안에서 이 사건을 풀어 보자."

"인권적인 면에서는 에페소서 6장 5절부터 9절에 나오는 '종과 주인'의 구절을 보아야겠어. 종과 주인이라는 표현이 현대적이진 않지만…. 여기 있다!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의를 다하여 자기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눈가림으로만 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답게 진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십시오.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기쁘게 섬기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종이든 종이 아니든 각기 주님께로부터 그만한 상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주인된 사람들도 자기 종들에게 같은 정신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종들을 협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나 여러분에게 주인이 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며 또 그분은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대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또 골로사이 3장 22절부터 4장 1절에는 '새 생활의 인간 관계'라는 주제로 기록된 것 중에서…. 위의 것에 추가된 것이 있다면 24절부터 4장 1절 까지, '여러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으로 받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행한 불의만큼 벌을 받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공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인된 사람들은,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자기 종들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대우하십시오.'"라고 나와 있고,

"루가 복음 17장 3절을 보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라고 나와 있어. 또 구약성서의 사무엘 하권 11장과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범하는 장면이 나오고 12장에는 나단 예언자가 다윗을 꾸짖는 장면이 나와."

"그 때 그 상황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지? 그러니까 폭력을 당한 양 언니와 대화하면서 양 언니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는지?"

"처음엔 나도 무시하려고 사태를 바로보지 않았지만 신앙인으로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으로서 동료의 고통을 보고 들으면서 그냥 넘어 갈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들기 시작했고 나를 양 언니에게 다가가도록 주님이 이끄신 것 같애. 그래서 대화할 수 있었고, 대화함으로써 양 언니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양 언니를 깊숙이 새로 알게 되었어. 그 때부터 나는 힘을 얻은 것 같애. 처음엔 직원들에게 용기 없이 말했지만 차츰 용기를 가지고 양 언니를 만나도록 설득할 수 있었어."

"참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어, 양 언니라는 여직원뿐만 아니라 이 계장이라는 남직원도 구원의 대상이요.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어. 서로 화해하도록 해야지. 양 언니에게도 당사자들이 만나서 화해하도록 말해야 되겠어. 어렵지만 '가서 대화하라'고. 또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상급자와 당사자 그리고 직원들끼리도 이 사건 속에서 화해하고 다시 형제로서 만나게 해 주어야 돼."

"앞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을 생각해 본 적 있어?"

"다시 이러한 상황이 안 일어나도록 방향을 잡아야겠고, 구체적으로는 내가 비둘기 텔러이니까 우선 아침 방송 때 인격의 동등성에 대해서 말해야겠어. 동료들에게 서로 서로 존중하자고 하겠어. 또 상급자라고 무조건 '이거 해라, 저거 해라'는 명령하달식 업무 지시가 아니라, '바쁘지 않으면 이것 좀 해주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도록 해야겠어. 그리고 또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앞에서 계속 지적해야겠어."

막연하게 신앙인으로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으로서의 부담과 책임감만 갖고 다가가려고 했던 영희는 차츰 차츰 자신이 할 일을 찾아 나갔다. 그의 가슴 속에는 차츰 용기가 살아났다. 영희는 침묵 기간 동안 그렇게도 괴로워하며 고민했던 문제의 해답을 얻었다. 영희가 그 동안 찾은 것은 '문제 해결 방법'이었다. 그러나 영희가 해야할 일은 '동료 관계의 회복'이라는 활동 방향의 확신이 섰다. 그러면서 동시에 문제의 해결 방법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선 여직원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여직원 회장과 내가 비둘기 텔러로서 남직원 책임자와 남직원 회장과 만나 이야기해야겠어. 또 구조적으로 은행이 평생직장이 되지 못하고, 또 일을 부담스러워 하는 문제와 요인에 대해서도 말야. 둘째로 인간과 인격의 가치를 느끼도록 대화해야겠어. 셋째로 여직원을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동료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말해야겠어. 그러면 화해의 길이 열릴 수 있겠지."

"그럼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실천 약속을 해 보자."

"그래, 우선 내일 가서 양 언니에게 진척되는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여직원 회장과 내가 여직원을 소집하고, 이 계장과 내가 만나서 대화하고, 여직원 회장과 내가 남직원들과 대화하고, 상급자들도 만나고, 두 당사자들이 개인적으로 만나서 화해 한 후, 공개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화해하는 순으로 하면 되겠어."

신부님 말씀 시간에, 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나눔을 지켜 보고 계시던 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꼭 해결해야 한다고 고집하면 의욕도 사라지고, 좌절감도 생길 수 있고, 또 오히려 화해보다 미움과 원망이 앞설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길 바래요. 다음 주에는 복음 나눔을 통해 서로의 상황을 더 깊이 나누기로 해요."

차례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씩


회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희는 생각했다. 자기가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서 회합한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 그리고 팀회합은 자신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팀회합을 한다고 하는 것이 비단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회의와는 달랐다. 팀회합을 하면 반드시 문제에 대한 특효약이 있어서 금방 해결되고 성과가 눈에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처음에는 속이 후련했다. 그런 불만과 어려움을 스스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 '실천 약속'이라는 것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직장 동료들에게 다가가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관찰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기들을 보면서 사회 초년 시절에 겪었던 고민들이 자신만이 느끼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동료를 도와주며 왜 늦은 시간까지 업무가 밀리는지, 과다하게 일이 집중되어 있는지, 문제가 무어라고 생각하는지 등등 작은 것부터 보기 시작했다. 차츰 주변 정리도 해 가면서 일을 하고 업무시간 중에는 열심히 일하고 (커피를 마신다거나, 자리를 많이 비운다거나 하지 않고) 부당한 것은 무엇인지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서로 힘이 되었다. 영희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 나눔으로써 얻는 힘이야. 강의를 듣고, 해결 방법을 지시받아 할 수 있는 일과는 달라. 아마 지시를 받아 하는 것이라면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고, 못하게 되면 팀회합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을 것이지만, 서로의 질문을 통해 자기 수준에 맞게 활동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스스로 깨우쳐 활동하도록 이끄는 이 방법이야 말로 인생 교육의 참 멋이고 가장 효과적인 양성 방법이야."

영희는 팀회합에서 나눔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자신에게 힘이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첫째로 나눔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했고 그 나눔이 영희의 삶에 기쁨과 생기를 가져다 주었다. 또한 그럼으로써 자신의 직업과 일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매주 돌아오는 회합시간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직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그저 힘들고 싫은 일거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팀회합을 통해 전혀 모르던 언니들과 친 자매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든든하게 생각했다. 그 뒤로는 같은 방법으로 손님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단골손님도 끊이질 않았다. 즐겁고 재미있었다.

'그래. 그 전에는 손님들이 몰릴 때면 지긋지긋하게 느꼈어. 손님이 아니라 원수 같았지.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고. 그럴 때마다 이 일은 나에게 맞질 않는다고 생각하고 방황했었지. 한참 방황하고 지쳐있을 때 주님께서 나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셨다. 내가 한 사람의 고귀한 인격체로서 이 세상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이 일터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그 인정을 주님께 받은 거야. 재미있군! 그래 우스웠어. 지금은 어떻지? 역시 이 일은 주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야!'

영희의 발걸음은 편하고 가벼웠다. 그리고는 다짐한다. 내일은 이 일을 푸는 작업을 해야겠다. 기쁨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 다음 주 팀회합 시간에 영희는 이렇게 발표했다.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어. 화해를 시킨다는 것은 정말 싸우기보다 더 어려워. 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미움과의 싸움이 더 치열한 것 같아. 쉽지 않더라고. 오히려 기도를 배운 것 같애. 안되니까 정말 기도하게 되데. 화해시킨다며 미워할 수도 없고. 처음엔 미칠 것 같더니만, 사랑은 정말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이겨야만 가능한 것 같애. 그 때서야 기도가 되더라고. 주님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인간에게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 정말 제대로 관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야겠어."

그렇다. 일은 영희가 실천 약속을 한대로 해결되지 않았지만, 지점의 분위기는 바뀌었다. 당사자들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힘을 얻은 것 같았다. 당사자들은 더 이상 무시하거나 도피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무시'와 '도피'는 같은 감정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리고 영희는 그 동안 팀회합을 하면서도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정신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동하는 것인지 확실한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영숙이 언니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활동 정신은 현장에서 자신이 직접 활동하면서 차츰 차츰 배우는 것이다." 그러니 일이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았다거나 실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금방 좌절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뜻, 바로 그대로 금방 결과가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자기가 걸어야 할 그 길을 걷노라면 언젠가는 그 일이 꼭 완성되리라고 믿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영희는 복음에서 예수님이 "늘 깨어 있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거나, 자신에게 준비가 덜 되었거나 그 일을 감당할 역량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바로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지금 진행 중이고 만들어 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아마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들 가운데 와 있다."는 말씀이 우리들 각자 자신의 마음 속에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이미 담아져 있지만, 그것이 마치 "하느님 나라는 너희도 모르는 사이에 도둑처럼 올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생각이 실천으로 옮겨지고 때가 되면 이루어지고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래서 영희는 절대로 포기하거나 좌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문득 영희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떠나는 한 회원이 영숙이 언니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팀회합을 했지만, 내가 한 만큼 내 자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그리스도 정신으로 보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것이며, 복음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그런데 생활에 연결시켜서 살아 간다는 것이 너무 어려워. 또 가톨릭 노동 청년회 활동은 금방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성숙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자신의 변화를 느끼기가 어려워. 그래서 떠나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돼." 영희는 그 회원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깊이 뒤돌아 보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에 도전하면서 활동했더라면 성숙할 수 있었을 텐데. 그 회원의 말을 생각하면서 영희는 포기라는 방법이 정말 쉽고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고지는 바로 저기고, 거기서 자기를 부르고 있는데 빨리 올라 갈 수 없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고지는 자기가 외면할 수 없는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요, 자신의 인생일진데 더욱 더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영희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회합은 끝나가고 있었다. 회합 끝 마무리 신부님 말씀 시간에 신 신부님은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말을 끊고 다른 말씀을 하셨다.

"참, 공지사항이 있지. 미영아? 언니들이 이야기 안하던?"

"있어요. 정기총회요."

공보를 맡은 미영이가 공지사항을 알렸다.

"지난 주 임원모임 때 우리 구로본동 성당 정기총회 일자가 잡혔답니다. 정기총회는 오는 9월 26일 토요일부터 27일 주일까지 1박 2일로 합니다. 26일은 부천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원 피정의 집에서 기도와 나눔을 하고, 다음 날 본당에 와서 정기총회를 개최합니다. 회비는 5천원입니다. 회원 각자는 개인보고서를 제출하고, 팀 지도투사는 활동보고서를, 팀장은 팀보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마감은 늦어도 15일 까지는 내야 한답니다."

"개인보고서? 뭘 어떻게 보고하는 거야? 신부님? 안 쓰면 안돼요?"

여울 팀에는 지도투사가 없기 때문에 신 신부님이 도와주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개인보고서는 그냥 자기를 소개한다는 기분으로 편하게 작성하면 될 거야! 우선 자기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사건이나 상황을 몇 개 선정해 놓고,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단히 쓰면 돼! 그리고 사건들을 선택할 때 가정과 직장, 동료 관계 그리고 신앙 문제를 골고루 빠지지 않고 쓰면 돼요.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그게 다야."

"그게 어디 간단해요? 몇 달은 걸리겠어요."

신부님은 인쇄물을 나눠 주면서 말했다.

"몇 달은 무슨? 며칠이면 돼요. 걱정하지마. 다른 회원들도 다 써 올 테니까. 남들 앞에서 자기를 밝힌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너희가 처음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 중의 하나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숨김 없이 밝히는 것이 감동적이었고 감사했다.'고 했잖아? 이젠 너희가 밝힐 차례야! 아직 때가 안 된 사람도 있으니까, 전부 다 밝힐 필요는 없어요. 물론 거짓으로 밝히라는 말은 아니지만 밝히고 싶고 밝힐 수 있는 것까지만 밝히면 돼! 이걸 보면 쉬울 거야."

신부님이 내 주신 인쇄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개인 및 활동보고서 작성 요령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나'를 형성한 과거의 여러 상황(사건)들을 상기하면서, 하느님께서 언제, 어떻게 내 삶에 개입하시고 이끌어 변화시켜 주셨는지 생각해 보고 변화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보자.

내가 주님이나 나의 변화를 의식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그 분은 나와 함께 계셨고 늘 가까이 계시기를 원하셨던 분이심을 생각하고, 설사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사건 안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보다 더 복음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 개인보고서 작성 요령

1. 자기 소개 : 탄생일, 탄생지, 가족사항, 가정 형편, 어린시절의 꿈과 상황

2. 자기 인생의 큰 사건이나 일, 기억에 남아 있는 중요한 일과, 그 일이 내 생애에 끼친 영향 및 결과

3. 신앙을 갖게 된 동기, 인도한 사람, 그 때의 느낌이나 체험, 세례 후의 마음의 변화, 신앙으로 인한 기쁨이나 고통을 준 사건 등

4.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간직하고 싶은 성서 말씀이나 신앙에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삶

5. 직장을 처음 가질 때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과 동료 관계

6. 가노청 팀회합과 활동을 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것 -신앙인으로서의 역할

가) 자신의 변화. 발전 (신앙, 말씀, 기도, 삶, 대인 관계, 가정, 직장 등)

나) 팀원들의 변화. 발전 ( " " )

다) 팀 공동체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 일치, 사랑, 화해, 용서, 만남, 마음을 열고 만남.

라) 복음의 어느 말씀이 우리 팀 공동체에 힘이 되고 있는가?

7. 세상에 빛과 소금이 돼가는가?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자신이나 팀 공동체나 가노청 전체가)

나. 활동보고서 작성요령

1. 사례보고 할 상황이나 사건들을 선정한다. (직장, 가정, 신앙, 친구)

2. 그 상황이나 사건에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왜?

3. 주변 사람들은 어떠했는가?

4. 그 상황이나 사건의 근본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문제 원인과 관계성 생각)

5. 그 상황이나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 (섭리) 을 체험했는가?

6. 그 하느님에 대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왜?

7. 그 상황이나 사건을 접하고 나서 원망이나 감사할 것이 있는가?

8. 그 상황이나 사건은 오늘의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9. 이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계시는가?

10. 이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11. 이 상황이나 사건을 무엇으로 (어떤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는가?

차례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꽃


1992년 제 9 차 구로 본동 정기총회

일 자 : 1992년 9월 26일 (토요일) 늦은 7시부터 27일 (주

일) 7시까지

장 소 : 26일 - 부천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원 피정의 집

27일 - 본당 회합실

회 비 : 5,000원

준비물 : 개인보고서 및 팀보고서, 활동보고서

프로그램

26일 19:00 성당 출발

20:00 - 21:30 저녁식사

21:30 - 22:00 묵주 기도

22:00 - 23:00 묵상

23:00 - 꿈나라

27일 07:00 기상

07:00 - 08:00 등산

08:00 - 09:30 아침식사

09:30 - 10:30 정리, 묵상

10:30 수녀원 출발

12:00 본당 도착, 정기총회

12:00 - 12:10 인사소개

12:10 - 12:40 연혁, 회계 보고

12:40 - 13:30 점심식사

13:30 - 14:50 활동보고 (임원, 개인, 팀보고)

14:50 - 16:30 임원 사임 및 선출

16:30 - 17:30 1년 평가 및 안건 토의

17:30 - 18:00 신부님 말씀

19:00 미사

"야, 너 개인보고서 다 썼니?"

"아니, 그걸 벌써 어떻게 써?"

"야, 그거 쓸라치면 정말 다시 살아야 하겠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일기라도 매일 써 놓을 걸!"

"그런데 활동보고가 한 시간 이십 분인데 그 동안 다 발표할 수 있나? 게다가 질문까지 있을 텐데."

"아, 참! 그래서 발표는 한 팀에 하나씩 하기로 했어."

"그럼, 난 안 써도 되겠네! 야, 신난다."

"아냐!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냐. 한 명, 한 명 전체 나눔은 첫날 저녁에 수녀원에서 하기 때문에 미리 다 써 와야 된데."

"좋다 말았군!"

"빨리 써. 괜히 나중에 우리 팀만 망신 당하지 않게. 가뜩이나 우리가 사무실 팀인데다가 전체모임 있을 때 잘 나가지도 않아서 만나면 서먹서먹하기만 한데 이번에는 풀어야 할 것 아냐?"

미순이나 유자, 연희, 영희 모두 미영이가 말한 그 당위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발표는 누가 하는 거야?"

"활동 보고는 김영숙 가타리나 여회장이 임원활동보고서로 대신하고, 팀 보고는 새로 발족한 남자 한우리팀이, 개인 보고서는 우리 여울팀의 김유자 율리안나가 하기로 했어."

"야, 유자야 축하한다."

"축하라니, 얘들 금방 쓰니, 못 쓰니 하더니 축하한다고?"

"근데, 아까 임원활동 보고서로 대신한다는 말은 뭐야?"

"우리 본당에 투사가 많이 없잖아. 그리고 있는 투사는 다 임원을 겸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몇 개씩 쓰기는 뭐하다고 그냥 임원활동 보고서로 대신하기로 했다는 거야."

9월 26일 저녁. 구로본동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은 수녀원에 모여서 지난 자신들의 삶과 각오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질문을 통해 그 동안 서로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쌓인 오해와 거리감을 말끔히 씻으며 공동체가 되는 순간을 가졌다. 현장과 사무실이라는 간격 역시 지워져 버렸다. 서로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통해 한 식구가 되었다."

다음 날 다른 본당에서 온 남부 연합회 소속 회원들과 다른 연합회 회원들 그리고 신부님을 모시고 정기 총회를 시작했다.

"이렇게 많이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먼 곳에서 우리를 격려하러 오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서울대교구 남부연합회 구로본동 본당의 정기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조정복 아브라함 남회장의 개회 선언이 있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작기도를 드리고 인사소개를 했다. 연혁 보고와 회계 보고를 마치고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정기 총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보고서들을 발표하고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활동 보고로 김영숙 가타리나 여회장님의 임원활동 보고가 있겠습니다. 앞으로 나오셔서 발표해 주시죠."

"안녕하세요. 김영숙 가타리나입니다.

가을은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 추수할 것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이런 좋은 계절에 정기총회를, 우리 또한 한 해의 활동을 뒤돌아보면서 반성하지만 알찬 곡식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렇게 활동 보고서를 쓸 수 있도록 지켜 주심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매년 정기총회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임원을 할 때는 한 해가 빨리 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하나 하다가 정기총회 때는 무엇을 했나 뒤돌아 보니 1년이 지난 일이지만 처음 회장으로 선출될 때가 생각납니다.

남회장과 여회장은 동등한 위치에 있지만 여회장직을 깊게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회장이 되었습니다. 내 자신은 남회장이 있으니까 라는 생각과 여회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남회장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약간의 공백기간이 생겼을 때 회장역할 해 나가면서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알기만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첫째는 내성적인 성격도 원인이 있었으며 우리 본동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각 팀의 성향들을 파악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을 보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문제점을 보면서도, 회장으로서의 중재역할을 해야 함을 알면서도 하지 못한 점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임원이 힘들어할 때도 왜 힘이 드는지도 모르고 지내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개인적인 사정의 어려움을 알았고 떠나려고 할 때야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게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어떤 행사 때에는 경험이 없으므로, 이것은 변명에 불과하지만 역할 분담을 못 시키는 부분도 많았고 임원 스스로가 해 버리는 모순도 있었습니다.

큰 행사를 준비할 경우, 속으로는 걱정하면서도 역할 분담을 시켰을 때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잘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기쁘고 잘할 수 있는데 역할 분담을 시키지 못한 점과 혼자서 어려워했음을 생각하면서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어떤 어려움이나 기쁨을 함께 나눈다고 하면서도 함께 하지 못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해를 뒤돌아볼 때,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뒤돌아보면서 한 가지 배우고 깨달은 것은 함께 준비하고 동참할 때 모두의 기쁨이 두 배 세 배로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회원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행사가 있을 때 자기 시간을 조금만 투자하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이런 기쁨을 다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도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회장을 맡아 일하면서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는지, 직장생활과 임원활동에서 오는 갈등은 없었는지 등의 질문이 있었고 영숙이 언니는 나름대로 대답을 성실히 해 주었다.

"다음은 신생팀인 남자 한우리 팀의 팀 보고가 있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우리팀의 팀장 장한창 테오도로입니다.

저희 팀은 모든 노동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와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팀명을 한우리라고 지었습니다.

팀원은 장 야고보, 장 테오도로, 장 프란치스코, 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구 베드로 이렇게 다섯 명입니다.

팀 발족일자는 1992년 1월 9일입니다.

회합 방법은 첫 주 생활 반성, 둘째 주 복음 연구, 셋째 주 교재 나눔, 넷째 주 자유시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유시간에는 팀원들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비디오를 관람하고 나누거나, 다른 팀을 방문하여 팀교류를 하거나, 문화생활을 합니다.

팀 현황은 92년 1월 지도투사이신 장 야고보 형제, 장 테오도로, 장 프란치스코, 이 스테파노 이렇게 4명이 발족하여 회합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 스테파노가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고 4월에 이 수사님이 회합에 동참하였고, 회합은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잘 되어 나갔습니다. 9월 초부터 구 베드로 형제가 회합에 나오기 시작하였고 아직 깊이 있는 나눔은 부족하지만 회원들의 결속력과 단합은 잘 되고 있어 앞으로 좋은 양성으로 튼튼한 힘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회합내용은 '92년 1월 9일 발족한 이래 5월 7일 회합방법을 다룰 때까지 복음연구, 교재, 생활반성과 그날의 모임에서 나왔던 이야기 중에서 다루고 싶은 내용을 다음 주제로 결정하면서 회합을 했습니다.

특별히 넷째 주에는 팀원들을 더욱 더 잘 알기 위해 가정을 방문해서 저녁 식사 후 가족들과 대화도 하며 회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팀과의 교류도 시간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좋은 만남이 될 수 있었고, 다른 팀원들의 열의도 볼 수 있었고 서로를 알게 되는 교류가 되었습니다.

우리 팀원들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때는 한 회원이 방문판매회사 (재팬 라이프) 의 판매원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서로가 고민하고 주변에서 일어났던 예를 들어서 새벽까지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기뻤던 것은 그 형제가 복음의 정신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에 깊이 있게 반성하고 숙고하여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젊은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팀원들의 모습에 무한한 성장의 모습을 봅니다.

회합내용 중에 복음 나눔을 한 것을 하나 발표하겠습니다.

요한 복음 13장 31절부터 35절.

하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하려면 사랑하는 것에 따르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사랑한다면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 줄 수 있다. 책임자로서 모든 것을 잘 보아야겠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위하기보다 남을 더 먼저 생각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생활이 사랑 안에서 싹튼다.

둘,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인원이 같이 생활하는데도 원만하게 생활하지만, 남이 나에 대한 말을 했을 때 반응이 충격적인 경우에는 화가 난다. 작은 마음의 상처라도 건드렸을 때는 괴롭다. 얘기 후에도 상처의 자국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조그만 것을 위해서도 큰 노력이 필요하다.

셋, 하나와 둘

사랑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이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겠다. 지적, 충고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되겠다. 기도 안에서 사랑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화가 났을 때는 자신에 대해 화를 많이 낸다.

넷,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주님께 바치면 사랑의 영광을 주실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사랑한다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꼭 좋아한 사람이나 필요할 경우에만 사랑하지 않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사랑해야겠다.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면 주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실천약속

하나.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대하겠다.

하나. 형제간에 대화의 시간을 자주 갖겠다.

하나. 친절하게 대하도록 노력하겠다.

하나. 기쁜 마음으로 생활하겠다.

하나. 나부터 변화하겠다.

이상으로 저희 한우리팀의 팀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오랜만에 생긴 남자 팀에 회원 모두가 기쁨과 환영의 박수를 쳐 주었고, 팀원이 떠나간 이유와 피라미드식 방문판매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팀장은 피라미드식 판매 방식의 결정적인 문제점이 '이웃을 희생하여 자기가 사는 방법'이기 때문에 자기를 희생하여 이웃을 살리려는 그리스도교적 정신과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차례





개인 보고서


10분의 휴식을 마친 후 회장은 유자를 불렀다.

"다음은 여울팀의 박유자 스텔라의 개인보고가 있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유자 스텔라입니다.

상큼한 이 초여름날 개인 보고서라는 한 단어 때문에 이렇게 고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1969년 4월 11일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종리라는 아주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가난한 농사꾼이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5남 1녀 중 장녀이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셨고, 가정 일은 별로 돌보시질 않으셨기 때문에 어머님과 어려서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하신 오빠가 농사와 집안일을 돌보셨고 다른 오빠들은 어린 나이부터 객지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어린 막내 오빠와 저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고 다른 오빠들에 비해서 비교적 별 어려움 없이 학교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에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고, 어린 저와 오빠는 그럴 때마다 눈물로 밤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저런 아버지라면 없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었고 자주 어머니께 다른 좋은 아버지와 우리 아버질 바꾸자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하나라고 절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아버지가 사랑해 주실 때마다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이른, 초여름 날 아버지는 갑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그 때는 이별의 슬픔을 몰랐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어린 저에겐 한편으로 편안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텅 빈 자리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아버지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흘렀고, 전 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엄마와 오빠 덕분에 별탈 없이 학교 생활에 열중하고 있을 때쯤 추운 겨울 어느 날 집안 일을 돌보시던 오빠가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아찔해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느끼지 못했던 너무도 큰 이별을 맛보아야만 했으며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셨고 올케 언니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사방을 헤매고 돌아다녔습니다. 오빠가 살아 계실 땐 곧잘 저희 집 일을 돌보아 주시던 동네 분들도 오빠마저 돌아가시자 저희집을 등한시했고 이곳저곳에서 알지도 듣지도 못하던 빚쟁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 때 큰 오빠가 해외 근로자로 사우디에 가 계셨는데 소식을 듣고 돌아오셔서 그 동안 모아 두셨던 돈으로 빚을 청산하셨고, 우리는 맨손으로 다시 일어서야 했습니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할 정도로 집안은 기울었지만 어머니와 오빠들은 딸 하나 있는 것 남부럽지 않게 키워 보시겠다고 정말 남부럽지 않게 저의 뒷바라지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전 그분들의 기대만큼 공부에 열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내디뎠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고 마음의 안정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 서울의 오빠들 곁으로 상경했습니다.

그리고 연금매장의 판매사원으로 취직을 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하던 중 지금의 대모님이신 장 가타리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항상 밝고 즐겁게 생활하시는 그분이 무척이나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대모님은 책자도 가져다 주시고 많은 얘기도 들려 주시곤 하시면서 교리를 받아 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안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런 대모님의 덕분에 전 교리를 신청했습니다.

직장일을 마치고 밤 늦게 성당으로 향할 때면 피곤해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열심히 다녔고 많은 걸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영세를 받기 한 달 전 정도 수녀님께서 저의 자라 온 얘기를 들으시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라는 단체를 소개시켜 주셔서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모여서 삶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영세를 받던 날 제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고 더 열심히 성당에도 다니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 활동도 충실히 해서 몸소 신앙인이라는 걸 실천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먹은 만큼 저의 행동은 따라와 주질 않았고, 그런 저의 행동 때문에 자꾸만 성당에 나오는 횟수가 줄어들었습니다. 한 번 두 번 모임에 빠지다 보니 모임이 있는 요일이면 불안했고, 하루 하루가 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흘렀고 이러면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다시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회원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신부님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모두들 저를 외면할 것 같은 생각에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대해 주시는 신부님과 회원들은 저의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고 많은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세상 괴로움과 고통을 저 혼자만의 것인 양 움츠리고 지냈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회원들과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을 때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저마다의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전 새삼 느끼게 되었고, 다만 어떻게 참고 잘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드러나고 감추어져 보이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아, 주님은 나에게 이런 십자가를 주셔서 주님 안으로 날 이끌어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집으로 향하는 저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활기가 찼으며 제가 노력하는만큼 주님도 저에게 사랑을 주시리라는 것을 느꼈고, 앞으로 매사에 충실하고 노력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스텔라가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지켜 봐 주십사 하고 고개 숙여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고가 다 끝나고, 임원사임과 선출이 있었다. 남회장엔 횃불팀의 조정복 아브라함이 여회장엔 한빛팀의 강숙연 바울라가, 서기엔 여울팀의 이영희 도미니카가 회계엔 한우리팀의 장한창 테오도로가 공보엔 촛불팀의 장돈님 리디아가 뽑혀 신부님의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나눔팀의 김영숙 가타리나 언니는 서울대교구 남부 연합회의 여회장 후보로 추천되어 회원들의 동의 절차를 마쳤다.

"새로 선출된 남녀회장과 임원들께 축하드립니다. 우리는 남녀회장과 임원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지나가는 '92년도 우리 가톨릭 노동 청년회 구로본동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각 팀에서 평가회를 가진 결과를 발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일 년 동안은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또 임원들의 활발한 노력이 회원들에게 서로를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행사나 모임에 참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단순한 친목회가 아닌 현장 안의 복음화에 노력했으면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알기 전의 생활에 비해 알고 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더욱 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도 나왔습니다."

"너무 좋은 평가만 하신 것 같습니다. 일년을 돌이켜보면 반성해야 할 부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 동시에 그것은 그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발전시켜야 할 부분들을 볼 줄 알고 이것들을 실천 할 때 우리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년도 우리 활동의 목표와 안건 토의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팀별로 올라온 목표를 보면 횃불팀에서 '회원 양성의 해', 한빛팀에서 '팀 교류의 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회원 양성의 해'를 내년도 목표로 하자고 올린 횃불팀에서 배경설명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팀 확장을 위한 회원 확보에 노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으니, 내년도엔 회원들이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정신을 잘 알아서 현장 복음화에 힘쓸 수 있도록 회원 양성의 해로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회원 양성의 해'로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팀 교류의 해'를 올린 한빛팀 설명해 주십시오."

"회원은 많이 늘어난 것 같지만 아직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서먹서먹합니다. 그러므로 내년도엔 팀 간의 교류를 통해 서로를 더욱 더 깊이 알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두 팀에서 올린 목표와 제안설명 두 개가 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목표 제안에 대해 토론을 하기로 하겠습니다.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양성 과정 안에는 팀 간의 교류뿐 아니라 국제 교류까지 포함됩니다. 그런데 특별히 우리 본당의 특성을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팀회합과 교류를 통한 회원 양성의 해'로 잡으면 좋겠습니다."

횃불팀의 투사가 제안 설명을 했다.

"그러면 세가지 안이 나오게 되는 셈입니까? 또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회원 양성 안에 팀교류가 포함된다는 설명에 다른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몇 분이 흐른 뒤 회장은 다시 한 번 더 묻고 표결에 들어갔다. 대다수가 세번째 안인 '팀회합과 교류를 통한 회원 양성의 해'에 손을 들었다.

안건토의는 '93년도 활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있어야할 '가톨릭 노동 청년회 교육'과 일반인들을 초대하여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소개하는 일반야유회와 일반회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서 논의했고, 이에 대한 상반기 평가회를 갖자는 의견이 채택됐다.

신부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회원들의 확장과 친목을 넘어서 충실히 현장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미사를 드리고 다 함께 저녁식사를 겸한 파티를 한 후 돌아오는 길에 영희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 총회는 처음이다. 대개 총회하면 회장만 뽑을 뿐 아니라. 그것도 사전에 지정된 한 사람을 내세우고 박수만 치고 마는데 여기는 무슨 자격도 많고, 몇 명 되지도 않는 회원들 끼리도 정회원과 예비회원을 가려 투표권을 주고 안 주고 따지는 모습이 다소 빡빡해 보이기는 했지만 참으로 합리적이었고 책임있는 삶을 살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





희선이 어머님의 죽음


현장 안은 더웠다. 추석 연휴를 위해 휴일도 없이 일 주일 내내 계속되는 대체 근무는 숙연이를 비롯한 직원들을 모두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현장 안의 평균 온도 40도와 더불어 9월 초의 무더위는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숙연이는 이 무더위가 엄마의 근심을 덜어 주길 바라고 있다. 지난 달에 들이닥친 태풍은 호남의 전답을 쓸어 버렸다. 태풍의 피해로 논바닥에 누워 버린 다 자란 벼이삭들을 하나라도 건지려고 몸부림치듯 달려드는 농부들의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바라보면서 수심에 가득 찬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버지없이 혼자 논밭을 일구어야만 했던 어머니. 그래서 숙연이는 현장 안에서 살이 익어 버릴 듯한 이 열기가 그나마 남은 어머니의 논에 한 가닥 희망을 가져다 주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연신 땀을 닦아 내면서도 전구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휴식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씻으러 가는 숙연이에게 정희가 다가 왔다.

"언니, 오늘 희선이가 안 왔어.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애!"

희선이는 얼마 전 정희가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에 새로 데려 온 생산 5과의 동료이다. 어머니가 배가 아프시다고 해서 근처 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단순한 위장병이려니 했지만 위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 후로 희선이는 팀 회합에도 참석치 못하고 어머니 병간호에 매달려 있었다. 희선이 언니들은 모두 시집갔다는데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또한 희선이가 출가외인이라고 강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언니들도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희선이는 어린 남동생과 단둘이 어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정작 어머님께는 병명을 알려 드리지도 못한 채 말이다.

숙연이는 팀회합에서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다루었다. 팀회합에서는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의료혜택을 위해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본당 빈첸시오 회원들과 함께 여의도 성모병원 사회복지과를 통해 극빈환자 혜택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어머니께 병명을 알리지 않은 채 병원을 옮기자는 회원들의 결정에 대해 희선이 어머니는 그냥 있겠다고 버티시는 바람에 그냥 간병수발만 도와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태풍의 피해로 희선이 어머니가 입원해 있던 병원이 수해로 물에 잠겼고 그 바람에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희선이는 낮에는 자기가 간병하고 또 밤에는 동생이 간병하기로 하고, 오전 근무보다 수당이 1.5배 많은 야간근무를 신청했다. 어머니의 병이 심해지면 심해질 수록 희선이는 어머님 간병에 매달려야만 했다. 이 무렵 숙연이는 다시 회합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출가외인을 주장하던 희선이에게, 시집간 언니도 어머니의 딸이라는, 한 가족이라는 일체감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급히 언니들에게 연락을 했고, 언니들의 도움을 거부하던 희선이도 언니들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함으로써 다시 한 가족으로 뭉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오늘 급기야는 근무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오전 교대근무자인 동료들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그래? 그럼 이따 퇴근 후에 가 봐야겠다."

밤 9시. 잔업을 마친 후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이미 핏기가 가시었고 숙연이가 보더라도 심각한 것 같았다. 10시. 집으로 모시라는 병원 측의 연락이 왔다. 퇴원수속을 위해 원무과로 내려가던 숙연이는 빨리 회원들을 소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 화요일이면 여울팀이지. 그런데 이 밤에 올 수 있을까? 희선이를 모를 텐데. 어쨌든 성당에 전화해서 그 친구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준비를 청해야겠다.

"따르릉."

"여보세요. 구로본동 성당입니다."

"저,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장 강숙연인데요. 급한 일이라서 그러는데요 거기서 팀회합 하는 여울팀 아무나 좀 바꿔 주시겠어요?"

잠시 후 여울팀장 영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누구니?"

"네. 영희예요."

"응, 나 숙연인데 전에 우리 팀에서 활동하던 희선이 어머니가 위급해서 집으로 모시고 갈 거야. 빨리 회원들에게 연락해서 개봉동 전철역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빠져 나와. 오른쪽으로 길 건너 12번 버스 타고, 정일 국민학교 앞에서 내려 전화하라고 그래! 희선이네 집 전화번호는 681에 3689야. 다 기억하겠니?"

"네. 다 받아 썼어요."

"빨리 연락해. 그리고 빈첸시오회에도 연락해 줘!"

"예."

급했다. 퇴원 수속을 마치고 구급차를 부탁하고 병실로 돌아왔다. 희선이는 동생과 단둘이 의자에 앉아 숨을 몰아 내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훌쩍이고만 있었다. 갑작스런 어머님의 죽음 앞에 그렇게 똑똑하고 명석했던 희선이는 지금 한낱 어린아이만 같았다. 숙연이도 막상 돌아가시려는 희선이 어머니 앞에서 어떻게 희선이를 위로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슬픔에 잠겨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울고 있는 희선이 동생을 잡아 일으키며 숙연이가 외쳤다.

"뭐 해! 빨리 짐 정리하고 어머님 모셔야지!"

짐이랄 것도 없는 것이지만 둘은 눈물을 흘리며 정리를 마쳤고 구급차에 어머니를 눕혔다. 집으로 향하는 구급차 안에서 숙연이는 두 달 전 물에 잠긴 병원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성모병원으로 옮기던 때를 생각했다. 여의도 전 지역이 밀려오는 차량에 막혀 인도를 통해 병원으로 달리던 그때를. 결국 이렇게 가시는구나! 집에 도착했다. 숨을 헐떡이는 어머니를 요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드렸다. 그리고 숙연이는 희선이를 재촉해 언니들과 친척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11시 30분. 어머니의 숨이 끊겼다. 혼수 상태에서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헐떡이던 숨을 거두셨다. 두 자식이 곁에 있는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는지 그냥 그렇게 죽음을 홀로 맞이하셨다. 혼자 가셨다. 어린 두 아이를 남겨 놓고. 희선이 남매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어머님의 머리 맡에 쪼그리고 앉아 막 젖떨어진 아기처럼 어머니만 바라볼 뿐.

회원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그 침묵은 계속됐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숙연이도 연락을 다 취한 뒤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희선이 남매는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회원들은 문상객을 위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신부님과 구로본동 성당 연령회원들이 희선이의 집에 도달했을 때는 12시가 넘었다. 급히 수세를 거두고, 연령회원들은 연등을 걸고, 천막을 쳤다. 유족들이 하나둘씩 찾아 오기 시작했다.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잡다한 준비를 마친 뒤 팀원들이 밤을 새기로 하고 다른 회원들을 돌려 보낸 시간은 3시였다.

이틀 뒤, 장례를 마치고 희선이는 다시 회사에 출근했다. 무척이나 핼쑥해진 얼굴에 웃음마저 잃은 희선이는 보기에도 애처로워 보였다.

추석!

숙연이는 가지 못하면 몸살이 날 정도로 그리운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으로 향했다. 희선이 어머님의 죽음을 겪고 난 후 숙연이는 어머님의 움직임을 전보다 주의깊게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어머님을 봉양하기엔 너무나도 지쳐버린 숙연이는 감기와 몸살로 추석을 보내고 그냥 그렇게 올라왔다. 다시 또 라인에서 울리는 기계 소리와 뜨거운 열기 안에 합류해야만 했다. 왠지 허탈하기만 했다.

차례




지원근무


사흘 후 겨우 기력을 회복한 숙연이는 희선이와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희선이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당분간 팀회합을 쉬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회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숙연이는 잠시 쉬면 편하겠다는 희선이를 바라보며 아직 다른 이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희선이의 자존심을 걱정했지만, 희선이가 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유를 아는 탓에, 숙연이도 희선이에게 팀회합에 나오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우리는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하기 위해 활동한 것이지 성당 나오게 하기 위해 함께 해 준 것은 아니니까.

그날 저녁 팀회합 시간. 투사 언니가 말했다.

"어떻게 추석 잘 보냈어요?"

회원들은 각자 추석을 맞아 시골에 가서 집안 식구들과 만나서 그 동안 맺힌 오해도 풀고 새벽이 될 때까지 이 친구, 저 친구 집을 방문하며 놀았던 이야기,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과 고궁을 방문하고 영화도 보면서 느낀 이야기며 모두 나름대로 보람있게 보냈던 추석의 풍경을 재현했고, 정겨웠던 순간으로 돌아가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 정희가 투정 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난 추석 기분 잡쳤어."

"왜, 무슨 일이 있었니?"

"글쎄, 추석을 마치고 온 날 현장 사람들을 모아 놓고 회사에서 외부 강사를 초빙해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난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며칠 동안 기분이 우울했어."

"왜, 무슨 일이었는데?"

"강의를 듣고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나더러 박 계장이 착색 (전구에 색깔을 입히는 작업) 반에 지원 근무를 하러가라는 거야. 내가 싫다고 하니까 머뭇거리고 말더니 오후에 또 가라는 거야. 자꾸 외면하는 것만 같아서 나갔어. 갔다 오니까 김 언니가 조장이 자기 조 일은 안하고 어디 갔다 오냐고 화를 내잖아.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저녁 밥 먹으면서 눈물이 막 흘러 나오잖아.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해 놓고는 마치 우리 조에서 내가 필요없는 사람처럼 한두 번도 아니고 뻑하면 나보고 지원 근무를 가라니 억울하고 자존심만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지원 근무가 뭐야."

"다른 부서에서 일이 많을 때 가서 지원해 주는 거야."

"그런 일이 자주 있니?"

"납기일에 쫓기거나 제품 출하할 때 자주 있어."

"그런데 왜 정희만 시켜?"

