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자료실 >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 어농리(윤유일 묘)

죽음으로 신앙 지킨 신앙 가족의 요람

여주와 함께 찰지고 기름진 쌀로 유명한 경기도 이천군 너른 들 가운데 위치한 어농리 사적지에는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해 오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모셔져 있다.
 
이천은 우선 사적지를 찾아 나선 길에서 만나는 너른 들과 그 들을 싸안은 듯 부드러운 곡선으로 흐르는 야트막한 구릉들이 정겨운 느낌을 준다. 중부와 영동 고속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서울이나 대전, 원주 등지에서도 쉽게 찾아올 수 있지만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조금 번거로운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사적지가 있는 마을까지 가는 버스 편은 하루 서너 번에 그쳐 시간이 안 맞으면 두세 시간을 논두렁에 주저앉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택시 기사들이 사적지 위치를 잘 알고 있으므로 일정이 바쁘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그럴 경우 이천 본당에 문의해 가톨릭 운전 기사 사도회 소속 기사를 찾아 자세한 안내를 받는다면 더욱 좋다.
 
어농리 사적지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묘가 모셔진 단내 사적지와도 지름길을 통하면 채 6킬로미터 남짓의 거리밖에 안 되므로 두 사적지를 한데 묶어 순례하는 코스가 괜찮을 듯하다.
 
윤유일을 포함한 파평 윤씨 온 가족이 박해의 서슬 아래 희생된 후 20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족보도 없고, 또 교회 안에서는 그 후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서야 후손 중 하나인 윤필용 씨가 나타났고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 안에서 윤 바오로의 조부 사혁과 부친 윤장, 그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윤관수, 그 사촌 누이동생 점혜 아가다와 운혜 루시아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의 가묘를 만들었고 그해 9월 15일 수원 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축성, 성역화됐다. 한국 교회사 안에서 순교자 윤유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그가 바로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셔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윤유일은 1779년 주어사 강학회를 주도한 권철신의 제자였다. 이승훈이 북경에 들어가 영세하고 돌아와 1784년 한국 교회가 창설됐으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미흡했다. 그래서 성직자가 없었던 당시, 평신도가 성사 집행과 미사 봉헌을 할 수 있는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상 숭배는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됐다.
 
스스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승훈, 권일신 등 교회 지도자들은 1789년 10월 예비자였던 윤유일을 북경의 북당 천주교회로 파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청했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견진까지 받아 돌아왔다.
 
평신도의 성무 집행은 안 된다는 회답을 구베아 주교에게 받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1790년 9월 재차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해 성사를 집행할 신부를 보내 달라는 간청을 했고 그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의 회오리가 어느 정도 잦아든 1794년 말 윤유일은 지황(地璜)과 함께 북경으로 길을 떠나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서울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목자가 없던 한국 교회에 첫 사제로 발을 디딘 주 신부는 서울 북촌(北村:지금의 계동)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머물렀고 처음 6개월간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신입 교우인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 신부는 몸을 피해야 했고 윤유일, 지황, 최인길 세 사람은 체포돼 비밀리에 그 날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 날이 1795년 6월 28일, 윤유일의 나이 36세였다.
 
이처럼 사제가 없어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던 불완전한 한국 교회에 신부를 처음으로 모셔와 완전한 교회로 만들었던 윤유일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한편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에서 체포돼 신안 앞바다 먼 섬인 임자도로, 그 숙부 윤현은 강진으로 유배됐고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 안드레아, 그 동생 윤유오 야고보는 순교했다. 윤유일의 사촌 누이동생이자 동정녀로 살았던 윤점혜 아가다와 운혜 루시아는 1801년 양근에서 참수됐다.
 
이처럼 윤유일과 그 일가족이 모두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고 그중에서 윤유일·윤유오·윤점혜는 현재 시복이 추진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이천 어농리 성지의 의미

경기도 이천 시내에서 동쪽으로 난 복하다리를 건너 우회전하여 죽산쪽으로 10km 정도를 가다 보면 우측으로 한 성지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어농리 성지'(이천시 모가면)로, 1795년에 순교한 밀사 윤유일과 그의 동료들을 비롯하여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등 모두 10명의 순교자들을 모셔 놓은 곳이다. 이 중에서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야고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신이 없는 의묘이다.
 
