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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명례방 공동체

1. 유학자들의 천주교 신앙 수용
 
1603년 이광정(李光庭)이 북경으로부터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를 가져온 이래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한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들은 약 200여 년 동안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리고 천진암, 주어사를 중심으로 강학회를 개최하면서 실학 운동을 전개하던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남인 실학자들이 1777년 혹은 1779년에 이르러 광암 이벽(曠菴 李檗)의 설득에 의해 한문서학서 안에 담겨있던 천주교 사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 때 이벽이 참석했던 강학 모임은 녹암 권철신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참석자들 역시 그의 문하생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 역시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문서학서 안에 포함된 천주교 교리를 거부할 것인지 아니면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갈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이 강학회에 참석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담긴 깊은 가르침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이를 보유론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드렸으며, 7일 중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읽은 후로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다른 일은 모두 쉬고 묵상에 전념하였으며, 또 그 날에는 육식을 피하였다.
 
2. 이승훈의 북경행과 세례
 
하지만 이들이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리기는 하였지만, 이벽 이외의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벽마저도 자신들의 학과 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는 있었지만, 그 동안 북경에서 전래된 서적만을 가지고서는 천주교를 완전하게 실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그의 친구이자 이가환(李家煥)의 생질(甥姪)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서인 이승훈(李承薰)이 1783년 동지사행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그의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성당 정면

성당 측면

예수님상

성당 내부

이승훈은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서한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천주교 교리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북경을 방문하게 되면 서양인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발달된 수학 이론에 대해 배우고 그에 대한 책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은 즉시 그를 찾아가서 천주교 가르침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횔세.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교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며 남북극의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의 강생이며, 선한 사람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이벽의 말을 들은 이승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여 이벽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벽은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세히 알아오도록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 "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여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 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 손에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
 
이러한 이벽의 부탁을 받고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북당을 찾아가 프랑스 선교사들로부터 교리를 배운 다음 입교할 결심을 하고 귀국 직전 부친의 동의를 얻어 영세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교리를 가르친 그랑몽(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 신부로부터 첩을 두지 않겠다는 것과 매년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하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3. 이벽의 선교 노력과 수표교 선교공동체
 
북당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1784년 3월 말경 선교사로부터 얻은 많은 책과 십자고상과 상본과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서 이 서적들을 이벽에게 보냈다. 이벽은 친구가 보내준 많은 교리서를 받자마자 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외딴집을 세내어 교리서 탐독과 조용한 묵상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이승훈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교리서 등을 연구한 뒤, 1784년 9월 이벽이 세례자 요한이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벌이게 되는데, 갑진년(甲辰年, 1784년) 겨울부터 이벽의 집이 있던 수표교는 천주교에 입교한 초기의 중요한 신도들의 세례 장소로 활용되었다.

성가대석

제대

제대

성 베네딕도상

이벽은 효과적인 전교 방법을 생각하던 중 학식과 평판으로 당대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몇몇 사람들을 입교시켜 그 지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가환(李家煥), 양근(陽根, 경기도 양평군)의 권일신(權日身) 등 양반 학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설복시켰으며, 1784년 11월 어느 날 이승훈은 이벽의 집에서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형제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다음으로 이벽은 천주교 신앙이 모든 백성들에게 빠짐없이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할 수 있는 중인(中人) 역관 계급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최창현(崔昌顯),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을 위시하여 지황(池璜), 김종교(金宗敎) 등이 입교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전래된 한문 교리서들이 한글로 번역됨으로써 천주교의 가르침이 일반 민중들과 여인들에게까지 분명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권일신 역시 자기 자신의 입교로 만족하지 않고, 곧 그의 친척과 친지들에게도 선교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충청도 태생인 이존창(李存昌)은 권일신과 역관 김범우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즉시 개종하였다. 개종한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서 그의 가족과 친지들에게 선교함으로써 이 지방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같은 무렵 전주 출신의 유항검(柳恒儉)도 천주교에 대해 듣고 권씨 집을 찾아 상경하였다. 그리고 권일신의 권고와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많은 사람을 입교시킴으로써 호남지방 교회에 초석을 놓았다. 이렇게 서울에서 시작하여 마재, 여주 등 경기도 일대에 전파되었던 천주교는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승훈의 진술에 의하면, 1784년부터 1785년 1년 동안에 신자 수가 1천여 명에 달하였고 교세의 범위도 두루 천 리에 이르렀다.
 
4. 명례방 공동체와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이처럼 신도들이 늘어나게 되자 자연히 영세식 외에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한국 교회 최초로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열리던 곳은 명례방(明禮坊) 장악원(掌樂院) 앞(중구 명동 1가)에 있던 김범우(도마)의 집이다.
 