"다른 애들은 잘 안 갈려고 해. 그리고 그 쪽에서도 지난 번에 일한 사람이 왔으면 해. 새로 일 가르치려면 번거로우니까. 글쎄 박 계장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우리 조도 사람이 두 명이나 결근해서 힘든데 지원 나가라니? 열받아, 정말. 와서는 '조장, 무료봉사 좀 하지!' 하는 게 아니겠어.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안 간다고 하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보내려다 안 되니까, 나중에 와서는 나보고 '어떡하니, 명찰 무거운 사람이 가야지.' 하면서 사정을 하잖아, 그래서 갔다 오니까 다들 나만 원망하잖아. 누가 가고 싶어 갔다 왔나? 자기들은 일만하면 그만이지만 난 조장이라 전표도 써야 하고 일이 더 밀리는데 나 보고들 야단이야."

"관리자가 일 시키기 쉬운 사람만 시키고 말 많은 사람은 안 시켜서 매번 가는 사람만 가게 돼. 문제야, 어떻게 해야지. 계속 이럴 거 아냐?"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미선이가 거들었다.

"요새 일이 잘 없나?"

"추석 바로 뒤라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노는 것은 아냐. 게다가 어제 정전이라 작업을 못했어. 그러니 일이 밀렸지. 게다가 저쪽에선 자꾸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이쪽 관리자를 쪼는 모양이야. 그런데 그래도 그렇지.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나흘 동안 계속 지원 근무 나갔어. 나도 내 라인에서 필요한 사람인데 계속 나더러 나가라는 거야."

"지원 근무는 조장이 다 모아 놓고 순번을 정하던가 하는 식으로 조정할 수 없나?"

"그런데 누가 말을 들어야지."

"다른 사람이 다 싫어 하는 것을 조장이 솔선수범한 측면은 좋은 것 같애."

"그 박 계장도 신자야. 신자로 서로 아니까 자꾸 나만 보고 부탁하는 것 같애. 이용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겸손하게 참아야 하는 건지…."

"그래 오늘은 너무 늦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감정 섞인 이야기가 앞뒤 없이 반복되니까.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정식으로 다루기로 하자. 다음 주에 올 때 다른 친구들은 짧게 나눔하고, 정희의 문제를 깊이 다루기로 하자. 사건은 오늘 들었으니까, 정희는 다음 주 회합까지 준비해 올 게 있어. 첫째로 사건을 고치는 문제하고, 둘째, 사건의 당사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또 신앙적으로는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등의 내면적인 문제들을 차분히 적어 와서 발표해 주었으면 좋겠어."

투사언니가 말했다. 숙연이가 보기에도 아직 추석휴가의 들뜬 분위기로 다 들떠 있는 이 상황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엔 좀 무리였고, 회원들 눈치가 다 피곤해 보였다. 그렇지만 정희를 막상 여기서 딱 잘라 보내기도 뭐하고 기분을 전환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추석 때 내려갔다 와서 기분은 좋지만 노느라고 오늘은 다 피곤하니까. 다음 주에 맑은 정신으로 하자. 밖에 나가서 차나 한 잔 하면서 기분 좀 풀고 가. 부담없이 정희의 추석 얘기도 좀 듣고. 그리고 다음부터는 늦지 않도록 해. 늦으면 충분히 다루지도 못하고 아쉽게 가야 하니까 일찍 오세요."

팀장인 숙연이의 제안에 다 동의했고, 팀원들은 성당 옆에 있는 호프집 '지구촌'으로 갔다.

차례





매듭을 풀며




다음 주 회합시간. 목요일. 8시. 성당 회합실. 강숙연 바울라, 염정희 젤뚜루다, 고미선 미카엘라, 양정옥 율리안나 투사 언니

"오늘은 지난주에 약속한 대로 정희의 이야기를 듣고 깊이 나누기로 하지." 혹시 정희 말고 이번 주간에 있었던 일 중에 이야기 할 것 있으면 짧게 나누고 시작하기로 하지."

"그냥 정희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해요."

"다들 별고 없었니?"

"그래요. 그냥 정희 이야기 해요."

"지난 주 상황에서 더 전개된 것이 있니?"

"아니."

"지원 근무는 또 했었니?"

"응. 안할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누군가 가야 하고 아무도 나서지 않고."

"그럼 상황은 지난 주에 다 들은 것으로 하고. 이번에는 그러한 상황이 계속될 때 현장과 개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오게 되는지 이야기해 보자. 먼저 당사자인 정희가 이야기해 볼래? 그 동안 어떤 것을 느꼈는지?"

"우선 지원 근무를 가는 사람은 갑자기 안해 본 과정에서 일하게 되니까 자연히 서툴고, 자신감도 없어 큰 부담을 안고 일해야 하며, 돌아와서 동료들과의 관계도 어떤 때는 어색하기도 하고, 더군다나 계속 한 사람만 보내게 되면 자기 조에서의 소속감도 잃어버릴 수 있는 것 같애."

"옆에서 본 미선이는 같은 라인에서 일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니? 정희가 지원 근무 나간 다음에 다른 동료들의 반응은 어떻데?"

"지원 근무를 가라고 시키는 계장은 아무나 잘 안 가니까, 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이 그냥 일만 되도록 하려고 말 잘 듣는 사람만 계속 시키는 것 같애. 그러니까 관리자가 자기가 일을 시킬려면 무슨 원칙을 세워서 해야 하는데 그냥 가는 사람만 가니까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 되는 걸 느껴. 또한 내가 한 번 정희 언니 대신 가서 일해 봤는데, 나더러 정희 언니가 왜 안 오냐는 식이야. 아무래도 지원을 받는 쪽에서는 한 번이라도 더 해 본 사람이 계속 오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오면 또 가르쳐야 하니까 싫어해. 또한 동료들은'한 사람이 갔구나,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 같애. 그리고 누가 한 명 지원 근무가면 오히려 우리 라인에 한 사람이 더 빠져서 일이 더 많아 지니까, 자기들을 대신해서 지원 근무를 갔다는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그 지원 근무 간 동료에게 고마움이나 염려 같은 것은 없어. 자연히 지원 근무 간 동료의 입장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도 않아. 단지 지원 근무 문제가 생기고 또 한 사람이 가게 되면 자기가 순간적인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로만 만족하는 것 같애. 그리고 다시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또 그 사람이 가겠지.'하고 은근히 미는 버릇마저 생겨 그 한 사람만을 계속 희생시키려 하는 분위기야."

"그러면 이 지원 근무 문제를 다른 차원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 경제적인 차원에서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지원제가 아무런 대책없이 계속되고 또 그 지원이 일손이 남으면서 하는 지원이 아니라 공정상 인원이 부족한데도 지원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라면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애. 일단 손이 모자란다는 핑계로 여기 저기서 끌어 당겨 쓰는 것이 괜찮은 방법 같지만, 쉬지도 못하고 계속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니면서까지 일해야 된다면 결국 손해야. 왜냐하면 그 지원 근무자나 그 지원자를 보내는 라인이나 다 피로와 짜증으로 인해 불량만 많이 나오게 되고 일하기 싫어지니까. 그렇게 되면 직원들이 능률도 안 오르고 또 퇴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결과적으로 회사측이 손해야. 또 한편으로 지원 근무자가 이중의 일을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자신이 일하는 강도에 맞춰 월급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식의 지원근무가 계속되면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조금 전에 숙연이 언니가 이야기했듯이 전부 다 이 방식 대로라면 노동자들의 취업 기회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만 계속 혹사당하면 사회적으로 이직율도 높고 더욱 더 현장을 기피하게 될거야. 그리고 인격이나 우정 등의 가치는 사라지고 어떻게든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고 할거야. 비정상적인 인간관계, 서로 이용해 먹으려는 관계로 삭막해지는 거야."

"왜 이렇게 돼 가는 거지?"

"우리가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 자기에게 직접 밀어닥친 사건만 깊이 생각하고, 정말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방법이 최선인지 동료들이나 관리사원에게 함께 제기하고 나누어 결정하려는 진지한 자세가 부족해서 그랬던 것 같애."

"사회 의식도 문제야. 사람들은 노동자들이야 시키는 대로 일만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일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감정은 안중에도 없어. 또 우리도 어렵고 궂은 일은 남에게 떠넘기려는 태도도 원인이야."

"시키고 듣기만 하는 수직적인 사회, 문제를 진지하게 풀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순간만 넘기려 하고 무슨 말이라도 하면 마치 따지는 것 정도로만 인식하며 오히려 피하려고만 하는 사회 분위기도 원인인 것 같애."

"인원이 모자라면서도 충원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들은 어찌되었든 경비나 줄이려 하고 또 노동조합이 활성화될까봐 인원을 될 수 있으면 줄이려고 하는 경제 제일주의적인 사고도 원인이야. 또 노동을 천하게만 보기 때문에 일하면서도 긍지와 보람을 가지고 일하지 못해. 또 고생스럽기 때문에 일하러 오지 않는 우리 경제 구조의 어두운 단면인 것 같애."

"그럼 이 지원 문제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정희가 조장으로서 솔선수범했다는 것과 이웃 공정의 어려운 사정과 부탁에 응했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어."

"그런데 희생하는 마음으로 갔지만 끝까지 희생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고 오히려 동료들을 원망할 정도가 됐는데도 아직 동료들이나 관리자와 상의하지 않은 것은 부정적인 면 야."

"또 지원은 어느 정도라도 자발성이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 요구하기만 해서 한 사람을 희생시키기만 하는 근무제도도 부정적인 거야."

"그래 이왕 하는 일인데 부담을 갖고 일하면 안 좋아. 무리하게 밀어 붙이기만 하면 힘들어. 어느 정도 보람을 갖고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지."

"신앙적인 면에서는 이문제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지난 주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봤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면서도 자기의 희생을 강요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다고 생각해. 또 처음에는 싫고 짜증만 냈는데 누군가가 해야하는 상황과 동료들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누가 인정해 주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가라앉을 수 있었어. 그리고 한편으로는 보람도 있었고. 그런데 마음은 그렇지만 막상 또 지원 근무를 하게 되니까 싫긴 싫어."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나만 계속 갈 수도 없고. 앞으로는 지원 나가는 그 한 사람만 고생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또 지원 갔다 오는 사람에게 '수고했다'라는 말이라도 하여 섭섭하지 않도록 해야겠어."

"혼자서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면 곤란하잖아."

"지원 문제에 있어 우선 회사에 계장이나 노조를 통해 직원 보충을 요구하고, 우리끼리도 한 사람만 가서 고생하지 않도록 상의해서 순번제 지원이나 또 다른 대책을 마련해."

차례





깨져버린 이상


"저 놈 짓이야!"

"저 놈 누가 데려왔어?"

"저런 놈이 다 있어! 저 놈 어디서 온 놈이야?"

여기 저기서 희동이를 가리키며 눈알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인부들은 다 퇴근하고, 희동이는 나머지 정리를 하느라 혼자 남아 있었다. 정리를 다 마치고 퇴근하려는데 공사감독이 들어왔다. 왜 여태 안 갔느냐는 물음에 정리하느라 늦었다고 말하고는 아무 생각 없이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아침.

희동이가 공사 현장으로 출근을 했더니 모두 술렁이고 있었다. 누군가 어제 저녁에 공사감독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금고에서 설계도면을 꺼내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한 사람, 한 사람 용의자를 찾더니 급기야는 희동이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너, 엊저녁에 왜 늦게 갔어? 바른대로 말해. 말 안하면 …"

"뒤 청소하고 가느라고 늦었는데요."

"이 자식이!"

공사감독의 그 커다란 손바닥으로 눈에 불똥이 튀듯 얻어 맞은 희동이는 땅바닥을 굴렀다.

"왜 그래요?"

"너 엊저녁에 금고에서 설계도면 꺼내갔지? 누구한테 갔다 줬어? 빨리 안 대!"

"아녜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희동이는 공사감독에게 멱살을 잡힌 채 파출소로 끌려 나갔다. 희동이가 개 끌려가듯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현장 소장의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현장 소장은 이 갑작스런 상황을 바라보고는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야?"

"글쎄, 이 놈이 금고에서 설계도면을 꺼내 갔어요!"

"설계도면을 꺼내 가다니! 무슨 말이야?"

"이 놈이 어제 늦게 나가는 게 수상하다 했더니, 아침에 기사가 와서 금고를 열더니 설계도면이 없어졌다는 거에요. 이 놈이 가져간 게 틀림없어요."

"설계도면은 여기 있어. 맨날 자리비우고 다니다가 없어지면 난리치지 말고 평소에 자리를 잘 지켜야지! 이 사람 저 사람 드나드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길래, 하도 불안해서 내가 집으로 가져갔다 가져오는 길이야."

"네에?"

"그럼 임마. 진작 아니라고 했어야지!"

희동이의 멱살을 움켜 잡았던 공사감독이 손에서 힘을 빼고 슬그머니 손을 놓자 희동이는 다시 한 번 땅바닥에 뒹굴고 말았다. 미안하단 말도 없었다. 잡아먹을 듯한 기사들의 기세도 한 순간의 헛기침과 아울러 사그라져 버렸다.

"도대체 이게 뭐야?"

희동이는 그날 일당을 받고는 그냥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누명이 벗겨졌다는 안도감 이전에 회복할 수 없는 신뢰가 깨져 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남들은 그냥 퇴근해도 마무리는 내가 항상 했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항상 백안시했다. '왜 이러는 것일까? 왜 내겐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허탈했다.

희동이는 광주 현장을 떠나면서 광주교구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을 따라 목포에서 피정을 하게 되었다. 피정 동안 이모저모를 생각해 보았다. 왜 내게는 자꾸 이런 일만 일어나는 건지? 도대체 그 이유가 뭔지를.

지난 1988년 기숙사를 퇴사하면서, 함께 기술을 배우던 사람들과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선배 한 분과 함께 자립하기 위해 김포에서 조그만 공장을 시작했다.

"희동아, 남 밑에 가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실습 나갔을 때의 서러움을 기억하며 희동이는 말했다.

"좋기만 해요. 살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만 일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 다른 친구들도 데려와야 겠어요."

"그래. 공장이 잘 되면 우리 회원들끼리 모여서 사업을 하자! 지금은 시작 단계니까 조금만 더 노력하자."

처음에는 좋은 공동체로 발전을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혼자 묵상하며 논두렁을 거닐곤 했었다. 들려오는 것은 바람소리, 벼가 흔들리는 소리, 군인들의 사격소리, 비행기소리, 각종 벌레 우는 소리… 모두가 자연 그대로였다. 함께 모여 놀기도 하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월급도 이익금을 서로 나누어 가져보니 적지 않은 액수였다. 희동이는 자기 저금통장에 늘어나는 액수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기뻤다. 어릴 때 돈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죽 쑤어 먹던 그 고달픔은 한낮 추억인 것만 같았다. 공장 생활 1년 만에 희동이는 고향에 쓰러져 가는 집일 망정 자기 집을 마련했고 아버지를 모셨다. 희동이는 참으로 흐뭇했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수금하러 갈 때 마다 사장은 자리를 피하는 듯 만날 수도 없었다. 다음에 오라는 경리 아가씨의 차디찬 대답만 되풀이 듣고는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 왔다. 그 동안 물건이 잘 나갔기 때문에 외상으로 가져다 쓴 원자재 값도 적지 않았다. 사업을 처음 시작한 형들은 후배들에게 짜증도 자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야, 희동아 너 시골에 집 샀다며?"

"응, 볼품은 없지만 그래도 편안히 누워 잠잘 수는 있어."

"그런데 니 통장엔 아직도 돈이 많이 남아 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되다니?"

"아니, 내가 널 의심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제 누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네 통장을 보았는데 돈이 많다고 하면서, 네가 혹시 열심히 일한다고 형들이 너한테 돈을 조금 더 주나 보다고 하는 것 같애!"

"무슨 소리야? 형들이 왜 나만 더 줘? 형들도 다 똑같이 나누는데!"

하도 어처구니 없는 질문이었고 또 그 대답에 아무 소리 없기에, 그냥 그렇게 넘어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일은 이상하게 꼬이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었지만 그들은 살면서 어떻게 돈을 안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형들이 돈을 더 주지 않았다면, 수금을 하면서 조금씩 떼거나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로 형들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완강히 부정하던 형들도 돈을 뗀다거나 뒷거래 이야기까지 나오자 차츰 신뢰하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땐 갑자기 공장 사정이 너무나도 궁했던 시기였다. 공장을 그만 두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정도로 외상에 시달렸던 것이다.

가장 친한 선배 형이 희동이에게 와서 물었다.

"희동아!"

"네."

"너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무슨 소문이요?"

희동이는 자기가 너무나 철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다들 없어 쩔쩔매는 그 시절에 자기만 버젓이 두둑한 돈 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시기를 받기에 적절하다는 것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희동이 자신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사람이 확증을 잡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였다. 그 순간에 희동이는 의심을 받고 살기보다는 나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 땐 누가 뭐라든 자기만 결백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짐을 싸서 시골 집으로 내려 간 희동이를 사람들은 발각날까 무서워 도망친 것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작업도구마저 훔쳐 달아났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을 헤아리지 못한 채 시골에서 지낸 3개월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희동이가 시골로 떠나던 날 함께 활동했던 어린 후배 철진이가 집을 나갔다. 사람들은 희동이가 철진이를 팔아 먹었다고 말해 버렸다. 처음에는 반신 반의하면서 철진이의 어머니와 조카가 찾아오더니 매일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철진이를 찾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협박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까지 되자 부모님들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서울로 향했다.

급한 김에 서둘러 상경했지만 희동이의 주머니엔 살아갈 만한 지폐 한 장 없었다. 3개월간 집에 있으면서 모아둔 돈은 집 수리하면서 다 썼기 때문에 가진 것이라곤 현금과 BC카드 하나 뿐이었다. 상경 후 회원집에 잠시 머물렀다가 대부님께 빌리고 현금을 인출해 친구와 함께 둘이 사는 조건으로 월세방을 겨우 얻었다. 그리고 나서 문제를 하나씩 해결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결국 모든 것이 대인 관계에서 온 것이다. 인간의 존재성과 흔히 말하는 정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서로 다르다. 그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살고 있다. 함께 살면서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만 갈 수 없다. 함께 가야한다. 그것도 고통을 함께 짊어지며 서로의 아픔을 감싸 주어야 한다. 인간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부둥켜안아 주며 가야 한다. 훈련원을 졸업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만든다는 이상이 얼마나 우리를 들뜨게 했던가! 또 실제로 함께 일할 때의 그 기쁨을 뭐라고 설명하고 또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으랴? 희동이는 김포를 떠날 때의 그 허무감을 다시는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해 11월. 희동이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대자이면서 김포에서 한때나마 같이 일했던 후배 철진이가 일터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희동이는 무려 일 주일을 영안실에서 지내며 못내 아쉬워했다. 희동이는 철진이의 주검을 화장시키고 한 줌의 재를 뿌리는 순간 자신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후 희동이의 뇌리에는 이미 떠나버린 녀석이지만 문득문득 떠 올랐다. 그리고 희동이는 지금 자신의 가슴 속에서 피어 오르는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자기도 허락할 수 없는 그리움과 만나 보고 싶은 애절함이. 그냥 그렇게 서운한 감을 가지고, 서로를 피하며, 마음 한 구석에 원망을 간직한 채 살기가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죽으면 다시 보지도 못할 형제들인데! 또 나중에 운명을 달리하고 운이 좋아 하느님 앞에서 보게 된다면 얼마나 죄스러울까! 누구를 탓하기엔 너무나도 그리운 형제들이여!'

차례





증거자


"숙연아 얘기 들었니?"

"무슨 얘기?"

"우리 라인이 없어진데."

"없어지다니?"

"자동화가 된다나 봐."

"누가 그래?"

"노동조합 사무실에 갔더니 위원장이 그러던데."

숙연이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방만한 회사 경영으로 시설투자는 안하고 값싼 인력만을 고용하다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임금이 오르기 시작하자 회사는 인건비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공장 자동화 방법밖에 없다 라는 협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위축시키던 지난 봄의 임금투쟁 때 외쳤던 전무의 말이 숙연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최근 노동조합 내부는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위원장과 대의원들의 갈등은 비단 노선 싸움에 그치지 않고 감정 싸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도대체 이러한 갈등에 휘말려 있는 위원장은 공장 자동화로 라인 하나가 없어질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또 안다면 그에 대한 대응책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숙연이는 답답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하는 노동조합이란 말인가? 그 때 등 뒤에서 노동조합 위원장이 숙연이를 불렀다.

"강숙연씨!"

"네?"

"왜, 그렇게 놀래요?"

"아, 아무것도 아녜요."

하필 위원장에 대한 불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원장이 나타나자 숙연이는 당황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 사람 양반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짓는 숙연이에게 위원장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따 일 끝나고 볼 수 있어요?"

"이따가요? 왜요?"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무슨 말인 데요?"

"내가 뭐 부탁할 것이 있어서 …"

"그래요. 일 끝나면 노동조합 사무실로 갈께요."

"거기 말고 공단 5거리에 있는 피카소 다방에서 만나죠."

"피카소 다방요?"

"네. 지난 번에 노보 제작진과 함께 갔던 곳요. 단둘이 만나서 데이트 좀 합시다."

숙연이는 노동조합 회보(노보)를 제작하고 있었다. 숙연이는 제작진에게 지난 번에 노동조합 상근자들이 회식을 시켜 주고 차를 마시러 갔던 그 다방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숙연이는 몇 번을 되짚어 생각해 보았지만 자기를 부른 이유에 대해 별 뾰족한 건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단둘이 만나자는 그 말투가 이상했을 법도 했지만 평소에 워낙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라 그냥 만나서 듣지 하고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퇴근 후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약속시간에 맞춰 피카소 다방으로 갔다. 노동조합 회보에 대해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더니 위원장은 자세를 바로 하고 심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강 숙연씨, 이번에 노조에 사무장 좀 맡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노조 사무장요?"

"그래요, 사무장 자리를 숙연씨가 맡아 주셨으면 해요."

"왜 하필 이런 때 저보고 맡아 달라는 거죠?"

숙연이는 노동조합 간부들 간의 갈등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는데 위원장은 다른 말을 했다.

"역시 노보를 만드시는 분이시라 눈치가 빠르시군요. 위원장 선거를 하려면 사무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숙연씨도 알잖아요. 그런데 누구 하나 마땅하게 이 일을 잘 처리할 사람이 없어요.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숙연 씨도 알다시피 노조 상근자가 하도 잘 바뀌어서 적당한 사람이 더 이상 없어요."

"안돼요. 저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인물이 못 돼요."

숙연이는 이 사람이 왜 이러는 지 이해가 안 갔다. 그 동안 있던 사무장들은 모두 자기와 안 맞아서 자기가 내보내 놓고 이제 와서 선거를 해야 하니까 사무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다, 그것도 자기에게 하라는 이유가 뭔지 이해가 안 갔다. 위원장은 계속 설득하려고 했고 숙연이는 그냥 거부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조원들 중에 노조를 아는 이는 간부나 대의원들 뿐이고 노동조합 내부의 갈등을 계기로 거의 다 노조를 빠져 나가거나 무관심하고 있었다. 또한 위원장과 함께 일하겠다고 나설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숙연이는 위원장 몰래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비밀모임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 모임은 상황에 따라서는 위원장과 반대 입장에 맞서 싸워야 할 형편이기도 했다. 진퇴 양난이었다. 숙연이는 우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서는 혹시 위원장이 자신의 모임을 알고 있는지 떠 보았다.

"왜 저를 선택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건 숙연씨가 노보 일을 하면서 노조를 잘 알고 또 성격이 차분하고 ‥"

좋은 말은 많이 늘어 놓았지만 그 중에 숙연이를 움직일 만한 말은 없었다. 그러나 위원장이 자신의 모임을 모르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었다. 나흘을 고민 속에 잠겨 있다가 견진교리를 들으러 성당에 갔다.

10월 23일. 견진교리 두 번째 시간.

숙연이는 성서를 펴고 강의를 하시는 신부님과 함께 복음을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어느 구절에 가서 자기가 멈추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만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처럼 성서 말씀이 숙연이에게 가깝게 들려 본 적은 처음이었다. 꼭 하느님께서 신부님의 입을 통해 자기에게 이르시는 것 같았다. 조합 상근자를 맡으라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다시 성서에 눈길을 돌렸다. 사람들은 이미 한참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마!"

"이럴 수가?"

숙연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옆 친구가 쳐다보고는 의아해하다가 다시 성서로 눈길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숙연이는 자신의 가슴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숙연이는 하느님께로부터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을 들은 것 같았고 상근자로 가서 화해의 사도가 되라는 명령을 듣는 것만 같았다.

그 동안 숙연이는 망설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바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달 말 지도투사언니와 함께 팀회합을 해오다 갑작스럽게 예비팀을 맡게 되었다. 새로운 회원들을 자기 팀에 넣어 함께 하기에는 좀 늦었고 새로 만들자니 맡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숙연이는 투사언니가 6개월 동안 함께 팀을 지도하는 것을 옆에서 도와 주겠다면서까지 자기에게 예비팀을 맡으라고 청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숙연이는 실제로 아직 팀을 지도하기에는 미숙하고 양성이 덜 된 상태다. 그래서 팀회합을 할 때마다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만 하고 시간에 늘 쫓기는 것이 자기 힘에 부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론 힘들기는 하지만 부족한 대로 그나마 함께 하는 데에 의미를 갖고, 그들 안에서 다시 양성되어 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노동조합 상근자로 뛴다는 것은 무리였다.

또 집안 사정은 어떤가? 숙연이는 얼마 전 작은 사업을 하는 오빠네가 큰 어려움에 처한 것을 뒤늦게 알고서 그 동안 자신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한 채 살아 왔는지를 반성할 정도였다. 그래서 위원장의 부탁과 노동조합의 상황이 부담은 됐었지만 자기는 시간상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미뤄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성서 구절은 숙연이에게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다고 재촉하고 있었다. 숙연이는 점점 누군가 할 일, 누군가가 맡아서 치뤄야 할 일을 주님께서 자신에게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회합 때 신부님은 식별을 잘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모든 일을 다 맡아서 해야 만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도 지적해 주셨다. 또 숙연이도 그 일이 하기 싫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헤쳐 나갈 자신도 없었다. 위원장도 싫었다. 위원장과 함께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그 동안 그만두었던 전임자들에게 수도 없이 들어 왔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호소라도 하듯이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그 말씀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말씀은 숙연이로 하여금 평신도 사도로서 해야 할 일을 일러 주는 것만 같았다. 숙연이는 식별의 은총을 달라고 기도했다. 과연 자신이 나아갈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 달라고 매달렸다.

"주님! 있는 그대로의 제 자신을 받아들이고, 동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어려움 중에 있는 동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현장 안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평신도 사도로서의 삶을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항상 이끌어 주십시오. 주님! 저는 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이 주님께서 제게 주는 십가가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길을 알려 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알려 주십시오. 아멘."

며칠 뒤 숙연이는 위원장에게 말했다. 해 보겠다고‥. 물 밀듯 밀려오는 가슴 속의 말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차례





이게 아닌데!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연정이는 자기 나이 스물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중학을 겨우 졸업하고, 17살 때부터 뛰어든 직장생활이 이젠 지겹고 힘들기만 하다. 뭘 바라고 살 것인가?

처음엔 아버지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은 좀처럼 낳지 않았다. 오히려 술로 난 병인데도 술이 떠나질 않는다. 아버지를 망치는 것인가? 아버지를 돕는 길인가? 절망스럽다. 연정이는 기계처럼 일만 하고 아무런 희망없이 사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싫어졌다.

따스한 햇살이 산들거리는 봄바람과 함께 연정이의 피부를 살포시 스치던 어느 날 중학교 때부터 짝꿍이던 미자가 다가왔다.

"연정아, 너 여기 좋으니?"

"말 하지 마. 어디론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휙 떠나 버리고만 싶어."

"나 요번에 서울에 가려는데 너 같이 가지 않을래?"

"서울?"

"응, 어차피 객지 생활인데 서울가면 여기보단 더 나을 것 같아."

"서울 어디?"

"서울에 내가 아는 언니가 있어. 그 언니가 일하는 데서 일손이 부족해서 사람을 찾고 있대. 난 너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

어차피 집 떠나 떨어져 사는데도 그나마 더 멀리 가는 것을 아쉬워하여 만류하는 작은언니를 뒤로 한 채 미자와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왔다. 미자 언니가 일한다는 곳을 찾았다. 대방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피혁공장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 날부터 연정이는 일을 시작했다. 햇빛이 공장의 작은 창문을 통해 들이비칠 때마다 이리저리 나르는 먼지의 향연을 볼 수 있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코를 찌르는 가죽 냄새, 본드냄새를 벗삼아 고달픈 시다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자랑 같은 기숙사에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잔잔한 기쁨이 느껴졌고 위안이 되었다. 연정이와 미자는 악착같이 일했다. 하지만 첫 월급을 타고는 왜 일하나 싶었고 또 다시 객지생활의 고달픔이 시작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좀더 졸라매며 살아야겠다, 얘."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서울도 이렇게 작으냐? 서울 깍쟁이라더니! 뭐 마산이나 여기나 그게 그거 같애."

"…."

미자는 말이 없다. 연정이는 자기가 불평을 심하게 했나 싶어 눈치만 살피고 있다. 미자가 가자고 해서 온 곳인데 불평을 듣고는 화가 난 줄 알고 멈칫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미자는 그 때부터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 일요일 미자가 피곤하다고 해서 연정이 혼자 회사 친구들이랑 근처 야산으로 첫 나들이를 하고 와 보니, 미자는 방바닥에 조그만 쪽지만 달랑 남겨 놓고 떠나 버리고 없었다.

'난 가난이 싫어. 찾지 마!'

"아니, 얘가 어디 갔지?"

"경실이 언니, 우리 미자 못 봤어요?"

"미자? 어제 사표 내고 떠났잖아. 너한테는 얘기 안 했니?"

"어제 사표를 냈다고요? 그럼 어디로 갔지?"

"넌 전혀 몰랐구나? 술집에 갔어. 여기서 살기 빠듯하다고 얘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리 빠져 나가. 그러다간 나중엔 다시는 나오지 못할 데까지 가고 말지."

"술집요?"

"찾아가지 마. 너마저 잡혀. 가고 싶다면 몰라도."

연정이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잠바를 걸친 채 방 안에 넋나간 사람처럼 털썩 쭈그리고 앉아서 저녁이 된 줄도 모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연정아, 너 밥 먹으러 안 갈래?"

"정신차려 ‥."

경실이 언니의 위로와 충고도 더 이상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눈물이 한 방울 주르륵 흘러 내리더니 멈출 줄을 몰랐다. 멍한 채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일을 했다. 그리고 방에 돌아오면 텅 빈 가슴을 달랠 길 없어 울기만 했다. 차츰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이 있었다.

'왜 우리는 가난한가? 왜 이렇게 보람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게 사는 것인가? 그래 돈을 벌자. 돈이라도 벌어 우선 이 가난에서 벗어나자!'

연정이는 짐을 쌌다. 그 날부터 연정이는 신길동, 독산동으로 돈을 많이 준다는 소리만 들으면 그리로 옮겼다. 하지만 돈을 많이 주면 노동시간이 길고 어느 곳이나 그게 그거였다. 연정이는 잦은 이직으로 오히려 피곤해져 가는 자신의 생활 환경을 되돌아보며 어디 한 군데서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이럴 바에야 직접 공단으로 들어가자.

'최소한의 조건은 되겠지.'

22살이 되던 해, 연정이는 구로공단 내 전구 제조업체인 우정실업에 정착했다. 공단은 괜찮을 줄 알았지만 그래도 작업환경은 여전히 열악했다. 게다가 납기일에 맞춰야 한다는 강압 속에서 잔업과 철야로 이어지는 장시간 노동에 몸이 남아나지 않는 것 같았다. 연정이는 이 어두운 세상은 어디를 가도 다 이런 곳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을 하고 나니 오히려 그게 나았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내던 연정이에게 옆 라인의 숙연이 언니가 찾아왔다.

"얘, 너 관리실에 가 봐! 이 계장님이 찾아."

"나를?"

무슨 일일까?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연정아, 너 부천에 아는 사람 있니?"

"아뇨. 아, 사촌 오빠 있어요."

"그래? 음 ‥."

"왜요? 무슨 일이 있나요?"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오빠가 많이 아픈가 봐. 인천 인혜병원에 가 봐."

그 때까지 연정이는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은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연정이의 사촌 오빠는 연정이 집안의 장손으로서 언제나 의젓하고 동네에서도 칭찬이 대단한 건실한 청년이었다. 노는 날이면 연정이 사촌들을 들이며 산으로 데리고 다녀 아버지로 인한 어릴 때의 고통을 잊게 해 준 정말 착하고 고마운 오빠였다.

"오빠가 아파요? 이름이 뭔데요? 오빠가 정말 맞아요?"

"조영길이라고 하던데."

"그래요? 인혜병원이 어딘데요? 인혜병원 몇 호실이에요?"

"그냥 가면 알거야. 작은 병원이라고 ‥."

연정이는 오빠가 아플 리가 없는데 하며 의아해 하면서도 이 계장님이 가르쳐 준 대로 인혜병원을 찾았다. 현관에 들어가 안내원에게 물었다.

"입원한 사람 중에 조영길이라는 사람 있어요?"

"조영길?"

입원 환자 명부를 들추다 말고 안내 아저씨는 말했다.

"아, 조영길! 죽었어. 저기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 끝으로 가면 영안실이 있을 거야 거기 가서 찾아봐!"

"죽었다구요?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오빠가 죽었다고요?"

"죽었다니까."

자꾸 우기는 연정이를 바라보며 안내 아저씨는 머뭇머뭇 다시 입원 환자 명부철을 들추기 시작했다. 연정이는 갑자기 이 계장님의 말이 생각났다. 혹시? 단순히 아프다는 사실 때문에 조퇴까지 시키며 보내줄 리가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자마자 영안실로 달려갔다. 영안실은 네 칸 이었다. 없다. '그럼 그렇지 오빠가' 하며 연정이는 안심을 했다. 그러나 마지막 칸을 향하는 연정이의 눈앞에 큰어머니가 서 계셨다.

'정말이었구나! 이럴 수가!'

사인은 B형 간염. 26살의 나이로 과로 속에서 있는 고통 없는 고통을 다 겪으며 마지막까지 울부짖다 간 오빠. 연정이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어간 오빠를 지켜보며 울며 불며 이 세상을 원망했다. 왜 세상은 내게서 모두 빼앗아 가버리지? 하는 원망과 무력감이 연정이를 휘감고 있었다.장례를 마치고 일터에 돌아왔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얘, 연정아!"

"깜짝야!"

"너, 왜 놀라니?"

같은 라인의 노동조합 대의원인 성자가 서 있었다.

"응, 아무것도 아냐."

오빠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연정이는 부정맥이 뛰기 시작했고, 작은 일에도 잘 놀라는 체질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와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공부?"

"응, 우리 몇 명이 모여서 저녁에 공부하고 있는데, 너도 함께 할래? "

"공부해서 뭐해? 그리고 난 대의원도 아니잖아."

"응, 그런 공부가 아니고. 왜 우리가 가난해야 하는지, 왜 억울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공부하는 거야! 네가 관심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왜 가난해야 하는지를 공부한다고? 그런 공부가 어딨어? 돈이 없으니까 가난하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일을 안 해서도 아니고.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을 안 주면 가난한 거야!"

"돈을 안 줘서 가난한 거라고?"

"그래. 마음 있으면 이따가 퇴근하고 올 테니까 그때 같이 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던 연정이는 이렇게 학습모임을 통해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고 노조활동을 계기로 침체를 탈피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성자의 하숙집. 5명의 대의원이 모여 있었고 낯선 얼굴의 30대 남자도 있었다. 방에 빙 둘러 앉아 돌아가면서 인사소개를 하자 연정이는 얼떨결에 이름만 말하고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유인물에 눈길을 두었다. 잠시 후 그 남자는 차분히 말을 시작했다.

"이제까지 노동자들이 억눌리고 가난하게 살아 온 것은 노동자가 일을 안 해서도 아니요. 노동자가 일을 못해서도 아니요. 이 사회구조의 모순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돈으로 노동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동을 사서 번 돈의 반은 자본가가 자기의 돈을 투자한 몫이라고 가지고 나머지 반만을 노동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나라의 자본가들은 우리에게서 반만 빼앗는 게 아니고, 이렇게 저렇게 우리에게 줄 걸 안 주고 착취해서 자기 배만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있는 자본가에 대항하여 싸워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만 가난이 없어지고, 착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단결로 자본가들을 무너뜨리고 노동자들만의 참 세상을 만듭시다. 노동해방!"

"노동해방!"

대의원들의 얼굴에는 비장한 빛이 서렸고, 놀란 토끼눈으로 남자의 말을 듣기만 하던 연정이는 가슴이 떨려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학습토론이라는 걸 했다.

연정이는 겁이 났다. 모임 내내 누가 와서 잡아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몸을 움츠리고 문고리를 바라 보았지만 아무도 들어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성자네 하숙집을 나서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목에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같이 가는 대의원들의 눈초리만 받을 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연정이의 노동조합 일은 그 동안의 절망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연정이는 그간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를 드디어 풀었다고 생각했다. 그 때부터 연정이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당찬 여성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얘, 너 노동조합에 들었니?"

"에이, 거긴 뭐하러 들어. 맨날 조합비만 걷어 가고 찍히기만 하는데!"

"그럼? 넌 그저 언제나 이 고생만 하고 있을래? 빨리 노동자 새 세상을 만들어야지.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누가 떡이라도 준다냐? 싸워서 얻어야지! 우는 아기 젖 주지, 밥 달라는 소리도 안 하는데 누가 밥 차려 주데?"

연정이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삶의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물을 만난 것이다. 이렇게 바쁘게 동료들을 조직하고 현장일에 적극적이던 연정이는 대의원 선거에서 라인 대표 대의원이 되었다. 연정이는 계속 현장 사람들을 조직화 했다. 그리고 풍물을 치며 문선활동을 하면서 집회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해 거들었다. 현장에서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면 주저하지 않고 관리자에게 항의했다. 이렇게 일 년 동안 적극적인 대의원 활동을 하던 연정이는 동료들에게 신임을 얻어 보궐선거를 통해 노조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대단한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던 연정이는 노조의 임원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노조간부들은 방법과 절차상의 이견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임원들이 속한 운동체마다의 노선 싸움으로 조금도 굽힐 줄 몰랐다. 그로 인한 내부 분열은 표면화되었다. 무슨 파가 이렇게 많고, 노선이 이다지도 중요한가? 어처구니 없었다. 노동해방을 위해 뛰자고 모인 사람들이 정작 노동자들의 해방과 복지를 위해서 써야 할 힘을 그렇게 소모하고 있다니 어처구니없었다. 게다가 부위원장으로서 어느 쪽을 편들어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는 처지가 연정이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노조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만이 마음을 짓눌러 괴롭기만 했다.

연정이는 점점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처리할 수 없는 무능력과 현실의 한계에 부닥쳐 깊은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 대의원들과 집행부와의 갈등이 더욱 더 심화될 수록 연정이는 노조임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냐!"

"얘, 너 자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잠 좀 자자. 잠 좀 자!"

연정이는 잠자리에서조차 괴로움에 시달렸다.

그렇게 휘청거리던 어느 날 연정이는 노조 사무장인 숙연이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숙연이 언니는 어느 쪽에도 끼지 않았지만 자신의 역할을 그런대로 잘 해내고 있었다.

"언니! 난 이런 노조가 싫어! 왜 이렇게 힘들지?"

"힘들어도 해야지. 노조원들이 너에게 맡겨 준 일인데."

"이런 상태에서 뭘 어떻게 하란 말야? 맨날 자기들끼리 싸우기만 하는데."

"너, 지쳤구나!"

"언니는 안 지쳐? 언니는 그래도 잘 하더라. 맞서 싸우지 않으면서도 무난히 일을 잘 처리하던데? 언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잘하긴 뭘 잘해? 다 나름대로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하면 격한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어. 사람이 다 다르게 생겼듯이 생각도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 음 ‥."

더 이상 아무 말없이 한참을 그냥 그대로 앉아 있던 언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 혹시 성당에 가 본 적 있니?"

"성당?"

"응,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무슨 아무 종교도 없니?"

"없어. 언닌 어디 다녀?"

"응, 난 성당 다녀. 성당에 가서 기도하고 나눔을 하면 힘이 생겨."

기도란 말은 들었지만 나눔이라는 숙연이 언니의 말에 연정이는 숙연이 언니도 자기가 전에 한 것처럼 무슨 학습모임을 하는 줄 알았다.

"그건 무슨 파야?"

"파라니?"

"학습모임마다 다 파가 있고, 파마다 다 무슨 노선이 있잖아?"

"파? 난 예수님 파야!"

갑자기 활짝 웃는 언니의 우스꽝스러운 대답에 둘이는 웃어 버렸다. 연정이는 참으로 모처럼 만에 웃었다. 내게도 웃음이 있다니. 갑자기 언니가 좋아졌고, 그런 언니가 편했다.

