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굴, 곧 대재 공소는 현재 경남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천리의
간월산 일대의 옛 신자촌인 간월 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 시대의 피난처이다.
이곳은 기해박해 당시 천주교 교우에 대해서는 인정 사정 없이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던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 넘어 간월 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 명의 신자들은 한꺼번에 넓은
굴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동굴에 숨으면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아 박해시대 교우들의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약 4개월간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했고 1860년
9월3일자로 된 그의 마지막 서한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한 아양등(베드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가)
등 3인의
순교자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죽림굴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언양에서 간월행 버스를 타고 호류 폭포에서 내려 왕방재로 등산해 간월산 정상에서 배내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내려가는 길은 왕복 3시긴이 걸린다. 혹은 언양에서 밀양으로 연결된 24번 국도로 석남사를 지난 뒤, 이천행 배포장 도로를 따라
이천(배내) 본동네 입구에 이르기 전 안내판 표시가 있는 곳에서 좌측으로 닦여진 산길은 3.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이다.
죽림굴과 관련된 순교자 중에는 24세의 나이로 순교한 김
아가다가 있다. 그녀는 부산 지방의 첫 신자로 기록되고 있는 김재권(프란치스코)의 손녀이자 병인박해 당시 '장하 순교(杖下殉敎)'한
김영제(베드로)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김영제가 잡혀가던 병인박해 때 붙잡혀갔다가 다시 풀려 나온 아가다는 17세, 18세의 다른 두 처녀와 함께 자진해서 잡혀가기를 청했다.
압송되다가 이들을 농락하려는 포졸들을 피해 간신히 도망 친 아가다는 집안이 풍비 박산이 난 것을 알고 방황하다가 마침내 최양업 신부가 숨어 있던
동굴, 즉 죽림굴로 찾아 든다.
극심한 고생으로 인해 탈진한 그녀는 죽림굴에 도착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석에 눕는다. 그녀는 죽기 전 몇 달간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
신부를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신부가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때로는 등억, 화천 등 가까운 동리에 나가 구걸도 하면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도 했다고 한다.
후세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녀가 밖에 나갔다가 굴로 돌아올 때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산기슭 입구에서부터 등불이 나타나 험한 길을
인도한 기이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결국 병석에 누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아가다의 유해는 간월 공소에 모셔졌다. 간월 공소는 1860년 경신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동정녀 김 아가다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순례자들은 여인의 몸으로 천주를
고백하고 자진해 붙들려 가려 했던 그녀의 용감하고도 숭고한 정신만은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관련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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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제공한다.
위치 : 경부 고속 국도 언양 인터체인제에서 빠져 나와
24번 국도를 따라 석남사 입구에 이르러 좌회전하여 살티 마을을 지나 2km쯤 가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신길로 접어드는 비포장 길을 6km 정도
가면 죽림굴 안내 푯말이 나타난다. 여기서 부터는 걸어서 3.5km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만 죽림굴에 이를 수 있다.