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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의 성지와 사적지 (1)

주문모 신부와 신유박해 관련 사적지

 
1. 한강개의 신앙과 성직자 영입 운동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와 성지는 교회 창설과 함께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초기의 대표적인 사적지라고 할 수 있는 '수표교'(水標橋)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 요한)의 집, '명례방'(明禮坊, 현 외환은행 본점과 명동 대성당 사이)에 있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수표교는 1784년 겨울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곳이고, 명례방은 교회 창설 직후에 수표교의 신앙 공동체가 새 집회소를 마련하면서 이전된 곳이었다.1) 그러다가 197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이 전주 남문 곧 '풍남문(豊南門, 현 전주시 전동 소재) 밖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함으로써 이곳이 한국의 첫 순교터가 되었다.2)
 
이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일반 사적지보다 순교터나 순교자의 무덤, 그 유해가 있는 곳을 성지로 여겨왔으며, 1984년에 103위 성인이 탄생하면서 이들과 관련된 곳을 모두 성지라고 일컬어왔다. 물론 가톨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순교자의 무덤이나 유해가 있는 곳을 순례하고 공경해 왔다. 반면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그들의 탄생지나 피신처도 무덤이나 유해 못지않게 중시해 왔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순교의 시작과 과정을 중시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성지는 순교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순교자의 탄생이 바로 박해의 결과였으므로 성지와 박해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해박해 이후 새로운 성지가 형성된 것은 1795년의 을묘박해(乙卯迫害)였으며, 이것이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의 첫 선교사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의 활동이나 순교 행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천주교회 창설 이듬해인 1785년 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고, 김범우가 형벌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지자, 몇몇 양반 지도층 신자들은 집안의 박해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벽은 부친에 의해 갇혀있다가 1786년 봄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첫 세례자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은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丁若鏞, 요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등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였다.3)
 
교회 지도층에서 다시 재건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786년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이승훈을 비롯하여 다른 10명의 신자들은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788년 무렵에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그 오류를 지적하여 성사 집전이 중단되고, 이어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고난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4)
 
윤유일의 집안은 본래 이천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그가 태어나 살던 곳은 양근(楊根)의 '한강개'(漢江浦, 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였다. 이곳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이벽과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루가), 류항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아우 권일신의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녹암계(鹿庵系) 이물들이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던 마을이었으니, 1784년에 이벽이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에 앞서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 이벽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한강개 뒤편에 위치한 앵자봉 자락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이었다.5)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였던 이존창과 류항검은 이후 자신들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과 '초남'(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을 중심으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초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윤유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였다.6) 이후 윤유일은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으며, 1789년에는 라자로회의 북당 선교 단장인 로(Raux, 羅黃祥) 신부에게 조건 세례를 받고, 남당(南堂)에 있던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어 1790년에는 다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7)
 
 
2.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살곶이다리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을 통해 조선 신자들과 약속한 대로 1791년 봄에 마카오 교구 소속의 레메디오스(dos Remedios, 吳) 신부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보냈지만, 약속 날짜가 맞지 않은 탓에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바로 이 해에 신해박해가 일어나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고, 권일신이 이듬해 유배를 가다가 도중에 사망하면서 천주교회는 다시 한번 타격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1790년에 구베아 주교가 내린 제사 금지령으로 몇몇 양반층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하였으니, 그 안에는 권철신, 이승훈 등이 끼어있었다.
 
조선 신자들이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한 것은 1793년이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층으로 활약하던 윤유일과 최창현(崔昌顯, 요한),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지황(池璜, 사바), 그리고 여교우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이 지황과 백(白) 요한을 북경으로 파견한 것이다. 강완숙은 본래 충청도 덕산에 살았으나, 당시에는 서울로 옮겨와 남대문 인근의 창동(현 중구 남창동)에 살고 있었다.
 
지황은 구베아 주교를 만난 뒤 1794년 초에 귀국하면서 다시 한번 성직자 파견 약속을 받았다. 이때 구베아 주교가 선발한 사람이 바로 북경 신학교의 첫 졸업생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였다. 그는 조선의 밀사들과 약속한 대로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나 요동의 봉황성 책문(柵門, 국경 관문)으로 가서 조선 신자들을 만났지만, 압록강이 얼 때와 연행사가 다시 북경에 갈 때를 기다려 입국하기로 하였다.
 