며칠 뒤 연정이는 숙연이 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구로본동 성당을 찾았다. 성당 뜰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시골 집에 돌아온 것 같이 아담한 뜰이 연정이를 반기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정갈한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성당 건물과 한 쪽 끝에 우뚝 서 있는 성모동굴과 연못이 정리 안 된 마당과 평범한 시멘트 2층 건물과 어울려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성당이라는 소리에 어색하면 먼저 빠져 나오리라고 생각했지만 연정이는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고 쉴 수 있었다. 숙연이 언니가 신부님과 회원들에게 연정이를 소개했다.

"신부님, 얘가 연정이에요."

"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연정이는 자기의 이야기를 숙연이 언니가 여기서 했다는 것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가 오기도 전에 자기를 알고 있다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따뜻하게 맞아 주고 오랜 친구처럼 반기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을 대하면서 마치 그리운 마음의 고향에 온 듯한 평온함을 간직할 수 있었고, 이곳이 자기를 위해 준비된 곳이라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곳이야말로 사람 사는 곳처럼 느껴졌다. 정이 있고 나눔이 있는 곳. 아직 이 세상에 사람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그로부터 연정이는 피곤하고 어려울 때마다 성당을 찾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 속에서 생기는 새로운 힘이 연정이의 앞길을 비춰 주는 빛이 되어 주었다. 희미한 빛을 보는 듯한 느낌에 연정이는 가노청 회합을 하면서 노동자 교리를 하기 시작했다. 교리시간에 복되신 예수님께서도 노동을 하셨고, 우리와 같이 물질적으로 심적으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연정이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연정이는 나눔을 통하여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이 무슨 노동운동의 방법론이나 관념론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운동은 젊은 노동자들의 생활 경험에서 출발하여 복음서 안의 정신을 본받아 사는 운동이었다. 자신의 이론을 상대에게 요구하고 고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개인 생활로부터 변화되어 스스로 해방된 사람으로 살아 나아가는 실천운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노동자 운동을 알았을 때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정신은 연정이에게 깊은 감동으로 와 닿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가노청 회합 중 복음나눔이 연정이에게는 가장 유익하고 기쁜 시간이었다. 복음을 묵상하고 나눌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길을 찾는 연정이의 갈증을 식혀 주고 채워 주었다.

차례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


"오늘 대의원들이 얄미워서 혼 났어요."

"왜?"

"글쎄, 얘네들이 상집위 (상임위원 집행위원회) 회합 때는 그렇게 못 잡아 먹어서 난리들이더니, 자기네 풍물 연습하게 지하 강당을 빌려 달라고 살살거리지 뭐야. 이럴 수가 있나 싶고 정말 소름끼쳐 참느라고 혼 났어요."

옆에서 지켜 보고 계시던 신부님이 끼여들었다.

"내 생각엔 지하 강당을 빌려 주고, 안 빌려 주고 결정하는 권리는 숙연이에게 맡겨져 있지만, 빌려주는 기준은 숙연이에게 편한 대의원이냐 꼴사나운 대의원이냐 하는 차이가 아닌 것 같은데."

"왜요? 제가 봐서 옳다고 생각하면 빌려주고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빌려주는 건데요."

"뭐가 옳고, 뭐가 틀린 거지? 노조원들이 노조 강당을 쓰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

"걔네들은 노조를 깰려고 하는데도요?"

"그건 숙연이 입장이 아닌가? 그 대의원들도 자신들이 노조를 깨기 위해 활동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기넨 노조를 다시 살리기 위해 한다고 하겠죠?"

"그런데?"

"무조건 강하게만 나와요. 무조건 강하게 나가자고만 하면 어떡해요? 지금 우리는 노조원도 많이 떨어져 나가고, 교육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해서 있는 조합원들도 의식이 없어서 당장 회사와 맞부딪혀 싸우면 질 게 뻔한데요."

"노선과 방법이 서로 다른 것하고, 한쪽이 틀린 것하고는 어떻게 구분하지?"

"…."

신부님의 집요한 질문은 숙연이의 입을 막아 버렸다.

"독재자들이나 권위에만 차 있는 공직자들 중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이 자기가 짊어져야 할 책임 때문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애. 그걸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면 편애하게 되고 결국은 특혜를 주게 되는 것 아닐까? 누가 청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청하는지 사안을 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누구에게도 공정한 것 아냐? 사무장은 집행부 쪽이나 대의원 쪽이나 다 똑같이 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숙연이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왜 항상 자기 편을 들어 주던 신부님이 이렇게 나오시는가? 숙연이는 이럴 때가 싫었다. 조합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팀회합에서 나눔으로써 숙연이는 힘을 얻기도 했지만 때로는 숙연이를 몹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조합에 대해 접해 보지 않은 신부님이나 팀원은 늘 신앙적인 면에서 얘기를 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판단, 실천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자기 감정을 죽여야 하는지 신부님은 모르시는 것 같았다. 그것이 너무 괴로워 숙연이는 팀회합에 돌아오면서 울어 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 또 당했다. 숙연이는 기숙사로 돌아 오면서 자신 안에서 들끓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울분은 집에 돌아 와 저녁기도를 마칠 때까지 계속 되었다.묵상 중에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던 투사언니의 말이 떠 올랐다. 그리고 숙연이는 자기가 조합 안에서 겪었던 힘든 상황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회원들과 신부님, 특히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겼다.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는 날이 갈수록 혼탁하고 야비해져 갔다. 대의원들은 위원장을 어용으로 몰아 세웠고,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위원장은 그런 대의원들이 회사에서 하루 아침에 쫓겨나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것 같았다. 위원장은 결국 선거에 중립을 지켜야만 할 숙연이에게도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강숙연 씨! 강숙연 씨는 현 집행부의 사무장 아냐? 그런 사무장이 위원장의 재선을 위해 뛰지 않고 중립 운운 하는 게 말이나 돼?"

"위원장님! 저는 위원장님에게 사무장으로 임명은 받았지만, 위원장님과 집행부만을 위한 사무장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사무장에요. 노조원들의 사무장이라구요."

그러나 위원장의 회유와 협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숙연이는 매일 들볶여야 했다.

"강숙연 씨! 중립, 중립 하면서 내 뒤나 캐는 거 아냐? 나도 더 이상의 중립은 용납할 수 없어! 알아서 해!"

"알아서 하다니요?"

"내가 무슨 조치를 취할 테니까, 알아서 해!"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숙연이는 사무장 자리에서 쫓아 낸다는 말로 알아 들었다. 그래서 숙연이는 그렇게 되면 오히려 편한 마음으로 다시 현장에 가서 일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아니었다.

"강숙연씨! 노조 회비하고 노조 수입을 누가 받지?"

"제가 받는데요."

"그럼 누가 장부에 기입하지?"

"제가 다 기입하죠. 보여 드려요?"

"보면 뭐해? 미리 빼먹고 기입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지금 장부를 보면 그걸 확인할 수 있나? 사무장이 받고 사무장이 기록하는데 확인할 방법이나 근거도 없고."

"아니, 위원장님! 그럼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

"아니, 누가 강숙연 씨를 의심한다고 했나? 중립 중립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사무장이 나를 지원 안하면 낙선시키려 하는 것 밖에는 안 되지. 그렇게 계속 나를 낙선시키려고 하면 노조 수입금 횡령 혐의로 고발할 수도 있다는 거지."

위원장은 이 말을 마치고 휙 나가 버렸다. 숙연이는 눈 앞이 캄캄했다. 지금까지 숙연이는 단순히 자신의 거취에 대한 염려 때문에서가 아니라 어떻게 중립을 지켜 나가고 이 혼탁한 선거를 공정하게 운영하기 위해 금속연맹과 공단노조연대회의 실무자와 여러번 상의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이 달랐다. 순간 숙연이의 머리엔 차디찬 구치소의 땅바닥이 떠올랐다. 지난 번 영길산업 위원장이 구속되었을 때 지원차 가서 면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온 몸이 굳어 간다고 말했었다.

숙연이는 섬뜩한 기운에 놀라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떨리는 숙연이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숙연이의 목에 걸려 있던 예수님의 십자가 목걸이였다. 그리고 왕왕 울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마태오 복음의 5장 11절과 12절의 말씀이었다. 숙연이는 이러다 회사마저 쫓겨나고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것이니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숙연이는 무섭고 떨리던 가슴을 간신히 잠 재울 수 있었다.

협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숙연이의 각오는 더 굳어져만 갔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 안에서 발생했다. 숙연이는 자신이 데려 온 연정이가 자신과 다른 입장에 있음을 알았다. 팀원들 모두가 서로의 의견을 중재하고 도와 주려 했지만 일치되지 못했고 급기야는 연정이가 팀회합을 떠나 버렸다. 숙연이는 정말 괴롭고 견디기 어려웠다. 형제를 잃는다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숙연이를 약하게 했다. 그로 인해 숙연이는 선거를 치르는 사무장으로서의 자신의 자세와 행위가 정당하고 바른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또 다시 번민과 회의 속에서 헤매야 했다.

11월 4일. 결국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는 현 위원장의 재선으로 끝났다. 그 동안 숙연이는 조직적으로 서로 해치고 상처만 안겨 주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기회주의자처럼 보여지는 괴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역할을 다 수행해 떳떳하게 현장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숙연이는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듣기에도 거북하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날카로운 질문을 통해 자기를 거듭 바로 서게 했던 회원들의 우정과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숙연이가 그 혼란의 와중에 몸부림칠 때 팀회합을 통해 숙연이는 회원들에게서 따뜻한 만남을 배웠고, 이제는 동료들과의 만남 안에서도 기쁨을 다시 찾았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선물이라고 느껴졌다. 갑자기 숙연이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숙연이가 이번 사건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조합 활동 자체가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고서는 진정한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신뢰와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도.

차례





주님 제가 왔어요


연정이는 숙연이 언니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숙연이 언니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기는 어쩌란 말인가? 숙연이 언니, 자기 하나만 백로같이 맑으면 무엇하나?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라는 현실 앞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 쪽도 저쪽도 아닌 채 남아 있는 모습이 함께 하기에 거북했다. 대의원들은 지나치게 강하고 투쟁 일변도라 안 맞고, 현 위원장은 선명하지 않아서 안 맞는다면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연정이는 그냥 어느 한 쪽의 선택 없는 중립이란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언니가 싫어졌다. 아니 언니가 싫은 것이 아니라 언니를 비난하고 협박하는 대의원들과 위원장 사이에 끼어서 거북하게 느껴지는 그 상황이 싫었다. 숙연이 언니 혼자 그렇게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떨어져 있는 것이 싫었다. 혼란스러웠다. 또다시 평화를 잃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평화를 처음 얻었을 때 한없이 기뻤다. 그러나 평화를 잃은 지금은 전보다 더 평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연정이는 괴로웠다. 하지만 연정이는 그 이유가 언니의 잘못이고, 언니 때문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그 방향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연정이도 자랑할 것이 없었다. 스스로 깨끗하다거나 잘했다고 내세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도 언니가 원치 않는 방법을 쓰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지는 않았지만 동조하고 묵인하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연정이를 더욱 더 괴롭히고 있었다. 또 다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도 함께 할 수가 없었다. 비단 언니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이 팀회합에 참석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연정이는 자신이 괴로운 만큼 변화되어 갔다. 더군다나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를 기점으로 분열이 가속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대의원들의 공격을 점점 받게 된 연정이는 언제부턴가 적이라고 생각했던 자본가보다 대의원들이 더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연정이는 그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판단하며 행동했다. 심지어 해고되는 대의원들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는 통쾌해 하기도 했다. 어느새 연정이는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한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그 뒤로 연정이가 현장에 나타나면 동료들이 연정이의 면전에다 심한 욕설을 퍼붓고 망신을 주었다. 연정이는 점차 수모를 겪는 기회가 많아졌으며 등 뒤의 비아냥거림도 감수하고 다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연정이는 죽고 싶었다. 사람들이 싫었고 만나는 게 두려워졌다. 연정이는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서서히 사람들과 대화를 끊기 시작했다. 혼자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그러면 언제나 까닭없이 눈물이 흘러 내리곤 했다. 낮에는 여럿이 모인 자리를 피해 다녔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미칠 것 같은 고통에 퇴사를 하려 했으나 연정이의 자존심은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연정이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수치스러움에 못 이겨 휴가를 내어 고향으로 내려갔다. 연정이는 동네 앞길 모퉁이의 논두렁에서 아기를 업고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 올리며 시야가 흐려져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스스로 물었다.

"내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나를 잃고 살고 있구나!"

상경한 뒤 연정이는 혼자 성당에 가 주님 앞에 엎드려 복받치는 설움에 엉엉 울었다.

"주님, 제가 왔어요! 이 죄인이, 이 추한 인간이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모순투성이인 제가, 감히 주님 앞에서 도와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전 당신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 어쩌면 좋아요? 이 못난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한참을 울고 있는 연정이에게 십자가 위의 주님은 너무나 평온하고 자애로우신 모습으로 다가 오셨다. 연정이는 진정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연정이는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을 씻고 다시 노동자 교리반에 들어 갔다. 가까스로 교리를 마칠 수 있었고, 그 뒤 92년 12월 19일 벅찬 기쁨의 세례를 받았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 온 연정이는 감격 속에 '주의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지금은 현장을 떠나간 자기가 사랑했던, 자기가 미워했던 동료들에게도 용서를 빌었다.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 연정이는 이런 행복을 자신에게 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직 주님이 누구신지 잘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알지 못했던 주님은 꼭 옛날부터 나와 함께 하셨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나는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기도가 이렇게 위안이 되고 큰 힘이 될 줄이야! 중단했던 가노청 회합도 나의 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다시 시작했으며, 팀원들 역시 애정을 갖고 대해 주어 너무나 고마웠다. 잘못된 조합활동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활 속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으며, 이 소중한 만남을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차례





여긴 자리가 없네


"신부님, 그 동안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무리 전화해도 안 계시대요."

"음, 나? 교구 사제 피정 갔다 왔어. 왜?"

"관악동 본당에서 '가노청은 나가라'고 했대요."

"나가? 나가다니, 어디로 나가?"

"본당 단체로 인정할 수 없대요."

"누가 그래? 거기 지도 신부님 만나 봤어?"

"네. 청년 지도 신부님이 그랬대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신부님 옛날부터 가노청을 잘 아시는 분인데."

"당신도 아신다고 하면서, 안 된다고 그랬대요."

"왜? 이유는 뭐래?"

"본당 신부님이 안 된다고 했대요. 본당 신부님 방침이라고 따라야 한다고 했대요."

"그래. 보좌신부는 본당 신부님 방침을 따라야 하는 거야. 내가 한 번 신부님께 가서 인사드리고 말씀드릴게."

"신부님이 한번 가 보시게요?"

"그래, 내가 한번 가서 인사도 드릴 겸, 말씀드리지 뭐."

"이번 주에 투사들하고 회원들이 그곳 청년 지도 신부님을 만나 뵙기로 했다니까 그 다음에 가세요."

"그래, 알았어. 회원들한테 정중하게 말씀드리라고 해. 괜히 덤비지 말고."

"네, 걱정마세요. 투사들이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에요."

사제 피정을 마치고 본당으로 돌아온 신 신부는 연합회장 연수의 전화를 받고 갑자기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아직 우리 나라에도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 신 신부의 신학생 시절만 해도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용공 단체라고 규정짓고 박해를 했던 일이 많았었다. 그리고 아직 지방에서는 교회 안에서 조차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경원시 하는 풍조도 있었다.

신 신부의 머릿속에는 갑자기 신학생 시절 노동 사목 사제와의 모임에 참석 했을 때의 일이 스치고 지나 갔다. 직장에서 해고된 한 청년이 자기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뒷조사를 받다가 해고되었노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분이 외국 신부님께 그 나라에서도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천주교 신자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박해 받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면서, 그러면 영광이겠다"고 대답해서 모두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근 10년이나 지난 이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 주 관악동 투사들과 지도 신부님과의 면담에서도 결과는 동일했다. 신 신부는 관악동 지도 신부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 신부는 회원들에게 어떤 부담감마저 받은 인상을 주었다. 신 신부는 연합회 지도 신부로서 직접 관악동 본당 신부님을 만나 뵙겠다고 그 신부님에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신 신부가 전화로 관악동 본당 신부님과 면담 약속을 할 때만 해도 그 분은 그 건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를 안 하셨기 때문에, 제대로 잘 말씀드리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오후 4시. 관악동 본당 사제관.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서울교구 남부 노동 사목을 담당하고 있는 신 신부입니다. 이번에 신부님께서 저희 회원들에게 하신 말씀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님은 모른 체하셨다. 신 신부는 어리둥절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신부님께서 회원들에게 하셨다는 말씀에 대해 여쭈었더니, 대답은 같았다. 관악동 성당 교리실 부족으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회합할 장소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 신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신부님이 왜 이러실까?"

자리가 없다니? 주일 저녁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이 회합을 하는 그 시간에는 다른 단체들의 회합이 없어, 빈 교실이 많다는 것은 회원들에게도 들었고 확인도 된 일이지만 수용해 주지 않으셨다.

몇 차례를 반복해서 청했지만 같은 대답이셨다. 표현은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본당 안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이다. 또한 이전해 간 전 지도 신부와의 관계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었다. 신 신부는 맥이 빠졌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 나올 생각도 해 보았지만, 회원들의 우수에 찬 눈망울들이 어른거려서 그럴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는 연로하신 신부님께 젊은 신부로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잠깐 와서 자기 말만 하고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그냥 가버린다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말씀이 나오시기를 기대했다. 한참 후에 그 분은 입을 여셨다.

"난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한국에 들여 온 박성종 신부와 동창인데, 잘 알어. 그렇지만 여긴 맞지가 않어. 그리고 데모나 하고 그러면 성당 꼴이 뭐가 돼나? 아마 박 신부도 죽기 전에 회원들 하고 잘 안 맞아서 떠난 걸로 알고 있는 데‥. 자네도 협박하러 왔나?"

신 신부는 듣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나쁜 아이들이 아닙니다."

그 신부님은 당황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연로한 신부님이시라 그런지 그런 데에 동요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울긴 왜 울어? 노동자들 하고 일할려면 강해야지, 이렇게 약하면 어떡해?"

아무리 더 설명을 하고 청을 드려도, 이해를 해 주시고 수긍을 해 주시는 것 같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기는 자리가 없네!"

"그럼 다음 본당에 가시면 꼭 허락해 주십시오."

"난 여기가 끝이네, 여기서 아마 은퇴하게 될 거야."

그 신부는 신 신부가 철이 없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렇게 못 알아듣나 하고 답답해 하셨겠지만, 신 신부는 희망을 잃어 버릴 수 없었고, 자신의 마음 안에서 그 신부님을 미워하게 될 까 두려워 재삼 드린 청이었다. 신 신부가 돌아서 나오려는 찰나에 그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게."

신 신부도 말씀드렸다.

"예,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신부님도 우리 회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 본당 신부님의 방을 나서면서, 신 신부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갖가지 상념들과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 오면서 신 신부는 갑자기 혼자라는 고독감이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 신부는 그냥 가기에는 너무 괴로워, 성당의 예수님을 뵈러 갔다.

"주님, 이 교회를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이 본당의 주임 신부님도 기억해 주소서!"

얼마가 흘렀을까? 이미 밖은 어두워졌고, 깜깜한 성당 감실 옆의 감실등만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 와 가톨릭 노동 장년회 지도 신부가 본당 주임신부로 있는 삼성산 성당으로 전화를 걸어, 그 본당에서 팀회합을 할 수 있도록 청했다.

무슨 일이든 회원들을 위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신 신부는 교회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희망을 다시 일깨워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서울교구 남부연합회 35주년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신 신부는 교구 주교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기념 미사의 주례를 부탁드렸다. 주교님께서는 미사 중에 회원들에게 평신도 사도직과 현장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중요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씀해 주셨다.

"가톨릭 노동 청년 여러분과 함께 미사 집전을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35주년! 35주년이라는 것이 특별한 숫자의 의미는 아니지만, 그 만큼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나라 땅에서 그리고 노동자들의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그 동안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평신도 사도로서 의연하게 지켜온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가 노동자에게 많은 지원을 해 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적인 노동의 의미와 영성을 이어 오고, 그나마 노동자들이 교회 안에서 발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을 통해서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의 전체 신자 숫자에 비하면 여러분의 숫자는 적지만, 여러분의 존재가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전교를 열심히 했지만, 신자들 자신이 생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복음에 맞게 생활할 수 있도록 적절히 알려 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 중략 -

2,000년대 교회의 사목방침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새로운 복음화 방법을 제시하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담고 사는 우리 주변 부터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복음 선포와 행동을 병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따로 놀았던 교회 신앙 생활과 우리의 사회 생활을 긴밀하게 연결해 보자는 것입니다. 복음성서를 어려운 책으로 보지 말고 오늘 이 생활 속에서 말씀해 주시는 양식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말씀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기초적인 작은 공동체로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은 벌써부터 나름대로 여러분과 같은 노동자 속에서 매일 매일 삶을 연결시키는 일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실천하는, 복음적인 생활 방식을 꾸준히 했고 평신도 사도로서 교회에서 가장 소외받은 가난한 노동자에게 값진 보물을 보여 주고 나누어 주었습니다.

오늘 35주년을 맞이해서 복음의 일꾼인 여러분과 거쳐간 신부님과 선배님께 그런 의미로 진심으로 감사와 지원을 보내 드립니다. 비록 숫자는 적지만 여러분이 하는 일이 정말 예수님의 복음과 가까운 일이라는 긍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기도와 활동을 계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끌려서 순간적인 즐거움에 마음까지 빼앗겨 버리고, 무엇이 정말 값지고, 탐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35주년 행사에 100여명의 규모를 보더라도 알 것입니다. 결국 노동자들은 갈수록 즐거움을 찾는 데 시간과 정열을 빼앗기기만 하고 정작 즐거움은 빼앗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록 여러분의 복음을 향한 투쟁은 값어치 있는 것이고, 더욱 용기를 내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 중략 -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피곤해 하려는 우리들의 마음과 몸을 보십시오. 이러한 상황이 습관처럼 되어 가는 엄청난 세태 속에서 의로운 투쟁을 해 나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투쟁은 마치 겨자씨 한 알처럼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씨앗이 커다란 나무로 자라 시원한 그늘과 풍성한 열매를 제공하는 투쟁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의 젊은 노동자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오늘의 세태에 정면으로 맞서 대결할 때, 젊은 노동자들은 하느님이 그들 안에 마련해 준 자신들의 고귀한 인격과, 하느님이 그들의 영혼 안에 심어 주신 의로운 양심을 지켜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오늘의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도 역할을 끊임 없이 수행해 나가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강복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비록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행사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지 않아 행사장은 썰렁했지만, 교회를 상징하는 주교님께서 오셔서 회원들의 마음을 채워 주셨다. 그리고 회원들의 가슴 속에는 이러한 확신이 다시 한 번 더 깊이 새겨질 수 있었다.

"우리는 진정 이 땅에서 포기할 수 없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교회의 평신도 사도이다."

차례





기다림


각 본당의 정기총회가 끝나고 연합회 정기총회를 마친 회원들은 곧 대림피정 준비로 들어 갔다. 각 본당별로 1년 동안 활동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에 대한 해답을 주님 안에서 풀기 위하여 피정을 준비하는 것이다. 연합회 행사 나눔 시간에 각 본당에서는 주제를 선정해 왔다. 이번 정기총회에서 연합회장으로 뽑힌 한연수 라파엘 형제가 질문을 했다.

"각 본당에서 이번에 있을 대림피정에 대한 주제를 준비해 오셨으리라고 믿습니다. 한 본당씩 발표해 주시죠. 먼저 구로 3동부터 할까요?"

"저희 구로 3동 본당에서는 회원들이 한 해를 반성하자는 의미로 '새롭게 태어나소서' 라는 주제를 정했습니다."

"저희 독산동은 현장에서 회원들이 활동하다가 힘들면 자주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 때도 많은데, 이런 상황은 현재나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연 '예수님은 이러한 사회 안에 왜 오셨는가?' 하는 주제를 통해 다시 한 번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고자 하기 위해 이 주제를 잡았습니다."

"저희 구로본동은 세 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본당에서 정하지 못하고 그냥 세 가지를 다 가져왔습니다. 세 가지 다 발표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첫째는 우리의 삶과 예수님의 탄생이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활 속의 나의 기다림'이란 주제이고, 두 번째는 생활 반성의 연장으로 '나에 대한 부르심'이란 주제입니다. 또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노동자로서 예수님의 가난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현장 속의 마구간'이란 주제를 올렸습니다."

"어휴, 올해는 주제가 너무 많이 올라 와서 무엇을 선정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눠 보기로 하죠.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연수의 말에 각 본당의 회장들과 임원들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하다가 한 명씩 말을 꺼냈다. 먼저 구로본동 회장 숙연이가 말했다.

"다 좋은 것 같아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가 참 힘든 것 같아요. 다 할 수는 없고 커다란 것을 하나 잡아서 주제로 잡고 거기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을 몇 개 골라서 소제로 잡는 것이 좋겠어요."

"그것도 참 좋은 방법이 되겠네요. 내용들이 다 참신하긴 하지만 전년도에 했던 것들과 비슷한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새로운 주제들을 선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내용은 지난 3월 사순 피정에서 다룬 것 같고요. 한 해를 반성하는 것은 성탄 일반회에서 간략하게나마 매년 하는 것 같아요."

연합회 경험이 많은 구로 3동 회장 숙희가 말했다. 그러자 독산동 회장 정아가 말을 이어 받았다.

"저희가 낸 '예수님은 왜 오셨을까?' 라는 주제는 결국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것이니까, 구로 본동에서 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활 속의 나의 기다림' 이란 주제가 좋은 것 같아요."

다른 이들 모두 이견이 없었다. 그래서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활 속의 나의 기다림' 으로 잡고 소 주제로 '현장 속의 마구간' 으로 잡았다. 회원들은 프로그램을 짠 후 장소는 과천에 있는 영보 수녀원으로 정하고, 회비는 연합회 보조 8천원, 개인 부담 8천윈 씩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연합회 공지 사항으로는 오는 11월 13일 가톨릭 노동 청년회 창설자 카르댕 추기경 탄신 100주년과 전태일 열사 추모일을 맞아 11월 수요미사에 기념하기로 했다. 아울러 11월에 돌아가신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전국 지도 신부님이셨던 전 미카엘 신부님을 기념하며 아울러 한국에 최초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설립하신 박성종 신부님과 전 남부 지도신부님 이셨던 이용유 신부님도 기억하기로 했다.

12월 5일 토요일 오후 8시. 과천 영보 수녀원 피정의 집.

늦은 시간에 회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새로 생긴 삼성산 본당의 회원들도 참석했고, 또 그 동안 본당 사정 때문에 연합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대림동, 신정동 회원들도 눈에 띄어 참가 인원 47명으로 단촐했지만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연길이는 현관을 들어서면서 게시판에 걸려 있는 피정 프로그램을 읽어보았다.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서울교구 남부연합회 대림 성탄 피정 프로그램

주제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활 속의 나의 기다림

소제 : 현장 속의 마구간

12월 5일 토요일

20:00 - 20:30 접수

20:30 - 21:00 취지 및 인사 소개

21:00 - 21:30 슬라이드 상영 및 묵상

21:30 - 22:00 묵상 및 묵주 기도

22:00 취침

12월 6일 주일

07:00 - 07:30 기상

07:30 - 08:00 기도 및 묵상

08:00 - 09:00 아침 식사

09:00 - 10:00 강의

10:00 - 11:00 묵상 (산책 가능)

11:00 - 12:30 분과 토의 1

12:30 - 13:30 점심 식사

13:30 - 15:00 분과 토의 2

15:00 - 15:30 분과 발표

15:30 - 16:30 휴식과 고해성사

- 부르심에 대한 응답 편지 쓰기

16:30 - 17:30 미사 (편지 봉헌)

17:30 - 18:00 정리

18:00 - 19:00 저녁 식사

19:00 다시 현장으로

"안녕하십니까? 이 곳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번 대림 피정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활 속의 나의 기다림' 입니다. 또 소 주제는 '현장 속의 마구간' 입니다. 이번 주제와 소제는 예수님의 탄생이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의미로 정했습니다. 특별히 가난하게 태어나신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우리가 처해 있는 가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활해야 할지도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연합회장의 취지 설명과 인사 소개를 마치고 저녁을 못 먹고 온 회원들을 위해 준비한 빵과 우유를 먹었다. 그리고 다 함께 강의실에 모여 존 포웰 신부님의 "왜 나를 말하기를 두려워 하는가?" 라는 주제로 구성한 슬라이드를 보고 묵상에 들어갔다. 잠시 후 묵주기도를 바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연합회 임원들은 모여서 분과에 들어 갈 회원들의 명단을 준비했다.

다음 날 아침. 이번에 새롭게 연합회 서기를 맡은 연길이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기도 자료를 찾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상 아침 잠이 많던 영숙이도 회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벌떡 일어나 연길이와 함께 성당에 들어가 온풍기를 틀고 묵상용 음악이 나올 수 있도록 녹음기를 맞춰 놓았다. 아침 기도를 마치고 식사를 한 후 기다림이란 주제로 강의를 들었다.

"어떤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집을 나가시자,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이 커서 장가를 가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당연한 일을 바라고 있는데도 하느님은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것입니까?' 이 사람의 기도는 누가 봐도 뭐랄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희망과 연관지어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진짜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현실에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헛된 것 같지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며, 약속에 충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 때가 안 된 것뿐입니다. 희망! 그것은 현실속에서 없는 것 같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담한 현실, 그것이 오히려 참 희망입니다. 때가 되어야, 무르익어야 과일이 열립니다. 우리는 씨를 심고, 물을 주고, 땅을 밟아 주지만, 새싹이 나오기 바로 전 까지는 씨가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떡잎이 나올 때 희망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떡잎이 나올 때처럼 내 희망, 내 꿈이 하느님의 뜻에 진정 합당한 것이라면 이루어질 때까지 기간이 걸립니다. 이것이 참 희망이랄 수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빨리 오시지 않자, 자신들이 다윗을 왕으로 세워 놓고 커다란 나라를 만들어서는 희망이 이루어졌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외적의 침략을 받아야 했고, 또 한편 국내의 정권 다툼으로 급기야는 나라가 반으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은 희망이 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차츰 사람들은 자신들의 희망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왕국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희망은 신약에서나 오늘 우리의 삶에서나 비슷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면서도 현실에서 잘 먹고 편하게 사는 것을 바랍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의 생활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변화 되길래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나 혼자만의 노력이나 변화로는 잘 안 되니까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가 속시원이 살 수 있도록 확 바꿔 주십시오 라는 식의 바램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임하셔서 나의 주인으로서 나를 복음적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설레임 속에서. 그리고 한편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변화할 때 버려야 하는 나와 나의 시공 안의 것들, 그리고 다시는 누리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는 현세의 위안과, 인간적인 보호와, 편함에 대한 미련, 내가 변화되었을 때 닥쳐올 사회와 이웃으로부터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감정이 우리 안에 교차되면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 "

연수는 오늘따라 졸지 않았다. 우리 노동자들에겐 이렇게 실생활과 연관시켜 강의를 해 주시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어려운 신학 교리 같은 강의는 알아 듣지도 못하고 어렵기만 하기 때문이다.

"… 여러분들은 이번 피정의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활 속의 기다림으로 잡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한 시간 동안 주님과 여러분 자신의 관계에 대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당에 앉아서 하는 것이 가장 좋고요. 익숙하지 않으신 분이나 피곤하고 졸린분은 산책을 하면서 생각하셔도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묵상과 나눔을 위해 몇가지 설문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살아가면서 주님의 말씀을 목말라하며 찾아 왔는가? 둘째, 우리는 왜 주님을 기다려 왔는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주님께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그리고 아까 강의에서 말했듯이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어떻게 미리 앞당겨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차례





활동의 원천이요 양식이신 주님


연길이는 성당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쏟아지는 졸음을 못이기고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면서 생각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낯설은 질문이군. 내가 생활하면서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지금 내가 살면서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런데 이 질문들에 대해 명료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것, 저것 끄집어 내려고 고심을 했지만 뚜렷한 흔적이 자신에겐 없었다. 자신을 돌이켜볼 때 자기 자신은 복음을 실천하는 평신도 사도로서 이렇다할 힘이 없었다. 연길이는 자신이 정말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리고 자신은 이기적이며, 오히려 인스턴트 문화 속에서 시류를 따라 휩쓸리고 있는 가랑잎과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다시 생각했다.

"그러면 만일 주께서 내게 오시면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

지금 연길이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들어와 조금씩 변화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커다란 변화는 아니지만 동료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하나의 변화라면 변화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까지 자기 자신의 판단이 서서 걸어갈 수 있게끔 해준 것도 팀회합이 자기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팀회합은 생활하는데 청량제 역할을 했으며, 연길이는 지금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데 팀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회합 때 생활 나눔을 하기가 힘들지만 하고 나면 언제나 새로운 힘이 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도대체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팀회합이 어떻게 힘을 줄 수 있는가? 팀회합이 친구들과 만나 서로 관심을 가지고 신경 써 말해주는 것과 어떻게 틀리는가? 오히려 친구들은 자기가 무슨 일이 생기면 발 벗고 나서는 데도 잘 안 풀릴 때가 많은데, 팀원들은 자신의 일을 대신 해 주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팀회합에서 들어 줄 뿐인데도 팀회합을 하고 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기고, 어떻게 문제가 잘 풀려나갈 수 있는가? 오히려 친구들과 함께 할 때보다 문제가 더 가볍게 느껴지고, 잘 풀려나가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회합방식의 문제인가? 토론 방법의 문제란 말인가? 그것도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친구들과는 깊이 못 들어가고 겉도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런데 우정만으로는 할 수 없는 평신도 사도로서의 사명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과연 무엇이 회원들을 사도로 만드는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일도 해결하기 힘든 판에 남의 일까지 걱정해가며 활동할 수 있을까? 그런 사명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연길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쉽사리 그 이유에 대해 파악할 수 없었다. 연길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분과 토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연길이는 3분과에 배정되어 있었다. 3분과에는 연길이와 구로본동의 이영희 도미니카와 정희경 데레사, 독산동의 주순미 안나 그리고 삼성산의 주수경 마리안나가 배정되어 총 5명이었다. 인사 소개를 짧게 마치고 순미가 사회를 보기로 했다.

"어떻게 어젯밤 잘 주무셨구요? 오늘 강의는 무료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오랜만에 신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니까, 예전에 수련회가서 지도 신부님으로 처음 오셔서 하신 강의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그 땐 아주 어려웠는데요. 묵상들은 잘 하셨어요? 저는 공교롭게도 어제 잔업까지 하고 와서 아침에 성당에 들어가 앉아서 졸기만 하다가 나왔어요. 묵상 많이 하신 분이 먼저 하시면 좋겠어요. 누가 먼저 하시겠어요?"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자 연길이가 말문을 열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졸다가 나와 산책을 하면서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저는 주님을 그렇게 필요로 하고 산 것 같지는 않아요. 언제나 제가 살면서 저는 혼자이다시피 살았으니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아까 산책을 하면서 생각해 봤는데, 저는 가노청 팀회합을 통해서 커다란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팀회합이 양식이자 비타민인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늦게 시작한 것이 후회가 돼요.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먼저 시작해서 참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연길이가 말을 마치자 새로 생긴 삼성산의 키 작은 꿈나무 팀의 수경이가 질문을 했다.

"연길 씨는 어떻게 팀회합이 힘이 되어요?"

이 말에 연길이는 속으로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아니, 얘가?' 그렇지만 투사 체면에 자기 본당 팀원이 묻는 데 그냥 얼렁 뚱땅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말 저말 주어 삼키며 대답을 했다.

"팀회합 할 때 왜 있잖아. 관찰, 판단, 실천 3단계 말야. 그 3단계가 힘을 주는 거지. 그리스도의 눈으로 사건이나 상황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결정하는 판단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실천 약속을 하고 나면, 그 왜 있지 뿌듯한 감, 그리고 또 활동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도와 주시지."

연길이는 대답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말에 놀라고 있었다. 그렇지, 주님이 계시지!

"연길이 형제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을 만나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하루를 반성하고 주님께 도움을 청했어요. 그런데 가노청에 들어 오고 난 뒤에는 나눔을 통해 힘을 얻게 되고 새삼 사도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마 그것은 성체조배를 통해 주님께 내 자신의 문제들을 맡기고 나니까 팀회합 때 나눔을 통해 다른 이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기도를 게을리할 땐, 팀회합을 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보다는 제 자신의 문제를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고 그 문제를 회원들이 들어주기를 더 바라게 돼요.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기도를 먼저 해야만 다른 이들에게 사도처럼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 같아요. 기도를 많이 해야겠어요. 기도를 하면서 나아갈 길을 청하면 팀회합에서도 힘이 생길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만날 때면 그 친구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요."

영희의 발표를 듣는 순간 연길이는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까 얼버무리며 대답하고 나서 느꼈던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주님의 힘이구나.'

이제서야 연길이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그랬다.

'팀회합을 제 2의 고백소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 맞아! 팀회합은 주님을 모시는 기도의 연장이구나! 그렇지!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게 되는 거구나!'

순미도 자신의 묵상을 발표하며 거들었다.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아까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깨우잖아요. 그래서 정신을 차려 보니 분과 나눔을 할 시간이래요. 그런데 몇 시간을 잔 것 같고, 정말 주님 안에서 쉬니까 푹 자는 것 같아요."

순미는 이 이야기를 하다가 쑥스러운지 웃었고, 다른 회원들도 모두 그렇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고개를 끄떡였다.

"가끔 팀회합이 안 될 때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모를 때, 퇴근하고 성당에 가서 기도하게 돼요. 그렇다고 주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하라고 방법을 즉시 말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리고 가면 일이 잘 풀릴 때가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주님을 만난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기도하면서 편안해지고 제 마음이 따뜻해질 때가 있어요. 아마 그 때 주님을 만나는 것 같아요. 또 아마 그걸 가리켜 주님께서 위로를 주신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만나고 나면 순간이나마 주님과 일치하게 되나봐요. 그렇게 일치하고 나면 일이 무난하게 잘 풀리는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이건, 주님께서 직접 하신다'하는 기분이 들어요. 저는 그 때 비로소 주님의 도구가 되고 주님께서 저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어, 이건 한 수 더 뜨네!'

연길이는 순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피했지만 정리가 되었다. 같이 삼성산의 키 작은 꿈나무 팀의 투사로 활동하면서 팀을 지도할 때마다 잘한다 싶었는데 그게 주님의 도우심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주님께 창피하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왜 순미에게만 힘을 주나 하는 질투도 생겼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연길이의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네가 안 찾으니까, 그렇지!'

스스로의 머리 속에서 나온 말에 연길이는 뜨끔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도 기도하면서 주님을 찾고, 주님께서 자기 안에 오시기를 희망하며 기다리면 오시리라는 위안을 받고 있었다. 끝마무리를 할 단계가 되었다. 순미가 나머지 두 명의 회원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주님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은 말을 한 것 같애요. 혹시 생활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느꼈다거나 아까 신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미리 앞당겨 사는 경우에 대해 묵상하신 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누가 먼저 하실래요? 우리 수경이가 할까? 희경씨가 하실래요?"

희경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성서 말씀은 아닌데요. 한번은 언니에게 화가 나서 막 퍼부었는데, 같이 사는 형부가 곁에 있다가 '왜 언니에게 화내냐?' 하는 눈으로 놀라서 바라보고 있어서 더 화를 낼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나, 잘래.' 하고 방에 들어가 맘을 달랬지요. 그리고 나서 다시 나와선 형부에게 가서 '형부! 오늘 좋은 일 있었어요?' 하고 말하게 되더라구요. 눈칫밥 먹고 사는 셈이니까요. 또 어떤 때 동생들이 집에 놀러 오면 형부가 굉장히 잘해 줘요. 그럼 옆에서 '난 뭐야?' 하는 샘도 나지요, 또 그렇다고 따지면, 꼭 루가 복음에서 집 나갔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준다고 화가 난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넌 늘 나와 함께 살지 않니?' 하는 말씀이 떠올라요. 결혼한 언니하고 같이 살다 보니까 재미있어요. 그리고 그 동안 막연했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어요. 그냥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그려 왔던 것하고는 다른 것 같아요. 아마 이런 것이 미리 앞당겨 사는 것이 아닌가 해요"

"저는 길에서 자주 싸우게 돼요. 지난 번에도 주차위반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막 화를 내며 욕을 해 대는 거예요. 저는 그 때 '아무데나 차 대 놓고 다니는 주제에 차는 왜 가지고 다녀.' 하고 쏴 붙이려다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꾹 참았어요. '옳은 일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구절을 생각하고 처음엔 그냥 참고 말았는데 두고 두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이예요. 그런데 집에 와서 씻고 밥 먹고 쉴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오시더니 성당에서 가정기도를 하라고 했다고 하시면서 기도하자는 거예요. 어머니가 그러시니까,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끌려나간다는 기분으로 '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되겠지.' 하고 따라 나갔어요. 기분이 상한 상태라 기도하는 것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가 밥상을 가운데 놓고 둥그렇게 앉았는데, 밥상 위에 놓인 십자가가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듯 자리하고 있었어요. 계속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냥 건성으로 주의 기도를 외우다가 갑자기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저를 보고 웃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내가 피로해서 그러나 하고는 눈을 씻고 다시 보았는데 정말 계속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계신 거예요. 그 때처럼 기도를 오래 해 보고 싶었던 때는 없었어요. 낮에 화난 것은 아예 없어져 버리고 왜 그렇게 좋은지 꼭 날아갈 것만 같았어요."