중인 김범우는 원래 이벽과 면식이 있어 그의 집에 왕래하다가 그의 권면에 의해 천주교 서적을 검토한 끝에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였다. 그는 세례를 받자 자신의 집을 신앙 집회의 장소로 제공하여 1784년 겨울부터 정기적인 신앙 집회인 "취회(聚會)"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갖게 되면서 양근, 마재, 내포, 호남 등지의 신앙 공동체들과 잦은 교류를 갖게 되었고, 각 공동체가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명례방 공동체는 이벽의 주도하에 한국 최초의 정기적인 신앙 집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 이러한 신앙 집회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명례방

79위 복자

기념 제대

성세대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의 예배 모습을, "벽위편(闢衛編)"에서 묘사하고 있는 설명을 통해 살펴보면, 대체로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서양 선교사들의 미사 지내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푸른 두건으로 머리를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예배를 이끌던 이벽의 복장은 제의를 입은 서양 선교사들의 모습일 것이고, 신도들이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쓴 것은 미사보와 서양 선교사들의 얼굴이 흰 것을 보고 분장을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예수의 화상과 몇 가지 물건들은 바로 전례 장소를 장식하기 위해 성당에 드리워진 여러 성화상과 성물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이벽이 거행한 예배가 '미사'였다고 한다면, 1786년 봄에 이승훈이 다시 신도들을 규합하여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시행하기 이전, 다시 말해서 조선 천주교회 창립 초기부터 이승훈과 이벽을 주축으로 한 '가성직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춘 신부, 순교자 현양 제50호(2000년 4월 12일),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발행, pp.4-6]

명례방 공동체와 명동 대성당

100년 전인 1898년 5월 29일. 서울 남부 명례방(지금의 명동)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사적 제 258호)이 축성된 날이다. 당시 대성당의 건립은 지난 1세기 동안 박해를 받아 온 한국 천주교가 완전히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뿐만 아니라 '뾰족집'의 상징인 종탑은 이후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화의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민주화의 요람이요 억압받는 민중들이 해탈을 염원하는 장소로 여겨져 왔다.
 
바로 이곳의 복음사는 200여 년 전에 형성된 신앙 공동체로부터 시작된다. 1784년 봄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그 해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가 곧 명례방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성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던 명례방 마을에는 당시 김범우(토마스)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벽의 집이 비좁아 집회 장소로 적당하지 않자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1784년 늦게 형성된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봄까지 유지되었으나, 형조의 아전들에게 공동체의 집회가 발각됨으로써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을사년(1785)의 사건으로, 갓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가 얻은 최초의 시련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이렇게 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이어 김범우는 유배된 지 얼마 안되어 형벌로 인한 상처가 덧나 배소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4-25).
 
김범우의 죽음은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얻게 될 수많은 혈세(血洗) 곧 '피의 세례'를 예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가장 아래에 있는 주춧돌은 바로 김범우와 같은 초기 희생자들이었다.

지하 소성당

성모동산

성모상

성모상

을사년 사건 이후 명례방 공동체의 역사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 기록에서도 명례방이란 이름 석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결코 그것을 영원한 역사의 단절로 남겨 두지 않았으니, 박해가 끝나 갈 무렵인 1882년부터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다시 터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를 책임지고 입국한 제 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 주교는 명례방 언덕에 대성당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1882년부터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그 중 한 한옥에 종현 학당(鐘峴學堂)을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모아 기초 학문을 가르쳤다.
 
블랑 주교는 이 때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부지를 매입하였다. 조선 정부의 방해, 일본인과 개신교인들의 질투도 이를 막지는 못하였다. 1887년 겨울에 부지 정지 작업이 시작되면서 신자들은 차츰 신앙의 자유를 찾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어 1892년 5월 8일에 제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 주교는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는 기쁨을 맞이하였고, 1898년 5월에 마침내 한국 교회는 40m가 넘는 종탑을 갖춘 길이 65m의 고딕식 건물을 갖게 되었다.
 
1900년 9월 5일에는, 1899년에 왜고개(瓦峴, 현 용산 군종 교구청 인근)에서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등 7명의 순교자 유해와, 1882년에 남포 서들골(현 충남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의 서짓골)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성 다블뤼(Daveluy, 安) 주교 등 4명의 순교자 유해를 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어 1901년 11월 2일에는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 소재)에서 용산 신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던 성 앵베르(Imbert, 范) 주교 등 3명의 유해를 지하 묘지로 옮겼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을 왜고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들 중 훗날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의 유해는 1967년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성당 지하 묘지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성스러운 곳이다. 또 지금까지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순교자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의 유해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2호(1999년 3월), 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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