윤유일은 양근 대감마을 권철신의 제자로 교회가 창설된 지 3-4년이 지난 뒤에야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무렵 교회 지도층에서는 밀사를 선발하여 북경에 보낼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는데, 마침 성격이 온순하며 입이 무거운 30세의 윤유일이 밀사로 추천되었다. 그는 아직 신입 교우였지만 신심만큼은 동료들을 탄복시킬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그러므로 험한 북경 길을, 그것도 천한 상인 신분으로 왕래해야 하는데도 순순히 밀사의 임무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였다. 특히 두 번째로 북경에 갔을 때는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서 훗날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 필요한 성작과 제의 등을 받아 왔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는 포도나무 묘목을 윤유일에게 주면서 재배 방법과 포도를 수확한 뒤 포도주를 담그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이어 1793년 말에는 동료 밀사 지황(池璜, 사바)이 북경을 다녀오게 되었고, 1794년 말에는 윤유일, 지황,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등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영입하였다. 그 결과 1795년 4월 5일에는 주 신부의 집전으로 조선 땅에서 최초로 부활절 미사가 봉헌될 수 있었다.
 
이 부활절 미사 때 사용된 포도주는 5년 전에 윤유일이 가져와 가꾼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땅에서 최초로 가꾸어진 포도나무였고, 최초로 빚어진 포도주였다. 북경의 포도나무가 조선에서 신앙의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이미 윤유일과 동료들을 순교의 길로 인도해 가고 있었다. 부활절이 지난 어느 날 모든 사실이 조정에 밀고된 후 주 신부는 여회장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밀사 윤유일, 최인길, 지황은 끝내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포도청에서는 이내 그들에게 갖가지 형벌을 가하며 주 신부의 종적을 알아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밀사들은 결코 용기와 신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참 천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만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천상의 기쁨이 넘친 얼굴로 순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로 윤유일의 나이는 36세, 최인길은 31세, 지황은 29세였다. 순교 후 세 밀사들의 시신은 광희문(일명 시구문)을 지나 왕십리를 거치면 닿게 되는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 부근의 강물에 던져졌다. 이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현재 어농리의 무덤은 의묘로 조성되었다.
 
윤유일의 순교가 즉시 양근의 본가에 회오리를 몰고 온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은 결국 유명한 순교 집안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01년의 박해가 일어나면서 부친 윤장과 숙부 윤현이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았고, 숙부 윤관수(안드레아)는 순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 사촌 노이 윤점혜(아가다)와 윤운혜(마르타), 운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한편 4월 19일에는 교우들이 그토록 숨기려 애썼던 유일한 목자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한 뒤 새남터에서 순교하였고, 5월 23일에는 강완숙 회장마저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조선 교우들은 주 신부의 순교시에 일어났던 기적을 서로 전하면서 기억했고, 훗날 이를 북경 주교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본래 청명하였던 하늘이 홀연히 어두운 구름에 가득 덮이고, 광풍이 일어 새남터 모래 벌판에 돌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형 집행이 끝나자 바람과 비가 즉시 그치고, 하늘의 해가 다시 빛났으며, 영롱한 무지개와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군사와 백성들은 이 날의 광경을 보고는 모두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1811년 조선 교우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신미년의 서한'에서)
 
윤유오의 후손들은 이후 오랫동안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러나 진리는 끈질긴 법이다. 그 집안의 신앙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고, 후손들은 1987년부터 윤유오의 무덤이 있는 어농리 선산을 성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윤유일이 영입한 주문모 신부,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인 윤점혜, 여회장 강완숙의 의묘도 함께 조성하여 현양해 오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수원교구에서 추진하는 '윤유일과 주문모 신부 등 초기 순교자들 8분의 시복 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일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4호(1999년 5월), pp.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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