회원들이 이렇게 분과 발표를 마치자 지도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요. 여러분들이 참 잘 지적하셨어요. 팀회합을 할 때 우리는 주님을 초대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팀회합에 함께 해주십니다. 팀회합이 우리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팀회합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팀회합을 할 때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루가 복음 24장 13절에서 35절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주님이 자신들과 함께 걸어가 주고 그들의 말을 하루 온 종일 들어 주시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할 때 마땅히 그래야만 했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자신들이 한껏 기대를 품었던 주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고통스러운 문제에 대해서만 몰두할 줄 알았지,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리라는 것 즉,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거나 몰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곁에 계셨지만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서는 제자들의 이런 상황을 가리켜 '눈이 멀었다' 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팀회합에서 주님께 자신들의 고민과 걱정들과 문제들을 말씀드리고 상대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제자들처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 문제에 몰두하여, '왜 이게 잘 해결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자기 마음 속에 자신을 가두어 놓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바라볼 여유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나눔의 이치입니다. 나눔의 이치는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요구를 전하는 것을 넘어, 주님께 또 주님께서 보내 주신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함께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이치로 주님께 자신의 일들을 먼저 말씀드려 주님의 뜻을 찾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평신도 사도입니다. 우리가 사는 직장과 가정과 동네라는 세상에서 주님의 사도로서 일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도로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 사상적인 논리나 경제적인 원칙이나 인간적인 체면 등 주님의 뜻과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도 무조건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장 손을 떼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도입니다. 우리는 평신도 사도로서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가정과 직장과 동료들 사이에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도로서 일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이 담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고 또 함께 그 일을 주님이 걸어가신 그 방식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설령 주님의 방식이 세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우리 역시 확신이 서지 않을 때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는 것을!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하느님의 뜻이 어리석어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사람들보다 하느님이 올바르시고 강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한계라고 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주님이 걸어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주님을 향해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팀회합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일 때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여러분이 원하는 그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주님께서 나와 우리의 팀회합에 함께 하시길 청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흐뭇하게 자리잡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뵈옵는 기쁜 성탄이 되시길 빕니다."

차례





성탄 일반회


대림 성탄 피정을 마치고 회원들은 어떻게 하면 성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각 팀별로 나눈 의견을 본당 별로 모아 연합회에 올렸다. 연합회에서는 회원들이 모은 의견을 집계하여 나누기로 했다.

"나눔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금까지 각 본당 별로 들어온 의견들을 발표 하겠습니다. 도림동에서는 고아원을 방문하여 어린이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올라왔고, 독산동에서는 기술 훈련원을 방문하여 훈련생들과 함께 보내자는 의견이 올라왔고, 구로본동에서는 성탄을 혼자서 외롭게 맞이해야 하는 동료들을 초대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경축하자는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구로 3동과 신정동에서는 본당 내 청년 단체 모임에 함께 하여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알리는 기회로 삼자는 의견이 올라왔고, 삼성산에서는 양로원을 방문하여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는 노인들과 함께 하자는 의견이 올라 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의견이 들어와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함께 나누기로 하죠."

연합회 여회장 영숙이가 설명을 하고 나자, 독산동 회장 정아가 말을 꺼냈다.

"우선 들어온 의견들을 비슷한 것끼리 모아서 합쳐 보기로 하죠."

남회장 연수가 대답했다.

"그렇게 할까요? 그러면 고아원과 양로원, 기술훈련원 방문을 한 데로 잡고, 본당 내 가톨릭 노동 청년회 소개를 위한 청년 연합회 성탄행사 참가를 하나로 잡고, 직장 내 외로운 동료 노동자들을 초대하는 성탄 일반회를 개최하자는 의견을 하나로 잡아 셋으로 나눌까요? 이렇게 나누는 것에 대해 이견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죠."

그러자 독산동 정아가 이견을 제시했다.

"고아원과 양로원 방문은 성격이 같은데, 기술훈련원 방문은 좀 성격이 다른 것 같아요. 고아원과 양로원 방문은 자선 차원에서 본당에서도 특별히 사회복지 분과를 통해 각 단체들이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자선차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기도 하고 우리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성격과 좀 떨어지는 것 같애요. 남들이 전혀 안 간다면 우리라도 가야겠지만요. 그런데 기술훈련원 방문은 가는 사람도 거의 보지 못했고, 어쩌면 우리들이 같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차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이어서 구로 3동 회장 숙희가 말했다.

"그것도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본당은 매년 연합회 차원에서 성탄 일반회를 개최하다 보니까 본당 내에서 불만이 많아요.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매번 본당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고요."

독산동에서 온 서기 영철이가 반박했다.

"저희도 본당에서 매년 청년 연합회 주최로 성탄행사를 하는 데요. 거기에 동료들을 데려가면 어색해요. 모두 신자들인데다가 데려온 친구들이 일반인이면 끼기도 좀 어려운 것 같애요. 그렇다고 본당 단체원들이 단체원들 끼리도 서로 잘 모르는데 처음 데려 온 친구들과 인사하는 정도이지 깊이 반기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잘 아는 사람들하고 보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소외감만 더 주는 것 같은 부담도 있어요. 게다가 잠깐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버리거나 단체별로 놀러 가기 때문에 우리는 끝나면 각자 집으로 데려 갈 수도 없고, 누구네 집에 모이자니 우리들이 다 들어갈 만한 집도 없고 참 애매했어요."

구로본동 회장 숙연이가 말했다.

"그런데 그럼, 독산동에서 기술훈련원에 가자는 의견은 어떻게 된 거예요? 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한 번도 참여하거나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 온 데가 없는데 양 쪽 다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같이 행사를 치르기엔 더 부담이 되잖아요? 게다가 성탄 때면 다 방학 중이고, 혹시 있다면 남부에선 여기 돈 보스꼬 센터 기술훈련원이 천주교 재단이니까 성탄 행사를 할 수 있을 텐데요."

센터 기술 훈련원 출신 희동이가 말했다.

"거긴 거기대로 자체 행사를 매년 하고 있어요. 성탄 밤 미사 후에 매년 전체 모임을 갖고 방마다 밤새 놀다가 새벽에 집으로 돌아 가요. 그때부터 방학이 시작되거든요."

신정동 투사 정렬이가 물었다.

"행사를 함께 하려면 미리 의견을 묻고 같이 준비해야 하는데, 이제 말하기엔 좀 늦은 것 같아요. 벌써 십이 월 중순인데. 독산동에서 여기 돈 보스꼬 센터에 미리 알아보기는 했습니까?"

"아직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서 결정이 나면 물어 보려고 했어요."

이어 구로본동 회장 숙연이가 말했다.

"차라리 그런 생각이 있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서 내년 초부터 자주 방문도 하고 관계를 가진 다음에 내년도에 실시했으면 좋겠어요. 게다가 이번에는 신정동 회원들이나 삼성산의 새 팀원들에게 우리 행사를 알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먼 데 있는 사람들을 방문하거나 관계를 갖는다는 것도 좋지만, 계속 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고 한번 하고 말면 일회적으로 끝나 버리고 비효과적인 것 같아요."

구로본동 남회장 정복이가 거들었다.

"매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도 훈련원 출신이라 잘 아는데요, 돈 보스꼬 훈련원 같은 데는 신부님과 수사님들, 선생님들과 자기들끼리 잘 놀아요. 그런데 현장 내에서 남들은 다 성탄이다 뭐다 해서 기쁘게 노는데 성탄을 홀로 보내야 하는 동료들을 데리고 함께 하는 것이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활동다운 활동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몇 명이서 끼리끼리 모여 술이나 먹고 그냥 축제 기분에 논다고 밤길을 헤매게 두는 것보다는 우리가 초대해서 함께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벌써 각 본당별로 데려올 사람들을 물색 중일 텐데. 지금와서 새로운 것을 찾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연합회에서 내년도 사업계획을 잡을 때 고려해서 새로운 것이 필요하면 그 때 결정해서 다음 해에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연합회장 영숙이가 물었다.

"도림동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의견을 개진하게 되면 의견을 낸 쪽에서 주도적으로 뛰어야 되는데, 저희는 지금 회원이 얼마 안 돼서 행사를 추진할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연합회에서 결정하는대로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도림동 회계 미야의 의견이었다. 그때 남회장 연수가 말했다.

"의견을 냈다고 해서 꼭 그 본당이 다 떠 맡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수그러 드실 필요는 없는 것 같애요. 어차피 다 역할을 분담해서 할 건 데요 뭘. 더 하실 이야기가 없으면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결정하는 게 무리가 없겠어요."

여회장 영숙이가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 고아원이나 양로원 방문에 정 뜻이 있으신 분들은 꼭 성탄 밤에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니까 다른 본당 단체와 함께 개별적이나 본당 별로 참여하기로 하죠. 그렇게 하고요. 그리고 본당 청년들과의 화합 문제는 사전에 잘 이해를 시키고 잠깐 참석해서 인사 정도로 마치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기술훈련원 방문 문제는 저희 연합회에서 사전에 돈 보스꼬 훈련원 측에 미리 가능한지를 알아 보고 이 달 말에 있을 내년도 사업계획 수립 때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올해는 준비 관계도 있고 어려울 것 같아요. 그러면 올해도 예년과 같이 특별히 오갈 데 없는 동료들과 함께 성탄 일반회를 개최하기로 하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있으시거나 이견이 있으시면 이야기하시죠."

그리고 나서 한 본당씩 의견을 물어보니 다 동의하였다.

"그러면 장소는 어디로 잡으면 좋을까요? 혹시 사전에 알아본 데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각 본당 임원들은 특별히 자기 본당 외에는 알아본 본당이 없었다. 그래서 연합회장 연수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 시흥 본당에, 전에 종로에 있는 서울교구 노동사목회관장님이셨던 정 진 신부님이 부임해 오셔서, 저희 보고 거기에도 가노청을 한 팀 신설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으셨는데요. 이번 기회에 가서 붐도 일으킬 겸 거기서 했으면 좋겠어요."

"회장님이 미리 알아 보셨나요?"

"이번 건을 직접적으로 알아 보지는 못했지만, 일전에 정진 신부님과 말씀을 나눌 적에 시흥에서 연합회 행사를 한 번 했으면 하시는 의향을 비추신 적이 있으셨어요. 제가 한 번 더 자세히 알아보고요. 만일 어려우면 각 본당에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고요. 정 안 되면 지도 신부님이 계신 구로본동에서 하기로 하죠!"

연수가 지도 신부님이란 단어에 액센트를 써가며 익살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모두 다 웃었다. 이어서 주제는 독산동 본당에서 올라 온 '예수님, 당신은 왜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야만 했습니까?' 로 잡았고, 프로그램을 짰다. 그리고 회비는 회원들에게 동료 노동자를 데려오는 데 부담이 없는 액수로 1천원을 잡았고, 시흥에서 가까운 독산동 가노청에서 지난 본당 청년 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탄 연극을 하기로 하고, 또 라면과 시큼한 (?) 떡으로 야식을 구로본동과 함께 준비하기로 했고, 삼성산에서 벽장식을, 신정동에서 다과를, 구로 3동에서 오락 진행을 맡았고, 연합회에서 진행과 접수를 보기로 했다. 도림동에서는 본당 인원 관계로 그냥 참여해서 각 본당의 일손을 도와주기로 했다.

12월 25일 새벽 1시 30분. 천주교 시흥 교회 지하 교리실.

정면 벽에는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서울 교구 남부 연합회' 라는 글자와 주제인 '예수님, 당신은 왜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야만 했습니까?' 라는 글자가 크고 반짝이는 색지로 걸려 있었고, 한 쪽 옆에는 당일 프로그램이 붙여 있었다. 그리고 양 쪽 벽에는 색종이와 반짝이는 색실로 성탄의 기쁨을 표현했고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도 수수하게 장식해 놓아 들어오는 이들에게 축제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했다.


성탄 일반회 프로그램 안내

주제 : 예수님, 당신은 왜 가난한 노동자로 태어나야만

했습니까?

장소 : 천주교 시흥 교회 지하 교리실

12월 25일 금요일 예수 아기 나신 날 새벽

01;30 - 02:00 접수

02:00 - 02:30 인사 소개 및 취지 설명

02:30 - 03:30 오락 및 야식

03:30 - 05:00 본당 별 장기 자랑 및 포크댄스

05:00 - 05:30 연극

05:30 - 06:00 촛불 예식 및 폐회

06:00 정리 및 귀가

성탄 당일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성탄 일반회를 찾은 회원들은 굉장히 기뻐했다. 왜냐하면 예년 보다 훨씬 많은 일반인들이 참여해 행사의 의의를 더해 주었고, 개최 본당인 시흥에서도 처음으로 3명의 일반인들이 주보 공지와 게시판에 붙인 홍보물을 보고 찾아왔으며, 선배들과 지방 교구 회장단들도 대거 참석해 총 90여 명의 인원이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렸기 때문이다.

일반인들도 예년에 비해 자신들도 참여할 수 있는 오락 프로그램이 진지하고 성실해 좋은 시간을 가졌다는 평과 함께 연극 연출이 낯설지 않은 주제여서 피부에 와 닿았으며, 촛불예식 때 피로를 씻어 주는 듯한 깊은 침묵 안에서 구세주의 탄생에 대해 친근감을 갖도록 해 준 데에 대해 자신들을 데려 온 회원들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는 좋은 평가가 나와 일반인들은 물론 회원들도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차례





제 3 부 복 음 의 투 사 들

사도의 첫 걸음

활동의 열매

고난의 현장에서

나눔의 광장

젊음 노동 신앙 1. 연합회

젊음 노동 신앙 2. 본당과 팀

젊음 노동 신앙 3. 하기 수련회

새 신부와 투사 선서

복음을 살며

양성하며 양성되며

자기를 이기는 용기

평신도 사도직

사랑의 힘

사랑하는 회원들에게







사도의 첫 걸음


연수는 오늘 일이 유난히 지루하다고 느꼈다. 항상 일을 시작하면 콧노래가 나오고, 도배지를 잡은 손과 마음이 마치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을 받은 듯 설레였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설레이던 흥분마저 생겨나지 않고, 날카로운 도배지에 손마저 베었다.

"아! 어우! 피가 나잖아!"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촌 명중이가 놀래서 휴지를 들고 들어와, 피가 나는 손에 지혈을 해 주며 연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우스개 소리를 했다.

"아니, 얘 봐! 야, 너 도배 처음 하는 사람처럼 왜 그래?"

"글쎄, 오늘 뭔가 잘 안 풀리는데. 에이, 오늘 일 안 나오려다가 나오니까 이 꼴이구먼."

연수는 기분이 팍 상했다. 나올까 말까 하고 망설이던 일을, 사람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나와, 추운 겨울에 손까지 베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아니고, 어젯 밤 늦게까지 일하러 나오라는 전화가 안 오길래, 오늘 동생 연식이 졸업식에 가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침 일찍 전화가 왔잖아. 그래서 나올까 말까하고 고민하다가 내가 고민하는 것을 본 연식이가 괜찮다고 해서 나왔는데, 일이 손에 잘 안 잡히네."

"야, 걱정 마라. 요새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기 바빠서, 어디 옛날처럼 집에서 누가 오면 만나 줄 시간이나 있는 줄 아니?"

"그래도 연식이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국민학교 때부터 엄마 밖에 못 갔어. 그래서 이번 고등학교 졸업식엔, 내가 큰 맘 먹고 가서 아버지처럼 축하도 해 주고 저녁도 사 주려고 했었단 말야. 지난 번 중학교 졸업식에도 일 때문에 못 갔었는데, 연식이한테 미안해!"

"야, 걱정 하지마! 연식이는 그런 일로 외로움 탈 아이도 아냐. 지난번에 보니까 신나게 잘만 놀더라."

그날따라 일도 늦게 끝났다. 그런데다 집주인이 일 다 끝나니까 나타나서는, 노임을 깍으려고 여기 저기 시비를 거는 통에 서로 언성을 높였다. 또 그 때문에 연수와 명중이에게 도급을 주었던 지물포 사장마저 와야 했고, 지물포 사장은 보기에도 다 잘 된 도배를 갖고 집주인이 트집을 잡는다며 화를 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지물포 사장은 기분이나 풀고 들어 가라고 집에 가야한다는 연수를 억지로 붙잡았다. 연수는 실랑이를 하다가 모처럼 만에 베푸는 사장님의 선심을 계속 거절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밥은 집에 가서 동생과 같이 하겠다는 생각으로 간단하게 생맥주를 약간 마신 뒤 닭튀김만 집어 먹고 나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둘째 여동생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다 모여 있을 줄 알았던 연수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연미야, 어머니랑 다 어디 갔니?"

"글쎄, 오빠. 놀라지 마!"

놀라지 말라는 연미의 말에 연수는 더욱 긴장을 했다.

"무슨 일이 생겼어?"

"연식이가 친구들하고 파출소에 잡혀 있대."

"뭐, 파출소에? 파술소엔 왜?"

순간적으로 연수는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연식이의 졸업식에 가 주었어야 하는데, 못 가서 실망한 연식이가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싶어 연미가 일러 준 신림동 파출소로 달려갔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 보니 어머니가 연수를 맞았다. 거기엔 어머니 말고도 몇 분의 아주머니들이 더 계셨다.

"연수야, 여기다! 지금 오니?"

"예, 어머니.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응, 연식이가 졸업 기분에 술 먹고, 패싸움을 했대."

"패싸움요?"

너무나 의외였다. 연식이가 패싸움을 했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뭐가 잘못된 것이겠거니 하고 연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동생은 무척 착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연식이는 지금 어디 있어요?"

"응, 보호실에 있어."

"뭐, 잘못된 거 아녜요? 연식이가 패싸움을 하다니요?"

"글쎄 사건 경위는 조사가 끝나봐야 자세히 알겠지만, 친구들끼리 술 먹고 나오다가 다른 애들이 옆에서 시비를 거는 통에 싸웠나 봐! 몇 명은 도망쳤는데, 연식이하고 그 사과가게 하는 집 아들, 게 이름이 뭐더라?"

"정근이요?"

"응 그래. 정근이. 그리고 또 같은 반 친구라던데 누군지 몰라도 두 명이 더 있어. 나머지 세 명은 도망쳤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연수를 바라 본 경찰이 한 아이를 취조하다 말고 연수를 불렀다.

"이리 좀 와 보세요."

"예, 저요?"

"네."

"피의자하고 어떤 관계에요?"

어떻게 조서가 꾸며졌는지 연식이는 피해자가 아니라 이미 피의자가 돼 있었다.

"피의자요?"

"예, 술병으로 사람을 찔렀어요."

"누가요? 연식이가요?"

"아? 연식이요? 연식이가 직접 술병을 든 건 아니고… 연식이는 자기 말로는 친구가 맞는 걸 보고 도망 갈 수 없어서 그냥 같이 있다고 하던 그 애로구먼."

연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그럼 그렇지. 연식이가 그런 애가 아냐. 하지만 경찰의 이야기는 달랐다.

"연식이하고 친구들은 괜찮은가요?"

"괜찮아요. 아까 저 아주머니가 사식을 넣어 주셔서 저녁도 잘 먹고 지금 보호실 안에 잘 있어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아직 조사해 봐야 하니까, 잘 몰라요. 이건 집단 폭행이니까 누구 하나의 잘못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요. 그런데 전부 일곱 명이 네 명하고 싸웠는데, 정작 찌른 사람이 여기 없어요. 내가 그 아이 집에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없다고만 하고. 가족이라도 오라니까 아직 아무도 안 나타나네. 그래서 청년이 그 집에 가서 그 아이들을 좀 데려 왔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이 안 끝나요."

"제가요?"

"청년이 가족들에게 가서 설득을 해서 데려와요."

연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기더러 대신 잡아오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 때 마침 한 어머니가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경찰이 그 어머니를 보더니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누구 어머니세요?"

그 어머니는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우리 얘가 아녜요. 우리 앤 안 그랬대요."

"그 앤 왜 안 데려 오셨어요?"

"그 앤 집에 없어요."

"집에 없는데, 걔가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어떻게 아세요?"

연수가 보기에도 그 아주머니는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것 같았다.

"전화가 왔었어요. 전화가."

"그러지 말고 그 애를 데려 오세요. 어차피 일은 벌어진 건데. 나중에 우리가 잡아 오면 '살인미수죄'가 될 수도 있어요. 아시기나 하세요, 아주머니? 병까지 깨서 휘두르다 사람마저 찔렀으니, 그냥 넘어갈 사건이 아니라구요."

그 아주머니는 물론이고 연수 역시 깜짝 놀랐다. 술먹고 단순히 실랑이를 하다 치고 박은 것 하곤 차원이 아주 다른 것이었다. 연수는 바싹 긴장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그 소리를 듣자 엉뚱해지기 시작했다.

"걔가 안 그랬어요. 걔는 아녜요. 저 아이가 그랬을 거에요. 저 아이가. 너 맞지? 니가 그랬지?"

그 아주머니는 갑자기 조서를 받던 애를 향해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아이는 벌벌 떨며 아니라고 했고, 급기야는 경찰이 나서서 아주머니를 밀어젖히며 소리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에요? 걔 한두 번 사고 친 게 아니구먼. 우리가 직접 현장에 가서 잡아올 때 술병들고 설치다 도망간 걸 봤는데. 고등학생이라 가볍게 봤더니, 그 애 전과자 아녜요?"

아주머니는 놀라서 소리쳤다.

"전과자라뇨? 이 양반이 누굴 누명을 씌워도 분수가 있지. 전과자라니요? 아직 사회에 나오지도 않은 아이를 전과자라고 뒤집어씌우다니?"

이번에는 오히려 아주머니가 흥분해 경찰에게 고자세로 나갔다. 그러나 경찰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빨리 데려오시지, 전과자도 아니라면 왜 감추고 그래요? 빨리 데려오세요. 빨리."

이 말에 아주머니는 다소 기가 꺽이는 듯 했지만 여전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

"집에 없다니까요!"

"전과자도 아닌 애가 어디 가서 숨어요? 전과자면 몰라도, 처음 일을 저지른 아이가 집에 와서 숨지, 어디로 가요?"

계속 전과자라는 말에 그 어머니는 풀이 죽고 말았다.

"빨리 데려오세요, 빨리? 괜히 애꿎은 사람에게 뒤집어씌우지 말고!"

그때 나머지 세 명의 아주머니들이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리 오세요. 아이들 때문에 오셨죠?"

그런데 나중에 들어온 아주머니 세 명은 이미 들어오면서 입을 맞췄는지, 경찰을 보자 마자 같은 소리를 했다.

"우리 앤, 안 그랬어요. 걘 집에 없어요‥."

경찰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 아주머니들이 정말 왜 이래? 야, 김 일경 가서 애들 잡아 와! 안 되겠어, 학생들이라 잘 대해 줬더니 정신들 못차리고."

일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아마 전투경찰인가 보다. 김 일경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저요? 제가 가서 잡아와요?"

"응, 대기하고 있다가, 이따가 야간 순찰 나간 이 경사하고 박 경사님 오시면 같이 가서 잡아와."

"예."

아주머니들은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 가자 작전을 달리 해서, 이번에는 경찰에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경찰의 말은 변함 없었다. 설사 훈방을 하더라도 그 아이들이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실랑이를 보면서 연수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 아이 살린답시고 곧 나가면 다시 보게 될 자기 아들 친구에게 뒤집어 씌우는 사람이 없지 않나, 무조건 감추고 보자는 식으로 아니라고 우겨댔다가 지금은 비는 사람들이 없나. 그 안에 갇혀 있는 아이들의 안부는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는 눈치였다. 착잡한 심정을 달래려고 연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한 모금 빨다가 연수는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연미가 생각나서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를 잡은 김에 지도 신부님에게도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부님, 저 연순대요. 지금 동생 문제로 파출소에 와 있어요."

"파출소? 파출손, 왜?"

"연식이가 오늘 졸업 했거든요. 그런데 졸업 기분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같은 반 친구들 하고 신림동에서 소주 한 병을 먹고 나오는데, 옆에서 누가 치고 가더래요. 그래서 실랑이가 벌어져 싸웠대요."

"응, 그래? 졸업하고 졸업 기분에 그런 거니까, 훈방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이들하고 싸운 사람들은 청년들이었나 봐요. 그 쪽은 네 명 밖에 안 됐지만 아이들은 일곱 명이나 돼도 마구 얻어 맞았대요. 그러다가 한 아이가 옆에 있는 술병을 賁서 그 중에 한 사람을 찔렀대요."

"뭐? 사람을 찔렀어?"

"네. 경찰이 오고 그 사람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요. 막상 찌른 애들하고 같이 실랑이 한 애들은 다 도망가고, 여긴 연식이 하고 네 명만 잡혀 왔어요."

"병에 찔린 사람은 어떻데?"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닌가 봐요. 간단히 팔을 몇 바늘 꿰맸다는 것 같애요. 아직 병원 측에서나 피해자 측에서 급한 연락이나 요구가 없어요."

"간단한 상처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애들은 괜찮니?"

"네. 저도 아직 보지는 못했는데요. 어머니가 면회를 하시고 사식을 넣어 주셨대요. 그냥 잘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어쩐지? 연식이가 착한 아이인데. 내가 독산동에 있을 때만 해도 착한 아이였는데 사람을 찔렀다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너 지금 거기 위치가 어디니?"

"여기가지 오실 필요는 없어요. 기도 좀 부탁드려요."

"그래, 알았다. 일이 더 진척되면 전화해."

"네. 너무 걱정마시고, 안녕히 계세요."

"야, 내 걱정을 니가 왜 하니? 니가 걱정이 심하겠다."

"전, 괜찮아요. 신부님 기도해 주세요. 전 걱정 마세요. 잘 될 거에요."

사무실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합을 하던 신 신부는 전화를 받은 후에 다시 앉았지만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원들에게 이 상황에 대한 기도와 관심을 부탁하고, 방으로 들어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강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강 변호사님? 저 구로본동 성당 신 신부입니다. 별일 없으셨구요?"

"네. 전 별일 없습니다. 신부님 무슨 일이 또 생겼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고요. 저기, 우리 회원 중에 하나가 동생이 파출소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했는데요‥."

신 신부는 연수에게서 들은 대로 정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강 변호사의 답변은 연수나 신 신부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물론 초범일 테니까 크게 벌을 받지는 않겠지만, 졸업식 때마다 그런 일이 많이 생겨 요새가 '연말 연시 폭력 사범 단속 기간'이고, 게다가 병으로 찌른 부위와 정도에 따라서는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신 신부의 물음에 강 변호사는 신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검사 앞으로 그 아이들을 위한 탄원서를 써 주는 일뿐이라고 했다.

신 신부는 연수의 부탁대로 미사와 기도 시간에 연식이와 그 친구들을 기억했고, 신 신부는 연식이와 그 친구들을 위해 검사 앞으로 보내는 탄원서를 썼다. 연수는 탄원서를 받아들고는 미안해했고,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들도 포함되어 있는 일인데도 모두 자기에게만 맡기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자기만 혼자 뛰다시피한다며 아쉬워했다. 신 신부는 부모님들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사후 대책을 요청했고 연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인 솔타리 팀회합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그 결과 회원들이 함께 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차례




활동의 열매


병에 찔린 사람은 더 이상의 부작용이 없어, 몇 바늘 꿰맨 다음 그냥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기로 했다는 연락이 연수에게 왔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찌른 그 아이는 그 어머니가 경찰의 재촉에 못 이겨 파출소로 데려 왔지만, 자기 아이만을 신경써 경찰에게 금품을 주려고는 했어도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계속 무관심 했다. 나머지 세 명의 어머니들도 끝까지 아이들을 경찰서에 출두시키지 않고 눈치만 보면서 질질 끌어서, 연수와 애꿎은 아이들의 부모들만 애를 태웠다.

연수는 어머니를 모시고 경찰이 권유한 대로 피해자와의 합의를 위해 피해자의 집에 찾아갔다. 이 날도 다른 어머니들은 하나도 참여해 주지 않은 것이다. 정작 찌른 아이의 어머니는 인간적인 도리에서라도 가서 사과 한 마디쯤은 해야 마땅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어머니는 함께 하지 않았다. 연수는 짜증도 났고 원망도 들었지만 구치소에 있을 아이들을 생각해 꾹 참았다. 연수와 연수의 어머니는 죄인이었다. 연수는 피해자의 집을 몇 번씩 방문하며 합의금을 조정할 때마다, 참여는 않고 뒤에서 탈만 부리는 어머니들이 싫었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또 이쪽도 한 어머니도 아니고 여러 명의 어머니를 대해야 했으므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도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온 늦은 시간에 상대하려니 참 힘들었다.

팀회합에서 연수는 이 이야기를 꺼냈고, 회원들은 어머니들을 한데 모아서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고 제의했다. 팀원들의 도움으로 결국 연수는 어머님들을 한자리에 다 모을 수 있었다. 모인 자리에서 연수는 어머님들에게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말했다.

"이렇게 오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어머님들의 맘에 다 들지는 않겠지만 어머님들이 제게 맡겨 주신 일을 저는 성의껏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들 한 분 한 분 다 알고 허락하셔야 되는 일이지만, 저 혼자 여러 명의 어머님들에게 다 맞추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머님들이 항상 집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또 어머님들 나름대로의 생각도 있으시기 때문에 쉽게 응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만 혼자선 힘듭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여 함께 의견을 나누고, 이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는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함께 모여 주셔야겠습니다. 공동의 문제이니까, 공동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연수의 이 말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런지 모두 동의를 하셨다. 연수는 계속했다.

"그리고 저는 이 사건이 간단히 합의금만 주고 끝날 성질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와도 단순히 금전적인 합의로 끝날 것이 아니라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둘러싸고 저와 어머님들 간에 그리고 어머님들 간에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도 화해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연수의 이 말이 끝나자, 어머나들 중 화를 내시는 분도 있었다.

"상대가 먼저 싸움을 걸어 와서 생긴 일인데, 찌른 사람만 죄인이고 저 쪽은 죄인이 아냐?"

"우리끼리 뭐가 어떻단 말야, 우린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연수가 우리에게 무슨 불만이 있어? 우리가 못 해 준 게 뭐야? 불만이 있으면 말해 봐."

어머님들은 연수의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연수에게 불만을 털어 놓기만 하셨다. 연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려고도 했지만 그러면 그냥 회의는 무산되어 버릴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자신이 그 동안 이 일을 하며 느꼈던 것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을 다 마치고 와야 이 문제를 풀어 나갑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저에게 일을 맡겨 놓기만 했지 함께 하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피해자의 집에 갈 때도 여러분 중에 어느 한 분 함께 가 주신 분이 계십니까? 그리고 제가 어렵게 어렵게 합의를 하고 오면 여러분은 집에 앉아서 전화로, '돈이 너무 많다.'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하고 타박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화마저 내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왜 저 혼자만 이 일을 떠맡아야 하고, 또 제가 합의를 할 때마다 일일이 다 한 분씩 마치 무슨 결재나 허락이라도 맡아야 하는 것처럼 대하십니까? …"

할 말은 많았다. 그러나 연수는 차마 아이들을 빨리 파출소로 데려 오라든가, 찌른 사람의 부모로서 인간적인 도리를 다 하기 위해 가서 사과라도 하라든가 등의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단지 이 사건을 둘러 싼 부모님들과 자신의 관계 그리고 부모님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를 진전시키면 분열을 조장하게 될까봐 이런 말을 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여러분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여러분 중에 자식들에게 나가서 싸워라! 남과 싸우고는 절대 화해하지 말라! 그리고는 어떻게든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만 빠져 나와라! 하고 가르치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왜 좋은 것을 가르치셨으면서도, 여러분 자신은 실천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좋은 일을 하려는 것마저 방해하고 계십니까?"

불쾌한 감정이 어머님들의 얼굴 가득이 담겨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이 말에 대해서는 아무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어서 연수가 더 말을 꺼냈다.

"어머님들이 이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임해 주시고, 어머님들끼리 편을 가르지 마시고 화해를 하셔야 아이들끼리의 화해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앞으로 아이들이 나왔을 때 어머님들은 자기 자식을 어떻게 교육하시며, 또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보려고 하십니까? 만일 아이들이 어머님들이 이번 일로 인해 이렇게 입장이 서로 달라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이들끼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한 아이가 나빠서 이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다는 모른다 해도 여러분 중에, 여러분 자식이 질이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모두 다 자기 자식이 아까운 만큼 아이들끼리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서로를 받아들이고 화해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효과가 있는 듯했다. 이 날 회의는, 다음 합의가 있을 때는 한 분씩 돌아가면서라도 함께 가기로 했고, 합의금의 최저, 최상 기준도 정했고, 합의하러 가는 사람에게 그 가운데에서 적절히 합의액수를 정하기로 한 후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합의를 하러 갈 때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어머님들은 다 빠졌고 또 다시 연수와 연수의 어머님만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합의금의 액수는 회의 때 정한 액수에 맞춰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합의서에 도장이 찍혀야 아이들이 풀려 나올 수 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합의액수의 각 가정별 액수 분배 문제로 분란이 일었다. 연수는 도대체 이 어머님들이 자식들을 사랑하기는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고, 결국 자신의 집에서 합의액수의 절반을 대고, 나머지 6명의 어머니에게는 연수가 마치 무슨 구걸이라도 하는 것처럼 빌다시피 해서 아이들이 나올 수 있었다. 이미 대학 입시 2차 시험은 다 끝난 다음이었다.

연수는 아이들이 나온 것만으로는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피해자에게 가서 화해를 했고, 아이들을 이번 기회에 새롭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수는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아 아이들을 데리고, 솔타리 팀원들과 함께 꽃동네로 가서 오웅진 신부님께 부탁하여 1박 2일의 피정을 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데려 와 노동자 교리반에 넣었다. 연수는 이들이 대학 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역할을 맡았고, 이들도 자신들의 원의에 따라 '시대의 빛'이라는 팀으로 회합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때의 실수로 홍역을 치렀지만, 사회에 진 빚을 갚겠다는 의미로 빛이 되어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연수는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활동의 열매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단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한 팀을 더 만든 것이 아니라, 자칫 하면 자신들의 실수로 빛과 등져 어둠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형제로 얻은 것이다. 연수는 솔타리팀 복음나눔 회합 때, 루가 복음 15장 11절부터 32절에 나오는 '잃어 버린 아들'의 다음 구절을 보며 인간의 생명과 인생에 대해 깊은 나눔을 할 수 있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차례





고난의 현장에서


라자로 마을에 와서 남부연합회 주최 사순 부활 피정을 하며 숙희는 나환우들의 밝은 모습을 보고 놀랐다. 숙희는 나환우들이, 누가 보기에도 딱한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하느님과 사회를 원망하는 기색이 없는 것같아 보여 이상했다. 숙희는 나환우들의 생활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더 점검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4장 17절에서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동시에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영적인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란 기도한다고 머리 속에서 꿈이나 그리고 거룩하게 산다고 현실의 아픔이나 고통은 무시하며 육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채울 수 없는 훨씬 더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육적이며 물질적인 행복 추구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6장 24절에서 26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저는 참는다는 것과 희생한다는 것이 복음적인 의미로 말할 때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신 이유가 그저 겉으로 분란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또는 싸우기 싫고 미운 살 박히기 싫어서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도피는 결국 자신감을 빼앗아 가고 세상을 원망하며 자기만 손해보게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불의를 인정하고 용인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죄값으로 삼으시고자 하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뜻이 설사 자신의 죽음을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빚을지라도 자신의 뜻과 생각보다 더 낫다는 확신과 순명의 자세에서 나오는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희생은 인간 구원을 위한 적극적인 투신입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실패나 포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

외부 강사 신부님의 간략한 강의가 끝나고 구로 3동 회장인 김 숙희 마리아가 사례발표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구로 3동 태양팀의 김 숙희 마리아입니다. 처음 올 때부터 이번 피정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생활 속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란 주제와 '나의 배반과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란 소제는 저의 삶과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노청을 처음 시작할 때는 부족했어도 활동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했지만, 지금 현재의 제 모습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만성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매번 새롭게 시작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92년 8월 31일 주님 앞에서 노동계의 투사로 활동할 것을 약속했었습니다. 심적인 부담감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부족한 만큼 활동하리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선서식을 준비하면서 현장 안의 분위기가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믿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지고 있었습니다. '92년 임금 인상 시기 때 서로간의 이념대립 문제로 간부들끼리 마찰이 생겨 몇 안되는 간부들이 서로 패가 갈리게 되는 상황이 빚어졌습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정기 총회 때 위원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위원장 선거 때 분열이 점점 커져갔고, 저는 위원장에 대한 불신과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합활동을 하면서 저도 조합원들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되느냐 보다는, 조직에 이익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먼저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저의 입장을 더 많이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고 생활에서 조금 더 구체적이고도 깊이있는 내용을 나누기 위해 칠월 정기총회 이후 노동조합의 간부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몸에 배어 있던 것이라 쉽게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되었습니다. 평조합원의 위치에서 많은 활동들을 하리라고 마음 먹고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우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조합의 조직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보다는 문제점만 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이 집행부로부터 보여지지 않자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조합 사무실도 제 자신의 개인 감정 때문에 찾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합간부로 있을 때 조합원들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비판하고 지적하던 제가 똑같이 평조합원으로 돌아가면서 조합에 대해 전면적으로 신경을 꺼버리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3개월 동안 조합간부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자, 저 역시 스스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과 또한 내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겉에 보이는 모습만 비판하게 되는 일이 생기고 많은 반감을 갖게 된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3개월동안 생활하고 있을 때, 현장에서는 위원장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1월 23일 국가보안법으로 강제 연행되어 장안동에 있는 대공분과 분실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장안동 분실로 찾아가 구속자 면회 요구를 외치며 항의도 했지만, 저 자신의 감정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극적으로 임했고 제 일이 아닌 다른 이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조합의 대표자가 구속까지 되었지만 현장 안에서는 위원장의 불신이 커져만 갔고 저마다 한 마디씩 불만을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몇 명 안되는 간부와 그 동안 활동하지 않았던 저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가 만나서 대책회의를 하였습니다. 회의를 진행하면서 위원장 직무대행의 역할이 저에게 지목되자 그 때부터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저는 제가 꼭 해야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 아닌 다른 이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의를 계속하면 할수록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고 우리는 한숨만 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되자 다시 한 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동조합 일을 다시 한다는 것은 저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려운 상황 앞에서 저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쉽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십자가를 져야겠다고 결정내렸습니다. 많은 고민과 기도 속에서 주님을 원망하고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수 없이 되풀이했습니다. 서울 구치소 안에 있는 위원장을 찾아가 위임장을 받아 들고 12월 16일부터 노동조합의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노조 사무실에서 상근하게 되었습니다. 첫 상근을 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조직의 일을 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느꼈던 터이라 사람들을 대하기가 너무나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장을 순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첫 인사를 하고는 많은 도움을 부탁했습니다. 하루종일 라인을 순회하면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위원장의 노고가 새삼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라인 콘베이어 앞에서 일할 때는 반복작업에 시달려 어깨와 손이 아팠지만, 노동조합의 상근자로서 많은 이들을 상대하고 포괄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처음 상근하면서 며칠 간은 계획을 세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위원장 구속과 더불어 십칠 명이 조합을 탈퇴하고, 현장분위기는 예전과 달리 살벌해지고 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현장순회는 제게 또 다른 두려움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주간 현장순회를 하지 않고 조합사무실에 앉아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되고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현장순회를 하지 않는다고 조합원들과 간부들의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던 것은 그 일이 저의 일같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합원 간담회를 통해 조합 탈퇴자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조합원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비조합원과 조합원과의 차등 대우를 요구했고 해고까지 시켜야 한다는 의견과 좋게 설득하자는 등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상집 간부 회의를 통해 설득하자는 의견이 나와 탈퇴자와 간담회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간부들이 시간을 빼서 탈퇴자와 이야기하면서 간담회 참석요구를 했으나 한 명만 가능하고 다른 이들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습니다. 간부들이 해마다 임금인상 하면서 팔 올리며 구호와 노래를 하는 것이 싫고, 또한 아줌마들이기 때문에 생활에 대한 절박함이 예전보다 없어졌기 때문에 탈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전부터 조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고 다른 이들도 하지 않는데 왜 나만 하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이렇게 원인분석은 하였지만 특별한 대안이 없어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조합원들이 쉽게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자 간부들은 포기하고 신뢰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변화의 가능성과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다시 싹트게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겠지만 앞으로의 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쁘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현장 안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정신을 뿌리 내린다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느낍니다. 각자의 삶에 대해 인정해 주어야 하는데도 자신의 의지대로만 판단해 버리고 자기와 맞는 사람하고만 이야기를 하며 선입견을 가지고 활동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님은 많은 이들의 삶에 대해 인정해 주셨고, 옳지 않은 생각과 남들이 꺼리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셨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힘겨운 십자가를 생각하며, 제가 지고 가는 이 어려운 현실 여건 하에서 주님께 의탁하며 생활하고 싶습니다. 현장 안에서 활동하면서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며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뛰겠습니다. 어떠한 만성적인 생각보다는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주님께 저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연합회장 연수가 일어서 분과 나눔에서 다룰 설문을 불러 주었다.

