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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앵자봉 능선이 보인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의 생가 터로 이름난 마재는 우선 그 생김새부터가 재미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주 서로 만나는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왼쪽으로 그 입구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 모양이 혹처럼 불쑥 튀어 나와 있어 마치 한강물을 지키는 파수꾼같다.
 
마재의 정다산 유적지에는 사당과 기념관, 생가 터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언덕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마을과 한강을 넘어 천진암이 있는 앵자봉 계곡이 펼쳐지고 그 오른쪽은 약종이 살았으며 묘소가 있던 배알미리(拜謁尾里)가 된다. 지금은 팔당댐으로 물길이 바다처럼 넓어졌으나 2백 년 전의 능내리(마재)와 비알미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있을지언정 이웃 마을이었음에 틀림없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중 정다산은 그의 형 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天壽)를 다하면서 "목민 심서", "경세 유표", "흠흠 신서"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신유박해(1801년)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 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쓰여진 것이다.
 
이 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 유고(蔓川遺稿)"에서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20여 년간의 기나긴 유배 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 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재에서는 또한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멀리 바라다볼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회의 큰 초석이 된 권철신 5형제의 집터가 있는 양근(陽根) 대감 마을과도 지척이다. 때문에 마재는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 천주학을 공부하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 오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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