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자료실 >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 황사영 묘

여관에 가려진 순교자의 얼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고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족보를 확인하는 어려운 작업 끝에 간신히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위치해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거의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가 북경에 보내려 한 백서가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 준 굳건한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신앙의 귀감이 되겠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묘가 하루속히 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明問)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正祖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으며 이에 그는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 든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른다.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약종은 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이로써 그는 부귀 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잘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된다.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22행, 1만 3천3백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 간의 골육 상잔(骨肉相殘)의 당쟁이었음을 피력하고, 세 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 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돼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외로운 순교자의 무덤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는 순교자 무덤이 외롭게 안장되어 있다. 신유 박해로 순교한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알렉시오)의 무덤이다. 당시 황사영은 양박 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형을 받았으므로 시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또 가까운 집안 사람들이 모두 유배를 당한 터였으므로 그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 씨 문중의 선산에 안장한 이들은 먼 친척이나 면식이 있는 신자들 몇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황사영의 무덤은 집안에서조차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국사범으로 처형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다가 180년이 지난 1980년에 황 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또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황사영의 무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사적지로 조성되기도 전에 주변이 개발되면서 순교자의 무덤은 초라한 모습으로 건물 뒤에 가려지게 되었다. 겨우 찾은 황사영의 묘비에는 '순교자 황사영 공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비록 당시의 위정자들에게는 그의 죽음이 매국의 결과로 치부되었을지라도 묘비를 건립한 사람들은 이를 순교로 이해했던 것이다. 아니면 "황사영은 출생 가문과 개인적인 공로로, 또 드물게 보이는 재능과 덕행으로 일반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얻었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557면)라고 한 것처럼 그의 덕행을 기리고자 한 것임이 분명하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6호(2000년 5월호), pp.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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