"1번, 나는 요즈음 어떤 일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뛰고 있는가? 다음 2번, 내가 살아가면서 십자가는 내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3번, 내가 주님을 배반한 적이 있는가? 분과별 명단은 뒤의 게시판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각 분과 명단 중 맨 첫번째 이름이 써 있는 분이 분과장님입니다. 분과장님들은 오후 3시까지 나눔을 하고 3시부터는 두 번째 묵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 분과에서는 서기를 정하셔서 연합회에서 드린 노트에 나눔 내용을 기록하여 나눔이 끝난 후 연합회에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고해성사를 보실 분은 4시 반에 파견 미사가 있을 예정이오니, 분과 나눔이 끝난 후 미사 전까지 지도 신부님이나 강사 신부님에게 청하면 되겠습니다. 좋은 나눔이 되시길 바랍니다."

숙희는 영숙이가 들어 있는 제1분과에 들어갔다. 영숙이의 분과에는 구로본동의 장 한창 테오도로, 전국 본부 회장을 맡고 있는 독산동의 김재수 하상 바울로, 박금숙 에밀리아나, 신정동의 박복순 세실리아가 함께 하고 있었다. 간략한 인사 소개를 마치고 구로본동의 한창이가 먼저 자기 묵상을 발표하였다.

"저는 지난번에 회사를 옮기게 되었는데, 저보다 먼저 들어 온 사람이 나이는 저보다 어린데도 자기를 형으로 불러 주기를 바라서 참 어려웠습니다. 몇 달을 신경전을 벌이다가 이번 사순절에는 성서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무심코 성서를 펼쳤는데, 거기에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는 구절이 나오고 그 밑에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 구절을 읽고 저도 한 번 해달라는 대로 해주자는 마음을 먹었어요. 해달라는 대로한다고 제 나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제가 형이라고 불러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사이가 좋아졌어요. 저도 뭐 특별히 어색한 것도 없어졌구요. 아까 강의를 들으면서 그 생각이 났어요. '예수님의 희생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것' 이라는 말씀이 제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정말 아주 큰 악이 아니라면 들어주어도 무방하겠다구요. 그래서 저는 이번 사순절에 십자가를 한 번 져 봤고, 막상 짊어 지었더니 그런대로 기쁨과 보람이 있었어요."

"그게 몇 절이죠?"

사회를 맡은 금숙이가 물었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 아마 이사야 50장 이었을거에요.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 라고 써 있었던 것 같아요."

이어서 금숙이가 발표를 이었다.

"전 지난번에 연합회에서 임원을 맡아달라고 했는데, 제 역할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거절했었어요. 모두 다 각자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저에게 맡으라고 했던 직책이 회계였거든요. 그런데 가끔 수요 미사 때 연합회 임원들이 겸직을 하면서 바쁘게 장부를 정리해서 회원들이 강하게 질문을 할 때나 감사에게 지적 받을 때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어 주었구나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나를 믿고 부탁한 건데 내가 거절하는 바람에 마음속에서 배신까지는 안 가더라도 섭섭한 마음을 갖게 해 준 것 같아요."

"어유,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마음놓으세요. 저희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요, 뭐."

연합회 여회장 영숙이가 놀라며, 금숙에게 위안을 주었다. 이어서 재수가 말했다.

"전국 본부 회장을 하면서 일이 너무 많아서 어떤 때는 짜증도 나고 그러다 보면 화를 낼 때도 있어요. 지난번에 한 번은 광주 교구 연합회에 출장을 갔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왔는데, 본부 집에 아무도 없는거에요. 그 날따라 열쇠를 가지고 있다가 나갈 때 바지를 갈아입고 나가는 바람에 두고 간 거에요. 그래서 '곧 오겠지' 하고는 문 앞에서 몇 분을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한 삼십 분인가를 기다리니까 실무자하고 사무원 둘이 웃으면서 오는거에요. 그래서 다짜고짜 '집 비워 놓고 어디 갔다 오냐'고 소리를 질렀죠. 그것만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문 열고 사무실로 들어가서는, 지난번에 '예비 회원 교육'을 하기 위해 준비 회합한 것 제가 갔다 올 때까지 자료 정리 해 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그거 됐냐고 물었더니, 아직 못했다는거에요. 그래서 또 뭐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사무원 리디아가 울잖아요. 그래서 모른 척하고 '빨리 해 놔'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전 방에 들어가 좀 쉬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부산 회원이 와서 리디아보고 '얘, 생일 축하한다'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차 했어요. 지난번 준비 회합 끝나고 생일날 식사 함께 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걸 깜빡 잊어버리고 광주로 갔구요, 그래서 실무자가 나가서 대신 사주었나 봐요. 그런데 저는 약속도 잊어 버렸고, 나중에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까 예비 회원 교육 준비 회합 자료도 제 가방에 있잖아요. 그래서 아까 묵상하면서 요즘 내가 어디다가 정신을 팔고 사는 것인가하고 반성해 봤어요. 가노청 정신은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으로 시작하는 건데, 저는 일에 빠져 있던거에요."

"그래서 사과는 했어요?"

영숙이가 물었다.

"아직 못 했어요. 그땐 멋적어서 그냥 모른체하고 넘어 갔어요."

"그런 법이 어딨어요? 저렇게 남 회장이 멋없어서 …"

"할게요. 이번 피정 끝나고 집에 가서 사과도 하고, 점심도 사줄 거에요!"

영숙이의 말을 막고 재수가 애걸하듯 말해 모두 웃었다. 영숙이가 말을 이었다.

"저는 남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제가 직장에서 활동하면서 제일 벽에 부딪히는 것은 남성들이 남성 우월주의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거에요. 사무실에서는 전화나 복사하는 것 등 아주 사소한 것도 자신이 조금만 움직이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같은 사무원이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사무원에게 요구해요. 여자니까 당연하게 해야 된다는 남성들이 의외로 참 많아요. 이것을 고치려고 했을 때 처음에는 힘들었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남성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스스로 하도록 확신을 갖고 유도한 결과 만족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구로본동 성당에서 견진을 받을 때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님의 웃고 있는 얼굴 모습이 제가 어려울 때마다 힘이 돼요. 활동할 때 욕먹으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생각해요. 십자가에 달려서도 웃으실 수 있는 모습이 아마 여유라는 말보다는 당당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옳은 일이고 또 자기 편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도 위하고 또 마음 안에 애정을 가지고 활동한다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십자가를 지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복순이가 마지막으로 발표를 했다.

"저는 지난번에 이웃집에 어머니 심부름 갔다가 누워 있는 청년을 발견했어요. 그 청년은 군대 가서 안전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어 제대했는데, 벌써 누워 있은 지가 1년 반이나 되었대요. 그런데 저는 그 때까지 옆집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 왔어요. 그래서 팀 회합을 하며 그 청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저는 여자라 너무 가까이 가기도 뭐하다고 하니까, 팀원들이 같이 가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본당 빈첸시오에 연락해서, 매주 한 번씩 같이 방문을 하고 대화도 나누었어요. 그랬더니 그 청년이 좋아졌어요. 처음엔 말도 없이 누워만 있더니 이젠 저희가 가면 웃기도 하고 말도 해요. 그 집 사람들은 자기 아들이 말도 못하게 된 줄 알았대요. 몸이 다시 낫지 않는다고 포기한다면 그 청년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몸만을 만난다고 생각해요. 지금 낫지 못하고 변할 수 없어 보여도 관심을 가지고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희망을 주는 것 같아요. 마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살로 된 육체는 죽었지만 영으로 다시 태어나셨던 것처럼요."

차례




나눔의 광장


살을 에이는 겨울이 지나고 살랑거리는 봄기운이 느껴진다. 암울한 듯한 사순절을 마치고 밝은 부활을 맞아 구로본동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들은 일반 야유회를 벌여 직장의 동료들을 초대했다. 일반야유회는 한강 고수부지에서 열렸다. 집에서 각자 싸온 점심을 먹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소개했다. 그리고 간단한 나눔을 하고 잔디밭에서 작은 운동회를 벌였다.

일반인들은 모처럼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4월은 파릇파릇한 들판을 드러내 놓고 회원들을 마냥 반기는 것 같았다. 땀흘려 일하는 일상에서 이런 여유와 작은 기쁨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이번 일반회에는 구로3동의 김희동 안드레아와 이연길 가브리엘 형제 그리고 연합회장인 한연수 라파엘도 참석해 주었다. 이연길 형제는 허리가 아픈데도 불구하고 2인3각이나 배로 풍선 끼고 걷기를 하며 상대방에게 보조를 맞춰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줘 회원들을 기쁘게 했다.

이렇게 일반야유회를 한 후에 이들은 두 세 번의 일반회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대한 소개를 들었고 차츰 팀 회합에 참여케 되었다. 젊음의 5월 중순이 되면서 새로 만난 식구들이 한데 모여 연합회 주최로 나눔의 광장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눔의 광장은 서로를 소개하고 서로의 삶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에는 본당별로 실시했지만 올해는 한번 함께 하자는 의견이 나와 실험적으로 같이 해 보자고 한 것이다.

5월 15일 오전 10시. 돈 보스꼬 센터 교육관 강당.

"이렇게 많이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그 동안 새로 만난 회원들이 서로의 삶을 보다 더 깊고 진지하게 나누고 싶다는 의견에 따라 나눔의 광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가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첫 순서는 기존 회원들 중에서 예비회원들이 선택한 정희경 데레사 회원의 개인보고서를 듣기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오셔서 발표해 주시죠."

"안녕하십니까? 구로본동 나눔 팀의 정희경 데레사입니다.

가노청과 함께 한지 2년 남짓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개인 보고서를 쓸 기회가 자주 주어졌지만 그때마다 쓰다가 멈추곤 했습니다. 그만큼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 보기 어려웠고 차분히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가 봅니다.

저는 경북 봉화군에 위치하고 있는 두음이라는 곳에서 3남 4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외아들이시고 또한 가장으로서 집안 일을 돌봐야 했기에 학업보다는 농사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에 대한 교육열이 참으로 높았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별로 말씀이 없으셨기에 저에겐 무척 어려운 분이셨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든지 어머님을 통해서 전하곤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내성적이라 활발한 면은 없었으며 고집이 세어 한 번 울면 여간해서 울음을 그치질 않았고 눈물이 많아서인지 정이 많았습니다. 소꿉친구를 따라서 한 해 일찍 들어간 국민학교는 먼 거리이기는 했지만 얘기를 좋아했던 저에게는 힘든 거리이기보다 정겨운 거리였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언니와 오빠와 함께 춘양이라는 곳에서 자취하면서 많은 책을 보게 되었고 방과 후에는 운문부나 산문부 활동으로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시는 글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한 저로서는 독후감과 다른 글을 많이 쓴 시기였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었을 때 부산에서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 명절이면 찾아오는 주위 선배들을 보고 자립을 해서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부모님께 여쭈었지만 호강에 겨운 소리라며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저는 상업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겠다는 꿈도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시들해졌고 기능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실습 위주의 학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3이 되어서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언니의 도움으로 회사를 소개받아 제일 먼저 서울로 오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는 친구들의 모습도 서울로 간다는 설레임으로 인해 웃으면서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하루 늦게 제출한 이력서로 인해 취직을 못하고 출퇴근하는 언니의 모습을 보며 하루종일 아무 일없이 보내야만 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벽보용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은 규모가 작은 개인회사 경리직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꿈꾸던 회사와는 너무나 달랐기에 적응을 하지 못한 채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후 여러 직장을 옮겨 다녔으며 가는 곳마다 어려움이 따랐고 왜 직장을 그만두었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백화점에 다니고 있는 친구소개로 백화점에서 수입 욕조제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본사는 봉천동에 있었으며 대형 백화점에 납품을 하고 있는 업체였는데 몇 명밖에 되지 않았고 판매 여직원은 둘이었기에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주위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자 같은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회사에 따라 복지 혜택이나 급여의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자리를 권유받았을 때 갈등이 있었지만 결정을 내린 곳이 지금 근무하고 있는 '네슬레'입니다. 커피가 주요 제품인 네슬레의 창립 멤버로서 새롭게 출발을 했을 때 직원들 모두 어려움을 겪었으며 6개월 정도 시장조사 자료를 만든 뒤 파견된 곳이 방배 보은 연금매장이었고, 얼마 후 업주들의 대립으로 구로 복지관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미혼인 언니의 결혼이 있었고 혼자 자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언니 집에 저의 집도 함께 옮겨가게 되었으며 성 가정이었던 탓에 아침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되었으며 종교를 갖지 않고 있던 저에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얼마 후 교리자 접수 신청이 있었고, 주위의 권유도 있었지만 교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후 미우라 아야꼬의 「빛 속에서」라는 책을 보고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뒤늦게 신청을 했는데 수녀님의 도움으로 일반 교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직장 근무는 제게 참으로 힘겹게 다가왔는데 그 원인은 제가 하는일이 제품 판매보다 부수적인 일을 더 많이 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장 이동을 희망했지만 초창기라 지점 직원의 이동이 빈번한 상황이었기에 저의 사정을 아는 분들은 대부분 지방이나 본사로 발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형부는 병원에서 언니를 돌봐야 했으며 저는 퇴근을 하면 곧장 집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언니의 입원 중에는 주일이면 형부와 함께 미사에 참여한 후 교리실로 향했고 한결같은 원장 수녀님의 사랑과 관심 속에 교리를 빠지지 않고 듣게 되었습니다.

언니도 건강하게 퇴원한 후 기쁨 속에서 1991년 4월 20일 부활절에 저는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어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기쁨은 영적인 어머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 신부님의 소개로 직장인들의 모임인 가노청을 알게 되었으며 함께 했던 팀이 지금의 나눔팀입니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대화할 때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팀원들의 모습을 보고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참석했는데 나눔의 깊이가 깊어질 무렵 가정과 회사 일로 갈등을 겪고 있는 팀원들이 떠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저 자신 또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월 4회 모임이었기에 회합보다는 개인적인 일이 더 중요시 여겨져서 모임 참석 때는 준비가 미흡했으며 그로 인해 회합 날이 다가오면 "가야 하나?"라는 망설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팀을 떠날까하고 여러 차례 고민했지만 그 때마다 제 곁에 가노청 회원들이 함께 했었고 주님의 손길이 머물렀음을 느낍니다.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동료 가노청 회원들의 생활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가노청 정신을 봅니다.

보이기에 힘쓰고 배워야 하는 지금 이 시기에 제게 보여준 주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예비회원들의 개인 보고서를 통해 서로를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구로3동 본당 흙두들기팀 김명오 아론 회원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구로3동 흙두들기팀의 김명오 아론입니다.

저는 1969년 8월 27일 강원도 원통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2남 2녀 중 장남인 저는 무척 개구쟁이였었고 부모님은 저를 낳고 굉장히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위로 누나 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 형편은 정말 좋지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형제가 많으셔서 가산은 물려받지 못한 채 시골의 집 한 채만 달랑 받으셨다고 합니다. 남의 논과 밭을 빌어 소작농을 하신 아버지는 남의 일만을 많이 하셨고 품삯으로 겨우 가정을 이끌어 가셨다고 합니다. 술을 좋아하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많이 다투셨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작은 집으로 도망가곤 했습니다. 그런 날 저녁이면 아버지는 또 술 드시러 가시고 어머니는 고상 아래서 묵주기도를 하시곤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어머니 옆에서 울기만 했습니다.

유아 세례를 받은 나는 아론으로 불리워졌으며 '명오'라는 이름은 국민학교를 들어간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조그만 공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공소를 운영해 나갔는데 일요일이면 엄마와 누나들과 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지금은 할머니도 고인이 되시고 공소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가난이 무엇인지 남들 다가는 중학교를 우리 누나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인지 늘어나는 빚 때문이었는지. 겨우 14살의 나이에 집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누나를 보며 우리 가족은 다 울었고 아버지의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너무 엄격하셨던 아버지는 지금도 그 때의 얘기를 우리에게 하시며 못 가르친 설움을 토해 내시곤 하십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 때문인지 아버지께서 교리를 배우시게 되셨고 세례를 받으신 아버지는 '안드레아'라는 본명을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변화되기 시작하셨고 술도 조금씩 드시고 어머니와의 불화도 적어졌습니다. 집안 형편도 나아지는 듯했고 시골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에는 성당을 수안보로 다녔습니다. 외국 신부님이셨는데 한국말을 잘 하셨습니다. 학교 선생님 중에 교인이 계셨는데 토요일이면 성당에 나와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시곤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때는 밤새도록 연극, 장기자랑도 하면서 재미있게 보내곤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3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고 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했습니다. 사실 나는 성적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도 가기 싫었습니다. 나는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고 싶은 욕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업계 계통으로 지원을 했고 충주 공고 건축과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공부와는 전혀 달라서 인지 또 건축과는 적성에 안 맞아서인지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자과에 지망했는데 떨어지고 제 2지망인 건축과에 합격한 것입니다.

자연히 성적은 떨어졌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 모르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당구장 등을 전전했습니다. 부모님께 죄송스러웠지만 고등학교 때는 성당을 기피했었고 나가는 것을 싫어했었습니다. 그런 내가 등록금을 탈 때는 부모님께 미안한 생각뿐이었고, 하루 빨리 집을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교 시절이 왜 이렇게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누구건 주위 환경 조건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1987년 8월 드디어 사회 생활의 첫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실습을 나가게 된 것입니다. 나와 친구 3명은 서울로 와서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나 꿈과는 달리 공장과 기숙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건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거기서 내가 해야 할 일조차 나와는 성격이 너무나 틀렸습니다. 갖추어지지 않은 장비, 모자라는 인원, 힘든 야간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임금도 형편 없었습니다. 실습생들이라고 마구 부려 먹기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생활 6개월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졸업을 핑계로 공장을 도망나온 나는 사촌형의 소개로 자동차 인테리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는 나의 적성에 맞았습니다. 무엇을 고치거나, 손님이 원하는 곳을 고쳤을 때 어떤 환희와 가슴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일 자체가 재미있었고 일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땐 일요일이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갈 데 없고 친구 없던 나는 가게에서 혼자 하루종일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당에 갈 수 있는 용기는 없었습니다. 이미 3, 4년은 냉담을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90년 8월 사장님이 가게를 청산하고 춘천으로 이사를 간다는 말씀을 하시는 순간 나는 아찔했고 사회의 냉정함에 다시 놀랐고, 다른 직장을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아는 형님의 소개로 지금 근무하는 '이화 카독크'에 입사했습니다. 공장이 굉장히 컸고 사람도 많았고 시간제 근무였기에 나에게는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오히려 전의 직장보다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얼마간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작은누나와 신대방동에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누나가 해주는 밥과 한 마디의 따뜻한 말들이 혈육의 정을 느끼게끔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구석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성당을 안 나간지 너무 오래 돼서 누나 따라 구로 3동 성당에 가 보았습니다.

이때 누나는 가노청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1992년 6월 누나의 권유로 김희동 안드레아씨와 구로 3동 회원들과 일반 야유회를 통해 가노청을 알게 되었고 나 또한 마음에 들어 흙두들기 팀을 8월에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가노청을 통해 나의 주변 모습들과 나 자신의 변해 가는 모습들이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회원들과 어우러져 함께 하는 일과 삶의 나눔. 직장에서 동료들과 나누는 현장에서의 사건들을 눈 여겨 관찰하게 되었고 부끄러웠지만 회합에서의 생활 나눔을 통해 내성적이던 내 성격이 조금은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가노청을 통해 하느님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고 복음 정신대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무슨 일이든 극복하고 부딪혀 보자는 마음가짐과 관찰, 판단, 실천을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해 나가는 '나'가 되기를, 하느님 곁에서 신앙생활하고 가노청 활동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하느님! 인도해 주시길 기도 드립니다."

"이번에는 독산동 화조팀의 이정하 루도비꼬 회원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독산동 화조팀의 이정하 루도비꼬 입니다.

남들 앞에서 저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척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저는 1968년 6월 6일 강원도 삼척군 하장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저와 5남매였습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와 어머님은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에 큰형과 작은형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형님들은 국민학교만 마치고 부모님을 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민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저희들을 남겨 놓고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형편이 점점 나빠만지고 그 영향이 저에게까지 미치고 말았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어머님의 몸이 불편하셔서 원주 기독교 병원에 입원을 하려했지만 돈이 없었기에 입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연히 저도 진학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께서 학비를 대 주어서 진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원주 기독교 병원에서 종합진찰을 받았습니다. 병원측은 너무나 큰 오진을 냈습니다. 어머니가 위암이라고 있던 것입니다. 그 사실에 온 가족이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지 한 달이 다 지나서야 오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님들과 저는 병원을 찾아가서 확인을 해 본 결과 서류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가난이 아주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면 뭘 하는가 하고 학업도 포기했습니다. 그저 돈을 벌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께로부터 혼이 나고 중학교까지 마쳤습니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고등학교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저는 원주 직업훈련원에 들어갔습니다.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 기계 계통이었습니다. 1년간 기술을 배워서 자격증을 취득해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사회 생활을 하게 된 곳은 경기도 여주였습니다. 거기서 한 달 동안 일을 한 후 월급을 타면 무조건 저금을 했습니다. 그때 생각은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이런 생활을 1년 정도 했습니다. 친구들 곁을 떠나 홀로 서울로 왔습니다. 작은형의 소개로 마장동에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여기서의 저의 생활도 똑같았습니다. 서울 생활 1년 정도 될 무렵이었습니다. 작은형이 교통사고를 내서 성동구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형의 사고로 그 동안 저금을 해둔 돈은 모두 합의금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세상이 정말 싫고, 일할 마음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길로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에 있는 동안에는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잊기로 했습니다.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사회생활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일을 하고 나면 아무런 할 것이 없었습니다. 제대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친구를 따라 온 곳이 성당이었습니다. 성당이란 곳이 저에게는 참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친구와 서너 번은 같이 왔지만 계속 올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온다는 것이 무척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지금 있는 직장 동료의 권유로 노동자 교리를 받았습니다. 1년간 교리를 받으면서 내가 그 동안 잘못 생각했던 것을 뉘우쳤습니다.

1992년 12월 13일 영세를 받았습니다. 영세를 받기 전에 가노청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회원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그날 처음 만난 회원들이 아주 오랜 친구들처럼 느껴졌습니다. 회원들이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같이 교리를 받는 회원과 함께 화조팀이라는 곳에서 회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합을 하면서 저의 생활은 예전과 달리 좋아졌고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팀원들에게 열 수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그 동안 말을 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팀회합에서 저는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았을 때 팀원들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힘들 때 회원들이 같이 해 주었기에 지금까지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독산동 예비팀의 정송이 가브리엘라 회원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독산동 예비팀의 정송이 가브리엘라입니다.

저의 부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저는 1972년 6월 26일 서울 특별시 이화동에 자리한 한옥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저의 가족은 엄마, 오빠 셋 그리고 저 모두 다섯 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가족 중에 아버지께서 빠진 이유는 제가 고 1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정말 믿고 싶지도 않았고, 믿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심장병이 있으시기는 하셨지만 49세란 젊으신 나이에 돌아가실 줄이야! 아버지의 부주의로 술을 마시고, 새벽에 일하고 오시는 도중에 뺑소니 차로 인해, 그만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 것입니다. 5년 전에는 돌아가심을 믿기는 싫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진리처럼 제 나름대로 삶을 밝게 적응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식구는 현실적으로 대처를 잘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모두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잊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의미로 우리 가족의 삶을 살기 위해 아버지에게 집착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강인하고 투철한 사명감인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정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가족은 삶에 현명하게 대처해 나갔습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삶을 긍정적이고 밝게 말입니다.

화제를 바꾸어서, 어린 시절에는 외로움을 많이 느꼈었습니다. 오빠는 세 명인데 여자 형제가 없어서였습니다. 정말 어렸을 땐 왜 언니가 없을까 하며 상상으로 언니를 만들어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은 천주교 집안입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고 얼마 뒤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오빠와 저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당에서 복사를 한 오빠들은 성인이 된 뒤 대학 때부터 모두 냉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하느님과의 영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오빠들을 보며 안타깝지만, 지켜보면서 언젠가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빠들을 위해서 기도를 항상 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우리 가정에 내리길 기원해 봅니다.

경제적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중류 가정축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오빠들의 교육은 꼭 마쳐 주시려 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한다는 공부에는 끝까지 지원해 주시는 소신을 가지셨습니다. 어머니도 공부 욕심이 많으셨는데 여건상 못하신 모양입니다. 하긴 요즘 어머니들은 다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님은 가치관을 심어 주시는 것이 남다릅니다. 우리들의 교육을 위해 유태인의 교육 책을 읽어 가시면서 우리를 지도하실 정도였습니다. 그 덕분에 오빠들과 저는 이른 나이부터 정신적으로 더 많이 성숙해져 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도 있습니다. 갓난아이였을 때 온 가족이 설악산으로 놀러 가면서 저를 셋방에 맡기고 간 적이 있었답니다. 그 셋방 사람이 먹을 것을 잘못 먹여 탈수증에 걸려 죽을 위험에 처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읍니다. 아버지께서 헌혈해 주시고 제가 병자성사를 받고 난 후 어머니가 병원에서 저를 간호하다 주무시는데 꿈에 간호복을 입은 천사가 빛과 함께 저를 따뜻하게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차도가 있으면서 살아났고 어머니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앞으로 수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나의 성소가 가정 성소에 있는지, 수도 성소에 있는지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저는 기도드립니다. 좋은 방향으로 진로를 택하여 주실 것을, 어머니는 '꼭 필요한 사람이기에 살려 주셨다.'고 믿기에 하느님이 꼭 필요한 도구로 쓰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의 22살의 삶은 평온 가운데 계속 펼쳐질 것입니다. 가노청은 회사 동료인 순정이 언니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가노청에 대한 언니의 설명에서 참 좋은 노동자 단체임을 알았습니다. 모두 슬픔과 기쁨, 현장에서, 어디서나 노동자들이 형제 자매로 깊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을 예비팀을 하면서 많이 느낍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느끼고, 가노청 회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두서 없는 발표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읍니다.

가노청 회원 여러분 사랑합니다.

서로 서로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나눕시다. 주님의 은총이 항상 가노청 회원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이번에는 독산동 화조팀 박정범 레오 회원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독산동 화조팀의 박정범 레오입니다.

저 는 전라남도 영암에서 1968년 3월 4일 24시 04분에 처음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우리 식구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나 영암 월출산의 정기를 한 몸에 받으며 근심 걱정없이 건강하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농사꾼이신 부모님은 농사를 지어 우리 5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영암 시골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졸업과 동시에 그해 군복무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어린 학창 시절엔 그래도 푸른 제복을 입고 있는 군인 아저씨들이 씩씩해 보이고, 멋있어 보였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국민학교 땐 멋있는 군인 아저씨가 되는 게 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이 제 앞에 닥치자 그렇게 늠름해 보였던 푸른 제복의 사람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당장 군대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근심 걱정에다 두려움이 먼저 앞섰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버지께선 제가 군에 입대한다고 하니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몸도 왜소한데다 왼손잡이라는게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전 부모님의 그러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88년 10월 10일 논산으로 입영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홀홀 단신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게 입영전야인지 … 막상 군 생활을 체험해 보니 그렇게까지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30개월이란 시간들이 저한테 있어서는 마음 편안한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대한민국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그것도 남자들만의 생활이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좋았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시간은 흘러 그렇게 달고 싶었던 예비군 마크를 가슴에 달게 되었고, 전역하는 날엔 온 세상의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것 같았고, 군 생활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날아 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읍니다.

그러나 제대하던 때의 기쁜 마음과 좋았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사회의 첫발을 내딛으려 하니 저의 생각과는 너무나 달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집에서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가방 하나 둘러메고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선배의 소개로 인쇄라는 직업을 택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시골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니 빨리 집으로 내려오라는 어머님의 울먹이는 목소리였습니다. 집에 가보니 아버지께선 누워서 움직이지도 못하시며 숨만 헐떡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자식들이 모두 와 있는 데 알아보지도 못하신 채 말입니다.

3일 동안 식구들은 아버지 곁에서 그저 바보처럼 지켜 보고만 있 을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모할머니께서 "오늘을 넘기기 힘들겠다."고 하시며 집안 친척들에게 연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아버지들이 한 분, 한 분 오셨고, 마지막으로 당진에 계신 넷째 작은 아버지께서 도착하시자마자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시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그 심정이란? 아버지께서 위독하신데도 불구하고, 곁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지켜만 보고 있었던 우리 자신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 때에 하느님을 먼저 알았더라면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아버지 좀 구원해 달라고, 목청껏 소리라도 질러 보았을 텐데 …

다시 서울에 올라와 일을 하면서 강정진 형과 김재수 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으로 인해서 제가 가노청에 몸을 담게 되었고, 하느님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끔씩 형들을 따라서 성당에 나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인가 회합실에서 남, 녀 공동회합을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자기의 직업, 자기의 생활들을 진솔하게 거짓없이 얘기 나누는 모습들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입니다. 전 가노청에 가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하고 있는 직업이나 자기의 생활을 남들 앞에서 얘기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인해 가노청에 조금씩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었는데 재수 형이 팀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비쳐 왔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니 저더러 해 보라고 권유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92년 1월부터 근로자 교리를 받기 시작했고, 2월엔 투사인 재수형을 비롯, 4명이 화조라는 팀명으로 회합을 시작했습니다. '92년 한 해는 저에게 너무나 즐거웠던 시간들이었고, 마음 편한 한 해였습니다. 교리반에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가노청 독산동 회원들도 생기 발랄하게 모두들 열심이었습니다. 그해 11월 13일 저, 정범이는 레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영세받을 때는 세상의 모든 면에 있어서 더욱 더 충실하게 살아가겠노라고 다짐 했었는데, 하느님께서 절 시험하시는것인지, 저에게 이유 없는 방황의 시간들이 닥쳐왔습니다. 그렇게 좋았던 회합에 충실치 못하게 되고, 하고 있던 일도 짜증만 더해 갈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쁘고, 편안만 했던 마음이 저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저의 생활리듬이 깨어져 버렸는데도 저 혼자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만 할 뿐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서 풀려고는 생각지도 않았읍니다.

이러한 때 회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회합을 하기 싫고 지루하며 나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만 생각했지 내가 먼저 나서서 회합을 하자고 하거나 가노청 회원으로써 활동을 열심히 하자고 요청하지 못한 점들이 저를 더욱 더 힘들게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가노청을 떠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노청 회원들을 저버리고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누가 그랬던가 가노청을 떠나는 사람이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 전 지금껏 가노청에 몸 담으면서 하면서 회원들에게 받기만 했기 때문에 더욱 더 떠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지금껏 기회를 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받은 만큼 아니, 그 씨앗으로 다른 모든 이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말입니다.

정범이는 여러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이번 글을 통해서 하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지도 않는 정범이를, 또 심심하면 회원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남기려고 한 레오를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고, 사랑을 나누어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지금까지 가노청활동 하면서 깨져 보기도 했고, 스스로 자포자기 하려고도 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가노청 회원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하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정범이가 가노청을, 가노청 회원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끝으로 여러분들께 미안스럽게 생각된 점은 저의 개인 보고서인데 중간 생략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니까 다음 기회에 정범이의 실체를 완전하게 벗길 때가 있으리라 믿으시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은 마지막 순서로 구로본동 본당 촛불팀 정영선 회원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구로본동 촛불팀의 정영선입니다.

저는 ˙74년 2월 경북에 있는 두엄이라는 작은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늘 외로워 하며 자라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희 7남매를 키우시기 위해 하늘에 별을 보고 일어나 별을 보고 들어오시는 부모님을 그 땐 이해할 수 없어 속상해 했습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언니랑 오빠랑 셋이서 생활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긴 했어요.

어느 날 하늘에 별이 반짝 반짝한데 혼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는 언니를 보고 놀랍고 존경스럽고 고마워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 땐 언니가 엄마로 보이더라구요. 중3말이 되어 진로를 결정해야 했을 때 부모님께선 집안 형편도 어려우니 언니들이 간 상업 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하셨고 저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힘들어 하시는 걸 알면서도 아들은 대학까지 보내고 딸은 가고 싶은 고등학교조차 보내 주지 않는 부모님이 야속했습니다.그래도 부모님 뜻에 따라 상고에 진학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교생활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들도 참 많았지만 적응이 잘 되지 않았고 친구와 갈등으로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92년 11월 현장 실습기간이 되어 자리를 찾아가야 했을 때 저는 언니들이 있는 이곳 서울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유화 주식회사로 입사 입사하여 시작된 사회생활은 두렵고 낯설긴 했지만 마냥 좋았습니다. 사장님, 전무님, 대리님은 아버지, 어머니 혹은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처럼 절 예뻐해 주셨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며 사회가 마냥 냉정하고 무서운 곳이라던 선생님 말씀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부도가 난 회사였고, 그들은 제 앞에서 공장 처분과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또 날마다 걸려오는 채권자들의 전화에서 폭언을 듣게 되었고, 폭력을 쓰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곱게 자란 저에겐 충격과 불신 불안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때 가노청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신부님과 회원들을 만났을 때 호기심과 반항심이 일어났습니다. 처음 보는 저에게 너무 다정하게 대해 주 셨거든요. 겉치레가 심한 사람들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

저는 촛불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주) 한국유화에 사직서를 내고 친구들의 소개로 다시 (주) 코리아나 화장품에 1월 25일 입사했습니다. 새로운 각오로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열심히 새로운 일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을 때 느낀 당혹감이란? 그곳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실적을 많이 올려야만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고 실적이 떨어졌을 땐 인격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위해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목표달성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듯 했습니다.

회합날만 기다렸고 회합에서 힘을 얻어 회사에 나가면 힘이 쪽 빠져 버렸습니다. 월말이면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빴고 엄청난 업무량으로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가 하면 밤을 새는 수도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심해지는 인간성 상실을 보며 많이 망설이기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사직서를 냈습니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가노청을 더 깊이 알고 싶고 다시 사회에 나갈 때 가노청의 한 사람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례





젊음 노동 신앙 1. 연합회


˙92년 6월 9일 수요일 저녁 8시. 돈 보스꼬 센터.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남부 연합회 회의실.

"다 같이 개회 기도로 시작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오, 주여!

내 삶의 모든 것을 주께 바치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실히 살게 하시어 세상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판단하게 하소서. 또한 우리를 어려움 중에 있는 동료들 가운데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노동자들이 복음 안에 살게 하시고 모든 이들이 하나되어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게 하소서.

사도들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성요셉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소화 데레사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한국의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우리를 강복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어서들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그 동안 별고 없으셨죠? 오늘은 원래 본당 별 상황과 회합 내용을 나누는 날입니다만, 지난 주에 하기 수련회 준비가 촉박하다는 본당 회장님들의 요청에 따라 다음 주로 본당 나눔을 미루고 오늘은 하기 수련회에 대한 행사 나눔을 시작 하겠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도 사업보고 시간에 올해에는 오는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연휴를 이용해서 하기 수련회를 갖기로 계획했습니다. 여러분들 각 본당에서도 하기 수련회에 참여시킬 일반인들을 초대하느라 바쁘신 줄 압니다. 지난 달 셋째 주에 하기 수련회에 대한 안건을 받았습니다만, 더 나누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연합회장 연수의 말에 각 본당의 회장단들은 특별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연수는 계속했다.

"그럼 이번 하기 수련회의 주제부터 잡기로 하죠. 지금까지 들어 온 주제들에 대해 서기가 발표해 주시죠."

연합회 서기 이연길 가브리엘이 연합회에 접수된 주제에 대해 발표했다.

"안건이 접수 된 순으로 발표하겠습니다. 구로 3동에서는 '노동자로서 직업 선택의 관점'이란 주제가 올라 왔구요, 독산동에서는 '신앙인으로서의 공동체 삶', 구로본동에서는 '현 사회 흐름에 따른 우리들의 올바른 가치관'이 올라 왔습니다."

"그러면 각 본당에서 올린 주제에 대해 회장님들의 제안 설명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안을 내신 구로 3동에서 말씀하시죠."

"저희 구로 3동에서는, 요즘 노동자들의 이직율이 높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요. 그렇게 자주 직장을 옮기는 이유가 무엇이고 또 옮길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를 함께 나누기 위해 '노동자로서 직업 선택의 관점'이라고 잡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구로 3동 회장 숙희의 말이었다. 이어 독산동 회장 준철이가 말했다.

"아직도 개인적인 신앙생활만 중시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엔 사회 안에서 이웃과 함께 하는 신앙에 대해 나누기 위해 '신앙인으로서의 공동체 삶'이란 주제로 잡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지난 본당 월례회에서 나왔습니다."

구로 본동의 회장 숙연이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엔 사회가 너무 급속도로 바뀌어 가지요. 어떤 때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혼란스러운 때가 있어요. 그래서 이번 하기 수련회에서는 '현 사회 흐름에 따른 우리들의 올바른 가치관'이란 주제로 나누었으면 해요."

"다른 본당에서는 어떤 주제가 나왔습니까?"

연합회장 연수가 묻자, 신정동에서 대답했다.

"저희는 본당 사정상 이번 월례회에서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주제를 잡는 것이 좋을지, 나누어 보기로 하죠."

각 본당의 회장들은 나름대로 자기 본당의 의견들을 설명하면서 토의가 진행돼 나갔지만 뚜렷하게 한 주제로 모으지는 못했다. 한 쪽 옆에서 회장들의 주제 발표안을 듣고 있던 연수는 하기 수련회의 주제들이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기 수련회도 하나의 교육행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일반인들도 초청하여 함께 하는 자리인데, 너무 구체적이거나 부담을 주는 주제를 잡으면 좀 무거워지지 않을까요?"

연합회장의 질문을 들은 각 본당의 임원들은 회장의 지적에 대해 나름대로 인정을 하기는 했지만 뚜렷한 대안이 나오지 않아 회의는 공전되고 있었다. 그때 전에 전국본부 회장을 역임했던 구로 본동의 투사가 발표를 했다.

"연합회 모임에서 각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올린 안건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다른 내용의 주제를 잡는다는 것은 무리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특별히 한 주제가 잡힐 수 없다면 성서에서 한 구절을 선택하여 주제로 정하고 추후에 다시 논의하여 소제로 보충하는 것이 어떨까요.?”

회장들은 이 의견에 동의했고 성서 구절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회장들이 찾은 구절은 루가 복음 7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되살려 주시면서 하신 말씀인 "젊은이여 일어나라."가 좋겠다는 데 합의했다. 이어서 하기 수련회의 장소 및 강사와 사례발표자 선정과 프로그램을 잡기 시작했다.

"이번에 연합회에서는 하기 수련회 장소를 '용인 영보 수녀원'으로 잡았으면 하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연합회장 연수의 의견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회장들도 있었다.

"매년 수련회를 시설에서만 했는데요. 이번에는 산행을 하거나 야영을 하면서 직접 우리가 밥을 해 먹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은데요."

구로 3동 회장의 이 제안을 연합회 여회장 영숙이가 받았다.

"그렇게 하자면 지금 현재 저희가 해 왔던 방법대로는 안 되겠네요. 저희는 매년 교육면을 많이 치중해 왔는데, 직접 밥을 해 먹거나 산행을 하게 되면 시간적으로 많이 쫓기게 되어 다른 방법의 프로그램과 다른 차원의 운영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돼요. 만일 한 본당에서 이번 하기 수련회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몰라도, 지금 투사 선서 전 교육이 진행 중이라 사전 답사나 준비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본당 회장님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한 번 본당 별로 대표자들을 선정하여 하기 수련회 준비 위원회를 구성해서 준비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각 본당 별로 중심 활동 회원들은 임원으로서 하기 수련회 준비를 위해 역할 분담이 되면 그것도 준비해야 하고, 나머지는 거의 투사 선서 대상자들이어서 예비회원들 뿐이었다. 그런데 일반인까지 초청하는 하기 수련회를 예비회원들에게만 맡긴다는 것은 좀 무리한 상황이라는 의견이 들어와 다시 연합회에서 제시한 용인 영보 수녀원으로 결정 되었다. 그리고 본당 회장들은 강의를 청할 강사분들의 후보 명단을 제시해 연합회에서 추진하기로 했고,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다. 예년의 프로그램과 새로운 안을 수렴하고, 수녀원 근처에 부녀자들을 보호하는 성모 자애원이 있다는 장소적인 특성을 살려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을 짰다.