그 무렵 최인길은 서울 '정동'(貞洞)에 장차 신부가 거처하게 될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1794년 12월 14일(양력 1795년 1월 4일), 주문모 신부는 마침내 지황, 윤유일 등의 안내를 받아 서울에 도착한 뒤 줄곧 이 집에서 머무르며 조선 말을 배웠다. 그리고 1795년 윤 2월 16일(양력 4월 5일) 한국 땅에서 최초로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였으니, 이로서 정동 최인길의 집은 조선 포교지의 유일한 본당 역할을 하게 되었다.8)
 
그러나 한 밀고자에 의해 주 신부의 거처가 포도청에 알려졌고, 5월 11일에는 체포령과 함께 포졸들이 정동으로 파견되었다. 을묘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주 신부는 남대문 안에 있던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였지만, 집주인 최인길이 체포되고 이어 윤유일, 지황도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포도대장은 자신의 손으로 주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어 일을 빨리 매듭지으려고 무서운 형벌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1795년 5월 12일(양력 6월 28일) 이들 세 명은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게 되었으니, 훗날 밀사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선교사의 안내자들인 지황, 윤유일, 최인길 세 교우는 체포된 바로 그날 밤에 법정으로 인도되어, 재판관들의 악의와 술책과 잔인성을, 침묵과 인내와 항구함으로 이겨냄으로써 재판관들을 지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십자가에 못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모독하라고 하자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참된 하느님이시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재판관들은 세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와 조롱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외국인의 입국에 대해 대답을 얻어내지 못한 데 절망하고 격분한 나머지 죽을 때까지 그들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 증거자들은 거의 같은 시각에 고문 가운데 숨을 거두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의 이름을 불렀으며, 얼굴에는 예수와 교회를 위한 고통에서 맛보는 영적인 기쁨의 평온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9)
 
이렇게 하여 박해자들의 재판소인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사적지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순교터가 되었으니, 이 사건은 앞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탄생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세 순교자들의 시신은 관례대로 동쪽의 '광희문'(光熙門, 일명 水口門 또는 屍軀門)을 통해 강물에 버려지게 되었다. 장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은 이곳을 통해 내다버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광희문 밖의 인근 언덕은 훗날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힌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면 순교자 윤유일, 최인길, 지황의 시신이 버려진 강물은 어디였을까? 당시에도 지금과 거의 유사하게 광희문을 지나면 왕십리와 행당동을 거쳐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을 건너게 되어 있었다. 이 다리는 경기도 양주군 일대의 상인과 주민들이 서울로 들어오던 관문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광희문을 거쳐 나갔다면 그들의 시신은 이 부근에서 한강 쪽으로 버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터로, 시성 운동이 시작되면 반드시 확인해야 할 장소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3. 장고봉과 정사박해의 순교자
 
주문모 신부는 이에 앞서 1795년 초에 경기도 양근, 전라도 고산(高山) 땅으로 이주해 살던 이존창의 집과 류항검의 집을 순방한 적이 있었다. 그때 주 신부는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내려가다가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 아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이 무덤은 우리 나라 신자들 가운데 유명한 분의 무덤입니다.'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교(聖敎)를 공부하여 만약 성인품에 오른다면 마땅히 천주당을 그 사람의 무덤 위에 건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훗날 조선 땅에 성교가 크게 성행하게 된다면, 이 두 사람의 무덤은 마땅히 천주당 안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10)
 
이처럼 주 신부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다면 이들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성당이 건립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곳은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의 '장고봉'(長古峯) 인근으로, 한국 최초의 순교자들이 묻혀있는 의미있는 사적지라고 할 수 있다.11) 그러나 지금 이곳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주 신부가 말한 대로 신앙의 자유를 얻고 시복 작업이 추진되어 왔지만 성당은 건립되어 있지 않다.
 
