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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나란히

부산시 강서구 생곡동 배씨(裵氏) 가문의 선산에는 배씨가 아닌 조씨(曹氏) 성을 가진 형제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병인박해 당시 신앙을 증거하고 죽음을 택한 청년 조씨 석중과 석정의 유해가 문중의 선산에 묻히지 못하고 선산을 앞에 둔 배씨 문중 선산에 묻혀 있는 것이다.
 
경남 김해 지방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이다.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다른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도들을 징계하기 위해 떠나보낸 귀양길이 오히려 유배지에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곤 했다는 것은 어쩌면 천주의 섭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해의 서슬에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은 이학규에 의해 김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밀양 박씨 문중의 순교자 박대식(라우렌시오) 가정의 선대(先代)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박대식의 부친 박만혁(?-1810년)이 김해군 진례면 시례리에서 이학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의 아들 대붕·대흥·대식 3형제가 모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막내인 대식이 1836년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했다.
 
어찌 됐든지 이들의 입교 이후 진례, 녹산, 노루목 등에 신자촌이 형성됐고 박대식의 순교에 이어 1839년 기해박해 때는 밀양 단장(丹場)의 가물리와 법흥리 등의 신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지방의 신자촌들이 더욱 번성했다.
 
원래 뼈대 있는 유교 집안이었던 창녕 조씨 가문에서 김해파의 원조 묘우당의 6대손으로 부친 조대연의 5형제 중 셋째와 넷째로 태어난 석중과 석정은 천주교로 개종한 뒤 열심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2년 뒤인 1868년 무진 년에 두 형제는 가락면 상덕리편도 부락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동래 아문으로 끌려간 이들은 배교를 강요하는 관헌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지만 배교를 완강히 거부하고 끝가지 신앙을 증거 했다.
 
고문을 하는 사람조차도 이들의 굽힘 없는 신앙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결국 조씨 형제는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관헌은 먼저 형 석중을 가차없이 참수하고 나서는 다시 동생 석정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배교하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형님의 목에 십자가 꽃이 피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기도 속히 참수해 주기를 간청함으로써 마침내 그 역시 목을 떨구어 형제가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는다.
 
형 석중은 손(孫)이 없었고 동생 석정은 아들이 있었으나 그나마 아들 대(代)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한다.
 
순교한 이들의 시신은 문중의 반대로 선산에 모셔지지는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故) 배문한 신부의 3대조(祖)가 조씨 선산 앞에 있는 배씨(裵氏) 선산 가까이에 순교자 조씨 형제를 묻어 지금까지 관리해 오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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