그리고 독산동에서는 불놀이를, 삼성산에서는 수련회 장소 환경 장식을, 구로본동에서는 다과를, 신정동과 구로 3동에서는 미사 준비를 하기로 역할을 분담했고 차내에서의 프로그램 진행자 선정은 각 본당 회장들이 추천하는 남녀 회원 한 명씩을 준비시키기로 했고, 회의가 길어져 시간 관계상 사례발표자의 선정은 연합회 임원들이 강사 선정과 연결시켜 추진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지막 신부님 말씀 시간에 누구를 하기 수련회에 초대해야 할 것인지를 잘 생각하자는 의견과 아울러 최근 한국 내에 늘어 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제안이 있어 연합회에서 같이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럼 폐회기도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로 하기로 하죠.

나가세! 주의 부르심에 그리스도를 따라나가세.

온 세상 사람을 주의 품안에 다 불러들이세.

형제여, 그리스도의 용사여, 장하고 강직한 용사.

굳게 뭉쳐 손에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가세.

그리스도 왕께!

충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아멘.

자, 안녕히 돌아 가십시오.”

하기 수련회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모두들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연합회장단들은 강사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초대를 한데 묶어 서울교구 노동 사목 위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상담소를 통해 추진했다. 다행히 본당 회장단들이 올린 강사 후보자 명단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선배인 박 리디아 자매님이 상담소장을 역임하고 있어서 강사겸 통역을 위해 참석해 주시기로 해서 쉽게 해결되었다. 사례발표자는 최근 현장뿐 아니라 사무실 단순 노동자들이 많아지는 세계적인 추세를 감안해 구로본동 본당의 사무실팀에서 맡기로 했다. 그리고 수련회 안내 책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회장단들은 특별히 일반인들의 초청 때문에 초대의 글이나 기도문을 부담없이 꾸미는 데 아주 애를 먹어 아래와 같이 인쇄했다.

수련회를 시작하며

"노동과 활동, 그리고 무더위에 지친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연과 함께 편안히 쉴 수 있고 소중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마련 하였습니다.

이 자리는 젊은 노동자들이 마음을 열고 서로의 삶을 나누며, 개인주의에 물들어 가는 현실속에서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쁹기보다는 공동체의 따뜻함을 느끼는 진실한 대화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젊은 노동자들이 노동과 삶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기쁨을 안고 사는지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가치에 부응하는 삶은 무엇이며,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각자의 활동 방향을 쁹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항상 소외되어 있는 이들과 함께 하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활동을 반성하고 심신도 편안히 쉴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빕니다."

차례





젊음, 노동, 신앙 2. 본당과 팀


6월 15일 화요일 저녁 8시 구로본동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합실. 여울팀 회합.

"나눔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안건은 하기 수련회에 대한 것입니다."

여울 팀의 투사격인 영희는 그 날 팀회합 내용인 생활나눔을 마치고 기타토의에 들어갔다.

"우선 연합회에서 잡힌 것에 대해 알려 드리기로 하죠. 지난 번에 우리 본당에서 올린 '현 사회 흐름에 따른 우리들의 올바른 가치관'이란 주제는, 무슨 답이나 어떤 방향을 가지고 유도하는 기분이 들어 일반인들에게 다소 부담이 된다는 지적에 따라 채택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그냥 루가 복음 7장 14절의 성서구절을 인용해 '젊은이여, 일어나라'로 선정되었답니다."

"다른 본당에서는 의견이 없었나요?"

여울 팀 서기 미순이가 물었다.

"구로3동에서는 '노동자로서의 직업 선택 관점'을 올렸고, 독산동에서는 '신앙인으로서의 공동체 삶'이란 주제를 올렸는 데, 독산동의 것은 신자 아닌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너무 구체적인 것이고 구로3동 은 사람을 초대해 놓고 따지거나 주입하려는 인상을 준다는 우려로 역시 채택되지 않았답니다."

영희 대답에 회원들은 연합회의 결정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동의를 했고, 영희는 말을 계속했다.

"장소는 교육을 충실히 할 수 있는 무난한 장소로 3년만에 다시 '용인 영보 수녀원'으로 가기로 했고, 일자는 변동없이 7월 16일 금요일 8시 30분부터 7월 18일 일요일 오후 5시까지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본당은 다과를 준비하는 것으로 역할분담을 했습니다.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 불러 드릴테니까 받아 적으세요.

7월 16일 금요일

20:30 -- 21:00 돈 보스꼬 센터 (접수 및 승차)

21:00 -- 24:00 차 안에서....

24:00 -- 01:00 시작 기도와 취지 설명

01:00 -- 07:00 멋진 내일을 위한 꿈속으로

7월 17일 토요일

07:30 -- 08:00 기상 및 세면

08:00 -- 08:30 등산로 조깅

08:30 -- 09:30 아침 식사

09:30 -- 10:30 인사 소개

10:30 -- 11:30 사례 발표

11:30 -- 13:00 강 의

13:00 -- 14:00 점심 식사

14:00 -- 15:00 자유 시간 (수영)

15:00 -- 17:00 조별 토론

17:00 -- 18:00 조별 발표

18:00 -- 19:00 저녁 식사

19:00 -- 21:00 본당 및 개인 장기자랑

21:00 -- 23:00 모닥불 놀이

23:00 -- 07:00 내일이 기다리고 있네요, 꿈나라

7월 18일 주일

07:00 -- 08:00 기상 및 에어로빅

08:00 -- 08:30 세면

08:30 -- 09:30 아침 식사

09:30 -- 12:00 추적 놀이

12:00 -- 13:00 점심 식사

13:00 -- 14:00 자애원 방문

14:00 -- 15:00 자유시간 (수영)

15:00 -- 16:30 파견 미사

16:30 -- 17:00 짐 챙기고 뒷정리

17:00 -- 17:30 저녁 식사

17:30 사진 촬영 및 서울로 출발

“이상의 내용 중에 질문하실 것이 없으면, 참석할 분들의 인원을 점검하기로 하죠."

"다른 본당은 뭘 맡기로 했어?"

정현이가 물었다.

"응, 그것까지는 전달받지 못했는데, 나중에 숙연이 언니에게 물어서 알려 줄게. 참 정현이 너도 이번에는 가지? 연휴니까 괜찮을 거야. 누구 데려와도 좋고?"

웃으면서 영희가 묻자, 모두 정현이를 바라보았다. 그 동안 정현이는 시간이 없다면서 팀회합만을 나오기로 했었다.

"좋아, 별일 없으면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가지."

"'별일 없으면'이 뭐야? 그냥 가면 되지."

"그래, 갈게."

이 말에 모두 환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참, 미순이는?"

"나? 당연히 가야지! 내가 안 가면 누가 가니? 물어 보는 게 이상하다, 얘. 그리고 난 이번에 누구 한 명 데리고 갈 거야."

"누군데?"

"응, 재균이라고 남자야."

"야, 너 우리 몰래 숨겨 둔 남자 친구 있는 거 아냐?"

"남자 친구? 아냐, 남자 친구라도 있으면 좋겠다. 걔는 우리 윗 집에 사는 청년인데, 우리 언니가 소개해 주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 전화국에 입사해서 전화 가설하러 다니는데, 신앙을 갖고 싶어 한다기에 이번 기회에 같이 가려고.? 영희 너는 누구랑 같이 올래?"

"나? 난 준선이를 데려가기로 했어. 너희들도 알걸 우리 국민학교 동창이야! 성준선이라고 미술대학을 가기 위해 3수 했다가 이번에 정근해상 업무부에 들어 갔어. 이번 기회에 하기 수련회도 같이 가고, 노동자 교리도 받으면서 우리 팀에 초대해야겠어. 너희 생각은 어떠니?"

"아, 그 예쁘장한 애? 좋지, 좋아!"

"아, 그 4학년 때 전국미술대회에 나가서 우수상 탄 애 아냐?"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럼. 그래서 왜 그 애 집에 가서 저녁 얻어 먹었잖아. 아, 너희들은 참 같은 반이 아니었지."

"참 영선이 너는 왜 가만히 있니? 별로 마음에 안 드니?"

"마음에 안 들긴? 모르니까 그렇지. 난 너희들하고 같은 학교를 안 다녔잖아. 그래도 너희가 좋다는 애면 나도 좋아."

영선이는 그 동안 여울 팀의 창단 멤버들이 결혼과 이사로 다 떠난 다음에, 정현이와 같이 새로 들어온 데다가 나머지 네 명과는 구로동에서 같이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럴 땐 외로움을 느낀다기 보다는 할 말이 없어 했다.

"괜히 미안하다, 얘."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니? 나도 한 명 데려오기로 했어."

"그래 정말?"

"누군데?"

"남자야?"

"야, 니네 왜 오늘따라 남자 타령이니? 우리 사무실에서 나하고 같이 경리도 보고 외근도 나가는 아인데, 나이는 열아홉이고 전남 광양 출신이야. 이름은 양은정이야. 니네 걔 모르지?"

영선이의 이 말에 모두 웃었다.

"돈님이는 어떻게 할래?"

"나도 가, 난촛불 팀과 같이 할 테니까 여기선 빼도 돼."

촛불팀은 신생 예비팀이다. 그래서 장돈님 리디아가 여울팀에서 팀회합을 함께 하면서, 촛불팀에 지도투사로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 참 촛불 팀원들은 다 간다고 했니?"

"잘 모르겠어. 경연이가 이사간다고 했는데, 이번에 참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혜연이는 갈 것 같애, 또 영선이도 아마 별일 없으면 갈 거고, 진이는 그 때 방송 통신 대학 수업이 있어서 못 간다고 했고, 참 '숙녀 플러스 여성 마이너스 깍뚜기' 팀은 이번에 참석하게 되나?"

"응, 그 팀은 아직 상고생들이기 때문에 전부 다 참석하기엔 이르고, 신부님하고 주일학교 교사들하고 상의해서 팀장 선경이 정도는 데리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직 모르겠어."

오 선경이가 팀장으로 있는 '숙녀 플러스 여성 마이너스 깍뚜기' 팀은 여자 상업 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이른바 가톨릭 노동 청년회 청소년 팀이다. 그 팀은 본당의 주일학교 정규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칫 인문계 중심의 교육 형태에서 소외될 우려가 있다고, 지도 신부님이신 신 신부님께서 준 예비팀 수준으로 삼아서 지도해 달라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부탁하여 영희가 함께 하고 있는 팀이다. 팀원들은 고1 두 명과 고2 세 명, 고3 한 명, 총 일곱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팀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영희는 이번 하기 수련회에 고 3 인 팀장 오선경만이라도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그럼 우리 팀은 총 아홉 명이 참석하는 것으로 회장단에게 알릴게. 그리고 역할 분담 문제는 다음 주에 있을 본당 임원모임 때 준비해서 마지막 주일 본당 월례회 때 전체 회원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다룰 거야. 하기 수련회에 대해서 별 다른 이야기는 없니?"

"참, 작년에 보니까 불놀이 같은 것을 준비하는 회원들은 당일 교육에도 못 들어 오고 하루 종일 거기에만 매달려 있어 안쓰럽더라. 이번에는 예년처럼 준비하느라 너무 시간 뺏기지 않게 본당에서 준비할 것만 다 준비하고 나무 쌓고 그런 것은 간단하게 했으면 좋겠어. 나무를 쌓는다던가 기름을 먹인다던가 하는 것도 잘 준비해야 하겠지만 그것 잘 준비 못했다고 불놀이가 완전히 망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내 생각엔 실제로 준비해야 할 것은 행사 내용인 것 같애.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모든 회원들과 참석자들이 골고루 서로 어울릴 기회를 많이 제공하느냐, 또 마이크를 잡은 회원이 어떤 말로 수련회 주제의 의미를 더 살리느냐, 어떤 방법으로 해야 우리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정신과 방법을 깊이 새기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어 준비했으면 좋겠어!"

여울팀 회원들은 모임을 폐회기도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21일 월요일 저녁 8시. 구로 본동 가톨릭 노동 청년회 임원모임.

본당 임원 모임에는 본당 남, 여회장과 서기 및 회계와 공보를 비롯하여 각 팀의 투사들과 투사가 없는 팀은 팀장이 참석했다. 남회장 정복이가 사회를 보았다.

"안녕하셨습니까? 일 주간 동안 팀회합 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촉박하게 연합회 결정 사항을 통보해 드리느라 여러 가지로 힘드셨겠습니다. 오늘은 우선 각 팀의 하기 수련회 참석 인원을 점검하고, 팀회합에서 나온 건의나 기타 사항을 나누어 월례회 때 회원들에게 제시할 내용을 준비하기로 합시다. 그 밖에 다른 것도 다룰 것이 있으면 여기서 나누기로 하죠. 다른 안건 내 놓으실 분이 있으면 먼저 이야기 하시죠."

"저기 이번에 하기 수련회 일자와 서울교구 사제서품일자가 겹쳤는데 어떻게 하죠. 이번에 서품받으실 분 중에 우리 가톨릭 노동 청년회 남부연합회 출신 공 바오로 신부님이 계신데요. 안 갈 수도 없고."

횃불팀장 공석이가 말했다.

"그래요? 그게 몇 일이지요?"

"우리가 하기 수련회를 떠나는 7월 16일 오후 2시 잠실 체조 경기장에서 있답니다."

"그래요? 그럼 이따가 함께 다뤄 보기로 하죠? 또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정기총회 준비에 대해서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눔팀장 희경이가 말했다.

"그래요, 그것도 다뤄야 하는데, 정기총회 건은 간단하지 않은데, 어떻게 할까요? 전에는 8월에 하기 수련회를 다녀오게 되어 좀 바빴는데, 이번엔 7월에 연휴가 있어 가는 거니까, 갔다 와서 다뤄도 되지 않을까 하는데요, 여러분들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일자하고 준비 사항을 먼저 공지라도 해 둬야 되지 않겠어요?"

"그렇군요. 그리고 다음 의견은요?"

횃불 팀 투사 장성이가 말했다.

"투사 선서 하고 구로 본동 본당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설립 10주년 행사 준비는 어떻게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아, 참. 그것도 다뤄야 하는데, 이따가 이야기 하기로 하죠. 아휴, 오늘 다룰 것이 너무 많네요 빨리 진행하도록 합시다. 첫번 째로 각 팀의 하기 수련회 참석 인원을 지도 투사를 포함한 팀원과 일반인을 나누어 알려 주시죠."

"횃불 팀은 팀원 5명 전원 참석과 일반인 2명이 참석하여 총 7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나눔 팀은 팀원 2명과 일반인 1명, 계 3명입니다."

"여울 팀은 팀원 5명, 일반인 3명, 그리고 숙녀 플러스 여성 마이너스 깍뚜기 팀의 팀장 1명 그래서 총 9명입니다."

숙녀 플러스 여성 마이너스 깍뚜기라는 팀 명을 발표할 때 모두 웃었다. 너무 길고 참으로 애교 있는 팀명이기 때문이었다.

"촛불팀은 팀원 네 명 중에 두 명, 일반인은 아직 없습니다."

"거긴 왜 둘 밖에 안 갑니까? 요새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신생팀이라 부담스러워 하나요?"

회장이 물었다. 돈님이가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 저는 여울팀 인원 댈 때 포함되었고, 한명은 그 때 방통대 수업이 있어서 빠지고, 한 명은 지난 주 팀회합 때 시골로 이사간다고 송별식을 했어요."

"한 명이 누굽니까? 비밀이 아니라면 가르쳐 주시죠."

"네, 경연이에요."

"송별식이라도 참석했어야 했는데, 그냥 보내서 섭섭해 했겠어요."

"아녜요, 자기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간다고 생각하니 미안하다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 당부해서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거에요. 나중에 주소 드릴테니 편지라도 하세요."

"그러기로 하죠. 신부님은 아십니까?"

"예, 지난 주에 송별식 같이 하셨어요."

"그런데 왜 우리 임원단에 알려 주시지 않았지?"

"저보고 연락하라고 했는데, 제가 잊어버렸어요."

"그건 그렇고, 다음 팀 보고 받죠."

"예, 한우리팀, 팀원 5명에 저는 횃불 팀에 들어 갔으니까 빼고, 일반인 1명, 총 5명입니다."

"옹달샘팀, 팀원 4명에 일반인 5명, 총 9명입니다."

"거긴 왜 그렇게 많아요?"

"네, 제가 라인에서 4명 데려 오기로 했어요."

"수고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모두 팀원 22명에, 일반인 13명, 총 35명 이네요. 계산 맞습니까, 회계님?"

"예, 맞아요."

"자, 그럼 다과 준비로 들어 갑시다. 다과는 무엇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남회장 정복이의 질문에 여회장 숙연이가 대답했다.

"그건 저희 여회원들이 알아서 할게요. 횟수가 4번 맞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갈 때 저녁 못 먹고 바로 퇴근한 사람들 위해 간식 한 번, 다음 날 그룹 나눔 할 때 한 번, 저녁에 불놀이 할 때 한 번, 다음 날 추적놀이 할 때 한 번 총 네 번 맞습니다. 어, 이번에는 여회원들이 이렇게 나서시니 감사합니다."

"언젠 뭐 안 그랬어요? 저희가 간식 식단 짤 테니까, 물건 사러 갈 때 도와 주기나 하세요."

"그럼, 그렇지!"

모두 다 웃었다. 그리고 하기 수련회에 관해 연합회에 올릴 안건들을 수렴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 갔다.

"우선 처리하기 쉬운 것부터 다루기로 하죠."

"투사 선서 일정과 10주년 행사요?"

"그게 제일 간단한가요?"

"그렇죠. 정기총회하고 사제서품 건은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요."

"벌써 시간이 아홉 시 반인데, 천상 오늘 다 다룰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정기총회 일정은 관례대로 9월 셋째 주인 19일에 잡혀 있는 대로 하고, 각 팀에서 보고서를 준비하라는 공지사항 정도로 하고 하기 수련회 갔다 와서 준비하기로 하죠."

"10주년 건은요? 지난 번에 정기총회 일자에 맞추어 하기로 했는데요."

촛불팀 투사인 돈님이가 질문을 했다.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죠?"

"내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어떤가 해? 정기 총회하고 10주년 행사를 분리하는 거야. 우리 정기 총회 만큼은 충실히 하자고! 괜히 10주년 행사까지 함께 한다고 해서, 정기 총회 때 정작 깊이 들어 가야 할 보고서들이나 주제 안건 가볍게 다루지 말고. 어떻게 생각해? 차라리 10주년 행사는 투사 선서 축하식과 함께 치르면? 어차피 그 땐 투사 선서자들만 바쁜 거 아냐? 나머지 회원들은 정기 총회에 비해 여유가 있잖아?"

장성이의 이 말에 나눔 팀의 희경이가 동의했다.

"그것도 참 좋은 생각이네요. 사실 저희도 개인 보고서를 다 쓰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부담도 상당히 됐는데. 그렇게하면 부담도 덜고요. 대단하지도 않은 저희들을 위해 거창하게 축하식한다고 하면 저희도 부담되는데요."

"누가 거창하게 축하식한다고 했나? 간단하게 하자고, 간단하게!"

장성형제의 이 농담에 모두 다 웃었고, 희경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을 보고 숙연이가 역성을 들었다.

"아이, 선배님은요? 투사 선서면 성대하게 해야 되는 건데, 뭘 그래요? 선배님은 성대하게 안 했어요?"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야. 암 성대하게 해야지! 그래도 여회장이라고 여회원들 편드 네?"

그래서 또 한 번 웃었다.

"그럼 투사 선서식 날짜는 언제로 정할까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아직 투사 선서 전 교육도 안 끝났는데. 교육 다 끝나면, 그 때 가서 잡으면 되잖아요."

계속되는 웃음거리로 회원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한창이의 이 한 마디 말로 문제들이 다 종결되어 버렸다.

"그럼, 다 끝났나요?"

"아뇨, 아직. 서품식 건이 남아 있어요."

"참, 그거 어떻게 하죠?"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남부 연합회 출신으로 서울에서 처음으로 서품을 받는 공 바오로 신부님은 단순히 선배로서만이 아니라, 그 동안 지도 신부이상으로 회원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정성을 쏟아 왔었다. 비록 방학 때나 볼 수 있었지만 항상 방학이 되면 학기 동안 준비한 자료들과 생각들을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래서 서품식에 참석 안 할 수도 없고, 참석하자니 그나마 일찍 끝나는 사람이나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선발대로 가서 하기 수련회를 준비하기로 다 배정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문제는 우리뿐만 아니라, 연합회에서도 다루어야 하니까 거기에 따르기로 하죠. 만일에 예정대로 하기 수련회를 가게 되면, 우 리 본당에서는 제가 월차휴가를 내어 참석하기로 하겠습니다."

연합회 여회장인 나눔 팀 지도 투사 영숙이가 제안을 했다. 다들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끝냅시다."

회장의 이 말에 서기 한창이가 말을 이었다.

"참, 아까 처음에 말하려고 했는데, 안건 받아쓰느라 말할 기회가 없었어요."

"뭔데?"

좀 피로한 듯 회장이 물었다.

"연합회 기도모임 지향요."

연합회에서는 매월 첫주에 있는 수요미사와 둘째 주 본당 나눔, 셋째 주 행사나눔 외에도 넷째 주에 떼제 수사님들을 모시고 기도모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월례 수요미사와 기도모임에는 전 회원들이 참여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고, 특별히 기도 지향을 선정해서 제출해 왔던 것이다.

한창이의 이 말에 아무도 생각을 못해 왔다는 듯, 기도지향에 대해 별 제안이 없었다. 시간은 벌써 10시 25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후에 영희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모두들 놀라며 영희를 바라 보았다.

"참, 이번에 외국인 노동자들도 하기 수련회에 초대하기로 했다죠. 이번 기도모임의 기도 지향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바치는 것이 어때요? 그리고 바치는 김에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나라 노동자들까지 합쳐 모든 외국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바치는 거에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좋은 생각이라고 채택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회합을 마쳤다.

"폐회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주여!

우리의 모든 잘못과 활동의 소홀함을 용서로 청하오니 들어 주시고 우리 마음에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시며,'오직 당신의 뜻을 이룬다는 진실 외에는 아무것도 바람 없이 저의 생을 주께 바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이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결심한 것을 잘 지킬 힘을 주시고 그 결심을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사도들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성요셉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소화 데레사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한국의 순교 성인 성녀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우리를 강복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월례회는 다가 오는 주일, 27일 저녁미사 후에 있겠습니다."

차례





젊음 노동 신앙 3. 하기 수련회


1993. 7. 16. 토요일. 저녁 9시. 돈 보스꼬 센터 앞 관광버스 실내.

"오래 기다리셨죠, 여러분? 이제 출발하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까 접수할 때 받으신 하기 수련회 책자를 모두 꺼내서 2쪽을 펴주십시오. 다 피셨습니까?

그럼 하기 수련회 책자 2쪽에 있는 '개회기도'를 다 같이 바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주님!

오랜만에 도심의 각박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좋은 친구들과 함께, 2박 3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일터에서의 힘든 노동을 잠시 멈추고, 여러 가지의 고민과 어려움과 저의 모든 시간도, 잠시 동안 당신께 맡긴 채, 어린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마음껏 이 안에 빠져들고 싶습니다.

이 수련회를 통해서, 젊은 노동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알게 하시고, 보다 의미 있는 삶에 투신할 수 있도록 함께 하소서.

아멘."

하기 수련회의 막은 올랐다. 차는 ‘부르릉’ 하며 떠나기 시작했고, 서울의 밤거리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들어가면서 선경이는 설레임과 두려움을 간직한 채 창 밖의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항상 매연으로 덮혀 하늘이 잘 안 보이던 구로동과는 다른 맑은 모습이었다. 하늘에 별과 달이 보인다. 신부님은 사제서품 축하 저녁 식사 관계로 선경이를 돈 보스꼬 센터에 데려다 주고 내일 보자며 첫 밤을 혼자 지내야 하는 선경이의 두 손을 꼭 잡아 주고 떠나셨다. 영희 언니도 선경이와 함께 오지 못했다. 신부님께서는 영희 언니가 은행 일이 늦어져 좀 늦게 온다 는 전화가 왔다고 하시더니, 차가 떠날 때까지 영희 언니는 참여하지 못했다. ‘오늘 안 오나보다!’ 다행히 신부님께서 선경이를 꼭 데리고 다니면서 책임지라고 했던 영희 언니와 같은 팀원인 돈님이 언니가 옆에 있었지만, 선경이는 왠지 낯설고 거북하다.

그때 갑자기 스피커에서 선경이의 이름이 나왔다. 선경이는 깜짝 놀랐고, 혹시 잘못 들었나 해서 고개를 쳐들고 눈이 빠져라 앞을 바라 보았지만 사회자는 선경이를 부르고 있었다.

"오늘 여러분에게 특별히 소개시켜 드릴 귀여운 숙녀가 한 분 계십니다. 구로본동에서 온 '숙녀 플러스 여성 마이너스 깍두기' 팀의 오선경 베로니카 양입니다. 여러분 모두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마자, 계속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와 오락을 진행하던 언니와 오빠가 선경이를 불러 냈던 것이다.

"이리 앞으로 나오세요?"

"여기 어떻게 해서 오게 되셨어요?"

"신부님이 가라고 하셨어요."

"신부님, 어디 가셨어요?"

"신부님은 공 바오로 신부님 사제서품 축하 식사하러 가셨어요."

"혼자 무서워요?"

선경이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속 마음을 읽고 있는 것만 같았다.

"놀라지 마세요. 아까부터 제가 계속 보고 있었어요. 혼자 가만히 창 밖만 쳐다 보고 있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지금 보니까 선경이었어요. 아까 신부님이 떠나시면서 저에게도 말씀해 주고 가셨어요. 꼭 노래 시키라고요!"

이 말이 나오자 모두들 웃음이 터져 나왔고, 선경이도 긴장이 풀어져 웃고 말았다. 선경이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라는 소리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평소에 부르던 '걸어서 저 하늘까지'란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사람들은 선경이도 의외랄 정도로 박수를 아주 아주 힘차게 쳐 주었고 앙코르곡까지 청했다. 선경이는 이어서 '질투'라는 노래를 불렀다. 역시 사람들은 소리까지 지르면서 박수를 쳐 주었다. 선경이는 한편으로는 어색하기도 했지만 좋았다. 자신의 긴장을 풀게 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이 환영의 분위기가 좋았다. 이 분위기는 선경이에게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것 같았다.

"잘 불렀어요. 이렇게 잘 하는 줄 알았으니 다른 분이 더 못 부르겠어요."

"아까, 떨려서 잘 못 불렀어요."

선경이의 이 말이 회원들을 웃겼다.

"떨린 게 그 정도에요. 아까 제가 팀 명을 부를 때, 무척 길고 어렵다고 했는데, 누가 정했어요? 신부님이 정해 주셨어요?"

"아뇨, 신부님이 이 모임은 우리들끼리 하는 거라고 우리가 정하라고 해서 우리가 정했어요."

"팀 명의 뜻이 뭐에요? 한 번 설명해 주시겠어요?"

"처음에는 뭐 모닥불, 그림자, 사랑의 샘 등 이것 저것 다 나왔다가요. 시시하다고 생각해서 우리들은 숙녀이고, 영희 언니는 여성이라고 붙여서 넣어 주었어요. 그리고 다음에 신부님을 빼 버릴려다가 그래도 어디 그럴 수 있어요? 그래도 신부님인데. 그래서 그냥 함께 해 주시는 신부님을 깍뚜기라고 불러 '숙녀 플러스 여성 마이너스 깍뚜기' 팀이라고 팀명을 정했어요."

사회자가 웃음을 참지 못해, 한참을 웃다가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신부님이 뭐라고 해요?"

"신부님요? 신부님은 그냥 웃고만 계셨어요."

"그럼, 뺄려고 하다가 넣어 준 신부님이 회합을 함께 하면 재미 없겠네요?"

"있잖아요. 이건 비밀인데요. 신부님이 없으면 재미가 없어요."

선경이의 이 대답에 차내에 있는 회원들은 물론 운전기사 아저씨까지 웃으셨다. 선경이는 왜 웃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그게 비밀이에요? 신부님이 없으면 왜 재미가 없어요?"

"신부님이 계시면, 하다 못해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주잖아요?"

정말 우스웠다. 회원들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어 대는 바람에, 선경이는 한 동안 대답을 멈췄다. 잠시 후 웃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선경이는 계속 대답했다.

"그건 농담이구요. 누가 우리 같은 학생들의 말을 잘 들어 줘요? 다 어린애라고 무시하죠. 그런데 신부님은 우리 편에 서서 이야기도 잘 들어 주시고 질문도 하셔요.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다 받아 쓰셔요. 그럴 땐 우리가 무슨 스타가 되서 인터뷰하는 기분이에요. 그런데 신부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씀인데요?"

"지금은 신부님과 함께 하는 것이 좋지만, 게속 팀회합 하다 보면, 나중엔 부담이 될 때도 있을 거래요."

"그래요? 지금 또 누구와 함께 팀회합해요?"

"우리는 고1 두 명이랑요, 고2 네 명, 저, 그리고 선배 언니하고 함께 해요. 혹시 이 영희 도미니카 언니라고 아세요?"

사람들이 또 웃었다. 선경이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왜, 웃어요? 그 언니 이상한 언니에요?"

이번에는 더 크게 웃었다. 사회자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손만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요. 됐어요. 들어가세요."

선경이는 자리에 돌아오면서 걱정이 되었다. 웃는 것을 보니 이상한 언니는 아닌 것 같은데, 혹시 그 언니가 무슨 문제가 있는 언니라서 이러나보다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하니까 기가 막혔다. 그 언니 하나 바라 보고 왔는데,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선경이는 회원들이 자기가 말하는 표현과 억양 및 표정이 하도 진지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두 대의 차로 용인 영보 수녀원에 도착한 97명의 회원들은 곧 방을 배정받고 취침에 들어 갔다. 선경이는 피곤해서 일찍 잠이 들었다. 옆의 돈님이 언니는 자기보다 더 피곤한지 코를 심하게 골았다.

다음 날 아침. 선경이는 눈을 뜨자 마자, 혹시 밤 사이에 영희 언니가 왔나 싶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다. 선경이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을 갔다가 강의실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올 때가 되서야 비로소 영희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니?"

"선경아, 잘 잤니?"

"응, 잘 잤어."

"너 어제 인기 만점으로 데뷔했다며?"

"누가 그래 사람들이 그래?"

"그래 회원들이 그러더라. 너 어제 노래를 두 곡까지 부르고, 사람들을 그렇게 웃겼다고 하던데."

사람들이 언니에게 이미 다 말했나 싶어, 선경이는 어제의 그 질문을 언니에게 던졌다.

"언니, 있잖아."

선경이는 영희 언니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그래, 말해 봐. 뭔데?"

"응, 저기. 내가 어제 사회자에게 언니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글쎄 사람들이 다 웃잖아. 정말 이상하더라."

언니도 깔깔대며 웃었다. 선경이는 어이가 없었다. 이 언니가 실성했나 싶어, 두려움마저 생겼다.

"언닌, 왜 웃어?"

"응, 우리는 가족 같이 서로 다 잘 알어. 그런데 네가 나를 아느냐고 물었으니 웃을 수밖에!"

"다, 안다고? 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알아."

"응,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너 같이 처음 온 사람은 모르지만, 회원들끼리는 다 알아."

"어떻게 다 알어?"

"응, 참, 너 왜 처음에 소개할 때 부모, 형제, 학교, 학년, 반, 번, 집 전화번호, 취미, 혼자 있을 때 뭐 하느냐? 뭐 등등 질문이 많았지?"

"응, 그런데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해? 한 사람한테도 질문하는 게 여러 개인데 다른 사람 것까지 다 어떻게 기억해?"

"그러니까, 그 때 신부님이랑 언니가 노트에다 다 받아 적었잖아. 그걸 다 적어서 혼자 있을 때나 회합하러 올 때 자꾸 봐서 익히고 외우는 거야. 그러면 다 알게 돼. 너도 여기서 이따가 인사 소개할 때, 그냥 듣지만 말고 수련회 메모 책자에다 다 적고 되풀이해서 읽어 봐. 그러면 너도 알게 될 걸."

선경이는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투사 언니인 영희 언니의 설명과 실습을 통해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전에 강의를 하신 박 리디아 언니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선배라고 했다. 외국인 노동 상담소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인들이 7명이나 참석했다. 그 분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콧등이 시큰 할 때도 있었고 세계는 모두 하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민족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강의 도중 신부님은 외국인들 옆에 붙어서 서툰 영어로 통역을 하시느라 고생하시는 것 같았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필리핀과 파키스탄, 네팔에서 7명이 왔다고 했다. 선경이는 자기도 집을 떠나 여기 홀로 와 있지만 함께 하는 언니들과 오빠들이 잘 돌보아 주고 있기 때문에 잘 보내고 있듯이 저 외국인들도 누군가가 잘 맞아 들이고 도와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경이는 아직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어서 영희 언니가 은행 내에서 평신도 사도로서 활동한 것을 토대로 사례발표를 했다. 참 대단했다. 선경이는 언니의 발표를 들으면서, 자신도 직장을 갖게 되면 그렇게 활동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선경이는 점심을 먹고 언니와 언니 친구들과 함께 놀았다. 비가 와서 밖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지루한 줄 몰랐다. 열심히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펴 이름을 적고 다시 읽으며 오후를 보냈다.

오후 3시가 되자 선경이는 언니를 따라 분과 토의 방에 들어 갔고, 거기서 또 소개를 했다. 선경이는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소개를 하는 것인가 의아해 하면서 받아 적는 순간, 이것이 자꾸 되풀이 되면서 서로를 아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과 나눔 시간에 선경이는 대화가 이렇게도 깊이 들어 갈 수 있구나 하면서, 그냥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 하고 이런 식으로 나눔을 하는 것 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나가는 이야기나 심심풀이로 떠벌리는 단순한 농담의 연결도 아니요, 그렇다고 주제 토론이나 겉 멋이 들어 허풍을 떠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진지하게 서로의 삶을 듣고 나서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애정 어린 마음 속에서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 내용과 깊이는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해 말을 하는 이나 그 말을 듣고 있는 이에게까지 인간과 사회를 깊고도 넓게 볼 수 있도록 해 준다고 생각했다. 선경이는 그런 대화라면 속일래야 속일 수도 없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팀회합 안에서 부담없이 그냥 친구들과 이야기나 나누고, 주제를 정해 그 주제에 대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들을 토로하는 주제 토론에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 대화는 각자의 삶에 변화와 변혁을 꾀하며 동시에 또 요구하고 있었고, 그 변혁의 방향은 복음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예술이었다. 대화의 예술이었다.

분과 토의를 마치고 선경이는 대 강의실로 돌아가 전체 발표를 들었다. 회원들은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자기 분과에서 나눈 이야기의 내용들을, 각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도 앉아서 듣고 있는 이가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여 발표했다. 발표시간에도 웃기려고 하거나 그냥 발표해 버리고 넘겨버리는 식이 아니라, 거기서도 질문을 받고 또 다시 모색하는 모습이 정말 진지해 보였다. 영희 언니는 이것이 마치 팀회합에서 나눈 이야기를 월례회에서 발표하여 나누고, 또 연합회 차원에서 또 다시 다루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설명해 주었다. 정말 그렇다면 대단했다. 또한 영희 언니는 팀의 회원이 몇 명이냐 하는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가고, 나눔을 통해 회원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가 이 방법의 성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선경이는 영희 언니의 말대로 정말 그렇게 한다면 세상이 확실히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도 비가 계속 왔기 때문에 실내 강당에서 장기자랑을 했고, 불놀이를 대신 한 공동체 놀이를 했다. 비 때문에 밖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넓은 강당에서 한 쪽으로 책상과 의자를 배열하고 편하게 놀 수 있었다. 오전과 오후에 걸쳐 긴 교육을 마친 후라 선경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회원들도 피곤해 보였지만, 서로 어울리고 서슴없이 다가서는 회원들의 모습이 참 좋았다. 덕분에 자신처럼 처음 온 사람도 물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들과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특별히 마지막 촛불예식은 질서 정연 했고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기념 촬영을 했다. 선경이도 몇 번이나 함께 사진을 찍어야 했다.

선경이는 하루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영희 언니 옆에 누워서 언니가 하는 대로 같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선경이는 가서 팀원들에게 수련회를 알려 줄겸 오늘 하루의 행사를 정리한 후, 맨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정말 이 모임은 특별히 처음 온 이들이나 혼자 있는 이들에게, 함께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처음 온 사람이 주인이 되도록 키워 준다.’

선경이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선경이는 하늘이 그렇게 맑고 높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또 선경이는 그 하늘을 보면서 자기 팀원들을 생각했다. ‘같이 와서 이 광경을 보고 함께 배웠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선경이는 영희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언니, 왜 다른 아이들은 오지 못하게 했어? 같이 와서 보았으면 아주 좋았을텐데. 팀회합도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고."

"오지 못하게 한 것보다, 내년에 오라고 했지."

"그게, 그 말 아냐?"

"아마 우리 팀 다 왔으면. 니네 끼리 어울리느라고 다른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걸!"

언니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잠시 말을 그쳤다가 다시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와서 잘 못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어. 그리고 너희 팀은 고등학생이라 우리도 아직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몰라 그랬던 거야. 그리고 막은 것은 아니야. 좀 연기한 것 뿐이지. 넌 어떠니?"

"아주 좋아!"

"다행이다. 그럼 니가 가서 잘 전해 주고, 여기서 니가 보고 배운 방법을 가서 실습해 봐."

"언닌, 어떻게 하고?"

"응, 내가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도와 주고, 옆에서 함께 해 주지. 하지만 하는 건 너야!"

갑자기 어린 아이만 같던 선경이는 자신이 마치 커다란 짐을 진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참, 언니. '성모 자애원'이 뭐야?"

"왜?"

"응, 오늘 이따가 아침먹고 간다고 프로그램에 써 있길래 궁금해서 물어 본 거야."

"거기는 길거리 같은 데서 방황하거나 노숙하는 부랑아나 정신질환자들을 보호하는 부녀자 보호소야. 여기 수녀님들이 운영하고 계셔."

"정신 질환자도 있어?"

"응. 왜, 빨리 가고 싶니?"

"좀, 겁난다."

"너는 아직 그런데 한 번도 안 가봤지?"

"아냐. 나도 꽃동네 같은 데 가 봤어."

"응, 다행이구나. 그런데 오늘 거기에 안 가기로 했어!"

"왜?"

"너처럼 교회에서 봉사 활동 등에 한 번이라도 참여하면 부랑아나 정신 질환자들을 자연스럽게 접한 적이 있어서 좀 부담이 없을 거야. 그리고 또 보아도 신앙의 분위기 안에서 동등한 인격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여기 온 사람 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만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어제 저녁에 나왔어. 아마 일반인들 중에 누군가가 성모 자애원에 가기를 꺼려했던 것 같애. 그래서 원하는 사람은 나중에 개별적으로 가기로 했어."

아침을 먹고 나서 바로 추적 놀이에 들어갔다.

선경이는 추적놀이를 하러 가면서, 맑게 개인 하늘하며, 흙 바닥과 물 먹은 풀잎들에서 나는 향내가 참 싱그럽다고 느꼈다. 추적 놀이는 정말 재미있었다. 선경이나 회원들은 이미 어느 정도 서로를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스스럼 없이 함께 할 수 있었다. 어제의 두 분과가 한 조가 되어 추적 놀이의 각 지점마다 찾아 가서 안내문을 받고, 그 안내문에 씌어 있는대로 행동하는 이 놀이는 정말 재미있었다. 선경이는 과거에도 주일학교에서 많이 했지만, 여기서는 각 지점마다 그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잘 느낄 수 있도록 정성껏 준비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특별히 이 추적놀이는 참여하는 이로 하여금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대한 이해와 정신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꾸며졌었다.

점심을 먹고 선경이는 영희 언니를 언니 친구들과 함께 산책하도록 풀어 주고, 자신은 구두를 수선한다는 14살 짜리 마르꼬라는 꼬마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여기 와서 느끼고 배운 대로 기쁘게 해 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선경이에겐 첫 실습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어쩌면 마르꼬도 선경이를 대상으로 실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실습은 실습이 아니라 인생이었고, 인간이 걸어나아가야 할 그 길을 걷기 시작한 첫 걸음이었다.

파견미사를 마치고 연합회장 연수가 하기 수련회 폐회 선언을 했다. 그리고 다 함께 안내 책자에 있는 폐회기도를 바쳤다.

"주님 ! 감사합니다.

맑은 공기와 평화를 만끽하며 지냈던 영보 수녀원, 2박 3일의 수련회를 마치려 합니다.

당신의 사랑 안에서, 서로가 조금씩 가까워졌음을 느낍니다.

일터에서, 생활 안에서,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터놓을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쁹을 수 있었음을 감사 드립니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지내던 우리가 온 몸을 부딪히며 어울릴 수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반복되는 생활고에 신음하던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로 부딪히며 뜨거운 가슴으로 만났습니다.

이제는 삶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제의 내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힘을 배웠고 내가 서야 할 자리를 알았습니다.

주님!

이제 당신의 뜻을 깨닫고, 세상으로 파견되는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아멘."