이후 6년 동안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머무르면서 지방의 교우들을 자주 순방하였다. 이존창과 류항검을 다시 한번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양근 한강개에 있는 권일신의 아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을 찾기도 하였고, 충청도 덕산의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과 정산필(鄭山弼, 베드로)을 만났다. 그리고 정산필을 내포의 회장으로 임명하고, 1795년 7월경에는 충청도 연산 출신의 황심(黃沈, 토마스)을 밀사로 선발하여 이듬해 겨울에 그를 북경으로 보냈다. 이때 주 신부는 신자들과 의논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계획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태우고 올 선박의 파송'을 요청하였지만, 허락을 얻지는 못하였다.
 
1797년부터 1799년까지 충청도에서는 정사박해가 일어나 여러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그 결과 1798년에는 이도기(李道起, 바오로)가 정산에서, 정산필이 덕산에서 순교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인언민,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였다. 그 유명한 해미 순교터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중에서 인언민의 사적지가 삽교 본당 신자들에 의해 1991-1992년에 고향인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 조성되었다.12)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주 신부는 경향으로 피신해 다니면서도 여러 차례 황심과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옥천희(玉天禧, 요한) 등을 북경에 파견하였으며, 평신도들의 신심 단체인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였다.
 
 
4. 신유박해와 서소문, 새남터
 
1800년 무렵,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수는 1만 명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곧 이어 일어난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앞서 1800년 4월과 5월에는 여주와 양근에서 경신박해(庚申迫害)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박해의 전주곡과도 같았다.
 
1801년 1월 10일(양력 2월 22일), 대왕대비 김씨 곧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이름으로 반포된 윤음을 법적 토대로 하여 시작된 박해는, 그 초기에 명도회장 정약종(丁若種, 아우구스티노)의 책 상자 사건(柵籠事件)이 일어남으로써 좋은 명분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관직에 있거나 학문으로 이름이 있는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정약종을 비롯하여 홍낙민, 홍교만, 홍인 등 4명이 순교하였다. 이어 박해는 주문모 신부가 3월 12일(양력 4월 24일) 의금부에 자수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9월 29일에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데르)이 체포되고 [백서](帛書)가 발각되면서 세 번째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100여 명이 순교하거나 처형되었고, 400여 명이 유배를 당하였다. 이들의 순교터로는 우선 서울의 '서소문 밖'과 '새남터'(현 새남터 성당의 남쪽 지점)를 들 수 있다. 또 전라도에서는 전주의 풍남문 밖, 무장의 '개갑(開甲) 장터'(현 고창군 공음면 갑촌), 김제 등지에서, 충청도에서는 공주와 예산에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옥중에 있던 경기도 신자들의 순교터인 '경기 감영'(현 서대문구 적십자 병원 자리)과 '여주 남문 밖', '양근 서문 밖'이 있으며, 포천과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도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때 지방의 순교자들은 서울에서 판결을 받았을지라도 해읍정법(該邑正法)에 따라 각 거주지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는데, 이는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13)
 
이중에서도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곳은 서울의 '서소문 밖' 형지로,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바로 이곳은 [서경](書經)의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서울의 공식 처형장이었다. 반면에 '새남터'는 조선 개국 이래로 군인들의 연무장으로 이용되던 곳이었으며, 모반 죄인과 같은 중죄인을 처형할 때는 이곳을 형장으로 사용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4월 19일(양력 5월 31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한편 이밖에도 기록상으로 정확히 나타나는 순교터는 '여주 남문 밖'과 '양근 서문 밖'이 있다. 1800년에 여주와 양근에서는 모두 18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용삼(베드로)이 경기 감영의 옥중에서 1801년 2월 14일(양력 3월 17일)에 순교하였고, 3월 13일(양력 4월 25일)에는 여주에서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 임희영, 정종호 등 5명이, 양근에서 윤유오(야고보), 유한숙 등 2명이 순교하였다. 그 장소가 바로 '여주 관아의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길가'와 '양근 관아의 문에서 서쪽으로 2리쯤 떨어진 큰길가'였다.14)
 