차례





새 신부와 투사 선서


"신부님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회장님이 축하해 주셔서."

"지난번엔 저희 하기 수련회하고 날짜가 겹쳐서 회원들이 많이 참석 못해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하기 수련회가 먼저 잡힌 건데. 그날이 떠나는 날이었잖아?"

"네."

"어차피, 평일이래도 직장 때문에 빠져 나오기 힘들었을걸!"

"네. 아이, 이래야 되는데!"

연수는 박수를 치면서 시원해 (?) 했다.

"뭐가?"

"우리 노동자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신부님이 계시니까, 못 갔어도 좀 덜 미안하잖아요."

"에이, 신부님들 다 이해하셔."

"그래도 다 안 그러시던데요, 뭐!"

"그래도가 뭐야? 그래도가? 설사 안 그러신 분이 계시면 알려 드려야지. 그게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역할이 아냐? 교회와 노동계를 연결하는 것도 중요한 역할야."

"그래야 하는데…"

"자꾸 가서 말씀드려."

"참, 그건 그렇고 신부님 우리들 위해 첫미사 한 번 드려 주셔야죠?"

"그래, 드려야지. 참 신 신부님한텐 말씀드렸어?"

"그럼요. 신 신부님께서 먼저 말씀하시던데요."

"언제 날짜 잡았어?"

"저희 연합회 수요미사가 원래 첫 주에 있는데, 이 번 달엔 8월 초라, 그 때가 회원들 휴가 기간하고 겹칠 것 같아요. 그래서 한 주 미뤄서 드려 주셨으면 해서요. 신부님 시간이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우리 회원들하고 미사 드릴려고 미리 날짜 빼 놓았어."

"감사합니다. 신부님. 정말 우리 신부님이야! 이 다음에 우리 잊으시면 안 돼요!"

"얘가? 무겁다, 무거워. 벌써부터 겁 주냐? 겁 줘?"

공 바오로 신부님은 서울 교구 가톨릭 노동 청년회 출신 첫 신부다. 국민학교를 나와 곧 공장을 다니느라 수학이 늦어졌고, 돈 보스꼬 기술 훈련원에 입학하여 독학으로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공 신부님은 연수가 회장으로 있는 남부 연합회의 회장을 거쳐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전국본부 회장을 역임 한 후 신학교에 가기 위해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신부가 되기 전에도 매 번 방학 때만 되면 회원들과 어울려 함께 하기를 좋아했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회원들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를 주었다.

"오늘 미사에는 하기 수련회를 다녀 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참 많이 참석 해 주셨습니다. 또한 선배님들까지 오신 것은 무엇보다도 공 신부님의 첫 미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 미사를 드려 주신 공 신부님과 참석 해 주신 선배님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맨 날 형님 같기만 하던 공 신부님이 신부님이 되시니까 한 편으론 기쁘기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론 어디다 뺏긴 것만 같아 섭섭합니다. 공 신부님도 얼떨떨하지요?"

공 신부님을 비롯한 참석한 이들이 모두 웃었다.

"오늘은 잔치도 있고 하니까, 회계 보고나 다른 사안은 빼고 본당별 공지사항만 듣기로 하겠습니다."

각 본당마다 돌아가며 곧 있을 9월의 정기 총회에 대해 발표했다. 독산동에서는 정기 총회와 아울러 민들레팀의 투사 선서식이 9월 19일 본당 청년 미사인 7시 미사에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모두들 박수를 쳤고 기뻐했다. 이 회원들은 지난 2년간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팀회합을 통해 양성되었고, 7번의 투사 선서 전 교육과 피정을 마치고 본당 지도신부와 연합회 지도 신부와의 면담 및 승인을 거쳐 드디어 오는 9월에 투사 선서를 받게 된 것이다.

순미가 돈 보스꼬 경당을 나서며 교육관 1층의 새 신부님 축하장으로 가는데 숙연이 언니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축하한다, 얘!"

"고마워요, 언니."

순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가노청 들어온 지 얼마 되었지?"

"약 2년 반 쯤 되었어요."

"선서 전 교육은 몇 번 했니?"

"5월 중순부터 일곱 번 했어요."

"뭐? 그럼 거의 매주 하다시피 했네!"

"다 했는데요, 뭐. 언니는 몇 번 했어요?"

"가만 있자. 우리가 까르댕 추기경님의 생애와 가노청 역사 한 번, 가노청 정신 한 번, 노동계 상황 보고 및 현황 설문조사 한 번, 투사의 자세와 역할 한 번, 다른 팀 방문하고 나서 팀회합 방법 및 체험 나눔 한 번, 평신도 사도직 한 번 그리고 투사 선서 전 피정. 그래서 총 일곱 번. 우리도 일곱 번은 했네. 고생했지? 고생했을 거야! 그런데, 이제부터야! 이제부터. 이제부터 정말 잘 살아야 돼!"

사제에게 사제서품이 그 시작이라면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은 투사 선서가 그 시작이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은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직장과 특별히 동료들 안에서 복음을 자시의 삶으로 살며 전하는 복음의 투사들이다.

9월 19일. 저녁 7시. 천주교 독산동 교회 저녁 7시 미사.

신부님의 강론이 끝난 뒤 사회자가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투사 선서식이 있겠다는 선언을 했다.

"지금부터 가톨릭 노동 청년회 투사 선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투사 선서를 하실 분들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옆에서 독산동 본당의 가톨릭 노동 청년회장 강 전진 요한이 투사 선서 대상자를 호명했다.

"주 순미"

"네."

"박 금숙"

"네."

투사 선서 후보자들은 대답과 함께 제단 앞으로 나와 섰다. 순미는 떨릴 줄 알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떨리지는 않았다. 그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유난히 커 보였다. 정말 컸다. 마치 이제부터 자신이 짊어지고 걸어 가야 할 무게 만큼이나 되는 것 같았다. 순미와 금숙이 옆으로 선서자를 지도해 왔던 투사 정순이 언니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신부님이 지도 투사에게 물었다.

"이 분들이 투사선서를 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톨릭 노동 청년회합에서의 생활반성, 교재연구, 피정, 연구회, 훈련회, 일반회등을 통하여 이분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제 이분들이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정신을 잘 알고 더욱 열심히 복음의 사도로서 활동하기로 결심하여 투사 선서를 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도 투사는 또렷하고 힘있게 대답했다. 순미는 고마웠다. 그리고 부족한 자신들을 양성시켜 주느라 고생했던 언니에게 보답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신부님이 선서자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오늘 가톨릭 노동 청년의 선서를 하고자 원하십니까?"

"원합니다."

"이 선서를 하기전에, 여러분은 이 선서를 통하여 무엇에 종사하는지 아십니까?"

"압니다."

"무엇에 종사합니까?"

"우리들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교회의 사명인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며,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정신대로 현실 안에서 관찰, 판단, 실천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종사합니다."

"이 새로운 이상의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당신들은 어떤 협조를 기대하십니까?"

"나는 교회와 모든 가톨릭 노동 청년의 조직체에 의탁하며, 특히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의 협력과 사랑에 의탁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신뢰하며 언제 어디서나 그의 증거자가 되고자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믿고 나는 자비로운 어머니이신 거룩한 교회의 이름으로 여기 있는 이 자매들의 투사선서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사회자가 이제부터 투사 선서문을 낭독하겠다고 발표했다. 순미와 금숙이는 오른손을 쳐들고 선서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후부터 나의 가정, 나의 동네, 나의 일터, 나의 휴가, 나의 결혼 또 나의 내일의 생활 준비에 있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이상을 따라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할 것을 선서합니다. 또한 나와 같은 모든 노동형제 자매를 이 이상 안에 이끌도록 종사합니다. 주 하느님께 의탁하며 나의 서약에 충실을 다하겠습니다."

신부님은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뺏지를 축성해 순미와 금숙이의 가슴에 달아 주었다. 그 동안 회원들과 신자들은 미리 준비한 악보를 들고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를 힘차게 불러 주었다. 다시 신부님께서 선서자들을 향해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당신 친히 그 일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선서자들은 응답을 마치고 제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참석해 주신 신부님들이 함께 선서자들에게 강복과 안수를 하셨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여러분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아멘."

신부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끝났다. 뒤로 돌아서서 신자들에게 인사해."

순미가 뒤로 돌아섰을 때 신자들은 힘찬 박수를 쳐 주었다. 순미는 성당을 메운 신자들의 열기와 박수소리가 자신들을 축하해 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한 편 앞으로 자신의 평신도 사도직 수행을 지켜 보고 있을 분들이라는 생각에 한층 더 십자가가 무거워 지는 것 같았다. 그 때 사회자가 축하의 인사와 함께 투사 선서 개인 보고서가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이제 막 투사 선서를 한 가톨릭 노동 청년회 남부 연합회 독산동본당 민들레 팀의 주순미 안나 자매가 개인 보고서를 발표 하겠습니다."

"저는 68년 7월 22일 경북 봉화군의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화전민 이주 조치로 같은 군에 있는 춘양면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일은 막노동 뿐이었습니다.

집안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중2때 아버지께서 간염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가정 형편으로 야간 학교를 지원했습니다. 무거운 집안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과 가족을 떠나 낯선 객지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머리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세화여실과 인연을 맺으면서 주식회사 정화라는 신발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기숙사나 회사에서 같은 또래인 학생들과 생활했습니다. 그 애들이 자라 온 환경이 저와는 다른 것이었기에 그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오빠나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야간 학교를 지원한 애들 앞에 시골에서도 월세를 살아야 할만큼 어려운 가정얘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사생활과 학교생활의 1인 2역은 유난히도 잠이 많은 저에게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세화에서의 3년은 지식적으로 얻은 것은 별로 없을지라도 성숙할 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87년 2월말 ‘정화’에서의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3년 간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헤어짐을 빼고 나면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습니다. 3월 친구의 소개로 주식회사 동한기계에 입사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현장 생활을 해서인지 현장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8월 중순 경 3일간의 노사분규가 끝나고 팔월회란 또래들의 모임이 생겼습니다. '88년 3월 임금인상시기에 노사위원 언니의 부탁을 받고 임금 요구액에 반영시킬 시장 조사를 위한 모임을 갖고 난 며칠 후 팔월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던 친구가 위장취업자라서 해고되었고 그 사건으로 잠시 위축되었지만 다시 뭉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8명은 회사의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 해 6월 노동조합설립 당시 신참과 고참 두패로 갈려서 싸우다가 신참파가 졌습니다. 회사의 압력으로 40여명이 사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자신감과 좋아하던 사람들과 화기애애하던 현장 분위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8월, 정강일씨를 만나면서 새로운 곳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신뢰 속에서 만남이 거듭될수록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이 사회의 모순과 직장 안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선배들과의 만남 속에서 종교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2천 년 전이 아닌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어떤 일을 가장 먼저 하셨을까?"라는 질문이나 해방신학에 대해서 아느냐 이런 질문은 생소하기만 했고 종교의 한계성을 얘기할수록 종교에 대해 더욱 알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신자이셨기에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유아영세를 했고 국민학교 6학년 때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시골 공소에 다녔기에 주일학교나 교리는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엄마랑 함께 드렸던 아침, 저녁기도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에 와서 공소의 분위기와는 다른 커다란 성당의 분위기에 놀라 3년 동안 성당을 찾지 않았습니다. 직장에서 독산동 성당 다니는 친구를 만나면서 독산동 성당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마침 견진교리를 한다는 소식에 약간의 망설임 끝에 신청서를 냈습니다. 교리 중 고해소에서 신 신부님을 만났고 신부님을 통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라는 단체를 소개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성당 내에 이런 노동자들의 단체가 있다는 사실과 신부님께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그 때 회사에서 노동조합 대의원을 하고 있어서 많이 망설였는데 신부님과 회원들의 권유에 일단은 부딪쳐 보자는 마음으로 회합을 시작했습니다. 팀회합은 제 2의 고해소라는 말이 가슴 깊이 새겨졌고 회합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모임에서 만난 선배들과의 만남이 깊었고 직장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빨리 해결해야만 했기에 회합에서 나누려 하기보다는 생활나눔 때 보고하는 형식을 취했고 직장문제로 만났던 선배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반복되는 회합이 가끔씩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팀회합은 자신의 모습을 뒤 돌아보고 정리하게 했고 생활하면서 힘겨워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 팀원들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섹션의 상황이나 연합회의 흐름을 모르고 어떤 사안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무척이나 힘들었고, 생활의 중심이 없이 이 일 저 일에 관여함으로써 행사가 겹쳤을 때의 시간 배분 문제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갖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회원들의 모습은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저에게 자극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투사 언니의 말은 신앙인이면 당연히 주일 날 미사를 드려야 하는 것처럼 회합도 의무적으로 당연히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회합날짜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은 새로운 발견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시작하게 된 것도 온전히 주위에서의 권유와 노력에서 였듯이 신림동 팀원들과의 만남 또한 그러하며 투사는 예비회원들과 함께 다듬어진다는 말처럼 키 작은 꿈 팀원들을 통해 내면적으로 성숙되고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올바른 가톨릭 노동 청년회인으로서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 드립니다."

순미는 선서식 후 축하식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기쁨이 큰 만큼 십자가도 큰 것 같다. 부담이 된다. 앞으로 어떻게 잘 해낼 수 있을까? 한 계단을 더 올라가면 더 큰 십자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순미는 투사 선서식문에 있듯이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당신 친히 그 일을 완성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그 말이 진정 자신에게 힘이 되기를 빌었다.

차례




복음을 살며


"따르릉"

"여보세요, 누구세요?"

곤히 자고 있던 연수가 전화 벨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연수? 연수야?"

"예, 그런데요?"

"나, 재수야. 자다 일어났니?"

"응, 모처럼 일찍 자려고 했는데, 웬일이야?"

"다른 게 아니고, 이번 전국 투사 교육 때, 사례 발표를 남부 연합회에서 맡아 줬으면 좋겠어? 누가 좋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혼자 결정해? 회원들하고 상의해 봐야지."

연수는 일도 많은데 또 일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며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지난 번 전국본부 주최 일반 회원 교육에 다녀 온 남부 회원들이 지방 교구에선 복음 나눔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다는 지적을 했다. 그때 연수나 남부 회원들은 다 의아해 했다. 복음을 읽고 함께 나누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음대로 활동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생활 나눔도 예수님의 말씀을 빗대어 판단과 실천약속을 하게 되는 데, 복음 나눔 시간 외에 회원들이 따로 또 복음을 읽는단 말인가? 바쁘고 피로한 노동자들의 생활 안에 회합 때 안 다루면 언제 복음을 개인적으로 보고 심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연수는 전국 회장단들이 모여 예비회원 교육 평가회를 하는 자리에서 복음나눔의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남부에서 복음을 사는 삶에 대한 사례발표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수요모임 때 각 본당의 상황과 회합 내용을 나누면서 연수는 이 건에 대해 말했고 본당 회장들과 임원들과 협의하여 구로본동의 강숙연 바울라를 사례 발표자로 선정했다.

전국 투사 교육은 강경 ‘나바위 피정의 집’에서 열렸다. 전국 지도 신부님의 복음 나눔의 7단계와 간단한 복음 나눔법 등을 강의로 들은 후에 남부의 강숙연 바울라가 사례발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 교구 남부연합회 소속 구로본동 한빛팀의 강숙연 바울라입니다.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이라는 주제를 받고서는 무척 망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대할 때마다 기쁨도 많았지만 괴로움과 죄스러움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저의 개인 생활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팀에서 복음나눔을 하면서 다루었던 이야기를 종합하여 발표하겠습니다.

전라남도 화순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저는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을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생활이 싫어서 열심히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18살에 구로 공단에 있는 전구 제조회사에 입사하였습니다.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않으면서 악착같이 적금을 부었고 통장에 불어나는 돈을 확인하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살았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쥐꼬리 만한 월급에 집안 생활비까지 보태가며 적금을 아무리 부어 보았자 제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21살에 그 동안 늘 미련을 두었던 공부를 위해 방송통신고에 입학을 했고 막연히 현실 탈피를 꿈꾸며 방송통신대학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1학기 시험에서 F학점이 두 개가 나올 정도로 진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었고 4년 동안 휴식도 없이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몸을 혹사시킨 바람에 건강이 몹시 나빠졌습니다. 자주 앓아 눕는 상태가 되자 현실의 벽을 절감하며 학교를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심한 허탈감과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저를 괴롭히곤 했습니다.

가족들을 돌보지 않고 바람처럼 살다가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고, 한 마을에서 엄마와 작은 엄마가 싸우던 모습들이며 커갈수록 불편한 관계가 되어 가는 이복 형제들이 늘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잃어버린 큰 언니에 대한 생각들이 늘 제 가슴을 답답하게 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무도 그 대상이 되어주질 못했습니다. 그 순간에 저도 모르게 하느님을 찾았고 제발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다닌 사람은 다름아닌 큰언니였고 제게 처음으로 찬송가를 가르쳐 준 사람도 큰언니였습니다. 언니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일 때도 찬송가를 불렀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서는 더욱 더 하느님께 매달리며 기도하곤 했었습니다. 그런 큰언니가 끝내 불행한 채로 버려진 것을 보고 저는 한 때 하느님을 거부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믿었던 언니를 구해주지도 못한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엉터리 하느님께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힘들고 외롭던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하느님을 찾았고 하느님은 저를 당신 곁에 불러 주셨습니다. 같은 회사 언니를 따라 구로본동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교리를 받기 시작하여 '90년 4월에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부족해서인지 하느님께서 정말 저와 함께 하시는지 느낌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도하고 나면 왠지 마음이 좀 편해지고 만날 때마다 자상하신 신부님이 좋았습니다. 영세를 받고 나서 그 해 6월 한빛팀에서 팀회합을 시작했는데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교리를 받기 시작할 무렵 돈 보스꼬 센터 수요미사에 참석하면 서부터였습니다.

모두가 직장의 젊은 노동청년들로서 서로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들이 무척 보기에 좋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팀회합을 통해 직장동료나 친구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고민들을 회합에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위안이 되었고 투사언니와 신부님의 관심이 늘 고마웠습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팀회합 내용은 한 주 한 주 생활 나눔, 복음 나눔, 교재 나눔, 기타시간 등으로 진행되었는데, 생활나눔은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지만 복음 나눔 시간이 항상 어렵고 부담스러웠습니다. 아프다고 울고 매달릴 줄만 알았던 갓난아이 신앙을 가지고 있던 제게 복음은 무척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곤 했었습니다.

복음 나눔 시간에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라는 말씀을 가리켜 신부님은 예수님이 바로 우리들의 직장 안에도 계시며 동료들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의아 하고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분이 어떻게 우중충한 공장 안에 시커먼 작업복을 입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우리 같은 노동자들 안에 계시다는 건지......

그 동안 직장 안에서 남보다 좀더 편한 일을 하기를 원하고 모든 면에서 저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활을 해 왔던 저는 예수님이 동료들 안에 계신다는 말씀을 들은 후로는 짜증을 내다가도 참게 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 사람 대하는 것이 무척 조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회원들과의 만남이 계속될수록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회원들의 밝은 모습 안에도 어려운 역경을 딛고 살아온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고, 저만 힘들게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특히 사람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라시는 말씀을 회원들을 만날 때마다 기억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 나눔을 할 때마다 실천이 참 어렵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는 것이다’ 라는 복음을 나눌 때 저는 제 주변에서 가장 보잘 것없는 동료가 누구인지 찾아 내고 그 동료에게 어떻게 다가서서 함께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 행동을 실천하기로 마음 먹었읍니다. 다른 팀원은 동료 아줌마 한 분이 다리를 저시는데 성격이 매우 편협하고 답답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짜증스럽고 모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다며 앞으로 관심을 갖고 다가가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실천 약속을 했습니다. 그 다음 회합에 와서 그 팀원은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고 얘기했지만 함께 하기 위해 나름대로 시도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를 더 사랑하신다는 말씀에 위안을 얻으면서도 계속적으로 가난을 실천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고 피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성당에 나온 것은 주님 안에서 고통없는 평화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며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자 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수난까지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동안 너무 힘들어서 이제 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데 다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니 너무 하시지 않은가. 나를 에워싼 답답한 상황들 속에서 구해주기를 기도하는 제게 그것이 저의 십자가임을 지적해 주시고, 예수님의 수난은 곧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과 예수님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선택하셨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고통을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팀원 중 한 명이 직장동료였는데 우리는 성격이 잘 맞지 않아 무척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노동조합 문제를 놓고 의견충돌이 많았었는데 조합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던 저는 회사에 대한 불만들이 생각나 조합의 모든 투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표현했고 팀원은 투쟁이 아닌 양보와 타협쪽을 주장했습니다.

팀회합 안에서 충돌이 직장 안에서 어색한 관계로 발전하여 오랫동안 서로 힘들었지만, 신앙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안에서 팀원끼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동료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공감대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벽을 허물기 위해 무척 노력했고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91년 10월 저는 견진교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직장에서는 제가 속한 라인이 자동화 도입에 의해 해체될 상황이었고 노동조합 상근자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무척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위원장 몰래 해고자 중심으로 비밀모임을 갖고 있었기에 상황에 따라서 위원장과 반대 편에 서서 싸워야 할 입장이었으며, 조합 내부는 이미 집행부와 대의원 간의 갈등이 계속 표출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상근자로 들어가 일한다는 것이 무척 두렵고 망설여졌습니다.

그런데 견진교리 두 번째 날이었습니다. 성서를 펴고 신부님과 함께 복음을 읽어 나가고 있었는데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만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그처럼 복음 말씀이 가깝게 들려 본 적이없었습니다. 꼭 신부님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게 이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거기에 용기를 얻어 조합상근자로서 일을 하기로 결정했고 일 년 임기 동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어려움을 겪면서도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시마’ 하시던 말씀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견진성사를 통해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로 머무르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선 듯한 느낌이 들었고,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느님 사업에 일꾼이 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도드렸습니다.

조합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을 팀회합에서 나눌 때 저는 커다란 힘을 얻기도 했지만 때로는 무척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조합에 대해 접해보지 않은 신부님이나 팀원은 늘 신앙적인 면에서 얘기를 하며 제 감정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판단, 실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자기 감정을 죽여야 하는 것인지 너무 괴로워 팀회합에 돌아오면서 울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고통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투사 언니의 말이 생각납니다. 조합 안에서 겪었던 힘든 상황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회원들과 신부님, 특히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덕분에 조직적으로 서로 해치고 상처주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기회주의자처럼 보여지는 괴로움을 감수하며 임기를 마쳤고, 떳떳하게 현장 안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노동조합 활동 자체가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이 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하나의 소득이었습니다.

복음나눔이 항상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항상 일깨워 주고 우리들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도록 해 줍니다. 얼마 전 한 선배님께서 요즘처럼 내가 행복한 때가 없었던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회원들에게서 따뜻한 만남을 배웠고 이제는 동료들과의 만남 안에서도 기쁨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선물입니다. 갑자기 나는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각 지방에서 올라 온 팀의 지도투사 중 복음 나눔을 처음 하는 회원은 다소 어려워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초보자들이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복음나눔 7단계'를 따라 나눔을 하면서, 전처럼 부담감 없이 친근하게 복음에 다가 설 수 있게 되었다는 평가를 했다. 또한 이번 교육을 통해 사례발표를 듣고 어려워만 가는 현장 활동의 부담에서 벗어나서 다시 일어나 걸어 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새길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차례





양성하며 양성되며


9월 첫주 연합회 수요미사에서 삼성산 본당의 키 작은 꿈 나무팀의 정성은 안젤라 회원의 편지가 낭독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첫 주에 있는 매 연합회 미사 때마다 각 본당에서 돌아가며 미사를 준비했고 준비한 본당에서 회원들의 개인보고서가 발표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그날은 개인 보고서 대신 한 여회원이 자기 투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고 있었다.

「안나 언니에게

요즘은 날씨가 무지 무지 좋아서 꼭 가을날 같아. 언니 요 며칠 동안의 하늘을 바라본 적 있어? 매일 매일 뿌연 하늘만을 볼 수밖엔 없었는데 참 맑은 하늘이더라. 하늘을 보면서 가슴이 뚫리고 어떤 일이든 술술 풀려나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정말이지 나의 불투명한 앞날이 저 하늘처럼 푸르러 희망 가득한 날이 되길 간절히 빌어 보았어.

그리고 우리 삼성산 팀원들과 함께 우리의 모임이 잘 되고 나도 그 안에 흡수되어 멋진 삶을 사는 가노청인이 되길 빌었지. 그렇지만 가노청에 대해서는 어떤 벽이 가로막혀 더 이상은 가까이 갈 수 없고 자꾸만 내 자신은 가노청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게 되어 난 역시 이 정도에서 그만 두는 것이 나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덜 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어.

이 글월을 읽고 슬퍼할 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너무나 미안하다라는 말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해.

언니에게 처음 쓴 글이 이런 식의 내용이 될 줄은 몰랐는데 거듭 거듭 미안해.

언니! 내가 예전에도 그만두겠다고 한 걸 기억하지? 그땐 정마저 끊으려던 나에게 언니의 눈물은 커다란 충격이 되었고 잘나지도 않은 내가 남을 울렸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어. 그래서 다시 회합을 해 보리라 결심하였고 그런대로 여기까지 왔지만 그때에 갈등했던 생각이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더 이상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이런 결정을 한거야.

물론 언니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 줄 말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내 안에서 받아들일까 의문스러워.

어쨌든 가노청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 같고 어디가서도 이렇듯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아.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 저번에도 한 번 얘기한 것 같은 데 가노청에서 하는 행사에 갔을 때는 언니가 너무나 먼 타인처럼 느껴지고 결코 편하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 물론 서로 속해 있는 팀들이 있고, 하는 일이 많아서 우리와 많이 어울릴 수 없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곳에서 더욱 더 친해지고 싶었던 우리의 마음을 너무 몰라 주었던 것 같아.

이 말은 정말 하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건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기를 부탁해.

그리고 이것만은 기억해 줘. 언니가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고 나 자신의 문제들로 인해 가노청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

너무 칙칙한 얘기만을 한 것 같네. 화제를 바꿔서 언니도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난 기숙사에서 처음 생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롭게만 느껴져. 매일 밤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애들과 얘기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자니까 처음 며칠은 참 피곤했어.

또 매일 밤 찾아오는 동생들을 돌려 보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냐. 또 동생들이 오지 않는 날엔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현숙이라는 동생이 요즘 남자친구가 생기는 바람에 그 연애 얘기를 듣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졸린 눈으로 맞장구 쳐주고 경험도 없는 내가 그 애한테 조언을 해 주느라 밤새우기 일쑤야.

사실 조금은 짜증나지만 아이들의 속속까지 알 수 있어서 신나는 면들도 있고 요즘 아이들의 생각을 쉽게 접할 수도 있어서 좋아. 그래도 앞으로는 일찍 자야겠어. 회사에서 졸지 않게. 지금까지는 별탈 없이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잘 살아갈 것을 약속할게.

두서 없이 쓴 글이라 부끄럽지만 다음 편을 기대해 줘. 이만 줄일 게‥. 안녕.

1993. 7. 23

영원한 동생 안젤라로부터」

연길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순미는 울고 있었다. 연길이 역시 울었다. 자신의 눈물이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듯 순미는 성은이의 편지를 들으면서 지난 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지난 92년 4월. 본당 회장인 정아 언니가 다가와서 물었다.

"연합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이번에 관악동 본당에 새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신설되는데 거기 가서 네가 팀을 맡았으면 좋겠데 네 마음은 어떠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 생각해봐!"

"잘 생각하긴? 내가 어떻게 지도투사로 갈 수 있어? 언니는 잘 알면서 왜 그래?"

"니가 어때서 그래? 팀을 맡아봐야 진짜 투사가 되는 거야. 그리고 그 때 비로서 가노청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건지, 왜 필요한지 알게 돼!"

"고마워, 언니. 언니가 나에게 권했다는 사실만이라도 난 만족 할 수 있어."

"그게 아냐. 그리고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냐. 투사는 예비팀과 함께 변화를 시도하는 거구, 예비팀과 함께 다듬어지는 거야. 네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나마 너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야 한다는 것도 생각해야지!"

순미는 그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하고 가슴을 졸일 만큼 인간의 인생에 관한 것이라고도 생각 못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맡겨진 회원들의 기쁨에 같이 웃고, 그 회원들의 슬픔에 누구보다도 더 깊이 울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처음 자신에게 팀을 맡으라는 제의가 왔을 때에는 그냥 부탁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웃어 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을 통해 팀을 맡아야 할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순미는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관악동에 기존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이 없다는 것, 그리고 파견 투사라는 말이 갖는 이상한 느낌 등등의 이유로 무척이나 막막했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을 것 같았던 처음의 느낌과는 달리 회원들의 노력으로 관악동 성당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순미와 회원들이 관악동 성당에 조금 적응해 나갈 무렵, 그 팀을 만드는데 주력하셨던 신부님의 인사 이동이 있었다. 고 비오 신부님께서 떠나신 후 관악동 본당에서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합을 못하게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청년 담당 신부님과 대화도 했고, 연합회 임원들과 지도 신부님께서도 많이 노력하셨지만 결국 아쉬움만 남긴 채 관악동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 일은 관악동 회원들 가슴 속에 아픔을 남겼지만, 관심갖고 지켜 봐 주는 많은 회원들로 인해 외롭지만은 않았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던 삼성산 교회.

순미는 신부님에 의해 만들어진 팀이라 신부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도 했었지만 한편으로 편안하기도 했다. 한 동안 팀이 정착하기 위해 용트림을 해야만 했다. 회합 날짜, 회합 시간, 회합 방법의 변화가 잦았고 심했었다. 그리고 회원들이 한 명, 두 명 떠나갈 때 순미는 어떻게 잡아야 하나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 보았고, 나 아닌 누군가가 잡아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협조를 해 줄 뿐 자신의 일이었다. 지난 번에도 성은이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언니, 언니는 가노청 활동이 재밌어?"

"재밌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꼭 재미로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

"언니는 투사라 좋겠다. 최소한 투사로서의 사명감은 있을 것 아냐?"

"사명감은 뭐! 있다해도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어? 왜, 넌 요새 어떠니? 가노청이 재미있니?"

"아니! 나 사실은 그만 두었으면 해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순미의 가슴이 얼마나 내려 앉았는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핑하니 눈에서 눈물만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성은이는 순미가 우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을 했다.

"난 지금까지 근 6개월이나 가노청을 했는데 아직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가 없어. 게다가 잘 안 되니까 부담도 되고. 내 안엔 사명감도 아직 일어나지 않아. 날 잡지 마. 난 가노청에 안 맞는 것 같애.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이런데도 회합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

성은이는 이렇게 자기 말을 다 하고 난 후에서야 순미를 바라 보았다. 순미의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성은이는 당황해서 그저 잘못했다는 소리만 반복하며 순미를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순미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가라 앉힐 수 없어, 한 참을 울다가 결국 울음을 그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었다.

지금 이렇게 앉아 성은이의 결별 편지를 들으면서, 순미는 또 다시 그 때의 그 암담했던 심정을 되씹으며 울고 있다. 하지만 그 때와는 분명 다르다. 성은이의 이번 태도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는가? 저 흔들리는 불꽃을 꺼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심지를 다시 한 번 곧게 세우고, 기름을 갈아 넣고, 산소가 잘 공급되도록 문도 가끔씩 열어 놓고.

순미는 문득 지난 주 복음나눔 시간에 묵상했던 성서 구절이 생각났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차례





자기를 이기는 용기


'키 작은 꿈나무'들이 정기총회를 하게 되었다. 뒤늦게 그리고 갖은 어려움을 격고 출범한 삼성산 본당 팀이기 때문에 연합회 지도신부님과 회장단을 비롯하여 연합회에 소속된 많은 회원들이 참여해서 격려를 해주었다.

정기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연길이는 몇 번이나 망설였다. 자신의 투사활동보고서를 발표할까 말까 하는 번민이 여러 가지 상념과 더불어 머리를 뒤집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연길이는 이번에도 자신을 숨기고 회원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 놓지 않는다면 투사로서의 자격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회원들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아직 자연스럽게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연길이는 자신이 훌륭한 투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자신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회원들이 받은 후부터 하나씩 멀어져 갔고, 급기야는 떠나는 회원들도 생겼다.

자신을 밝힌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것이 자기가 원하지 않던 상황에 처해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거나 사회의 구조적 제도적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온전한 의지로 알고서도 마땅히 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행해버린 이 일을 밝힌다는 것이 연길이에게는 너무나 어려웠고 스스로 용납하기 힘들었다. 연길이는 투사로서 팀을 이끌어 가면서 항상 회원들에게는 회합 때마다 팀 회합은 제 2의 고백소라고 모든 것을 밝히고 나누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연길이는 모든 것을 솔직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 그 동안 자신이 밝히지 않았던 것을 이제 와서 밝히자니, 컴컴하고 상대가 보이지 않는 고해소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회원들이 모인 앞에서 마치 자아비판이라도 하는 것 같아 땀마저 솟아 났다.

그 동안 연길이가 밝히지 않은 것은 밝히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연길이의 마음 속에서는 오히려 회원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처음 생긴 팀이라 혹시 주도권을 자기에게 주고 자기에게만 의지할까 봐, 될 수 있으면 자신은 말을 적게 하고 회원들이 말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 주려고 했고 회원들을 존중했다. 또 투사니 뭐니 하는 명칭이 회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만 같아 자기도 같은 회원의 입장에 서서 활동하고 싶었기 때문에 밝히지 않았는데, 연합회 모임에 가서 자신이 삼성산 키 작은 꿈나무의 지도투사라는 말을 회원들이 듣고 와서부터는 이렇게 일이 꼬이고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자신을 변호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도 멋쩍어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미루다보니 시기를 놓쳤고, 회원들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첫 의도가 실수였다고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며칠을 준비해서 오늘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왔지만, 자기를 이긴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것인지? 연길이는 다시 한 번 아랫 배에 힘을 주고 다짐했다. 용기를 내자!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지 않는가?

"저는 가노청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한 해의 활동에 대해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관악동과 이곳 삼성산교회에서 각각 1년씩 활동했습니다. 제가 관악동 공동체에 함께 참여 했을때, 공동체 안의 청년 노동자들이 둥그렇게 앉아 더듬 더듬 부끄럽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간의 친밀감이 발전을 꾀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충만감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준비'가 부족하고 '능력'이 없고 모자른 저를 주님께서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삼성산으로 우리들의 새 보금 자리를 마련하면서부터 저의 부족한 부분들이 자주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회원들 모두는 이향 (고향을 떠난) 노동자들이 아니고, 부모님과 함께 가정이라는 틀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곳 또한 오랫동안 물질 문명에 길들여진 서울이었습니다.

저는 삼성산에 와서 텔레비젼에 길들어 있는 이들에 대해서,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이들의 정신 부분에 자리매김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 이들의 노동관이 생계수단의 원천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들의 직업 선택이 아직까지는 자신의 매력과 소질에 관계 없이 선택되지만 자신들이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 적성을 고려하고 맞추어서 사회에서 자립의 기초를 닦겠다는 포부에 대해서, 동료들과의 대화없이도 많은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현재 즐기고 있는 놀이나 문화, 길거리에 다니며 이어폰을 귀에 끼고 다니는 것을 자연스럽고 만족스러워 하고, 다른 사람과 상관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노래방에서 놀 때 이들은 자신의 노래하는 모습이 얼마만큼 잘 비춰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제가 칭찬해줄 시간도 없이, 빠르게 다음 사람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단지 스트레스 해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사람보다 기계와 얼마나 더 친숙해졌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지만, 정말로 우리들의 삶 깊숙이 자리잡혀가고 있음에 대해서도 실감하게 된 계기는 삼성산에서 였습니다.

저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고,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위치, 입장 등 노동법 기타 어떤 한계에 도달되어 있는 부분들만 이야기하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이 물질적인 척도에만 국한되도록 해 버린 쪽으로만 많이 이야기 했었습니다.

저는 팔을 높이 쳐들고 구호를 외치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의식이 가미되어 있다는 노래를 불러야만 그 순간의 기분이 안정되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노동운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길거리, 버스 안 등에서 누가 옷에 의식적인 글씨가 박혀있는 티만 입고 있어도 괜히 뿌듯해 하던 시기에 가노청에서 팀회합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회원들과 대화를 할 때도 의식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해, 어느 직장의 파업에 대해, 대규모 집회에 대해, 스스로 그런 위치에 서지 못함을 자위하듯 풀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원들 안에서 ‘가브리엘은 많이 알아’ 또는 ‘머리가 좋아’라는 얘기를 가끔 듣게 될 때, 그 순간의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또 다른 '대화의 장'이 열리기를 기다리거나 찾아 다니기에 바빴습니다.

이렇게 가노청에 발을 들여놓은 저는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이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연합회에 우겨서 관악동에 투사로 파견 나왔습니다.

실질적으로 투사라 하면 양성이 돼 있어야 합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실지로는 틀리는 수가 있는데, 저는 정말로 기초적 양성이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만심만으로 나서서, 결과적으로 관악동에서 삼성산으로 옮기는데 도움만 주었습니다.

회합이 잘 안된다고 회원들이 얘기했습니다. 저는 제가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노동의식'이라는 부분만을 강조했고, 이 부분에 대해서 회원들이 반박을 하거나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만족해 했습니다. 실지로 이 모임은 제가 회원들을 이끌어 나가기만 했지, 회원들과 함께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주로 강요했고, 그 부분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가노청에서 배운 말들과 거짓된 아름다운 말들로 포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주순미 안나 투사가 파견 나오면서 상황은 급속도로 변해 갔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서로 협력해서 잘 이끌어 나가라고 겸손하게 충고했지만 저는 무시해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만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들이 틈새를 보이며 부수어 지기 시작했고, 저의 허황되고 안일한 태도가 드러났으며, 팀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 일방적 의견의 동의를 구하느라 또 다시 마찰이 빚어졌습니다.

속으로는 기분이 안 좋았지만 내색은 할 수 없었습니다. 안나 투사의 현실적인 경험과 그의 경륜이 저를 짓누르는 부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안나 씨는 준비도 잘 해 올뿐만 아니라, 그 동안 저는 주로 머리로만 이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제가 아무리 말을 잘 해서 회합의 당혹감을 풀어 나가려고 해도 안나 투사를 보면 속으로 창피하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안나 투사와 의견이 엇갈려 처음에는 선배를 찾아가기도 하고, 고 신부님과 대화하며 잘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부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피곤하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회원들이 드디어 팀회합의 단조로움을 거론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안나 투사는 고민을 하고 대안을 내놓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거기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고 신부님의 포고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들이 하고 있는 회합에 진척이 없고 회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복음나눔 7단계'라는 방법으로 공동 회합을 실시하라는 말에 아무런 질문과 고민없이 수용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남부 연합회에서 '가노청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이라는 주제 아래 가노청의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 어려움을 해소하고 청년들 안에 깊숙히 들어가 보자 하는 자기 진단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 모임을 하면서 투사모임과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투사모임에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끌려만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팀회합과 팀확장이 잘 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저 자신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대응하며 도와 달라는 입장을 내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지금에 와서 정말 주님 앞에서 저의 활동에 대해서 반성을 하며, 우리에게는 '가노청을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이 필요치 않았음을 어렵게나마 주장합니다.

그 모임은 그 많은 모임에 모임만 하나 더 보태준 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노청이 잘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 각자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이 신앙심이 깊어서 우리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아니고, 가노청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며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산에서 수요미사를 준비할 때, 정 안젤라의 편지 글 발표를 들으면서 안나 투사는 겉으로 울었지만, 저는 속으로 창피해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자신이 삼성산에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되돌이켜 볼때 너무도 당혹스럽습니다. 이제서야 저는 가노청의 양성 부분에 들어가게 된 것 같습니다.

가노청이 교회나 조직을 위한 단체가 아니듯이 요즘 제 자신 역시 회원들이 가노청을 위한 또는 투사 저 개인을 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그 동안 교회나 조직의 많은 선배들과 지도자들이 이야기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가노청 운동은 노동운동이 아니고 노동자 운동이다.' 전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단지 그다지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라고만 생각 했고, 형식적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이 말이 제 가슴을 답답하리만큼 때리고 있습니다.

여하튼 저는 직장 안에서의 활동이 부족했고, 조직에 너무 치우쳤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나마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정말 가노청 조직이나 교회를 위한 개인이 아니라, 아니 그것들을 등에 업고 내 자신의 만용만 부려오던 것에서 벗어나, 복음으로 무장되어 직장 안에서, 길거리에서 예수님의 사도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제 저와 우리들은 공동체 안에서 우정만 나누며, 자신의 문제만을 찾으면서 어떻게든 거기서 나아지려고 해결하는 방법의 시기를 벗어나서 저와 우리 자신들의 삶을 직장 안에서 관찰, 판단하며 실천하는 습관을 갖고 일생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앙 또한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모든 행동에 임하겠습니다."

회원들의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왜 팀회합에서는 그렇게 물어도 대답하지 않더니 여기서 이렇게 밝히느냐? 그리고 여기서 낱낱이 밝힌 그 용기로 앞으로는 팀회합에서도 밝혀 달라 등등의 주문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연길이는 여하튼 기분이 좋았다. 최소한 자신을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리라고 생각했다.

함께 삼성산의 여자팀을 맡아 지도해 왔던 순미도 자신의 입장을 발표했다.

"저도 가끔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끔은 가슴 뿌듯함으로 나머지 많은 시간은 무감각하게 회합을 해오면서 과연 제대로 된 회합을 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았어요. 그 의문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구요. 하지만 이 팀을 맡게 되면서 팀원들을 생각하면서 일주간을 기쁘게 보낸 때도 많아요. 그리고 회원들이 그만 둔다고 할 땐 정말 벽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고민하고, 아무것도 못하는 나 자신을 되 돌이켜 보며 무력감에 빠져 고생한 적도 많아요. 처음엔 이 본당에 먼저 파견나온 남자 투사가 있어서 분위기를 많이 활발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저도 남자투사와 개인적으로 팀회합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해요. 하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한 걸음씩 함께 내딛자고 청하고 싶어요.

그리고 삼성산에서 온전히 정착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흔들림과 힘겨움이 있으리라 예상되지만, 더 많은 시간 회원들과 대화하고 함께 노력하면, 신부님을 통해 우리를 불러 주신 주님께서 곧게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시리라 믿어요."

지도신부님 말씀시간에 한 쪽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 계시던 연합회 지도신부님께서 한 말씀 하셨다.

"처음에 회합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투사 없이도 할 수 있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투사가 없었으면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투사와 지도신부와도 같은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제외되어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거나, 우리가 맡아 주어야 할 사람들을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투사가 좀 잘못하는 것 같더라도, 투사가 회원을 감싸 주듯이 회원들도 투사를 감싸 안고 같이 나가시기를 빕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허구입니다. 머리로만 알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는 좀 몰라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자신의 머리로 아는 것을 살아가면서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복음 말씀처럼 여러분이 아는 것이 여러분의 삶으로 드러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의 정기총회를 축하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의 먼저 본당인 관악동의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잊지 말고 기도해 주십시오. 비록 여러분을 쫓아냈다고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분은 여러분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주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을 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 사랑의 방법입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있을 신정동 본당의 정기총회에도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희 참석한 이들을 통해 격려와 기쁨을 얻었다면, 여러분도 가서 격려해 주고 힘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점심은 가톨릭 노동 장년회 회원들이 삼성산 성지에서 성지순례를 하면서 여러분의 것까지 준비했다고 했으니까 가서 함께 하기로 합시다."

지도 신부님의 말씀이 끝나자 회원들은 박수를 치며, 점심값 벌었다고 웃어 댔다. 그리고 삼성산 회원들은 식사 후 이어진 회장 및 임원단 선출을 비롯하여 정기총회를 모두 마친 후, 신정동 본당으로 와서 그곳 정기총회에 함께 해 주었다. 회원이 너무나 적었던, 아니 그곳 본당에서 두분 사제가 전 교우를 사목하고 있는 것에 비길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는 투사와 협조자를 빼면 둘만을 회원으로 보내 주셨기 때문에 썰렁했던 회의실이 열기로 가득 찰 수 있었다.

그날 모든 행사가 끝난 뒤 연길이는 자신을 이기면서 주님께 다가갈 수 있었다는 사실과 회원들에게 보다 더 애정 가득한 투사로 새로 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날마다 혼자 자취하는 이 방이 이제는 연길이 혼자가 아닌 것 같았고, 주님과 회원들이 자신의 가슴 깊이 들어와 자신을 반기며 웃어 주고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차례




평신도 사도직


"야, 이것 좀 빨리 해 줘!"

갑자기 영희의 창구 구멍을 통해 저금통장 하나가 던져져 들어 왔다. 영희는 깜짝 놀랐다. 이런 손님이 다 있나 하면서, 사무적으로 대했다.

"얼마 찾으세요, 손님?"

"거기 써 있잖아!"

예금 인출 청구서엔 '15,000,000원 정'이라고 씌여 있었다. 이렇게 많은 돈이 은행 내에 있을리 없었다.

"손님, 은행 거래 처음해 보세요. 이렇게 큰 돈을 은행에 찾으려 오시려면 먼저 전화라도 하셔야죠. 지금은 돈이 없어요."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 돈 갖고 내가 찾는데, 니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갑자기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일대 혼란이 휩쓸었다. 갑자기 김 대리가 불쑥 앞으로 나와서는 영희를 뒤로 보냈다. 영희는 뒤로 밀려나며 생각했다.

'아니! 뭐, 저런 손님이 다 있지?'

김 대리는 간신히 그 손님을 달랬고, 부천 시내 여기저기 은행에서 돈을 긁어 모아 간신히 액수를 채워 돌려 보냈다.

"미스 리"

"네."

"여긴 미스 리가 전에 근무했던 서울 경복궁 지점 하곤 달라. 손님에게 봉변당하기 일쑤니까 조심하도록, 알았어요?"

"네."

영희는 황당하고 창피했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영희는 잠깐 쉴 양으로 직원 휴게실로 갔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게 무슨 꼴인가? 손님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고, 가노청 하면서 사람 만나는 것이 즐거워 거의 반은 자신이 지원하다시피 해서 오게 된 곳이 이 모양이란 말인가?"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영희는 조용히 자신의 눈을 돌리며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조명이 흐려 잘 보이지도 않는 창구 좌석, 칠을 언제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지저분한 은행 벽, 채 한 평도 안 되는 이 좁은 직원 휴게실, 그나마 서류들이 정리도 안 된 채 여기저기 널부러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영희의 입에서는 한숨만 나왔다.

"이러니까 직원들이 다른 곳으로 발령나기만 기다리지! 어쩔 수 없어!"

그러나 영희는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을 들으면서 놀랐다.

"어쩔 수 없다니? 그럴 순 없어! 뭔가 해야지, 내가 할 일이 아마 있을거야!"

그냥 그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희망을 잃는다는 것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것인지를 이미 뼈저리게 체험한 영희였다. 곰곰이 다시 한 번 자신이 이 지점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서 희망과 기쁨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적기 시작했다.

"첫째 점심 시간.

점심시간이 한 시간씩 2교대여야 하는데, 현재는 겨우 20분 내지 30분 정도로 삼 교대를 하고 있다.

둘째 퇴근 시간.

은행 규정상 마감 시간이 4시 30분인 데도 5시나 5시 30분을 넘기기가 일쑤다. 결국 정산을 하다보면 6시에 끝나야 할 것이 7시나 7시 30분을 넘기기가 예사다.

셋째, 휴식 공간.

탈의실이나 잠시 앉아서 쉴만한 자리도 없다.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도 사람이 앉아 있을 만한 곳은 못된다. 지저분하고 좁아서 겨우 두세 명이나 들어와 앉을 수 있을까?

넷째, 직원간의 인간관계.

창구엔 손님이 너무 많아 인사를 하거나, 직원끼리 만나서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없다. 맞교대를 위한 상대역으로서의 동료이지, 일을 함께 해 나가는 협조자로서의 동료관계란 찾아 보기 힘들다. 결국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부담스럽기만 하고 서로 원망만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한 편 책임자들은 무사 안일에다 책임의식도 없어지고 다른 한편 말단 행원들은 자기 일만 무난히 처리하고 시간만 보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만이 양상된다."

영희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틈만 나면 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살피고 다녔다. 사실 몇 분 안되는 점심시간에 빨리 점심 먹고 혼자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그래도 편안히 쉬고 다시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는 직원들만의 공간이 필요했다고 느꼈다. 그래도 찾은 보람은 있어 창고로 쓰던 조그마한 공간에서 서류, 폐품들을 치우고 남녀 직원 모두 쉬는 시간에 차를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기로 결심했다.

"김 대리님, 협조 좀 해 주세요?"

김 대리가 나서자 남 직원들이 한둘 일어나 다가왔다. 여직원들도 어디선가 빗자루를 들고 와서 쓸기 시작했다. 무거운 서류 등은 남자 직원들이 정리하고, 여직원들은 빗자루를 들고 깨끗이 정리했다. 이 일로 몰랐던 직원들끼리 서로 서로 잘 알게 되었고 친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간만 해결했다고 다 된 것이 아니었다.

"김 영훈씨 새로 만든 직원 휴게실 가보셨어요?"

"직원 휴게실, 그런 것이 있었나?"

"아니, 지난 주에 창고에 있는 서류들고 날랐잖아요? 여직원들이 다 청소했는 데, 얼마나 깨끗하고 편해졌는지 안 가 보셨어요?"

"아, 그렇지! 바빠서, 미안해."

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미안하다니? 미안하다?"

영희는 직원들의 하루를 다시 본다. 사실 얼마나 바쁜지 휴게실에 갈 시간이 없다. 휴식 시간이라야 겨우 점심 식사 시간뿐 아닌가!

"박 정순씨, 휴게실 가 봤어요?"

"가긴 어딜 가? 괜히 거기 가 앉아 있다가 미운 털이나 박히면 어떻하라고?"

"누가 뭐라 그랬어요?"

"그거야 눈치로 아는 거지, 누가 뭐랄 때까지 있다간 정말 쫓겨 나게."

"휴! 이거야, 원! 산 너머 절벽이로구만!"

영희는 이렇게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해 보면서, 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제도가 변한다고 해서 변화되는 것은 정말 아니었다. 제도의 변화와 아울러, 아니 그것보다 먼저 그 제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변화되어야 하며, 최소한 그것과 동반하여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이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변화란 사업이나 정책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강렬하고도 절실한 원의가 먼저 있어야만 실제로 복음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 때 비로소 자신들의 것이 된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직원들이 다 퇴근 할 무렵 은행 관리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김 대리님, 직원 휴게실을 힘들게 만들었는데 아무도 사용을 안하네요? 누가 거기 가 있으면 쳐다 보고 핀잔이라도 주는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김 대리님은 거기 가 보셨어요?"

영희는 은근히 김 대리를 떠보고 있었다.

"응, 직원들이 거기 갈 시간이 없다나 봐."

"아니, 점심시간이 한 시간인데 왜 갈 시간이 없어요?"

"그래? 점심시간이 한 시간 이던가?"

"점심 시간이 한 시간 아녜요?"

"그렇지, 아마 한 시간이지. 그런데 손님들이 자꾸 와서, 그냥 돌려 보내기도 뭐 한가 봐. 점심 시간엔 손님들도 안 왔으면 좋겠어, 그러면 직원들도 편히 쉴 수 있을텐데. 그렇다고 점심 시간엔 은행 문 닫는다고 공고를 써 붙일 수도 없고, 참. 어려운 문제야!"

김 대리는 상사의 눈치를 보는 평행원이 아니었다. 이미 대리였고 이젠 아예 당연히 점심 시간에 근무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듯한 말투다. 그런데 갑자기 김 대리는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요새, 업무량이 적은가 봐."

"적다니요?"

"난 그렇게 안 생각하는데, 위에선 자꾸 인원을 감축하려고 하는 것 같애."

김 대리는 영희를 곁눈으로 바라 보면서, 이젠 거꾸로 영희를 떠보고 있다.

"인원을 감축하다니요? 요새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김 대리님도 아시 잖아요? 바빠서 휴게실도 못 간다는데, 업무량이 줄다니 말이 되나요?"

"위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몇 명이 떠나야 할 것 같애."

"네? 업무량은 늘어 나고만 있는데, 인원을 늘이지는 못 하더라도 줄이다니 이상해요?"

"글쎄, 요새 민영화 된 은행에서 서비스 개선을 무기로 덤비니까, 우리도 인건비 절감과 경영 합리화를 모색하는 것 아닐까. 위에서 하는 일이라 난 잘 모르지 뭐."

김 대리는 지금 영희의 의견을 묵살하는 정도가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었다. 영희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잘 모르다니? 김 대리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정말 힘들 군, 힘들어!'

며칠 후 결혼도 하고 나이마저 많은 고참 여직원들을 지방으로 발령을 냈다. 또 한편 고도의 인사 전략이 여행원들을 음으로 양으로 괴롭히며 좁혀 왔다. 대리급 직원들은, 민영 은행은 오후 5시가 넘어도 손님을 받는다는 안내문을 마치 직원들이 들으라는 듯이 공공연히 들고서 떠들고 있었다.

"그만두란 이야기군! 야, 치사하다. 치사해! 내가 여기 아니면 못 사냐?"

"차라리 그만 두라고 하지! 에이! 때가 됐어, 때가."

언니들은 하나둘씩 사표를 내기 시작했다. 영희는 정말 안타까웠고 그런 상황 앞에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여태 은행을 위해 그렇게 헌신한 직원들을 표창장은 주지 못 할 망정, 감사를 표시해도 그 노고에 대한 응답이 되지 못 하는데, 적반하장 격으로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고 몰아내 버리다니!"

이런 상부의 태도가 정말 싫었다. 영희는 허무해졌다.

"주님께서는 일하는 것이, 노동하는 것이 신성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이게 신성한 노동의 대가인가?"

영희는 이 상황을 바라보며 노동이 신성하다는 것을 도저히 느낄 수 없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팀회합에서 모두 이야기하고 실천 약속으로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랬지만, 막상 아침에 출근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눈에 띄는 어두운 직원들의 모습만이 영희를 대할 뿐이었다. 영희는 자신의 힘이 어디론가 빠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영희는 어려움 중에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 던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다시 깊이 깊이 관찰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이 제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항상 피로해 했고 힘들어 했다. 또 책임자는 그런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영 합리화를 외쳐 댔지만, 더 이상 변화될 수 없을 정도로 과다한 업무량이란 수렁에 빠진 은행의 구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직원들은 직원대로 책임자는 책임자대로 불만 투성이었다.

영희는 이렇게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점심시간 1시간만은 제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고, 그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즉시부터 여직원 회장과 남직원 회장, 각계의 대리들과 만남의 자리를 자주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중식시간에 대한 문제와 직원들이 떳떳이 휴식 시간을 주장하지 못하는 그 이유와 해결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모임에서 나온 결과는 이랬다. 그 동안 특히 고참 여직원들의 경우 업무시간 중에 눈을 피해 자리를 비우고 커피를 마신다거나, 사적인 전화를 한다거나, 중식교대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는다거나 해왔기 때문에 같은 직원의 입장에서 남자 직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게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에, 점심시간을 다 찾지 못해도 당연하다는 입장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한편 팀회합에서 영희는 휴식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노동과 직장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나누었다. 팀회합에서 나온 결과는 이랬다. 직장은 일하는 곳이다. 그래서 휴식도 노동과의 연관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휴식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일종의 충전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쉬기 위해 일터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지도 않고 계속 일에만 매달린다면, 요령만 생겨나고 능률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앉아 무사안일 분위기만 계속될 것이다. 그러면 업무 수행이나 대 고객 서비스 면에서도 질이 낮아질 뿐만 아니라 사고가 생겨날 확률이 높다. 또한 직원 개인면에서 본다면 일에 기쁨이나 활력이 없고 오히려 육체적인 피로는 과중되고 몸만 축나고, 그렇게 되면 점점 일과 직장이 싫어지게 되어 전직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아울러 이번에는 저번처럼 혼자 생각하고, 윗 사람들과 조직적으로만 계획하여 실행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계획하는 일을 동료들과 그 계획과 연관되는 사람들 모두와 나누어 다소 일이 늦게 진척되는 한이 있어도 '함께 하는 것' 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영희는 휴식시간에 대해 되도록이면 많은 동료들과 그리고 상사들과 많은 시간을 할애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연한 걸 왜 묻는가 싶어 의아해 하고, 새삼 그 일을 꺼내서 뭐하냐 안돼서 그러는데, 여건이 안돼서 그렇지 누가 말리느냐 등등의 반응들이 있었다. 그러나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는 것과 있어야 한다는 청원식의 요구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1시간 동안 휴식하였을 때 오는 문제점과 그 대응책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상사들과 나누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작업으로 실제로 한 번에 확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직원 저 직원들을 통해 직장 전체에 휴식시간에 대한 필요성과 대응책에 대한 토론이 직원 각자의 입에서 흘러 나와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미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한 직장 내의 분위기를 타고 영희는 그 때부터 근무시간 제도의 변화를 위해 그 동안의 대화를 통해 얻은 구체적인 안을 작성해 제출했고, 동료들과 상사들의 이해와 수용으로 무사히 통과 된 그 안은 실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먼저 식사를 하고 누가 나중에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실제로 순번을 짜게 되자 누구 하나 선뜻 마지막 시간을 택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우선 처음에는 영희가 3교대의 마지막 시간대, 그러니까 오후 3시부터 4시 까지의 시간대를 선택했다. 그런데 영희는 자기가 자청한 일이었지만 막상 3시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랐다. 기운이 쪽 빠져 몸에서 열이 나는 듯한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기도 했지만, 영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작게나마 세상을 구하시는 주님의 고통과 아픔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제도가 시행되던 첫날 영희는 일기장에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옮겨 적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골로 1,24)

차례





사랑의 힘


그런데 그 휴식시간 제도의 정착을 위해 뛰었고, 그것이 실제로 정착된 후 영희는 무엇인지 모르는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정작 하고 싶은 것을 다 했고, 원하던 바를 다 이루었는데도 그렇게 신이 나지 않았다. 마치 주일학교 때 연극 공연을 마친 후 허탈해 했던 그 때처럼 허전했다. 이상하게도 일을 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사라졌다. 그 동안 영희는 손님들이 자기 이웃이다라고 생각하며, 그 생각을 자기 일터의 좌우명처럼 여기고 거기서 용기와 힘을 얻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손님에게 편하게 또 될 수 있으면 잘 대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열성도 점점 시들어 갔다. 이상했다. 그 때 마침 전에 경복궁 지점에서 모시던 대리님이 전화를 했다.

"미스 리? 나, 이 대리인데? 요새 잘 지내나?"

"예? 이 대리님요? 어쩐 일이세요?"

"응, 내가 좀 만나 보고 싶어서. 요새 바빠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이따가 한 여덟 시쯤, 전에 경복궁 지점 뒤편에 있던 그 '프랑스와'란 레스토랑에서 만날까?"

"네, 그러세요."

영희는 전화를 받고 의아해 했다. 이 대리는 영희가 경복궁 지점에서 여기 부천 지점으로 옮길 때 신설 민영 은행인 행복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동안 서로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지금 전화가 온 것이다.

저녁 8시 세종로 프랑스와 레스토랑.

"안녕하세요, 이 대리님! 먼저 오셨네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별일 없으시고요? 새로 옮긴 은행은 어떠세요?"

"응, 좋아, 아주 좋아! 그런데 참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부탁을 하나 하지?"

"부탁요? 저 한테 무슨 부탁을 해요? 제가 뭐 해 드릴 게 있나요?"

"그럼, 미스 리 정도면, 아니 미스 리만 할 수 있는 거야! 그 동안 행복 은행이 내부 정리와 준비를 마치고, 이제 우리 은행에서 본격적으로 업무를 추진해야 하는데, 여직원들을 관리하고 교육시킬 사람이 필요해! 내가 전에 경복궁 지점에서 함께 해 봐서 아는데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애. 미스 리가 우리 은행으로 와서 그 일을 맡아 주면 좋겠어. 이 은행은 아주 괜찮은 은행이야! 장래성도 좋고, 재정도 탄탄하고. 만일 미스 리가 와 준다면 본점 인사관리과에서 여직원 교육과 관리 담당으로 일하게 되고, 월급도 지금 받는 월급의 적어도 두 배는 보장해 줄 수 있어. … "

이 대리의 제안을 들으면서 영희는 이러저러한 생각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이 대리가 제안 한 일자리는 영희가 해 보고 싶은 역할이었고, 보수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혹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직이라는 사건 앞에서 영희는 망설여졌다.

"지금 이 하늘은행을 그만 두면 어떻게 되나? 그리고 부천지점은? 내가 가노청 정신으로 활동한 이유는 무엇인가?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중들이 잘 살도록 절을 바꿔야 한다던 그 신념은 어떻게 하나?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도직과 동료들과 직장 복음화를 향한 사명은?"

여러가지로 복잡했다. 골돌히 생각하는 영희를 바라보다 이 대리는 이렇게 말했다.

"뭐, 지금 당장 결론을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한 이 주일쯤 생각해 보고 나에게 확답을 주지! 어때?"

"네."

영희는 화제를 돌려서 이 대리와 서로 간의 가족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번 이 대리 집에 직원들이 초대받아 가서 만났던 이 대리의 부인과 어린 아들 형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영희는 여러 가지 상념들에 휘말렸고, 그러한 상념들을 정리하기 위해 휴가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김 대리님 휴가좀 다녀왔으면 하는데요?"

"휴가? 갑자기 웬 휴가야? 무슨 일이 있어? 아니 한참 잘 하다가 왜 갑자기 휴가야? 이 바쁜 시기에 휴가라니? 미스 리는 다 좋은데 가끔 엉뚱한 데가 있어."

"몸이 좀 안좋아요. 그리고 이번 일 치르느라 좀 지치기도 했고요. 열흘만 쉬고 올게요. 네, 김 대리님?"

"열흘? 열흘이라니?"

"…."

계속 말없이 서 있는 영희를 바라 보면서 김 대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퇴근 후에 다시 말하자고 했다. 퇴근 후 다시 만났지만 영희는 더 할 이야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김 대리에게 직장 이전 문제를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단지 그 동안 너무 바빠서 시골 할머님께도 가지 못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마무리 졌다. 영희가 여름 휴가도 없이 바쁘게 뛰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김 대리는 시골에 계신 자신의 노부모 생각을 했는지 마지 못해 휴가를 허락했다.

열흘! 열흘 동안의 휴가! 영희는 이 시기에 회합도 거의 하지 않고 돌아다녔다. 시골 할머님께 인사를 갔고, 친척들도 찾아 보았지만 계속 머리는 전직 문제와 사도직 문제로 꽉 차 무겁기만 했다. 그러다가 서울로 올라 오는 길에 그 동안 인사차 방문하겠다고 약속만 하던 공주 프라도 수녀원의 신동심언니를 찾아 갔다. 언니는 이미 수련기간을 마치고 첫 서약을 한 후 공주 분원에 내려 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사가 싫어 서울에 올라 와 공장에 다니던 언니가 수녀가 되어 다시 농촌으로 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참 묘한 기분을 갖게 했다. 마치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은 포기할 수 없나 보다 하는 생각도 갖게 했다. 언니와의 긴 대화를 마치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푹 잤다. 오랜만에 아주 달고도 달게 늦잠을 잤다. 영희는 점심을 먹고 밭에 일하러 나가는 언니를 따라 나가려다, 쉬고 기도나 하라는 언니의 만류에 못 이겨 기도실로 들어 가 앉았다.

기도실에 앉아 있으려니, 부천 직원 동료들이 하나씩 생각났다. 그리고 그 동료들이 자신에게 던졌던 말 마디가 하나 하나 떠올랐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나가다간 더 힘든 지점에 좌천되기라도 하면 어쩔래!?"

영희는 직원들이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던져 주었던 이 이야기가 자신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섞인 오해의 눈빛과 말 소리도 들려 왔다.

"그래,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나?, 나는 나일뿐이야. 내가 그런다고 나의 일터가 천국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이 사회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만 낙오자가 되는 것 밖에는 안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하늘은행 부천 지점은 뭔지 모르게 자신을 놓아 주지 않았다. 한편 행복 은행에서 제안한 좋은 조건이라면 보수가 더 높다는 것 외에 특별히 다른 것은 없었다. 하늘 은행 부천 지점에서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그 제안에 솔깃했지?"

그것은 영희가 매일 그 지점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직원들이 미웠다. 영희가 돌이켜 보면 그 동안 자신이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자기가 한 만큼 직원들이 자기에게 해 주지 않았다고 야속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없으면 어디 잘 되나 보자!" 라는 심리에 그런 생각을 더 했다. 기도실에 앉아 있는 것이 편하기는 했지만, 영희의 가슴은 확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영희는 회원들의 직장을 방문해 보고 싶었다. 그 다음 날 영희는 수녀원을 나와 서울로 회원들을 만나러 돌아왔다. 보고 싶은 이들! 자기가 힘들 때는 꺼려졌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고, 자신의 마음을 다 터놓을 수 있는 회원들!

"숙연이 언니야? 나 영흰데 바빠?"

"아니, 괜찮아! 너 지금 어디 있니?"

"여기, 공단 서점 옆 공중전화 박스에 있어!"

"응, 그래! 그럼 거기서 31번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만 와. 그러면 내가 나갈게!"

영희는 언니에게 줄 책을 한 권 사 가방에 넣고 버스를 탔다. 언니는 정거장까지 나와 있었고, 언니와 함께 현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더웠다. 너무 더웠다. 영희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일을 하나 하며 의아해 하는데도, 현장 안에서는 전혀 더위도 못 느끼는 듯 구슬 땀을 흘리면서도 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휴가를 맡아 돌아다니는 자신이 미안해 할 정도였다. 숙연이 언니는 노조 사무실로 영희를 데려 갔다. 하지만 거기도 너무나 바빴다. 할 수 없이 숙연이와 영희는 공장을 나와 근처 시원한 다방으로 들어 갔다.

"더웠지?"

"응! 그런 데서 어떻게 일 해? 언니는 장해!"

"뭐, 남들 다 일하는데. 참, 너 요새 잘 안 보여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전화했더니, 휴가 갔다고 하던데? 휴가는 잘 보내고 있니? 지난 여름 내내 일한다고 휴가도 못 얻었더니 다행이다. 얼굴이 괜찮아 보이는데! 어디 좀 다녀왔니?"

숙연이 언니는 갑자기 자기를 찾아 온 손님에게 전혀 부담감을 안 주려고 하는지, 왜 왔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물어 보았다. 결국 영희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캐묻지도 않았지만, 너무나도 편안하고 푸근해 자기를 줄 수밖에 없었다. 영희는 자신의 고민을 다 털어 놓았다. 영희는 숙연이 언니가 바쁠텐데도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고 또 숙연이 언니가 조합활동 하면서 상사와 동료들 그리고 조합원들에게까지도 실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언니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평소 언니를 대하면서 궁금해 했던 의문점의 해답을 얻었다. 과연 언니는 어디서 활동의 힘을 얻고, 언니의 이런 삶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영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뜨거워지는 가슴 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나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었구나, 믿음이 없었구나!"

바로 그것이었다. 영희는 자신이 동료들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겉 보기에 옳고 정의로운 일을 해도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주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지만, 영희는 자신이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고, 세상의 낙오자가 되는 것 같아 더 이상 활동하지 않으려고 했던 어리석음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여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동료들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미워했던 자신의 부족함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영희는 그 날 밤 집으로 돌아와 기도실에서 정리되고 언니를 통해 확인한 자신의 새로운 삶을 꿈꾸며, 가톨릭 노동 청년회 정기 총회를 준비하는 개인 보고서 말미에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문제들이 나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교육 제도 하에서 자신의 적성과 능력이 무엇인지 미처 돌아볼 여유도 없이 획일화된 그런 기준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데서 오는 한 개인의 갈등과 어려움이 드러난 것입니다. 지나친 경쟁과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이윤을 얻는 것이 당연시 되는 우리의 일터가 조금이라도 변화될 수 있다면 부족한 것이 많지만 열심히 활동할 것을 가노청 회원 여러분과 주님 앞에 약속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1요한 5,4).’ 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영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일터로 돌아갔고, 다시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를 외치며,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에게 편안한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차례





사랑하는 회원들에게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어느 노래 가사에서 들었던 한 구절이었지만, 특별히 우리 남부 가노청 식구 모두는 서로 서로에게 항상 이 마음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매번 정기총회를 맞이하면서 여러분께 드렸던 수많은 말들 그 너머 뒤편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 향한 저의 감정을 표현하는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에게 여러분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더 좋은,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가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작은 용기라도 내서 표현해 봅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무런 가식 없이 이렇게 멋쩍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합니다. 기꺼이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역시 어려운 말과 복잡하기만 한 글이 될지 모르지만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가노청 회원들과 함께하며 배워 정립한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여러분이 동료들을 복음화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 한 번 적어봅니다.

1. 우리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동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노동계에 파견된 사도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주님이나 교회가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를 여러분에게 보낸 것은 주님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님이십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여러분에게 파견할 때 제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또 노동계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서울 대교구의 주교님들은 우리 노동사목 신부들을 부르셔서 우리를 통해 노동계와 노동계에서 일하는 여러분들의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여러분이 원해서 가노청에 왔다고만 생각할 지 모르지만 가노청을 만들고 가노청을 인준하여 그 정신 안에서 활동하도록 하시고 물질적 영신적 도움을, 부족하지만 저 같은 신부를 파견해 주셔서 여러분에게 보내주신 분은 바로 현실에서 주님의 교회를 책임지신 주교님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에게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가 더욱 가까이 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이 세상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을 믿으며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누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교님들의 사도직에 협조하는 우리의 방법입니다.

2. 주님의 호소와 파견 -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섬

우리는 동정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만났을 때, 어려움에 허덕이는 동료들을 만났을 때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은 "불쌍하다. 안 됐다"하는 감정이고 그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그 친구들에게 다가가도록 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호소요 우리를 파견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대답하는 내 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따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더욱 가까이에서 따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과 나의 삶, 즉 생활을 나누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어려운 친구, 동료들뿐만 아니라 제 3세계의 가난한 민족들, 공업화된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농촌 발전에 따라 망하거나 제거된 농민들과 이민 이주자들에게 늘 관심을 두고 다가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부자들이나 권력자들, 선진국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미움을 간직하는 순간 하느님은 내게서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거듭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하지만 우리의 투쟁은 복음을 이루려고 하는 정의의 투쟁이지 기득권을 대신 차지하려는 정치적이고도 이기적인 투쟁이 아닙니다.

3. 복음화 -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 (복음, 福音)

그러면 '복음화'란 무엇입니까? 복음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정치적이고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어느 정당함(또는 명분)에서든지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일입니다. 복음화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노동의 수단이나 소비의 수단이나 혁명의 수단과 동일화 되지 않게 싸우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현실의 부조리와 한계 너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께 향한 갈망을 새겨 주는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의 복음의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일어나게 하고 그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 복음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법이 아니고 방향이며 신앙고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소명은 각자의 선교활동에서 언제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4. 복음화의 단계

1)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복음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복음화시킬 수 있을까?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한다는 우리의 사명은 우리 삶의 개인적이고도 내적인 면이나 외적인 면에서 보람과 긍지, 그리고 힘을 줍니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할 때, 특별히 자신들의 삶을 나누는 생활반성과 복음 나눔의 회합 시간에 참여하면서 신앙의 확신과 사제생활의 멋과 사목을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가노청회원들의 팀회합과 삶 속에서 주님이 살아서 함께 하고 계시며,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감명 깊게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노청 회원들은 순박하고 단순하여 주님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안에서 자기 삶의 길과 양식을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피하지 않고 애써 자기 삶의 조건 (자신이 하루에 겪는 여러 가지 일) 안에서 실현하고자 합니다. 또한 실제로 자신의 삶 안에서 실현시킴으로써 주님의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한 걸음씩 복음의 투사요 사도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부러운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며 또한 복음을 믿고 그것을 이루려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확신이 거듭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루가 10,21) 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되며 여러분을 통해 내가 복음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2) 복음화의 첫 단계 - 동일화와 상호신뢰

처음 팀회합에 참석하는 예비회원들이나 노동자 교리에 들어온 예비자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도 들지 못합니다. 이름을 물어 보아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며, 수첩에 글씨를 쓰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쓰던 것을 멈추고 덮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받아 써가며 진지하게 들으면 놀랍니다. 아무도 지금까지 자신들의 말을 받아 써 가면서 들어줄 정도로 존중받고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얼마가 지나면 예비회원들이 먼저 말하게 되고, 스스로 친구를 데려오고, 먼저 말을 걸어 주는 사도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하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을 복음화 하는 첫단계는 동일화와 상호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임무는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고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는, 그래서 자신의 존엄성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으로 기다리고 아껴 주며 키워 주려는 복음적인 열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는 가르치고, 지적하고, 보호해 주려는 상하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인격적인 관계이며, 주는 것만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나눔 속에서, 같은 인간 조건에서부터 출발하려는 동일화의 진지한 자세와 그에 따라 형성되는 상호신뢰의 작업입니다.

이 동일화와 상호신뢰를 통해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여 창조 때의 본성을 회복하게 되며 우정 안에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1989년 2월 주교님으로부터 '가노청 남부 지도신부'를 맡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신학과 4년생 때부터 마음 속으로 그려왔기 때문에 설레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 3년간 지속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커다란 부담도 있었습니다.

첫해 1년간은 정착기였습니다. 이 1년간은 가노청 회원들과 함께하기 위해 내 자신의 사고와 의식, 행동양식을 비롯해 개인적이고도 사적인 생체리듬까지, 내 삶 전반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에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1년간은 회원들의 표현대로 '우리들의 신부님'이 되기 위해 열심히 뛰었습니다. 어디든 회원들이 모이면 찾아 가고 싶었고, 이렇게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함께 하는 것 외에도 미사 전례나 기도 중에 회원들과 함께 활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회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회원들과 같은 조건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우선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저녁이면 10시 30분에 취침하던 신학교 생활습관이 바뀌어져야 했습니다. 더구나 전에는 저녁 8시부터는 모든 일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는데 (외출금지), 가노청은 8시부터 였습니다. 들어와 앉아 있어야 할 저녁 시간에 연합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성당 밖으로 나간 다는 것 자체가 처음엔 이상하고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또한 저녁 늦게 들어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한다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두번째로 사고와 의식의 전환 문제도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항상 머리로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행동양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생각하기 전에 일은 벌어졌습니다. 논리에서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둘러싼 환경과 그 사건에 따른 반사적인 행동이 논리와 사고를 지배했습니다. 그것은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 한가운데 선 회원들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성당일은 회의를 하고 일을 추진하며 모든 결정은 신부인 제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노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노청의 활동은 회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에서 자기의 능력에 맞게 자기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부가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번째로 당시 가노청 남부 안에서 지도신부의 자리를 찾는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과연 지도신부의 역할과 자리는 무엇인가를 꽤 오래 고민했습니다. 회의를 하거나 무슨 결정을 내려도 지도신부는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지도신부가 와 있는데도 지도신부가 관계해야할 전례나 미사, 피정 문제에 대해 상의도 없이 자신들끼리 결정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노청에 내가 필요한 존재인가를 내 자신에게 되묻기도 여러번 했습니다. 물론 이 극단적인 형태는 성숙되지 않았던 가노청의 일면이긴 했지만, 나는 차츰 다른 면에서 사목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사목해야 하는 것인지를 새롭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노청 지도신부는 한 마디로 '영적 지도자'라는 표현이 걸맞은 것 같습니다. 또한 그것이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3) 복음화의 둘째 단계 - 복음을 통해 주님과 만남

복음화의 첫 단계가 인간성 회복과 우정의 건설이라면, 두번째 단계는 주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의 빛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는 성서를 같이 나누며 자신의 삶에 복음을 적용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고 다소 지루하며 세상의 악과 싸우는 진통을 겪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현실 안에서 자기 소신대로 아니 덧붙여 복음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 더욱 더 파고드는 주님의 사랑과 완덕을 향한 열망이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청년 노동자들이 자기 인생의 시기에 겪어야 하는 전직과 전업, 승진과 이전 등의 직장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복음적 활동과 가정 안에서의 자신의 역할 등의 과제 앞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식별하는 순간들입니다.

옳은 것을 실천하려 하지만 두려움에 망설이는 순간, 사회적인 기준과 관점에서 더 나은 조건과 자리 앞에서 고민해야 하는 순간 순간에, 그야말로 '삶과 마주친 청년 노동자' 로서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몸부림치며 찾아 나서는 제자들의 단계입니다.

이 때 사목자는 주님께 대한 신뢰와, 거듭되는 사회의 벽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자기 인생의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좌절하게 됩니다. 또한 사목자의 영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자기 수준에 맞게 적절히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며 신중하게 대화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그 결정과 실천이 주님의 뜻과 사랑 안에 있음을 힘있게 인정해주고 지켜봐주며 위로하고 성원합니다.

저는 유치원 때부터 성당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3학년 때 세례를 받고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랄 때는 (지금도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마찬가지이지만) 신부님과 내 문제를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상담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또한 우리에게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해주는 사람도, 적게나마 자신의 삶 속에서 복음을 실현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아니 내가 보지 못했겠지요. 그래서인지 성당을 그렇게 오래 다녔지만 복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물론 피정도 가고 수련회도 가고 여러분처럼 주 1회 모임도 했지만 주제토론이나 했지, 여러분처럼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활을 비춰 보는 생활 나눔이나 복음 나눔을 해 본적은 몇 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땐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노청 지도신부 2년째부터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과감히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을 신뢰하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괜히 부작용이나 들지 않을까 해서 돌려서 말하고, 좋은 말로 바꿔 말하고. 하지만 그것은 제가 아직 복음을 내 삶 안에서 구체적이고도 명료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오히려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저는 신앙이 제대로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차로 내 삶 속에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성서 외에 복음화시키는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적인 혼란과 방황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확신을 가지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내적인 투쟁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여러 가지 다른 방법과 수단으로 여러분과 함께 했지만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돌아와 방안에 앉으면 다가오는 허탈감과 아쉬움을 수없이 느끼면서 나는 이 길을 택했습니다. 아니 그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연합회 본당 나눔에서 여러분은 구로 3동의 한 투사가 자기 본당의 어려운 상황을 바라볼 때마다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되새기며 울다 울다 "이젠 기도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주님의 말씀인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현하는 길 외에 또 다른 방법과 수단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을 따르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왜 그리 피해 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4) 복음화의 셋째 단계 - 복음의 사도

두 번째 단계가 복음을 깨달아, 자신의 것으로 얻고, 맛들여,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단계였다면, 세 번째 단계는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십자가를 지고 세상의 죄악을 물리쳐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단계입니다.

차츰 가난한 이들은 복음을 실천하면서 자그마하게나마 열매를 맛보고, 시련을 당하더라도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체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얻고 증거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세상의 악과의 투쟁을 시작해 나가며 복음을 선포 증거하는 사목자의 '종이 아니라 벗으로서' (요한 15,15 참조) 함께 걸어가게 됩니다.

한 가노청 회원이 자기 집도 없고 그나마 겨우 방 한칸에 5명의 가족이 함께 살며 현대적인 가재도구나 귀금속도 없지만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자기 가정 안에, 그리고 자신의 직장 안의 모순 속에서, 철거되어 가는 지역사회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읍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가리켜 '신앙인의 참 모습' 이라고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따라 갈 수 없는 세상의 유혹과 미련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이러한 동료 신앙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임으로 초대하여 복음화의 첫 단계를 실천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나의 가장 큰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회원들이 복음을 실천하고자 하지만 용기가 없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끝까지 실현하려는 절실한 의지가 약해서 고민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입니다. 또 한편 회원들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의 거부 앞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모습이 제일 안쓰럽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마 나는 사도가 되었나 봅니다. 이젠 나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의 아픔이 나에게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오니 말입니다.

중 3때였던가 무지개를 잡으러 다니던 사내가 무지개 잡기를 포기했을 때 그 눈썹과 머리가 갑자기 하얗게 되어버렸다는 국어 교과서의 이야기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우리의 사명인 복음을 포기할 때 희망은 사라집니다. 그 포기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 수 없게 됩니다.

홀로 있을 때나 기도할 때 여러분의 모습이 항상 아른거리며 보고 싶고, 만나면 기쁩니다. 여러분이 내 생의 일부가 된 지 이미 오래지만 지금은 내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복음의 투쟁은 내 사목 생활의 거의 전부입니다.

5) 쓰디쓴 체험을 통해 얻는 복음화의 값진 열매

복음화의 열매는 외형적이거나 조직적인 공동체의 건설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더 수축될 수도 있고, 세상의 광대함과 조직적인 악의 세력 앞에서 보잘 것 없는 한 알의 밀씨와도 같은 수확일 수 있으며, 현세에서는 풍요함 보다 패망하는 듯한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외형적인 모습은 실패요 허무한 것이지만, 내면으로는 주님께 순종함이고, 주님과의 일치요, 사도의 표징입니다. 우리 자신의 사도적 활동 안에서 우리는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시간도 빼앗기고, 자신의 사회적인 꿈도 없어져 버리지만) 그 열매는 우리에게 참 꿈을 실현시켜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완성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신부입니다. 아니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내가 어디서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 사도들을 만날 수 있고, 여러분 같은 형제, 자매들을 만나고 얻을 수 있겠습니까? 난 정말 행복합니다.

여러분의 정기총회지에 실린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낍니다. 또 투사 선서 때에도 내 가슴 속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주님의 은총 안에서 따스한 봄날의 보슬비처럼 계속 흘러내립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회원들을 지켜주시고 키워주셔서! 또 나를 회원들에게 보내 주셔서! 그리고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나를 받아주시고 함께해 주셔서!

사랑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 모든 것을!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나도) 언제나 어디서나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주님 태어 나신 지 1993년 9월 22일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서울 대교구 남부 연합회

심 흥 보 (베드로)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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