신유박해의 순교자들 가운데 그 무덤 소재지를 알 수 있는 신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윗배알미리'(현 경기도 동부면 배알미리)에 있는 정약종의 무덤과 '어농리'(현 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에 있는 윤유오(尹有五, 야고보)의 무덤이 알려지게 되었다. 어농리에는 이밖에도 윤유오의 형 윤유일과 숙부 윤관수(안드레아), 사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와 윤운혜(마르타), 정광수(바르나바) 부부, 그리고 주문모 신부와 여회장 강완숙의 의묘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배알미리에 안장되어 있던 정약종의 유해는 1959년 4월에 반월 사사리로 옮겨졌다가 1981년 11월에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유명한 순교 사적지는 대부분 신유박해 때에 이미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그중에는 명례방, 여사울, 초남, 풍남문 밖, 포도청, 광희문 밖, 해미, 새남터, 서소문 밖, 남한산성 동문, 배알미리, 어농리 등과 같이 널리 알려져 왔거나 오래 전에 사적지로 개발된 곳도 있다. 반면에 수표교, 한강개, 살곶이다리, 장고봉, 주래, 개갑 장터, 경기 감영, 여주 남문 밖, 양근 서문 밖처럼 널리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가 밝혀져 있지 않은 사적지도 많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들의 위치를 고증하여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두거나 사적지로 개발하는 작업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신유박해 이전의 미확인 사적지 일람>

사적지 | 구분

성격 및 의미

현재 지명

수표교 앞

한국 천주교회가 청설된 곳이요, 첫 세례식이 있던 이벽(요한)의 집

서울 종로구 소표동 인근

살곶이다리

1795년 을묘박해 때의 순교자 윤유일, 최인길, 지황의 시신이 버려진 곳(추정지)

서울 성동구 행당동

장고봉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 소재지(추정지)

충남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 부근

여주 남문 밖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최창주, 이중배, 원경도 등 5명이 참수된 순교터

경기도 여주시 창리 인근

양근 서문 밖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유오, 유한숙, 민경배 등이 참수된 순교터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인근

 
 
1) 이원순, "金範禹家 論考", [韓國 가톨릭 文化活動과 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차기진, "명례방 공동체", [한국 가톨릭 대사전] 4, 1997.
2) 차기진, "한국교회 최초의 치명터 전동 성당", [윤지충, 권상연과 전동 성당], 천주교 전동교회, 1992, 73-96면
3) Ch. Dallet, [한국 천주교회사] 상, 안응렬, 최석우 옮김,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317-322면.
4) Andreas Choi, L'Erection 여 premier Vicariat Apostolique et les origines 여 Catholicisme en Coree, Suisse: Schoneck-Bekenried, 1961, 91-97면.
5) 하성래, [尹有一, 鄭 評傳], 聖黃錫斗루가書院, 1988; 차기진, [星湖學派의 西學認識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1995.
6) 이승훈이 1784년 말에 연행사(燕行使) 일행 중의 한 사람을 선택하여 북경에 있는 북당(北堂) 선교사들을 만나고 돌아오도록 한 적은 있지만, 그를 교회의 밀사로 보기는 어렵다.
7) 최석우, "이승훈 관계 서한 번역문", [교회사연구] 제8집, 1992, 163-170면.
8) 최석우, 위의 글, 197-198면, 구베아 주교가 카라드랭 주교에게 보낸 1797년 8월 15일자 서한; 차기진 옮김,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자료집] 제1집,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 1996, 37, 45면.
9) 최석우, 위의 글, 199-200면.
10) [邪學懲義] 권2, 233-234면.
11) 차기진, "한국교회 최초의 치명터 전동 성당", [윤지충, 권상현과 전동 성당], 천주교 전동교회, 1992, 94면.
12) Ch. Dallet, 앞의 책, 399-426면; 삽교 본당 30년사 편찬 위원회 편, [삽교 본당 30년사], 1997, 155. 161-162면.
13) 차기진, "한국 천주교회와 諡福, 諡聖運動의 방향", [교회사 연구] 제11집, 1996, 189-207면.
14) 이기경 편, [闢衙編] 권2, 345-346면.
 
[출처 : 차기진, 사목 230호(1998년 3월), pp.8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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